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인물

[스크랩] 성경 속의 여인들

하나님아들 2016. 4. 22. 11:03


성경 속의 여인들(1)  이 말씀은 K.C.C.C 총재이신 김준곤 원로목사님의 설교 말씀입니다

성경 본문 창세기 12:4, 17:17

성경 속에 있는 몇 사람의 여인들을 창세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구약 성경에 맨 처음 나오는 여자인 하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와는 최초의 여인입니다. 태어나거나 어려서부터 성장한 경험이 많습니다. 처음부터 완숙한 여인으로 하나님께서 만든 여인입니다. 인류의 영원한 어머니이고 처녀 중의 처녀입니다. 윈초적인 무구성과 무죄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숨 쉬고 생각하고 먹고 마시고 사물을 보고 듣고 희노애락의 감정을 느끼는 이런 것들에 대한 경험이 하나도 없는 여인입니다. 성 경험도 처음해 보고 죄 경험도 처음해 보고 죽는 일도 처음해 보고 아들도 처음 낳아 보고 더군다나 그 아들이 살인하는 일도 처음 경험했을 것이고 또 뱀을 통한 사단의 시험과 접촉도 처음 당해보고 에덴동산에서도 처음 추방당해 보고 하나님의 진노도 처음 경험해 보고 인류의 비참한 고생이라는 것도 처음 경험해 보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그녀의 감수성은 어느 여인보다도 민감했습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이 함께 공존하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인류의 모든 여인은 하와와 마리아의 중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살인자 가인의 후예들이 만든 도시의 여인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 사람의 여인이 나오는데, 하와 이후에 알 수 없는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가 나올 때까지는 성경에 나오는 여인들은 별로 신통한 여자가 없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도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인족의 여인들이라든가 혹은 홍수족 여인들이라든가 바벨탑족의 여인들이라든가 소돔과 고모라의 여인들을 생각해 볼 때 그 여인들의 시대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무신론적 여인 시대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라멕의 두 아내와 딸 나아마를 생각해 보겠는데 라멕의 두 아내의 이름은 하나는 아다이고 하나는 씰라입니다. 아다라는 이름은 장식이라는 뜻이고 씰라라는 이름은 그늘, 어두움이라는 뜻입니다. 또 나아마는 라멕 왕국의 공주입니다. 나아마라는 이름은 재미라든가 쾌락이라든가 하는 뜻인데 성적인 쾌락과 재미를 본다는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녀의 이름에서 성적 매력을 풍기는 여자라는 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은 현대 문명의 상징자 같은 그런 장인데 23~34절에 보면,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 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너무도 잔인하고 무섭고 횡포한 그런 독재자의 노래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의 아내와 딸 나아마는 좋지 않은 여자들입니다. 도시의 여인들입니다. 허영과 사치와 쾌락주의의 제물이 된 여인들을 창세기 4장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고대의 유명한 용사들과 하나님의 딸들이 서로 결혼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아 홍수의 전야의 여인들은 다 타락한 사람들입니다. 에녹의 부인과 에녹의 자부 네 여인도 노아의 방주에 들여가서 구원을 받았지만 에녹의 자부 네 여인들의 이야기는 성경에 한마디도 안 나옵니다. 구원을 받기는 받았지만 별로 쓸모가 없는 여자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에녹의 여인들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의 여인들도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셋째,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라는 구약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제일 대표되는 신앙의 어머니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장 11절을 보면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과 똑같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지키실 줄 알고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사라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기 때문에 늙어서 단산했지만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여인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사라는 소문나게 아름다운 미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창세기 12장 10절에서 20절까지를 보면 아브라함이 사라를 데리고 애굽으로 갔을 때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래서 애굽 왕 바로가 사라의 아리따움을 보고 데려가서 후궁을 삼았습니다. 그런데 재앙이 임하자 나중에 아브라함의 아내인 줄을 알고는 아브라함에게 ‘어찌하여 나에게 거짓말을 했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고 하면서 사라를 돌려보냈습니다. 또 사라는 자기 남편에게 너무나도 순종했습니다. 낯설은 곳에 가서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날 때부터 반대를 했어야 했지만 순종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한마디도 불순종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신앙길을 따라서 아무 반항도 없이 기쁜 마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천막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부잣집 딸이지만 천막을 치고 이곳저곳에 다니면서 피난 생활을 하는 데도 아브라함에게 불순종한 일이 없었습니다.
사라의 아름다운 점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사막에서 천막을 치고 사는 궁핍한 생활을 하는 집에 잘 모르는 세 사람의 손님이 찾아왔을 때 손님들을 잘 대접하라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불문률에 따라 자기 집에 모셔 들여 극진히 대접을 했습니다.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할 일까지 있습니다.
또 메시야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큰 복의 근원 메시야가 자기 몸에서 날 것이라는 그 약속을 한번도 잊어버리지 않고 마음속에 지니면서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물론 사라가 실수한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약속의 자녀가 태어난다고 했지만 10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자 견디다 못해 자기의 종 하갈을 아브라함과 동침케 하여 아이를 낳게 했습니다. 반드시 자기의 몸에서 아이를 낳아야 하겠는데 자기는 나이가 많고 늙어서 이제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을 해서 인위적인 방법으로 아브라함의 씨를 얻어야 하겠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거부해야 했었는데도 이방인인 애굽의 몸종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마엘입니다. 그것이 대단한 실수였고 인류 역사의 비극의 씨가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에서 마호멧이 나오고 지금 6억에 가까운 회교도가 기독교와 대치하면서 인류의 최후의 반기독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라의 실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에 반드시 자기의 몸에서 메시야가 날 것이라는 약속을 재확인하는 말을 들었을 적에 사라는 웃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묻기를 ‘네가 왜 웃느냐’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라는 속으로 웃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속으로 웃었지 겉으로는 안 웃었다고 한 것입니다. 사라의 소명 가운데 최대의 것이고, 세계 인류의 구속 문제가 거기에 달려 있는 그런 대사건에 대해서 재확인을 해주자 웃었습니다. 그런 사라에게서 예수님이 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난다는 이야기를 다시 재확인하는데 웃었고 또 이스마엘을 낳게 함으로써 가정불화가 생겨 하갈을 내쫓아 광야에서 죽게 했던 사라에게서 예수님이 나신 것입니다.

넷째, 리브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입니다. 아브라함이 노종을 불러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자기의 고향, 자기의 족속이 있는 곳으로 가서 차기의 아들 이삭의 아내를 택하여 오라고 했습니다. 그 노종은 하나님께 성중의 딸이 물 길러 나올 때 자신이 우물곁에 섰다가 한 소녀에게 물을 구했을 때 자신에게 물을 줄 뿐만 아니라 약대에게도 물을 주는 친절한 소녀가 있으면 그녀를 이삭의 아내로 정해 주신 것으로 알겠노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리브가가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노종이 물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그에게 물을 줄 뿐만 아니라 그 약대에게도 물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노종이 이삭의 아내로 하나님께서 택하심을 믿고 리브가의 집으로 들어가 문안을 드리면서 리브가에게 따라가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리브가는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와 오라비가 며칠을 우리와 함께 있다가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지금 가겠나이다.’하고 하면서 따라 나섰습니다. 리브가는 성격이 아주 쾌활한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남모르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만나러 기쁘게 자기 집을 떠나서 메시야의 태동을 위해 떠나는 것입니다. 메시야의 피를 이을 여자들이 구약 성경에서 가느다랗게 이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신비스런 구속사의 섭리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의 편애가 항상 자녀들 사이에는 불화를 낳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키울 때 리브가처럼 편애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데 리브가치 생각 속에 이러한 것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에서에게서는 아무리 보아도 위대한 것이 나올 것 같지 않으므로 아브라함의 장자의 축복 곧 메시야가 그 손에서 나는 축복은 야곱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야곱도 물론 못된 사람입니다. 야곱은 꼭 리브가의 치마 자락을 붙잡고 졸졸 따라 다녔기에 리브가와 사이가 좋았지만 에서는 아주 호걸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사냥을 하고 돌아다니기에 리브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야곱과 공모를 해서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삭의 아내로서 예수님의 조모가 되었습니다.

다섯째, 드보라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의 드보라는 여선지 드보라가 아니라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입니다. 창세기 35장 8절에 보면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고 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짤막한 구절입니다. 이 여자에 대한 기록이 이것밖에는 없습니다. 알론바굿이란 이름은 눈물의 상수리나무라는 뜻입니다. 리브가를 따라 왔던 유모는 노예일 수 있습니다. 노예가 유모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집에서 평생을 봉사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그 유모가 죽었을 때 야곱의 온 가족이 얼마나 슬퍼했던지 눈물의 상수리나무라는 이름을 붙여서 묘비를 세웠습니다. 성경 속의 모비명 가운데 제일 뚜렷하고 주목할 만한 것이 드보라의 묘비입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상수리나무 밑에다가 눈물의 상수리나무라는 그런 묘비명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녀는 야곱에게는 외할머니와 같고 리브가에게는 어머니 같은 분이었습니다.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그 노파는 믿었을 것입니다. 너무도 사랑스럽게 친할머니처럼 같은 신앙으로 귀하게 자기 가족들을 보살폈던 그 할머니에게 죽은 후에 눈물의 상수리나무라는 묘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옛날에는 기독교 가정에도 더러 노예가 있었습니다. 노예와 주인 사이에 아름다운 신앙의 인정담이 꽃을 피운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오네시모와 바울과 빌레몬의 아야기입니다. 노예와 바울과의 이야기와 같은 것들이 그 한 예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드보라라는 이름은 벌이라는 뜻입니다. 벌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벌입니다. 흔자 돌아다니는 도둑벌입니다. 이 벌은 사람을 보면 쏩니다. 또 하나는 꿀벌이 있습니다. 주인집에 꿀을 벌어 주며 부지런히 일하는 희생의 상징이 꿀벌입니다. 이 드보라는 꿀벌이라는 이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자기 주인을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했던 그 할머니가 죽어서 눈물의 상수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기독교 가정에서는 흔히 식모나 고용인들을 쓸 때에 그가 병이 들고 못쓰게 되면 그 후임을 빨리 정하고 가볍게 생각을 합니다. 고용인과 주인 사이에 참다운 인정이 오고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야곱의 가족과 드보라 사이에서 참다운 인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고용살이를 하는 사람이나 고용을 하는 사람이나 다 같이 야곱의 가족과 드보라처럼 그렇지 따뜻하게 대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 레아와 라헬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 가서 14년을 살았습니다. 창세기 29장 17절을 보면 ‘라반이 두 딸이 있으니 형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레아는 아주 얼굴이 밉고 라헬은 얼굴이 고운 여자입니다. 야곱이 첫눈에 반한 여인은 라헬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라헬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레아에게 있었습니다. 야곱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나야 되는데 야곱은 라헬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라반은 그의 집에서 야곱이 7년 동안 일을 해야 라헬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7년 동안 일을 하고 결혼식을 한 뒤 첫날밤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라헬이 아니고 레아였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그래서 장인 라반을 찾아가서 라헬을 얻기 위해서 7년 동안 일을 했는데 외삼촌이 어찌하여 이렇게 할 수가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라반은 야곱에게 언니보다 동생을 먼저 주는 것은 그 지방에서 하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7년을 더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아주 인내심이 강하고 열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7년을 더 참아 라헬을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레아와 라헬 둘 다 얻었습니다. 그런데 외모는 라헬이 곱고 레아가 추한 데 비해 속은 달랐습니다. 라헬보다 레아가 훨씬 신앙적으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알 수가 있느냐 하면 아이들의 이름을 짓는데 레아가 첫 아이를 낳았을 적에 ‘하나님이 이제야 나를 돌아보셨다’는 뜻의 르우벤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라헬에게는 그러한 신앙이 없습니다. 메시야의 피와 메시야의 맥락과 선이 흐르기 위해서는 신앙이 있는 여인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레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를 낳게 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시므온으로 ‘내 원수 앞에서 나를 위로하셨다’는 뜻이고 셋째 아들을 레위로 ‘이번에야말로 남편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뜻이며 넷째 아들은 아주 신앙적인 이름으로 유다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유다의 손에서 하나님이 메시야를 태어나게 합니다. 족보를 보면 유다가 예수님의 할아버지로 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뜻입니다. 그 유다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를 낳게 했습니다. 메시야의 맥락이 그렇게 흐릅니다. 라헬은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는데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이 베냐민족의 후예가 베들레헴에서 헤롯이 아이들을 다 죽일 때 슬픔을 당하는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일곱째, 디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다의 자녀들 속에서 메시아가 태어나게 되는데, 야곱의 딸 가운데 디나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이 여자는 레아에게서 난 딸입니다. 디나는 이방 사람들과 접촉을 하고 우상 종교를 섬기거나 섞여서는 안 되는 엄격한 교훈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디나에게는 가나안 이방인들에게 꼬리를 치고 추파를 던지는 그런 유혹자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유혹했다는 말은 없지만 절대로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밖에 나가서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의 눈에 띄어 그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디나를 자기 아내로 얻게 해 달라고 하몰을 졸랐습니다. 그래서 하몰은 자기 땅에 와서 유거하고 있는 야곱의 집에 청혼을 하러 갔습니다. 자기 아들이 지금 상사병이 나서 죽게 되었으니 디나를 며느리로 삼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회의를 했습니다. 야곱의 자식들은 계략을 꾸몄습니다. 청혼을 허락하는 대신 조건을 붙였습니다. 약속의 자녀들은 늙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남자들은 모조리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할례는 남자의 성기 표피를 좀 째는 것이어서 아주 아픕니다. 그 할례를 받으면 우리와 함께 약속의 자녀가 되어 결혼할 조건이 성립된다고 했습니다. 하몰은 그것을 허락했습니다. 그 성에 살고 있는 모든 남자들을 강제로 불러다가 의무적으로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할례를 받고 나면 3일째가 굉장히 아프고 며칠이 지나야 낫습니다. 그 성의 남자들이 아파서 고통스러워할 때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그들을 다 죽였습니다. 얼마나 비참한일입니까? 야곱의 자식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너희들이 너무 잔혹한 짓을 했기 때문에 나중에 보복을 당하기가 쉬우니 여기서 살 수가 없다고 자기의 식구를 전부 데리고 다른 곳으로 피난을 다시 가는 그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성경 속에, 야곱의 딸 가운데 이런 비극도 있는 것입니다.

여덟째, 다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자부입니다. 그때 당시의 풍속 가운데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둘째 아들이 아내로 맞게 되는 법이 있었습니다. 다말이라는 여자는 키가 크고 마른, 가냘픈 인상을 지닌 미인입니다. 가나안 여인입니다. 가나안의 원시 족속 가운데는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 유일신 종교를 믿는 멜기세덱과 같은 그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다말은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희미하지만 가지고 있었던 집안의 여자인 것 같습니다. 그 다말이 엘이라고 하는 유다의 장자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성경에 보면 엘이 하나님 앞에서 악하여 하나님이 그를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난이라는 둘째 아들이 형의 대를 잇기 위해 다말을 취해야 하는데, 오난은 다말과 동침은 했어도 다말에게서 자식이 나면 자기 자식이 되지 않을 줄 알고 땅에 설정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도 죽였습니다. 다말은 또 과부가 되었습니다. 또 유다에게는 셀라라는 어린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친정에 가서 수절하면서 자기 아들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다말의 마음속에는 메시아의 후손이 유다의 후손에서 난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야곱의 축복입니다. 그 메시아의 후손이 태어나려면 자기가 장자의 며느리이므로 자기를 통해서 날 것이므로 친정집에 가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셀라가 자랐는데도 자기에게 주지를 않았습니다. 유다의 마음속에 겁이 나는 것이 하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말에게 다시 셀라를 주면 셀라도 엘이나 오난처럼 벌을 받아서 죽으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다말이 음란해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말은 자기 속에서 꼭 메시아의 씨가 태어난다는 약속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보면 유다가 마침 부인이 죽고 몹시 외롭게 되어 있을 때 유다가 양털 깎는 자기 목장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다말은 과부의 옷을 벗고 창녀의 옷을 입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가 오는 길목에 나가 앉았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며느리를 창녀로 오인하고 동침을 하여 다말에게 잉태케 했습니다. 그때 다말은 유다에게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받았습니다. 석달쯤 후에 유다는 며느리 다말이 간음하여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가 간음했으니 불태워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다말은 전에 받았던 약조물을 보여 위기를 면했습니다. 창세기 39장 26절을 보면 유다는 ‘그는 나보다 옳도다’고 말했습니다. 이 한마디에 사죄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말은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베레스는 다윗의 10대조입니다.

아홉째, 창세기 41장 45절에 나오는 아스낫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로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요셉에게 이 이름을 지어 주고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했습니다. 요셉은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요셉에게도 흠이 많이 있습니다. 요셉의 자식들이 다 망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족보학을 연구하고 역사를 연군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시와 축복을 받았던 사람이지만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바로 왕은 요셉이 욕심이 났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는 한 애굽 종교의 동질화를 시킬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굽 종교는 태양신이고, 태양신의 수도가 온이라는 곳입니다. 온의 제사장이라고 하면 그때 당시의 종교 대신 아닙니까? 제일 높은 사람입니다. 덕망이 높은 귀족이고 최고의 현인이며 또한 종교 지도자이므로 왕까지도 그를 예언자에게 하듯이 해야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온의 제사장의 딸을 요셉에게 주었습니다. 그때 요셉이 안 된다고 해야 했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를 취했습니다. 완전히 애굽에 귀화를 시켜서 종교적으로도 변신을 시키고 호적도 이름도 새로 지어 주었습니다. 화가 나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요셉이 받기는 받았어도 생전 그 이름을 써먹은 적은 없습니다. 일본 사람이 한국 사람을 창씨 개명하듯이 그렇게 당했습니다. 요셉은 용감하게 그것을 거부하지 못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에게 신앙적인 이름도 지어 주지 못했고 할례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아내 아스낫이 종교적으로 반대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태양신과 하나님이 공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생활을 했습니다. 아스낫이라는 최고의 미인을 얻었지만 그 여인 속에는 한 가지 없는 것이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아스낫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낳았습니다. 므낫세라는 이름은 망각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풍성함이라는 뜻입니다. 그 아스낫의 태양신의 후손의 피가 섞여 있는 에브라임이 유다와 항전을 해서 솔로몬의 자식인 여로보암에게 모반을 일으켜서 우상 숭배하는 사마리아 족이 되었습니다. 혼합족이 되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사마리아 종교, 우상 숭배 종교가 에브라임이라고 하는 요셉의 후손에서 난 것은 그 아스낫의 피가 요셉의 자손들에게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2세들이 바알 종교를 퍼뜨린 곳도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여호와 종교를 박멸하는 운동을 한 것도 요셉의 자식인 에브라임후손에서 생겼다는 것도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될 것입니다. 요셉의 후손은 멸종되다시피 해서 종교 변질족으로 거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마땅히 축복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지만 신앙 없는 여인을 아내로 택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열째,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게벳은 믿음의 여인입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믿음이 좋은 여인입니다. 그녀는 죽음을 무릅쓰고 모세를 3개월 동안 숨겨 두었습니다. 믿음으로 숨겨 두었던 것입니다.

열한째, 모세의 누님 미리암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미리암은 여선지자이고 시인이고 여걸입니다. 출애굽의 주역을 담당했습니다. 미리암과 모세의 형 아론은 아주 친했습니다. 모세를 갈 상자에 넣어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는 틈을 타서 강에 띄우자고 한 것도 미리암의 아이디어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지도권을 다 행사하는 것을 보고 광야에서 질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론과 짜고 민중에게 비방했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과 결혼을 했으니 정당 결혼을 하지 않았고 신앙 결흔을 하지 않았다고 비방했습니다. 이방인과 결혼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자격이 없다고 그렇게 치명적인 선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모세에게 그 약점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여기서 우리가 교훈을 받을 것이 있습니다. 그 말이 정당한 말이기는 하지만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 대해서 ‘너희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계획 가운데 중요하게 쓰는 백성이기 때문에 그 백성을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적으로 취급하겠다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하나님의 사업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는 사람에 대해 악의를 가지고 방해를 할 때, 정당한 조건을 잡아서 하더라도 저주를 받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미리암이 문둥이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론과 함께 회개하자 고쳐 주셨습니다만 미리암에게 그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열두째, 십보라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세의 첫 아내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치는 생활로 직업을 삼아 하다가 엘리에셀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모세도 결혼을 잘못했습니다. 사람을 죽여 할 수 없이 쫓겨 가서 미디안 광야에서 이드로라는 제사장 집에 머물게 되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2장 21절에 보면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억지로 강요를 당해서 정략 결혼을 처지만 모세는 자기가 동거하기를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아이를 낳았는데 그 이름을 엘리에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모세는 할례를 원했지만 십보라가 반대해서 할례를 주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신앙이 전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타협을 하고 산 것입니다. 엘리에셀이라는 뜻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내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말이지 자기 하나님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기는 내 하나님이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후에 모세가 거의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사경을 헤매는 것을 보고 십보라는 그녀에게 신앙이 생겨서가 아니라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자기 남편이 그렇게 할례를 주자고 하는 것을 하지 않은 것이 한이 되고 또 그것 때문에 여호와 신이 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시험 삼아 이런저런 목적으로 자기가 엘리에셀에게 할례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무튼 모세 부부는 불행한 부부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자녀와 아내에게 신앙을 유산으로 전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의 아내에 대한 기록은 유대 역사에서 완전히 묵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모세와 같이 위대한 사람의 후손이 별로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얼굴이 곱고 예쁜 여인만을 좋아 하는 형제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얼굴이 못생겼어도 그 모습 속에 천사와 같은 얼굴을 가진 여인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천사인데 속으로는 악마와 같은 그런 여인과 결혼하면 불행해집니다. 우리 C.C.C.의 모든 자매들은 모두 속으로 아름다운 믿음과 모습을 가진 여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성경 속의 여인들보다 더 훌륭한 면을 가지고 있는 여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경 속의 여인들(2)

성경 본문 룻기 1:8~13

성경을 보면, 감추어져 있는 지극히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주옥 같은 영적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그냥 간과되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별로 알려지지 않은 여인들의 이름까지 들추어서 살펴보면 깊은 뜻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 하갈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가 되고 여종인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에게서 나는 자는 메시야의 맥락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뜻입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아브라함의 씨이기 때문에 그가 한 민족을 이루게 하고 번성케 하는 축복을 하겠다는 하나님 말씀이 있습니다.
하갈은 애굽 여자인데 사라의 몸종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라는 복의 근원이 되는 복된 메시야의 씨가 그 속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까 인간 상식으로 판단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젊은 몸종에게서 인위적으로 아브라함 씨를 태어나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갈을 권해 아브라함에게 들여보내 이스마엘을 낳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 사람 중에서 제일 책임이 없고 죄가 없는 사람은 하갈입니다. 성경에 일부다처제를 승인했다든지 권장했다는 말은 없지만 구약적 상징입니다. 성경의 해석의 원리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너희들의 마음의 강팍함을 인하여 이혼할 때에는 이혼 증서를 써 주어서 내보내라고했지만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상황이 어찌 되었든 간에 아브라함은 사라와 공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참 죄를 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사라의 기특한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돕겠다는 선치에서 그러한 어리석은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사라도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순한 사람이었고 이스마엘은 용감하고 사나웠습니다. 이삭은 이스마엘에게 꼼짝을 못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사라는 불쾌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졸라 하갈을 내보내자고 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약속을 믿고 떡과 가죽 부대에 물을 가득 담아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냈습니다.
하갈은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이스마엘을 데리고 광야로 가게 됩니다. 그들은 브엘세바 광야를 방황하다가 마침내 먹을 물도 떨어졌습니다. 이스마엘이 목이 타서 죽을 지경에 이른 것을 하갈은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떨기나무 아래에 이스마엘을 두고 마주 보며 방성대곡을 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이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두려워 말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라며 하갈의 눈을 밝게 해서 샘물을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은총과 축복을 베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마엘과 함께 계셨고, 이스마엘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면서 활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여인을 취하여 그 자손이 크게 번성했습니다.
그런데 하갈은 종의 신분이었지만 자기의 태에서 메시아가 잉태될 것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너무도 조심스럽고 경건되게 하나님의 약속의 장막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또 자기 아들이 아브라함의 약속의 장막에 참여하는 것이 하갈의 제일 큰 소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추방을 당하게 되었지만 역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한 족속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갈에게는 분명히 여호와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아브라함의 집에 그대로 있었으면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한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집을 떠났기 때문에 무식한 그녀는 유일신의 신앙을 막연하게 가지게 되었고 거기에서 알라의 신이 태어났고 마호멧교가 생겨 났습니다.

둘째, 유딧과 바스맛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26장 34∼35절에 보면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항상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태에서 메시야가 태어나서 복의 근원이 된다는 메시야 약속의 원천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아주 무신론적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장자권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데 하나님의 축복을 팥죽 한 그릇의 헐값으로 팔아 버렸습니다. 그는 종교적인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취할 때도 신앙의 기준으로보지 않고 아름다운 여자를 취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헷 족속의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에서를 설득해서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게 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새로 들어 온 헷 족속의 두 여인 때문에 그것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그나마 에서에게 남아 있던 여호와의 신앙의 선마저도 점점 희미해지고 희석되어서 마침내 여호와 신앙은 소멸되어버리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에서의 처들은 아브라함의 장막에 우상 종교를 도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 때문에 시부모와 며느리 사이가 굉장히 나빴습니다. 에서는 부모와 두 부인 사이에서 몹시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창세기 28장 9절에 보면 에서는 본처 이외에 이스마엘의 딸인 마할랏을 첩으로 취합니다. 에서는 그녀의 야성미를 보고 아내로 취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이스마엘의 딸이니까 조금이라도 여호와의 신앙이 남아 있을까 해서 첩으로 취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신앙의 선의 맥락은 점점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셋째, 라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에 보면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의 직업창녀입니다. 여리고 성은 아프리카나 아라비아 등지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고 또 예루살렘까지 통하는 관문이기 때문에 무역의 도시이고 또 난공불락의 군사 요새였습니다. 거기에는 수백 명의 기생이 있었을 것인데 라합은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유명한 창녀였던 것 같습니다. 고대 국가에서 그 당시의 창녀들의 집은 아라비아 대상들의 숙소로 이용되었습니다. 몸도 쉬고 마음도 쉬고 또 자기의 성적인 만족도 얻을 수 있으므로 자기의 가정에서 수개월 또는 수년씩 떨어져 있던 사람들은 기생집에서 쉬곤 했습니다. 많은 군사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은 이 기생들을 탐정과 스파이로 이용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생들은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광야로 나온 출애굽의 대사건과 같은 세상의 뉴스를 그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최대의 뉴스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서 가나안 땅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는 가나안 족속들은 저주받은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족속처럼, 노아 시대의 사람처럼 전부 멸망시켜 버려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땅 속에 들어가 버리게 하고 노아 시대에는 물 속에 침수시켜 완전히 없애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가나안 땅 사람들은 씨도 남기지 말고 다 불태워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였습니다. 새 선민의 종교적․도덕적 오염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걱정하셨습니다. 조그만 병균 하나만 남아도 오염이 되고 누룩이 되어 번져서 부패해 버리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몹쓸 족속으로 여기신 데는 이중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그곳에 정착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가나안 족속을 없애 버리게 하려는 섭리도 있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려는 마음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신앙이 생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녀의 집에 두 정탐꾼을 머물게 했다는 사실을 들키기만 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스파이와 통한 것이므로 일종의 매국 행위로 몰릴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두 사람을 평안히 영접했습니다. 그것은 돈을 받아서도 아니었고 애정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쳐들어 오면 이스라엘 시대가 될 테니까 그때 덕을 좀 보려는 타산적인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것 같은데 자신은 하나님 편을 들어야 하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편에 서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마음으로 개종한 비밀 신자처럼 변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문학 작품 중에 창녀 이야기가 있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는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창녀 쏘냐가 등장합니다. 러시아 지성인의 대표적 인물인 라스콜리니코프는 꺼져 가는 등불 같고 상한 갈대와 같은 운명의 여인 쏘냐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신앙에 의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라합의 마음속에도 이와 같은 가냘픈 신앙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제가 6&#8228;25 전에 김천에서 교회 일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교회에서 어떤 부인을 그곳 집사로 임명하려 했는데 반대가 일어났습니다. 그분은 경건되고 항상 남을 구제하는 순수한 분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어느 구중심처(九重深處)의 양반 집에서 자라난 규수 같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분은 창녀 출신이었습니다. 어쩌다 잘못해서 창녀가 되었지만 구원을 받고 어느 남자 집사님과 살면서 자기의 과거를 의식하고 더욱 더 경건되게 사는 분이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해서 그분을 집사로 세우지 못했는데 지금까지도 그 일을 생각하면 분합니다. 이렇게 창녀 출신의 경건된 여자들이 있습니다. 기생 라합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라합에게 가서 구원을 받을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 속에 기생 라합의 이름이 끼게 됩니다. 떳떳하게 라합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그녀는 가나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오직 한 사람의 신앙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열 사람의 의인이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치 않겠다고 하셨고 예레미야 때는 한 사람의 의인을 찾으면 이 거리를 사하겠다고 하셨는데 가나안 땅에는 기생 라합이 있었습니다.

넷째, 사사인 드보라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난세 시대의 사사였습니다. 아주 걸출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 이후에 지도자가 끊어져서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까지 사사들에 의해서 정부도 없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는 사사들에 의해서 지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사들은 전 이스라엘에 한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12지파 족속 가운데서 예언자 대신에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쉽게 가나안 사람들과 동화되어 버렸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며 부패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가하셨습니다. 또 그때마다 예언자들이 일어나서 야단을 치면 그들은 우리가 그것 때문에 망했다고 회개를 하면서 회복합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 가운데 한 가지 신비스러운 것은 이스라엘 사람처럼 쉽게 타락하고 쉽게 화하는 민족도 없었습니다. 다른 민족은 몇 백 년이 걸려야 회복하는데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위대한 예언자가 나오든지 사사가 나와 하나님의 채찍을 맞고 그 예언을 하게 되면 전부 회개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회복하게 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런데 드보라 시대에는 여호수아 시대 때 점령했던 가나안 땅의 대부분을 가나안 사람들이 재점령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처럼 거기서 압제를 받고 조공을 바치고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왕 가운데 야빈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성경에 보면 그는 철병거 900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생긴 탱크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철로 된 전차가 900대나 있어서 당해 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축복이 떠났으니 더 더욱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빈의 전차 부대가 산에까지 미칠 수는 없으므로 산지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영토를 지키면서 질서를 유지하고 살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랍비돗의 아내인 여선지자 드보라라는 여자가 나옵니다.
그녀는 가정주부이면서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잔다르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국의 예언자이고 사사이며 군사 지도자였지만 또한 시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총명한, 여왕 같은 구국의 여걸이었습니다. 구약사에 그녀만큼 매력적인 여자도 많지 않습니다. 군사 지도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여자 장군이나 해적의 여두목 같은 것을 연상할지 모르지만 그녀는 여성스러운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바락에게 스물론과 납달리에서 1만 명을 모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하와 그 병거를 기슨 강으로 이끌 테니 1만 명을 이끌고 다볼 산에 잠복해 있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마치 이 청천 장군이 만주의 협곡에서 일본 사람을 섬멸시킬 때와 같은 전략을 짰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곳으로 시스라의 군대가 900대의 전차를 몰고 들어왔을 때 대홍수가 나서 기손 강이 범람하고 잠복해있던 군대가 일어나니 그들은 대파당했습니다. 가나안이 멸망했습니다.
드보라가 이렇게 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간다고 한 것과 같은 신앙의 용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드보라와 같은 구국의 여걸, 신앙의 용사가 나왔으면 합니다. 그래서 민족 복음화도 담당하고 세계 선교도 담당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는 여권 운동이니 여성 상위 시대니 하는 말을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여성 운동과는 차원이 다른 여성이 주축이 된 적극적인 신앙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드보라와 같은 신앙의 용사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다섯째, 삼손을 망하게 한 들릴라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들릴라는 굉장히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사사인 삼손이 반해서 거의 미치다시피 했습니다. 그렇다면 들릴라는 어떤 형의 여자였을까요? 그 여자는 정에 약해 사랑에 죽고 하는 종류의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교활한 냉혈 동물이었습니다. 자기에게 미쳐 생명을 바치는 남자를 열이라도 죽일 수 있는 잔혹한 여자였습니다. 삼손은 절대로 그녀에게 반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교제를 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삼손은 사사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이므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여자와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와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 당시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힘의 비결이 어디에 있는가만 알면 그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가 들릴라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알고는 은 1,100으로 그녀를 매수했습니다. 그녀의 관심은 돈밖에 없었습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여자입니다. 많은 남자를 울리고 죽이지만 아무에게도 정을 주지 않는 사실은 불쌍한 여자입니다. 이러한 여자들이 돈을 많이 가지고 싶어합니다. 당시 삼손은 왕에 필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힘이 센 영웅이었습니다. 한 여자가 반할만한, 정을 줄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들릴라는 그를 사랑하기보다는 이용한 냉혈 동물이었습니다. 그녀는 마침내 삼손의 힘의 비결이 머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어 적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포로가 되어 눈이 뽑히고 연자 맷돌을 평생 소처럼 돌리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린데 삼손은 한번만 자기에게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다곤의 신전에서 괴력을 발휘해 적을 섬멸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죽음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삼손을 망하게 한 이스라엘의 패망의 배후에는 들릴라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나 삼손뿐만 아니라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여자 때문에 일생을 망쳐 버리고 하나님에게 욕을 돌리게 된 경우를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종을 넘어뜨리기 위해 여색을 사용한다는 것에 대해 경계를 해야 하겠습니다.

여섯째, 나오미와 룻과 오르바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서 살다가 흉년이 드니까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으로 흉년을 피해서 피난을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10년쯤 살다가 두 아들은 모압의 여인인 룻과 오르바와 각각 결혼을 해서 나오미에게는 두 며느리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 죽어 버리고 세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쾌활하고 경건되고 총명하고 인정이 많은 사려가 깊은 어머니였습니다. 별로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명쾌하고 쾌활한 성격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이 죽어 버려 소망이 다 끊어졌지만 그 비극을 신앙적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치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의 땅이며 자기의 조국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두 며느리는 친정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시어머니를 한사코 따라가려고 했는데 가는 도중에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오르바가 자기의 백성과 자기의 신에게 돌아갔다고 기록했습니다. 신에게 돌아갔다는 것이 초점이 됩니다. 옛날에는 각 민족마다 종교가 있었는데 모압 사람들은 롯의 자손들입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신앙을 다 잃어버린 불신앙의 상징입니다. 그의 두 딸도 소돔과 고모라에서 못된 것을 몸에 묻혀 가지고 왔습니다. 나중에 손이 끊겨서는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롯에게 술을 먹여 두 딸이 임신하도록 했다는 더러운 일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롯의 가정에 소돔과 고모라의 음란한 오염이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 모압 사람들은 이러한 롯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나 모압 땅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에 대한 신앙의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 쓰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롯에게 한 가닥의 신앙의 선이 선조 때부터 남아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것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따라 가다가 돌아가라고 하니까 입을 맞추고 울고 슬퍼하면서 자기 백성과 자기 신에게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뜻있는 말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신에게 돌아갔습니다. 아이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 그런 신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룻기 1장 16∼17절에 보면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면서 같이 가기를 원했습니다. 룻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성경을 잘 해석해 보면 어째서 모압 여자인 룻을 통해서 메시야의 선이 이어지게 되어 있느냐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룻은 여기에서 중대한 결정을 한 것입니다. 죽은 남편을 못 잊어서 또는 늙은 시어머니를 버릴 수가 없어서 자기 고향을 떠나 시어머니를 따르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어머니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고 어머니의 백성은 나의 백성이 된다고 한 것입니다.
어머니의 백성은 곧 신앙 백성입니다. 베들레헴은 신앙의 땅입니다. 나오미의 마음속의 제일 큰 일념은 하나님 백성의 땅에 가는 것입니다. 먼 훗날에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나고 다윗의 동리가 되는 메시야의 선이 자기의 몸에서 신비스러운 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두 여인은 몸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신비스러울만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룻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나오미를 따라가게 했던 것입니다. 다시는 자기들의 신과 자기들의 백성에게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두 개의 갈림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종종 이러한 갈림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에 가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쁨으로 환영했습니다. 노과부를 동정했고 특별히 시어머니에게 효도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약속의 땅에 와서 살고 있는 룻에게 많은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룻기는 재미있는 소설감이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룻을 결혼시키기 위해 깊이 생각하다가 자신의 친척으로 착하고 경건한 사람인 보아스의 아내가 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의 타작 마당에 가서 이삭을 주워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부하들을 시켜서 룻이 올 때는 일부러 이삭을 많이 떨어뜨려 놓게 했습니다. 아주 낭만적입니다. 물론 나오미는 룻과 보아스를 맺어 주기 위해 많은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아스의 타작 마당에서 추수 후에 축하연이 있었는데 나오미는 룻에게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 입고 몸에 향수를 바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축하연이 끝나고 자는 것을 보았다가 그의 발치에 누워 있으라고 했습니다. 몸 옆으로 습격해 들어가라고 하지 않고 보아스가 누워 있는 발치의 이불자락을 덮고 누워 있으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이 맺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룻을 통해서 이새가 나오고 다윗이 나왔습니다. 룻은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입니까!

일곱째, 신앙의 어머니인 한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나는 브닌나라는 첩과 함께 남편 엘가나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아이가 없었지만 브닌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엘가나는 한나를 갑절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브닌나의 시기와 냉대를 받았습니다. 본부인인 한나가 얼마나 고통을 받았겠습니까? 한나는 실로에 가서 제사를 지내면서 너무나도 간절히 하나님께 아이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통곡을 했습니다. 아이를 주시면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헌신의 표시로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건은 어느 나라의 어느 여자에게나 있을 수 있는 사건입니다. 아이가 없는 것을 죄처럼 생각하던 때이었으므로 한나가 그렇게 소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사건 속에 한나의 신앙이 나타나 있습니다.
한나는 아이를 주고 안 주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 달렸다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일용할 양식도 하나님이 주시니까 먹는다고 생각했고 병이 들었을 때도 하나님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마음의 근심이 생길 때도 하나님이 치료할 수 있다고 생자했습니다. 국난이 닥쳐와도 한나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인류 전체의 통치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신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없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도록 기도하는 믿음을 가졌던 그 사실과 또 그 아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치겠다고 하는 서원과 또 그렇게 일생을 바쳤다는 그 사실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무엘은 그러한 신앙의 태에서 태어났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긴다고 했는데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는 소박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병이 들면 과학을 믿고 병원에 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병에는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고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내가 이 병을 수락하면서 이 고난을 시련으로 연단으로 받게 해주십시오.’하며 하나님의 뜻을 범사에서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루 속의 사소한 사건 속에서도, 시험 공부를 하는 사건 속에서도, 또 결혼이라는 인생의 최대의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해결할 수 있다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한나는 이러한 신앙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한나는 무의식 속에 구속사의 중대한 계획이 성사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덟째, 아가보의 어머니라고만 알려진 무명의 여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엘리의 자부이고 비느하스의 아내인 이 무명의 여인의 짤막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신앙의 교훈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대해 자기의 남편과 두 아들이 죽어 버렸습니다. 그녀의 시아버지인 엘리는 아주 경솔한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 중에서도 아주 비겁하고 경솔하고 부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식들도 제물을 상용해 먹고 또 제사를 지내러 오는 여자나 집의 여종들과 간음하는 악마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제사장 엘리의 가족은 수치스러운 못된 가족이었습니다.
그래도 엘리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법궤를 빼앗겼다는 말을 듣고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떨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엘리의 자부인 이 여인은 자기의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산기가 있어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태어난 아기가 아들이라고 이야기해 주어도 관념치도 않고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고 하면서 죽었습니다. 아들이라고 해도 대답도 않고 법궤를 빼앗겼다는 것에, 하나님의 궤가 적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에 쇼크를 받아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을 아가보라고 지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아가보의 어머니는 엘리의 자식들이 못되었기 때문에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에도, 또 엘리가 죽었다는 사실에도 별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것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 가족이 여호와의 영광을 가리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는데서 울고 가슴 아파했던 이 여인,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걱정하고 기도했던 이 여인은 자기 집이 이스라엘을 지켜야 할 파수꾼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타락했기 때문에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다 여호와의 법궤를 적에게 빼앗겼다는 말을 들을 때 너무도 신앙적인 충격을 받아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의 이름 없는 여인들 가운데도 가정의 일보다, 자기 남편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 때문에 나라의 일 때문에 많은 충격을 받고 마음 아파하는 그런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홉째,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25장 3절에 보면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막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그들은 모든 점에서 대조적입니다. 외모나 신앙 등 모든 면에서 대조적입니다. 나발은 하나님의 적이 되어 하나님을 배신하고 불순종의 상징인 사울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택해서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가 집행되고 있는 다윗 편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부부의 비극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편을 들고 하나는 악마 편을 들었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울은 다수이고 다윗은 소수였습니다. 일국의 왕의 임명을 받은 다윗은 600명의 충신들을 데리고 쫓겨 다니면서 나발의 영토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발은 마땅히 다윗의 군대를 보호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을 몹시 미워했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을 택한 것입니다. 다윗은 예전에 나발의 목자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많은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나발도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굴 속에 숨어 있으면서 600명의 군량이 없을 때 나발에게 식량을 구하러 갔습니다. 연명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나발은 식량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욕을 했습니다. 모욕을 주어 왕의 신하들을 쫓아 버렸습니다.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그러나 아비가일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의 원수인 사울이 패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이 원칙에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구속 사업을 실천하고 있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자는 하나님을 방해하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하는 일을 증오하고 방해하고 매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항상 이런 것을 표준으로 구약을 해석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원수는 우리가 미워해야 합니다. 신앙적인 하나님의 원수는 미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시기심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새 플랜을, 큰 미션을 방해하다가 그 자리에서 많은 저주를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인 모세는 구스 여인과 불신앙 결혼을 했습니다. 그것을 미리암과 아론이 비난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출애굽에 공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세보다도 더 공로가 많았습니다. 또 미리암은 모세가 태어날 때부터 아주 민첩하게 행동해서 모세를 살렸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독주를 하며 신앙도 없는 여자를 얻어 오니까 비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을 문둥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미션을 시행하고 있으면 그것을 절대로 방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일을 해 오면서 더러는 제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박해하던 사람들을 혼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리 부족해도 그 사람을 박대하면 하나님의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은 자기 남편의 못된 행동을 보고 다윗이 화가 나서 군대를 보내 자기 집을 징벌한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총명한 그녀는 남편과 의논 없이 아주 민첩하게 낙타에 많은 식량을 실어서 다윗에게 가서 울면서 그 발 앞에 엎드려서 남편의 행동을 사과했습니다.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때 이미 다윗은 군대를 보냈습니다. 그해서 군대를 다시 소환했습니다. 하마터면 그 가족이 다 멸망당할 뻔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비가일은 집에 와서 나발에게 왜 불신앙적인 행동을 했느냐며 집안이 망할 뻔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나발은 그 말에 충격을 받고 드러누웠습니다. 그리고 10일 만에 죽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일로 인해 다윗과 아비가일 사이에 큰 로맨스가 생겼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열째, 밧세바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밧세바는 매우 아름다운 여자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왕궁의 지붕 위를 거닐다가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밧세바가 다윗을 홀리기 위해 다윗이 늘 지붕 위에서 거니는 것을 알고는 보이는 곳에서 목욕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여튼 그녀를 본 다윗은 탐이 나서 그녀를 데려오게 해서는 간통을 범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기의 죄를 감추기 위해 잔꾀를 부렸습니다. 전쟁에 나가 있는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불러서 술을 많이 먹이고는 집에 가서 자라고 했습니다. 밧세바가 우리아와 동침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러한 일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너무나 충성스러웠습니다. 왕의 명령을 받고 전쟁을 치르는 사람이 자기 부인에게 갈수 없다고 하여 자기집 밖에서 잤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전쟁터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되자 다윗은 할 수 없이 그를 제일 위험한 곳에서 싸우게 하라는 편지를 총사령관에게 보내어 그는 적의 화살을 맞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밧세바는 장사를 치르고는 금방 궁중으로 들어와서 다윗과 살게 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밧세바가 참 나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의 아내로서 위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목욕을 했다는 그 사실도 나쁘지만 다윗이 오라고 했을 때 왕이니까 어쩔 수 없이 갔다 하더라도 동침은 거절했어야 하는데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남편이 문밖에서 자고 있을 때 어떻게 해서든지 안으로 들어오게 하지 않아 결국은 남편이 죽게 만들었고 또 상 기간이 끝나니까 금방 궁중에 들어가서 살아 버렸습니다. 얼마나 못된 여자입니까! 성경에는 이렇게 못된 여자에 대해 좋게 기록된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을 써서 참회를 했습니다. 그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주의 목전에서 죄를 범했다고, 마음이 너무도 부패한 자라고, 모태에서부터 이렇게 더러운 자이었다고 참회했습니다. 내게 새 영을 부어 주시고 새 마음을 주시기 바란다고, 긍휼히 여겨 달라고 구도했습니다. 얼마나 울면서 간통죄와 살인죄를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온 천하가 다 알도록 자복했습니다. 그러나 밧세바가 죄를 회개했다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참으로 못된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한테서 솔로몬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솔로몬에게서 대가 이어져서 그녀는 예수님의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족보에서 없애 버렸으면 좋겠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럴 수도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좋은 여자도 많지만 나쁜 여자도 많이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못된 신앙이라도 조금만 있으면 그것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아무리 가느다란 신앙의 선이라도 그것을 붙잡고 구속의 역사를 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과연 신앙이 소중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의 신앙과 무신앙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흑인과 백인의 차이보다도, 악인과 선인의 차이보다도, 당나귀와 사람의 차이보다도 더 큰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구약에 보면 신앙의 선이 없어질듯 없어질듯 하다가도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불이 꺼진 줄 알았는데 어딘가에 조금 타다 남은 것이 있어 그것을 붙잡고 하나님이 메시야 구속의 섭리를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귀한 신앙을 폭포수처럼 가지고 있으니까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 교회에는 많은 여성들이 있는데 여러분은 하나님께 귀히 쓰임을 받는 여성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경 속의 여인들(3)

성경 본문 열왕기상 17:8~24

첫째, 드고아의 여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녀는 슬기 있는 여인입니다. 사무엘하 14장 1∼22절을 보면 그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여주인공이 슬기 있게 멋있는 연극을 해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드고아의 여인도 멋있는 연극을 했다고 하겠습니다.
다윗의 가족 가운데에서 강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맏아들인 압살롬이 누이 다말을 욕보인 배다른 동생 암논을 살해했습니다. 가족 내에서 강간 사건과 살인 사건이 난 셈입니다. 다윗이 저지른 죄 때문에 그것을 다 치르게 됩니다. 구약 성경에 있는 엄격한 법 질서하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살인한 사람은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아버지인 왕에게서 국법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되자 이웃 왕가로 피신을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몹시 슬퍼하며 지내고 있는 다윗의 마음을 안 요압은 드고아의 여인을 시켜 다윗 왕 앞에서 멋진 연극을 했습니다.
그 여인은 상복을 입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다윗 왕에게 가서 애원을 했습니다. 일찍이 과부가 된 자신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서로 불화가 생겨 싸움을 하다가 말려 줄 사람이 없어서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살해하고 아이가 하나 남았는데 주위 사람 모두가 살해한 아이를 내가 감춰 놓았다면서 내놓으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 아이를 내어 놓으면 살인자의 처벌을 받아 아들 둘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되어 집안의 씨가 마르게 될 터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절히 말했습니다. 그러자 인정이 많은 다윗 왕은 특명을 내려 그 아들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할 테니 남은 아들이 다시 나와서 살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드고아의 여인은 이야기를 비약시켜서 압살롬의 운명에 대하여 언급을 했습니다. 왕이 법에 의해서 압살롬까지 처벌을 하게 되면 이와 같은 결과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자신의 경우를 비유로 들어 탄원을 하는 듯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눈치가 빠른 다윗은 여인이 연극을 하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여인에게 사대로 고백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다윗 왕은 이 여인에게 최면에 걸리다시피 해서 압살롬을 궁중으로 다시 불러 들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러한 유형의 여인들이 역사의 뒤뜰에서 뭇 영웅들과 왕들을 조정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한 목적을 위해서 혹은 악한 목적을 위해서 여인들이 연극을 벌였던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사무엘상 28장에 있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땅에서 신접술 같은 것을 숭배하는 것을 멸절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여 이스라엘을 종교적으로 청소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임직한 사울 왕은 실패작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많은 책망을 듣고 벌을 받았는데 사울 왕의 통치 기간에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사울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의 왕관을 박탈했습니다. 그런데 왕권을 박탈당한 후에도 계속해서 다윗을 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밖에서는 블레셋이 쳐들어오고 안에서는 하나님 영이 떠나고 하나님의 축복이 거두워진 극한 상황에서 그는 거의 정신 분열자처럼 발광증을 나타내었던 것입니 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신앙이 없어지면 사람들은 신접술자나 무당과 같은 미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울 왕도 하나님의 영의 떠나니까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변장을 하고 갔지만 신접한 여인에게 곧 사울 왕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기의 어려운 상황을 이야기하고는 사무엘을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도대체 신앙이 없었습니다. 신접한 여자한테 가면 죽은 사무엘을 불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어떻게 일을 처리하면 좋겠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독단적으로는 하지 못하겠으니까 복잡하고 착잡한 생각에서 나온 발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을 신접술자가 불러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사울의 불신앙적인 생각입니다. 또 하나남께 회개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는 사실이 이미 신앙에서 멀리 떠나 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하여튼 신접한 여인은 사무엘을 불렀습니다. 요즘도 신접한 사람들에 의해 이런 일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을 불러내고 링컨도 불러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내부적인 이야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마가 하는 것입니다. 악마가 영매를 통해서 죽은 사람의 흉내를 내고 내용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악마의 희롱이, 악령들의 역사가 많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실 악령은 사람보다 미래의 일을 많이 아는데, 사무엘이 나타나서는 블레셋이 쳐들어와서 너와 네 아들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울은 두려워서 음식도 먹지 못했습니다.
세상에는 강신술이나 신접술 같은 신을 접하는 마술이 많은데 특히 여자들은 초감각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있어서 신과 접하기가 쉽습니다. 에덴에서도 최초의 악마가 아담에게 접선한 것이 아니라 하와에게 접선을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특별히 여자들은 산에 가서 기도를 할 때나 신비주의를 추구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여자는 아름답고 감수성이 민감하고 신비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악령과 접하기가 아주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신접한 여자는 두려워하는 사울을 위로하면서 송아지를 잡아서 잘 대접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을 화대해서 해석해 보면 이 여자가 인간적으로는 나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자가 신들에게 붙잡혀서 그렇게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무녀들이 정치와 결탁을 해서 역사의 뒤뜰에서 장난을 치고 영향을 끼쳤던 것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권력가진 사람들은 몹시 불안하기 때문에 이렇게 미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몹시 불안합니다. 지금 세계의 통치자들 중에 하나님에 대해서 절대 신뢰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나 불안한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당이라 신접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해 일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접한 여인들이 권력자의 배후를 조정할 수 있었다는 것이 구약의 기록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셋째, 사무엘하 17장에 있는 바후림의 한 농부의 아내인 무명의 여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 왕은 그의 장자 압살롬에게 모반을 당해서 부자간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내란이 일어났습니다. 아히도벨은 모반군의 총지휘자였는데 압살롬의 모반에 가담한 군대가 아주 막강해지자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피난 생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망명한 다윗은 예루살렘 안에 있는 다윗의 주도 세력과 연락망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첩보행위를 하는 사람은 한 여종이었습니다. 그녀가 예루살렘에서 압살롬의 정보를 다윗 왕에게 가져갈 때는 이중 삼중의 연락망을 거쳤는데 제1차로 그 여종이 정보를 가져오면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에느로겔이라는 우물가에서 그 여종을 접선해서 다윗 왕에게 그 정보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종의 첩보 활동이 압살롬에게 눈치를 채이게 되어서 뒤를 쫓기게 되었습니다.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도 압살롬의 첩자들에게 추격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잡히기만 하면 다윗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고 또 접선이 끊어지게 되기 때문에 다윗이 일망타진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다윗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속사의 종자이기 때문에 기어이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후림이라는 곳에는 다윗 왕을 존경하는 경건한 농부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촌부인데 이 촌부는 나라의 회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육탄이 되어서라도 다윗 왕을 구원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두 첩자가 쫓기는 것을 보고 어떻게 자기 몸으로 막아 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 첩자는 쫓기다가 우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부근을 찾아보면 그들은 금방 들킬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때 이 여자의 마음속에 번개처럼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방에 들어가 큰 모포를 가져다가 우물을 덮고는 그 위에 금방 타작하려고 가져온 보리를 수북하게 쌓아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부근에서 일을 하는 것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쫓아온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그들이 도망간 곳을 가르쳐 주어 두 첩자를 위험에서 건져 내었습니다. 다윗을 위하여 경건하게 기도하던 한 무명의 부인 때문에 구속사의 그렇게도 중요한 위기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무명의 여인들 속에도 바후림의 촌부와 같은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마리아가 되고 우리들의 마르다가 되어서 혹은 우리들의 에스더가 되어서 민족 복음화 운동과 세계 선교의 역사에 있어서 굵직한 몫을 담당하는 무명의 영웅적인 행동을 하는 여성들이 많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넷째, 열왕기상 3장에 나오는 솔로몬 왕 때의 법정의 두 여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너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만, 창녀 두 명이 한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시기와 질투와 경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창녀가 아기를 낳게 되었고 다른 창녀도 3일 후에 아기를 낳았습니다. 먼저 아기를 낳은 창녀는 타락할 대로 타락한 여자였는데 밤에 거칠게 잠을 자다가 그만 자기 아기를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창녀의 자고 있는 아기와 자기의 죽은 아기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산 아기를 서로 자기 아기라고 싸우게 되었고 마침내 솔로몬에게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정 저런 사정을 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솔로몬은 서로 내 아기라고 하니 그 아기를 나누어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기를 바꾸었던 창녀는 쾌히 찬성을 했고, 진짜 어머니는 그 아기를 차라리 저 여자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진짜 어머니를 가려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교훈은 똑같이 타락한 여자들이라고 해도 마지막까지 모성애를 지니고 있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이중 삼중의 질투심까지 움직여서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식의 악마적인 광란증을 일으키는 여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인은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인간성도 모성애도 친구의 우정도 다 짓밟아 버린 악마적인 독을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여자는 사회 구조의 상부층에도 있고 하부층에도 있는데 남자들이 이런 여자에게 걸리기만 하면 신세를 열 배로 망치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아야의 딸 리스바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무엘하 21장에 그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울은 적과 싸울 때 하·나님께서 적 족속을 전부 죽이라고 했는데 죽이지 않았습니다. 또 사무엘이 지내야 할 제사를 제사장도 아닌 사울이 지냈고, 박탈당한 왕권을 기어이 고집했으며, 다윗 왕을 죽이려고 했고, 또 신접한 여자를 찾아가는 등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사실 가나안 족속은 다 멸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볼 때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족속이고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은 족속이어서 지상에서 멸절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브온 족속이 간교를 부려 여호수아를 꼬여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계약을 맺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맺은 것이기 때문에 좋든지 나쁘든지간에 유효하게 살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손해가 날지라도 약속한 것을 변경시키는 것은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계약이라도 사울이 지켰어야 하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기브온족을 멸절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사울이 전쟁에 때하게 되고 나중에 다윗이 득세를 했는데 기브온족에 의해서 보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자손 7명이 교수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큰 바위 위에 교수대를 세워 놓고 목을 달아서 죽였습니다. 사울의부인 중의 하나인 리스바의 두 아들과 함께 다른 아들 다섯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사형법에는 죽으면 묻지 않고 독수리나 짐승의 밥이 되어서 뼈만 남을 때까지 그냥 놓아 둡니다.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리스바는 자기의 두 아들과 사울의 배다른 다섯 아이들들 죽는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 지켜서서 가지 않았습니다. 시체에 뼈만 앙상하게 남을 때까지 꼼작도 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시체를 지켰습니다. 어머니로서의 지성을 다했습니다. 남편의 혈육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고귀하고 경건된 참회와 속죄,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기도 같은 기다림이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그 뼈를 모아다가 왕능인 사울 옆에 장사를 정식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21장 14절에 보면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사형당한 시체 옆에서 자기 가족의 죄를 속죄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며 치욕적인 상황 속에서 공포의 밤에 부르짖었던 그 처절한 영혼의 울부짖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극한 상황 속에서 여인들이 드리는 지성스런 기도가 하늘을 움직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섯째, 악처로 유명한 욥의 아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욥은 너무 많은 재난을 당했습니다. 집안이 하루아침에 망했습니다. 10명의 자녀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종들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수천 마리나 되는 그의 육축도 약탈당하거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벼락도 내리고 적이 쳐들어오기도 해서 일시에 다 망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자기의 몸에는 더러운 악창이 생겨서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욥의 친구들이 와서 비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욥은 물질적인 고통뿐만이 아니라 육체적&#8228;심리적&#8228;사회적&#8228;영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자신을외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의 탄식을 보면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말 가운데 이보다 더 처절한 절망의 언어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언어였습니다. 욥의 고통은 인간 고통의 제일 극심한 경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극한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한 가닥 남은 위안이라고는 자기의 아내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아내가 마지막 화살을 욥의 가슴에다 꽂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앙적으로 괴로운 욥에게 영적으로 살인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욥기를 읽으면서 그의 아내의 말을 들을 때 섬뜩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런 스타일의 여자가 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이런 유형은 좌기 드문 특별한 경우의 사람이 아닙니다. 크리스천 중에도 이와 같은 아내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영적으로 고통을 받게 될 때, 육신적으로 가장 괴로움을 당할 때, 심리적으로 가장 괴로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될 때, 악마와 하나님 사이에서시련의 고통의 극한 속에 있을 때 그를 꽉 잡아 주는 아내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내버리고 죽으라고 악담을 하는 아내도 많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의 아내는 루터가 실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이 죽었다고 하면서 상복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지 않고서야 당신이 그렇게 실망을 할 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상징적인 행동으로 루터의 아내는 남편의 영적 시련을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수많은 사역자의 아내들 중에는 남편에게 위로 대신에 공격을 하고 격려 대신에 좌절에 빠뜨리며 충성 대신에 배반을 사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의 아내 때문에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이 십자가를 벗어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영광의 길을 가라고, 편안한 길을 가라고 또 대접받는 길을 가라고 하면서 남편의 십자가를 벗겨 버리는 욥의 아내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곱째, 스바의 여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스바는 오늘의 이디오피아입니다. 스바의 여왕은 경치,경제,외교,군사,문화의 각 방면에 걸쳐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많은 지혜를 짰으며 계획을 했습니다. 그녀는 유명한 여왕입니다. 특히 그녀는 다윗 왕조를 계승해서 황금 국가를 만들고 있는 솔로몬에게서 정신적 종교적인 것을 배워 와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녀가 솔로몬에게 갔을 때 아름다운 성전에 매력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고대 건축미의 절정이라고 말합니다.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이 없는 사이에 정치적 변란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돈도 많이 들고, 많은 신하를 데리고 가야 하는, 그리고 가는 도중에 도둑을 만날지도 모르는 험난한 길을 간 것은 솔로몬의 지혜의 비결인 그의 신앙을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디오피아는 최근에 황제가 현 정권에게 살해될 때까지 제일 오래된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면면하게 흘러 내려 온 역사는 스바의 여왕에 의해서 도입된 기독교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의 원천인 신앙을 찾아갔던 것이 아프라카의 빛이 되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덟째, 열왕기상 14장에 있는 여로보암의 아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2절에 보면 ‘그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 여로보암이 그 아내에게 이르되 청컨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으로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저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고한 사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여로보암은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 10지파의 왕국을 세운 북군의 초대 왕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그의 아내와 더불어 여호와 신앙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 원주민들이 신봉하고 있는 여러 불순한 우상 종교들을 도입해서 소위 혼합 종교 시대를 이루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 부강국의 암흑 시대의 장을 여는 마당에 여로보암의 아내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아비야이고 하나는 나답입니다. 아비야는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뜻을 품은 사람이었는데 나답은 여호와 앞이 악한 일을 한 자라고 했습니다. 아비야는 여호와를 경외하지는 않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 선의를 가졌고 호감을 가졌습니다. 그런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한 가정에서 선의를 가진 그 신앙이라도 결코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비야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내에게 변장을 시켜서 선지자 아히야를 찾아가게 했습니다. 변장을 하고 몰래 아히야를 찾아간 것은 하나님의 종을 찾아가서 기도를 받고 은총으로 용서를 받아야 하겠다는, 회개하고 간절히 은총을 갈구하는 마음으로 간 것이 아니라 마치 점장이를 찾아가는 심정으로 미신적인 동기에서 선지자를 찾아갔기 때문입니다. 신앙적 동기가 아닌 불순한 동기에서 찾아갔습니다. 급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기는 찾았지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찾아간 것이 아니라 미신적인 생각으로 찾아갔습니다. 아히야는 그들을 보자마자 책망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왕으로 세웠는데 배반하고 우상 종교를 섬기며 혼합 종교를 만들었으니 너희 집안은 망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도 너희 성 안에서 죽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아비야는 하나님을 향한 선의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사람만은 장례식을 치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선지자의 말대로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내는 여로보암과 공모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절대 악이라 신앙 악을 대할 때 기독교인의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고 협조해야 하는 한계가 분명해야 합니다. 절대로 거부하는 때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남편과 공모해서 나쁜 일을 해왔지만, 신앙에 대해서 모호한 짓을 해왔지만 그러나 그녀가 하나님의 종 아히야를 무당을 찾는 심정으로 찾아가서는 안 되었습니다. 거기서는 회개를 하고 내가 왕비라고 솔직히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녀가 남편과 공모함으로 인해서 온 가족이 멸망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적인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홉째, 사르밧의 과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 때문에 저주를 해서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게 했습니다. 온 땅이 지옥이 된 것입니다. 식물과 동물들이 목이 마르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형벌이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사르밧에 가서 한 과부의 집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과부의 집에는 마지막으로 약간의 기름과 가루가 조금 남아 있었는데 예언자 엘리야가 찾아와서 기름과 가루가 마르지 않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면서 마지막 남은 가루로 먼저 나에게 떡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과부는 여호와 하나님을 대접하는 뜻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뜻에서 마지막 남은 자기의 떡을 엘리야에게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집에는 기름과 떡가루가 마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할 때에는 얼마 있으면 먹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먹고 나면 이제 먹을 것이 없어 죽는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부는 아들과 함께 굶어 죽는다고 하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먼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대접했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깊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도 굶어 죽을 각오로 주님을 섬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전도자의 길을 갈 때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걱정하지 말고 굶어 죽을 각오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절대로 굶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울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째, 이세벨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녀는 성경 가운데 악한 여인의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열왕기상 21장 25절에 보면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아합이 참으로 많은 악을 행했는데 그 아내에게 충동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세벨은 시돈 왕의 딸이고 아합 왕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미모와 간계와 탐욕과 허영의 상징인 이상한 여인입니다. 악녀와 같은 여인입니다. 그런데 아합 왕은 아주 나약하고 공처가입니다. 그래서 이세벨이 다스렸습니다. 아합이 나봇의 기름진 포도밭이 탐이나 뺏고 싶었지만 어렵게 되자 이세벨이 거짓 증인을 세워 그가 하나님과 왕을 모욕했다는 위증을 하게 해 살해하고 그 포도밭을 몰수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못된 짓을 그녀는 식은 죽 먹듯 했습니다. 마음대로 살인도 할 수 있고 정부도 뒤집을 수 있는 여자였습니다. 아름다운 곳곳에 바알 종교의 신당을 세우고 바알 신상을 궁중에 모셔 놓고는 여호와 종교의 선지자들을 모두 죽이고 바알 종교를 국교로 만들었습니다. 정치적 종교적으로 악한 일을 너무나 많이 행했습니다. 그러한 그녀는 하나님의 벌을 받아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녀의 시체는 개가 모두 뜯어 먹어 뼈만 앙상히 남았고 아무도 묻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추악한 여인의 말로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말로가 그렇게 된다면 이 다음의 세상에서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열한째, 수넴 여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열왕기하 4장 8절에 보면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망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고 했습니다. 제가 특별히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종들을 잘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는 가정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싫어하는 가정은 하나님의 축복을 거부한 가정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수넴 여인은 하나님의 종을 잘 대접했습니다. 자기 집에 방을 하나 마련하고는 침상과 책상, 의자를 놓고 촛대를 진설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언제든지 와서 쉬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사를 통해서 구속사의 향기이고 기름과 같은 역할을 하는 여인입니다. 그래서 수넴 여인은 자기 아이가 죽었을 때에 엘리사를 모셔다가 그 아이를 살려내는 축복을 받았고 영적으로도 말할 수 없는 축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전도하다가 피곤한 많은 종들을 이렇게 대접해 주는 수넴 여인과 같은 여인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수넴 여인이 받은 축복을 모두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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