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스크랩] 고치기 위한 분해와 조립 [2018.05.27]

하나님아들 2019. 1. 12. 12:25

2018527(주일) 낮 설교 - 성령강림 후 제1[삼위일체주일] -

 

고치기 위한 분해와 조립

( 히브리서 4 : 913 )

 

. 둘 사이

 

남산으로 날아가던 부엉이 한 마리가 잠시 숲속에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에 있던 산비둘기가 부엉이를 보고 말을 건넸습니다. “넌 어딜 그렇게 숨 가쁘게 날아가니?” 그러자 부엉이가 억울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난 남산으로 이사 가는 중이야.” 산비둘기는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 북산에 사는 사람들 때문에 그래.” 북산에 사는 사람이 왜 싫어졌느냐고 묻는 산비둘기의 물음에 부엉이가 대답했습니다. “, 북산사람들이 내 목소리가 듣기 싫다며 나를 미워해.”

그래서 할 수 없이 이사 가게 됐어.” 산비둘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습니다. “내 생각으론 어딜 가나 소용없을 것 같은데. 원인은 네 목소리에 있으니까. 네 목소리를 고치지 않는 이상 어딜 가나 널 미워할 거야.” 관계의 문제는 도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의 문제는 크든 작든 마음에 상처를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관계의 문제가 생기면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를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하여 혼자서 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관계를 끊고 도피한다고 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과 문제가 생기고 참을 수 없어 그 사람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내면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 내면에는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비난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분노와 비난은 배신감과 복수심을 불러일으킵니다. 물리적으로 떨어졌다고 하나 정신적으로는 불편한 관계는 이어지고,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는 것입니다. 관계에서의 문제는 양자 간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관계는 쌍방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두 사람 간에 누가 더 큰 잘못을 저질렀고, 또 누가 사건을 일으키도록 동기유발을 하였는가 하는 문제의 원인은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킬 뿐 근본적인 문제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관계(Relationship)라는 말의 영어 어원은 한 배를 탄 사람을 뜻합니다. 한 배를 탔기 때문에 한 사람만이 그 배를 풍랑 속에 빠뜨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관계의 문제는 공동의 책임입니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도 함께 풀어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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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 사이에 한반도 정세가 심하게 요동쳤습니다. 북미정상회담이 취소되느냐, 진행되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소식이었습니다. 어제는 남북정상이 예고 없이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2차 정상회담을 열었습니다. 현재 한반도의 상황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예축불허의 상황입니다.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북미정상회담이 일단 다시 열리는 것으로 분위기가 돌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될 것이라고 확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북미정상회담이 열리고,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정착되어야 우리나라가 살 수 있습니다. 남북분단 상태가 지속되는 한 우리나라는 많은 문제가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습니다. 평화체제가 되어야 풀리는 문제가 한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 상황을 바라보면서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이 하셔야합니다. 트럼프가 하는 것 같고, 문재인대통령이 하는 것 같고, 북한 김정은이 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하셔야합니다.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이 우리나라를 열어주셔야 진정 열리는 것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차가 고장 나서 멈추면 어떡합니까? 자동차정비소를 찾아가야합니다. 그러면 정비소에서는 자동차를 진단하고, 고장 난 부위를 수리합니다. 때로는 자동차를 분해합니다. 고장 난 부품을 제거하고 새 부품으로 바꿉니다. 그러면 수리된 자동차는 문제없이 다시 운행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가전제품도 그렇고, 소장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계가 고장 나면 시계수리공을 찾아가면 됩니다. 모바일이 고장 나면 AS센터를 찾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수리공은 모바일을 분해합니다. 그리고 고장 난 부분을 고칩니다. 사람이 고장 나면 어떡해야 할까요? 사람도 기계처럼 분해하고 조립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사람을 대상으로 분해 조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 할지라도 사람을 분해 조립할 수 있는 의사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기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인간을 분해 조립할 수 있습니다.

 

Α.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습니다(12a).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 통로로 인간에게 주어졌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러셨습니다. 모세에게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글자로 된 말씀이 주어지기 전에는 직접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말씀하신 대로 행동했습니다. 또 그 하신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말씀을 편의상 언약(言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말로써 주어졌기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 이후 말로써 주어지는 언약보다 기록된 말씀으로 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글로 옮겨 적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다니는 성경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글로 주어진 말씀을 자의적(恣意的)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자칫하여 이단사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말씀이 주어지는 통로는 설교입니다. 물론 설교는 설교자의 신학과 해석의 결과물입니다. 이렇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12a) 하나님께 직접 들은 말씀이 아니라 할지라도 선포된 말씀(로고스)이 레마(ημα)가 되는 순간, 말씀은 나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습니다. 같은 말씀인데 어느 때는 별 감동이 없고, 또 어떤 때는 그 말씀이 마치 벼락 치는 것처럼 강력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활력이 넘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들려지는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Β.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쪼개기(분해)까지 하십니다(12b).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보통 사용하는 칼은 한쪽만 날이 서 있습니다. 그러나 좌우에 날 선 칼은 양날이 서 있는 칼입니다. 매우 예리한 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 선 어떤 칼보다 더 예리하다는 것입니다. 예리하게 날이 선 칼로 무엇을 할까요? 여러 용도가 있겠지만, 횟감을 요리할 때 날이 선 칼이 필요합니다. 칼이 잘 듣지 않으면 회를 뜰 수가 없습니다. 칼이 잘 들어야 회를 뜨는 것이 가능합니다. 또 돼지나 소를 도축하여 부위별로 나눌 때도 매우 예리하게 날 선 칼을 사용합니다. 발골(拔骨)한다고 합니다.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작업입니다. 이때도 칼날이 예리해야 제대로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칼보다 더욱 예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한다는 것입니다. 혼과 영을 쪼개면 어떻게 될까요? 정신이 쪼개져서 두 개가 되고 세 개, 네 개가 되면 어떻게 되죠? 정신분열증이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쪼개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죽겠죠.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죽이는 말씀이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리는 말씀입니다. 결코 죽이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쪼갠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분해한다는 것입니다. 산산조각을 내기 위해 쪼개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찾아내기 위해 쪼개는 것입니다. 쪼개고, 문제를 찾았으면 고칠 수 있어야합니다. 그냥 쪼개놓기만 하면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문제가 무엇인지 진단하기 위하여 쪼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된 부분을 도려내고, 새 것으로 바꾸기 위함입니다. 만약 쪼개기로 끝난다면 파괴입니다. 고치기 위함이고, 살리기 위함입니다.

 

Γ.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를 새로 조립하여 만드십니다(12c).

혼과 영과 및 골수와 관절을 찔러 쪼개기까지한 것은 치료 목적입니다. 치료를 위해 부위별로 나눈 것입니다. 다른 말로 분해한 것입니다. 혼을 분해하고, 영을 분해하고, 골수와 관절을 분해했습니다. 우리 몸을 이렇게 부위별로 분해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는 것이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 몸을 분해하실 수 있습니다. 사지백체를 분해하실 수 있으시고, 오장육부를 분해하실 수 있으시며, 우리 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모두 분해하실 수 있으십니다. 만약 사람이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몸에 분해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해부학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산 사람에게는 극히 일부만 해부(解剖)합니다. 만약 전부 다 해부하면 인간은 죽습니다. 몸 전체를 해부했다가 다시 맞춰서 살릴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몸을 분해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분해하신 후 판단하십니다. 그리고 고칠 부분을 고치십니다. 마치 고장 난 부품을 갈아 끼우듯 우리의 고장 난 부분을 고치신 후에 다시 조립하십니다. 원래 상태보다 훨씬 더 좋게 조립하십니다. 쪼갤 능력을 가지신 분이 조립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닙니다. 인간은 그 어느 기계나 제품보다 뛰어납니다. 너무 정밀하고, 너무 견고하고, 너무 잘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해부하듯이 인간을 해부할 수 없고, 더구나 다시 조립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저 흉내를 조금 내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말씀으로 찔러 분해하시고, 우리의 문제를 진단하여 치료하시고, 다시 조립하여 더 향상된 삶을 살도록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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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 하나로 큰 수입을 올리며, 귀중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망치로 건물 벽과 바닥과 기둥을 두들겨 보고, 그 소리로 그 건물이 얼마나 단단히 잘 지어졌는가를 알아냅니다. 두들겨 보면 시멘트와 모래와 철근의 비율에 따라 소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건물처럼 두들겨 보면 소리가 다르게 나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배합에 따라 각기 다른 소리가 날 것입니다. 영혼의 불순물이 적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잘 배합된 영혼에서는 적어도 징징거리는 소리나 죽겠다는 소리가 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을 원망하고 헐뜯고 불평하는 소리가 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칭찬의 소리가, 어려운 이를 보면 위로의 소리가, 외로울 때에는 찬송 소리가, 어려울 때에는 기도 소리가 날 것입니다. 혼란이 생길 때에는 묵상 중에 퍼지는 침묵의 고요함이, 평상시엔 환한 얼굴에서 흐르는 잔잔한 미소와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새로워지는 기적과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간절히 축복(祝福)합니다.

출처 : 덕교교회 사람들
글쓴이 : 아브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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