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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교 사상 역사

하나님아들 2018. 10. 21. 00:42
종교 사상 역사

 

 

 1. 초대교회 vs 영지주의

영과 정신은 선하고 육과 물질은 악하다는 극단적 이원론에 근거하여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을 물질을 만든 저급한 신으로 보았다 . 그리고 선한 그리스도의 영이 악한 인간의 육을 입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설명하는 기독론은 가현설로 이해된다. 그리스도가 입은 육신은 그렇게 보였을 뿐이지 실제로 인간의 육신을 입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육을 영의 감옥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영을 가두고 있는 육을 제어하고 영을 육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방법으로 과도한 금욕주의 를 적용하였다. 그리고 구약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보다 자신들이 더욱 월등하다고 생각하며, 믿음이 아니라 특별히 얻어지는 비밀 지식을 통해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 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영지주의 사상 즉 영의 것을 높게 여기며 물질를 저등급으로 생각하는 사상이 오늘날 오순절, 순복음, 은사주의 등에서 발견된다. 영의 것을 최우선에 두기 때문에 방언을 하는 것이 구원의 증거로 보고 있으며, 어떠한 사람이 신유의 은사가 있다면 그것으로 최고 높은 영적 상태로 여기는 것이다.


2. 마르키온(80-160)

마르키온은 2세기 초에 나타난 거짓교사였다. 구약을 배격하는 면에서 그는 영지주의자들과 비슷한 맥락에 있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율법의 하나님이며 신약에 나타난 사랑의 하나님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주장 하면서 구약성경을 총체적으로 부정 하였다. 그는 구약의 신을 불완전한 신으로 규정하였고 진정한 하나님은 신약성경에서 나타난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며 사도 바울에 의하여 가장 잘 설명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편집된 누가복음서와 목회서신을 제외한 10개의 바울서신들을 정경으로 인정하면서 기존 교회가 신약성경의 정경화 작업을 하도록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터툴리안은 이를 반박하고 나섰다. 터툴리안은 초대교회의 교부이자, 평신도 신학자였으며 삼위일체라는 신학용어를 먼저 사용한 이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터툴리안의 신학적 이론은 모두 다 이단을 물리치기 위한 일종의 변증신학이었다.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수난을 십자가의 수치라고 말하는 마르키온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수치는 기독교 신앙에 필수적이다. 네가 하나님에게 부당하다고 하는 것은 모두 나에게는 유익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은 부끄러워할 일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다는 사실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에 믿을 만한 것이다. 묻히신 분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확실하다."라고 말함으로써,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종파인 마르키온주의에 저항하였다. 이것 외에도 로마제국의 신을 조각하는 교우에게 우상을 만들지 말 것을 충고하고, 재혼 및 박해를 피한 도피, 배교, 살인, 간음을 죄로 규정하였으며, 당시 카르타고 교회가 배교자들을 받아들이고 신자 수에 비해 도덕성이 떨어지는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는 성령의 교회이지, 죄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며 이단적 사상에 대해 변증했다.
(위키백과. 테르툴리아누스)


3. 몬타누스(170)

이 파는 영지주의와는 달리, 직접 교회 내에서 일어난 반동적인 교회 개혁운동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예언자의 영을 받았다고 주장 하며 자신이 곧 아버지요, 아들이요, 보혜사라고 주장했다. 특별계시와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는 사도들의 시대로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그러한 특별하고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다.

미국 개혁신학교수로 있었던 헤롤드 브라운은 19세기 말의 오순절 주의의 발생을 몬타누스의 정신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의 예배에서 성령의 감동이라는 이름 아래서 사람들의 느낌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들이 동원되고 있다. 오늘날도 신사도 운동이라는 것을 가지고 몬타누스 사상을 교회 안에 전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사상을 올바른 성경의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4. 아리안 주의(260-336)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신적 성질이 나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는 아버지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며 그를 만드신 아버지에게 종속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성질상 아버지보다 열등하며 하나님의 첫 번째 피조물이며, 신적 속성들을 아들에게 주었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완전한 하나님도 아니요, 완전한 인간도 아닌 것으로 묘사 하였다. 그래서 그는 ‘로고스’ 용어를 좋아하였다. 물론 아리우스는 성령의 신성도 부정하였다. 그래서 아리우스의 제자들은 성령이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아리우스에게 있는 이단적 가르침의 뿌리는 이성주의이다. 하나님의 속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추측한 가운데 나온 주장이다.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비추어 볼 때 삼위일체 교리는 불합리한 것이었다. 이렇게 이성적 합리성을 우선으로 앞세우는 것은 교회사 가운데서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 예로 미국에서 일어난 유니태리언 교회를 들 수 있는데 이들도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였다. 또한 보편주의도 이성주의에 뿌리를 두는데,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지옥으로 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과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반드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 또한 이성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단지 도덕적 모범 인물 에 불과하다. 따라서 기독교의 중요한 가치는 도덕에 대한 가르침 이라고 말한다. 이들에 의하면 교회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현대 문화에 적응하여서 진정한 인간의 정신을 찾아내고 도덕적 모범을 제시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아리우스 주의는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단을 만들어 냈다.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교회 가운데에서도 이성적으로 스스로 지혜로워지려고 하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을 믿지 않고, 복음을 세상의 문화로 채색하여 옷을 입히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이성적, 문화적 호응을 얻으려고 애쓰며 무엇보다 구원의 생명에 대해서는 서서히 관심이 없어지고 있다. 설교자의 설교는 도덕적인 것이 되었으며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적응이 뛰어난 설교자들이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를 끌고 있다. 그 결과 인간의 영혼은 영적으로 빈곤상태에 있게 되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4-1. 아리우스와 아다니우의 대립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 주장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변호하고 사도들의 정통교리를 변호하면서 평생 싸우고, 니케아 신조를 지킨 알렉산드리아 주교이다. 니케아 공의회 후에도 강대한 세력을 유지한 아리우스파의 적의를 한 몸에 받아서 복잡한 교회정치의 움직임과 함께 주교 재직중에 5회, 전체 17년간 추방이나 도피 생활을 했다. 신학상으로는 아리우스파의 종속주의적 그리스도론에 대항 하고, 하나님과 아들인 그리스도는 <호모우시오스(동질)> 라고 주장했다. 또한 성령에 대해서도 그 신성과 부친인 하나님과의 동질 을 주장하고, 삼위일체 신관을 완성시켰는데 이 입장은 기독교 신학의 정통이 되었다.


5. 펠라기우스(350-425)

1)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명령을 하신 것이다.
2)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인간자신의 자유로운 의지결정에 따른 선택의 결과 이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범한 모든 행동의 책임을 인간 자신이 담당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선을 택할 수 있는 힘을 소유했으며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는 인간 본성의 능력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3) 펠라기우스는 이처럼 인간의 자유를 가리켜 하나 하나의 행동을 선택하며 행할 수 있는 자연적 능력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에 대한 개념은 자연스럽게 죄에 대한 개념을 암시해준다. 그는 죄에 관하여 논술하기를 죄는 그릇된 감정이나 욕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의지의 개별적 행동으로 성립된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죄를 범할 수도 있고 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담은 범죄의 길을 선택하였고 결국 자신을 해하게 되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없도록 치명적 상처를 주지는 않았고 따라서 죄악의 성질이나 죄책의 유전은 있을 수 없다. 즉 원죄와 같은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담이 비록 죄는 지었다고 하지만 인간은 아직까지 죄 없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진정한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도 부정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이러한 논증을 한 펠라기우스주의는 카르타고 회의(412)에서 정죄를 받는다. 그 근거가 되는 명제를 요약하면
-아담은 죽을 운명으로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그가 죄를 범했든 범하지 않았든 죽었을 것이다.
-아담의 죄는 그 자신만을 상하게 했으며 인류 전체를 상하게 한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들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로 태어난다. 따라서 유아는 세례를 받지 않아도 영생할 수 있다.
-전 인류는 아담의 죄와 사망을 통하여 죽은 것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사는 것도 아니다.
-복음 뿐만 아니라 율법도 천국에 이르게 한다.
-예수 강림 이전에도 죄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펠라기우스
어거스틴

원죄
원죄 부인
원죄 인정

죽음

아담
아담은 처음부터 죽을 사람으로 출생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죽게 됨

인간
죽을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죽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죽게 됨

유아의 원죄의 세례
유아는 아담의 타락 이전의 상태로 원죄가 없으므로 세례가 필요 없음
인간은 출생 시 원죄를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받아야함

예정론
인간의 자유의지적이며 가항적
절대 불가항력적

하나님의 은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되며 거부할 수 있음
오직 은혜로만 구원, 택자에게 주어짐, 불가항력적

구원관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력으로 구원받음
오직 믿음으로 구원(구원은 선물)

자유의지
인간에는 선택능력이 있음
아담타락 후 죄를 지을자유의지만 존재

율법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인간은 죄 없이 살 수 있음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만족케 할 만한 의는 불가능

평가
인간중심적, 인본주의적 신앙체계,성경의 진리를 왜곡, 부정
하나님의 예정과 은총 강조,기독교 정통 교리 확립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에 대해 어거스틴의 은총론은 정면 대치된다. 이제 어거스틴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
어거스틴은 죄를 선에 대한 상실로 표현한다.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참 선을 행할 수 없으며 자기의 운명을 실현할 수도 없고 더 깊은 죄의 노예 상태로 빠져들어 가게 된다 고 말한다. 은총이전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를 범할 뿐이며 율법은 그러한 자연인을 정죄하여 사망에 던져 버린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어느정도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데 대하여는 부정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이 마음과 편지라는 글을 통해 자유의지에 대하여 말하기를
“은총으로 인하여 선택의 자유 즉, 자유의지를 폐하여 버리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선택의 자유의지를 오히려 세운다. 율법이 신앙으로 폐지되지 않음과 같이 선택의 자유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폐하여 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세워진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강조한 반면, 어거스틴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고 한다.

2) 어거스틴의 은총론
어거스틴은 은총론을 전개하기 위하여 죄에 관한 포괄적 특성을 전개한다. 죄가 모든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사멸성을 가져왔고 실제적으로 새로운 죄를 짓기 원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 그리고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는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을 자제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죄의 상태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통로는 오직 은총을 통한 길 밖에 없다. 이 은총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집행 된다.

첫째로, 율법을 통하여 죄와 죄책의 느낌을 일으키게 한다. 둘째로,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의롭게 됨과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예수의 속죄사업을 나타낸다. 셋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성령은 성화된 인간의 의지와 일생을 통하여 협력한다. 이 같은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은총은 불의한 인간들로 하여금 선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진술한다. 또한 이 하나님의 은총에 관하여 정의하기를 무상으로 순수하게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선물이란 무상이 아니라면 은총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인간이 자기의 공로를 통하여 은총을 얻어낼 가능성은 전혀 없다. 오직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임을 주장하면서 은총에 관하여 몇 가지로 구분하여 논술한다.

① 예정적 은총
야곱의 선택과 에서의 유기에 관련하여 양택설을 전개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치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심이라(롬9:10-29)”
기록된대로 어거스틴은 예정적 은총론을 전개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가장 합당하신 섭리의 미리 아신바 되고, 예정되고,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고 영화롭게 하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증명하지 못하였다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아직 출생하지 않았을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따라서 결코 멸하지 아니한다. 누구에게 신앙을 허락할 것인지 하나님께서 미리 알지 못하시었다고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그가 누구에게 신앙을 허락하실지 예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를 구원하실 그의 자비도 분명히 예지 아니하셨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예정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예지와 작정이다. 이로써 성도들은 확실한 구원을 받는다.”

② 선행적 은총
어거스틴은 “신앙으로 은총을 얻게 되며, 은총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죄의 병으로부터 고침이 오며, 영혼의 고침으로부터 선택의 자유가 오며, 선택의 자유로부터 의에 대한 사랑이 오며, 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율법을 행함이 온다. 은총은 의지를 고치고 이로써 의를 자유롭게 사랑하게 된다.” 어거스틴의 논리를 정리해보면 예정적 은총을 입은 자, 즉 선택하여 부르신 자에게는 선행적 은총인 믿음이 주어지고 이로써 의롭다함을 얻게 된 후 선행할 힘을 얻게 된다 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에 있어서 은총은 사실상 모든 것에 선행한다고 볼 수 있다.

③ 불가항력적 은총
인간의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불변하게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④ 견인적 은총
어거스틴은 견인의 선물이 없으면 인간이 선행적 은총에 의해서 비록 표면상으로 선택이 되었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멸망을 받게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마지막까지 은총 안에서 인내해야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약한 성도들에게는 은사를 주시어 이로써 저들이 선한 것은 불가항력적으로 원하게 하시었고 또한 선을 버리는 일도 불가항력적으로 거절하게 하시었다 .”
( http://blog.naver.com/gggid?Redirect=Log&logNo=70011582465)


6. 세미 펠라기우스 주의와 로마 카톨릭 교회

존 카시안(365-433)이 그 학파를 이끌었다. 그는 먼저 어거스틴의 견해가 새로운 것이며 교부들의 가르침, 특히 터툴리안, 암브로스, 제롬의 가르침에서 떠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카시안은 어거스틴의 예정론에 대한 가르침은 인간들로 실망에 빠트리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할지라도 인간의 의지를 돕는 정도면 된다 고 하였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주장을 하였다. 죄인들이 자신들의 결정에 의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의 부패하고 타락한 것을 부정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도움이라고 생각하였다. 죄인들은 자신이 구원을 얻기 위한 첫 번째 걸음을 취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할 자연적 능력(자유의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미-펠라기우스 사상은 인간의 도덕적 능력이 타락에 의해서 영향 받지 않았다라고 주장하였다 . 타락된 죄인은 여전히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하도록 움직일 수 있는 내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은혜의 효과는 항상 죄인의 의지의 실행에 달려 있게 된다 . 세미-펠라기안주의자들은 일반속죄를 믿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은 자신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이러한 속죄를 받아들이는 선택을 하기 전에는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카시안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원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모든 자에게 유용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보편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고 선택된 백성이나 혹은 유기된 백성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은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세미-펠라기우스 사상에 대해서 논의하기 위해 529년 오렌지 대회로 모였다. 대회는 25개의 조항을 채택하고 세미-펠라기우스 사상을 거절하였다. 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아담의 죄는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에게도 손상을 주었다.
2) 아담의 죄는 모든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다 주었다.
3) 은혜는 우리가 그것을 위해 기도할 때 주어질 뿐 아니라, 은혜 자체가 우리로 기도하게 만든다.
4) 믿음의 시작에 있어서 믿고자 하는 성향은 은혜의 효과이다.
5) 모든 선한 생각과 행위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6) 중생된 자와 성도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7)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선물이다.
8) 아담 안에서 약하여진 자유의지는 오로지 은혜의 세례를 통하여 회복 될 수 있다.
9) 우리가 소유한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따라서 아무도 자랑해서는 안된다.
10)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은 자신 스스로의 의지로 범하는 것이다. 사람이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자발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11) 타락을 통하여 자유의지가 약하여졌다. 그래서 은혜가 앞서지 않는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믿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위해 선을 행할 수도 없다.
12) 모든 선한 행위들이 처음부터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감화시키셔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게 하신다. 우리에게 어떤 선행하는 공로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원하는 것이며 세례 후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다.

오렌지 회의는 인간의 부패와 오직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다. 오렌지 대회 이후, 로마 주교 보니페이스 2세(530-532)는 세미-펠라기우스 사상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이렇게 오렌지 대회에서 세미-펠라기우스 사상이 정죄되었지만, 로마 교회는 세미-펠라기우스 사상을 뿌리치지 않았다. 결국 세미-펠라기우스 사상은 중세 교회의 중심 사상이 되어서 종교 개혁이전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기까지 세미-펠라기우스 사상은 비공식적이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의 매우 우세한 구원론 이었다. 거저 주시는 구원의 은혜의 교리는 거의 사라졌고, 행위로 의로워지는 개념이 교회에 일반적이었다. 더욱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의 반작용으로 인간의 전적 타락을 부정하고, 구원은 은혜와 행위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내려왔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세미-펠라기우스 주의를 견지 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세례를 중생시키는 도구로 간주한다. 따라서 세례를 통하여 원죄와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는다고 주장한다. 물론 고해성사는 용서함을 받는 수단이 되며, 다른 성례들은 선행을 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움의 수단이 된다고 말한다.
( http://blog.daum.net/kkho1105/12369)


7. 에라스무스와 루터

루터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을 때 르네상스 학자인 에라스무스를 만나게 된다. 에라스무스 역시 로마 카톨릭의 오류에 대하여 격분한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 혹은 자유선택을 인간 의지의 능력으로서 이것을 가지고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에 자신을 적용할 수 있다고 정의하였다. 에라스무스는 하나님의 은혜와 별개로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자발적 힘을 가지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고 생각하였다. 또한 나님과 인간이 협력 혹은 협동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의지력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반드시 하나님을 선택해야 하며 인간이 이렇게 선택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의 공로로 간주하여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를 서로 반대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러한 세미 펠라기우스 주의로 흘러가고 말았다.
하지만 루터는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주장에 대해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변호하였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논리가 펠라기우스에 동의하는 것 이라고 논증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지도 않을뿐더러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고 논증하며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이 절대적 일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전혀 자유롭지 못하며 죄의 감옥에 갇혀있는 것이며 죄악에 종된 상태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만으로는 스스로 선을 행하여 돌아설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루터와 에라스무스가 연합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오류에 대해서 싸우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자유의지에 대해 논쟁을 하다가 에라스무스가 ‘자유의지에 대한 논증’이라는 것을 출판하였고 이에 대해 루터가 ‘의지의 속박’을 출판하면서 세미 펠라기우스에 대한 논쟁이 루터와 에라스무스 간에 일어나게 되었다. 우리는 에라스무스의 세미 펠라기우스 주의가 낯설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 세미 펠라기우스주의가 왕성하기 때문이다. 소위 요즘 유행하는 전도방식은 거의 다 세미 펠라기우스 주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루터의 말보다 에라스무스의 주장에 더 친숙함을 느낀다. 이러한 느낌들은 오늘날 교회가 성경의 진리에서 얼마나 떠나있는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들이 교회 속에서 일어난 오류들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기 때문에 과거 교회사 속에서 유행하던 오류 혹은 이단들이 다시 재발흥하여도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따라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속에서 교회는 세속화되며, 타락해가고 있다. 그 이유는 진리보다는 인간적이면서 거짓 가르침들이 더욱 유행하기 때문이다.


8. 트렌트 공의회와 칼빈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가 종교개혁의 기지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거부하면서 구원은 은혜와 함께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고수 하였다. 물론 오늘날까지 로마 카톨릭은 세미-펠라기우스를 견지한다. 이러한 로마교회의 입장은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으로 열린 트렌트 공의회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트렌트 공의회는 1545~1563년 북이탈리아의 트리엔트에서 열린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19차 에큐메니컬 공의회로, 종교 개혁 운동으로 생긴 유럽 교회의 혼란과 분열을 종식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개혁자들에게 지적 당한 폐습을 개혁하고, 7성사, 화체설, 원죄 등의 교의를 명확히 하였다. 이로써 중세에서의 교의나 전례(典禮)의 다양성은 없어지고 통일적 교회를 목표로 하는 근대적 가톨릭 주의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규율면에서는 부재 성직록 폐지, 주교의 감독권 강화, 면죄부 판매인 폐지, 신학교 정비에 의한 강론 능력이 풍부한 사제 양성 등으로 교회 활성화에 기여하였고 영성 생활에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트렌트 공의회는 전적으로 로마 카톨릭을 위한 종교회의 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신칭의에 있어서 세미 펠라기우스 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고 타락한 인간의 전적 부패와 전적무능에 대해서 믿지 않는다 . 그래서 단지 자유의지가 완전히 부패한 것이 아니라 약화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더욱이 하 나님과 인간이 협력하여 우리 자신을 스스로 변화시키는 것처럼 주장하면서 사람이 이 은혜를 거절할 수 있다 고 했다. 

칼빈은 트렌트 공의회에서 주장된 교리들에 대하여 반박하는 논문인 “트렌트 공의회 결정에 대한 반론”을 1547년에 발표하였다. 칼빈은 트렌트 공의회가 펠라기우스 사상과 별다름이 없음을 주장하며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행위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를 전가 받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은 구원에 대해서 자랑할 것이 아무도 없음 을 말한다.


9. 알미니우스(1560-1609)

알미니우스는 화란의 조그만 도시 우데워터에서 태어났다. 그는 1575년 라이텐 대학에 입학하였고 1587년에서 1603년까지 암스테르담에서 목회를 하였다. 알미니우스는 로마서 7:14(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을 바울의 거듭나지 않은 상태를 기억하는 것으로 가르쳤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로마서7:22을 볼 때, 거듭나지 않은 자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할 수 없기 때문에 회심 이후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는 1593년 로마서 9장을 설교하면서 그의 예정론에 대한 태도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알미니우스가 스스로 정리하여 제시한 예정론과 그것을 의미하는 바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죄로 가득한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고 있는 하나님의 첫 번째 절대적인 작정은, 그 분께서 그 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 구속자, 구원자, 제사장, 그리고 왕으로 임명하도록 작정하신 것인데, 그 분은 그 분 자신의 죽음으로써 죄를 파괴하실 것이며, 그 분의 순종하심으로써 상실해왔던 구원을 획득하실 것이며, 그 분 자신의 공로로써 그것을 전하실 것이다.
-첫 번째 항목은 작정의 대상 중에서 ‘구원자’와 관련된 내용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를 구원하실 분으로 작정하였으며, 이 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구원자로 제시된다. 
 
2) 하나님의 두 번째 명확하고 절대적인 작정은, 그것 가운데서 그 분께서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을 위해서, 그 분을 통해서 구원을 성취하시도록 하지만 모든 회개치 않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을 죄 가운데, 진노 하에 버려두시기로, 저주하시도록 작정하신 것이다.
-두 번째 항목은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 되도록 ‘구원의 수단’을 예정하셨다는 내용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구원의 기회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하나님의 예정이 인간의 자유의지적 반응과 상관없는 무조건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믿음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조건이 되므로써 조건적 복음을 제시 한다. (조건적 선택)

3) 세 번째 신적 작정은, 그것으로써 하나님께서 충분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서 회개와 믿음을 위해 필요한 수단들을 시행하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1. 신적 지혜를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그 분의 자비와 그 분의 엄정한 둘 모두에 적합하게 되는지 아신다.
2. 신적 공의에 따라서, 이것으로써 하나님은 그 분의 지혜가 정하는 무엇이든지 채택하시며, 또 그것을 실행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믿음을 산출하기 위한 수단들, 즉 말씀과 성령이라는 수단이 효과적으로 회개와 믿음을 산출할 수 있도록 작정하셨다. 그는 그 은혜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열려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직 구원받도록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속죄를 준비하셨다는 제한 속죄를 반대한다. 이전에 범죄 했다는 이유를 제외하고서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부인하지 않으신다고 보았다. (보편적 속죄)

4) 네 번째 작정은 이러한 것들에 뒤따라오는데,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저주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이 작정은 하나님의 예지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것으로써 그 분은 모든 영원성으로부터 그 분의 선행하는 은혜를 통해서 믿고 그 분의 후속하는 은혜를 통해서 인내하게 될 개별적 존재들을 아셨는데, 앞서 묘사했던 회심과 믿음을 위해 적합하고 적절한 수단들을 시행을 따르는 자와 믿지 않고 견디지 못할 자들을 똑같이 아셨다.
-네 번째 항목은 이전 세 가지 항목에서 밝힌 예정의 결과로써 비로소 개별적 존재에 대한 구원과 저주가 예정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혁신학적인 의미의 예정이 아니라, 전지하신 하나님의 ‘예지’에 기초한 것으로 의미가 전환된다. 세 번째 작정까지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말했던 알미니우스가 유독 개별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선택과 유기의 작정만큼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아니라 예지에 의한 ‘조건적 작정’이라는 이성 우위적 입장을 취한다.(예지예정)

알미니우스의 주장은 “ 모든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저항할 수 있으며, 제공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거절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무시할 수 있으며,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할 수 있으며, 마음 문을 두드리는 하나님에게 문을 열지 않을 수 있다. 선택된 자나 유기된 자의 구별 없이 이러한 일들을 실제적으로 행하고 있다.” 알미니우스는 세미 펠라기우스 주장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인간들의 의지로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609년 알미니우스가 죽고 나서 1610년 46명의 목회자가 자신들의 알미니안주의 견해에 대해서 정부가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항의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본격적이면서 조직적으로 알미니안 주의가 시작되었다. 항의 문서를 작성하는 것에 있어서 알미니우스의 제자인 시몬 에피스코피우스의 역할이 중심적이었다.

*항의문서는 5개의 요지를 가지고 있었다.
1. 인간은 완전타락하지 않아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다.
2.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예수 믿을 자를 미리 아시고 거기에 근거하셔 선택해주셨다(롬8:29)
3. 예수님의 죽음은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니 주님은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으므로 믿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믿을 것이며 믿고 싶지 않으면 그만이다.
4. 하나님이 특별한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은혜를 주셔도 인간은 구원을 거절할 수 있다.
5. 성도가 한번 구원을 얻었다가도 나중에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신학적 오류]

1. 인식론
알미니우스는 예정론을 결정론 혹은 숙명론으로 오해 한 인식론적 오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이 예정되었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은 무익해지고, 신자들의 회개와 믿음과 성결한 생활을 위한 열정들이 무용해진다고 염려 했다. 하지만 구원의 선택이 인간의 결정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방종과 태만에 빠질 가능성이 더 많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나 목회와 선교를 무익하게 만든다. 크리스토퍼 네스는 알미니안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론을 펼친다. “그들은 ‘나는 내가 원할 때에 회개할 수 있다. 비록 현재는 저속하게 살고 있지만,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때에 나는 선택될 수 있을 것인데, 왜냐하면 나의 임종 때조차도 회개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내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는 말로 사람들을 가르친다. 이것이 사람들로 의무에 태만하게 만드는 교리다.”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회개나 믿음이 필요 없으며 태만하게 살아도 된다는 그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예정론을 결정론이나 숙명론으로 인식한 결과물임을 또한 생각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보면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는 알미니안주의가 하나님을 신뢰하려는 희망까지 앗아간다. 반면에 복음을 대적하며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고 그와 함께 그 택하신 성도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견인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고난 중에서라도 선교의 열망은 식지 않을 것이며 죄인들에 대한 소망과 사랑을 더욱 가지게 할 것 이다.

알미니안은 칼빈의 예정론을 숙명론으로 인식하는데 그들은 개혁신학의 예정론이 인간을 자만하게 만든다고 비판하면서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만심에 빠졌던 유대인들을 예로 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비판은 정당하지 못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을 ‘선택의 조건’으로 보고 자만했다는 점에서 유대인들은 오히려 알미니안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건적 선택이 인간에게 자만과 자랑의 근거를 제공하며, 무조건적 선택은 오히려 자랑과 자만의 근거가 전혀없음을 깨닫게 함으로써 겸손하게 만든다 . 알미니안의 구원의 영광을 온전히 하나님께 돌리지 못하고 인간의 공로에 돌리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것보다 더 큰 교만은 없다. 개혁신학은 언제나 결정론과 운명론을 반대했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동시에 인간의 책임을 분명히 말해왔다. 도르트 신경 역시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강조했다. 따라서 인식적 오류에 기초한 알미니우스와 알미니안의 칼빈주의 예정론에 대한 비판은 조금도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다.

2. 구원론
알미니우스의 구원론은 첫째, 인간 공로주의적이다. 그는 은혜가 필수적이긴 하지만 구원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공로 또한 필수적 이라고 말했다. 알미니우스는 은혜를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본 펠라기우스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그는 중생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지속적인 은혜가 없으면 인간의 선행이 불가능함을 시인한다. 하지만 그 은혜는 중생하지 못한 자연인에게 하나님께서 선행하여 일으키신 것이며 계속적으로 인간과 협력하는 은혜다. 따라서 구원을 위해서는 인간의 행위 또한 필수적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내게 되는데, 이는 성경적 입장과 상반된다. 알미니우스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회개와 신앙을 조건으로 해서 구원하신다는 입장인데 필립 샤프는 칭의에 대한 입장이 트렌트 종교회의의 입장과 매우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둘째로, ‘믿음이 선택의 원인이다’ 는 알미니우스의 주장은 ‘선택이 믿음의 원인이다’라고 증언하는 성경말씀과 정면으로 충돌 한다. 성경을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선택에 있어서 개인의 신앙에 의존하지 않으신 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5)”선택하셨다. 하지만 그는 ‘거룩하고 흠 없을 것이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처럼 성경의 증언을 왜곡했다. 그의 주장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은 하나님의 선택을 분명하게 언급한 로마서 9장 11-13절의 증거와도 상반된다. 결국 알미니우스는 구원의 주체를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역에서부터 인간의 믿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셋째로, 구원의 견고함을 믿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구속하신 은혜를 값싸게 만들어버렸다. 사실 구원을 결정하는 최종 열쇠가 인간의 손에 있다면, 상황에 따라 쉽게 요동하는 인간의 태도에 따라 구원도 불안하게 흔들리기 마련이므로 알미니우스는 생을 마감하기까지 성도의 견인문제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얻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반응에 따라 예정하신 내용을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구원이 이토록 불확실하고 불안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구속하신 은혜는 너무나 초라한 은혜에 불과하게 된다. 넷째로, 알미니우스는 구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라고 주장한 셈이다. 구원의 최초의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인간이며 먼저 인간이 믿음을 가져야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 이다. 또한 구원을 최종결정하는 것 역시 인간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할 수도 있고 항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혜는 실제적인 구원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 못한다. 

3. 인간론
인간에 대한 알미니우스의 견해는 전적으로 타락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존재, 즉 성경이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펠라기안들이 원죄를 부정하고 인간은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세미 펠라기안들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치명상을 입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인간의 타락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모든 인간은 죄로 죽었으나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에 의해서 모든 인간의 자유의지가 약간 회복되었다고 말했다. 비유하자면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정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일종의 심장소생술을 받아서 마지막 유언 한마디를 할 수 있을 정도만큼은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타락의 강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주입’으로 여기며 주입된 은혜를 근거로 ‘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 은 세미 펠라기안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시안과 매우 흡사한 견해이며 또한 트렌트 회의에서 결정한 로마 가톨릭의 칭의 교리와도 유사하다.

4. 기독론
알미니우스의 반성경적인 인간론은 기독론 역시 반성경적이게 했다. 첫째로, 그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의 가치를 심각하게 손상 시켰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구원 가능성만 열어놓으셨을 뿐이며, 그 ‘가능성’을 유효한 ‘실제성’으로 바꾸는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이기 때문 이다. 결과적으로 알미니우스를 따르면 구원의 가능성을 성취한 그리스도의 공로보다는 구원의 실제성을 성취한 인간의 공로가 훨씬 가치있게 평가되어야 한다. 둘째로, 그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거의 실패에 가까운 것으로 만든다 .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목적을 모두 성취하지는 못하신 꼴이 되신다. 알미니우스의 논리를 따르면 오늘날 기독교 인구의 비율만으로 생각해 봐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소수에게만 유효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없었던 셈이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대속하신 것이 아니라는 논리적 결과를 만들어낸다.

5. 성령론
알미니우스는 인간본성의 부패성을 심각하게 인정하면서 구원을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바르게 말했으나, 이 은총은 선택된 특정한 사람들만이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제시되는 은혜라고 주장했다. 또한 속죄는 보편적으로 제공되지만 구원은 제한적 이어서 ‘회개하고 믿는’ 반응을 보인 자만이 구원을 획득한다고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모든 자들을 위해 죽으심)과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모든 자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알미니안은 알미니우스를 그대로 수용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으나, 성령께서는 그 유익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키시지 않는 분, 곧 존재와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셔야 할 삼위의 하나님을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 두 마음 혹은 두 의지를 가진 갈등적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삼위의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나 능력에 있어서나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시다는 것이 정통 기독교의 고백이다. 하지만 알미니우스는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삼위의 동등성을 무너뜨리며,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 분으로 만든다. 이는 하나님의 의지의 통일성 또한 무너뜨리는 행위다.

6. 신론
알미니우스는 예정에 대한 칼빈주의적 견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모독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켰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견해가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으로 여겼다. 알미니우스의 신은 자유롭게 주권적으로 작정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신앙 상태에 의존해서 작정하시는 분 이다.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서, 즉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엡1:4-5)하셨다는 말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또한 알미니우스의 신은 먼저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할 것을 예지하신 후에 그를 선택한다. 이 주장 역시 궁극적으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 라는 성경의 증언과는 반대된다. 어거스틴과 칼빈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을 택한다는 것이 궁극적인 진리인 반면에, 알미니우스에게서는 그 역이 진리이다.

1611년 칼빈주의자들이 알미니안의 항의문서에 대한 반대의 대답을 했지만 논쟁은 계속 되었고 이로 인하여 시민전쟁의 기운도 있었다. 결국 1618년 알미니안 주의자들을 판단하기 위해서 국제회의가 도르트에서 개최되었는데 단지 화란만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80여명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모여서 153회에 걸친 회의 끝에 결론은 화란정부가 이전부터 믿고 가르치던대로 결정되었다. 즉 알미니안 주의의 다섯 오류에 대해서 개혁신학의 입장을 선언하며 이단으로 정죄했다.

1. Total Depravity 전적타락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여 스스로는 하나님을 찾아갈 능력이 없어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로 주셔서 먼저 이끌어주셔야만 믿게 된다는 교리
2.  Unconditi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하나님은 예수를 믿을 자를 미리 아시고 성도를 택해준 것(예지예정)이 아니고 조건없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이 그가 구원할 자를 오로지 일방적으로 택해 주셨다는 교리(예정예지)
3. Limited Atonement 제한속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룩한 대속은 모든 이류를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들만 위한 것임을 밝히는 교리
4. Irresistible Grace 무저항적 은혜
하나님이 효과적 부르심으로 은혜를 주시면 인간은 반드시 구원을 받게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효과적 부르심을 거역할 수 없다는 교리
5. 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의 궁극적 견인
한번 중생하여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영원히 상실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이 인도해주신다는 교리

알미니안 주의에 의하면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결심하였습니다" 혹은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라고 하면 회심한 것으로 간주한다. 구원의 은혜의 증거도 없이, 성령의 거룩하게 하는 중생의 역사도 없는데,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결심 하나로 구원을 받았다고 간주한다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물론 인간적으로 볼 때 이러한 방식은 매우 쉽고, 교인으로서 교회에 등록시킨다면 숫자적 교회성장은 빠를 것이다. 또한 그 영혼에 성령님이 역사하기가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까 쉽고 편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영혼을 속이는 것이며, 정직하지 못한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는 20세기에 걸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는 명목적 그리스도인과 구원의 은혜가 확실치 않은 교인들이 넘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는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였으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복음주의의 4/5에 해당되는 자들이 바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특성으로 자신의 입으로 예수를 구주로 시인했기 때문에 구원 받은 자로 간주하고 설교 자체에 심판이나 죄에 대하여 강력한 설교를 하지 않는다. 모든 교인이 구원이라는 이름하에 경건성과 거룩성만을 설교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설교 자체에 죄의 깨달음이 없고 심판에 대한 설교가 없기에 보편적으로 "-을 해라", "-을 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회개보다는 인간의의지를 발동시킨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봉사를 해라"라는 설교를 듣고는 자신이 왜 교회에서 봉사를 하지 못햇는가에 대한 회개보다는 "이제 교회에서 봉사해야지"라는 자신의의지가 발동이 된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는 오래갈 수가 없고 오래 간다할지라도 중심이 자신에게 있기에 기쁨이 없고 불평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목회자 밑에서 설교를 오래듣고 나면 구원의 은혜를 얻지 못할 뿐더러 계속적으로 영적침체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또한 성령의 역사에 의존하기보다 여러 가지 인간이 고안해 낸 프로그램들을 의존해서 전도하고 교회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현상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인간이 고안해낸 적절한 프로그램에 의해 중생이 가능하거나 중생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그만큼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제한하는 것이며, 중생이 도덕적 설득에 의해 이루어지는 변화라고 했던 알미니안과 같은 입장에 있게 된다. 도로트 회의는 이러한 주장을 단호하게 배척했다. 목회 현장에서 경영기법의 도입, 상담 심리기법의 도입, 마케팅 전략의 도입 등은 경계해야 할 점도 있고 수용할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심각한 문제점은 그러한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좀 더 효과적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잠재된 생각이다. 그러한 생각들은 스스로 미처 깨닫고 있지 못할지라도 신·인 협력설을 주장했던 알미니우스의 사상과 같은 맥락에 있다. 왜 한국 교회는 개혁자들이 철저히 반박했던 로마 가톨릭의 영성을 다시 추구하면서 로마 가톨릭화 되어가는가? 왜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이 부족한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많으며, 구원에 대한 확신문제를 가지고 파고드는 이단의 세력이 날로 확장되는가? 이는 그만큼 한국교회 내에 알미니안 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것은 참신하고 새로운 프로그램들이 아니라 개혁파 선배들이 물려준 성경적 신앙고백들과 교리들을 새롭게 회복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서 점점 교묘하게 위조되는 모조품 진리들에 대항하여 진리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냉철한 분별력을 갖출 수 있도록 무장하고, 자신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려는 열정을 가진 성도들로 성숙케 하는 일일 것이다(딤후2:15).
(알미니우스에 대한 이단성 연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신학과(역사신학)전공 최동규)


10. 도덕률폐기론

16세기의 청교도들은 경건을 수단으로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운동을 일으킨 자들이다. 청교도들은 율법이 성령의 영향 아래서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는 죄를 깨닫게 하고 질책하는 기능을 하며 거듭난 자에게는 성화의 수단으로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하게 하며 진정한 경건을 이루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 됨을 매우 강조하였다.

청교도들의 이러한 율법적인 태도에 대해서 반대하는 자들이 영국에서와 뉴잉글랜드에서 출현하게 되었는데 율법의 기능에 대해 반대하기를 “ 믿는 자들이 은혜언약 아래에 있는 것이지 행위언약 아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의 계명은 더 이상 유효치 않다. ”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을 도덕률 폐기론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칭의가 선택과 같이 영원하다고 주장하면서 칭의가 믿음보다 앞서며,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갖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의롭게 하신다고 하면서 칭의의 결과로 믿음 이 나타난다고 한다. 또한 구원받은 백성 혹은 구원 받을 백성은 결국 구원 받을 것이며, 그들은 칭의로 인하여 미래의 모든 죄도 용서함 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영원하여서 취소되지 않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중압감을 느낄 필요가 없음을 강조한다. 이들은 은혜를 매우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실 죄를 짓는데 있어서 허가증을 받고자 하는 매우 육신적인 주장에 불과 하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청교도 신학을 일으키며 제1차 영적 대각성이 일어났을 때, 도덕률폐기론주의자들이 다시 일어나 부흥을 극단의 열광주의로 변질시키려했듯, 오늘날에도 한국교회 내에서 이러한 경향의 가르침이 여전히 계속 존재하고 있다.  은혜의 외적 증거인 경건이나, 성화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며 또 자신들이 은혜 가운데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매우 교만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11. 하이퍼 칼빈주의

1689년부터 알미니안 주의에 대한 극단의 반대로서 하이퍼 칼빈주의가 영국에서 일어났다. 하이퍼 칼빈주의란 하나님의 주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을 제외하는 가르침 이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에 대해 강조하며 복음전도의 필요성을 부정하는데 사실 하이퍼 칼빈주의는 역사적 칼빈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이퍼 칼빈주의는 존 훗시의 영향을 받아 존 스켑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1735년에 이르면서 침례교도인 존 길이 조직적으로 체계화하며 신학이 정리된다.

하이퍼 칼빈주의 가르침
1)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하고 인간의 책임을 면제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어떻게 균형적으로 설명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배제하고 인간의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책임만을 강조한 것에 대해서 과도한 반응으로 다른 극단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2)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전적타락과 부패의 교리를 극단적으로 해석 하여서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생각할 마음도 없다고 하면서 복음 전할 필요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들에게 외쳐질 때, 성령께서 그들의 영혼 위에 일하셔서 깨닫게 하며, 죄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기 때문에 반드시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전도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는데 사용하는 은혜의 수단이다.

3) 하이퍼 칼빈주의는 제한속죄를 과장하여 확대 시킨다.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이 선택된 자에게만 유효하다는 교리를 곡해한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는 다 정하여졌다고 생각하여서 복음의 초청을 반대한다.

4) 칭의 교리를 확산시켜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 대신에 믿음 이전에 의롭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11장 4절에 따르면, "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택함받은 모든 사람을 의롭다 하시려고 작정 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때가차매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그렇지만, 그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성령께서 때를 따라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시킬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실제적으로 영원전에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선택된 자들이 아직 회심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실제적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주장 한다.

5)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여러 면에서 도덕률 폐기론 신학을 따른다. 먼저 회심에 있어서 죄의 질책이 필요없음을 말하면서 회심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에 대해 만족하는 것으로 말한다.

결국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교회는 깊은 잠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전도할 이유도 없고 오히려 그것이 잘못되었으며, 성화를 힘쓰지 않으며, 죄에 자신을 방임해도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성도의 견인교리를 오용하여 인간의 책임 부분을 면제하려는 그들의 잘못된 신학을 발견할 수 있고, 실천 신학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만을 위한 구원자로서만 인정하고 지금 순종하고 따라가야 하는 주로서는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장차 오실 심판자이신 심판의 주로는 예수를 원치 않는 자들 가운데 널리 퍼져 있다.


12. 존 웨슬리

18세기 영국 사회개혁운동을 이끌었던 존 웨슬리의 영향은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웨슬리는 도덕률폐기론 주의의 오류성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성결, 교회의 경건, 사회개혁들로서 개혁자의 정신을 목적 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에 강조를 두었기 때문에 결국 알미니안 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웨슬리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한 최대의 교리적 관심사가 “ 인간이 어떻게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성화(구원)될 수 있는가? ”였고 그 구원론의 중심에는 성령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적 구원의 길(엡2:8)”이라는 자신의 설교에서 ‘ 선행은총의 역사-칭의 전의 회개-믿음-칭의-신생(중생)-칭의 후의 회개와 점진적 성화-완전성화 ’라는 구원의 순서를 말해준다.

1) 선행은총
웨슬리는 선행은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늘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역사(요6:4),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인데 우리가 사모하면 할수록 점정 증가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교화하시는 빛(요1:9), 곧 사람에게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도록(미6:8) 지시하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선행은총이란 성령께서 때때로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시어서 깨닫게 하시는 전부를 말합니다……선행은총은 인간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싹트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과,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과,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하였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 등입니다.’ 또한 웨슬리는 죄인 된 모든 사람들이 지닌 ‘양심’을 선행은총으로 이해 한다. ‘영혼이 자연적으로 죄악에서 죽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런 변명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선행적 은총 입니다. 사람은 은총이 없어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은총을 활용하지 않는 까닭에 범죄하는 것입니다.’ 이상 웨슬리의 선행은총은 보편은총의 개념에 따라 만인에게 골고루 주시는 만인을 위한 은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선행은총을 지니고 있으며, 선행은총의 바깥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선 “값없이 주시는 은총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이라는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하셨고, 요한복음 1장 9절(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오셨다.) 주석에서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빛을 자연적 양심이라 보았으며, 미가6장 8절을 가지고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라는 말씀을 선행은총의 역사 라고 간주했다.

이 선행은총은 우리 안에서 다음과 같은 작용을 한다. 첫째, 깨달음(자연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존재 가능성을 믿는 것)을 촉발하여 우리에게 하나님과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 둘째, 하나님께서 타락한 사람의 마음속에 다시 부분적으로 기록해준 내면의 율법인 도덕법이고, 그것이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 모세의 율법 이다. 그래서 사람 속에 제한된 도덕법의 지식이 있는 것은 선행은총이 작용한 결과인 것이다. 셋째, 선행은총은 우리가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은총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 을 준다. 다시 말해 선행은총이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를 회복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은총을 수용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는 ‘가항력적 은총’을 말한다.

펠라기우스는 원죄나 죄의 유전을 부정하고 인간 본성에 선을 행할 능력이 주어져있어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협력은 이 본성적인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웨 슬리는 원죄의 교리가 존재하며, 이 원죄의 상태에서는 인간이 선하거나 선행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선행은총 없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협력 또는 공헌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인간은 누구라도 선을 행하는 일, 하나님의 은혜에 자유롭게 응답하는 일에 있어서도 아주 무력한 존재라고 말한다 . 그러나 웨슬리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선행은총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만인에게 적용함으로 인해 모든 사람은 이미 원죄의 죄책에서 용서받았고, 그 결과로서 영원한 형벌에서 면제받을 수 있는 길을 얻게 되었으며, 또한 인간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로 출생할 때 선행적 은총은 주어졌고, 그 결과로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든지 아니 믿든지 선택할 자유의지와 결단의 능력이 회복되어 있다 고 말한다. 그래서 웨슬리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이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해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에, 우리 인간이 해야 하는 노력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구원성취에 있어서 인간의 협동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웨슬리는 선행은총을 타락한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 속에 내면적 율법인 도덕률을 회복시키기시고, 선택의 자유 곧 자유의지를 회복시키시는 성령의 역사 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역사, 그리스도를 통해 교화시키는 빛, 구원을 갈망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열쇠이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과 완전을 이루는 것을 가능케 하는 구원의 원천으로서의 은혜인 것이다.

2) 회개와 믿음
웨슬리는 “성경적 구원의 길”(엡2:8)이라는 자신의 설교에서 선행은총을 받은 자가 칭의에 이르기 위한 조건으로 회개와 믿음을 들고 있다. 그리고 웨슬리는 회개를 ‘칭의 전의 회개’와 ‘칭의 후의 회개’, 이렇게 두 종류로 구분한다. 또한 웨슬리는 마태복음 3장 8절 주석에서 칭의 전의 회개를 ‘율법적 회개’로 부르고 있고, 칭의 후의 회개를 ‘복음적 회개’로 부르고 있다. 칭의 전의 회개는 죄책, 정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형벌의 두려움과 관련된 것으로 율법이 전하는 가르침과 명령에 의해 죄를 철저히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연적 인간은 선행은총으로 회복된 내면의 도덕적 율법과 선한 양심의 증거와 함께 회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성령이 율법을 통해 죄인들을 깨우치는 것은 일반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또한 웨슬리는 칭의 전의 회개의 열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했으며, 사단의 죄와 세력에 의해 거룩하지 못한 요소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선한 행위로 여기지 않았다. 한편 복음적 회개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 죄가 무엇인지 깨닫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죄에 대한 깨달음, 우리의 생활, 우리의 말과 행위에 고착되어 있는 죄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이런 의미에서 칭의 후 회개는 자기 의를 신뢰하던 것에서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신뢰하는 것으로 변화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또한 웨슬리는 칭의 후의 회개의 열매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행해졌기에 선한 행위로 간주하여 칭의 후에도 회개와 선행은 꼭 필요하며, 이 두 가지를 등한시 하게 되면 성화되리라고 기대할 수 없고, 이미 받은 은혜를 지속할 수도 없으며, 믿음 안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계속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율법적 회개가 그저 죄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이라면, 복음적 회개는 깨달은 나머지 모든 죄에서 성결한 마음과 생활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웨슬리는 회개를 칭의에 이르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고, 칭의의 조건으로 믿음이 회개보다 더 중요하다고 이해했다. 그는 믿음에 대한 정의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는 것(고후5:19)에 대한 증거요, 확신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셨다(갈2:10)는 하나님의 증거요, 확신이다. 바로 이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 되심을 안다.(고전1:30)” 결국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셨다는 확신이라는 의미하는데 이는 단순한 동의 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확실히 신뢰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며, 그 전의 죄과의 책임을 인간에게 돌리시지 않는다는(고후5:19) 사실, 이러한 내가 이제는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 혹은 신적 확신인 것이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존 웨슬리의 성령론-총신대학교 신학과 조직신학전공 김성민)

칼빈주의에 대한 웨슬리의 또 하나의 오해는 예정론이다. 웨슬리는 이 부분에서도, 도덕률폐기론 주의자들과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의 예정론을 칼빈주의로 착각 하였다. 그래서 웨슬리는 예정론이 사람들로 하여금 전도하는 것에 가장 큰 걸림돌로 보았다. 선택된 백성과 유기된 백성이 결정되었다면, 전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라는 방식 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웨슬리는 칼빈주의를 혐오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지식은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신29:29). 다만 효과와 결과가 나타나야만 알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누가 버림을 받은 유기된 자인지 마지막 타락과 배교 및 성령 훼방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주께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순종하여 전해야 하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수단으로 해서 자신이 선택한 백성을 건지시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해야하는 것이다.

개혁신학에 있어서 예정과 성화는 분리할 수 없는 교리 들이다. 에베소서 1:4-5(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목표가 있다. 그것은 거룩함 이다. 따라서 본인이 예정된 백성임을 확인하기 원한다면 거룩함, 즉 성화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성화없이 예정을 말하면서 육신적으로 살아갔던 것이다. 즉, 개혁신학에서 예정론은 성화와 직접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육신적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는 것 이다.


13. 찰스피니 부흥주의

조나단 에드워즈와 청교도 신학에 영향을 받은 장로교단 목회자 제임스 맥그레디가 영적으로 각성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1800년부터 부흥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1801년 8월에 카인릿지에서 모인 집회에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설교자가 설교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쓰러지는 현상과, 고개를 쉴새없이 끄덕거리는 현상과, 개 같이 짖는 현상, 그리고 웃는 것과 달리거나 춤추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러한 현상은 계속되었고 이러한 집회에 대해 침례교, 장로교, 감리교 목회자들과 회중이 참석하여 의논하게 된다. 장로교 목회자들과 침례교 목회자들 사이에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지지하는 자들도 있는 반면, 교리적으로 오류가 분명한 열광주의라고 반대하는 자들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열광주의: 열광주의는 냉랭한 지성주의에 반대되는 말이며, 일반적으로 체험에만 관심 을 가진다. 열광주의는 신앙에 있어서는 정통주의일 수 있으나, 객관적인 진리와 가르침을 따르기보다는 감정이나 결과에 더 치중한다. 열광주의는 성령에 대해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성경만을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어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특별히 계시해 주는 것들, 즉 우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 (이안 머리,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부흥과개혁사, 191)
그러나 감리교 목회자들에게는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고 이러한 육체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영적 체험이라고 생각하여 이것을 문제 삼지 않았고 오히려 환영했다. 우리는 이러한 신학적 태도를 부흥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부흥주의는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부흥이라는 명제를 만들어 내었고 더욱이 알미니안 주의와 도덕률폐기론이 그것에 가담하여 신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새로운 스타일의 설교 테크닉이 도입되었다.

1827년에 이르러서 장로교의 찰스피니가 새로운 방법들을 도입하기 시작하는데 개인들에게 직접적이며 공개적인 압력을 가하는 것들로서 때때로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거나, 즉각적인 결정을 하여 회심하라고 요구하거나, 죄에 대해 슬퍼하는 좌석을 따로 만들어 그곳에 앉기를 격려한다거나, 여자들을 그룹 속에 넣어 날카로운 목소리로 기도하게 한다거나, 질책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의 고안된 방법들을 가능한 다 동원하여 집회를 여는 것이다. 피니는 부흥이 하나님의 간선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방법들을 사용함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피니는 부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죄의 자각과 회개 로 보았다. 그런데 피니는 죄의 자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죄인이 어떻게 죄를 자각하게 되는가? 자신들의 죄를 생각함으로써이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인이 깊은 느낌을 얻는 방법이기도 하다.” 피니는 죄의 자각을 목표로 두고 깊이 생각할 때 죄의 자각이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 피니에 있어서 죄의 자각은 성령께서 죄인의 심령을 깊이 책망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들을 생각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 하였다. 이러한 피니의 신학은 회개의 방법에서도 나타난다. 자신 스스로가 심령을 바꾸는 노력과 결심을 하라고 촉구 한다. 이렇게 죄의 자각을 위해 애쓰고, 그 다음에 “뉘우치고, 회개하고 개혁의 과정을 통해서 죄인들의 구원이 뒤따른다고 하였다.” 피니는 이러한 주장을 하면서 중생이 100%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것을 반대한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마음을 갖게 해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주장한다. 피니는 이러한 각성과 회개가 일어나는 부흥을 위해서 새로운 방법의 사용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 방법 가운데, 부흥회를 강조하였다. 피니가 강조한 부흥회는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는 수단이었다.

찰스피니의 심각한 신학적 오류
1) 회심학
찰스피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을 강조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내 의지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때 성령께서는 죄인들을 죄로 질책하기 보다는 죄인들을 설득 하여 바른 선택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물론 찰스 피니는 인간의 전적부패를 믿지 않고 인간의 능력으로 하나님에게 완전하게 순종할 수 있으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 하였다. 회심을 자발적이며 의도적인 마음의 변화로 말한다. 결국 피니에게 있어서 중생과 회심은 같다 . 왜냐하면 찰스피니에게 있어서 중생은 수동적이 아니라 사람의 능동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신학과 청교도 신학에서는 중생은 하나님의 은밀한 사역으로 수동적이고 회심은 그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응답과 순종으로 능동성 을 말한다.
 
2) 찰스 피니는 자신의 이러한 새로운 측정이란 방법론의 결과로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영적침체로 빠지는 것을 보고 딜레마에 빠져 고민 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모순으로부터 빠져 나오기 위해 완전주의를 따라간다. 즉, 사람들이 회심을 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회심자들을 보면서 그들로 죄로부터 자유케하는 경험인 두 번째 체험을 하라고 권면 한다. 완전성화의 이론을 따르면서, 성결 체험을 위한 집회를 주장하게 되었다. 찰스 피니의 이러한 잘못된 신학에 대해서 그 당시 참된 부흥을 추구하고 있는 많은 신학자들이 그를 타일러도 보고 경고도 하였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애쉬벨 그린은 피니의 회심 신학이 너무 피상적이어서 교회 경건을 무너뜨릴 수 밖에 없음을 경고하였다. 에드워드 그리핀도 경고하기를 “찰스피니의 회심신학은 자신들의 결정을 회심으로 보기 때문에, 이렇게 결심한 자들로 더욱 자신들을 믿는 것으로 빠지게 할 것이며 또 사람들로 하여금 교만하도록 부추기기 때문에 결국에는 뒤떨어진 종교를 만들어 낼 것이다.” 찰스 피니의 부흥주의가 현대의 복음주의에 직접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집회 가운데 제단 앞으로 불러내어서 어떤 결정을 요구하고 결정한 자들에게는 그 초청자가 구원을 선포 하는 의식을 제공하여 준 것이다. 예를 들면 빌리그램의 경우 피니 방법론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더욱이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들 가운데 찰스 피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정적으로 고조시키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더욱 개발되어 과도하게 감정적인 복음송을 부르거나 여러 가지 도구들을 사용해서 일시적 체험을 유발시키고 도 결정을 유도하려는 것들이 다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이것은 찰스 핫지가 지적한 것처럼 환상주의로 신학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교회의 경건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14. 완전주의와 성결운동

감리교 목사인 티모디 메리트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위한 지침’을 발행하게 되었다. 그 목적은 완전성화의 체험이 회심의 체험처럼 크게 일어나기를 소망하였던 것이다. 그의 글은 감리교 안에서 다시 관심을 끌었고 1837년 2월 22일 ‘Zion's Herald’에서 감리교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모여 완전성화에 대한 주제를 다루었다. 이런 잡지는 그리스도인의 완전 체험의 간증들을 실어서 출판함으로 완전성화와 성결부흥운동에 대한 관심을 더욱 크게 확장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성결부흥운동을 증진시키기 위해 강조된 가르침은 웨슬리의 완전성화론과 체험이었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며, 의도적인 죄를 짓게 하는 내적 기질로부터 자유하고, 신적인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을 가르쳤다. 이 두 번째 체험은 의도적인 죄를 짓지 않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눠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웨슬리안 완전주의는 미국 장로교의 신학파 신학과 만나게 되고 그 중 찰스피니 또한 동의하여 보다 높은 체험의 경험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매료되었다.

완전주의와 성결부흥운동이 추구하는 바는 사실 비판할 것이 없을 것이다. 보다 나은 성결의 삶을 위해 혹은 완전한 사람을 위해 보다 확실하고 분명한 영적체험을 추구하는 것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영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것에 있어서 피상적이며 혹은 주관적 이라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완전주의와 성결부흥운동은 바로 이점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웨슬리의 완전주의와 성결운동은 첫 번째 체험인 회심을 성경에서 말하는 것보다 기준을 더 낮추어 회심하여도 능력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고 그래서 두 번째 체험을 통해서 죄를 이기고, 헌신하며, 사랑에 가득찬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회심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은 회심으로부터 벌써 순종의 삶을 산다 라고 말한다(롬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
-그리고 ‘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박영돈 저자)’ 책에 “신약 성경에 의하면 죄와 분리된 성결의 삶은 회심 후 제2의 축복을 체험할 때까지 유보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처음 믿을 때부터 시작되며 신자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죄에 대해 죽고 새사람으로 부활하는 결정적 성화가 일어나며 동시에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특권이 주어진다. ”고 말한다. -또한 로마서 8:1 이하에 의하면 진정으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즉, 회심을 한 자는 죄의 주관에서 벗어나서 죄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고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서 계명이 요구하는 바를 지키게 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롬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한 회심한 증거로서 더욱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서 육신을 죽이는 것이다 (롬8: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회심하였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을 성령의 도움으로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회심한 영혼은 죄를 미워하고 싸우게 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8:9-11(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해도 받지 않게 하려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에는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와 열매 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한 자는 웨슬리안 완전주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죄를 짓고, 알면서 죄를 짓는 자들이 아니다. 고린도후서 7:11에서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한 자의 증거 혹은 열매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죄에 대해서 분하게 여기며, 죄를 짓는 것에 대해 경건한 두려움이 있으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벌하는 증거들이 있다.
-이러한 원리는 요한일서로 가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웨슬리안 완전주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회심하였다고 하지만 계명도 지키지 않고, 죄와 싸우지도 않으며, 거룩한 삶을 살지도 않으며, 헌신도 없고, 사랑도 없다면 그것은 요한일서에 비추어보면 아직 회심하지 않은 상태 이다. 요한일서2:4(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에 의하면 주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아직 회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2:9는 빛 가운데 있다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자라고 증거한다. 더욱이 요한일서3:6(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에 의하면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다면 그는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자라고 단언하여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은혜 혹은 회심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영적효과와 능력은 매우 크며, 분명하다. 그럼에도 웨슬리안 완전주의자와 찰스 피니, 그리고 성결 부흥 운동하는 자들은 아예 처음부터 성경적 기준에서부터 떠나 구원의 은혜가 없는 자들을 구원받았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여전히 능력 없이 살아가는 그들을 향하여 두 번째 체험을 하여서 능력 있는 사람으로 살라고 외쳤던 것이다.


15. 오순절 주의

웨슬리안 완전주의와 성결부흥운동은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기반을 제공 하여 주었다. 오순절 운동은 1895년 얼윈에 의해 시작되는데 그는 성화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성령의 불세례를 받아서 성령의 완전한 지배에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1901년부터 찰스 파람은 방언이 천년기의 늦은 비 시대의 증거이며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러한 주장이 성결운동에서 오순절 운동으로 전환되는 결정적 선언이 된다. 성결운동의 윤리적 성결강조를 위한 체험이 초자연적 체험의 강조로 변이된 것 이다. 그래서 다른 성령의 은사인 예언, 지혜, 지식, 신유를 창조하며 신적치유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신적치유가 하나님의 구원의 부분이라고 말하였다. 오순절 운동은 육신의 치유가 영적인 치유와 함께 속죄에 포함된다고 가르치면서 이 운동은 더 확산되어갔다.

오순절 신학의 문제점
1) 성령의 은사가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보다 높은 수준의 성화된 상태로 말할 수 없다.
2) 성령의 은사가 절대로 구원의 은혜보다 우선순위일 수 없고 앞설 수 없다. 성령의 은사는 그 성격상 임시적이요 일시적인 것이며(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제한적이다(고전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그러나 구원의 은혜는 영원한 것이며 더욱이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일반사역이다. 즉, 그 은사로 다른 사람을 세우거나 교회를 위한 것이지 은사를 받은 본인의 구원을 확인하거나 심령의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니라). 성령의 은사는 교회와 봉사를 위한 기능적 역할을 할 뿐이다. 따라서 오순절 운동은 성령의 일반사역을, 영혼을 구원하는 성령의 특별사역보다 앞서게 하여 그 순서를 바꾸어 버렸다. 이들의 오순절 운동의 신학체계는 청교도들이 지적한 것처럼 성령의 은사는 있으나 구원의 은혜가 없는 위선자들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은혜가 더 깊은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따라서 오순절 신학은 위선자들을 양성할 수 있는 신학 체계이므로 은사들이 풍성할지라도 성령의 열매를 찾아보기 힘들고 도덕적으로 낮은 수준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16. 자유주의 신학

촬스 피니와 알버트 반즈 그리고 리만 바철의 실천적 펠라기우스주의를 견지함에 따라서 미장로교는  장로교는 이들에 대해 반대하며 칼빈주의를 견지하는 구학파와, 찰스 피니를 지지하는 신학파로 분리되었다가 1869년 통합이 다시 이루어졌다. 이 결과에 대해 장로교 교회사가인 로에츠쉘러는 말하기를 “교회의 신학적 기반이 넓어지고 신앙고백에 동의하는 것도 느슨해졌다.”고 하였다. 이는 통합으로 인해 구학파의 칼빈주의 신학이 자연스럽게 무너져 내려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자유주의적 경향에 반대하기 위해서 통합 이후 교회 내에서 크고 작은 이단시비가 계속 있었으며 구학파의 목회자들은 통합 이후에 계속해서 신학적 혼탁을 염려하며 경고하였다. 통합으로 인해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길을 가도록 열려진 가운데 찰스 브릭스가 남북 전쟁 후 독일에서 공부하고 미국으로 돌아와서 벨 하우젠의 고등 성경비평주의를 주장하고 그 세력을 모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개정 하려 하였다(1899). 이러한 영적 움직임에 대해서 교회사가 필립 샤프는 "1899년 총회는 아메리카 신학역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인데 오랜 칼빈주의는 급속도록 죽어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총회에서 노회들의 3분의 2이상의 동의를 얻지 못하여 일단 이 개정운동은 멈추게 되었지만 결국 1903년 총회에서 그 안건은 가결되었다.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을 하나님은 모든 만인을 사랑한다는 것과 조화되도록 해석하는 것과 10장 3절의 선택된 유아에 대한 해석을 유아기에 죽은 자가 구원받지 못한 자로 간주되는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과 16장 7절, 22장 3절의 본문 변형과, 그리고 25장 6절에서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누락시킨다. 또한 이러한 개정의 실제 속사정은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인간의 가치와 영적 능력과 확신에 강조를 두고자 하는 것에 있었다. 이에 대해 로에츠쉘러는 평가하기를 “교회가 시대의 조류에 따라 신학적으로 변경할 준비를 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개정은 신학적으로 변하여 가는 시대의 시작이며 이것으로 장로교회는 실천적으로 칼빈주의를 버리기 시작하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개정은 1810년 칼빈주의에서 떠나 알미니안주의로 가버린 컴버랜드 장로 교회가 1906년에 미국 장로교에 다시 합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자유주의자들도 자신들이 크리스찬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정녀 탄생, 성경 무오, 그리스도의 육체적으로 다시 오심의 교리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기초가 아니기 때문에, 이 교리들을 거부한다고 해서 교회에서 내 쫓아서는 안 된다 고 말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거센 도전에 그레샘 메첸은 기독교 초자연적인 것을 거부하는 자유주의자들과 혈투를 벌리
게 되었다.

메첸이 지적한 자유주의의 불신앙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현대 자유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 원리들과 교리들을 제거 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의 교리들의 무용성 주장에 메첸은 기독교는 삶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교리로서 분리 될 수 없음 을 강조하였다.
2) 현대 자유주의는 예수님의 윤리적 교훈들에 초점 을 둔다. 메첸은 복음은 단지 윤리적 가르침이 아니라 구원을 다루는 것이며 이 구원의 은혜로부터 삶과 도덕이 그 효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3) 현대 자유주의는 선량한 인간을 추구하면서 인간의 도덕적 부패 혹은 무능을 믿지 않는다. 메첸은 이것에 대해서 기독교는 애통하는 심령을 가진 종교로서 먼저 죄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죄를 처리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이 죄를 너무나 쉽게 여기고, 세상의 도덕적 표준으로 만족하고 있음을 개탄하면서 현대 자유주의 교회가 “절대로 불가능한 과업 곧 의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으며…현대 자유주의 전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자신 긍정의 포기를 요구하지 않은 채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려고 애쓰며 죄의 자각을 피하도록 힘을 다해 돕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4) 현대 자유주의는 성경의 완전 영감론을 거절하면서 성경은 오류가 있으며 모든 말씀에 대해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예수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해야한다고 주장 한다. 그들은 구속자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도덕적 모범인 예수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메첸은 예수님은 우리 신앙의 대상임을 강조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은 죄로부터의 ‘구원’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필요없음을 지적한다.
5)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 메첸은 예수님은 초자연적 인격이며, 참으로 하나님 이셨던 인격임을 말한다.
6) 예수님의 초자연적 인격전체를 부정하고 기적을 거부 한다.
7)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적 죽음으로 보지 않고, 다만 인간으로 본받도록 제시된 자기희
생의 표본으로 간주한다. 결국 자유주의자들은 죄의 실재를 무시하고 인간의 의지의 설득으
로 구원에 이른다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죄를 미워하는 것은 물론이며 죄에 대한 심각성과 죄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십자가
의 죽음의 교리가 편협적이라고 비난하며 스스로 의로운 행위로 구원 받으려 한다.
8) 하나님의 공의를 믿지 않고 사랑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심판의 교리도 믿지 않는다.
9) 그들이 추구하는 구원은 사회복지적 인 것이다. 매첸은 사회복지가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구조상 관심을 둘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사회의 참된 개혁은 구속함을 입은 자들이 사회에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함으로 이루어지는 것 으로 보았다. 


17.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는 1910년 에딘버러에서 열린 선교사 대회가 발전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조직되었다. 1961년에 국제선교사공의회가 세계교회협의회 또한 합병되는데 각 조직 모두 세계선교를 위한 에큐메니칼 단체이다. 이들은 자유주의 신학에 상당히 영향을 많이 받은 국제적 조직이고, 20세기의 교회와 선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WCC가 주장하는 구원은 인간성의 회복 이며 인간의 죄와 죄의 본성에 대해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다 . 그들은 원죄와 인간의 부패성을 부정하면서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현재 이 땅 가운데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롭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상의 가치기준을 높이 평가하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교회가 따라가라고 말한다. WCC가 이해하는 교회는 영적기관이 아니며 세상을 섬기는 것을 통해 사회적 기능을 하는 기관 일 뿐이다.

오늘날 복음주의자들도 죄에 대해 설교하지 않는다. 인간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새로운 방식의 예배들이 고안되었다. 인간의 자긍심을 부추기고, 자기 계발을 함양하면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설교하며 세상의 가치기준을 따라가고 있다. 교회는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문화와 교양학습 기관으로 전락했고 스포츠 센터와 각종 문화행사가 쉴 새 없이 진행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교회는 종교기관이 아니라 문화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배당을 의도적으로 개조하고 십자가마저도 떼어놓고 있다. 또한 영적인 것에 무관심하고, 복지사업 기관으로 전향하고 있다. 세상이 행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도 육신적 웰빙과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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