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의 세계는 과연 어떠한가?
죽음 이후의 상태
전 3:21의 인생의 '혼'으로 번역된 루아흐( )는 영(靈)의 오역이다. 그런데 뒤따르는 후반 절의 말씀에 보면 짐승의 '혼' 역시 루아흐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짐승에게도 영이 있는가 라고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그러나 짐승은 영이 없는 존재로서 짐승에게 사용한 루아흐에는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루아흐( )라는 말은 원래는 '바람'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서 하나님께와 인간에게 사용될 때는 영이라는 뜻이며 때로는 인간의 정신(Spirit) 또는 마음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지만 동물에게 사용될 때는 '호흡'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즉 전 3:21의 본문을 원문의 뜻대로 다시 번역하면 "인생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호흡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 없어지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 말씀을 살펴보면 동물의 호흡이 땅으로 내려가 없어지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나, 사람의 영이 위로 올라간다고 하는 것은 구약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른 것이다.
창세기에서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자신도 죽어 슬퍼하며 음부로 내려가리라'(창37:35)라고 하여 음부(陰府)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이후 구약에는 음부에 관한 표현이 많이 나타나는데 거의 모두 음부로 내려간다 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게 된다. 즉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신 불신간의 모든 자의 영이 지하에 있는 어떤 음침한 장소로 내려가게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이 장소를 음부라고 불렀으며 히브리어로는 쉐올( )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 3:21에서는 구약의 다른 표현들과 달리 인간의 영이 음부로 내려간다고 하지 않고 위로 올라간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은 몸과 분리되어 음부라는 곳으로 가기는 하되 그 음부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땅 속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라고 이름한 어디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혜자였던 솔로몬은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나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실이라는 점에서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라는 반어법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 이전의 옛날 족장들과 선지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지하 어디인가의 어둠의 세계로 가는 것으로 알았지만, 솔로몬은 그곳이 물질로 이루어진 지하 세계가 아니라 비물질적인 영계(靈界)의 어느 곳으로 파악한 것이었다.
즉 비물질적인 존재인 사람의 영이 그의 몸을 떠난 이후에는 또다시 흙으로 된 어느 공간 즉 물질 안에 갇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 말일 것이다. 족장들이나 선지자들도 모르는 진리를 솔로몬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지혜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을 지혜의 대명사라고 일컫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성경의 계시의 구조는 점진적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의 모든 선지자들에게 완전한 비밀을 한꺼번에 주시지 않으시고 점진적으로 지식을 증가시켜 주시는데 그 이유는 인간들의 이해의 비약으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하심이다.
오늘날 우리가 밝히 아는 모든 것들이 과거 어느 때에는 부분적이거나 모형으로만 계시되어진 것들이 많음은 잘 아는 사실이다.
점진적 계시의 원리에 의하여 구약의 음부(쉐올)라는 단일한 장소가 신약에서는 낙원(파라데이소스)과 음부(하데스)라는 두 장소로 구분되어진다. 즉 믿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면 그의 영은 낙원(아브라함의 품, 주님의 품)으로 가고 불신자의 영만이 음부로 간다고 하여 죽은 자가 가는 처소를 구분하는 것이다.
그런데 낙원과 음부는 비물질적 존재인 사람의 영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에 물질로 이루어진 자연계 내에 존재하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비물질적이고 비가시적인 영계에 존재하는 어느 곳이라는 것이다.
낙원은 어디에 있는가?
낙원은 헬라어로 파라데이소스( )라고 하는데 주님이 눅 23:43에서 우편에 달린 자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있을 곳'(낙원)이라고 말씀하신 그곳이며 또한 눅 16:22에서 거지 나사로가 천사들에게 받들려 들어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도 하는 처소이기도 하다. 한편 계 2:7에서 파라데이소스는 에덴동산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었으며 헬라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인 칠십인역(LXX)에는 창세기의 에덴동산을 이 단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에덴동산이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계시는 완전한 하늘 나라가 아님으로 볼 때 낙원이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낙원을 천국과 동일시하여 믿는 자가 죽으면 그의 영은 곧바로 하나님께서 계시는 완전한 영계(靈界)의 하늘 나라로 간다고 주장하는 신학적 사고가 있기도 하지만, 낙원이 곧 천국은 아니다 라는 사실은 성경의 여러 가지 말씀을 통해 분명히 입증된다.
주님께서는 죽으시기 전에 우편에 있는 자에게 말씀하실 때 '오늘' 낙원에 가신다(눅 23:43)고 하셨다.
한편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만나신 마리아에게 주님이 아직까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지 못하셨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죽으신 후 부활까지의 '삼일'이라는 기간 동안에 하나님이 계신 영계의 하늘 나라가 아닌 또 다른 영계의 어떤 곳 즉 낙원에 다녀오셨다는 말씀이다. 이로 볼 때 낙원을 천국과 동일시 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낙원은 눅 16:22에서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하였으며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보면 마치 아브라함이 낙원의 주인처럼 묘사되어있다. 하지만 피조물인 아브라함은 결코 낙원의 주인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이 낙원에서 멀리 떨어진 음부에 있는 부자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가장 큰 자로 여기고 아브라함이 낙원의 주인인 것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이러한 일반적 상식을 바꾸지 않으시고 그대로 인용하신 것은 그렇게 하시더라도 깨닫는 자는 깨닫고 그 말속에 숨은 뜻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 13:34에서 주님은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을 직접적으로 자극하심으로써 그들의 반발심만 부풀리게 하는 것이 복음 전파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완악한 자들이 일시적으로 깨닫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후에 다시 타락하여 하나님 나라를 훼손시킬 우려(마 13:11-15)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낙원의 주인은 누구이신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과 주님이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것은 바로 주님의 품을 뜻하는 것이다. 영원한 하늘 나라가 완성되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은혜와 보호 아래 편안한 안식을 취하고 있는 주님의 품속(고후 5:8, 12:4)과 같은 그 곳이 바로 낙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낙원을 하늘 나라처럼 생각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낙원을 영원한 천국과 존재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사상이다.
혹자는 엡 4:7-8의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라는 말씀을 오해하여 주님의 승천 시에 낙원에 있던 영들을 하나님 나라로 옮기셨기 때문에 낙원은 더 이상 없으며 그 사건 이후부터는 성도가 죽으면 그의 영이 곧바로 하나님 앞으로 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전후 문맥을 충분히 살펴보지 않은 지나친 억측이다. 바울이 위와 같이 표현한 이유는 사람의 각 지체가 각각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여 온전한 몸을 이루어 가듯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각양의 은사(카리스마)를 선물로 받아 봉사와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야 함을 역설하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죄 가운데 사로잡혀 있던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봉사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도록 각인에게 은사들을 주셨다는 뜻인 것이다.
구약의 음부(쉐올)는 신약에서 낙원(파라데이소스)과 음부(하데스)로 나뉘어 계시되었다. 음부는 헬라어로 하데스( )라고 하며 부정 접두어 아( )와 '보다'라는 뜻의 동사 에이도( )가 합성하여 이루어진 말로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어두운 곳'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쉐올과 같은 의미이다.
성경에 의하면 음부는 하나님의 은혜가 단절된 일종의 고통 받는 장소(눅 16:24)로서 낙원 밖의 어느 영계의 장소(눅 16:26)로 파악된다.
신약에서 하데스와 같이 사용된 말로는 다른 말로는 롬 10:7의 '끝없는 깊음(무저갱)'이라는 뜻의 아뷔쏘스( )와 벧후 2:4의 '깊은 감옥'이라는 뜻의 타르타로스( )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들 '음부'를 뜻하는 단어들이 '지옥'과는 다른 뜻임을 알아야 한다.
지옥이란 무엇인가?
지옥(地獄)이란 용어는 '땅 속의 감옥'이라는 뜻인데 사실은 잘못 번역된 말로서 성경에서 뜻하는 의미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데, 성경 번역 당시 불교 등 동양 사상에 젖어있던 사람들이 적절한 우리말을 찾지 못함으로써 억지로 만들어 낸 말이다.
땅 속에는 감옥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성경에서 지옥으로 번역된 헬라어 게엔나( )는 원래는 '불 못(림네 퓌로스)'이라는 뜻으로서 최후 심판 때 불신자들이 사망의 부활로 나온 후 최종적으로 가게 되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를 뜻한다.
게엔나는 히브리어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의 게힌놈( )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인데 게힌놈은 '살육의 골짜기(렘 7:32)'라고도 하는 곳으로서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기 전에 바알과 몰렉 등 이방신을 섬기던 때에 자신들의 자식을 불에 태워 바침으로써 그 곡성이 하늘을 찌르던 악랄하기 그지없는 장소를 상징하는 말이다.
혹자는 음부와 지옥(불못)을 혼동하여 불신자가 죽으면 그의 영이 곧바로 지옥으로 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적인 생각이 아니다. 천국과 지옥은 사람이 죽자마자 바로 가는 곳이 아니며, 죽은 자의 영은 낙원과 음부로 나뉘어 가서(눅 16:22-23) 최후의 심판 때까지 대기하고 있다가 최후 심판 직전에 생명과 심판의 부활로 나와서(요 5:29) 심판을 받은 후에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가지고 천국과 지옥이라는 영원한 결정에 따라 영생과 영벌을 받게 되는 것(마 25:46)이다.
이로 볼 때 지옥을 물질계의 어느 공간으로 생각하는 것은 유치한 발상이며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르다. 더군다나 최후의 심판을 받기 전까지는 아무도 지옥 불못에 던져진 자가 없다는 사실(계 20:13-14)을 알아야만 한다.
단테의 '신곡'이나 존 번연의 '천로역정' 등을 보면 천국과 지옥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며 문학 작품에 불과한 것이지 성경과 같은 권위가 있는 책은 결코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책이 아무리 진실되 보인다고 하더라도 비성경적임에 대하여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다. 특히 단테의 신곡은 후대에 나타나는 모든 '내세 체험 이야기'에 가장 많이 그리고 오래 동안 영향력을 끼쳐온 작품인데 거기에는 연옥(煉獄)이나 림보(Limbus)와 같은 터무니없는 것들도 등장하는 잘못된 천주교 신앙을 토대로 쓴 글임을 알아야 한다.
한편 주님께서는 막 9:48-49에서 지옥에 대하여 가르치실 때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고 하셨다. 이는 지옥 형벌의 무서움을 깨우쳐주시기 위한 것이지 주님 당시의 지옥의 모습을 묘사하신 것이 아니다.
안유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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