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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 7강의: 부활의 문제에 관하여...

하나님아들 2016. 3. 23. 21:40

 

제7강의: 부활의 문제에 관하여...| 기독교 변증학 (학부)
소피스트 | 조회 85 |추천 0 | 2010.11.01. 10:00

 

 

 

제7강의: 부활의 기적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부활은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부활이란 이른바 기적의 형태다. 대체로 기독교 신앙은 부활과 같은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는다. 하지만 무신론자들과 비기독교인들은 과학적인 시대에 부활과 같은 기적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고 비판한다. 이 같은 반문에 대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부활이 기독교 신앙에 핵심적인 교리이기 때문에 변론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이는 자신이 믿는 바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신앙은 확고한 진리에 기초된 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기 때문이다.

 

 

1.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 회의적이다. ?다빈치 코드?와 같은 작품이 유행하면서, 사람들은 대체로 종교가 말하는 기적의 문제 그리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갖는다. 초대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사건에 대해 뭔가 숨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꾸며짐 이야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도전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2. 우리가 답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 체험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증거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신앙 체험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은 반응을 기대하지 않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체험이란 주관적이고 자의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증거는 단순히 개인적인 믿음에 의존되어 있지 않고 역사적인 증거라는 것이다.

 

 

3. 성서는 역사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사도행전 1장 3절은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계심을 나타 내사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여기서 확실한 많은 증거(many infallible proofs)는 역사적인 증거를 의미한다. 40일이라는 시간적인 증거, ‘나타내며’라는 시각적 증거, 그리고 ‘말씀하셨다’라는 청각적 증거를 포함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근거를 그리스도의 부활로 설명하고 있다. 14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만일 살지 않았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이나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이 공허한 것이 된다.” 사실 그렇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은 아무런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부활사건을 조작하기 위해서 단순히 인간적인 시도를 하지 않았음을 믿는다. 남침례신학교의 로버트 번스타인은 이렇게 적고 있다. “빈 무덤은 실로 부활과 관련된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었고, 심지어 제자들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이 생긴 시점보다도 앞섰다. 빈 무덤은 1세기 유대교 반대자들도 받아들인 사실이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기 목을 내놓는 증인들의 말은 기꺼이 믿는다.” 자신의 목숨을 감수하면서까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미련한 사람이 아닌 이상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거짓 증인들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바꾸면서까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종종 거짓증거를 하는 것은 이익을 얻기 때문에 거짓증거를 하는 경우가 있다. 자동차 사고와 같은 현장에 대한 목격자들이 종종 거짓으로 증언하는 경우는 그것에 대한 대가가 주어지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제자들이나 초대 기독교인들이 거짓말을 해서 얻은 이익은 어디에 있었을까.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참수형에 처했고, 빌립은 매를 맞고 투옥되어 십자가형에서 죽었다. 마태는 반은 도끼이고 반은 칼인 미늘창이라는 무기로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안드레, 베드로 그리고 바돌로매는 십자가형으로 목숨을 잃었다. 마가는 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음을 맞이했다. 사도요한은 어떤가. 그는 밧모섬에 유배되어 자신의 삶을 마감하지 않았는가. 만일 사실이 아닌데도 거짓말로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삶을 내팽게치는 얼간이를 본 적이 있는가.

 

 

4. 초대교회의 역사가인 유세비우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결코 보지 못했던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부활과 부활 후에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에 관한 이야기를 꾸며냅시다. 그리고 그 거짓말을 무덤까지 가지고 갑시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위해 죽는 게 어떨까요? 아무 이유 없이 고문을 당하고 매를 맞는 걸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요? 만방에 가서 그들의 제도를 전복하고 그들의 신을 부인합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아무도 설득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우리의 거짓 속임수에 대한 처벌을 받게 될 테니 그러면 우리는 만족을 얻게 될 것입니다.” (J.P. 모어랜드 & 팀 뮬호프, ?이렇게 답하라: 예화로 풀어보는 기독교 변증?, 박세혁 옮김, 새물결플러스, 2008, 105).

 

흥미로운 것은 거짓말이 매우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거짓이란 매우 효과적이고 그럴 듯해야 한다. 하지만 제자들이 증언한 부활의 사건에서는 거짓말에 비추어본다면 매우 엉성한 증언이다. 모어랜드와 뮬호프가 지적하듯이, 구체적인 인명이나 지명을 말해서는 안 되는데, 제자들은 그러한 것들을 말하고 말았다. 성서의 증언, 특히 마가의 증언은 분명하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당돌히 발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막 15: 42-43, 46). 아리마대 요셉은 누군가.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71명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의 법정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른바 산헤드린 회원인 그는 예수의 시체를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금세 그 이야기는 거짓으로 탄로 났을 것이다.

 

 

5. 그렇다면, 부활의 이야기를 다룬 성경은 믿을 만한 내용인가. 성경이란 대체로 신화와 같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가. 예수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들은 대체로 형식적인 면에서 픽션이나 전설과 유사한 것이 아닌가. 만일 성경이 그렇다면, 부활의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이며, 실제로 크게 과장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도전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 문제는 우리가 역사적인 사실과 픽션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픽션과 역사는 서로 다르다. 물론 글을 쓸 때에는 서로 다른 관점이 허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역사적이지 않고 픽션이라고 말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특히 사도행전의 기록이 주후 60년에서 62년경에 기록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빠진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예루살렘 함락과 사도바울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다. 왜 그 같은 중요한 사건들은 다루지 않았는가. 예루살렘 함락이란 미국의 무역센터인 쌍둥이 빌딩의 파괴와 유사한 사건인데, 왜 기록하지 않았을까. 예루살렘이 정복되었을 때, 1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었다. 그런데 누가가 사도행전을 탈고할 시점에는 예루살렘과 성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성전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 비판은 그다지 큰 비판이 될 수 없다. 누가가 바울의 죽음을 기록하지 않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가택연금 되었던 바울에 관한 기록은 있고, 그의 죽음이 없다는 것은 다소 믿을 수 없는 기록이라고 논박한다. 하지만 실제로 누가가 자신의 글을 마칠 무렵에는 바울이 가택 연금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바울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쓸 수 없었다.

 

 

6. 부활은 하나의 기적인데, 과학의 시대에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마주하는 도전이다. 이 도전이 위협적인 이유는 과학의 합리성이 기적과 같은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이 부분에서 강하게 도전했다. 특히 그의 ?기적에 관하여?(On Miracles)에서 그는 기독교 기적의 문제에 관하여 수학적이고도 논리학적인 오류들을 발견하려고 시도했다. 첫째, 흄은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기적은 충분한 증거에 기초하여 설정되지 않았다고 논박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기만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보호해 줄 만큼 충분히 분별력이 있고 교육받아 학식 있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속이려고 한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한 사람들, 그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게 인류에게 믿음을 주고 명성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또한 너무도 유명하여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공공연한 방식으로 이행된 사실들을 증거로 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모두에 의해 증명된 어떤 기적이란 전 역사를 통해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 따라서 흄은 사람들이 어떤 사건을 증언할 때에 충분히 믿을 수 있도록 증언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기독교 기적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둘째, 흄은 인간본성의 원리에서 기적을 비판한다. 원래 인간이 어떤 추리를 할 경우에 일반적으로 그가 경험하지 못한 대상들이 그가 경험했던 것과 유사한 것을 말한다. 하지만 기적에 관한 기독교 증언은 일어날 확률이 높지 않은 일을 증언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흄은 이렇게 말한다. “신앙인은 열광자일 수도 있고, 실재하지 않는 것을 본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그는 자기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것도 알 수 있지만, 신성한 원인을 승격시키기 위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의도를 가지고 그것에 몰두할 수 있다. 혹은 이런 망상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강력한 유혹에 자극받은 허영심이 다른 정황 속에 있는 인류의 나머지에게 끼치는 힘보다 더 강력하게 그에게 작용한다.”

 

셋째, 흄은 초자연적인 이야기나 기적의 이야기는 대체로 야만적인 나라나 미개한 나라에게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언급한 기적의 이야기나 초자연적인 현상의 이야기들이 갈릴리 지방이나 아직 미개한 지방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그에 의하면, 문명인들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지하고도 야만적인 조상들로부터 전해들은 것이 이른바 기적 이야기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흄은 기적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무지한 사람들 속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큰 이점이 있기 때문에, 비록 속임수가 너무 드러날 정도로 커서 무지한 사람 대부분을 속일 수는 없을지라도, 예술과 학문이 발달한 도시에서 그 첫 번째 속임수가 실행되었을 때보다 외진 시골에서 훨씬 더 성공할 기회를 갖는다. 가장 어리석고 미개한 야만인들은 이 이야기를 널리 퍼뜨린다.”

 

넷째, 흄은 수많은 증인들에 의해 반증되지 않는, 명확히 간파되지 못하고 있는 것들까지도 밝혀 주는 증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흄이 지적하듯이, “기적적인 것은 증언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증언은 스스로를 파괴한다.”

 

이 네 가지 이유들에서 흄은 기독교의 기적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처음부터 기적적인 것이 따라다녔을 뿐만 아니라, 요즘에도 기적적인 것이 없다면, 어떤 이성적인 사람도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을 수 없다. 단순한 이성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진실성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기에 불충분하다. 그리고 그것에 동의하기로 신앙에 의해 움직여진 사람은 누구나 그 스스로 자신의 오성의 원리들 모두를 파괴하며, 또한 습관과 경험에 너무도 모순되는 것을 믿게끔 그를 결단하는 지속적인 기절을 의식하고 있다.”

 

기적에 대한 답변은 C. S. 루이스의 ?기적?에서 적절히 답하고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의 논증을 살펴보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흄이 정의하듯이, 기적은 “자연법칙의 위배”(violation to the law of nature)다. 그리고 과학의 진보가 기적을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주고 있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따라서 대중적이고도 흐릿한 생각에 기초한 일반인들은 단순히 기적을 자연법칙에 위배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믿는다. 이 문제에서 루이스는 자연법칙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자연법칙이란 세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1) 자연법칙은 어떤 운이나 이치를 배제하고 관찰에 의해 알려지는 사실이다. (2) 자연법칙이란 평균치 법이 적용된 경우다. (3) 자연법칙은 물리학의 근본원리로서 필연적 진리로 이해된다. 이 세 가지 정의에서 대체로 사람들은 자연법칙을 필연적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자연법칙을 깨뜨린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아무리 전능한 존재라고 해도 자기모순적인 일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은 매우 성급한 결론이다. 외부의 간섭이 있어도 자연은 그대로 순응하는 것이 자연법칙이지, 외부의 간섭이 없이 스스로 진행되는 것이 자연법칙이 아니다. 그것이 루이스가 말하고자 한 논박이다. 루이스에 따르면, 자연법칙은 자기 스스로 사건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자연법칙은 어떤 사건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운동법칙이 당구공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운동법칙은 다만, 뭔가(가령 당구 채를 가진 사람 혹은 배의 순간적 기울임, 아니면 어떤 초자연적인 힘)로 인해 운동이 일어나면, 그 다음에 그 운동을 분석할 뿐입니다. 자연법칙은 아무 사건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다만 모든 사건이-일단 유발되었다면-순응해야만 하는 패턴이 무엇인지를 진술할 뿐입니다.” 따라서 기적이 자연법칙을 깨뜨린다고 정의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기적이란 결코 원인이 없는 사건도 아니며 그렇다고 결과도 없는 사건이 아니다. 기적의 원인은 하나의 활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활동은 기적에 의해서 표현할 수 있다. 루이스가 대담하게 말하듯이, “기적의 결과는 자연법칙을 따라 나타난다.” 어쩌면 자연은 외부의 어떤 것이 들어오면 그것에 맞추어서 돌아가는 것이다. 자연은 자기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어떤 작인이나 동인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실재가 일관적이고도 체계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맞지만, 기적을 배제하는 것은 맞지 않다. 만일 기적이 일어난다면 다른 모든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모든 것과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통합하여 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서랍에 오만원을 넣어 두었다고 하자. 내일 다시 우리가 오만원을 넣어두면, 그 합이 10만원이 된다. 자연법칙은 5만원에 5만원이 더해지면, 10만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서랍의 돈을 보고, 얼마를 가져갔다, 그렇게 된다면, 그 법칙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의 어떤 작용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통합된다는 것이 자연법칙이다. 따라서 자연법칙은 외부의 어떤 작용에 아무런 의미를 제공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비유신론자들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부활의 신앙에 대해 지어낸 이야기 혹은 거짓말이라고 비판한 문제에 대해 변증할 말을 생각해 보자. 그들의 주장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부활이라는 것이 과학적 시대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분명하고도 상식적이다. 따라서 이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다. 정말로 부활의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일까. 거짓이라면 왜 우리는 부활을 믿고 있을까. 이런 거짓된 이야기를 전하는 기독교를 계속 신봉하고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매우 가치 없는 일이다. 물론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진리보다는 거짓을 더 신봉하는 시대인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에 기록된 이 부활의 보도가 거짓이라면 얼마나 우리가 헌신하고 살아온 삶이 낭비였는가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의 이야기는 거짓이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우선 부활의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짓을 전달하는 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거짓말의 메커니즘에 대해 기독교 변증가이면서 기독교 철학자인 J. P. 모어랜드와 팀 뮬호프의 방법은 매우 유용하다고 보인다.

 

거짓의 메커니즘의 첫 번째 단계는 항상 자신에게 유리하게 말한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꾸며 말하는 것은 거짓의 효과적인 메커니즘이다. 칠레의 탄광촌에 69일 동안 갇혀 있었던 광부들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런데 그들은 일종의 영웅이 되려는 말을 지어냈다. 그들은 그들에게 유리하게 말하기 위해서 지어낸 거짓된 이야기들이 들통이 났다. 그들이 입을 맞춘 거짓된 이야기는 그 같은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다툼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진실한 이야기는 모두가 구출된 후에 드러났다. 이처럼 꾸며낸 이야기는 어느 순간에 다 들통이 나고야 만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이야기는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사건을 목격한 자들이 증언한 이야기가 틀렸다거나 지어낸 이야기라고 문제가 된 적이 없었다. 제자들이 부활의 사건을 자신들이 유리한 쪽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이 당한 참수형, 십자가형 혹은 유배당함 등을 알면서도 부활을 증언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참수형을, 빌립은 매를 맞고 투옥되어 십자가형을, 마태는 반은 도끼이고 반은 칼인 미늘창이라는 무기로 잔인하게 살해형을, 안드레는 십자가형을, 마가는 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음을, 바돌로매는 매를 맞고 십자가형을, 베드로도 십자가형을 그리고 요한은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하였던 것을 보면, 그들에게 유리한 것은 없었다.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혹은 자신의 조롱과 고문을 초래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역으로 그런 사람들은 있었을지 모른다. 말하자면 정반대로 자신이 살기 위해서 부활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 사람들은 있었을 것이다.

 

거짓의 메커니즘의 두 번째 단계는 구체적인 인명이나 지명을 말하지 않는다. 꾸며낸 이야기는 대체로 구체적인 지명이나 인명을 말하지 않아야 효과적이다. 오늘날 매스 미디어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이야기를 포장한다. 가령 어느 중년 연예인 A는 B라는 여자 연예인과 불륜을 저질렀다. A와 B는 정확히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가 거짓을 꾸며낼 때에 실제 사람이나 장소를 언급한다면, 거짓말이 드러나기 때문에 숨기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야 거짓이 효과적이다. 한 예를 든다면, 2007년에 일어난 신정아 사건이 그 한 경우다. 예일 대학교 신문인 ?예일 데일리 뉴스?에서 “한국은 이력 허위자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Korea batters resume fakers)라는 제목으로 뉴스를 내보냈다. 신정아는 동국대학교의 가장 젊은 교수로서 발탁되었고, 어느 누구도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비록 거짓 이력임에도 이 사실은 사람들은 믿을 수 있다. 하지만 확인하면 그 같은 이력은 거짓으로 밝혀진다. 그녀의 이력이 거짓인 것은 정확한 지명이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뉴헤이븐(New Haven)이라는 예일 대학교와 학위 수여자의 이름이 정확히 기록되었기 때문에 확인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이처럼 거짓은 인명이나 지명을 언급한다면 그것의 진위는 쉽게 구분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기사는 인명이나 지명이 정확히 기록되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제자들이 보도한 세부사항이 지나치리만큼 구체적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실수를 한 것이었다. 예수를 장사한 곳은 아리마대 요셉이 마련한 무덤이었고, 부활한 후에 그를 목격한 자들이 500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사정은 다를 수 있지만, 바울이 목격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건에서 다메섹이라는 정확한 지명은 그의 부활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거짓의 메커니즘의 세 번째 단계는 거짓말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수집한다. 대체로 거짓말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거짓을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활용한다. 그래야만 거짓은 효과적일 수 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이야기가 거짓이고, 그것을 발설한 사람들이 그 거짓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료들을 수집했다고 생각하는가. 누군가가 거짓을 말하고, 그의 이야기를 신뢰하라고 말을 한다고 하자. 대체로 우리는 사기 전과범이나 마약 중개상 혹은 농민들이 하는 이야기보다는 수녀, 경찰관, 교사 등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신뢰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성경에서 부활의 첫 증언자들이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여성들은 당시에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가 아니었다. 따라서 부활의 증언자로 여성을 택한 성경의 저자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결과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인 한 사람이 유대법정에서 증언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다. 여성을 부활의 증언자로 선택되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못해 우둔한 것은 아닐까 싶다. 여성을 증언자로 채택되었을까. 하지만 진리이기 때문이다. 속이려면 없는 사람을 끌어다 썼을 것이다. 성경의 진리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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