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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교 영성(Christian Spirituality)

하나님아들 2015. 5. 4. 23:26

기독교 영성(Christian Spirituality)

 

 

 

크리스천의 지상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전도와 선교이다.  그러나 전도와 선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영성 발달(spirituality development)이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 3:18에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명령한다.  여기 “자라가라”는 명령은 바로 영성발달을 촉구하는 명령이다.  왜 이런 명령을 하였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성품은 저절로 발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잡초는 저절로 자라지만, 곡식이나 채소는 저절로 자라지 않는 것과 같다.  로마의 네로 황제의 박해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크리스천들을 향하여 영적으로 “자라가라”고 명령한 것을 보면, 영성 발달은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진 아주 중대한 명령임이 분명하다.  

  

전도와 선교는 크리스천 개개인과 교회가 밖을 향하여 수행해야할 외적 차원의 명령이고, 영성발달은 크리스천 개개인과 교회가 내부적으로 수행해야할 내적 차원의 명령이다.  모든 크리스천은 이 두 가지 명령을 동시에 받고 있다.  교회는 전도와 선교를 통하여 양적으로 성장함과 동시에 영성발달을 통하여 질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에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심지어 교회 문제들을 세상 법정으로 끌고가는 일이 허다하다.  왜 그런가?  성도들이 윤리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가?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수많은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윤리적인 가르침을 주어왔고 지금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윤리를 알지만 그러한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연고이다.   

그러므로 영성발달은 크리스천이 세상에 빛을 발하면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영성발달은 오늘 모든 크리스천 개개인과 교회 전체가 힘써야할 지상 과제임이 분명하다.   

 

본 강의는 권택조 교수의 <영성 발달>이란 책을 주요 자료로 하여, 영성이 무엇인가 그 개념을 밝히고, 그러한 개념을 근거로 하여 영성발달의 모델을 제시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성 발달의 모델을 각 개인과 교회의 삶 속에 적용할 때, 교회와 가정 및 사회 속에서 성숙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본다.

 

 

제 1장 영성(Spirituality)의 개념A. 영성에 대한 다각적 고찰  

 

거의 모든 종교는 영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종교마다 영성의 의미가 다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연구하려는 영성은 기독교적 영성이다.

 

1. <영성>에 대한 역사적 고찰

 

기독교의 영성은 구약성경의 유대주의적 토양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바로 유대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영성은, 자연을 관찰하며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명상을 토대로 하여 형성된 것이 아니고, 역사적 사건 속에서 태어나고 발달한 것이다.    

교회사적 면에서 “영성”(spirituality)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영국교회에서 인데, 영성을 성직자단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18세기 이전까지는 <영성>과 동일한 성경적 용어를 발견치 못하였고 그 개념을 신학적으로 정립하지도 못하였다.  20세기에 와서야 학자들은 영성에 대한 정의를 내리게 되었는데, 영성을 한 인간 전체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개념으로 정의하였다.  영성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는가를 교회사적으로약간 살펴보면 이러하다. 

   

(1) 오리겐(Origen, 185-254)은 “순교야말로 영성발달의 최고봉”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렇게 확신한 것은, 자기의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고 있는 모습 속에서 영성발달의 극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리겐과 같은 교대 교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동방교회의 영성은 하나님과 연합되어 인간도 신성화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즉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로 神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을 영성 발달로 보았다.

 

(2) 어거스틴(Augustine, 354-403)은 인간이 신성화된다는 동방교회의 교리를 반대한 자로서, 인간은 겸허한 자세로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고백을 통하여 영성을 발달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3)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540-604)는 중세 초기의 영성발달의 아버지라 불리운 자로서, 수도원 제도를 체계화시키고,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4) 12세기와 13세기는 영성이나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기이었다.  수도하는 수도승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많은 영적인 글들과 문학 작품들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13세기에는 신학의 권좌가 수도원에서 대학으로 옮겨졌다.  수도원을 중심한 명상적 영성에서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적 영성으로 옮겨짐으로서, 명상 중심의 영성과 학문 중심의 신학적 영성이 서로 합쳐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신학이 대학을 중심으로 하여 학문적 수련의 분야로 발달해감에 따라, 신학과 영성이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분리는 중세 말에 와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고, 근대에 접어들면서는 당연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기에 심리학이 영적 명상의 분야에 접목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기 이전이나 전환기에 수도자들은 영성적 신학 혹은 신학적 영성을 시도하였다. 문예부흥이 일어나기 직전에 유럽에는 이탈리아의 은둔자들로 구성된 <어거스틴 수도회>가 있었는데, 이 수도회는 성 어거스틴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규칙은 성경에 뿌리를 둔 영적 삶의 규범으로 카리타스(caritas)라는 개념에 기준을 두었는데, 카리타스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5) 14세기에서 15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르네상스(Renaissance) 곧 인문주의운동은, 영성과 관계없는 비종교적 색채가 짙은 운동같지만, 사실은 기독교적 영성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인문주의 교육의 방향이 인식론과 인류학 쪽으로 많이 발달하게 되었고, 따라서 영성의 성격도 전(前) 세기처럼 지나치게 知性으로 치우치지 않고  복음주의적 영성을 많이 포함하게 되었다.  르네상스 운동가들은, 기독교적 영성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 속에서 보았다.

 

(6) 종교개혁시대의 영성은 루터와 칼빈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루터는 칭의의 수단으로 믿음을 강조하였는데, 그렇다고 그가 선행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크신 선물인 이상, 그런 선물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루터는 선행의 대상은 이웃이 필요로하는 것들이라고 강조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선행의 최고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의 영성에 대한 개념은 타자중심적인 삶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의 영성은 문예부흥의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 체험에서 영향 받아 이루어졌다고 본다.  당시 로마 카토릭교회가 인간은 선행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었으며, 칼빈의 영성 운동은 이 같은 당시의 부패한 종교사회를 재건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칼빈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메움에 있어, 인간성의 제한 때문에 불가불 하나님 편에서의 우선적인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인간이 믿음으로 동참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믿음에 따른 행동이야말로 신앙의 궁극적 척도가 된다고 강조하였다.  

 

칼빈신학의 초점은, 신자는 수도원에서 명상만 하고 실생활은 소극적 부정적 태도를 취하지 말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데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칼빈의 영성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고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라는 입장에 섰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영국 국교인 성공회(Anglican Church)의 목사로 살다가 죽었지만, 사실은 감리교의 창시자이다.  웨슬리는 그의 형제 찰스(Charles)와 더불어 찬송가를 개발하고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속회제도를 개발하였다.  그는 영성 발달을 위하여 설교와 찬송 그리고 교육을 중요시하였다.

 

휫필드(Whitefield, 1714-1770)와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1703-1758)는 다 같이 교육을 통한 영성 발달에 초점을 맞춘 사람들이다. 아우만(Aumann)에 의하면, 기독교 역사의 전 과정을 통하여 공통적으로 강조된 크리스천의 삶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는 데 있었다고 한다.  기독교의 영성은, 神學이라는 학문 속에만 갇혀 있어서도 안되고, 반면 신학을 멀리 떠난 채, 개개인의 일상생활 속에만 존재하는 개인적 신비주의의 영역에 국한되어서도 안 된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하여 형성된 영성은, 말씀과 실천이 공존하는 상태에서 발달하였다.  즉 성경에 기반을 둔 신학적 이론과 주장이 크리스천의 삶 속에 절대적 가치로 심어질 때,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여 개개인의 생활 속에서 기독교 윤리가 실천된다는 것이다.

 

2. 영성에 대한 교단적 시각

 

(1) 투터교단(The Lutheran)의 시각 - 칭의중심적 영성 

     

루터교단은 도덕성과 영성을 크게 구분짓는다.  도덕적인 삶(시민적인 義)은 옛 사람이 이 세상에서 노력하여 얻는 품성인 반면, 영성은 옛 사람이 죽고, 성령의 지배아래 있는 새사람이 살아 활동함으로써 형성되는 품성이라고 본다.  

 

루터는 칭의 속에 성화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거룩하게 되려고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 성취되는 모든 의나 거룩은 자기 거룩이요 자기 의(self-righteousness)이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진정한 의미의 義와 거룩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므로 루터가 보는 성화는 칭의중심적 영성이다.

 

(2) 개혁교단(The Reformed)의 시각 - 성화중심적 영성  

     

개혁주의신학은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성화중심적 영성을 말한다. 영성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영성이 발달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 속에 결핍된 영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성을 우리가 어떻게 보충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드림으로써만 가능하다.  

 

(3) 웨슬리교단(The Wesleyan)의 시각 - 칭의와 성화중심의 영성

 

루터와 같이 웨슬리도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웨슬리는 루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은혜를 통해서 됨과 동시에 또한 성화되는 것도 은혜로 된다고 본다.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성화는 인간의 노력으로 된다는 입장을 반대한다.  구원이나 성화나 모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웨슬리가 보는 영성은, 중생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은 것을 내재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계속하여 이루어가는 과정이다.  웨슬리는 성화의 경험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데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웨슬리 교단이 보는 영성은 칭의와 성화 중심의 영성이라고 볼 수 있다.  

 

(4) 오순절교단(The Pentecostal)의 시각 - 능력 중심의 영성  

     

오순절교단의 영성은, 성령의 역사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헌신하는 크리스천 개개인이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의 지배를 받아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사는 것에 큰 관심을 둔다.  방언은 기본적인 성령의 은사이고, 방언 외에도 몇 가지 은사들 곧 치유의 은사, 지식의 은사, 지혜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 등을 받아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데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오순절교단에서 말하는 <영성> 혹은 <영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한 개인의 인격적 자질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이 교단의 영성은 능력 중심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5) 묵상주의교단(The Contemplative)의 시각 - 묵상중심의 영성 

      

기독교 역사의 초창기 몇 세기동안 묵상주의자들은 크리스천의 궁극적 목적을 하나님과의 결합(union with God)에 두었다.  세속을 떠나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영적인 것을 받음으로 성화의 단계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러한 교제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 바로 <묵상>이었다.  다른 교단들이 보았을 때 인간적인 노력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묵상주의자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영성을 발달시키려는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많은 개신교들은 묵상주의 전통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힌슨(Hinson)은 말한다.  힌슨에 의하면 묵상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이미 인간을 위하여 모든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의 마음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은혜의 에너지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냥 묵상만 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알고, 안 진리를 느끼고, 알고 느낀 바를 실천에 옮김으로써 영성 발달의 균형을 맞추려고 시도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공통으로 강조한 것은, 믿음,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성령이다.  영성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3. 영성에 대한 학자들의 시각  

 

영성에 관한 연구를 한 미국의 대표적인 학자들 8명의 견해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960년대부터 연대순으로 생각해 본다.

  

(1) 쌘더스(Oswald Sanders)의 시각

 

 

그는 산상보훈(마5:1-11)에 근거하여 영성의 차원을 8가지로 나누었다:

첫째는 겸손이다(“심령이 가난한 자”5:3). 자기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상태이다.  

둘째는 애통이다(5:4). 순수한 마음으로 죄를 슬퍼하며 돌이키는 상태.        

셋째는 온유이다(5:5). 자기 고집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이다.

넷째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이다(5:6).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마음이 간절한 상태이다.  

다섯째는 긍휼이 여기는 것이다(5:7). 남을 비판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정신이다.  

여섯째는 마음이 청결한 것이다(5:8). 어떤 일을 하는 동기나 상상이나 사고가 깨끗한 상태이다.  

일곱째는 화평케 하는 것이다(5:9). 다른 사람을 섬기는 정신을 가지고 문제가 있을 때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상태이다.

여덟 번째는 의를 위하여 핍박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5:10-11).  어떤 어려움이 와도 흔들이지 않고 용기백배하여 주님께 충성하는 정신이다.  

Sanders가 주장하는 영성의 개념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갖는 내적 자질을 의미하며 동시에 타자중심적인 삶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2) 핑크(Arthur Pink)의 시각

 

그는 다음과 같은 5가지 기본적인 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영적 성숙도를 측정해야 한다고 한다.  

첫째는 영적 지식의 증가.  

둘째는 영적인 일에 대한 참된 기쁨.  

셋째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함.  

넷째는 신앙의 강화와 확대.  그리고

다섯째는 개인적 경건의 증대이다.    

이와 같이 그는 영적 성숙도의 차원을 논할 때, 하나님을 아는 것 즉 인지적 영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즉 정서적 영역,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 즉 행위적 영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3) 카터(John Carter)의 시각

 

그는 영적 성숙의 단계를 일곱으로 나누었다. 즉

ㄱ) 자신과 타인과 세계를 영적 시각에서 감지하는 단계  

ㄴ) 자신과 타인을 받아들이는 단계  

ㄷ) 인생의 목표를 멀리 두고 현재를 살아가는 단계

ㄹ) 자신이 선택한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단계  

ㅁ)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능력과 취미를 발달시키는 단계  

ㅂ) 자아실현의 단계  

ㅅ)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단계이다.  

그리고 카터는 “성경이 제시하는 성숙한 크리스천이란 그의 생각과 신앙과 동기와 느낌 그리고 태도와 행위가 서로 지속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그런 것들이 성경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는 심리적 성숙과 영적 성숙이 결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영성이 발달한 사람은 자신의 내면적 자아와 외면적 자아가 조화를 이루는 중에 자신의 능력과 가치와 취미를 개발하고 사용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볼 때, 영성은 인격과 동떨어진 특수한 요소가 아니고 인격 속에 묻혀서 개발되어야 하는 전인적(holistic) 개념이 되어야 한다.

  

(4) 윗체른(Frank Wichern)의 시각

 

 

그는 [딤전 3:1-7]과 [디도서 1:5-9]에 근거하여 영성발달은 어디까지나 영적 지도력의 정도에 의하여 평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영적 지도력이 훌륭한 사람은 영성이 발달한 사람이라는 논리는 무리 없이 성립된다고 보지만, 그러나 영성이 발달한 사람은 누구나 다 영적 지도력이 뛰어나다는 논리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5) 리차드(Lawrence Richards)의 시각

 

그는 영성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타자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으로 정의한다.  영성은 물질적 세계를 배제하지 않으며, 참된 영성은 신자의 전인적 삶과 체험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이 곧 영적인 삶이다.  그는 또 이렇데 말 한다: 아무리 타인을 위해 산다고 해도 성령의 개입이 없으면 영성이 아니며, 아무리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처럼 보여도 자신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참된 영성은 아니다.

 

(6) 벤너(David Benner)의 시각

 

그는 영성발달을 이해함에 있어서, 심리학적 차원과 영적 차원을 하나님을 중심으로 통합한 통합적 방법론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영성을 설명하기 위해 “심리영성”(psycho-spirituality)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삶과 경험은 결국 심리적 차원과 영적 차원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성숙한 것과 인격적으로 성숙한 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그 이전에 반드시 심리적 혹은 인격적으로 성숙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심리적 혹은 인격적으로 성숙하면 자동적으로 영적 성장이 따라온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영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은 심리적 인격적 차원의 성숙도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영성발달은 심리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에서 동시에 시도가 되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심리학과 신학의 통합적 접근이 영성발달 연구에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7) 엘리슨(Craig Ellison)의 시각

 

그에 의하면, 인간은 전인적 존재(a holistic being)이기 때문에, 인간의 영성을 논할 때에 신학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차원에서도 논의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의 영적 성장이나 영적 성숙은, 인간의 어떤 한 부분만 볼 것이 아니고, 전 인격을 통합한 전체적 조직체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된 영성은 삶의 현장을 떠난 어떤 특수한 영적 현상에만 중심을 둔 개인적 영적 독백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영성은 한 인간의 인격 전체가 인격자이신 하나님과 근본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삶 자체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이해한 참된 영성은,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한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의 한 과정이다.  

(8) 맬로니(Newton Malony)

 

그는 성숙이라는 개념을 전인적 차원에서 다룬다. 그래서 영적인 차원의 삶은 인간의 총체적 삶에서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성숙한 크리스천을 “자기정체성과 성실성 및 영적 감화를 지니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성숙한 영성은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 나타나는 거룩한 전인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영성은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교제에 근거한 자기 정체성, 성실성, 영적 감화, 적합성 등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인지적(cognitive), 정서적(affective), 행위적(behavior!!!al) 영역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이상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을 요약하면, 영성이란 한 개인이 하나님과 타인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의 총체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쌘더스와 엘리슨은 과정을 중요시하였고, 카터와 벤너와 엘리슨과 멜로니는 삶의 총체성 혹은 전인성을 강조하였고, 그리고 샌더스, 카터, 윗체른, 엘리슨, 멜로니 등은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인간과의 관계를 중요시하였다.  그리고 위의 모든 학자들은, 영성을 발달시킴에 있어, 성령의 역사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4. 영성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고찰

 

영성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용어들로서, 성경적 신학적 개념을 지니고 있는 주요 단어들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1) 경건(godliness)

 

“경건”이라는 헬라어는 <유세베이아 ευσεβεια> 라고 하며, 이 말은 <ευ(잘,좋게 well) + σεβω(예배하다 to worship)>의 합성어로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예배를 드린다’‘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하여 예배를 드린다’ ‘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등의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볼 때, 유세베이아는 영성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그 이유는 영성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2) 온전함(perfection)

 

“온전함”이란 헬라어는 τελειο?이며, 이 말은 ‘온전히 자람’ ‘성숙함’, ‘최종적 단계까지 발전함’ 등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영성이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의 과정이며 그 과정의 최종 단계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이 “온전함”이란 용어는 영성과 관계된 말이 분명하다.    

 

(3) 거룩함(holiness)

 

“거룩”은 영성과 가장 가까운 낱말 중의 하나다. 멜로니(Malony)라는 학자는, 영성이란 크리스천의 삶 속에서 거룩이 밖으로 나타나는 과정이라고 한다.   “거룩한”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 이며. 헬라어로는 αγιο? 라 하는데, 이 두 용어는 모두 “분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세속적인 것에서 분리되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거룩이며, 자기중심에서 분리되어 타자중심이 되는 것이 거룩 이다.  

사도 바울은 롬12:1-2 에서 거룩한 삶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 곧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거룩이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음속에서나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성품과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성이 발달한 사람일수록 더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4) 성화(sanctification)

 

성화란 성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그 분의 뜻을 땅위에서 실현해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성화는 구약보다 신약이 더 강조하고 있지만 그 뿌리는 구약에 두고 있다.  구약의 원어인 히브리어에 <카도쉬 ????>라는 말이 있는데, 성화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카도쉬는 <거룩한> 이란 말로서 세속적인 죄의 속성에서 분리되어 하나님과 연합한 상태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사셨지만 죄는 없는 분이셨다.  예수님은 죄가 뿌리박힌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삶 곧 성화의 삶을 사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성화 자체이시며, 우리는 그 분을 목표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5) 의(義 righteousness)

 

이 말은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υνη)라고 하는데, 그 신학적 의미는 관계적 개념을 가진다.  즉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올바로 가질 때에 그것이 의로운 삶이 된다는 것이다.  관계가 좋다는 것은 곧 의롭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으며, 반면 관계가 나쁘다는 것은 곧 불의하다는 개념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나심으로부터 하나님과 완벽한 관계 속에 계셨고,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심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완벽하게 맺으셨고,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하였다.  

 

그래서 그 분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를 이루는 의로운 삶을 사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같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으심으로 의로운 삶을 사신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고 사는 것이 의로운 삶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경건, 온전함, 거룩, 성화, 의(義) 등의 개념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관계적 개념이다.  즉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및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이다.  영성은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개념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5. 영성과 도덕성(Spirituality and Morality)

 

영성과 도덕성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비도덕적인 영성은 전혀 기독교적 영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매우 도적적인 존재로서 거룩하신 분이시다.  기독교는 도덕을 지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지만, 그렇다고 비도덕적 구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드림으로 얻게 되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도덕적인 삶을 산다.

    

영성이 없는 도덕성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이나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영적이라고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가 없는 도덕성의 열매는 영성이 아니고 자기의(self-righteousness)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 영성은 도덕성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크리스천들이 도덕적으로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에게 있어 도덕성은 성령 충만의 과정에서 열매로 맺어진다.  그렇게 때문에 크리스천의 도덕성은 곧 영성을 형성한다.  인간이 선을 행할 때, 성령이 역사하였다면 그것은 영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한 자연인의 도덕성은 영성과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영성은 하나님과의 성경적 관계를 맺어야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크리스천에게만 해당되는 용어이다.  도덕성은 영성 발달에서 계속 강조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비도덕적인 영성은 기독교적 영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B. 영성과 자아(spirituality and self)   

 

영성이란 하나의 자아가 하나님과의 관계 및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자아>에 대한 개념을 종교적, 심리학적, 성경적 관점에서 연구한 다음 자긍심(self-esteem)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1. 자아에 대한 종교적 시각    

 

<자아>에 대한 종교적 개념은 아주 부정적이다.  자아는 환각적이며 모든 문제와 고통의 근원이며 저주스런 존재라고 본다.  자아에 대한 이같은 부정적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어느 종교에나 흔히 있는 현상이다.  이슬람교도들은 자아를 영성발달의 장애물이라고 본다.  영국의 기독교 신비주의(British Christian mystics)는 영성이 발달하려면 자아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한다.  동양종교들은 자아를 환각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영적 훈련에서 자아로부터 해방되는 운동은 대단히 중요시된다. 세계 여러 종교들은, 근본적인 교리는 서로 크게 다르지만, 자아를 탈피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동의하고 있다.  

 

2. 자아에 대한 심리학적 시각  

    

하바드 대학의 심리학자인 다니엘 골맨(Daniel Goleman)은 인간의 심리를 탐구함에 있어서 <자아인식>(self-awareness)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였다.  <자아>가 무엇인가를 놓고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철학자들은, 인간을 물질적 요소(육신)와 비물질적 요소(영혼)로 구성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인간에게 <본질적 자아>가 있는 것으로 보았는데, 아마도 이것은 <영혼>이 있다는 신학자들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듀이(John Dewey,1887)와 제임스(William James, 1890) 같은 사람들은 <자아>(self)와 비슷한 개념으로 <영혼>(soul)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1) 기능주의의 시각     

    

기능주의는 사람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보다는 그 지식을 얼마나 행동화하느냐는 쪽에 더 관심을 가진다. 즉 지식이 활동으로 기능화되어야 한다는 쪽에 더 무게를 둔다.  기능주의 심리학의 대표자들인 듀이와 제임스의 자아에 대한 개념을 살펴본다. 듀이(John Sewey, 1887)는 <정신의 의식적 활동>을 3가지로 분류하였는데, 그것은 인지적인(cognitive) 의식과 정서적인(emotional) 의식과 의지적인(volitional) 의식이다.  정서적 의식은, 3가지 영역 중에서 <자긍심 self-esteem>에 가장 관계가 깊은 것으로, 이것을 "감정의 주관적 상태" 혹은 "정신의 정서"라고 하였다.  모든 느낌은 이와같은 <자아 혹은 영혼>의 활동을 동반하며 그와 같은 느낌은 자아가 가지고 있는 최근의 의식이다.  

제임스(William James, 1890)는 자아를 두가지 모습을 지닌 실체로 보았다.  그는 경험적으로 알려진 객체로서의 자아를 <me>라고 불렀고, 주관적인 존재로서의 자아를 <I > 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me>를 나누어 “물질적 나”(material me), “사회적인 나”(social me), “영적인 나”(spiritual m)라고 칭하였다.   <물질적 나>는 몸과 가족과 소유물을 포함하고 있으며, <사회적인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받아들이는 자아 인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한 인간은 여러 가지 사회적 자아를 소유할 수 있다고 본다.  다른 사람들이 각기 나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들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나에게는 여러 가지 사회적 나가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영적인 나>는 나의 의식의 상태와 심리적 기능과 기질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제임스가 이해하는 자아 개념은, 인간의 어떤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개인 자체 안에서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통합된 전인적 존재이다.

 

(2) 상호작용주의(interactionism)의 시각

 

상호작용주의는 자아를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아와 사회 환경의 상호작용이라는 심리학적 입장을 말한다.  쿨리(C.H.Coolley, 1964)는 제임스의 <사회적 나>(social me)에 관심을 두고, 일상적인 관찰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경험적 자아>(empirical self)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거울에 반사된 자아>(reflected or looking-glass self)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자신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나타날 것인가에 대한 상상과 이런 상상에 대한 자아 감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쿨리는 자아개념을 3가지 요소로 분류하였는데, 그 3가지 요소는  

1)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대한 상상과  

2 )이와같은 상상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판단  그리고  

3)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판단한다는 생각 속에서 나오는 자긍심이나 열등감과 같은 자기 느낌이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나를 좋게 상상하는 대로 판단한다고 느껴지면 <자긍심>이 생길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내가 나를 좋게 상상하는 만큼 나를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열등감>이 생긴다.   이와 같은 <사회적 나>의 개념은 어린아이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이렇게 보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저렇게 보인다는 것을 배우는 중에,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 대한 인식을 가지면서 발달한다.  이와 같은 <자아감정>(self-feeling)은 사춘기에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자아감정은 일생동안 두고두고 나타나며, 이 감정은 자신에 대한 상상력의 중심이 되고 무슨 일을 열심히 하도록 자극하는 역할도 한다.  쿨리의 <자아 개념>은 영성 발달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성발달의 주체는 자아인데, 바로 그 자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 안에 있는 자아이기 때문에, 영성발달에서 타인과의 관계는 아주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자아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발전될 수 없다.  더구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영성발달의 주체로서의 자아는 있을 수가 없다.  영성발달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잘 맺어가는 중에 이루어지는 삶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미드(G.H. Mead, 1934)는 자아의 발달에 대한 가장 조직적인 학설을 확립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강하게 주장하기를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들을 배출한 사회적 구조의 반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회의 한 맴버로 살 때에만 진정한 자아를 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각 개인의 개성(personality)이 이루어지며, 이와 같은 내면화된 태도들이 모여서 소위 한 개인의 인격(character)이 형성된다고 한다. 

  

(3)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의 시각

 

정신분석학은 자아는 의식적인(conscious) 면과 전의식적인(preconscious) 면과 잠재의식적인(unconscious) 면을 모두 다 가지고 있다고 본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는 프로이드(Sigmund Freud, 1923)인데, 그는 의식으로 향하는 정신적 과정과 무의식으로 향하는 정신적 과정을 분리하였다. 그의 주된 관심은 무의식(unconsiousness)인데, 무의식은 자기 자신을 본능이나 충동을 통해서 나타낸다고 한다.  그는 한 인간의 상식적인 측면인 이성적 기능을 <자아>(ego)라고 불렀는데, 이 자아는 본능을 통제하려고 힘쓴다고 하였다.  초기 아동기에 나타나는 <성적 쾌락에 대한 무의식적 자기책망>은 성인이 되면서 <이상적 자아>(ego ideal)가 발달하도록 도움을 주며, 이 이상적 자아를 그는 <초자아>(Super-Ego)라고 불렀다.  높은 수준의 가치를 추구하는 힘이 이 초자아에서 나온다고 본다.  

 

<자아>(Ego)가 이상적인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자책감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신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염원하는 쪽으로 이끌어간다고 본다.  어린아이 때에는 부모의 영향을 받아 자아가 발달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그 역할은 선생이나 권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옮겨간다. 권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금지사항들은 이상적 자아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양심>이라는 형태로 존재하면서 계속하여 도덕적 감각을 발전시킨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의 이론에 의하면, 부모가 아이에게 충동을 억제하라는 요구를 강하게 하면 할수록 그 아이의 <초자아>는 더욱 강화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초자아>의 말을 듣지 않고 <자아>가 충동대로 행동했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 죄책감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사용되는 또 하나의 용어가 <이드>(Id)인데, 이것은 본능적 충동을 말한다.  <초자아>는 자아를 도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 이드>는 자아를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도록 이끌어간다.  그래서 어떤 자아가 초자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 가치있는 행동을 하게 되고, 본능(Id)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도 이 같은 이론을 말하였다(롬7:19-25).  

 

<자긍심>(self-esteem)이라는 현대 심리학적 개념의 뿌리는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도록 몰고 가는 힘(drive)을 프로이드는 <억압되었던 성적인 힘>이라고 했는데, 그의 제자였던 아들러(Alfred Adler)는 모든 인간의 행동 뒤에 있는 기본적인 힘은 <열등감을 우월감 혹은 완전감으로 바꾸려는 노력>이라고 하였다. 프로이드나 아들러나 모두,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는 데에는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는 <이상적 자아>(self-ideal)이며, 이것은 자신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상태로 존재한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아들러에 의하면, 어떤 개인도 사회적인 맥락과 사회적인 관계성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고 한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사회적인 존재이다.  태어나는 자체가 부부라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회적 결합에 의한 결과이며, 태어나는 과정에서 그 아이는 산부인과 의사와 간호사들을 접하게 된다.  집에 돌아오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이웃을 접하게 되고,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과 학우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게 되며, 더욱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사회생활을 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임이 분명하다. 

 

영성발달은 하나님과의 관계발달이며 동시에 인간과의 관계발달이다.그러므로 영성발달은 자아의 사회적 관계를 떠날 수 없다.  아들러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 행동의 동기는 열등감을 우월감 혹은 완전감으로 바꾸려는 노력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부족한 데서 풍족한 곳으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노력을 하며 사는 존재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와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성향을 선용하여 인간에게 부여된 최고의 기준인 성경적 가치를 성령의 조명을 받아 가르치고 이끌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통해 소위 초자아를 발전시켜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며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성발달의 과제이다.

 

프롬(Erich Fromm, 1947)은 <자애>(self-love)를 강조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인간이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의 기본적인 힘을 <자아실현>(self-fulfillment)으로 본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사랑>이나 <자기 관심>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과 반대개념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주장은 루터나 칼빈이나 칸트와 같은 사람들의 의견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사랑과 타인사랑은 양자택일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프롬은 주장하기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듯이 자아도 사랑해야 하며, 이렇게 할 때 자아가 인정을 받게 되고 창의력도 길러진다고 본다.  자아에 대한 사랑을 수용함으로써 행복과 성장과 자유가 흘러나온다고 보며, 자아사랑은 타인 사랑의 능력을 길러준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프롬이 말하는 <자기사랑>은 <이기주의>(selfishness)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사실에 있어 이기적인 사람은 자아를 사랑하지 못하며 자아를 미워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타인을 사랑할 수도 없게 된다.    

 

(4) 행동주의(behavior!!!ism)의 시각

 

행동주의 심리학의 창시자인 왓슨(John Watson, 1925)은 <자아>라는 것은 <영혼>이라고 하는 진부한 개념의 흔적에 불과하다면서 그것을 부인하였다. 그는 또한 정신, 의식, 느낌 등과 같은 개념도 무시하였다.  그 이유는 그러한 개념들은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리학자들은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키너(B.F. Skinner, 1971)도 자아의 비과학적인 개념을 부인하였다.  이와 같이 행동주의가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만을 강조하면서, < 주관적 자아>(subj ective self)를 배척하였는데, 이것이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 심리학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을 고도로 진화되었으며 진화되어가고 있는 동물로 본다.  그들은 학생을 중성적 인간 동물(neutral human animal)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훈련과 조작과 통계를 통하여 의도하는 대로 만들 수 있는 존재로 본다.

 

(5) 현상학적 심리학(phenomenological psychology)

 

현상학적 심리학의 대상은 현상적 세계이며, 이 현상적 세계는 한 개인이 보는 바대로의 실재(reality)로 구성된다.  현상적 연구는 어떤 특수한 체험이 그 사람에게 어떤 가치가 있으며, 그 체험이 과연 그 개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자 한다.  현상학적 심리학자는, 언어적 행동과 비언어적 행동에 의존하여 연구하며, 어떤 주체의 의식적 경험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의식적 과정과 같은 비현상적인 것들보다는 현상적인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연구한다.   사람은 자기인식의 경험과 물질적 세계를 통하여 얻은 경험을 통하여 배워,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자아개념과 일치하는 한도에서 어떤 지각 대상을 받아들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개념>은 중요한 사람들과의 경험을 통하여 학습된다고 본다는 것이다.  

  

(6 )인간주의적 심리학(humanistic psychology) 

 

1950년대에 인간주의적 심리학이 한 학파로 출현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들은 매슬로(Maslow), 주라드(Jourard), 로저스(Rogers) 등이다.   인간주의는 모든 감각과 경험의 주체가 되는 한 개인의 특질 즉 개성(personhood)을 중요시한다. 로저스(Carl Rogers, 1959)는 그의 인격이론에서 <긍정적 자아 존중>(positive self regard)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자아가 건전한 방향으로 기능을 발휘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어떤 어린아이가 자기 주위에 있는 중요한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대우를 받고 칭찬도 받으며 상을 받을 때에 그는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을 체험하게 된다.  어린아이 때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런 무조건적 존중을 경험하게 되면, 긍정적 자아개념을 갖게 되며, 이렇게 되면 자아에 대한 긍정적 태도가 형성되어, 타인들이 자기를 어떻게 대하든 크게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고 본다.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행동주의는 예외이지만, 자아에 대한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의 시각에 따르면, 기독교교육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가 자아에 영향을 끼쳐 영성발달을 도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여지를 넓게 제공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3. 자아에 대한 성경적 시각   

 

성경이 말하는 <자아>는 두 가지 형태의 자아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인간 속에 있는 이런 이중적 자아를 가리켜 <옛 사람>(the old man)과 <새사람>(the new man)이라고 하였다.  정신분석학적인 주장과 비교하면, 옛사람은 <이드>(Id)와 결합하여 행동하는 자아(Ego)이고, <새사람>은 <슈퍼에고>(Super-Ego)와 연합하여 행동하는 자아이다.  <애고>(Ego)가 <슈퍼에고>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 행동하면 선을 행하고, <이드>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 행동하면 악을 행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옛 자아는 자기중심적인 자아(self-centered self)이며, 새 자아는 타자중심적인 자아(other-centered self)이다.    

 

사람 속에 있는 <자기중심>은 바로 <원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은,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중심의 삶을 떠나 자기중심의 삶을 살겠다는 선언이었다.  그것을 먹으면 자신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자기중심의 욕망과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면 되겠느냐는 하나님 중심적 양심이 서로 싸우다가, 결국 자기중심적 욕망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은, <자기중심적 자아>가 인간의 삶 속에 깊이 뿌리박게 된 불행의 원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속에 있는 두 가지 형태의 자아 중에서 <옛 자아>(the old self)는 매일 죽여야 할 자아이며, <새 자아>(the new self)는 계속 성장시켜야 할 자아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미워하고 매일 죽어야 한다는 주장도 맞고 자기를 사랑해야 한다는 주장도 맞다. 왜냐하면 옛자아는 미워하고 죽여야 하지만, 새 자아는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려면 “자신을 부인하라”고 가르치는가 하면, 또한 “네가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도 사랑하라”고 교훈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지상사역 특히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사역으로, 그 분 속에 있는 타자중심적인 자아의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타자 중심적 자아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셔서 타자중심적인 삶을 살다가 타자중심적인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야 말로 진정 원죄에서 완전히 벗어난 의인이었다.  그러므로 영성발달의 목표가 되시는 <예수님 닮기>는, 타자중심적인 삶임을 알 수 있다.

 

4. <자긍심>에 대한 신학과 심리학의 통합적 시각 

 

<자긍심>(self-esteem)이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되 자기의 긍정적인 면을 중요시하고 그런 자기 모습을 바라보며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자세이다.   심리학적 연구에 의하면,   

 

(1) 자긍심이 높은 사람들은 긍정적인 송환(positive feedback)을 더욱 믿을 만하고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긍심이 낮은 사람들은 부정적인 송환(negative feedback)을 더욱 믿을 만하고 정확한 것으로 인식한다.  후자의 사람들은 때로는 심한 병리학적 비판을 하는 수도 적지 않다고 한다. 

 

(2) 자긍심이 제대로 발달한 사람들과 자긍심이 낮은 사람들은 필요를 충족시키는 면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전자의 사람들은 안정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놀라게 하는 일들을 잘 처리하며 무마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놓고 겁을 낼 때에도 그들은 문제를 긍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타인들을 도와줄 수 있다.  그들은 문제를 만났을 때 그  문제가 그냥 지나가기를 기다리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갈등을 해소시키려고 노력한다.   반면 후자의 사람들은, 자신이 심리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안정감마저 사라지게 한다.  

 

그들은 근심과 걱정을 이겨낼 수 없다고 느끼며, 인간 상호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들은 또한 모험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들의 삶은 더욱더 고통스러워진다.  어려운 일들을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자기에게는 전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것을 변화시키려고 하는데서 야기되는 걱정거리를 처리할 능력이 없다.  이런 사람들이 회의에 참석하면, 일반적으로 “안 됩니다” “나는 반대요 ..” “그게 될 것 같습니까?” “나는 못 합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지만 우리는 안 됩니다” “이론은 좋지만 실제는 안 됩니다.”는 등등의 발언을 일삼는 것이 보통이다. 

 

(3) 자긍심은 심리학적인 측면에서나 신학적인 측면에서나 영성발달의 중요한 부분이다.  웹스터(Webster, 1987)는 자긍심과 진정한 영성에 관하여,“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그의 영성을 공급받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안과 자긍심을 체험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영적인 대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가 소유한 자긍심은 그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4) 자긍심은 부정적인 면도 있고 긍정적인 면도 있다.  종교에서는 주로 자긍심의 부정적 측면을 많이 지적하고, 심리학에서는 주로 긍정적인 면을 많이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 면을 다 수용함이 옳다고 본다. 종교적 측면에서의 부정적인 요소는, 자기중심적 자긍심과 연관된 것이라고 보며, 심리학적 측면에서의 긍정적 요소는 타자 중심적 자긍심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자기중심적 자긍심은 자신과 남을 파괴하는 부정적 힘의 원천이지만, 반면 타자 중심적 자긍심은 자신과 남을 위하는 긍정적 힘의 원천이다.  전자의 삶은 옛 자아를 발달시키는 자아이고, 후자의 삶은 새 자아를 발달시키는 삶이다.  전자는 마이너스 영성발달이고, 후자는 플러스 영성발달이다.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다윗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타자중심적인 자긍심이 위대한 역사를 일으켰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의 내면에 이와 같은 타자 중심적 자긍심이 발달한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C. 비정상적 영성과 참된 영성 1.비정상적 영성(Abnormal Spirituality)  

 

참된 영성과 반대되는 대표적인 개념들로, 우리는 자기중심주의(self-centeredness)과 자아도취증을 들 수 있다.  

 

(1) 자기중심주의(self-centeredness) 

      

자기중심주의는 여러 가지 모습의 비정상적인 영성을 형성하여 발전시키는 것으로 참된 영성의 정반대 개념이다.  우리는 비정상적인 영성 연구를 위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상호 비판을 비교해 봄으로 배울 수 있다. 이 양자간의 신랄한 비판을 통해서, 우리는 <삶을 죽이는 종교>와 <삶을 성취시키는 영성>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종교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을 때에 그분을 그토록 거부하고 비판한 것을 보면 그들의 신앙은 메시야에 대한 성경적인 시야를 벗어나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의 안목을 조금이라도 소유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예수님을 사사건건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자기중심적인 삶은, 자기 의를 낳고 자기 의는 히브리 민족주의를 형성시켰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의 의가 바리새인들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의 의가 무가치한 것임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의 영성은 잘못된 영성임을 예수님께서 신랄하게 비판하신 것은, 자기중심적인 의는 잘못된 영성이기 때문이다.  

 

영성이 발달한 것처럼 보이는데, 자기중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사람의 영성은 영성이 아니라, 생명을 질시시키는 종교성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중심적주의란, 타자를 이용해서 자기의 이익과 영광만을 추구하는 나머지 타자를 해치는 것을 말한다. 즉, 다른 사람들을 해치고라도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가치관이 형성된 사람들 속에 있는 삶의 습관이다.

      

자기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일시적으로 좋은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호의를 베푼다. 그래서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자기 목적이 다 달성되어 더 이상 이용가치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사정없이 그 사람을 배신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와 같은 자기중심주의가 모든 사람 속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성의 저변 깊은 곳엔 자기중심주의 혹은 이기주의가 깔려있다.  그래서 브락(Brock, 1988)은 “자기중심주의가 바로 원죄(Original Sin)다”고 하였으며, 맷잿(Matzat, 1990)은 “자기중심주의가 죄악에 물든 옛 성품”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렇게 볼 때, 자기중심주의는 우리 인류가 아담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에게 붙어 다니는 죄성이다.  과연 원죄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자기중심주의에서 행동함으로 생겨났다.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도, 자기중심주의에 붙잡힌 그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타자중심주의의 삶을 살도록 교육하기 위해서 이었다.    

카텔(Cattell, 1963)은 자기중심주의는 자아가 하나님과 멀어질 때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자기중심적인 크리스천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있어서 오히려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주의는 자기의, 자기기만, 이기심, 자만, 자기파괴 등의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극히 위험한 것들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오늘 한국 교회는 자기중심적인 영성을 치유받아 참된 영성인 타자중심적인 영성을 발전시키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2) 자아도취증(narcissism)       

 

자아도취증은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가장 해로운 인격의 고장 중의 하나로, 자기중심주의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  최근에 영성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자아도취적 문화(narcissistic culture)에 맞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자기중심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영성운동은, 자아도취증을 유도하는 위험한 운동이다.  

심리학에서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아도취증)은  자기중심주의에서 기인되는 병리학적 현상으로 정의한다.  자아도취증이란 말의 유래는 이러하다 - 고대 헬라 신화에 <나르시스>(Narcissus)라는 청년이 나오는데, 그는 강을 주관하는 神인 세피서스(Cephisus)의 아들이었다.  

 

나르시스는 미남 청년으로서 자기의 미모에 자부심이 큰 젊은이 있으며, 많은 소녀들이 그를 사랑했으나 자기는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르시스를 사랑한 소녀들 중에 가장 미모가 뛰어난 요정인 <에코>(Echo)의 사랑도 거절하였다. 그래서 신들이 노발대발하여 나르시스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로 하여금 연못에 비추인 자기의 모습을 보고 거기에 미쳐버리도록 하였다.  

 

물속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그는 그 연못을 떠나지 못했으며, 결국 그는 그 연못에 빠져 죽어 수선화(Narcissus)가 되었다고 한다.  이 신화는 다른 사람은 사랑할 줄 모르고 자신만을 지나치게 사랑하다가 스스로 파멸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나르시스>(자아도취증)란 말은, 바로 이 신화에서 유래하였다.   리스만(Riesman, 1982)은, 자아도취증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크나큰 병폐라고 지적하며, 자아도취증을 자기중심주의와 동일 시 하였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사랑과 자기도취증은,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다르다.  자아도취증은 다른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 자기만을 사랑하는 형상이지만, 이에 반에 건전한 자기사랑은 타인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자기 사랑인 것이다.  남에 대한 사랑이 포함된 자기 사랑은 타자중심적 자아와 연결된다.  그러나 남에 대한 사랑이 배제된 자기 사랑은 자기중심적 자아와 연결되는 것이며, 심리적인 면이나 영적 면에서 치명적인 병리현상이다.    

 

2. 참된 영성(True Spirituality)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할수록 영성이 발달하기는커녕 오히려 옛날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는 모습을 많이 본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영성에 대한 오해의 늪에 빠져 참된 영성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 우리는 옛날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위선자라는 책망을 받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1) 영성에 대한 오해         

 

<영성>은 ‘물질적인 것’ ‘인간적인 것’ 혹은 ‘문화적인 것’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런대도 오늘 많은 사람들은 영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도 아니며, 인간적인 것도 아니며, 문화적인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은 결코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은 인간적인 범위 안에서 살고 있는 문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질적이 아니고 인간적이 아니며 문화적이 아닌 모든 것은 영적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하는 주장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인간은 물질로 구성된 존재이고 죄성과 나약성을 가지고 있으며, 문화 속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긍정적인 연관성을 맺고 살아갈 때 그것은 영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영적인 삶은 하나님과 성경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삶이다. 

    

영적인 것과 몸은 서로 적대관계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영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육신이 쇠약해야 하고, 육신이 강해지면 영적으로 쇠약해진다는 생각은 비성경적이다.      

 

영성과 인간성도 서로 모순이 되는 개념이 아니다.  인간성이 좋다고 해서 영성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참으로 영성이 좋은 사람은 인간성이 좋아야 한다.  교회의 직분을 선정할 때에 “외인에게도 칭찬을 받는 자”라는 말은 바로 영성과 인간성의 밀접한 관계를 지적하는 말이다.  영성발달의 목표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간성을 동시에 가진 훌륭한 인격자 이셨다. 

      

영성은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역동적 결합이다.  신자가 믿는 하나님은 구속자이면서 동시에 창조주이시며, 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성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결합된 영성이다.  만일 영성과 물질이 반대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크리스천에게 물질을 주시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물질축복이란 용어도 비성경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청빈사상>은 그 자체가 반드시 성경적인 가치관은 될 수 없다.      

영성은 또한 문화와

반대 개념이 아니다.  반문화운동이 영성발달 운동은 아니다.  문화를 등지고 산 속으로 들어간 사람을 영성이 발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도시에서 문화생활을 누리며 사는 사람을 향해 영성이 낮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떤 문화 형태에서 살든지 그 문화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얼마나 잘 맺고 살며 또한 타인들과의 관계를 얼마나 잘 맺고 사는가가 영성발달의 중요한 척도이다.  물질과 몸과 인간성의 문화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는 도구로 쓰여질 경우에만 그 모든 것 속에 영성이 포함될 수 있다.그리스도는 그 당시의 종교인들이 입던 제사장 옷 등의 성의를 입지 않고 말씀을 전파하였어도, 영성의 최고봉을 이루셨다.  왜냐하면 그 분은 주어진 문화권 속에 살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및 그 문화 속에 사는 인간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으시면서 사셨기 때문이다.  

 

(2) 참된 영성(Treu Spirituality) 

      

기독교의 영성은 근본적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래서 팍스(Fox, 1991)는 영성을 “생명으로 충만한 삶” 혹은 “영으로 충만한 삶의 길”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및 타인들과 관계를 잘 맺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에너지가 바로 영성의 참된 근원이다.    

신자의 영성의 목표되시는 예수님의 영성은 십자가 사건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십자가 사건은 관계 회복의 사건이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및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가장 위대한 사건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고 타인과의 관계를 잘 맺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가?  그것은 타자중심주의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중심주의의 삶이 필요하며, 사람과의 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 중심의 삶이 필요하다.  즉 자기가 아닌 타자 곧 위로 하나님을 중심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고, 아래로 혹은 옆으로 다른 사람을 중심하여 화목 하는 삶을 살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좋아질 것이다.    

  

하나님중심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중심이라는 개념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중심으로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그 안에서 우리를 만나신다.  구약시대의 <성막>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었고, 사람들은 그 성막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성막의 본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중심주의로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중심으로 사는 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중심이 아닌 영성은, 아무리 꾸미고 닦아도 어디까지나 세속적 인본주의에 불과하다.     

 

기독교 영성의 참된 목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얼마나 무엇을 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얼마나 거룩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다(Rice, 1991).  이 말은 우리가 이루는 사역보다 우리의 존재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영성이란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바뀌어 지는 과정인데,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중심으로 바뀌어가고 있느냐를 아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타인중심으로 사느냐에서 나타난다.   타인들을 고려하지 않는 하나님중심은 위선에 불과하고,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는 타인중심은 세속적 인본주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참된 영성은 하나의 자아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및 사람들과의 관계를 성경적으로 맺어가면서 그리스도다움을 향하여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다>고 정의할 수 있다.  

  

영성은 일반계시는 물론 특별 계시적 차원의 삶을 요구한다. 다시 말하면, 일반계시의 윤리 도덕적 인격을 갖추면서 사는 삶만으로는 영성이 되지 못한다.  특별 계시적 차원의 삶 곧 성경적 차원의 삶이 반드시 필요하다.  일반계시 안에서의 윤리 도덕과 특별계시 안에서의 영적 법칙을 하나로 통일시킨 삶이 바로 참된 영적 삶이요 이것이 참된 영성이다.   

 

 제 2장 영성발달을 위한 인간 이해와 성령의 역사        

 

A. 인간의 본질적 구조  

 

1. 삼분설(三分設)과 이분설(二分設)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는 “김씨 집안의 셋째 아들이요 성격은 내성적이다.”고 말한다. 이러한 자기의식을 우리는 <자아> 혹는 <자아의식>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제일 접근하기 쉽고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나>는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하여 특별한 생각 없이 “나는 나지, 별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가?”하며 특별한 생각 없이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라는 인간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상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인가를 정확히 알아야, 나의 발전을 이루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라는 존재를 어떤 존재라고 하는가?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성경에 근거하여 <나>의 본질을 추구하다가 생긴 이론이 소위 <삼분설><이분설>, 혹은 <일분설>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교단별로 견해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통합측은 1분설, 합동측은 2분설, 그리고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침례교 등은 3분설을 주장한다.  성경은 3분설 혹은 2분설적 견해를 보여준다.

 

(1) <3분설> 입장의 성경 말씀들     

  

데살로니가 전저 5:23에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το πνευμα spirit)과 혼(η ψυχη soul)과 몸(το σωμα body)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여기서는 인간이 [영 + 혼 + 몸]으로 구성된 것으로 나타난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ψυχη soul)과 영(πνευμαspirit)과 및 관절과 골수(joints and marrow)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라니”   이 말씀에서는 인간이 [영 + 혼 + 관절과 골수]로 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살전 5:23의 <몸>이 여기서는 <관절과 골수>로 표현되어 있을 뿐 같은 입장이다.

 

(2) <2분설> 입장의 성경 말씀

 

마10:28 “몸(the body)은 죽여도 영혼(the soul)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σωμα body)과 영혼(ψυχη soul)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 인간 = 몸(σωμα) + 영혼(ψυχη = 혼(원어) ]  

롬8:10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το σωμα body)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το πνευμα spirit)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 인간 = 몸(σωμα) + 영(πνευμα) ]

전도서 12:7 “흙(???? the dust)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the spirit ???? )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 인간 = 흙(??? 몸) + 신(영 ??? 하나님이 주신) ]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 the dust)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 ???? the breath of life)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a living being ??? ??? )이 된지라” 

[ 인간 = 흙(몸) + 생기(영) = 살아있는 혼(생명체)(??? ???) ](=생물 ??? ??? 창2:19)    

                                         

이 본문에서는 인간이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의미하며, 원어로 볼 때에 창 2:19의 “생물”고 동일하다.  이것은 생명체라는 입장에서는 인간과 생물이 동일하나, 그 차이는, 인간 창조에서는 하나님의 생기(영)가 흙으로 만든 몸 안에 불어넣어졌다는 것이다 여기 불어넣어진 생기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이라고 본다(전12:7 참조).      

히브리서 12:9 “우리 육체(flesh σαρξ)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spirits πνευματα)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하지 않겠는냐” (cf. 요3:6 ).[ 인간 = 육체(σαρξ)(몸 + 혼적 요소 Calvin) + 영 πνευμα ]       ( Cf. 엡2:3 “육체의 욕심”(σαρξ) = <몸 +혼의 욕망>으로 봄)

 

롬 7:25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σαρξ)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인간(내자신) = 마음 + 육신(죄의 법을 섬김) ] 엡 4:22-24 “너희는 .. 옛 사람(old self)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new self)을 입으라 ”  [ 인간 = 옛 사람 + 새 사람( 하나님의 형상: 참 지식(골3:10), 의, 거룩 )] 

                            

(3) 몸과 혼과 영에 대한 개별적 고찰  

     

1) <몸>(??? 육신)         

 

ㄱ) 인간의 뼈와 살을 포함한 육신 전체를 말한다(왕상21:27, 왕하 6:30)  

ㄴ)인간의 모든 영적 기능의 좌소가 되어, 하나님을 사모하여 부르짖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시119:120, 84:2)          

Cf. < 육체 σαρξ>라고 할 때는 몸(육신)의 의미가 아니고, <몸 + 혼>의 기능을 합한 의미이다(엡2:3, 히12:9, 롬7:25)

 

2) <혼>(???)

 

혼은 <영>이 육신에 작용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다.[창2:7 인간 = 흙(육신) + 생기(영) = 살아있는 혼] 혼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ㄱ) 혼의 일반적 의미는 <생명>(life)이다(출 21:23, 4:19).            

ㄴ) 혼은 모든 지정의의 좌소이기도 하다.  한글개역은 <혼>(???)을 여러 가지로 번역한다. -- “마음”(민 21:4,삿 16:16), “뜻”(창 23:8-9, 시 105:22), “욕심”(전 6:7, 잠 23:2), “영혼”(겔 18:4), “생명”(레 17:11) 등등.           

ㄷ) 혼은 또한 의식하고 감독하는 주체로서의 인간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창 2:7).  

[인간 = 살아있는 혼]Oeheler “인간은 영을 갖고 있는 존재이나 그 자체는 영은 아니고 혼(???)이다.”Payne  “인간은 영을 갖고 있으나 그 자체는 혼이다. 인간은 그의 영으로서 사고하나 그 사고자는 혼이다.”

 

3) 인간의 영(???) 

         

ㄱ) 영은 혼의 원동력(motive power)이다.  인간의 영(???)이 인간의 육신을 통하여 지정의의 어떤 개성적이요 인격적인 형태로 표현될 때 그것을 <혼 ???>이라 불렀다.  구약은 <혼>을 인간의 지정의의 좌소로 보았으나, <영>은 더 근본적인 지정의의 좌소로 보았다.  그러나 한글개역은 <영>을 “마음”으로 번역하고 있다(창26:35 마음(???), 학1:14 마음(???), 대하36:22 마음(???)).          

ㄴ) 사람은 자기의 <영>의 작용을 다스리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영을 새롭게 하는 역사가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함을 증거 한다.  다윗이 범죄 후 시51:10에 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하고 기도한데서 잘 나타난다.           

ㄷ) 한글개역은 <영 ???>을 주로 “마음”(심령)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마음과 영은 다르다(“상한 심령”(시51:17), “통회하는 마음”(사57:15) ).    

 

(4) 인간의 마음(??)   

   

ㄱ) 혼(???)과 마음(??)은 구별되어야 한다.  

 

신약성경도 <혼>은 프쉬케(ψυχη)로 되어 있지, 마음을 가리키는 칼디아(καρδια)로 번역된 일은 없다.  김희보 교수에 의하면, “<혼>이란 영에 근원한 것으로 인간 육신 밖에서 들어온 외래적인 것이나, <마음>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육신의 일부분이요 하나의 생리학적 불가견의 기관이라.”고 한다.      

ㄴ) < 마음>과 <혼>은 서로 다르나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인간의 <혼>은 오직 <마음>이란 기관을 통해서만 활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육신적인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마음>이 지정의(知情意)의 좌소가 된다.  <혼>의 지정의의 표현은, 오직 인간의 육신의 기관인 <마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인간의 육신의 모든 기관 중에서 보이지 않는 기관인 <마음>만이 오직 <혼>의 활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기관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신에 있어서의 도덕적 신앙적 행위의 유일한 기초는 <마음>에 있다.  따라서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사람의 도덕적 신앙적 상태가 결정된다(신6:5,삼상16:7).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구속이 <새 마음>을 받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겔11:19, 마5:8, 눅6:45). ㄷ) 인간의 <지혜>의 좌소도 <마음>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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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34:10에 보면 “총명한자”(wise man)가 원문에 ‘마음을 바로 하는 자’라는 의미로 “마음의 사람들”(??? ????)이라고 표현된다. 이와 같은 의미로 잠6:32의 “무지한자”는 원문에 ‘마음의 허무자’(?? ???)라고 말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을 종합하면, 인간의 <영 πνευμα>과 <혼 ψυχη>은, 각기 지정의(知情意)의 인격적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영>이 <혼>의 원동력이 되며, 특히 <영>이 새롭게 되는 일은 성령하나님의 역사로 가능함을 보여준다(시51:10 cf.요3:6).  그리고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영과 혼이 각기 <마음>으로 많이 번역되고 있는데, <마음>은 보이지 않은 <몸>의 한 기관으로, 혼의 모든 지정의의 표현은 이 마음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인간 자신이 <몸>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도록 지음 받았으나, 때로는 인간 인격이  <영과 육체>로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 <육체>( σαρξ)는 <혼과 몸>의 의미가 합해진 의미이다.

          

성령님께서 구원을 각 개인에게 적용하실 때에도 <영>에는 내적인 생명으로 역사하시고, <육체>(몸+혼)에는 외적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3:6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함으로, 중생시에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새 생명을 갖게 하신다.  그러나 승천 하신 후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든 육체 >(πασαν σαρκα) 위에 부어주어, 복음증거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심을 볼 수 있다.그래서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온전히 복음 사역에 수종들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을 알게 된다.

 

B. 두 종류의 성령 충만   

 

영성발달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성령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발달의 주도자는 분명히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 충만해지는데 있다.  그러데 이러한 성령 충만에는 내적 충만과 외적 충만이 있다.  

 

1. 내적 충만

 

내적 충만은 성령의 <영>(=영혼(한글개역))에 대한 사역 즉 생명적인 사역을 말한다. 요한복음 3:6에 의하면 중생시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이 거듭난다.  성령께서는 그 후 우리 영속에 내주하셔서 우리의 영을 하나님과 생명적으로 연합하게 하심으로(롬6:5, 요14:20) 성화되고 성장되게 하신다.  우리의 인격이 이렇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충만되어질 때, 이것을 <내적 충만>이라고 하며, 그 결과는 <성령의 9가지 열매>로 나타난다. 즉 갈5:22-23에 기록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9가지 열매를 맺게 된다.

 

2. 외적 충만     

 

외적 충만이란 성령의 <육체 σαρξ(혼+몸)>에 대한 사역 곧 성령의 은사적 사역을 말한다.  은사는 주의 신령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주신 도구(능력)이다.  성령의 은사적 사역은, 고전 12:7-11에 기록된 대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 통역 등등의 은사들이다. 

   

이러한 은사들은, 욜2:28에 약속된 “만민” 곧 “모든 육체”(??? ??) 위에 오순절부터 부어 주기로 약속하신 성령(오순절 성령 행2:14-17)을 받아(성령세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성령의 능력충만) 주로 나타나는데(행2:1-4, 눅24:49),  이것이 바로 성령의 <외적 충만>이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이같이 두 종류의 성령 충만을 주시는 목적은, 먼저 거듭나게 함으로 <영>에 생명을 주어 변화시켜 거룩한 인격으로 성장시키고, 그 다음 마귀에게 종 노릇해온 <육체>(몸+혼)에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능력을 부어 주어, 자기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귀 곧 사탄>은 악한 왕국의 왕이요, <귀신들>은 그의 통치 아래 활동하는 타락한 천사들이다.  귀신들린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귀신을 향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꾸짖을 때, 처음에는 그 귀신이 <나는 과거에 죽은 누구누구다>는 식으로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죽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귀신이 그 사람처럼 행동하여 살아있는 사람들을 속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 속지 않고 계속 예수님의 이름과 그의 권세로 꾸짖고 추궁하면, 죽은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라는 자기의 본 정체를 밝히고 떠난다.   

 

<윤회설>을 말하는 불교의 경우, 사람이 죽어서 소도 되고 돼지도 된다는 것은,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이 죽으면, 그 안에 붙어 있던 귀신이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거나, 아니면 다른 짐승들에게 들어가 활동하다가, 그 짐승이 죽으면 또 다른 곳을 찾아 계속 떠돌아다니며 생활하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하느냐 하면,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갈 영원한 멸망의 때까지 그렇게 한다(마12:43-45 참조).  이렇게 볼 때, 불교인들은 <귀신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꼴이며,  성령의 은사들을 받아 분명한 영분별을 하게 되면 이러한 사실을 밝히 알 수 있게 된다.    

 

성령의 모든 은사를 친히 체험한 박철수 목사님에 의하면, 사람에게 들어가는 귀신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태어날 때 들어가 자기화된 귀신(성격 형성, 개성),  

둘째는 죄를 지을 때에 들어가게 되는 귀신,  그리고

셋째는 지나가다 슬쩍 사람에게 들어가는 귀신(거릿 귀신)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마 8:20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그 당시 목수 일을 하셨으니, 목수간도 있고 어머니와 동생들이 살던 집도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는가?  그것은, 당시 백성들 가운데 <영과 혼과 몸>이 신령한 집으로 건축되어 있지 못함으로, 주님이 내주 내재할 <신령한 집>이 없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베드로는, 벧전 2:4-5에서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와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하였을 것이다.    

 

인간 이해에 있어 두 종류의 성령 충만은 대단히 중요하다.  두 종류의 성령 충만으로 우리 <영>이 새로워지고 우리 육체(혼+몸)가 성령의 능력을 입게 될 때, 우리의 영성과 삶은 제대로 잘 발달되어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내 영에 임함으로 영이 변화되고 성령 충만하게 됨으로, 내 영의 지정의(知情意)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바로 깨달아, 선악을 바로 분별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보다 성숙해질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생기는 <윤리 도덕적인 감정>은 <혼적인 감정>으로서 죽고 썩을 것이지만, 영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생명적이며 실제적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아무리 <조카를 사랑 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머니로부터 흘러나오는 <모성애>는 아니다.  왜냐하면 모성애는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육신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기 때문에 고마워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육신적인 것, 혼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아 하나님이 내 영혼의 친아버지가 되었음을 깨닫고 감사해서 사랑하는 것은 <영>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그 사랑의 농도에 있어서 전혀 차원이 다르다.  두 종류의 성령충만을 통해서, 우리는 <영>에 역사하는 것과 <육체>(혼+몸)에 역사하는 것이 다름을, 사랑의 느낌으로도 이렇게 입증할 수 있다.

 

C. 인격의 세 영역에서의 영성발달을 위한 성령의 역사  

 

영성발달을 위해서 성령의 역사와 기독교 교육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학문적으로 기독교교육은 반드시 성령론과 접목되어야 한다.  인지적 영역, 정서적 영역, 행위적 영역은 교육학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학습이론이다.  인간의 인격도 지성, 정서, 의지로 구성되어 있고, 성령님도 그런 세 가지 영역의 인격자이시다.  즉 성령님은 <지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가르치시며, <감정>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뜻대로 살 때에 기뻐하시고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에 슬퍼하신다. 그리고 그 분은 또한 <의지>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자기의 뜻을 따라 행동하신다.   

 

기독교교육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존하여 전인적인 인격발달을 목표로 삼는다면, 기독교 교육을 통하여 영성발달을 도모할 수 있다.  아래로부터의 <기독교교육>과 위로부터의 <성령의 역사>가 동반된다면, 놀라운 영성발달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럼 인간 인격의 세 영역에서의 영성발달 문제를 상고해 보기로 한다.  

 

1. 인지적 영역(cognitive domain)과 성령의 역사  

    

(1) 정의(definition)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의하면, <인지>(cognition)란 “앎의 과정”이라고 함으로 인간의 이성(理性)과 관계가 깊음을 말한다.  렌너(Renner)라는 학자와 그 동료 연구원들은 <인지(認知)란 사람과 그 환경과의 계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라고 정의하였다.  

 

(2) 인간발달을 위한 인지적 발달

 

인지적 발달은 영성발달이나 인간발달에서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는 인지심리학과 학습의 인지적 스타일 그리고 인지학습을 소개함으로, 인간발달을 위해 인지적 발달이 어떠함을 소개한다.  

       

1) <인지심리학>(cognitive psychology)

 

<인지심리학>이란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하여, 인간의 지적인 과정과 기억구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학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지심리학은 효과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 인간의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효과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은 기독교교육에서 아주 중요한 관심사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교육은 인간 행동의 변화에 큰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의 인지적 영역은, 심리학에서도 큰 관심사이고 또한 이것은 영성신학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지적 능력을 상실하거나 왜곡하면 인격과 신앙의 기본적인 틀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다서에도 이성을 잃은 사람을 짐승으로 비유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인지적 작용이 인격 및 영성에 매우 중요한 것임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몰라도 영성은 발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른 말이 아니다.    

  

2) <학습의 인지적 형태들: FID / FD>

 

 

위트킨(Witkin,1978)과 그의 동료들은 1940년 후반에 실험을 통하여, 두 가지 형태의 인지적 학습 방법을 발견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는 <장의존(field dependence: FD)의 학습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장비의존(field independence: FID)의 학습 형태>이다.   

 

<장의존의 학습 형태>란 어떤 정보 자체보다도 그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에 더 관심을 두는 경향이다.  이 학습형태에 속한 학생들은 교사를 볼 때에 정보 제공자로 보기보다는 한 인간으로 보게 된다.  반면 <장비의존의 학습 형태>란 어떤 지각적 장(a perceptual field) 안에서 발견되는 자극들을 장(field)에서 분리시키려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이 학습 형태에 속하는 학생들은 교사를 볼 때에 한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정보의 제공자라는 관점에서 보게 된다.  그래서 장비 의존적인 사람들은 관계를 중요시하고, 장비 의존적 사람들은 분석을 좋아한다.    

 

3) 기독교교육에 대한 인지학습적 접근     

  

피아제(Jean Piaget) -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배우고자 하는 의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배운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상급이 된다.       

브루너(Jerome Bruner) - 인지적 발견학습의 대변자로서, 교사가 학생으로 하여금 학습의 장에 대한 전체적 구조를 파악하도록 도움을 주고 구체적 내용을 학생 스스로 발견하는 기쁨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학습효과가 더욱 높아진다.      

오슈벨(David Ausubel) - <의미 있는 학습>은 그 사람의 현재의 지식 체제에 새로운 정보가 잘 합쳐질 수 있게 한다.  

 

내부에 배우고자 하는 의욕이 있다는 피아제의 이론이나 배움의 기쁨을 강조한 브루너의 이론이나 학습의 의미를 강조한 오슈벨의 이론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지적 영역에 있어, <지성>과 <감성>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욕이나 기쁨이나 의미라는 용어들은 감성적인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피아제의 주장은 교사가 교수학습과정(teaching-learning process)을 설정해야 하고, 브루너의 경우엔 교사가 문제해결과 발견학습을 위한 자극이 될 자료들을 공급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오슈벨의 경우엔 교사가 의미 있는 학습을 할 수 있는 적절한 자료 제공자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들 모두에게 공통점은, 교사가 적극적이며 자발적인 <정보 제공자>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피아제의 경우도 비판을 받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도교적 입장에서 볼 때, 그가 전제하는 인간성의 궁극적 선에 대한 개념은 잘못된 것이다.  브루너의 발견학습의 경우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은 고도의 기술과 많은 정보가 요구되는 시대인데, 발견학습만을 고집한다면 정보를 제공받는 일에 뒤떨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발견학습을 모든 학생에게 적용시킬 수 없으며, 그의 이론은 단지 하나의 학습이론일 뿐이다.  

 

우리 기독교 교육에서 교육의 절대적 내용은 <성경>이며, 절대적 교사는 <성령님>이시다.  기독교교육에서 메시지는 절대적이지만, 그 방법은 다양해야 하므로, 비기독교교육 이론들이 제시한 교육방법이라도 진리 전달 방법으로 적합하면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3) 영성발달을 위한 인지적 발달       

 

인지적 발달은 영성발달과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을 영성발달의 원천적 자료로 삼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려면 일단 이성과 지성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쉘튼(Shelton, 1990)은 영성발달에서 <감정 이입>(empathy)이 매유 중요하지만, 동시에 분별력, 지각, 혹은 자기이해(self-understanding) 등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였다.  

 

로빈슨(Robertson, 1975)은 지적하기를 성령 충만한 신자의 삼대특징 중의 하나는 <구원에 대한 확고한 지식>("a know-so" salvation)이며, <아마 내가 구원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의 구원>(“a maybe-so” salvation)에 대한 인식만 가지서는 성령 충만한 신자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카터(Carter, 1974)는 영성발달의 인지적 영역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시각에서 자신을 알고 남을 알고 세계를 아는 것이 영성 발달의 일곱 단계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가 <전지하심>(omnisceince)인데,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이성적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그 이성은 영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을 수용하는 조건하에서의 이성이어야 한다.      

 

1) 성령과 인지적 영역과 영성발달

 

이성이 없는 영 곧 비이성적인 영은 하나님의 영은 아니다. 인간의 이성 역시 영의 중요한 속성 중의 하나이다.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는 모범인간(a model Man)으로서, 물질로 된 육신(material body)과 이성적인 영혼(reasonable soul)을 가지셨고, 지적이고 도덕적인 인격을 가추셨다.  영성 발달이 그 분을 닮아가는 과정이라면 인지적 영역은 영성발달에 분가분적이다.

 

2) 하나님의 말씀과 인지적 발달

 

양자는 아주 깊은 관계를 가진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영성발달의 근원이 되는 <말씀>을 주시고 그의 종들로 그 말씀을 가르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신6:1-3, 마28:18-20). 가르친다는 것과 배운다는 것은 인지적 기능을 사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지각을 사용하여 성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어린아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히5:13-14).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경 말씀을 공부하여 진리를 깨달아 앎으로써 영성이 발달한다는 원리는 성경이 가르쳐 준다.    

ㄱ) 행20:32 -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ㄴ) 골1:9 -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여기서 바울은 영적 성장의 3가지 요소를 “신령한 지혜”, “총명”, “아는 것”이라는 인지적 영역과 관련시킨다.    

ㄷ) 벧후 1:5-7 -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영성발달을 위하여 지적 영역의 중요성을 말해주며, 또한 정서적 영역이 함께 함을 말한다.    

ㄹ) 렘3:5 -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ㅁ) 잠 2:10 -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에 즐겁게 될 것이요.”        성령의 역사로 작용하는 지적 작용은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ㅂ) 사 43:10 - “나 야웨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여기 “알고 믿으며”란 표현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구약에서 앎이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머리의 지식>(head know-ledge)이 <가슴의 지식>(heart-knowledge)으로 연결되어 삶의 정황 속에서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을 의미한다.  중생 자에게 성령이 역사할 때 머리의 지식이 가슴을 거쳐 삶의 현장으로 연결된다.  학습(learning)의 세 영역인 인지적 영역, 정서적 영역 및 행위적 영역도 같은 맥락으로, <학습>(learning)이란, 알고(knowing), 느끼고(feeling) 행함(doing)으로써 완전한 학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인지적 능력을 통하여 영성을 발달시키는 영적인 자원이 된다.  만약 진리를 알지 못하고 그냥 믿기만 한다든지 혹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알려고만 한다면, 그런 사람에게 영성발달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에베소 4:13에서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교훈한다.   크리스천들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은 물론, 자신과 타인과 세상에 대한 것을 알아야 그들의 <영성>이 정상적으로 발달할 수 있다.  지식은 영성발달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2. 정서적 영역(affective domain)과 성령의 역사 

    

<정서적>(affective)이란 단어의 명사형인 <정서>(affect)란 단어는 가슴(heart)과 연관된 말로써 감정(emotion) 혹은 정서를 의미한다.  이 말은 주관적인 느낌으로서 신체와 연결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다.  그리고 정서에 대해 사용되는 다른 말로 <emotion>이란 말이 있는데, 이 말에 대하여 골맨(Goleman)은 이렇게 말한다.

 

<정서>(emotion)란 말의 어원은 라틴어 동사인 <motere (to move) + e (away)>의 합성어로서 정서란 “움직여 나간다.”(move away)란 의미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정서>란 인지적인 영역과 행위적인 영역을 함께 포함한다.  과연 우리의 생각이 행동으로 변하려면 <정서>를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그것이 실천으로 옮겨지려면 마음이 움직여져야 하는 것이다.  가슴에 닿는 설교가 되어야 성도들의 생활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감정적인 사람은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자기 통제를 잘못하는 사람으로 정서발달이 잘 된 성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크리스천들은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라, 정서적인 삶을 발달시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항목에서는 영성발달을 위한 성령의 역사와 정서적 영역에 관해 상고해 보려고 한다.

 

(1) 정저적 영역과 유사한 개념들  

- 정서적 영역과 유사한 개념들을 나타내는 용어들은 다음과 같다.   

   

1) 긍휼(compassion)

 

<긍휼>은 영성에서 중심이 되는 성경적 용어로써 정서적 영역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마5:7, 9:27,33 etc.).  예수 그리스도는 긍휼을 가장 잘 실천하신 역할 모델(role model)로서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본을 보이셨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면 이러하다 --    

[마9:35-36] --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    

[막 1:40-41]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끓어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긋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 깊은 곳에 긍휼이 충만하였음을 보게 된다.        

 

2) <감정이입>(empathy)

 

감정이입(empathy)이란 말은 <em(안으로) + pathy(느끼다)>의 합성어로서, ‘안으로 느끼는 감정’을 의미한다.  즉 다른 사람 안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입장에서 함께 느끼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느끼는 감성은 타인을 돌보아주는 행동의 원천적 힘이다.  Shelton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긍휼>(empassion)이 바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정이입>(empathy)과 동일하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은, 그 느낌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도와주는 삶을 살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영성>은 발전한다.  왜냐하면 영성은 자기중심의 삶이 아니라 타자중심의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감성 발달의 중요성

 

  센더스(Sanders,1962)는,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모습을

1)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  

2) 영적으로 미성숙한 그리스도인  그리고

3) 퇴폐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분류한 다음 이르기를 이러한 분류의 근거는 그들의 지식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성>과 관계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오늘에 와서 사람들이 지능지수(IQ) 보다 감성지수(EQ)에 더 중요성을 두는 이유도 이 때문인 줄 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정서가 합리성에 지배당하지 않고 그의 합리성을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볼 때, 어떤 허신적인 일을 함에 있어서도 <정서>가 합리성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란(Ron, 1991)에 의하면, 미국에는 수백만의 <어른 아이들>(adult children)이 존재하는 데, 그 이유는 그들의 정서적 발달이 미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몸은 어른이지만 그들 속에 있는 정서는 어린아이라는 것이다.  하바드대학의 교수인 아블론(Ablon)은, <정서>는 인간됨의 기초이며 필수적인 요소라고 강조하였다.  하바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골맨(Goleman,1995)은 정서적인 마음(emotional mind)은 이성적인 마음(rational mind) 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친구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사로가 이미 천국에 간 것을 알면서도, ‘나사로가 믿고 천국에 갔으니 찬송하자’고 하지 않고 우셨다.  예수님의 이성은 <감성>의 통로를 거쳐 행동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예수님은 정서발달에 있어서도 우리의 모델이며 목표이시다.  

 

(3) 감성 발달의 필요성    

    

어떤 학자는 <감성>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감성의 선천성을 강조하고, 다른 학자는 감성이 단계를 거쳐 지속적으로 발전해간다고 감성의 후천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Brown(1993)의 주장과 같이, 감성에는 선천적인 요소와 후천적인 요소가 모두 있다고 봄이 옳다고 본다.      

감성발달은 출생 시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할 인간적 과제라고 보아야 한다.  만일 어린아이가 사랑과 보호를 받으면서 제 시기에 감성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몸은 어른으로 성장해도, 감성발달은 지체되어 어린아이가 되어, 가정과 사회와 교회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그래서 20세기에 와서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감성발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에 의해서 <이성적 감성적 치료법>

(Ra-tional Emotive Therapy: RET)이 창안되기도 하였다. 그는 강조하기를 인간의 심리적 과정은, 인지적 영역과 정서적 영역과 행위적 영역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한 인간을 치료함에 있어서, 이 세 가지 영역을 깊이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4) 정서적 영역에서의 영성발달과 기도     

   

1) 기도

 

기도는 정서적 영역에서 영성발달을 도모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서 기도하는 사람과 그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교(communion)이다.  이 하나님과의 친교를 통해서 인간은 큰 감성적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한나는 기도를 통하여 고통에서 해방받는 정서적 체험을 했으며, 바울은 근심걱정에 얽매어 정서가 메마른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교훈하다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도의 다섯 가지 요소들은, 경배(adoration), 감사(thanksgiving), 고백(confession), 요청(petition), 중보(intercession) 등이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 정서적 영역에 속하는 용어들로서, 가슴을 열 때에만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  기도는 정서적 영역에서 영성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2) 기도와 성령의 역사

 

 

성령님은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들어내시고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내어놓고 성령의 역사를 간구하며 기도하면, 그 기도 속에 성령이 역사하여 진정한 회개를 하게하고, 그런 회개는 행동을 변화시킨다.   기도는 선택과목이 아니고 필수과목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행하는 교육 사역에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3) 기도와 영성발달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로서 영성발달의 초점이 된다. 기도는 인간의 최대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필수적인 영적 행위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특별히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을 소생시키시고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과 인격의 원동력이 우리의 <영>이기 때문이다.   

     

ㄱ) < 인격발달>

 

인격발달이 안 된 사람은 영성이 발달했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양자는 불가분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영성이라고 생각하고 사람과의 수평적 관계는 인성이라고 함을 옳지 않다. 자기중심은 인격의 미성숙을 의미하고 타자중심은 인격의 성숙을 의미한다. 미성숙한 사람일수록 먼저 자기만을 생각하며, 성숙한 사람일수록 먼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한다.  여기서 <타자중심>이란 하나님중심(God-centeredness)과 타인중심(peole conteredness)을 의미한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중심의 인격으로 변화시켜주며,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타인중심적인 인격자로 변화시켜 준다.  기도할 때 성령께서는 자기중심에서 타자중심으로 우리의 생각과 정서와 행동을 변화시켜주는 힘을 발휘하신다.   특히 중보기도는,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에서 타자중심적인 인격자로 우리를 변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는, 제자들에게 타자중심적인 삶 곧 하나님중심적인 삶과 타인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다. 주기도에는 “나”라는 말은 없고 모두 “우리”라고 가르치신다.  우리의 기도가 타자중심적일 때, 우리의 인격은 날로 발달한다.  기도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중심이 되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 짐을 나워 지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ㄴ) < 행동발달>

 

여기서 <행동발달>은 영적인 성장을 의미하는 용어로써, 신앙의 영적 발달 곧 영적 성숙을 의미한다.  인격발달과 대칭되는 말이다.  행동발달은 행동(행위)에 관계되는 말로서 힘을 필요로 하는 개념이다.  예수님의 행동 속에는 언제나 힘이 동반하였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영성발달이라면, 크리스천에게도 그리스도에게 있었던 능력의 일부가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은 지상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유하는 사역을 행하셨으며, 그러한 사역 속에 능력이 나타났다.  그러므로 오늘 그의 뒤를 쫓는 그의 제자들인 우리에게도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는 일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정상적이다.    

20세기에 와서 일어난 은사운동도, 영성의 행위적 영역에 중점을 두고 일어난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도는 크리스천들을 성숙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능력 있는 삶을 살게 한다.

 

4) 기도와 정서생활

 

기도는 정서적 생활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감정의 치유, 친밀감, 감사하는 마음, 소망 등의 정서는 기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만큼 아버지로부터 정서적인 면에서 큰 발달을 경험하게 된다.  

    

ㄱ)<감정의 치유>(emotional healing)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는데, 그 사랑의 체험은 곧 정서적 치유를 가져온다.  슐러(Schuller, 1982)는 인간 속에 6가지 부정적 감정이 있는데, 그것은 열등감, 무의미, 걱정, 죄책감, 후회, 공포 등인데,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치유를 위한 처방전이었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기도는 찬양과 감사와 고백과 요청과 중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특히 찬양 기도는 감정의 치유에 큰 역사를 한다.  찬양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치유의 능력을 생산하는 중요한 일을 한다. 왜냐하면 찬양 기도는 치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우리들의 영성 발달의 근거가 된다.

          

ㄴ)<친밀감>(intimacy)

 

심리학에 의하면, 친밀감이란 자기의 정체성을 잃을 염려가 없는 가운데 개방적이며 협조적이며 부드러운 인간관계를 맺는 체험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신학적인 면에서도 친밀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친밀감이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나 다른 인간과의 관계가 생명력과 사랑을 상실한 채, 하나의 기계적인 관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는 친밀감과 깊은 관계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친밀감은 인간발달에서도 영성발달에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ㄷ) < 감사>(gratitude)

 

감사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뿐 만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침 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들 중 감사하지 않은 아홉은 예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였지만, 돌아와 감사한 한 사람은 그로 인하여 예수님과의 관계가 더욱 좋아지게 되었다. 예수님은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책망하셨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용서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과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로 묶여 있는 개념이다(살전5:17-18).        

 

ㄹ) < 소망>(hope)

 

 

소망은 인지적 영역에 속한다기 보다는 정서적 영역에 속한다.  왜냐하면 소망은 가슴과 연결되어 있고 정서와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을 통하여 영원한 소망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하심으로 이 같은 참된 소망을 소유하게 하신다.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은 크리스천으로 하여금 영성을 발달시키는 힘을 가지게 한다. 

   

3. 영적 행위 영역(spirichomotor domain)과 성령의 역사

     

이 항목에서는, 기독교교육이 성령의 역사와 병행하면서 어떻게 행위적 영역에서 영성발달이 이루어지게 하는가를 상고한다.  행위적 영역을 전도와 제자도와 지도력, 이 세가지 분야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려고 한다.   

 

(1) <정의>(definition)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의하면, <행위>(pshychomotor)라는 말은 “정신작용에 의해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 말은 정신작용이 행위로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정신의 작용은 인지적인 면과 정서적인 면을 다 포함하고 있다.  즉 정신작용이란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이 행함으로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행위”란 인지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에 기반을 둔 정신 작용이 행동으로 연결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믿음대로 행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 이상, 기독교교육이나 혹은 크리스천의 삶에서, <행위 영역>이 등한시 되면, 열매없는 나무와 같고 영혼 없는 육신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1) <영적 행위 영역>(spirichomotor domain)

 

기독교 입장에서, 영성발달은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 의미의 <행위 영역>이라는 말에 <영적>이라는 말을 첨가하여, <영적 행위 영역>이라고 한다.  크리스천들의 영성 발달은 기본적으로 영적인 곳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2) <영적 행위 영역의 중요성>

 

영적 행위 영역은, 성령의 역사가 한 인간의 사고와 정서에 영향을 미쳐서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으로, 영성발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수님은 그의 지상사역을 통하여 영적 행위 영역의 중요성을 모델로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야고보의 글에서 행위 영역의 중요성이 잘 이야기된다. 그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약2:26).  어떤 사마리아인의 선행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영적 행위 영역의 중요성이 잘 나타난다(눅10:33-35).    

 

(2) 세 영역의 성격       

 

1) <관계성>(relatedness)

 

인지적 영역과 정서적 영역과 행위적 영역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동은 지성과 감정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육신과 정신으로 분류하려는 노력은 현대문화의 소산이지만, 성경은 인간을 영혼(영)과 육신으로, 혹은 영혼(영)과 정신(혼)과 육신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최근 상당수의 신학자들은 영혼(영)과 정신(혼)과 몸을 한 인간 속에 통합된 전인적 존재로 보는 경향이 많다.  이분설을 취하든 삼분설을 취하든 간에,  인간 구성의 요소들은 모두 한 인간 속에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의 행동은 영혼과 정신과 육신의 결합 속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이 세 가지 영역이 통합된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구원이었다.  피어설(Pearsall, 1988)은 말하기를 아는 것과 느끼는 것과 행하는 것은 영적 발달의 필수 요소라고 하였다.  엘리스(Ellis, 1979)도 처음에는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의 문제 해결을 위해 그 사람의 지성에 호소하면 된다고 믿어서 개발한 <지성요법>(RT=Rational Therapy)이 그 다음 지성과 감성이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는 <지감성요법>(RET=Rational-Emotive Therapy)으로 발전하고, 그러다가 결국에 가서는 행동의 중요성까지 첨가되어 <지감성행동요법>(RETB= Rational-Emotive-Behavior!!! Therapy)으로 발전하여 치료를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곧 인간 치료를 위해서도 지성과 감성과 행위 전체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2) <기독교적 가르침의 상승작용>

 

욘트(Yount, 1996)는 인간 경험의 세 가지 영역을 예수님의 사역에 비교하여 말한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의 사역은 이성적인 요소와 감성적인 요소와 행위적인 요소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한다. 예수님은 선지자로서(마13:57)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심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믿는 도리를 알게 하셨고(인지적 영역), 제사장으로서(히3:1) 사람들을 사랑하고 기도해주고 결국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림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바른 가치관을 갖도록 그들의 마음을 일깨워 주셨으며(정서적 영역),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막15:2) 제자들을 뽑아 훈련시키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는 천국의 통치권을 행사하심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말씀을 행하라고 명령하셨다(행위적 영역).   

 

욘트는 인지적 영역과 정서적 영역과 행위적 영역이라는 심리학적 모델과 예수님의 3가지 직분이 서로 같은 영역에서 일치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 크리스천 모델>과 <세속적 모델>을 접목시켰는데, 양자의 차이점은 크리스천 모델의 중심점은 <그리스도>인 반면, 세속적 모델의 중심점은 <자아(ego)>에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천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그들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의 중심이 된다. 반면 세속적 모델의 중심은 개인적 <자아(ego)>이며, 이 자아가 비크리스천들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의 중심이 된다.  이들의 인생은 자기중심적으로 이루어진다.  욘트에 의하면, 만일 인간이 자기가 마음대로 생각하고 느끼며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한다면, 크리스천의 삶이나 불신자의 삶이 서로 다를 바가 별로 없을 것이라고 한다.

 

(3) 영적 행위 영역에서의 성령과 기독교교육의 접목       

  

성령의 역사가 지성과 감성에 영향을 미쳐 영적인 행위를 함에 있어서, 기독교교육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기독교교육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말씀을 교재로 하고 성령님을 거룩한 교사(Divine Teacher)로 믿기 때문에, 기독교교육과 성령의 역사는 항상 접목되어야 한다.  기독교교육의 목적이 <변화>인데, 참된 변화를 위해서는 언제나 성경말씀의 기반위에 성령의 역사가 능력으로 작용해야 한다.  교육이나 학습은, 지적 영역이나 정서적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변화된 행동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기독교 교육에서 교육의 효과를 기대하려면, 영적 행위 영역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4) 영적 행위 영역의 삼대 분야     

  

<전도>와 <제자도>와 <지도력>을 영적 행위 영역의 삼대 분야로 설정하고 살펴보려고 하는데, 이 삼대분야의 공통적인 특징은 순종과 봉사로 나타난다. 

     

1) <전도>(evangelism)

 

<전도>는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으로써(마28:18-20), 구원의 진리를 알고 느껴고 믿는 사람들이 행하는 인간 구원의 행위이다.  교회성장학자들은, 전도를 현장에 가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과 확신시키는 일로 설명한다.  <현장으로 가는 일(presence)>은 크리스천이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로서 그 발걸음은 위대한 생명 구원의 사명을 수행하는 타자중심적인 선행의 발걸음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proclamation)>은 복음을 말로 표현하는 영적 행위로서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 약을 주는 행위이며 굶주린 영혼에게 영의 양식을 공급하는 위대한 영적 행위이다.  그리고 <확신시키는 일(persuasion)>은 복음 전파자와 성령님이 합동으로 행하는 위대한 영적 행위이다.  이 3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전도를 <3-P 전도 >(3-P Evangelism)라고 한다.  이 전도의 특징은 순종과 봉사로 나타난다. -     

     

ㄱ) < 순종>

 

전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위이며 하나님 중심의 행동이다(마28:18-20).  예수님의 성육신과 사역과 죽으심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서 나온 행위이었다.  그 결과 주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높임을 받고 계신다.  예수님은 100 % 순종함으로 100%의 영성을 보여 주셨다.  이 모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영성발달을 도모하는 자의 길임을 알게 된다.    

       

ㄴ) < 봉사>

 

 

전도는 가장 전형적인 봉사의 형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행위이며 멸망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공급해주는 최대의 선행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봉사는 전도 안에 포함된 중요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예배를 본다”고 하는 말도 서양인들은 “예배 봉사”(worship service)라고 한다.  

 

씽클러(Sinkler)는 말하기를, 모든 영적인 활동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봉사와 사람들에게 대한 봉사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과연 위로 하나님께 봉사하며 옆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행위는 영성발달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을 차지한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성장은, 허공 속에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및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진정한 자아는 하나님과의 관계 및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해석되고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being in Christ)과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봉사(doing service to God and people)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자를 통해서는 구원이 이루어지고, 후자를 통해서 성화 혹은 성숙이 이루어진다.  포스터(Foster)는 말하기를, 예수님의 십자가는 순종의 표요  그가 제자들의 발을 닦아준 수건은 봉사의 표이며, 순종과 봉사는 영적 성숙을 위한 외적 훈련이라고 하였다.  

 

2) 제자도(descipleship)

 

거룩과 성숙을 추구하며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사람들에게 대한 봉사에 초점을 맞춘 제자도는 영적 행위 영역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이제 제자도의 이론 속에 포함된 순종과 봉사의 속성들을 상고해 본다.  

          

ㄱ) < 순종>

 

“제자”(desciple)란 말은 헬라어로 μαθητη? 이며 라틴어로는 discuplus인데, ‘배우는 사람’이란 뜻으로, 스승으로부터 주어진 원리를 받아들이고 따르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제자도>란 개념 속에는 스승에 대한 순종이 포함되어 있다.  성경적인 제자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비옥한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데, 하나님은 자신과 제자들과의 관계를 잘 맺도록 하기 위해 순종을 요구하는 분이시다.  제자도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영성의 핵심도 하나님과의 관계인데, 이 관계는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성경이 말하는 제자도가 따르는 것과 순종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은 영적 행위 영역이 제자도 속에 포함된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 준다.

     

제자도는 <그리스도다움>(Christlikeness)을 향하여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으로서 순종을 요구하는 개념이다(Kwon, 1997).  훌(Hull, 1990)은 지적하기를, 오늘날 교회들의 지도력이 약화되고 교회가 힘이 없게 된 것은, 순종이라는 제자도의 핵심적 요소를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ㄴ) < 봉사>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더불어 사람들에 대한 봉사는 제자도와 영성발달의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하나님중심주의>를 증진시키고, 사람들에 대한 봉사는 <타인중심주의>를 증진시킨다.  예수님은 영성발달의 궁극적인 목표인데, 바로 그 예수님께서 강조하시기를, 자신의 성육신의 목적은 다름 아닌 타인들을 섬기는 봉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타인들을 섬기는 봉사를 하지 않고는 영성발달을 기대할 수 없다. 

 

3) <지도력>(leadership)

 

지도자(leader)란 낱말이 영어로 표기된 것은 주후 1300년대이고, 지도력(leadership)이란 말이 사용된 것은 주후 1800년대에 와서야 사전에 사용되었다고 한다(옥스포드 영어사전).초기의 지도력 연구자들은, 위대한 지도자라는 인물들의 특징이 어떤 것인가를 조사하는 일을 하였고, 그 뒤에 와서는 어떤 타고난 특질들이 그 사람을 훌륭한 지도자로 만든다는 데 의심을 가지게 됨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지도자가 처한 상황을 바꾸는데 관심을 가지고 참된 지도력을 찾아보려고 하였다.  

 

래서 지도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는 등의 생각은 구시대적인 발상이 되었다.   

지도력에 있어 <변화>(change)는 아주 중요한 요소인데, 변화는 학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지도자는 자기의 상급자에 대한 순종과 자기에게 지도를 받아야할 사람들에 대한 봉사의 정신이 있어야 효과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영적 지도력을 발휘하려면, 그 지도자는 영적 지도력의 최고의 상급자인 주님께 대한 순종과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봉사가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이렇게 볼 때, 참된 지도력 역시 순종과 봉사를 그 특징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ㄱ) < 순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인 예수님은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을 뜻을 이루신 분이시다(빌2:5-8).  그러므로 그 분을 따르는 지도자의 지도력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어야 함은 너무나 자명하다.   리쥐(Ridge, 1989)는, 피지도력(followership)과 지도력( leadership)을 동일시하였다.  지도력은 상대적 관계의 개념으로, 따르는 자들이 없으면 지도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력에 있어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함을 보게 된다.  영적 지도력은 따르는 정신을 필요로 하는데, 이 따르는 정신 속에는 순종이 핵심적 요소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ㄴ) < 봉사>

 

순종과 봉사는 지도력의 양면이다.  왜냐하면 지도력은 따르는 자들의 지도자에 대한 순종과 지도자의 따르는 자들에 대한 봉사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지도력이 개발되고 있다.  즉 지도층의 권위보다는 피지도층(따르는 자들)에 대한 봉사정신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지도력이 개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지도력은,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섬기는 자로서의 지도자상에서 이미 소개된 것이다.

       

오늘 많은 교회들이 비전을 잃고 방황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섬기는 자로서의 지도력을 가진 교회 지도자들이 적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포드(Ford, 1991)는 <변화하는 지도력>(transforming-leadership)을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변화하는 지도력이란, 자신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권력을 따르는 자들에게 분배하고, 그 분배한 지도력을 가진 사람들 안에서 자신의 지도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기의 권세를 분배해 주고 그들로 하여금 지도력을 발휘하도록 함으로써, 3년간 지도자로 활동하신 분이 수억의 제자들을 거느리는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이다.  그러한 위대한 지도자이신 예수님은 항상 따르는 자들에 대한 봉사 정신을 가지시고 활동하셨다.  즉 타자중심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영적 지도력의 핵심적 요소이며 영성발달의 참된 증거이다.

 

4) <성령의 역사 안에서의 전도를 위한 제자도와 지도력>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제자도와 지도력은 같은 범주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제자화 사역은 곧 영적 지도자를 양성하는 사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자 도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 지도력에서도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힘이다.  성령의 능력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영적 지도력을 발휘하려는 지도자들 때문에 문제가 온다.  성령으로부터 능력을 받은 사람만이 진정한 영적 지도자이다.    

   

성령을 통한 영성 발달은, 전도에 있어서 제자도와 영적 지도력의 공통인수(common factor)이다. 왜냐하면 제자도와 영적 지도력은 성령 안에서의 영적 성장과 영적 성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 성령을 통한 영적 성장과 성숙이 필수적인 것처럼, 참된 지도자는 성령을 통한 영적 성장과 성숙이 필수적이다.  자신의 영적 성장과 성숙을 도외시하면 그 사람은 영적 지도력을 상실하고 만다.  이상에서 우리는 영적 행위 영역에서의 기독교교육과 성령의 역사를 통합적으로 논의하였는데, 그 초점은, 크리스천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의 영적 행위의 삼대 요소인 전도와 제자도와 지도력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순종과 봉사가 이 삼대요소의 공통인수가 된다는 것을 말하였다.  <전도>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행위임과 동시에 사람들에 대한 영적 봉사이며, <제자도>는 주님께 대한 순종과 사람들에게 대한 봉사 없이는 성립되지 않으며, 그리고 <영적 지도력> 역시 지도자에 대한 순종과 지도를 받는 사람들에 대한 봉사의 정신으로 구성된다.     

 

아래로부터의 <기독교교육>과 위로부터의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크리스천은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한다.  영적 행위 영역은, 그 자체가 독립된 것이 아니고, 인지적 영역과 정서적 영역과 깊은 관계를 맺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사람들에 대한 봉사의 과정을 통해 영성발달이 이루어진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인간 행동의 변화는, 윤리적, 도덕적 변화에 그치지만, 성령의 역사가 개입된 인간 행동의 변화는 윤리 도덕적인 차원을 넘어 영적 차원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제 3장 영성발달을 위한 통합적 모델  

 

통합적 모델을 만드는데, 신학과 교육심리학이 접목되었다.  신학에서는 기독론과 성령론이 관계된다.  영성발달의 목표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기독론(Christology)이 필수적으로 다루어져야 하며, 한 개인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은 성령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에 성령론이 동원된다.  그리고 교육심리학(Educational Psychology)이 동원되는 것은, 영성발달의 당사자인 한 사람의 자아(self)가 영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심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기독교교육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오순절 성령강림은 제자들의 영성과 크게 관계된다.  오순절 이전의 자기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살던 제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 부어 주심을 입고부터 타자중심적인 능력의 사람들로 변화되었다.  기독교교육과 성령론의 접목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이제 그럼 영성발달의 통합적 모델을 만들기 위한 내용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A. 영성발달과 기독교교육의 목표    

 

영성발달의 목표와 기독교교육의 목표는 완전히 일치한다. 그 공동의 목표는 <그리스도다움>(Christlikeness)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바로 영성발달의 목표요 기독교교육의 목표이다.  성령의 역사 안에서 기독교 교육이 이루어질 때, 영성이 발달하며, 그 궁극적 목표는 그리스도다움이다.  그럼 그리스도다움이란 무엇인가?  

 

B. 그리스도다움(Christlikeness)

   

<그리스도다움>이란 타자중심주의와 능력 충만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격의 면에서 타자중심주의요 행동의 면에서 능력 충만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타자중심주의와 능력충만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다움의 반대는 자기중심주의와 무능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그토록 많이 충돌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다움의 반대 위치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의 인격: 타자중심주의  

     

그리스도의 삶은 타인들을 섬기는 삶으로 엮어져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사역과 대속적 죽음은 전적으로 타자중심적인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타인들을 위해 봉사하며 심지어 자기의 목숨까지 인간 구원을 위해 바치는 것이라고 하셨다. (마 9:35, 사61:1-2, 눅4:16-21, 행10:38, 히9:12-14, 빌2:7-8)

 

2. 그리스도의 행위: 능력 충만 

    

그리스도의 행동 가운데는 능력이 동반되었다.  그의 말씀엔 항상 생명력이 충만하였다.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보수적 신앙을 자처했던 바리새인들의 메시지에는 그 같은 힘이 없었다.  만일 힘이 있었다면 그것은 파괴적인 힘이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엔 살리는 힘이 작동하였다.  죄를 사하심으로써 영혼을 살리는 힘이 작동하셨고, 좌절하는 사람들을 향한 그의 위로의 말씀 속에는 정신과 감정을 살리는 힘이 작동하셨다. 육신이 병든 사람에게는 그 병을 치유하시는 권능이 작동하셨다.  심지어 죽은 사람들에게 말씀이 주어졌을 때에는 죽은 자들을 살리는 위대한 생명력이 동반되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특징은, 영과 혼과 육신을 살리는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바로 성령의 능력 충만이 그리스도의 행위의 특징이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죽은 영혼을 살리고, 상처 받은 감정을 치유하며, 병든 육신을 치료하시고,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성숙시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부활에 나타난 권능의 근원은 성령님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승천직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권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행1:8).     

 

어떤 사람이 <힘>을 소유하고 있을 때에, 그 사람의 인격이 자기중심적이면 그 힘은 부정적이며 파괴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인격이 타자 중심적이면 그 힘은 긍정적이며 건설적으로 사용된다.  사탄은 자기중심적인 인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그 힘이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곳에 나타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격은 타자 중심적이기 때문에 그 힘은 긍정적이며 건설적인 곳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중심적 자아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타자 중심적 자아인 <새 사람>을 입음으로써, 성령의 능력이 우리 자신을 통하여 타인들에게 건설적인 능력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브라운(Brown)은 경고하기를, 자기중심적 인격을 가진 사람의 행동에는 사탄의 능력이 동반된다고 하였다.

 

C. 타자중심주의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  

- 두 심리학자들의 이론을 통해서 타자중심주의를 논의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콜 버그(Kohl berg)의 도덕발달론

 

도덕발달은 영성발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도덕성이 없는 영성은 비도덕적 영성이며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의 영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발달 심리학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로렌스 콜 버그(Lawrence Kohl berg)의 도덕발달이론은, 한 개인의 자아와 타인들과의 관계에 근거하고 있다.  

그의 도덕발달이론은 세 개의 수준에 속하는 6 단계로 나누어지는 데 다음과 같다 -    

(1) 첫째 수준은 <보통 이하의 수준>으로 자아 중심적 수준이다.  이 첫째 수준은 1단계와 2단계로 이루어진다.: 제 1단계 -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갖는 단계이다.제 2단계 -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되, 타인에 대하여 일방적인 관심을 보이는 단계이다.    

(2) 두 번째 수준은 <보통의 수준>으로서 자아가 타인들을 고려하며 적절한 관계를 맺는 수준이다. 이 수준은 3단계와 4단계로 이루어진다.:제 3단계 -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으며 자기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단계이다.제 4단계 -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자신을 사회와 연결시켜 사회를 위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단계이다.    

(3) 세 번째의 수준은 <보통 이상의 수준>으로 자아가 타인들을 위하여 공헌하는 수준이다.  이 수준은 5단계와 6단계를 포함 한다:제 5단계 - 사회적 계약을 중요시한다. (예: 안중근 의사).제 6단계 - 만인에게 통하는 윤리적 법칙을 따라 행동하는 단계이다.  완전히 자아를 버리고 타자를 위해서 희생하는 최고의 단계를 말한다. (예: 예수님)

 

2. 호프만(Hoffman)의 감정이입 발달이론 

    

마틴 호프만(Martin Hoffman, 1975, 1979)은 종합적이고도 심도 있게 감정이입 발달론(theory of empathetic development)을 개발한 사람이다.  <감정이입>(empathy)이란 다른 사람의 불쌍한 처지를 보고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진실한 마음을 말한다.  성경적인 용어로는 <긍휼>이 여기 해당한다.  

 

인류학자들의 증거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선사시대의 인간들은 자신을 해치는 환경에 대해 적대감정을 가지는 수가 많았는데, 이때에 한 편으로는 자기를 보호하려는 자기중심적 동기가 강화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도모하려는 순수한 동기가 확립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감정이입 발달은, 다른 사람의 안녕을 위한 순수한 동기에 관계된 이론으로, 이 이론은 바로 타자중심적인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콜 버그의 도덕발달이론에서는 가장 낮은 단계(1단계)가 자기중심주의이며 가장 높은 단계(6단계)는 타자중심주의이다.  그리고 호프만의 감정이입발달이론에서도 감정이입은 타자중심주의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심리학적 측면에서 볼 때도,  <타자중심주의>는 가장 높은 수준의 가치임이 분명하다.  

 

D. 타자중심주의에 대한 신학적 성경적 관점 

  

타자중심주의는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과연 그것은 그리스도다움과 동일시될 수 있는가?  

 

1. 타자중심주의의 성격 

 

 타자중심주의는 하나님중심주의와 타인중심주의를 동시에 포함하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자기(self) 이외의 타자(other)는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과 눈에 보이는 타인들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 

 타자중심주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류에게 강조하신 중요한 신앙의 내용 속에 흐르는 공통인수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의 경우를 보아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핵심을 이룬다(출20:3-17).  성자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주신 산상수훈을 보아도 그러하다.  여덟 가지 복이 모두 타자중심주의로 구성되어 있다(마 5:2-10).  성령 하나님의 아홉 가지 열매도 타자중심주의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갈5:22-23).

 

성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이나 성자 하나님께서 주신 팔복이나 성령 하나님께서 맺게 해주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모두, < 타자중심주의>라는 핵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이 타주중심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바로 성삼위 하나님의 공통된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고자 한다면, 타자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2. 타자중심주의의 중요성  

 

타자중심주의는 어떤 사람이 얼마나 영적으로 성숙했는가를 알려주는 사인이다.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은 거기서 나오기 전에는 결코 영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 수 있다.  영성발달의 목표인 그리스도다움은 바로 타주중심주의로 요약될 수 있다. 타자중심주의는 그 말대로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에 있어 자신을 점검할 수 있다.  

 

타자중심주의는 행동을 잴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영성발달의 정도를 측정하는데 청진기 역할을 한다.  만일 우리의 삶이 자기중심주의(Self-Centeredness = S-C)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영적 미숙아에 불과하며, 만일 타자중심주의(Other-Centeredness = O-C)로 살아간다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그의 영성은 제대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E. 영성발달의 모델  

 

<영성>은 문화적, 사회적, 인간적인 것들을 모두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과의 신비적 관계에만 국한되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영성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사람들과의 수평적 관계를 다 포함하는 전인적인 개념이다.  영성을 하나님과의 수직적 신비적 관계에만 국한시킨다면, 그런 영성의 소유자는, 그 신앙을 생활화할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영성은 신앙이 생활화되게 하는 삶 속에서 발견되는 영성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에 베드로는 여기가 좋으니 산하의 세상으로 내려가지 말자고 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자들을 데리시고 산하로 내려오셔서,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역사하셨다.  이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맺음과 동시에 인간들과의 수평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온전한 영성의 모델을 제자들에게 제시해 주셨다.    

이와 같은 개념을 토대로, <영성>을 정의하면 이러하다 -- “영성이란 성령님의 인도하에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및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를 성경적으로 맺으면서 하나의 자아가 그리스도다움을 향하여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영성발달에서 중요한 4가지 요소들은,

1) 영성이 발달해야 할 주체인 자아(self)와  

2) 영성발달의 목표인 그리스도다움(Christlikeness)과  

3) 영성발달을 시키는 사역의 주체인 성령님(the Holy Spirit)과 그리고

4) 영성발달의 도구인 기독교교육(Christian education)이다.  

 

F. 영성교육을 위한 기독교교육의 실천적 방안 

 

영성이란 우리의 생활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및 우리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의 실제적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영성발달 이론은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그럼, 영성발달 모델을 토대로 성도들의 영성을 어떻게 발달시킬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방법으로 몇 가지를 제시해 본다.

 

1. 영성발달에 초점을 둔 기독교교육   

 

기독교교육은 영성발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영성발달을 위해서라면  교회는 기독교교육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성령의 지도 아래 있는 교사와 학생 

   

기독교교육에 있어서 교사와 학생은 성령의 지도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교육은 영성발달을 도모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성경적 관계는 성령의 개입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성발달은 정신이 행동으로 바뀌어 지는 차원을 넘어서, <영>이 정신과 결합하여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자리에 이르러야 한다.일반교육에서는 학생을 돕기 위해 교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기독교교육에서는 학생이나 교사가 모두 성령의 역사하심을 가장 중요시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교사나 학생이 모두 성령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만 기독교교육의 목적이 달성되며 영성 발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3. 교회 안에 필요한 세 가지 학교

 - 교회 안에 필요한 세 가지 학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 성경학교(Bible School)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것은 물이 없는 곳에서 고기 낚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성령의 역사를 무시한 기독교교육은 메마른 지성주의로 빠지게 하지만, 성령의 인도 아래 행해지는 성경 공부는 영적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기독교교육은 어린이들에게만 적용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어린아이들로부터 청년들과 장년들과 노인들에게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연속적 프로그램이 되어야 한다.

 

(2) 기도학교(Prayer School)

 

기도는 교육을 통해서 될 수 없다는 고정 관념을 버려야 한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  성령님도 기도를 가로쳐 주신다고 한다(롬 8:26).  성령님은 우리가 올바로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기도학교의 교수님이시다.  기도는 정서적 영역과 연관된 영적 활동이다.  기도학교는 정적인 면에서 우리를 도와 건전하게 영성이 발달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칼슨(Carlson, 1992)은 <영적 개혁에의 초대>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기도의 계획이 없는 크리스천은 영적으로 성숙할 수 없다고 하면서, 기도학교의 설립을 강조한다.  이 말은, 되는 대로 하는 기도생활을 가지고서는 영적 성숙이 어렵다는 의미이다.  딕스트라(Dykstra, 1981)는 말하기를, 기도 없는 도덕교육은 실천할 수 없는 짐을 더해줄 가능성이 크며, 기도를 통한 성령의 역사가 동반되는 도덕교육은, 개인이 삶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제공한다고 하였다.  

 

(3) 전도학교(Evangelism School)

 

전도는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행위로 가장 큰 선행이다. 전도는 지식과 정서와 행위가 결합된 영적 행동이다.  전도를 하려면 복음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하고, 시간을 내어 그 사람을 찾아가 그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는 영적 행위 영역에 속한다.  예수님의 사역은 전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자신이 땅에 오신 목적이 전도이었다고 하신다(막1:38).  전도는 크리스천의 지식과 정서와 의지를 총동원한 최고의 사역임이 분명하다.  

성경학교를 통하여 인지적 영역에 변화가 일어나고, 기도학교를 통하여 정서적 영역에 변화가 일어나고, 그리고 전도학교를 통하여 영적 행위 영역에 변화가 일어나서, 지성과 감성과 행동이 골고루 발달하는 전인적인 기독교교육 운동이 한국교회에 힘차게 일어나게 되기를 바란다.  아래로부터의 기독교교육과 위로부터의 성령의 역사가 동시에 일어나서,  자기중심적인 <옛 사람>이 타자중심적인 <새 사람>으로 바뀌는 영성 발달의 역사가, 모든 개인과 교회에 일어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출처:부산백석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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