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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르트 리바이벌 / 박영돈목사

하나님아들 2018. 8. 13. 00:00

바르트 리바이벌

 

 

최근 들어 한국교계에 바르트 리바이벌이라도 일어난 듯 바르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바르트의 교의학 전집이 차례로 번역되어 나옴에 이어서 이번에는 바르트 전기가 출간되어 화제가 되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보수교계에서 위험한 학설로 금기시되었던 바르트 신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흥미를 유발시키고 있다. 이는 그동안 한국에서 푸대접받아온 바르트를 새롭게 조명하고 평가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단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트의 신학을 옹호하는 이들이 한 맺힌 원성을 발하듯이, 바르트에 대한 왜곡과 편견이 한국 보수교회에 만연한 것은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통교리를 굳게 보수하려는 사람일수록 이질적인 견해를 비평함에 있어서도 최대한 공정성을 기하는 신학함의 정통도 굳게 지켜야 한다. 바르트를 무조건 배격하는 것이 정통보수의 상징이 아니다. 바르트 신학에 나타나는 몇몇 극단적인 경향과 개념을 꼬투리 잡아 그를 자유주의자로 섣불리 매도하는 미숙한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그의 입장이 아무리 우리와 다를지라도 편견 없이 정당하게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이 신학함의 기본자세이다. 바르트의 신학도 그 시대의 산물이니 어떤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어떤 관심과 어떤 대적과의 투쟁을 통해 빚어진 신학인지를 파악해야한다. 로마서 주석을 발간하고 교회교의학 마지막 권을 저술하기까지 46년 동안에 걸친 그의 신학여정에 나타나는 사상의 변화와 발전을 신중하게 검토해야한다. 이런 복합적인 측면을 한데 아우르는 통전적인 시각에서 그의 신학을 진단해야 좀 더 온전하고 설득력 있는 비평이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보수신학자들이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20세기 최대의 신학자라고 하는 바르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는 현대신학과의 의미 있는 논쟁과 소통은 불가능하다. 20세기 후반부를 지배하는 현대신학의 거대한 흐름은 부분적으로 바르트 신학에 대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반응으로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르트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령론적 종말론의 맥락에서 삼위일체 신학을 발전시키려는 시도(몰트만), 바르트가 소홀히 한 보편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종말론적인 선취사역을 신학적으로 조명하려는 노력(판넨베르크), 세속의 영역과 창조 속의 하나님의 내재성에 착안한 세속신학, 창조신학, 생태학적인 신학 등의 출현은 바르트를 모르고는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보수신학이 급변하는 현대 상황에서 제기되는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대사상과 신학으로부터 받는 자극과 도전 앞에 자체점검과 발전을 위해 몸부림치지 않고 과거의 신학적인 산물만을 한 치의 수정함도 없이 답습하는 안일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머지않아 현대사회에서 신학적인 케토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바르트에 대한 최근의 관심이 고무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려스럽기도 하다. 바르트에 대한 왜곡된 비판은 바로잡아야겠지만, 그에 대한 무분별한 추종은 금물이다. 전에 나와 이 메일을 주고받았던 모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는 바르트의 신학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따르며 칼빈의 신학이 바르트에 의해 가장 잘 전수되었다고 주장한다. 바르트에게 서 나타나는 분명한 오류마저 성경말씀의 빛 가운데 점검하고 지적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르트 같은 천재적인 신학자에게 한번 푹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든 치명적인 함정이다. 그 신학이 논리적으로 정교하고 치밀하며 탁월할수록 지적인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힘은 막강해진다. 그래서 그 신학의 틀 속에 꼼짝없이 갇혀 그 신학이 안고 있는 문제를 성경말씀을 통해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판단력을 잃어버린다. 지적인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보다 월등한 지성의 소유자를 자신의 히로로 삼아 추종하려는 근성을 가진 것 같다. 이것이 지적으로 겸손하지 못한 자들이 범하는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겸손하게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말씀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은 바르트같이 탁월한 학자에 비해 신학적인 지식이 일천할지라도 성경의 빛 가운데 그 신학이 안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을 볼 수 있는 혜안을 갖게 되어 특정한 신학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바르트의 신학에는 명백한 성경진리에서 빗나간 부분이 많다. 성경관과 계시론은 차지하고라도 그의 걸작이라고 하는 화해론에서도 이런 오류가 여실히 드러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선택되고 의롭게 되며 거룩하게 되었다고까지 말한다. 칭의와 성화가 명분적으로는(de jure, by right)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적으로는(de facto, in fact) 신자들만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성경에 불신자가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말씀이나 암시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이런 이원론적인 개념은 판넨베르크 같은 현대 신학자도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였다. 바르트가 진리를 조직신학의 틀 속에 가두는 것에 그토록 반기를 들었으면서 자신은 자기만의 논리체계에 진리를 꿰맞추는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바르트의 신학은 자신도 인정했듯이 미완성된 작품, 특별히 성령론적으로 보완되어야 할 신학이다. 그는 생의 말년에 자신에게 신학을 한 번 더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의 신학을 성령론적으로 재조명하여 발전시키고 싶다고 하였다. 바르트는 자기 신학의 약점과 한계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르트가 못다 이룬 염원을 그에게 영감을 받은 그의 후예들이 이루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기독론에 편중되었던 바르트 신학 이후의 현대신학의 흐름은 성령론(종말론)적으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세계 신학계에서는 몇 십 년 전부터 이미 바르트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학적인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이제 바르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평가를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으니 이 점에서는 한국 신학이 많이 뒤진 셈이다.

바르트에 대한 두 극단적인 경향, 무조적인 배척과 무비판적인 추종에서 벗어나 좀 더 건강하고 냉철한 비판의식으로 바르트를 소화한다면 바르트의 신학이 보수신학에 위협이 되기보다 긍정적인 도전과 자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르트를 사이에 두고 보수와 진보가 첨예하게 대립하기보다 바르트를 채널로 보수와 진보가 서로의 발전을 위해 성숙한 신학적인 논쟁과 교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은 현대 신학사의 발전에 한 몫을 담당한 사상으로 평가하면 족하다. 모든 조직신학이 그렇듯이 바르트의 신학도 역시 미완성품이며 매우 불완전하게나마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 계시된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 즉 사인에 불과하다. 그 사인판이 아무리 화려하고 뛰어나 돋보일지라도 거기에 도취되어 그 사인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대상을 놓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나 같은 신학교수들은 바르트를 제대로 연구하여 신학생들과 목사들이 바르트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이해할 수 있게 도와야한다.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게 돌아가는 목회현장에서 뛰는 사역자들이 바르트를 읽고 소화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이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은 읽기가 어렵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아마 그들은 남다르게 지적으로 탁월한 이들인지 모른다. 나는 30년 전에 바르트 교회교의학 전집을 사서 그동안 읽어왔지만 아직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적잖다. 나도 현대신학과 철학을 상당히 읽은 사람이지만 바르트의 글은 읽기에 그렇게 수월하지가 않다. 계속 이어지는 복문으로 엮어진 그의 글을 읽고 이해해내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가 요한다. 결코 편하게 술술 읽어낼 수 없는 책이 아니다. 내가 가르치는 Th. M 과정의 현대신학 과목에서 바르트 교의학의 일부를 읽어보게 했는데 대부분의 목사들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바르트를 쉽게 독파할 수 있다는 이들은 참 대단한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주눅 들지 않게 자신의 잘남을 좀 감춰주었으면 좋겠다.

바르트의 교의학을 읽을 수 있는 시간과 능력이 있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만한 시간과 여력이 없어도 목회를 잘 하는데는 아무 지장 없으니 반드시 바르트를 읽어야만 한다는 부담은 떨쳐버리시라. 바르트의 신학을 말씀의 신학이라고도 하는데 그의 교의학을 읽다보면 정작 말씀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칼빈 신학교에서 내 논문을 지도한 안토니 후크마 교수는 바르트는 너무 말이 많다고 했는데 사실 그러하다. 그의 교의학 전집만을 읽는데도 엄청나게 시간이 많이 든다. 교회교의학을 5번 혹은 10번까지 읽은 교수가 있다니 참 놀랍다. 그의 신학을 전공하는 교수들은 그렇게까지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라면 짧은 인생의 그 많은 시간을 바르트를 이해하는데 몽땅 바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전적으로 목회를 한다면 바르트를 읽는데 많은 시간을 소진하느니보다 성경을 더 철저히 연구하며 그것을 위해 필요한 책들을 읽고, 성령의 임재와 능력으로 충만하기 위해 더 깊이 기도하며 교회와 교인들을 돌아보는 일에 그 시간을 보내고 싶다.

출처 :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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