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교회사!!

[스크랩] Ⅱ. 교회사 개관

하나님아들 2019. 1. 22. 12:47

. 교회사 개관

 

교회사의 구분

 

1) 초대교회(1~600)

 

초기 100년까지를 신약교회 시대라고 분류한다. 이 시대는 신약성경이 기록되고 사도 요한이 생존하면서 사역했던 기간이다. 이후 313년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완전히 공인하기까지의 기간을 초기 카톨릭 교회 시대로 분류한다. 그리고 380년 데오도시안이 기독교를 국교화 하고 590년 그레고리 1세가 교황에 오르기까지의 기간을 ()카톨릭교회 시대라고 분류한다. 그리고 그레고리 교황 이후로 현재에 이르기까지를 일반적으로 카톨릭(천주교)”이라고 부른다.

 

로마제국의 박해 아래서 첫 3세기동안 교회는 변증적인 신학을 발전시켜 나왔다. 이 과정에서 복음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분파운동은 교회의 통일된 신학형성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세계교회회의를 통해 정통 신학의 교리를 확립하려는 시도와 작업이 있게 되었다. 4세기에는 니케아 회의(325)와 콘스탄티노플 회의(381)를 통해 삼위일체 논쟁이 정리되었다. 그 후에 발생한 인간론 논쟁은 에베소 회의(431)와 오렌지 회의(529)를 통해 정리되었고, 기독론 논쟁은 칼케돈회의(451)를 통해 정착되었다. 이로써 복음의 정통적인 이해가 기초적으로 확립되었다.

 

2) 중세교회(600~1600)

 

중세교회란 그레고리 1세 교황이 즉위한 590년부터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1517년까지 약 일천년 간을 일컫는다. 중세에는 교황 중심의 교회론이 강화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도입하여 사변적인 스콜라 신학이 대성하게 되면서 자연신학적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그릇된 교회론과 그로 인한 교회 전통에의 강조 그리고 자연신학의 대두 등은 신학적으로 종교개혁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속죄론에 있어서는 상당한 진보를 보인다.

 

중세가 시작되면서 이슬람교의 발흥과 세력 확장, 게르만족 침입, 북방 유럽 해양족(바이킹족)의 침입으로 서방 기독교의 힘이 축소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크 왕조는 800년 로마의 교황권과 합세해서 신성로마제국을 건설한다. 그리하여 카롤링거 문예부흥시대를 여는데 학문적인 면에서 은총론, 성찬논쟁이 있었고, 베네딕트 수도원 등을 세우며 교권을 확립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내부적인 타락을 가져와서 니콜라 주의와 시모니(simony)의 부패상을 가져온다. 이런 부패상에 대항하는 카타리파와 왈도파가 일어났으며 독일중심의 교황권에서 개혁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러한 상황의 반동으로 교회는 제도권 신학(스콜라니즘), 수도원(도미니칸, 프란시스칸), 십자군 원정 등으로 더욱 강경책을 세웠다. 십자군에 의한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기회로 민중의 불만을 타파하려 했다. 그 결과로 교황의 절대권이 확대되었으나 민중은 오히려 미신적 신앙을 갖게 되었다. 유물, 유품, 유골 등을 숭배하게 되었고 천기(天氣)를 하나님의 징조와 연결하여 해석하였다. 각종 미신이 조장되어 점성술, 마녀 등의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이에 대한 지성인들의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으며 사회의 부패를 풍자했는데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단테의 신곡, 복카치오의 데카메론 등이 그것이다. 서민문화가 발달 되었고, 내세 지향적인 종말신앙이 나왔으며, 농민전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드디어 1517년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는 것이다.

 

3) 종교개혁시대와 근대교회(1600~1900)

 

1517년 마르틴 루터의 개혁선언을 기점으로 개신교회가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분리하였으며, sola scriptura의 원리 하에 신학 전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신학 체계가 수립되었다. 특히 sola fidesola gratia의 원리 하에 구원론이 재편되었고, 성찬론의 차이는 개신교의 내분을 결과하여 루터파와 칼빈파로 분열되어 독특한 신학체계를 형성하였다.

 

17세기에는 양파(兩派)의 차별화를 위해 극단적인 교조주의를 추구하는 스콜라적 정통주의(Orthodoxy)가 극도로 개발되어 신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교리적 정통주의와 교리논쟁은 반동적인 경건주의(Pietism)를 발생시켰으며, 감성중심의 신앙체계는 한편으로 웨슬리주의와 같은 성화 중심의 부흥운동과 선교운동을 일으켰다. 다른 한편으로는 슐라이어마허를 중심으로 주관적 신학이 개발되었는데, 이는 반()기독교적인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 사상과 연결되어 자유주의(Liberalism)를 야기하였다.

4) 현대교회(1900~현재)

 

과학의 발달과 세속화로 인한 서구의 비()기독교화는 자유주의 신학을 크게 고무하였으며, 이는 세계 교회에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고자 유럽에서는 신정통주의(Neo-orthodoxy), 영미에서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 운동이 일어나 구()자유주의를 몰락시켰다. 그러나 이 양대 신학 간의 내분으로 교회가 분열되고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교회일치 운동들이 일어났고 신학적으로는 복음주의(Evangelicalism) 운동이 확산되었다.

 

한편 신정통주의에서 파생한 실존주의 신학은 신자유주의를 야기하였으며, 사신신학, 세속화신학, 과정신학, 포스트모던신학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또한 현대 산업사회의 비인간화와 사회적 불의는 정치신학을 발생시켰고 이는 다양한 형태의 해방신학을 결과하였다. 세속화로 인한 비관론은 재림주의를 야기하여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가 크게 확산되었으며 은사 운동으로 성령론에 대한 재조명이 시도되었다.

 

5) 한국교회의 신학

 

1885년 미국으로부터 기독교가 도래한 이후 초기에는 주로 경건주의적인 선교사들에 의해 신학이 전수되었으나, 점차 한국 신학자들이 발생하면서 다양한 신학들이 수입되었고, 신학적 갈등과 함께 교회가 분열되었고, 결국 진보와 보수라는 양극화현상이 정착되었으며 중도통합적인 복음주의는 아직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근본주의<교의신학> 7권을 저술한 총신의 박형룡이 대표적이며, 보수적인 장로교신학이 모두 여기 속한다. 이에 반대하여 한신의 김재준이 동정녀탄생이나 성경무오설과 같은 전통적 기독교신앙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한국의 자유주의를 태동시켰다. 중도적인 신정통주의는 한신의 박봉랑, 장신의 이종성 등에 의해 도입되었다.

 

한국의 독재 상황에 해방신학을 접목한 민중신학은 서남동, 안병무, 현영학 등에 의해 개발되었고, 종교다원주의는 감신(감리교신학대학)의 변선환, 한신(한국신학대학)의 김경재, 연신(연세신학대학)의 유동식에 의해 주도되었다. 몰트만의 신학은 < 기독교 조직신학 >을 저술한 연신의 김균진에 의해 도입되었고, 화란신학은 총신의 차영배와 <개혁교의학>을 저술한 고신의 유해무 등에 의해 소개되었다. 토착화신학은 감신의 윤성범, 연신의 김광식에 의해 시도되었다. 여성신학은 이대(이화여대)의 이우정과 손승희가 대표적이다.

 

출처 :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
글쓴이 : 오직 성경으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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