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리!! 교의신학!! 변증학!!

[스크랩] 제 6강의 - 과학과 기독교 신앙 (종교)의 대립에 관해서

하나님아들 2016. 3. 23. 21:39

 

제6강의-과학과 기독교 신앙 (종교)의 대립에 관해서| 기독교 변증학 (학부)
소피스트 | 조회 148 |추천 0 | 2010.10.24. 17:01

 

 

제6강의: 과학과 기독교 신앙(종교)은 서로 상충하는가?

 

1633년 6월 22일 아침 도미니카 수도원에서는 낭랑하고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판결문이 낭독되었다.

 

“우리는 당신을 우리 마음대로 이 교리 성성의 공식적인 감방에 감금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린다. 그리고 유익한 회개를 위해 앞으로 3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일곱 개의 회개 시편을 반복하여 암송할 것을 명한다. 이 형벌과 회개의 전부 혹은 일부를 바꾸거나 제거하는 일은 우리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존될 것이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eus)의 기존이론에 반대하여 지구는 움직이고 태양은 정지해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인정한 갈릴레오에 대한 형벌을 판결한 종교재판의 전문이다. 당시 가톨릭교회가 지구는 정지해 있고 평평해 있으며 인간이 지구의 중심이라는 입장을 고수한 상태였다. 이 종교재판은 이른바 과학과 종교 간의 논쟁으로 비화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1.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생각 “과학에는 개인적인 의견이나 선호, 사변적인 상상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과학은 객관적이다.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으로 증명된 지식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지식이다.” 한편에서는 과학이야말로 객관적, 보편적, 합리적으로 관찰된 입증에 근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종교가 주관적, 편협적, 감정적이며 그리고 서로 일치하지 않은 전통들이나 권위들에 근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버트란트 러셀은 과학과 종교의 문제는 ‘독단(도그마)과 이성의 투쟁사다’라고 말한다.

 

2. 과학과 종교(기독교 신앙)와의 관계
(1) 갈릴레오가 말했듯이, “성경은 천국의 길을 제시하는 책이지 우주의 운행에 대해 말해주는 책이 아니다.” 당시에 갈릴레오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은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은 벨라르미노(Bellarmino, 1542∼1621)와 멜랑히톤(Melanchton, 1497∼1560)이 가장 두드러진 사람들이었고, 그리고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도 여기에 동조했다. 특히 멜랑히톤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코페르니쿠스(Copernicus)를 신랄하게 공격했고, 이런 이론은 ‘풋내기 점성가’의 이론으로, 그들을 ‘어리석은 자식들’이라고 비난했다.
  갈릴레오를 정죄한 가톨릭은 당시에 과학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갈릴레오의 견해를 퍼뜨리거나 옹호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 후 359년이 흐른 1992년에 와서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정식으로 사과문을 발표했다. “갈릴레오는 과학을 연구하면서 창조자의 존재를 감지했습니다. 그 창조자는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그를 자극했던 그의 직관을 예상하고 지원한 창조자였습니다.”

 

(2) 과학과 종교의 논쟁은 과학을 대표하는 ‘진화론’(evolution)과 종교를 대표하는 창조론(creation)으로 나타났고, 또한 신학적인 논쟁에서는 우연(contingency)과 필연(necessity), 혹은 자유의지론(free will)과 결정론(determinism)의 논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국의 상황에서는 아직 진화론과 창조론의 갈등적 논쟁이 명시적으로 일어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의 상황은 다르다. 1980년 미국의 아칸소 주에서 진화론을 가르칠 때는 창조론도 함께 가르쳐야 한다는 법이 통과되면서 촉발되었고, 그것이 논쟁의 시작이었다. 이 법안은 2년 뒤에 진화론자들의 반대에 의해 취소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3)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유형들
첫째, 상충적인 관계(conflict relationship)가 있다. 이 견해는 과학은 종교가 아니며, 종교는 과학이 아니다. 과학의 입장에서는 주로 ‘과학적 유물론’(scientific materialism)과 종교의 입장에서는 ‘성경 문자주의’(biblical literalism)가 상충적인 대안에 지지하는 입장이다. 상충적인 관계는 서로 대립적이기 때문에 배타적 관계이다.

 

둘째, 독립적인 관계(independent relationship)가 있다. 이것은 그들의 영역이 서로 다른 전제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기능이 서로 다른 영역에서 행하고 있기 때문에 비교하여 참된 것과 거짓을 택일하는 문제가 아니다. 마치 이 관계는 갈릴레오가 ‘자연의 책’과 ‘성경의 책’으로 구분한 것과 같다. 종교적인 언어(religious language)와 과학적 언어(scientific language), 즉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language game)다. 놀이는 동일하지 않다.


셋째, 대화적 관계(dialogue relationship)가 있다. 이 관계는 실재에 대해 서로 해명적이다. 그들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추구하는 방식은 진리를 찾아가고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유사하다고 보았다. 과학혁명의 토마스 쿤은 과학과 종교 그리고 기독교 신앙과 부단히 대화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최근에 과학자 스티브 제이 굴드는 ?시대의 반석들: 생명이 충만한 종교와 과학?에서 종교의 영역과 과학의 영역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한다. 과학자인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신빙성을 내포하고 있는 듯 보인다. “과학은 암석의 시대를 다루고, 종교는 시대의 반석을 다룬다. 과학은 천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연구하고, 종교는 천국에 가는 법을 연구한다.” 이 문제에 대해 리처드 도킨스는 “굴드가 ?시대의 반석들?에서 쓴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다”라고 일축해 버린다. 아마도 굴드의 말에 다소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넷째, 상보적 관계(integration relationship)가 있다. 과정철학(알프레드 화이트헤드, 떼야르 샤르댕, 찰스 하츠혼)에서 이 견해가 나타나고, 그리고 이론물리학자들이며 신학적 성향을 가진 이안 바버, 아더 피칵, 존 폴킹혼(이 세 사람은 과학자이지만 신학을 배워서 신학적 관점에서 과학을 설명하는 학자들임) 등은 상보적 관계에 지지를 보낸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아래로부터의 관찰과 경험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서로 상보적이라고 믿는다. 아래로부터 위로의 방식(bottom-up)은 귀납적 방식을 말한다. 과학과 종교는 진리(실재)에 대한 해명이지 진리는 아니다. 이 둘의 방식은 매우 유사하다. 그들의 경험과 관찰에서 어떤 실재를 해명하는 작업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3. 종교(신앙)의 제한성과 가치
(1) 종교와 신앙은 의미와 가치에 근거되어 있다. 종교가 과학이 될 필요는 없지만 과학에서 진리의 조건으로 삼는 귀납적 추론, 관찰, 합리성, 이성 그리고 상식(common sense)과 같은 필요 충족적 요소들을 신중히 고려하여야 한다. 종교가 보다 건전하게 되려면 이러한 조건들을 수용하여야 한다. 종교만큼 신비주의에 빠지기 쉬운 것도 없다.


(2) ?세속도시?의 저자 하비 콕스(Harvey Cox)가 지난 30년간 세계적으로 나타난 성령운동에서 현대문명은 ‘종교의 소멸론’이 아니라 ‘종교적 본능의 회귀’에 대한 갈망이라고 보고했다. 콕스의 최근 저서 ?천국으로부터의 불?(Fire from Heaven)에서 오늘날 사라져 가는 것은 세속성이지 종교성은 아니라는 점이다.


(3) 사람들은 과학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과학이 인간의 절망과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의 실존은 과학이 추구하는 방식과는 정반대의 길에서 도움을 준다. 그래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종교가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4. 과학의 제한성과 가치
(1) 우리는 무조건 과학이라고 해서 그것에 맹신해서는 안 된다. 피칵이 지적하듯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언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우리의 젊은이들은 종교 대신에 과학의 픽션의 온화한 형식을 받아들이고 있다.” ‘과학은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과학은 필요한 도구이며 중요한 삶의 방식을 제공한다.


(2) 과학은 종종 합리성의 패러다임으로 규정된다. 과학 방법은 실재를 반영하는 이론들을 세운다. 첫째, 합리적 모델 진영이 있다. 칼 포퍼(Karl Popper)와 이메르 라카토스(Imre Lakatos, 1922-1974)가 주장하는 진영이다. 과학의 방법은 합리성이어야 한다. 둘째, 비합리적 모델 진영이 있다. 합리주의적 모델과는 달리 비합리적 모델을 옹호하는 과학 철학자들은 과학의 합리성과 탐구의 이성적 기능을 비판했다. 토마스 쿤과 폴 페이어아벤트에 의해 지지된다. 과학이론은 누적적인 이론이 진리에 도달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불가공약성’(incommensurability)의 개념을 말한다.


(3) 전통 과학에 대한 비판은 이븐리 켈러(Evelyn Fox Keller), 루쓰 블라이어(Ruth Bleier), 그리고 산드라 하딩(Sandra Harding)과 같은 과학 철학자들의 목소리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여성이 만들어진 것이지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이는 여성의 개념이 어떤 생물학적 필연성(biological necessity) 때문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성장 과정에서 오는 여성과 남성의 문화의 역할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여성과 남성의 개념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개념이다. 첫째로, 성의 편견이 없는 과학적 견해(Genderless View)를 주장한다. 둘째로, 유기적 견해를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셋째로, 페미니스트 과학자는 표준 인식적 견해(standpoint epistemological view)를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변증적 차원에서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답변들을 정리해 보자. (1)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우주의 현상에 드러난 것들을 헤집고 그 이면으로 파고드는 탐구의 영역이다. 하지만 종교는 삶의 실존적인 가치나 의미를 추구한다. 과학에는 종교와 같은 인격적인 영역이 결여되어 있다. 문화 신학자인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적절히 언급했듯이, “종교란 우리의 삶과 자연의 표면 아래 놓여 있는 무한한 깊이에 사로잡힌 상태다.” 오히려 지금은 과학에 종교적 영역, 즉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다. 이렇게 단언한 사람은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총지휘하고 있는 과학자 프랜시스 S. 콜린스다. 그의 유명한 ?신의 언어?에서 우주에는 어떤 지적설계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이 지적설계이론을 통해서 과학은 다윈주의를 배격하고 창조론을 수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은 명제에서 그 이유를 밝힌다. 첫째, 진화는 무신론적 세계관을 옹호하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무가치하게 만든다. 둘째, 진화는 자연의 미묘한 복잡성을 설명하지 못하므로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셋째, 진화가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설명할 수 없다면, 진화과정에 어떤 식으로든 지적설계자가 개입해 필요한 부분을 제공할 수 있다. 이처럼 과학, 특히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과학은 삶을 황폐케 한다는 점이다.

  콜린스와 같은 열정으로 존 호건은 과학의 종말을 예견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과학을 믿는다면, 우리는 위대한 과학적 발견의 시대가 이미 지났을 가능성-심지어 개연성-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과학은 응용과학이 아니라 우주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자리를 가늠해보려는 가장 순수하고 숭고하며, 원초적인 인간적 요구로서의 과학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의 연구를 통해서 지식의 증감은 있을 수 있겠지만 더 이상 위대한 발견이나 혁명은 낳지 못할 수도 있다.”


  분명히 이 세상에는 신비한 요소들이 많다. 하지만 과학은 신비적인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는 종교나 신앙의 영역을 증명하는 기능을 갖지 않는다. 어쩌면 과학은 그러한 모든 것을 발견하지 못할지 모른다. 비근한 예로 진화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만,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비로운 것은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이 세상에는 신비스러운 경외감이 존재하며 사람들은 그러한 경험에 감탄한다. 과학이 삶의 모든 궁극적인 답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오만한 사람이거나 허풍쟁이임에 틀림없다. 삶에 나타나는 신비로움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진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과학의 기계적이고도 메마른 삶만이 남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과학자들조차도 과학은 과학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우리시대의 진화론의 대변자인 굴드는 도킨스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이는 과학이 아무리 합리적이고도 이성적인 수단을 이용하여 탐구한다고 하더라도 신의 존재 문제와 신앙의 문제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의 모든 동료를 향해 수백 번도 더 반복해 말한다. 과학은 아무리 합리적인 수단을 이용한다고 해도 자연을 관리하는 신의 문제를 판단하기란 한마디로 불가능하다고. 우리는 그것을 증명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우리 과학자들은 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수 없다……. 과학은 오직 자연적인 설명만을 내놓을 뿐, 도덕이나 신앙과 같은 다른 영역에서 다른 형태의 배우(하나님)를 인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아마도 굴드의 평가는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과학은 자연의 영역의 것에 한정하여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은 자연 밖의 존재이며 영역이다. 그런 면에서 과학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거나 부정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