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강의: 이성과 신앙은 서로 상충하는가?
기독교 변증학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은 이성과 신앙의 관계일 것이다. 이는 이 둘의 관계를 상충적이고도 경쟁적인 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아덴(그리스)과 예루살렘(히브리)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터툴리안의 물음). 바울이 언급한 “헛된 철학과 헛된 속임수 그리고 초등학문”에 대한 글들이 이성과 철학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져온 것처럼 보인다.
1. 역사적인 전개 인식의 두 가지 견해는 히브리적 인식과 그리스적 인식이 있다. 객관성과 합리성을 원칙으로 하는 그리스적 인식과 만남과 느낌을 원칙으로 하는 히브리적 인식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이 둘의 관계가 서구 문명의 태동이고 한편만이 아니라 양자를 포용하는 인식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린도 전서 1장22-23에는 세 종류의 유형이 나온다. 바리새인(히브리적 인식) 그리고 사두개인(그리스적 인식)을 언급하고,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1)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로서 사후의 삶(혹은 부활)을 믿었던 사람들이다. 사두개인들은 헬라파 사람들로서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죽은 후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십자가의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중요성은 단순히 역사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신앙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즉 믿음이란 역사적 사실에 근거된 신앙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잘못하면 우리의 신앙이 “실컷 울고 누가 죽었는지 묻는 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신앙이 맹목성과 맹신성 그리고 열광성에서 탈피해야하지 않을까.
2. 이성과 신앙의 관계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접근들이 있어왔다. 여기에서는 간략히 그들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신앙을 배제한 이성주의적 대안이 있다. 이것은 이성만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세계가 합리적이고 질서가 있기 때문에 세계는 이성에 의해서만 인식된다는 입장이다. 신앙도 이런 열정으로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잘 알려진 이야기는 클리포드의 “신념의 윤리”다. 클리포드의 신념의 윤리는 증거주의를 말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윤리의 신념이 아니라 신념의 윤리다. 우리가 믿는 신념에는 윤리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가 제시하는 예는 선주의 배). 계몽주의 시대의 잔재를 주장하는 클리포드는 우리가 믿는 신앙이나 신념이 증거가 부족할 경우에는 언제 어디서든지 포기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성의 합리성이 부족함으로써 사회에 미치는 해악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신념은 우리의 행위에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성을 배제한 신앙주의적 대안이 있다. 이것은 불합리하지만 믿는다는 것이고, 이성으로서는 어떠한 믿음도 가질 수 없다는 견해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 루터는 이성을 일종의 창녀로 보았다. 말하자면 아무런 유익이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겼다. 키에르케고르의 신앙주의는 이 대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그의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신앙적 단계에서 마지막 신앙적 단계 혹은 종교적 단계에서는 이성의 사유가 끝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며, 이것을 그는 일종의 역설 혹은 비약이라고 말한다. 신학자 칼 바르트도 이 신앙주의적 입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자연신학(이성의 사유를 인정하는)을 배격하기 때문이다.
셋째, 이성이 신앙에 선행하는 대안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다. 우리가 믿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차원이 우선적이라는 견해다. 그의 명제, “은총은 결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성하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신학구조에서 이성은 두 가지 힘으로 구성되어있다. 하나는 능동적 이성(intellectus agens)이고, 다른 하나는 수동적 이성(intellectus possibilis)이다. 능동적 이성은 감각경험에서 보편 관념을 추론하는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하고, 수동적 이성은 추상적인 관념들의 저장소로 이해한다. 아무튼 아퀴나스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이성은 이해력을 말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신앙은 이성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넷째, 신앙이 이성에 선행한다는 대안이 있다. 이 대안은 안셀무스와 어거스틴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이 견해는 일단 우리가 믿으면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고 말한다. 믿지 않으면 그것 너머에 존재하는 이해의 차원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들은 믿기 위해서 이해하지 말고, 그대가 이해하기 위해서 믿으라.”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 즉 지성을 추구하는 믿음이다. 믿음은 단순히 믿음에 국한하지 않고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3. 합리적 신앙의 필요성 기독교 변증학은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합리적 신앙의 필요성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무신론자들로부터 당하는 비판은 기독교가 부도덕하고도 비상식적이며 그리고 폭력적이기 때문에 온갖 부조리를 만들어내는 온상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의 야만성과 폭력성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물론 그들의 비판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비판에서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합리적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신앙이 행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보편적 합리성을 주장해 온 영국의 경험론자인 존 로크는 그의 ?기독교의 합리성?에서 합리적 신앙을 강조했다. “모든 사람이 합리적인 것에 동의한다.” 말하자면 합리적인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것이 자신의 주장이든 신앙이든 간에 그것이 합리적일 때에 동의한다. 특히 로크에 따르면,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서 “명제나 진리주장과 같은 것에 대한 확실성이나 개연성을 발견하는 것”은 이성의 기능이고, 반면에 “이성의 추론에 의해 어떤 의사소통의 특수한 방식으로 이른바 계시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타당하게 승인해 주는 것”은 신앙의 기능이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아무런 이성의 방식을 배제하고 동의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성의 방식에 의해서 신앙이 검증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증명해 보이려고 노력한 로크의 노력은 오늘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신앙의 합리성을 강조하면서 합리적일 때에 윤리적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여기서 바울은 사랑에 지식(knowledge)과 총명(insight)을 덧붙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선한 것들을 분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혹은 무엇이 악한 것인지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다는 것이다. 분별은 느낌 그 자체로서 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주어진 상황을 고려하고 추론하는 이성적 판단에서 주어지는 선물이다. 베드로의 경우에도 신앙이 윤리적 실천과 관련을 해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베드로 전서 3: 16절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말하자면 기독교 변증은 이러한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실천에 의해서 검증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신앙의 합리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전히 우리는 클리포드가 제시한 “신념의 윤리”가 매우 절실히 필요하다고 본다. 신념의 윤리는 우리가 믿는 믿음이나 신념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이 항상 옳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이성적 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앙이 사람을 헤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엄격한 증거주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신념이나 신앙이 타인을 헤친다면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의 신념이나 신앙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우리는 기억한다. 911사건이 극우 종교단체들의 행위인 것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역사 속에 사라진지 오래된 사건 중에 “인민사원의 자살파티”라는 것이 있었다. 1978년 11월 18일 신흥종교 교주였던 짐 존스 목사의 죽음의 가르침을 추종하던 신도들이 남미 밀립에서 대규모 집단자살을 감행한 사건이다. 당시 900구 이상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유태인의 학살(아유스비츠 수용소), 백인우월주의사상의 KKK(Ku Klux Klan) 집단 등 다양한 형태들은 신앙의 비합리성이나 비상식성에 의해서 사람들을 헤친다. 신앙이 타락할 때, 사회의 건전한 기준이 상실된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신앙의 합리성을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신앙이란 합리성과는 다르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앙이란 증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신비스러운 사건들을 믿는 행위라고 받아들인다. 그 한 예로, 그들이 제시하는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도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믿지 않는 도마를 꾸짖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믿음과 결부시키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실제로 빈번히 그릇된 해석을 제공하는 이야기로서 도마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이야기가 얼마나 잘못 해석되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예수는 도마를 꾸짖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도마가 책망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이유다. 도마가 책망을 받은 이유는 충분한 이유가 없어 못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얼마든지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3년간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장사한 뒤에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들었다. 그런데도 도마는 그의 부족한 믿음을 불가능한 신뢰의 간격을 잇지 못한 문제가 아니다. 그의 불가피한 그의 불신앙은 그 같은 증거들이 있는데도 단순히 신뢰를 내딛지 못한 문제다. 이는 마치 최근에 불거진 타블로의 진실공방과 같다.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는 타진요 회원들은 미국의 스탠포드대학교로부터 타블로가 졸업을 했다는 직접적인 해명을 하고, MBC방송에서도 사건의 전모를 밝혔고, 게다가 그러한 증거에 기초하여 경찰에서도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러한 사건을 믿지 못하고 조작되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타블로의 사건을 예로 든 것이 좀 과장되고 부풀린 예이긴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마치 증거를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불신앙의 형태를 선택하는 것과 얼마나 유사한가.
신앙의 합리성은 직접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우리의 믿음에 대한 기초가 어떤 무게를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나약한 것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터전 위에다 세운 것인지 스스로 점검할 시간이 필요하다. 신앙의 합리성은 이러한 태도와 용기를 요청한다. 마치 베뢰아 사람들의 태도와 같이 신앙의 확실성을 두들겨 보는 것이 필요하다. 베뢰아 사람들은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니라.” 만일 우리가 확신이 없다면, 이제 확신을 가져야 할 때다. 자신이 믿는 것들이 정말로 진리인지를 알아볼 때다. 그래야만 우리의 신앙이 맹신적 사고에서 벗어나 합리적 사고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 기니스는 매우 적절하게 믿음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믿음은 무에서 생기지 않고 사실을 먹고 자란다. 믿음의 본능은 진리에 뿌리내리고 실체에 근거하는 것이며, 그것이 믿음과 공상을, 믿음의 대상과 상상의 허구를 구별해 준다. 확인이 지체되는 곳에는 믿음이 장시간 역사의 법정에서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이 찾는 판결은 언제나 진리의 판정, 실체에서 나오는 판결이다.”
이처럼 우리는 신앙과 이성이 상충할 것이라는 전제는 완전히 빗나갔다. 신앙과 이성은 한 배를 탄 동료와 같다. 이 둘은 함께 진리를 향해 고난과 역경을 헤쳐 가는 동료다. 신앙은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선택하는 요소다. 하지만 그것이 이성의 판단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소스라쳐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믿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과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과 믿음은 진리를 위한 조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할 것은 신앙을 가지게 되면 편향되거나 편견에 근거된 생각을 갖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는 듯하다. 따라서 이성이 배제된 신앙은 적합하고도 합리적인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공격을 받게 되면,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방어적이 되고, 다소 위축된다. 이런 문제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은 이성의 기능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다. 이성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왜 사람들은 편견이 없는 견해를 생각할 때에 이성을 염두에 두는지를 세심하게 살펴야한다. 우선 이성이란 철학적 전통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철학에 무지한 그리스도인들은 철학을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기는데, 그러한 태도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이성이란 계몽주의 시대에 나온 산물로 본다. 계몽주의는 오늘날의 측면에서 보자면 일종의 우상에 헤어 나오지 못한 시대다. 이성이 우상이라고 말할 때에 어색하게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성은 진리를 발견하는 길로서 제시되었는데, 이는 모든 편견이 없는 견해에 도달하고자 노력했다. 그것은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해석적 철학자인 한스-게오르그 가다머의 적절한 평가에서 밝힌 것처럼,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은 하나의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다른 이전의 시대의 선입견을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이성이란 “선입견에 대항하는 선입견”(prejudices against prejudices)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이성을 전면에 내세운 것 자체가 일종의 선입견이었다는 것이다. 낸시 피어시도 ?완전한 진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성이란 적나라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이전의 모든 가정과 종교적 신념의 옷을 벗어 버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계몽주의에서 온 것이다.” 모든 학문은 아무리 이성을 강조해도 그것은 이미 선입견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아무런 편견이 없이 정확 무오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이성의 방식은 오만하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너무 과신해서는 안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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