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계약사적 창조사
(Die bundesgeschichtliche Schöpfungsgeschichte für K. Barth)
출처: 김재진의 케리그마 신학연구원(http://www.kerygma.or.kr)
칼 바르트(Karl Barth, 1968-86) 신학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계약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이 갖고 있는 계약신학적 특징은, 그가 <<창조>>와 <<계약>>을 결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교회 교의학 § 41의 표제를 “창조와 계약”(44ff.)1) 이라고 붙이고, § 41,2의 부제를 “계약의 외적 근거로서의 창조”(103ff.)라 하였으며, 그리고 § 41.3의 부제를 “창조의 내적 근거로서의 계약”(258ff.)이라고 하였다.
베르쿠버(G. C. Berkouwer)2)도 바르트 신학의 독특성을 계약신학으로 특징짓고 있다. 그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약과 화해의 예증(Praefiguration)”3)이라고 말한다. 프렌터(R. Prenter)4)도 바르트의 창조론을 “창조와 구원의 통일”5)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들은, <<계약과 창조>>, 그리고 <<창조사(創造史와) 계약사(契約史) 내지는 구원사(救援史)>>가 바르트에게 있어서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몰트만(J. Moltmann)은 바르트의 두 번째 명제를 -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계약이 창조의 내적 근거> - 즉각적으로 수정하기 원한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6) 창조와 계약을 종말론적 그리고 목적론적으로 해석한다. 그는 “역사적 계약이, 바르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창조의 내적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 ‘영광의 나라 (Reich der Herrlichkeit)‘가 (창조의 내적 근거: 역자 삽입)이다. 왜냐하면 이 영광의 나라가 ... 역사적 계약의 내적 근거이기 때문이다”7) 라고 말한다. 과연 몰트만이 반론을 제기하듯이 <<영광의 나라>>가 창조의 내적 근거가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바르트에 의해서 주장된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사에서 과연 배제되어 있는가?
몰트만의 수정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바르트의 중심주제는 무엇을 뜻하는가? 즉 “창조의 의도(意圖) 내지 의미는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역사의 처음과 중심과 마지막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역사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44) 라는 바르트의 말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기 위하여 우리는 제 1 장에서 제사문서 <P>(창 1,1-2,4a)의 창조사에 나타난 창조의 목표에 대하여, 제 2 장에서는 야웨스트 <J> 창조사(창 2,4b-25)에 나타난 인간 창조의 상태에 대하여, 그리고 제 3 장에서는 예수의 사건 속에서 성취된 계약사와 창조사의 관계에 대하여 논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끝으로 제 4 장에서는 바르트 창조신학이 갖고 있는 신학적 발단에 대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이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약은 창조사, 이스라엘과 야웨 하나님과의 계약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발단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사(和解史)의 내적 원리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를 통하여 우리는, 바르트가 구원사 (Heilsgeschichte)를 결코 진보적 발전사관의 전망이나, 헤겔식 변증법적 사관에서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1. “창조의 안식”은 제사문서 창조사(창 1,1-2,4a)의 목적
바르트에게 있어서 창조는 결코 창조에 관한 인간의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진술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창조는 아주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하나님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창조는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관계를 위한 일을 수행해 가시는 “사역의 연속 가운데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첫 번째 사역으로서”(44,ff.), 그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44)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창조는 역사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63). 따라서 창조는 “창조의 역사(Schöpfungsgeschichte)”(참고. 44-103)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 41,1을 “창조, 역사, 창조의 역사”로 표제를 붙이고 있다. 그는 창조에 관한 성서의 진술, 즉 창세기 1장과 2장을 이스라엘 족장에 관한 족보(Toledot, 창 5,1-31; 6,9-12; 10,1-32 등등)에 비유하여 “창조의 역사”로 해석한다. 그는 “‘창조사’를 학술적 전문용어인 족보(Toledot)라는 말로서 표현한다면, 제사문서, 즉 창세기 2,4이하는 바로 ‘하늘과 땅의 족보’이다. 즉 신적인 창조사역의 연속 속에 나타난 세계 전체의 족보를 나타내는 가계(家系)나무(Stammbaum)”(67)8)라고 해석한다. 그는 “창조사”는 더 나아가 구약성서의 계약사(Geschichte des Bundes)를 그 목적으로 삼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이 계약의 역사는, 창조 자체가 이 계약사의 시작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창조의 목적이다”(44).
그렇다면 어떠한 성서적 근거에 기인해서 바르트는 창조사가 계약사를 목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한 해명을 바르트는 우선 창세기 2장 1-3절에 있는 창조사의 제 일곱째 날에 관한 보고를 주석함으로서 제시한다. 그는 창세기 2장 1절의 הלכ 라는 단어를 끝이 아니라, 완성하심(Vollenden)으로 해석한다. 즉 “끝, 곧 행위의 마지막 행동이 아니라, 이 마지막 행동에 즉각적으로 뒤따르는 그리고 이 (창조의) 행위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끝맺는다는 의미로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음(Nichtmehrtun)”(248)이다. 이 말의 뜻은 “그(하나님)는 이 창조 전체에 무엇을 더한다든지 아니면 보다 좋게하는 계속적인 사역을 거부하셨다”(249)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해석을 창세기 1장 31절에 나타나는 말: “그(하나님: 역자 주)가 만드신 모든 것, 그것은 참 좋았다”(249)로 보강한다. 그래서 그는 제 일곱째 날의 의미를 “신적인 완성 혹은 쉼”(248), 더 나아가 이 두 가지 의미의 결합으로 규정한다. 하나님께서 제 일곱째 날에 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은, 동시에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발동하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인간 역사의 주체가 되셨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이 사실을 요약한다: “사람들은 제 일곱째 날에 있었던 하나님의 행위를,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창조된 세계를 통치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스스로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으로, 그리고 그 세상을 통치하는 주권의 획득(Inaguration)으로 ...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249). 다시 말해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창조는 제 6 일에 끝난 것이 아니라, 제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신 것으로 온전히 창조의 목표에 이른 것이고,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은 동시에 성서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역사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는 모든 것의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 것이다.9)
그래서 바르트는 제 일곱 번째 창조의 날에 대한 성서적 전승에 다음과 같은 신학적 의미를 첨부한다:
“창조작업을 모두 수행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쉬신 것은 - 출애굽기 3장 17절에 병행하게 나타나듯이 - 숨을 들이쉬심(naphasch)의 개념과 아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출애굽기 23장 12절에서 바로 이러한 하나님께서 숨을 쉬시고 그리고 또한 당신의 종들과 그리고 이방인들과 함께 안식의 향연(mitfeirenden)을 가지신 것이 기술되어진 것은 참으로 옳은 것이다”(250).
계속해서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과 함께 향연을 베푸셨다”는 성서의 진술이 뜻하는 바를 하나님 의지의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함께 공존하시길 원하셨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은, 당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제 일곱째 날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 그의 피조물과 함께 상호공존(Koexistenz)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설정하셨다”(244). 이러한 하나님과 피조물의 상호공존 사상은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그의 신학적 출발점이다. 그는 이 공존 사상을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피조물의 존재의미를 해석하는 신학적 발단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를 다음과 같이 규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저 문장, 곧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뜻하는 바는, 이 피조세계 전체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현실성(Wirklichkeit)이라는 것이다. 이 문장이 또한 뜻하는 바는, 부정적인 면에서는, 하나님께서 홀로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고, 긍정적인 면에서는, 하나님 앞에, 옆에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한 다른 존재가 실존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하나님의 본질에서 구별된 존재, 그 자체 안에 여러면에서 차이를 가진 존재가, 그러나 언제든지 하나님의 본질에 대면하여 있는 고유한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3).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창조가 하나님과 피조물의 상호공존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바르트는 “하나님의 세계 내재(die Welt immanenz Gottes)”(244)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는 창세기 2장 3절, 곧 제 일곱째 날의 의미를 “하나님의 세계 내재”적 의미로 해석한다. 즉 일곱째 날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안식일을 설정하여 놓으시고 강림하시사 인간과 함께 안식의 향연(饗宴)을 가지셨다는 것이다(참고. 254). 바르트가 창조의 제 일곱째 날의 의미를 “하나님의 세계 내재”로 해석하는 것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계발적인 결론이 나온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창조사의 제 일곱째 날은 “창조의 안식”, 즉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과 결합을 위한 공동체의 날(der Tag der Gemeinschaft)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제 바르트는 “창조의 안식일”에 일어난 “하나님의 세계 내재”, 즉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가지시는 결합(Gemeinschaft Gottes mit dem Menschen)을 “하나님 자신과 인간 사이에 맺은 계약의 의미 및 의도”(247)로 해석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창조의 목적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계약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다. 계약은 창조의 목적이다. 창조는 계약으로 가는 길이다”(106). 이러한 바르트의 진술에 대하여 오블라우(G. Oblau)9) 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덧붙인다: “안식의 시간은 바르트의 신학에 있어서 계약의 시간이다.”10) 그렇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창조의 제 일곱째 날이 갖는 신학적 의미는 단지 창조의 날들 중 마지막 날이 아니다. 이 일곱째 날이 갖고 있는 의미는 바로 이 날에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이 이루어졌다는 데에 있다.11)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는 제 일곱째 날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 곧 계약을 실제적인 내적 전제로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는 외형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 곧 <<계약>>에 기인하고 ... 그리고 외형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이 창조를 뒤따르는 역사의 전제이다. 그리고 (창조는: 역자 첨부) 이 창조의 역사를 내적으로 지속시켜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사(關係史) 곧 계약사의 전제이다 - 즉 창조는 계약에로 가는 길이요, 매개체(Mittel)이다”(259).
결론적으로 창세기의 제사문서 <P>의 창조기사에 나타나는 제 일곱째 날이 갖는 의미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공동체, 곧 연합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창조의 목적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 및 연합은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총괄적인 의미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을 뜻한다. 따라서 계약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 창조 사역의 목적일 뿐아니라, 창조사 곧 창조역사의 내용적 원리(das materiale Prinzip)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는 구약신학의 계약이라는 단어 berith의 의미를 독일어 번역 “Bund”12)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과 하나님의 결합 및 연합을 계약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구약성서의 계약사로 들어가는 문턱으로서의 야웨스트 창조사(창 2,4b-25)
바르트가 제사문서 <P>의 창조기사(창 1,1-2,4a)에서 창조를 “피조물에 대하여 하나님이 갖고 계신 사랑의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한 전제로”(105) 나타내고 있는 반면에, 야웨스트 <J>의 창조사에 대한 해석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하나님 주권의 계시, 곧 그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존재의 의미와 필연성을 주신 계시”(260) 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창조기사를 창조의 안식일, 곧 제 일곱째 날이 갖는 의미(참고. 창 2,1-3)로 묶고 있다. 그래서 그는 창조의 안식일, 곧 제 일곱째 날을 한편으로는 제사문서 <p> 창조사의 목적으로 보고,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야웨스트 <J> 창조사의 시작으로 본다. 그리고 또한 동시에 이 창조의 안식일을 이 두번째 창조기사와 더불어 시작된, 혹은 그 뒤를 즉각적으로 잇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계약사의 시작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바르트는 어떻게 이러한 해석에 이르는가? 어떠한 성서적 근거에서 창조의 안식이 제사문서적 창조사의 목적이며, 동시에 야웨스트적 창조사, 더 나아가 구약성서적 계약사의 시작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바르트는 제사문서 <P> 창조사에 있는 제 일곱째 날이 야웨스트 창조사 <J>와의 연관성을 해명함으로서 답변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제 일곱째 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것은 창조에 연이어 계속 되어지는 계약사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안식일의 제정” 내지는 자신과의 공동의 축제를 위한 “인간의 초대”를 “창조사에 뒤따르는 구약성서의 계약사 그리고 구원사의 근거설정 내지는 준비”(255f.)로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한다: “그렇다. 계약사는 참으로 창조의 한 주간 중 제 일곱째 날의 사건 속에 정초되어졌다. 그렇게 계약사는 이날에 은밀하게 시작된 것이다”(245).
계약사의 창조사적 근거 위에서 혹은 창조사의 계약사적 전망에서 바르트는 이제 창세기 2장 18-25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에 따른 인간의 창조, 곧 남자와 여자의 창조에 대하여 주목한다. 그는 인간의 창조, 곧 남자와 여자의 창조에 대한 보고로 제 2 창조기사가 - 야웨스트의 창조기사 - 끝나고 있음을 주지시킨다(참고. 329). 다시 말해서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창조는 야웨스트 <J> 창조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지막 행위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바르트는 창조의 목적, 곧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체 내지는 계약으로 두 창조사를 연결시킨다. 더 자세히 말하면 제사문서적 <P> 창조사의 목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마지막 행위, 곧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의 향연과, 야웨스트 <J> 문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행위, 곧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창조를 근거로 하여 두 창조기사를 유형론적으로(typologisch) 결합한다. 그래서 그는 창세기 2장 18-25절을 제사문서적 <P> 창조기사 속에 있는 창세기 1장 27절과 관련시킨다. 그런 다음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창조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시작된 계약사의 첫번째 행동”(246) 으로 해석한다. 더 나아가 그는 인간창조를 “전역사(前歷史)적 창조사에서 역사의 계약사로 넘어가는 이행(den Übergang von der praehistorischen Schöpfungsgeschichte zur historischen Bundesgeschichte)”(329)으로 특징 짓는다. 이러한 계약사적 전제 때문에,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의 창조 이후로 계속 되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도 자신이 친히 이 인간과 계약관계를 맺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관성 속에서 바르트는 야웨스트 <J> 창조사에 나타난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창조를 하나님의 마지막 행위로 보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계약관계로 나타낸다. 바르트 자신의 말을 빌리면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창조는 아직 기초 놓아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미 체결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noch nicht begründet, aber schon beschlossene Bund)이었다. 그 계약 안에서 하나님은 주님이 되시길 원하셨고, 그리고 인간과 관계를 맺기 원하셨다”(331).
이제 바르트는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창조가 계약관계 내지는 둘이 하나가 되는 결합(Bund)으로서의 계약임을 창세기 2장 25절을 주석함으로서 확정한다. 그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창세기 2장 25절: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에 근거해서 “파트너 관계(Partnerschaft)” 혹은 “계약관계(Bundespartnerschaft)”로 규정한다. 바르트가 창세기 2장 25절을 “파트너 관계” 혹은 “계약관계”로 보는데는 그 이유가 있다. 그는 우선 “파트너”란 단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파트너”란 “자신에게 상대자로 있으면서 돕는자라는 개념을 아주 짧게 바꾸어 쓴것” (331) 이라고 설명한다. 즉 “파트너”라는 개념은 창세기 2 장 18 절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돕는 배필” 이라는 개념이 변형된 표현이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계약관계”라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마음으로든, 肉으로든 혹은 靈으로든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시인으로 하여금 저 사랑의 노래를 짓도록 한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이라고 한다, 즉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계약이라는 것 이외는 다른 그 어느 것에 비길 데 없을 것이다. 즉 男 女의 관계는 주저함 없이 서로가 원하고 그리고 수행된 하나됨 (Vereinigung)을 뜻하는 것이다.” (358)13) 이러한 근거에서 바르트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파트너 관계” 혹은 “계약관계”로 특징 짓고 있다. 그리고 야웨스트 <J> 창조 기사가, 바로 이 “파트너 관계” 혹은 “계약관계”의 창조로 끝나고 있다는 점에 근거해서, 그는 야웨스트 창조사의 目的을 역시 契約으로 굳히고 있다. 그래서 그는 창세기 2 장을 다음과 같이 이해 한다: “창세기 2 장은 체결되었고, 파기될 수 없이 낙인 찍혀진 계약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 2 장은, 사랑 노래의 고조 속에서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하여 목적한 바를 맨 앞에 내어놓고 있는 것이다. 무엇 보다도 이 계약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359) 이러한 의미에서 야웨스트의 창조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약의 파트너로 인간을 규정하고, 부르시는 은혜의 계약을 기초하고, 전개하고 그리고 두루 관철 시키기 위한 하나님 자신의 행위이다.” (46)
바르트는 야웨스트의 창조사와 구약성서의 계약사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 “Jahve-Elohim”으로 보강 한다. 이 관계를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처음 부터 Jahve-Elohim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시고, 이 이름 아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그리고 그들의 주님으로 역사하신 하나님 이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창조의 완성 이후에 시작된 계약사에 더 가까이 접근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미 창조사에서 이러한 이름를 갖으셔야만 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창조사는 ... 계약사의 한 전제가 된다. 그렇다! 창조사는 구체적으로 보이는 역사의 모형 (Vorbild) 으로서 첫번째 계약사로 간주 되어지는 것이다.” (265)14)
이에 상응하게 바르트는 창세기 9,26; 사 37,16; 45,18 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과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이름이 서로 一致하고 있음을 主旨시킨다15).
지금까지의 分析과 熟考에 근거하여 바르트는 제사문서 <P> 창조사와 야웨스트 <J> 창조사의 연관성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결론 짓는다: “창조에 관한 두개의 진술은 창조사와 계약사를 포괄하고 있다. 즉 세계와 이스라엘의 건립을 포괄하고 있다.” (272)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두번째 창조사를 - 야웨스트의 <J> 창조사 - “계약사와 구원사의 문턱 (Schwelle der Bundes- und Heilsgeschichte)”(271) 이라고 특징 짓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이에 상응하게 그는 창조사에 대한 두개의 증언들 (창 1, 2 장)을 구약 성서 계약사의 前歷史로 해석한다. 바르트 자신의 말을 빌리면, “창조에 관한 두개의 증언은 최초 인간의 역사로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前歷史 (Vorgeschichte des Volks Israel)의 아주 통합적 요소이다.” (67)
이상의 사실에 근거하여 이제 우리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야웨스트 창조사와 계약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창조가 계약의 외적 근거였던 것 처럼, 바로 그렇게 계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였다. 창조가 계약의 형식이였듯이, 바로 그렇게 계약은 창조사의 內的 전제였다”(262).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다: 창조사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계약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을 바르트는 창조의 안식일이 갖고 있는 기독론적 그리고 종말론적 의미로 대신 한다.
III. 예수의 사건 속에 있는 계약사의 성취와 새로운 시작
바르트는 하나님께서 “인간 때문에 혹은 인간을 위하여 창조의 제 일곱째 날을 축복하셨으며, 사람이 축복을 받도록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250f.)고 말한다. 그리고 “그 날에 인간이 자유롭게 즐거워 하며, 축제를 갖도록 하셨으며, 하나님께서도 그 날에 친히 함께하시여, 쉬셨으며, 원기 회복 하셨다” (251) 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 역사적 영역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의해서 제정된 안식의 반복과 그에 상응하는 행위” (255) 를 인간들이 행할 것을 명령하고 계시다고 해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창조의 안식에 대한 의미와 하나님의 계명으로서의 안식일 계명을 (출 20,8-10; 신 5,14-15)16) 연관시킨다. 더 나아가 그는 “창조의 안식”과 “부활 주일”을 연결시킨다. 야웨스트 <J> 창조사 그리고 구약성서의 계약사가 시작하고 있는 “창조의 안식일”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역사가 시작되는 “부활 주일 (Ostersonntag)”을 類型論的으로 연결시킨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는 “창조의 안식일”에 있었던 “하나님의 쉬심” 내지는 “하나님과 인간의 하나됨”을 기독론적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해석 한다.
바르트는 “창조의 안식일”이 갖고 있는 기독론적 의미를 콜 부뤼게 (H. Fr. Kohlkbruegge)의 考察에로 되돌아 감으로서 설명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콜 부뤼케의 말을 인용한다: “제 일곱째 날에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태양을 마음에 들어 하였으며, 창조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의한 창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재건 (wiederherstellt) 하시고자 하셨다.”17) 그래서 바르트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신 날을 일 주일의 첫 날로 결정하고, 일 주일을 축제의 날로 시작 하였던 것은 의미있는 일이였다고 해석한다. 바르트는 초대교회의 “주님의 날” 준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장 오래된 기독교 공동체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전 16,2; 행 20,7 에 의하면, 일주일의 제 일곱째 날이 아니라, 첫번째 날을 축제일 (Feiertag)로 생각하였고, 또 그렇게 말했다. 뿐만 아니라 아주 분명하게 표현하면 Κυριακη ημερα (主님의 날)로 (계 1,10), 한 주일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항하여 이러한 눈에 띄는 혁명을 시도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창조의 질서를 혁명적으로 거역 하기 위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죄를 짓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순종으로 이 주님의 날을 지켰다. 왜냐하면 주님이 부활 하신 날은, 막 16,2; 마 28,1; 눅 24,1 에 의하면, 유대교 안식일 다음 날 이였으며, 주일의 첫 날 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창세기 2,3 절을 정확히 이해 하는 데 적용 될 수 있지 않을까?” (258)
이러한 해석에 덧 붙여서 그는 또 아래와 같이 강조한다: “가장 오래된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의 부활에서, 창조로 말미암아 기초된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이 성취 되었음을 인식했다. ... 그들은 예수의 부활에서, 창조사에 있는 제 일곱째 날의 의미가 곧 주님의 날임을 보았고, 또 인식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은 이제 단지 마지막 날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있어서는 첫번째 날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축제일로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 (57f.)
바르트는 이제 이 “주님의 날”을 히브리서 4,3.10.11 절18) 의 진술을 근거로 하여 세상 “마지막 날”과 연결시킨다. 그리고 동시에 이 “마지막 날”을 또다시 “창조의 안식일”과 <<안식>> 이란 의미에서 서로 연결 시킨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날”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마지막 날은 안식일이 될 것이다. 인간의 마지막 날은 인간에게 평안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평안은 하나님 자신의 평안과 함께 하는 (인간의) 평안이 될 것이고, 그 것은 (인간이) 바로 참되신 하나님의 자유와 축제와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다.” (246) 이러한 바르트의 “마지막 날”에 대한 해석은 앞에서 우리가 이미 숙고한 바와 같이 “창조의 안식일” 곧 창조의 제 일곱째 날의 의미와 상응한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르트는 “창조의 안식일”이 갖고 있는 의미, 곧 “하나님의 세계 내재”, “하나님과 인간의 하나됨”,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체적 안식” 등의 의미로 “창조의 날”과, “주님의 날” 그리고 세상 “마지막 날”을 계약이라는 동일한 전망을 갖고 유형론적으로 연관시키고 있다.
이상 바르트가 언급한 세 날: 즉 “창조의 안식일”, “주님의 날” 그리고 이 세상 마지막에 있을 “종말의 날”에 대한 언급으로 부터 다음과 같은 종합적인 결론이 나온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이 세 날은 “안식의 평안”이라는 의미에서 서로 일치 된다. 인간은 “창조의 안식일”에 평안의 안식에로 초대 되어진 것과 같이, “주님의 날”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로 그리고 하나님과의 공동의 축제에 초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은 또한 “마지막 날”에 하나님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19). 따라서 인간은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축제를 가지며, 활동적으로 살도록 허락 되었다.” (258) 그러기에 저 제사문서 창조사가 “창조의 안식”을 목적하고 있듯이, 그리고 야웨스트의 창조사가 남자와 여자의 계약, 곧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에, 이르는 길 이였듯이, 바로 그와 같이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사는 “주님의 날”을 겨냥하여 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약의 참된 목적과 성취는 ... 바로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으로서의 한 인격이신 예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387)
지금까지의 분석을 종합하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인식 할 수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창조의 안식일”은 “주님의 날”과 유비적으로 (analogisch) 그리고 유형적으로 (typologisch) 그 의미에 있어서 서로 상응 한다는 것이다. 즉 창조사와 계약사 - 화해사를 포함하여 - 사이에는 하나의 유형적인 유비 (typologische Analogie)가 있다. 그리고 각 역사는 그 역사의 끝에 “창조의 안식일” 과 “주님의 날” 그리고 “마지막 날”을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을 위한 축제의 날, 곧 계약의 날을 갖고 있다. 이 세 날 사이의 연관성을 도표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창조사 목적 (Bund) 의 미 연속성
창조사 <P> -----------> 창조의 안식 안식에 초대 <J> 창조사의 문턱
(창 1) 창조사의 수렴 (계약의 날) 쉼; 공동축제
창조사 목적 (Bund) 의 미 연 속 성
창조사 <J> 男, 女 창조 男, 女의 하나됨 -----(분리의역사)------->
(창 2) (파트너 형성) (부부공동체) 하나님,인간 (남,여) 계약사
이스라엘 목적 (Bund) 의 미 연 속 성
계약사 -------> 주님의 날 神, 人 하나됨 J.C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구약) terminus ad quem (교회공동체) 화해사의 시작
화해사 목적 (Bund) 의 미 연 속 성
(신약) -------> 마지막 날 紳,人의 영원한 합일 창조이전에 J.C 안에
terminus a quo (하나님의 나라 형성) 있었던 紳,人 공동체
이러한 도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세 날의 유비적 연관성 때문에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계약”을 “실제적인 계약으로서 ... 이스라엘 그리고 구약성서, 창조주, 피조물 ... 모두를 내포하고 있는 것” (387) 으로 특징 짓는다20).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갖고 있는 의도와 의미는 모든 신적 사역의 첫번째 의미로서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피조된 모든 사물의 처음으로서, 예수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이다.” (377) 그렇다면 여기서 또다시 문제가 제기 되어진다. 어떻게 이러한 역사적 모형이 가능하단 말인가? 어떻게 이러한 시대구분적 내지는 역사 유형론적 해석이 가능한가?
이에 대한 답변은, 바르트가 창조사를 역사 개념의 전망을 갖고 해석하는 데서 간접적으로 제시되어 진다. 왜냐하면 “성서의 창조사”는, 그에 의하면, “역사 이전의 역사 (praehistorische Geschichte)” (87)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가 아닌 역사 (nicht historische Geschichte)” (87) 는 아니다. 왜냐하면 창조사는 “아주 전적으로 다른 하나의 가능성” (90) 에 基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가능성이란, 창조사가 例示적이고 시적으로 기술된 역사 진술 (divina- torischen und dichtenden Geschichtssage”21) 로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에 의하면, 창조사는 “창조신화 혹은 창조설화 (Schöpfungsmythus)”(92) 가 아니다. 창조사는, “신화에 관한 진술과는 구별된, 역사 (Historie) 에 관한 순수한 진술 그 자체이다.” (98) 다른 말로 말해서 창조사는 그 자체 만으로 독립된 역사가 아니라, 창조 이후에 계속되어지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역사와 불가분리 관계되어 있다. 바르트 자신의 말로 바꾸어 말하면, “성서의 증언이 우리들에게 仲裁 해 주는 것은 단순히 은총의 계약 그 자체만을 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 보다도 먼저 다양한 문서들 속에 있는 <성서의> 제 증언들과 不可 分離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 가운데서 창조사를 얘기하고 있다.” (65) 그래서 “창조의 역사”는 이 역사의 구체적인 의도와 의미 그리고 목적인 계약사를 그 자체 안에 포괄하고 있다. 바르트는 강조한다: “창조는 그 자체상 화해나 구원은 아니지만, 화해와 구원을 그 내부에 포괄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러한 화해와 구원은 창조로 시작된 것이다.” (44) 결국 그에게 있어서 창조는 단지 “은총의 계약사을 위한 공간 설정 (die Erstellung des Raums für die Geschichte des Gnadenbundes.” (46) 이외에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IV. 창조사에 대한 기독론적 전망
바르트는 구약과 신약이 서로 不可分離의 유대 관계에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 紐帶 관계를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사로 묶고 있다. 그는 舊約의 歷史을, 한 하나님께서 특별히 한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 백성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오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신약의 역사는 이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人類로 확산된 것으로 본다. 더 나아가 그는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관계를 창조 신학에 까지 적용 시킴으로서 전 우주의 역사를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사로 특징 짓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제기 된다: 어떻게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 혹은 하나님과 온 인류의 실존적 세계사를 “역사 이전의 역사” 혹은 “원 역사”에 까지 소급시켜서 이해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두 가지 면에서 답변 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구속 신학에서 창조 신학에로의 조명이고,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化肉을 창조 신학의 전망에서 해석한 것이다.
1. 구속신학에서 창조신학으로
바르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고,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구속의 하나님을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분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 인식에 있어서는 창조주 하나님이 먼저가 아니라, 구속의 하나님이 먼저였다는 구약성서 신학의 연구 결과를 뒤 따른다. 그는 구약성서 신학적 연구 결과에 상응하게 - 유대 전승에 상응하게 -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계약의 주님으로 먼저 체험한 사실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 즉 창조주 성부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 전통적인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 삼위일체 하나님 - 동일한 계약의 意志를 갖고 계신 분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서 바르트는 세상 만 백성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를 선택하시어,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唯一하신 하나님으로서, 온 인류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시어 (Ich will euer Gott sein, Ihr sollt mein Volk sein) “인간과 함께 하시는 분 (Immanuel! Gott mit uns)”으로 보았다.
따라서 바르트는 그의 창조론에서 創造史를 하나님과 이스라엘 내지는 온 인류와의 契約史보다 優位에 놓거나, 前提로 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계약을, 창조사를 이끌고 가는 “내적인 원리”로 보았다. 그는 未知의 역사로 부터, 즉 창조사로 부터, 이스라엘 계약사나 구속사를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실존적 삶의 상황 속에서 일어난 계약사로 부터 “역사 이전의 창조사”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는 계약을 實在論적으로22) 이해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르트의 神認識23)에 의하면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결코 창조의 하나님 보다 뒤에 계신 분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계약의 하나님 혹은 구속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 보다 시간적으로 나중에 계신 분이 아니듯이, 계약은 창조 보다 나중에 체결된 것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계약은 實在論的으로 창조에 우선한다. 바르트 자신의 말을 빌리면: “창조는 계약의 외적 근거”이고, “계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이다.
결론적으로 종합하면, 바르트는 유대교 전통 속에서 인식되어진 하나님 이해 순서를 - 곧 구속과 계약의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 - 자신의 창조론에 적용하였다. 그래서 그는 창조주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동일한 분으로 봄으로서 창조사를 계약사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 인식의 순서에 상응하게 계약을 實在論的으로 이해 함으로서 “계약을 창조의 내적 근거”로 규정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창조, 타락, 화해 내지는 구속의 변증법적 역사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창조의 완성으로 보는 기독론적 계약사로 전개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바르트는 자신의 창조론에서 온 우주의 창조사를 구약성서의 계약사로 부터 기독론적 전망을 갖고 전개하고 있다.
2. 창조신학의 전망에서 본 예수의 화육
바르트는 그의 기독론 내지 화해론 (KD IV,1-4) 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이루어진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사건은 “깨어진 계약의 완성 (Die Erfüllung des gebrochenen Bundes)”24) 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化肉은 바로 창조 이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체결된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을 완성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25).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의 화육은 창조로 시작된 하나님의 의지를 곧 계약의지를 실현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바르트 자신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께서 그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인식은 피 할 수 없는 우선적인 인식이 될 것이다, 즉 바로 이것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간되심: 역자 주) 이미 창조 속에서 그리고 창조와 더불어 역사하였던 근원적인 하나님의 의지이다. 곧: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26) 이를 바꾸어 말하면 창조의 안식일에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의 안식 내지는 향연은 영원한 아들의 낮아짐 속에서 즉 “Immanuel! Gott mit uns” 에서 존재론적으로 성취되었고27), 창조의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갖으셨던 안식의 향연에 초대된 인간은 예수 곧 “인자의 높임”28) 으로 성취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를 새로운 피조물로 바르트는 規定 하고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은 이제 결고 看過되어서는 안된다, 즉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려하여 새 로 운 창조에 관하여 (갈 6,15; 고후 5,17),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새 로 운 인간에 관하여 (엡 4,24), 인간의 고양된 계속적인 삶에 관하여가 아니라, 분명 인간의 <<새로 태어남>> (요 3,3)에 관하여, 그렇다 분명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하여 (계 21,1; 베후 3,13)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다음 사실도 간과되어서도 안된다, 즉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첫 번째 아담의 형상이 완성된 것이라든지 혹은 고양된 형상으로서 찬양하지 않고, 예수 자신를 첫 번째 아담과의 예리한 대립 속에서 (<<첫 번째 사람은 땅에서 낳고, 두 번째 사람은 하늘로 부터 낳다>>) <<마 지 막>> 아담 (인간) 이라고 명명하고 있다.”29)
이러한 진술로 부터 분명해 진것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창조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 곧 하나님과 인간의 하나됨 혹은 공동체 형성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은 하나님과 인간의 하나됨 곧 계약의 완성, 창조의 제 일곱째 날에 (창조의 안식일) 하나님께서 갖기를 원하셨던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체 (Gemeinschaft)의 창조론적 완성이다. 왜냐하면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과 존재론적으로 함께하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Immanuel! Gott mit uns: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인간 창조의 궁극적인 목표요, 근원으로 간주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은 단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구약성서의 계약사에 나중에 추가 편입된 것이 아니라30), 오히려 창세 이전부터 결정된 하나님의 계약의 결단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의 최종적인 목표였다. 다시 말해서 모든 창조는 바로 이 인간 예수을 향하여 수렴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모든 창조의 정점이며, 목표이다31).
따라서 바르트는 Cur Deus homo? 에 대한 전통적 (herkömmliche) 답변으로서의 화해이론32)을 “계약의 완성”이라는 계약신학적-기독론적 화해론으로 대치한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한 아들 성자의 화육을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에 세우신 인간과의 계약을 완성하기 위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예수를 참 인간 곧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원하셨던 인간의 참되고 실제적인 모습으로 보기 때문이다33). 즉 예수는 피조된 참된 인간 본성을 인식할 수 있는 근원이다34).
지금까지 분석한 내용들을 고려하여 볼 때, 바르트의 계약신학적 창조사에는 “구속신학에서 창조신학으로” 라는 조직신학적 사고 전개 방향에 상반되는 또 하나의 사고 전개 방향이 있다. 그것은 “계약신학적 基督論 내지 和解論에서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인간되심 (Gottes Menschwerdung in Jesus Christus) 에서 - 계약 신학적 창조 신학으로” 가는 또 다른 국면이 있다.
결론적 종합하면 바르트의 創造史에는 두가지 局面 내지는 조직신학적 사고 전개 과정이 있다, 그 하나는 구약 성서신학적 연구 결과에 힘 입어 - 유대교 전승에 의하면 구속신학이 창조신학에 우선한다 - 이스라엘의 계약신학에서 창조 신학을 조명하는 것이다35). 그리고 다른 국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화해의 사건을 - 하나님과 인간의 하나됨 (Immanuel! Gott mit uns) - 창조 이전에 세워진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 곧 계약의 완성으로 보는 창조사의 기독론적 전망이다36). 전자가 구약성서의 계약사를 창조사로 소급 적용하는 실재론적인 국면이라면, 후자는 창조사에서 구약성서의 계약사를 거쳐 화해사에 이르는 인과론적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국면을 따라서 자기의 창조론을 전개하는 과정 속에서 바르트는 계약 (Bund), 곧 “창조의 안식일”, “주님의 날” 그리고 “세상 마지막 날”에 갖는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 (Gemeinschaft) 내지는 男, 女 하나됨 (Vereingung) 을, 신학적 중심 사상으로 삼고 있다.
3. 역사의 내용상의 원리로서의 계약
바르트에게 있어서 창조는 결코 종결된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전제로 한 역사이다. 즉 창조는 현재의 행위이며, 역사적 사건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창조사와 실역사로서의 구약성서 계약사는 예리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두 역사 속에는 언제든지 인간과 함께 하시고자 하는 (Immanuel! Gott mit uns) 한 분 하나님의 계약 의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를 시간의 차원에서 바꾸어 말하면, 역사 곧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수렴하고 (terminus ad quem),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부터 시간이 나온다 (terminus a quo) 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약은 “창조사”, “구약성서의 계약사” 그리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시작 된 화해사를 포함하는 전 “救援史 (Heils- geschichte)”의 내용상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창조사, 계약사, 이스라엘의 역사 그리고 구원사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먼저 “創造史”는, 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간 피조물을 계약의 파트너로 세우시는 歷史라 할 수 있다. 그의 말을 빌리면: “創造史에서 아무 도움도 빌리지 않고 온전히 홀로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창조된 피조물을 (인간을: 역자 주) 파트너로 세우셨다.” (85) “契約史”를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규정 한다: “하나님에 의해서 기초된 계약의 역사,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은혜계약의 역사는 - 하나님께서 이 은혜의 계약을 체결하시고, 두루 시행하시고, 그리고 그 은혜계약의 목적으로 이끄시고, 그리고 바로 그렇게 피조물의 영역에서 당신이 영원부터 자기 자신에게서 체결되고 결의된 것을 사실화 (wahrmacht) 하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63) 계속해서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말하자면, 樂園史 (Paradises- geschichte) 에서 지시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워진 계약의 문제를 전개하고 (entrollt) 있다.” (314) 그리고 구원사 (Heilsgeschichte) 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 한다: “구원사는 역사이다. 곧 고유한 역사 (eigentliche Geschichte) 이다. 그 역사 속에 모든 다른 역사가 내포되어 있는 그러한 역사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역자 주) 은혜의 계약은 바로 이 역사의 주제 (Thema) 이다. 그렇다 구원사는 분명 역사이다.” (64)
이러한 계약사적 역사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바르트에 의하면 세계 창조의 특별한 사건이자 범례 (Paradigma) 이다37). 즉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역사이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계약의 역사를 주관해 오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위해서 (pro nobis)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Immaneul! Gott mit uns)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은 역사의 내용사의 원리 (das materiale Prinzip der Geschichte) 라고 할 수 있다.
맺는말
바르트에게 있어서의 창조와 계약, 그리고 계약과 역사의 연관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본 논문의 연구 결과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契約은, 창조사에서 우선적인 목표였던 “창조의 안식”일에 갖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연합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존재론적 표현을 빌리면, 구약성서적 계약사의 목표였던 “주님의 날”에 갖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 곧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사, 곧 구원사 (Heilsgeschichte) 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세상 마지막 날”에 갖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도의 안식, 즉 구원사의 완성 (Vollendung) 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러한 의미을 고려해 볼 때에 바르트에게 있어서의 창조는 미카엘 벨커 (M. Welker)38) 가 해석하듯, 창조적 그리고 피조적 상호의존 관계 (Interdependenzve- rhältnisse)39) 로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見地에서, 몰트만이 제기한 바르트의 계약신학적 문제점, 즉 바르트가 역사적 계약을 창조의 내적 근거라고 말함으로써 창조의 종말론적 목표를 뜻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看過 했다는 비판, 그래서 오히려 “영광의 나라”가 역사적 계약의 내적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몰트만의 주장은, 바르트의 계약사적 창조사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몰트만이 이러한 비판의 근거로 제시하는 구 신교주의 전통인 “창조와 계약의 연관성”은 - 지금까지의 숙고 속에서 분명히 드러난 바와 같이 - 바르트에게서 더욱 근본적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舊 改新敎 신학의 전통으로 요한 콩게우스 (Johann Coccejus) 의 신학을 들고 있으며, 그의 신학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요한 콩게우스에게 있어서 창조는 단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역자 주) 계약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계약 곧 하나님의 창조 계약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미 선택론에서 요한 콩게우스의 계약사상을 수용하면서 이를 창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은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 (Ratschluss)”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약 수립”으로 소급시키고 있다.40) 그 곳에서 바르트는 모든 하나님의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결의”, 혹은 “결단”에 기인하고 있는 것으로 그의 선택론을 (KD II,2) 전개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그는 섭리론 (KD III,3) 에서 로마서 11 장 36 절: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근거로 아주 짤막하게 창조 보전을 (Enthatlung)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셨기에 보전하시고, 또한 유지시키신다. 그러므로 이 역사는 일어날 수 있고, 그러기에 피조물은 공간, 기간 그리고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41)
따라서 우리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계약사”에서 결코 빠져 있지 않음을 인식 할 수 있다.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결의”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끌어 가시고자 하는 영원하고 불변한 목표인 “하나님의 나라”을 豫定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결의 하신 일을 이 땅에서 실현시켜 가는 과정에 있다는 의미에서 소위 “creatio continua (계속적인 창조)”의 개념이 거부되지 않기 때문이다. 몰트만의 바르트 비판에 대한 답변의 一環으로서 숙고한 이 논문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要約으로 끝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창세 이전에 영원한 아들을 통하여 맺어진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救援해 가시는 歷史의 重心이요, 내용상의 原理이다.
[출처] 바르트의 계햑사적 창조사|작성자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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