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할 수 있는 사람
1999년 9월 26일 / 대예배 / 마 18:21-35
예수님 당시에 가장 유력했던 사회 신분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종파도 바리새파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가장 유력했던 신앙 사상은 율법주의였습니다. 율법주의는 ‘무엇을 하라’는 것과 ‘무엇을 하지 말라’는 계명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분들이 아직도 하나님이 ‘하라’하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하려고 애를 씁니다. 대단히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를 쓰면서 스스로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비교해보며 잘한 것이 잘못한 것보다 많으면 “나는 이제 천국에 갈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사람이 다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율법에서 ‘이것을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지 말라’ 말씀하신 율법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거스리고 파괴한 범법자들입니다. 그런데 어찌 범법자인 우리가 율법이 어떻다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논란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우리는 단지 율법을 범한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긍휼을 구해야 할 사람일 뿐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합니다.
▶ 여러분! 천국은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이행한 사람들이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사람들이 가는 나라입니다. <아멘> 그러나 아직도 이 진리를 모르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그 중요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율법주의라는 굴레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 예수님 당시에는 이 율법주의가 강조되다보니,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였습니다. 또 지키지 않는 사람은 지키는 사람을 정죄하는 정죄와 고발과 비난의 사회풍토가 조성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배경속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주어졌습니다. “너희는 다른 사람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기를 바라며 너희도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비판과 고발의 살벌한 사회풍토를 지켜보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당시의 사회는 사랑과 용서를 잊어버린 사회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의 교훈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놀라운 교훈을 말씀하시기 시작하면서 “천국은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고 정죄하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의 나라이기 때문에 천국에 속한 백성들의 삶은 서로가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의 사회에서는 이런 말들이 있었습니다. “두 번까지는 용서해라. 그러나 그 이상 용서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이다.” 그 당시 한 유명한 랍비의 문서에는 이런 선언이 있었습니다. “세 번까지는 용서해라. 그러나 네 번째는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된다.”
■ 이처럼 고발과 정죄와 비판이 난무하는 그 당시 사회풍토 속에서 예수님께 사랑을 배웠던 베드로는 어느 날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한 일곱 번쯤 하면 되오리까?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바리새사람들은 두 번 용서하라고 그랬습니다. 어떤 랍비는 세 번만 용서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아닙니까? 아무래도 한 일곱 번쯤은 해야 되겠지요?” 베드로는 큰 맘 먹고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지 않겠나 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사실 베드로다 이 말씀을 드리면서 다른 사람보다 나는 좀더 많이 용서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 것은 아직도 용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가운데서 한 말이며, 7번까지라고 한 것은 베드로가 그렇게 용서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용서하도록 힘쓰겠습니다!’라는 표현일 뿐입니다.
▶ 내가 용서해 주면서 몇 번 용서했나 헤아리는 사람은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완전한 용서가 아닙니다. 물론 용서조차 못해주는 사람보다 열 배 백 배 낫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한다는 차원에서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느냐 못받느냐?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용서해야 하며 할 수밖에 없다는 차원에서 말씀을 계속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크리스천에게 하시는 명령입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도 아니요, 구원받아야 할 사람에게가 아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자녀가 부모한테 잘못한 걸 깨달은 다음에 “아버지 내가 잘못했습니다. 다신 안 그럴께요”하면 “그래, 용서한다. 다신 그러지마”하고 용서합니다. 그런데 이 부모가 “내가 몇 번 용서했었지? 저놈을 내가 몇 번 용서했지?”하며 수첩에 적는 부모는 없습니다. 용서하는 걸로 끝나지 몇 번 용서했다라는 것을 기억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세상의 부모도 그러한데 하늘 아버지는 어떠하시겠습니까? 용서한 횟수를 센다는 것은 다만 복수나 벌을 나중으로 미루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분노가 폭발할 시간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물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일곱 번은 일곱 번인데, 일흔 번씩을 하나로 하여 일곱 번이란 말입니다. 490번만 용서하고 491번째는 용서하지 말라는 말이 아닌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압니다. 사실 일곱 번을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490번이라도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490번이란 것을 숫자로 헤아리기보다는 무제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하나님)은 무한히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 마디로 용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주인이 되신다고 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참으로 용서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남을 용서할 때 동기가 있습니다. 사랑하니까 용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가정, 교회가 잘되기 위해서 용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대단히 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유명한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 <마 18:23-34>을 다시 한 번 읽읍시다.
임금님에게 어떤 종이 빚을 졌습니다. 종의 신분으로서는 평생을 갚아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입니다. 부정을 하지 않고는 갚을 수 없는 수 천 억에 해당되는 돈이었습니다. 종도 그 빚을 갚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큰 빚을 지고 괴로워하는 종의 모습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마 18:25-26)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26) 그랬더니, 그 종이 엎드려서 무릎을 꿇어 애원하기를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과연 종이 말한 것과 같이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많은 돈을 어떻게 갚겠다는 것입니까? 이런 말을 듣고 있는 임금은 그 종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로는 갚겠다고 하지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임을 잘 알고 있고, 또 그 종도 형편이 어려워 일부라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종이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임금님의 어질고 사랑이 많으심에 대하여 호소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감히 임금님께 빚진 것을 탕감해 달라는 말은 입밖에도 낼 수 없고, 단지 시간만 연기해서라도 갚겠다는 말을 할 뿐 입니다.
▶ 임금님은 그 종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엄청난 빚을 아주 없는 것으로 완전히 탕감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에게 차용증서를 ‘가지고 오라’하여서 그것을 없앴습니다. 그런데 탕감해 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긴 임금의 사랑 때문에 천문학적 숫자의 빚을 아주 없는 것으로 완전히 탕감하고 이를 선언했던 것입니다.
▶▶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이 무엇입니까?
(마 18:28)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고 했습니다. 이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신하가 임금 앞을 떠난 지 얼마가 되었다고 자기에게 빚진 사람을 만나 빚을 갚으라고 한 후에 사정을 하는 것도 외면한 체 멱살을 잡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자기도 빚을 지고 있는 처지에서 말입니다. 동관에게 꾸어준 빚은 일 백 데나리온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돈은 자기가 임금님에게 탕감받은 빚에 비하면 1/60만입니다. 몇 백 만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작은 빚을 갚으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여기에서 목을 잡는다는 말은 다른 번역에 보면 목을 비틀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그 동관이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다”라고 했지만 허락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 소식을 임금이 듣게 되었습니다. 괘씸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나는 그 엄청난 숫자의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저는 얼마되지도 않는 빚을 갚으라고 동관을 가두기까지 하다니 … .” 난리가 났습니다. 주인이 한 말을 봅시다.
(마 18:32-34)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대단히 논리적이고 경우에 합당한 말로 꾸짖었습니다. 그가 한 것처럼 그대로 갚아주었던 것입니다.
▶ 그렇다면 잠시 멈추고 과연 탕감을 받은 종이 자기 동관을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임금님이 그에게 빚을 갚으라고 야단도 하지 않았을 것이요,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면서 그에게 쓸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생계비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종은 자기 아내와 자식들과 더불어 생활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생계비는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임금님이 그것까지 다 팔아 갚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에게 빚을 동관의 형편은 전혀 그렇지를 못하였습니다. 그 종과의 같은 동관으로 그의 형편은 어느 정도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입장도 되지를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멱살을 잡히고 모욕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만일 어느 정도의 돈이 있었다면 당장 가져다가 갚았을 것입니다. 생계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기에 몇 백 만원을 가지고 이러한 모욕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다는 것은 보면 매우 어려운 처지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임금님이 이야기를 들은 후에 크게 진노한 것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그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자기는 임금님으로부터 탕감받을 수도 없는 액수의 돈을 탕감받은 주제에 생계비조차 없어 굶주리고 있는 동관의 멱살을 잡고 돈을 갚도록 감옥에 가둔다는 것은 무엇인가 크게 잘못한 일입니다.
■ 여러분! 이 시간 우리의 눈을 들어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쳐다보시지 말고, 옆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시지 말고, 내 집에 있는 식구를 쳐다보시지 말고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그분이 무엇을 그리 잘못하셨다고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했습니까? 그분은 우리의 죄와 허물 아니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며,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이야기하십시다. 우리 모두의 죄와 허물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을 받으시고 신음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분은 골고다의 언덕에서 보배로운 마지막 핏방울을 떨구시면서 갑자기 암흑이 덮이는 하늘을 향해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같이 한 번 해 보십시다. “다 이루웠다” 이 말의 본 뜻은 이렇습니다. “빚을 다 갚았다”하는 말입니다. 그 빚은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빚입니다. 그리고 이 빚은 우리의 방법이나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밑에 나와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의 은총을 깨닫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한 그 순간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빚을 내가 다 탕감했노라”
■▶ 이야기는 더 계속됩니다. 이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우리는 탕감을 받을 수 없는 죄까지 탕감을 받았는데, 왜 형제의 조그만 잘못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원인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하여 탕감을 받지 못하였다거나, 우리가 범한 죄가 별로 심각하게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의 죄와 나의 죄를 비교하니 내가 지은 죄가 작기에 바리새인처럼 남을 무시하였고, 세리와 같은 저 사람은 저주와 형벌을 받아야 하되 하나님의 자녀인 나는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나 봅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오늘의 말씀은 여러분과 전혀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결코 여러분의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죄를 탕감해 주셨습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탕감해 주셨습니다. 단지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만 끝난 것도 아닙니다. 왜 우리가 이웃의 사소한 잘못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계속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계속적인 사랑과 용서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
▶▶ 오늘의 말씀에서 악한 종은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들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믿어지지 않거든 하나님 앞에 근신하며 깊은 회개를 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내 마음에 감동이 없는 분이 있다면 금식기도라도 하셔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나는 계속 의인이라고 한다면 성경 말씀에 선언한 대로 (마 18:35) “너희는 각각 진심으로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감옥에 갇힐 것이다 / 지옥과 같은 답답함을 느끼게 될 것이며 끝내는 지옥에 보내질 것이다) 하실 것이다."는 말씀이 그대로 임할 것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사람이지만 결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완전한 사람은 아직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실수가 많고 허물이 많습니다. 물론 온전히 지기를 위하여 노력은 합니다만. 나 자신이 실수가 많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실수가 없겠습니까? 우리도 이웃도 다 함께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고 서로 용서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나만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아니요, 그렇다고 나만이 죄인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못합니까?
▶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모르고 잘했다고 하니까 그렇지요. 저 사람이 이제부터 잘한다고 하면 내가 왜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겠습니까?” 이 말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서 미움을 새기지 못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총이 있으면 쏘아 죽이고 싶을 것이며, 소리 소문 안나게 약이라도 먹여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아예 어떤 사람은 남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조차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의롭다고 합니다.
왜 이렇습니까? 하나님께 어마어마한 죄를 용서받고도 그 용서의 가치와 의미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많은 은혜는 받았으나 용서해 준 것이 티끌만큼도 없으니(어떤 이는 야! 티끌보다는 많아!라고 항변도 하겠지요. 그러나 받은 바 하나님의 은혜에 비한다면 결코 티끌보다 클 수가 없습니다.) 어찌하시렵니까? 이대로 살다가 지옥에 가시겠습니까? 그럴 수야 없지 안겠습니까? 어떤 이의 말을 대변해 봅니다. “아니 내가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침을 받았는데 어찌 내가 지옥에 간다는 말인가? 말도 되지 않아.”라고 항변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그런 항변은 하나님께 가서 하십시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마 18:35) “너희는 각각 진심으로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 시편 103편을 보십시다. “내 영혼아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까? 감사의 비결은 죄의 용서함을 받은 놀라운 축복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이 언제나 내가 손해 보는 것이고, 약자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가장 하기 쉬운 일은 같이 욕하고, 같이 주먹을 휘두루고, 같이 침을 뱉는 일입니다. 이건 본능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쉬운 게 결코 아닙니다.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 능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른은 어린아이를 용서하지만 어린아이는 어른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렇듯이 용사는 더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 영국의 웰링턴 제독의 병사 가운데 아주 불량한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고민 하다가 조금도 희망이 보이지 않자 웰링톤 제독이 그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교육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너는 내 교육을 받지 않았다. 내가 너를 징계하기까지 했지만 네 삶에는 달라진게 아무 것도 없다. 아무런 반성도 없는 것을 보니 너는 희망이 없다. 그래서 나는 너를 총살하기로 최종 결단을 내렸다.”라고 선언을 했습니다. 이때 총살당할 위기에 놓인 이 병사의 친구가 갑자기 뛰어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독님, 제독님께서 저 사람한테 한 가지 하지 않으신 것이 있습니다. 제독님께서는 저 친구를 용서해 보신 것이 없습니다.” 이 말에 이 웰링턴 제독이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엘링턴 제독은 총살을 집행하려던 그 병사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 내가 용서하마. 아무런 조건도 없이 너를 용서하마.” 제독의 용서를 받아 살아나게 된 이 병사는 그 순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사람을 새사람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오늘 주신 마지막 절 말씀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8:35) 너희는 각각 진심으로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지난 날의 죄와 지금 짓고 있는 죄와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사해주시겠다고 하는데, 형제가 짓고 있는 죄 하나 용서하지 못하겠는가? 용서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세요”라고 기도도 했는데 말입니다. 그때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바울은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너희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라”
오늘까지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내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이 기도가 거짓말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목사님들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014.9.10.(수): 가짜 와 진짜 (0) | 2019.01.12 |
---|---|
[스크랩] 2014.9.17.(수): 생명이 있다는 것 (0) | 2019.01.12 |
[스크랩] 1999년 9월 26일 / 저녁예배 / 벧전 2:1-10 / 새 신분 새 삶, 그리고 성숙 (0) | 2019.01.12 |
[스크랩] 1999년 9월 29일 / 삼일예배 / 로마서 1:17 / 以信得義와 以信聖化 (0) | 2019.01.12 |
[스크랩] 1999년 10월 3일 / 대예배 / 딤후 2:20-21 / 이제는 귀한 그릇이 되자 (0) | 2019.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