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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악의 기원

하나님아들 2012. 9. 3. 23:30
악의 기원


박희본



사단의 타락

우리가 인류의 원죄, 즉 죄의 시작에 대해서 알고자 하면, 우리는 먼저 사단의 타락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 14장 12∼14절 그리고 에스겔 28장 11∼19절을 보면 루시퍼는 본래 빛의 전달자라는 직분을 가진 피조물 중에서 가장 탁월한 존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한 빛이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자로 지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기를 스스로 높여 독립적인 자기중심성을 나타낸 것이며, 이기주의를 추구하는 자아만족적인 최초의 죄를 진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무언가가 되어보려고 시도한 것인데, 한마디로 피조물이 하나님이 되어보려는 어리석고 교만한 패역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최초로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려다 추방을 당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나 자기 왕국을 세웠기 때문에, 마귀 곧 하나님의 대적자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어둠의 주관자 사망 권세를 잡은 자 혹은 공중권세를 잡은 자 즉 지금 불순종하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는 악령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기로 작정을 했기 때문에 완전히 거꾸로 된 왕국을 세운 것입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뒤바뀌어 있습니다. 그에게는 악이 선이고 선이 악입니다. 그는 마땅히 미워해야 할 가증한 것을 기뻐하며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미워합니다. 그는 하나님처럼 자기를 비운 자아가 아니라 자기로 가득찬 자아이며, 의존적인 자아가 아닌 독립적인 자아이며, 얻지 말아야 할 이기적인 자아의 영역으로 들어간 최초의 피조물로서 그는 죄의 영, 죄의 본체가 되었습니다.

한편 하와의 범죄는 사단처럼 의도적인 범죄는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해 디모데전서 2장 14절은 '그가 꾀임을 받아 죄에 빠졌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와는 사단의 거짓말에 속임을 당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될 줄로 잘못 알고 하나님께 범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꾀임에 빠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의도적인 범과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단처럼 하나님께 적개심을 가지고 범과한 것이 아니고 그의 아내에 대한 육신적인 멍에 때문에 범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반역했다기 보다는 육신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는데 더 큰 관심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죄는 영적이라기 보다는 육신적인 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영적인 죄요 근원적인 반역의 죄를 지은 악의 영이요 죄의 본체인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을 살펴보면 몇가지 중대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이끌어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도록 명령하셨는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또 다른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우리는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는 말씀으로부터, 어떤 침입자에 대한 암시를 받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두 나무는 특별한 의미가 담긴 상징적인 나무로서 영생과 사망을 갈라놓은 중요한 시금석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어진 명령은 먹는 행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행위인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피조된 인간이 받았던 유일한 명령은 믿는 것 곧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먹는 행위는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명령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라"는 명령과 일맥상통하는 명령인 것입니다. 이 명령은 긍정형이지만 에덴 동산에서 하신 명령은 부정형이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명나무의 실과는 먹으라는 명령이 없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담이나 하와가 생명나무에 어떤 관심을 가졌다는 기록도 볼 수가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는 스스로가 그 필요성을 인식하여 자발적으로 그것을 취하기까지는 사실상 그것이 자기의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억지로 생명나무 과실을 먹도록 강요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신이 누구며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납득하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명령은 금지하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교육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유한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서 납득하는 가운데 행동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고 더 이상 혼돈하거나 흐리멍텅하게 살지 않고 진리의 길을 믿음으로 걷지 않으면 안됩니다.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 즉 받아야 할 것과 받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히 구분할 줄 모르면 우리는 계속 혼돈 속에서 사단의 노략물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가 분별력을 가지고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처음부터 유혹받아 넘어질 가능성이 짙었지만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셨던 것입니다.

수용적인 존재 아담

그러면 생명나무 과실은 무엇을 의미하며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생명나무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그 과실은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의도는 인생들이 그의 아들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고 살면서 영생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먹는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인간은 수용적 피조물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그릇처럼 무엇을 담고 살고 집처럼 누군가를 모시고 살도록 지어진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의 영은 자기와는 달리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순종하는 자의 종으로 살게 되어 있지 스스로 주인되어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롬 6:16)는 말씀을 볼 때 인간 스스로는 절대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수가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은 그 마음에 누구를 영접하느냐에 따라 그의 종이 되어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내가 종이 되느냐 주인이 되느냐 하는 선택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종이 되느냐하는 선택권이 주어졌을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와는 아직 이 사실을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사단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사단은 무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지난번에 우리가 인간의 창조 목적을 생각해 볼 때, 인간은 그릇과 같은 존재요 또 포도나무의 가지이고, 머리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할 몸인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전적 무능력한 존재인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는다고 자존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되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따먹은 인간은 눈이 떠져 선악을 분별하기에 이르렀으나 선을 행할 능력은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질 때, 죽음의 문제가 초래되었다는 것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고, 또 하나님을 떠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에 맞부딪힌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죄의 유혹은 자신의 힘으로 물리칠 수 없습니다. 오직 진리의 성령에 속한 바가 되고 함께 연합한 자가 되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덜미가 잡힌 채 죄의 수렁에 빠져들고 만 것입니다.

아담은 원래 지어진 바 그대로 수용적인 존재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미혹되어 잘못된 영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그 영의 속성대로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속성을 가진 미혹의 영을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결국 아담을 비롯한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전적 무능력을 배우기 위해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거듭난 성도일지라도 이 사실을 깊히 깨닫기까지 숱한 함정과 걸림돌에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자아 만족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환상에서 깨어나서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기까지의 과정, 그것은 좀처럼 체득하기 힘든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과정입니다.

인간의 실상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대로 인간이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려면 꼭 몇 가지 체득해야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뿐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진리들을 배우고 납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타락으로 인하여 지금 우리의 존재가 어떠한 상태로 몰아넣어졌는가를 밝히 인식하고 있어야 헛된 애씀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인생들의 눈이 밝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기가 옳다하는 것을 하고자 하고 잘못되었다 생각하는 것을 안하고자 합니다. 예전에는 가지지 못했던 양심의 기능이 시작된 것입니다. 로마서 2장 15절을 보면 양심의 기능을 가리켜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마음에 양심이 증거가 되어 악한 것을 행하면 송사를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속에 악한 영, 곧 죄의 실체가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욕에 사로잡히고 이기주의의 노예가 되어서 마음으로만 선을 행하기 원하는데 실상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할지라도 양심이 우리에게 선을 행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려고 애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실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의 헛됨을 알지 못하고는 우리의 헛된 애씀이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18∼24절을 함께 찾아 읽어봅시다. 무어라고 답해 주고 있습니까?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8∼24).

이 사람이 왜 곤고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선을 행하기 원하는데 자기 속에 선한 것이 없고 또 선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자기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고 있는 어처구니 없는 실상을 보면서, 자기 속에 죄가 있고 악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안되는 줄 알지만 양심은 끊임없이 선을 행하라고 하기 때문에 번번히 실패하면서도 애쓰는 것이며, 그래서 그 심령은 곤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결코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자신의 주인이 아닌 것입니다. 언제나 무엇인가의 노예요 종인 것입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영을 반영하는 것이 인간의 본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가 자신을 스스로 살 수 있는 자주자 또는 자존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런 거짓말을 믿게 하는 거짓 영의 미혹에 동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그를 지배하는 영을 담고 그 영과 연합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요컨대 내가 누구와 연합되어 있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여기서 세상에 있는 이는 사단의 영을 가리킵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을 보면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한다"했습니다. 이와같이 성도들 안에는 그리스도가 계시지만 불신자들 안에서 세상 신이 저들의 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룩이라는 것이 '인격적 영의 실체'임을 모르듯이 죄 또한 본질상 인격적인 영의 실체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룩이란 성결의 영이신 성령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말씀을 볼 때, 만일 우리에게 지혜가 있고 거룩함이 있다면 이것은 우리의 속성이나 우리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드러난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결이나 지혜가 인격적인 영의 실체인 것처럼 죄 또한 우리 안에 거하는 더러운 영으로 인격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이 두려워하는 영으로, 또는 속박의 영으로, 이 세상의 영으로,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불순종하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는 악한 영인 죄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과 사랑이 인간의 인격과 활동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는 성령님이신 것처럼, 죄 또한 동일한 우리의 인격과 활동을 통하여 드러나는 미혹의 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사건에 뒤이어 기록되었던 가인의 살인 사건에 대하여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좀 난해한 부분이지만 가인은 주범이 아니고 사단의 하수인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사단을 가리켜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를 가인의 살인사건의 주범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어떤 사람은 아담이 사단의 유혹을 거절했더라면 우리가 영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은 혼자서 그 유혹을 거절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였습니다. 그가 만일 홀로 사단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었다면 아마 우리도 하나님 없이 유혹을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유혹을 대항하는 방법으로 우리 자신을 내세운다면 우리는 늘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은 아담이 넘어질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때문에 선악과는 아담이 할 수 있나 없나로 시험해 보기 위해서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가 혼자서는 할 수 없음을 알고 자신에게 하나님이 필요한 존재임을 고백하게 하기 위한 교육과정으로 선악과를 두셨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나신 바 되었으나"(벧전 1:20)하는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부터 그리스도를 보내시려고 작정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그들이 타락할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분으로, 천사장 루시퍼가 어떻게 자기 직분을 거절하고 최초로 어둠의 왕국을 열어 놓을 것인지, 또 어떤 일을 저지를 것인지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이에 대한 대처방안을 미리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잘 납득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로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0) 하나님께서는 구원얻을 후사들을 얻으시려고 섭리적으로 그의 피조물들을 타락의 굴레 아래로 한 번 예속당하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부패함과 무력함을 처절히 깨닫게 하기 위함이며 그가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은 하나님이 절대 필요한 존재임을 고백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일 원수들과 악과 저주가 없었더라면 원수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며, 선으로 악을 이기며, 저주하는 자들을 위하여 축복하시는 참 사랑의 성품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때때로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과 시련 속으로 몰고 가시는 것은 그 속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오직 의뢰하실 분이 주님뿐임을 깨닫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는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8)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유혹의 덫에 자주 걸려 넘어진 경험이 없다면 지속적으로 주님만을 의뢰해야 함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유혹을 대항키 위해 주님 대신 자신을 앞세우고 있었을 것이 뻔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난처한 상황에 직면해 보지 않는다면 이것을 극복하는 믿음을 어느 때 배울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8장 끝부분에서 말씀해 준대로 사단이 제 아무리 큰 시험과 무서운 공격을 가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사단은 그저 우리를 전적으로 주님만 의뢰하도록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할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단이 변개시킬 수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런 일 저런 일을 통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또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점차 자신이 서야 할 위치가 어떠한 위치인가를 알아 서게 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을 우리의 참된 주로 알게 되고, 그의 사랑을 받으며 그분께 영광돌리는 영원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
-새생명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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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New Life 성령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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