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배경사 요약
메소포타미아 역사
1)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북쪽의 산악지방에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거쳐 페르샤만 쪽으로 내려왔다. 처음 등장한 인종은 우바이드 족이며 주전 4000년경 수메르족의 출현으로 문명이 시작되는데 이때를 우륵시대라고 한다. 최초의 문자로서 상형문자가 발명되었고 10진법과 60진법이 사용되었다.
2) 메살림 시대에는 쐐기모양의 설형문자(알파벳의 원형)로 발전되었으며 도시생활을 중심으로 왕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메사니파다는 우르의 첫 왕조시대를 열었으며, 아카드 시대에는 제국의 초기형태가 시작되었다. 이때는 도시국가가 중앙집권화된 정부로 대체되었고, 달신 신(sin)과 태양신 샤마스를 숭배했다. 우르 3세 시대에는 sin의 숭배가 유행했는데 입비신 왕 때 아모리 족속의 엘람에게 패망한다. 이후 이들은 바벨론의 함무라비에게 정복당한다. 함무라비는 마리정복을 마지막으로 평화사업에 착수하여 함무라비 법전을 집대성했다.
3) 고대 앗수르 왕국은 아카드 시대의 사르곤 왕국의 속국으로 있다가 독립하여 일루수마를 첫 왕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함무라비에 점령 당해 속국이 되어 200년간 암흑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리 왕국은 60평방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왕궁을 마리에 건립하며, 성경에 헷 족속으로 명명되고 있는 힛타이트 족속이 왕국을 형성하게 된다.
4) 중간 앗수르 왕국은 앗수르-우발릿 1세가 세웠으며 디글랏빌레셀 1세가 군사력을 최절정의 단계에까지 끌어올렸다. 디글랏빌레셀의 군대는 무자비한 군대였다. 전쟁을 하지 않을 때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서 사냥을 즐겼고, 동물원과 식물원 건립, 성벽의 요새화, 궁전과 신저의 건축에 매진했다. 그러나 디글랏빌레셀 사후에 세력이 극도로 약화되었다.
4) 앗수르-단 2세가 즉위하면서 앗수르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살아났다. 앗수르-니라리에 이르러 새 앗수르 제국은 전성기에 들어섰다. 이들은 무자비하게 적들을 학살했으며, 이런 잔인한 행위는 앗수르의 신인 우레의 신에게 드리는 예배로 해석된다. 앗수르-단 3세 때 재앙이 땅을 휩쓸어 약해진 틈을 타서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영토를 확장했고 웃시야 치하의 유다가 잠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5) 앗수르의 대적은 다메섹의 르신이었다. 르신은 유다의 아하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이때 아하스가 디글랏빌레셀에게 도움을 청했고, 디글랏빌레셀 3세는 다메섹을 정복하고 여로보암 2세 때 확장했던 영토를 모두 빼앗고 이스라엘을 사마리아 주변의 작은 영토로 위축시켰다. 이때 호세아는 앗수르의 묵인하에 베카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6) 살만에셀 5세는 이스라엘 왕 호세아 때에 사마리아를 멸망시키고 타지역 사람들은 사마리에 이주시킴으로 혼합된 사마리아 백성이 생겨나게 되었다. 향후 유대인들은 피와 종교가 혼합된 사마리아 백성들을 멸시하기 시작했다.
7) 산헤립은 페니키아, 블레셋 동맹군과 애굽 구원병을 패퇴시키고 예루살렘을 제외한 전 유대 지역을 점령했다. 그런데 갑자기 산헤립의 군대가 붕괴되고 아들에게서 소외를 받는 중 칼라의 신전에서 기도하는 중에 살해당했다. 아들 엣살핫돈은 애굽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길에서 객사했다. 앗수르바니팔이 왕위를 계승하고 문화발전에 기여했으나 그가 죽은 후 엄청난 전비를 충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되었다. 마침내 앗수르의 마지막 왕인 신-살-이스군은 바벨론과의 전쟁 중 자결함으로써 앗수르는 종말을 고했다.
8) 새바벨론제국은 나보폴라살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외교력으로 제국을 유지하는 방법을 택했고 605년에는 갈그미스에서 애굽군대를 격파했다. 아들 느부갓네살이 왕위를 계승하여 597년에는 예루살렘을 공략하여 여호야긴 왕과 그의 모친을 인질로 끌어갔다. 시드기야가 바로 호프라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18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공격한 끝에 주전 586년 유다 왕국을 멸망시켰다.
9) 아벨 마르둑은 여호야긴 왕을 특사로 풀어주었고, 달신을 섬기던 제사장들이 나보니두스를 왕으로 세웠고, 나보니두스는 달신인 신의 신전건립과 골동품 수집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때 고레스의 영도하에 페르샤의 세력이 점점 증대되고 있었다. 결국 장군 구바루가 고레스에게 투항했고 구바루는 나보니두스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이에 페르샤 군대는 싸움도 없이 바벨론에 진주해 들어왔다. 고레스는 주전 539년 바벨론에 해방자로 환영 받으면서 입성했다.
페르샤 제국의 역사
1) 주전 559년 고레스가 메데 제국의 속국인 Anshan을 상속받음으로 페르샤 제국이 시작되었다. 고레스는 메데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메데의 장군 하르파구스가 고레스에게 투항을 하게 됨으로 고레스는 힘들이지 않고 왕권을 이양 받게 되었다. 고레스는 유화정책을 실시하여 메데의 관리들을 유임시켰다.
2) 또한 바벨론의 장군 구바루도 고레스에게 투항하게 되었다. 바벨론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은 마르둑의 제사장들이 신상을 가져가는 나보니두스에게 등을 돌린 것이었다. 이때도 고레스는 유화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고도의 정치적인 전략에서였다.
3) 고레스는 조서를 내려 유대의 포로민들을 귀환시켰는데,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약 오만명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스 4:1) 로 인하여 성전재건 작업은 18년 동안이나 진척되지 않았다.
4) 고레스는 동쪽 국경의 유목민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사했다. 고레스는 정복민들에게 아버지로 칭송받았고, 그리스인들은 스승이자 입법자라고 불렀으며, 유대인들에게는 바벨론 유수를 종식시켜 주었다. 고레스는 페르샤의 사상을 강요하지 않고 점령지역의 문명을 종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5) 왕위를 계승한 캄비세스는 애굽을 정복하고 애굽의 바로로 등극하여 자신이 태양신 레의 아들임을 선포했다. 그러나 본국에서 가우마타가 왕위를 찬탈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캄비세스는 회군하는 길에 죽었다. 하지만 그의 군대는 충성을 다하여 가우마타를 체포하여 처형했다.
6) 이어서 왕이 된 다리우스는 베히스툰의 비문을 세웠다. 이 비문은 한 개의 길이가 18미터에 달하는 규모이며 설형문자 해독에 열쇠를 제공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때 중단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재건 작업이 학개와 스가랴의 지도하에 재개되었다. 다리우스는 고레스의 조서를 발견하고 성전재건에 경비지원을 하도록 지시했다. 다리우스는 절대권력을 행사했지만 법에 관한 문제는 일곱명의 재판장과 협의해야 했고 왕 자신이 내린 명령을 왕 자신도 어길 수 없었다. 이는 다니엘서의 기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7) 다리우스는 도로와 우편제도를 발달시켰는데 우편로는 당시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다리우스는 스키토 족을 공략했지만 스키토 족은 페르샤 군을 내부로 끌어들이는 전술을 사용하여 군비공급을 불가능하게 했다. 결국 다리우스는 철군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트라키야를 정복하여 그리스 본토를 제외한 소아시아 지방을 손에 넣게 되었다.
8) 다리우스가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얻은 사건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이오니아 동맹이 결성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에 페르샤는 그리스 본토에 대한 원정을 시도했지만 해군을 거의 잃고 마라톤 전투에서 대패하게 되었다. 다리우스가 건축한 페르세폴리스의 왕궁은 위대한 고대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9) 다리우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크세르크세스(= 아하수에로 )는 바벨론의 반란을 제압하고 성벽을 무너뜨리고 신전을 파괴했다. 이는 영원한 바벨론제국이라는 개념을 의도적으로 종식시키려는 것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3년간의 준비를 거쳐서 그리스 정벌을 다시 시작했다. 해군에서 고전을 했지만 아테네에 입성하여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신전들을 불태웠다. 이를 목격한 그리스 군은 살라미스에서 사생결단을 하고 싸워 페르샤 군은 대패를 하게 된다.
10) 성경에는 성전 건축을 방해했던 유다의 대적들이 크세르크세스에게도 유대인을 고발한 기록이 등장한다.(스 4:6) 이때 크세르크세스는 왕비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에스더를 왕후로 간택하게 된다. 그리고 하만이 모르드개와 온 유대인을 멸하려고 했을 때 에스더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구원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11) 크세르크세스의 뒤를 이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아닥사스다)가 왕이 되었다. 이때 에스라는 유대인 1500명을 이끌고 7개월여의 여정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에스라는 잡혼문제와 예루살렘성 보수라는 두 가지 문제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유다의 대적들의 음모로 재건작업은 중단되었다. 여기서 느헤미야의 마음이 불붙게 된다.
12)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느헤미야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 보수작업을 허락했다. 느헤미야가 작업을 마치고 수산으로 돌아간 사이에 유대에는 다시 안식일, 잡혼 등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느헤미야는 재차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개혁을 단행하였고, 이와 함께 구약의 역사는 끝이 난다.
13) 다리우스 2세는 펠로폰네수스 전쟁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연합군을 패퇴시켰지만 국운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메데와 애굽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키는 가운데 왕위를 계승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애굽을 재차 정복하고 아테네와 페르샤 동맹을 체결하게 된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이를 적대행위로 해석하고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환관 바고아스에게 살해당했다.
17) 바고아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사촌을 왕으로 세웠으나, 그는 다리우스 3세라는 이름을 취하고 바고아스를 독살해 버렸다. 주전 333년 다리우스 3세는 잇수스 전투에서 대패하고 페르샤 중심부가 알렉산더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다리우스 3세의 죽음과 함께 페르샤 제국은 멸망당했다.
페르샤 시대 유대인의 상황
1) 사마리아인 - 주전 721년 사마리아가 앗수르에게 함락 당했다. 그 후 바벨론, 시리아, 엘람 등지의 이주민들이 사마리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마리아가 함락된 지 1세기 반 후에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바벨론 유수가 있은 후 주변의 이웃들이 유대땅을 차지하고 새로운 생활양식을 발전시켰다.
고레스의 조서에 따라서 유대인들이 귀환했을 때,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소유지가 위협받게 되리라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들도 성전재건작업에 동참하고자 했으나 이들의 신앙을 의심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거절되자 사마리아인들은 성전재건 작업을 방해하게 되었다.
결국 성전재건작업은 완수되었으나 잡혼 문제가 대두되었고, 총독 산발랏은 자신의 딸과 대제사장 요야다의 아들과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그리심에 신전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에 느헤미야는 요야다를 대제사장의 자리에서 축출하게 되었고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원수가 되었다.
2) 엘레판틴의 유대인 - 캄비세스 때에 상당수의 유대인 용병들이 애굽에 들어갔고 캄비세스 철군 후에는 엘레판틴 지역에 남겨진 수비대의 일원이 되었다. 이들은 야훼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신도 같이 섬김으로 신앙의 순결성은 지켜지지 않았다.
3) 회당 - 느부갓네살에 의한 성전파괴와 더불어 제사는 끝이 났으며, 새로운 예배 방식이 요구되었다. 기도와 성경연구의 모임이 포로지에서도 지속됨으로 주간 회당예배가 형성되었다. 회당 즉 쉬나고게는 집회 또는 집회를 위한 건물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유대인들의 영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다. 회당은 열명만 모이면 조직할 수 있었으며 히브리어 성경을 아람어를 비롯한 실용언어로 해석해주었다.
4) 산헤드린 - 대도시에는 23명의 장로단으로 구성된 산헤드린(회당공동체의 관리회)이 있었고, 법정과 민사 및 종교행정의 역할을 담당했다. 매질, 출교, 사형 등이 선고될 수 있었으며 가장 가혹한 처벌은 출교였다. 특히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은 대산헤드린으로서 유대의 최고법정 역할을 하였으며, 대산헤드린의 명령은 유대인이 거주하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인정되었다.
5) 예배 - 회당의 예배의식은 자유로웠으며 자격만 있으면 어떤 유대인이든지 예배를 집행할 수 있었다. 또한 산헤드린의 대리로 범법자를 매로 치는 일과 어린아이를 매로 치는 일도 담당했다. 주후 2-3세기의 미쉬나 시대에는 쉐마를 통해서 율법의 신성함과 중요성을 가르쳤다. 예수님과 바울이 모두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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