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설교의 방법
교회가 있는 곳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되어져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중생을 일으키기 위한 수단이라 불렀고(벧전 1:23), 또 그 말씀이 당시에 전도된 것이라고 밝혔다(벧전 1:25), 그 복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전달되어져야 한다. 사도바울은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했고(딤후 4:2), 디모데가 바울에게서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 곧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부탁해야 한다고 일렀다.(딤후 2:2) 사도 바울은 설교로부터 중생에까지의 온 과정을 이렇게 요약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설교자의 임무는 자기의 생각이나 체험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인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가장 잘 설교한 것인지의 문제를 두고 지난 전 기독교 세기 동안 씨름이 계속되어 왔다. 이런 노력의 와중에서 20세기 초반에는 어떤 특별한 방법, 소위 구속사적 방법이란 것이 일어났다. 필자는 화란 캄펀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이 방법대로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에 화란에서 목사로서 설교하고, 또 한국에 있으면서 고신대학에서 설교하는 동안 계속 이 방법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려고 애를 썼다.
그럴때마다 소위 구속사적 방법으로 따라 설교를 하였다. 이 방법의 발전과 개관을 위해서는 영어와 한글로 나와 있는 책들 중에 다음의 것들을 참고하는 것이 유익하다. S. Greidanus, sola Scriptura) 제 4장 : “구속사적 접근”과, C. Trimp의 『설교학 강의』등. 구속사란 말에 대해서 C. 트림프는 그 표현 자체가 분명치 않고 여러 다양한 학설들에 따라 다르게 사용된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에서 이 방법의 몇 가지 근본적 입장을 간략하게 다루어 보겠다.
1. 하나님 중심과 우선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살펴볼 때 거기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를 보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은 이 세상에 살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에게 약속과 명령을 주시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약속하시고 성막의 제사에 대해 명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기도 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주시고 백성의 대부분은 그를 거부하지만 그를 믿는 자도 있다. 승천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온 사방으로 보내고, 족속들은 그 분을 믿기도 하고 믿지 않기도 한다.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역사에는 두 가지 극점, 곧 하나님과 인간이 있다. 그 역사에서 하나님은 항상 앞서 나오시고 하나님이 선제권을 가지시며 규칙들을 선언하시며 구원을 이루신다.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다양한데 믿음, 용기, 신뢰또는 화, 겁 또는 불신앙, 불순종등이다.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그 역사의 서술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앞서 가심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성령에 나타난 어떤 사람의 경우에도 그의 전기를 만들 수 없다. 또 가령 베드로와 같은 사람의 경우에도 우리가 그의 심리적 성격의 한 측면을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그의 전 심리전 구조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성경이 개인의 생애와 성경을 위한 필요를 자료를 다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개인의 차원 뿐만 아니라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묘사하기에도 자료는 부족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역과 그분이 어떻게 행하시는지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설교하는 자는 항상 하나님과 인간에대해 말해야 한다. 하지만 설교자는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기록된 역사는 하나님의 행동으로부터 묘사되고 그 범위 안에서 인간적 반응이 나타난다. 구약에 기록된 역사를 연구할 때 설교자가 물어야 하는 첫 번째의 질문은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고, 무엇을 원하시며, 무엇을 의도하시느냐는 것이다. 또 그 시각으로부터 다음으로 설교자는 인간의 행동을 고려해야 한다. 이 때문에 창세기 12장과 26장 설교에서는 인간의 거짓말이 중심요소가 아닌 것이다.
성경 인물들의 모범에 집착하면 핵심적인 것을 놓치고 만다.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며, 성경을 잘못 적용하게 된다. 성경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알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라면 성경의 본문 말씀들을 하나님 중심으로 설명하고 적용해야 한다.
신약에 기록된 역사에 대해서도 이 규칙은 마찬가지이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과 사람이 서로 만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때에도 예수님과 그 분의 사역과 말씀이 중심적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사람이 예수님앞에서 어떻게 만나면 되느냐의 문제에 적용시켜서는 안된다.
기록의 목적이 분명히 예수님을 설명하는 것에 있는 것이라면 설교에서도 이것이 핵심적인 것이어야 한다. 복음서 기록이 목적이 바로 이것이란 사실은 요한복음 20:30,31에 분명히 나타난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하려 함이니라”(참고, 막 1:1, 행 1:1,2).
성경에서 역사가 이야기되어진 방식, 곧 삼위 하나님이 우선적 위치를 가진다는 사실이 설교의 초점을 결정하는 것이다.
2. 역사의 발전
우리가 역사를 진지하게 대할 때 역사에서 항상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사건과 상황을 접하게 된다.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과 에덴 동산을 창조하셨지만 그것은 없어져버렸습니다. 첫 세계는 홍수로 멸망되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로 가나안 땅에서 살았지만 이스라엘은 그 땅을 정착할 소유지로 받았다. 제물이 바쳐진 것은 아벨 때로부터 아주 오래 되었지만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에 대한 특별한 규칙들을 주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처음 왕이 없었지만 나중에 왕이 그 백성을 다스렸다.
신약에서는 상태가 다시 많이 변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그는 구약의 제사를 성취하셨다. 그 당시에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중에 사셨지만 지금은 하늘에 계신다. 그 후 기간은 사도들의 시기였는데 지금은 한사람의 사도도 없으므로 상황은 다시 많이 달라졌다. 이처럼 역사를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은 그 역사의 발전과 변화를 부인할 수 없게 된다.
발전이라고 말한다. 해서 상태가 항상 더 나아지고 또 하나님의 백성이 뒤로 미끄러지지 않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상태에는 자주 불순종, 쇠퇴, 배반 등이 나타남을 보게 된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지만(창 5:22) 그 후에 셋의 후손이 그렇게 하나님과 교제하지는 않았고 그들의 죄로 인해 홍수로 멸망당하기도 했다.
다윗왕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전성기였으며 그를 이은 왕들 중에는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왕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우리는 역사의 발전을 생각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왕이 지은 죄는 다윗의 위치에서부터 판결되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방의 적으로부터 안전을 주셨기 때문에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지 않은 것은 더 심한 죄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족속과 그들의 신보다 능력많은 분이심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들의 죄의 벌은 바벨론 포로였던 것이다(왕하 17:18).
그 발전은 작은 변화에서도 나타나고 큰 변화에서도 나타난다. 그 작은 변화라도 무시하면 아브라함의 거짓말과 이삭의 거짓말에 대해서 같은 방식으로 설교하게 된다. 그러나 그 변화를 주목할 때 이 두 사건 사이의 상황이 완전히 다른 것임을 쉽게 볼 수 있다.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경우에 이런 거짓말이 불필요한 것임을 증명하신 사실은 이삭이 같은 방식으로 또 한 번 거짓을 행해 보려 한 것이 더욱 나쁜일임을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양식 구할 것을 깨닫지 못함을 잘못된 일이다(막 6:35-44). 하지만 그들이 두 번째의 같은 상황속에서 바로 예수님께 양식을 부탁하지 않은 것은 보다 더 심한 일이다(막 8:1-10). 또 그들이 그 후에 계속 음식에 마음을 두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것은 가장 잘못된 일이다(막 8:14-21).
이런 변화의 다른 예로서 세례 요한의 의심과(마 11:2,3) 제자 도마의 의심(요 20:25)을 대조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는 두 사건 사이에 발전되었고, 상태는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참으로 약속된 메시야인지를 물었고, 도마는 예수님이 참으로 부활하셨는지 믿지 못했다.
발전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우리들 간에도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스라엘 애굽에서 살던 당시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상황 속에서 돌아가지도 못한다. 우리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 과거의 사건을 돌아보고 그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지를 물어볼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되풀이 되지 못한 일인데, 우리는 오늘날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태어나야 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탄생이 오늘 우리에게 결정적 사건이 된다. 성탄절 설교는 그리스도가 태어난 사실이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야 하겠고 청중들로 하여금 그 의미대로 예수님을 믿도록 권면해야 하겠다.
오순절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우리는 오순절날이 있던 당시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건을 목격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그 사건에 대한 설교는 청중들에게 그 당시 목격자들과 같은 것을 경험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베드로는 그것을 오순절날의 설교에서 권면하지 않았고, 바울도 한 번도 오순절 체험을 되풀이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다. 오순절 사건에 대한 설교는 청중들에게 그 사건의 의미를 설며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를 받아들이도록 권하는 것이어야 한다. 오순절이 지적하는 사실은 구약과는 달리 신약교회에 성령님이 거하시는 상태의 시작이다. 설교는 교회로 하여금 바로 그 성령님의 인도와 능력으로 살도록 이끄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3. 구원
이상에서 ‘구속사적’이란 말의 ‘역사’에 해당하는 것을 간단히 살펴 보았는데 이제 ‘구속’이란 면을 생각해 보겠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적 특징을 가지는 동시에 구원의 특징도 가진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교제하시는 중에 일어나는 몇몇 재미있는 사건들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수세기 동안 구원을 이루어 오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것을 기록한다.
구원의 말씀은 역사를 통과한다. 구원은 낙원의 첫 범죄에 이어 뱀의 씨가 여자의 씨로 인하여 공격당할 것을 하나님께서 선언하셨을 때 처음 계시 되었다. 구원에 대한 계시는 점차 풍부해졌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장들에게 그것을 약속하시고(창 12:2,3), 또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위하여 피흘림이 필요한 것을 보여 주셨다. 광양에서 선언된 또 다른 규칙들도 구원의 여러 면을 보여 주었다. 예를 들어 문둥병에 대한 계명을 통해서는(렘 25:8이하) 구원의 결과를 지적하셨다. 그 후에 하나님은 다윗의 왕통을 통해 구원자가 일어날 것을 알려주셨고, 구원자의 사역에 대한 여러 가지를 예언자들을 통해 알게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구약의 성취자로 오셨다(요 5:39).
성경은 구속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까 당연히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적 위치를 가진다. 그리스도의 중요성은 단지 그의 행동과 말씀을 기록하는 복음서에 한정되지 않고 앞에서 본 것처럼 구약에도 해당된다. 또 예수님의 중심성은 그 분이 승천하신 후에도 계속된다. 바울의 서신서중에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이 수없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지 그리스도를 통해섬나 가능한 것을 말한다.
이상은 설교자가 모든 설교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을 습관적으로 언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에대한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하면 곧 식상하고 말 것이다. 오히려 어느 설교에서 든지 설교하고자 하는 본문이 그리스도와 그 분의 구원과 어떤 관계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설교자는 여러 방면으로부터 구원을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성경에는 구원이 광범위 하고 폭넓은 영향력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구원을 영혼의 구원과 관련하여 말할 때에라고 죄의 용서나 영생에 국한되지 않는다. 죄는 영혼에 제한되지 않고 생활 어디에나 영향을 미치는 요소인 것처럼 영혼의 구원도 기독교인의 생활 어느 면에서든지 나타나져야 한다. 이 때문에 권세자 모두가 그리스도 아래에 있는 것으로 말하는 본문(엡 1:20,21, 골 1:17)에 대한 설교는 정부의 임무를 다루면서도 이는 구원과 관련된 것이다. 또 가정생활과 그리스도의 구원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엡 5:22-6:9, 골 3:18-4:1, 벧전 2:13-3:7) 필자의 설교집에는 에베소서 6장의 설교를 예로 들었다.
구원이란 주제 아래 또 다른 요소가 들어가는데, 곧 구원의 중심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도 설교에서 언급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그 위에 있다(요 3:36). 또 그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려고 할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 3:18). 하나님의 명령의 목표는 우리는 하여금 죄에서 구하기 위한 것인데, 그 명령을 순종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킨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를 여러 많은 이야기로 제시하고 있고, 설교자는 그것들로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필자의 설교집에는 그예로써 레위기 10장과 마태복음 22장의 설교가 나온다.
<고재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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