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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 8강의: 예수는 실제인물인가 아니면 신화의 인물인가?

하나님아들 2016. 3. 23. 21:42
 
제8강의: 예수는 실제인물인가 아니면 신화의 인물인가?| 기독교 변증학 (학부)
소피스트 | 조회 94 |추천 0 | 2010.11.07. 21:56

 

 

 

제8강의: 예수는 실제인물인가 아니면 신화의 인물인가?

 

예수에 대한 논박은 최근에 두 유형의 작품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에 하나의 위협적인 도전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나는 댄 브라운(Dan Brown)의 ?다 빈치 코드?이고, 다른 하나는 티모시 프리크(Timothy Freke)와 피터 갠디(Peter Gandy)의 ?예수는 신화다?라는 작품들이다.

 

1. ?다 빈치 코드?의 문제

댄 브라운은 ?다 빈치 코드?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려는 것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 둘째,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후손이 프랑스의 왕족과 결혼했다. 셋째,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교회는 힘을 잃을 것이고, 따라서 이 사실을 두려워한 교회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무엇인가 조작하거나 억눌러야 한다.

 

그러면 댄 브라운의 의도는 뭔가. 그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란 여성을 억압하고, 여성적 신성을 세상에서 제거하려고 조작된 문서와 이론들을 만들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남성 중심적 지배체제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다 빈치 코드?는 하나의 픽션이다. 마치 흥미로운 추리소설로서 이 책은 그야말로 픽션이다. 하지만 문제는 브라운은 이 픽션이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는데 있다. 게다가 이 책에 관한 서평은 대체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이 이 작품에서 역사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고, 그로 인해 기독교 신앙의 고백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부인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의 전략이다.

 

?다 빈치 코드?란 소설제목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시온 수도회의 회원이었다는 주장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시온 수도회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결혼에 관하여 알고 있는 소규모 비밀 조직이었다. 그들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 수 있는 가공할만한 비밀을 폭로하지 못하도록 교회는 반대했다. 그래서 시온 수도회는 바티칸의 보복을 피하고자 이 비밀을 암호처럼 그림이나 책 그리고 조각품에 은밀하게 표기해 두었다는 것이다. 그 그림 중 하나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을 보면, 예수의 오른 편에 앉은 사람이 요한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자세히 보면 그 얼굴은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이다. 여성처럼 생긴 얼굴로 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원래 레오나르도는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의 일기에 의하면, 그는 플로렌스에서 서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마을 빈치에서 1452년 4월 15일(일요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아무튼 ?다 빈치 코드?는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결혼 사실을 숨긴 교회의 행위는 역사상 가장 큰 은폐 행위이다.” 근거는 무엇인가. 영지주의 복음서들에 그들이 결혼한 사실에 대한 증거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 중 빌립 복음서는 이렇게 기록한다. “반려는 막달라 마리아였다. 예수는 제자들보다 그녀를 더 사랑했다. 예수는 모든 제자들보다 더 자주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으며, 제자들은 ‘왜 선생님은 우리보다 그녀를 더 사랑합니까?’라고 물었다.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왜 내가 너희를 그녀만큼 사랑하지 않느냐? 앞을 볼 수 있는 사람과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함께 어두움 속에 있다면 그들 사이에는 아무 차이가 없느니라. 그러나 그곳에 빛이 비추어진다면,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빛을 볼 수 있지만,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은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있느니라.” 여기서도 사실 원문에는 파손되었다. 원문에는 정확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가 그녀의 ( )에 입을 맞추었다.” 손인지, 입인지, 뺨인지, 이미 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중동의 관습에 의하면, 예수는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반려를 배우자로 뜻한다고 ?다 빈치 코드?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아람어가 아니라 콥트어로 내려왔기에 단순히 배우자가 아니라 ’companion‘은 친구사이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다 빈치 코드?는 기독교의 진실성에 대한 부정으로서 정경의 문제를 든다. 이 책에서 티빙 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내 말은 성경이 신의 작품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말이죠. 성경은 무슨 요술을 부리듯 구름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죠. 인간들이 격동의 시대를 살며 기록한 것이 수많은 번역과 천가와 개정을 통해 발전해온 것입니다. 완성된 성경이 존재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죠.”

 

우리가 이 도전에 답하여야 할 것은 뭔가. 그것은 기독교의 기원과 교회의 역사적 사건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2. ?예수는 신화다?의 문제

예수 이야기와 이교도 신화가 닮았다는 가정에서 이 책은 출발한다. 이유는 간명하다. 오늘날 교황청이 있는 자리에 한때 이교도 신전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교도의 사제들이 신성한 종교의식을 행하였듯이 예수도 바로 이 자리에서 종교적 의식을 행했다는 것이다. 너무나 흡사하다는 생각이 하나의 호기심을 발동하게 했다. 따라서 기독교와 이교도 사이의 유사한 신앙의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많은 증거들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 저자들의 생각이다. 그 저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실존한 메시아의 전기가 아니라 이교도의 여러 유서 깊은 이야기를 토대로 한 하나의 신화라고 우리는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새롭고 유일무이한 계시 종교였던 것이 아니라, 실은 고대 이교도의 미스테리아 신앙을 유대인 방식으로 각색한 것이었다.” 그들이 빌려온 권위는 “이용 가능한 역사적 자료와 가장 최근의 학문적 연구 성과”에 기초를 두었다.

 

첫째, 기독교는 이교도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초기 기독교가 이교도의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이교도 신화에서 인기 있던 주제가 예수의 이야기나 전기에 접목되었다는 것이다. 근거는 다수의 기독교 신학자들이 이 사실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정녀 탄생은 후대에 외래 신화를 추가한 것이어서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문제가 된다고 밝힌다.

 

둘째, 기독교는 영지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프리크와 갠디는 “영지주의자들은 잊어진 기독교인들이다”라고 주장한다. 영지주의 문서는 19세기 이전에는 출판되지 않았다. 1945년 한 농부가 이집트의 나그함마디(나지함마디라고 하기도 함) 근교의 한 동굴에 감춰져 있던 영지주의 장서를 우연히 발견했다. 이 장서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배포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신약성경의 정경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영지주의 문서란 ?도마의 복음서?, ?빌립의 복음서?, ?베드로와 12사도의 행적을 기술한 문서?, ?바울의 계시록?과 ?야고보의 계시록? 등이다. 왜 기독교는 이 문서들에 대해 무관심한가. 크리크와 갠디의 주장에 의하면, 영지주의가 합법적인 기독교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지주의는 이질적인 기독교의 한 형태다. 그들은 이렇게 적고 있다. “영지주의는 생명의 기원과 의미를 탐색했고, 내면 우주의 마지막 미개척지를 대담하게 탐구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주의자였고, 창조적인 자유 사상가였다. 그들이 문자주의 교회의 주교들에게 왜 그토록 미움을 받았는지 너무나 명백했다.” 그들은 초기 기독교를 두 가지 신앙형태로 전제하는데, 하나는 문자주의적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영지주의적 신앙이었다. 문자주의적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영지주의적 신앙을 배격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자주의자들에게 영지주의자는 위험한 이단자”였기 때문이다. 만일 정통 기독교가 영지주의에서 갈라져 나왔다면 어떨까. 그것이 그들이 가정하는 것이다.

 

영지주의(Gnosticism)는 후기 헬레니즘 문화권 속에서 일어났다. 존 B. 캅은 영지주의를 이렇게 표현한다. “영지주의는 이 우주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하나의 전체로서 포괄한다고 믿는 종교다.” 그런데 프리크와 갠디가 염려한 것처럼, 캅은 영지주의의 신화적인 자료를 활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료들을 활용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을 위해서 매우 유용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캅에 따르면, 영지주의는 하나의 차축시대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에게 영지주의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존재의 자리를 의식에로 옮겨서 무의식 속에 있는 신화적인 산물들을 객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셋째, 기독교 신앙의 기원은 은폐되었다. 이 은폐의 주역은 다름 아닌 기독교 역사가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였다. 유세비우스는 4세기 초에 전설을 수집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이고 날조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기독교의 초기 역사를 집필했다. 이후의 모든 역사는 유세비우스의 의심스러운 주장을 토대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인용할 다른 정보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이단자로 간주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4세기에 편집된 거짓 문서가 우리에게 확고한 사실로서 전해졌다. 그러면 유세비우스는 누군가. 그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임용되었던 인물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았고, 문자주의 기독교를 믿는 사람에게 권력을 부여해서 이교도와 영지주의자들을 말살하게 했다. 황제는 자신의 주장인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하나의 신, 하나의 종교”를 원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신조가 만들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신조에 동의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에서 추방되거나 침묵해야 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관한 기록은 유세비우스에 의해서 기록되었는데, 문제는 “아첨으로 가득한 전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인인 황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미화된 인물이다. 그는 니케아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아내를 목 졸라 죽였고 아들을 살해했다. 그는 임종할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다. 잔혹한 행위를 계속하다가 최후의 순간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를 용서받고 천국의 자리를 보장받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처럼 악한 황제이지만 유세비우스는 그를 매우 미화시켰다.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신앙적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교도의 신에게 기도하고 있던 콘스탄티누스의 눈앞에 십자가 모양의 트로피가 나타났다. 천국의 빛을 받으며 태양 위에 우뚝 솟은 이 트로피에는 ‘이것으로써 정복하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날 밤 잠을 자는데,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그 트로피가 그에게 나타났다. 그분은 ‘이 십자가 모양의 프로피를 만들어서 전투를 치를 때마다 호신구로 사용하라’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의 박해를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이것이 밀라노 칙령이다. 크리크와 갠디는 이렇게 반문한다.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관한 ‘역사’가 로마 폭군에게 임용된 한 사람이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난다면 정말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3.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

C. S. 루이스는 예수가 역사적 인물일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바른 행동을 한 사람이었다고 논증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는 “정신병자-자신을 삶은 계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수준이 똑같은 정신병자-거나, 아니면 지옥의 악마일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는 자신의 공적인 삶에서 정신병자나 다른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예수에 대한 적대적인 사람들조차도 그가 수준이 낮은 사람이나 지옥의 악마와 같은 행동을 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우선 우리는 우리의 기록으로부터 예수의 실존적 인물을 증언하기보다는 비기독교적 문서를 통해서 증언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최초의 로마인의 자료로 알려진 플리니(Pliny, 주후 61∼113)의 보고에서다. 황제의 행정 관료인 플리니는 주후 110년경 트라얀(Trajan) 황제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무엇하는 사람들이고, 무엇을 믿는 종파인지를 부탁을 받았다. 트라얀 황제에게 보고한 내용인데, 이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생활방식을 기록한 것들 중 가장 오래된 비기독교인의 기록문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들의 과오나 실수란 다름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즉, 정해진 날의 새벽 미명에 모여서 자신들이 신으로 섬기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차례로 암송하는 것을 관습으로 한다는 것, 그리고 하나의 맹세로 자신들을 결속하되 어떤 범죄를 목적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도둑질이나 강도, 강음을 범하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약속을 어기지 아니하며 필요할 때 자신의 돈을 내놓기를 주저하지 않겠노라는 뜻에서 그리한다는 것, 그런 것들이 자신들의 과오라면 과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한 후에는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서 음식을 나누되 정상적이고 해가 되지 않는 음식을 나누는 것이 또한 그들의 관습입니다.”

 

역사가 타키투스가 쓴 ?로마제국 흥망사?에서 신약성경에 언급된 내용들을 확증하고 있다. (1)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공생애를 살았다 (눅 3:1). (2)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할 당시의 로마 총독은 본디오 빌라도였다 (마 27: 2, 행 3: 13; 13: 280. (3) 그리스도는 죄인으로 처형되었다 (눅 23: 2). (4) 이 일은 유대에서 일어났다 (막 11: 16). (5) 그 운동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퍼져 나갔다 (행 1: 4, 28: 14). 이 기록은 넒은 의미를 갖는데, 그것은 유대의 예수에서 시작하여 로마의 바울에서 마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타키투스와는 달리,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에서 초기 기독교에 대한 연구가 매우 가치가 있고 또 흥미롭지만 연구의 어려움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두 가지 어려움을 들고 있는데, 하나는 교회사 자료가 부족하고 그 자료 중에 신빙성이 의심스럽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성직자나 일반 기독교인들의 완전하지 않은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번은 기독교의 형태를 다섯 가지로 기술한다. (1)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열정을 지녔다. (2) 그들은 내세의 관념을 중요한 진리로 받아들였다. (3) 원시 그리스도교회는 기적의 힘을 보여주었다. (4) 그리스도교는 도덕적으로 근엄한 행적을 드러내었다. (5) 그리스도교는 집단의 결속과 규율을 지켰다.

초기 기독교에 대한 기번의 역사 기록은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사실은 기독교의 활동에 대한 것에서 매우 신앙적 열정과 도덕적 탁월성 그리고 공동체의 일치성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뜻은 무얼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그가 올바른 삶을 살았다는 것을 믿는다. 그의 말이 거짓이 없이 항상 올바른 말씀을 하신 분이라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그가 살았던 삶이 항상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었던 삶이었다는 것이다.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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