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리!! 교의신학!! 변증학!!

[스크랩] 제 9강의: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하나님아들 2016. 3. 23. 21:43

 

제9강의: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기독교 변증학 (학부)
소피스트 | 조회 71 |추천 0 | 2010.11.11. 14:39

 

 

 

제9강의: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아무리 성경에서 근거를 찾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믿을 수 있는가. 성경도 일종의 소설이고,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지 않는가.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성경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간주해야 하는가. 이러한 도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무신론의 대표자라 자처하는 옥스퍼드 대학의 리처드 도킨스는 성경을 믿을 수 없는 많은 이유 가운데,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신은 잔인하고 일종의 허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그러한 허구적 인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유신론의 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자비한 인격적 존재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도킨스에 대한 비평도 만만하지 않다. 특히 그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는 ?프라스펙트?에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대한 혹평은 다소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리처드 도킨스가 종교에 관한 두꺼운 책을 구성했다는 것은 수년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함양미달의 책을 쓰리라고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재미없고, 독단적이며, 일관성도 없고, 자기모순에 빠져있다. 그의 전작들에서 표현된 열정이나 문체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도킨스에 의하면, 구약의 신은 잔인한 신이다. 게다가 도킨스는 성경이 상당히 부도덕하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의 주장은 감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지만, 그는 대체로 논증의 형식을 가지지 않고, 논증하는 아이러니한 방식이나 현란한 수사학의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고 열광한다. 이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해 주는 영웅적인 웅변가의 기질을 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시대는 종종 아무런 근거 없이 맹목적 확신에 찬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도킨스는 사람들로부터 인기주의에 영합한 사람으로 비쳐진다. 그의 세계관이 무신론이니깐,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람들로부터 존재의 문제나 인간의 중요한 가치의 문제를 다루기보다 자신의 돈벌이를 생각하는 학자로 전락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것이 도킨스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아닐까 싶다.

 

성경은 여러 측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첫째, 성경은 신화로 가득 찬 내용들인데,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의 비판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성경의 이야기란 한낱 옛날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홍수 이야기나 신약성경에 나오는 기적 이야기들이 단적인 예들이다. 어떻게 그 같은 이야기들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신화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비판이다. 회의주의자였던 버트란트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예수는 늘 희한한 이야기로 사람을 현혹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시장기를 느낀 예수께서 멀리 서 있는 이파리 무성한 무화과를 보시고 먹을 것이 있을까 하고 그리로 가셨다. 무화과수에 가보니 아직 열매 맺을 때가 되지 않아 잎사귀 외엔 아무것도 없음을 아시게 되었다. 그때 예수께서 대답하시고 나무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영원히 아무도 네 열매를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주께서 저주하신 저 무화과수를 보소서. 시들어버렸나이다’라고 하였다.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무화과가 열릴 철도 아닌데 나무를 탓하다니 말이다.” 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성경의 이야기는 역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신화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러셀은 이러한 이야기들은 아무런 도덕적인 교훈도 포함하지 않는 저급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비판은 더 악의적이고도 적대적이다. 그에 의하면, 구약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은 꿈과 점성술 이야기로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정확히 그 기록된 내용에서 언급된 장소가 정확히 어디인지 밝히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복음에 관한 기록들은 논리적이지 않은 사건들로 뒤죽박죽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복음서는 실제로 사건이 일어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누군가가 구전으로 전해오던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뒤죽박죽 엮은 것임이 분명해진다. 복음서 저자들은 심지어 신화적인 이야기에 관해서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산상수훈, 예수가 기름부음을 받은 것, 유다의 배신,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것에 관해 서로 엄청난 견해차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십자가 처형이나 부활에 대해서도 일치된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네 가지 복음서를 모두 신이 승인했다는 주장이야말로 우리가 그냥 폐기해야 하는 주장이다. 네 개의 복음서가 기초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는 책, 학자들이 ‘Q’라는 이름으로 존재를 추정만 하고 있는 이 책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아무래도 그 책의 저술에 ‘영감’을 제공했다는 신의 부주의를 탓해야 할 것 같다.”

 

 

둘째, 성경은 과학과 모순이 된다는 비판이다. 앞장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성경은 과학과 상충된다고 믿기에 성경의 많은 기적의 이야기들이 신뢰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은 어떤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우리 시대는 과학에 대해 한없는 신뢰를 보낸다. 과학은 선입견이 없는 학문으로 여기고, 아무런 사견이 개입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따라서 과학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지식으로 여긴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믿음에서 시작된다. 과학은 과연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지식인가. 과학 공동체 내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주장들이 제기된다. 가장 명망 있는 학자들 중에 토마스 쿤과 같은 학자들은 과학의 지식에 절대적인 맹신을 주장하지 않고 그러한 믿음을 맹목적이라고 경고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심적인 교리는 동정녀 탄생이다. 동정녀 탄생에 관한 기록은 단순히 기록을 넘어서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이룬다는 이유에서 매우 중요하다. 교회 밖의 지성인들은 마리아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이해하나,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하였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늘날 혼전 임신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에게는 남동생 네 명과 여동생 여럿이 있었다. 야고보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데, 예수의 남동생인 야고보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가 나온 것을 보면 야고보 역시 예수와 같은 시기에 종교적으로 대단히 활발한 활동을 펼친 듯하다. 이 이야기에 대한 비판은 대단히 거세다. 마치 이것은 바다 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광풍과 같이 거센 비판이다. 히친스는 이렇게 비아냥거린다.

 

 

        “쉽게 입에 담을 수 없고 성적인 문제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는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의 저자들은 다시 역설계를 이용했다. 그것도 초창기 교회 위원회가 여러 복음서들 중에 어떤 것을 각각 ‘경전’과 ‘외경’으로 규정할지 결정하면서 필사적으로 역설계를 동원했을 때보다 훨씬 더 후세에, 마리아는...그 전에 이미 ‘순결한 상태’를 통해서 본질적으로 아무 흠이 없는 존재가 된 것으로 결정되었다. 또한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마리아가 죄를 지었을리는 없었기 때문에 절대로 죽지 않는 존재라는 설정도 덧붙였다. 이렇게 해서 성모가 무덤에 묻히지 않고 허공으로 떠올라 천국으로 갔다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주장하는 ‘승모 승천’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장엄하고 독창적인 교리가 선포된 날짜가 흥미롭다. 순결한 잉태는 1852년에 로마에 선표, 또는 발견되었으며, 성모 승천에 관한 교리는 1951년에 선포되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항상 멍청하지는 않다. 이 영웅적인 구조 노력 역시 조금은 공을 인정받을 만하다....하지만 아무리 교회의 결의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해도, 이런 영감이 어떤 식으로든 신에게서 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을 모욕하는 것이 될 것이다.”

 

 

셋째, 교회 밖의 지성인들이나 무신론자들은 성경의 역사적인 신빙성을 비판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대체로 성경의 역사적인 신빙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 변증론은 이 같은 물음에 답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근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내려오는 성경의 원본이 변색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그리스도인들은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원본이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퇴색되어질 것이라는 의문이고, 게다가 성경의 원본은 일점일획이라도 틀리지 않지만, 현재 우리가 가진 성경의 사본은 베끼는 과정에서 다르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변증학은 이러한 물음에도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게다가 성경의 역사적 신빙성의 구체적인 비판에서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숫자나 인명에 대한 오류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따진다. 이 문제는 성경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문제에 하나의 장애가 되는 물음이다. 말하자면 문서의 객관성에 관한 문제다. 따라서 기독교 변증학은 이 커다란 장애물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성서학자들조차도 사본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있다. 성서학자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그리스어 신약성서 사본들을 면밀히 연구하면서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기술한다. 그들에 의하면, 원 본문이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원 본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원 본문을 재구성할 수 없다면, 원 본문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지 모른다. 우리가 알듯이, 교회사의 전 기간에 걸쳐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원 본문을 접하지 않았기에 원본이 오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믿음의 단계이지 확증의 단계는 아니다. 이것이 외부로부터 지적받는 것보다 신앙 공동체 내에서 자주 지적받는 물음이다. 축자적 영감설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의 원 본문에는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현재 우리는 사본들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러 오류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가의 기록은 예수가 유월절 식사를 한 후에 십자가에 달렸다(막 14: 12; 15장 25)고 말하는 반면에, 요한은 유월절 식사 전에 예수가 숨을 거두었다고 말한다(요 19: 14). 식사 후와 식사 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 더 예를 든다면, 마가복음 2장에서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고 가르치면서 다윗 와이 굶주렸을 때 신하들과 함께 행했던 일을 언급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그런데 이 구절은 문제가 있다. 이 구절은 구약성경 사무엘하 21: 1-6에서 인용된 것인데, 문제는 다윗이 행한 때의 대제사장은 아비아달이 아니라, 사실은 아비아달의 아버지인 아비멜렉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마가가 그냥 실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신앙 공동체 내의 사람들은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다소 길었는데, 말하자면 사본의 신빙성에 관한 문제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기에 어떤 방식으로도 변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1장 16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는……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쫓은 것이 아니요.” 이것은 성경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받아들일 정도로 그 출처가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신약성경의 자료들을 세심하게 살펴본다면, 헤롯왕에 대한 기사는 그의 존재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역사적 자료에 의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라고 하는 문제를 떠나서 성경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뒷밭침하고 있다.

 

 

우리는 변증적 관점에서 성경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다는 신빙성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준비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는 성경의 예언에 대한 성취다. 종교철학자인 노만 가이슬러와 윌리엄 닉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코란이나 몰몬경, 힌두교의 베다 경전 등 다른 책들도 거룩하게 영감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그 어떤 책도 앞날에 대한 예언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다른 종교의 경전과는 달리, 성경은 앞날에 대한 예언을 말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것에 대한 성취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신빙성이 높다. 신명기 18장에 보면, 선지자가 성취되지 못할 예언을 했을 때에는 거짓 선지자가 된다. 아마도 교회 밖의 많은 이들은 성경이 무조건적인 예언이고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상당히 문자적으로 성취된 성경의 예언들을 보게 되면, 성경에 대한 신뢰가 쌓이게 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시간(단 9장)과 장소(미 5:2)을 예언했고, 그리고 본질적인 의미(사 7: 14)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사 53장)에 관한 것을 예언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예언들이 성취되었는데, 에돔의 멸망(옵 1장), 바벨론에 대한 저주 (사 13장), 두로의 멸망(겔 26장), 니느웨의 멸망(욘 1-3장) 그리고 이스라엘의 귀환 (사 11: 11) 등이다.

 

둘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그 역사성이 증명한다. 먼저 우리는 고대 문헌들의 신뢰성을 검증할 필요가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비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으로 믿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변론할 수 있는 것은 역사성이다. 비기독교인들은 역사성을 대체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C. 샌더스의 ?영문학사 연구개론?(Introduction to Research in English Literature History)에서 사료 편찬의 세 가지 기본원리를 열거하고 있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사료적 검증, 내적 증거의 검증 그리고 외적 증거의 검증이다. 사료적 검증이란 원본과 사본의 간격을 검증하는 원리이다. 성경의 원본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사본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즉 그 베껴 쓴 사본들이 얼마나 믿을 만한가하는 것이다. 여러 사본들이 통일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신약성경의 사본을 본다면, 지금까지 헬라어사본만도 5686개도 넘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많은 사본의 수가 많아도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본을 보지 않아도 원본과 매우 근접할 뿐만 아니라 완벽에 아주 가깝다는 정확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대영 박물과 관장과 수석 사서로 일했던 프레데릭 케년(Frederic G. Kenyon)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당시의 원본과 최초의 사본 사이의 시간 간격은 너무도 적어서 실제로는 무시해도 될 정도였다. 그래서 성경이 원래 기록된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져 왔다는 것을 의심할 마지막 근거까지도 제거되었다. 신약 성경의 정통성과 일반적인 통전성은 이제 확립되었다고 간주할 수 있다.” 1세기 역사가인 플라바우스 요세푸스의 증언은 매우 단언적이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대한 경외심이 얼마나 투철한지를 실제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왜냐하면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어느 누구하나 그 성경에 가필을 하거나 삭제를 하거나 또는 음절 하나도 바꾸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성경을 하나님의 법도로 여기고 그 성경을 기준으로 살아가며 필요한 경우에는 그 성경을 위해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는 게 유대인들의 본능이다.” 이처럼, 필사본이 거의 오류가 없을 정도로 정확하였다는 것은 역사성의 관점에서 매우 믿을 수 있게 한다. 아마도 성경만큼 풍부한 본문 검증을 받은 책이 어디 있을까. 아마도 매우 오래도록 성경에 관한 검증은 이루어져왔다. 만일 누군가가 그러한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이해할 수 없거나 아니면 악의적인 태도를 의도적으로 보이려는 사람일 것이다.

 

루이스와 쉐퍼의 대화를 시도한 스콧 버슨과 제리 웰즈는 이 문제에 관해 성경의 무오성을 가지고 논박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조언한다. 대신에 그들은 성경의 역사적 신뢰성을 가지고 변증하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변증의 현장에서 성경무오가 아닌 역사적 신뢰성을 천명하는 것을 옹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다. 대화의 초기 단계에서 성경무오를 고집하게 되면 변증학의 진정한 관심사 즉 더욱 중요한 신앙의 의제로부터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 신앙의 의제들을 성경무오에 의거해서 다루게 되면 처음부터 불필요한 논쟁을 유발시키게 된다.” 이들의 조언은 상당히 도움을 준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신학적 논쟁이나 논박을 통해서 우리가 필요한 성경의 역사성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신론 지성인들과의 대화에서 우리의 힘을 소진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셋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그 가르침에 대한 내용에서 알 수 있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증명하고 있다. 다른 소설이나 문학작품들과는 달리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도덕적이고도 윤리적인 삶을 살도록 종용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삶과 인격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문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 16-17)는 디모데의 고백은 실제로 우리의 삶에 유익성을 가져다주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수많은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전한 말을 믿지 않는 것은 선지자나 예언자들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적인 언어로 전달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상황, 즉 그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외친 것들은 사회의 부패된 체제에 대한 비판과 정의로운 요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그 가르침들이 왜인 그루뎀(Wayne A. Grudem)이 말한 것처럼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읽고, 우리의 삶과 인격이 변화고 성숙된다. 우리는 주관적인 증언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변화되었다는 고백을 듣는다. 따라서 성경은 스스로 그것의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이런 이유에서 기독교는 책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책인 성경을 읽음으로써 기독교는 보존되고 전파된 것이 아닐까 싶다.

 

넷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한번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성경을 믿지 않는다. 마치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 당신은 우정이 무엇인지 아는가를 묻는 것과 같다. 우정이란 한번 친구를 사귀어보면 알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스스로 성경이 그러한 것인가를 한번 읽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윌리엄 카우퍼는 이렇게 기록했다. “성령이 말씀에 숨을 불어 넣으시고 진리를 나타내 보이시네. 교훈과 약속들이 성화시키는 빛을 가져오네.” 벤허의 원저자인 루 월레스(Lew Wallace)의 이야기가 이 부분에서 도움을 준다. 월레스는 남북전쟁의 영웅이며 터키 대사를 지냈다. 그는 그의 절친한 친구 로버트 잉거솔(Robert Ingersoll)에게 기독교의 신화를 영원히 없애버릴 수 있는 책을 써야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잉거솔이 유명한 장군이면서도 문학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기 때문에 월레스는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던 것이다. 월레스는 그 같은 책을 써서 인류를 그리스도에게 매여 있는 굴레로부터 벗겨주고자 다짐을 했다. 웰레스는 유럽과 미국의 유명한 도서관을 돌아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성경을 직접 읽으면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무신론적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의 신성에 대한 확실성을 믿게 되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 그는 불후의 명장이라고 하는 벤허를 썼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무신론자나 기독교 밖의 지성인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거짓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에게 성경을 읽어볼 것을 권해보아야 한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는 매우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 분명하다.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