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스크랩] 1999년 9월 29일 / 삼일예배 / 로마서 1:17 / 以信得義와 以信聖化

하나님아들 2019. 1. 12. 12:05

以信得義以信聖化

1999929/ 삼일예배 / 로마서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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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3:24-28)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15:8-9)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살전 5:23-24)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1.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어 구원받고, 믿음으로써 성결케 되어, 날마다 죄악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롭게 살아가게 되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진리이다. 기독교와 세상 일반종교를 말할 때, 단적으로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종교요, 세상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 헤매이며 무진 애쓰는 인위적 종교라고 한다.

또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심을 믿고, 죄 가운데 깊이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독생자의 모양으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것이요, 인간의 어떤 행위 공로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친다.

그런데 바로 이 점 - 즉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는 크리스찬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진리의 일면만이 아닌, 전체적인 면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중요한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2. 교회사에 있어서 16세기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열쇠가 되었던, “오직 義人은 믿음을 말미암아 살리라”(1:17)는 말씀은, 이를 간단한 말로 표현해서 이신득의”(3:22, 26-28, 2:16, 3:6)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되는 믿음과 행함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개신교의 두 신학체계가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즉 개혁주의 신학(칼빈주의 신학)과 웨슬리안-알미니안 신학 사이의 견해차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즉 개혁주의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닌 바에는,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의의 수준에는 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오직 은총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의로운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로써는 공교롭게도 어거스틴으로부터 연유된 소위 예정론이 칼빈에 의해서 채택되고, 그것이 이른바 칼빈의 절대예정론으로써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예정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인간의 행함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3. 이와는 대조적으로 웨슬리안-알미니안 체계에서는 오직 은총,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똑같은 이신득의의 진리에 대한 후속적인 성경해석에서 차이가 생기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웨슬리안-알미니안적 해석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신 목적-즉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게 인정하실 뿐만 아니라, 실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分與해 주심으로써, 계속적으로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요, 하나님의 뜻이요, 소원이시라고 믿는 것이다.

즉 이신득의는 우리가 구원받는 資格條件이라고 한다면, 그 후속적인 의로운 행실은 그 필연적인 결과 또는 열매로 보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일관된 진리라고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거듭나기는 했지만, 실지로는 전적으로 의롭게 살아갈 수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어느 한 구절, 또는 일부분만 떼어 가지고 이리 저리 해석할 것이 아니라, 전 후 문맥을 연결해서, 넓게는 그 성경 한 권, 나아가서는 성경전체에 일관된 중심사상과 원칙에 모순됨이 없이 해석함을 기본원칙으로 삼는 것이다.

 

4. 아무리 풍성한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만큼 의롭게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죄는 안 지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고, 또 사실 그 신학체계(개혁주의)에서는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게 되는 것이, 그저 名色 이름만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質的으로 의롭게 해주신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인 것이다.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the many were made sinners),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는 말씀대로, 죄인이 된 것도 이름만 죄인이 아닌 실지 죄인이 된 것이요, 의인이 된 것도 명색만 의인이 아닌 실제적 의인이 되리라는 사실을 made란 동사가 명백히 나타내고 있다.

즉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이신득의의 그 의를 거의 전가된 의로만 간주하는 데, 웨슬리안-알미니안 신학체계에서는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전가된 의가 적용된다고 보지만, 현재를 기점으로 앞날에 대해서는 분여되는 의에 보다 큰 비중을 두며, 그 의롭게 됨이 초기구원(중생) 단계와 전적구원(온전한 성결, 성령세례, 성령충만)의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웨슬리안적인 성경에 일치한 가르침으로 믿는 것이다.

 

5. 또한 로마서 5장에는 한 사람 아담의 죄로 인하여 온 인류가 정죄에 이르게 된 사실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의 선물을 비교해서 말하면서<(5:9-10)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아담으로 인한 타락의 심각성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은 더욱 더(much more) 넘쳤다고 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의 은총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그 본래의 위치 이상으로 솟구치는 더욱 더 풍성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개혁주의에서 말하듯이 구원받은 크리스천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면 - 즉 죄는 안 지을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써도 아담의 범죄 이전의 상태에도 미달된다는 말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으로써도 인간의 죄 문제는 다 해결될 수 없다는 말로써, 성경의 일관된 진리와는 맞지 않는 주장일 수밖에 없다.

 

6. 성경이 시종일관하게 가르치는 바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구원은, 우리가 행동으로 지은 범죄(自犯罪)에서 뿐만이 아니라, 죄의 본성, 죄의 세력(원죄의 성질, 도덕적 부패성)에서까지 우리를 깨끗케 하사, 또 다시 죄에 빠지지 않고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주실 약속하신 것이다.

찬송가 202장은 바로 이 같은 놀라운 은총의 찬송이다. 202

 

7. 성경에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성결된 생애를 보내야 한다는데 대해서 수많은 명령과 약속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신약성경 중, 사도 바울의 서간서의 중심제목은 신자들이 성결된 생애에 나아가야 한다는 권면의 말씀이다. 바울의 서신들을 상하로 구분할 때, 대부분 상은 교리적은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고, 하는 성도의 실천적인 행위에 대하여 강조를 하고 있다.

사실상 성경 66권 전체의 핵심은 하나님이 거룩하심과 같이 그의 자녀들은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요, 따라서 구약성경은 구약시대의 성결된 삶을 가르친 것이요, 신약성경은 신약성도의 성결을 가르친 내용인 것이다. 그 많은 구절들 가운데 한 성구를 인용한다면, 살전 5:23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이 한 구절 가운데서 우리는 매우 귀중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니, 즉 하나님의 그 자녀들에 대한 소원을 말하면서,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신다는 動詞가 헬라어 문법의 부정과거법 시제로 되어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지나간 때에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때도 그러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는 온전한 성결(성화)의 역사도, 그 은혜에 대한 내 자신의 믿음이 요지부동하게 확고히 섰으면, 그 일이 언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10문둥병자의 고침이 언제 이루어졌는지 모름).

 

8. 요컨대 이 같은 역사 즉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게 인정해주시고, 거듭나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시고, 나아가서 우리의 내재의 罪性까지 깨끗케 하시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요,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임을 이 같은 헬라어 문법에만 있는 독특한 시제로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일은 시간을 요하지 않는 역사이며, 그 은총에 대한 많은 기도와 갈급한 사모함으로써, 마침내 의심없는 믿음이 확고히 설 때, 알지못하는 사이에 벌써 정결케 되어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렇게 온전히 거룩하게 된 성도들은 계속적으로 그 은혜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까지 보전(간직)해야 한다는 점을 현재동사로 분명히 하였다. 또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까지 약속해 주셨으니, 바로 계속되는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고 말씀하셨다.

 

9. 이와 같이 성경의 일관된 원칙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실생활에 있어서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되어 있다. 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에서도 말씀하시기를,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의 법칙이요, 영계의 법칙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요일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즉 영원한 생명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본질이다. 그것은 다른 아무 데도 그 기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고, 만일 그에게서 떠나가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다. 신약성경 중의 믿음이란 끊임없이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요, 지속적 믿음이라면 항상 그 믿음 그 진리가 실생활에 반영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열매맺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이므로 가지에서 열매가 맺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본능인 것이다.

그런고로 이신득의의 신앙은 곧바로 이신성화의 신앙생활로 이어져야함이 성경이 가르치는 뭇성도들, 모든 크리스천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하신 소원이요, 그의 뜻임을 확실히 깨닫고, 성결된 생애에 나아갈지어다.


출처 : 천성성결교회
글쓴이 : 천성교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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