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3일(주일) 낮 설교 - 성령강림 후 제2주[평신도주일] -
그릇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물
( 고린도후서 4 : 9-13)
Ⅰ. 「 습관의 실수 」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저와 결혼만 해주신다면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드리겠습니다.” 어느 낭만적인 젊은이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열렬히 청혼했습니다. 청혼을 받은 여인은 그 청년이 얼마나 성실하고 끈기가 있는 사람인지를 시험해보기 위하여 한 가지를 제안했습니다. “하늘의 별까지 따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이 강변의 자갈돌 중에서 별 모양으로 생긴 돌을 하나만 찾아와 주세요.” 그러자 젊은이는 그날부터 강변에서 별 모양의 돌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살펴본 돌을 다시 찾지 않기 위해서 한 번 확인한 돌은 아예 강물에 던져 넣는 일을 며칠 동안 수천 번이나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는 날마다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돌을 찾았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돌을 찾았는지 돌을 찾는 손끝이 그만 터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수없이 돌을 집어 던진 어깨는 무척 아팠지만 젊은이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는 드디어 별 모양의 돌을 발견했습니다. “드디어 찾았다!” 젊은이는 크게 소리치며 너무도 기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동안 습관처럼 반복했던 행동으로 돌을 강물에 던지고 말았습니다. 젊은이는 그 순간 ‘아차’하며 길게 탄식하며 낙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모습을 여인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 그토록 성실하게 노력하는 젊은이에게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젊은이의 청혼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어버린 습관은 간혹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치명적 실수를 범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 청년은 생각지도 못한 습관 때문에 사랑을 잃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청년이 사랑을 이룬 것도 청년의 습관 덕분입니다. 이 청년처럼 자기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올바른 습관을 가진다면, 분명 어디에선가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또 응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 존 드라이든의 말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길러야합니다.
Ⅱ.
“언어(말)는 행동을 만들고, 행동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성격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성격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성격이 형성되면 인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습관화되어 성격이 되면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생각하기에 따라 말과 행동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생각은 말을 바꾸고, 행동도 바꾸고, 습관과 성격도 바꿉니다. 그러면 인생자체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정말 ‘생각을 잘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불신앙적인 생각보다 신앙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또 불순종적인 생각보다 순종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맘대로 잘 되지를 않습니다. 내가 내 맘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내 맘을 주장해 주셔야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질그릇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질그릇은 다 알다시피 진흙으로 만든 그릇입니다. 옹기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옹기’는 쉽게 항아리를 생각하면 됩니다. 옹기는 귀한 그릇이라기보다 대중적인 그릇입니다. 도자기와는 다릅니다. 누구나 쓰는 대중적인 그릇입니다.
도자기는 귀하고 비싼 그릇이라면, 질그릇은 천하고 값싼 그릇입니다. 그런데 그 그릇에 무엇이 담겼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항아리에 물을 담으면 ‘물 항아리’입니다. 된장이나 간장, 고추장을 담으면 ‘장독’이라고 불리는 항아리가 됩니다. 쌀을 담으면 ‘쌀 항아리’입니다. 그릇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 그릇에 무엇을 담았느냐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달라집니다. 사도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질그릇’이라고 했지만, 그 그릇에 보배를 담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보배를 담았다면, 그 그릇은 보배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7) 아무리 싸구려라 할지라도 보배를 담고 있으면 보배 그릇입니다. 많은 이들이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겉모양이 아니라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 속에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담겼으면 그리스도의 그릇입니다. 성령이 담겼으면 성령의 그릇입니다. 빈 캔은 요란하지만, 채워진 캔은 조용하기만 합니다.
Α. 질그릇에 영광의 빛이 비춰야합니다(6).
사도바울은 인간을 질그릇으로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그릇을 사용합니다. 그릇은 쓰임에 따라 참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또 같은 그릇이라도 만든 재료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와 모양을 가지게 됩니다. ‘본차이나’라는 그릇이 있습니다. 1800년경부터 생산되기 시작했는데, 이 그릇은 잘 깨지지 않습니다. 접시의 이도 잘 빠지지 않습니다. 접시를 들고 손가락으로 치면, 아주 맑고 경쾌한 소리가 납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가 유명합니다. 그런 그릇들은 흙으로 만들지만 불로 구워서 만듭니다. 영롱한 빛을 내기 위해서 자기는 1천도가 넘는 뜨거운 불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면 명품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귀하고 값비싼 그릇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질그릇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질그릇은 고열을 견디지 않아도 만들어집니다. 초벌구이와 재벌구이 등의 복잡은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흔합니다. 그래서 투박합니다. 그래서 쉽게 사용하고, 이가 빠지면 아까워하지 않고 그냥 버립니다. 주목을 끄는 질그릇보다 주목받지 못하는 질그릇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창고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질그릇 같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빛을 받으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취면, 영광스런 모습으로 빛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6) 하나님의 영광을 알려면 우리 마음에 빛이 비쳐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 빛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조명을 받고 빛나기 시작합니다. 빛이 비치면 빛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Β. 질그릇에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담아야합니다(7).
아무리 값비싼 그릇이라고 할지라도 쓰임새에 따라서 가치가 결정됩니다. 그릇의 용도는 주로 음식을 담는 것입니다. 물론 그릇이 꼭 음식물만 담는데 한정되어 쓰이는 것은 아닙니다. 장식용도 있고, 예술품으로 만든 그릇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장례를 치를 때 주로 나무로 만든 관을 사용합니다. 오동나무로 만든 관은 아주 좋은 관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꼭 나무 관만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석관이나 옹관을 사용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리스 순례를 하면서 박물관을 관람하게 되었는데, 고대사회의 장례제도를 소개한 것을 보니까 귀족이나 왕들은 석관이나 옹관을 사용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왕의 시신을 모실 관이기에 최대한 잘 만들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관입니다. 산 사람을 넣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은 넣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관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냥 관일 뿐입니다. 관을 아무리 아름답고 좋게 만들고, 그 관에 장식을 한다고 할지라도 관을 가까이 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 금붙이로 장식되어 있다면 금이 탐나서 움쳐갈 수는 있겠지요. 돈만 된다면 뭐든지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영적으로 죽어 있다면 우리는 마치 옹관(甕棺)과 같습니다. 시체를 담고 있는 항아리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배’를 담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물처럼 여기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배롭게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 보배를 가진 질그릇이라면 우리는 보배로운 그릇입니다. 이 보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인생은 보배로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Γ. 질그릇에 예수의 생명이 담겨야합니다(10-12).
그릇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질그릇의 재료는 흙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흔한 것 가운데 하나가 흙일 것입니다. 너무 많아서 귀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너무 많으면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닭 무리 가운데 학 한 마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닭이 무리지어 있다면, 그 무리 중에 있는 닭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닭 무리 중에 학이 있다면, 그 학은 금방 눈에 띕니다. 한 마리밖에 없기에 더 관심을 받습니다. 또 무리와 다르기에 주목을 받습니다. 예전에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냥 무리에 섞여 무난하게 살아야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다릅니다. 주목받지 못하면 그냥 묻혀버립니다. 그래서 어떡하든 튀어보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으면 달라집니다. 시신이 있으면 시신이 역사합니다. 시신은 차츰 썩어갑니다. 악취가 납니다. 가까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생명이 있다면 다릅니다. 생명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역사하면 생기발랄해집니다. 움직임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려 해도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어린아이들은 가만히 있질 못합니다. 아이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고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어린아이시절에는 생명이 용솟음치기 때문입니다. 막 끌어 오르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의 생명을 담고 있으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우리 몸에 짊어져야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 십자가가 능력이요, 희생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Ⅲ.
술을 끊자는 운동을 금주운동(禁酒運動)이라고 합니다. 금주(禁酒)를 호소하는 한 금주운동가가 지역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강연회를 열었습니다. 강의 도중에 격한 감정으로 소리쳤습니다. “이 지역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누구입니까? 제일 큰 집을 가진 사람이 누구입니까? 성실하게 일하는 여러분이 아닌 바로 술집 주인입니다.” “옷을 최고로 잘 입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가장 비싼 차를 타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역시 술집 주인입니다. 그런데 그 돈들이 모두 어디서 나옵니까? 바로 여러분한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매일 지출하는 술값이 그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며칠 후 강연을 들었던 사람 하나가 거리에서 금주운동가와 마주쳤습니다. 그는 감동적인 강연을 잘 들었다고 말하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금주(禁酒)운동가는 자신의 강연이 성공적이었다는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으며 대답 했습니다. “아! 그러세요! 술을 끊으셨군요?” 금주운동가의 질문에 그 사람이 쑥스러워하며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의 강연을 듣고 바로 다음 날 술집을 차렸습니다.” 아무리 열변을 토해도 자신의 관심사만 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관심사입니까? 물질이 여러분의 관심사입니까? 결정해야하고, 결단해야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그 속에 보배를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 보배를 가지고 사시기를 축복(祝福)합니다.
'목사님들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예수께서 보내신 진리의 영 [2018.05.20] (0) | 2019.01.12 |
---|---|
[스크랩] 고치기 위한 분해와 조립 [2018.05.27] (0) | 2019.01.12 |
[스크랩] 2014.9.10.(수): 가짜 와 진짜 (0) | 2019.01.12 |
[스크랩] 2014.9.17.(수): 생명이 있다는 것 (0) | 2019.01.12 |
[스크랩] 1999년 9월 26일 / 대예배 / 마 18:21-35 / 용서할 수 있는 사람 (0) | 2019.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