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스크랩] 예수와 종말론

하나님아들 2012. 7. 25. 15:45

예수와 종말론

 

 

  1. 유대 묵시문학과 예수

 

  1) 묵시문학의 형성

 

  가. 유대 민족에게 있어서 자기들의 나라와 이 세계를 야훼가 직접 다스리게 되리라는 기대는 결코 공허한 환상일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희망의 근거는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겪었던 구체적인 경험이었다. 출애굽사건과 광야유랑의 긴 역정을 거치는 동안, 그들은 스스로를 계시하시며 그들의 역사에 간섭하여 섭리하시는 야훼의 활동을 감지하였다. 또 가나안에 정착하여 그 시대의 중근동세계의 열국들과 부딪히면서 역사의 주로서의 야훼신앙은 더욱 더 확고해 졌다. 이 신앙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인가는 이 땅위에 이루어져 그의 통치가 세계위에 편만하게 되리라는 희망이 싹텄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오랜 기간에 걸친 고난과 억압의 과정(왕국 분열, 외세의 침공, 남북왕조의 멸망 등)을 밟게 되자 종말론적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과거 이스라엘 역사상의 위대한 일들은 미래에 있을 종말의 시기(세상 끝 날)에 재현되리라는 묵시문학적 희망으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나.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희망은 이 세계와 역사가 일단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오는 새 기원을 전제로 하고 기대한다. 야훼의 통치가 역사속에서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은 탈역사화하여 초월적 실제로서 나타난다는 기대로 바뀌어졌다. 이처럼 종말론적, 초월적 희망이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구약성서 다니엘서에서라 할 수 있다. 발터 가스퍼는 야훼통치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종말론과 관련시켜 이렇게 말한다.
  "종말론적 희망이 표현되어 있는 성경의 기사는 장차 일어날 사건들의 사전보도가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오히려 어떤 괴로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의 의로와 희망의 말씀이다. 종말론적 및 묵시문학적 언명들은 현재 및 과거에 겪었던 구원 체험과 구원 희망을 완성이라는 양식을 빌어 다시 옮겨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결국 세상의 절대적 지배자로 당신을 실증하시라라는 신앙의 확신을 표출하는 것이다."

 

  2) 유대 묵시문학을 이어받은 예수

 

  가.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정경속에 포함되어 있는 다니엘서 외에 에녹서, 에스드라, 바룩의 묵시록, 여예언자들의 신탁, 모세승천기 등 많은 묵시문학적 문서들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는 그 시대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던 묵시사상을 받아 드려 종말론적 희망을 가졌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의 선교 초기부터 선포했던 메시지와 기적, 치병 등 그의 활동의 대주제는 하나님나라였는데, 이 나라는 결국 종말론적, 묵시문학적 우주상이 철저히 드러난다. 갑자기 도래하는 심판의 날, 세계의 종말, 그 때에 겪어야 할 대재난에(눅 17:26이하, 21:34이하) 대하여서 뿐 아니라 심판자로 오시는 인자(막 8:38, 13:24) 전 세계에 걸치는 큰 추수(막 4:26이하, 마 13:24이하), 하늘의 축제(마 8:11) 등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유대 묵시사상을 이어 받은 예수의 종말론의 원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현재의 질서는 하나의 커다란 혁명이요 변화인 종말을 향해 다가간다.
  ② 종말의 날에는 여러 가지 징조가 나타난다(천재지변, 천상적 존재의 나타남, 죽은 자의 부활 등)
  ③ 종말심판 : 심판주가(메시아) 임하여 인간을 심판하고 상(천국)과 벌(지옥)을 내린다
  ④ 새 세계, 새 질서 : 심판 후에 오게 되는 새 세상은 영원하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

 

  나. 그렇다면 예수의 종말론은 유대의 묵시문학 사상과 별로 다를 것이 없지 않는가? 라는 질문이 나온다. 이에 대하여 위는 예수의 종말론 속에는 새로운 사실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유대 묵시문학적 종말론에 새롭고도 결정적인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였
  
  다. 세계의 종말과 심판이 묵시문학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막연한 먼 장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제 곧 다가 온다는 것이다. 수천년동안 고대하던 결정적 순간이 예수 자신의 오심과 함께 눈 앞에 전개도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때가 다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막 1:14, 마 4:17, 10:7, 눅 10:9,11)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사실 많은 예언자들과 제왕들도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을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눅 10:23-24, 마 13:16-17)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눅 4:21) 등의 여러 말씀들은 바로 예수와 함께 도래해 오는 종말을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혁명적이고 당혹스런 예수의 주장, 즉 예수 자신이야말로 이미 있는 질서를 마감하고 새 질서,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실현시키는 하나의 전기라고 하는 가르침은, 당시의 유대인에게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걸림돌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심지어 가족들도 그를 정신이 약간 이상해지지 않았나 의심할 정도였다(막 3:21) 여기서 예수는 하나님나라와 종말의 임박성을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쉽게 가르치게 된다.

 

  2. 예수의 종말론

 

  1) 신국과 종말에 대한 예수의 해석

 

  가. 예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 13:1-9, 막 4:1-9, 눅 8:4-8),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겨자씨의 비유(마 13:31-32, 막 4:30-32, 눅 13:18-19), 누룩의 비유(마 13:33, 눅 13:20-21), 그물의 비유(마 13:47-51) 등을 통하여 세상 끝날에 임하게 될 하나님나라의 성격에 관하여 가르쳤다. 이같은 비유로 표현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가 사실은 적나라하게 지금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는 먼 훗날 초월적 세계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감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는 이 세상, 현존질서 속으로 은밀히 잠입해 들어와 사람들로서는 이 사실조차 알 길 없으므로 철저하게 그것은 비밀이다(막 4:11). 하나님 나라가 임해올 때 이 세상의 모든 현실이나 가치는 상대적인 것으로 제쳐 놓을 수 밖에 없다. 왜냐면 오직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만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이 세상에의 집착이냐 아니면 그 나라를 위한 결단이냐를 양자택일하도록 인간을 몰아간다.

 

  나. 예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살펴보면 그 나라가 지금 당장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다는 표현과, 미래에 오게 될 신국을 기다리고 요청해야 한다(주기도문의 "당신이 나라가 임하옵소서")는 언명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이런 상반된 예수의 표현 때문에 학자들은 예수의 종말론을 미래적 종말론(바이스, 슈바이처, 베르너) 실현된 종말론(C.H. 도드) 등으로 그 강조점을 달리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예수의 종말론은 현재와 미래에 모두 걸쳐있다. 따라서 퀴멀의 "긴장된 종말론", 쿨만의 "구속사적 종말론" 등처럼 현재와 미래 사이의 긴장을 강조하는 종말 이해가 더 예수의 종말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종말론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지금 도래하고 있기에 오늘의 시점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지만, 한편 이 나라는 미래를 거머쥐고 있는 이상 결단의 결과는 미래에 연결된다. "지금을 하나님의 현재요 구원의 시간으로 깨닫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미래가 구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현재, 자신의 과거, 그리고 미래에 대한 자신의 꿈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미래가 심판이다. 예수는 그 자신의 말씀과 행위를 통하여 오늘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미래에 완성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종말을 현재와 미래로 말할 때 우리는 이 두 진술을 분리시킬 수 없다. 예수에 있어서 현재는 심판과 구원으로서의 미래를 열어 가는 시각이다. 따라서 예수가 현재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고, 미래에 대해서 말함은 현재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미래는 현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하나님의 미래의 빛 아래 있는 결단의 시간이다.

 

  2) 예수 사건의 종말론적 성격

 

  가. 예수가 사용한 용어와 그의 가르침 및 행태를 살펴보면 예수 자신과 그의 사건 자체가 곧 종말과 하나님나라의 징표임을 그가 드러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스스로를 "인자"라고 자처함으로 다니엘서에 나타나는 종말의 "사람의 아들"과 동일시하고 있다. 고별설교(요 13:31-14:31)도 예수 스스로의 공적활동의 종말론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으며,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는 최후의 외침도 시편 22편을 빌어 종말론적 기원을 드린 것이다. 그것은 그의 절망적 외마디라기보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을 희망하는 기도의 처절한 표현이다.
  예수가 기적을 일으키고, 병자들을 치유하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소위 현재 지향적 활동 역시 종말이(따라서 하나님나라의 도래가) 오늘 여기서 이미 임했음을 믿고 그것을 나타내 보이는 상징적 행동이었다. 성전숙정(마 21:12-13, 눅 19:45-48, 요 2:13-22)도, 최후의 만찬(마 26:17-29, 막 14:12-26, 눅 22:7-23, 요 13:21-30)도 모두 행동으로 보인 종말의 상징이다. 한 마디로 종말과 하나님나라는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 묵시문학과 다른 예수의 종말론은 이처럼 예수 자신이 종말의 핵심에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는 그의 말씀과 행동으로써 오늘을 포착하고 이것을 이미 우주적 미래의 결단이 내려지는 현재로 삼는 것이다."

 

  나. 예수는 자기의 수난을 종말에 사람들에게 다가올 고통과 재난을 미리 보여주는 것으로 본다. 수난은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나라의 숨겨짐과 낮아짐의 징표요 증거였다. 여기에 고난의 종말론적 신비가 숨어 있다. 예수는 박해를 당하고 배척받은 예언자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고, 이사야의 예언에 나타나는 "고난받는 종"의 이미지는 물론, 묵시문학적 전승에서 보여지는 의로운 사람들의 고난에 대하여 깊이 통찰하였으리라. 예수에게 있어서 이러한 예언과 묵시문학적 표현들은 바로 예수 자신의 종말론적 형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섭리요 구약의 완성이며, 묵은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도래하는 신호였다.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과감하게 기성 옛 질서에 도전했던 그의 행위에서 결과된 것 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를 밝혀준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신의 통치가 세상의 현존질서의 핵심에서 실현된 사실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출처 : 주사랑
글쓴이 : 항공모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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