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성령운동의 역사적 인물
1. 요한 웨슬레
요한 웨슬레는 1703년 6월17일 영국 링컨 주에 있는 인구 2천명 미만의 작은 마을인 엡윗촌(Epworth)에서 부친 사무엘 웨슬레와 모친 수산나 사이에서 19명의 자녀 중 15번째(아들로 두번째)로 태어났다. 30세때 웨슬레는 부흥운동의 초기 런던을 중심으로 옥스포드, 브리스톨(런던의 서쪽 180㎞인 지점), 킹스우드(런던 서쪽 120㎞인 지점)등지에서 순회 전도 활동을 하였으며 급속하게 북쪽의 뉴캐슬까지 전도 무대가 확장되었다. 1739년에 시작된 전도 집회는 1742년에 이르러 영국 전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1739년에서 1744년까지 5년간은 보조자로서 목사 4명과 평신도 지도자 4∼5명이 도와 눈부신 결실을 맺었다. 웨슬레는 브리스톨과 킹스우드를 중심으로 그 인근 여러 촌락과 동네에서 계속 노천 설교를 하였고 모인 군중의 수는 1천명으로부터 1만5천명까지 되었다. 브리스톨에서는 주일 아침 7시에 드리는 예배에 무려 5천명 내지 6천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설교를 경청하였다. 이런 일이 자주 계속되었다. 휘트필드의 요청으로 어퍼 무어필드(Upper Moorfield)에서는 오전 7시에 1만 2천명이 모인 군중 앞에서 웨슬레가 강력한 구원의 메시지를 증거 하였고 같은 날 오후 5시에는 케닝톤 광장에서 1만 5천명 군중에게 옥외설교를 하였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감화력이 컸던지 모여든 군중들은 넋을 읽고 그의 설교를 경청하였고 설교가 끝났을 때에는 자신들의 죄를 깊이 깨닫고 눈물로 회개하고 울부짖으며 심지어는 실신하는 자들도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처럼 땅에 쓰러지기도 하였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웨슬레가 86세 되었을 때 아일랜드를 방문하여 3개월 체류하면서 더블린과 콕(Cork)시장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그밖의 도시에서도 그를 환대하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청중이 쇄도하였고 더블린에서는 수차례 집회를 가졌는데 런던에서보다도 더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의 설교를 들었다. 이때 60여 도시와 촌락을 9주간 순회하면서 예배당에서 100회, 옥외 노천에서 6∼7차 설교하였으며 꼬냅 에서는 5만 5천명의 군중이 모여 들어 그의 설교를 경청 하였다. 87세가 된 웨슬레는 노쇠함을 느끼면서도 영국 각처와 웨일즈, 와잇도등을 순회하면서 전도를 하고 신도회를 돌보았다. 엡윗을 방문했을 때에는 너무 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어 할 수 없이 예배당 밖의 노천에서 집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웨슬레의 최후 10년간의 활동은 그전 40년 동안의 업적보다도 배 이상의 결실을 거두었다. 1785년 4월 24일 일기에 이렇게 쓰여져 있다. “50년 전에 심은 겨자씨 한 알이 그렇게도 신기하게 성장한 것을 나는 지금 마음에 되새기고 있다. 이것은 영국전역과 아일랜드와 와잇도, 맨도 그리고 아메리카에는 이워드 군도(Leeward Islands)로 부터 미주 전대륙에 미치고, 캐나다의 뉴 파운드 랜드(New found land)에 까지 이르렀다.”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외친 요한 웨슬레가 뿌려 놓은 복음의 씨앗은 이제 20세기를 넘어가면서 전세계 95개 국에서 5천만명의 성도로 성장하는 눈부신 결실을 이루었다. 불란서 역사가 토마스 칼라일(Thmas Carlyle)과 엘리 할레비(Eli Halevy)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18C 요한 웨슬레에 의해 일어난 감리교회가 영국을 변화시키고 개혁시켰으므로 불란서와 같은 유혈혁명이 영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영국사회와 국가를 구원하였다.” 18C 영국 역사를 저술한 레키는 요한 웨슬레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존 웨슬레는 그 시대의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중에 한사람이었고 그의 영적 역사는 해전이나 육전에서 얻어진 어떤 결과보다 큰 것이었다.” 맥티어 감독(Mc Tyeire)은 웨슬레의 신앙 부흥 운동을 아래와 같이 평가하였다. “휘트필드의 놀라운 영적 부흥 운동은 마르고 거칠은 땅을 한번 신선케 하고 비옥케 한 다음 그 땅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말았지만 웨슬레의 놀라운 신앙부흥 운동은 마치 시냇물이 흘러가면서 점점 커지고 깊어지며 거 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웨슬레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성령 충만과 뜨거운 선교열정과 속회조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웨슬레는 감리교 성도들에게 살아계신 성령을 체험하고 그와 똑 같은 체험을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회심의 성령체험에서 출발하고 평신도를 동원한 속회조직을 활성화시켜 부흥시키고 기도로 인한 성령체험과 말씀공부와 전도와 선교에 최선을 다했다. 결론적으로 요한 웨슬레의 부흥운동은 회개운동과 하나님 은혜에 대한 진실한 응답을 통한 성결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구원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또한 믿음의 구원과 함께 성령의 능력으로 성화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성령의 체험을 통하여 속죄의 확신과 원수까지 기도해주는 사랑을 실천하였고, 교회의 선교의 비젼과 실천에 최선을 다했다. 요한 웨슬레의 성화와 성령세례를 동일한 체험으로 보는 “완전성화”(인간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성화될 수 없고 위로부터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동일한 성령세례에 의해서 성화되어진다) 견해는 19세기 후반에서 오순절 운동 지도자들에게는 거부되었다. 오순절 운동 지도자들은 회심(칭의), 자격의 완전성화, 방언으로 증거되는 성령세례의 세 단계 기독교인의 경험을 주장하였다.22)
2. 조나단 에드워드
미국이 낳은 위대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 주 이스트 윈저(East Winsor)에서 회중교회 목사인 아버지 니모시 에드워즈의 11명의 자녀 가운데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독실한 청교도 정신은 아들인 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조나단에게 매일 성경묵상과 기도를 하도록 하고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능력을 개발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1721년 3월 이후에 회심하게 된다. 1727년 2월15일 스물세 살의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시작했다. 에드워드가 사역을 하던 18세기 초반의 미국은 기도의 불이 꺼지고 각종 집회, 주일 성수가 사라진 영적으로 어두운 시절이었으며 인디언 전쟁으로 식민지의 영적상태는 회복불능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순수한 복음으로 말씀을 전하고 만연된 세속적인 성취만을 추구하는 신앙을 신랄하게 공격을 하였다. 그는 하루에 열 두 시간 성경을 연구하며 기도하여 충실한 목회를 하였다. 그의 설교는 두 시간 이상이 다반사였고 차분하고 정확한 말씀을 전하는 성격주석을 기초로 하는 청교도적 설교를 하였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 그의 강력한 설교주제였다. 로마서 4:5절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말씀으로 자기 교회에서 다섯 차례 설교했는데 이 설교를 통하여 노샘프턴의 교인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고 나아가 뉴잉글랜드 전역에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다. 그의 간절한 열정으로 말미암아 1734년에서 35년으로 넘어가는 겨울동안 그의 교구에서 300여명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노샘프턴의 200가구의 전체 주민이 중생 체험을 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735년 봄에는 뉴햄프셔 주 곳곳으로 번져 나아갔다. “거의 모든 가정에 성령이 임재 해 계신 증거들이 있었다”고 에드워드는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10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유명한 ‘대각성 운동’(1734-1744)이다. 영국출신으로 18세기 가장 뛰어난 인물인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1739년 미국으로 건너가 조나단 에드워드를 도와 각지에서 교파를 초월한 설교를 하며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신앙의 활기를 불어 넣었다. 대각성 운동으로 인해 뉴잉글랜드에서만 짧은 기간 동안 5만명 이상 회심하여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대각성운동은 유럽과 영국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루터교가 되살아났고, 영국에서는 요한 웨슬리로 인하여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대각성 운동은 미국인들을 하나로 일체감을 갖도록 했으며 교파를 초월한 연대감이 깊어져서 독립전쟁(1775-1783)에서 식민주가 단결하여 승리를 얻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1750년 12월 초 인디언들이 사는 스탁 브리지에서 6년간 인디언 선교를 하였다. 이곳에서 함께 사역하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가 29세에 죽자 「고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목사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출판하였고 그의 글은 18세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선교열정과 부흥사역의 헌신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19세기 기독교 세계 선교비전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을 통해 18세기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와 헨리 마틴이 회심하여 인도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또한 로버트 메케인(Robert M. Mccheyne)이 팔레스타인 선교를 하는 등 수많은 복음주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해외로 향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1758년에 죽었으나 그가 뿌려놓은 복음주의 씨앗은 ‘제2차 대각성 운동’으로 번져 18세기 말엽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어 1784년에 15,000명이었던 감리교인이 1850년에는 100만 을 넘었으며, 침례교의 경우 1800년에 10만 명이 1850년에는 80만 명이 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부흥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국은 지금도 영적 대각성 운동에 뜻있는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한결같이 조나단 에드워드의 저서를 읽고 회심하여 국가와 세계교회들의 부흥을 위한 기초가 되고 있다.23)
-. 성령사역의 관점으로 본 조나단 에드워드의 부흥운동
에드워드는 인간의 노력에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성령의 역사에 의존한다. 개혁주의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고 성령세례로 단번에 감동을 받아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에 갈 자격과 권한을 얻는다고 보며 사람들의 노력을 행사하여 이것들을 얻을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감정에 대하여 상황에 맞는 감정을 존중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회개의 눈물과 통회함, 은혜에 대한 감동과 기쁨, 자유하고 평안함 등은 당연하며 열정적으로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을 존중하였다. 반면 감정이 표출된다고 진리에 대한 표증은 아니라고 하며 열정적이거나 유창하거나 감동이 된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한 사랑의 표징은 아니다 라고 한다. 감정에 대하여 정리하면서 진정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의 특별한 표지를 “은혜로운 감정은 신적 영향에서 나온 것입니다. 감정의 목적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탁월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드워드는 자연스런 감정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부흥에 있어서의 개인의 내면적인 상태를 중요시하였다. 1740년대 부흥기에 표출된 주목할 만한 신비한 여러 현상들 즉,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성령세례로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들에 대하여, 능력과 신비한 현상으로 인하여 말씀중심의 본질이 손상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도 이 체험들을 무시하지 않는 진실 된 자세를 잃지 않았다.24)
3. 찰스피니
미국에서 일어난 ‘제2차 대각성 운동’(The Second Great Awakening 1795-1835)을 이끈 뛰어난 지도자가 바로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이다. 피니는 1792년 미국의 코네티컷 주 리치필드 카운티 워렌에서 평범한 청교도 농부였던 아버지 실베스터 피니와 어머니 레베카 라이스 피니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피니가 2살이 되던 해 뉴욕 주 서부로 이사 가게 되었다. 피니는 이곳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유대어 및 법률에 관한 수준높은 교육을 받아 총명하고 유망한 청년으로 인정을 받았다. 피니를 통한 각성운동은 자신의 영적체험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29살이 될 때까지 교회의 설교 내용 같은 것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자주 목사와 논쟁을 했으며 교회 청년회에서 기도를 해 주겠다고 하면 한 번도 기도응답이 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비꼬곤 했다. 그러나 피니는 그가 즐겨 읽는 법률 서적들이 대부분 성경에 높은 권위를 두고 있음을 주의 깊게 보고 자신의 학문적 발전을 위해 성경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성경을 읽어나가던 피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종교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는 모순이 결코 성경 때문이 아님을 확신하고 성경이 명백한 하나님의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갈수록 구원에 대한 갈망과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니는 자신이 구원을 놓고 고민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성경을 읽다가도 사람들이 들어오면 성경을 법률서적 사이에 아무렇게나 섞어 놓았다. 마음이 괴로워 기도할 때조차도 혹시나 밖에서 사람들이 들을까 하여 열쇠구멍을 막고 소리 죽여 기도했다.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했으나 답답하고 괴로울 뿐이었다. 그러던 중 1821년 10월 10일 아침 피니는 그의 사무실에서 빛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예수님은 피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너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냐? 너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너 자신의 의를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느냐?” 피니는 당시의 회심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술 했다. “나는 주님의 발 앞에 쓰러져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회개를 다하였다. 나는 주님의 두 발을 나의 눈물로 온통 다 적시어 놓았다.” 그는 이어 “성령이 내게 임하셨을 때 마치 전류의 파장이 내 온몸을 꿰뚫고 흐르고 또 흐르는 듯 하는 느낌을 받았다. 성령의 사랑이 내게 밀려 왔다. 성령의 파도가 계속 밀어닥칠 때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피니의 성령 체험은 바울이 다메섹(Damascus)에서 빛과 음성을 듣고 땅에 엎드린 회심한 것과 매우 유사한 현상이다. 이런 영적 체험 후 피니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했다. 1823년 6월 25일 그는 세인트로렌스(St. Lawrence)노회의 배려로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담임이던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의 조지 게일(George W. Gale) 목사의 문하에서 신학 수업을 시작해 6개월 후인 그해 12월 30일 강도사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나서 1824년 7월 1일 피니는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특히 1824년 봄부터 그는 서부지역여선교회의 후원을 받으며 뉴욕 주 북부 지역 정착민을 상대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50년 동안 그는 미국, 영국, 스코틀랜드 등지를 다니며 부흥회를 열었다. 부흥사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그는 여러 대도시에서 오랜 기간 동안 부흥회를 진행했다. 피니가 말씀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많은 역사가 일어났다. 어느 날 피니가 뉴욕 주에 위치한 소돔(Sodom)이란 미국 마을에서 집회를 시작하고 15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생긴 일이다. 사람들이 모두 앉은 자리에서 땅바닥으로 엎드려 기도하고 울부짖었다. 당시 모습을 피니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양손에 칼을 쥐고 휘둘러도 그들을 그렇게 재빨리 넘어지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넘어지기 시작하여 2분도 채 못 되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저앉거나 엎드려 기도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한편 어느 날 피니가 뉴욕방직 공장을 견학하는 동안 일하던 한 처녀가 피니가 다가가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푹 쓰러졌다. 소녀는 눈물로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 그 순간 마치 화약이 폭발하듯 그 방에서 일하던 모든 사람들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한편 이 공장의 주인은 “공장 일보다 영혼 구원의 일이 더 중요하다”며 그 날로 공장 문을 닫고 피니를 초청해 공장에서 부흥 집회를 열었다. 공장주는 모든 직공들이 집회에 참석하도록 했으며 며칠이 지나자 모든 직공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 이외에도 피니의 사역과 관련해 또 다른 유명한 일화가 있다. 피니가 유티카(Utica)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동안 그 지방의 오네이다(Oneida)장로회 노회도 모였다. 당시 피니의 사역을 못 마땅하게 여긴 한 늙은 목사는 피니가 인도하는 집회에 격렬한 비난의 연설을 했다. 집회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은 이에 깜짝 놀랐으며 나쁜 영향을 염려해 울면서 기도했다. 그 다음날 아침 그 늙은 목사는 침대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피니는 뉴욕이건 필라델피아이건 일단 부흥회를 시작하면 일년 이상 계속했다. 그의 설교는 능력이 있어 청중들로 하여금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만들었다. 피니는 1825년 후반부에 도시 중심으로 집회를 가졌으며 뉴욕에서는 7년 동안 대집회를 가졌다. 1830년 뉴욕 주 로체스터에서 가진 전도 집회 때는 시민 10,000여 명 중 1/10이 회개했고, 1,200명이 교인으로 등록하게 되었으며 1831년 한 해 동안에 십 만 명의 성도가 회심을 체험하는 기적을 낳았다. 피니는 다른 목사들과 달리 원고 없이 자유로운 형태의 설교를 했으며 개인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기도해주었다. 여성들을 회중 앞에서 기도와 간증을 하게 했으며 회심자 들을 강단 앞으로 불러 세워 간증을 하도록 했는데 이것을 소위 ‘새로운 척도’(New Measure)라고 했다. 피니의 새로운 척도운동을 통해 반노예운동, 여권신장운동, 형무소개혁, 금주와 절제운동 등 수 많은 사회개혁 운동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피니의 자유분방한 예배방식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반대 세력은 피니에 대한 거짓 풍문을 퍼뜨렸으며 피니의 활동을 정탐해 방해공작을 했다. 적지 않은 교회가 그에게 강단을 허락하자 않을 정도의 반대도 있었다. 피니는 일생을 통해 사회로부터 많은 반대와 조롱을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그의 뒤에는 늘 주님이 함께 했다. 실제로 피니는 주님으로부터 반대 세력이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음성으로 들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방해 공작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으며 피니의 부흥운동은 불길처럼 타오르게 되었다. 한편 미국 콜롬비아 노회에서는 피니에 대한 거짓 송사만을 믿고 특별 위원회를 구성했다. 피니를 심문함으로써 그의 집회를 방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조사 위원 중 한 목사는 일부러 피니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목사의 요청대로 피니는 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다. 그 목사가 피니의 설교를 듣고 노회에 통보하기를 “피니의 설교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더 이상 피니를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 동시에 주님께서 피니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피니를 방해하면 하나님과 맞서 싸우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로인해 콜롬비아 노회에서는 피니를 반대하는 소리가 없어지고 피니의 복음 전하는 일에 협조를 했다. 결국 그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약해졌으며 오히려 그를 지원하는 세력은 더 강해졌다. 이를 통해 미국에서 일어난 제2차 대각성운동은 피니를 통해 절정에 이르게 됐다. 특히 당시 매우 보수적인 신학자였던 윌밍턴(Wilmington)의 길버트(Gilbert) 목사도 피니를 초청해 집회를 열었다. 특히 필라델피아에서 피니는 3,000명을 수용하는 한 독일계 교회에서 집회를 계속했다. 이 집회에서도 기적을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를 통해 미국의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기독교 부흥이 일어났으며 피니의 부흥집회가 절정에 달했을 때 100,000명의 사람들이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훗날 사람들은 피니의 설교가 성공한 원인을 그의 논리적 제시,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그의 관심과 사랑의 마음에 연유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피니 자신은 이에 대해 다만 성경에서 제시한 복음을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목사이자 신학 교수였던 피니는 일생동안 확성기도 대충매체도 없던 시대에 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이끌었다. 통계에 따르면 피니의 집회에서 회심한 사람 중 90%이상은 계속해서 변화 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는 그가 회심한 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변화된 삶을 위한 성화(聖化)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가르쳤고 피니 자신의 삶도 하나님의 온전한 임재 가운데 거하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그 격렬한 어조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 회개했던 것은 피니 자신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가. 찰스 피니의 “완전성화”
그의 조직신학에서 완전성화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이를 명령하셨다,
2) 인간은 자신의 도덕적 기능에 힘입어 천부적으로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할 수 있다,
3) 금생에서의 신자의 완전성화를 위해 복음이 예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4) 금생에서의 신자의 완전성화를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도록 하나님이 명하고 계시다.
5) 그리스도가 이를 위해 기도했다,
6) 금생에서의 신자의 완전성화가 성경에서 선명하게 약속되고 있다는 사실 등이다.25)
찰스 피니에 따르면, 완전성화는 하나님의 명령일 뿐만 아니라 성경에 명백하게 표현된 약속이다. 인간은 자신의 도덕적 기능에 힘입어 천부적으로 이 완전한 성화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이를 명하셨다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찰스 피니의 견해는 인간의 도덕적 기능이 완전하다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인간의 의지로 하나님께 나아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완전성화는 하나님의 법에 전적으로 순종하는데 있으며 하나님의법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만을 명한다고 가르쳤다. 천부적 능력에 입각하여 우리가 완전성화에 도달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완전성화는 각 개인의 책임이었다. “그대가 계속하여 완전한 상태에 있는 한 그대는 완전할 것이다.”라고 피니는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완전한 상태로 만드셨기에 인간은 그 자신을 완전한 상태로 보존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피니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식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하나는 기적이고 하나는 법칙성을 따라 역사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부흥의 원리를 후자에 속한 것으로 주장한다. 피니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부흥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없다고 생각하고 기다리는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찰스 피니는 “하늘의 만나를 기다리는 것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고 지금은 씨를 뿌리고 일을 해서 곡식을 거두어 식량을 마련하는 것이다. 씨 뿌리고 일하는 법칙이 지금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모든 수단 방법을 이용하여 부흥케 해야 한다.” 피니는 “진리는 도구다”라고 말한다. 피니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선포되는 말씀이다. 그래서 피니는 설교에 대단한 권위를 부여한다. 피니는 성령이 본문을 제시해주고 전개시키는 것에 의지해서 설교하는 즉흥적인 설교자로서 계획 없는 즉석설교를 했다. 찰스 피니는 어느 누구보다도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와 오순절주의 운동이 성장할 수 있도록 기초를 만드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주었다고 평가받고 있다.26)
4. 이반 로버츠(Evan Roberts)
1904년에 일어난 웨일즈 부흥운동은 오순절주의 기원을 이루는데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영국 오순절운동과 미국 아주사거리 오순절 부흥운동 등 각 지역의 오순절운동이 일어나는데 직접적인 동기부여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부흥을 일으키실 때 사용하시는 사람의 유형이나 방식, 또는 임하는 현상이 매우 다양하다. 조직적이며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을 쓰는가 하면, 때로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무식한 사람을 사용하신다. 어떤 때는 조그만 기도회로부터 시작되기도 하고, 대중 집회를 통해서 역사하기도 한다. 혹은 갑작스럽게 임할 수도 있고, 점진적으로 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부흥의 요인에 있어서 어떤 공식화된 틀을 규정해 놓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과 다양성의 생생한 실례가 ‘이반 로버츠’(Evan Roberts,1878-1951)를 중심 하여 일어난 ‘웨일즈 부흥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04년 웨일즈에서 부흥이 일어나 약 5개월간에 10만 명 이상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 부흥의 불길에 뇌관 역할을 담당했던 26세의 이반 로버츠는 가난하지만 경건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칼빈주의적 감리교회에서 성장했다. 이반이 12살 되던 해에 다른 소년들처럼 탄광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13세가 되던 1891년부터 자신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며 웨일즈에 부흥을 보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했다. 갱도 안에서 일할 때도 그는 계속 기도와 찬양, 성구 암송으로 시간을 보냈고,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여러 시간 동안 성경을 읽었다. 사실 그는 식사시간 보다도 기도하기를 더 좋아했고 자주 한밤중에 일어나 부흥을 보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곤 했다. 1904년 10월 28일 목요일에 어느 기도회에 참석한 이반은 아침 7시경에 “주여, 저를 굴복시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이반에게 “네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즉시 이반은 화답하며 “주여, 그렇습니다. 저를 굴복시키소서!”라고 외쳤다. 아침 9시 예배시간에 무릎을 꿇고 계속 부르짖을 때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셨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 때의 일을 회상했다. “나는 어떤 살아있는 힘이 내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자꾸만 더해 갔는데, 거의 터질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눈물과 땀이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가슴이 끓고 있었는데 피가 솟구쳐 나오는 듯 했다. 내가 굴복된 후 평강의 물결이 물밀 듯 밀려 왔으며, 심판 날에 멸망당할 영혼들에 대한 연민에 휩싸여 눈물을 흘렸다.” 이 순간 이반은 13년간이나 기도하던 성령의 충만을 받았고, 그와 동시에 부흥을 위한 기도 역시 응답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기도하는 사람을 통하여 웨일즈에 부흥이 임하게 하셨던 것이다. 부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강한 손이요, 능하신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영광을 인간과 공유하기 원하지 않으신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을 우상화 한다면 부흥은 곧 시들어 버리고 오히려 성령을 소멸하여 그 역사에 거침돌이 될 수 있다. 이반은 이런 사실에 대해 매우 민감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회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성령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분이 집회를 주관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가 언제 어디로 설교를 하기 위해 갈 것인가를 사전에 미리 알리지 않았고 오직 성령을 따라 움직였다. 그는 사람들이 집회에 오는 것이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사람들이 그를 보고 그의 말을 듣고 싶어 온 것을 직감할 때는 집회 도중에 떠나기조차 했다. 그는 심지어, 사람들의 관심이 자기에게서 떠나 그리스도에게만 집중되기를 고뇌하는 심령으로 기도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께서 자기로부터 부흥의 영을 거두어 가실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어떤 때는 의도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서 설교를 하는 것을 삼갈 때도 있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아무 것도 여러분들에게 드릴 것이 없어요. 여러분을 복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이러한 부흥의 가치관을 갖고 있던 이반이 인도하는 집회에는, 언제나 성령의 권능이 마치 연못의 수면 위에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듯 회중 전체에 임하곤 했다. 온 회중은 기도와 찬양에 있어 모두가 인위적이 아닌 성령의 주장하심에 따라 순종하였던 것이다. 웨일즈의 부흥에는 설교가 거의 없었다. 집회의 3/4 이 찬양시간으로 이루어졌으며 걷잡을 수 없는 기쁨이 뒤따랐다. 흔히 부흥에는 언제나 죄의 통회와 눈물이 있기 때문에 경직되고 침울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통해 하늘의 기쁨을 마음에 간직한 사람은 언어와 태도로 기쁨을 나타내야 하는데, 늘 우울하며 슬픈 기색을 보이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 기쁨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메아리요, 성령을 통한(롬14:17) 성령의 열매(갈5:22)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흥은 기쁨을 수반한다(빌4:4;살전5:16). 이반은 항상 미소를 머금은 채 기도했고 웃으며 설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 놀라운 삶입니다. 나는 너무나도 행복해서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반은 강단에 서서 환희로 빛을 발하는 표정을 지은 채 찬송을 인도했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는데 심지어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했다. 그는 완전한 자유로움, 전혀 엄숙한 표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모습은 매우 감명 깊은 것이었다. 그는 마치 행복감에 도취되어서 끓어오르는 것도 같았고 기뻐 날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설교하지 않았다. 그저 기도와 찬송 사이사이 간증과 몇 마디의 말뿐이었다. 그것도 한번에 몇 문장을 넘기지 않았다. 이렇듯 찬양과 기쁨이라는 특성이 웨일즈의 부흥운동을 지배하고 있었다. 성령의 부흥이 임하자 웨일즈 전역에는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교회나 기도회 때 뿐 아니라 거리나 기차 안에서, 가정이나 심지어 선술집에서도 사람들이 성령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장소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실재와 가까이 계심의 의식이 뒤따랐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의식, 영원이 가까이 그리고 실제적으로 다가와 있는 듯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의 구름이 여러 달 동안 웨일즈 전 지역에 낮게 드리워 있었기 때문에, 오락이나 술잔치 자리는 비었고, 많은 사람들이 술집에 들어가 주문한 술에 손을 대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하나님의 임재 의식이 얼마나 강했던지 술잔을 입에 가져갔던 팔이 마비될 정도였다. 풋볼팀들이 해체되었고, 그 팀에 소속되어있던 선수들은 시합보다 주님의 은혜에 대해 간증하는 것을 더 중요시했다. 그리고 서점에 있는 성경책이 품절 되었다. 그리고 탄광은 모독적인 언사를 쓰는 장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소로 변했으며, 가정마다 기쁨과 찬양으로 가득 찼으며, 욕설과 저주의 말을 일삼던 죄인들이 변화되고, 그들은 성령의 기름부음 받아 공적인 모임에서 성경을 인용하며 간증하였다. 이반 로버츠는 2년간의 짧은 부흥사역을 담당하고 은퇴하여 1907년부터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중보기도에만 전념했다. 이반 로버츠가 주축이 된 웨일즈 부흥운동의 불길은 유럽과 아프리카, 동남 아시아, 북남미, 한국 등 전 세계적으로 활활 타올랐으며 처음 2년간 이들 나라에서만 5백 만명 이상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참으로 웨일즈의 부흥은 성령이 그 주도권을 쥐고 하나님만 영광 받은 성령운동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27)
5. 파함(Charles F. Paham)
찰스 파함은 본래 감리교회 목사였지만 칸사스주 토페카시에서 성결운동의 목사로서 일하였고 1898년부터 신유역사를 하다가 1900년에 칸사스의 토피카에 벧엘 성경학교를 세우고 한40명의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칭의, 은혜의 제2역사로서 성화, 신유와 주의 재림 교리에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고 그 표로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실현되기 위하여 1900년12월31일 철야 예배를 하였고 학생 중에 아그네스 N.오즈만이라는 여학생이 손을 얹고 기도해주므로 중국어를 말하였고, 그 다음 저녁에는 보헤미안 방언을 말하였다. 이것이 20세기 방언이 일어난 최초의 사건이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고 그 표로 방언을 해야 한다는 오순절 신학을 처음 수립하였다. 이 방언 사건을 계기로 파함은 칸사스와 주변 주들에서 적지 않은 부흥을 성취하였다. 파함은 1905년 텍사스의 휴스턴으로 성경학교를 옮겼고, 그해 흑인 감리교회 목사로서 성결교회에서 일한 윌리암 시무어는 파함의 허락을 얻어 등록하고 공부하였다. 이때 그의 선생 파함에게서 성화는 성령세례가 아니고 성령세례는 별도 제3의 경험으로서 방언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가르침 받았다. 이때 시무어는 성령 세례도 방언도 받지 못하였지만 파함의 오순절 신학을 바른 교리로 받아들였다.28) 파함에게서 오순절 신학을 가르침 받은 시무어는 1906년 로스엔젤레스의 한 흑인 성결교회의 목사로 청빙 받아 오순절 신학을 설교하였다. 방언해야 성령 세례 받았다는 증거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아직 방언하지 못하였지만 계속적인 기도회를 가지다가 1906년 4월 9일 그와 다른 7명의 사람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다. 이 방언 현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므로 아주사가에 있는 감리교회당을 구입하여 사도적 신앙선교라는 간판아래 부흥회를 1909년까지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20세기 최대 부흥운동인 오순절 운동을 일으켜 그는 오순절의 사도가 되었다. 그의 오순절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하게 되었다. 파함은 오순절 신학의 선생이고 아버지라면 시무어는 오순절 운동의 전파자와 사도가 되었다. 이 운동이 짧은 시간에 미국 전역에 퍼지고 전 세계에 퍼질 수 있었던 것은 프랑크 바틀만의 문서 활동에 크게 의존하였다. 그는 미국의 성결회 계통의 신문들에 아주사 부흥운동을 자세히 보고하였고, 또 소책자들을 각처로 보냈다. 또 세계각처에서 특히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들이 오순절의 체험을 얻기 위해 아주사거리로 모여들었고 많은 목사들도 부흥회에 참가하였기 때문이다. 성경 부흥 운동을 하던 목사들이 자기들의 부흥회를 닫고 아주사거리로 모여들었다. 오순절 부흥운동이 오래 계속되었어도 거기에는 영웅이나 큰 지도자가 없었다. 프랑크 바틀만의 증거대로 시무어도 명목상의 지도자로만 인정되었다. 주님 자신이 인도하였고, 아무런 계획표나 사제계급도 없었다. 시무어는 두 개의 빈 구두상자 뒤에 통상 앉아 있었고, 집회동안 그의 머리는 기도하며 숙이고 있었다. 예배는 거의 계속적으로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러 왔고 하나님은 거기 계셨으며 그리하여 집회는 계속적으로 진행되었다. 다 기도하였고 집회들은 스스로 자동적으로 시작되어 간증과 찬양과 경배로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단순히 기도하였고 성령이 나머지를 처리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성령 세례와 방언을 하였다. 또 방언을 받기 바란 사람은 윗층 기다리는 방에서 기도하고 기다렸다. 이렇게 시작되고 진행된 오순절 부흥 운동은 로스엔젤레스와 미국의 부흥운동으로 국한하지 않고 전 세계로 전파되어 세계적인 부흥운동이 되었다.29) 프랑크 바틀만은 이 일을 운동 초기에 예언하였다. '그 부흥운동은 의심할 것이 없이 세계적인 부흥이 될 것이다.' 이 예언대로 아주사거리의 부흥은 곧 세계 각처로 퍼져 나갔고, 미국 전역에 파급되었다. 파함은 1900년 실로에 있는 ‘성령과 우리 신학교’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하여 통성기도, 금식기도, 박수치고, 자유롭게 찬양하고, 방언을 하고, 즉흥적 설교와 간증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 그는 성령이 부어질 때에 방언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그리스도 재림 때에 세계적인 부흥을 가져오는 것이며, 마지막 때에 사도적 능력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확신을 같게 되었다. 그래서 방언이 성령세례의 증거라는 견해를 갖게 되었다. 이 견해로 인하여 성령세례와 방언을 연결시키는 오순절주의의 신학적 정의를 공식적으로 천명한 최초의 사람이 된다. 1905년 겨울동안에는 파함의 부흥집회의 영향으로 미조리와 텍사스주에 걸쳐 약 25,000명의 오순절 신자와 60여명의 설교자를 얻게 되어 그들은 후에 하나님의 성회 초기 지도자들이 되었다. 그리고 칸사스, 미조리, 텍사스 주의 여러 도시에는 오순절 집회 장소들이 생기게 되었다. 시무어와 테리등과 함께 하게 되며 테리는 휴스턴에 머무는 동안 성령세례를 충만히 받고 로스엔젤로스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나중에 아주사 거리 오순절 부흥운동이 폭발하는 연결역할을 했으며 시무어는 1906년부터 아주사거리의 폭발적인 부흥운동을 주도하고 성령운동의 경이로운 경험을 보게 된다. 1905년 4월부터 시작된 이 아주사 거리의 부흥운동의 결과로 인하여 현대 오순절 운동이 실제적으로 폭발하여 전 세계적인 부흥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파함으로부터 시작된 이 부흥운동은 시무어가 폭발적인 부흥운동을 맞이하게 되었다. 시무어는 오순절의 늦은 비 성령의 역사를 주장하며 다음의 내용을 가르쳤다. 회개, 사도 신앙회복, 믿음에 의한 칭의, 은혜의 완전한 사역으로서의 성화, 방언으로 증거된 성령세례, 구속 안에 있는 신유, 그리스도 재림에서 성도들의 전천년 휴거, 특히 그는 오순절 성령의 경험을 종말론적으로 해석을 하였다. 지금은 늦은 비 성령의 역사로 교회의 온전한 회복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 가르침들은 오순절주의의 신학적 뼈대가 되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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