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토크>
1. 성령은 누구이신가? (Who Is the Holy Spirit?) |
사도행전 4:13-22 |
홍만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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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
성령은 누구이신가? 성령은 유령이 아니라 인격이시다. 생각하시고(행15:28), 말씀하시며(행1:16), 인도하시고(롬8:14), 슬퍼하신다(엡4:30). 성령은 다른 보혜사이십니다. 창세기부터 성령강림절까지 성령이 어떤 분이신가 알아 봅시다.
1. 성령은 천지창조에 참여하셨다 (involved in creation)
1) 우주창조에 질서를 부여하셨다 (창 1:1-2)
2) 오늘도 난장판과 무질서의 삶을 치료하신다
3) 인간창조에 생명을 부여하셨다 (창 2:7)
4) 오늘도 메마른 흙같은 인생과 교회를 새롭게 하신다
2. 성령은 특정한 사람, 시간, 임무에 역사하셨다
(particular people, time, task)
1) 브살렐의 예술적 사역 (출 31:1-5)
2) 기드온의 지도적 사역 (삿 6:14-16, 34)
3) 삼손의 능력적 사역 (삿 15:14-15)
4) 이사야의 예언적 사역 (사 61:1-3)
3. 성령은 하나님에 의해 약속되었다 (promised by the Father)
1) 새 언약의 약속 (렘 31:31-34)
2) 새 마음의 약속 (겔 36:26-27)
3) 새 백성의 약속 (욜 2:28)
4. 성령은 세례요한에 의해 예수님에게 연결되었다 (linked with Jesus)
1) 세례요한 자신이 성령충만을 받았다 (눅 1:15)
2) 성령과 함께한 사람들 (마리아, 엘리사벳, 스가랴, 시므온)
3) 세례요한이 소개한 예수님과 성령 (눅 3:16)
4) 예수님은 성령 받은 자요 성령 주시는 자 (눅 3:22, 4:1, 14, 18)
5. 성령은 예수님에 의해 온전하게 계시되었다 (predicted by Jesus)
1) 성령은 생명의 영이다 (요 7:37-39)
2) 성령은 능력의 영이다 (눅 24:49, 행 1:8)
3) 성령은 방언의 영이다 (행 2:2-4)
4) 성령은 구원의 영이다 (행 2:37-41)
우리는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은 성령의 강림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제 성령은 더 이상 특별한 과업을 위해 특별한 때에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알파-주말수양회>
6. 보혜사 성령님의 본질 |
사도행전 4:13-22 |
여는 말 |
어느 교회에 신실한 여자 집사님이 있었는데, 남편이 교회에 나오질 않아서 늘 기도하며 꾸준히 권면했습니다만은 따라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아침에 남편이 느닷없이 하는 말이 "나 오늘 당신과 함께 교회에 가려는데"라고 하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이제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가 보다 하고 서둘러서 남편과 함께 교회에 가게 됩니다. 가면서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오늘 어느 목사님이 설교하시나? 모처럼 가는데 좋은 목사님이 설교하셔야겠고 무슨 제목으로 하실까? 어떤 본문을 보실까? 이 첫 번 교회에 나가서 바로 은혜를 받아야 하겠는데 이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며 교회에 나갔는데 주보를 딱 받아보니까 본문이 뭐냐하면 창세기 5장이더랍니다.
창세기 5장에는 사람의 이름만 나옵니다. 이 계보라고 하는 족보가 쭉 나오는데 사람의 이름만 나오니 아, 이거 큰일났거든요. '어떡하나 이거' 거기를 요약하면 그래요. 아담은 930세를 살고 죽었다. 셋은 912세, 에노스는 905세, 게난은 910세, 마할랄렐은 895세, 야렛은 960세, 그리고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고 죽었다입니다.
‘모처럼 남편이 교회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좀 낙심이 되지만은 (수6:1)을 생각했답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면서 조심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마치고 나올 때에 남편이 "여보 등록합시다" 그러더랍니다. 그리고 가서 등록용지를 찾아서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오겠다고 등록을 했어요. 참 이거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래 집에 돌아가서 음식을 잘 차려서 남편에게 대접을 하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늘 특별한 말씀을 들은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떤 말씀을 들었기에 이렇게 결심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오늘 성경에 보니까 아무개도 죽었더라, 아무개도 죽었더라, 이거 대체로 많이 살기는 했드만." 그러나 죽었더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너도 죽어' 그러더랍니다.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있질 않다. 내게는 구세주가 필요하다. 그래서 믿기로 했노라 그러더랍니다.
참 용기의 근본이 어디에 있습니까? 심리학자들이 심층분석해서 연구해 보면 사람은 두 가지 걱정밖에는 없답니다. 하나는 죽을까 하는 걱정이요. 죽음이라고 하는 엄연한 사실이 내게 다가오고 있어요. 그게 첫째고, 두 번째는 죄 문제입니다. 죄에 대한 가책이올시다. 사업이 안돼서 고민하는 게 아니에요. 죄가 생각나서 그래요.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고 할 때도 자녀를 나무라는 게 아니에요. 내 죄 때문에 얘가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 고민이에요. 감기만 걸려도 벌벌 떠는 것이 다 죄 때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에요. 비가 안 오는 것도 뭐 여러 가지로 얘기하지만은 이것도 다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늘이 문을 닫지 않았나, 그래 고민이에요. 죄 문제, 죽음과 죄 문제, 이것이 근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가치관을 배우고 세계관을 배우고 많은 귀한 교훈을 예수로부터 배우겠다 하고 예수를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로부터 복도 받고, 출세도 되고, 성공도 얻고, 무엇인가 예수로부터 권력도 얻고, 예수로 인해서 무언가 내 소원을 이루어보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에요. 예수를 따릅니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몇십 년을 교회에 나왔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중생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사람의 특징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지게 되고, 특별히 중요한 것은 이제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성령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설교말씀을 들을 때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중생하여 순간순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리고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한 단 더 나아가서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하게 될 때 이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만이 아니라, 좀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리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올시다.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인생 존재의 참 비결은 살아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아는 데 있는 것이다.' 성령이 나와 함께 있을 때, 이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올시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의 속성을 아주 단면적으로 확실하게 말해주는 그런 내용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 대표적인 그리스도 인이 지금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습니다. 이 산헤드린 공회라고 하는 것은 당시 유대 나라의 종교정치를 통합한 그런 귀한 국회와 같은 공회입니다. 여기서 생사를 결정합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까지 여기서 재판을 해버립니다. 예수님도 사실은 여기서 사형선고를 받고 빌라도의 손을 의지해서 빌라도를 통해서 사형집행을 한 것뿐입니다. 사형판결은 여기서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 자리에서 재판 받으실 때, 베드로가 저 뒷전에서 벌벌 떨다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 현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섰습니다. 오늘 그들의 특징은 담대합니다. 용기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결정적인 약점이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돈은 있으나 용기가 없어요. 지식은 있으나 용기가 없어요. 여건도 그만하면 괜찮은데 용기가 없어요. 왜 이렇게 쫄아들고 있느냐? 왜 이렇게 비겁해졌느냐? 한번 생각해보세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 충만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의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라고 말합니다. 자기 눈 앞에는 지금 공회의 회원들 71명이 즐비하게 앉아서 아주 무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아주 저 사람들을 아예 다 말살해 버리려고 하는 그런,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를 또 죽이려고 하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하나님을 본 거예요.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하는 의식을 가진 거예요. 사람 앞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받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건, 어떤 말, 어떤 일을 보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의식이 더 충만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그 옛날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보름스 라고 하는 의회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역시 생사권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거기서 현장에 서서 스튜트가르트에 가면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요만한 표식이 있는데,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Oh, God. Here I stand." 이건 유명한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있습니다.' 딱 한마디입니다. 사람 앞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가 섰습니다. 바로 이 의식, 그 정체 의식,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스데반이 순교할 때만 해도 헬라파 유대인들, 왕년의 동료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를 갈며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거기에 보좌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 내가 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에 저 사람들이 돌을 던지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바로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항상 초점을 하늘에 두고 삽니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 의식이 그 충만함이올시다.
독일의 신학자인 '몰트만'이라고 하는 분이 '생명의 샘'이라고 하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면 개인의 모든 삶은 카리스마적 체험이 된다.' 성령에 사는 사람의 경험, 지식, 모든 사건이 전부 카리스마적 의미를 가지게 되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의 문제가 되요. 카리스마적 체험으로 의미가 바꾸어지는 거예요.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요. 모든 일에 하나님과 나와의 은사적 관계, 카리스마적 관계가 되더라는 얘기입니다.
또한 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그대로 체험하고 있는 겁니다. 역사적인 예수,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고 멀리 가버린 분이 아니에요. 이제 영으로 우리 가운데 계셔요. Exalted Christ라고 그럽니다.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Living Christ로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식했어요. 그런고로 표적이 나타나는 것이에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 성전 문에 앉아있는 사람, 하루 이틀 본 게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따라 그 성전에 올라가면서 딱 만나는 순간, 그리스도의 영이 그를 감동해서 '넌 왜 보고 지나가느냐?' 이거예요. 그래서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이 40세 된 이 사람을 향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했더니 벌떡 일어났어요. 모든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우러러보며 하고 있지만은 그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나와 함께 있다고 하는 증거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 거예요. 그것 뿐이요. "어찌하여 나를 쳐다보느냐? 난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이 자리에 나타나셨느니라"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충만함입니다. 내 손으로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다 주님이 직접 나를 통해 역사하는 것뿐이에요. 그리스도께서 지금 살아 역사하고 있다. 그것을 의식하고 그렇게 순종하게 됩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이제 나를 지명했다는 데 대한 감격으로 삽니다. 하필이면 왜 나 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어째서 나 같은 사람입니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고용하시고 나를 사용하시고 나와 함께 역사하느냐 말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필이면 허물 많은 나 같은 사람, 나약한 나 같은 사람, 어지러운 과거를 가지고 사는 왜 나 같은 사람입니까? 사도바울은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를 핍박했고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다. 죄인의 괴수다. 그러나 내가 직분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기셨기 때문이다. 나를 사로잡고 나를 포로해서 나를 통해 역사한다는 거죠. 너무 감격스러운 거예요. 어찌해서 주는 나를 사용하시는 겁니까? 그런고로 이런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는데 누구를 용서 못합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는데 바울의 고백대로 보면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그는 나를 사랑하셨는데 이제 내가 누구를 미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올시다.
저는 좀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게 되고 자기의 어두운 과거로부터 완전히 출애굽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아마 이 문제에 더 신경을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난 베드로의 용기가 가상해요. 왜냐하면, 보세요. 베드로의 과거를 다 알고 있잖아요. 이게 오래 전 된 얘기도 아니고 불과 몇 일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베드로가 도망갔던 사람 아닙니까?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사람 아닙니까? 다 알고있어요. 모두가 알고 있어요. "저 사람이 수제자라고 하면서 도망갔댔다며?" 다 아는 그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가 지금 담대하게 설교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그것이, 그것이 알고 싶어요. 보통문제가 아니거든요.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그게. 그의 어두운 과거를 다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 불학 무식한 것까지 알고 있고 그가 갈릴리 물고기 잡던 어부라는 것까지 다 알고 있어요. 형편없는 인간이다 이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담대하게 나의 모든 부끄러운 과거로부터 완전히 출애굽을 했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용기가 있는 거예요. 과거가 아무리 그의 발목을 잡아도 상관없습니다. 지난날에 내가 누구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기억이 없습니다. 깨끗이 지워버리고 오직 주의 사람으로 주님이나를 쓰신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거만 가지고 역사합니다. 이 얼마나 굉장한 일 입니까?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자기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수 있다는 게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더구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찬송가 20장을 보면 "다 감사드리세" 하는 가사입니다. 우리가 주일 아침마다 자주 부르는 찬송입니다. "다함께 감사드리세"하는 찬송인데 이 찬송가의 역사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이 작사자인 마르틴 린카르트라고 하는 분은 독일의 목사님입니다. 17세기에 독일과 그 모든 구라파에 흑사병이 유행했습니다. 참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좌우간 기록에 보는 대로 이 목사님에게도 하루에 수십 명씩 죽고요, 하루에 오십번 장례식을 했답니다. 자기 아들도 흑사병으로 죽었습니다. 기록대로 보면은 이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이 흑사병 걸린 사람들을 돕는다고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돕는다고 하다가 다 전염 되가지고 수도원에 거미줄을 치게 되었습니다. 흑사병으로 막 죽어갈 때입니다. 거기에 대한 얘기가 많이 있잖아요. 영화도 많고. 이때에 자기 아들도 죽었는데요 목사님은 "다 감사드리세" 라고 하는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다 감사드리세 온 몸과 정성 다하여 다 감사드리세. 본 회퍼 라고 하는 독일의 신학자는 말합니다.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은 간단하게 구별이 된다. 그것은 기독교인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원망과 불평하는 것은 세상사람이요 오로지 감사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은 죽음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세계를 전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저들이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예수부활, 머지 않아서 곧 나 자신이 부활이라고 믿고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향해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들은 만족한 감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초월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두 가지 걱정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는 '죽을까' 하는 걱정이요 또 하나는 '벌 받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두 가지 걱정은 없습니다.
그리고 충만합니다. 충만한 체험. 그리고 성경적으로 이성적으로 사건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충만한 감성, 충만한 의지,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런고로 만족합니다. 여기에 충만함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이올시다. 여기에 새로운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학무식했다고 합니다. 아그람마타, 글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러나 여러분 아시는 대로 용기는 지식으로 오는 게 아닙니다. 지탄 없이 말하더라. 용기는 환경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충만한 가운데, 오직 충만함이 사랑으로 향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로마를 가면 한 번씩 다 보게 되는 원형극장이라고 있지요. 원형경기장. 그 옛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거기서 수십만 죽어갔습니다. 거기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기록 속에 이러한 유작이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나는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으십시오. 나는 사랑의 숨결을 불어낼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사랑한다고 절규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져버리십시오. 나는 사랑의 재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워 주십시오.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의 증오로 가득한 마음을 녹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웃으면서 그들은 죽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만함입니다. 근심, 걱정, 모호함과 두려움, 다 사라집니다. 깨끗한 영혼, 밝은 미래, 오직 사랑으로. 그래서 여유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담력이 있습니다. 여기에 진실한 용기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으로 인한 이 위대한 용기와 담력이 오늘 우리가운데 또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넉넉한 가운데 살면서도 근심이 많고, 좋은 여건을 바라고 살면서도 용기가 없습니다. 어느 사이 이렇게 비굴해졌고 비겁해졌고 초라해졌음을 고백하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제 이 모든 정욕과 우리를 얽매이는 시험으로부터 벗어나서 성령 충만한 자유인이 되게 하시고 이 담력과 위대한 용기 속에서 승리 생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보혜사 성령님을 아시나요
? 본 문 : 요 14: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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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16-20)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자 마자 그들은 전에는 결코 보지도
듣지도 못한 희한한 일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행진에
나가는 앞길에 갑자기 낮에는 거대한 구름기둥이 서서 하늘을 마치 양산
처럼덮어 태양을 가리웠고 밤에는 불기둥이 이스라엘 백성앞을 대낮같이
밝혀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원수의 기습이나 사나운 짐승들의 공격을 막아주었
으며 밤이면 급속히 공기가 차가와지는데 그 차가워진 공기를 훈훈하게 데
워서 의복이나 이불이 부실한 그들을 따뜻하게 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
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실은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보여주시는 뜻깊은
비유입니다. 우리가 죄악의 애굽세상에서 우리는 우리주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고 세상에서 신앙세계로
돌아오면 우리가 전에 듣지고 못하고 보지도 못한 희한한 일이 우리
속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령이 구름기둥과 불기
둥과 같이 우리의 영혼 속에 들어와서 거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회에서는 결코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오직 예
수를 믿을 때 우리 속에 임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실 때 밤같이 어둡고 캄캄한 시련을 당할
때면 낙심과 절망으로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시고 훈훈하게 해주셔서
믿음과 용기를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또 우리를 보호하시고 밝은 길로 인도하시며 삶의 생존경쟁에서 힘
들고 지쳐 땀을 흘릴 때 우리를 가리워주시고 상쾌하게 해주시고 쉬게 해
주시고 기뿜과 소망을 주심으로 이 광야같은 세상을 승리로 살아가게 만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1. 성령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3년 반 동안 제자들과 함께 이땅에서 사역하시다가 아
버지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의 심정은 처참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3년여 동안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비참하게 죄인의 한 사람처럼 잡혀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여 세상을 떠난다고 하자 제자들은 더욱 갈등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
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한복음
14: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처음 보혜사이십니다. 예수
님께서는 우리의 처음 보혜사이십니다. 주님께서 3년여 동안 인도하고 가
르치고 보호하고 돌보고 도움이 되신 처음 보혜사이셨고 십자가에 죽었
다가 부활해서 승천하시지만 다른 보혜사를 하나님이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다른 보혜사는 바로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
파라클레토스'라는 말로써 '파라'란 말은 '곁에'란 말이고 '클레오'란
말은 '부른다'는 말인데 이것이 합성어가 되어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하나
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항상 곁에 계신 자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러
므로 예수님이 제자들 곁에 항상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떠나고 난 다음
그리스도가 보내신 성령은 예수님의 제자들 곁에 부르심을 받아 항상 같
이하여 도움을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보혜사로 오셔서 죄악과,질병,저주와 죽음에서 건져
주셨고 그후에 하늘에 오르사 보좌 우편에 앉으셨고 그 다음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께서 오셔서 성도를 도와주시고 신앙생활을 잘하게 하시고 천국 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님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여러번,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셔서 낙심한 제자들을 다 모으시고 감람산에 오게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초대의 명령을 내리시고 그들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해 올라가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4절로 8절에는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
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
로되¡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
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
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주님의 말씀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이 말씀을 듣고 20명의 제자들은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모
여서 열심히 열흘동안 성령오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순
절날이 이르자 갑자기 하늘로써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머리 위에 임하자 그들이 곧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 땅에 강림하신 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셨고 아버지께로
부터 성령을 선물로 받아 제자들에게 부어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갑자기
성령의 비추심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 비참한 실태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그리스도 복음의 종말인줄 생각
하였는데 성령이 와서 비추어주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바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요,하나님의 은사요,
하나님의 섭리란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몸으로 체험하고 뜨겁게 사
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속에 들어과 계심으로 말미암아 하
나님은 살아계시고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우리와 같이 계시다는 것을 몸
으로 체험하고 그들은 뜨겁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천국의 소망과 기쁨이 넘쳐 흘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겁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강하고 담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살면 전도요! 죽으면 천국이다! 두려울 것이 뭐냐? 강하고 담대한 마
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전도의 열심히 마음에 폭발하여 그들은 일어나서
온 예루살렘을 복음으로 채우고 유대와 사라마리아와 땅끝까지 물밀 듯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밀고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과 행
동에 하나님의 능력이 따라나서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든자가 고침을 받고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당시 사회의 낮은 계층이 소수의 사람들이 일어나 인류와 세계 역
사를 뒤바꾸어 놓는 위대한 역사를 베풀게 된 것입니다.
3. 성령님이 도와주시기를 원하시는 일들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와 계시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 속에서 우리 내
적인 계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11장 2절에는 "야웨의 신 곧 지혜화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야웨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 속에 와 계신 성령은 지혜의 영
이신 것입니다.
지혜란 무엇입니까? 어려운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가 부족할 때 하나님께 구
하면 넘치는 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금이나
은을 구하지 말고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이 지혜로서
와 계시기 때문에 항상 성령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성령께서는 지혜의
영이시며 총명의 영이십니다.
총명이란 사물을 깨닫는 능력입니다. 마음이 아둔해서 사물을 때
닫지 못합니다. 성령께 민감한 사람이 되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빨리
깨닫고 구하여 대처해야 됩니다.
이 총명은 바로 성령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빨리 사태를 깨닫고
거기에 대처하면 사고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또 새로운 세계를 열어갈
수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모략의 영으로 우리속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일을
성공시키는 가르침을 모략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원만한 가정을 가질
수있는가? 어떻게 하면 좋은 부부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자녀를 잘 기르는가? 어떻게 하면 사업을 잘 성공시킬 수 있는가? 이런
여러가지 일에 모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도한 상담가이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를 당하면 지례
로운 사람에게 카운셀링을 받으러 가지 않습니까?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이
바로 상담가이십니다.
성령은 또한 재능의 영입니다. 여러 가지 기능을 주셔서 능력있게
인생을 살게 합니다. 사람들 각자를 주님이 택하셔서 여러사람에게 특별한
재능을 주셔서 그 재능을 가지고 어떠한 사람은 가르치기를 잘하고, 어
떠한 사람은 설교를 잘하고, 또 어떠한 사람은 기계를 잘 만지고, 주님께서
주를 믿는 사람에게 여러가지 특별한 재능을 주셔서 이를 가지고서 우리
하나님께 봉사하고 인류에 봉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영이신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지식의 영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속에 사물을 대한 정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얻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경외케 하는 영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케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항상 성령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 하나님을 섬겨라,... 그래서 마음에 늘 경건함을 가지고 죄악을 두려워 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을 두려워 하고 경건하게 하나님을섬길 수 있도록 회개시키는 이런 역사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야웨의 영으로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나타내는 영입니다.
성령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우리가 거울을 들여다 보면 거울에 우리
얼굴이 보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들여다 보면 성령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령께서 계시의 영으로써
우리속에 들어와서 이런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에 이것을 알고 구하면성
령께서 역사하여 주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에게 와서 외적인 능력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치료의 은사를 주셔서 병을 고치게 하시고 기적을 행
하시는 은사를 주셔서 기적을 나타내시고, 믿음을 주시는 은사를 주십니다.
예언의 영은 말씀을 증거하는 은사를 주시고, 섬기게 하는 은사를 주
어서 잘 가르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위로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를 주어서 행정력을 가지고 잘 다스리게 만들어 주시기도
하시고 긍휼을 베푸는 은사를 주어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도와서 고아와 과부를 잘 감싸주는 이러한 은사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
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
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
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다"
(로마서 12:6-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은사를 성령께서 각
자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내게 어떠한 은사가 있는 지를 살펴보고 그 은
사를 받은데로 열심을 다해서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4. 성령님과 매일같이 교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서는 "바울선생은 축도하기를 주 예수 그리
수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
을지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2000년전 교회 안에 와서 거하
시고 세상에서 역사하시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속에와서 지금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교회요, 예수믿는 사람의 마음안에 와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보좌에 계시고 예수님 보좌우편에 계시고 성
령은 우리속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통해서 아버지도 예수님도 우
리와 함께 거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자이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성령님을 대해야 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인격적인 무시를 당하면 이성을 잃어 버립니다. 무시당하는 아내가 집
에서 온전한 아내의 역살을 할 수 없고 무시당하는 남편이 남편으로써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가운데 와 계신데 우
리가 성령님을 무시해 버리면 성령님이 소멸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
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 늘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성령과 범사에 의논해야 됩니다. 성령은 우리들 돕는 하나
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일에 상의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에 맞고 아
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그 길로 이끌어 달라고 성령께 늘 도움을 구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절대로 당신 자신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내가 성령이다! 나를 경외하라! 그런말 절대 안합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을 나타내고 예수님만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들보고
내가 성령이니 내 말을 들어라! 이런말 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하시고 당신 자신은
언제나 감추십니다. 현명한 주부가 언제나 자녀들을 기를 때 아버지 중심
으로 "이것은 아버지의 뜻이다! 네 아버지는 형편없는 사람이다! 내 뜻대로
살아라! 이래서 가정을 흐트러 버리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우리를 집중시키고 당신은
감추어 버리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가 예수를 믿자 마자 곧장 우리속에 와서 계십니
다. 그때 성령은 바로 구원의 영으로써 와 계십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
에는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사
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를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
구든지 믿는 자는 성령을 이미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도 더 간절히 기도해서 나만 성령님을 모시고 있지말고 이 성
령의 은혜를 온 천하에 나누기 위해서 성령충만함 받기 위해서 우리 기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인격자이기 때문에 성령님과 끊임없이
교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기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놓지
않고 너희에게 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성령없이는 모두다 고아와 같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무장한 사람은 어떤 사람
보다 위대한 능력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영혼이 발 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되며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않고 위에가고 아래가지 아니하며 남에게 꿔줄지언정 꾸지않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의 영이되시고 총명의 영이 되시고 모략의 영이되시고 재능의 영이되시고 지식의 영이되시고 하나님을 경외케 하는 영이 되시고 야웨 아버지와 예수님을 계시하는 영이 되셔서 우리에게 도저히 세상사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영원한 하늘에서 원천적인 능력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하고 축복받은 사람은 자유롭게 예배드리고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고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고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는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남의 원수가 된다 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자기 중심이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육신을 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했습니다. 주일날 이런 유혹을 받습니다. 교회 하루쯤 결석하고 식구끼리 산이나 들로 하루여행을 다녀오자. 이건 절대 성령의 생각이 될 수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이요, 자기 의지기 때무에 행해마ᄂ도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가 주일날 교회 안가고 놀러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성령께서 그들을 보시면 얼마나 탄식하시고 우리 마음도 얼마나 무겁습니까? 놀면서도 불안한 법입니다. 제가 시카고에 있을 때 박세직 국회의원을 만나서 목사님들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분은 여의도 침례교회에 다니며 신앙 좋고, 체험이 많으신 분입니다. 정치를 하면서 주일날 골프장을 갔답니다. 골프장에서 정치적 중대 사안을 나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골프장 안가면 정치하기도 어려운 지경입니다. 그러나 늘 마음이 무겁고 하나님 앞에 죄스러워서 굳게 결심하고 주일날 절대로 가지 않기로 했답니다. 그 후로 마음의 평안이 오고 하나님이 더 좋은 길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의 모든 행동이 그분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도덕적이고 지성적인 사람도 육체의 본능대로 사는 사람보다 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어서 성경도 잘 압니다. 헬라인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적이고 지적인 사람들입니다. 로마인은 법과 질서, 명예를 존중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건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천국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미국 교포의 가장 큰 문제는 웰페어 법안의 통과입니다. 미국에 살면서 영주권만 받으면 노후에 국가가 모든 생활을 책임지고 공급해 주었습니다. 이제는 영주권으로 안되고 아예 그 나라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다 늙으신 노인들이 시민권을 따야하는데 영어를 할 수 있나요? 큰 걱정에 쌓여 있습니다. 그 나라 시민권자에게만 혜택을 줍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저 교회에 등록만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깊은 영적 관계를 맺고 성령의 진리를 배워가고 기도로 영적 교제를 하고 생활이 믿는 자처럼 건전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 본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 시민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나라의 법과 질서를 따르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온전히 떠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슨 힘으로 삽니까? 내 힘만으로는 안됩니다. 비록 쓰러지고 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실패하고 고독한 일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항상 나를 다스리는 중심, 그 힘이 따로 있습니다. 성도라 해서 실패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넘어지고, 실패하고, 상처 입고 아파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지금 나를 강하게 붙드시고 다스리시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 결과로 기쁨이 있고, 평안과 생명이 있습니다.
회개하면 성령님이 임하십니다(행2:38).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이 임하십니다(행 10:44).
성령님을 모신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있지 아니합니다(과거).
성령님을 모신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고 죄에 대하여 죽는 삶을 삽니다 (현재).
성령님을 모신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몸의 행실을 죽이고 삽니다(미래). 이처럼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이야말로 과거 현재 미래가 예수 안에서 승리하는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부디 바라기는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눈만 뜨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생각하는 육신의 사람이 되어서 는 안됩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절대로 평안이 없고 만족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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