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 영!! 혼!! 육!!

[스크랩] 몸-영혼. 단일체로서의 인간

하나님아들 2018. 1. 28. 22:58

몸-영혼. 단일체로서의 인간 


인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인류 역사의 최초의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종교의 차이를 불문하고 인간이라면 반드시 가지게 되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인간이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론이었다. 일반 학문에서 뿐만 아니라 신학에서도 그것이 중심되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 대답에 대하여 현대의 신학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서적으로 맞지 않으며, 신학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견해라는 주장이 많이 나오고 있다. 성서는 인간의 구성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몸과 영혼은 각각 무엇이며, 서로의 관계는 어떠한가 하는데 대하여 신학적인 대답을 다시 찾아 보고자 한다.1) 


1. 전인(全人)으로서의 몸 

바르트(K. Barth)는 '몸의 부활(resurrection of the body)'이라는 신앙고백에서의 몸에 대하여 우리에게 주의를 환기시킨다. "'나는 몸의 부활을 믿는다.' 그런데 성경에서의 몸은 사람 자신을 가리킨다"2) 하고 말한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기독교의 희망은 몸의 부활인데, 여기서 몸은 영혼을 제외한 인간의 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영혼이든 몸이든 그것은 서로 구별될 수는 있으나 분리되지는 않으며 더욱이 독자적으로 실존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이다.

다알(M. E. Dahl)에 의하면 몸은 피상적으로는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인 것을 가리키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개인 또는 인격을 의미한다. 신령한 몸 또는 육의 몸 같은 용어들이 그런 경우이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몸'은 실제적으로 '인격'을 의미한다. . . 그가 '신령한 몸'을 이야기할 때, 그는 성령의 완전한 통제 아래 있는 인간의 인격을 의미하였다. 마찬가지로 '자연적 몸'은 동물적 영혼에 의해 움직여지고 피조적 연약성과 '육'의 악한 힘에 의해 영향받기 쉬운 인격을 의미한다.3)

그리이스인들이 자기의 몸을 어떤 다른 물건처럼 간주하였던 데 비해 셈족은 자기자신을 자기의 몸과 동일시하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차이를 간결히 말한다면 그리이스인들이 자기들은 쏘마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 비해,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쏘마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뜻으로 불트만(R. Bultmann)은 "인간은 쏘마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쏘마이다"4) 라고 말했다. 곧 몸은 인간 그 자체 또는 인격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몸이 헬라인들에게는 소유의 대상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인격 자체로 여겨졌는데, 이것이 성서의 사상인 것이다. 누가복음 24:39에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라는 말씀은 몸을 보고 인격을 안다는 뜻으로서 몸이 바로 인격이라는 의미이다.

성서에 사용되는 몸은 인간의 한 구성요소라기 보다는 인간 자신을 가리킨다. 영혼을 제외한 물질적인 부분을 가리키는 경우는 엄밀히 말해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레샤케(G. Greshake)는 몸의 온전한 의미는 영혼을 제외한 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체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는 바울서신의 쏘마가 신체성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보았다.5) 그에 의하면, 몸은 전체로서의 인간을 가리킨다. 몸은 인간의 물질적인 면을 주로 나타내지만 영혼을 배제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영혼을 포함한 전인(全人)의 대명사로 사용된 것이다. 


2. 몸 없는 영혼 개념의 오류 

바르트는 영혼을 몸과 별개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고, 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전인으로 이해했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영혼에 해당하는 단어인 '네페쉬(Nephesh)'가 몸과 결합되어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는 것을 주목한다. 구약은 영혼을 몸의 생명으로 정의하고 있고6), 그러므로 몸처럼 여러 가지 생리적인 현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7) 그에 의하면 네페쉬는 '루아흐(ruah)'처럼 숨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사람의 목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의미하며, 그것이 살아있는 존재를 죽은 자와 구별한다. 호흡이 있거나 회복되는 곳에 영혼이 있는데,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호흡이 일어나는 몸도 반드시 있다. 바르트는 숨을 단지 몸의 생명을 뜻하는 대표적이고 언어적인 부호로 이해한다. 숨이 있다는 것은 몸이 살아 있다는 단순한 의미라는 것이다. "네페쉬가 몸의 생명이므로, 영혼은 '그리워하고', '만족되고', '굶주리고', '채워질' 수가 있다(시107:9)"8) 하고 말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가 영혼의 욕구와 몸의 욕구가 같음을 말함으로서 영혼이 몸과 별개의 것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이해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약의 용어인 프쉬케(ψυχ?)는 구약의 영혼개념과 차이가 없으며, 더우기 그리이스적 개념은 조금도 없다. 그에 의하면 신약에서 프쉬케라는 용어는 특별히 사도행전에서 많이 등장하며 그것은 분명히 '생명' 곧 '개인적 생명'과 '개인'이라는 구약성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이외의 신약에서조차 영혼에 관한 그리이스적 개념9)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구절은 거의 없다.

라너(K. Rahner)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죽음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는다.10) 그러나 이것은 몸이 없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라너는 전통적인 몸-영혼 교리를 보완하고 있는데, 그것은 영혼은 몸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즉 몸이 붕괴되더라도 영혼은 소멸하지 않으나, 그 영혼은 질료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질료와 또 다른 적극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죽음 속에서 영혼이 몸과 이 세계를 모두 떠나고, 하나님과 함께 이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표상을 배격하는 것이다. 라너의 견해는 몸으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실존할 수 없으며, 죽음 속에서도 세계와 관련된 형태를 지닌 새로운 몸이 영혼에게 부여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수많은 카톨릭 신학자들의 공감을 얻었다고 포르그림러(H. Vorgrimler)는 평가한다.11)

몸이 인간의 영혼을 배제하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은 것처럼 영혼도 마찬가지다. 영혼은 주로 인간의 비물질적인 면을 가리키지만 몸을 배제하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몸을 포함한 전인의 대명사로 사용된 것이다. 히브리적 사고방식에는 몸과 영혼을 구분하여 각각을 다른 것과 분리하여 생각하고 서술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몸과 영혼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몸 없는 영혼의 존재가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는 배격되어야 한다는 것이 현대의 영향력 있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의 견해이다. 바르트는 몸 없는 영혼의 존재에 대하여 부정하면서, "몸 없이 하나님의 것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역이며 하나님을 은밀히 부정하는 것이다"12) 라고 주장하였다. 몸 없는 영혼만의 존재가 가능하다면 몸과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부정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바르트는 신구약성서가 영혼이 몸과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영혼은 개인의 특정한 생명이다. 그런 점에서 몸과 구별되어야 하지만, 몸으로부터 분리되지는 않는다.13) 몸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영혼만의 독자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혼을 소멸되지 않는 불멸적인 본질을 가진 것이라거나, 몸보다 더 우월한 부분으로 보는 것을 비성서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14)

영혼을 소멸되지 않는, 어쩌면 선재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어떤 경우에나 인간 실재의 불멸적 영적 본질로서, 더 낮고 죽을 부분인 몸과 비교할 때 더 높은 '부분'으로서, 몸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는 개념은 매우 비성서적이다.15)

그레샤케에 의하면, 고대 헬라의 영혼이해는 구약성서의 네페쉬 개념과 유사하다. 고대 헬라 곧 호머시대는 영혼을 인간의 '부분'이 아니고, 즉 몸과 구별되는 부분이 아니고, 오히려 영혼 없는 몸 자체가 인간의 그림자로서 죽음 후에 무덤 가까이에 또는 죽은 자의 세계에 생명과 힘, 빛, 희망, 미래가 없이 체재한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고대 헬라의 영혼 이해는 구약성서의 '네페쉬' 및 '스올' 개념과 별로 멀지 않다."16) 그리고 고대 헬라는 몸으로부터 분리된 영혼개념이 없었고 이것도 구약사상과 일맥상통한다.

터툴리안은 영혼이 '신체적'이며 '형체(effigiata)' 라는 것은 영혼의 정의에 속한다고 하였다.17) 그에 의하면, 하데스(음부)에서의 영혼도 몸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만, 나사로와 부자 비유에서처럼, 성서적 실상에 합한 것이 된다.18) 오리게네스는 영혼이 죽음 속에서 현세의 몸으로부터 분리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몸이 없는 것이 되지 않고 오히려 질적으로 더 세련되고 정화된 신체성을 얻는다고 하였다.19) 그는 나사로 비유에 관해서 언급하기를, 영혼도 죽음 안에서 몸의 상실 이후 아직 종말론적 부활 이전에, 자기의 스케마(σχ?μα)20)를 보존하며, 이런 의미에서 죽은 후에도 하나의 몸을 가진다고 하였다.21)

이러한 교부신학자들의 견해를 검토한 후 그레샤케는 영혼을 새롭게 이해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이해가 아니라, 고대 반영지주의 신학에서처럼 이해하자는 것이다. 

'영혼'(또는 영)은 구약성서와 고대사상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반영지주의신학(터툴리안)처럼 이해될 필요가 있다. 즉 인간의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축소된 생명력 안에 있는 (몸을 가진) 죽은 인간으로서 이해되어질 수 있다. 화법상의 특징이 이것에 상응한다. 산 인간의 '부분'으로서의 영혼을 표현하는 데에 주로 'animus' 또는 'mens'가 사용된다. 반면 죽은 자의 '영혼'은 'anima' 또는 'spiritus'로서 표현된다.22)

그에 의하면 영혼은 인간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라기 보다는 생명력이 축소된 전인을 가리킨다. 죽은 자의 영혼과 산 자의 영혼에 대한 표현이 다르다는 것은 죽은 자의 영혼이 산 자의 영혼에 무엇인가가 첨가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신체적인 무엇이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그레샤케는 몸 없는 영혼개념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단언한다. "몸의 완성을 기다리는 영혼의 중간상태가 있음을 주장하는 사람 중에 라찡어와 다른 비평가들이 있지만, 나로서는 몸 없는 영혼이라는 개념은 개념이 아니다."23) 판넨베르크는 몸과 영혼이 너무나 결합되어 있으므로 몸 없는 영혼만의 실존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24)

결국 우리가 영혼이라고 말할 때 이것을 몸과 대조되는 인간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면 잘못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영혼 안에 신체성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든지, 혹은 죽은 자의 영혼을 생명력이 축소된 인간으로 이해해야 온전한 이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몸 없는 영혼이 혼자 떠돌아 다닌다는 것은 성서적 사상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신체성을 가진 영혼이 전인(whole man)과 다른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곧 신체성을 가졌다는 것은 몸을 가졌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신체성을 가진 영혼이란 몸을 가진 영혼이고 이는 곧 온전한 인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도 영혼은 몸 없이는 실존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죽음 후에 만약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는 몸 없는 영혼이 아니라 몸이 있는 영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바로 전인이다. 죽음 후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말은 죽음 후에 전인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3. 몸-영혼 단일체로서의 인간 

로마 카톨릭의 라찡어(J. Ratzinger) 추기경에 의하면, 교부시대부터 '영혼'이라는 단어는 죽음을 넘어 파괴되지 않고 남는 인간의 자아(I)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는 영혼을 "자기의 몸과 분리된 인간의 계속적인 진정한 실체"라 하였다.25) 이 영혼이 죽음 이후에 존재한다는 것을 화란의 「교리문답서」(Dutch Catechism) 중에서 인용하여 소개하였다. 

우리 주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죽은 다음에도 남아 있을 수 있는 그야 말로 인간 불멸의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이 '그 무엇'이란 시체로 남을 몸은 아니다.26)

라찡어에 의하면, 초기교회는 죽음을 넘어 존재하는 불멸의 인간존재의 담지자를 영혼이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죽음 후에 인간의 몸은 시공간의 세계 속에 남아 있다. 그것은 부활하지 않고 무덤 속에 놓여있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죽은 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몸 없는 존재를 성경이 말하고 있는데, 그 존재가 바로 영혼이라는 것이다. 라찡어는 죽음이라는 상황에서 몸과 분리되는 영혼 개념을 끄집어 낸 것이다.

그러나 라찡어는 화란 새교리서를 아전인수격으로 인용하였다. 교리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바로 다음 문장에서 '그 무엇'이 몸과 전적으로 유리되어 있는 소위 영혼을 운위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순전히 무형적인 인간 영혼을 운위하는 것은 성경적 용법이 아니다."27) 성서는 죽음 후의 존재를 몸이 없는 존재라고 증거하지 않음을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몸이 있는 존재임을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죽은 자는 현세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다.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될 가능성을 라찡어는 깊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고대 초기 기독교변증가들과 반영지주의신학자들은 이분법적 인간이해보다는 통전적 인간론을 가지고 있었다. 위 저스틴(Pseudo-Justin)의 저서는 그에 대하여 전형적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인간이 몸과 영혼으로 구성된 이성적 생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영혼이 그 자체로 사람인가? 결코 아니다! 영혼은 사람의 영혼일 뿐이다. 몸이 인간이라고 불려지는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몸으로 불려질 뿐이다. 그렇다면 둘 중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인간이 아니고, 둘을 합한 것이 인간이라고 불려지고, 또 하나님이 인간을 생명과 부활에로 부르셨다면, 하나님은 하나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부르셨으며, 그리고 그것(전체)은 몸과 영혼으로 일컬어진다.28)

기독교신학은 플라톤의 영혼에 대한 견해를 단순히 수용하지는 않았다. 기독교신학은 이원론보다도 인간의 단일성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상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플라톤의 견해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종합함으로서 일단 종결되기에 이르렀다. 이 이론은 비엔나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312년 교회에서 수용되게 되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몸과 영혼의 결합체이다. 즉 인간은 서로 의존하고 있는 두가지 부분실체(Teilsubstanzen)의 결합체이다. 몸이나 영혼은 그 어느 것이나 자체로 존재하는 독자적인 것도 아니고, 단지 우연하게 일치를 이룬 것도 아니다. 영혼은 몸에 형체를 부여하는 형상이다. 몸은 정신-인격적인 영혼의 표현으로서, 몸을 통해서만 영혼은 비로소 자신의 구체적인 실재(實在, Wirklichkeit)에 이르게 된다. 형상(영혼)과 질료(몸)의 두 실체가 만나서 하나의 존재인 인간을 형성한다.29)

후크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인간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인간을 단일체 즉 전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30) 인간은 종종 서로 분리될 수 있는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래서 인간을 몸, 영혼, 영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삼분론과 또는 몸과 영혼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분론 등의 견해들이 있어 왔다. 이러한 견해들에 대하여 후크마는 성경이 정확한 과학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 또한 영혼, 영 등의 용어들은 다소간 서로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비판을 시도한다.31)

그는 우리가 삼분론을 거절해야 되는 이유는 첫째, 그것이 인간의 단일성을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 몸과 영혼 사이에 화해될 수 없는 대립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며, 셋째, 영과 영혼 사이에 뚜렷한 차이점을 말하기에는 성경이 아무런 근거도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32) 삼분론 보다 더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분론도 삼분론을 거절하는 마찬가지 이유로서 거절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특히 그것은 고대 헬라의 인간이해와 유사함을 지적했다.33) 후크마는 구약과 신약 속에 나타나는 인간의 구성에 관한 여러 가지 표현들을 조사 구명한 다음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인간은 단일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신체적인 측면과 정신적 혹은 영적 측면을 갖고 있으나 우리는 이 둘을 분리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몸을 갖는 영혼 혹은 영혼을 갖는 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상이한 부분들의 복합체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전체성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하며,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분명한 가르침이다.34)

그러나 후크마는 성경이 인간을 전체로서 보고 있지만, 인간이 신체적인 측면과 비신체적 측면의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두 측면성을 가장 잘 표현한 말로서 '영육통일체'를 주장하였다. 이 표현이 가지는 좋은 점은 인간의 단일성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두 측면을 바르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35)

한편 에릭손(M. J. Erickson)은 조건적 동일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인간의 영혼과 몸은 화학합성물(chemical compound)과 같이 단일한 인간을 형성한다는 이론이다. 이것은 원소들의 혼합물(a mixture of elements)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후자의 경우 각 원소는 각자의 독립된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만의 독특한 특성들을 보유하고 있다. 합성물의 경우, 이것들은 구성원소들과는 다른 특성을 지니게 된다. 마치 소금(NaCl)의 경우와 같다. 거기서는 나트륨이나 염소의 특성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론내린다. "우리는 인간을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으로 구성된 복합적 구조를 갖는 통일체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36)

로핑크(G. Lohfink)는 영혼과 몸으로서의 인간의 단일성을 극단적으로 표현하였는 바, 영혼과 몸을 사실상 한 인간에 대한 두 술어로 이해하였다. 그에 의하면, 몸과 영혼은 인간의 두 부분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유일한, 나눌 수 없는 실재(Wirklichkeit)의 두가지 서로 다른 양식(Weise)이다.37) 로핑크는 인간이 이 세상에 살 때 두가지 양식으로 실존한다고 보았다. 하나는 영혼으로서의 양식, 또 하나는 몸으로서의 양식이다. 그러니까 몸과 영혼은 한 실재의 두 양식인 것이지 두 가지 분리될 수 있는 구성요소가 아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의하여 분리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몸은 인간의 구성요소를 가리키기 보다는 존재양식을 가리킨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영광의 몸' 즉 하나님의 불멸의 영광(δ?ξα)38)에 상응하는 하나의 존재양식을 가진다. 이것은 '낮은 몸' 즉 지상의 인간에 속하는, 죽음에 넘겨지는 사멸될 존재양식과는 구별된다. 몸은 존재양식이지 물질적 요소를 가리키지 않으며, 육은 그 존재양식의 성격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영혼 및 영도 몸과 결합하여 사용될 때 그 존재양식의 성격을 가리킨다. 신령한 몸, 자연적 몸, 육의 몸 등이다. 그러므로 신령한 몸(σ?μα πνευματικ?ν)은 성령에 의해 결정된 부활된 몸이라고 이해해야 한다.39) 순수하게 물질적 요소에 해당하는 용어는 없다. 콘첼만(H. Conzelmann)도 고린도전서 15:42-44 주석에서 쏘마를 존재양식으로 보고 있다. 그는 바울이 쏘마를 다른 실체 곧 육이나 영과 같은 실체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양식으로 생각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양식-실체'(form-substance) 이론을 옹호하고 쏘마는 그 자체로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언제나 싸르크스(육)로서의 존재양식이거나 또는 독싸(영광)로서의 존재양식이다. 그것은 언제든지 천적이든지 지상적이다."40)

여기에 이르면 몸과 영혼은 더 이상 비교하여 우열을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몸과 영혼을 형상과 질료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에 유사하게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영혼이 몸보다 더 낫다는 어떤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열등한 것은 쏘마 프쉬콘(혼적 몸, σ?μα ψυχικ?ν)이고 프쉬코스(혼적인, ψυχικ??)는 거의 언제나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다.41) 곧 혼적 몸 또는 영혼의 몸이 - 이것이 자연적인 몸인데 - 신령한 몸 곧 영의 몸과 대조적으로 사용되었다. 거듭나기 전의 자연적인 몸의 상태는 영혼에 의해 지배되는 몸이라는 뜻이다. 이 상태는 죄의 영향력 안에 있는 상태이므로 부정적인 의미가 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몸과 영혼 가운데서 무엇이 더 열등하냐 하는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몸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죄의 영향 아래 있는 영혼으로 인하여 부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몸과 영혼은 서로 비교하여 우열을 논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몸과 영혼의 불가분리성으로부터 우리는 죽음자체가 전인적인 사건임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다알(M. E. Dahl)은 바울 및 나머지 성서 기자들이 죽음을 인간 본질의 두 부분의 분리로서 또는 개인의 한 부분의 다른 부분으로부터의 분리로서가 아니라 전인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보았다.42) 인간은 영혼이며 몸이고,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는 통합 속에 있다면 죽음은 전인적으로 임할 수밖에 없다. 로핑크의 말과 같이 "죽음이 몸에만 임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죽음의 현실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43) 몸만 죽임을 당하고 영혼은 해를 입지 않는다면, 죽음은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오스카 쿨만이 잘 설명한 바 있다. 쿨만은 헬라사상의 대표자로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묘사한다. 그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죽음은 몸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여 주기 때문이다. 죽음은 영혼의 위대한 친구이기 때문이다.44)

죽음을 만약 몸과 영혼의 분리라고 이해하고, 영혼은 죽음 후에 파멸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관조 속에서 몸 없이도 충분한 복락을 발견하게 된다고 이해한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로핑크에 의하면 그 경우 몸의 부활은 단순히 여분의 것이 되고 말며, 동시에 그것은 몸에 대한 경멸이 된다고 하였다.45) 몸이 부활해야 될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몸은 있는 것이 좋지만 없어도 큰 문제는 아닌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몸이다. 인간은 영혼이다. 그리고 인간은 몸과 영혼이다. 인간은 영혼이면서 몸이고 몸이면서 영혼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영적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영혼이고, 피조물과의 관계 또는 육적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몸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몸과 영혼은 구별할 수는 있지만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몸이 죽는다는 것은 그 개인이 죽는다는 것이고 따라서 영혼도 죽는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만약 몸이 죽었는데도 영혼이 어딘가에서 살아 있다고 성경이 증언한다면, 그 영혼은 부활한 사람의 영혼이며, 거기에는 부활한 영혼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몸도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4. 결론 

몸과 영혼의 이분법은 인간이 몸과 영혼으로 나눌 수 있게 되어 있고, 영혼은 몸보다 더 고상하고 중요한 부분이며, 영혼은 몸 없이 실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같은 사상은 성서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없다. 따라서 전통적인 몸-영혼 이분법은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성서는 인간의 일부로서의 몸, 곧 영혼 없는 몸의 실존을 인정하지 않는다. 몸은 인간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의 전체 곧 전인을 의미한다. 죽음 후에 존속한다고 주장된 영혼도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영혼을 몸과의 깊은 연관 가운데서 이해해야 한다. 영혼도 몸 없이 실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영혼의 신체성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영혼은 몸의 형상이다. 영혼은 몸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죽음 후에도 영혼이 실존한다면 그 영혼은 몸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몸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영혼이라고 표현된 죽은 자는 몸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로서 전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영혼이면서 몸이고 몸이면서 영혼이다. 이 둘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몸과 영혼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상태로 한 인간을 구성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몸-영혼 단일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혼과 몸은 인간의 구성요소라기 보다는 차라리 인간의 존재양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므로 몸의 죽음 또는 영혼의 죽음은, 한 사람의 일부의 죽음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가 죽는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몸과 영혼은 너무나 깊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영혼 없는 몸이 실존할 수 없듯이 몸 없는 영혼만의 실존도 불가능한 것이다. 


1) 몸과 영혼에 대하여 신학은 특히 인간론과 종말론에서 매우 자주 다루고 있다. 신약성서에는 영혼은 프쉬케(ψυχ?)로, 몸은 쏘마(σ?μα)로 표기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용어로 영과 육이 있는데, 전자는 프뉴마(πνε?μα)로, 후자는 싸르크스(σ?ρξ)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용어들에 대한 정의가 다소 불분명한 가운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인간을 몸과 영혼으로 구성된 존재로 이해할 때, 영은 영혼과 같은 것으로 그리고 육은 몸과 같은 것으로 일반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용법상 영혼은 몸과 대조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영은 육과 자주 대조되고 있다. 

2) Karl Barth, Dogmatics in Outline (New York : Harper & Brothers, 1959), 154.
3) M. E. Dahl,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 a study of I corinthians 15 (London : SCM Press, 1962), 15.
4) Rudolf Bultmann,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3. Auflage (Tübingen : Verlag J. C. B. Mohr, 1958), 195.
5) G. Greshake & G. Lohfink, Naherwartung Auferstehung Unsterblichkeit - Untersuchungen zur christlichen Eschatologie (Freiburg : Herder, 1982), 175.
6)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II/2 (Edinburgh : T. & T. Clark, 1960, 1980), 379.
7) Ibid.
8) Ibid.
9) 영혼과 몸의 이분법을 가리킨다.
10) Herbert Vorgrimler, Der Tod im Denken und Leben des Christen, 심상태역, 「죽음」(서울: 바오로 딸, 1994), 145.
11) Ibid., 146-7.
12) K. Barth, Die Auferstehung der Toten, tr. by H. T. Stenning,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London: Hodder and Stoughton Limited, 1933), 206.
13) Karl Barth, "Is man immortal?" in Karl Barth, ed. James F. Andrews (St. Louis : B. Herder Book Co, 1968), 117.
14) 「기독교강요」 I.15.2 에서 칼빈은 영혼을 몸보다 더 우월한 부분으로 서술하였다. 그리고 III.25.6에서 영혼은 불멸하다고 주장하였다. 바르트는 이 점에서 칼빈과 견해를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15) K. Barth, Church Dogmatics III/2, 378.
16) G. Greshake & J. Kremer, Resurrectio Mortuorum - zum theologischen Verständnis der leiblichen Auferstehung (Darmstadt :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86), 169.
17) Ibid., 196-7.
18) Ibid., 197.
19) Ibid., 206.
20) 모양으로 번역될 수 있다(고전7:31에는 형적, form으로, 빌2:7에는 모양, fashion으로 번역되어 있음). 사실상 에이도스(ε?δο?)와 동일한 것으로 현세의 몸의 구조(틀)를 의미한다. 

21) G. Greshake & J. Kremer, Resurrectio Mortuorum - zum theologischen Verständnis der leiblichen Auferstehung (Darmstadt :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86), 276.
22) Ibid., 210.
23) G. Greshake & G. Lohfink, Naherwartung Auferstehung Unsterblichkeit - Untersuchungen zur christlichen Eschatologie (Freiburg : Herder, 1982), 180.
24) W. Pannenberg, Was ist Mensch, 허혁 역, 「인간이란 무엇인가」(서울: 성광문화사, 1981), 50-54쪽.

25) Joseph Ratzinger, Eschatologie - Tod und ewiges Leben (Regensburg : Verlag Friedrich Pustet, 1977), 96.
26) Ibid. 참조, De Nieuwe Katechismus, 대건신학대학 전망편집부 역, 「가톨릭신앙입문 - 화란 <새 교리서>」(서울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1), 564. 
27) Ibid.
28) G. Greshake & J. Kremer, Resurrectio Mortuorum - zum theologischen Verst&auml;ndnis der leiblichen Auferstehung (Darmstadt :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86), 185-6.
29) H. Vorgrimler, Der Tod ..., 142.
30) A. A. Hoekema, Created in God's Image, 류호준 역, 「개혁주의 인간론」(기독교문서 선교회, 1990), 337.
31) Ibid., 338.
32) Ibid., 341-6.
33) Ibid., 347.
34) Ibid., 359.
35) Ibid., 359-60.
36) Millard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 (Grand Rapids : Baker Book House, 1990), 537.
37) G. Greshake & G. Lohfink, Naherwartung Auferstehung Unsterblichkeit - Untersuchungen zur christlichen Eschatologie (Freiburg : Herder, 1982), 216.
38) 고후3:11 참조.

39) Ted Peters, "Resurrection : what kind of body?", in Ex Auditu(1991), 68.
40) Hans Conzelman, I Corinthians(Philadelphia : Fortress, 1978), 282. 
41) M. E. Dahl,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56.
42) M. E. Dahl,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53.
43) G. Greshake & G. Lohfink, Naherwartung Auferstehung Unsterblichkeit - Untersuchungen zur christlichen Eschatologie (Freiburg : Herder, 1982), 216.
44) Oscar Cullmann, Immortality of the Soul 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The Epworth Press, 1958), 20-21.
45) G. Greshake & G. Lohfink, Naherwartung Auferstehung Unsterblichkeit - Untersuchungen zur christlichen Eschatologie (Freiburg : Herder, 1982), 216.

            

최태영 교수/영남신대 교수, 예장통합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전문위원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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