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대로 되는 축복 마태복음 8:5-13 2009.5.17(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누구에게 부탁해야할지 몰라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는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그러나 이때 중요한 것은 환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이 많겠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신앙생활이란 내용물이 없는 선물포장과 같습니다. 만일 누가 선물을 주었는데 그 안에 선물의 내용물이 없이 포장박스만 있다면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믿음이 없는 신앙생활을 아무런 열매를 바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진정한 믿음이 어떤 것인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1. 하인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백부장 백부장의 간구 예수님께서 산위에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5장에서 7장에 이르는 산상수훈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제자들이 살아야할 계명을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친 산에서 내려오신 후 문둥병자를 고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호소합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괴로워하나이다.” 가버나움은 4:13에 이어 예수님의 선교의 중추지로서 두번째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4:13에 언급된 1차 갈릴리 사역이 5-7장에 언급된 산상수훈으로 중단되고 제 2차 갈릴리 사역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 가버나움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서 로마의 군단급(1군단은 700명의 기병을 포함한 3000 - 6000명의 보병으로 구성)은 아니지만 팔레스틴의 분부왕 헤롯 안디바의 보조 부대가 주둔했던 곳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이 헤롯의 관할지에 있던 것으로 보아 이 백부장은 이방 출신으로서 아마 헤롯의 용병(傭兵)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백부장은 수하에 1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중급 지휘관이었습니다. 누가에 의하면 이 사람이 유대인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눅 7:2-10). 백부장은 예수님께 ‘주여’라고 말합니다. “주여”라는 말은 예수님을 향한 백부장의 돈독한 믿음과 존경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는 하인의 중풍병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시기를 구합니다. 여기서 하인은 계급이나 신분상 수하에 있는 자, 또는 피지배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백부장은 자신의 부모, 혈육이나 상전(上典)이 아닌 일단 무시해도 좋은 자를 위해 굳이 와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 하인은 당시 사회 구조상 천민이었으나 백부장과는 특별한 우정이나 애정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째든 자신의 수하 하인을 위하여 체면과 만사를 제쳐두고 이처럼 간청하고 있는 이 백부장의 성품은 사랑과 긍휼이 많은 모습입니다. 어쩌면 그가 이처럼 자상한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그는 로마인이면서도 유대인인 예수님에 대하여 선입관을 갖지 않고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중풍병은 신체의 전체나 일부 또는 얼굴이나 기타 부위에 일어나는 마비 증상을 가리킵니다. 그 원인은 매우 다양하고 또 현대에 이르러서도 완전 규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표적 원인으로는 역시 뇌졸증을 들 수 있습니다. 뇌졸증이란 뇌의 작은 동맥들이 파열되어 뇌 속에서 출혈이 일어나는 경우, 또는 뇌 속에서 혼탁한 핏덩어리가 뭉쳐져서 혈액의 순환이 막히는 경우, 발작이 일어나고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발작과 혼수상태가 발생되는 경우에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며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에라도 반신불수 등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뇌졸증 이외의 원인으로 생긴 마비 증세도 중풍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째든 이 중풍병은 문둥병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둥병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일어난 병으로서 이 또한 그 당시에는 기적이 아니면 고치지 못하는 병으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응답 예수님은 백부장이 자신의 하인의 중풍병 때문에 당신에게 간청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즉시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7절) 예수님의 치유 기적 장면을 보면 주로 병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오거나 예수님의 메시지를 전달받음으로 하여 치유되었지 예수님께서 직접 병자를 찾아가시겠다고 제안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여기서 굳이 가시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론 여기 백부장은 헤롯 용병으로서 그의 혈통적 배경은 로마인이 아닌 다른 이방인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유대인 출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일단 로마 식민 체제의 하수인이라는 점에서 로마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피지배자인 유대인은 점령자인 로마인을 착취자 내지 종교적 이방인으로서 경멸하였고 또 로마인은 유대인을 편협하고 위험한 피지배자로 멸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벽을, 즉 상대적인 편견과 증오의 벽을 절대적인 사랑과 정의로써 허물어 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자신의 구원 사역이 유대인을 넘어 세계 만민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설사 예수님이 병자에게 가시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째든 예수님은 이상의 방법을 동원해 이방인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2. 믿음으로 간구하는 백부장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예수님이 백부장의 집에 가시어 하인을 직접 고치시겠다고 말씀하시자 백부장은 이에 대해서 자신의 집에 오시기를 거절하고 말씀하시기를 청합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8절)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감당치 못하다'라는 말은 영적, 도덕적 충족성이 몹시도 결여됨을 고백한 말로서(3:11) 어떤 권위있는 대상에 대하여 인간이 스스로의 무가치함을 느낄 때 사용됩니다. 이는 분명 자신의 죄악됨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절대 거룩성을 인지(認知)했음을 반영하는 진술로서 백부장의 겸손한 심정을 나타내 주고 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겸손한 영혼에게 주님의 다함없는 은혜가 필시 수여될 것입니다(시 147:6).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백부장은 분명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자기 하인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그의 요구는 그가 예수님을 전능한 절대자로 믿었음을 증명해 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말씀으로만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다는 기록은 요한복음 4:46-53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휘귀한 경우였기에 백부장의 믿음은 더욱 돋보이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예수님을 어떤 비상(非常)한 의사로 생각했다면 특효약이나 손을 만지는 등의 치료 요법을 요청했을 것이고 또 능력있는 종교 지도자 정도로 생각했다 하더라도 기도나 안수 등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 속에는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을 믿은 때문이며 이것은 그가 예수님께 대해 신적 메시야임을 고백한 것과 같은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말씀의 권능을 믿으며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말씀으로만 자신의 하인을 고치실 수 있다고 고백한 배경을 설명합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내가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9절)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은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여기서 권세란 것은 로마 황제의 권한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국가에 속한자란 모두 국가 권세의 정점(頂點)인 황제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국가 질서 체계를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군인으로서 황제로부터 권한의 일부를 위임받아 자기 수하에 백명의 부하를 이끌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이같은 명령체계와 그 개념은 너무도 명확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국가 체계라는 인위적 차원에서의 상급자와 그 하급자 사이의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질병을 중심으로 한 예수님의 자연 세계에 적용시킨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는 결국 백부장이 예수님을 인본주의적 통치자인 황제 이상의 존재, 즉 자연과 우주를 복종시킬 수 있는 신본주의적 통치자로서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영적 현상의 원리를 꿰뚫어 본 백부장의 신앙의 지혜는 매우 놀라운 것이라 하겠습니다. 3. 믿음대로 되는 축복 진정한 믿음 예수님은 백부장의 고백을 듣고서 놀라십니다. 그리고 좇는 자들에게 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10절)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기이히 여기시었습니다. '기이히 여기다'라는 말은 '놀라 감탄하다' 는 의미입니다. 이는 결국 예수님께서 모든 사건을 지배하시는 결코 놀라지 않으실 신(神)이신 동시에, 한편으로는 놀라는 감정적 성정을 지니신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즉 예수님이 지니신 신적인 전지성(全知性)마저도 그분의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제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다음에 대단히 주요한 내용을 말씀하시고자 할 때 흔히 사용되던 말입니다(5:18).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이스라엘 중에서도 만나본 적이 없는 믿음으로 소개하십니다. 왜냐하면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계시하고 있는 구약적 배경을 거의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어떤 유대인들보다 예수님의 인격과 본질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여태까지 만나 본 유대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말씀만으로도 병이 낫겠다고 고백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 이어서 예수님은 장차 이방인들이 천국에 들어가고 유대인중의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경계하십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11-12절)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이 표현 뒤에 나오는 말씀의 엄숙성과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거듭해서 유대인의 신앙관에 일대 변혁을 이루게 될 이방인 선교에의 비전(vision)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서로부터’는 평행구인 누가복음 13:29에는 좀 더 포괄적으로 '동서남북으로부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유대 지경 내(內) 뿐 아니라 이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까지를 포함한 말입니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는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바 있는데(사 45; 6; 49:12), 본문은 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본문의 백부장이 이방인이긴 하지만 이제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게 되었음을 예언자의 말을 통해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에 앉는 것’은 전 세계 만민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 신앙의 조상들과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뜻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여호와의 언약을 받은 당사자들로서 선민 이스라엘의 신앙의 뿌리들입니다. 따라서 이 세 이름들은 이스라엘의 선민의식과 여호와 신앙의 정통성을 강조할 때에 자주 언급됩니다. ‘앉다’란 말은 '기대어 눕는다'는 뜻으로서 식사 기간 중 거의 눕다시피 식탁에 기대어 앉는 유대인들의 식사 예법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잔치상에 둘러 기대는 상태를 지적한 것입니다. ‘식탁에 앉다’란 말은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베풀어질 향연과 그로 인한 큰 기쁨을 상징할 때 흔히 사용된 관용적 표현입니다(마 26:29; 눅 14:15 -24). 이 잔치는 메시야 왕국의 완성을 상징하는 '메시야 잔치'라고 명명되는데, 이 개념은 구약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사 25:6 - 9; 65:13, 14 등). 그리고 메시야 잔치, 곧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천국에 앉을 수 있는 자들은 이방인인 이 백부장의 예(例)에서도 암시되었듯이, 백부장이 소유했던 그런 믿음을 소유한 자들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은 천국에 들어갈 자들에 대한 하나의 전형적인 모델인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세상 각처에 살고 있는 이 믿음의 소유자들은 나라가 임할 때 먼 곳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그 나라의 자손들'이란 뜻으로서 그 나라를 상속하게 된 자, 즉 나라에 대한 합법적인 상속권을 가진 자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유대 민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3:9, 10), 당연히 천국에 속한 자들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단순한 혈통적 순수성만으로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수 없겠기에 결국 나라의 본 자손들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임을 분명히 언급하셨습니다. ‘바깥 어두운데’는 멸망의 장소, 곧 미래에 '메시야의 잔치'가 배설되는 곳의 외부를 상징합니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베드로 사도는 불의한 자들을 위해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벧후 2:17). 즉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 곳은 항상 밝은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곳은 어두운 곳으로서 어두움의 권세인 사단이 지배하는 곳 내지 영영한 절망이 있는 지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22:13). 결국 ‘바깥 어두운데’란 존재론적인 절대 소외와 영적인 절망 및 종말론적인 죽음과 형벌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고 할 것입니다. 실로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빛을 내는 곳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요, 진리의 말씀이 없고 하나님의 빛이 없는 곳은 사단이 지배하는 어두움과 죽음의 세계임을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지옥의 장면을 더욱 생생하고 무섭게 묘사한 표현으로서, '운다'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고통을, '이를 간다'는 것은 깊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고통과 절망은 그들을 위해 찾아온 메시야를 거절한 것에 대한 대가로서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고, 또 제거할 수 없는 영원한 눈물과 고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11, 12절의 두 구절들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구약의 사상들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는데 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장차 온 땅의 동서남북으로부터 모여든 사람들로 구성됩니다(시 107:3; 사 43:5, 6; 49:12). 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이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사 45:6; 59:19; 말 1:11). 동서남북에 있는 많은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 것입니다(사 2:2, 3; 60:3-4; 미 4:1, 2; 슥 8:20-23). 믿음대로 될지라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에 대하여 칭찬을 하시고, 진정한 천국백성이 누구인지 말씀하신 후, 백부장의 믿음대로 될 것을 선언하십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13절)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 주님은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지만 이번에는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란 말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습니다. '믿은 대로'란 말은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시지만 그 은혜는 인간편의 믿음의 양(量)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과, 기적이 행사되면서 백부장이 믿고 있는바 병고침이 그대로 실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백부장의 믿음의 분량대로 그의 하인의 병이 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라고 선언하실 때 즉시 백부장의 하인의 병이 나았습니다. 누가복음 7:6을 보면 예수님과 백부장의 집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의 친구들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그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의 하인의 병이 나았던 것으로 보아 '그 시'란 말은 바로 그 순간, 즉 예수님의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란 말씀이 떨어진 즉시 나았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은 곧 능력이며 실행이고 창조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기도의 응답의 비결을 발견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줄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며 예수님께 말씀하시면 자신의 종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것입니다. 그 결과 하인의 병이 나은 것입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음에도 당시의 유대인들이 갖지 못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의 하인의 중풍병을 치료받았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로서 순수하게 믿은 믿음입니다.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자신의 하인이 비록 중풍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지라도 나을 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하인은 나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믿는대로 되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역사가 잘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씀대로 되어진다고 믿는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이 말씀 한마디만 해주시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으로 주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백부장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기도하십시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백부장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믿은 대로 될지라”는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도 염려를 합니다. 그러나 염려는 기도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물론 인간이기에 자신의 기도를 주님이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더욱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주님이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간절히 부르짖을 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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