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예배에 대한 문제는 예배드리는 자가 예배에서까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영적 체험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배가 우리의 삶과 무관한 형식적인 예배로 전락해 간다는 데 있다. 이번 성서신학마당의 주제가 성경과 예배이므로 우선 구약이 의미하는 예배의 의미부터 알아보자.
1. 예배란?
(1) 우선 예배란 무엇이냐? 할 때 예배란 하나님을 주(主)로 섬기는 행위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영어의 예배란 말이 "service"라고 칭한다. 이 어원은 히브리어의 "아바드"에서 유래되는데 그 의미는 종이 주인을 섬긴다는 뜻과 같이 예배자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긴다는 뜻이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못할 때 이는 예배가 아니라 우상숭배가 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을 주(Lord)로 고백하고 섬긴다는 어휘가 구약에서 115회 나타나는데 그 중 75회가 신명기 작품 즉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와 열왕기 상하 등에서 나타나므로 아바드란 용어의 신학적 의미는 신명기 신학자들에 의하여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아바드와 관계된 문장에서는 이방신을 섬기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신명기 신학자는 우리가 섬길 참 하나님은 여호와 한 분 밖에 없으므로 그분만을 섬기라고 설교하였다. 신명기 6:4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한 분 뿐이다"라는 유일한 신앙을 강조하고 예배는 이런 신앙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유대 회당에서 예배는 이 세마(Shema) 노래가 불리우고 있다.
(2) 예배란 인간의 삶의 근거와 존재 기반이 하나님께 있음을 시인하는 표시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인정되고 예배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인식되는 뜻에서 하나님 앞에 굴복함을 뜻한다. 영어의 예배를 뜻하는 worship이란 단어는 가치 있는 신분이란 뜻으로 히브리어의 히스타카 보트(삼상 1:3)와 같은 의미이다.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갔을 때 사용된 말인데, 즉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는 뜻으로 이마를 땅에 대고 인간 전존재를 하나님 앞에 굴복하여 예배 대상의 존재 가치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주인의 존재 가치만 인정하고 예배자는 종처럼 주인 앞에 엎드려 복종하는 자세가 곧 예배의 행위이다.
2. 예배 제사란?
앞에서 예배의 어원적 고찰로 어떤 태도와 동작이 예배인가를 보았다. 어떤 동기에 왜 예배를 드렸는가를 고찰할 때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인간의 감사의 표현이요, 응답이다라고 할 수 있다. 신명기 신학자 이전의 신학자들은 예배란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은혜의 보답의 행위가 예배였다고 한다. 초기 예배가 출애굽 사건과 관련된다. 애굽의 박해와 고통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 주었기 때문에 이 출애굽기 사건에 대한 감사의 응답과 표시가 예배로 표현되었다. 출애굽기 3:12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했다.
너는 나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이 산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리라
다윗도 시편에서 전쟁에서 승리를 준 하나님께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께 찬송하고 대대손손이 예배할 것을 노래하고 있다(시 22:30). 말라기도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예배치 않는 자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와 예배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말 3:18). 고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섬기는 행위를 말한다.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있으니 초기 이스라엘 신학 사상 가운데 하나님의 게신 곳과 그곳에 접근에 관한 이해이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출애굽 시대에 하나님이 계신 곳은 모세만 접근할 수 있었고 장로나 아론도 접근이 금지되었으니 일반 백성은 예배하러 하나님께 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는 모세라는 중재자를 통해서만 백성의 간구가 하나님께 전달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명령이 모세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하달되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세속적인 일반 백성은 직접 하나님께 접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세 같은 기능을 담당하는 자가 탄생했으니 제사장들이요, 그들을 보좌하는 레위인들이였다. 제사장도 아론의 직계만이 되었으며 다른 사람이 될 경우에는 죽음을 당했다(민 3:10).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동물과 식물로 제사를 드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고대 히브리인들의 제사였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복을 받기 위해, 또는 각종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얻기 위해 또는 죄용서를 받기 위한 각종 제사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고대에 예배의 양식 즉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양식은 각종 제사로 나타나게 되었다.
3. 제사로서 예배 - 속죄
제사로서의 예배는 주전 586년 이스라엘 멸망까지 이스라엘에서 진행되었다. 제사의 의식규정과 장소 기구들에 관한 규정은 출애굽기 25장, 레위기에 잘 수록되어 있다. 제사의 종류로는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소제 등이다. 이 제사의 기본 기능은 예배자가 하나님 앞에 나아 오는 것이며 제사장을 통해서 속죄함을 받는 데 있다. 소제를 제외하고는 전부 동물을 희생시켜 하나님께 분향하고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에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피가 죄를 속하게 되는 것이다(레 17:11). 속죄의 기능은 제사장의 기본 기능이다. 특히 대제사장은 속죄일(7월 10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는 일을 수행한다. 즉 개인과 사회의 새로운 삶의 기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죄사함을 받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제사장으로서의 우리는 예배자의 속죄의 기능을 잘 활용해야 할 것이다.
4. 기도와 찬양으로서 예배 - 영적 섬김
앞에서 본 바대로 이스라엘 종교사상 속에 예배의 전승은 제사로 일관되었다. 이런 제사제도에는 문제가 나타났으니 이방 종교의 제사제도와의 혼합과 내용이 없는 형식주의에 빠진 것이다. 아하스 왕 때 앗시리아 제단을 다메섹으로부터 모방하였고 이런 이방제단에서 번제와 친교제의 제물들을 드리고 제물의 피를 뿌렸다(왕하 16:10 이하). 그래서 히스기야 왕 때는 종교정화운동으로 산당을 철거하고 석상을 부수고 앗세라 묵상을 찍어 버렸다(왕하 18:4).
요시야 왕 때에는 일련의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니 요시야 왕은 유다 각 성읍과 예루살렘 인근 지역에 있는 가짜 제사장들을 파면하고 바알과 일월성신에게 제물을 바치던 자들은 모두 파면했다(왕하 23:5 이하). 여호와 전에 세웠던 태양신 동상과 병거도 태워버렸다. 이런 우상숭배와 같은 제사형식 때문에 제사는 예언자로부터 많은 규탄을 받았고 왕의 법으로 금지까지 하게 되었다.
특히 제사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난은 제사가 형식에만 치중한 나머지 진실과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아모스도 제사는 형식뿐 회개가 없고 위선뿐임을 지적했다.
아침마다 희생 제사를 드리고 사흘마다 십일조를 드리고 누룩든 빵을 감사제물로 바치고 자원제물을 드리지만 나 여호와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너희를 뒤엎어 버리리라(암 4:4 이하).
호세아도 제사는 잘 지내지만 자비가 없다고 하였고 이사야 선지자도 제사의 불성을 지적하므로 당시 제사로서의 예배는 형식뿐이고 내면적으로 하나님과의 참된 단계가 결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우리의 예배도 형식 뿐 내용과 진실이 없는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제사의 종식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서 비롯되었다. 에스라, 느헤미야에 의해 제 2성전이 재건되었으나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만 제한되었고 보편적인 제사 예배 행사는 사라지게 되었다.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은 그곳에 있는 회당에서 기도와 성경 읽기와 찬양으로 예배드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정치 사회정황에 따라서 제사로서의 예배는 개인 혹은 대중의 기도와 찬양과 토라 읽기의 예배로 변모하게 된 셈이다.
5. 회당에서 기도와 찬양과 미크라 - 영적 만남
앞에서 언급한대로 제 2 성전 시대에는 제사장에 의해 제사가 진행되었지만 특수한 날 즉 명절에만 진행되었다.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주 예루살렘에 올 수가 없었고 특히 시리아의 박해시대에는 제사를 자유롭게 드릴 수가 없었다. 이는 외경인 마카비서에 나타난 성전모독과 제단파괴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러한 팔레스틴 상황의 변화에 따라 유대인은 흩어져 있는 곳을 중심으로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 생활은 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회당예배의 출발이다.
회당은 주로 높은 산꼭대기나 불이 있는 곳에 세워졌다. 회당이란 성전과 달리 사람이 모이는 곳(synagogue)으로 이해되었다. 회당은 우선 모임의 장소이기 때문에 모여서 민족혼을 일깨우고 종교생활을 영위하였다.
회당에서의 예배는 예배부름, 세마낭독, 기도, 토라와 예언서 읽기와 축복선언 등으로 진행된다. 예배부름에는 성전입장에 사용되는 시편들로써 15편 같은 예배자의 자격을 묻는 시가 선포된다. 세마 낭독으로는 신명기 6:4-9, 11:13-21, 민수기 15:37-41 세마는 신명기 6:4 만으로 되여 있었으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kus Epiphanes) 박해가 시작되기 반세기 전에 신명기 11:13-21 이 첨가되었고 로마시대에는 민수기 15:37-41 이 또 첨가되었다.
세마란, "듣는다"라는 히브리 동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예배시작부터 우리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유일신 신앙을 소리 높여 낭독하고 있다. 신명기 11자의 내용도 같은 내용으로 신명기 6:4 의 부연설명이다. 주 내용은 유일신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고 이방신을 섬기면 복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가 없다는 내용이다. 민수기 15장의 내용은 옷단 귀에 술을 만들어 달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는 말이다. 이 계명은 이 술을 보고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마음과 눈이 미혹되거나 방종치 않게 하기 위함이다. 요즈음도 유대인 중에 핫시딤(Hassidim)이라는 유대 정통주의자들의 옷을 보면 허리에 실로 짠 술을 달고 다닌다. 이것은 야르보토 미츠보토(613조항의 율법)을 뜻하는 것으로 부정적인 계명 365개 조항과 긍정적인 명령 248개 조항을 합한 계명을 뜻한다. 이 술을 보고 만지므로 이 모든 계명들을 상기하고 준수토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들을 예배 첫머리에 상기토록 낭독하고 있다.
이런 예배순서가 초대 비타니아(Bithynia) 교회에서는 십계명 교독으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로마교회에서는 십계명을 교독하지 않고 후기 시편교독으로 대치되었다.
다음은 기도순서이다. 기도는 소위 "스모나에세르"(Eighteen Benedictions)라는 18조문의 기도문이다. 예배 대중은 일어서서 기도를 하고 끝은 아멘으로 응답한다. 기도문은 여러 양식을 갖는다. 간구, 고백, 묵상, 감사, 찬양, 경배, 중보기도문 등이다. 성경본문에서 인용된 기도문으로 성경에 85개의 기도문이 있다고 한다(Köhler Baumgartner). 그중 60개가 완전히 시편이고 14개가 시편의 일부이고, 시편 17,86,90,102, 142편 등 5편이 특히 시편 기도문으로 사용된다. 시편 17편은 다윗의 기도문으로 "정직한 자의 음성을 듣고 거짓되지 않은 자의 입술에서 나온 기도를 들으소서"라는 기도의 서두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겠다는 내용의 기도이다. 개인의 자의적 기도보다는 성경대로의 기도이다. 시편 142편 같은 기도는 다윗이 굴에 숨어서 하나님께 부르짓는 기도로 환난과 고난 중에 있을 때 다윗의 심정을 생각하며 드리는 기도이다. 이런 기도가 자의적.자율적 내용이 결여된다 할 지라도 내용이 성서적임에는 틀림없다.
히브리어 팔렐이란 말의 뜻은 "자신을 외부와 단절시킨다(cut oneself)"는 뜻으로 예배 중 이방관습과의 단절을 의미할 뿡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보이고 소망을 찾는 마음의 예배이다. 아브라함도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했다(창 12:8). 기도의 내용은 물질적인 복(창 28:20ff)으로부터 영적 복까지를 다 포함한다.
중재기도는 족장들, 예언자, 왕, 제사장들의 주요기능이였다. 아브라함도 소돔성의 구원을 위해서, 히스기야 왕도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기도는 제사와 달리 어디서나 가능하지만 주로 거룩한 곳, 즉 실로나 기브온에서 기도하곤 하였다. 그래서 성전이 곧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이해되었다. 기도는 아침, 오후, 밤 기도 등 하루에 3회 기도하며 시편 119:164에는 하루 일곱 번씩 기도하고 있다.
기도하는 자세는 통상 서서(삼상 1:26, 왕상 8:22), 무릎을 꿇고(단 6;11, 에 9:5), 엎드려(수 7:6), 머리를 숙이고(창 24:26, 느 8:6), 손을 하늘로 들고(왕상 8:22, 시 20:2),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왕상 18:42) 하는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기도는 금식기도였다. 특히 위기시에는 금식기도가 병행되었다(에 4:16).
기도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음율에 맞춰, 찬양에 맞춰 하고 아멘으로 응답하였다. 시편 41:13은 기도의 끝을 아멘으로 응답하고 있다. 에스라 2:65에는 200명의 성가대가 동원되기도 하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과 함께 도덕적 및 영적 실제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 다음에는 율법낭독이다. 모세오경은 3년 주기로 하여 해당부분을 낭독한다.
예언서 낭독은 고정된 낭독이 없으나 사회자나 읽는 자의 선택에 따라서 읽는다. 아니옥에서 바울의 성경낭독은 율법과 예언서에서 였다(행 13:15). 신약시대에는 시편도 3년 주기로 회당에서 낭독되었다고 한다. 이 성경낭독 후에는 성경에 대한 간단한 주석이 인도자에 의해 주어졌다. 오늘의 설교와 같은 장문의 강해는 아니지만 짧은 해석이 주어졌다. 대부분 종교의식에 설교가 많고 길지 않다. 대부분 성경낭독이 비중을 차지한다. 옛날엔 각 개인이 성경을 소유할 수가 없었던 시대이므로 회당에 와야만 성경말씀을 들을 수가 있었다. 에스라가 포로 귀환 후 율법책을 갖다가 읽고 설명할 때 많은 사람들이 듣고 통회의 눈물을 흘 린 것은 그때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느 8:1-8).
회당예배는 핫잔(hazzan)이라고 불리우는 회당장의 축복선언으로 끝맺는다. 회당장만 이 축복선언을 할 수 있는데 회당장이 없을 때는 생략한 것으로 전해진다. 회당장이 낭독하는 축복선언문을 회중은 어깨만큼 손을 들고 따라 반복하고 문장이 끝날 때마다 아멘으로 응답한다.
찬송과 헌금은 따로 없다. 예배시작부터 끝까지 기도나 성경낭독은 찬송곡으로 이어지고 성가대가 교독의 응답을 대신하여 준다. 기도문은 있어도 찬송가는 없다. 시편 전부가 찬송가이고 특히 시편 145-150편은 찬양 찬송으로 찬송의 시작과 같이 할렐루야로 시작되고 끝난다. 영국 장로교회의 찬송가도 찬송가사는 시편이고 찬송곡은 몇십 개의 곡에 맞추어 부르는 찬트(chant) 찬송이다. 시편찬송이 구체적인 우리의 삶을 노래하기에 부족함이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찬송하는데는 부족함이 없고 성서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시편찬송은 특히 감사찬송이다. 시편에 나타나는 서두는 호두로 감사를 전제한 찬양이다. 단순히 인간 같은 상대에 감사하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와 함께 하나님을 길이 높이는 뜻이 내포된 기림의 찬송이다. 그래서 시편의 찬송은 하나님께만 드려진 감사의 노래로 높임의 찬양이다.
찬양 시편에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함께 간구와 탄식이 주 내용을 이룬다. 시편 136편 같은 감사찬송은 자연과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열거하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상기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함이로다 하며 후렴으로 노래하고 있다. 또 간구는 찬양자의 바램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기대와 소망인 것이다. 탄식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고뇌에 찬 부르짖음이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전제된 탄식이다. 불신상태에서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배반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한 신뢰바탕에서 어린아이가 어머니만 믿고 부르짖는 울음의 소리요, 노래소리와 같은 것이다.
헌금은 절기에 따른 감사 십일조가 바쳐지기 때문인지 매주 헌금순서는 없다. 회당장 혹은 랍비들도 자기의 일반직업이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기 때문에 회당재정에 문제가 심각한 것은 아니다.
이상에서 본 대로 구약에서는 제사에서 예배로 제사예배에서 성경 읽기와 찬양예배 양식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주로 회당예배에서는 세마낭독과 기도, 성경 읽기와 축복성언 등으로 진행되는데 많은 것이 시편에서 온 기도문과 찬양시가 사용되고 있다. 초대 기독교에서는 주요 회당의 의식을 따랐으나 성만찬에 큰 비중을 두었다.
현대 유대교에서도 간단한 떡과 포도주의 나눔이 예배 후에 있으나 교회에서와 같은 의식을 갖지 않는다. 교회에서는 성만찬의 비중이 큼으로 초대교회가 핍박받은 이유 중에 하나가 곧 성만찬 시행에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인은 피와 살을 먹는 야만인으로 취급당하기도 하였으니 곧 율리안 법(lex Julian)으로 성만찬에 금지되기도 하였다. 그후 예수부활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주의 말씀과 성만찬에 의지하여 왔으므로 오늘 우리가 설교에만 비중을 두고 있는 것에 대한 재고가 요청된다고 본다. 설교준비와 함께 기도, 찬양, 성만찬 준비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도서>
1. C.Westermnn, Praise and Lament in the Psalms, Tr. by K.R.Crim and R.N.Soulen(T & T Clark LTD., Edinburgly, 1965).
2. S.Mowinckel, The Psalms in the Israels"worship, Oxford, Basil Blackwell, 1967.
3. Encyclopeedia Judaica, "Benediction", "Liturgy", "Prayer", 등 대한예수교장로회.
4.「우리는 이렇게 예배한다」, 총회출판국, 1990년.
5.「에벤에셀」 12호, 장로회신학대학 제68회 동문회, 1990년.
6. H.H.Rowley, Woship in Ancient Israel : Its Ferms and Meaning, Condon, SPCK 29, 1967.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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