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훈련의 종류
영성훈련을 크게 ‘절제훈련’과 ‘참여훈련’으로 구별할 수 있다. 절제훈련에는 독거, 침묵, 금식, 검약, 순결, 입이 무거움, 희생 등이 있으며, 참여 훈련에는 성경탐구, 예배, 찬양, 봉사, 기도, 친교, 죄 고백, 복종 등이 있다. 절제훈련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모든 하나님의 은사를 건전하고 온전하게 활용하는 길로 이끈다.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으로써 그 결과 자신의 힘이 신장되고, 자신의 사랑이 확대되고, 자기 내면의 평화가 증가되게 한다. 일반적으로 절제훈련을 할 때는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욕구로 간주되는 것(식욕, 수면욕, 성욕, 육체활동, 교제의 욕망, 호기심, 편리함, 안락, 물질적 안정, 명예 추구 등)을 충족시키는 일을 어느 정도 그리고 얼마동안 삼가야 한다. 적절한 영성 훈련 과정은 우리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성향들(교회 역사상 널리 인정되어 온 7 大罪인 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폭식, 호색)을 확고하게 제거해야 한다.
A. 영성훈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영적인 삶의 진보를 이룬 사람치고 어느 시점에서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요동치 않는 견고한 발판을 찾고 지키게 해주기 때문이다. 절제 훈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1) 고독과 침묵
고독 혹은 독거란 의도적으로 타인들과의 상호관계를 절제하고, 교우관계 및 타인들과의 의식적인 관계에서 오는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자신을 외부와 단절하고 혼자 있으면서, 하나님과 단 둘이 있으면서 아무 것도 않는 은혜를 누려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생활양식을 표면화하고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이다. 타인으로 부터 고립하여 홀로 거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독거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질서 속에 통합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뿌리 깊은 행위들로부터 자유를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독거 속에 심리적 거리, 즉 우리를 미혹하고, 근심케하고, 억압하는 피조물을 영원에 비추어서 볼 수 있는 관점을 발견한다. 이를 두고 토마스 아 캠피스는 ‘피조물을 느끼지 않는 것, 그것들에 죽고 그것들에 관한 지식에 죽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즐거워했다. 오! 고독한 자는 복이 있나니(O beata Solitude!).라고. 독거를 하면 피상적인 안정의 껍질이 벗겨버리고 적나라하게 내면이 드러나고 알지 못했던 심연을 드러내준다. 권능을 얻는 최고의 장이 이것이다. 훈련 중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훈련이 되어야 할 이유이다.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덜 사람다워진다. 사실 은밀한 생활이 결여되면 세속적인 생활도 활력을 잃는다.
독거는 영성생활의 시초에 행해야 할 기본적인 훈련이지만, 영성이 성장하면서 반복적으로 실시되어야 한다. 타락한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인간들과의 상호관계 속에 있으면 은혜 안에서 자랄 수 없다. 예수께서도 그러셨다(막 6:31,32;9:2,14:32;눅 6:12). 독거로 고독을 실천하심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육신을 입은 사회적인 우리의 뒤틀린 모습을 바로잡아 주는 방편이 될 수 있다. 몸과 영혼을 죄의 회로에서 끄집어내어 천국의 새로운 습관적인 성향을 찾게 해주려면 긴 시간 혼자서 조용히 있는 것만이 유익한 길이다. 그러면 직접적인 노력으로는 안 되는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 바쁨과 서두름과 고립과 외로움이 위력을 잃고 자신과 하나님을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면서 고독 속에 내린 영혼의 닻 속에서 몽글몽글 솟아나는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고독할 때 자신의 주변생활을 지배하는 자동 반응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순전한 고독 속에서 침묵과 평정이 가능하고, 직장과 가정으로 돌아갈지라도 하나님을 의뢰하고 마음을 굳게 정하여 그 마음을 견고하게 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시 112:7,8). 하나님과 혼자 있을 때에만 자신에게 의미 있으면서 하나님과도 의미 있고 체험적인 상호작용을 만나기 때문이다.
독거의 고독 속에서 하는 침묵은 고요한 상태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자신과 하나님의 소리를 자연스럽게 듣는 것이다. 그 부재 속의 하나님의 실체를 강하게 느끼며 가만히 있어 여호와가 하나님 됨을 알고(시 46:10), 그분께 주목하게 된다. 삶을 그냥 두고, 남들이 뭐라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하나님께 맡긴다. 고독을 완성하려면 침묵이 필요하다. 침묵은 또한 독거를 가능하게 한다. 침묵 없는 독거는 효과 없다. 침묵은 독거를 하나의 실체로 만드는 길이다. 독거를 실현하는데 침묵이 반드시 필요하듯이, 침묵의 훈련을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독거가 필요하다. 거기서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여 고요함에 들어가지 않는 한 아직 세상이 우리를 쥐고 있게 된다. 고독과 침묵 속에 들어가면 더 이상 하나님께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그분의 소유로 족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영혼이 있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며, 이 세상이 내 아버지의 세상임을 배운다. 이것이 충분히 연습되면, 인간을 몰아가는 자만심과 미친 듯이 바쁜 삶을 점차 밀어낸다. 어디 있든지 그 지식이 우리를 소유한다. 더 이상 굳이 외적인 고독과 침묵 속에서 있지 않아도 고독과 침묵이 우리 안에 거한다. 일어나는 일마다 예수께 감사한다(골 3:17). 조용히 혼자 고독과 침묵을 돌보고 가꾸면서, 그 깊이와 힘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가는 곳마다 고독과 침묵을 품고 다닌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는 안식(히 4:9)을 알게 된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마음의 쉼’을 알게 된다(마 11:29). 이것은 삶과 죽음에 쉬우면서도 요동치 않는 기초가 된다. 독거와 고독과 침묵은 은혜의 강력한 방편이다. 고독이 최고의 길이고, 침묵은 써레질이다. 침묵은 즐겁고 힘이 나는 일이다. 우리 삶을 구성하고 있고 우리에게 정상이 되어버린 그 자극과 반응을 마치 젖을 떼듯이 떼어낼 수 있다.
일반적인 예배, 기도, 성경공부, 교회 출석이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것은 몸과 영혼이 너무 고갈되고 분열되고 상충이 되어서, 그 처방된 활동에 제대로 임할 수 없고, 그래서 대체로 그 활동이 율법적이고 무력한 의식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휴식을 곁들여서 장시간의 고독과 침묵에 들어가면 그런 활동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가만히 있어 여호와가 하나님 되심을 알고 그 분 앞에 잠잠히 기다리는 것과 이 연습에 시간을 아끼지 않으면 훈련된 영혼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시고, 그리하여 모든 생각과 감정과 선택은 자연스럽게 방향을 돌리게 된다. 몸 자체도 쉼과 힘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 고독과 침묵의 여파는 우리가 처한 사회적 상황에 두루 퍼진다.
고독과 침묵은 평판과 성공을 포함하여 세상과 운명을 하나님의 손에 넘긴다는 결단이다. 우리의 몫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의식으로 정결케 된다. 자기 방에 머물 줄 아는 자신에게 족한 것을 찾은 사람이요 혹시 닥칠지 모르는 어떤 일에도 위협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신체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에 기생하던 세상을 주관하려는 성향은 더 이상 지배하거나 뒤흔들 힘이 없다. 이 두 훈련은 인간의 불행과 죄의 근원을 가장 직접적으로 공략하므로, 영적인 삶을 위한 훈련 중에 가장 근본적이다. 아무 것도 않고, 성취를 일절포기하고, 손을 떼는 법을 배운다.
고독과 침묵의 연습은 저녁에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루를 반성함으로 시작할 수 있다. 방이나 마당이나 산책을 택할 수 있다. 또는 가족들 모두가 잠든 사이에도 가능하다. 하루 동안의 언행을 되돌아보고, 만났던 사람들과 그들의 필요와 관심을 생각해 본다.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고, 타인을 위해 중보기도 한다. 동작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침묵해 본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하나님의 평화를 느끼는 시간을 갖는다. 더 깊고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지려면 계획과 결단이 필요하다. 매일 5분부터 시작해서 습관을 들이고 매주 한 시간씩 고독의 시간을 따로 갖는다. 그리고 매달 하루씩, 매년 주말이나 일주일씩 고독의 시간으로 가질 수 있다. 성경을 정독하고, 묵상하는 글을 쓰고, 밖으로 나가 해거름을 감상하고, 달과 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대화와 소음을 떠나서 혼자 있는 것이, 휴식하고 관찰하고 장미꽃 향기를 맡고, 아무 것도 않는 것이다. 이곳에서 다른 은혜까지 떠올리게 된다. 다른 사람들과 상황에서 누적된 더께를 벗는다. 고요한 사귐의 자리에서 영혼이 있고, 양육해야 할 내적인 존재가 있음을 다시 발견하며, 말씀하시고 상호작용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내면의 성소에서 다시 체험한다(시 46:10). The Message 번역에서는 “가던 길을 멈추라.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라”고 되어 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와 교제한다. 기쁨이 충만해진다. 조급증도 외로움도 사라진다(요 16:24).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삶의 질을 높이려면 시간을 쓰는 것보다 더 유익한 시간 사용은 없다. 시간은 나는 것이 아니라 내는 것이다. 시간을 낼 수 없이 바쁘다면 스스로 그렇게 만들거나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것이다. 사역을 함으로써, 혹은 능력을 받음으로써, 또는 영적인 경험을 함으로써는 결코 성품이 고쳐지지 않는다. 아름답고 건강한 성품, 깊은 통찰과 이해, 삶과 사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풍성한 능력의 공급은 이러한 훈련에서만 온다.
2) 금식
금식은 가치가 높고 역사가 오래된 안식으로 들어가는 훈련의 방법으로서 상당기간 동안 음식을 끊고, 몸과 전인을 하나님이 직접 유지시켜 주심을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자리이다. 음식을 끊음으로서 제멋대로인 자아를 굶주리게 하고, 의지의 측면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면서 교훈과 영적인 힘을 얻는 길이다. 금식은 평강이 먹는 즐거움에 얼마나 크게 의존하는가를 보여줌으로 겸손하게 한다. 금식은 신앙 없이 지혜롭지 못한 삶과 태도-자기존중의 결여, 무의미한 수고, 목적 없는 생활, 휴식이나 운동 부족-가 원인이 되어 몸속에 생긴 불편함을 진정시키기 위해 먹는 즐거움을 얼마나 이용하는지 깨닫게 된다. 금식은 육체가 우리의 강력한 결심을 거슬려 강력하고 교묘하게 제멋대로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입증한다. 금식은 생명의 원천이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발견하고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해낸다. 금식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원천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한다(마 4:4). 또한 세상이 알지 못하는 양식을 먹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한다(요 4:32,34). 생명이 음식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도 발견하게 된다(눅 12:33). 불신자에게는 배(stomach)가 神이지만(빌 3:19;롬 16:18), 우리에게는 배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종임도 알게 한다(고전 6:13).
주께서 금식을 축제요, 마음껏 즐기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한 것의 진의를 알게 된다(마 6:16-18). 금식(feast)은 축제(festival)가 되는 힘과 기쁨과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금식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실체에 더 흠뻑 빠져들어 가는 경험이 되고, 의식(사고)과 성격과 잘못된 생각(물질주의)들이 사라진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요청되는 자기부인을 실천하는 중요한 방법이다(마 16:24). 금식할 때 하나님을 마음껏 즐기면서 행복하게 고난을 받는 방법을 배운다. 금식을 체계적인 훈련으로 잘 활용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는 자기들의 자원을 분명하게 끊임없이 의식한다. 모든 종류의 손실을 견딜 수 있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절제력과 자제력을 배양시키기 때문에 모든 근본적인 욕구들에 관해 절제와 자제를 공급한다. 음식이 우리 삶의 포괄적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금식 효과는 인격 전반에 미친다.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젖을 뗀 아이의 만족함을 경험한다(시131:4;딤전 6:6).
금식은 온 힘을 기울여 행해야 실천할 수 있으며, 하나의 훈련으로서 체계적인 금식을 습관화시킨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예배의 일부로서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음식에 대한 부인을 경험하면 하나님의 뜻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만드는 다른 욕망도 부인 할 수 있다. 금식의 목적은 그리스도께 집중하는데 있다. 일주일에 한 끼 부터, 일주일을 채식 만하는 방법까지, 혹은 24시간을 물만 마시는 금식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나중에는 형편과 하나님의 허락에 따라 40일 금식까지 가능해 진다. 금식을 통하여 욕구충족에 의존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재훈련시켜주고, 구체적인 실존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요인이 되게 해준다. 원하는 것을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상태에서 자유하게 하는 기능도 있다. 뭔가 없을 때(뭔가 없을수록) 침착하고 평온하고 강인하게 견디는 법도 배운다. 이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필요를 채우면 전 존재와 아울러 몸을 직접 지탱시켜 주는 능력이 있다(신 8:3-5;마 4:4;요 4:32-34). 금식은 우리를 해방시켜 하나님의 풍성함에 들어가게 해주며, 영혼을 재정비하는데 엄청나게 영향을 미친다. 금식을 잘만하면 비단 음식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욕심과 감정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다.
3)검약 혹은 가난
자신의 욕망, 곧 지위욕, 사치욕,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임의로 돈이나 재물을 사용하는 것을 절제하는 것이다. 검약을 실천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선한 판단에 의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삶에 반드시 필요하고 인정된 것의 범주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치가 행복 추구로 비쳐지는 시대에 성경의 경고를 따르는 것이다(약 5:1;5:5). 영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낭비적 소비가 영혼을 타락하게 만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경배와 섬김을 떨어뜨리고, 이웃에게 상처를 준다. 사치는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범죄이며 사회의 해악을 끼치는 것이다. 훈련으로서의 검약은 숱한 욕망들에 대한 관심과 집착에서 해방시킨다. 검약은 마리아가 택한 한 가지 필요한 , 곧 좋은 편(눅 10:42)에 집중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최고의 자유는 경제적 빚으로 말미암은 영적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사랑의 빚 외에는 어떤 빚도 져서는 안 된다. 사랑을 베푸는 쪽에서는 그것이 선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13:8). 위대하길 원하지만 진정으로 경건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일에 지나치게 큰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삶의 한 양식으로 고정된 검약은 불필요한 일에서 해방시킨다. 검소(simplicity:인간의 행복에 필수적이지 않은 것은 단호하게 물리치고 뚜렷한 목적을 지향하는 삶의 구조를 갖는 것)와 가난(모든 소유를 거부하는 것)은 충분히 검약의 표현이다.
4) 순결(chastity)
타인들과의 관계에서(부부관계까지) 성적인 부분을 적절하게 유지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의 핵심은 성, 성적 감정 및 생각을 자제하는 훈련을 실천하고, 그럼으로 그것들에 지배를 받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결혼한 사람들까지도 스스로 성을 억제함으로 배우자의 성을 그의 전인격의 한 부분으로 보고 감사함과 사랑으로 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전 7장). 이 일은 더 굳세게 성적 갈등 없이 사람들에게 친숙해지는 실천을 행하게 해준다. 순결훈련이 추구하는 주요효과는 전반적인 삶 속에서 성적행위, 감정, 태도, 생각 등을 적절히 다루는 것이다. 진정한 영성은 성이 결코 삶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성은(창 1:27) 선하고 아름다우며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의 한 부분이다. 성은 우리 존재의 본질을 이룬다. 특히 순결의 본질은 정욕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전체가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다. 순결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 직장, 학교, 교회 또는 이웃에서 만나는 성의 사람들의 유익을 먼저 추구해야 한다.
5) 은밀성
자신의 선한 행위와 행적을 알리기를 삼가는 것이다. 훈련이 되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거나 심지어 오해를 받아도 평화와 기쁨과 자신의 의도를 상실하지 않을 수 있다. 신앙의 길을 견고하게 하는데 이 훈련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타인과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체험하게 된다(시 31:20). 칭찬과 비난을 초월하는 사람에게 큰 마음의 평정이 임한다. 칭찬받는다고 더 거룩해지지 않고 비난이나 무시를 받는다고 더 악해지지 않는다. 그저 나 자신일 뿐이다, 하나님이 아신다. 항상 훌륭하게 행동하면서 자신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경건한 영혼의 표시이다. 다른 피조물에 의해 위안을 얻으려 하지 않는 것이 위대한 순결과 내적 신뢰의 표시이다. 자신을 위한 외적 증거를 구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리는 사람이다.
신앙의 큰 오류이면서 가장 큰 불신앙은 영적 행동과 덕성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광고하는 것이다(마 6장). 이것은 신앙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숨기는 것이 불가능한 신앙의 배양은 옳은 일이지만(마 5:14,16) 바르게 실천된 은밀성은 우리의 공적 관계의 장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수중에 놓을 수 있게 해준다. 최고 수준의 은밀성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사랑과 겸손을 가르친다. 그 사랑과 겸손은 우리로 최고의 빛 속에서 동료들을 보게 하고, 심지어 그들이 우리보다 더 낫게 처신하고 더 낫게 보이는 것을 소망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한다(빌 2:3). 전에 맛보지 못했던 사랑의 홍수를 경험하려면 서로 경쟁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이 더 탁월하고 더 칭찬을 받으며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위해 기도해야하고, 그들의 수고와 성공을 즐거워해야 한다.
6) 희생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소유하거나 누리는 것을 삼가는 것이다. 어느 정도 남아도는 것을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의 훈련은 우리 수중에 있는 것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 안에서 어둠의 심연 속에라도 들어갈 정도로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다(히 11:19;눅 21:2-4). 희생은 봉사에 속하는 것 같지만 선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버리사 죽으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훈련에 속한다. 희생의 대가는 실제 거지처럼 살면서도 왕처럼 누리는 영적 만족이다. 자신의 마지막 남은 속옷까지 주신 예수와, 기꺼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포기했던 바울이 그 본보기이다. 희생하고 버리면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린다는 것 때문에 이 일은 어렵지만 웬만해서는 누리지 못하는 행복을 누리게 한다. 특히 예수께서 자신이 누려야할 모든 부귀영화를 거의 누리지 않고 가난하게 살았던 희생과 포기의 삶을 생각하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사는 사람들이 해내지 못할 훈련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 극빈자로 지냈으나 결코 구차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희생했으나 결코 유치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것은 큰 사랑과 자비와 희생의 모본이셨다.
B. 절제훈련은 참여훈련과 균형을 이루어야한다. 또 그것에 의해 보완되어야한다. ‘절제’와 ‘참여’는 영적 생활의 들이쉬는 호흡과 내쉬는 호흡이라 할 수 있다. 절제훈련은 작위죄(作爲罪)를 범하는 성향을 대응하고, 참여훈련은 부작위죄(不作爲罪)를 범하는 성향을 대응하는 것이다.
1)성경연구 및 암송
학습은 훈련의 일부이다. 학습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다. 학습할 때 우리 생각은 학습 대상 안의 질서를 취한다. 그 질서는 생각 자체를 빚고, 그리하여 영혼과 거기서 나오는 삶을 빚는다.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늘 생각 앞에 두면 하나님의 질서가 그의 생각과 영혼 속으로 스며든다. 율법이 내면생활과 외부 활동의 일상적인 틀이 되면서 영혼이 회복된다. 말씀이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움직임에 접붙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경건의 시간보다 더 중요하다.
선택 할 수 있는 자유를, 고독과 침묵과 금식을 실천하면 이 자유가 한층 강화되며, 그럴 때 성경에 보전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생각을 제대로 채울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암송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을 암송하면 늘 말씀을 우리 생각 앞에 둘 수 있다. 그것은 항상 하나님을 우리 앞에 두는 것과 같다(시 16:8,9).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게 된다. 우리가 할 몫은 끊임없이 이 생각을 그분께 돌리고 다시 돌리는 것이다. 나침반 바늘이 정북을 향해 있듯이 새로운 습관을 통하여 그분이 내 존재의 북극성이 된다.
그래서 토라이며 로고스이신 하나님의 생명의 흐름 안에 의식적으로 머무르는 것이 가능해진다. 여호수아 1장 8절은 암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암송을 하면 입으로 중얼거리며 묵상하게 되고, 그러면 행할 수 있으며, 그러면 형통할 수 있게 된다. 내면에 그분을 닮은 성품을 품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걷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 계명은 더 이상 무거운 것이 아니다(요일 5:3). 암송할 수 있다면 고독, 침묵, 금식만이 해답인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신약성경 복음서를 날마다 정성들여 읽고 또 읽어서 그 장면들과 말들을 의도적으로 항상 우리 생각 앞에 두는 것이다. 암송하고, 말과 사상과 상상력을 되살려내고, 이렇게 순간순간 항상 함께 있겠다는 분과 동행하는 것이다. 하루 중에 닥치는 일들은 우리로 깨우쳐주는 하나님 말씀의 임재 안으로 들어온다. 그의 빛 안에서 일상사를 볼 수 있다(시 36:9).
이런 과정의 시작 단계로, 주어진 하루 동안 끊임없이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연습을 하기로 작정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하지만 자신을 닦달하지는 말아야 한다. 꾸준히 하다보면 예수의 인격과 아름다운 말씀들이 저절로 생각을 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좋은 성구를 암송하면 예수님께 집중하는데 탄력이 붙는다(마 5-7장, 고전 13장, 요 14-17장, 골 3장). 이런 말씀들로 생각이 가득차고 언제고 묵상하면 삶 전체가 경건의 시간이 된다(사 26:3). 살아계신 말씀이 생각을 점하면 자연히, 초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영광스러움이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묵상하면, 사랑 안에 있는 자는 언제나 생각이 사랑의 대상에 가 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생각에 황홀하게 취해있다(시 139:18). 이런 식으로 예배의 삶속에 들어간다. 천국의 찬송이 우리 내면생활에 쉬지 않고 실재한다. 예배가 우리 삶의 끊임없는 기저가 된다. 편만하고 빛나는 선(善)을 한 인격 안에 가르치고 인도하고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비전과 거기서 자생적으로 솟아나는 생수의 한 단면이다(요 14:14;7:38). 편만하고 지속적인 평안함과 기쁨이 넘쳐난다(롬 15:13). 영혼이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서적인 깊은 필요들이 채워지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풍성한 특징이 좋은 감정을 만들어낸다(요 15:10,11).
2)예배
하나님을 가치 있는 분으로 보고, 그분에게 위대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계 4:11;5:12,13). 하나님의 활동과 고귀함에 깊이 주목함으로 우리가 찬양하는 선(善)은 우리 정신과 마음속에 들어와 신앙을 성장하게 하고, 그분처럼 튼튼하게 된다. 말씀의 연구는 예배와 찬양의 길을 열어놓으며, 예배할 때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을 말과 생각으로 경험하고 간직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삶을 직접적이고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요인이 된다(사 6:1-13). 예배란 신적인 도움을 받기는 해도 본질상 우리의 몫이며 그러기에 영성훈련이 필요하다. 예배드릴 때 마음과 정신은 그리스도에 대한 경이들로 가득 찬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한다. 즉 우리의 인격에 의해 신격(神格)이 되어 하나님의 신성의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집중의 대상을 자아에서 하나님과 그의 뜻으로 옮기며, 마음에 영감을 주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비전에 맞추는 훈련부터 시작할 수 있다. 특히 음악은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시키는데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된다. 따라서 찬양을 따라 부르는 것, 예배의 기도를 기록하는 것(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지 집중하면서), 교회의 예배에서 마음과 사고와 감정과 몸과 영혼을 다해 드려보는 것으로 훈련할 수 있다.
3)찬양
가장 중요한 훈련 중의 하나이며 예배의 완성이다. 우리에게 나타나신 위대하심을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형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우리의 삶과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의 기사를 찬미하는 것이다(출 15:20; 삿 5장;삼하 6:12-16). 거룩한 기쁨과 즐거움은 절망을 치료하는 해독제이고, 진정한 감사의 원천이다. 발끝에서 허리, 머리끝까지 울려 퍼지는 것, 선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손과 눈과 목소리를 드리는 것이다(신 14:26,27). 인생에서 결코 뿌리 뽑히지 않는 고난과 아픔의 때에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마음에서 우러나서 찬양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건전한 신앙을 수립하거나 유지될 수 없다(욥 1,2장).
4)봉사
다른 사람의 유익을 촉진하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실천하기 위해 재물과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다. 오만, 소유욕, 시기, 분노, 탐심 같은 감정을 포기하는 훈련을 함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봉사 할 수 있는데, 봉사는 영성 생활을 위한 하나의 훈련으로 취해진다. 봉사는 타인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지름길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적합하지만, 또한 영향력, 권세, 지도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더 중요하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종으로 산다는 것은 제자들이 항상 직면하는 커다란 도전중의 하나이다(마 20:25-28). 큰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한다. 크게 된다는 것과 종으로 산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영적 성취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고통 하는 세상에 고대하는 삶의 양식으로서 그것 없이는 결코 고상한 실존을 영위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봉사하는 훈련을 함으로 자기 영혼을 타락시키지 않고서 위대한 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영 안에서 봉사하는 것은 겉치레의 가면을 벗어버리는 겸손의 자유를 제공한다. 봉사는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게 해주며, 나 라는 진흙 덩어리를 선(善)과 필요한 일에 선택적으로 드릴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관통해 흐르며 완전히 해방된 적극적인 사랑의 경험은 영적 생활의 끊임없는 시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준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수중에서 함께 하는 존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확신을 가지고 편안한 마음으로 말이다.
5)기도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질과 양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훈련으로서의 기도는 최상의 기도를 통해 인격이 변화되며, 자주 기도할수록 그만큼 더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다른 확신이 다른 삶의 영역 속으로 넘쳐흐른다. 기도는 쉬지 않고 기도하기를 배울 때라야 영성생활을 강화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기도하는 습관은 은혜로운 상호작용에서 확고하게 되고, 전 생애는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하게 된다. 기도는 고독, 금식과 같은 다른 훈련과 병행되어야 삶의 뿌리를 내린다. 기도를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이 아니라 영적 풍요로움에 이르게 하려면 기도를 더 깊이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6)교제
생명을 나누어 가고 있는 사람들과 다른 사람과의 정규적인 깊은 결합을 이루는 것이다(고전12:7-11). 교제는 친밀한 관계를 나누는 단계에서 주로 행해지는 일로서, 마음으로부터 물질과 기도와 은사와 재능과 시간과 삶의 모든 영역을 나누는 것으로 확대된다. 이 나눔은 자신의 내면의 영역을 확장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치를 주는데 기여한다. 이 교제는 성삼위 하나님과의 교제가 기본이 되어, 그와 우리와의 교제로 이어지며, 이러한 긴밀한 내면의 힘은 피차 격의 없는 나눔의 장이 된다. 이를 통하여 이기심을 극복하고, 사랑의 상호교환을 실천하며, 인격의 변화를 가져오는 성숙의 도구로 활용된다.
7)죄 고백
교제의 범주 중에서 이루어지는 훈련으로서, 형제자매들 앞에서 죄를 토로하고 용서의 기쁨을 나누는 것이다. 특히 교제의 모임을 통하여 우리 참모습을 알려주며, 중요한 것을 하나도 감추지 않으며, 이상적으로 완전한 투명성을 허락한다.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는다. 여기서의 죄 고백은 우리로 죄를 피하는데 도움을 준다(잠 28:13). 죄 고백은 나쁜 평판을 만들고, 나쁜 평판은 친숙한 사람의 관계를 어렵게 할 수 있지만, 친밀성과 죄 고백은 죄를 범하지 않게 한다. 개방된 진실성 이상으로 온전한 행위를 지원하는 것은 없다. 성숙하거나 능력 있는 사람과의 죄고백은 지극히 도움이 된다. 죄 고백만으로 깊은 관계를 이룰 수 있으나, 그것이 없으면 교회 관계 속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피상적 교제에 그치고 만다. 교제 속에서 죄 고백이 가능하므로, 이 두 훈련 사이에는 본질적인 상호관계가 있다. 죄고백을 했으면 죄에 대한 보상이 따라야 한다. 보상도 강한 훈련이다. 자신의 본연의 고결함, 곧 우리 인격 속에 존재하는 세력이 이러한 보상을 요청한다. 죄 고백이 가장 강력한 영성훈련 중의 하나이지만 쉽게 악용될 수 있으므로, 효과적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개인 당사자나 최종적 훈련으로 인도해주는 모임의 지도자 모두에게 상당한 경험과 성숙함이 필요하다.
8)순종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피차 순종하는 것이다. 교제의 최상의 수준이다. 겸손, 완전한 정직, 투명성, 때때로 죄고백과 보상은 순종의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유지된다. 예수의 길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호 순종할 것을 가르친다(엡 5:21;빌 2:3). 그러나 순종은 깊은 경험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를 닮았기 때문에, 즉 그리스도의 길에 있어서 선배가 되기 때문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인정된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는 참다운 순종은 모든 인간관계의 꽃이며, 그만큼 향기롭고 아름다운 일이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인격이 되는 것이다. 훈련을 통한 순종의 길은 누구에게나 굽히지 않는 신앙적 소신으로 누구에게나 굽힐 줄 아는(순종) 미덕을 만들어 낸다.
이상의 자세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제자훈련에 따르는 영성훈련’이라는 실제적인 훈련의 마당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영성훈련만이라도 제자의 바탕이 되어야 가르쳐 지킴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이 실제 가능해 질 수 있을 것이다. 끝도 없이 시간을 두고 제자훈련을 해대도 해답이 없는 사람들에게 영성훈련은 훌륭한 답이 될 수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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