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귀한 그릇이 되자
1999년 10월 3일 / 대예배 / 딤후 2:20-21
‘희소가치’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많으면 가치가 없고, 흔하지 않는 것이라야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다이아몬드가 흔한 돌멩이처럼 아무렇게나 길가에 굴러다닌다고 하자. 아무도 그 다이아몬드를 귀중하게 생각하거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희소가치가 사람에게도 적용되고 있어 문제다. 사람의 수가 점점 많아져서 지구가 만원이 되자 상대적으로 사람의 가치는 점점 하락되어가고 있다. 그러한 현상이 정치, 경제,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면 말세라고 하지 않는다. 더 큰 문제가 있다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할 크리스천들이 그 가치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창 6:1-7)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그야 말로 세상적으로 볼 때 에덴 동산과 같은 요단 들을 택하듯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세상적으로 보기에 천국과 같은 세상을 택하였듯이 많은 크리스천이 세상을 택하여 하나님을 떠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역사를 하셔서 이 땅에 남아있는 경건한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신다.
예수님은 사람을 가리켜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라고 하셨다. 과거에 그가 어떠한 일을 했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오늘 그가 현재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를 물으시며, 과거에 그가 어떠한 존재였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오늘 그가 어떠한 존재가 되었느냐를 보시며 그와 함께 일을 하시고자 하신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할 때, 과거와 당장 보이는 현실을 가지고 한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남들을 판단하고 평가를 하고 있을까? 세상 사람들이야 하나님을 믿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느냐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크리스천들이 사람들을 세상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고 또 그렇게 가치를 내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4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죄인이며, 버림받은 사람이며, 실제로 그렇게 생활을 하고 있는 세리와 죄인과 창기를 친구삼아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흠이 되어 예수님은 ‘나사렛 천한 사람’, ‘죄인의 친구’라는 비웃음과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외모와 형편, 그들의 과거를 보시지 않고 현재 그들의 외모를 보시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므로 그들을 사랑하셨고, 제자로 삼기도 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신앙이 성장한 12사도를 주축으로 한 교회들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않고 중심으로 보았지만, 약 2장을 보면 시대가 흘러가면서 교회들이 점점 예수님의 정신과는 멀리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여 영접하되 천한 사람이 오면 멸시를 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인간이 가치를 ‘그릇’이라 하는 상징적인 비유를 들어 하나님이 쓰시는 참된 일꾼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본문은 큰집에는 여러 가지 그릇이 있는데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도 있다고 하면서 우리들을 그릇에 비유한 말씀이다. 누가 묻기를 이러한 그릇 가운데 가장 귀한 그릇을 골라내라고 한다면 모두 금그릇이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상대적인 평가방법에 의해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릇의 가치는 그 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그릇의 용도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먼저 주의할 것은 금그릇은 그만큼 귀한 그릇임은 부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금과 같은 존재 - 세상에서 귀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금과 같은 존재라고 할지라도 다음에 나오는 여건에 합당치 않으면 분명히 하나님께 예비된 그릇이 될 수가 없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나는 원래 좋지 못한 환경, 불우한 여건 속에 자라났기 때문에, 나는 머리가 둔하여 일류대학을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귀한 그릇이 되기에는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실망하고 낙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릇이라고 하는 것은 그 질에 가치가 있는 것만이 아니고, 비록 보잘 것 없는 질그릇이라도 용도만 잘 쓰여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귀한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나는 오늘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으로서의 맛을 잃었던 여러분과 내가 이제 다시 소금으로서의 맛을 찾고, 잃었던 빛을 다시 찾아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예비된 그릇이 되자는 것이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와 같은 우리가 사랑과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서 아들이란 신분으로서 오히려 품꾼의 하나와 같이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둘째 아들이 되자는 것이다. 이제 우리 스스로가 오늘 말씀에 입각하여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 귀중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말이다. 우리가 귀한 그릇이 되려고 하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1. 빈 그릇이 되어야 한다.
그릇의 목적은 무엇을 담기 위해서이다. 아무리 좋은 그릇이라도 그 무엇을 담을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그릇으로서의 사명을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빈 그릇이 되어야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던 것이다.
여기에 스텐그릇이 하나 있다고 가정하면서 이 그릇에다가 김치를 담으면 김치그릇이 되고,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된다. 그러한 예는 없겠지만 만일 여기에다가 먹지못할 쓰레기를 담았다면 웬지 그 그릇이 천해 보이기만 할 것이다. 반면 이 그릇에다가 아주 귀한 참기름이나 꿀을 담았다면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인하여 그릇을 귀하게 여길 것이다.
그릇이라는 질은 그대로 있지만 쓰여지는 용도에 따라서 쓰레기를 담았을 때의 가치와 꿀을 담았을 때 같은 그릇이지만 그 가치는 전혀 달라지게 된다.
바울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깊은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어떤 환경, 지식유무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 속에 무엇이 담겨져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버리고 빈그릇이 되어 그 속에 귀한 것을 담아야 귀한 그릇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 어떻게 하면 빈그릇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지금 내가 간직하고 있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을 발견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 13:45에서 천국을 설명하는 중에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마 13:44-46)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우리가 귀한 그릇이 되려면 먼저 빈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빈그릇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내가 가진 것보다 더 귀한 보화를 발견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아직도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성품, 옛 습관, 그 못된 정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다. 또는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도 귀한 것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거나 옛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눅 19장에서 삭개오는 예수님 얼굴을 한번만 보았으며 하다가 예수님을 자기네 집에 모시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자기네 집에 들어오시기 직전에 자기 집에 쌓아두었던 재물의 절반을 잘라서 불쌍한 이웃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남에게 토색한 것이 있다면 4배나 갚겠다고 하였다. 그렇게도 탐내서 모았던 귀중한 재물을 아무런 미련도 없이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뒤로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을 자기네 집에 모신 것이 가장 귀중하였기에 미련도 없이 재물을 선한 일에 쓸 수가 있었던 것이다.
2. 귀한 그릇이 되려면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고,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지금 우리의 얼굴을 성형수술한다고 하여 우리의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외모는 수수하게 하면 될 것이고, 내 속사람이 깨끗해야 귀하게 쓰임받는 그릇이 될 수 있다는 밀이다. 아무리 좋고 귀한 황금으로 만든 그릇이라도 그 속에 더러운 것들이 붙어 있다면 아무도 그 그릇을 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질그릇이라고 할지라도 깨끗이 씻은 그릇이라면 누구라도 소중하게 그리고 긴요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들어쓰시는 그릇이 되려면 먼저 마음의 그릇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이 말은 곧 회개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무엇을 회개하라는 말인가? 하나님께 대하여 교만했던 내 자신, 불순종했던 나, 의심 많았던 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또는 기도하면서 내 자신이 회개하기 위하여 전심을 기울인다면 반드시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 깊은 것까지 회개하도록 배려를 해 주실 것이다.
3. 주인의 쓰시기에 편리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란 곧 편리한 그릇이다. 그릇의 용도는 무엇을 담기 위해서이고 또 쓰는 사람이 불편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값진 그릇이라 해도 주인이 쓰시기에 불편하다면 사실 그 그릇은 유효적절하게 쓰지 못하게 된다. 누구나 어느 곳에서 어떤 때 사용을 해도 불편하지 않고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주인의 뜻에 맞아야 한다. 주인의 뜻에 거역하기보다는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말씀을 드려야 한다. 종이 주인의 뜻을 거슬리며 제멋대로 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그 종에게 귀한 것을 맡길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몇 번씩이나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막 8:34)고 하셨던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라, 교만한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내 잘났다고 주인행세하지 말라. 온유하고 겸손하라. 예수님이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이 되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생각하며 평가할 때가 아니라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것을 염두에 두며 이제부터 새로운 출발을 하십시다.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태를 보고 나는 금그릇이구나 나는 질그릇이구나 판단하지 말고 여러분 속에 무엇이 담겨져 있는가를 살펴보시고 귀한 것을 담도록 하십시다. 비록 남들이 우리를 귀하게 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귀한 것을 담으며 반드시 귀하게 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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