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인물

[스크랩] 77명의 역대 대제사장 들

하나님아들 2016. 9. 6. 15:44

역대 대제사장들

 

1.대제사장이란

1).대제사장의 의미

①코헨가돌은 “존귀한 .위대한 .고상한.” 이라는 뜻을 가졌고

②코헨로쉬(스7:5)란 아론 대제사장을 말하며 “머리 .정상. 지도자”라는 뜻을 가졌다

 

2. BC1445년-BC959년. 장막 성전 시대 (광야 시대 이후 다윗 이전 까지 )

장막 성전 ( 광야 시대 10대 대제사장 역임)

시내 광야에서부터 BC1445년경 최초로 장막 성전에 봉사했던 대제사장 아론부터 아히둡 까지 10명의 대제사장이 있었다.

1). 1대 아론 대제사장 BC14456년경-BC1406년경

1대 아론을 거룩한 대제사장 계보의 시조. 대제사장의 직분이 그의 자손들로 이어졌으므로, 제사장을 가리켜 “아론의 자손”, “아론의 집”, “아론의 반차를 좇는 자”라는 칭호를 얻음

2). 2대 엘르아살 대제사장

3). 3대 비느하스 대제사장

비느하스는 모압 평지에서 시므온 지파 족장 시므리가 미디안 여인 고스비를 데리고 간음죄를 지을 때 창을 들고 가서 두 사람을 죽였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은 비느하스에게 하나님의 평화의 언약을 주셨고,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을 약속하셨다.

4). 4대 아비수아 대제사장

5). 5대 북기 대제사장

6). 6대 웃시 대제사장

7). 7대 스라히야 대제사장

8). 8대 므라욧 대제사장

9). 9대 아마랴 대제사장

10). 10대 아히둡 대제사장

 

3. BC959-BC586년. 솔로몬 성전 시대 이후 (느부갓네살왕 파괴)

솔로몬 시대 사독부터 유대 왕국 멸망 BC586년까지 여호사닥 까지 13명이 대제사장직을 역임 함

다윗시대의 대제사장직은 아론의 두 아들 중 셋째 엘르아살 후손과 아론의 넷째아들 이다말 후손이 동시에 담당하는데 두 명의 대제사장 동시에 역임 했다

1). 11대 사독 대제사장

솔로몬 시대 사독 대제사장

사무엘 시대와 사울시대에 아론의 넷째 이다말 후손에게 대제사장 자리를 내어주므로 정통 셋째후손들이 퇴락의 위기에 있었다.

다윗시대에 이르러 두 명 대제사장이 임명되므로 정통후손들은 활기를 되찾는다.

아론 넷째아들 이다말 후손의 대제사장이 다윗의 큰아들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솔로몬시대 처형 되므로 정통 후손인 사독의 독주시대가 열린다.

2). 12대 아히마아스 대제사장

3). 13대 아사랴 대제사장

4). 14대 요하난 대제사장

5). 15대 아사랴 대제사장

6). 16대 아마랴 대제사장

7). 17대 아히둡 대제사장

8). 18대 사독 대제사장

9). 19대 살룸 대제사장

10). 20대 힐기야 대제사장

남 유다 제 16대 왕 요시야 시대의 대제사장. 성전 수리 중에 율법 책을 발견했고 이 율법 책이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단초가 되었다.

11). 21대 아사랴 대제사장

12). 22대 스라야 대제사장

13). 23대 여호사닥 대제사장

 

4. BC515-BC320년. 메대 바사시대. (페르시아 시대)

바벨론(다니엘이후) 멸망이후 페르시아 속주 시대 3차의 포로석방과 성전 재건축이 이루어진다.

*.. 스룹바벨 성전 (바벨론 포로 석방 시대 이후. 6대 대제사장 역임)

가). 대제사장 여호수아부터 얏두아까지 6대 대제사장이 있었다.

나). BC420년경

예수아(여호수아)는 요야김을 낳았고 요야김은 엘리아십을 낳았고 엘리아십은 요야다를 낳았고(느12:10) 요야다는 요나단을 낳았고 요나단은 얏두아를 낳았느니라(느12:11)

*. 성전 재건축 이후 시대 (바벨론 포로의 후손들. 다니엘 시대 이후 )

1). 24대 여호수아 대제사장

성전 재건축이 이루어진다.

2). 25대 요야김 대제사장

3). 26대 엘리아십 대제사장

처음에는 대제사장으로서 성벽 중건에 앞장섰으나, 이후에 예루살렘 성벽 중건을 방해 함

4). 27대 요야다 대제사장

5). 28대 요하난 대제사장

6). 29대 얏두아 대제사장

구약 성경에 마지막 대제사장이다. 바사의 마지막 왕이었던 다리오 3세와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활동했던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대제사장.

 

5. BC320년-BC198년. 헬라 시대, 남방 왕 시대 (헬라시대 전반부) 프톨레미 왕조 7대 제사장

알렉산더 정복 후 이집트 프톨로미 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유대는 남방과 북방의 전쟁으로 남방이 패전한 이전 시대로서, 남방이 패전하자 BC198년 북방 셀류크스. 안티오쿠스 왕조의 지배에 들어간다.

1). 30대 오니아스 1세 대제사장

2). 31대 시몬 1세 대제사장

BC300년경의 인물로 프톨레미 1세 때 파괴 되었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였으며 가뭄과 포위 속에서도 급수를 가능케 할 수 있게 시설 공사를 지시했다라고 한다.

프틀레미 시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인 의인 시몬은 대제사장으로 명성과 함께 고대 유대주의의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되어져 왔다

3). 32대 엘르아살 대제사장

프톨레미 2세의 지원을 받아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당시 세계 공용어인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이 탄생하게 된다.

이집트 알랙산드리아 도시에서 유대 12지파에서 각 6명씩 차출하여 히브리어로 나누어진 성경을 헬라어로 집결하여 번역하였으며 이때가 BC250년경이다.

4). 33대 므낫세 대제사장

5). 34대 오니아스 2세 대제사장

프틀레미4세에게 대제사장이 바쳐야할 조공 액수인 은 20달란트 지불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 거절로 인하여 프틀레미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게 된듯하다

6). 35대 시몬 2세 대제사장 추정 BC200년경

7). 36대 오니아스 3세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 - 사독 가문의 마지막 합법적인 대제사장

처음은 남방왕의 치하에 있었다, 북방의 영토로 바뀌면서 북방 왕 안티오쿠스 4세기 초 의인 시몬의 후손으로 정통파 유대인이었던 오니아스3세를 헬라파유대인들이 반대하여 헬라 파 야손을 지지하여 오니아스3세를 몰아었으며 야손은 거액의 뇌물로 안티오쿠스4세에게 대제사장 임명을 받는다.

 

6. BC198년-BC159년. 헬라 시대. 북방 왕 시대 (헬라시대 후반부)

1). 37대 야손 대제사장

야손은 유대 히브리어를 버리고 헬라이름으로 창씨 개명하는 등 헬라문명에 심취한 친 헬라파의 골수분자로서 뇌물로 통치자를 매수하여 대제사장의 직임을 맡았는데 그는 레위 자손으로서 대제사장의 혈통이 아님에도 통치자에게 뇌물을 주어 대제사장에 오르자 북방의 정책에 협조함으로 정통유대인들에 원성을 샀다

아론의 셋째 아들 엘르아살 사독의 후손이 수행해야할 대제사장의 직무를 37대 야손 대제사장부터 혈통의 위임의 질서를 파괴하였다 이 시대부터 아론의 정통후손들은 대제사장의 직무를 빼앗겼다

2). 38대 메델라우스 대제사장

헬라 북방 시대에 베냐민 지파의 친 헬라파인 메델라우스자가 대제사장 오르려고 이전 야손 대제사장보다 더 많은 뇌물을 북방 통치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4세 에게 주어 38대 대제사장에 등극하고

통치자의 명령대로 성전과 온 산상에 통치자를 닮은 신상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하여 성전을 더럽혔다

3). 39대 알키무스 대제사장

레위 지파지만 대제사장의 정통 혈통이 아닌 친 헬라파 유대인으로 북방의 정책에 동조하였으며 마카미 혁명을 안정시키려고 마카비와 협상을 한다.

혁명을 일으킨 혁명의 정통파 유대인들 처벌하지 않기로 협약을 맺으나 곧 협약을 깨고 혁명에 가담했던 수많은 정통파 유대인들을 처형한다.

메델 라우스 대제사장도 처형한다. (대제사장이 대제사장을 처형하는 권력의 시대가 됐다)

혁명에 가담한 정통파 유대인들을 처벌하지 않기로 협약까지 하고서도 대제사장이란 자가 유대를 위하여 정당히 종교혁명을 한 많은 숫자 정통파 유대인들을 처형시키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을 39대 대제사장이 행하였다, 권력으로 변모한 대제사장 직분의 타락상을 보여 주었다

권력으로 변화하는 3 대제사장 악행과 헬라 문명으로 인한 영적 타락의 변모

4). BC175-BC159년. 헬라 북방 시리아 셀류쿠스. 안티오쿠스왕조 지배시대, 3대 대제사장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는 적그리스도의 성전의 박해와 종교의 무자비한 탄압은 오늘날 적그리스도의 예표로 등장한다.

남방의 헬레니즘 문명으로 일부 유대인들의 문명의 타락은 대제사장의 권력으로 변모와 함께 헬라의 신문명으로 유대 종교적 생활을 병들게 하며 종교 신앙의 타락에서 오는 많은 시대의 변천을 낳게 한 결과로 초래한다.

정통한 유대인들에 의해 마카비 혁명이 일어난 시대이며 마카비 혁명이후 독립된 하스몬가 왕조가 탄생 된다.

아스몬 왕가는 헬레니즘 문명으로 그 왕가 후손들마저 헬라이름으로 바꾸는 등 헬라문명을 동경하므로 대제사장의 자리를 권력과 귀족으로 생각하는 통치이념은 왕조의 형제 왕자간의 권력 다툼과 함께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탄생과 두파벌이 권력다툼은 피를 부르는 얼룩진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신구약 중간사의 역사에 오점을 남긴다 .

4-1). 북방의 통치 시대 신구약사에 기록된 극악한 3대 대제사장

알렉산더 정복 후 이집트 프톨로미 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유대는 남방과 북방의 전쟁

남방이 패전하자 BC.198년 북방 셀류크스. 안티오쿠스 왕조의 지배에 들어간다.

북방 안티쿠스 에피파네스 4세 통치 시대는 할례, 안식일 준수, 율법 준수 등 모든 예배 생활을 금지하면서 유대교를 극심하게 탄압했다.

북방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4세는 자신들의 종교 탄압 정책에 동조하는 악한 친 헬라 세력의 유대인들로 차례로 3대걸쳐 대제사장에 임명했다.

북방왕의 종교 탄압은 결국 마카비 혁명 발발은 ( BC167년) 화산에 분화구 터지듯 결국 정통파 유대인들은 반기를 들었다

그 결과 비록 긴 세월은 아닐지라도 약 100년이란 기간 자치 독립 유대 왕조가 탄생 된다.

4-2). 헬라파 유대인 대제사장들의 등장

헬라시대 북방왕 부터 시작된 대제사장자리는 아론의 대제사장 혈통을 제외시킨 가운데 통치자에 의해 통치자를 협력하는 친 헬라파 유대인으로 임명이 결정 됐다

7. BC159-BC152년. 알키무스 이후 대제사장 공백기 7년

마카비 혁명시대에 무력으로 주도했던 1차 혁명 지도자 마키비가 죽고(라멜라우스 대제사장시대)

그 후임에 동생 요나단이 외교적으로 혁명을 주도 했던 활동시대였다 (대제사장 공백기)

1). BC159년 알키무스 대제사장의 죽은 이후 공백시대

알키무스가 3년 만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고(BC159년), 대제사장의 자리는 BC152년까지 7년간 공백 상태가 되었다.

당시 마키비는 죽었으나 그 동생들 중 요나단과 시몬이 마카비 혁명에 이어 유대의 독립을 위해 외교적 방법으로 새로운 혁명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시기에 속한다.

요나단의 노력으로 외교적 승리를 하며 마카비 형제 요나단과 시몬이 각각 대제사장에 오른다.

 

8. BC153 -BC135년 독 립 개막 시대 2대 대제사장

유대 독립 혁명을 주도했던 마카비 혁명의 지도자 마카비가 죽고 그 후임으로 동생 요나단 활동을 하게 된다 요나단의 외교적으로 노력으로 유대의 독립을 하여 요나단이 대제사장으로 등극하다 암살 된 후에 요나단의 후임으로 마카비 형제중 제일 막내 시몬이 유대 민족의 최고의 지도 계층으로 부상하여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여 하스몬 왕가를 세운다.(작은 고을에 제사장 집안)

시몬 자신의 사위가 반란을 일으키며 시몬을 비롯하여 두 아들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 40대 요나단 아푸스 대제사장(BC153년-BC142년) 마카비 동생

혁명 세력으로 외교의 성공으로 독립을 얻어내자 대제사장에 오른다. (지방 제사장 혈통이다)

아론의 셋째 아들 엘르아살 후손 사독 혈통 오니아스 대제사장 혈통이 있었기 대제사장 혈통에 반발로 예셋이파의 추종자에게 암살당한다.

2). 41대 시몬 타시 대제사장 (BC142년-BC135년) 마카비 동생

사위 반역으로 의해 모두 멸절을 당하고 겨우 시몬 막내아들 힐카누스1세만 가까스로 도망하여 살아 남았으며 하스몬가 힐카누스 왕조가 출범하게 된다.

 

9. BC135년-BC37년 하스몬 왕조 힐카누스 왕가의 대제사장

하스몬가왕조의 왕과 겸임 대제사장 시대 (레위 지파. 지방 제사장 혈통)

마카비 혁명 세력의 후손들 대제사장과 왕권의 겸임 시대 (철권시대)

1). 42대 요한 힐카누스 1세 왕 (대제사장) BC134년-BC104년

전쟁을 일으키며 영토를 확장하며 이두매 지역에 강제로 종교를 강요하고 할례를 받도록 함으로 원성을 산다.

후일 헤롯대왕은 할례를 받았기에 이두매 유대인이라 한다.

2). 43대 아리스토불루스 1세 왕 (대제사장) BC104년-BC103년

힐카누스 장자 반란을 우려 동생들을 죽이고 공포와 술의 그늘에서 타락의 길에 섰다

헬라 문명을 지향하고 히브리어 이름에서 헬라어 이름을 바꾼다.

아리스토 불루스1세의 폭정에 겨우 동생 안네스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3). 44대 알렉산더 안네스 왕 (대제사장) BC107년-BC76년

힐카누스1세 차남 바리새파 유대인을 반란 혐의로 800명 처형

미망인 알렉산더 살로매 섭정 통치 시대 BC76년-BC67년

왕권 정치는 그의 모친인 알렉산더 살로매가 섭정왕으로 통치하였고 대제사장의 직무는 큰아들 힐카누스2세 수행했다

4). 45대 힐카누스2세 대제사장 직무 BC76년-BC67년

5). 46대 아리스토불루스 2세 왕 (대제사장) BC67년-BC63년

형의 왕권을 사두개파와 군대 힘으로 강제로 제압하여 몰아낸 뒤 왕위 오른다.

모친 살로매가 죽자 힐키누스 2세는 왕권에 오르지만 곧 동생과 사두개파의 반란으로 도주한다.

로마 폼페이 장군 유대 점령(로마 속국)

6). 47대 힐카누스 2세 왕 (대제사장) BC63년-BC41년

로마의 군대에 협조하여 동생 아리스토 불루스 2세의 왕권을 몰아내고 회복한다.

7). 48대 안티고누스 왕 (대제사장) BC41년-BC38년

아리스토 불루스2세 아들 이다

파르티아 왕국의 외세 힘을 빌어 힐카누스2세 (큰 삼촌)왕권을 무너뜨리고 유대의 왕권을 장악한다. 힐카누스2세는 살지만 한쪽귀가 짤리는 환란을 당한다.

안티고누스는 하스몬 왕가의 9번째 대제사장이자 마지막 대제사장이 되었다.

아스몬 왕가에서 대 제사장 오른 명분은 아론의 후손으로 지방 제사장 직분을 맡아온 가문이라는 데 있었다.

8). BC134년 힐카누스1세대 이후 후손들

힐카누스 왕가의 후손들의 헬레니즘 문명으로 종교적 정체성 타락

마카비 혁명은 정통파 유대인들이 그 후손을 위하여 헬레니즘 문명과 종교 탄압을 하는 헬라 북방 왕에 항거하여 마카비 혁명을 일으키며 무수한 유대인피를 뿌린 값진 결과로 독립을 하여 유대교를 회복하고 독립된 아스몬가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힐카누스1세 이후 2세대들은 헬라 문명을 너무 좋아하는 것도 지나쳐 고유의 히브리어 이름을 헬라 이름으로 스스로 창씨개명을 하고 스스로 헬라화 하며 종교를 멀리하는 종교에 쇠퇴를 자초 하였으며 헬라 문명의 탐습은 신앙의 타락으로 이어졌으며 권력 장악의 불안에 술과 향락에 빠져 형제들을 형벌케 하여 죽이는 악행을 저질렀다

아스몬가 왕조 후손들을 헬레니즘 문명을 답습하며 왕가의 귀족으로 변모하여 종교의 타락의 길로 향하였다 (유대인들 안에도 헬라파들이 많이 존재했다)

힐카누스 왕조가 들어서면서 대제사장 직임에서 뒤쳐진 아론 대제사장의 혈통으로 중심이 되어 시작된 사두개파는 유대인의 귀족 계급으로 서서히 등장하고 왕조에 편입하여 권력을 누렸다

사두개파는 왕의 이념에 편승하여 문명과 더불어 귀족화로 변모하며 종교는 형식적인 관례로 제사장 일을 하면서 몫을 챙기는 권력과 부을 탐하는 권력형 사두개파로 전략하고 말았다

8-1). BC103년-BC76년. 3대 알렉산더 안네스 왕 겸임 대제사장 시대.

800명을 처형한 사건

힐카누스 왕조 알렉산더 안네스 왕에 대한 바리새파의 반란의 혐의로 처형당한 사건은 왕권과 대사장의 겸임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대제사장의 직무가 분리가 되어 있지 않음으로 발생된 종교왕국으로서 단점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다

알렉산더 안네스 왕 (44대 대제사장) 시대에는 왕조 권력을 편입하려는 권력형 유대인들이 경쟁하듯 생기면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정권의 세력에 우위에 서려고 서로 정면대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알렉산더 안네스(BC103-BC76) 왕은 율법적인 바리새파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헬라 문명에 향락을 사모하는 왕으로서 율법적인 바리새파는 골치 아프고 껄끄러운 존재였고 바리새파들을 왕위 주변에서 명목을 내세워 멀리했다 (대제사장의 직무를 소홀한 이유이다)

바리새파는 왕 권력에 편승하려는 의도는 목적이 사뭇 달랐다

왕권을 겸한 대제사장의 유대 왕국으로서 종교정책의 지원 받아 율법을 되살리고 청소년들의 종교 교육과 율법적인 종교에 대한 활성화 등 헬라문명과 대응하는 종교적 개혁 등 많은 일을 해보려는 의욕적인 바리새파 정통적인 바리새인들이었으나 안네스 왕은 바리새파를 멀리했다

바리세파는 정통파 유대인으로 결집됐고 강력한 율법에 실천자들인 예셋이파도 그들에 속하였다

마카비 혁명의 주도세력이기도한 바리새파들이 득세하면 얼마든지 왕권 종교정책에 대한 반란의 세력이 결집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염려 하던 현상은 바로 이루어졌다

바리새파들은 반기를 들었다 - 사두개파의 밀려 권력 안에 들어가지 못한 바리새파들은 “마카비 혁명의 후손들이 권력이나 문명에 향락이나 채우려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피를 흘리며 마카비 혁명을 일으켰단 말인가?” (그 정당성은 왕가에 향하여 반기를 들었다)

바리새파 정통파 유대인들은 유대왕국을 종교왕국으로 세우고 싶었다.

그래서 이 부패한 왕조를 뒤 업으려 시리아의 협조를 얻으려 하였으나 과거에 일들 즉 북방의 탄압받던 그 시대 일들로 인하여 포기 하였다

(또한 외세로 왕권을 무너뜨릴 수는 있으나 독립은 포기 하여야 하기에 실행 할 수 없었다 )

왕권에 대한 불순 세력의 반란을 알레산더 안네스 왕조에 밀고 되었다

알렉산더 안네스 (BC103년-BC76년)는 바리새파 유대인을 색출했다 감옥에 보내는 자들을 빼고서도 처형자만 바리새파 정통의 유대인 800명을 그대로 처형했다. 바리새파의 대대적인 숙청된 사건으로 예루살렘에 피바람이 불었다

사두개파의 입지 더욱 좋아졌고 바리새파는 초토화 되었고 탄압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유대인 사회의 두 파사이는 앙숙의 관계로 감정의 골은 깊어만 갔다 (밀고는 사두개파의 개입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알렉산더 안네스가 죽고 이어서 왕비 살로매가 9년간을 섭정 통치하며 바리새인들을 완화 정책하며 탕평정책으로 바리새파를 등용하여 종교 교육 등 율법의 유대사회를 이룩하였다

파벌 간에 평온을 되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함으로 모든 것이 일단은 안정이 되었으나 살로매가 죽자 두 아들이 서로 왕 정권과 대제사장으로 등극하려는 권력 전쟁으로 이어진다.

곧 두형제의 왕 정권 내분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각왕자의 편파가 나누어 지지함으로 두지파도 함께 내분 전쟁에 개입된다.

8-2). BC76년-BC67년 미망인 알렉산더 살로매의 탕평정책과 온화한 정책

힐카누스 왕조 중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다. 당시 대제사장은 큰아들 힐카누스2세가 직무를 수행함

알랙산더 안네스의 철권정책은 많은 오점을 남긴 두 왕자의 부친 알렉산더 안네스(BC.103-BC.76년)가 죽으면서 바리새파 유대인 800명 처형한 사건으로 알렉산더 안네스는 많은 후회를 하였다

운명할 당시 후회를 하며 정권이양을 한 왕비 살로매에게 통치를 명하면서 바리새파의 등용과 바리새파의 종교 활동을 재개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알렉산더 안네스왕은 죽었다

미망인 알렉산더 살로매는 두 왕을 섬긴 부인이니 알렉산더 안네스의 미망인이면서 그 형인 아리스토 불로스(1년 통치) 미망인도 된다.

통치자 이며 두 왕자의 모친인 미망인 살로매(BC76년-BC67년)는 9년간 섭정에 자리에 있으면서 이전에 바리새인들의 처형사건으로 한 맺힌 바리새파들을 등용하며 잘 보살폈으며 아울러 사두개인들도 보살피는 탕평정책으로 한동안 유대사회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자신 친정오빠로 산헤드린을 조직했다 장로조직 협의회였다 이때에 산헤드린 생겼다 탕평정책의 일로였다

8-3). BC67년. 알렉산더 안네스의 두 아들의 왕 권력의 내분 전쟁

힐카누스 왕조의 두 왕자들과 함께 권력 개입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권력의 싸움의 시대

유대의 왕권력의 내분 전쟁으로 형 힐카누스2세와 바리새파가 개입한 세력과 동생 아리스토 볼루스 2세와 사두개파가 개입한 세력의 다툼이 발생

형제 왕조 내분 권력 전쟁인 동시에 유대의 두지파간에 내분 전쟁이다

당시 유대사회 유대 민족의 심각한 갈등 문제였다

8-4). 모친 살로매가 죽자 두왕자들의 왕권 전쟁

두 왕자들의 정권 싸움에는 두 지파들이 나뉘어져 적극 개입하여 권력전쟁을 부추겼다

살로매는 평소 두 아들을 걱정했다 그래서 대제사장일은 큰아들에 힐카누스 2세에게 모친 통치 시절에 직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또한 군대 총 지휘권을 작은아들 아리스토 불루스2세에게 주었다

(군대 총지휘권으로 모친 살로매가 죽고 형이 등극하자 군의 세력으로 왕권을 찬탈한다)

당시 바리새파는 대제사장의 큰아들 힐카누스2세 편에 섰고 사두개파는 군대 총지휘권을 갖은 동생 아리스트 불루스 편에 섰다(당연히 사두개파는 대제사장 편이여야하나 군대를 장악한 동생의 편을 들었다)

섭정자 살로매가 죽었다 당연히 큰아들 힐카누스2세는 대제사장의 직무를 하고 있었으니 왕위에 오르게 되자 바리새파에서는 그동안에 한을 푸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BC67년 형 힐카누스2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사두개파와 아리스토 불루스2세는 군대를 총 동원하여 형 힐카누스2세에게 쳐들어가 왕권과 대제사장의 왕권을 강제로 찬탈 한다

아무 대비가 없던 힐카누스2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바삐 도주하여 이두매 안티바스(헤롯의 부친)에 몸을 의탁하는 신세가 되었다

BC63년경 세월이 흘러 한을 품은 형 힐카누스2세의 나그네 인생은 끊나나 싶었으나 막강한 로마 대군대가 점령하려 팔레스타인에 들어온다.

8-5). BC67년 로마군에 의한 동생 아리스토 볼로스2세 왕권을 밀어내고 등극한

형 힐카누스 2세

로마군을 도와 동생 아리스토 볼로스2세(BC67년-BC63년)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힐카누스 2세 유대왕으로 등극하여 그 한을 풀지만 로마의 속국이 됨으로 독립은 끝나 버린다.

8-6). BC41년 아리스토 불루스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의 파르티아 전쟁과 유대 왕 등극

로마군에 의해 포로 압송 중이던 동생 아리스트 불루스2세와 그의 아들은 안티고누스는 로마로 압송 중에 포송줄을 끊고 그의 아들 안티고누스는 탈출하고 아리스토 볼루스2세는 죽음을 맞는다.

BC41년 아리스토 불루스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는 탈출 후에 파르티아 왕국을 끌어들여 파르티아 전쟁을 일으키어 삼촌인 힐카누스 2세 왕정권을 무너뜨린다.

8-7) BC41년파르티아 전쟁의 결과 (힐카누스 왕가 마지막왕 안티고누스 왕권 회복전쟁)

파르티아 전쟁은 많은 권력의 통치권을 바꾼다.

우선 이전쟁에서 로마 삼두에 두 번째 핵인 로마의 크라수스 장군이 죽음으로 로마 권력구도를 바꾸었고 헤롯대왕의 형 파사엘이 자살하고 힐카누스 2세도 죽었다

헤롯의 아버지 이두매 총독 안티파터는 전쟁 2년 전 암살당한다.

8-8). 파르티아 왕국은 외세 힘으로 아리스토 볼로스2세 아들 안티고누스(BC41년-BC37년)가 유대왕에 올랐으나 로마 제국이 가만히 있지 않음

유대 왕을 임명 해놓고 파르티아왕국과 유대를 단숨에 무찔러 버린다.

BC37년 또다시 로마군은 파르티아 왕국과 팔레스타인 공격함으로 안티고누스는 5년 통치 후 아스몬왕조에 힐카누스왕가 마지막 유대왕이 된다.

8-9). 유대 민족의 최대 희망 예루살렘 성지와 대제사장의 염원

유대 민족은 살아남았으나 국가도 없고 왕도 없는 유대 민족이 되었다

오직 로마가 통치에 따라 움직이는 이방인의 왕국이 있을 뿐 로마의 속국이 된 이스라엘 민족 만 남아 있게 된다. 비록 속국이 되었으나 종교의 신앙인 모태인 성지 예루살렘이 있었다.

이방인 헤롯왕이 등장하며 종교 분리 차원으로 대제사장의 자리가 유대인에게 주어졌지만 유대인이 바라는 종교 지도자의 대제사장의 고귀하고 존경스러운 꿈은 사라졌다

헤롯이 결코 만만치 않은 사람이 장차 대제사장의 자리에 오를 사람은 유대인이 생각지도 않은 가상치도 않은 인물을 선택 할 것은 이미 예고되었었다

8-10). BC167년-BC38년. 마카이 혁명에서 힐카누스 마지막 왕 안티고누스까지 유대의 오욕

하나님께서 유대 왕국을 통하여 구약사의 종말을 다시 한 번 보여주신다.

구약사의 종말은 미래의 종말의 예표이다

마카비 혁명은 마카비에 의해 무력시도 한 후 마카비의 동생 요나단이 외교로 혁명에 성공하여 독립 하게 되자 혁명의 후손들은 하스몬 왕조로 탄생 된다.

그러나 실상 그들의 혈통은 레위 지파의 지방 제사장급에 해당된 혈통의 왕조로서 그 권력으로 왕과 대제사장을 겸임한 통치세력으로 장악한다.

율법 상 대제사장에 당연히 올라야 하는 아론의 정통의 후손들은 대제사장의 직분을 넘겨주고 사두개파라는 파벌을 만들어 혈통의 명분으로 귀족으로 발전한다.

마카비 혁명의 후손들인 힐카누스 왕조는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지 못하고 부패했으며 대제사장의 직분을 권력으로 보는 참다운 종교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권력 내분의 전쟁을 일삼으며 혈육간에 정권싸움으로 힐카누스왕가는 세월을 보냈다

아스몬가 왕가 시대에 사두개파나 바리새파가 조직되고 파벌에 속한 유대인들도 역시 왕조시대에 같은 동반적 관계로 권력의 탐욕과 종교 타락으로 유대인 사회는 종교의 퇴락과 병폐로 뿌리를 내리는 시대상을 자초하는 가운데 신구약사의 중간사의 시대는 흘러갔다

세상은 또 한번 회동을 치며 새로운 시대로 돌입한다. 아주 커다란 로마 제국의 외세가 침략함으로 힐카누스의 내분은 퇴락의 길로 걷게 된다.

그러나 왕조의 내분은 그칠줄 몰랐다 새로운 로마시대를 깨닫지 못하고 외세의 힘을 빌어가며 내분정권 전쟁은 독립이란 유대왕국은 아랑곳없이 오직 정권 탈환이라는 목적으로 외세의 힘까지 빌어가며 왕조 내분에서 생긴 싸움은 계속하지만 결국 모두 몰락한다.

결국 마지막 안티고누스 왕으로 힐카누스 왕가는 멸망하면서 왕가의 내분의 정권전쟁에서 그 기회를 이용하고 기생하며 비집고 나타난 자가 헤롯이다

로마의 속국이라도 당연히 유대인의 혈통으로 유대왕이 세워져야함에도 내분의 전쟁의 결과는 이방인의 헤롯 왕조가 탄생되는 종교왕국인 유대인의 명예에 먹칠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로마 속국 시대에 이방인이 유대왕으로 세워지며 오욕에 유대왕국은 새로운 이방인이 유대왕으로 통치하는 시대의 개막을 맡게 된다.

이방인 통치하는 수치스런 헤롯 대왕의 시대에 살면서도 그들은 또다시 대제사장 자리를 놓고 암투에 혼란을 맞게 된다. (그들은 유대의 독립보다는 대제사장의 자리에 온 힘을 기울인다)

 

10. 헤롯 대왕 시대 7대의 대제사장 임명권 발동 (BC37년-BC4년)

1). 49대 아나넬 대제사장 (BC37-BC35년, 헤롯 친구, 헤롯 첫 대제사장)

헤롯의 친구인 아나넬을 바벨론의 거주하는 유대인의 지지를 얻으며 파격적인 임명을 했다

아나넬은 헤롯 시대에 처음 임명된 대제사장이다

헤롯은 유대 힐카누스 왕가 마지막 왕인 안티고누스 2세 (BC38년)가 죽은 후 하스몬 왕조에서 대제사장 직분을 맡을 사람은 당연히 알렉산더 2세의 아들 아리스토 불러스3세 이었으나 그간에 하스몬 가문이 왕조의 힐카누스 왕가에 대한 대제사장을 겸한 통치시대에는 그 권한이 상당했음을 알고 대제사장의 권한을 축소시키려 벼르고 있었다.

그리고 대제사장을 자기 수하에 두려고 무명인인 바벨론에 거주하는 그의 절친한 친구인 아나넬을 불러와 대제사장을 임명했다 (유대인 정통파 혈통은 오직 유대와 예루살렘의 본토에 사는 정통파 혈통 유대인으로 인정되었다 )

2). 50대 아리스토 불루스 3세 대제사장(BC35년-BC34년)

아리스토 불루스 3세의 모친은 힐카누스 2세의 딸 알렉산드라였으며 왕가 결혼 통례에 따라 힐카누스2세의 동생인 아리스토 불루스 2세의 아들 알렉산도와 결혼하였다

자녀로는 딸. 헤롯의 둘째 아내 미리암네 1세와 남동생 50대 제사장으로 단명한 아리스토 불루스 3세다 (알렉산드라는 헤롯대왕 의해 부친과 두 자녀와 두 외손자와 자신까지 죽음을 맞는다 )

BC35년 17세의 어린 나이에 헤롯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어 약1년 만인 BC34년 18세에 헤롯에 의해 죽었다

아리스토 불루스3세의 임명 동기와 죽음

BC37년 헤롯의 장모요 힐카누스2세의 딸인 알렉산드라는 아나넬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한 것이 아스몬 가문에 대한 굴욕적 처사라며 헤롯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BC35년 그녀는 프톨레미 ,왕조 클레오파트라7세와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로 이용하여 헤롯이 아나넬을 대제사장직에서 쫓아내고 자기 아들 아리스토 불루스 3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BC35년 10월 장막절에 17세의 아리스토 불루스3세가 율법에 따라 대제사장 복장을 하고 제단에 제사를 드릴 때 백성들의 호감이 하늘에 닿을 듯 함으로 헤롯의 비위를 건드렸다

BC34년 헤롯은 여리고에 있던 하스몬 왕가의 궁전 근처 연못에서 아리스토 불루스 3세(당시나이 18세)가 수영하고 있을 때 신하를 시켜 그를 익사시켰다 이후로 헤롯은 하스몬 왕가 후손들을 다시 대제사장직에 임명하지 않았다

3). 51대 아니넬 대제사장 (BC34년-BC30년, 재 임명)

헤롯 대왕은 아리스토 불루스 3세가 죽자 친구 아니넬 재임명하였고 바벨론 주거 하는 유대인으로는 영광스러운 일이며 환호를 받았다

4). 52대 예수 대제사장 (BC30년-BC24년, 파비의 아들 예수)

애굽 알렉산드라 및 그 외에 애굽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지지를 얻으려 했다

헤롯은 아나넬을 파직하고 파비의 아들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파비라는 성이 애굽의 레온토 폴리스에 이는 묘석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파비가 애굽에서 온 가문임을 추정케 한다.

헤롯은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지지를 얻고자 아네넬을 임명했던 것처럼 애굽에 있는 유대인 출신의 제사장을 임명하여 그들로 부터 정치적 지지를 얻으려 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다시는 혈통직과 평생직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으며 대제사장직은 그 본래의 힘과 지위가 상실 되었다

헤롯이후 AD70년 로마에 멸망하기 까지 28명(30명)의 대제사장 가운데 파비 가문은 세 사람이다

파비 가문 - 애굽 및 애굽 알렉산드라 거주 유대인의 지지를 받으려 함

*.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대제사장 들

52대 파비의 아들 예수 (BC30-BC24년) 직무 6년

57대 시에의 아들 예수 (BC4년-AD6년) 직무 10년

74대 담누스의 아들 예수 (AD62년-AD63년) 직무 1년

75대 가말리엘의 아들 예수 (AD63년-AD64년) 처가 보에두스 가문. (헤롯 장인 시몬가문)

5). 53대 시몬 대제사장 (BC24년-BC5년 헤롯대왕의 셋째 부인 마리암네 2세의 장인)

헤롯의 장인 시몬. 보에두스의 아들 19년 직무.

헤롯은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제사장 시몬의 딸 마리암네 2세의 미모에 반해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결혼에 앞서 그 가문의 지위를 격상시켰으며 대제사장 예수를 급히 파직하고 그의 장인이 될 시몬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처럼 헤롯은 단지 자기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멋대로 대제사장을 파직 임명했으며 시몬은 BC24년에 임명되어 약 19년간 대제사장으로 활동하여 헤롯 가문의 지배기간 중 가장 오랫동안 대제사장직에 있었다.

BC5년경 미리암네 2세는 헤롯의 본처 도리스의 장남 아들 안티파터와 헤롯의 형제 페로라스와 공모하여 헤롯을 죽으려는 살인 음모를 묵인했는데 그것이 발각되어 헤롯에게 이혼 당했다 이때 미리암네 2세의 부친 시몬도 대제사장직에서 파면되었다

대제사장 시몬의 부친 보에두스의 가문에서 당시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던 애굽지역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다.

시몬이후에도 보에두스의 가문에서 대제사장이 여러 명 나오는데 헤롯이후 AD70년 유대 멸망하기까지 보에두스 가문 출신은 5명이다 .

*. 헤롯 대왕의 장인 시몬의 보에두스 가문 대제사장들

53대 시몬 BC24년-BC5년 (헤롯의 셋째 부인 미리암네2세 , 헤롯의 장인, 19년 직무)

55대 요아살 BC4년 시몬의 아들

58대 요아살(재임명) AD6년 시몬의 아들

56대 엘르아살 BC4년 시몬의 아들

66대 시몬 칸데라스 AD41년-AD42년 시몬의 아들

75대 가말리엘의 아들 예수 AD63년-AD64년 총1년. 그의 아내가 보에두스의 가문

6). 54대 맛디아 대제사장 (BC5년-BC4년 데오빌루스의 아들 맛디아)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실 때의 대제사장으로 추정

맛디아는 예루살렘 출신 데오빌루스의 아들로 기록 BC5년 헤롯대왕이 다섯 번째로 임명한 대제사장으로 BC4년3월에 해임되었다

헤롯과 온 예루살렘은 BC4년2월경 동방박사들로부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소동하였다

헤롯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라고 묻자 그들은 미가5:2에 예언된 대로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했다(마23:6)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롯은 자기 아들 안티파터를 죽이고 5일후에 자신도 죽었다

맛디아는 대속죄일 전날 어떤 여인과 동침하는 꿈을 꾸어 자신이 부정하게 되자 자신의 친척인 엘리무스의 아들 요셉 하여금 속죄일 하루동안만 대제사장직을 대행하게 했다

이후 헤롯이 심히 병들어 있을 때 유대의 저명한 율법학자 두 명이 백성들을 선동하여 헤롯이 성전에 세운 황금 독수리형상을 헐어버린 사건이 있었으며, 헤롯은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 맛디아를 파직하였다

7). 55대 요아살 대제사장 (BC4년 보에두스 가문. 헤롯의 장인 시몬 아들 요하살 )

헤롯의 셋째 부인이며 헤롯의 장인인 시몬의 아들로서 보에두스 가문에서는 부친을 이어 두 번째 대 제사장이며 헤롯대왕이 마지막으로 임명한 자이다

BC4년 초 헤롯은 맛디아 대제사장을 해임하고 대신 처남 요아살을 임명한 후 그해 유월절 직전에 죽었다

헤롯대왕 사후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 헤롯 아켈라오는 (BC4년-AD6년) 부친을 위해 7일간 애곡하였으며 얼마 후 유월절 축제 가 열렸다

이때 모인 군중들 가운데 소요가 일어나 아켈라오의 군인들이 일반 백성 3000명을 살해한 일이 있었다.

헤롯 의 아들인 아켈라오 와 안티바스가 왕권의 승계문제로 로마에 가서 아우구스투스의 판결을 받으러 갔을 때 요아살 대제사장도 로마로 유대의 대표단으로 가서 왕권을 유대인에게 돌려줄 것을 청원 한다 로마에서 돌아온 후 아켈라오왕은 요아살 대제사장을 경질시킨다. 요아살 대제사장의 해임 (BC4년)

8). 56대 엘르아살 대제사장 (BC4년 보에두스의 아들 엘르아살)

보애두스 가문의 부친에 이어 세 번째 대제사장이며 AD4년 아켈라오가 임명한 첫 번째 대제사장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에게 사절단을 보내서 자신들의 율법에 따라 살 수있는 자유를 달라고 청원하였다

그 자리에서 헤롯 아켈라오의 부정을 고발하면서 유대를 수리아에 병합시켜 왕권 통치나 그와 유사한 정부 형태가 아닌 로마 파견 총독의 통치를 받게 해 달라고 하였다

아켈라오는 대제사장 요하살이 그들을 도와주었다고 비난하면서 그를 해임시킨 후 그의 동생 엘르아살을 대신 임명한다.

아켈라오는 조상들의 율법을 어기고 그의 형인 알렉산더의 아내이자 갑바도기아 왕과 아켈라우스의 딸인 글라피라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유대인들은 이일로 그를 더욱 증오하였다

엘르아살을 대제사장직에서 1년도 못되어 해임시키고 시에의 아들 예수가 대제사장에 임명한다.

9). 57대 예수 대제사장 (BC4년-AD6년 시에의 아들 예수)

예수는 시에의 아들로 기록되어있다 헤롯 대왕이후에 등장한 대제사장 중에 예수란 이름을 가진자는 네명이다.

52대 파비의 아들 예수 (BC30-BC24년) 직무6년

57대 시에의 아들 예수 (BC4년-AD6년) 직무 10년

74대 담누스의 아들 예수 (AD62년-AD63년)

75대 가말리엘의 아들 예수 (AD63년-AD64년) 처가 보에두스 가문. (헤롯 장인 시몬가문)

10). 58대 요아살 대제사장 (AD6년 재임명, 보에두스 가문의 시몬 아들 요아살)

요아살은 보애두스 가문의 네 번째 대제사장이며 재임명 된 자다.

BC4년에 약1년간 대제사장을 지낸적이 있으며 AD6년 아켈라오에 의해 재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AD6년 다시 아켈라오왕에 의해 요아살이 대제사장에 재임명 된 후 얼마 못되어 로마 당국은 분봉왕 헤롯 아켈라오왕을 해임시킨다.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유대인들의 재산에 세금을 부과하려는 목적으로 “호적하라.” 는 명령을 내렸는데 당시 수리아 총독 구레뇨가 이를 시행하였다 당시는 요아살이 해임되기 얼마 전이었는데 그는 세금 징수에 거세게 반발하는 유대인들을 설득하여 잠잠하게 하였다

아켈라오왕이 추방된 후 수리아 총독 구레뇨(퀴리니우스)는 요아살 대제사장이 권력을 남용하였다는 이유로 대제사장에 해임했다

요세푸스는 호적이 다 이루어 졌을 때 가이사 아구스토가 악티움 해전(AD31년)에서 안토니우스에게 이긴지 37년째 되는 해는 AD6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1). 헤롯 아켈라오 분봉왕 3대의 대제사장 임명권 BC4년-AD6년

성경에는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가. 헤롯 아켈라오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이 되었다 함을 듣고 두려워하여 유대로 가지 않고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 동네에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2:22-23)

헤롯 아켈라오는 헤롯 대왕과 네 번째 부인 말데이스(사마리아인)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헤롯대왕이 죽기 전에 그를 첫 번째 후계자로 임명했다

BC4년부터 AD6년까지 약 10년간 치리 하였으며 유대 . 사마리아. 에돔 등 헤롯이 통치하던 지역의 절반을 통치하였고 세 명의 대제사장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즉위한 첫해 주전 4년 유월절에 반란의 기미를 보이는 유대군중 약3000명을 무차별 살육한 일과 폭도들을 지지했다는 구실로 대제사장을 파면한 일 . 아내와 이혼하고 불의하게 재혼한 일등으로 유대인의 원성을 샀다

결국 유대인들이 아켈라오를 로마황제에게 고소하여 그는 당시 골 지방의 한도시인 비엔나로 추방당한다.

이후로 다시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이 유대 지방을 치리하였다 (아그립바1세가 개입하여 파직된다

 

11. 수리아 총독 구레뇨. 1대의 대제사장 임명권 (AD6년-AD9년)

1). 59대 안나스 대제사장 (AD6년-AD15년 셋의 아들 안나스)

티베리우스(디베료) 황제 통치 15년 째 안나스 와 가야바 - 안나스 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었다.

AD6년 안나스는 셋의 아들로 수리아의 총독 구레뇨에 의해 임명되었다 (눅3:2.요18:13-24. 행4:6.)

안나스는 수리아의 총독이 임명한 첫 대제사장이며 신약성경과 랍비문서에도 여러차례 언급된 인물이다

티베리우스(티베로) 황제 통치 15년째에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었으며 (눅3:1-2)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였다(요18:13)

본래 대제사장은 한명이어야 하는데 신약 성경에서 안나스와 가야바를 둘 다 대 제사장으로 언급하고 있다(요18:24.행4:6) 구약 다윗시대에도 대제사장을 두 명 임명하여 직무를 관할케 하였다

당시 유대 지역에서 이들이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안나스의 임기는 AD15년에 끝나지만 그 후로도 계속 그의 아들들을 대제사장으로 세워 크게 영향을 미쳤다

AD.29년경 예수님이 잡히신 후 안나스에게 제일 먼저 신문을 받았는데 (요18:12-13. 19-24)이때도 안나스는 대제사장으로 호칭되었다 - 사위 가야바가 정식 대제사장이다

사도행전 4:1-6에서도 여전히 대제사장의 문중에 안나스가 기록된다.

안나스는 9년간 재임하였고 그의 아들 5명과 그 사위까지 모두 대제사장을 역임하였다.

*. 안나스와 다섯 아들(안나스 가문)이 예수님을 죽임

61대 첫째 아들 엘르아살 AD15년-AD17년 (직무1년)

63대 사위 아들 요셉 가야바 AD18년-AD36년 (직무18년) 예수님을 죽임

64대 둘째 아들 요나단 AD36년-AD37년 (직무1년) AD33년 요나단이 사주 스데반 죽임)

65대 셋째 아들 데오빌루스 AD37년-AD41년 (직무4년)

67대 넷째 아들 맛디아 AD42년-AD43년 (직무1년)

73대 다섯째 아들 안나스2세 AD62년 (직무3개월)

(안나스의 가문은 역대 제사장중 가장 세력을 확대하고 기독교 탄압. 역대 임명. 권력. 부. 등 최고의 권력을 자랑했다 )

 

12. 유대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4대의 대제사장 임명권(AD15년-AD26년)

발레리우스 그라투스는 AD15년 디베료 황제에 의해 루푸스의 후임으로 유대 총독직에 올랐으며 그가 재임한 11년 동안 4명의 대제사장을 임명하였다

헤롯 아켈라오가 가이사 아구스도에 의해 추방된 후 그가 통치하던 유대와 사마리아는 로마의 직접직인 통치 받게된다.

로마총독은 세금 징수를 위해 많은 세리를 고용했으며 납세를 위한 대규모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큰 반발을 사기도 했다(행5:37).

또한 유대 통치를 효과적으로 하기위해 유대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 임명권을 갖기도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임명했던 대제사장이 바로 예수님을 못 박도록 내어준 안나스의 사위 요셉 가야바이다

유대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는 AD15년, 안나스 대제사장을 해임하였지만 후임으로 안나스 집안사람을 배제 하지 않았다

1). 60대 이스마엘 대제사장 (AD15년-AD16년 파비의 아들 이스마엘)

이스마엘은 파비가문의 두 번째 대제사장이다 유대 총독 그라투스가 최초 임명한 대제사장으로 임명받은 지 얼마 못되어 해임되었다

동일한 가문과 동일한 이름으로 AD15년-AD16년에 대제사장이던 자가 있었다.

당시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을 포함한 지도자들 사이에 일어난 파벌싸움이 폭력사태로 번졌다

이로 인해 나라 안은 무정부 상태와 같은 극한 혼란에 빠져 정의가 공의가 완전히 짓밟히고 말았다

극도로 타락한 대제사장들은 타작마당에 노예들을 보내 제사장들이 받아야 할 십일조를 중간에서 무자비하게 가로챘다

2). 61대 엘르아살 대제사장 (AD16년-AD17년 안나스의 첫째아들 엘르아살)

엘르아살은 안나스의 다섯 아들 중 중 처음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 AD16년 유대 총독 그라투스가 임명하였으며 AD17년 까지 약 1년 정도 직무하였다.

3). 62대 시몬 대제사장 (AD17년-AD18년 카밋의 아들 시몬)

카밋의 아들 시몬은 AD.17년 유대 총독 그라투스가 임명하였으며 AD18년까지 약 1년 정도 재임하였다

탈무드에 속죄일 전날 밤에 대제사장 시몬이 이방 아랍 왕에게로 나아가 말씀 드렸는데 그때 “이방왕의 침이 그의 예복에 떨어져서 부정케 됨으로 그의 형제인 유다가 대신하여 속죄일에 성소에 들어가 직무를 수행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 이 사건은 그들이 대제사장의 예복을 매우 신성시했던 것을 말해준다

그는 1년에 단 한번뿐인 속죄일에 가장 중요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보지도 못하고 해임되는 것이다

4). 63대 시몬 요셉 가야바 대제사장 (AD18년-AD36년 안나스 사위 가야바)

요셉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로 안나스 집안의 세 번째 대제사장이다 (마26:3,57.눅3:2. 요11:49. 요18:13-요14.24.28.행4:6)

요셉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마 26:59)로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온 공회는 산헤드린을 뜻하며 당시 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서 산헤드린의 최고 의장이었다.

AD18년 본디오 빌라도의 전임총독 빌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라투스가 떠나고 본디오 빌라도 (AD26년-AD36년 )가 새 총독으로 온 이후에도 여전히 파직되지 않고 AD18년-AD36년까지 약 18년간 대제사장으로 활동하였다(눅 3:1-2)

그는 유대의 최고 종교 지도자였고 정치가와 외교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었으며 수리아 총독 비탤리우스에 의해 면직되었다.

요11:47-53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예수를 처리할 방도를 찾고 있을 때 가야바가 등장하며 백성들은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였다(마26:3)

마26:59에는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며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온 공회는 산해드린을 뜻하며 당시 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서 산헤드린의 최고의 의장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형 판결은 대제사장 중심의 산헤드린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13. 본디오 빌라도는 (AD26년-AD35년)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의 후임 총독

대제사장 임명권 행사 없었음

예수님께서 무죄하신 줄 알면서도 로마총독의 권한으로 십자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요19:1~16)

1). 본디오 빌라도 로마 보고서의 내용

유대인들의 반란이 두려워 예수님을 처형 시키도록 허락한 본 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키도록 허락한 후 본디오 빌라도 가 로마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쓴 보고서입니다.

일 명: 본디오 빌라도 본명 폰티우스 필라투스 .

유대 총독기간: AD26년-AD35년

로 마 황 제 : 티베리우스 황제(AD14년-AD37년)

공 문 서 명 칭 : 본디오 빌라도 보고서

법정에서 만들어진 공문서 : AD 26년-AD 30년

소 장 되 어 있 는 장 소 : 터어키의 성소피아 사원 영문 번역자: 도날드 N. 리드만 박사

간행물은 예루살렘 월간 : 더 마운트 자이언 리포터 지 간행

제 목 : 시온산 보고서

게 재 년 월 : 1974년

번 역 책 : 생명의 말씀사 발간한 책의 내용 기재

 

“빌라도의 보고서”

1. 로마의 황제, 디베리우스 가이사 각하에게

각하께 문안드립니다.

제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최근 수 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은 너무나 독특한 일이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나라의 운명까지 변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저는 사건이 일어난 대로 각하께 소상히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2. 왜냐하면 최근에 발생한 사건은 모든 다른 신들과는 조화될 수 없는 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발레리우스. 플라슈스총독을 계승하여 유대 총독이 된 날을 저주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3. 부임한 이래로 제 생활은 불안과 근심의 연속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직위를 인수하고 큰 연회를 베풀 것을 명하고 갈릴리의 영주들과 대제사장, 그리고 그의 부하직원들을 초청하였습니다.

4. 그런데 정해진 시간이 되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저와 제가 속하고 있는 정부 전체에 대한 일종의 모욕으로 간주하였습니다. 며칠 후 대제사장이 저를 방문하였습니다.

5. 그의 거동은 엄숙하였으나 외식에 가득찬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종교가, 그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로마사람들과 자리를 같이하는 것이라든지 먹는 것이라든지 마시는 것을 금지한다고 변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변명은 신앙심이 깊은 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의 안색으로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변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략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6. 그 순간부터 피정복자는 정복자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로마인들에게 이 나라의 제사장들을 요주의 할 것을 경고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벼슬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위해서는 그들의 어머니라도 배신할 자들입니다.

제가 통치하는 모든 도시 가운데 예루살렘은 가장 다스리기 힘든 도시라고 여겨집니다.

백성들은 매우 거칠어서, 저 자신 순간순간마다 폭동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7. 저는 폭동을 진압할 만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저의 지휘 하에 한 명의 백부장과 그가 거느린 군대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자기의 통치지역을 방어할 만한 충분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고 알려 온 시리아의 사령관에게 증원군을 요청하였습니다.

8. 우리 정부 전체의 붕괴를 초래케 하는 원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저는 가능한 한, 대중들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 제사장들이 폭도들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9. 그러나 저는 될 수 있는 데로 백성들의 마음과 입장을 탐지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제 귀에 들려온 여러 가지 소문들 중에 특별히 제 주의를 집중시킨 사건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젊은 청년이 갈릴리지방에 나타나,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새로운 법을 고귀한 열정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목적하는 바가 민중을 선동하여 로마제국에 대항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제 근심은 곧 걷히게 되었습니다.

10.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보다는 오히려 로마인에게 더 친근하게 말을 하였습니다.

어느날 저는 큰 군중이 모여 있는 실로라는 곳을 지나다가, 군중에 둘러싸인 젊은이가 나무에 기대어 선 채로 군중을 향하여 조용하게 연설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라고 누군가가 일러주었습니다. 그는 그의 연설을 듣고 있는 군중과 현저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어서 저는 그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30세가량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렇게도 마음을 잡아끄는 평온한 얼굴을 본 일이 결코 없었습니다.

예수와,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저 검은 턱수염과 황갈색의 안색을 가진 무리들과를 어떻게 대조할 수 있겠습니까?

11. 제가 온 것이 예수에게 방해가 되게 하지 않으려고 저는 계속 걸었으나 제 부관에게는 군중 속에 들어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제 부관의 이름은 만류스로서 그는 카타린을 잡으려고 에투루리아에 주둔한 적이 있는 공작대장의 손자입니다. 만류스는 유대지방에 오랫동안 거주한 고로 히브리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충성하여 저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총독청에 들어서자 저는 먼저와 있는 만류스를 발견하였으며 그는 실로에서 예수가 한 말을 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12. 제가 읽어본 어떤 철학자의 작품에서도 예수의 말에 비교될 만한 것은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항적인 유대인 중 한 사람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인가고 그에게 물었을 때, 그는 대답하기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많은 자유를 그 나사렛 젊은이에게 허용한 것은 이와 같은 그의 지혜로운 말 때문이었습니다.

13. 저에게는 그를 체포하여 본디오로 추방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였다면 그것은 로마정부가 사람을 다루어 왔던 지금까지의 관례와는 상반되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젊은이는 선동적이거나 반항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예수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보호의 손길을 그에게 뻗쳐 주었습니다.

그는 자유롭게 행동하였고 말하였으며, 사람들을 모아서 연설하거나 또 제자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어떠한 관청의 제재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우리 조상의 종교는 예수의 종교로 대치될 것이며, 이 숭고한 관용의 종교는 로마제국을 허망하게 붕괴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가련한 저는 유대인의 말을 빌자면 하나님의 섭리요, 우리의 말대로 하자면 운명의 도구로 쓰여진 것일 것입니다.

14. 예수에게 허용된 무제한의 자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유하고 권세 있는 유대인들을 자극하였습니다.

예수가 후자들에게 가혹하게 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제가 그 나사렛 젊은이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은 것은 정략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는 그들을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은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음이 가득하다."

또 한번은 부자가 많은 헌금을 내고 뽐내는 것을 보고 한탄하며, 가난한 자의 한푼이 하나님의 목전에서는 더욱 빛나는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15. 예수의 오만한 언동에 대한 항의가 날마다 총독청에 줄을 이어 들어왔습니다. 저는 예수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닥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선지자로 불리우는 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일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으며, 예수에 대한 진정서가 가이사에게 제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한 처사는 원로인에게 재가를 받은 것이었으며, 파르티안 전쟁이 끝나면 저에게 증원군을 보내주기로 약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폭동을 진압하기에는 우리의 군사력이 너무도 허약한 고로, 저는 힘없이 물러섬으로써 총독청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용히 성의 평온을 되찾는 방안을 강구하기로 하였습니다.

16. 저는 예수에게 글을 써 보내어 총독청에서 한번 만날 것을 청하였습니다.

예수가 왔습니다.

황제께서는 제가 로마인의 피에 서반아의 피가 섞여 흐르는 혈통을 지닌 사람으로서, 두려움 따위의 유약한 감정은 모르는 사람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나사렛사람이 모습을 나타냈을 때 저는 저의 접견실에서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다리는 쇳덩이로 된 손으로 대리석 바닥에 붙여놓은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으며, 그 나사렛 젊은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히 서 있는데도 저는 마치 형사범처럼 사지를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으나 제 앞에까지 다가와 서는 것만으로도 "내가 여기 왔나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참 동안 저는 이 비범한 사람을 존경과 두려움으로 응시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신들과 영웅의 형상을 그린 수많은 화가들이 아직 그려내지 못한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너무나 두렵고 떨려서 그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17. "예수여," 하고 드디어 저는 말문을 열었습니다. "나사렛예수여, 지난 3년 동안 나는 그대에게 연설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였소.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나는 조금도 후회가 없소. 그대의 말은 현인의 말이오. 나는 그대가 소크라테스 나 플라톤을 읽어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그대의 설교는 다른 철학자들의 그것을 능가하며 단순하고도 장엄한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황제께서도 알고 계시며, 그를 허락한 것을 스스로도 기쁘게 생각하고 있소.

그러나 나는 그대의 설교가 강력하고도 원한 깊은 적대자를 만들고 있음을 알려 드려야겠소.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니오. 소크라테스에게도 대적이 있었으며 결국에는 그들의 증오의 희생물이 되었다오.

그대의 경우는 그대의 설교가 그들에게 매우 가혹하다는 것과, 내가 그대에게 자유를 허락한 것으로 그들이 나를 반대한다는 것 때문에 설상가상으로 시끄러워지고 있소.

그들은 로마정부가 그들에게 허용한 작은 권리마저도 나와 그대가 손을 잡고 그들로부터 빼앗으려 한다면서 고소까지 하고 있소.

내가 그대에게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라 부탁으로서, 이제부터는 그대가 설교할 때에 좀 더 신중하고 온화한 말로하며, 그들을 고려하여 대적의 자존심을 상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어리석은 군중들을 충동질하여 그대를 대적하지 않도록 하고 또 나로 하여금 법의 도구 노릇을 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오."

18. 그 나사렛사람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땅의 군주여, 그대의 말은 참된 지식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격류를 명하여 산골짜기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해 보십시오.

그러면 계곡의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 버릴 것입니다.

그 급류는 자연과 창조주의 법칙에 순종한다고 그대에게 답변할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그 급류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고 계십니다.

진실로 그대에게 이르노니 사론의 장미가 피기 전에 정의의 피가 엎질러질 것입니다."

"당신의 피는 엎질러지지 않을 것이오."하고 저는 깊은 감동을 받고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의 지혜는 로마정부에 의하여 허용된 자유를 남용하는 거칠고 오만한 모든 바리새인보다 더욱 값진 것이오.

그들은 가이사에 대한 음모를 꾸며, 가이사는 폭군으로서 그들의 멸망을 도모하고 있다는 말로 무식한 자들을 충동하여 황제의 관대하심을 공포로 조작시키고 있소.

19. 오만무례하고 철면피같은 인간들이오! 그들은 악한 계획을 도모하기 위해서 때로는 양의 가죽을 쓰는 티베르강의 여우임을 그들 자신은 모르고 있소.

나의 총독 관저는 밤낮을 물문하고 그대에게 도피처로 제공될 것이오."

예수는 관심 없다는 듯이 머리를 저으며, 근엄하고 숭엄한 미소를 띠면서 말하였습니다. "때가 이르면 그 때는 땅 위나 땅 아래 어느 곳에도 인자를 위한 도피처는 없을 것입니다.

의의 도피처는 저기에 있습니다." 라면서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의 책에 기록된 말씀은 성취되어야 할 것입니다."

"젊은이여,"하고 저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습니다. "그대는 나의 요청을 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오.

나의 통치하에 있는 지방의 안전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소.

당신은 설교할 때 좀 더 온건한 태도를 취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오. 나의 명을 어기지 않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결과가 어떠할 지를 그대도 잘 알 것이오. 와 주어서 고맙소. 잘 가시오."

20. "땅의 군주여,"하고 예수가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전쟁을 일으키려고 온 것이 아니라 평화와 사랑과 자비를 주려고 왔습니다.

나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로마세계에 평화를 주던 바로 그 날에 태어났습니다.

핍박은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핍박을 예상하고 있으며, 나에게 길을 보여주신 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그 핍박을 잘 감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세상 적인 사려분별과 지각을 삼가십시오. 성막에 희생 제물을 잡아놓는 것은 그대의 권력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말을 한 후 그는 투명한 영혼처럼 접견실 휘장 뒤로 사라져 갔습니다.

저는 그 젊은이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중압감에 해방되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21. 예수를 대적하는 자들은 그 당시 갈릴리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헤롯에게 편지를 써서 그 나사렛사람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헤롯이 그의 성격대로 하였다면 그는 예수를 당장 잡아 사형에 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왕의 위엄을 자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의원에 대한 그의 영향이 무시당할 지도 모르는 행동을 범하는데 주저하였으며 또 저처럼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관리로서 한 유대인 때문에 겁을 집어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전에 헤롯은 총독청으로 저를 방문하였으며 얼마간 가벼운 대화를 나눈 후, 떠날 즈음에 나사렛사람에 대한 제 견해가 어떠한지를 물었습니다.

22. 저는 대답하기를 예수는 가끔 위대한 민족이 드물게 배출해 내는 위대한 철인 중의 한사람으로 그의 교훈은 결코 처벌받을 만한 것이 아니므로 로마정부는 그 자신의 행동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언론의 자유를 그에게 허용하기로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헤롯은 음흉하게 웃어 보이면서 마지못해 하는 투로 인사하고는 떠났습니다.

유대인의 큰 축제가 다가오고 있었으며 백성의 여론은 유월절 의식에서 항상 감정을 표명하는 일반 백성의 환희에 편승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은 그 나사렛사람의 죽음을 시끄럽게 요구하는 소란한 군중들로 술렁이고 있었습니다. 제가 파견한 밀사는 성전의 금전이 군중들을 동원하는데 사용되고 있다고 전해 왔습니다.

위험은 점점 더 가중되었으며 한 로마의 백부장은 멸시와 모욕을 당했습니다.

저는 시리아의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어 100명의 보병과 될 수 있는 데로 많은 기병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습니다.

23. 저는 반역하는 성한 가운데서 얼마 되지도 않는 정병들과 함께 외톨박이가 된 것 같았으며 폭동을 진압하기에 너무 약한 탓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을 너그럽게 대해 주는 수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붙들고 있었으며 선동적인 폭도들은 총독청에 대하여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그들의 상전의 명령만 믿고 있었으며, 제가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말해 보라고 눈짓을 했을 때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고래고래 고함치기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때는 세력 있는 세 당이 예수를 대적하기 위해 일심동체가 되었습니다.

첫째로 헤롯당과 사두게파로서 그들의 선동적인 행동은 두 가지의 동기 즉 그들은 나사렛사람을 미워하였으며 로마의 속박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24. 로마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기를 가지고 거룩한 성에 들어왔다는 것 때문에 저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비록 제가 어떤 치명적인 죄를 범하였다고 해도 신성모독죄 보다는 덜 흉악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불만의 씨가 그들의 가슴속에 사무쳐 있었습니다.

저는 성전의 은금의 일부를 공공건물을 건축하는데 사용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제안은 무시당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공공연하게 예수의 대적임을 자처하고 다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정부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는 자들로서 그 나사렛사람이 지난 3년 동안 그가 가는 곳마다

바리새인들을 혹독하게 질책한 것에 대하여 끔찍한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만의 힘으로 행동하기에는 너무도 두렵고 약하다는 것을 알고 헤롯당과 사두게파와의 불화를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이들 세 당 외에도 저는 언제나 소요에 끼어들기 잘 하며 무질서와 혼란을 일으키는 데는 한몫을 잘 담당하는 분별없고 야비한 군중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예수는 대제사장 앞으로 끌려와 사형으로 정죄되었습니다.

25. 대제사장 가야바가 중재를 부탁해 온 때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는 예수의 유죄판결을 확인한 후 처형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예수는 갈릴리사람이요 그 사건은 헤롯의 관할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니 거기로 보내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교활한 그 영주는 겸양을 표시하는 척 하면서 가이사의 대리자인 저의 명령을 거절하고 그 사람의 운명을 제 손에 위탁하였습니다.

곧 저의 관저는 포위된 성보의 형세를 띄었고 매순간마다 불만에 가득찬 터질 듯 한 군중들은 그 수가 증가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나사렛산지에서 몰려온 군중들로 넘쳤으며 전 유대인들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26. 저는 장래의 운명을 내다본다는 까울 지방의 여자를 아내로 두고 있습니다.

아내는 제 발치에 엎드려 몸을 맡기고 울면서 말하였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조심하십시오. 저 사람에게 손대지 마십시오. 그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어젯밤, 저는 환상 중에서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물 위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 바람의 날개를 타고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보세요.

기드론 골짜기는 피로 물들어 붉게 흐르고 있었고 가이사의 조상은 대량학살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중간 기둥들은 퇴락하였고 태양은 무덤 속의 처녀처럼 슬픔 속에 면사포로 가리고 있었습니다.

오! 빌라도여, 악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아내인 제 애원을 듣지 않으신다면 로마중의원이 받을 저주가 두렵고 가이사가 당할 괴로움이 두렵습니다."

27. 이때는 이미 몰려온 군중들의 무게로 층층대의 대리석 계단이 삐걱거렸습니다.

그들은 그 나사렛사람을 다시 저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저는 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재판하는 장소로 나아가서 엄격한 어조로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 나사렛사람의 죽음이요."하고 그들은 대답하였습니다. "무슨 죄 때문인가?" "그는 참람한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전의 황폐를 예언하였으며 그 자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유대인의 왕, 메시야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로마의 법은," 라고 저는 말하였습니다. "그러한 죄는 사형에 처하지 않는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냉혹한 폭도들이 소리 질렀습니다. 분노한 폭도들의 고함소리는 관저의 기초까지 흔들어 놓았습니다.

군중 속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침착하게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그 나사렛사람이었습니다.

28. 무자비한 핍박자들로부터 예수를 보호하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헛수고로 돌아가고 저는 마침내 그 순간 예수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생각된 방법을 취하기로 하였습니다.

즉 이러한 명절에는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것이 그들의 관례였으므로 저는 예수를 자유롭게 놓아 소위 그들이 일컫는 속죄 염소로 삼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그들에게 형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내리기 위하여서는 하루를 온전히 금식하지 않고서는 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그들 자신의 법을 들어, 앞뒤가 맞지 않는 그들의 주장의 모순성을 지적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죄 선고는 산헤드린의 동의를 얻어 의장의 서명을 받아야 하며 또 어떠한 범죄자일지라도 형의 확정 선고를 받은 당일에는 그 형의 집행을 할 수 없으며 다음 날에 집행한다 할지라도 집행 전에 산헤드린이 전 경과를 검토해 보아야 하며

또 그들의 법에 따라서 한 사람이 기를 가지고 재판정 문에 서있는 동안 다른 사람은 말을 타고 좀 떨어진 곳에서 범죄자의 이름과 죄명과 증인의 이름을 소리 높이 외쳐, 혹시 누가 그를 변호할 사람이 있을 지 여부를 알아봐야 하며, 형 집행 도중 범인이 세 번 뒤를 돌아보아서 새로운 사실로 자신에게 유리한 변호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깨우쳐 주었습니다.

29. 저는 이러한 구실을 말해 줌으로써 그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복종하기를 바랐으나 여전히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저는 그들의 마음을 충족시켜 줄 생각에서 예수를 채찍질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군중의 분노를 증가시켰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대야를 가져오라고 하여 소란스러운 군중 앞에서 제 손을 씻음으로써 나사렛예수를 죽음에 내어 주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만 그것도 허사였습니다.

이 철면피 같은 군중들이 갈구하는 것은 바로 예수의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가끔 시민폭동에서 노도한 군중을 목격하여 왔으나 이번처럼 격렬한 폭동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마치 지옥의 모든 유령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것과 같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군중들은 걸어다닌다기 보다는 갑자기 땅에서 불쑥불쑥 솟아나는 것 같았으며

총독 청사의 입구에서부터 시온산까지 이르는 군중들은 넘실거리는 파도를 따라 움직이는 소용돌이처럼 보였고,

판노니아의 공회소의 소동이나 폭동에서도 결코 들어 볼 수 없는 가지가지의 해괴한 소리를 지르며 모여들었습니다.

30. 겨울날 황혼 무렵처럼 날이 어두워지자, 저 위대한 줄리어스· 시저가 죽었을 때처럼 적막하였습니다. 마치 3월 보름날 같았습니다.

모반을 일삼는 이 성을 위임받은 통치자로서, 저는 접견실 기둥에 기대어 서서 그 죄 없는 나사렛 젊은이를 처형하려고 끌고 다니는 어두컴컴한 지옥의 악마 같은 저들의 무서운 계략을 꺾을 방안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주위의 모든 것이 황량하게 보였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주민들을 게모니카로 가는 장례문을 통하여 모두 토하여 냈습니다.

황막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제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31. 저의 위병들은 기병과 백부장이 가세한 가운데 무력에 의한 질서유지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저는 홀로 남았으며, 그때 잠깐 동안 지나간 그 순간은 마치 저 자신이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바람결을 타고 골고다에서 들려오는 큰 부르짖음 소리는 일찌기 인간의 귀로는 들어본 적이 없는 고통의 소리를 발하고 있었습니다. 검은 구름이 성전 꼭대기 위에 드리워졌으며 마치 면사포를 가리운 것처럼 예루살렘을 덮고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에 나타난 징조들은 너무도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마치 디오누시오가 "창조주가 고통을 당하고 있든지 우주가 떨어져 나가고 있든지 둘 중의 하나다"라고 크게 소리 질렀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가공할 자연현상이 일어나는 동안 애굽에는 무서운 지진이 일어났으며,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으며 미신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은 거의 죽음의 공포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안디옥사람인 나이 많고 학식이 풍부한 빌도살이라는 한 유대인은 이 지진소동이 있은 후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32. 그가 놀라서 죽었는지 아니면 슬픔으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는 그 나사렛사람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날 밤 첫 시간이 되기 전에 저는 외투를 걸치고 성안으로 들어가 골고다로 향하는 문으로 가 보았습니다.

그 제물은 죽어 있었습니다.

군중들은 아직도 흥분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침울하여, 말없이 절망에 빠진 상태로 집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목격한 사실은 그들을 공포와 양심의 가책으로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저는 또 저의 적은 로마병정의 일단이 슬픔에 잠긴 채 지나가는 것을 보았으며 기수는 슬픔의 표시로서 독수리표 깃발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또 병정의 일부는 무엇인가 혼잣말을 하면서 지나갔지만 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33. 어떤 사람들은 신들의 뜻을 좇는 로마인들을 당황케 하는 기적들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한 무리의 남녀들이 걸음을 멈추고는 되돌아서서 움직이지도 않고 어떤 새로운 경이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갈보리언덕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허탈한 마음과 슬픔에 차서 총독 청에 돌아왔습니다. 그 나사렛사람의 피가 아직 얼룩져 있는 계단을 오르다가 저는 문득 한 늙은이가 무엇을 탄원하는 듯 한 태도로 서있는 것과 그 노인 뒤에서 몇 명의 로마사람들이 눈물을 지으면서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내 발 앞에 몸을 굽히고 크게 통곡하였습니다.

늙은 노인이 울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으며, 비록 외국사람이기는 하지만, 함께 있는 로마사람과 같이 제 마음은 슬픔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날 제가 본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34. 저는 그렇게 격한 감정을 가져본 체험이 없었습니다.

예수를 반역하여 판 사람들이나 그렇게도 반대 증언을 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그의 피 값을 우리에게 돌리시오." 하고 큰소리 쳤던 무리들은 비겁한 똥개같이 쑥 들어가버려, 그들의 이빨을 식초로 씻은 듯 시침을 떼고 있었습니다.

제가 들은 대로 예수가 죽은 후에 부활하리라는 그의 가르침이 사실이라면 이 가르침은 많은 군중 가운데서 실현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35. "영감님," 저는 감정을 억제하고 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시며 바라는 요구가 무엇입니까?" "저는 아리마데요셉 이라고 합니다."하고 노인은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나사렛 예수를 장사 지내고 싶습니다. 그것을 허락해 달라고 당신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당신 소원대로 하십시오."하고 저는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저의 부관 만류스에게 명하여 병정 몇 사람을 대동하고 가서 매장하는 것을 감독하고 불경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며칠 후 그의 무덤은 비어 있었으며, 그의 제자들은 각처로 다니면서 예수가 자신이 말한 대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다고 전파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건보다 더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36. 이 사실에 대해서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제 나름대로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황제께서도 헤롯을 시켜 조사하여 보시면 저에게 잘못이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묘실에 예수를 매장하였습니다.

그가 예수의 부활을 예상했는지 아니면 또 다른 묘실을 준비하려던 것인지는 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가 매장된 다음날 제사장 한 사람이 총독 청으로 와서 제게 말하기를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 숨긴 후 그가 생전에 예언한 대로 살아난 것처럼 꾸미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37. 저는 그 제사장을 친위대장인 말커스에게 보내어 무덤을 지키기에 충분한 수대로 병정을 데리고 가서 배치하라고 한 후, 만일 무슨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들의 책임이지 로마정부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큰 흥분이 일어났으며 저는 더 큰 근심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슬람이라는 사람을 보내어 자초지종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그는 제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연상할 수 있도록 자세히 말하여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무덤 위에서 부드럽고 아름다운 빛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는 여자들이 그들의 풍속대로 예수에게 발라드릴 향유를 가지고 왔는가 하고 추측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그는 여자들이 파수군을 통과할 수 없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이러한 여러 생각이 그의 마음에 스쳐가는 동안 이상하게도 온 주위가 환하고 밝게 비취고 거기에 이미 죽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수의를 입은 채로 서 있는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38. 그들 모두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에 충만하여 환호하는 듯 하였으며 동시에 그 주위와 위로부터 그가 들어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왔으며 온 누리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가득차고 넘친 것 같았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보고 듣는 동안 땅은 기고 헤엄치는 것 같았고 그는 토할 것 같고 힘이 없어 일어설 수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대지는 그 아래에서 헤엄치는 듯하여 그의 감각은 마비되고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39. 정신이 돌아왔을 때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의 현기증이 잠에서 깨어나 너무 갑자기 일어남으로 흔히 있는 것 같은 그런 경우가 아니었는가 물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잠들은 것이 아니라, 마치 임무 소행 중에 잠을 잤기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아 죽는 경우와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병정들은 서로 교대로 잠을 잤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광경은 얼마 동안이나 계속되었는지 물었습니다.

40. 그는 대답하기를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약 한 시간쯤 되지 않았나 짐작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정신이 돌아온 후 그 무덤에 가보았느냐고 물었으나 못 갔다고 대답하였고 그 이유는 교체병이 오자마자 그들이 숙소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에게 질문을 당하였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제사장은 밤에 일어난 사건이 지진이었으며 파수군들이 모두 잠들었을 때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간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에게 돈을 주겠다고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41. 그러나 그는 거기서 한 사람의 제자도 보지 못하였으며 시체가 없어졌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으며 누군가의 말을 듣고 후에 알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같이 대화한 제사장들의 예수에 대한 견해가 어떠하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제사장이 더러는 예수는 남자도 사람도 아니며 마리아의 아들도 아닐 뿐더러 베들레헴의 처녀의 몸에서 탄생된 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였다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만일 유대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이 모든 것이 그 사람의 손에 있다는 사실이 그를 따르는 자들이나 배척자들에 의하여 알려지고 증거 된 것처럼 그 모든 사실이 그 사람의 생애와 조화되기 때문입니다.

42. 그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바다를 잠들게 하고 폭풍을 멈추게 하고 고기를 잡아 그 입에서 은전을 얻어낼 수 있었던 분입니다. 만일 모든 유대인들이 증거 하는 것처럼 그가 했다고 하는 많은 일들을 그가 할 수 있었다면 그를 대적하게 했던 그의 모든 주장은 사실일 수밖에 없다고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는 범죄함으로, 어떤 법을 어김으로써 또 누구를 그릇되게 함으로써 비난을 산적은 없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그를 지지하였던 사람 뿐 아니라 그를 대항하였던 수많은 사람들까지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옆에서 말커스가 말한 것처럼 나는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43. 각하여, 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사실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이번 사건에 있어서 안티파터가 제게 관한 여러 가지 가혹한 평을 하였다고 들었으므로 황제께서 사건의 전모를 아신 후 제가 취한 행동에 대하여 바른 판단을 내려 주시도록 자세히 쓰느라고 많은 애를 썼습니다.

각하의 건승을 빕니다. 저는 각하의 가장 충실한 신하입니다.

폰티우스 필라투스

 

14 . AD26년 예수님의 수세 및 공생애 시작

AD30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 시대에 파벌들의 시대

1). 예수그리스도께서 바리새파의 대한 질책의 말씀을 하셨으나 사두개파에 대하여 질책하지 않으셨다

①. 종말의 심판은 믿는자의 심판이다

당시 사두개파는 메시야 왕국이나 천국복음에 대한 것이나 부활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형식적 율법에 따라 성전을 지키며 대제사장의 직무로 관계된 일과 그에 따른 세력 확장으로 인하여 얻어진 물질로 귀족의 삶을 꾸려가는 자들이다

오늘날 다원주의 추정하는 종교적 입지를 마련하는 세태에 비유를 해본다.

오늘날 다원주의를 선택한 일부 기독교에서는 다른 종교에 부활을 인정함과 같다 - 다른 종교에서 죽으면 새로 환생 한다든지 등등,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퇴락하게 한다.

종말에 심판에서 오직 믿는자의 심판으로 말씀하셨으므로 그 외에 안 믿는자의 대한 말씀은 없다

매는 고통이 온다. 그러나 매를 맞는 자격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자이다.

②.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한 질책

마태복음 23장은 외식하는 바리세인에 대한 책망의 장이다.

③.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시대적인 이해관계의 동조와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죽임

사두개파의 입지(애국심을 불러일으킨다)

예수그리스도인하여 많은 무리로 인한 군중의 인파로 설교하였음을 보고 이러한 상태의 소요가 일어날 경우 로마 당국은 그렇치않아도 유대인과 유대인의 종교를 가시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로마당국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러한 종교적 소요사태를 방관시 곧 반란으로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으므로 이사태가 방관하면 로마의 제재를 받을 수 있음을 우려한다.

다시한번 유대는 바벨론시대와 같은 포로로 철저히 멸망하게 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수많은 군중들의 모임은 더 이상 방관하면 않된다.

우리는 속국의 시대에 지난날과 같은 처절한 비극으로 지난날과 같은 일이 반복함은 없어야 되기에 어디든 민중의 모임을 일으키는 기독교는 철저히 막아야한다

또한 사두개파는 성전과 대제사장의 직무의 막강한 입지가 기독교로 인하여 율법이 무너지면서 사두개파의 세력이 쇠퇴될까 두려워하였다

바리새파의 입지

죄 없는 예수그리스도를 죽일 필요까지 있겠느냐는 의견이 분분 했다

바리새파측은 성전의 직무대한 권한도 없고 얻어지는 이익 관계는 없었다.

그러나 바리새파 측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고립생활을 하는 옛세이파와 국가를 염려하는 우국의 열심당원들인 과격파가 있었기에 기독교로 인하여 유대의 독립과 안전을 염려하며 유대 존망에 대한 생각하는 마음에 사두개파와 일치하면서 기독교 탄압을 사두개파와 합세 하였다

한편 바리새파에서는 만약에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인 천국복음이나 부활이나 종교적인 신앙 면에서는 얼마든 가능하며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이 옳을 수가 있으나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일이라 자신들을 위로하며 사두개파의 기독교 탄압을 묵시하고 찬성을 표를 던졌다

AD66년 바리새파 유대인들의 중심으로 유대 전쟁은 발발하게 됨으로 이스라엘은 멸망한다.

전쟁 중에도 바리새파의 분파로 인한 분파싸움은 지도 세력의 우위권 다툼으로 또 하나의 타락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과 멸망과 수많은 유대인이 학살되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노예로 팔려갔다)

 

15. 수리아 총독 비텔리우스. 2대의 대제사장 임명권 (AD35년-AD39년)

1). 64대 요나단 대제사장 (AD36년-AD37년 안나스의 둘째 아들 요나단)

루시우스 비텔리우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에 BC34년 로마 집정관 BC35년 수리아 총독.에 임명되어 BC39년까지 4년간 재임기간동안 2대의 대제사장을 임명. 해임했다

AD35년 수리아 총독 비텔리우스가 유대 총독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시기에 수리아 총독은 유대총독의 상급기관으로 유대총독을 해임할 권한이 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주고 로마인들이 관리하던 제사장 예복을 대제사장이 관리할 수 있도록 재가 해 주는 등 환심을 산후 가야바를 파직시키고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요나단은 안나스의 아들로 안나스 가문의 네 번째 대제사장이다

요나단은 강경파로 안나스 가문의 제일 악한 인물이다

스데반을 사주하여 죽였으며 예수님을 죽이는 데 주모자 역할을 물론 로마 벨릭스 총독도 암살을 사주한자이나 이런자도 대제사장에 임명된다.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과 안나스 가문 기독교 박해 첫 주역들로서 요나단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이었다.

예수님을 심문하는 요나단의 부친 안나스 예수님을 죽인 산헤드린 의장인 대제사장인 가야바 대제사장 안나스 사위다.

스데반 죽임을 사주하는 요나단은 산헤드린 공회의장이요 대제사장이었다.

AD33년 기독교인들에 대한 첫 박해와 스대반의 순교 사건이 발생했다 (행7장 ~ 8:1).

무리들은 거짓 증인을 세우고 스데반 모함하여 산헤드린 공회를 넘겼다 (행6:11-15).

사람들의 거짓 고소를 들은 산헤드린 공회 의장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이것이 사실이냐 (행7:1)라고 물었다

스데반은 자기 생명이 다하기까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한 진정한 순교자다 (행6:8. 7:60).

여러명의 적대자들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 하나를 당해 내지 못하였다(행6:10)

스데반의 죽음은 폭도들이 대제사장 요나단의 사주를 받아 불법적으로 자행한 일이다 스데반은 총독이 아닌 산해드린의 재판을 받았으며 (행6:8.-8:1). 아무 죄도 없었으나 성 밖으로 끌려가 돌에 맞아 처형되었다 (행7:58. 레24:14)

AD53년 이후에 벨릭스 총독을 암살하는 요나단

훗날 요나단의 지지로 유대 총독직에 오를 벨릭스 (AD52년-AD60년)는 정책상의 이유로 요나단이 자신을 반대하고 나서자 아그립바 2세 여동생 유부녀 루드실라을 유혹하여 결혼한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심문하며 감옥 가두었다. 바울을 가둔 이유는 금전을 바랐기 때문이다

요나단의 가장 신뢰하는 친구 도라스를 이용하여 벨릭스를 강도떼에게 죽게 하였다

 

2). 65대 데오 빌루스 대제사장 (AD37년-AD41년 안나스의 셋째 아들 데오빌루스)

데오빌루스는 안나스의 아들이며 안나스 가문의 다섯 번째 대제사장으로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데오빌루스라는 이름이 그의 손녀딸 여호하나의 납골당에 있은 비문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비문에는 대제사장 데오빌루스의 아들 여호하난의 딸 여호하나라고 기록 되었다

요세푸스(유대 역사학자)의하면 대제사장 명단에 AD1세기 여호하난이란 대제사장이 없으므로 비문에 기록된 대제사장은 분명히 데오빌루스를 가리킨다.

수리아의 총독 비텔리우수에 의해 임명 되었으며 AD37년 티베리우스 황제가 죽던해 부터 AD41년 헤롯 아그립바1세가 분봉왕이 될 때까지 대제사장으로 활동하였다

헤롯 아그립바 는 AD41년 분봉왕이 된 후 데오빌루스를 파직하고 시몬 칸데라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16. 헤롯 아그립바 1세 (AD41년-AD44년 사이 3대의 대제사장 임명권)

1). 66대 시몬 칸데라스 대제사장 (AD41년-AD42년 보에두스 아들 시몬 칸데라스)

보에두스 가문의 네 번째 인물이고 다섯 번째 대제사장

헤롯 대왕이 임명한 (헤롯대왕의 셋째 부인의 장인 시몬의 아들들, 이 가문을 보에두스 가문)

아그립바1세가 임명한 (해롯대왕 장인 의 형제)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데오빌루스를 파직하고 보에두스의 아들 시몬 칸데라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2). 67대 맛디아 대제사장 (AD42년-AD43년 안나스의 넷째 아들 맛디아)

맛디아는 안나스의 아들이며 안나스 가문의 여섯 번째 대제사장이다

아그립바1세에 의해 시몬 칸데라스가 해임된 후 맛디아가 임명되었으며 AD42년~AD43년까지 약 1년간 대제사장으로 활동하였다

맛디아 형 요나단(64대 대제사장)의 추전으로 된 것으로 보아 당시 요나단은 꽤나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68대 엘리오네우스 대제사장 (AD43년-AD45년 칸데라스의 아들. 엘리오네우스)

AD43년 헤롯 아그립바1세가 맛디아를 해임하고 간데라스의 아들 엘리오네우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AD44년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자 그후 엘리오네우스는 1년 정도 대제사장직을 더 유지하다가 AD45년 칼키스(현 레바논)의 헤롯에게 해임되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죽음이후 파견된 유대 총독 쿠스피우스 파두스(AD44년-AD46년)는 대제사장의 옷을 안토니아성에 두고 로마 관원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에 유대인 지도자들을 AD45년 로마 황재 글라우디오에게 탄원하였고 이때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황제를 설득 시켜 유대인들이 대제사장의 옷을 관리할 수 있게 하였다

4). 헤롯대왕의 힐카누스혈통의 손자 아그립바1세

아그립바 1세는 헤롯대왕과 아스몬 왕가의 마리암네 1세(힐카누스2세 외손녀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아리스토 불루스가 낳은 아들 즉 헤롯대왕의 손자이다

그 형제는 아리스토 불루스, 헤로디아 (마14:3-11, 막6:17-28, 눅3:19) 칼키스의 헤롯 등이다

그는 칼라굴라 황제와 두터운 친분으로 AD37년 헤롯 빌립의 영토를 받았고 AD41년 황제로 즉위한 글라우디우스 (마11:28, 18:2)가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그에게 하사했기에 때문에 그 영토가 헤롯대왕 당시의 영토의 버금갈 정도로 확장되었다

그 후 3년 AD41년-AD.44년 동안 아그립바 1세는 세 명의 대제사장을 임명 및 해임하였다

4-1). 아그립바 1세는 사도 야교보 처형과 기독교 핍박으로 인해 신적 존재로 추앙 받음

그는 또 유대인의 신임을 얻기 위해 세베데의 아들 사도 약고보를 처형하고 사도 베드로를 체포하여 처형하려했다 기독교를 핍박하는데 앞장서면서 유대인들에 환심을 샀다 (행12:1-4)

그의 여동생 헤로디아는 헤롯 안티바스 결혼하고 세례요한을 목을 베개함으로 악녀로서 유명하게 된 인물론 신약사에 첫 번째 순교한 세례요한의 죽인 장본인이다

그러나 AD44년에 백성에게 신으로 추앙받으며 교만히 심히 행하다가 갑작스럽게 충이 먹어 죽었다 (행12:21-23.)고 하였는바 이는 첫째는 자신을 신으로 간주했던 교만한 죄이고 두 번째는 교회를 핍박하고 사도를 죽인 죄다 (행12:1-2.말2:2.고전 10:31.)

그는 로마의 막강한 배경으로 선조 헤롯대왕에 버금가는 통치 권한을 가졌고 순탄한 정책을 구사하여 헤롯 왕조시대에 최고 왕권 누릴 수 있었으나 너무 자만하여 신적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으나 결국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고 단명 한다.

그의 아들은 아그립바 2세이며 딸들은 버니게와 드루실라가 행25:13. 행14:24에 등장 한다.

 

 

17.칼키스의 왕 헤롯 (AD44년-AD49년 사이 2대의 대제사장 임명)

1). 69대 요세푸스 대제사장(AD44년-AD49년)

2). 70대 아나니아 대제사장(AD44년-AD49년)

아나니아는 사도 바울의 사역기간에 등장하는 대제사장으로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을 폭력으로 막으려 했다

 

18.헤롯 아그립바 2세 (AD50년-AD66년 6대의 대제사장 임명권)

1). 71대 이스마엘 대제사장 (AD59년-AD61년 파비의 아들 이스마엘)

이스마엘은 파비의 가문에서 등장한 세 번째 대제사장이다

이스마엘은 AD59년 아그립바 2세가 처음으로 임명한 대제사장이며 베스도(AD60년-AD62년)가 유대 총독일 때 대제사장으로 있었다.

이스마엘 은 AD60년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사도 바울을 고소했던 대제사장이다(행25:1-2)

2년간 (AD58년-AD60년 )유대 총독 벨릭스에게 구금되었던 사도 바울에 대한 선고가 유예된 채 네로 황제(AD54-68년 )에 의해 벨릭스가 후임으로 베스도가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행24:27. 25:1).

베스도가 부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때 대제사장들과 유대인중 높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고소하였는데 (행25:1-2) 여기 대제사장들은 바로 이스마엘과 전임 대제사장 아나니아(행24:1)등 산해드린 공회원들을 카리킨다.

총독 베스도는 사도 바울에게 특별한 죄목이 없음을 확인하였으나 (행25:24-25)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유대인의 산헤드린 법정에 서겠느냐 물었다 (행25:9).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가 로마 시민권자 이므로 가이사 앞에서 심문을 받겠노라 하였고 베스도는 그것을 승낙했다 (행25:10-12.) 수일 후에 갈릴리 북부를 다스리던 헤롯 아그립바2세가 여동생 버니게와 함께 베스도를 문안하러 왔고 베스도는 바울의 소송문제를 아그립바 2세에게 부탁하였다(행25:13-27)

바울의 변론을 들은 베스도는 큰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라고 하였고 (행26:24) 아그립바 2세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라고 하였을 뿐(행26:28) 바울에게 죄를 찾지 못했다

결국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입을 모아 바울의 무죄를 인정하였다 (행26:30-32)

사도 바울은 유대인을 상대로 (행22:1-21).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행23:1-6). 벨릭스앞에서 (24:10-21). 베스도 앞에서(행25:8.10-11). 그리고 아그립바2세 앞에서 자신의 무죄뿐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증거했다.(행26:1-23) 또 복음을 증거 할 기회를 얻기 위해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하였다 (행25:11.행23:11)

아무 죄도 없는 사도 바울은 왕과 총독 그리고 고관들을 앞에서 온갖 누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한 재판을 받았으나,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증거하는 기회를 삼았다

이처럼 우리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에 빚진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증거해야 한다. (롬 1:14-15. 고전 9:16. 딤후4:2)

2). 72대 요셉 카비 대제사장 (AD61년-AD62년 전 대제사장 시몬의 아들 요셉 카비)

요셉 카비의 아버지 시몬은 시몬 칸테라스라고 하기도 하지만 카비라는 이름으로 보아 카밋의 아들 시몬일 가능성이 크다

AD61년 아그립바 2세에게 임명받았으며 베스도가 죽고 알비누스가 유대 총독으로 임명된 AD62년 에 해임되었다

4). 73대 안나스 2세 대제사장 (AD62년 안나스의 다섯째 아들 안나스2세)

안나스(AD6년-AD15년 재임)의 아들로 안나스 가문의 마지막 일곱 번째 대제사장이다

AD62년 아그립바2세에게 임명 받았으나 3개월 만에 해임되었다

가이사는 베스도 총독(AD60년-AD62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알비누스(AD62년-AD64년)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안나스 2세는 기질이 거만하고 매우 무자비하였다 그는 범죄자들을 매우 엄격하게 심판하는 사두개파의 일원이었다.

그는 총독이 바뀌는 틈을 타서 산해드린 공회를 열고 예수그리스의 형제 야고보와 그 외에 몇 명을 재판해서 율법을 어긴자로 정죄하여 돌로 쳐 죽였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에게 결박당한 채 가장 먼저 그의 부친 안나스(가야바의 장인)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고 그 하속에게 모독을 당하셨다.(요18:12-14,19-24)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3개월 짧은 기간 재임했던 안나스의 아들 안나스 2세에게 죽임을 당한다.

안나스 2세는 3개월간 악한 짓만 일삼다가 아그립바 2세로부터 해임되었고 AD66년 유대 반란을 일으킨 열심당원들과 합세한 이두매인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4). 74대 예수 대제사장 (AD62년-AD63년 담누스의 아들 예수)

아그립바 2세는 담누스의 아들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알비누스(AD62년-AD66년)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의 대제사장이다

얼마 후 아그립바2세가 담누스의 아들 예수를 파직하고 가말리엘의 아들 예수를 임명하였는데 대제사장직을 두고 전임과 후임 대제사장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났다

④아그립바2세의 명령이 무시된채 대제사장들끼리 싸움을 벌인것은 아마도 아그립바2세가 백성들의 재산을 탈취하여 유대외곽을 도시들을 꾸미는 일로 인하여 유대인들의 미움을 샀기 때문으로 보인다

5). 75대 예수 대제사장( AD63년-AD64년)

(가말리엘의 아들 예수, 처가 보에두스 가문 시몬)

①예수는 가말리엘의 아들이다

②AD63년 아그립바2세에 의해 임명 되었으며 헤롯성전이 완성된지 얼마 안 된 AD64년 약1년 만에 파직되었다

③가말리엘의 아들 예수는 대제사장직에서 해임된 후 안나스2세 (안나스의 아들)와 함께 AD66년 열심당이 일으킨 반란 때 이두매인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됐다

6). 76대 맛디아 대제사장 (AD64-AD66년 데오빌루스의 아들 맛디아)

데오 빌루스는 “하나님께 사랑 받는자”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으로 로마에게 성전이 완전히 훼파되기 전 정상적으로 임명된 마지막 대제사장이다

아그립바 2세는 예수를 파직하고 데오빌루스의 아들 맛디아를 임명하였으며 맛디아가 대제사장으로 있는 동안 유대와 로마간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7).아그립바 사후 공백기에 총독 정치

아그립바 2세는 AD50년-AD56년 6대의 제사장임명권 발동을 하였다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로 로마 황제 글라디우스 밑에서 양육을 받았다 부친 아그립바 1세는 죽었을 때 AD44년 17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유대는 다시 로마 총독이 다스렸다

7-1).유대 지역의 총독 파송

①파두스AD44년-AD46년.

②알렉산더 AD46년-AD48년,

③쿠마누스 AD48년-AD52년.

④벨릭스 AD52년-AD60년.

⑤베스도 AD60년-AD62년.

⑥알비누스 AD62년-AD64년.

⑦플로루스AD64년-AD66년 순이다

⑧이때부터 유대 분봉왕 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 로마 총독이 유대지역에 대한 정권행사를 행사하였으며

⑨AD44년부터 AD66년 유대 반란이 있기 까지 7명의 총독이 파송되었다

7-2). AD50년 아그립바 2세 외부지역 통치의 등장과 대제사장 임명권 발동

아그립바 2세는 AD50년경 숙부 헤롯이 통치하던 칼키스의 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유대 반란이 일어난 AD66년까지 아그립바 2세는 대제사장의 임명권을 행사하며 대제사장 6대를 임명 및 해임을 했다

그는 다시 통치구역을 부여 받게 된다 글라우디오 황제로부터 해롯 빌립의 영토를 받았고 AD54년 황제가 된 네로는 그에게 갈릴리 주변 지역까지 주었다

AD60년 유대 총독이 된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갈 때 친여동생 버니게를 동반했다 (행25:13)

아그립바 2세는 계속 로마황제에게 충성하여 영토를 보존하였으며 특히 AD70년 예루살렘이 파괴 될 때 로마의 행정관으로 로마편에 섰다

AD100년 경 자식 없이 죽었으며 그의 죽음과 함께 헤롯 왕조가 막을 내렸다

 

19. 반란의 시대 반란의 세력에 의한 제비뽑기 선출(마지막 대제사장 )

1). 77대 파니아스 대제사장 (AD67년-AD70년 사무엘의 아들 파니아스)

피니아스는 유대의 마지막 대제사장으로 사무엘의 아들이다

그는 대제사장 가문이 아니며 열심당의 대표가 제비로 뽑은 인물이다

저들은 다윗이 24반열을 제비 뽑은 것(대상24장)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기들의 대제사장을 임명할 권한을 갖고자 했던 것으로 당시 유대인들의 극심한 타락상을 보여 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제사장도 공범이 되게 하려고 율법의 전통을 깨고 마음대로 대제사장을 선출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니아킴 이라는 제사장 가문에서 제비뽑기를 하여 대제사장을 정하려고 하였으나 아프티아 출신 사무엘의 아들 피니아스가 뽑혔다

이는 대제사장의 그 길고 긴 타락이 종국이 얼마나 우습게 끝나버렸는가 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백성들이 고집하여 제비뽑기로 세운 대제사장 파니아스는 상식적으로 절대 대제사장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고 대제사장이 무엇인지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백성들은 광대들을 무대에 세울 때 분장을 시키듯 파니아스에게 대제사장옷을 입혀 놓고 제사가 진행되는 상황을 일일이 설명해주면서 제사를 마치 광대놀이처럼 즐겼다

제사장의 존엄성이 완전히 무너지고 제가가 구경거리와 농담거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몇몇 제사장들은 파니아스가 제사를 집례하는 동안 멀리서서 지켜보면서 흐르는 눈물이 그칠 수가 없었고 거룩한 제사 의식과 그 절차가 농락당하는 것을 보면서 애통해했다

유대역사가 요세푸스는 “아론의 형통이 아니면 비록 왕이라 해도 대제사장을 할 수 없다.” 라고 기록하면서 파니아스에 관한 내용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파니아스가 대제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유대전쟁이 있었고 그는 AD 70년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안의 아들 디도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대제사장으로 재임하였다

당시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성전의 지성소를 그들의 본부로 사용할 정도로 하나님의 성전의 거룩성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짓밟혀 버렸다

2). 반란자들 (열심당)의 제비뽑기 선출.

AD67년 마지막 대제사장1대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의 통치를 받는 유대 사회에는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반란은 대부분 열심당원들에 의해 주도 된 것이며 로마 정부의 주요 인사를 죽이려는 자객도 많이 일어났다(행21:38)

마지막 총독인 플로루스(AD64년-AD66년) 가 예루살렘 성전 창고에서 몇 개의 보물을 훔쳐가자, 유대인들은 이를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2-1). 진압군 대장군 베스파시안 장군의 황제 등극

로마 베스파시안 대장군에 의해 유대 반란은 어느 정도 진압되었으나 AD69년 베스파시안이 로마황제가 되었고 그 아들 디도가 예루살렘 정복에 나서게 되었다

2-2).베스파시안 황제 아들 디도 장군 예루살렘 함락

디도는 AD70년 유월절이 지켜지던 3월부터 예루살렘 성을 5개월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켰다

이때 요세푸스 기록에 의하면 100만명이 넘는 유대인이 살해당하였고 7만명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한다.

성전은 한 로마 병사의 방화로 완전히 전소되었다

AD63년 헤롯 성전이 완공 된지 불과 7년 만인 일이다

대규모의 유대 반란이 시작되어 열심당원들이 주도권을 잡고 초기의 혼란 때에 그들에 의해 제비로 뽑힌 자가 바로 마지막 대제사장 파니아스다

 

  첨부파일 역대 77명의 대제사장들.hwp

출처 : 환난날의 도피성
글쓴이 : 희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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