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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신학과 기독교 철학

하나님아들 2018. 10. 16. 18:58

철학적 신학과 기독교 철학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총신대학교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호에 이 글을 실을 수 있도록 청탁을 해 준 후배 학우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은 기독교 철학을 말할 때 아주 자연스럽게 화란 개혁파 신학적 전제를 가지고 발전된 화란의 기독교 철학과 그런 전통에 서서 미국에서 이를 발전시키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이런 전통에 의하면, 기독교 철학은 창조, 타락, 구속, 극치의 기본적인 기독교 세계관적 틀을 가지고서 철학적 작업을 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작업을 하는데 관심을 지닌 이들로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학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의 간접적으로 영향받으면서 화란에서 발전해 온 도여베르트,볼렌호벤 등의 철학적 작업과 이를 더 발전시켜 보려는 이들(소위 도여베르티안들), 그리고 좀더 신학적 관심을 가지고서 기독교의 실재론, 인식론, 가치론을 세우고 이에 근거해서 변증학적인 작업을 하는데 관심을 지닌 반틸을 따르는 이들(반틸리안들)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넓은 의미의 기독교 철학에는 이와는 다른 관심을 가지고 좀 다른 과제에 관심하는 이들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은총의 이원론적 구조를 가지고서 기독교 철학을 하는 토미즘과 네오토미즘의 로마 가톨릭적 철학(짜끄 마리땡이나 에띠엔 질송, 또 들자면 코플스톤 등의 노력)이 있고, 이런 입장에의 철학과 깊이 연관지으면서 발전해 온 소위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의 전통이 있습니다. 이런 입장과 연관되어서 영국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성장한 것이 버틀러 감독이나 팔리 등에 의한 알미니안적 변증학의 발전입니다. 이는 개신교적 형태의 자연 신학의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먼저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중립적 상호 인정의 토대를 수립해 놓고서, 그 후에야 기독교적 독특성에로 논의해 가려고 한다는 점에서 접근 방법 자체가 알미니안적입니다.(적어도 반틸은 그렇게 판단합니다.) 아마 이런 노력의 현대적 대변인들은 케이뜨 워드나 리쳐드 스윈번 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과거의 개신교 변증가들 중 일부는 바로 이런 방법으로 변증을 시도한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벤쟈민 월필드, 챨스 핫지 등과 그들을 따르는 구 프린스톤의 변증가들, 그리고 현대에는 스프라울 등의 리고니어 밸리 팀이 그런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상식 철학(common sense philosophy)의 큰 영향을 받은 이들은 신학에서는 개혁신학을 견지하면서 변증 방법에서는 알미니안적 방법을 견지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보다 좀더 철학적으로 작업하는 이들로 칼빈 대학 출신의 일련의 철학자들인 알빈 플란팅가, 월터스토르프,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작업하여 소위 개혁파 인식론의 주장자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대개 자타가 종교철학(philosophy of religion)을 한다고 하거나, 때로는 철학적 신학(philosophical theology)을 한다고 언급되기도 합니다.

이에 비해서 반틸과 그를 따르는 소위 전제주의자들은(presuppositionalists) 우리의 변증 작업도 이미 분명한 전제를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작업할 것을 요구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기독교 철학의 과제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하는 기독교 철학은 기독교 일반의 철학이 아닐 것이고, 그야말로 개혁파적 기독교 철학, 즉 philosophia reformata이어야 할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영원에 대한 폴 헬름의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조직신학자들이 그에 기대서 단순히 논의하고 지나갈 수 있는 논리적 전지 작업을 훌륭히 해 준 작업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마치 칼빈이 자신의 로마서 주석이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논리적 설명은 기독교 강요에서 시도하고, 주석에서는 본문의 의미만을 밝히는 작업을 하여 간단 명료하게 진술하는 일을 가능하게 한 것처럼, 진정한 개혁파 철학자들의 훌륭한 작업은 조직신학자들이 그들의 조직신학을 할 때 일일이 다 설명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그런 배경적 논의로 지면을 다 할애해 버리지 않도록 개별적 개념들에 대한 전문적 철학적 논의를 미리 (그러나 개혁 신학적 전제를 가지고서) 하여, 그 열매를 가지고 신학자들이 명료하고 분명하고 깨끗하게(crisp) 신학적 논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며, 이와 같이 다른 모든 학문의 개념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는 다른 모든 학문들을 종합하는 작업도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네가 추구하는 기독교 철학의 과제 중의 하나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개혁파 기독교 철학자들을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디에 찾아 볼 수 있을까요?

적어도 과거의 우리들의 선배들 가운데서 반틸은 그런 작업의 필요성과 방법을 선구적으로 잘 제시했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반틸적 전제에 충실하면서 철학적 작업을 하시는 분들과 같은 반틸적 전제를 가지고서 신학적 작업을 하시는 분들, 즉 개혁파 철학자들과 개혁파 신학자들의 상호 존중적 협동을 기대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개혁 신학적 토양에서 자라나서 그런 토양에서 연구하고, 가르치고, 공부하는 이들은 철저한 개혁신학자이고, 철저한 개혁파 철학자이기를, 그리고 그들은 각기 다른 작업을 해도 결국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인도해 가는 이들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