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한국교회의 성령운동
1. 한국교회의 성령운동
19세기 한국의 현실은 천주교가 미미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유교와 불교, 미신이 깊이 뿌리내린 은둔의 나라로서 폐쇄적이고 어두운 동토의 나라였다. 맥클레이 선교사의 한국 방문을 통하여 1884년 7월 3일 고종으로부터 한국의 병원선교외 교육이 허용하게 되었다.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물결은1903년 8월 원산에서 시작되었다.31) 이 물결은 웨일즈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일어났다. 연합성경공부 및 기도회를 인도하던 선교사 하디는 기도에 관한 세편의 글을 준비하던 중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있어 자신의 능력이 결핍된 것을 발견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있어 지신의 능력이 결핍된 것을 발견했다. 기도회 기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면서 그는 누가복음 11장 13절에 기록된 약속에 따라 성령의 충만을 간절히 간구 하였고 드디어 기도회 마지막 날 놀라운 영적 각성을 경험했다. 마지막 날 화이트의 강의를 통해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놀라운 도전을 받은 것이다. 그는 감정이 아닌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고 전에는 소유하지 못했던 마음에 새로운 평안을 얻게 되었음을 그곳에 모인 일곱 명의 선교사들 앞에서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리고 자신의 죄악에 대해 선교사 동료와 한국 성도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눈물로 회개함으로써 원산에 커다란 부흥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32) 이 부흥 운동의 결과는 개개인의 성결한 생활로 이어졌는데, 이것은 그때 이후 지금까지 한국교회에 내려오는 대표적인 신앙형태이면서 특징이 되었다.33) 이 원산 부흥운동의 물결로 교회 성도들의 삶이 두드러지게 변화되었다. 깨끗하게 하는 불같이, 신자들의 심령을 변화시켜 전에 보지 못한 신실성과 순결성을 갖게 되었다. 이 운동의 결과로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했다. 3년 동안에 수가 세배로 증가하였다. 두 번째 한국교회 성령운동은 1905년 말부터 1907년까지 한국을 휩쓸었다. 원산에 이어 평양에서도 1905녀부터 거대한 부흥 운동의 물결이 일어났는데, 회개를 촉구하고 성결한 삶을 강조한 이 부흥운동으로 인하여 마침내 한국교회는 급속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현실은 을사조약의 체결로 인해 더욱 어두워져 갔고 이는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켜 평양에 있는 선교사들이 1906년 8월에 한 주간동안 성경공부와 기도회로 모이는 계기가 되었다.34) 이 때 하디가 그 모임을 인도하기 위해 평양에 와서 요한일서를 본문으로 하여 말씀을 증거 하였고 선교사들에게 성령 충만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참석한 선교사들에 의해 평양의 한국교회 지도자들 역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35) 특히 참석한 사람 중에는 1906년 평양 신학교 학생이었던 길선주 목사가 있었는데 그는 새벽 기도회를 시작한 당사자이다. 새벽 기도회는 철야 기도와 함께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아름다운 신앙전통으로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당시 한국의 남쪽 목포에서도 1906년 초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교회마다 회중으로 가득 찼었다. 서울에서는 1906년 처음으로 여러 교단들이 연합하였고 성경학교에 많은 신자들이 많이 등록하였다.36) 1907년에 또 다시 거대한 부흥운동의 물결이 한반도를 뒤덮었다.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4개의 장로교 선교회가 연합으로 연례 평안도 사경회를 개최하였다. 이 때 성령의 능력이 특별히 나타나기를 간구했으며 그래함 리가 그 기도회를 인도하였다. 이 모임 중에 간단한 설교와 몇 명의 간증이 있었고 그래함 리는 새벽까지 기도회를 갖는데 기도를 원하는 사람은 남으라고 광고하였다. 500명이상이 남아서 회개를 하는 기도에 전념하였는데 회개하는 자들은 모두 성령의 강림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목놓아 울며 마루를 주먹으로 치며 통곡하며 회개하고 성령충만으로 그들은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37) 다음날은 길선주 목사에 의해서 사경회가 인도되었다.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더욱 강하게 일어났으며 그날 그 현장에 참석한 장로들과 목사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사기, 공금횡령 그리고 실제적인 도둑질을 고백했다.38) 이러한 부흥운동은 평양 전역을 거쳐 서울로 이어졌으며 평양 근교 지역 선천, 해주, 영변, 칠산, 재령으로 확산 되었다. 또한 대구, 개성, 강화, 제물포, 공주 등 전국적으로 이어졌으며 더 나아가 중국의 만주지역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39) 이 운동의 결과로 1906년에서 1907년 사이에 장로교회의 성장은 1906년 54,987명에서 1907년 73,844명으로 34% 증가하였고 감리교회도 역시 1906년에 18,108명에서 1907년에 39,613명으로 무려 118%의 증가를 나타냈다. 또한 208개의 기독교 학교가 344개로 증가하였다.40) 1910년 한일합방 후 일본은 대부흥운동을 통해 성장한 한국기독교가 일본 식민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잠재적 반정부 단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05인 사건이라 불리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조작하여 한국기도교를 탄압하였다. 이 사건을 통해 기독교의 지도자들을 투옥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함으로서 한국 통치의 장애물을 제거 하고자 한 것이다.41) 일제는 1910년 12월 29일 데라우찌 총독이 선천을 지나가는 기회를 타서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계획했다며, 총독암살 음모 사건을 날조하여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선교사들과 윤치호, 영기석, 유동설, 이승훈 등 신민회 간부와 기독교인 600여명을 포함하여 700여명을 체포했고 그 가운데 123명을 투옥시켰으며, 증거 조작을 통해 그 중 105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것이 마로 우리에게 알려진 “105인 사건”이다. 기소된 123명 가운데 98명이 기독교인 이었는데, 이중에는 10대 소년들도 있었다. 이와 같이 교회가 일본의 압제아래 수난을 당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결과 1911년과 1912년에 상당수의 교인이 교회를 떠났다. 장로교의 경우 1911년 144,261명이던 성도수가 1912년에는 127,228명으로 감소했는데, 이는 한 해 동안 거의 17,000여 명이나 줄어든 셈이다. 교회 수는 1,448개에서 1,438개로, 그리고 학교수는 656개에서 566개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런 수난 속에서도 성령의 역사는 교회속에 일어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길선주의 부흥회는 계속 되었다. 길선주는 1907년 대 부흥이 일어났을 때 목사가 된 후 28년간 헌신하였고 그의 전성기는 목사가 된 후 초기 약 10년(1910-1920)으로 본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절망에 처한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복음을 외쳤다.42) 길선주 목사의 초기 사역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회개운동으로 통곡하며 회개 하였고 성령의 강림으로 둥굴고 기절하고 기도의 불길이 일어났다. 길선주 목사는 요한계시록만 1만 2백회를 독파하여 거의 암기하였고, 신약성경은 100회, 구약성경은 30회 이상, 요한일서는 5백번 이상 독파하였다.43)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났다. 그 핵심은 기독교를 경로로 하고 있었다.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이 기독교 인사였다. 기독교 정신으로 결속력을 보이며 독립운동에 앞장서서 막대한 원동력을 보였다. 삼일운동 이후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죽거나 투옥되었다. 제암리 교회는 1919년 4월15일 낮 2시에 30여명의 성도들을 총과 칼로 죽이고 불살라졌다. 1919년 3월부터 5월30일까지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체포된 자 46,948명, 교회 파손 47개소, 학교 파손 2개소, 민가 파손 715 채였으며, 1년뒤 1920년 3월 1일 까지 사망자 7,645명, 부상자 45,562명, 체포자 49,818명, 가옥 소각 724채, 교회 소각 59개소, 학교 소각 3개교였다.44) 삼일운동을 통하여 교회가 민족의 운명과 동일한 행로를 간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몰려오는 큰 계기가 되었다. 감옥에서 기독교인들은 많은 사람들을 예수를 전도하여 구원 시켰으며 성경을 읽고 암기하여 나중에 목회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1920년대 김익두 목사의 사역으로 성령운동이 이어졌는데 김익두는 가슴을 칼로 찢는 성령의 세례를 경험하고 성령의 불을 내리는 부흥회 목사로 활동하게 되었다.45) 김익두는 내세 지향적이며, 사랑을 강조하였고
성령의 능력과 기도의 힘, 진실하고 소박한 신앙, 고난과 핍박 후의 소망을 외쳤고 빈곤과 병중에 있는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전도하고 목회를 하였다.46) 신사참배로 인하여 1930년대에 교회의 노선분리가 시작 되었고, 1907년 미국의 아주사 거리에 있었던 오순절 부흥의 역사와 성령세례를 체험하고 방언을 말하는 미국 오순절 선교사 메리 럼시가 1928년에 한국에 와서 성령세례와 방언을 체험하게 하였다. 럼시가 도착하던 해에 한국에서는 감리교 이용도 목사가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여, 오순절 운동을 한국에 소개하는 도구로 쓰임 받았다. 이용도 목사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많은 성도들이 방언과 신유를 체험하는 역사가 있었다. 이용도 목사는 “한국의 오순절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웠다. 그는 오직 주님의 뜻대로만 살기로 소망했으며 집회를 온전히 기도로 준비하였으며 설교를 10분 할때도 있었고 7시간 할 때도 있었다. 사랑의 실천과 사치를 버리고 수수한 옷차림을 하였으며 오직 기도와 찬송과 설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다. 그는 ‘교회의 혁신’을 하고자 하였고 교회의 자립과 토착화에 기여하였다.47) 1945년 8월15일 해방되어 새 희망과 번영의 아침을 맞는 듯 하였으나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의 발발로 3년동안 400명 이상의 목사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순교하게 되었고 이중에 손양원 목사와 김익두 목사가 포함되었다.48) 1.4후퇴 때 한국교회 많은 성도가 부산에 몰려와 거국적인 구국기도회를 열고 주의 손길을 구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다. 북한에서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피난촌의 중심은 교회가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교회는 열광적이고 종말론적인 내면화의 경건에 치중하도록 만들었다. 이시기에 미국의 오순절 교단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오순절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고 오순절 신앙은 이러한 한국적 상황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었고 가난과 질병과 불안한 그들에게 큰 소망을 주었다. 순복음 중앙교회도 이런 상황에서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뜨거운 기도운동으로 성령세례와 함께 방언과 각종 은사와 치유가 일어났으며 조용기 목사의 긍정적이며 소망적이며 힘있는 설교는 그 전쟁으로 상처받은 한국인들을 교회로 모이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기복적이라고 비판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조용기 목사의 멧세지는 그 고통의 시대 상황에 맞는 소망을 주고 힘을 주는 성령의 불같은 음성이었다. 오순절 교회들은 선교의 역사가 짧음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 중에서도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는 1964년에는 성도수가 무려2천명으로 늘었고 구역조직을 활성화하고 평신도들이 구역장들이 되어 새신자들을 양육하였으며 1973년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건축하여 동시 1만명이 예배드릴 수가 있게 되었다. 특히 여성지도자들을 양육하고 봉사하게 하는 새로운 방향을 시도하였다. 1993년에 5만 구역을 이루었고 1994년에는 70만명을 상회하였고 2008년에는 75만명 이상으로 부흥하는 세계최고의 큰 교회가 되었다.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강조하는 신조와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에서 변형된, 만인구원설을 첨가하고 성령신학을 장착한(찰스피니의 성령론에 가까운) 교리를 유지하는 세계오순절 교회와 일맥상통한다.49) 조용기 목사는 오중복음(구원, 성령충만, 신유, 축복, 재림)과 삼중축복(영혼, 범사, 건강의 축복)의 멧세지로 성도들이 이해하기 쉽게 가르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성령운동을 통하여 뜨거운 기도로 인한 방언으로 확인되는 성령세례를 중요시하고 각종 은사를 활성화 하고 평신도 영적 지도자를 양성하여 폭발적인 부흥을 가져왔다. 국제신학연구원 이영훈 원장은 교회 성장의 이유를 6가지로 말한다. 첫째, 강력하고도 적극적인 희망을 주는 십자가 중심의 능력의 멧세지. 둘째, 놀라운 신유의 역사. 셋째, 기도원 등을 통한 끈임 없는 기도운동. 넷째, 방언으로 확인되는 성령세례 강조. 다섯째, 평신도 사역을 중심으로 구역조직의 활성화. 여섯째, 선교사역의 강조 및 각종 미디어를 이용한 복음전파와 세계선교 확장이다. 1970년대에 이르러 교파를 초월한 대형집회와 부흥회의 활성화로 한국교회는 계속적인 부흥을 가져온다. 73년 5월 16일부터 31일까지 부산, 춘천, 대전, 전주, 광주, 대구, 여의도광장에서 부흥사 빌리 그레함 목사의 초교파적인 전도집회가 열렸고 연인원 171만명 참석에 3만7천명의 결신자를 얻게 되었다.50) 1974년 8월 13부터 17일까지 엑스폴로대회가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다. “예수혁명-성령의 폭발” 이라는 제목으로 빌 브라이트박사를 위시한 국내외 강사들이 진행하였다. 전도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하였고, 이 대회로 국내 결신자 27만명, 외국인 결신자 1,192명의 결실이 있었으며 5일동안 600만명이 참석하였고 철야기도에 143만명이 참석하였다.51)
1977년 8월에는 “77민족 복음화 성회”가 한국부흥사협의회주최로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다. 1907년 부흥 70주년 기념으로 열린 전도 대회였으며 첫날 80만명이 모이고 30만명이 철야기도를 하였다. 1980년에 80세계복음화 대성회로 여의도광장에서 열렸고 연인원 700만명에 결신자가 5만명 이상이 나왔고, 이 대회에서 10만명의 선교사 지망자를 내었다. 1984년 100주년 대성회는 연인원 350만명이 참석하였다. 이 시기의 성령운동에 있어서의 특징은 대규모의 연합집회를 통하여 그 분위기가 주도되고 확신 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수차례에 걸친 여의도 연합집회는 성령운동의 자신감과 한국교회 성령운동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선교에 큰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2.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의 평가
오순절 성령운동의 결과로 교회가 세워지고 급격한 성장이 이루어졌던 것처럼,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영향은 무엇보다도 성령운동 그 자체가 교회성장의 기폭제가 되었고, 수많은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교회역사에서 성령운동은 항상 전도운동을 가져왔으며 이로 인하여 교회가 크게 성장하였던 것이다. 한국교회 성령운동은 최근에 가까울수록 대표적으로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그 중심의 자리를 잡게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전쟁이후 상황에 따라 조용기 목사의 멧세지가 시대적으로 적절한 내용으로 성령의 운동에 의하여 선포 되었다.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성령의 운동임에 틀림없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을 통하여 성령의 기름부음과 충만하심으로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끌어 오셨음을 확인 할 수가 있다.52) 그 때에는 시대 상황이 어려울수록 성도들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갔으며 성령의 충만하심과 인도하심 안에 거하여 생명력이 강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성령운동이 한국교회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나 경제발전과 문화수준이 높아지고 인터넷과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하나님을 가리고 죄악의 강한 바람이 온 나라를 혼탁 하게 하는 시대 상황 앞에 서있는 한국교회는 필경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선진국에 가까운 부유한 생활로 하나님을 외면하고 배금주의가 만연하고 오락과 여가 즐기기에 중독이 되어가고 있다.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로 기독교인들의 극히 작은 비리는 크게 홍보 보도 되어 안 믿는 자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식상하게 한다. 문화생활의 상승으로 교회도 그에 상응하여 고급화 되어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멋진 외출복과 같이 기독교인이라는 신분의 만족감과 교양 있는 문화인으로서 기독교인의 신분을 유지하려한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축복받고 살아야 하고 예수 이름으로 고난 받고 핍박받는 것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가 있으니 내가 마음 가는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고 현실과 상식에 맞지 않는 성령의 권고나 지시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성경 지식이 넘쳐 나지만 예수님의 은혜의 감동도 사랑도 예배도 형식적이다. 예수님의 재림이 기다려지기는커녕 오실 때를 더 늦춰주시길 바라기도 한다. 목회자는 하나님 보다 눈앞에 보이는 교인들이 더 부담스럽고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그들한테 존경받고 싶어 한다. 각 교단들은 교권유지와 힘겨루기에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있는 것 같다. 개 교회들은 교회건축에 모든 재정을 쏟아 넣어야하고 그도 부족하여 막대한 대출을 짊어지는 상황에서 해외 선교사파송과 선교비 지출은 너무 미미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인다. 그나마 미전도 종족과 가난하고 위험한 나라들에 대한 실질적이며 죽음을 각오하고 헌신하고자 하는 선교보다는 이미 복음이 들어가서 핍박 없이 선교할 수 있는 2선 쯤에 속한 나라를 선호하고 단기선교로 흉내만 내는 선교를 하면서 생색만 내고자하는, 능력도 생명도 없고 주님의 뜻과 관계없는 인본주의 선교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이시대의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분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은 분명 한국교회의 위기임에 틀림없다. 2000년 이후에 기독교인의 감소는 이러한 부정적인 내용들을 뒷받침한다. 가난하고 두렵고 고통스러운 6.25 전쟁전후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던 그 시절에 불같이 역사하셨던 성령운동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근래에 경제의 위기와 세계정세의 위기는 다행히 신앙의 각성의 기회일 수 도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일 수도 있다. 선교하지 않으면 역사적으로 과거에 그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강재로 흩어버리는 방법으로 전쟁이나 핍박이나 천재지변 등을 허락 하실 지도 모른다. 세계선교가 시급한 지금 이 시대에, 성령께서는 새롭고 더 강력한 성령의 바람을 준비하고 계심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이 성령의 강한 바람으로, 성령의 불로 다시 이 땅에 임하셔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택하시고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큰 능력을 입히시고 세계역사의 마지막 전무후무한 강력한 성령운동을 하실 것이다. 이를 위하여 성령께서는 많은 주의 종들에게 중보기도 하게 하시고 때를 기다리신다고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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