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무익한 종이라

하나님아들 2012. 9. 18. 17:07

무익한 종이라 하여야 할 일을 할 것 뿐이라

누가복음 17 : 5 - 10

본문 말씀은 문제가 많은 말씀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가장 문제가 많은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뽕나무에게 명령하여 그 뽕나무가 뽑혀 바다에 심겨지는 기적을 아무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고 돌아 온 종에게 쉴 여가도 없이 주인을 위해 먹을 것을 바쁘게 준비하게 하고서도 ‘수고했다. 함께 음식을 먹자’는 말 한 마디도 듣지 못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고서도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약자의 노동력 착취를 정당화 하는 말씀이고, 인권가들의 입장에서는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말씀으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이 가르치는 깊은 기독교의 진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왜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대답하신 말씀입니다(5). ‘사도들’과 ‘제자들’(1)은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로서 수십명 또는 수백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님이 뽑아 세운 열두 제자들입니다.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구한 것입니다. 언제 이렇게 구했습니까? 1-4절까지의 말씀을 듣고 난 후였습니다. 이렇게 말씀은 앞뒤를 살펴보아야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실족하게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지는 것이 나이니라’는 말씀과 ‘형제가 범죄하고 회개하거든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을 듣고 사도들은 자신들의 현재의 믿음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 없으나’라고 한 말씀은 실족하게 하는 것은 불기피한 일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실족하게 할 수 있지만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했을 때, 사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으로는 실족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 역시 한 두 번은 할 수 있겠지만 하루에 일곱 번(무한정) 용서한다는 것은 현재 자신들의 믿음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아직 믿음이 어린 성도가 목사인 나에게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한다면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라’든지, ‘기도를 많이 하라’든지, ‘의심하면 믿음이 사라지니까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라고 말 해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더해 달라는 사도들의 요구에 믿음의 근본적 원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믿음을 많고 작음의 양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은 양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믿음을 겨자씨로 비유한 것은 겨자씨는 비록 작지만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란 존재 여부를 분간할 수없는 극히 작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존재 여부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진실된 믿음일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참 믿음’입니다. ‘진실된 믿음’, 조금도 가장됨이 없는 ‘순진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믿음의 양을 요구하였지만 예수님은 믿음은 생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바람 빠진 풍선에 바람을 보충해 주는 것 같은 믿음이 아니라 믿음은 생명이 있는 참 믿음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가 아니라 믿은지 얼마 되지 않을지라도 바른 믿음이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뽕나무에게 명하여 바다로 옮겨진다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것 입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서에는 산을 옮길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산이나 뽕나무에게 명하여 스스로 뽑혀 바다로 옮겨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불가항력적인 것을 예수님께서 왜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실족하게 하지 않게 하는 것이나,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실족하게 하지 않는 것이나, 용서하는 것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어지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상처 받은 일이 없습니까? 또 다른 사람을 실망하게 한 일은 없습니까? 사람을 실족하지 않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상처로 얼룩진 모습으로 참고 있는 것 뿐일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많은 성도들에게 실망을 주고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도 실족할 뻔 한 일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실족하지 않게 하는 것은 뽕나무를 바다에 옮겨 심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입니다.

용서하는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뽕나무를 바다에 옮겨 심는 것처럼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불가항력적인 것도 겨자씨만한 참 믿음만 있어도 실족하지 않게 할 수 있고 용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은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엄청난 일을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말씀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 유지와, 의심 없는 믿음으로 인한 결과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허풍만 떠는 믿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거짓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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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사도들이 믿음을 더해 달라는 요구를 했을 때 무익한 종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만을 가지고 평한다면 종에 대한 무자비한 주인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인권가들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좋은 소제가 될 수 있습니다. 종이 하루 종일 밭을 갈고 양을 치고 해가 져서 집에 돌아오면 주인이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이제 쉬어라고 했을 때 그런대로 기독교는 사랑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주인은 종에게 한 마디도 수고했다고 말했다면 그래도 기독교는 종을 사랑하는 자비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종에게 한 마디도 수고했다, 쉬어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래도 종은 조금도 불평없이 주인에게 음식상을 차려주고 주인이 음식 먹을 동안에 수종들다가 주인이 다 먹은 후에 ‘너는 먹고 마시라’고 해야 그제야 겨우 종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노예재도의 실제를 보게 됩니다. 노예는 사람이면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짐승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이나 종은 다 같은 사람인데 종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 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제들 너희들도 종처럼 주인을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와 같이 하라고 가르치면 대다수의 성도들이 아멘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를 떠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무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를 떠나도록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의 교회가 이 말씀이 주는 깊은 진리를 가르쳐 주어서 성도들에게 오해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주인이 다 먹고 마실 때까지 수종들다가 주인이 다 먹은 후에 ‘먹고 마시라’고 했을 때 종이 무어라고 말했습니까?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이를 한 것 뿐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무익한 종’이라고 한 것은 자신이 봉사하고 헌신한 그 어떤 대가를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대가성을 바라는 믿음이 아니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했을 때 이와 같은 대가성이 바라지 않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대가성이 없는 믿음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뭘 조금 하고나면 많은 것을 주실 것을 바랍니다. 오늘의 교회는 작은 것을 해도 ‘집사님 수고했습니다. 참 잘 하셨네요. 당신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는 이런 입에 발린 칭찬이라도 해 주면 좋아합니다. 하나를 하고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조금 수고한 것을 위해 만배로 갚아 달라고 기도하면 좋아합니다.

30배, 60배, 100배는 좋은 땅에 뿌리 씨가 열매 맺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거꾸로 자기가 받을 축복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30배, 60배, 100배의 축복 기도를 하는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대가성을 바라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대가성을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봉사는 ‘공양 신앙’입니다. ‘공양 신앙’은 자신이 한 일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악인들이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말했습니다(마25:44).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보상을 바라는 믿음은 공양 신앙입니다. 공양 신앙은 불교의 중심 신앙이며 샤마니즘 신앙입니다. 공양 신앙은 수고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것입니다. 대가성을 바른 신앙은 생명이 없는 죽은 신앙입니다. 이런 공양 신앙을 하는 자에게는 심판주께서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어 들어가라”고 무서운 저주를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25:41).

그러나 대가성을 바라지 않는 ‘공궤 신앙’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10)고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수고한 대가성을 전혀 바라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는 고백을 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한 것은 아무 유익도 없는 종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의무를 다 했다고 해서 그것이 칭찬 받을 만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른 편에 의인들에게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나이까’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너희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5:40).

성도인 나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의 흘리신 피로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속죄함을 받은 의인이지 죄가 없어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의인처럼 죄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죄인처럼 겸손하게 그리고 ‘무익한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 무엇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조금도 칭찬을 받을 일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는 고백을 하는 참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옛날 어느 왕족 집에 예수를 잘 믿는 종이 있었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전도해서 예수를 믿도록 해야 하겠는데 도저히 전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주인이 종과 함께 먼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중간 쯤 가다가 주인과 종 단 둘이 마주 앉아 쉴 때 종은 주인에게 ‘주인님도 예수를 믿으시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랫더니 주인이 ‘야 이놈아 네가 예수를 잘 믿으면 종이 상전된다더냐’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종은 ‘아닙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종 노릇을 더 잘해야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그래, 그럼 예수를 믿어 볼까’라고 했다고 합니다.

예수 잘 믿으면 상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 노릇 더 잘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우리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겨자씨와 같은 생명있는 믿음이 되어야 하고, 무익한 종으로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고백 할 수 있는 그 믿음이 되었을 때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없을 것이며, 얼마든지 용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것은 제자들이 믿음을 더해 달라고 했을 때 겨자씨와 같은 작은 믿음이라도 생명있는 참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가성을 바라는 공양 신앙이 아니라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하는 공궤 신앙이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 남을 실족하지 않게 할 수 있고 용서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허창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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