이단, 정명석(JMS) 집단에 대한 비판과 기독교적 대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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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론(마11:27 암3:7) 특별계시 : 음성, 말씀, 성경, 자연계시 : 만물계시(롬1:20), 실체계시(요4:6-12), 초자연계시 : 꿈, 환상, 비몽사몽, 이상(기독교계에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눔) 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성경을 떠나서도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달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오도(誤導)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광란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중략)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무슨 유익이나 만족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성경에 유의해야만 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중략)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두고 다른 교리를 우리에게 강요하는 영이 있다고 하면 이는 마땅히 허망하고 거짓된 것으로 의심을 받아야 한다(갈1:6-9).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런가?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고후11:14)하기 때문이다. (중략) 성령은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가장 분명하게 우리에게 지시되었다.”고 말했다. 계시가 성령의 조명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면 모두 성경에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를 보여야 한다. 그러나 정명석이 받고 있는 계시는 성경과 일치를 보이지 않으며,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가르쳐 주는’ 성령의 주사역에 정면 위배된다. 성령의 사역은 오직 성경에 의해 인정되는 것이다. 메시아 자격론 "하나님과 심정일체된 자, 죄의 문제 해결을 주는 자, 진리를 아는 자, 창조 목적을 가르치고 이루는 자 등 메시아 자격 요건을 30가지로 규정해 놓았다." 피조물이며 죄인인 인간이 ‘메시아 사역’이면 몰라도 ‘메시아 자격’에 대해 논할 수는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분의 주권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는 알 수 있다. 하지만 정명석이 규정하는 메시아 자격론을 보면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임의로 선정한 것이다. 자신이 메시아임을 나타내기 위해 비성경적인 논리를 편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신가? 성경에는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수맥과 같이 줄기차게 흐르는 메시아 사상이 있다. 이 사상은 메시아가 와서 그 백성들을 모든 불행에서 구원해 주시고,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신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는 예수의 물음에 ‘주는 그 그리스도’(You are the Christ)라고 했다. ‘그 그리스도’는 바로 성경에 약속된 그리스도임을 말한다. 성경에 약속된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이어야 한다(창3:15;마1:23;사7:14).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어야 한다(창12:2,3;22:18;눅1:32,33;삼하7:16). 이 약속대로 예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 아브라함의 후손 유대인에게서 나셨으며, 다윗의 자손 요셉의 아들로 나셨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제일 처음에 이사야 61:1-4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감당할 메시아 사역이 무엇인가를 밝히셨다(눅4:18-19). 예수께서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의 포로가 되고, 마귀의 권세 아래 눌리고 고통하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온 천하 만민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시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11:10).” 예수께서 오실 당시 민중들과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아가 와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며,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행1:6).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경에 약속된 그리스도는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야 죄와 사망의 고통에 사로잡힌 인생들을 근본적으로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를 위하여 이땅에 오신 것이다(요12:27). 결국 이 땅에 성육신하셨다가 대속의 죽음을 이루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 그리스도이시다. 지상천국론(계20:4) “또 그때는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하면서 올라간다고 하고 있으나 그건 성약의 복음이 동방에서 서방으로 가는 것이고 또 144,000명이 휴거되어서 올라가고 나머지는 불심판해서 죽는다고 하는데, 이건 재림주를 따르는 무리를 말한 것이다. 앞에서 들림과 구름의 개념, 땅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았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것은 재림주가 오시면 구름같이 깨끗한 우리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적인 세계에서 주를 영접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세계는 성약시대,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년왕국을 말하는 것이다(지상천국).” 정명석은 성경에서 땅은 영원하다고 하였으므로 결국 새 하늘과 해 땅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거기서 지상천국을 이루어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약의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 성경에 나타나는 복음은 완성된 것이며, 성경 외의 또다른 복음은 없다. ⑷ 고급 엘리야과 예수님의 재림승천 실상 비교 “엘리야 → 승천 → 재림 = 세례요한에게 영이 강림, 예수님 → 승천 → 재림 = JMS에게 영이 내림,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 예수님의 영 강림의 날” 예수께서는 엘리야가 왔으나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다(막9:13)고 하심으로 세례요한이 말라기서(말4:5)에 기록된 엘리야임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엘리야가 세례요한으로 재림한 것은 아니다. 엘리야의 사역을 감당한 것이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4:5-6) 따라서 엘리야가 재림하여 세례요한이 되고 예수님이 재림하여 정명석 자신이 재림예수가 되었다는 논리는 잘못이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승천하신 그 ‘모습’ 그대로 오신다(행1:11).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관계사명 “세례요한은 주의길을 예비하러 왔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닌데 세례요한이 의심과 시기로 인해 그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므로 예수님이 속히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또 영 육 중 영만 구하고 돌아가셨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려는 자는 오라했고 예수께서는 회개한 자는 오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과연 세례요한의 모함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인가? 복음서를 보면 세례요한은 공공연하게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외쳤다.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36) 구약의 희생제물은 황소나 염소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셨다. 구약의 제사는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once and for all)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다”(히9:28) 사도 베드로는 말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의 죄와 자신을 동일시 하셨던 것이다. 그는 우리의 속성을 입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의 죄악까지도 담당하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으심은 성경에 예언된 것이며 스스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영과 육 모두 구원하시는 진정한 구원자이시다. 세례요한의 모함에 의한 것이 아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 세례요한이 말한 그 메시아, 어린양은 20세기가 아닌 20세기 전에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는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즉 세상죄를 없이하는 어린양이었다. 죄를 없이하려면 죄가 없는 흠없고 점없은 어린양이어야 한다. 제사에 사용되는 어린양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붉은 대 속의 피를 흘리며 죽임을 당해야 한다. 예수, 그는 바로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죽은 메시아, 시험은 받으시되 죄는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인 것이다. 정명석은 자신의 부모가 죄없었다고 주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죄있는 자의 후손, 죄를 가진 자이다. 죄를 가진 자로서 만인의 죄를 없이할 자격이 있는가? 죄를 가진 인간으로서 메시아의 자격을 규정할 수 있는가? 과연 성경 어느 부분에서 명확하게 자신을 재림주라고 명하고 있는가? 그가 메시아라면 적어도 자신을 높일 것이 아니라 말죽통에서 태어나 새파란 젊음을 기꺼이 던진 나사렛의 예수처럼, 그와 같은 희생을 할 수 있노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위해 죽을 수 없는 자에게 내가 왜 내 인생을 던지겠는가? 그가 메시아라면. 유대교와 기독교의 교리 비교 “초림 예수와 재림예수가 구름타고 오시리라는 것과 종말에는 불심판이 있을 것과 부활 때는 육신으로 부활한다는 생각과 믿음이 유대교와 기독교가 같으므로 기독교는 현대의 유대교라 할 수 있다.” 23 단계에서 정명석은 자신이 이단이 아니라는 것을 합리화한다. 정명석은 유대교를 이단으로 보고 있다. 이 유대교와 교리가 같으면 기독교도 이단이며, 기독교는 이단이므로 정명석 집단을 이단이라고 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이 동일하게 신약성경에도 나타남을 믿고 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이 그 모체이며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 의해서 완성되어졌으므로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현대의 유대교가 아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냐에 따라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유대교는 유대인들만의 종교였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을 유대민족과 국경을 넘어 모든 족속의 하나님으로 믿는 종교이다. 두 감람나무와 두 증인(계11) “아담-하와, 이스말엘-이삭, 에서-야곱, 11형제-요셉, 루터-칼빈, 성부-성신, 전역사인물-후역사인물, 시대의 사명자들이 두 사람씩 나타난다.” 이 단계도 정명석 자신이 메시아라는 대전제를 만족시키기 위해 세운 논리이다. 시대의 사명자들이 2명씩 나탄다는 논리를 통해 자신이 시대의 사명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모든 역사에 두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역사를 오용해서는 안된다. 한 때 두 때 반 때 668+1260 = 1948(이스라엘 해방, 즉 제 1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해방), 668+1290 = 1978년(제 2 이스라엘 민족(현 기독교인)의 영적해방, 영적지도자 바뀜), 668+1335=2023(정명석의공생애 기간이 끝나는 1999) 위의 산출 근거는 단12:7, 25 계12:14와 단12:9-13(멸망케 할 미운 물건, 1290일, 1335일) 겔4:5(1일 이일년), 계11:2, 13:5(42달), 계11:3, 12:6(1260일) 등의 숫자를 인용했고 668이란 숫자는 ‘멸망케 할 미운 물건’ = AD668년에 회교성전이 예루살렘에 세워졌다는 것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통일교가 세워진 1948년과 정명석이 문선명으로부터 재림주권을 이어받았다는 1978년을 성서적으로 합리화시켜 보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논리는 이장림의 ‘다미선교회’사건에서도 보았듯이 하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은 시와 때에 대해 임의 추정하는 것이므로 잘못되었다. 창조목적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최대의 법이었다. 이것을 풀지 못하면 성경을 풀 수가 없다. … 금단의 열매는 하와인데 여자가 선악과이다. 남자의 중앙은 생명나무이며 여자의 중앙은 선악과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6천년 동안 가지고 계시다가 지금 나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동산 주변의 나무실과는 먹을 수 있으니 동산 중앙의 나무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갈빗대 하나로 인간을 만들 수 없다. 남자가 번식하는 것이 갈빗대를 부르뜨려 하는 것이 아니라 갈빗대는 정자를 말하는 것이다. 왜 갈빗대로 표현했는가? 이는 정자는 뼈를 만드는 사명을 하므로 갈빗대로 표현했다. 난자는 살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선생님(정명석)께 가르쳐 준 것이다. 인간의 핵은 정자와 난자다.” “흙으로 인간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아담과 하와의 부모가 따로 있다. 어머니 유전자와 아버지 유전자가 부딪힐 때 한 존재의 인간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한 유전자만 가지고는 사람이 안된다.… 하나님은 두가지 성품을 갖고 계시다. 육신이 태어나듯이 하나님도 그 상대자와의 생명의 파장으로 생명이 시작된다. “부부 일체를 만들어서 개인천국, 가정천국, 민족천국, 세계천국을 똑같이 하나가 되게하여 지상천국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창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을 통해 잘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셨다. 이들이 첫 인간이다. 죄없이 온 예수님을 둘째 아담이라고 했을 때, 첫째 아담은 죄가 없으며 그가 죄없이 창조된 첫 인간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정명석은 성경을 인용한다고 하지만 흙으로된 인간의 존재를 자신의 논리에 맞지 않아 부인하는 등의행위를 한다. 실제로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다. 또한 갈빗대가 정자라는 말이나 동산 중앙의 실과를 여자의 성기로 보는 것은 삼류만화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이다. 타락론 “선악과는 하와이다. 나무열매는 번식을 의미한다. 이는 곧 하와의 생식기이다. 먼저 사단의 상징인 뱀이 하와를 범함으로 사단의 피를 전했고(영적타락 : 하와와 천사-뱀-와의 불륜의 타락을 말함) 하와는 아담과 성행위를 함으로써(육적타락 : 하와가 타락후 아담과 부부관계를 맺음으로) 사단의 피를 전했다. 그리하여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선의 혈통을 번식시키지 못하고 사단의 악의 혈통을 번식시켰다. 인간의 더러운 피를 깨끗이 하는 데는 피가름이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영혼만 구원 하셨기에 육신을 구원할 재림주가 다시 오신다.” “뱀을 기독교에서는 사탄이라고 풀고 있다. 만약 뱀이 인간을 꼬였다면 오늘날 뱀을 잡는 땅꾼들을 하나님께서 상주셔야 한다. 그들은 천당에 가야 할 것이다. 창조 목적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물은 사람을 꼬일 수 없다. 천사들은 자기를 사랑하던 하나님이 그의 자녀인 인간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질투하고 시기하였고 또 하와를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 사랑의 욕정을 참지 못하고 하와의 선악과를 범하여 타락하게 했던 것이다.” 창세기 3장에 나타난 아담의 타락 이야기는 죄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것은 배신이었다. 모든 것이 풍부한 곳에서, 아담은 감사보다 불신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순종이 타락의 시초였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바울도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가르친다(롬5:19). 아담은 아내와의 불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인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배반한 것이다. 또한 통일교에서는 문선명이 깨끗한 피를 줄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혼음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저들에게는 구원에로 입문하는 의식인 것이다. 정명석은 통일교의 타락론과 구원론을 받아들였지만 아직 은밀히 자신이 재림주라고 말하여 드러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위의 이 논리대로라면 자신이 피가름을 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는 이 집단이 매우 음란한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성경은 뱀이 천사이며 하와와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뱀은 마귀를 상징한다.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계12:9).” 또한 천사들이 질투하는 등의 이야기는 고대신화와 같은 우스운 내용이며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구원론 “일반적으로 예수를 믿으면 천국가고 안믿으면 천국가고 안믿으면 지옥간다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관이고 인식관이다. 이런 식으로 안다면 내가하나님은 나쁜 하나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도 타락한 경로와 어떻게 타락했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구원을 시킬 수 있는지? 안다고는 하나 아는 사람은 기독교인 중에는 없다. 예수께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 일반적으로 옥을 음부라 한다. 그곳은 중간 영계다. 영들끼리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영적 구원을 다 이루려고 오셨는데, 세례요한의 잘못과 유대종교인들의 잘못으로 영적인 구원이라도 시켜야 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육이 곤고함을 말했다. 또 예수님이 결혼을 하지 않고 육신으로 번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의 자식을 번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육적 구원을 하려고 오신다. 영계에도 육과 같이 메시아를 기다린다.” 구원의 조건은 예수를 믿는 데 있다. 요3:16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는데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엘리야적 사역을 잘 감당하였고 예수께서도 그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자라고 칭찬하셨다. 세례요한의 말대로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셨다. 이 십자가 사랑을 믿으면 누구다 구원을 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또한 믿지 않고 죽은 자도 영계에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논리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정명석 자신이 지어낸 얘기일뿐이다.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것과 선의 자식을 낳은 문제가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의 완성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예수께서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기 위해 이땅에 오셨다는 성경적 근거가 어디에 있으며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는 말인가? 세례요한은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이고 했지 보통 ‘양’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재림론 “기독교에서는 예수께서 공중으로부터 육신으로 구름타고 오신다고 믿고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엘리야의 영이 세례요한에게 재림하고 모세의 영이 예수님에게 재림하듯 재림주는 부활승천하셨던 예수님이 육신으로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 가운데서 시대적 중심인물을 선택하여 그에게 예수님이 영으로 재림하여 협조하므로 재림 예수의 사명을 하게 하신다.” 이제까지 정명석의 논리가 결론을 맺는 것 같다. 시대의 중심인물인 자신이 재림주임을 비성경적 논리로 주장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 때 천사 둘이 말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1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가지고 재림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신자들에게 상을 주시기 위해 속히 오리라고 하셨다(계22:12).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하셨다(계22:13).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그 분,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 분, 바로 그 분이 마지막날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된 말씀에 나타난 내용 외에 덧붙일 필요가 없다. 다시 오실 그 분 예수를 기다릴뿐이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돋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슴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Ⅳ장 참조) 역사 (A,B,C)
이제 마지막 단계에서 정명석은 요한계시록 말씀을 근거로 자신의 사역을 말한다. 우리는 29단계까지의 내용을 보면서 정명석은 한국에서 태어나 사단의 괴수 노릇을 하는 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마지막 30단계에서 그를 메시아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공생애를 살았다면, 이단집단의 우두머리의 공생이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부활할 수 없다. 정명석이 마지막날 부활한다면 그것은 불과 유황불 심판을 받기 위한 부활일뿐이다. 여기서 여인을 어떻게 대했는가를 통해 정명석의 공생애와 예수님의 공생애와 비교하려고 한다. 87년 6월호 영레이디에 폭로된 한 역대생의 체험수기에는 교주 정명석이 처녀들을 농간한 일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피해자가 ‘하나님의 사명자가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항의하자 정명석은 자신이 이 시대의 재림주이므로 아무 것도 자신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애천교회에 다니다가 탈퇴하면 못살고, 형벌을 받게 되고, 교통사고가 나서 병신이 된다고 공갈협박을 했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여자에게 참빛이 되시며, 인생의 목마름을 채우다가 5번의 이혼경력을 갖고 동거하고 있던 여인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신 예수님의 인격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Ⅳ. 정명석 교리에 대한 올바른 대응 : 정통기독교적 교리에 의해 Ⅰ-Ⅲ장에서 정명석 집단의 이단성과 교리, 그리고 30개론에 대한 분석을 했다. 이제 본 장에서는 이러한 이단 집단에 올바로 대응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정통기독교의 교리를 주제별로 연구하였다.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정통기독교에 대한 바른 인식이야 말로 날로 성행해가는 이단집단을 분명하게 분별하고 올바로 대처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1. 올바른 성경관에 의한 대응 ⑴ 오직 성경 기독교에서는 성경을 캐논(Cannon:正經)이라고 지칭하며 신구약성경 66권을 들고 있다. ‘신약성서는 구약성서 속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성서는 신약성서 속에 나타난다’는 말처럼 구약과 신약은 서로 연결되며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 씌여졌다.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대원칙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오직 성경’을 의미한다. 성경에 근거한 인간의 구원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은혜뿐(Sola Gratia)이다. 이 ‘뿐’에 서지 않으면 안된다. ⑵ 올바른 성경해석 그런데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성경이 독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성경이 독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말씀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겸손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성경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에 겸손하게 귀기울여야 한다. 또한 시대성과 역사성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결코 역사책이 아니다. 성경은 신앙의 기록이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정명석의 주장처럼 역사속에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교리에 얽매여 획일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 또한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므로 그 사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메시지에 집중하여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고 성경이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교리에 얽매여 과학성없이 성경을 억지로 해석해서도 안된다. 이처럼 성경은 정명석 집단의 교리적 잣대로 판단되어질 수 없으며, 교리를 미리 설정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시녀가 되어서도 안된다. 성경은 성경으로서의 독자적인 권위와 정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⑶ 신약저자들의 성경해석 신약의 저자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구원의 새시대를 여셨다는 구원사적 계시로 보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구약 인용은 ‘문자적’ 성취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로서 구약을 인용했다(고전15:3-4). 그들은 독자에게 믿지 못할 것을 믿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확실한 증거(행1:3)를 제시하며 복음의 진정성을 증명했다. 그러므로 정명석 집단과 같이 자신들이 속해 있는 집단의 이기심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오석(誤釋)해서는 안된다. 겸손하고 신실한 말씀의 종이라면 역사적 정통 기독교가 고수해온 ‘성경의 영감(권위)’에 기초해서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을 고려해야 하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성과 연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오직 유일한 절대권위인 하나님과 그의 말씀만이 우리를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겸허하게 자신을 비워야 한다. 날마다 성령 안에서 겸허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난과 섬김의 능력을 지닌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하셨고 성령께서 조명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것이지 ‘미완성의 복음’은 아닌 것이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저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6) 2. 올바른 메시아관에 의한 대응 ⑴ 참 하나님,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 우리를 위하여 성육신하셨기 때문에 인성으로는 우리와 동질(同質)지만 신성(神性)으로는 성부(聖父) 하나님과 동질이다. 성자는 성부와 동질이므로 그의 선재성(先在性), 전지전능, 영원성, 거룩하심, 사랑하심, 의로우심, 진실하심에 있어서는 성부하나님과 같으며 만물의 창조자이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역할을 갖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완전한 인간이 되시어 하나님의 계획을 인류에게 전하셨으므로 예언자적 역할을 하셨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우리 인류의 죄를 속량하셨으므로 대제사장적 역할을 하셨다. 장차 다시 오셔서 사탄을 멸망히키고 죄인을 심판하며 모든 권세를 발아래 두시므로 만왕의 왕의 역할을 갖고 계신다. 기독교의 이단은 대부분 삼위일체론과 거기에 따르는 메시아관에서 벗어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정명석 역시 마찬가지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1:1)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만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5-16) ⑵ 예언의 성취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24:44) 예수께서는 히브리 성경의 세 부분이 모두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그들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 제자제도와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직을 마련해 주셨다. 이것은 죄는 희생제사와 중재하는 제사장 직분 없이는 사해질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선지자 중 이사야는 남은 자인 ‘여호와의 종’에 대해 예언했는데, 그 종은 순종하여 백성의 죄를 지고 죽는 자이다. 성문서에서는 오실 메시아에 대한 것을 더 많이 알 수 있다. 다니엘서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그들을 위해 나라를 얻는 ‘인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단7장). 이처럼 구약은 구속, 희생제사, 제사장 직분, 구원, 새언약, 다윗의 아들, 메시아, 고난받는 종, 인자에 대한 것이다. 이들 중 어떤 것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언급했을 수도 있고 또한 어떤 방식으로 부분적으로 성취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위대한 일이 예언되어 있었다. 구약은 이미 ‘복음의 씨앗’을 그 내부에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씨앗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구속사이다. 베드로전서 2장과 이사야 53장을 통해 본 예언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⑶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사역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오셨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성경은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떤 일을 행하신 일들을 선포한다. ‘죄로부터의 구원’ 이것은 죄로 인해 막힌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담이 허물어진 것을 의미한다. 죄로 인해 생긴 막히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을 한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해서. 사도바울은 예수의 일을 ‘화목하게 하는 직책’으로, 그의 복음을 ‘화목하게 하는 말씀’으로 묘사했다(고후5:18-19). 또한 그는 이 본문에서 이 화목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화목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화목의 실행자는 그리스도시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19)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원래 영원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 가운데 있던 것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9-20)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인자의 온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1:15)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요일4:14) ⑷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JMS나 통일교 문선명의 주장대로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역에 있어서 실패의 상징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메시아 사역을 알았으며 완성했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철저히 버림받음으로 말이다. 성경이 주는 메시지에 겸손하게 귀기울일 때 고난과 죽음의 예수를 만날 수 있다. 만일 구약성경의 제사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가시적으로 예시한 것이라면, 예언자들과 시편 기자들도 역시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했다. 우리는 시편 여러 부분에서 부당하게 핍박받는 사람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이 후에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스가랴서에는 매를 맞는 목자가 나온다. 그 목자의 양떼는 흩어졌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아볼 수 있다(슥13:7, 비교 막14:27). 다니엘서에 나오는 ‘왕’과 ‘끊어져 없어질’,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통해서도 이를 볼 수 있다(단9:25-26). 무엇보다도 이사야서 후반부에서 우리는 메시아가 누구인가를 심정적으로 만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고난당하는 종으로 멸시를 받는다. 그는 사람들의 모든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위해 찔리고 다른 사람의 죄악을 위해 상하며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끌려간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지는 자로 묘사된다(사53). 그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 그의 죽으심은 예언의 성취였던 것이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 기록되었으니”(눅24:46-47).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셨을 때 자신의 운명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는 성경이 자기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는 것과 사람들의 기대가 자기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어 있음을 아셨다. 그의 사역의 전환점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직후, 주님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막8:31)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는 “해야 한다(must)”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십자가에서 가장 처절한 고난을 받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한 메시아에 대한 벌이요, 인간을 위한 해방이었다.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예수의 십자가가 ‘실패’와 ‘미완성’의 상징인가? 성경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찬양한다.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히 9:26)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5:12) 여기서 ‘어린양’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양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 ‘어린양’에게 모든 찬양과 영광의 단어를 사용하여 높이고 있다. 실패의 십자가를 진 자에게 이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인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그 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은 것이다.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형(transfiguration)되는 것이다. 어떠한 죄나 간사함도 없는 예수께서 모욕을 당할 때, 그는 핍박하는 사람들을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의 손에 맡기셨다. 그래서 기독인들은 이 예수의 ‘십자가’를 신앙의 푯대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⑸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메시아 사역 십자가의 죽으심은 구원의 완성이었다. “다 이루었다”(요19:30) 예수께서는 자신이 성취하려고 했던 구원을 달성했던 것이다. 세상의 죄는 십자가에서 담당되었다. 이제 이 구주를 믿고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실은 성전의 휘장을 찢어진 사건을 통해 증거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과 인간의 벽을 상징하는 휘장이 필요없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들에게 천국 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 양으로서 우리를 위한 희생이 되신 것이다(고후5:7). 만일 정명석의 말대로 예수가 세례요한의 모함에 의해 죽었다면 예수께서는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하나님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정명석을 통해 이루어 주소서” 3. 올바른 역사관에 의한 대응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이므로 우리가 현재를 바로 알기 위하여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듣고 있고, 잘 알고 있는 신념들은 하루아침에 생성된 것이 아니다. 2천년 동안의 긴 역사 속에서 생성된 것이며 성경에 의해 검증된 것이다. 또한 우리는 과거의 사상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약점과 사람들의 시행착오를 만날 수 있다. 역사의식에 있어서 한 부류는 거울을 보듯하며, 다른 부류는 창문을 보듯한다. 거울은 보는 사람은 찌그러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다. 그리고 역사에서 단지 일정한 기간과 인물들을 발췌하여 연구함으로 그들 자신들을 찬양하기 위하여 과거를 재창조한다. 정명석은 바로 이경우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창문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역사의 창문을 통해 다른 것을 바라볼 수 있고 긴 역사 선상에서 차지하는 나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2천년동안 순교자의 피가 뿌려진 역사 선상에 서 있는 것이다. 이 역사의 선에서 많은 이들이 그릇된 논리를 내세워 복음의 순수함을 흐리게 했다. 자아도취되어 이상한 논리로 자신을 합리화시켜 나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창문을 통해 역사를 볼 때, 우리는 감히 정명석이 이 땅의 메시아임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메시아 예수께서는 2천년에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 그분은 20세기에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닌 것이다. 구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줄기차게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구체적으로 하셨다. 무한정한 미래를 예언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성취를 선포하였다. 그 성취는 이미 이루어졌다. 아직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충성을 다했던 사람들이 가졌던 미래는 헛된 것이란 말인가? 성취될 가능성이 없는 미래에 무슨 희망을 걸겠는가? 또한 하나님께서 약속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실패라면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이 실패했단 말인가? 그 하나님이 과연 사랑이시라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심이 없는 분이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계획을 세웠는데, 세례요한 때문에 계획을 수정한다면 후회하심이 없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인가? 정명석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만 구원을 받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들 소수를 살리기 위해 이제까지 하나님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았던, 비교할 수도 없는 사람들을 못본척한 분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는 약속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위에서 시작했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이 예수의 길을 걸어갔다. 기독교는 피의 역사요 피의 종교인 것이다. 4. 올바른 종말관에 의한 대응 ⑴ 종말에 대한 예수의 당부와 예언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는 날의 징조들을 예언하면서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24:4) /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5) /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11) /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23) /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24) /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25) /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26)”
이 말씀을 하신 예수께서는 그래도 불안해서 재차 다짐한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24:35-36)” 이러한 예수의 다짐 때문에 예수의 말을 진실로 믿었던 사도들은 종말이 곧 오기를 바라면서도 절대로 속단해서 종말론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재림에 대해 잘못 전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을 아시고 경고하였다.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하였다. 열렬히 그럴듯하게 자기들의 주장을 편치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당부하셨다. ⑵ 잘못된 종말론의 역사와 정명석 기독교 역사를 보면 종말에 대한 지나친 속단을 내린 무리들이 많이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나타나고 있는 비정상적인 종말사상은 초대교회 때부터 나타난 몬타니시트(The Montanists)들이 대표적인 무리들이다. 1950년이후에 이후죽순처럼 등장한 한국의 이단 종파의 특색은 바로 이러한 극단적인 종말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임박한 종말을 강조한여 신도들의 신앙을 가열시킨다. 정명석은 1980년대의 종말론자이다. 정명석은 자신을 문선명 교주의 대권자로 부각시키면서 말세의 종말론적 의미를 삭제하고 새하늘과 새땅이 이 지상에 이루어지는 지상천국론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는 예수님의 재림을 육체적 재림으로 인식하지 않고 영적 재림으로 믿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으로 재림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 가운데서 인물을 선택하여 그에게 예수님이 영으로 재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그 중심인물로 부상시켰다. 그는 정통기독교의 종말견해가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하는데서 오류 발생된다고 주장하면서 천동설 시대의 말세론을 버리고 지동설 시대의 말세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동설적인 말세관은 정교주를 중심한 지상천국론을 의미하는 것이다. ⑶ 사이비 종파와 정통파의 종말론 비교 이 둘의 공통점을 보면, 정통파의 종말론이나 사이비파의 종말론은 대동소이하게 열정적이다. 그리고 긴박성에 사로잡혀 있다. 또한 둘 다 사회, 정치, 국가적인 불안정 속에서 잉태된 시대적 산물이다. 그리고 신앙의 구심적인 역할을 종말론에 두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즉 종말이 신앙의 최고의 목적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차이점은 이미 날짜, 장소 등에 대한 예언 여부에 있다. 그리고 특정인을 재림주로 삼는 여부에 차이가 있다. 또한 성경에 대한 영적인 해석으로 인한 많은 이질적인 종말론을 가져오고 있다. 지상천국론 주장 여부도 이들의 차이점이다. 그리고 극단적이고 환상적이고 계시적인 속단 때문에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정통기독교는 재림에 대한 동일한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의 경고에 신뢰성을 보였던 사도들처럼 종말에 대한 환상적이고 계시적인 예언의 속단을 회피하였다. 그러나 사이비종파는 끊임없이 주관적인 속단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다. ⑷ 종말에 대한 성경의 권위 이단은 개인적 신비체험을 성경의 권위보다 우위에 두고 성경을 그 주관적 계시에 맞추어 해석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격하시키거나 무시한다. 성경말씀에서 바른 종말관을 가지기 위해서는 겸손함으로 성령을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논리적인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귀납, 연역, 유추 및 비교에 의한 논리적 이해가 있어야 한다. 물론 성경과 성경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또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기독교 역사의 조류를 알아야 한다. 자기 개인의 해석만이 옳고 이제까지 2천년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성경계시보다 더 진전된 계시로 새 계시가 주어졌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 오늘날에는 성경만을 유일하고도 필요충분한 계시로 인정하는 견해와, 성경계시만은 부족해서 계시가 필요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정명석은 후자에 속한다. 성경은 이들에게 경고한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로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⑸ 올바른 말세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을 옳게 믿는 사람은 그가 오시는 날짜에 관심을 두거나 그날을 점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진실하게 전파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위기의식을 불어넣어 세상을 도피하게 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말세의 징조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더러 주님께서 다시 오심을 깨어 기다리라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대답하셨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가 아니요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주님의 증인으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7-8)고 말씀하셨다. 일을 맡기고 떠난 주인이 언제 돌아올 것인가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거나 눈치를 살피는 종은 약은 일꾼이든지 문제가 있는 일꾼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천년 만년이나 살 것처럼 살아서도 안될뿐아니라 이 땅이 영구하게 있을 것처럼 살아서도 안된다. 아침 안개와 같이 잠깐 왔다가 가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유일한 위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시요 그로 말미암아 얻는 영생하는 구원이다. 종말을 향하여 줄달음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위로요 희망이다. 그가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교회를 온전케 하신다. 새하늘과 새땅으로 새롭게 창조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기다린다. 기다리며 성실히 살려고 한다. 5. 기독교가 비과학적이라는 데 대한 대응 현대인이 성경을 잘 못받아들이는 데는 두가지의 오해가 있는데 하나는 자연과학에 대한 오해요, 또 하나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이다. 성경이 핵심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가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것들이 과학과 충돌을 일으킬 아무 이유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정명석처럼 근거도 없이 상징적인 해석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과학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옛날 사람들을 교훈하실 때, 그들의 지식 수준에 맞춰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실 필요도 있었다. 훌륭한 교육은 피교육자의 수준에 맞춰서 피교육자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신학자 칼빈은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 말을 더듬으신다’고 하였다. 즉 우리의 수준에 맞추어 낮추시기도 한다는 뜻이다. 구원의 길, 올바른 삶의 길을 가르치기 위하여 사용한 사실들이 과학적이냐 아니냐 하고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마치 ‘아침에 해가 뜬다’ ‘저녁에 해가 진다’는 우리의 일상적인 표현이 비과학적이라고 시비를 거는 것과 비슷하다. 해가 뜨거나 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자전하는 것이니 그 표현은 엄격하게 따지면 비과학적이지만, 그 표현은 과학적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문제삼지 않는다. 성경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표현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자체로 과학적 지식이 그 주된 관심사도 아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책이고 그런 목적에 관한 한 오류가 없는 것으로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하여 성경의 가르침이 모두 비과학적이요 사실과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에 대해서 과학적이고 역사적 사실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으나 후에 오히려 정확하다는 것이 밝혀진 것도 무수히 많다. 그러나 정명석은 ‘홍수는 지역적인 것이다’, ‘태양아 멈추어아’ 등의 단계에서, 성경본문에 나오는 사건들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보면 잘못된 것이므로 상징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비과학적이므로 상징적인 해석을 해야 한다고 했던 사건들은 과학적인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그 부분들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우리는 이단에 대해 살펴본 다음, 정명석의 이단성과 30개론에 대한 분석을 했다. 그리고 정통기독교 신앙에 의해 대응방안을 찾아보았다. 우리는 이러한 이단집단에 대해 분명한 비판을 하고 그들에게 잡혀 있는 양들을 이끌어야 하겠다. 또한 우리가 포도원이라고 부르며 열심히 전도를 하듯 이단들도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이들의 일을 바라보고 대처해야 하는지를 ‘신의 도성’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성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이라는 책에서 말했다. “이 두 도성은 최후 심판에서 서로 분리될 때까지 이 세상에서는 서로 섞여 있고 또 꼬여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면서 세상 사람과 어울려 살고 있다. 우리는 구원받은 신자인데도 이단들과 함께 캠퍼스를 밟고 있다. 이 세상, 이 캠퍼스는 바로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서로 뒤섞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최후 심판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세상에서 선인과 악인에 관계없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대한 자세의 차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도성의 영원함을 믿고 동시에 캠퍼스에 난립하는 이단들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보라보고 이 세력들을 이겨나가야 한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은 이미 성경이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세력들을 바르게 분별하여 단호하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신앙관을 가져야 한다. 특히 성경에 기초한 신앙관을 가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열심히 성경을 묵상하고 나의 것으로 영접해야 한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참고문헌 1. 강창희, “신약의 구약해석 방법과 원리는 무엇인가”, ?목회와 신학? 삼월호, 1996. 2. 계명대 출판부, ?기독교의 이해?, 1996. 3. 고광필외, ?기독교사상Ⅰ?,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출판부, 1996. 4. 기독교문사, ?기독교새사전Ⅱ?, 1990. 5. 김성찬, “종말론 출판물,어떻게 볼 것인가”, ?재림과 종말?, 도서출판 두란노, 1992. 6. 김연태, “한국교회 성경해석의 변천과 그 교훈”, ?목회와 신학? 삼월호, 1996. 7. 김영재, “종말시대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 ?재림과 종말?, 도서출판 두란노, 1992. 8. 김준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순출판사, 1995. 9. 김재진, “구약성서의 조직신학적 수용에 관하여”, ?지구촌시대의 예언자적 신학과 목회?, 계명대 신학연구소. 1996. 10. 김철봉, “대학내의 민족종교 및 불건전한 선교단체”, ?유사종교연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1993. 11..심상법, “성경해석사가 말하는 성경해석의 교훈을 본다”, ?목회와 신학? 삼월호, 1996. 12. 심창섭, “한국 교회사에서의 종말론 흐름”, 「재림과 종말」, 도서출판 두란노, 1992. 13. 이원열, ?베뢰아 이단연구?, 국제기독교 이단연구학회, 1991. 14. 정갈렙,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마가복음 강해? 제16강, UBP, 1996. 15. 탁명환, ?기독교이단연구?, 국제종교문제연구소, 1989. 16. 탁명한, ?한국의 신흥종교? 제4권, 한국종교문제연구소·국제종교문제연구소, 1987. 17. 한국장로교출판사, ?정통과 이단?, 1993. 18. 한국창조과학회, ?창조과학의 이해?, 1996. 19. 시릴 브리지랜드외:한화룡외 역, ?성경연구 가이드?, IVP, 1996. 20. 존 스토트:황을호역, ?기독교의 기본진리?, 생명의 말씀사, 1994. 21. 존 스토트:황영철외 역, ?그리스도의 십자가?, IVP, 1994. 22. 존 스토트:정옥배역, ?복음·종말·교회?, IVP, 1993. 23. 존 칼빈:김종흡외 역, ?기독교 강요? 上, 생명의 말씀사, 1995. 24. A. J. 코니어스:정옥배역, ?어떻게 성경을 읽을 것인가??, IVP. 25. Derek Williams:이정석역, ?성경사전?, IVP, 1995. 26. D. M. 로이드-존즈:서문 강역, ?내가 자랑하는 복음?, 새순풀판사, 1990. 27. Tony Lane:김응국역, ?기독교 사상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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