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 난제(I)-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Old Testament Difficult Passages I
-Genesis, Exodus, Leviticus-
저자: 김경래 Author: Kyungrae Kim, Ph.D.
목 차 Contents
머리글
제1부. 창세기 난제
창세기 1장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 (창1:1-31)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 (창1:26; 3:22; 11:7)
온 지표면을 적신 큰 물덩어리 (창2:6)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2:7)
선과 악을 안다는 것 (창2:9, 17; 3:5, 22)
여자의 후손과 뱀 (창3:15)
생명나무와 영생 (창3:22-24)
가인의 출생에 대하여 (창4:1)
창4:7의 올바른 번역과 이해 (창4:7)
우리 들로 나가자 (창4:8)
야웨의 이름을 부르다 (창4:26)
하나님의 아들들 (창6:1-4)
노아 방주에 들어간 동물의 수 (창6-7장)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9:18; 10:21)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 (창5:3-32; 11:10-32)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언제 죽었나? (창11:32)
이스마엘의 운명에 관한 예고 (창16:12)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에서에 대한 예언 (창27:39-40)
야곱과 천사의 씨름 (창32:24-30)
요셉의 노예 정책 (창47:21)
세겜을 한몫 더 받은 요셉 (창48:22)
요셉에 관한 예언 (창49:22-26)
제2부. 출애굽기 난제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1:1-5)
모세의 미디안 생활과 이집트 왕의 죽음 (출2:23)
하나님의 이름 '야웨' (출3:14)
이집트 탈출을 위한 광야 사흘길 (출3:18; 5:1-3; 8:27)
피 남편 모세 (출4:24-26)
유월절의 제정과 그 의미 (출12:1-14)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시간 (출12:6)
이스라엘 자손의 이집트 체류기간 (출12:40-41)
만나의 정체 (출16:13-36)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가축으로 인한 농작물 손상 (출22:5)
염소 새끼와 어미젖 (출23:19)
우림과 둠밈 (출28:30)
하나님의 약속과 그 위기 (출애굽기 32장)
야웨의 책 (출32:32-33)
모세의 또 다른 회막? (출33:7-11)
이름으로 아는 것 (출33:12, 17)
제3부. 레위기 난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레위기 1-3장)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1:1-17)
제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제사장의 몫 (레1:9, 13 등)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레4:1-6:7)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레10:1-2)
성경의 '문둥병' (레위기 13-14장)
유출에 대한 규례 (레위기 15장)
이스라엘 자손이 섬기던 수염소 (레17:7)
오멜 절기와 부활 (레23:9-14)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십일조의 의미 (레27:30-33)
참고 문헌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세기 2:7)
"야웨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우리말 개역 성경에 등장하는 이 창2:7에 대한 번역문은 일반 독자들이나 심지어는 설교자들에게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말하는 이 오해란 앞서 창세기 1장에서 다른 동물들을 단순히 '생물'이라고 부른데 반하여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생령'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우리말에 있어서도 '생령'(生靈)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생령'(生靈)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네페쉬 하야'인데, 이는 이미 창1:20, 21, 24, 30에서도 나오는 표현으로서 개역 성경은 그곳들에서 '생물'이나(1:20, 21, 24) 또는 단순히 '생명'으로(1:30)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네페쉬 하야'란 표현은 또 창2:19; 9:10, 12, 15, 16에도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인간 외의 동물계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다른 동물과 동일한 '네페쉬 하야'인 우리 인간을 달리 표현하고자 만들어낸 '생령'이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에게 그릇된 생각을 조장할 수 있는 것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번역문이라고 하겠다. 이 경우 오히려 표준새번역의 '생명체'라는 번역이 훨씬 더 적합한 번역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라는 표현은 인간과 다른 동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페쉬 하야'라고 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2:7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그 안의 '생령'이라는 번역문을 버리고, '살아있는 존재' 내지는 '생명체'라는 번역문을 가지고 읽을 때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생명체'가 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호흡'이 필요한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칠십인역에서는 창2:7의 '네페쉬 하야'를 다른 경우에서처럼, (프쉬케 소싸)로 번역하였다. 헬라어에서 이것은 인간 뿐 아니라 인간 외 모든 동물계까지 가리킬 수 있는 표현이다. 칠십인역에서 '네페쉬 하야'의 '네페쉬'를 보통 '영(靈)'을 뜻하는 (프뉴마)로 번역하지 않고 그것과 구분되는 (프쉬케)로 번역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번역을 적절히 활용하여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고전15:45).
개역 성경은 고전15:45을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읽고 있다. 여기서 '산 영'과 '살려주는 영'은 각각 (프쉬케 소싸)와 (프뉴마 소오포이운)을 번역한 문구이다. 이 인용문구의 출처인 창2:7에서 이미 '생령'이라고 번역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결국 그 연속성을 어기지 못하고 (프쉬케)와 (프뉴마)의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다 '영(靈)'으로 번역한 듯하다. 바울이 의도한 바를 살리려면 여기서도 창2:7과 마찬가지로 '산 영' 대신 '살아있는 존재'나 '생명체'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우리 들로 나가자 (창세기 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이 구절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것은 히브리어 원문상의 난해구절도 아니요, 번역상의 문제도 아니다. 다만 사건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간단하여서 무언가 빠진 느낌을 줄뿐이다. 창4:8은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라는 문구로 시작되기 때문에 바로 이어서 가인이 아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록했을 법하지만, 그런 내용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사마리아 오경과 고대 주요 역본들은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다음에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이러한 사본학적 증거들 때문에 최초의 원본에 이 문구가 들어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우리말 역본들중 개역 성경이 아무런 난외주도 없이 맛소라 사본의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옮긴데 반하여,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본문 가운데 이 문구를 끼워놓고 난외주에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한편 이 구절에 대한 한 가지 흥미 있는 주석적 요소는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4:8>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말하였다: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 그들 둘이 들로 나갔을 때에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기에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는데,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지지 않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있구나. 그래서 네 제물은 열납되고 내 제물은 열납되지 않았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고,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진다. 그리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없다. 그러나 내 행실의 열매가 네 것보다 더 좋았기 때문에 내 제물이 네 것을 제치고 열납된 것이다."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없다.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악인에게 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있으며,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고, 악인에게는 벌이 있다." 이 일 때문에 그들은 빈 들판에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마침내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덮쳤다. 그는 돌로 동생의 이마를 쳐서 그를 죽여버렸다.
여기 우리말로 번역하여 인용된 타르굼 내용은 결코 창4:8의 원본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아마도 과거 유대인 사이에 유행하였을 주석적 요소를 반영할 뿐이다. 길게 첨가된 주석적 내용 중에는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도 포함되어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에서도 다시 이 문구가 원래의 히브리어 본문에서 번역된 것인지, 아니면 번역자가 주석적인 요소중 일부분으로서 첨가한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이런 경우에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본문 중에는 이 문구를 넣지 않되, 난외주를 이용하여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된 고대 사본이나 역본들이 있음을 언급해주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물론 예루살렘 타르굼의 긴 주석적 내용을 우리말 역본에 소개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아들들 (창세기 6:1-4)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야웨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神)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6:1-4).
창6:1-4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학자들간에 쉽게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신학계에 구구한 해석사를 남긴 성경 난제중의 난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해 내려오는 여러 해석중 어느 하나가 분명히 맞는 해석이라면, 이 구절은 하나의 난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많은 성경학자들의 그릇된 신학적 사고방식을 반증해주는 사실이 아닐까? 필자는 여러가지 견해를 이 지면에 소개하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옹호 내지는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류의 서적이 이미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히려 본문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통하여 필자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설명하고자 한다. 다른 훌륭한 학자들의 해석을 재현하는 내용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국내의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이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우선 1절의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대하게 된다. 이 낱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하아담'은 정관사 '하'와 명사 '아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 끝에서 '하아담'을 복수형 대명사 어미로 받는 것으로 보아('그들에게서'; 히브리어로 '라헴'), 이것은 고유명사로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보통명사로서 아담으로 시작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딸들'과 역시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2, 4절의 '사람의 딸들'('브노트 하아담')은 인류, 곧 인간 사회에서 태어나는 '딸들'을 가리킴이 너무나 분명하다.
2절과 4절에는 이들 '사람의 딸들'의 상대역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브네 하엘로힘')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여기 말고 욥기에 또 다시 등장한다(욥1:6; 2:1; 38:7). 욥기에서 우리가 문맥을 통하여 분명히 아는 대로, 이 표현은 우리 인간이 아닌 '하늘의 영적인 존재', 소위 '천사들'을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서 단3:25에 아람어로 '바르 엘라힌'이 있는데, 이는 '신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역시 영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시29:1; 89:6(히브리어 성경에서는 89:7)에 나오는 '브네 엘림'은 직역하면 '신들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이 표현 역시 천사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것이 만일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에 관한 언급이라면, 이에 대하여 조물주께서 무언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시고(3절) 또 이러한 혼인 관계로 유별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은(4절)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사 경건한 가문의 아들과 불경건한 집안의 여자, 또는 귀족층 남자와 서민층 여자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결과적 사실을 만족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이처럼 창6:1-4의 본문에서 이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간 세상의 남자를 가리키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으므로 자연히 누군가 '인간 사회' 밖의 존재이어야만 하겠고, 아울러 앞서 제시한 바, 욥기와 기타 유사 문구의 도움을 얻어 얼마든지 '천사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표현 자체와 전체적 문맥을 통하여 이런 식의 유추는 가능하지만, 다만 이러한 이해에 대한 신학적 걸림돌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22:30; 막12:25) 때문에 학자들은 선뜻 상기한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눅20:34-36에서는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좀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이제는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의 사람들을 가리켜 "천사와 같다"고 하신 것은 그들과 천사들이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 밝히 보는대로,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휘오이 테우', ՕՉՏՉ ՈՅՏՕ)이라고 부른 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와 같게 변한 그들의 새로운 신분 때문이 아닐까.
다시 창세기 6장으로 돌아와, 칠십인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에 대하여 '하나님의 천사들'('호이 앙겔로이 투 테우', ՏՉ ՁՃՃՅՋՏՉ ՔՏՕ ՈՅՏՕ)이라는 번역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은 칠십인역 말고도 외경 에녹서(6:1-6)와 요세푸스(유대인 고대사 1권 3장 1절) 등을 통하여도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신약 성경의 몇몇 구절도 창6:1-4의 해석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먼저 벧후2:4-5에서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신' 일과(4절)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홍수로 인간 세상을 멸하신 일'을(5절)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벧전3:19-20의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는 기록 역시 이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구절(벧전3:19-20)을 '그리스도께서 고난 즉 죽음을 부활로 이기신 후, 전에 타락하여서 옥에 갇혀 있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신 것'이라고 본다. 옥에 갇힌 이들 천사들은 벧후2:4("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말고, 유다서 6절("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벧전3:19-20과 벧후2:4-5에서 이들 천사들의 투옥과 홍수 심판 기사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이들 '타락한 천사'라고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특별히 유다서 6절에서 천사 타락을 언급한 후 바로 이어 나오는 7절("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을 통하여, 우리는 천사 타락이 성적인 범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신약 성경의 몇몇 기록은 창6:1-4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해석을 반증하기 보다는 오히려 변증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 영적 존재인 천사가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 다만 우리는 소돔 사람들이 롯을 찾아온 두 천사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기록을 통하여(창19:5; 벧후2:6-8) 이런 가능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따름이다. 천사와 인간의 성적 결합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로 간주되어,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창6:3은 이런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서 하나님이 취하시고자 하는 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무서운 죄악은 비록 악한 천사들로부터 시작되긴 하였으나, 인간('하아담')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 그 안에 죄의 결과를 뿌려놓았기 때문에, 인간 역시 그 죄값을 모면할 수 없게 된다.
창6:3에서 야웨께서 말씀하시는 바 '나의 신(ࠉࠇࠅ࠘)' 곧 '하나님의 영(靈)'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하나님의 생명의 숨(生氣)'(창2:7 참조)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서 보통 '영(靈)'으로 번역되는 '루둽'과 '숨'으로 번역되는 '네샤마'는 동의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사람의 딸들이 악한 천사들의 무질서한 행위에 이용된데 대하여 분노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제동을 거신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영은 육체인 사람 속에 영원히 거하지 아니할 것이다. 여기서 '영원히'란 말은 '레올람'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을 번역한 것으로서, '영원히'라는 뜻도 되지만 '오래도록'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창6:3의 "120년"은 아마도 하나님이 새로 정하신 인간의 수명을 가리킬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대략 900세 정도로 '오래도록'(='레올람') 수명을 누려 왔었다 (창세기 5장의 족보 참조).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 안으로 단축시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타락한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합하여 낳은 자식들은 평범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창6:4에서 히브리어를 소리나는 그대로 음역하여 '네필림'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용사요, 고대에 유명한 자들'이었다. '네필림'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칠십인역('호이 기간테스')을 따라 '거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필림'은 이곳 말고 유일하게 민13:33("거기서 또 네필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에만 등장한다. 민13:33의 상반절을 직역하면,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네필림 중에서 아낙 자손 네필림을 보았다"가 된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이들이 보았다는 아낙 자손은 헤브론에 거하던 세 사람으로서,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라고 그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민13:22, "또 남방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이집트 소안보다 칠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천사와 인간 사이에 특별한 거인이 태어나, 고대에 '용사로서 유명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창6:4의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라는 문구는 이 일이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비정상적인 결합이 언제까지 지속되었을까?' 하는 물음에는 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만일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으로 인하여 이런 일이 중단된 것이라면 모세, 여호수아 시대의 '네필림'(민13:33)은 이런 결합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거인'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창6:1-4에 기록된 사건과 홍수 심판의 연관성이다. 창6:5("야웨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에서는 인간의 죄악이 언급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홍수 심판이 있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서 언급되었다. 창6:1-4에 나오는 바, 타락한 천사의 행위에 대한 기록은 그 위치로 보아, 역시 홍수 심판의 원인 중 하나로서 묘사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들도 입증해주고 있다.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세기 9:18; 10:21)
일반적으로 노아의 세 아들은 셈, 함, 야벳의 순으로 일컬어진다 (창5:32; 6:10; 7:13; 9:18; 10:1; 대상1:4). 대부분의 성경 독자들은 이러한 배열로 인하여 그들의 나이 역시 같은 순서대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노아에게 셈, 함, 야벳의 순서로 아들들이 태어난 것인가? 우리는 성경 본문을 통하여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어 번역본들에 나타나는 성경 오역이 바로 그것이다.
개역 성경은 창5:32을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조그만 글자로 인쇄된 "된 후에"는 원문에 없으므로 문맥을 고려하여 번역문에 삽입한 것이다. 표준새번역 역시 이를 같은 뜻의 "노아는 오백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창5:32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노아가 오백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이다. 이 문장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에 세 쌍둥이가 태어남, 2) 이들 세 아들이 노아가 오백세 되기까지 차례대로 태어남, 3)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 첫 아들이 태어나고 그 다음에 차례대로 다른 두 아들도 태어남. 히브리어 어법상 앞의 두 가지 보다는 세번째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역과 표준새번역 둘다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순서가 꼭 나이에 따른 순서여야 할 이유도 증거도 없다.
다음으로 고찰해야 하는 구절은 창10:21이다. 우선 우리말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개역은 이를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라고 번역함으로써, 개역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번역문은 과연 히브리어 원문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까? 여기서 "야벳의 형"이라고 번역된 문제의 구절을 히브리어 원문 및 고대 번역문인 칠십인역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 두 가지면 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충분하다고 본다.
창10:21의 이 문제의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본문은 ('둺히 예쵛 하가돌')이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와 모음 부호를 무시할 경우 이 히브리어 구절은 두 가지의 직역이 가능하다: 1)'야벳의 큰 형제(brother)', 2)'큰 (자) 야벳의 형제'. 다시 말해서 '크다'('하가돌')라고 하는 형용사가 '야벳'과 '형제' 중 어느 것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이 문구의 해석이 달라진다. '야벳'을 수식할 경우 야벳이 형이 되고, '형제'를 수식하면 셈이 형이 된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 부호의 기능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구두점 역할일 것이다. 맛소라 성경의 엑센트는 여기서 '크다'가 '야벳'을 수식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맛소라 학자들은 야벳을 셈의 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칠십인역 역시 맛소라 학자들의 견해를 지지해준다. 이 구절에 대한 칠십인역의 번역문(ՁՄՅՋՖٍ ԩՁՖՅՈ ՔՏՕ ՌՅՉՆՏՍՏՒ)에 있어서 명사 '야벳'과 형용사 '크다'는 동일한 2격(소유격)을 취하고, '형제'는 3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큰 자'는 셈이 아니라 야벳인 것이다.
셈이 야벳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은 창11:10을 통하여서도 찾아볼 수 있다.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라는 이 기술에 의하면, 셈이 일백세가 된 것은 홍수 후 이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이레 후 곧 2월 17일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40일을 내렸으며 (창7:9-12), 그들이 방주 밖으로 나온 것은 노아가 601세 되던 해 2월 27일이었으니 (창8:14-19), 노아 홍수는 햇수로 볼 때 2년이나 지속된 장기간의 대사건이었다. '홍수 후 2년'('슈나타임 둺하르 하마불')이란 히브리어 문구는 분명히 홍수 사건이 완전히 끝난 후 또 두 해가 흐른 뒤의 일임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에게 노아 나이 600세와 601세의 두 해는 홍수해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그후 두 해(노아 나이 602세와 603세)가 지나, 노아의 나이가 대략 604세가 되던 해에 셈은 나이 100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셈은 노아가 504세가 되던 해에 태어난 셈이 된다. 이상 고찰한 바를 창5:32("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과 묶어서 볼 때, 셈은 결코 노아의 맏아들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증거로서 창9:24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창9:20-27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있을 때 그 아들들이 취한 행동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내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 중에서 분명치 아니한 점은 도대체 함의 아들 가나안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많은 독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저주를 받은 것은 함이 아니요 그의 아들인 가나안이다.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15:16, 19-21 등 참조). 이 저주를 항간에 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흑인 전체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창9:24에 기록되기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하였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작은'('하카탄')을 위하여 '둘째'라는 각주를 덧붙임으로써, 이 아들이 다름 아닌 '함'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함에 대한 저주가 없음을 고려할 때, 여기서 말하는 '그 작은 아들'은 아마도 함이 아니라 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경우, 이 작은 아들이 '행한 일'은 무슨 저주받을(25, 27하반절) 악한 행실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축복을 받아 마땅한(26-27상반절) 아름다운 행실을 가리키게 된다.
이상으로 우리는 야벳이 셈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찰해 보았다. 노아의 세 아들중 다만 함의 연령상의 위치가 확실치가 않다. 창9:24의 '작다'('하카탄')나 10:21의 '크다'('하가돌')라는 형용사가 반드시 최상급으로서 '막내'나 '맏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히브리어 어법을 따라서 최상급으로 이해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 세 아들의 가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야벳(2-5절), 함(6-20절), 셈(21-31절)의 순서로 열거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나이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상의 모든 고찰을 종합하여 가장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야벳은 노아 500세 되던 해에, 함은 노아 502세 되던 해에, 그리고 셈은 노아 504세 되던 해에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불행하게도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번역가와 성경 해석가들은 노아의 세 아들이 셈, 함, 야벳의 차례로 태어났다고 믿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창10:21 본문에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 현대 역본이 그런 것처럼,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맛소라 성경의 히브리어 본문과 고대 역본인 칠십인역을 따를 경우,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철저히 금하시고 있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과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아무리 시험이라고 하지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의혹 때문에 과거 유대인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갖가지 해석을 시도하였다. 여기서는 먼저 고대 유대인들의 해석중 하나를 예루살렘 타르굼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한다.
'타르굼'은 통일적인 하나의 성경 역본이 아니다. 그 시대도 다르거니와 역자 또한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다양한 종류의 '타르구밈'(타르굼의 복수형) 전승이 전해진다. 모세 오경만의 아람어 역본을 두고 볼 때, 온켈로스의 타르굼은 비교적 문자적 번역을 시도한데 반하여,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은 온갖 주석적 요소로 가득차 있어서 주석가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타르굼이라고 하겠다. 이 예루살렘 타르굼은 그 최종 편집이 상당히 늦은 시기에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그 안에 보존된 주석적 요소들중 상당한 부분이 예수님 이전부터 전해진 것들로 추정되기에 이러한 타르굼의 전승은 예수님 당시 구약 성경에 대한 유대인들의 해석을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 연구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창22:1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상당히 흥미있는 주석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우선 그 본문을 우리말로 옮겨 보기로 하자.
이 일들 후에 이삭과 이스마엘이 다투었다. 이스마엘이 말하였다: "내가 장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자 이삭이 말하였다: "내가 아버지 부인 사라의 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너는 내 모친의 여종인 하갈의 자식일 뿐이다." 이스마엘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나는 열 세 살에 할례를 받았으니 너보다 더 의롭다. 만일 내게 거절할 뜻이 있었더라면 나는 얼마든지 할례를 받지 않았었을 것이다." 이삭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나이 지금 서른 일곱이 아니냐. 만일 거룩하시고 찬양받으실 분이 나의 모든 지체를 요구하신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겠다." 그 즉시로 이 말들이 우주의 주께 들려졌고, 또한 그 즉시로 주의 말씀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위에서 보는대로 예루살렘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스마엘이 이삭의 비위를 건드리는 말로 그에게 도전해오자 이삭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적 태도를 주저함없이 발설한다. 자신의 모든 지체라도 주저하지 않고 바치겠다는 이삭의 선언이 결국 이러한 시험의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 이 타르굼의 설명이다. 특별히 아브라함이 시험받을 때 이삭의 나이는 37세로 되어 있다. 이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일을 사라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라는 127세에 죽었으므로(창23:1), 이때 이삭의 나이가 37세가 되는 점에 착안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이삭의 나이를 37세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22:1 본문은 상당히 흥미있는 해석을 보여주긴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은 설명일까 하는 데에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는 고대 유대인 랍비들의 지나친 추측에서 나온 해석이 아닌가 한다. 이와는 달리 요세푸스의 설명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더 설득력이 있다. 요세푸스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시험해 보고자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이때 이삭의 나이를 25세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이때 이삭의 나이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이나 요세푸스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번제 나무를 지우고 산을 오르게 했다는 점으로(창22:6) 미루어 이삭이 결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막 치려하는 순간에 이삭의 반응이 어떠하였을까? 고대 유대인들은 이에 대하여도 관심이 컸다. 먼저 예루살렘 타르굼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다음은 창22:10에 대한 예루살렘 타르굼의 본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손을 내밀어 칼을 집어서 자기 아들을 잡으려 하였다. 이삭이 자기 아버지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영혼이 고통 중에 분투하지 않도록 저를 꼭 붙잡아 매세요. 그래야만 아버지의 제물에 흠이 없겠고 저도 멸망의 구덩이로 던져지지 않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눈은 이삭의 눈을 쳐다보았으나, 이삭의 눈은 저 높이 천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삭은 그들을 볼 수 있었으나, 아브라함은 보지 못하였다. 높은 곳에서 천사들이 화답하였다: "우리 가서 땅 위의 저 두 별난 사람을 보자. 하나는 잡는 자요, 다른 하나는 잡히는구나. 잡는 자는 주저함이 없고, 잡히는 자는 그 목을 길게 내미는구나."
예루살렘 타르굼은 이삭의 순종과 신앙심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세푸스 또한 이에 뒤질세라 이때의 상황을 아브라함과 이삭 부자(父子) 사이의 눈물겨운 대화 내용을 통하여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요세푸스의 경우에도 이삭의 믿음과 순종이 돋보인다.
비록 이런 기록들이 추측에 불과하기는 하겠지만, 이때 이삭의 순종과 믿음에 대하여는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직 40이 되지 않은 젊은 나이의 이삭은 원하기만 하였다면 100세가 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고대 유대인들의 몇몇 성경 해석을 통하여 이삭의 믿음이 돋보이게 묘사된 데 반하여, 신약성경은 창세기 22장과 마찬가지로 이삭 보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7-19)고 하였고, 야고보 역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1)고 역설하고 있다.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애굽기 1:1-5)
야곱과 더불어 이집트에 내려간 야곱 가문 사람들의 숫자는 칠십인역에서 다섯 명이나 더 불어난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의 발언은 칠십인역과 일치한다 (행7:14):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그럼 먼저 문제의 출1:5의 맛소라 성경 및 칠십인역 본문을 직역하여 아래에 옮겨놓기로 하자. 문맥을 볼 수 있도록 맛소라 성경의 1:5 앞에 1:1-4의 내용을 괄호로 묶어 기입해둔다.
(맛소라 성경)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이집트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베냐민, 단, 납달리, 갓, 아셀.)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명인데,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칠십인역)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야곱에게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오인이었다."
출1:5에 있어서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차이점이란 아주 간단하다. 첫째로 두 구절의 순서가 서로 바뀌었고 (칠십인역에서는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가 절의 맨 앞에 나온다), 둘째 인원수 면에서 맛소라 성경에서는 '70명', 칠십인역에서는 '75명'으로 서로 다르다. 여기서 사마리아 오경은 맛소라 성경과 일치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창46:8-27에 나오는 보다 상세한 목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도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을 비교해보기로 하자. 창46:8-27은 내용상 1)레아 소생(8-15절), 2)실바 소생(16-19절), 3)라헬 소생(20-22절), 4)빌하 소생(23-25절), 5)종합(26-27절)으로 쉽게 나뉜다. 8절에서 19절에 이르기까지 표기상의 미미한 차이점을 제하고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은 서로 일치한다. 23-25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라헬 소생'(20-22절)의 명단에 있어서 칠십인역은 맛소라 성경과 차이점을 보이며, 따라서 '종합'(26-27절)에 있어서도 인원상의 차이점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20-22절 나란히 배열해보기로 하자.
맛 소 라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과 아릇이니,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사명이요. |
칠십인역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므낫세의 시리아 여자 첩이 그에게 낳은 아들들은 마길이요, 마길은 길르앗을 낳았다. 므낫세의 동생 에브라임의 아들들은 수델라와 다한이요, 수델라의 아들들은 에뎀이다.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이요, 벨라의 아들들은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이요, 게라는 아릇을 낳았다.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팔명이요. |
위의 표에서 보듯이 칠십인역에는 몇몇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들 삽입문에 대한 정보는 민26:35-36; 대상7:14; 8:3-5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목적은 아마도 창50:22-23("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이집트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의 영향을 받아, 요셉의 자손을 한 두 대(代) 더 보여주고 아울러 부자 관계를 정확하게 밝히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칠십인역에는 다섯 사람의 이름(마길, 길르앗, 수델라, 다한, 에뎀)이 더 들어 있지만 마지막에 '18명'으로 합을 낸 문제점이 보이기도 한다.
26절에 있어서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은 완전히 일치한다: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 륙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이다." 이 숫자에는 야곱 자신, 요셉, 및 요셉의 두 아들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로 다음의 27절에서는 20절에서의 차이점과 관련하여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 사이에 차이점을 보인다.
(맛소라 성경)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명이었더라."
(칠십인역) "이집트 땅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일곱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오명이었더라."
이상을 통하여 칠십인역의 '66명'을 설명하자면, 33(레아의 소생과 야곱을 합한 수) - 1(야곱) + 16(실바의 소생) + 11(베냐민과 그의 자손) + 7(빌하의 소생) = 66이 된다. 그리고 '75명'은 66 + 1(요셉) + 7(요셉의 자손) + 1(야곱)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칠십인역 22절의 '18명'은 어쩔 수 없이 라헬의 소생 중 요셉을 제외한 숫자로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수는 신10:22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이 절의 경우 칠십인역도 '75명'이 아닌 '70명'으로 읽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창세기 46장과 출1:5에 나타나는 사본상 차이점은 칠십인역의 의도적 편집 작업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맛소라 성경이 원래의 본문을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맛소라 성경을 통해볼 때, 창46:8-27의 기록은 몇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야곱의 아내들을 비롯하여 모든 며느리나 손주 며느리 등 여자들이 숫자 계산에 들어오지 못한 반면에(26절 참조), 유일하게 레아의 딸 디나와(15절) 아셀의 딸 세라(17절)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다른 말로 가정을 이루지 아니하고 지낸 것이 아닌가 한다. 디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창세기 34장 참조).
둘째, 레아 소생을 계수함에 있어서 야곱 자신을 포함시켜 그 수는 모두 '33명'에 이른다(15절).
세째,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할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자손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연대를 계산해 볼 경우,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베레스에게 이집트로의 이주를 즈음하여 두 아들이(12절) 이미 생겨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이 무렵 베냐민에게(민26:38-40; 대상7:6-7에 의거, '손자를 포함하여') 열 명의 아들이 생겨났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이들은 틀림없이 이집트로의 이주 후에 태어난 자손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70명'(또는 '75명')은 이집트에 내려간 실제의 정확한 인원이라기 보다는 이집트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민족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 야곱의 자손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출1:5)이라는 문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이러한 히브리적 사고 방식의 타당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히7:9-10 참조: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피 남편 모세 (출애굽기 4:24-26)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야웨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출4:24-26).
출4:24-26의 난점은 히브리어 문장의 번역에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사본학적인 문제도 아니다. 짧으면서도 전후 문맥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간단한 문단은 그 역사적 상황과 그에 대한 배경을 설명함에 있어서 많은 이론들을 만들게 한 성경 난제중의 하나이다.
야웨께서 왜 그리고 어떻게 모세를 죽이려 하셨나? 이러한 일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문맥을 통해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너무나 돌연적이고 이상스럽기까지 하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후, 이미 장인에게 요청하여 그로부터 허락도 받고(출4:18), 또 다시 야웨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는(출4:19), 아내와 두 아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는 중이 아니던가(출4:20)?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출4:22-23): "너는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야웨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이러한 일 다음에 기록된 내용이 바로 본문의 이상한 사건이다.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몇 가지 분명한 사실로는: 1)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심, 2)십보라가 아들 (아마도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할례를 행함, 3)이때야 비로소 모세가 화를 면함, 4)이 일로 십보라가 모세를 '피 남편'이라고 부름 등을 들 수 있다.
모세는 이때까지 자기 '아들'(20절의 복수형과는 달리 여기 25절에서는 단수형으로 언급됨)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무슨 일로 왜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이제까지 할례를 행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물론 첫째인 게르솜의 경우에도(출2:22 참조) 그가 과연 할례를 받았는지에 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모세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의 아내 십보라는 그 이유가 아들의 할례에 있음을 깨닫고는 즉시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로 실제로 모세는 죽음을 면하게 된다.
이때 십보라가 모세를 향하여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고 내뱉는데, 이 말은 한편으로는 일종의 분노와 자포자기가 함축된 말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의 특별한 사명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과 확인으로 들린다.
본래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셔서 그의 후손이 대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언약이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17:9-11). 이 명령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14)는 준엄한 경고로 끝을 맺는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에게만 해당하는 할례 예식은 틀림없이 남자들에 의하여 집행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출4:24-26 본문에서 모세가 아닌 십보라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는 사실 역시 특이하다. 24절의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라는 표현은 아마도 모세가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든가, 아니면 그가 무슨 특별한 위험에 빠져있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순전히 하나님과만 연관시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모세는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 수 없는 상황이었겠고, 자연히 그의 아내인 십보라가 이 일을 집행하여야만 했을 것이다.
아울러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은 모세보다는 십보라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모세는 한때 특별한 사명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지시에 대하여 자기는 부족하다면서 머뭇머뭇한 적이 있다(출3:11; 4:10, 13 참조). 이러한 모세의 태도로 인하여 하나님이 모세에게 노를 발하신 적은 있으나(출4:14 참조), 이런 일로 그를 죽이려 하신 것 같지는 않다. 더군다나 출4:24-26 본문에서는 모세의 위기에 대하여 할례가 주된 원인임을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에서는 십보라에 대하여 별 기록을 담고 있지 않다. 아마도 십보라로서는 그녀의 남편 모세에게 부여된 특별한 사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이행한다는 것이 모세 본인 못지 않게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멀리 이집트에서부터 '굴러 온 복'을 어찌 하루 아침에 놓칠 수 있으랴. 두 아들과 함께 남편을 따라 낮선 땅 이집트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너무나 처절하고 무거웠던 것이 아닐까? 남편이 구해야 하는 백성은 자기의 민족이 아니요 남편의 민족일 뿐이요, 이집트는 자기의 사랑하는 남편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 아니던가.
성경은 이집트로 향하는 모세의 가정, 아니 모세와 그의 아내 사이에 교차되는 감정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이처럼 유추해보는 수 밖에 없다. 두 아들은 그만 두고라도 아내 십보라의 마음 속에 있는 온갖 감정과 생각은 모세의 마음을 충분히 괴롭히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 모세와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들의 두 아들은 - 이집트로 향한다.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준엄하고도 분명한 명령 때문에.
이때 길의 숙소에서 일어난 사건은 모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십보라에게도 하나님이 내리신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준엄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로서 십보라는 자기 남편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할례의 집행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기 남편, 더 나아가서는 자기 남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중요성과 엄숙함을 재확인한다. 바로 이 언약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이 '사지'(死地)로 명령을 받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십보라는 이 냉정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 자기 아들의 양피를 베어 피를 냄으로써.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는 그녀의 외침은 그녀의 이러한 심경을 잘 대변해준다고 하겠다.
'피와 죽음'이란 관계를 두고 볼 때, 이 사건은 성경의 다른 몇몇 기록과도 연관성을 가진다. 우선 앞서 언급한대로 바로 앞의 출4:22-23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 재앙은 출애굽기 12장에 묘사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죽음을 면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간접적이긴 하지만 모세의 아들의 피가 모세의 개인적인 재앙을 면하게 하였다. 모세의 둘째 아들 엘리에셀의 이름을 설명하는 구절에서도 또한 다소나마 이런 맥락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파라오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출18:4).
출4:24-26에 기록된 사건으로 인하여 모세는 십보라와 두 아들을 장인에게로 돌려보내고 홀로 이집트로 떠난 것 같다. 그래서 출18:2-6에서 우리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 보내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 두 아들을 데렸으니.....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 아내로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 그가 모세에게 전언하되 그대의 장인 나 이드로가 그대의 아내와 그와 함께한 그 두 아들로 더불어 그대에게 왔노라"라는 기록을 보게 된다. 아마도 모세는 이 일을 통하여, 자기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신 하나님의 엄정(嚴正)하심과 그의 분명하신 목적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고는, 다시는 거역하거나 주저함이 없이 철저히 순종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인간 가운데 하나님의 강림(降臨)이 있다는 사실은 피조계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관심 내지는 간섭을 의미한다. 사실상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와 더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의 역사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신다. 이러한 간섭은 인간편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간을 지으신 이후로 인간을 그대로 두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강림 또는 임재(유대인들은 이를 가리켜 전문 용어로 '슈키나' 라고 한다)에 관하여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다. 구약 성경 중에서 하나님의 강림에 관한 기록중 가장 중요한 곳을 찾으라면 역시 출애굽기 19장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19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강림은 어느 개인이나 소수의 몇몇 사람 또는 작은 무리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목격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임하였다.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도 구름을 동반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 놀라운 광경 앞에서 두려움으로 떨며 모세의 중재를 요구하였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나타나신 것은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게끔 하는 목적이 있었다(출19:9; 20:20).
이제 필자가 고찰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강림에 관하여 출애굽기 19장에 기록한 사건이 시간적으로 언제 있었던 일이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출19:1)는 우리말 개역성경을 읽을 때, 정확하게 언제를 가리키는지 분명치가 않다. 여기 '제 삼월'중 '월(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데쉬'는 본래 '새롭다'라는 뜻에서 파생하여 '매월 달이 새로 뜨기 시작하는 월삭(月朔)'(new moon)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가 '월삭'을 뜻하는 경우로는 민29:6; 삼상20:5, 18, 24, 34; 왕하4:23; 사1:13; 겔46:1, 6; 암8:5; 시81:4 등을 들 수 있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총 281회 출현하는 이 단어는 그중 22회의 경우만 '월삭'의 뜻으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모두 '달'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그 때에'로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다시 직역하면 '이 날에'가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호데쉬'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월삭'의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출19:1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광야에 도착하여 시내산 앞에 장막을 친 것은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계산하여 제3월이 되는 바로 그날'이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이러한 해석을 근거로 하여 출19:1에 아예 '초하룻날'이라는 문구를 첨가하여, 각각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표준새번역)와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공동번역)로 번역하였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간'(출19:3) 날은 아마도 이제까지 설명한 '제3월 1일'이거나, 아니면 그 다음날일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말씀을 들은(출19:4-6) 모세는 이를 백성의 장로들에게 전해주고는(출19:7) 다시 백성의 반응을 하나님께 회보한다(출19:8). 출19:4-8에 기록된 일들이 모두 마치기까지는 아마도 하루 이틀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모세로부터 회보를 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앞에서 영광중에 나타나실 계획을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야웨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야웨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출19:10-11). 마침내 하나님이 말씀하신 "제3일 아침에 산 위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있었고, 심히 큰 나팔소리도 울려퍼졌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동반한 이 무서운 광경으로 인하여 "진중의 모든 백성은 다 두려워 떨었다" (출19:16).
첫째 달인 아빕월(출12:2 참조) 14일 저녁에 어린 양을 잡아 먹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출12:6-9 참조)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 그날 밤(아마도 제1월 15일 새벽, 출12:29-42 참조) 이집트를 떠났다. 성경의 역법을 따라 계산할 경우,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떠난 날(제1월 15일)로부터 하나님이 시내산에 나타나신 날(대략 제3월 3~6일 사이)까지는 대략 50일이 된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신 날을 오순절로 믿고 있다. 사실 이러한 계산은 거의 틀림없이 맞는 것이다. 오순절은 봄에 첫 곡식을 수확하여 첫 이삭 한 단을 흔들어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레23:15-16). 문제는 첫 이삭 한 단을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이 언제냐 하는 것인데, 레23:11, 15에 '안식일 이튿날'이라고 한 이 날은, 그 문맥상 유월절/무교절과 나란히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계산이 맞다면 오순절은 무교절중에 들어있는 일요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무교절중에 이집트를 나왔으므로, 그로부터 대략 50일이 지난 날은 오순절이 될 가능성이 크다.
모두가 아는 바대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교회 중에 강림하신 날도 바로 오순절이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이날 교회 위에 임하신 성령은 각 믿는 이의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삶을 인도하신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은 언제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탄절(개신교와 천주교의 12월 25일)은 성경 및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으로서, 일단 무시할 필요가 있다. 성경 연대기 학자 폴스틱(Eugene Faulstich, Witnesses for Jesus the Messiah, Spencer, 1989)은 여러 가지 역사 및 천문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을 (그레고리 역법으로 환산하여) 주전 6년 5월 14일로 제시하고 있다. 폴스틱이 제시한 유력한 근거들중 하나는 초대교부중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예수님의 탄생일자를 이집트 역법에 따라서 '파콤월 25일'로 기록한 것(The Stromata I.xxi)이다. 폴스틱은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태어난지 제8일, 곧 그가 할례받은 날이 바로 오순절이었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인용한 책, 6쪽).
만일 출애굽기 19장을 통하여 우리가 살펴본 연대기 재구성과 예수님의 탄생에 관련하여 폴스틱이 도출해낸 결론이 맞는 것이라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강림은 모두 오순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오순절의 의미를 재삼 강조하면서 되새길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왕 나온 김에 사도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마침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여기서 '가운데'라는 말은 '어느 개인 안에'가 아니라 '무리 중에'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시내산에서 성부 하나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에 오실 때 빽빽한 구름으로 임하지 아니하시고,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서 쓸쓸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고백하고 있다. 요한은 산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시던 날 온 누리를 덮었던 그 빛난 구름을(마17:1-8; 막9:2-8; 눅9:28-36 참조)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을 보았던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름으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요한은 이 사실에 감사 감격하여 이 글을 기록하고 있으며, 자신의 기록을 읽는 이들이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를 믿을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시내산 사건보다 더욱더 놀라운 일로서 하나님이 자신의 위엄을 가리시고 은혜와 진리로써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처음 오셨을 때의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그가 다시 오실 때는 현저한 하나님의 영광중에 오신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가 다시 오실 때 다음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3-4).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위기 1:1-17)
레위기 제1장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코르반) 중 번제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다른 예물이나 희생 제사에서도 그렇거니와 희생물로서 사용되는 동물은 제한되어 있다. 동물의 분류 내지 명칭에 있어서 히브리어는 우리 말과 약간 다르기 때문에 우리 말 성경 독자에게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번제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동물은 크게 '가축'과 '새'로 나뉜다. 가축중에는 '소'와 '양떼'('쫀')가 가능한데(1:2), 다같이 '흠 없는 수컷'이어여 한다(1:3, 10). '쫀' 중에는 다시 '양과 염소'가 가능하다(1:10). 이런 분류는 레3:1, 6, 7, 12; 5:6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독자는 레1:2, 10; 3:6; 5:6 등의 '쫀'은 1:10; 3:7의 '케쎄브'와는 달리, 양과 염소를 모두 포함하는 낱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성경에 일반적으로 '양(羊)'이라고 번역되는 낱말 '쫀'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 떼를 두루 가리키는 집합 명사이다. 한편 '쎄'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항상 단수로만 사용되고, '쫀'은 항상 복수로서 사용된다. 따라서 '쫀'은 '쎄'의 복수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30:32은 단수와 복수로서 이 두 낱말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쫀')로 두루 다니며 그 양('쎄') 중에 아롱진 자와 점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히브리어 '쫀'과 우리말 '양떼'의 의미 영역이 서로 다른만큼, 자연히 여기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읽을 경우, 레1:2에서 "누구든지 야웨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라고 읽은 독자는 레1:10의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혹시 염소가 추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10절의 '떼'는 2절의 '양'과 더불어 다같이 히브리어 '쫀'을 번역한 것이요, 한편 10절의 '양'은 히브리어 '케쎄브'를 번역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번역상의 난점은 출12:3, 5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출12:3에서 히브리어 낱말 '쎄'에 대하여는 개역과 표준새번역 공히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뒤의 5절을 통하여 볼 때, 이 낱말은 여기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를 다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 말에 양과 염소를 다같이 가리킬 수 있는 단어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 번역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확한 의미는 문맥(이 경우에는 출12:5)을 통하여 파악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우리말 개역의 경우 3절과 5절 모두에서 '쎄'를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반하여, 표준새번역의 경우 3절에서는 '어린 양'으로 5절에서는 '짐승'으로 서로 달리 번역되어 있다. 필자에게도 무슨 묘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개역이든 표준새번역이든 번역문만을 읽는 독자들에게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나답과 이비후의 죽음 (레위기 10:1-2)
레위기 8장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제사장 위임식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모세의 주재하에 열리는 이 위임식은 7일 동안 물로 씻기고, 옷을 입히고, 관유를 바르고, 속죄제와 번제와 위임제를 바치고, 피를 뿌리고, 식사하는 일 등이 반복된다(레8:6-34). 레위기 9장은 7일 동안의 위임식이 끝난 후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제8일에 처음으로 시행하는 일종의 취임식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이날 행사는 아론의 주관하에 거행된다. 그리고 이 날의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는 8장의 위임식과는 달리 이전에 명령을 받은 바가 없고, 새롭게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 날 취임식을 위한 준비가 마친 후,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8-11절), 아론의 아들들을 위한 번제(12-14절), 백성을 위한 각종 제사(15-21절)가 집행된다. 그리고는 아론의 축복과 하나님의 응답이 뒤따른다(22-24절).
레위기 10장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모든 제사를 마치고 제사장 응식을 먹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성경은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죽임당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나 그 상황 설명이 그리 명료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먼저 레10:1-2의 기록을 여기에 옮겨 놓기로 하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야웨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야웨 앞에서 죽은지라."
여기 '다른 불'이란 히브리어 표현 '에쉬 사라'를 옮긴 것이다. 이 표현은 역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 민3:4; 26:61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본문들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나답과 아비후는 '야웨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하여 많은 주석가들은 '불을 번제단에서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화를 입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번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향로에 채워서 분향하라'(레16:12)는 지시는 사실상 이 사건 이후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레16:1 참조). 그리고 역시 이 사건 이후, 고라 무리의 반역이 있었을 때,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취하고 (번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고 명한 적이 있다(민16:46). 이 두 경우 외에 "단 위의 불을 가져다가 향로에 담는 장면"은 마지막으로 신약 성경의 계8:5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고찰해 볼 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이유를 단순히 '다른 불', 곧 일부 주석가들이 말하는 바, '번제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불을 취하여 분향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시원한 대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비합법적인 분향' 때문이라고 한다. 출30:9의 "너희는 그[=분향단] 위에 다른 향('크토레트 사라')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라"는 명령은 이 사건 이전에 있었던 지시이다. 이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예를 들어, Keil & Delitzsch, Levine) 출30:9와 레위기 10장 본문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하면서, '다른 향을 살라 바치는' 행위를 얼마든지 '다른 불을 드리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위의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나답과 아비후가 죽게 된 데에는 단순히 이들 두 가지중의 어느 하나나 또는 두 가지 이유 모두로 인한 것 이상으로 더 복합적인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레16:1에 "아론의 두 아들이 야웨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야웨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이어 야웨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론에게 지시하신 말씀이 적혀 있다: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레16:2-4). 이 말씀을 통해 볼 때에, 아론의 두 아들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방자하게 지성소로 들어 가려다가(또는, 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시는 올바른 분향 방법에 대한 말씀으로까지 계속된다: "향로를 취하여 야웨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야웨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다" (레16:12-13).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술에 관한 지시를 내리셨다는 사실이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레10:9). 우리는 이 구절만 가지고는 이 날 과연 나답과 아비후가 술을 마시고 회막에 들어간 것인가 하는 여부를 판가름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날의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후손에게 술에 관하여 엄명을 내리셨다는 점이다. 나답과 아비후의 음주 여부는 그만 두고라도, 적어도 이 날 두 사람은 회막 안에서 무언가 경망된 짓을 하였기에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경망된 행동이 혹시 음주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보게 된다.
아울러 이 일 후에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레10:3)고 하신 야웨의 말씀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 그에게 가까이 할 수 있는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자세와 태도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나답과 아비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두 사람이 회막 안에서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일을 저질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야웨의 불'은 그분께 가까이 하여 그분이 원하시는대로 제사하는 이들의 제물을 사름으로써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환희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레9:22-24 참조: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야웨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동일한 '야웨의 불'은 그분 앞으로 방자하게 나아오는 자는 가차없이 불살라 처벌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형벌은 고라 무리의 반역 사건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민수기 16장).
오멜 절기와 부활 (레위기 23:9-14)
처음 난 것으로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친 것은 비단 사람이나 짐승 뿐만은 아니다. 율법은 식물의 첫 열매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칠 것을 명하고 있다(출23:19; 34:26). 여기서 토지 소산이라 함은 각종 곡물과 과일 및 올리브 기름 등 일체의 농산품을 가리킨다(민18:12 참조). 레위기에서는 특별히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전에 첫 이삭 한 단(= '오멜')을 야웨께 바칠 것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야웨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레23:10-14).
칠칠절 곧 오순절의 날자는 이 첫 이삭을 바치는 날에 달려있다. 15-16절에 의하면 칠칠절은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결정된다. 물론 해마다 기후나 기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 첫 이삭을 거두는 날이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유월절은 대략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의 4월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의 곡물(주로 보리와 밀) 추수는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에 거의 이루어진다. 이 사실은 첫 이삭 단을 바치는 날이 유월절 또는 무교절과 시간상으로 밀착되어 있음을 설명해준다.
'오멜'을 흔드는 날, 곧 레23:11, 15의 '안식일 이튿날'에 관하여는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학자들간에 논란이 많다. 필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하여 이 '첫 이삭 한 단'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흔드는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찌기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암시적으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유월절 기간에 죽으시고 안식후 첫날에 다시 살아나셨다. 죽은지 사흘만에 살아나셨으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은 무교절 한 주간 중의 일요일이 될 것이다. 레위기 23장에서 '오멜'을 굳이 '안식일 이튿날'(이 표현은 민33:3; 수5:11의 '유월절 다음날'과는 구분됨)에 드리라고 한 것은 이 구절이 다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상징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레23:11의 '안식일 이튿날'은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고전15:20). 바울이 사용한 '첫 열매'라는 낱말 역시 구약 성경의 냄새를 물씬 풍겨준다. 과거 바리새인으로서 율법 연구에 혼신의 노력을 쏟았던 바울인지라 율법의 구절구절이 그의 머리 속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언급하면서 율법의 첫 소산에 대한 규례를 염두에 두었음에 틀림없다. 이상의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레위기 23장의 '오멜'과 관련시킬 수 있고, 또 그 날짜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오멜' 절기가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이듯이(레23:14),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히 기념할 날이다.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모세의 율법 가운데 안식년과 희년(禧年) 제도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안식년과 희년을 산정하는데 있어서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7'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정확한 산출 방법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견해 차이를 보인다. 먼저 안식년의 기간과 관련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야웨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레25:3-5).
이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성경의 역법(曆法)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의 역법에서는 해의 주기(=365.242196일)와 달의 주기(=29.530588일)가 함께 사용된다. 해의 주기는 날과 해(年)의 기준이 되고, 달의 주기는 절기와 달(月)의 기준으로 쓰인다. 1주일 7일의 개념과 하루가 대략 해질 무렵인 오후 6시에 시작한다는 점은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되었다. 12달의 이름은 차례대로 1)니싼 또는 아빕, 2)십 또는 이얄, 3)씨반, 4)타무스, 5)아브, 6)엘룰, 7)에타님 또는 티슈리, 8)불 또는 마르헤스반, 9)키슬레브, 10)테ꕛ, 11)셰밭, 12)아달이고, 13)베아달은 윤달이다. 달이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날이 초하루가 되고 완전히 그믐달로 변할 때가 그 달의 마지막 날이 되기 때문에, 1년의 기준이 되는 해의 주기와 맞추기 위하여 윤달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 역법에 따른 한 해는 니싼월(봄)에서 시작하여 다시 니싼월로 돌아오는 주기를 취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서 1년중 농업의 주기는 제7월, 곧 티슈리월(그레고리력의 9-10월에 해당)에 시작하여 그 다음해 티슈리월에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주요한 농산품인 보리와 밀과 포도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자면, 티슈리월에 시작되는 밭갈기와 (보리 및 밀)씨뿌리기, 니싼월에서 씨반월 사이에 걸친 보리와 밀 수확, 티슈리월에 끝나는 포리 수확의 순서가 된다. 레25:3을 따라, '6년 동안 파종하며 6년 동안 과수원을 관리할' 경우 제6년에 수고한 결과는 제7년 니싼월에 시작하여 티슈리월 이전까지 거두게 된다. 따라서 땅은 안식년 첫 달(니싼월)부터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7월(티슈리월)부터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다음으로 희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희년 산정에 관하여 레25:8-9은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라고 밝히고 있다. 이 구절은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희년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레25:10-11("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의 '제 오십년' 때문에 희년을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아니라, 그 다음 해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럴 경우 희년이 끼는 주기는 7년 동안에 안식년(희년도 일종의 안식년임)이 두 번씩 발생할 수 있으므로 농업상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레25:10-11의 '제 오십년'은 한 희년을 '제1년'으로 계산할 경우 다음 희년이 '제50년'이 되므로 얼마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로 인정하는 우리 한국인들의 나이 계산법과 비교해보면 이런 계산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희년을 매 '일곱번 째의 안식년'과 동일한 때로 이해할 때, 희년과 관련된 많은 의문점들이 사라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농업주기로 인하여 안식년이 사실상 제7년 제7월(티슈리월)에 시작하는 것처럼, 희년 역시 '일곱번 째의 안식년' 제7월, 곧 티슈리월 10일에 나팔을 크게 분 후 시작하게 된다. 구약 성경 난제(I)-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Old Testament Difficult Passages I
-Genesis, Exodus, Leviticus-
저자: 김경래 Author: Kyungrae Kim, Ph.D.
펴낸 곳: 도서출판 대장간 Publisher: Daejanggan Press (Anyang, Korea)
초판일:1998년 8월 25일
목 차 Contents
머리글
제1부. 창세기 난제
창세기 1장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 (창1:1-31)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 (창1:26; 3:22; 11:7)
온 지표면을 적신 큰 물덩어리 (창2:6)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2:7)
선과 악을 안다는 것 (창2:9, 17; 3:5, 22)
여자의 후손과 뱀 (창3:15)
생명나무와 영생 (창3:22-24)
가인의 출생에 대하여 (창4:1)
창4:7의 올바른 번역과 이해 (창4:7)
우리 들로 나가자 (창4:8)
야웨의 이름을 부르다 (창4:26)
하나님의 아들들 (창6:1-4)
노아 방주에 들어간 동물의 수 (창6-7장)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9:18; 10:21)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 (창5:3-32; 11:10-32)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언제 죽었나? (창11:32)
이스마엘의 운명에 관한 예고 (창16:12)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에서에 대한 예언 (창27:39-40)
야곱과 천사의 씨름 (창32:24-30)
요셉의 노예 정책 (창47:21)
세겜을 한몫 더 받은 요셉 (창48:22)
요셉에 관한 예언 (창49:22-26)
제2부. 출애굽기 난제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1:1-5)
모세의 미디안 생활과 이집트 왕의 죽음 (출2:23)
하나님의 이름 '야웨' (출3:14)
이집트 탈출을 위한 광야 사흘길 (출3:18; 5:1-3; 8:27)
피 남편 모세 (출4:24-26)
유월절의 제정과 그 의미 (출12:1-14)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시간 (출12:6)
이스라엘 자손의 이집트 체류기간 (출12:40-41)
만나의 정체 (출16:13-36)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가축으로 인한 농작물 손상 (출22:5)
염소 새끼와 어미젖 (출23:19)
우림과 둠밈 (출28:30)
하나님의 약속과 그 위기 (출애굽기 32장)
야웨의 책 (출32:32-33)
모세의 또 다른 회막? (출33:7-11)
이름으로 아는 것 (출33:12, 17)
제3부. 레위기 난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레위기 1-3장)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1:1-17)
제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제사장의 몫 (레1:9, 13 등)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레4:1-6:7)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레10:1-2)
성경의 '문둥병' (레위기 13-14장)
유출에 대한 규례 (레위기 15장)
이스라엘 자손이 섬기던 수염소 (레17:7)
오멜 절기와 부활 (레23:9-14)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십일조의 의미 (레27:30-33)
참고 문헌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세기 2:7)
"야웨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우리말 개역 성경에 등장하는 이 창2:7에 대한 번역문은 일반 독자들이나 심지어는 설교자들에게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말하는 이 오해란 앞서 창세기 1장에서 다른 동물들을 단순히 '생물'이라고 부른데 반하여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생령'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우리말에 있어서도 '생령'(生靈)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생령'(生靈)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네페쉬 하야'인데, 이는 이미 창1:20, 21, 24, 30에서도 나오는 표현으로서 개역 성경은 그곳들에서 '생물'이나(1:20, 21, 24) 또는 단순히 '생명'으로(1:30)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네페쉬 하야'란 표현은 또 창2:19; 9:10, 12, 15, 16에도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인간 외의 동물계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다른 동물과 동일한 '네페쉬 하야'인 우리 인간을 달리 표현하고자 만들어낸 '생령'이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에게 그릇된 생각을 조장할 수 있는 것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번역문이라고 하겠다. 이 경우 오히려 표준새번역의 '생명체'라는 번역이 훨씬 더 적합한 번역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라는 표현은 인간과 다른 동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페쉬 하야'라고 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2:7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그 안의 '생령'이라는 번역문을 버리고, '살아있는 존재' 내지는 '생명체'라는 번역문을 가지고 읽을 때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생명체'가 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호흡'이 필요한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칠십인역에서는 창2:7의 '네페쉬 하야'를 다른 경우에서처럼, (프쉬케 소싸)로 번역하였다. 헬라어에서 이것은 인간 뿐 아니라 인간 외 모든 동물계까지 가리킬 수 있는 표현이다. 칠십인역에서 '네페쉬 하야'의 '네페쉬'를 보통 '영(靈)'을 뜻하는 (프뉴마)로 번역하지 않고 그것과 구분되는 (프쉬케)로 번역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번역을 적절히 활용하여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고전15:45).
개역 성경은 고전15:45을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읽고 있다. 여기서 '산 영'과 '살려주는 영'은 각각 (프쉬케 소싸)와 (프뉴마 소오포이운)을 번역한 문구이다. 이 인용문구의 출처인 창2:7에서 이미 '생령'이라고 번역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결국 그 연속성을 어기지 못하고 (프쉬케)와 (프뉴마)의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다 '영(靈)'으로 번역한 듯하다. 바울이 의도한 바를 살리려면 여기서도 창2:7과 마찬가지로 '산 영' 대신 '살아있는 존재'나 '생명체'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우리 들로 나가자 (창세기 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이 구절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것은 히브리어 원문상의 난해구절도 아니요, 번역상의 문제도 아니다. 다만 사건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간단하여서 무언가 빠진 느낌을 줄뿐이다. 창4:8은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라는 문구로 시작되기 때문에 바로 이어서 가인이 아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록했을 법하지만, 그런 내용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사마리아 오경과 고대 주요 역본들은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다음에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이러한 사본학적 증거들 때문에 최초의 원본에 이 문구가 들어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우리말 역본들중 개역 성경이 아무런 난외주도 없이 맛소라 사본의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옮긴데 반하여,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본문 가운데 이 문구를 끼워놓고 난외주에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한편 이 구절에 대한 한 가지 흥미 있는 주석적 요소는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4:8>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말하였다: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 그들 둘이 들로 나갔을 때에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기에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는데,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지지 않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있구나. 그래서 네 제물은 열납되고 내 제물은 열납되지 않았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고,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진다. 그리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없다. 그러나 내 행실의 열매가 네 것보다 더 좋았기 때문에 내 제물이 네 것을 제치고 열납된 것이다."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없다.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악인에게 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있으며,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고, 악인에게는 벌이 있다." 이 일 때문에 그들은 빈 들판에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마침내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덮쳤다. 그는 돌로 동생의 이마를 쳐서 그를 죽여버렸다.
여기 우리말로 번역하여 인용된 타르굼 내용은 결코 창4:8의 원본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아마도 과거 유대인 사이에 유행하였을 주석적 요소를 반영할 뿐이다. 길게 첨가된 주석적 내용 중에는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도 포함되어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에서도 다시 이 문구가 원래의 히브리어 본문에서 번역된 것인지, 아니면 번역자가 주석적인 요소중 일부분으로서 첨가한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이런 경우에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본문 중에는 이 문구를 넣지 않되, 난외주를 이용하여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된 고대 사본이나 역본들이 있음을 언급해주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물론 예루살렘 타르굼의 긴 주석적 내용을 우리말 역본에 소개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아들들 (창세기 6:1-4)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야웨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神)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6:1-4).
창6:1-4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학자들간에 쉽게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신학계에 구구한 해석사를 남긴 성경 난제중의 난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해 내려오는 여러 해석중 어느 하나가 분명히 맞는 해석이라면, 이 구절은 하나의 난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많은 성경학자들의 그릇된 신학적 사고방식을 반증해주는 사실이 아닐까? 필자는 여러가지 견해를 이 지면에 소개하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옹호 내지는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류의 서적이 이미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히려 본문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통하여 필자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설명하고자 한다. 다른 훌륭한 학자들의 해석을 재현하는 내용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국내의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이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우선 1절의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대하게 된다. 이 낱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하아담'은 정관사 '하'와 명사 '아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 끝에서 '하아담'을 복수형 대명사 어미로 받는 것으로 보아('그들에게서'; 히브리어로 '라헴'), 이것은 고유명사로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보통명사로서 아담으로 시작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딸들'과 역시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2, 4절의 '사람의 딸들'('브노트 하아담')은 인류, 곧 인간 사회에서 태어나는 '딸들'을 가리킴이 너무나 분명하다.
2절과 4절에는 이들 '사람의 딸들'의 상대역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브네 하엘로힘')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여기 말고 욥기에 또 다시 등장한다(욥1:6; 2:1; 38:7). 욥기에서 우리가 문맥을 통하여 분명히 아는 대로, 이 표현은 우리 인간이 아닌 '하늘의 영적인 존재', 소위 '천사들'을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서 단3:25에 아람어로 '바르 엘라힌'이 있는데, 이는 '신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역시 영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시29:1; 89:6(히브리어 성경에서는 89:7)에 나오는 '브네 엘림'은 직역하면 '신들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이 표현 역시 천사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것이 만일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에 관한 언급이라면, 이에 대하여 조물주께서 무언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시고(3절) 또 이러한 혼인 관계로 유별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은(4절)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사 경건한 가문의 아들과 불경건한 집안의 여자, 또는 귀족층 남자와 서민층 여자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결과적 사실을 만족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이처럼 창6:1-4의 본문에서 이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간 세상의 남자를 가리키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으므로 자연히 누군가 '인간 사회' 밖의 존재이어야만 하겠고, 아울러 앞서 제시한 바, 욥기와 기타 유사 문구의 도움을 얻어 얼마든지 '천사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표현 자체와 전체적 문맥을 통하여 이런 식의 유추는 가능하지만, 다만 이러한 이해에 대한 신학적 걸림돌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22:30; 막12:25) 때문에 학자들은 선뜻 상기한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눅20:34-36에서는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좀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이제는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의 사람들을 가리켜 "천사와 같다"고 하신 것은 그들과 천사들이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 밝히 보는대로,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휘오이 테우', ՕՉՏՉ ՈՅՏՕ)이라고 부른 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와 같게 변한 그들의 새로운 신분 때문이 아닐까.
다시 창세기 6장으로 돌아와, 칠십인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에 대하여 '하나님의 천사들'('호이 앙겔로이 투 테우', ՏՉ ՁՃՃՅՋՏՉ ՔՏՕ ՈՅՏՕ)이라는 번역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은 칠십인역 말고도 외경 에녹서(6:1-6)와 요세푸스(유대인 고대사 1권 3장 1절) 등을 통하여도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신약 성경의 몇몇 구절도 창6:1-4의 해석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먼저 벧후2:4-5에서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신' 일과(4절)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홍수로 인간 세상을 멸하신 일'을(5절)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벧전3:19-20의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는 기록 역시 이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구절(벧전3:19-20)을 '그리스도께서 고난 즉 죽음을 부활로 이기신 후, 전에 타락하여서 옥에 갇혀 있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신 것'이라고 본다. 옥에 갇힌 이들 천사들은 벧후2:4("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말고, 유다서 6절("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벧전3:19-20과 벧후2:4-5에서 이들 천사들의 투옥과 홍수 심판 기사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이들 '타락한 천사'라고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특별히 유다서 6절에서 천사 타락을 언급한 후 바로 이어 나오는 7절("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을 통하여, 우리는 천사 타락이 성적인 범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신약 성경의 몇몇 기록은 창6:1-4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해석을 반증하기 보다는 오히려 변증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 영적 존재인 천사가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 다만 우리는 소돔 사람들이 롯을 찾아온 두 천사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기록을 통하여(창19:5; 벧후2:6-8) 이런 가능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따름이다. 천사와 인간의 성적 결합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로 간주되어,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창6:3은 이런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서 하나님이 취하시고자 하는 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무서운 죄악은 비록 악한 천사들로부터 시작되긴 하였으나, 인간('하아담')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 그 안에 죄의 결과를 뿌려놓았기 때문에, 인간 역시 그 죄값을 모면할 수 없게 된다.
창6:3에서 야웨께서 말씀하시는 바 '나의 신(ࠉࠇࠅ࠘)' 곧 '하나님의 영(靈)'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하나님의 생명의 숨(生氣)'(창2:7 참조)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서 보통 '영(靈)'으로 번역되는 '루둽'과 '숨'으로 번역되는 '네샤마'는 동의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사람의 딸들이 악한 천사들의 무질서한 행위에 이용된데 대하여 분노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제동을 거신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영은 육체인 사람 속에 영원히 거하지 아니할 것이다. 여기서 '영원히'란 말은 '레올람'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을 번역한 것으로서, '영원히'라는 뜻도 되지만 '오래도록'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창6:3의 "120년"은 아마도 하나님이 새로 정하신 인간의 수명을 가리킬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대략 900세 정도로 '오래도록'(='레올람') 수명을 누려 왔었다 (창세기 5장의 족보 참조).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 안으로 단축시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타락한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합하여 낳은 자식들은 평범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창6:4에서 히브리어를 소리나는 그대로 음역하여 '네필림'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용사요, 고대에 유명한 자들'이었다. '네필림'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칠십인역('호이 기간테스')을 따라 '거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필림'은 이곳 말고 유일하게 민13:33("거기서 또 네필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에만 등장한다. 민13:33의 상반절을 직역하면,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네필림 중에서 아낙 자손 네필림을 보았다"가 된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이들이 보았다는 아낙 자손은 헤브론에 거하던 세 사람으로서,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라고 그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민13:22, "또 남방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이집트 소안보다 칠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천사와 인간 사이에 특별한 거인이 태어나, 고대에 '용사로서 유명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창6:4의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라는 문구는 이 일이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비정상적인 결합이 언제까지 지속되었을까?' 하는 물음에는 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만일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으로 인하여 이런 일이 중단된 것이라면 모세, 여호수아 시대의 '네필림'(민13:33)은 이런 결합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거인'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창6:1-4에 기록된 사건과 홍수 심판의 연관성이다. 창6:5("야웨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에서는 인간의 죄악이 언급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홍수 심판이 있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서 언급되었다. 창6:1-4에 나오는 바, 타락한 천사의 행위에 대한 기록은 그 위치로 보아, 역시 홍수 심판의 원인 중 하나로서 묘사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들도 입증해주고 있다.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세기 9:18; 10:21)
일반적으로 노아의 세 아들은 셈, 함, 야벳의 순으로 일컬어진다 (창5:32; 6:10; 7:13; 9:18; 10:1; 대상1:4). 대부분의 성경 독자들은 이러한 배열로 인하여 그들의 나이 역시 같은 순서대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노아에게 셈, 함, 야벳의 순서로 아들들이 태어난 것인가? 우리는 성경 본문을 통하여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어 번역본들에 나타나는 성경 오역이 바로 그것이다.
개역 성경은 창5:32을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조그만 글자로 인쇄된 "된 후에"는 원문에 없으므로 문맥을 고려하여 번역문에 삽입한 것이다. 표준새번역 역시 이를 같은 뜻의 "노아는 오백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창5:32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노아가 오백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이다. 이 문장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에 세 쌍둥이가 태어남, 2) 이들 세 아들이 노아가 오백세 되기까지 차례대로 태어남, 3)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 첫 아들이 태어나고 그 다음에 차례대로 다른 두 아들도 태어남. 히브리어 어법상 앞의 두 가지 보다는 세번째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역과 표준새번역 둘다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순서가 꼭 나이에 따른 순서여야 할 이유도 증거도 없다.
다음으로 고찰해야 하는 구절은 창10:21이다. 우선 우리말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개역은 이를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라고 번역함으로써, 개역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번역문은 과연 히브리어 원문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까? 여기서 "야벳의 형"이라고 번역된 문제의 구절을 히브리어 원문 및 고대 번역문인 칠십인역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 두 가지면 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충분하다고 본다.
창10:21의 이 문제의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본문은 ('둺히 예쵛 하가돌')이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와 모음 부호를 무시할 경우 이 히브리어 구절은 두 가지의 직역이 가능하다: 1)'야벳의 큰 형제(brother)', 2)'큰 (자) 야벳의 형제'. 다시 말해서 '크다'('하가돌')라고 하는 형용사가 '야벳'과 '형제' 중 어느 것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이 문구의 해석이 달라진다. '야벳'을 수식할 경우 야벳이 형이 되고, '형제'를 수식하면 셈이 형이 된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 부호의 기능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구두점 역할일 것이다. 맛소라 성경의 엑센트는 여기서 '크다'가 '야벳'을 수식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맛소라 학자들은 야벳을 셈의 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칠십인역 역시 맛소라 학자들의 견해를 지지해준다. 이 구절에 대한 칠십인역의 번역문(ՁՄՅՋՖٍ ԩՁՖՅՈ ՔՏՕ ՌՅՉՆՏՍՏՒ)에 있어서 명사 '야벳'과 형용사 '크다'는 동일한 2격(소유격)을 취하고, '형제'는 3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큰 자'는 셈이 아니라 야벳인 것이다.
셈이 야벳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은 창11:10을 통하여서도 찾아볼 수 있다.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라는 이 기술에 의하면, 셈이 일백세가 된 것은 홍수 후 이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이레 후 곧 2월 17일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40일을 내렸으며 (창7:9-12), 그들이 방주 밖으로 나온 것은 노아가 601세 되던 해 2월 27일이었으니 (창8:14-19), 노아 홍수는 햇수로 볼 때 2년이나 지속된 장기간의 대사건이었다. '홍수 후 2년'('슈나타임 둺하르 하마불')이란 히브리어 문구는 분명히 홍수 사건이 완전히 끝난 후 또 두 해가 흐른 뒤의 일임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에게 노아 나이 600세와 601세의 두 해는 홍수해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그후 두 해(노아 나이 602세와 603세)가 지나, 노아의 나이가 대략 604세가 되던 해에 셈은 나이 100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셈은 노아가 504세가 되던 해에 태어난 셈이 된다. 이상 고찰한 바를 창5:32("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과 묶어서 볼 때, 셈은 결코 노아의 맏아들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증거로서 창9:24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창9:20-27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있을 때 그 아들들이 취한 행동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내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 중에서 분명치 아니한 점은 도대체 함의 아들 가나안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많은 독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저주를 받은 것은 함이 아니요 그의 아들인 가나안이다.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15:16, 19-21 등 참조). 이 저주를 항간에 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흑인 전체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창9:24에 기록되기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하였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작은'('하카탄')을 위하여 '둘째'라는 각주를 덧붙임으로써, 이 아들이 다름 아닌 '함'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함에 대한 저주가 없음을 고려할 때, 여기서 말하는 '그 작은 아들'은 아마도 함이 아니라 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경우, 이 작은 아들이 '행한 일'은 무슨 저주받을(25, 27하반절) 악한 행실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축복을 받아 마땅한(26-27상반절) 아름다운 행실을 가리키게 된다.
이상으로 우리는 야벳이 셈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찰해 보았다. 노아의 세 아들중 다만 함의 연령상의 위치가 확실치가 않다. 창9:24의 '작다'('하카탄')나 10:21의 '크다'('하가돌')라는 형용사가 반드시 최상급으로서 '막내'나 '맏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히브리어 어법을 따라서 최상급으로 이해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 세 아들의 가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야벳(2-5절), 함(6-20절), 셈(21-31절)의 순서로 열거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나이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상의 모든 고찰을 종합하여 가장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야벳은 노아 500세 되던 해에, 함은 노아 502세 되던 해에, 그리고 셈은 노아 504세 되던 해에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불행하게도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번역가와 성경 해석가들은 노아의 세 아들이 셈, 함, 야벳의 차례로 태어났다고 믿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창10:21 본문에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 현대 역본이 그런 것처럼,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맛소라 성경의 히브리어 본문과 고대 역본인 칠십인역을 따를 경우,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철저히 금하시고 있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과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아무리 시험이라고 하지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의혹 때문에 과거 유대인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갖가지 해석을 시도하였다. 여기서는 먼저 고대 유대인들의 해석중 하나를 예루살렘 타르굼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한다.
'타르굼'은 통일적인 하나의 성경 역본이 아니다. 그 시대도 다르거니와 역자 또한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다양한 종류의 '타르구밈'(타르굼의 복수형) 전승이 전해진다. 모세 오경만의 아람어 역본을 두고 볼 때, 온켈로스의 타르굼은 비교적 문자적 번역을 시도한데 반하여,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은 온갖 주석적 요소로 가득차 있어서 주석가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타르굼이라고 하겠다. 이 예루살렘 타르굼은 그 최종 편집이 상당히 늦은 시기에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그 안에 보존된 주석적 요소들중 상당한 부분이 예수님 이전부터 전해진 것들로 추정되기에 이러한 타르굼의 전승은 예수님 당시 구약 성경에 대한 유대인들의 해석을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 연구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창22:1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상당히 흥미있는 주석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우선 그 본문을 우리말로 옮겨 보기로 하자.
이 일들 후에 이삭과 이스마엘이 다투었다. 이스마엘이 말하였다: "내가 장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자 이삭이 말하였다: "내가 아버지 부인 사라의 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너는 내 모친의 여종인 하갈의 자식일 뿐이다." 이스마엘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나는 열 세 살에 할례를 받았으니 너보다 더 의롭다. 만일 내게 거절할 뜻이 있었더라면 나는 얼마든지 할례를 받지 않았었을 것이다." 이삭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나이 지금 서른 일곱이 아니냐. 만일 거룩하시고 찬양받으실 분이 나의 모든 지체를 요구하신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겠다." 그 즉시로 이 말들이 우주의 주께 들려졌고, 또한 그 즉시로 주의 말씀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위에서 보는대로 예루살렘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스마엘이 이삭의 비위를 건드리는 말로 그에게 도전해오자 이삭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적 태도를 주저함없이 발설한다. 자신의 모든 지체라도 주저하지 않고 바치겠다는 이삭의 선언이 결국 이러한 시험의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 이 타르굼의 설명이다. 특별히 아브라함이 시험받을 때 이삭의 나이는 37세로 되어 있다. 이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일을 사라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라는 127세에 죽었으므로(창23:1), 이때 이삭의 나이가 37세가 되는 점에 착안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이삭의 나이를 37세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22:1 본문은 상당히 흥미있는 해석을 보여주긴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은 설명일까 하는 데에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는 고대 유대인 랍비들의 지나친 추측에서 나온 해석이 아닌가 한다. 이와는 달리 요세푸스의 설명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더 설득력이 있다. 요세푸스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시험해 보고자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이때 이삭의 나이를 25세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이때 이삭의 나이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이나 요세푸스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번제 나무를 지우고 산을 오르게 했다는 점으로(창22:6) 미루어 이삭이 결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막 치려하는 순간에 이삭의 반응이 어떠하였을까? 고대 유대인들은 이에 대하여도 관심이 컸다. 먼저 예루살렘 타르굼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다음은 창22:10에 대한 예루살렘 타르굼의 본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손을 내밀어 칼을 집어서 자기 아들을 잡으려 하였다. 이삭이 자기 아버지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영혼이 고통 중에 분투하지 않도록 저를 꼭 붙잡아 매세요. 그래야만 아버지의 제물에 흠이 없겠고 저도 멸망의 구덩이로 던져지지 않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눈은 이삭의 눈을 쳐다보았으나, 이삭의 눈은 저 높이 천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삭은 그들을 볼 수 있었으나, 아브라함은 보지 못하였다. 높은 곳에서 천사들이 화답하였다: "우리 가서 땅 위의 저 두 별난 사람을 보자. 하나는 잡는 자요, 다른 하나는 잡히는구나. 잡는 자는 주저함이 없고, 잡히는 자는 그 목을 길게 내미는구나."
예루살렘 타르굼은 이삭의 순종과 신앙심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세푸스 또한 이에 뒤질세라 이때의 상황을 아브라함과 이삭 부자(父子) 사이의 눈물겨운 대화 내용을 통하여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요세푸스의 경우에도 이삭의 믿음과 순종이 돋보인다.
비록 이런 기록들이 추측에 불과하기는 하겠지만, 이때 이삭의 순종과 믿음에 대하여는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직 40이 되지 않은 젊은 나이의 이삭은 원하기만 하였다면 100세가 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고대 유대인들의 몇몇 성경 해석을 통하여 이삭의 믿음이 돋보이게 묘사된 데 반하여, 신약성경은 창세기 22장과 마찬가지로 이삭 보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7-19)고 하였고, 야고보 역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1)고 역설하고 있다.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애굽기 1:1-5)
야곱과 더불어 이집트에 내려간 야곱 가문 사람들의 숫자는 칠십인역에서 다섯 명이나 더 불어난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의 발언은 칠십인역과 일치한다 (행7:14):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그럼 먼저 문제의 출1:5의 맛소라 성경 및 칠십인역 본문을 직역하여 아래에 옮겨놓기로 하자. 문맥을 볼 수 있도록 맛소라 성경의 1:5 앞에 1:1-4의 내용을 괄호로 묶어 기입해둔다.
(맛소라 성경)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이집트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베냐민, 단, 납달리, 갓, 아셀.)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명인데,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칠십인역)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야곱에게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오인이었다."
출1:5에 있어서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차이점이란 아주 간단하다. 첫째로 두 구절의 순서가 서로 바뀌었고 (칠십인역에서는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가 절의 맨 앞에 나온다), 둘째 인원수 면에서 맛소라 성경에서는 '70명', 칠십인역에서는 '75명'으로 서로 다르다. 여기서 사마리아 오경은 맛소라 성경과 일치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창46:8-27에 나오는 보다 상세한 목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도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을 비교해보기로 하자. 창46:8-27은 내용상 1)레아 소생(8-15절), 2)실바 소생(16-19절), 3)라헬 소생(20-22절), 4)빌하 소생(23-25절), 5)종합(26-27절)으로 쉽게 나뉜다. 8절에서 19절에 이르기까지 표기상의 미미한 차이점을 제하고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은 서로 일치한다. 23-25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라헬 소생'(20-22절)의 명단에 있어서 칠십인역은 맛소라 성경과 차이점을 보이며, 따라서 '종합'(26-27절)에 있어서도 인원상의 차이점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20-22절 나란히 배열해보기로 하자.
맛 소 라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과 아릇이니,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사명이요. |
칠십인역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므낫세의 시리아 여자 첩이 그에게 낳은 아들들은 마길이요, 마길은 길르앗을 낳았다. 므낫세의 동생 에브라임의 아들들은 수델라와 다한이요, 수델라의 아들들은 에뎀이다.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이요, 벨라의 아들들은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이요, 게라는 아릇을 낳았다.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팔명이요. |
위의 표에서 보듯이 칠십인역에는 몇몇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들 삽입문에 대한 정보는 민26:35-36; 대상7:14; 8:3-5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목적은 아마도 창50:22-23("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이집트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의 영향을 받아, 요셉의 자손을 한 두 대(代) 더 보여주고 아울러 부자 관계를 정확하게 밝히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칠십인역에는 다섯 사람의 이름(마길, 길르앗, 수델라, 다한, 에뎀)이 더 들어 있지만 마지막에 '18명'으로 합을 낸 문제점이 보이기도 한다.
26절에 있어서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은 완전히 일치한다: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 륙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이다." 이 숫자에는 야곱 자신, 요셉, 및 요셉의 두 아들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로 다음의 27절에서는 20절에서의 차이점과 관련하여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 사이에 차이점을 보인다.
(맛소라 성경)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명이었더라."
(칠십인역) "이집트 땅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일곱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오명이었더라."
이상을 통하여 칠십인역의 '66명'을 설명하자면, 33(레아의 소생과 야곱을 합한 수) - 1(야곱) + 16(실바의 소생) + 11(베냐민과 그의 자손) + 7(빌하의 소생) = 66이 된다. 그리고 '75명'은 66 + 1(요셉) + 7(요셉의 자손) + 1(야곱)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칠십인역 22절의 '18명'은 어쩔 수 없이 라헬의 소생 중 요셉을 제외한 숫자로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수는 신10:22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이 절의 경우 칠십인역도 '75명'이 아닌 '70명'으로 읽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창세기 46장과 출1:5에 나타나는 사본상 차이점은 칠십인역의 의도적 편집 작업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맛소라 성경이 원래의 본문을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맛소라 성경을 통해볼 때, 창46:8-27의 기록은 몇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야곱의 아내들을 비롯하여 모든 며느리나 손주 며느리 등 여자들이 숫자 계산에 들어오지 못한 반면에(26절 참조), 유일하게 레아의 딸 디나와(15절) 아셀의 딸 세라(17절)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다른 말로 가정을 이루지 아니하고 지낸 것이 아닌가 한다. 디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창세기 34장 참조).
둘째, 레아 소생을 계수함에 있어서 야곱 자신을 포함시켜 그 수는 모두 '33명'에 이른다(15절).
세째,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할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자손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연대를 계산해 볼 경우,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베레스에게 이집트로의 이주를 즈음하여 두 아들이(12절) 이미 생겨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이 무렵 베냐민에게(민26:38-40; 대상7:6-7에 의거, '손자를 포함하여') 열 명의 아들이 생겨났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이들은 틀림없이 이집트로의 이주 후에 태어난 자손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70명'(또는 '75명')은 이집트에 내려간 실제의 정확한 인원이라기 보다는 이집트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민족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 야곱의 자손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출1:5)이라는 문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이러한 히브리적 사고 방식의 타당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히7:9-10 참조: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피 남편 모세 (출애굽기 4:24-26)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야웨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출4:24-26).
출4:24-26의 난점은 히브리어 문장의 번역에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사본학적인 문제도 아니다. 짧으면서도 전후 문맥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간단한 문단은 그 역사적 상황과 그에 대한 배경을 설명함에 있어서 많은 이론들을 만들게 한 성경 난제중의 하나이다.
야웨께서 왜 그리고 어떻게 모세를 죽이려 하셨나? 이러한 일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문맥을 통해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너무나 돌연적이고 이상스럽기까지 하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후, 이미 장인에게 요청하여 그로부터 허락도 받고(출4:18), 또 다시 야웨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는(출4:19), 아내와 두 아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는 중이 아니던가(출4:20)?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출4:22-23): "너는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야웨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이러한 일 다음에 기록된 내용이 바로 본문의 이상한 사건이다.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몇 가지 분명한 사실로는: 1)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심, 2)십보라가 아들 (아마도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할례를 행함, 3)이때야 비로소 모세가 화를 면함, 4)이 일로 십보라가 모세를 '피 남편'이라고 부름 등을 들 수 있다.
모세는 이때까지 자기 '아들'(20절의 복수형과는 달리 여기 25절에서는 단수형으로 언급됨)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무슨 일로 왜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이제까지 할례를 행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물론 첫째인 게르솜의 경우에도(출2:22 참조) 그가 과연 할례를 받았는지에 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모세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의 아내 십보라는 그 이유가 아들의 할례에 있음을 깨닫고는 즉시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로 실제로 모세는 죽음을 면하게 된다.
이때 십보라가 모세를 향하여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고 내뱉는데, 이 말은 한편으로는 일종의 분노와 자포자기가 함축된 말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의 특별한 사명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과 확인으로 들린다.
본래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셔서 그의 후손이 대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언약이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17:9-11). 이 명령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14)는 준엄한 경고로 끝을 맺는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에게만 해당하는 할례 예식은 틀림없이 남자들에 의하여 집행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출4:24-26 본문에서 모세가 아닌 십보라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는 사실 역시 특이하다. 24절의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라는 표현은 아마도 모세가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든가, 아니면 그가 무슨 특별한 위험에 빠져있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순전히 하나님과만 연관시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모세는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 수 없는 상황이었겠고, 자연히 그의 아내인 십보라가 이 일을 집행하여야만 했을 것이다.
아울러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은 모세보다는 십보라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모세는 한때 특별한 사명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지시에 대하여 자기는 부족하다면서 머뭇머뭇한 적이 있다(출3:11; 4:10, 13 참조). 이러한 모세의 태도로 인하여 하나님이 모세에게 노를 발하신 적은 있으나(출4:14 참조), 이런 일로 그를 죽이려 하신 것 같지는 않다. 더군다나 출4:24-26 본문에서는 모세의 위기에 대하여 할례가 주된 원인임을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에서는 십보라에 대하여 별 기록을 담고 있지 않다. 아마도 십보라로서는 그녀의 남편 모세에게 부여된 특별한 사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이행한다는 것이 모세 본인 못지 않게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멀리 이집트에서부터 '굴러 온 복'을 어찌 하루 아침에 놓칠 수 있으랴. 두 아들과 함께 남편을 따라 낮선 땅 이집트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너무나 처절하고 무거웠던 것이 아닐까? 남편이 구해야 하는 백성은 자기의 민족이 아니요 남편의 민족일 뿐이요, 이집트는 자기의 사랑하는 남편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 아니던가.
성경은 이집트로 향하는 모세의 가정, 아니 모세와 그의 아내 사이에 교차되는 감정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이처럼 유추해보는 수 밖에 없다. 두 아들은 그만 두고라도 아내 십보라의 마음 속에 있는 온갖 감정과 생각은 모세의 마음을 충분히 괴롭히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 모세와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들의 두 아들은 - 이집트로 향한다.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준엄하고도 분명한 명령 때문에.
이때 길의 숙소에서 일어난 사건은 모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십보라에게도 하나님이 내리신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준엄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로서 십보라는 자기 남편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할례의 집행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기 남편, 더 나아가서는 자기 남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중요성과 엄숙함을 재확인한다. 바로 이 언약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이 '사지'(死地)로 명령을 받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십보라는 이 냉정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 자기 아들의 양피를 베어 피를 냄으로써.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는 그녀의 외침은 그녀의 이러한 심경을 잘 대변해준다고 하겠다.
'피와 죽음'이란 관계를 두고 볼 때, 이 사건은 성경의 다른 몇몇 기록과도 연관성을 가진다. 우선 앞서 언급한대로 바로 앞의 출4:22-23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 재앙은 출애굽기 12장에 묘사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죽음을 면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간접적이긴 하지만 모세의 아들의 피가 모세의 개인적인 재앙을 면하게 하였다. 모세의 둘째 아들 엘리에셀의 이름을 설명하는 구절에서도 또한 다소나마 이런 맥락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파라오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출18:4).
출4:24-26에 기록된 사건으로 인하여 모세는 십보라와 두 아들을 장인에게로 돌려보내고 홀로 이집트로 떠난 것 같다. 그래서 출18:2-6에서 우리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 보내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 두 아들을 데렸으니.....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 아내로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 그가 모세에게 전언하되 그대의 장인 나 이드로가 그대의 아내와 그와 함께한 그 두 아들로 더불어 그대에게 왔노라"라는 기록을 보게 된다. 아마도 모세는 이 일을 통하여, 자기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신 하나님의 엄정(嚴正)하심과 그의 분명하신 목적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고는, 다시는 거역하거나 주저함이 없이 철저히 순종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인간 가운데 하나님의 강림(降臨)이 있다는 사실은 피조계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관심 내지는 간섭을 의미한다. 사실상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와 더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의 역사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신다. 이러한 간섭은 인간편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간을 지으신 이후로 인간을 그대로 두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강림 또는 임재(유대인들은 이를 가리켜 전문 용어로 '슈키나' 라고 한다)에 관하여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다. 구약 성경 중에서 하나님의 강림에 관한 기록중 가장 중요한 곳을 찾으라면 역시 출애굽기 19장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19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강림은 어느 개인이나 소수의 몇몇 사람 또는 작은 무리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목격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임하였다.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도 구름을 동반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 놀라운 광경 앞에서 두려움으로 떨며 모세의 중재를 요구하였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나타나신 것은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게끔 하는 목적이 있었다(출19:9; 20:20).
이제 필자가 고찰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강림에 관하여 출애굽기 19장에 기록한 사건이 시간적으로 언제 있었던 일이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출19:1)는 우리말 개역성경을 읽을 때, 정확하게 언제를 가리키는지 분명치가 않다. 여기 '제 삼월'중 '월(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데쉬'는 본래 '새롭다'라는 뜻에서 파생하여 '매월 달이 새로 뜨기 시작하는 월삭(月朔)'(new moon)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가 '월삭'을 뜻하는 경우로는 민29:6; 삼상20:5, 18, 24, 34; 왕하4:23; 사1:13; 겔46:1, 6; 암8:5; 시81:4 등을 들 수 있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총 281회 출현하는 이 단어는 그중 22회의 경우만 '월삭'의 뜻으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모두 '달'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그 때에'로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다시 직역하면 '이 날에'가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호데쉬'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월삭'의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출19:1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광야에 도착하여 시내산 앞에 장막을 친 것은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계산하여 제3월이 되는 바로 그날'이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이러한 해석을 근거로 하여 출19:1에 아예 '초하룻날'이라는 문구를 첨가하여, 각각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표준새번역)와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공동번역)로 번역하였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간'(출19:3) 날은 아마도 이제까지 설명한 '제3월 1일'이거나, 아니면 그 다음날일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말씀을 들은(출19:4-6) 모세는 이를 백성의 장로들에게 전해주고는(출19:7) 다시 백성의 반응을 하나님께 회보한다(출19:8). 출19:4-8에 기록된 일들이 모두 마치기까지는 아마도 하루 이틀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모세로부터 회보를 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앞에서 영광중에 나타나실 계획을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야웨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야웨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출19:10-11). 마침내 하나님이 말씀하신 "제3일 아침에 산 위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있었고, 심히 큰 나팔소리도 울려퍼졌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동반한 이 무서운 광경으로 인하여 "진중의 모든 백성은 다 두려워 떨었다" (출19:16).
첫째 달인 아빕월(출12:2 참조) 14일 저녁에 어린 양을 잡아 먹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출12:6-9 참조)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 그날 밤(아마도 제1월 15일 새벽, 출12:29-42 참조) 이집트를 떠났다. 성경의 역법을 따라 계산할 경우,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떠난 날(제1월 15일)로부터 하나님이 시내산에 나타나신 날(대략 제3월 3~6일 사이)까지는 대략 50일이 된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신 날을 오순절로 믿고 있다. 사실 이러한 계산은 거의 틀림없이 맞는 것이다. 오순절은 봄에 첫 곡식을 수확하여 첫 이삭 한 단을 흔들어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레23:15-16). 문제는 첫 이삭 한 단을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이 언제냐 하는 것인데, 레23:11, 15에 '안식일 이튿날'이라고 한 이 날은, 그 문맥상 유월절/무교절과 나란히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계산이 맞다면 오순절은 무교절중에 들어있는 일요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무교절중에 이집트를 나왔으므로, 그로부터 대략 50일이 지난 날은 오순절이 될 가능성이 크다.
모두가 아는 바대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교회 중에 강림하신 날도 바로 오순절이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이날 교회 위에 임하신 성령은 각 믿는 이의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삶을 인도하신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은 언제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탄절(개신교와 천주교의 12월 25일)은 성경 및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으로서, 일단 무시할 필요가 있다. 성경 연대기 학자 폴스틱(Eugene Faulstich, Witnesses for Jesus the Messiah, Spencer, 1989)은 여러 가지 역사 및 천문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을 (그레고리 역법으로 환산하여) 주전 6년 5월 14일로 제시하고 있다. 폴스틱이 제시한 유력한 근거들중 하나는 초대교부중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예수님의 탄생일자를 이집트 역법에 따라서 '파콤월 25일'로 기록한 것(The Stromata I.xxi)이다. 폴스틱은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태어난지 제8일, 곧 그가 할례받은 날이 바로 오순절이었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인용한 책, 6쪽).
만일 출애굽기 19장을 통하여 우리가 살펴본 연대기 재구성과 예수님의 탄생에 관련하여 폴스틱이 도출해낸 결론이 맞는 것이라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강림은 모두 오순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오순절의 의미를 재삼 강조하면서 되새길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왕 나온 김에 사도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마침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여기서 '가운데'라는 말은 '어느 개인 안에'가 아니라 '무리 중에'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시내산에서 성부 하나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에 오실 때 빽빽한 구름으로 임하지 아니하시고,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서 쓸쓸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고백하고 있다. 요한은 산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시던 날 온 누리를 덮었던 그 빛난 구름을(마17:1-8; 막9:2-8; 눅9:28-36 참조)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을 보았던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름으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요한은 이 사실에 감사 감격하여 이 글을 기록하고 있으며, 자신의 기록을 읽는 이들이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를 믿을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시내산 사건보다 더욱더 놀라운 일로서 하나님이 자신의 위엄을 가리시고 은혜와 진리로써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처음 오셨을 때의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그가 다시 오실 때는 현저한 하나님의 영광중에 오신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가 다시 오실 때 다음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3-4).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위기 1:1-17)
레위기 제1장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코르반) 중 번제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다른 예물이나 희생 제사에서도 그렇거니와 희생물로서 사용되는 동물은 제한되어 있다. 동물의 분류 내지 명칭에 있어서 히브리어는 우리 말과 약간 다르기 때문에 우리 말 성경 독자에게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번제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동물은 크게 '가축'과 '새'로 나뉜다. 가축중에는 '소'와 '양떼'('쫀')가 가능한데(1:2), 다같이 '흠 없는 수컷'이어여 한다(1:3, 10). '쫀' 중에는 다시 '양과 염소'가 가능하다(1:10). 이런 분류는 레3:1, 6, 7, 12; 5:6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독자는 레1:2, 10; 3:6; 5:6 등의 '쫀'은 1:10; 3:7의 '케쎄브'와는 달리, 양과 염소를 모두 포함하는 낱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성경에 일반적으로 '양(羊)'이라고 번역되는 낱말 '쫀'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 떼를 두루 가리키는 집합 명사이다. 한편 '쎄'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항상 단수로만 사용되고, '쫀'은 항상 복수로서 사용된다. 따라서 '쫀'은 '쎄'의 복수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30:32은 단수와 복수로서 이 두 낱말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쫀')로 두루 다니며 그 양('쎄') 중에 아롱진 자와 점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히브리어 '쫀'과 우리말 '양떼'의 의미 영역이 서로 다른만큼, 자연히 여기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읽을 경우, 레1:2에서 "누구든지 야웨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라고 읽은 독자는 레1:10의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혹시 염소가 추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10절의 '떼'는 2절의 '양'과 더불어 다같이 히브리어 '쫀'을 번역한 것이요, 한편 10절의 '양'은 히브리어 '케쎄브'를 번역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번역상의 난점은 출12:3, 5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출12:3에서 히브리어 낱말 '쎄'에 대하여는 개역과 표준새번역 공히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뒤의 5절을 통하여 볼 때, 이 낱말은 여기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를 다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 말에 양과 염소를 다같이 가리킬 수 있는 단어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 번역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확한 의미는 문맥(이 경우에는 출12:5)을 통하여 파악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우리말 개역의 경우 3절과 5절 모두에서 '쎄'를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반하여, 표준새번역의 경우 3절에서는 '어린 양'으로 5절에서는 '짐승'으로 서로 달리 번역되어 있다. 필자에게도 무슨 묘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개역이든 표준새번역이든 번역문만을 읽는 독자들에게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나답과 이비후의 죽음 (레위기 10:1-2)
레위기 8장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제사장 위임식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모세의 주재하에 열리는 이 위임식은 7일 동안 물로 씻기고, 옷을 입히고, 관유를 바르고, 속죄제와 번제와 위임제를 바치고, 피를 뿌리고, 식사하는 일 등이 반복된다(레8:6-34). 레위기 9장은 7일 동안의 위임식이 끝난 후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제8일에 처음으로 시행하는 일종의 취임식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이날 행사는 아론의 주관하에 거행된다. 그리고 이 날의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는 8장의 위임식과는 달리 이전에 명령을 받은 바가 없고, 새롭게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 날 취임식을 위한 준비가 마친 후,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8-11절), 아론의 아들들을 위한 번제(12-14절), 백성을 위한 각종 제사(15-21절)가 집행된다. 그리고는 아론의 축복과 하나님의 응답이 뒤따른다(22-24절).
레위기 10장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모든 제사를 마치고 제사장 응식을 먹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성경은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죽임당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나 그 상황 설명이 그리 명료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먼저 레10:1-2의 기록을 여기에 옮겨 놓기로 하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야웨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야웨 앞에서 죽은지라."
여기 '다른 불'이란 히브리어 표현 '에쉬 사라'를 옮긴 것이다. 이 표현은 역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 민3:4; 26:61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본문들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나답과 아비후는 '야웨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하여 많은 주석가들은 '불을 번제단에서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화를 입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번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향로에 채워서 분향하라'(레16:12)는 지시는 사실상 이 사건 이후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레16:1 참조). 그리고 역시 이 사건 이후, 고라 무리의 반역이 있었을 때,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취하고 (번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고 명한 적이 있다(민16:46). 이 두 경우 외에 "단 위의 불을 가져다가 향로에 담는 장면"은 마지막으로 신약 성경의 계8:5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고찰해 볼 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이유를 단순히 '다른 불', 곧 일부 주석가들이 말하는 바, '번제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불을 취하여 분향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시원한 대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비합법적인 분향' 때문이라고 한다. 출30:9의 "너희는 그[=분향단] 위에 다른 향('크토레트 사라')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라"는 명령은 이 사건 이전에 있었던 지시이다. 이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예를 들어, Keil & Delitzsch, Levine) 출30:9와 레위기 10장 본문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하면서, '다른 향을 살라 바치는' 행위를 얼마든지 '다른 불을 드리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위의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나답과 아비후가 죽게 된 데에는 단순히 이들 두 가지중의 어느 하나나 또는 두 가지 이유 모두로 인한 것 이상으로 더 복합적인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레16:1에 "아론의 두 아들이 야웨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야웨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이어 야웨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론에게 지시하신 말씀이 적혀 있다: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레16:2-4). 이 말씀을 통해 볼 때에, 아론의 두 아들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방자하게 지성소로 들어 가려다가(또는, 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시는 올바른 분향 방법에 대한 말씀으로까지 계속된다: "향로를 취하여 야웨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야웨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다" (레16:12-13).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술에 관한 지시를 내리셨다는 사실이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레10:9). 우리는 이 구절만 가지고는 이 날 과연 나답과 아비후가 술을 마시고 회막에 들어간 것인가 하는 여부를 판가름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날의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후손에게 술에 관하여 엄명을 내리셨다는 점이다. 나답과 아비후의 음주 여부는 그만 두고라도, 적어도 이 날 두 사람은 회막 안에서 무언가 경망된 짓을 하였기에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경망된 행동이 혹시 음주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보게 된다.
아울러 이 일 후에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레10:3)고 하신 야웨의 말씀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 그에게 가까이 할 수 있는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자세와 태도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나답과 아비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두 사람이 회막 안에서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일을 저질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야웨의 불'은 그분께 가까이 하여 그분이 원하시는대로 제사하는 이들의 제물을 사름으로써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환희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레9:22-24 참조: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야웨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동일한 '야웨의 불'은 그분 앞으로 방자하게 나아오는 자는 가차없이 불살라 처벌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형벌은 고라 무리의 반역 사건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민수기 16장).
오멜 절기와 부활 (레위기 23:9-14)
처음 난 것으로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친 것은 비단 사람이나 짐승 뿐만은 아니다. 율법은 식물의 첫 열매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칠 것을 명하고 있다(출23:19; 34:26). 여기서 토지 소산이라 함은 각종 곡물과 과일 및 올리브 기름 등 일체의 농산품을 가리킨다(민18:12 참조). 레위기에서는 특별히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전에 첫 이삭 한 단(= '오멜')을 야웨께 바칠 것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야웨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레23:10-14).
칠칠절 곧 오순절의 날자는 이 첫 이삭을 바치는 날에 달려있다. 15-16절에 의하면 칠칠절은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결정된다. 물론 해마다 기후나 기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 첫 이삭을 거두는 날이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유월절은 대략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의 4월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의 곡물(주로 보리와 밀) 추수는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에 거의 이루어진다. 이 사실은 첫 이삭 단을 바치는 날이 유월절 또는 무교절과 시간상으로 밀착되어 있음을 설명해준다.
'오멜'을 흔드는 날, 곧 레23:11, 15의 '안식일 이튿날'에 관하여는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학자들간에 논란이 많다. 필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하여 이 '첫 이삭 한 단'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흔드는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찌기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암시적으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유월절 기간에 죽으시고 안식후 첫날에 다시 살아나셨다. 죽은지 사흘만에 살아나셨으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은 무교절 한 주간 중의 일요일이 될 것이다. 레위기 23장에서 '오멜'을 굳이 '안식일 이튿날'(이 표현은 민33:3; 수5:11의 '유월절 다음날'과는 구분됨)에 드리라고 한 것은 이 구절이 다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상징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레23:11의 '안식일 이튿날'은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고전15:20). 바울이 사용한 '첫 열매'라는 낱말 역시 구약 성경의 냄새를 물씬 풍겨준다. 과거 바리새인으로서 율법 연구에 혼신의 노력을 쏟았던 바울인지라 율법의 구절구절이 그의 머리 속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언급하면서 율법의 첫 소산에 대한 규례를 염두에 두었음에 틀림없다. 이상의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레위기 23장의 '오멜'과 관련시킬 수 있고, 또 그 날짜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오멜' 절기가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이듯이(레23:14),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히 기념할 날이다.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모세의 율법 가운데 안식년과 희년(禧年) 제도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안식년과 희년을 산정하는데 있어서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7'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정확한 산출 방법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견해 차이를 보인다. 먼저 안식년의 기간과 관련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야웨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레25:3-5).
이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성경의 역법(曆法)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의 역법에서는 해의 주기(=365.242196일)와 달의 주기(=29.530588일)가 함께 사용된다. 해의 주기는 날과 해(年)의 기준이 되고, 달의 주기는 절기와 달(月)의 기준으로 쓰인다. 1주일 7일의 개념과 하루가 대략 해질 무렵인 오후 6시에 시작한다는 점은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되었다. 12달의 이름은 차례대로 1)니싼 또는 아빕, 2)십 또는 이얄, 3)씨반, 4)타무스, 5)아브, 6)엘룰, 7)에타님 또는 티슈리, 8)불 또는 마르헤스반, 9)키슬레브, 10)테ꕛ, 11)셰밭, 12)아달이고, 13)베아달은 윤달이다. 달이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날이 초하루가 되고 완전히 그믐달로 변할 때가 그 달의 마지막 날이 되기 때문에, 1년의 기준이 되는 해의 주기와 맞추기 위하여 윤달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 역법에 따른 한 해는 니싼월(봄)에서 시작하여 다시 니싼월로 돌아오는 주기를 취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서 1년중 농업의 주기는 제7월, 곧 티슈리월(그레고리력의 9-10월에 해당)에 시작하여 그 다음해 티슈리월에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주요한 농산품인 보리와 밀과 포도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자면, 티슈리월에 시작되는 밭갈기와 (보리 및 밀)씨뿌리기, 니싼월에서 씨반월 사이에 걸친 보리와 밀 수확, 티슈리월에 끝나는 포리 수확의 순서가 된다. 레25:3을 따라, '6년 동안 파종하며 6년 동안 과수원을 관리할' 경우 제6년에 수고한 결과는 제7년 니싼월에 시작하여 티슈리월 이전까지 거두게 된다. 따라서 땅은 안식년 첫 달(니싼월)부터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7월(티슈리월)부터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다음으로 희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희년 산정에 관하여 레25:8-9은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라고 밝히고 있다. 이 구절은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희년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레25:10-11("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의 '제 오십년' 때문에 희년을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아니라, 그 다음 해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럴 경우 희년이 끼는 주기는 7년 동안에 안식년(희년도 일종의 안식년임)이 두 번씩 발생할 수 있으므로 농업상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레25:10-11의 '제 오십년'은 한 희년을 '제1년'으로 계산할 경우 다음 희년이 '제50년'이 되므로 얼마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로 인정하는 우리 한국인들의 나이 계산법과 비교해보면 이런 계산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희년을 매 '일곱번 째의 안식년'과 동일한 때로 이해할 때, 희년과 관련된 많은 의문점들이 사라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농업주기로 인하여 안식년이 사실상 제7년 제7월(티슈리월)에 시작하는 것처럼, 희년 역시 '일곱번 째의 안식년' 제7월, 곧 티슈리월 10일에 나팔을 크게 분 후 시작하게 된다. 구약 성경 난제(I)-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Old Testament Difficult Passages I
-Genesis, Exodus, Leviticus-
저자: 김경래 Author: Kyungrae Kim, Ph.D.
펴낸 곳: 도서출판 대장간 Publisher: Daejanggan Press (Anyang, Korea)
초판일:1998년 8월 25일
목 차 Contents
머리글
제1부. 창세기 난제
창세기 1장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 (창1:1-31)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 (창1:26; 3:22; 11:7)
온 지표면을 적신 큰 물덩어리 (창2:6)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2:7)
선과 악을 안다는 것 (창2:9, 17; 3:5, 22)
여자의 후손과 뱀 (창3:15)
생명나무와 영생 (창3:22-24)
가인의 출생에 대하여 (창4:1)
창4:7의 올바른 번역과 이해 (창4:7)
우리 들로 나가자 (창4:8)
야웨의 이름을 부르다 (창4:26)
하나님의 아들들 (창6:1-4)
노아 방주에 들어간 동물의 수 (창6-7장)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9:18; 10:21)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 (창5:3-32; 11:10-32)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언제 죽었나? (창11:32)
이스마엘의 운명에 관한 예고 (창16:12)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에서에 대한 예언 (창27:39-40)
야곱과 천사의 씨름 (창32:24-30)
요셉의 노예 정책 (창47:21)
세겜을 한몫 더 받은 요셉 (창48:22)
요셉에 관한 예언 (창49:22-26)
제2부. 출애굽기 난제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1:1-5)
모세의 미디안 생활과 이집트 왕의 죽음 (출2:23)
하나님의 이름 '야웨' (출3:14)
이집트 탈출을 위한 광야 사흘길 (출3:18; 5:1-3; 8:27)
피 남편 모세 (출4:24-26)
유월절의 제정과 그 의미 (출12:1-14)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시간 (출12:6)
이스라엘 자손의 이집트 체류기간 (출12:40-41)
만나의 정체 (출16:13-36)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가축으로 인한 농작물 손상 (출22:5)
염소 새끼와 어미젖 (출23:19)
우림과 둠밈 (출28:30)
하나님의 약속과 그 위기 (출애굽기 32장)
야웨의 책 (출32:32-33)
모세의 또 다른 회막? (출33:7-11)
이름으로 아는 것 (출33:12, 17)
제3부. 레위기 난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레위기 1-3장)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1:1-17)
제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제사장의 몫 (레1:9, 13 등)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레4:1-6:7)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레10:1-2)
성경의 '문둥병' (레위기 13-14장)
유출에 대한 규례 (레위기 15장)
이스라엘 자손이 섬기던 수염소 (레17:7)
오멜 절기와 부활 (레23:9-14)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십일조의 의미 (레27:30-33)
참고 문헌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세기 2:7)
"야웨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우리말 개역 성경에 등장하는 이 창2:7에 대한 번역문은 일반 독자들이나 심지어는 설교자들에게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말하는 이 오해란 앞서 창세기 1장에서 다른 동물들을 단순히 '생물'이라고 부른데 반하여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생령'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우리말에 있어서도 '생령'(生靈)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생령'(生靈)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네페쉬 하야'인데, 이는 이미 창1:20, 21, 24, 30에서도 나오는 표현으로서 개역 성경은 그곳들에서 '생물'이나(1:20, 21, 24) 또는 단순히 '생명'으로(1:30)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네페쉬 하야'란 표현은 또 창2:19; 9:10, 12, 15, 16에도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인간 외의 동물계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다른 동물과 동일한 '네페쉬 하야'인 우리 인간을 달리 표현하고자 만들어낸 '생령'이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에게 그릇된 생각을 조장할 수 있는 것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번역문이라고 하겠다. 이 경우 오히려 표준새번역의 '생명체'라는 번역이 훨씬 더 적합한 번역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라는 표현은 인간과 다른 동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페쉬 하야'라고 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2:7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그 안의 '생령'이라는 번역문을 버리고, '살아있는 존재' 내지는 '생명체'라는 번역문을 가지고 읽을 때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생명체'가 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호흡'이 필요한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칠십인역에서는 창2:7의 '네페쉬 하야'를 다른 경우에서처럼, (프쉬케 소싸)로 번역하였다. 헬라어에서 이것은 인간 뿐 아니라 인간 외 모든 동물계까지 가리킬 수 있는 표현이다. 칠십인역에서 '네페쉬 하야'의 '네페쉬'를 보통 '영(靈)'을 뜻하는 (프뉴마)로 번역하지 않고 그것과 구분되는 (프쉬케)로 번역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번역을 적절히 활용하여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고전15:45).
개역 성경은 고전15:45을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읽고 있다. 여기서 '산 영'과 '살려주는 영'은 각각 (프쉬케 소싸)와 (프뉴마 소오포이운)을 번역한 문구이다. 이 인용문구의 출처인 창2:7에서 이미 '생령'이라고 번역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결국 그 연속성을 어기지 못하고 (프쉬케)와 (프뉴마)의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다 '영(靈)'으로 번역한 듯하다. 바울이 의도한 바를 살리려면 여기서도 창2:7과 마찬가지로 '산 영' 대신 '살아있는 존재'나 '생명체'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우리 들로 나가자 (창세기 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이 구절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것은 히브리어 원문상의 난해구절도 아니요, 번역상의 문제도 아니다. 다만 사건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간단하여서 무언가 빠진 느낌을 줄뿐이다. 창4:8은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라는 문구로 시작되기 때문에 바로 이어서 가인이 아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록했을 법하지만, 그런 내용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사마리아 오경과 고대 주요 역본들은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다음에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이러한 사본학적 증거들 때문에 최초의 원본에 이 문구가 들어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우리말 역본들중 개역 성경이 아무런 난외주도 없이 맛소라 사본의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옮긴데 반하여,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본문 가운데 이 문구를 끼워놓고 난외주에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한편 이 구절에 대한 한 가지 흥미 있는 주석적 요소는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4:8>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말하였다: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 그들 둘이 들로 나갔을 때에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기에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는데,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지지 않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있구나. 그래서 네 제물은 열납되고 내 제물은 열납되지 않았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고,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진다. 그리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없다. 그러나 내 행실의 열매가 네 것보다 더 좋았기 때문에 내 제물이 네 것을 제치고 열납된 것이다."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없다.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악인에게 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있으며,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고, 악인에게는 벌이 있다." 이 일 때문에 그들은 빈 들판에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마침내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덮쳤다. 그는 돌로 동생의 이마를 쳐서 그를 죽여버렸다.
여기 우리말로 번역하여 인용된 타르굼 내용은 결코 창4:8의 원본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아마도 과거 유대인 사이에 유행하였을 주석적 요소를 반영할 뿐이다. 길게 첨가된 주석적 내용 중에는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도 포함되어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에서도 다시 이 문구가 원래의 히브리어 본문에서 번역된 것인지, 아니면 번역자가 주석적인 요소중 일부분으로서 첨가한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이런 경우에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본문 중에는 이 문구를 넣지 않되, 난외주를 이용하여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된 고대 사본이나 역본들이 있음을 언급해주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물론 예루살렘 타르굼의 긴 주석적 내용을 우리말 역본에 소개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아들들 (창세기 6:1-4)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야웨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神)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6:1-4).
창6:1-4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학자들간에 쉽게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신학계에 구구한 해석사를 남긴 성경 난제중의 난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해 내려오는 여러 해석중 어느 하나가 분명히 맞는 해석이라면, 이 구절은 하나의 난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많은 성경학자들의 그릇된 신학적 사고방식을 반증해주는 사실이 아닐까? 필자는 여러가지 견해를 이 지면에 소개하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옹호 내지는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류의 서적이 이미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히려 본문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통하여 필자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설명하고자 한다. 다른 훌륭한 학자들의 해석을 재현하는 내용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국내의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이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우선 1절의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대하게 된다. 이 낱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하아담'은 정관사 '하'와 명사 '아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 끝에서 '하아담'을 복수형 대명사 어미로 받는 것으로 보아('그들에게서'; 히브리어로 '라헴'), 이것은 고유명사로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보통명사로서 아담으로 시작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딸들'과 역시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2, 4절의 '사람의 딸들'('브노트 하아담')은 인류, 곧 인간 사회에서 태어나는 '딸들'을 가리킴이 너무나 분명하다.
2절과 4절에는 이들 '사람의 딸들'의 상대역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브네 하엘로힘')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여기 말고 욥기에 또 다시 등장한다(욥1:6; 2:1; 38:7). 욥기에서 우리가 문맥을 통하여 분명히 아는 대로, 이 표현은 우리 인간이 아닌 '하늘의 영적인 존재', 소위 '천사들'을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서 단3:25에 아람어로 '바르 엘라힌'이 있는데, 이는 '신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역시 영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시29:1; 89:6(히브리어 성경에서는 89:7)에 나오는 '브네 엘림'은 직역하면 '신들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이 표현 역시 천사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것이 만일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에 관한 언급이라면, 이에 대하여 조물주께서 무언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시고(3절) 또 이러한 혼인 관계로 유별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은(4절)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사 경건한 가문의 아들과 불경건한 집안의 여자, 또는 귀족층 남자와 서민층 여자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결과적 사실을 만족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이처럼 창6:1-4의 본문에서 이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간 세상의 남자를 가리키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으므로 자연히 누군가 '인간 사회' 밖의 존재이어야만 하겠고, 아울러 앞서 제시한 바, 욥기와 기타 유사 문구의 도움을 얻어 얼마든지 '천사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표현 자체와 전체적 문맥을 통하여 이런 식의 유추는 가능하지만, 다만 이러한 이해에 대한 신학적 걸림돌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22:30; 막12:25) 때문에 학자들은 선뜻 상기한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눅20:34-36에서는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좀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이제는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의 사람들을 가리켜 "천사와 같다"고 하신 것은 그들과 천사들이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 밝히 보는대로,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휘오이 테우', ՕՉՏՉ ՈՅՏՕ)이라고 부른 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와 같게 변한 그들의 새로운 신분 때문이 아닐까.
다시 창세기 6장으로 돌아와, 칠십인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에 대하여 '하나님의 천사들'('호이 앙겔로이 투 테우', ՏՉ ՁՃՃՅՋՏՉ ՔՏՕ ՈՅՏՕ)이라는 번역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은 칠십인역 말고도 외경 에녹서(6:1-6)와 요세푸스(유대인 고대사 1권 3장 1절) 등을 통하여도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신약 성경의 몇몇 구절도 창6:1-4의 해석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먼저 벧후2:4-5에서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신' 일과(4절)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홍수로 인간 세상을 멸하신 일'을(5절)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벧전3:19-20의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는 기록 역시 이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구절(벧전3:19-20)을 '그리스도께서 고난 즉 죽음을 부활로 이기신 후, 전에 타락하여서 옥에 갇혀 있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신 것'이라고 본다. 옥에 갇힌 이들 천사들은 벧후2:4("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말고, 유다서 6절("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벧전3:19-20과 벧후2:4-5에서 이들 천사들의 투옥과 홍수 심판 기사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이들 '타락한 천사'라고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특별히 유다서 6절에서 천사 타락을 언급한 후 바로 이어 나오는 7절("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을 통하여, 우리는 천사 타락이 성적인 범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신약 성경의 몇몇 기록은 창6:1-4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해석을 반증하기 보다는 오히려 변증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 영적 존재인 천사가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 다만 우리는 소돔 사람들이 롯을 찾아온 두 천사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기록을 통하여(창19:5; 벧후2:6-8) 이런 가능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따름이다. 천사와 인간의 성적 결합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로 간주되어,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창6:3은 이런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서 하나님이 취하시고자 하는 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무서운 죄악은 비록 악한 천사들로부터 시작되긴 하였으나, 인간('하아담')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 그 안에 죄의 결과를 뿌려놓았기 때문에, 인간 역시 그 죄값을 모면할 수 없게 된다.
창6:3에서 야웨께서 말씀하시는 바 '나의 신(ࠉࠇࠅ࠘)' 곧 '하나님의 영(靈)'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하나님의 생명의 숨(生氣)'(창2:7 참조)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서 보통 '영(靈)'으로 번역되는 '루둽'과 '숨'으로 번역되는 '네샤마'는 동의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사람의 딸들이 악한 천사들의 무질서한 행위에 이용된데 대하여 분노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제동을 거신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영은 육체인 사람 속에 영원히 거하지 아니할 것이다. 여기서 '영원히'란 말은 '레올람'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을 번역한 것으로서, '영원히'라는 뜻도 되지만 '오래도록'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창6:3의 "120년"은 아마도 하나님이 새로 정하신 인간의 수명을 가리킬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대략 900세 정도로 '오래도록'(='레올람') 수명을 누려 왔었다 (창세기 5장의 족보 참조).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 안으로 단축시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타락한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합하여 낳은 자식들은 평범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창6:4에서 히브리어를 소리나는 그대로 음역하여 '네필림'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용사요, 고대에 유명한 자들'이었다. '네필림'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칠십인역('호이 기간테스')을 따라 '거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필림'은 이곳 말고 유일하게 민13:33("거기서 또 네필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에만 등장한다. 민13:33의 상반절을 직역하면,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네필림 중에서 아낙 자손 네필림을 보았다"가 된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이들이 보았다는 아낙 자손은 헤브론에 거하던 세 사람으로서,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라고 그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민13:22, "또 남방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이집트 소안보다 칠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천사와 인간 사이에 특별한 거인이 태어나, 고대에 '용사로서 유명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창6:4의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라는 문구는 이 일이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비정상적인 결합이 언제까지 지속되었을까?' 하는 물음에는 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만일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으로 인하여 이런 일이 중단된 것이라면 모세, 여호수아 시대의 '네필림'(민13:33)은 이런 결합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거인'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창6:1-4에 기록된 사건과 홍수 심판의 연관성이다. 창6:5("야웨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에서는 인간의 죄악이 언급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홍수 심판이 있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서 언급되었다. 창6:1-4에 나오는 바, 타락한 천사의 행위에 대한 기록은 그 위치로 보아, 역시 홍수 심판의 원인 중 하나로서 묘사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들도 입증해주고 있다.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세기 9:18; 10:21)
일반적으로 노아의 세 아들은 셈, 함, 야벳의 순으로 일컬어진다 (창5:32; 6:10; 7:13; 9:18; 10:1; 대상1:4). 대부분의 성경 독자들은 이러한 배열로 인하여 그들의 나이 역시 같은 순서대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노아에게 셈, 함, 야벳의 순서로 아들들이 태어난 것인가? 우리는 성경 본문을 통하여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어 번역본들에 나타나는 성경 오역이 바로 그것이다.
개역 성경은 창5:32을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조그만 글자로 인쇄된 "된 후에"는 원문에 없으므로 문맥을 고려하여 번역문에 삽입한 것이다. 표준새번역 역시 이를 같은 뜻의 "노아는 오백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창5:32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노아가 오백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이다. 이 문장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에 세 쌍둥이가 태어남, 2) 이들 세 아들이 노아가 오백세 되기까지 차례대로 태어남, 3)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 첫 아들이 태어나고 그 다음에 차례대로 다른 두 아들도 태어남. 히브리어 어법상 앞의 두 가지 보다는 세번째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역과 표준새번역 둘다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순서가 꼭 나이에 따른 순서여야 할 이유도 증거도 없다.
다음으로 고찰해야 하는 구절은 창10:21이다. 우선 우리말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개역은 이를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라고 번역함으로써, 개역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번역문은 과연 히브리어 원문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까? 여기서 "야벳의 형"이라고 번역된 문제의 구절을 히브리어 원문 및 고대 번역문인 칠십인역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 두 가지면 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충분하다고 본다.
창10:21의 이 문제의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본문은 ('둺히 예쵛 하가돌')이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와 모음 부호를 무시할 경우 이 히브리어 구절은 두 가지의 직역이 가능하다: 1)'야벳의 큰 형제(brother)', 2)'큰 (자) 야벳의 형제'. 다시 말해서 '크다'('하가돌')라고 하는 형용사가 '야벳'과 '형제' 중 어느 것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이 문구의 해석이 달라진다. '야벳'을 수식할 경우 야벳이 형이 되고, '형제'를 수식하면 셈이 형이 된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 부호의 기능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구두점 역할일 것이다. 맛소라 성경의 엑센트는 여기서 '크다'가 '야벳'을 수식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맛소라 학자들은 야벳을 셈의 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칠십인역 역시 맛소라 학자들의 견해를 지지해준다. 이 구절에 대한 칠십인역의 번역문(ՁՄՅՋՖٍ ԩՁՖՅՈ ՔՏՕ ՌՅՉՆՏՍՏՒ)에 있어서 명사 '야벳'과 형용사 '크다'는 동일한 2격(소유격)을 취하고, '형제'는 3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큰 자'는 셈이 아니라 야벳인 것이다.
셈이 야벳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은 창11:10을 통하여서도 찾아볼 수 있다.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라는 이 기술에 의하면, 셈이 일백세가 된 것은 홍수 후 이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이레 후 곧 2월 17일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40일을 내렸으며 (창7:9-12), 그들이 방주 밖으로 나온 것은 노아가 601세 되던 해 2월 27일이었으니 (창8:14-19), 노아 홍수는 햇수로 볼 때 2년이나 지속된 장기간의 대사건이었다. '홍수 후 2년'('슈나타임 둺하르 하마불')이란 히브리어 문구는 분명히 홍수 사건이 완전히 끝난 후 또 두 해가 흐른 뒤의 일임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에게 노아 나이 600세와 601세의 두 해는 홍수해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그후 두 해(노아 나이 602세와 603세)가 지나, 노아의 나이가 대략 604세가 되던 해에 셈은 나이 100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셈은 노아가 504세가 되던 해에 태어난 셈이 된다. 이상 고찰한 바를 창5:32("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과 묶어서 볼 때, 셈은 결코 노아의 맏아들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증거로서 창9:24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창9:20-27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있을 때 그 아들들이 취한 행동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내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 중에서 분명치 아니한 점은 도대체 함의 아들 가나안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많은 독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저주를 받은 것은 함이 아니요 그의 아들인 가나안이다.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15:16, 19-21 등 참조). 이 저주를 항간에 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흑인 전체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창9:24에 기록되기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하였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작은'('하카탄')을 위하여 '둘째'라는 각주를 덧붙임으로써, 이 아들이 다름 아닌 '함'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함에 대한 저주가 없음을 고려할 때, 여기서 말하는 '그 작은 아들'은 아마도 함이 아니라 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경우, 이 작은 아들이 '행한 일'은 무슨 저주받을(25, 27하반절) 악한 행실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축복을 받아 마땅한(26-27상반절) 아름다운 행실을 가리키게 된다.
이상으로 우리는 야벳이 셈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찰해 보았다. 노아의 세 아들중 다만 함의 연령상의 위치가 확실치가 않다. 창9:24의 '작다'('하카탄')나 10:21의 '크다'('하가돌')라는 형용사가 반드시 최상급으로서 '막내'나 '맏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히브리어 어법을 따라서 최상급으로 이해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 세 아들의 가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야벳(2-5절), 함(6-20절), 셈(21-31절)의 순서로 열거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나이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상의 모든 고찰을 종합하여 가장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야벳은 노아 500세 되던 해에, 함은 노아 502세 되던 해에, 그리고 셈은 노아 504세 되던 해에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불행하게도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번역가와 성경 해석가들은 노아의 세 아들이 셈, 함, 야벳의 차례로 태어났다고 믿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창10:21 본문에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 현대 역본이 그런 것처럼,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맛소라 성경의 히브리어 본문과 고대 역본인 칠십인역을 따를 경우,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철저히 금하시고 있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과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아무리 시험이라고 하지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의혹 때문에 과거 유대인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갖가지 해석을 시도하였다. 여기서는 먼저 고대 유대인들의 해석중 하나를 예루살렘 타르굼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한다.
'타르굼'은 통일적인 하나의 성경 역본이 아니다. 그 시대도 다르거니와 역자 또한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다양한 종류의 '타르구밈'(타르굼의 복수형) 전승이 전해진다. 모세 오경만의 아람어 역본을 두고 볼 때, 온켈로스의 타르굼은 비교적 문자적 번역을 시도한데 반하여,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은 온갖 주석적 요소로 가득차 있어서 주석가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타르굼이라고 하겠다. 이 예루살렘 타르굼은 그 최종 편집이 상당히 늦은 시기에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그 안에 보존된 주석적 요소들중 상당한 부분이 예수님 이전부터 전해진 것들로 추정되기에 이러한 타르굼의 전승은 예수님 당시 구약 성경에 대한 유대인들의 해석을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 연구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창22:1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상당히 흥미있는 주석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우선 그 본문을 우리말로 옮겨 보기로 하자.
이 일들 후에 이삭과 이스마엘이 다투었다. 이스마엘이 말하였다: "내가 장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자 이삭이 말하였다: "내가 아버지 부인 사라의 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너는 내 모친의 여종인 하갈의 자식일 뿐이다." 이스마엘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나는 열 세 살에 할례를 받았으니 너보다 더 의롭다. 만일 내게 거절할 뜻이 있었더라면 나는 얼마든지 할례를 받지 않았었을 것이다." 이삭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나이 지금 서른 일곱이 아니냐. 만일 거룩하시고 찬양받으실 분이 나의 모든 지체를 요구하신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겠다." 그 즉시로 이 말들이 우주의 주께 들려졌고, 또한 그 즉시로 주의 말씀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위에서 보는대로 예루살렘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스마엘이 이삭의 비위를 건드리는 말로 그에게 도전해오자 이삭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적 태도를 주저함없이 발설한다. 자신의 모든 지체라도 주저하지 않고 바치겠다는 이삭의 선언이 결국 이러한 시험의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 이 타르굼의 설명이다. 특별히 아브라함이 시험받을 때 이삭의 나이는 37세로 되어 있다. 이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일을 사라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라는 127세에 죽었으므로(창23:1), 이때 이삭의 나이가 37세가 되는 점에 착안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이삭의 나이를 37세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22:1 본문은 상당히 흥미있는 해석을 보여주긴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은 설명일까 하는 데에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는 고대 유대인 랍비들의 지나친 추측에서 나온 해석이 아닌가 한다. 이와는 달리 요세푸스의 설명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더 설득력이 있다. 요세푸스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시험해 보고자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이때 이삭의 나이를 25세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이때 이삭의 나이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이나 요세푸스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번제 나무를 지우고 산을 오르게 했다는 점으로(창22:6) 미루어 이삭이 결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막 치려하는 순간에 이삭의 반응이 어떠하였을까? 고대 유대인들은 이에 대하여도 관심이 컸다. 먼저 예루살렘 타르굼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다음은 창22:10에 대한 예루살렘 타르굼의 본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손을 내밀어 칼을 집어서 자기 아들을 잡으려 하였다. 이삭이 자기 아버지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영혼이 고통 중에 분투하지 않도록 저를 꼭 붙잡아 매세요. 그래야만 아버지의 제물에 흠이 없겠고 저도 멸망의 구덩이로 던져지지 않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눈은 이삭의 눈을 쳐다보았으나, 이삭의 눈은 저 높이 천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삭은 그들을 볼 수 있었으나, 아브라함은 보지 못하였다. 높은 곳에서 천사들이 화답하였다: "우리 가서 땅 위의 저 두 별난 사람을 보자. 하나는 잡는 자요, 다른 하나는 잡히는구나. 잡는 자는 주저함이 없고, 잡히는 자는 그 목을 길게 내미는구나."
예루살렘 타르굼은 이삭의 순종과 신앙심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세푸스 또한 이에 뒤질세라 이때의 상황을 아브라함과 이삭 부자(父子) 사이의 눈물겨운 대화 내용을 통하여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요세푸스의 경우에도 이삭의 믿음과 순종이 돋보인다.
비록 이런 기록들이 추측에 불과하기는 하겠지만, 이때 이삭의 순종과 믿음에 대하여는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직 40이 되지 않은 젊은 나이의 이삭은 원하기만 하였다면 100세가 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고대 유대인들의 몇몇 성경 해석을 통하여 이삭의 믿음이 돋보이게 묘사된 데 반하여, 신약성경은 창세기 22장과 마찬가지로 이삭 보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7-19)고 하였고, 야고보 역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1)고 역설하고 있다.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애굽기 1:1-5)
야곱과 더불어 이집트에 내려간 야곱 가문 사람들의 숫자는 칠십인역에서 다섯 명이나 더 불어난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의 발언은 칠십인역과 일치한다 (행7:14):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그럼 먼저 문제의 출1:5의 맛소라 성경 및 칠십인역 본문을 직역하여 아래에 옮겨놓기로 하자. 문맥을 볼 수 있도록 맛소라 성경의 1:5 앞에 1:1-4의 내용을 괄호로 묶어 기입해둔다.
(맛소라 성경)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이집트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베냐민, 단, 납달리, 갓, 아셀.)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명인데,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칠십인역)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야곱에게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오인이었다."
출1:5에 있어서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차이점이란 아주 간단하다. 첫째로 두 구절의 순서가 서로 바뀌었고 (칠십인역에서는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가 절의 맨 앞에 나온다), 둘째 인원수 면에서 맛소라 성경에서는 '70명', 칠십인역에서는 '75명'으로 서로 다르다. 여기서 사마리아 오경은 맛소라 성경과 일치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창46:8-27에 나오는 보다 상세한 목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도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을 비교해보기로 하자. 창46:8-27은 내용상 1)레아 소생(8-15절), 2)실바 소생(16-19절), 3)라헬 소생(20-22절), 4)빌하 소생(23-25절), 5)종합(26-27절)으로 쉽게 나뉜다. 8절에서 19절에 이르기까지 표기상의 미미한 차이점을 제하고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은 서로 일치한다. 23-25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라헬 소생'(20-22절)의 명단에 있어서 칠십인역은 맛소라 성경과 차이점을 보이며, 따라서 '종합'(26-27절)에 있어서도 인원상의 차이점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20-22절 나란히 배열해보기로 하자.
맛 소 라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과 아릇이니,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사명이요. |
칠십인역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므낫세의 시리아 여자 첩이 그에게 낳은 아들들은 마길이요, 마길은 길르앗을 낳았다. 므낫세의 동생 에브라임의 아들들은 수델라와 다한이요, 수델라의 아들들은 에뎀이다.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이요, 벨라의 아들들은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이요, 게라는 아릇을 낳았다.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팔명이요. |
위의 표에서 보듯이 칠십인역에는 몇몇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들 삽입문에 대한 정보는 민26:35-36; 대상7:14; 8:3-5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목적은 아마도 창50:22-23("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이집트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의 영향을 받아, 요셉의 자손을 한 두 대(代) 더 보여주고 아울러 부자 관계를 정확하게 밝히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칠십인역에는 다섯 사람의 이름(마길, 길르앗, 수델라, 다한, 에뎀)이 더 들어 있지만 마지막에 '18명'으로 합을 낸 문제점이 보이기도 한다.
26절에 있어서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은 완전히 일치한다: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 륙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이다." 이 숫자에는 야곱 자신, 요셉, 및 요셉의 두 아들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로 다음의 27절에서는 20절에서의 차이점과 관련하여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 사이에 차이점을 보인다.
(맛소라 성경)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명이었더라."
(칠십인역) "이집트 땅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일곱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오명이었더라."
이상을 통하여 칠십인역의 '66명'을 설명하자면, 33(레아의 소생과 야곱을 합한 수) - 1(야곱) + 16(실바의 소생) + 11(베냐민과 그의 자손) + 7(빌하의 소생) = 66이 된다. 그리고 '75명'은 66 + 1(요셉) + 7(요셉의 자손) + 1(야곱)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칠십인역 22절의 '18명'은 어쩔 수 없이 라헬의 소생 중 요셉을 제외한 숫자로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수는 신10:22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이 절의 경우 칠십인역도 '75명'이 아닌 '70명'으로 읽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창세기 46장과 출1:5에 나타나는 사본상 차이점은 칠십인역의 의도적 편집 작업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맛소라 성경이 원래의 본문을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맛소라 성경을 통해볼 때, 창46:8-27의 기록은 몇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야곱의 아내들을 비롯하여 모든 며느리나 손주 며느리 등 여자들이 숫자 계산에 들어오지 못한 반면에(26절 참조), 유일하게 레아의 딸 디나와(15절) 아셀의 딸 세라(17절)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다른 말로 가정을 이루지 아니하고 지낸 것이 아닌가 한다. 디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창세기 34장 참조).
둘째, 레아 소생을 계수함에 있어서 야곱 자신을 포함시켜 그 수는 모두 '33명'에 이른다(15절).
세째,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할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자손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연대를 계산해 볼 경우,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베레스에게 이집트로의 이주를 즈음하여 두 아들이(12절) 이미 생겨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이 무렵 베냐민에게(민26:38-40; 대상7:6-7에 의거, '손자를 포함하여') 열 명의 아들이 생겨났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이들은 틀림없이 이집트로의 이주 후에 태어난 자손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70명'(또는 '75명')은 이집트에 내려간 실제의 정확한 인원이라기 보다는 이집트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민족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 야곱의 자손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출1:5)이라는 문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이러한 히브리적 사고 방식의 타당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히7:9-10 참조: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피 남편 모세 (출애굽기 4:24-26)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야웨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출4:24-26).
출4:24-26의 난점은 히브리어 문장의 번역에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사본학적인 문제도 아니다. 짧으면서도 전후 문맥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간단한 문단은 그 역사적 상황과 그에 대한 배경을 설명함에 있어서 많은 이론들을 만들게 한 성경 난제중의 하나이다.
야웨께서 왜 그리고 어떻게 모세를 죽이려 하셨나? 이러한 일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문맥을 통해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너무나 돌연적이고 이상스럽기까지 하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후, 이미 장인에게 요청하여 그로부터 허락도 받고(출4:18), 또 다시 야웨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는(출4:19), 아내와 두 아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는 중이 아니던가(출4:20)?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출4:22-23): "너는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야웨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이러한 일 다음에 기록된 내용이 바로 본문의 이상한 사건이다.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몇 가지 분명한 사실로는: 1)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심, 2)십보라가 아들 (아마도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할례를 행함, 3)이때야 비로소 모세가 화를 면함, 4)이 일로 십보라가 모세를 '피 남편'이라고 부름 등을 들 수 있다.
모세는 이때까지 자기 '아들'(20절의 복수형과는 달리 여기 25절에서는 단수형으로 언급됨)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무슨 일로 왜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이제까지 할례를 행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물론 첫째인 게르솜의 경우에도(출2:22 참조) 그가 과연 할례를 받았는지에 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모세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의 아내 십보라는 그 이유가 아들의 할례에 있음을 깨닫고는 즉시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로 실제로 모세는 죽음을 면하게 된다.
이때 십보라가 모세를 향하여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고 내뱉는데, 이 말은 한편으로는 일종의 분노와 자포자기가 함축된 말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의 특별한 사명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과 확인으로 들린다.
본래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셔서 그의 후손이 대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언약이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17:9-11). 이 명령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14)는 준엄한 경고로 끝을 맺는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에게만 해당하는 할례 예식은 틀림없이 남자들에 의하여 집행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출4:24-26 본문에서 모세가 아닌 십보라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는 사실 역시 특이하다. 24절의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라는 표현은 아마도 모세가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든가, 아니면 그가 무슨 특별한 위험에 빠져있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순전히 하나님과만 연관시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모세는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 수 없는 상황이었겠고, 자연히 그의 아내인 십보라가 이 일을 집행하여야만 했을 것이다.
아울러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은 모세보다는 십보라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모세는 한때 특별한 사명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지시에 대하여 자기는 부족하다면서 머뭇머뭇한 적이 있다(출3:11; 4:10, 13 참조). 이러한 모세의 태도로 인하여 하나님이 모세에게 노를 발하신 적은 있으나(출4:14 참조), 이런 일로 그를 죽이려 하신 것 같지는 않다. 더군다나 출4:24-26 본문에서는 모세의 위기에 대하여 할례가 주된 원인임을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에서는 십보라에 대하여 별 기록을 담고 있지 않다. 아마도 십보라로서는 그녀의 남편 모세에게 부여된 특별한 사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이행한다는 것이 모세 본인 못지 않게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멀리 이집트에서부터 '굴러 온 복'을 어찌 하루 아침에 놓칠 수 있으랴. 두 아들과 함께 남편을 따라 낮선 땅 이집트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너무나 처절하고 무거웠던 것이 아닐까? 남편이 구해야 하는 백성은 자기의 민족이 아니요 남편의 민족일 뿐이요, 이집트는 자기의 사랑하는 남편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 아니던가.
성경은 이집트로 향하는 모세의 가정, 아니 모세와 그의 아내 사이에 교차되는 감정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이처럼 유추해보는 수 밖에 없다. 두 아들은 그만 두고라도 아내 십보라의 마음 속에 있는 온갖 감정과 생각은 모세의 마음을 충분히 괴롭히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 모세와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들의 두 아들은 - 이집트로 향한다.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준엄하고도 분명한 명령 때문에.
이때 길의 숙소에서 일어난 사건은 모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십보라에게도 하나님이 내리신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준엄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로서 십보라는 자기 남편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할례의 집행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기 남편, 더 나아가서는 자기 남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중요성과 엄숙함을 재확인한다. 바로 이 언약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이 '사지'(死地)로 명령을 받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십보라는 이 냉정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 자기 아들의 양피를 베어 피를 냄으로써.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는 그녀의 외침은 그녀의 이러한 심경을 잘 대변해준다고 하겠다.
'피와 죽음'이란 관계를 두고 볼 때, 이 사건은 성경의 다른 몇몇 기록과도 연관성을 가진다. 우선 앞서 언급한대로 바로 앞의 출4:22-23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 재앙은 출애굽기 12장에 묘사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죽음을 면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간접적이긴 하지만 모세의 아들의 피가 모세의 개인적인 재앙을 면하게 하였다. 모세의 둘째 아들 엘리에셀의 이름을 설명하는 구절에서도 또한 다소나마 이런 맥락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파라오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출18:4).
출4:24-26에 기록된 사건으로 인하여 모세는 십보라와 두 아들을 장인에게로 돌려보내고 홀로 이집트로 떠난 것 같다. 그래서 출18:2-6에서 우리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 보내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 두 아들을 데렸으니.....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 아내로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 그가 모세에게 전언하되 그대의 장인 나 이드로가 그대의 아내와 그와 함께한 그 두 아들로 더불어 그대에게 왔노라"라는 기록을 보게 된다. 아마도 모세는 이 일을 통하여, 자기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신 하나님의 엄정(嚴正)하심과 그의 분명하신 목적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고는, 다시는 거역하거나 주저함이 없이 철저히 순종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인간 가운데 하나님의 강림(降臨)이 있다는 사실은 피조계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관심 내지는 간섭을 의미한다. 사실상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와 더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의 역사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신다. 이러한 간섭은 인간편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간을 지으신 이후로 인간을 그대로 두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강림 또는 임재(유대인들은 이를 가리켜 전문 용어로 '슈키나' 라고 한다)에 관하여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다. 구약 성경 중에서 하나님의 강림에 관한 기록중 가장 중요한 곳을 찾으라면 역시 출애굽기 19장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19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강림은 어느 개인이나 소수의 몇몇 사람 또는 작은 무리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목격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임하였다.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도 구름을 동반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 놀라운 광경 앞에서 두려움으로 떨며 모세의 중재를 요구하였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나타나신 것은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게끔 하는 목적이 있었다(출19:9; 20:20).
이제 필자가 고찰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강림에 관하여 출애굽기 19장에 기록한 사건이 시간적으로 언제 있었던 일이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출19:1)는 우리말 개역성경을 읽을 때, 정확하게 언제를 가리키는지 분명치가 않다. 여기 '제 삼월'중 '월(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데쉬'는 본래 '새롭다'라는 뜻에서 파생하여 '매월 달이 새로 뜨기 시작하는 월삭(月朔)'(new moon)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가 '월삭'을 뜻하는 경우로는 민29:6; 삼상20:5, 18, 24, 34; 왕하4:23; 사1:13; 겔46:1, 6; 암8:5; 시81:4 등을 들 수 있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총 281회 출현하는 이 단어는 그중 22회의 경우만 '월삭'의 뜻으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모두 '달'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그 때에'로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다시 직역하면 '이 날에'가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호데쉬'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월삭'의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출19:1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광야에 도착하여 시내산 앞에 장막을 친 것은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계산하여 제3월이 되는 바로 그날'이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이러한 해석을 근거로 하여 출19:1에 아예 '초하룻날'이라는 문구를 첨가하여, 각각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표준새번역)와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공동번역)로 번역하였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간'(출19:3) 날은 아마도 이제까지 설명한 '제3월 1일'이거나, 아니면 그 다음날일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말씀을 들은(출19:4-6) 모세는 이를 백성의 장로들에게 전해주고는(출19:7) 다시 백성의 반응을 하나님께 회보한다(출19:8). 출19:4-8에 기록된 일들이 모두 마치기까지는 아마도 하루 이틀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모세로부터 회보를 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앞에서 영광중에 나타나실 계획을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야웨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야웨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출19:10-11). 마침내 하나님이 말씀하신 "제3일 아침에 산 위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있었고, 심히 큰 나팔소리도 울려퍼졌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동반한 이 무서운 광경으로 인하여 "진중의 모든 백성은 다 두려워 떨었다" (출19:16).
첫째 달인 아빕월(출12:2 참조) 14일 저녁에 어린 양을 잡아 먹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출12:6-9 참조)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 그날 밤(아마도 제1월 15일 새벽, 출12:29-42 참조) 이집트를 떠났다. 성경의 역법을 따라 계산할 경우,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떠난 날(제1월 15일)로부터 하나님이 시내산에 나타나신 날(대략 제3월 3~6일 사이)까지는 대략 50일이 된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신 날을 오순절로 믿고 있다. 사실 이러한 계산은 거의 틀림없이 맞는 것이다. 오순절은 봄에 첫 곡식을 수확하여 첫 이삭 한 단을 흔들어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레23:15-16). 문제는 첫 이삭 한 단을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이 언제냐 하는 것인데, 레23:11, 15에 '안식일 이튿날'이라고 한 이 날은, 그 문맥상 유월절/무교절과 나란히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계산이 맞다면 오순절은 무교절중에 들어있는 일요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무교절중에 이집트를 나왔으므로, 그로부터 대략 50일이 지난 날은 오순절이 될 가능성이 크다.
모두가 아는 바대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교회 중에 강림하신 날도 바로 오순절이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이날 교회 위에 임하신 성령은 각 믿는 이의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삶을 인도하신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은 언제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탄절(개신교와 천주교의 12월 25일)은 성경 및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으로서, 일단 무시할 필요가 있다. 성경 연대기 학자 폴스틱(Eugene Faulstich, Witnesses for Jesus the Messiah, Spencer, 1989)은 여러 가지 역사 및 천문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을 (그레고리 역법으로 환산하여) 주전 6년 5월 14일로 제시하고 있다. 폴스틱이 제시한 유력한 근거들중 하나는 초대교부중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예수님의 탄생일자를 이집트 역법에 따라서 '파콤월 25일'로 기록한 것(The Stromata I.xxi)이다. 폴스틱은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태어난지 제8일, 곧 그가 할례받은 날이 바로 오순절이었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인용한 책, 6쪽).
만일 출애굽기 19장을 통하여 우리가 살펴본 연대기 재구성과 예수님의 탄생에 관련하여 폴스틱이 도출해낸 결론이 맞는 것이라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강림은 모두 오순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오순절의 의미를 재삼 강조하면서 되새길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왕 나온 김에 사도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마침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여기서 '가운데'라는 말은 '어느 개인 안에'가 아니라 '무리 중에'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시내산에서 성부 하나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에 오실 때 빽빽한 구름으로 임하지 아니하시고,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서 쓸쓸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고백하고 있다. 요한은 산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시던 날 온 누리를 덮었던 그 빛난 구름을(마17:1-8; 막9:2-8; 눅9:28-36 참조)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을 보았던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름으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요한은 이 사실에 감사 감격하여 이 글을 기록하고 있으며, 자신의 기록을 읽는 이들이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를 믿을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시내산 사건보다 더욱더 놀라운 일로서 하나님이 자신의 위엄을 가리시고 은혜와 진리로써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처음 오셨을 때의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그가 다시 오실 때는 현저한 하나님의 영광중에 오신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가 다시 오실 때 다음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3-4).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위기 1:1-17)
레위기 제1장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코르반) 중 번제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다른 예물이나 희생 제사에서도 그렇거니와 희생물로서 사용되는 동물은 제한되어 있다. 동물의 분류 내지 명칭에 있어서 히브리어는 우리 말과 약간 다르기 때문에 우리 말 성경 독자에게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번제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동물은 크게 '가축'과 '새'로 나뉜다. 가축중에는 '소'와 '양떼'('쫀')가 가능한데(1:2), 다같이 '흠 없는 수컷'이어여 한다(1:3, 10). '쫀' 중에는 다시 '양과 염소'가 가능하다(1:10). 이런 분류는 레3:1, 6, 7, 12; 5:6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독자는 레1:2, 10; 3:6; 5:6 등의 '쫀'은 1:10; 3:7의 '케쎄브'와는 달리, 양과 염소를 모두 포함하는 낱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성경에 일반적으로 '양(羊)'이라고 번역되는 낱말 '쫀'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 떼를 두루 가리키는 집합 명사이다. 한편 '쎄'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항상 단수로만 사용되고, '쫀'은 항상 복수로서 사용된다. 따라서 '쫀'은 '쎄'의 복수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30:32은 단수와 복수로서 이 두 낱말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쫀')로 두루 다니며 그 양('쎄') 중에 아롱진 자와 점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히브리어 '쫀'과 우리말 '양떼'의 의미 영역이 서로 다른만큼, 자연히 여기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읽을 경우, 레1:2에서 "누구든지 야웨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라고 읽은 독자는 레1:10의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혹시 염소가 추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10절의 '떼'는 2절의 '양'과 더불어 다같이 히브리어 '쫀'을 번역한 것이요, 한편 10절의 '양'은 히브리어 '케쎄브'를 번역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번역상의 난점은 출12:3, 5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출12:3에서 히브리어 낱말 '쎄'에 대하여는 개역과 표준새번역 공히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뒤의 5절을 통하여 볼 때, 이 낱말은 여기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를 다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 말에 양과 염소를 다같이 가리킬 수 있는 단어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 번역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확한 의미는 문맥(이 경우에는 출12:5)을 통하여 파악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우리말 개역의 경우 3절과 5절 모두에서 '쎄'를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반하여, 표준새번역의 경우 3절에서는 '어린 양'으로 5절에서는 '짐승'으로 서로 달리 번역되어 있다. 필자에게도 무슨 묘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개역이든 표준새번역이든 번역문만을 읽는 독자들에게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나답과 이비후의 죽음 (레위기 10:1-2)
레위기 8장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제사장 위임식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모세의 주재하에 열리는 이 위임식은 7일 동안 물로 씻기고, 옷을 입히고, 관유를 바르고, 속죄제와 번제와 위임제를 바치고, 피를 뿌리고, 식사하는 일 등이 반복된다(레8:6-34). 레위기 9장은 7일 동안의 위임식이 끝난 후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제8일에 처음으로 시행하는 일종의 취임식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이날 행사는 아론의 주관하에 거행된다. 그리고 이 날의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는 8장의 위임식과는 달리 이전에 명령을 받은 바가 없고, 새롭게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 날 취임식을 위한 준비가 마친 후,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8-11절), 아론의 아들들을 위한 번제(12-14절), 백성을 위한 각종 제사(15-21절)가 집행된다. 그리고는 아론의 축복과 하나님의 응답이 뒤따른다(22-24절).
레위기 10장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모든 제사를 마치고 제사장 응식을 먹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성경은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죽임당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나 그 상황 설명이 그리 명료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먼저 레10:1-2의 기록을 여기에 옮겨 놓기로 하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야웨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야웨 앞에서 죽은지라."
여기 '다른 불'이란 히브리어 표현 '에쉬 사라'를 옮긴 것이다. 이 표현은 역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 민3:4; 26:61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본문들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나답과 아비후는 '야웨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하여 많은 주석가들은 '불을 번제단에서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화를 입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번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향로에 채워서 분향하라'(레16:12)는 지시는 사실상 이 사건 이후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레16:1 참조). 그리고 역시 이 사건 이후, 고라 무리의 반역이 있었을 때,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취하고 (번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고 명한 적이 있다(민16:46). 이 두 경우 외에 "단 위의 불을 가져다가 향로에 담는 장면"은 마지막으로 신약 성경의 계8:5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고찰해 볼 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이유를 단순히 '다른 불', 곧 일부 주석가들이 말하는 바, '번제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불을 취하여 분향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시원한 대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비합법적인 분향' 때문이라고 한다. 출30:9의 "너희는 그[=분향단] 위에 다른 향('크토레트 사라')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라"는 명령은 이 사건 이전에 있었던 지시이다. 이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예를 들어, Keil & Delitzsch, Levine) 출30:9와 레위기 10장 본문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하면서, '다른 향을 살라 바치는' 행위를 얼마든지 '다른 불을 드리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위의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나답과 아비후가 죽게 된 데에는 단순히 이들 두 가지중의 어느 하나나 또는 두 가지 이유 모두로 인한 것 이상으로 더 복합적인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레16:1에 "아론의 두 아들이 야웨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야웨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이어 야웨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론에게 지시하신 말씀이 적혀 있다: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레16:2-4). 이 말씀을 통해 볼 때에, 아론의 두 아들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방자하게 지성소로 들어 가려다가(또는, 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시는 올바른 분향 방법에 대한 말씀으로까지 계속된다: "향로를 취하여 야웨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야웨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다" (레16:12-13).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술에 관한 지시를 내리셨다는 사실이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레10:9). 우리는 이 구절만 가지고는 이 날 과연 나답과 아비후가 술을 마시고 회막에 들어간 것인가 하는 여부를 판가름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날의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후손에게 술에 관하여 엄명을 내리셨다는 점이다. 나답과 아비후의 음주 여부는 그만 두고라도, 적어도 이 날 두 사람은 회막 안에서 무언가 경망된 짓을 하였기에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경망된 행동이 혹시 음주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보게 된다.
아울러 이 일 후에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레10:3)고 하신 야웨의 말씀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 그에게 가까이 할 수 있는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자세와 태도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나답과 아비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두 사람이 회막 안에서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일을 저질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야웨의 불'은 그분께 가까이 하여 그분이 원하시는대로 제사하는 이들의 제물을 사름으로써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환희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레9:22-24 참조: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야웨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동일한 '야웨의 불'은 그분 앞으로 방자하게 나아오는 자는 가차없이 불살라 처벌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형벌은 고라 무리의 반역 사건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민수기 16장).
오멜 절기와 부활 (레위기 23:9-14)
처음 난 것으로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친 것은 비단 사람이나 짐승 뿐만은 아니다. 율법은 식물의 첫 열매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칠 것을 명하고 있다(출23:19; 34:26). 여기서 토지 소산이라 함은 각종 곡물과 과일 및 올리브 기름 등 일체의 농산품을 가리킨다(민18:12 참조). 레위기에서는 특별히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전에 첫 이삭 한 단(= '오멜')을 야웨께 바칠 것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야웨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레23:10-14).
칠칠절 곧 오순절의 날자는 이 첫 이삭을 바치는 날에 달려있다. 15-16절에 의하면 칠칠절은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결정된다. 물론 해마다 기후나 기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 첫 이삭을 거두는 날이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유월절은 대략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의 4월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의 곡물(주로 보리와 밀) 추수는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에 거의 이루어진다. 이 사실은 첫 이삭 단을 바치는 날이 유월절 또는 무교절과 시간상으로 밀착되어 있음을 설명해준다.
'오멜'을 흔드는 날, 곧 레23:11, 15의 '안식일 이튿날'에 관하여는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학자들간에 논란이 많다. 필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하여 이 '첫 이삭 한 단'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흔드는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찌기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암시적으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유월절 기간에 죽으시고 안식후 첫날에 다시 살아나셨다. 죽은지 사흘만에 살아나셨으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은 무교절 한 주간 중의 일요일이 될 것이다. 레위기 23장에서 '오멜'을 굳이 '안식일 이튿날'(이 표현은 민33:3; 수5:11의 '유월절 다음날'과는 구분됨)에 드리라고 한 것은 이 구절이 다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상징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레23:11의 '안식일 이튿날'은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고전15:20). 바울이 사용한 '첫 열매'라는 낱말 역시 구약 성경의 냄새를 물씬 풍겨준다. 과거 바리새인으로서 율법 연구에 혼신의 노력을 쏟았던 바울인지라 율법의 구절구절이 그의 머리 속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언급하면서 율법의 첫 소산에 대한 규례를 염두에 두었음에 틀림없다. 이상의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레위기 23장의 '오멜'과 관련시킬 수 있고, 또 그 날짜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오멜' 절기가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이듯이(레23:14),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히 기념할 날이다.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모세의 율법 가운데 안식년과 희년(禧年) 제도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안식년과 희년을 산정하는데 있어서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7'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정확한 산출 방법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견해 차이를 보인다. 먼저 안식년의 기간과 관련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야웨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레25:3-5).
이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성경의 역법(曆法)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의 역법에서는 해의 주기(=365.242196일)와 달의 주기(=29.530588일)가 함께 사용된다. 해의 주기는 날과 해(年)의 기준이 되고, 달의 주기는 절기와 달(月)의 기준으로 쓰인다. 1주일 7일의 개념과 하루가 대략 해질 무렵인 오후 6시에 시작한다는 점은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되었다. 12달의 이름은 차례대로 1)니싼 또는 아빕, 2)십 또는 이얄, 3)씨반, 4)타무스, 5)아브, 6)엘룰, 7)에타님 또는 티슈리, 8)불 또는 마르헤스반, 9)키슬레브, 10)테ꕛ, 11)셰밭, 12)아달이고, 13)베아달은 윤달이다. 달이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날이 초하루가 되고 완전히 그믐달로 변할 때가 그 달의 마지막 날이 되기 때문에, 1년의 기준이 되는 해의 주기와 맞추기 위하여 윤달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 역법에 따른 한 해는 니싼월(봄)에서 시작하여 다시 니싼월로 돌아오는 주기를 취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서 1년중 농업의 주기는 제7월, 곧 티슈리월(그레고리력의 9-10월에 해당)에 시작하여 그 다음해 티슈리월에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주요한 농산품인 보리와 밀과 포도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자면, 티슈리월에 시작되는 밭갈기와 (보리 및 밀)씨뿌리기, 니싼월에서 씨반월 사이에 걸친 보리와 밀 수확, 티슈리월에 끝나는 포리 수확의 순서가 된다. 레25:3을 따라, '6년 동안 파종하며 6년 동안 과수원을 관리할' 경우 제6년에 수고한 결과는 제7년 니싼월에 시작하여 티슈리월 이전까지 거두게 된다. 따라서 땅은 안식년 첫 달(니싼월)부터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7월(티슈리월)부터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다음으로 희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희년 산정에 관하여 레25:8-9은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라고 밝히고 있다. 이 구절은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희년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레25:10-11("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의 '제 오십년' 때문에 희년을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아니라, 그 다음 해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럴 경우 희년이 끼는 주기는 7년 동안에 안식년(희년도 일종의 안식년임)이 두 번씩 발생할 수 있으므로 농업상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레25:10-11의 '제 오십년'은 한 희년을 '제1년'으로 계산할 경우 다음 희년이 '제50년'이 되므로 얼마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로 인정하는 우리 한국인들의 나이 계산법과 비교해보면 이런 계산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희년을 매 '일곱번 째의 안식년'과 동일한 때로 이해할 때, 희년과 관련된 많은 의문점들이 사라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농업주기로 인하여 안식년이 사실상 제7년 제7월(티슈리월)에 시작하는 것처럼, 희년 역시 '일곱번 째의 안식년' 제7월, 곧 티슈리월 10일에 나팔을 크게 분 후 시작하게 된다. 구약 성경 난제(I)-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Old Testament Difficult Passages I
-Genesis, Exodus, Leviticus-
저자: 김경래 Author: Kyungrae Kim, Ph.D.
펴낸 곳: 도서출판 대장간 Publisher: Daejanggan Press (Anyang, Korea)
초판일:1998년 8월 25일
목 차 Contents
머리글
제1부. 창세기 난제
창세기 1장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 (창1:1-31)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 (창1:26; 3:22; 11:7)
온 지표면을 적신 큰 물덩어리 (창2:6)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2:7)
선과 악을 안다는 것 (창2:9, 17; 3:5, 22)
여자의 후손과 뱀 (창3:15)
생명나무와 영생 (창3:22-24)
가인의 출생에 대하여 (창4:1)
창4:7의 올바른 번역과 이해 (창4:7)
우리 들로 나가자 (창4:8)
야웨의 이름을 부르다 (창4:26)
하나님의 아들들 (창6:1-4)
노아 방주에 들어간 동물의 수 (창6-7장)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9:18; 10:21)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 (창5:3-32; 11:10-32)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언제 죽었나? (창11:32)
이스마엘의 운명에 관한 예고 (창16:12)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에서에 대한 예언 (창27:39-40)
야곱과 천사의 씨름 (창32:24-30)
요셉의 노예 정책 (창47:21)
세겜을 한몫 더 받은 요셉 (창48:22)
요셉에 관한 예언 (창49:22-26)
제2부. 출애굽기 난제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1:1-5)
모세의 미디안 생활과 이집트 왕의 죽음 (출2:23)
하나님의 이름 '야웨' (출3:14)
이집트 탈출을 위한 광야 사흘길 (출3:18; 5:1-3; 8:27)
피 남편 모세 (출4:24-26)
유월절의 제정과 그 의미 (출12:1-14)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시간 (출12:6)
이스라엘 자손의 이집트 체류기간 (출12:40-41)
만나의 정체 (출16:13-36)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가축으로 인한 농작물 손상 (출22:5)
염소 새끼와 어미젖 (출23:19)
우림과 둠밈 (출28:30)
하나님의 약속과 그 위기 (출애굽기 32장)
야웨의 책 (출32:32-33)
모세의 또 다른 회막? (출33:7-11)
이름으로 아는 것 (출33:12, 17)
제3부. 레위기 난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레위기 1-3장)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1:1-17)
제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제사장의 몫 (레1:9, 13 등)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레4:1-6:7)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레10:1-2)
성경의 '문둥병' (레위기 13-14장)
유출에 대한 규례 (레위기 15장)
이스라엘 자손이 섬기던 수염소 (레17:7)
오멜 절기와 부활 (레23:9-14)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십일조의 의미 (레27:30-33)
참고 문헌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세기 2:7)
"야웨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우리말 개역 성경에 등장하는 이 창2:7에 대한 번역문은 일반 독자들이나 심지어는 설교자들에게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말하는 이 오해란 앞서 창세기 1장에서 다른 동물들을 단순히 '생물'이라고 부른데 반하여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생령'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우리말에 있어서도 '생령'(生靈)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생령'(生靈)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네페쉬 하야'인데, 이는 이미 창1:20, 21, 24, 30에서도 나오는 표현으로서 개역 성경은 그곳들에서 '생물'이나(1:20, 21, 24) 또는 단순히 '생명'으로(1:30)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네페쉬 하야'란 표현은 또 창2:19; 9:10, 12, 15, 16에도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인간 외의 동물계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다른 동물과 동일한 '네페쉬 하야'인 우리 인간을 달리 표현하고자 만들어낸 '생령'이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에게 그릇된 생각을 조장할 수 있는 것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번역문이라고 하겠다. 이 경우 오히려 표준새번역의 '생명체'라는 번역이 훨씬 더 적합한 번역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라는 표현은 인간과 다른 동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페쉬 하야'라고 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2:7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그 안의 '생령'이라는 번역문을 버리고, '살아있는 존재' 내지는 '생명체'라는 번역문을 가지고 읽을 때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생명체'가 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호흡'이 필요한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칠십인역에서는 창2:7의 '네페쉬 하야'를 다른 경우에서처럼, (프쉬케 소싸)로 번역하였다. 헬라어에서 이것은 인간 뿐 아니라 인간 외 모든 동물계까지 가리킬 수 있는 표현이다. 칠십인역에서 '네페쉬 하야'의 '네페쉬'를 보통 '영(靈)'을 뜻하는 (프뉴마)로 번역하지 않고 그것과 구분되는 (프쉬케)로 번역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번역을 적절히 활용하여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고전15:45).
개역 성경은 고전15:45을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읽고 있다. 여기서 '산 영'과 '살려주는 영'은 각각 (프쉬케 소싸)와 (프뉴마 소오포이운)을 번역한 문구이다. 이 인용문구의 출처인 창2:7에서 이미 '생령'이라고 번역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결국 그 연속성을 어기지 못하고 (프쉬케)와 (프뉴마)의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다 '영(靈)'으로 번역한 듯하다. 바울이 의도한 바를 살리려면 여기서도 창2:7과 마찬가지로 '산 영' 대신 '살아있는 존재'나 '생명체'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우리 들로 나가자 (창세기 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이 구절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것은 히브리어 원문상의 난해구절도 아니요, 번역상의 문제도 아니다. 다만 사건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간단하여서 무언가 빠진 느낌을 줄뿐이다. 창4:8은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라는 문구로 시작되기 때문에 바로 이어서 가인이 아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록했을 법하지만, 그런 내용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사마리아 오경과 고대 주요 역본들은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다음에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이러한 사본학적 증거들 때문에 최초의 원본에 이 문구가 들어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우리말 역본들중 개역 성경이 아무런 난외주도 없이 맛소라 사본의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옮긴데 반하여,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본문 가운데 이 문구를 끼워놓고 난외주에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한편 이 구절에 대한 한 가지 흥미 있는 주석적 요소는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4:8>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말하였다: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 그들 둘이 들로 나갔을 때에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기에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는데,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지지 않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있구나. 그래서 네 제물은 열납되고 내 제물은 열납되지 않았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고,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진다. 그리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없다. 그러나 내 행실의 열매가 네 것보다 더 좋았기 때문에 내 제물이 네 것을 제치고 열납된 것이다."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없다.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악인에게 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있으며,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고, 악인에게는 벌이 있다." 이 일 때문에 그들은 빈 들판에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마침내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덮쳤다. 그는 돌로 동생의 이마를 쳐서 그를 죽여버렸다.
여기 우리말로 번역하여 인용된 타르굼 내용은 결코 창4:8의 원본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아마도 과거 유대인 사이에 유행하였을 주석적 요소를 반영할 뿐이다. 길게 첨가된 주석적 내용 중에는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도 포함되어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에서도 다시 이 문구가 원래의 히브리어 본문에서 번역된 것인지, 아니면 번역자가 주석적인 요소중 일부분으로서 첨가한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이런 경우에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본문 중에는 이 문구를 넣지 않되, 난외주를 이용하여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된 고대 사본이나 역본들이 있음을 언급해주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물론 예루살렘 타르굼의 긴 주석적 내용을 우리말 역본에 소개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아들들 (창세기 6:1-4)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야웨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神)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6:1-4).
창6:1-4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학자들간에 쉽게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신학계에 구구한 해석사를 남긴 성경 난제중의 난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해 내려오는 여러 해석중 어느 하나가 분명히 맞는 해석이라면, 이 구절은 하나의 난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많은 성경학자들의 그릇된 신학적 사고방식을 반증해주는 사실이 아닐까? 필자는 여러가지 견해를 이 지면에 소개하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옹호 내지는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류의 서적이 이미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히려 본문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통하여 필자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설명하고자 한다. 다른 훌륭한 학자들의 해석을 재현하는 내용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국내의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이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우선 1절의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대하게 된다. 이 낱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하아담'은 정관사 '하'와 명사 '아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 끝에서 '하아담'을 복수형 대명사 어미로 받는 것으로 보아('그들에게서'; 히브리어로 '라헴'), 이것은 고유명사로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보통명사로서 아담으로 시작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딸들'과 역시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2, 4절의 '사람의 딸들'('브노트 하아담')은 인류, 곧 인간 사회에서 태어나는 '딸들'을 가리킴이 너무나 분명하다.
2절과 4절에는 이들 '사람의 딸들'의 상대역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브네 하엘로힘')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여기 말고 욥기에 또 다시 등장한다(욥1:6; 2:1; 38:7). 욥기에서 우리가 문맥을 통하여 분명히 아는 대로, 이 표현은 우리 인간이 아닌 '하늘의 영적인 존재', 소위 '천사들'을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서 단3:25에 아람어로 '바르 엘라힌'이 있는데, 이는 '신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역시 영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시29:1; 89:6(히브리어 성경에서는 89:7)에 나오는 '브네 엘림'은 직역하면 '신들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이 표현 역시 천사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것이 만일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에 관한 언급이라면, 이에 대하여 조물주께서 무언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시고(3절) 또 이러한 혼인 관계로 유별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은(4절)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사 경건한 가문의 아들과 불경건한 집안의 여자, 또는 귀족층 남자와 서민층 여자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결과적 사실을 만족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이처럼 창6:1-4의 본문에서 이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간 세상의 남자를 가리키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으므로 자연히 누군가 '인간 사회' 밖의 존재이어야만 하겠고, 아울러 앞서 제시한 바, 욥기와 기타 유사 문구의 도움을 얻어 얼마든지 '천사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표현 자체와 전체적 문맥을 통하여 이런 식의 유추는 가능하지만, 다만 이러한 이해에 대한 신학적 걸림돌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22:30; 막12:25) 때문에 학자들은 선뜻 상기한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눅20:34-36에서는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좀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이제는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의 사람들을 가리켜 "천사와 같다"고 하신 것은 그들과 천사들이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 밝히 보는대로,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휘오이 테우', ՕՉՏՉ ՈՅՏՕ)이라고 부른 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와 같게 변한 그들의 새로운 신분 때문이 아닐까.
다시 창세기 6장으로 돌아와, 칠십인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에 대하여 '하나님의 천사들'('호이 앙겔로이 투 테우', ՏՉ ՁՃՃՅՋՏՉ ՔՏՕ ՈՅՏՕ)이라는 번역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은 칠십인역 말고도 외경 에녹서(6:1-6)와 요세푸스(유대인 고대사 1권 3장 1절) 등을 통하여도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신약 성경의 몇몇 구절도 창6:1-4의 해석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먼저 벧후2:4-5에서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신' 일과(4절)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홍수로 인간 세상을 멸하신 일'을(5절)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벧전3:19-20의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는 기록 역시 이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구절(벧전3:19-20)을 '그리스도께서 고난 즉 죽음을 부활로 이기신 후, 전에 타락하여서 옥에 갇혀 있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신 것'이라고 본다. 옥에 갇힌 이들 천사들은 벧후2:4("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말고, 유다서 6절("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벧전3:19-20과 벧후2:4-5에서 이들 천사들의 투옥과 홍수 심판 기사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이들 '타락한 천사'라고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특별히 유다서 6절에서 천사 타락을 언급한 후 바로 이어 나오는 7절("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을 통하여, 우리는 천사 타락이 성적인 범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신약 성경의 몇몇 기록은 창6:1-4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해석을 반증하기 보다는 오히려 변증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 영적 존재인 천사가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 다만 우리는 소돔 사람들이 롯을 찾아온 두 천사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기록을 통하여(창19:5; 벧후2:6-8) 이런 가능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따름이다. 천사와 인간의 성적 결합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로 간주되어,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창6:3은 이런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서 하나님이 취하시고자 하는 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무서운 죄악은 비록 악한 천사들로부터 시작되긴 하였으나, 인간('하아담')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 그 안에 죄의 결과를 뿌려놓았기 때문에, 인간 역시 그 죄값을 모면할 수 없게 된다.
창6:3에서 야웨께서 말씀하시는 바 '나의 신(ࠉࠇࠅ࠘)' 곧 '하나님의 영(靈)'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하나님의 생명의 숨(生氣)'(창2:7 참조)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서 보통 '영(靈)'으로 번역되는 '루둽'과 '숨'으로 번역되는 '네샤마'는 동의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사람의 딸들이 악한 천사들의 무질서한 행위에 이용된데 대하여 분노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제동을 거신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영은 육체인 사람 속에 영원히 거하지 아니할 것이다. 여기서 '영원히'란 말은 '레올람'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을 번역한 것으로서, '영원히'라는 뜻도 되지만 '오래도록'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창6:3의 "120년"은 아마도 하나님이 새로 정하신 인간의 수명을 가리킬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대략 900세 정도로 '오래도록'(='레올람') 수명을 누려 왔었다 (창세기 5장의 족보 참조).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 안으로 단축시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타락한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합하여 낳은 자식들은 평범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창6:4에서 히브리어를 소리나는 그대로 음역하여 '네필림'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용사요, 고대에 유명한 자들'이었다. '네필림'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칠십인역('호이 기간테스')을 따라 '거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필림'은 이곳 말고 유일하게 민13:33("거기서 또 네필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에만 등장한다. 민13:33의 상반절을 직역하면,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네필림 중에서 아낙 자손 네필림을 보았다"가 된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이들이 보았다는 아낙 자손은 헤브론에 거하던 세 사람으로서,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라고 그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민13:22, "또 남방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이집트 소안보다 칠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천사와 인간 사이에 특별한 거인이 태어나, 고대에 '용사로서 유명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창6:4의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라는 문구는 이 일이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비정상적인 결합이 언제까지 지속되었을까?' 하는 물음에는 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만일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으로 인하여 이런 일이 중단된 것이라면 모세, 여호수아 시대의 '네필림'(민13:33)은 이런 결합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거인'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창6:1-4에 기록된 사건과 홍수 심판의 연관성이다. 창6:5("야웨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에서는 인간의 죄악이 언급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홍수 심판이 있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서 언급되었다. 창6:1-4에 나오는 바, 타락한 천사의 행위에 대한 기록은 그 위치로 보아, 역시 홍수 심판의 원인 중 하나로서 묘사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들도 입증해주고 있다.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세기 9:18; 10:21)
일반적으로 노아의 세 아들은 셈, 함, 야벳의 순으로 일컬어진다 (창5:32; 6:10; 7:13; 9:18; 10:1; 대상1:4). 대부분의 성경 독자들은 이러한 배열로 인하여 그들의 나이 역시 같은 순서대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노아에게 셈, 함, 야벳의 순서로 아들들이 태어난 것인가? 우리는 성경 본문을 통하여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어 번역본들에 나타나는 성경 오역이 바로 그것이다.
개역 성경은 창5:32을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조그만 글자로 인쇄된 "된 후에"는 원문에 없으므로 문맥을 고려하여 번역문에 삽입한 것이다. 표준새번역 역시 이를 같은 뜻의 "노아는 오백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창5:32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노아가 오백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이다. 이 문장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에 세 쌍둥이가 태어남, 2) 이들 세 아들이 노아가 오백세 되기까지 차례대로 태어남, 3)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 첫 아들이 태어나고 그 다음에 차례대로 다른 두 아들도 태어남. 히브리어 어법상 앞의 두 가지 보다는 세번째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역과 표준새번역 둘다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순서가 꼭 나이에 따른 순서여야 할 이유도 증거도 없다.
다음으로 고찰해야 하는 구절은 창10:21이다. 우선 우리말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개역은 이를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라고 번역함으로써, 개역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번역문은 과연 히브리어 원문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까? 여기서 "야벳의 형"이라고 번역된 문제의 구절을 히브리어 원문 및 고대 번역문인 칠십인역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 두 가지면 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충분하다고 본다.
창10:21의 이 문제의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본문은 ('둺히 예쵛 하가돌')이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와 모음 부호를 무시할 경우 이 히브리어 구절은 두 가지의 직역이 가능하다: 1)'야벳의 큰 형제(brother)', 2)'큰 (자) 야벳의 형제'. 다시 말해서 '크다'('하가돌')라고 하는 형용사가 '야벳'과 '형제' 중 어느 것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이 문구의 해석이 달라진다. '야벳'을 수식할 경우 야벳이 형이 되고, '형제'를 수식하면 셈이 형이 된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 부호의 기능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구두점 역할일 것이다. 맛소라 성경의 엑센트는 여기서 '크다'가 '야벳'을 수식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맛소라 학자들은 야벳을 셈의 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칠십인역 역시 맛소라 학자들의 견해를 지지해준다. 이 구절에 대한 칠십인역의 번역문(ՁՄՅՋՖٍ ԩՁՖՅՈ ՔՏՕ ՌՅՉՆՏՍՏՒ)에 있어서 명사 '야벳'과 형용사 '크다'는 동일한 2격(소유격)을 취하고, '형제'는 3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큰 자'는 셈이 아니라 야벳인 것이다.
셈이 야벳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은 창11:10을 통하여서도 찾아볼 수 있다.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라는 이 기술에 의하면, 셈이 일백세가 된 것은 홍수 후 이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이레 후 곧 2월 17일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40일을 내렸으며 (창7:9-12), 그들이 방주 밖으로 나온 것은 노아가 601세 되던 해 2월 27일이었으니 (창8:14-19), 노아 홍수는 햇수로 볼 때 2년이나 지속된 장기간의 대사건이었다. '홍수 후 2년'('슈나타임 둺하르 하마불')이란 히브리어 문구는 분명히 홍수 사건이 완전히 끝난 후 또 두 해가 흐른 뒤의 일임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에게 노아 나이 600세와 601세의 두 해는 홍수해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그후 두 해(노아 나이 602세와 603세)가 지나, 노아의 나이가 대략 604세가 되던 해에 셈은 나이 100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셈은 노아가 504세가 되던 해에 태어난 셈이 된다. 이상 고찰한 바를 창5:32("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과 묶어서 볼 때, 셈은 결코 노아의 맏아들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증거로서 창9:24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창9:20-27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있을 때 그 아들들이 취한 행동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내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 중에서 분명치 아니한 점은 도대체 함의 아들 가나안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많은 독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저주를 받은 것은 함이 아니요 그의 아들인 가나안이다.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15:16, 19-21 등 참조). 이 저주를 항간에 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흑인 전체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창9:24에 기록되기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하였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작은'('하카탄')을 위하여 '둘째'라는 각주를 덧붙임으로써, 이 아들이 다름 아닌 '함'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함에 대한 저주가 없음을 고려할 때, 여기서 말하는 '그 작은 아들'은 아마도 함이 아니라 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경우, 이 작은 아들이 '행한 일'은 무슨 저주받을(25, 27하반절) 악한 행실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축복을 받아 마땅한(26-27상반절) 아름다운 행실을 가리키게 된다.
이상으로 우리는 야벳이 셈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찰해 보았다. 노아의 세 아들중 다만 함의 연령상의 위치가 확실치가 않다. 창9:24의 '작다'('하카탄')나 10:21의 '크다'('하가돌')라는 형용사가 반드시 최상급으로서 '막내'나 '맏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히브리어 어법을 따라서 최상급으로 이해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 세 아들의 가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야벳(2-5절), 함(6-20절), 셈(21-31절)의 순서로 열거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나이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상의 모든 고찰을 종합하여 가장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야벳은 노아 500세 되던 해에, 함은 노아 502세 되던 해에, 그리고 셈은 노아 504세 되던 해에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불행하게도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번역가와 성경 해석가들은 노아의 세 아들이 셈, 함, 야벳의 차례로 태어났다고 믿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창10:21 본문에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 현대 역본이 그런 것처럼,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맛소라 성경의 히브리어 본문과 고대 역본인 칠십인역을 따를 경우,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철저히 금하시고 있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과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아무리 시험이라고 하지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의혹 때문에 과거 유대인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갖가지 해석을 시도하였다. 여기서는 먼저 고대 유대인들의 해석중 하나를 예루살렘 타르굼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한다.
'타르굼'은 통일적인 하나의 성경 역본이 아니다. 그 시대도 다르거니와 역자 또한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다양한 종류의 '타르구밈'(타르굼의 복수형) 전승이 전해진다. 모세 오경만의 아람어 역본을 두고 볼 때, 온켈로스의 타르굼은 비교적 문자적 번역을 시도한데 반하여,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은 온갖 주석적 요소로 가득차 있어서 주석가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타르굼이라고 하겠다. 이 예루살렘 타르굼은 그 최종 편집이 상당히 늦은 시기에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그 안에 보존된 주석적 요소들중 상당한 부분이 예수님 이전부터 전해진 것들로 추정되기에 이러한 타르굼의 전승은 예수님 당시 구약 성경에 대한 유대인들의 해석을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 연구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창22:1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상당히 흥미있는 주석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우선 그 본문을 우리말로 옮겨 보기로 하자.
이 일들 후에 이삭과 이스마엘이 다투었다. 이스마엘이 말하였다: "내가 장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자 이삭이 말하였다: "내가 아버지 부인 사라의 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너는 내 모친의 여종인 하갈의 자식일 뿐이다." 이스마엘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나는 열 세 살에 할례를 받았으니 너보다 더 의롭다. 만일 내게 거절할 뜻이 있었더라면 나는 얼마든지 할례를 받지 않았었을 것이다." 이삭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나이 지금 서른 일곱이 아니냐. 만일 거룩하시고 찬양받으실 분이 나의 모든 지체를 요구하신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겠다." 그 즉시로 이 말들이 우주의 주께 들려졌고, 또한 그 즉시로 주의 말씀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위에서 보는대로 예루살렘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스마엘이 이삭의 비위를 건드리는 말로 그에게 도전해오자 이삭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적 태도를 주저함없이 발설한다. 자신의 모든 지체라도 주저하지 않고 바치겠다는 이삭의 선언이 결국 이러한 시험의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 이 타르굼의 설명이다. 특별히 아브라함이 시험받을 때 이삭의 나이는 37세로 되어 있다. 이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일을 사라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라는 127세에 죽었으므로(창23:1), 이때 이삭의 나이가 37세가 되는 점에 착안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이삭의 나이를 37세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22:1 본문은 상당히 흥미있는 해석을 보여주긴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은 설명일까 하는 데에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는 고대 유대인 랍비들의 지나친 추측에서 나온 해석이 아닌가 한다. 이와는 달리 요세푸스의 설명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더 설득력이 있다. 요세푸스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시험해 보고자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이때 이삭의 나이를 25세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이때 이삭의 나이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이나 요세푸스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번제 나무를 지우고 산을 오르게 했다는 점으로(창22:6) 미루어 이삭이 결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막 치려하는 순간에 이삭의 반응이 어떠하였을까? 고대 유대인들은 이에 대하여도 관심이 컸다. 먼저 예루살렘 타르굼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다음은 창22:10에 대한 예루살렘 타르굼의 본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손을 내밀어 칼을 집어서 자기 아들을 잡으려 하였다. 이삭이 자기 아버지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영혼이 고통 중에 분투하지 않도록 저를 꼭 붙잡아 매세요. 그래야만 아버지의 제물에 흠이 없겠고 저도 멸망의 구덩이로 던져지지 않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눈은 이삭의 눈을 쳐다보았으나, 이삭의 눈은 저 높이 천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삭은 그들을 볼 수 있었으나, 아브라함은 보지 못하였다. 높은 곳에서 천사들이 화답하였다: "우리 가서 땅 위의 저 두 별난 사람을 보자. 하나는 잡는 자요, 다른 하나는 잡히는구나. 잡는 자는 주저함이 없고, 잡히는 자는 그 목을 길게 내미는구나."
예루살렘 타르굼은 이삭의 순종과 신앙심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세푸스 또한 이에 뒤질세라 이때의 상황을 아브라함과 이삭 부자(父子) 사이의 눈물겨운 대화 내용을 통하여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요세푸스의 경우에도 이삭의 믿음과 순종이 돋보인다.
비록 이런 기록들이 추측에 불과하기는 하겠지만, 이때 이삭의 순종과 믿음에 대하여는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직 40이 되지 않은 젊은 나이의 이삭은 원하기만 하였다면 100세가 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고대 유대인들의 몇몇 성경 해석을 통하여 이삭의 믿음이 돋보이게 묘사된 데 반하여, 신약성경은 창세기 22장과 마찬가지로 이삭 보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7-19)고 하였고, 야고보 역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1)고 역설하고 있다.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애굽기 1:1-5)
야곱과 더불어 이집트에 내려간 야곱 가문 사람들의 숫자는 칠십인역에서 다섯 명이나 더 불어난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의 발언은 칠십인역과 일치한다 (행7:14):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그럼 먼저 문제의 출1:5의 맛소라 성경 및 칠십인역 본문을 직역하여 아래에 옮겨놓기로 하자. 문맥을 볼 수 있도록 맛소라 성경의 1:5 앞에 1:1-4의 내용을 괄호로 묶어 기입해둔다.
(맛소라 성경)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이집트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베냐민, 단, 납달리, 갓, 아셀.)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명인데,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칠십인역)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야곱에게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오인이었다."
출1:5에 있어서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차이점이란 아주 간단하다. 첫째로 두 구절의 순서가 서로 바뀌었고 (칠십인역에서는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가 절의 맨 앞에 나온다), 둘째 인원수 면에서 맛소라 성경에서는 '70명', 칠십인역에서는 '75명'으로 서로 다르다. 여기서 사마리아 오경은 맛소라 성경과 일치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창46:8-27에 나오는 보다 상세한 목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도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을 비교해보기로 하자. 창46:8-27은 내용상 1)레아 소생(8-15절), 2)실바 소생(16-19절), 3)라헬 소생(20-22절), 4)빌하 소생(23-25절), 5)종합(26-27절)으로 쉽게 나뉜다. 8절에서 19절에 이르기까지 표기상의 미미한 차이점을 제하고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은 서로 일치한다. 23-25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라헬 소생'(20-22절)의 명단에 있어서 칠십인역은 맛소라 성경과 차이점을 보이며, 따라서 '종합'(26-27절)에 있어서도 인원상의 차이점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20-22절 나란히 배열해보기로 하자.
맛 소 라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과 아릇이니,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사명이요. |
칠십인역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므낫세의 시리아 여자 첩이 그에게 낳은 아들들은 마길이요, 마길은 길르앗을 낳았다. 므낫세의 동생 에브라임의 아들들은 수델라와 다한이요, 수델라의 아들들은 에뎀이다.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이요, 벨라의 아들들은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이요, 게라는 아릇을 낳았다.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팔명이요. |
위의 표에서 보듯이 칠십인역에는 몇몇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들 삽입문에 대한 정보는 민26:35-36; 대상7:14; 8:3-5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목적은 아마도 창50:22-23("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이집트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의 영향을 받아, 요셉의 자손을 한 두 대(代) 더 보여주고 아울러 부자 관계를 정확하게 밝히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칠십인역에는 다섯 사람의 이름(마길, 길르앗, 수델라, 다한, 에뎀)이 더 들어 있지만 마지막에 '18명'으로 합을 낸 문제점이 보이기도 한다.
26절에 있어서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은 완전히 일치한다: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 륙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이다." 이 숫자에는 야곱 자신, 요셉, 및 요셉의 두 아들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로 다음의 27절에서는 20절에서의 차이점과 관련하여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 사이에 차이점을 보인다.
(맛소라 성경)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명이었더라."
(칠십인역) "이집트 땅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일곱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오명이었더라."
이상을 통하여 칠십인역의 '66명'을 설명하자면, 33(레아의 소생과 야곱을 합한 수) - 1(야곱) + 16(실바의 소생) + 11(베냐민과 그의 자손) + 7(빌하의 소생) = 66이 된다. 그리고 '75명'은 66 + 1(요셉) + 7(요셉의 자손) + 1(야곱)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칠십인역 22절의 '18명'은 어쩔 수 없이 라헬의 소생 중 요셉을 제외한 숫자로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수는 신10:22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이 절의 경우 칠십인역도 '75명'이 아닌 '70명'으로 읽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창세기 46장과 출1:5에 나타나는 사본상 차이점은 칠십인역의 의도적 편집 작업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맛소라 성경이 원래의 본문을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맛소라 성경을 통해볼 때, 창46:8-27의 기록은 몇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야곱의 아내들을 비롯하여 모든 며느리나 손주 며느리 등 여자들이 숫자 계산에 들어오지 못한 반면에(26절 참조), 유일하게 레아의 딸 디나와(15절) 아셀의 딸 세라(17절)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다른 말로 가정을 이루지 아니하고 지낸 것이 아닌가 한다. 디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창세기 34장 참조).
둘째, 레아 소생을 계수함에 있어서 야곱 자신을 포함시켜 그 수는 모두 '33명'에 이른다(15절).
세째,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할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자손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연대를 계산해 볼 경우,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베레스에게 이집트로의 이주를 즈음하여 두 아들이(12절) 이미 생겨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이 무렵 베냐민에게(민26:38-40; 대상7:6-7에 의거, '손자를 포함하여') 열 명의 아들이 생겨났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이들은 틀림없이 이집트로의 이주 후에 태어난 자손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70명'(또는 '75명')은 이집트에 내려간 실제의 정확한 인원이라기 보다는 이집트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민족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 야곱의 자손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출1:5)이라는 문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이러한 히브리적 사고 방식의 타당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히7:9-10 참조: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피 남편 모세 (출애굽기 4:24-26)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야웨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출4:24-26).
출4:24-26의 난점은 히브리어 문장의 번역에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사본학적인 문제도 아니다. 짧으면서도 전후 문맥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간단한 문단은 그 역사적 상황과 그에 대한 배경을 설명함에 있어서 많은 이론들을 만들게 한 성경 난제중의 하나이다.
야웨께서 왜 그리고 어떻게 모세를 죽이려 하셨나? 이러한 일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문맥을 통해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너무나 돌연적이고 이상스럽기까지 하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후, 이미 장인에게 요청하여 그로부터 허락도 받고(출4:18), 또 다시 야웨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는(출4:19), 아내와 두 아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는 중이 아니던가(출4:20)?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출4:22-23): "너는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야웨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이러한 일 다음에 기록된 내용이 바로 본문의 이상한 사건이다.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몇 가지 분명한 사실로는: 1)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심, 2)십보라가 아들 (아마도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할례를 행함, 3)이때야 비로소 모세가 화를 면함, 4)이 일로 십보라가 모세를 '피 남편'이라고 부름 등을 들 수 있다.
모세는 이때까지 자기 '아들'(20절의 복수형과는 달리 여기 25절에서는 단수형으로 언급됨)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무슨 일로 왜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이제까지 할례를 행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물론 첫째인 게르솜의 경우에도(출2:22 참조) 그가 과연 할례를 받았는지에 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모세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의 아내 십보라는 그 이유가 아들의 할례에 있음을 깨닫고는 즉시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로 실제로 모세는 죽음을 면하게 된다.
이때 십보라가 모세를 향하여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고 내뱉는데, 이 말은 한편으로는 일종의 분노와 자포자기가 함축된 말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의 특별한 사명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과 확인으로 들린다.
본래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셔서 그의 후손이 대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언약이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17:9-11). 이 명령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14)는 준엄한 경고로 끝을 맺는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에게만 해당하는 할례 예식은 틀림없이 남자들에 의하여 집행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출4:24-26 본문에서 모세가 아닌 십보라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는 사실 역시 특이하다. 24절의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라는 표현은 아마도 모세가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든가, 아니면 그가 무슨 특별한 위험에 빠져있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순전히 하나님과만 연관시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모세는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 수 없는 상황이었겠고, 자연히 그의 아내인 십보라가 이 일을 집행하여야만 했을 것이다.
아울러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은 모세보다는 십보라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모세는 한때 특별한 사명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지시에 대하여 자기는 부족하다면서 머뭇머뭇한 적이 있다(출3:11; 4:10, 13 참조). 이러한 모세의 태도로 인하여 하나님이 모세에게 노를 발하신 적은 있으나(출4:14 참조), 이런 일로 그를 죽이려 하신 것 같지는 않다. 더군다나 출4:24-26 본문에서는 모세의 위기에 대하여 할례가 주된 원인임을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에서는 십보라에 대하여 별 기록을 담고 있지 않다. 아마도 십보라로서는 그녀의 남편 모세에게 부여된 특별한 사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이행한다는 것이 모세 본인 못지 않게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멀리 이집트에서부터 '굴러 온 복'을 어찌 하루 아침에 놓칠 수 있으랴. 두 아들과 함께 남편을 따라 낮선 땅 이집트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너무나 처절하고 무거웠던 것이 아닐까? 남편이 구해야 하는 백성은 자기의 민족이 아니요 남편의 민족일 뿐이요, 이집트는 자기의 사랑하는 남편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 아니던가.
성경은 이집트로 향하는 모세의 가정, 아니 모세와 그의 아내 사이에 교차되는 감정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이처럼 유추해보는 수 밖에 없다. 두 아들은 그만 두고라도 아내 십보라의 마음 속에 있는 온갖 감정과 생각은 모세의 마음을 충분히 괴롭히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 모세와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들의 두 아들은 - 이집트로 향한다.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준엄하고도 분명한 명령 때문에.
이때 길의 숙소에서 일어난 사건은 모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십보라에게도 하나님이 내리신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준엄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로서 십보라는 자기 남편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할례의 집행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기 남편, 더 나아가서는 자기 남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중요성과 엄숙함을 재확인한다. 바로 이 언약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이 '사지'(死地)로 명령을 받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십보라는 이 냉정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 자기 아들의 양피를 베어 피를 냄으로써.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는 그녀의 외침은 그녀의 이러한 심경을 잘 대변해준다고 하겠다.
'피와 죽음'이란 관계를 두고 볼 때, 이 사건은 성경의 다른 몇몇 기록과도 연관성을 가진다. 우선 앞서 언급한대로 바로 앞의 출4:22-23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 재앙은 출애굽기 12장에 묘사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죽음을 면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간접적이긴 하지만 모세의 아들의 피가 모세의 개인적인 재앙을 면하게 하였다. 모세의 둘째 아들 엘리에셀의 이름을 설명하는 구절에서도 또한 다소나마 이런 맥락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파라오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출18:4).
출4:24-26에 기록된 사건으로 인하여 모세는 십보라와 두 아들을 장인에게로 돌려보내고 홀로 이집트로 떠난 것 같다. 그래서 출18:2-6에서 우리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 보내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 두 아들을 데렸으니.....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 아내로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 그가 모세에게 전언하되 그대의 장인 나 이드로가 그대의 아내와 그와 함께한 그 두 아들로 더불어 그대에게 왔노라"라는 기록을 보게 된다. 아마도 모세는 이 일을 통하여, 자기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신 하나님의 엄정(嚴正)하심과 그의 분명하신 목적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고는, 다시는 거역하거나 주저함이 없이 철저히 순종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인간 가운데 하나님의 강림(降臨)이 있다는 사실은 피조계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관심 내지는 간섭을 의미한다. 사실상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와 더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의 역사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신다. 이러한 간섭은 인간편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간을 지으신 이후로 인간을 그대로 두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강림 또는 임재(유대인들은 이를 가리켜 전문 용어로 '슈키나' 라고 한다)에 관하여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다. 구약 성경 중에서 하나님의 강림에 관한 기록중 가장 중요한 곳을 찾으라면 역시 출애굽기 19장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19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강림은 어느 개인이나 소수의 몇몇 사람 또는 작은 무리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목격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임하였다.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도 구름을 동반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 놀라운 광경 앞에서 두려움으로 떨며 모세의 중재를 요구하였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나타나신 것은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게끔 하는 목적이 있었다(출19:9; 20:20).
이제 필자가 고찰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강림에 관하여 출애굽기 19장에 기록한 사건이 시간적으로 언제 있었던 일이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출19:1)는 우리말 개역성경을 읽을 때, 정확하게 언제를 가리키는지 분명치가 않다. 여기 '제 삼월'중 '월(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데쉬'는 본래 '새롭다'라는 뜻에서 파생하여 '매월 달이 새로 뜨기 시작하는 월삭(月朔)'(new moon)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가 '월삭'을 뜻하는 경우로는 민29:6; 삼상20:5, 18, 24, 34; 왕하4:23; 사1:13; 겔46:1, 6; 암8:5; 시81:4 등을 들 수 있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총 281회 출현하는 이 단어는 그중 22회의 경우만 '월삭'의 뜻으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모두 '달'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그 때에'로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다시 직역하면 '이 날에'가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호데쉬'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월삭'의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출19:1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광야에 도착하여 시내산 앞에 장막을 친 것은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계산하여 제3월이 되는 바로 그날'이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이러한 해석을 근거로 하여 출19:1에 아예 '초하룻날'이라는 문구를 첨가하여, 각각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표준새번역)와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공동번역)로 번역하였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간'(출19:3) 날은 아마도 이제까지 설명한 '제3월 1일'이거나, 아니면 그 다음날일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말씀을 들은(출19:4-6) 모세는 이를 백성의 장로들에게 전해주고는(출19:7) 다시 백성의 반응을 하나님께 회보한다(출19:8). 출19:4-8에 기록된 일들이 모두 마치기까지는 아마도 하루 이틀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모세로부터 회보를 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앞에서 영광중에 나타나실 계획을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야웨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야웨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출19:10-11). 마침내 하나님이 말씀하신 "제3일 아침에 산 위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있었고, 심히 큰 나팔소리도 울려퍼졌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동반한 이 무서운 광경으로 인하여 "진중의 모든 백성은 다 두려워 떨었다" (출19:16).
첫째 달인 아빕월(출12:2 참조) 14일 저녁에 어린 양을 잡아 먹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출12:6-9 참조)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 그날 밤(아마도 제1월 15일 새벽, 출12:29-42 참조) 이집트를 떠났다. 성경의 역법을 따라 계산할 경우,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떠난 날(제1월 15일)로부터 하나님이 시내산에 나타나신 날(대략 제3월 3~6일 사이)까지는 대략 50일이 된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신 날을 오순절로 믿고 있다. 사실 이러한 계산은 거의 틀림없이 맞는 것이다. 오순절은 봄에 첫 곡식을 수확하여 첫 이삭 한 단을 흔들어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레23:15-16). 문제는 첫 이삭 한 단을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이 언제냐 하는 것인데, 레23:11, 15에 '안식일 이튿날'이라고 한 이 날은, 그 문맥상 유월절/무교절과 나란히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계산이 맞다면 오순절은 무교절중에 들어있는 일요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무교절중에 이집트를 나왔으므로, 그로부터 대략 50일이 지난 날은 오순절이 될 가능성이 크다.
모두가 아는 바대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교회 중에 강림하신 날도 바로 오순절이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이날 교회 위에 임하신 성령은 각 믿는 이의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삶을 인도하신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은 언제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탄절(개신교와 천주교의 12월 25일)은 성경 및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으로서, 일단 무시할 필요가 있다. 성경 연대기 학자 폴스틱(Eugene Faulstich, Witnesses for Jesus the Messiah, Spencer, 1989)은 여러 가지 역사 및 천문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을 (그레고리 역법으로 환산하여) 주전 6년 5월 14일로 제시하고 있다. 폴스틱이 제시한 유력한 근거들중 하나는 초대교부중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예수님의 탄생일자를 이집트 역법에 따라서 '파콤월 25일'로 기록한 것(The Stromata I.xxi)이다. 폴스틱은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태어난지 제8일, 곧 그가 할례받은 날이 바로 오순절이었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인용한 책, 6쪽).
만일 출애굽기 19장을 통하여 우리가 살펴본 연대기 재구성과 예수님의 탄생에 관련하여 폴스틱이 도출해낸 결론이 맞는 것이라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강림은 모두 오순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오순절의 의미를 재삼 강조하면서 되새길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왕 나온 김에 사도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마침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여기서 '가운데'라는 말은 '어느 개인 안에'가 아니라 '무리 중에'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시내산에서 성부 하나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에 오실 때 빽빽한 구름으로 임하지 아니하시고,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서 쓸쓸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고백하고 있다. 요한은 산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시던 날 온 누리를 덮었던 그 빛난 구름을(마17:1-8; 막9:2-8; 눅9:28-36 참조)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을 보았던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름으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요한은 이 사실에 감사 감격하여 이 글을 기록하고 있으며, 자신의 기록을 읽는 이들이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를 믿을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시내산 사건보다 더욱더 놀라운 일로서 하나님이 자신의 위엄을 가리시고 은혜와 진리로써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처음 오셨을 때의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그가 다시 오실 때는 현저한 하나님의 영광중에 오신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가 다시 오실 때 다음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3-4).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위기 1:1-17)
레위기 제1장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코르반) 중 번제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다른 예물이나 희생 제사에서도 그렇거니와 희생물로서 사용되는 동물은 제한되어 있다. 동물의 분류 내지 명칭에 있어서 히브리어는 우리 말과 약간 다르기 때문에 우리 말 성경 독자에게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번제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동물은 크게 '가축'과 '새'로 나뉜다. 가축중에는 '소'와 '양떼'('쫀')가 가능한데(1:2), 다같이 '흠 없는 수컷'이어여 한다(1:3, 10). '쫀' 중에는 다시 '양과 염소'가 가능하다(1:10). 이런 분류는 레3:1, 6, 7, 12; 5:6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독자는 레1:2, 10; 3:6; 5:6 등의 '쫀'은 1:10; 3:7의 '케쎄브'와는 달리, 양과 염소를 모두 포함하는 낱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성경에 일반적으로 '양(羊)'이라고 번역되는 낱말 '쫀'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 떼를 두루 가리키는 집합 명사이다. 한편 '쎄'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항상 단수로만 사용되고, '쫀'은 항상 복수로서 사용된다. 따라서 '쫀'은 '쎄'의 복수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30:32은 단수와 복수로서 이 두 낱말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쫀')로 두루 다니며 그 양('쎄') 중에 아롱진 자와 점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히브리어 '쫀'과 우리말 '양떼'의 의미 영역이 서로 다른만큼, 자연히 여기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읽을 경우, 레1:2에서 "누구든지 야웨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라고 읽은 독자는 레1:10의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혹시 염소가 추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10절의 '떼'는 2절의 '양'과 더불어 다같이 히브리어 '쫀'을 번역한 것이요, 한편 10절의 '양'은 히브리어 '케쎄브'를 번역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번역상의 난점은 출12:3, 5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출12:3에서 히브리어 낱말 '쎄'에 대하여는 개역과 표준새번역 공히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뒤의 5절을 통하여 볼 때, 이 낱말은 여기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를 다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 말에 양과 염소를 다같이 가리킬 수 있는 단어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 번역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확한 의미는 문맥(이 경우에는 출12:5)을 통하여 파악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우리말 개역의 경우 3절과 5절 모두에서 '쎄'를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반하여, 표준새번역의 경우 3절에서는 '어린 양'으로 5절에서는 '짐승'으로 서로 달리 번역되어 있다. 필자에게도 무슨 묘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개역이든 표준새번역이든 번역문만을 읽는 독자들에게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나답과 이비후의 죽음 (레위기 10:1-2)
레위기 8장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제사장 위임식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모세의 주재하에 열리는 이 위임식은 7일 동안 물로 씻기고, 옷을 입히고, 관유를 바르고, 속죄제와 번제와 위임제를 바치고, 피를 뿌리고, 식사하는 일 등이 반복된다(레8:6-34). 레위기 9장은 7일 동안의 위임식이 끝난 후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제8일에 처음으로 시행하는 일종의 취임식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이날 행사는 아론의 주관하에 거행된다. 그리고 이 날의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는 8장의 위임식과는 달리 이전에 명령을 받은 바가 없고, 새롭게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 날 취임식을 위한 준비가 마친 후,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8-11절), 아론의 아들들을 위한 번제(12-14절), 백성을 위한 각종 제사(15-21절)가 집행된다. 그리고는 아론의 축복과 하나님의 응답이 뒤따른다(22-24절).
레위기 10장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모든 제사를 마치고 제사장 응식을 먹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성경은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죽임당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나 그 상황 설명이 그리 명료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먼저 레10:1-2의 기록을 여기에 옮겨 놓기로 하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야웨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야웨 앞에서 죽은지라."
여기 '다른 불'이란 히브리어 표현 '에쉬 사라'를 옮긴 것이다. 이 표현은 역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 민3:4; 26:61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본문들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나답과 아비후는 '야웨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하여 많은 주석가들은 '불을 번제단에서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화를 입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번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향로에 채워서 분향하라'(레16:12)는 지시는 사실상 이 사건 이후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레16:1 참조). 그리고 역시 이 사건 이후, 고라 무리의 반역이 있었을 때,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취하고 (번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고 명한 적이 있다(민16:46). 이 두 경우 외에 "단 위의 불을 가져다가 향로에 담는 장면"은 마지막으로 신약 성경의 계8:5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고찰해 볼 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이유를 단순히 '다른 불', 곧 일부 주석가들이 말하는 바, '번제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불을 취하여 분향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시원한 대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비합법적인 분향' 때문이라고 한다. 출30:9의 "너희는 그[=분향단] 위에 다른 향('크토레트 사라')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라"는 명령은 이 사건 이전에 있었던 지시이다. 이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예를 들어, Keil & Delitzsch, Levine) 출30:9와 레위기 10장 본문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하면서, '다른 향을 살라 바치는' 행위를 얼마든지 '다른 불을 드리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위의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나답과 아비후가 죽게 된 데에는 단순히 이들 두 가지중의 어느 하나나 또는 두 가지 이유 모두로 인한 것 이상으로 더 복합적인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레16:1에 "아론의 두 아들이 야웨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야웨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이어 야웨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론에게 지시하신 말씀이 적혀 있다: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레16:2-4). 이 말씀을 통해 볼 때에, 아론의 두 아들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방자하게 지성소로 들어 가려다가(또는, 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시는 올바른 분향 방법에 대한 말씀으로까지 계속된다: "향로를 취하여 야웨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야웨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다" (레16:12-13).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술에 관한 지시를 내리셨다는 사실이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레10:9). 우리는 이 구절만 가지고는 이 날 과연 나답과 아비후가 술을 마시고 회막에 들어간 것인가 하는 여부를 판가름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날의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후손에게 술에 관하여 엄명을 내리셨다는 점이다. 나답과 아비후의 음주 여부는 그만 두고라도, 적어도 이 날 두 사람은 회막 안에서 무언가 경망된 짓을 하였기에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경망된 행동이 혹시 음주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보게 된다.
아울러 이 일 후에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레10:3)고 하신 야웨의 말씀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 그에게 가까이 할 수 있는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자세와 태도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나답과 아비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두 사람이 회막 안에서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일을 저질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야웨의 불'은 그분께 가까이 하여 그분이 원하시는대로 제사하는 이들의 제물을 사름으로써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환희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레9:22-24 참조: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야웨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동일한 '야웨의 불'은 그분 앞으로 방자하게 나아오는 자는 가차없이 불살라 처벌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형벌은 고라 무리의 반역 사건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민수기 16장).
오멜 절기와 부활 (레위기 23:9-14)
처음 난 것으로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친 것은 비단 사람이나 짐승 뿐만은 아니다. 율법은 식물의 첫 열매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칠 것을 명하고 있다(출23:19; 34:26). 여기서 토지 소산이라 함은 각종 곡물과 과일 및 올리브 기름 등 일체의 농산품을 가리킨다(민18:12 참조). 레위기에서는 특별히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전에 첫 이삭 한 단(= '오멜')을 야웨께 바칠 것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야웨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레23:10-14).
칠칠절 곧 오순절의 날자는 이 첫 이삭을 바치는 날에 달려있다. 15-16절에 의하면 칠칠절은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결정된다. 물론 해마다 기후나 기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 첫 이삭을 거두는 날이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유월절은 대략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의 4월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의 곡물(주로 보리와 밀) 추수는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에 거의 이루어진다. 이 사실은 첫 이삭 단을 바치는 날이 유월절 또는 무교절과 시간상으로 밀착되어 있음을 설명해준다.
'오멜'을 흔드는 날, 곧 레23:11, 15의 '안식일 이튿날'에 관하여는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학자들간에 논란이 많다. 필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하여 이 '첫 이삭 한 단'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흔드는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찌기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암시적으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유월절 기간에 죽으시고 안식후 첫날에 다시 살아나셨다. 죽은지 사흘만에 살아나셨으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은 무교절 한 주간 중의 일요일이 될 것이다. 레위기 23장에서 '오멜'을 굳이 '안식일 이튿날'(이 표현은 민33:3; 수5:11의 '유월절 다음날'과는 구분됨)에 드리라고 한 것은 이 구절이 다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상징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레23:11의 '안식일 이튿날'은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고전15:20). 바울이 사용한 '첫 열매'라는 낱말 역시 구약 성경의 냄새를 물씬 풍겨준다. 과거 바리새인으로서 율법 연구에 혼신의 노력을 쏟았던 바울인지라 율법의 구절구절이 그의 머리 속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언급하면서 율법의 첫 소산에 대한 규례를 염두에 두었음에 틀림없다. 이상의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레위기 23장의 '오멜'과 관련시킬 수 있고, 또 그 날짜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오멜' 절기가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이듯이(레23:14),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히 기념할 날이다.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모세의 율법 가운데 안식년과 희년(禧年) 제도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안식년과 희년을 산정하는데 있어서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7'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정확한 산출 방법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견해 차이를 보인다. 먼저 안식년의 기간과 관련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야웨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레25:3-5).
이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성경의 역법(曆法)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의 역법에서는 해의 주기(=365.242196일)와 달의 주기(=29.530588일)가 함께 사용된다. 해의 주기는 날과 해(年)의 기준이 되고, 달의 주기는 절기와 달(月)의 기준으로 쓰인다. 1주일 7일의 개념과 하루가 대략 해질 무렵인 오후 6시에 시작한다는 점은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되었다. 12달의 이름은 차례대로 1)니싼 또는 아빕, 2)십 또는 이얄, 3)씨반, 4)타무스, 5)아브, 6)엘룰, 7)에타님 또는 티슈리, 8)불 또는 마르헤스반, 9)키슬레브, 10)테ꕛ, 11)셰밭, 12)아달이고, 13)베아달은 윤달이다. 달이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날이 초하루가 되고 완전히 그믐달로 변할 때가 그 달의 마지막 날이 되기 때문에, 1년의 기준이 되는 해의 주기와 맞추기 위하여 윤달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 역법에 따른 한 해는 니싼월(봄)에서 시작하여 다시 니싼월로 돌아오는 주기를 취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서 1년중 농업의 주기는 제7월, 곧 티슈리월(그레고리력의 9-10월에 해당)에 시작하여 그 다음해 티슈리월에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주요한 농산품인 보리와 밀과 포도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자면, 티슈리월에 시작되는 밭갈기와 (보리 및 밀)씨뿌리기, 니싼월에서 씨반월 사이에 걸친 보리와 밀 수확, 티슈리월에 끝나는 포리 수확의 순서가 된다. 레25:3을 따라, '6년 동안 파종하며 6년 동안 과수원을 관리할' 경우 제6년에 수고한 결과는 제7년 니싼월에 시작하여 티슈리월 이전까지 거두게 된다. 따라서 땅은 안식년 첫 달(니싼월)부터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7월(티슈리월)부터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다음으로 희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희년 산정에 관하여 레25:8-9은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라고 밝히고 있다. 이 구절은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희년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레25:10-11("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의 '제 오십년' 때문에 희년을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아니라, 그 다음 해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럴 경우 희년이 끼는 주기는 7년 동안에 안식년(희년도 일종의 안식년임)이 두 번씩 발생할 수 있으므로 농업상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레25:10-11의 '제 오십년'은 한 희년을 '제1년'으로 계산할 경우 다음 희년이 '제50년'이 되므로 얼마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로 인정하는 우리 한국인들의 나이 계산법과 비교해보면 이런 계산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희년을 매 '일곱번 째의 안식년'과 동일한 때로 이해할 때, 희년과 관련된 많은 의문점들이 사라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농업주기로 인하여 안식년이 사실상 제7년 제7월(티슈리월)에 시작하는 것처럼, 희년 역시 '일곱번 째의 안식년' 제7월, 곧 티슈리월 10일에 나팔을 크게 분 후 시작하게 된다. 구약 성경 난제(I)-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Old Testament Difficult Passages I
-Genesis, Exodus, Leviticus-
저자: 김경래 Author: Kyungrae Kim, Ph.D.
펴낸 곳: 도서출판 대장간 Publisher: Daejanggan Press (Anyang, Korea)
초판일:1998년 8월 25일
목 차 Contents
머리글
제1부. 창세기 난제
창세기 1장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 (창1:1-31)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 (창1:26; 3:22; 11:7)
온 지표면을 적신 큰 물덩어리 (창2:6)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2:7)
선과 악을 안다는 것 (창2:9, 17; 3:5, 22)
여자의 후손과 뱀 (창3:15)
생명나무와 영생 (창3:22-24)
가인의 출생에 대하여 (창4:1)
창4:7의 올바른 번역과 이해 (창4:7)
우리 들로 나가자 (창4:8)
야웨의 이름을 부르다 (창4:26)
하나님의 아들들 (창6:1-4)
노아 방주에 들어간 동물의 수 (창6-7장)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9:18; 10:21)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 (창5:3-32; 11:10-32)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언제 죽었나? (창11:32)
이스마엘의 운명에 관한 예고 (창16:12)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에서에 대한 예언 (창27:39-40)
야곱과 천사의 씨름 (창32:24-30)
요셉의 노예 정책 (창47:21)
세겜을 한몫 더 받은 요셉 (창48:22)
요셉에 관한 예언 (창49:22-26)
제2부. 출애굽기 난제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1:1-5)
모세의 미디안 생활과 이집트 왕의 죽음 (출2:23)
하나님의 이름 '야웨' (출3:14)
이집트 탈출을 위한 광야 사흘길 (출3:18; 5:1-3; 8:27)
피 남편 모세 (출4:24-26)
유월절의 제정과 그 의미 (출12:1-14)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시간 (출12:6)
이스라엘 자손의 이집트 체류기간 (출12:40-41)
만나의 정체 (출16:13-36)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가축으로 인한 농작물 손상 (출22:5)
염소 새끼와 어미젖 (출23:19)
우림과 둠밈 (출28:30)
하나님의 약속과 그 위기 (출애굽기 32장)
야웨의 책 (출32:32-33)
모세의 또 다른 회막? (출33:7-11)
이름으로 아는 것 (출33:12, 17)
제3부. 레위기 난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레위기 1-3장)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1:1-17)
제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제사장의 몫 (레1:9, 13 등)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레4:1-6:7)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레10:1-2)
성경의 '문둥병' (레위기 13-14장)
유출에 대한 규례 (레위기 15장)
이스라엘 자손이 섬기던 수염소 (레17:7)
오멜 절기와 부활 (레23:9-14)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십일조의 의미 (레27:30-33)
참고 문헌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세기 2:7)
"야웨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우리말 개역 성경에 등장하는 이 창2:7에 대한 번역문은 일반 독자들이나 심지어는 설교자들에게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말하는 이 오해란 앞서 창세기 1장에서 다른 동물들을 단순히 '생물'이라고 부른데 반하여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생령'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우리말에 있어서도 '생령'(生靈)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생령'(生靈)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네페쉬 하야'인데, 이는 이미 창1:20, 21, 24, 30에서도 나오는 표현으로서 개역 성경은 그곳들에서 '생물'이나(1:20, 21, 24) 또는 단순히 '생명'으로(1:30)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네페쉬 하야'란 표현은 또 창2:19; 9:10, 12, 15, 16에도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인간 외의 동물계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다른 동물과 동일한 '네페쉬 하야'인 우리 인간을 달리 표현하고자 만들어낸 '생령'이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에게 그릇된 생각을 조장할 수 있는 것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번역문이라고 하겠다. 이 경우 오히려 표준새번역의 '생명체'라는 번역이 훨씬 더 적합한 번역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라는 표현은 인간과 다른 동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페쉬 하야'라고 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2:7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그 안의 '생령'이라는 번역문을 버리고, '살아있는 존재' 내지는 '생명체'라는 번역문을 가지고 읽을 때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생명체'가 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호흡'이 필요한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칠십인역에서는 창2:7의 '네페쉬 하야'를 다른 경우에서처럼, (프쉬케 소싸)로 번역하였다. 헬라어에서 이것은 인간 뿐 아니라 인간 외 모든 동물계까지 가리킬 수 있는 표현이다. 칠십인역에서 '네페쉬 하야'의 '네페쉬'를 보통 '영(靈)'을 뜻하는 (프뉴마)로 번역하지 않고 그것과 구분되는 (프쉬케)로 번역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번역을 적절히 활용하여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고전15:45).
개역 성경은 고전15:45을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읽고 있다. 여기서 '산 영'과 '살려주는 영'은 각각 (프쉬케 소싸)와 (프뉴마 소오포이운)을 번역한 문구이다. 이 인용문구의 출처인 창2:7에서 이미 '생령'이라고 번역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결국 그 연속성을 어기지 못하고 (프쉬케)와 (프뉴마)의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다 '영(靈)'으로 번역한 듯하다. 바울이 의도한 바를 살리려면 여기서도 창2:7과 마찬가지로 '산 영' 대신 '살아있는 존재'나 '생명체'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우리 들로 나가자 (창세기 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이 구절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것은 히브리어 원문상의 난해구절도 아니요, 번역상의 문제도 아니다. 다만 사건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간단하여서 무언가 빠진 느낌을 줄뿐이다. 창4:8은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라는 문구로 시작되기 때문에 바로 이어서 가인이 아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록했을 법하지만, 그런 내용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사마리아 오경과 고대 주요 역본들은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다음에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이러한 사본학적 증거들 때문에 최초의 원본에 이 문구가 들어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우리말 역본들중 개역 성경이 아무런 난외주도 없이 맛소라 사본의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옮긴데 반하여,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본문 가운데 이 문구를 끼워놓고 난외주에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한편 이 구절에 대한 한 가지 흥미 있는 주석적 요소는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4:8>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말하였다: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 그들 둘이 들로 나갔을 때에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기에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는데,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지지 않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있구나. 그래서 네 제물은 열납되고 내 제물은 열납되지 않았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고,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진다. 그리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없다. 그러나 내 행실의 열매가 네 것보다 더 좋았기 때문에 내 제물이 네 것을 제치고 열납된 것이다."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없다.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악인에게 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있으며,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고, 악인에게는 벌이 있다." 이 일 때문에 그들은 빈 들판에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마침내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덮쳤다. 그는 돌로 동생의 이마를 쳐서 그를 죽여버렸다.
여기 우리말로 번역하여 인용된 타르굼 내용은 결코 창4:8의 원본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아마도 과거 유대인 사이에 유행하였을 주석적 요소를 반영할 뿐이다. 길게 첨가된 주석적 내용 중에는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도 포함되어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에서도 다시 이 문구가 원래의 히브리어 본문에서 번역된 것인지, 아니면 번역자가 주석적인 요소중 일부분으로서 첨가한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이런 경우에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본문 중에는 이 문구를 넣지 않되, 난외주를 이용하여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된 고대 사본이나 역본들이 있음을 언급해주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물론 예루살렘 타르굼의 긴 주석적 내용을 우리말 역본에 소개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아들들 (창세기 6:1-4)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야웨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神)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6:1-4).
창6:1-4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학자들간에 쉽게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신학계에 구구한 해석사를 남긴 성경 난제중의 난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해 내려오는 여러 해석중 어느 하나가 분명히 맞는 해석이라면, 이 구절은 하나의 난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많은 성경학자들의 그릇된 신학적 사고방식을 반증해주는 사실이 아닐까? 필자는 여러가지 견해를 이 지면에 소개하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옹호 내지는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류의 서적이 이미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히려 본문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통하여 필자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설명하고자 한다. 다른 훌륭한 학자들의 해석을 재현하는 내용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국내의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이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우선 1절의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대하게 된다. 이 낱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하아담'은 정관사 '하'와 명사 '아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 끝에서 '하아담'을 복수형 대명사 어미로 받는 것으로 보아('그들에게서'; 히브리어로 '라헴'), 이것은 고유명사로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보통명사로서 아담으로 시작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딸들'과 역시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2, 4절의 '사람의 딸들'('브노트 하아담')은 인류, 곧 인간 사회에서 태어나는 '딸들'을 가리킴이 너무나 분명하다.
2절과 4절에는 이들 '사람의 딸들'의 상대역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브네 하엘로힘')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여기 말고 욥기에 또 다시 등장한다(욥1:6; 2:1; 38:7). 욥기에서 우리가 문맥을 통하여 분명히 아는 대로, 이 표현은 우리 인간이 아닌 '하늘의 영적인 존재', 소위 '천사들'을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서 단3:25에 아람어로 '바르 엘라힌'이 있는데, 이는 '신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역시 영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시29:1; 89:6(히브리어 성경에서는 89:7)에 나오는 '브네 엘림'은 직역하면 '신들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이 표현 역시 천사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것이 만일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에 관한 언급이라면, 이에 대하여 조물주께서 무언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시고(3절) 또 이러한 혼인 관계로 유별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은(4절)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사 경건한 가문의 아들과 불경건한 집안의 여자, 또는 귀족층 남자와 서민층 여자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결과적 사실을 만족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이처럼 창6:1-4의 본문에서 이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간 세상의 남자를 가리키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으므로 자연히 누군가 '인간 사회' 밖의 존재이어야만 하겠고, 아울러 앞서 제시한 바, 욥기와 기타 유사 문구의 도움을 얻어 얼마든지 '천사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표현 자체와 전체적 문맥을 통하여 이런 식의 유추는 가능하지만, 다만 이러한 이해에 대한 신학적 걸림돌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22:30; 막12:25) 때문에 학자들은 선뜻 상기한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눅20:34-36에서는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좀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이제는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의 사람들을 가리켜 "천사와 같다"고 하신 것은 그들과 천사들이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 밝히 보는대로,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휘오이 테우', ՕՉՏՉ ՈՅՏՕ)이라고 부른 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와 같게 변한 그들의 새로운 신분 때문이 아닐까.
다시 창세기 6장으로 돌아와, 칠십인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에 대하여 '하나님의 천사들'('호이 앙겔로이 투 테우', ՏՉ ՁՃՃՅՋՏՉ ՔՏՕ ՈՅՏՕ)이라는 번역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은 칠십인역 말고도 외경 에녹서(6:1-6)와 요세푸스(유대인 고대사 1권 3장 1절) 등을 통하여도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신약 성경의 몇몇 구절도 창6:1-4의 해석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먼저 벧후2:4-5에서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신' 일과(4절)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홍수로 인간 세상을 멸하신 일'을(5절)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벧전3:19-20의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는 기록 역시 이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구절(벧전3:19-20)을 '그리스도께서 고난 즉 죽음을 부활로 이기신 후, 전에 타락하여서 옥에 갇혀 있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신 것'이라고 본다. 옥에 갇힌 이들 천사들은 벧후2:4("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말고, 유다서 6절("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벧전3:19-20과 벧후2:4-5에서 이들 천사들의 투옥과 홍수 심판 기사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이들 '타락한 천사'라고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특별히 유다서 6절에서 천사 타락을 언급한 후 바로 이어 나오는 7절("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을 통하여, 우리는 천사 타락이 성적인 범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신약 성경의 몇몇 기록은 창6:1-4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해석을 반증하기 보다는 오히려 변증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 영적 존재인 천사가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 다만 우리는 소돔 사람들이 롯을 찾아온 두 천사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기록을 통하여(창19:5; 벧후2:6-8) 이런 가능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따름이다. 천사와 인간의 성적 결합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로 간주되어,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창6:3은 이런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서 하나님이 취하시고자 하는 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무서운 죄악은 비록 악한 천사들로부터 시작되긴 하였으나, 인간('하아담')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 그 안에 죄의 결과를 뿌려놓았기 때문에, 인간 역시 그 죄값을 모면할 수 없게 된다.
창6:3에서 야웨께서 말씀하시는 바 '나의 신(ࠉࠇࠅ࠘)' 곧 '하나님의 영(靈)'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하나님의 생명의 숨(生氣)'(창2:7 참조)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서 보통 '영(靈)'으로 번역되는 '루둽'과 '숨'으로 번역되는 '네샤마'는 동의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사람의 딸들이 악한 천사들의 무질서한 행위에 이용된데 대하여 분노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제동을 거신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영은 육체인 사람 속에 영원히 거하지 아니할 것이다. 여기서 '영원히'란 말은 '레올람'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을 번역한 것으로서, '영원히'라는 뜻도 되지만 '오래도록'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창6:3의 "120년"은 아마도 하나님이 새로 정하신 인간의 수명을 가리킬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대략 900세 정도로 '오래도록'(='레올람') 수명을 누려 왔었다 (창세기 5장의 족보 참조).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 안으로 단축시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타락한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합하여 낳은 자식들은 평범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창6:4에서 히브리어를 소리나는 그대로 음역하여 '네필림'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용사요, 고대에 유명한 자들'이었다. '네필림'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칠십인역('호이 기간테스')을 따라 '거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필림'은 이곳 말고 유일하게 민13:33("거기서 또 네필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에만 등장한다. 민13:33의 상반절을 직역하면,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네필림 중에서 아낙 자손 네필림을 보았다"가 된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이들이 보았다는 아낙 자손은 헤브론에 거하던 세 사람으로서,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라고 그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민13:22, "또 남방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이집트 소안보다 칠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천사와 인간 사이에 특별한 거인이 태어나, 고대에 '용사로서 유명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창6:4의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라는 문구는 이 일이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비정상적인 결합이 언제까지 지속되었을까?' 하는 물음에는 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만일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으로 인하여 이런 일이 중단된 것이라면 모세, 여호수아 시대의 '네필림'(민13:33)은 이런 결합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거인'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창6:1-4에 기록된 사건과 홍수 심판의 연관성이다. 창6:5("야웨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에서는 인간의 죄악이 언급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홍수 심판이 있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서 언급되었다. 창6:1-4에 나오는 바, 타락한 천사의 행위에 대한 기록은 그 위치로 보아, 역시 홍수 심판의 원인 중 하나로서 묘사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들도 입증해주고 있다.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세기 9:18; 10:21)
일반적으로 노아의 세 아들은 셈, 함, 야벳의 순으로 일컬어진다 (창5:32; 6:10; 7:13; 9:18; 10:1; 대상1:4). 대부분의 성경 독자들은 이러한 배열로 인하여 그들의 나이 역시 같은 순서대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노아에게 셈, 함, 야벳의 순서로 아들들이 태어난 것인가? 우리는 성경 본문을 통하여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어 번역본들에 나타나는 성경 오역이 바로 그것이다.
개역 성경은 창5:32을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조그만 글자로 인쇄된 "된 후에"는 원문에 없으므로 문맥을 고려하여 번역문에 삽입한 것이다. 표준새번역 역시 이를 같은 뜻의 "노아는 오백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창5:32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노아가 오백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이다. 이 문장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에 세 쌍둥이가 태어남, 2) 이들 세 아들이 노아가 오백세 되기까지 차례대로 태어남, 3)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 첫 아들이 태어나고 그 다음에 차례대로 다른 두 아들도 태어남. 히브리어 어법상 앞의 두 가지 보다는 세번째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역과 표준새번역 둘다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순서가 꼭 나이에 따른 순서여야 할 이유도 증거도 없다.
다음으로 고찰해야 하는 구절은 창10:21이다. 우선 우리말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개역은 이를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라고 번역함으로써, 개역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번역문은 과연 히브리어 원문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까? 여기서 "야벳의 형"이라고 번역된 문제의 구절을 히브리어 원문 및 고대 번역문인 칠십인역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 두 가지면 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충분하다고 본다.
창10:21의 이 문제의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본문은 ('둺히 예쵛 하가돌')이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와 모음 부호를 무시할 경우 이 히브리어 구절은 두 가지의 직역이 가능하다: 1)'야벳의 큰 형제(brother)', 2)'큰 (자) 야벳의 형제'. 다시 말해서 '크다'('하가돌')라고 하는 형용사가 '야벳'과 '형제' 중 어느 것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이 문구의 해석이 달라진다. '야벳'을 수식할 경우 야벳이 형이 되고, '형제'를 수식하면 셈이 형이 된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 부호의 기능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구두점 역할일 것이다. 맛소라 성경의 엑센트는 여기서 '크다'가 '야벳'을 수식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맛소라 학자들은 야벳을 셈의 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칠십인역 역시 맛소라 학자들의 견해를 지지해준다. 이 구절에 대한 칠십인역의 번역문(ՁՄՅՋՖٍ ԩՁՖՅՈ ՔՏՕ ՌՅՉՆՏՍՏՒ)에 있어서 명사 '야벳'과 형용사 '크다'는 동일한 2격(소유격)을 취하고, '형제'는 3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큰 자'는 셈이 아니라 야벳인 것이다.
셈이 야벳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은 창11:10을 통하여서도 찾아볼 수 있다.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라는 이 기술에 의하면, 셈이 일백세가 된 것은 홍수 후 이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이레 후 곧 2월 17일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40일을 내렸으며 (창7:9-12), 그들이 방주 밖으로 나온 것은 노아가 601세 되던 해 2월 27일이었으니 (창8:14-19), 노아 홍수는 햇수로 볼 때 2년이나 지속된 장기간의 대사건이었다. '홍수 후 2년'('슈나타임 둺하르 하마불')이란 히브리어 문구는 분명히 홍수 사건이 완전히 끝난 후 또 두 해가 흐른 뒤의 일임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에게 노아 나이 600세와 601세의 두 해는 홍수해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그후 두 해(노아 나이 602세와 603세)가 지나, 노아의 나이가 대략 604세가 되던 해에 셈은 나이 100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셈은 노아가 504세가 되던 해에 태어난 셈이 된다. 이상 고찰한 바를 창5:32("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과 묶어서 볼 때, 셈은 결코 노아의 맏아들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증거로서 창9:24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창9:20-27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있을 때 그 아들들이 취한 행동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내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 중에서 분명치 아니한 점은 도대체 함의 아들 가나안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많은 독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저주를 받은 것은 함이 아니요 그의 아들인 가나안이다.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15:16, 19-21 등 참조). 이 저주를 항간에 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흑인 전체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창9:24에 기록되기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하였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작은'('하카탄')을 위하여 '둘째'라는 각주를 덧붙임으로써, 이 아들이 다름 아닌 '함'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함에 대한 저주가 없음을 고려할 때, 여기서 말하는 '그 작은 아들'은 아마도 함이 아니라 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경우, 이 작은 아들이 '행한 일'은 무슨 저주받을(25, 27하반절) 악한 행실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축복을 받아 마땅한(26-27상반절) 아름다운 행실을 가리키게 된다.
이상으로 우리는 야벳이 셈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찰해 보았다. 노아의 세 아들중 다만 함의 연령상의 위치가 확실치가 않다. 창9:24의 '작다'('하카탄')나 10:21의 '크다'('하가돌')라는 형용사가 반드시 최상급으로서 '막내'나 '맏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히브리어 어법을 따라서 최상급으로 이해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 세 아들의 가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야벳(2-5절), 함(6-20절), 셈(21-31절)의 순서로 열거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나이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상의 모든 고찰을 종합하여 가장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야벳은 노아 500세 되던 해에, 함은 노아 502세 되던 해에, 그리고 셈은 노아 504세 되던 해에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불행하게도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번역가와 성경 해석가들은 노아의 세 아들이 셈, 함, 야벳의 차례로 태어났다고 믿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창10:21 본문에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 현대 역본이 그런 것처럼,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맛소라 성경의 히브리어 본문과 고대 역본인 칠십인역을 따를 경우,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철저히 금하시고 있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과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아무리 시험이라고 하지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의혹 때문에 과거 유대인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갖가지 해석을 시도하였다. 여기서는 먼저 고대 유대인들의 해석중 하나를 예루살렘 타르굼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한다.
'타르굼'은 통일적인 하나의 성경 역본이 아니다. 그 시대도 다르거니와 역자 또한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다양한 종류의 '타르구밈'(타르굼의 복수형) 전승이 전해진다. 모세 오경만의 아람어 역본을 두고 볼 때, 온켈로스의 타르굼은 비교적 문자적 번역을 시도한데 반하여,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은 온갖 주석적 요소로 가득차 있어서 주석가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타르굼이라고 하겠다. 이 예루살렘 타르굼은 그 최종 편집이 상당히 늦은 시기에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그 안에 보존된 주석적 요소들중 상당한 부분이 예수님 이전부터 전해진 것들로 추정되기에 이러한 타르굼의 전승은 예수님 당시 구약 성경에 대한 유대인들의 해석을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 연구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창22:1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상당히 흥미있는 주석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우선 그 본문을 우리말로 옮겨 보기로 하자.
이 일들 후에 이삭과 이스마엘이 다투었다. 이스마엘이 말하였다: "내가 장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자 이삭이 말하였다: "내가 아버지 부인 사라의 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너는 내 모친의 여종인 하갈의 자식일 뿐이다." 이스마엘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나는 열 세 살에 할례를 받았으니 너보다 더 의롭다. 만일 내게 거절할 뜻이 있었더라면 나는 얼마든지 할례를 받지 않았었을 것이다." 이삭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나이 지금 서른 일곱이 아니냐. 만일 거룩하시고 찬양받으실 분이 나의 모든 지체를 요구하신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겠다." 그 즉시로 이 말들이 우주의 주께 들려졌고, 또한 그 즉시로 주의 말씀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위에서 보는대로 예루살렘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스마엘이 이삭의 비위를 건드리는 말로 그에게 도전해오자 이삭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적 태도를 주저함없이 발설한다. 자신의 모든 지체라도 주저하지 않고 바치겠다는 이삭의 선언이 결국 이러한 시험의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 이 타르굼의 설명이다. 특별히 아브라함이 시험받을 때 이삭의 나이는 37세로 되어 있다. 이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일을 사라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라는 127세에 죽었으므로(창23:1), 이때 이삭의 나이가 37세가 되는 점에 착안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이삭의 나이를 37세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22:1 본문은 상당히 흥미있는 해석을 보여주긴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은 설명일까 하는 데에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는 고대 유대인 랍비들의 지나친 추측에서 나온 해석이 아닌가 한다. 이와는 달리 요세푸스의 설명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더 설득력이 있다. 요세푸스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시험해 보고자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이때 이삭의 나이를 25세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이때 이삭의 나이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이나 요세푸스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번제 나무를 지우고 산을 오르게 했다는 점으로(창22:6) 미루어 이삭이 결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막 치려하는 순간에 이삭의 반응이 어떠하였을까? 고대 유대인들은 이에 대하여도 관심이 컸다. 먼저 예루살렘 타르굼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다음은 창22:10에 대한 예루살렘 타르굼의 본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손을 내밀어 칼을 집어서 자기 아들을 잡으려 하였다. 이삭이 자기 아버지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영혼이 고통 중에 분투하지 않도록 저를 꼭 붙잡아 매세요. 그래야만 아버지의 제물에 흠이 없겠고 저도 멸망의 구덩이로 던져지지 않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눈은 이삭의 눈을 쳐다보았으나, 이삭의 눈은 저 높이 천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삭은 그들을 볼 수 있었으나, 아브라함은 보지 못하였다. 높은 곳에서 천사들이 화답하였다: "우리 가서 땅 위의 저 두 별난 사람을 보자. 하나는 잡는 자요, 다른 하나는 잡히는구나. 잡는 자는 주저함이 없고, 잡히는 자는 그 목을 길게 내미는구나."
예루살렘 타르굼은 이삭의 순종과 신앙심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세푸스 또한 이에 뒤질세라 이때의 상황을 아브라함과 이삭 부자(父子) 사이의 눈물겨운 대화 내용을 통하여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요세푸스의 경우에도 이삭의 믿음과 순종이 돋보인다.
비록 이런 기록들이 추측에 불과하기는 하겠지만, 이때 이삭의 순종과 믿음에 대하여는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직 40이 되지 않은 젊은 나이의 이삭은 원하기만 하였다면 100세가 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고대 유대인들의 몇몇 성경 해석을 통하여 이삭의 믿음이 돋보이게 묘사된 데 반하여, 신약성경은 창세기 22장과 마찬가지로 이삭 보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7-19)고 하였고, 야고보 역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1)고 역설하고 있다.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애굽기 1:1-5)
야곱과 더불어 이집트에 내려간 야곱 가문 사람들의 숫자는 칠십인역에서 다섯 명이나 더 불어난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의 발언은 칠십인역과 일치한다 (행7:14):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그럼 먼저 문제의 출1:5의 맛소라 성경 및 칠십인역 본문을 직역하여 아래에 옮겨놓기로 하자. 문맥을 볼 수 있도록 맛소라 성경의 1:5 앞에 1:1-4의 내용을 괄호로 묶어 기입해둔다.
(맛소라 성경)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이집트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베냐민, 단, 납달리, 갓, 아셀.)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명인데,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칠십인역)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야곱에게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오인이었다."
출1:5에 있어서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차이점이란 아주 간단하다. 첫째로 두 구절의 순서가 서로 바뀌었고 (칠십인역에서는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가 절의 맨 앞에 나온다), 둘째 인원수 면에서 맛소라 성경에서는 '70명', 칠십인역에서는 '75명'으로 서로 다르다. 여기서 사마리아 오경은 맛소라 성경과 일치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창46:8-27에 나오는 보다 상세한 목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도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을 비교해보기로 하자. 창46:8-27은 내용상 1)레아 소생(8-15절), 2)실바 소생(16-19절), 3)라헬 소생(20-22절), 4)빌하 소생(23-25절), 5)종합(26-27절)으로 쉽게 나뉜다. 8절에서 19절에 이르기까지 표기상의 미미한 차이점을 제하고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은 서로 일치한다. 23-25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라헬 소생'(20-22절)의 명단에 있어서 칠십인역은 맛소라 성경과 차이점을 보이며, 따라서 '종합'(26-27절)에 있어서도 인원상의 차이점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20-22절 나란히 배열해보기로 하자.
맛 소 라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과 아릇이니,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사명이요. |
칠십인역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므낫세의 시리아 여자 첩이 그에게 낳은 아들들은 마길이요, 마길은 길르앗을 낳았다. 므낫세의 동생 에브라임의 아들들은 수델라와 다한이요, 수델라의 아들들은 에뎀이다.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이요, 벨라의 아들들은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이요, 게라는 아릇을 낳았다.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팔명이요. |
위의 표에서 보듯이 칠십인역에는 몇몇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들 삽입문에 대한 정보는 민26:35-36; 대상7:14; 8:3-5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목적은 아마도 창50:22-23("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이집트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의 영향을 받아, 요셉의 자손을 한 두 대(代) 더 보여주고 아울러 부자 관계를 정확하게 밝히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칠십인역에는 다섯 사람의 이름(마길, 길르앗, 수델라, 다한, 에뎀)이 더 들어 있지만 마지막에 '18명'으로 합을 낸 문제점이 보이기도 한다.
26절에 있어서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은 완전히 일치한다: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 륙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이다." 이 숫자에는 야곱 자신, 요셉, 및 요셉의 두 아들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로 다음의 27절에서는 20절에서의 차이점과 관련하여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 사이에 차이점을 보인다.
(맛소라 성경)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명이었더라."
(칠십인역) "이집트 땅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일곱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오명이었더라."
이상을 통하여 칠십인역의 '66명'을 설명하자면, 33(레아의 소생과 야곱을 합한 수) - 1(야곱) + 16(실바의 소생) + 11(베냐민과 그의 자손) + 7(빌하의 소생) = 66이 된다. 그리고 '75명'은 66 + 1(요셉) + 7(요셉의 자손) + 1(야곱)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칠십인역 22절의 '18명'은 어쩔 수 없이 라헬의 소생 중 요셉을 제외한 숫자로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수는 신10:22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이 절의 경우 칠십인역도 '75명'이 아닌 '70명'으로 읽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창세기 46장과 출1:5에 나타나는 사본상 차이점은 칠십인역의 의도적 편집 작업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맛소라 성경이 원래의 본문을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맛소라 성경을 통해볼 때, 창46:8-27의 기록은 몇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야곱의 아내들을 비롯하여 모든 며느리나 손주 며느리 등 여자들이 숫자 계산에 들어오지 못한 반면에(26절 참조), 유일하게 레아의 딸 디나와(15절) 아셀의 딸 세라(17절)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다른 말로 가정을 이루지 아니하고 지낸 것이 아닌가 한다. 디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창세기 34장 참조).
둘째, 레아 소생을 계수함에 있어서 야곱 자신을 포함시켜 그 수는 모두 '33명'에 이른다(15절).
세째,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할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자손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연대를 계산해 볼 경우,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베레스에게 이집트로의 이주를 즈음하여 두 아들이(12절) 이미 생겨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이 무렵 베냐민에게(민26:38-40; 대상7:6-7에 의거, '손자를 포함하여') 열 명의 아들이 생겨났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이들은 틀림없이 이집트로의 이주 후에 태어난 자손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70명'(또는 '75명')은 이집트에 내려간 실제의 정확한 인원이라기 보다는 이집트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민족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 야곱의 자손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출1:5)이라는 문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이러한 히브리적 사고 방식의 타당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히7:9-10 참조: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피 남편 모세 (출애굽기 4:24-26)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야웨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출4:24-26).
출4:24-26의 난점은 히브리어 문장의 번역에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사본학적인 문제도 아니다. 짧으면서도 전후 문맥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간단한 문단은 그 역사적 상황과 그에 대한 배경을 설명함에 있어서 많은 이론들을 만들게 한 성경 난제중의 하나이다.
야웨께서 왜 그리고 어떻게 모세를 죽이려 하셨나? 이러한 일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문맥을 통해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너무나 돌연적이고 이상스럽기까지 하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후, 이미 장인에게 요청하여 그로부터 허락도 받고(출4:18), 또 다시 야웨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는(출4:19), 아내와 두 아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는 중이 아니던가(출4:20)?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출4:22-23): "너는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야웨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이러한 일 다음에 기록된 내용이 바로 본문의 이상한 사건이다.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몇 가지 분명한 사실로는: 1)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심, 2)십보라가 아들 (아마도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할례를 행함, 3)이때야 비로소 모세가 화를 면함, 4)이 일로 십보라가 모세를 '피 남편'이라고 부름 등을 들 수 있다.
모세는 이때까지 자기 '아들'(20절의 복수형과는 달리 여기 25절에서는 단수형으로 언급됨)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무슨 일로 왜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이제까지 할례를 행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물론 첫째인 게르솜의 경우에도(출2:22 참조) 그가 과연 할례를 받았는지에 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모세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의 아내 십보라는 그 이유가 아들의 할례에 있음을 깨닫고는 즉시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로 실제로 모세는 죽음을 면하게 된다.
이때 십보라가 모세를 향하여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고 내뱉는데, 이 말은 한편으로는 일종의 분노와 자포자기가 함축된 말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의 특별한 사명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과 확인으로 들린다.
본래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셔서 그의 후손이 대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언약이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17:9-11). 이 명령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14)는 준엄한 경고로 끝을 맺는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에게만 해당하는 할례 예식은 틀림없이 남자들에 의하여 집행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출4:24-26 본문에서 모세가 아닌 십보라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는 사실 역시 특이하다. 24절의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라는 표현은 아마도 모세가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든가, 아니면 그가 무슨 특별한 위험에 빠져있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순전히 하나님과만 연관시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모세는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 수 없는 상황이었겠고, 자연히 그의 아내인 십보라가 이 일을 집행하여야만 했을 것이다.
아울러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은 모세보다는 십보라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모세는 한때 특별한 사명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지시에 대하여 자기는 부족하다면서 머뭇머뭇한 적이 있다(출3:11; 4:10, 13 참조). 이러한 모세의 태도로 인하여 하나님이 모세에게 노를 발하신 적은 있으나(출4:14 참조), 이런 일로 그를 죽이려 하신 것 같지는 않다. 더군다나 출4:24-26 본문에서는 모세의 위기에 대하여 할례가 주된 원인임을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에서는 십보라에 대하여 별 기록을 담고 있지 않다. 아마도 십보라로서는 그녀의 남편 모세에게 부여된 특별한 사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이행한다는 것이 모세 본인 못지 않게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멀리 이집트에서부터 '굴러 온 복'을 어찌 하루 아침에 놓칠 수 있으랴. 두 아들과 함께 남편을 따라 낮선 땅 이집트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너무나 처절하고 무거웠던 것이 아닐까? 남편이 구해야 하는 백성은 자기의 민족이 아니요 남편의 민족일 뿐이요, 이집트는 자기의 사랑하는 남편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 아니던가.
성경은 이집트로 향하는 모세의 가정, 아니 모세와 그의 아내 사이에 교차되는 감정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이처럼 유추해보는 수 밖에 없다. 두 아들은 그만 두고라도 아내 십보라의 마음 속에 있는 온갖 감정과 생각은 모세의 마음을 충분히 괴롭히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 모세와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들의 두 아들은 - 이집트로 향한다.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준엄하고도 분명한 명령 때문에.
이때 길의 숙소에서 일어난 사건은 모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십보라에게도 하나님이 내리신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준엄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로서 십보라는 자기 남편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할례의 집행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기 남편, 더 나아가서는 자기 남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중요성과 엄숙함을 재확인한다. 바로 이 언약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이 '사지'(死地)로 명령을 받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십보라는 이 냉정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 자기 아들의 양피를 베어 피를 냄으로써.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는 그녀의 외침은 그녀의 이러한 심경을 잘 대변해준다고 하겠다.
'피와 죽음'이란 관계를 두고 볼 때, 이 사건은 성경의 다른 몇몇 기록과도 연관성을 가진다. 우선 앞서 언급한대로 바로 앞의 출4:22-23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 재앙은 출애굽기 12장에 묘사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죽음을 면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간접적이긴 하지만 모세의 아들의 피가 모세의 개인적인 재앙을 면하게 하였다. 모세의 둘째 아들 엘리에셀의 이름을 설명하는 구절에서도 또한 다소나마 이런 맥락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파라오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출18:4).
출4:24-26에 기록된 사건으로 인하여 모세는 십보라와 두 아들을 장인에게로 돌려보내고 홀로 이집트로 떠난 것 같다. 그래서 출18:2-6에서 우리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 보내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 두 아들을 데렸으니.....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 아내로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 그가 모세에게 전언하되 그대의 장인 나 이드로가 그대의 아내와 그와 함께한 그 두 아들로 더불어 그대에게 왔노라"라는 기록을 보게 된다. 아마도 모세는 이 일을 통하여, 자기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신 하나님의 엄정(嚴正)하심과 그의 분명하신 목적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고는, 다시는 거역하거나 주저함이 없이 철저히 순종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인간 가운데 하나님의 강림(降臨)이 있다는 사실은 피조계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관심 내지는 간섭을 의미한다. 사실상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와 더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의 역사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신다. 이러한 간섭은 인간편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간을 지으신 이후로 인간을 그대로 두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강림 또는 임재(유대인들은 이를 가리켜 전문 용어로 '슈키나' 라고 한다)에 관하여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다. 구약 성경 중에서 하나님의 강림에 관한 기록중 가장 중요한 곳을 찾으라면 역시 출애굽기 19장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19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강림은 어느 개인이나 소수의 몇몇 사람 또는 작은 무리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목격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임하였다.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도 구름을 동반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 놀라운 광경 앞에서 두려움으로 떨며 모세의 중재를 요구하였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나타나신 것은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게끔 하는 목적이 있었다(출19:9; 20:20).
이제 필자가 고찰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강림에 관하여 출애굽기 19장에 기록한 사건이 시간적으로 언제 있었던 일이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출19:1)는 우리말 개역성경을 읽을 때, 정확하게 언제를 가리키는지 분명치가 않다. 여기 '제 삼월'중 '월(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데쉬'는 본래 '새롭다'라는 뜻에서 파생하여 '매월 달이 새로 뜨기 시작하는 월삭(月朔)'(new moon)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가 '월삭'을 뜻하는 경우로는 민29:6; 삼상20:5, 18, 24, 34; 왕하4:23; 사1:13; 겔46:1, 6; 암8:5; 시81:4 등을 들 수 있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총 281회 출현하는 이 단어는 그중 22회의 경우만 '월삭'의 뜻으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모두 '달'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그 때에'로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다시 직역하면 '이 날에'가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호데쉬'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월삭'의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출19:1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광야에 도착하여 시내산 앞에 장막을 친 것은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계산하여 제3월이 되는 바로 그날'이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이러한 해석을 근거로 하여 출19:1에 아예 '초하룻날'이라는 문구를 첨가하여, 각각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표준새번역)와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공동번역)로 번역하였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간'(출19:3) 날은 아마도 이제까지 설명한 '제3월 1일'이거나, 아니면 그 다음날일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말씀을 들은(출19:4-6) 모세는 이를 백성의 장로들에게 전해주고는(출19:7) 다시 백성의 반응을 하나님께 회보한다(출19:8). 출19:4-8에 기록된 일들이 모두 마치기까지는 아마도 하루 이틀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모세로부터 회보를 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앞에서 영광중에 나타나실 계획을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야웨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야웨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출19:10-11). 마침내 하나님이 말씀하신 "제3일 아침에 산 위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있었고, 심히 큰 나팔소리도 울려퍼졌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동반한 이 무서운 광경으로 인하여 "진중의 모든 백성은 다 두려워 떨었다" (출19:16).
첫째 달인 아빕월(출12:2 참조) 14일 저녁에 어린 양을 잡아 먹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출12:6-9 참조)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 그날 밤(아마도 제1월 15일 새벽, 출12:29-42 참조) 이집트를 떠났다. 성경의 역법을 따라 계산할 경우,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떠난 날(제1월 15일)로부터 하나님이 시내산에 나타나신 날(대략 제3월 3~6일 사이)까지는 대략 50일이 된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신 날을 오순절로 믿고 있다. 사실 이러한 계산은 거의 틀림없이 맞는 것이다. 오순절은 봄에 첫 곡식을 수확하여 첫 이삭 한 단을 흔들어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레23:15-16). 문제는 첫 이삭 한 단을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이 언제냐 하는 것인데, 레23:11, 15에 '안식일 이튿날'이라고 한 이 날은, 그 문맥상 유월절/무교절과 나란히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계산이 맞다면 오순절은 무교절중에 들어있는 일요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무교절중에 이집트를 나왔으므로, 그로부터 대략 50일이 지난 날은 오순절이 될 가능성이 크다.
모두가 아는 바대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교회 중에 강림하신 날도 바로 오순절이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이날 교회 위에 임하신 성령은 각 믿는 이의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삶을 인도하신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은 언제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탄절(개신교와 천주교의 12월 25일)은 성경 및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으로서, 일단 무시할 필요가 있다. 성경 연대기 학자 폴스틱(Eugene Faulstich, Witnesses for Jesus the Messiah, Spencer, 1989)은 여러 가지 역사 및 천문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을 (그레고리 역법으로 환산하여) 주전 6년 5월 14일로 제시하고 있다. 폴스틱이 제시한 유력한 근거들중 하나는 초대교부중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예수님의 탄생일자를 이집트 역법에 따라서 '파콤월 25일'로 기록한 것(The Stromata I.xxi)이다. 폴스틱은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태어난지 제8일, 곧 그가 할례받은 날이 바로 오순절이었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인용한 책, 6쪽).
만일 출애굽기 19장을 통하여 우리가 살펴본 연대기 재구성과 예수님의 탄생에 관련하여 폴스틱이 도출해낸 결론이 맞는 것이라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강림은 모두 오순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오순절의 의미를 재삼 강조하면서 되새길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왕 나온 김에 사도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마침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여기서 '가운데'라는 말은 '어느 개인 안에'가 아니라 '무리 중에'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시내산에서 성부 하나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에 오실 때 빽빽한 구름으로 임하지 아니하시고,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서 쓸쓸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고백하고 있다. 요한은 산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시던 날 온 누리를 덮었던 그 빛난 구름을(마17:1-8; 막9:2-8; 눅9:28-36 참조)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을 보았던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름으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요한은 이 사실에 감사 감격하여 이 글을 기록하고 있으며, 자신의 기록을 읽는 이들이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를 믿을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시내산 사건보다 더욱더 놀라운 일로서 하나님이 자신의 위엄을 가리시고 은혜와 진리로써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처음 오셨을 때의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그가 다시 오실 때는 현저한 하나님의 영광중에 오신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가 다시 오실 때 다음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3-4).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위기 1:1-17)
레위기 제1장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코르반) 중 번제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다른 예물이나 희생 제사에서도 그렇거니와 희생물로서 사용되는 동물은 제한되어 있다. 동물의 분류 내지 명칭에 있어서 히브리어는 우리 말과 약간 다르기 때문에 우리 말 성경 독자에게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번제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동물은 크게 '가축'과 '새'로 나뉜다. 가축중에는 '소'와 '양떼'('쫀')가 가능한데(1:2), 다같이 '흠 없는 수컷'이어여 한다(1:3, 10). '쫀' 중에는 다시 '양과 염소'가 가능하다(1:10). 이런 분류는 레3:1, 6, 7, 12; 5:6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독자는 레1:2, 10; 3:6; 5:6 등의 '쫀'은 1:10; 3:7의 '케쎄브'와는 달리, 양과 염소를 모두 포함하는 낱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성경에 일반적으로 '양(羊)'이라고 번역되는 낱말 '쫀'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 떼를 두루 가리키는 집합 명사이다. 한편 '쎄'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항상 단수로만 사용되고, '쫀'은 항상 복수로서 사용된다. 따라서 '쫀'은 '쎄'의 복수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30:32은 단수와 복수로서 이 두 낱말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쫀')로 두루 다니며 그 양('쎄') 중에 아롱진 자와 점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히브리어 '쫀'과 우리말 '양떼'의 의미 영역이 서로 다른만큼, 자연히 여기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읽을 경우, 레1:2에서 "누구든지 야웨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라고 읽은 독자는 레1:10의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혹시 염소가 추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10절의 '떼'는 2절의 '양'과 더불어 다같이 히브리어 '쫀'을 번역한 것이요, 한편 10절의 '양'은 히브리어 '케쎄브'를 번역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번역상의 난점은 출12:3, 5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출12:3에서 히브리어 낱말 '쎄'에 대하여는 개역과 표준새번역 공히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뒤의 5절을 통하여 볼 때, 이 낱말은 여기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를 다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 말에 양과 염소를 다같이 가리킬 수 있는 단어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 번역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확한 의미는 문맥(이 경우에는 출12:5)을 통하여 파악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우리말 개역의 경우 3절과 5절 모두에서 '쎄'를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반하여, 표준새번역의 경우 3절에서는 '어린 양'으로 5절에서는 '짐승'으로 서로 달리 번역되어 있다. 필자에게도 무슨 묘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개역이든 표준새번역이든 번역문만을 읽는 독자들에게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나답과 이비후의 죽음 (레위기 10:1-2)
레위기 8장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제사장 위임식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모세의 주재하에 열리는 이 위임식은 7일 동안 물로 씻기고, 옷을 입히고, 관유를 바르고, 속죄제와 번제와 위임제를 바치고, 피를 뿌리고, 식사하는 일 등이 반복된다(레8:6-34). 레위기 9장은 7일 동안의 위임식이 끝난 후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제8일에 처음으로 시행하는 일종의 취임식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이날 행사는 아론의 주관하에 거행된다. 그리고 이 날의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는 8장의 위임식과는 달리 이전에 명령을 받은 바가 없고, 새롭게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 날 취임식을 위한 준비가 마친 후,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8-11절), 아론의 아들들을 위한 번제(12-14절), 백성을 위한 각종 제사(15-21절)가 집행된다. 그리고는 아론의 축복과 하나님의 응답이 뒤따른다(22-24절).
레위기 10장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모든 제사를 마치고 제사장 응식을 먹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성경은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죽임당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나 그 상황 설명이 그리 명료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먼저 레10:1-2의 기록을 여기에 옮겨 놓기로 하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야웨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야웨 앞에서 죽은지라."
여기 '다른 불'이란 히브리어 표현 '에쉬 사라'를 옮긴 것이다. 이 표현은 역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 민3:4; 26:61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본문들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나답과 아비후는 '야웨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하여 많은 주석가들은 '불을 번제단에서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화를 입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번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향로에 채워서 분향하라'(레16:12)는 지시는 사실상 이 사건 이후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레16:1 참조). 그리고 역시 이 사건 이후, 고라 무리의 반역이 있었을 때,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취하고 (번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고 명한 적이 있다(민16:46). 이 두 경우 외에 "단 위의 불을 가져다가 향로에 담는 장면"은 마지막으로 신약 성경의 계8:5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고찰해 볼 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이유를 단순히 '다른 불', 곧 일부 주석가들이 말하는 바, '번제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불을 취하여 분향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시원한 대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비합법적인 분향' 때문이라고 한다. 출30:9의 "너희는 그[=분향단] 위에 다른 향('크토레트 사라')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라"는 명령은 이 사건 이전에 있었던 지시이다. 이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예를 들어, Keil & Delitzsch, Levine) 출30:9와 레위기 10장 본문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하면서, '다른 향을 살라 바치는' 행위를 얼마든지 '다른 불을 드리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위의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나답과 아비후가 죽게 된 데에는 단순히 이들 두 가지중의 어느 하나나 또는 두 가지 이유 모두로 인한 것 이상으로 더 복합적인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레16:1에 "아론의 두 아들이 야웨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야웨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이어 야웨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론에게 지시하신 말씀이 적혀 있다: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레16:2-4). 이 말씀을 통해 볼 때에, 아론의 두 아들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방자하게 지성소로 들어 가려다가(또는, 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시는 올바른 분향 방법에 대한 말씀으로까지 계속된다: "향로를 취하여 야웨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야웨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다" (레16:12-13).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술에 관한 지시를 내리셨다는 사실이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레10:9). 우리는 이 구절만 가지고는 이 날 과연 나답과 아비후가 술을 마시고 회막에 들어간 것인가 하는 여부를 판가름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날의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후손에게 술에 관하여 엄명을 내리셨다는 점이다. 나답과 아비후의 음주 여부는 그만 두고라도, 적어도 이 날 두 사람은 회막 안에서 무언가 경망된 짓을 하였기에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경망된 행동이 혹시 음주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보게 된다.
아울러 이 일 후에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레10:3)고 하신 야웨의 말씀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 그에게 가까이 할 수 있는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자세와 태도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나답과 아비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두 사람이 회막 안에서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일을 저질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야웨의 불'은 그분께 가까이 하여 그분이 원하시는대로 제사하는 이들의 제물을 사름으로써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환희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레9:22-24 참조: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야웨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동일한 '야웨의 불'은 그분 앞으로 방자하게 나아오는 자는 가차없이 불살라 처벌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형벌은 고라 무리의 반역 사건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민수기 16장).
오멜 절기와 부활 (레위기 23:9-14)
처음 난 것으로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친 것은 비단 사람이나 짐승 뿐만은 아니다. 율법은 식물의 첫 열매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칠 것을 명하고 있다(출23:19; 34:26). 여기서 토지 소산이라 함은 각종 곡물과 과일 및 올리브 기름 등 일체의 농산품을 가리킨다(민18:12 참조). 레위기에서는 특별히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전에 첫 이삭 한 단(= '오멜')을 야웨께 바칠 것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야웨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레23:10-14).
칠칠절 곧 오순절의 날자는 이 첫 이삭을 바치는 날에 달려있다. 15-16절에 의하면 칠칠절은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결정된다. 물론 해마다 기후나 기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 첫 이삭을 거두는 날이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유월절은 대략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의 4월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의 곡물(주로 보리와 밀) 추수는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에 거의 이루어진다. 이 사실은 첫 이삭 단을 바치는 날이 유월절 또는 무교절과 시간상으로 밀착되어 있음을 설명해준다.
'오멜'을 흔드는 날, 곧 레23:11, 15의 '안식일 이튿날'에 관하여는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학자들간에 논란이 많다. 필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하여 이 '첫 이삭 한 단'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흔드는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찌기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암시적으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유월절 기간에 죽으시고 안식후 첫날에 다시 살아나셨다. 죽은지 사흘만에 살아나셨으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은 무교절 한 주간 중의 일요일이 될 것이다. 레위기 23장에서 '오멜'을 굳이 '안식일 이튿날'(이 표현은 민33:3; 수5:11의 '유월절 다음날'과는 구분됨)에 드리라고 한 것은 이 구절이 다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상징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레23:11의 '안식일 이튿날'은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고전15:20). 바울이 사용한 '첫 열매'라는 낱말 역시 구약 성경의 냄새를 물씬 풍겨준다. 과거 바리새인으로서 율법 연구에 혼신의 노력을 쏟았던 바울인지라 율법의 구절구절이 그의 머리 속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언급하면서 율법의 첫 소산에 대한 규례를 염두에 두었음에 틀림없다. 이상의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레위기 23장의 '오멜'과 관련시킬 수 있고, 또 그 날짜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오멜' 절기가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이듯이(레23:14),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히 기념할 날이다.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모세의 율법 가운데 안식년과 희년(禧年) 제도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안식년과 희년을 산정하는데 있어서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7'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정확한 산출 방법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견해 차이를 보인다. 먼저 안식년의 기간과 관련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야웨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레25:3-5).
이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성경의 역법(曆法)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의 역법에서는 해의 주기(=365.242196일)와 달의 주기(=29.530588일)가 함께 사용된다. 해의 주기는 날과 해(年)의 기준이 되고, 달의 주기는 절기와 달(月)의 기준으로 쓰인다. 1주일 7일의 개념과 하루가 대략 해질 무렵인 오후 6시에 시작한다는 점은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되었다. 12달의 이름은 차례대로 1)니싼 또는 아빕, 2)십 또는 이얄, 3)씨반, 4)타무스, 5)아브, 6)엘룰, 7)에타님 또는 티슈리, 8)불 또는 마르헤스반, 9)키슬레브, 10)테ꕛ, 11)셰밭, 12)아달이고, 13)베아달은 윤달이다. 달이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날이 초하루가 되고 완전히 그믐달로 변할 때가 그 달의 마지막 날이 되기 때문에, 1년의 기준이 되는 해의 주기와 맞추기 위하여 윤달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 역법에 따른 한 해는 니싼월(봄)에서 시작하여 다시 니싼월로 돌아오는 주기를 취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서 1년중 농업의 주기는 제7월, 곧 티슈리월(그레고리력의 9-10월에 해당)에 시작하여 그 다음해 티슈리월에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주요한 농산품인 보리와 밀과 포도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자면, 티슈리월에 시작되는 밭갈기와 (보리 및 밀)씨뿌리기, 니싼월에서 씨반월 사이에 걸친 보리와 밀 수확, 티슈리월에 끝나는 포리 수확의 순서가 된다. 레25:3을 따라, '6년 동안 파종하며 6년 동안 과수원을 관리할' 경우 제6년에 수고한 결과는 제7년 니싼월에 시작하여 티슈리월 이전까지 거두게 된다. 따라서 땅은 안식년 첫 달(니싼월)부터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7월(티슈리월)부터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다음으로 희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희년 산정에 관하여 레25:8-9은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라고 밝히고 있다. 이 구절은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희년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레25:10-11("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의 '제 오십년' 때문에 희년을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아니라, 그 다음 해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럴 경우 희년이 끼는 주기는 7년 동안에 안식년(희년도 일종의 안식년임)이 두 번씩 발생할 수 있으므로 농업상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레25:10-11의 '제 오십년'은 한 희년을 '제1년'으로 계산할 경우 다음 희년이 '제50년'이 되므로 얼마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로 인정하는 우리 한국인들의 나이 계산법과 비교해보면 이런 계산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희년을 매 '일곱번 째의 안식년'과 동일한 때로 이해할 때, 희년과 관련된 많은 의문점들이 사라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농업주기로 인하여 안식년이 사실상 제7년 제7월(티슈리월)에 시작하는 것처럼, 희년 역시 '일곱번 째의 안식년' 제7월, 곧 티슈리월 10일에 나팔을 크게 분 후 시작하게 된다. 구약 성경 난제(I)-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Old Testament Difficult Passages I
-Genesis, Exodus, Leviticus-
저자: 김경래 Author: Kyungrae Kim, Ph.D.
펴낸 곳: 도서출판 대장간 Publisher: Daejanggan Press (Anyang, Korea)
초판일:1998년 8월 25일
목 차 Contents
머리글
제1부. 창세기 난제
창세기 1장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 (창1:1-31)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 (창1:26; 3:22; 11:7)
온 지표면을 적신 큰 물덩어리 (창2:6)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2:7)
선과 악을 안다는 것 (창2:9, 17; 3:5, 22)
여자의 후손과 뱀 (창3:15)
생명나무와 영생 (창3:22-24)
가인의 출생에 대하여 (창4:1)
창4:7의 올바른 번역과 이해 (창4:7)
우리 들로 나가자 (창4:8)
야웨의 이름을 부르다 (창4:26)
하나님의 아들들 (창6:1-4)
노아 방주에 들어간 동물의 수 (창6-7장)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9:18; 10:21)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 (창5:3-32; 11:10-32)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언제 죽었나? (창11:32)
이스마엘의 운명에 관한 예고 (창16:12)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에서에 대한 예언 (창27:39-40)
야곱과 천사의 씨름 (창32:24-30)
요셉의 노예 정책 (창47:21)
세겜을 한몫 더 받은 요셉 (창48:22)
요셉에 관한 예언 (창49:22-26)
제2부. 출애굽기 난제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1:1-5)
모세의 미디안 생활과 이집트 왕의 죽음 (출2:23)
하나님의 이름 '야웨' (출3:14)
이집트 탈출을 위한 광야 사흘길 (출3:18; 5:1-3; 8:27)
피 남편 모세 (출4:24-26)
유월절의 제정과 그 의미 (출12:1-14)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시간 (출12:6)
이스라엘 자손의 이집트 체류기간 (출12:40-41)
만나의 정체 (출16:13-36)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가축으로 인한 농작물 손상 (출22:5)
염소 새끼와 어미젖 (출23:19)
우림과 둠밈 (출28:30)
하나님의 약속과 그 위기 (출애굽기 32장)
야웨의 책 (출32:32-33)
모세의 또 다른 회막? (출33:7-11)
이름으로 아는 것 (출33:12, 17)
제3부. 레위기 난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레위기 1-3장)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1:1-17)
제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제사장의 몫 (레1:9, 13 등)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레4:1-6:7)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레10:1-2)
성경의 '문둥병' (레위기 13-14장)
유출에 대한 규례 (레위기 15장)
이스라엘 자손이 섬기던 수염소 (레17:7)
오멜 절기와 부활 (레23:9-14)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십일조의 의미 (레27:30-33)
참고 문헌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세기 2:7)
"야웨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우리말 개역 성경에 등장하는 이 창2:7에 대한 번역문은 일반 독자들이나 심지어는 설교자들에게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말하는 이 오해란 앞서 창세기 1장에서 다른 동물들을 단순히 '생물'이라고 부른데 반하여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생령'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우리말에 있어서도 '생령'(生靈)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생령'(生靈)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네페쉬 하야'인데, 이는 이미 창1:20, 21, 24, 30에서도 나오는 표현으로서 개역 성경은 그곳들에서 '생물'이나(1:20, 21, 24) 또는 단순히 '생명'으로(1:30)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네페쉬 하야'란 표현은 또 창2:19; 9:10, 12, 15, 16에도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인간 외의 동물계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다른 동물과 동일한 '네페쉬 하야'인 우리 인간을 달리 표현하고자 만들어낸 '생령'이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에게 그릇된 생각을 조장할 수 있는 것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번역문이라고 하겠다. 이 경우 오히려 표준새번역의 '생명체'라는 번역이 훨씬 더 적합한 번역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라는 표현은 인간과 다른 동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페쉬 하야'라고 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2:7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그 안의 '생령'이라는 번역문을 버리고, '살아있는 존재' 내지는 '생명체'라는 번역문을 가지고 읽을 때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생명체'가 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호흡'이 필요한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칠십인역에서는 창2:7의 '네페쉬 하야'를 다른 경우에서처럼, (프쉬케 소싸)로 번역하였다. 헬라어에서 이것은 인간 뿐 아니라 인간 외 모든 동물계까지 가리킬 수 있는 표현이다. 칠십인역에서 '네페쉬 하야'의 '네페쉬'를 보통 '영(靈)'을 뜻하는 (프뉴마)로 번역하지 않고 그것과 구분되는 (프쉬케)로 번역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번역을 적절히 활용하여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고전15:45).
개역 성경은 고전15:45을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읽고 있다. 여기서 '산 영'과 '살려주는 영'은 각각 (프쉬케 소싸)와 (프뉴마 소오포이운)을 번역한 문구이다. 이 인용문구의 출처인 창2:7에서 이미 '생령'이라고 번역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결국 그 연속성을 어기지 못하고 (프쉬케)와 (프뉴마)의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다 '영(靈)'으로 번역한 듯하다. 바울이 의도한 바를 살리려면 여기서도 창2:7과 마찬가지로 '산 영' 대신 '살아있는 존재'나 '생명체'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우리 들로 나가자 (창세기 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이 구절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것은 히브리어 원문상의 난해구절도 아니요, 번역상의 문제도 아니다. 다만 사건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간단하여서 무언가 빠진 느낌을 줄뿐이다. 창4:8은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라는 문구로 시작되기 때문에 바로 이어서 가인이 아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록했을 법하지만, 그런 내용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사마리아 오경과 고대 주요 역본들은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다음에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이러한 사본학적 증거들 때문에 최초의 원본에 이 문구가 들어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우리말 역본들중 개역 성경이 아무런 난외주도 없이 맛소라 사본의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옮긴데 반하여,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본문 가운데 이 문구를 끼워놓고 난외주에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한편 이 구절에 대한 한 가지 흥미 있는 주석적 요소는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4:8>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말하였다: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 그들 둘이 들로 나갔을 때에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기에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는데,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지지 않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있구나. 그래서 네 제물은 열납되고 내 제물은 열납되지 않았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고,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진다. 그리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없다. 그러나 내 행실의 열매가 네 것보다 더 좋았기 때문에 내 제물이 네 것을 제치고 열납된 것이다."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없다.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악인에게 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있으며,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고, 악인에게는 벌이 있다." 이 일 때문에 그들은 빈 들판에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마침내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덮쳤다. 그는 돌로 동생의 이마를 쳐서 그를 죽여버렸다.
여기 우리말로 번역하여 인용된 타르굼 내용은 결코 창4:8의 원본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아마도 과거 유대인 사이에 유행하였을 주석적 요소를 반영할 뿐이다. 길게 첨가된 주석적 내용 중에는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도 포함되어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에서도 다시 이 문구가 원래의 히브리어 본문에서 번역된 것인지, 아니면 번역자가 주석적인 요소중 일부분으로서 첨가한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이런 경우에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본문 중에는 이 문구를 넣지 않되, 난외주를 이용하여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된 고대 사본이나 역본들이 있음을 언급해주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물론 예루살렘 타르굼의 긴 주석적 내용을 우리말 역본에 소개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아들들 (창세기 6:1-4)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야웨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神)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6:1-4).
창6:1-4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학자들간에 쉽게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신학계에 구구한 해석사를 남긴 성경 난제중의 난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해 내려오는 여러 해석중 어느 하나가 분명히 맞는 해석이라면, 이 구절은 하나의 난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많은 성경학자들의 그릇된 신학적 사고방식을 반증해주는 사실이 아닐까? 필자는 여러가지 견해를 이 지면에 소개하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옹호 내지는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류의 서적이 이미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히려 본문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통하여 필자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설명하고자 한다. 다른 훌륭한 학자들의 해석을 재현하는 내용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국내의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이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우선 1절의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대하게 된다. 이 낱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하아담'은 정관사 '하'와 명사 '아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 끝에서 '하아담'을 복수형 대명사 어미로 받는 것으로 보아('그들에게서'; 히브리어로 '라헴'), 이것은 고유명사로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보통명사로서 아담으로 시작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딸들'과 역시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2, 4절의 '사람의 딸들'('브노트 하아담')은 인류, 곧 인간 사회에서 태어나는 '딸들'을 가리킴이 너무나 분명하다.
2절과 4절에는 이들 '사람의 딸들'의 상대역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브네 하엘로힘')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여기 말고 욥기에 또 다시 등장한다(욥1:6; 2:1; 38:7). 욥기에서 우리가 문맥을 통하여 분명히 아는 대로, 이 표현은 우리 인간이 아닌 '하늘의 영적인 존재', 소위 '천사들'을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서 단3:25에 아람어로 '바르 엘라힌'이 있는데, 이는 '신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역시 영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시29:1; 89:6(히브리어 성경에서는 89:7)에 나오는 '브네 엘림'은 직역하면 '신들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이 표현 역시 천사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것이 만일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에 관한 언급이라면, 이에 대하여 조물주께서 무언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시고(3절) 또 이러한 혼인 관계로 유별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은(4절)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사 경건한 가문의 아들과 불경건한 집안의 여자, 또는 귀족층 남자와 서민층 여자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결과적 사실을 만족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이처럼 창6:1-4의 본문에서 이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간 세상의 남자를 가리키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으므로 자연히 누군가 '인간 사회' 밖의 존재이어야만 하겠고, 아울러 앞서 제시한 바, 욥기와 기타 유사 문구의 도움을 얻어 얼마든지 '천사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표현 자체와 전체적 문맥을 통하여 이런 식의 유추는 가능하지만, 다만 이러한 이해에 대한 신학적 걸림돌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22:30; 막12:25) 때문에 학자들은 선뜻 상기한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눅20:34-36에서는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좀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이제는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의 사람들을 가리켜 "천사와 같다"고 하신 것은 그들과 천사들이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 밝히 보는대로,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휘오이 테우', ՕՉՏՉ ՈՅՏՕ)이라고 부른 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와 같게 변한 그들의 새로운 신분 때문이 아닐까.
다시 창세기 6장으로 돌아와, 칠십인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에 대하여 '하나님의 천사들'('호이 앙겔로이 투 테우', ՏՉ ՁՃՃՅՋՏՉ ՔՏՕ ՈՅՏՕ)이라는 번역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은 칠십인역 말고도 외경 에녹서(6:1-6)와 요세푸스(유대인 고대사 1권 3장 1절) 등을 통하여도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신약 성경의 몇몇 구절도 창6:1-4의 해석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먼저 벧후2:4-5에서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신' 일과(4절)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홍수로 인간 세상을 멸하신 일'을(5절)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벧전3:19-20의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는 기록 역시 이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구절(벧전3:19-20)을 '그리스도께서 고난 즉 죽음을 부활로 이기신 후, 전에 타락하여서 옥에 갇혀 있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신 것'이라고 본다. 옥에 갇힌 이들 천사들은 벧후2:4("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말고, 유다서 6절("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벧전3:19-20과 벧후2:4-5에서 이들 천사들의 투옥과 홍수 심판 기사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이들 '타락한 천사'라고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특별히 유다서 6절에서 천사 타락을 언급한 후 바로 이어 나오는 7절("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을 통하여, 우리는 천사 타락이 성적인 범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신약 성경의 몇몇 기록은 창6:1-4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해석을 반증하기 보다는 오히려 변증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 영적 존재인 천사가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 다만 우리는 소돔 사람들이 롯을 찾아온 두 천사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기록을 통하여(창19:5; 벧후2:6-8) 이런 가능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따름이다. 천사와 인간의 성적 결합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로 간주되어,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창6:3은 이런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서 하나님이 취하시고자 하는 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무서운 죄악은 비록 악한 천사들로부터 시작되긴 하였으나, 인간('하아담')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 그 안에 죄의 결과를 뿌려놓았기 때문에, 인간 역시 그 죄값을 모면할 수 없게 된다.
창6:3에서 야웨께서 말씀하시는 바 '나의 신(ࠉࠇࠅ࠘)' 곧 '하나님의 영(靈)'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하나님의 생명의 숨(生氣)'(창2:7 참조)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서 보통 '영(靈)'으로 번역되는 '루둽'과 '숨'으로 번역되는 '네샤마'는 동의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사람의 딸들이 악한 천사들의 무질서한 행위에 이용된데 대하여 분노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제동을 거신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영은 육체인 사람 속에 영원히 거하지 아니할 것이다. 여기서 '영원히'란 말은 '레올람'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을 번역한 것으로서, '영원히'라는 뜻도 되지만 '오래도록'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창6:3의 "120년"은 아마도 하나님이 새로 정하신 인간의 수명을 가리킬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대략 900세 정도로 '오래도록'(='레올람') 수명을 누려 왔었다 (창세기 5장의 족보 참조).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 안으로 단축시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타락한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합하여 낳은 자식들은 평범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창6:4에서 히브리어를 소리나는 그대로 음역하여 '네필림'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용사요, 고대에 유명한 자들'이었다. '네필림'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칠십인역('호이 기간테스')을 따라 '거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필림'은 이곳 말고 유일하게 민13:33("거기서 또 네필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에만 등장한다. 민13:33의 상반절을 직역하면,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네필림 중에서 아낙 자손 네필림을 보았다"가 된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이들이 보았다는 아낙 자손은 헤브론에 거하던 세 사람으로서,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라고 그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민13:22, "또 남방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이집트 소안보다 칠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천사와 인간 사이에 특별한 거인이 태어나, 고대에 '용사로서 유명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창6:4의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라는 문구는 이 일이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비정상적인 결합이 언제까지 지속되었을까?' 하는 물음에는 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만일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으로 인하여 이런 일이 중단된 것이라면 모세, 여호수아 시대의 '네필림'(민13:33)은 이런 결합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거인'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창6:1-4에 기록된 사건과 홍수 심판의 연관성이다. 창6:5("야웨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에서는 인간의 죄악이 언급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홍수 심판이 있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서 언급되었다. 창6:1-4에 나오는 바, 타락한 천사의 행위에 대한 기록은 그 위치로 보아, 역시 홍수 심판의 원인 중 하나로서 묘사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들도 입증해주고 있다.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세기 9:18; 10:21)
일반적으로 노아의 세 아들은 셈, 함, 야벳의 순으로 일컬어진다 (창5:32; 6:10; 7:13; 9:18; 10:1; 대상1:4). 대부분의 성경 독자들은 이러한 배열로 인하여 그들의 나이 역시 같은 순서대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노아에게 셈, 함, 야벳의 순서로 아들들이 태어난 것인가? 우리는 성경 본문을 통하여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어 번역본들에 나타나는 성경 오역이 바로 그것이다.
개역 성경은 창5:32을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조그만 글자로 인쇄된 "된 후에"는 원문에 없으므로 문맥을 고려하여 번역문에 삽입한 것이다. 표준새번역 역시 이를 같은 뜻의 "노아는 오백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창5:32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노아가 오백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이다. 이 문장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에 세 쌍둥이가 태어남, 2) 이들 세 아들이 노아가 오백세 되기까지 차례대로 태어남, 3)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 첫 아들이 태어나고 그 다음에 차례대로 다른 두 아들도 태어남. 히브리어 어법상 앞의 두 가지 보다는 세번째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역과 표준새번역 둘다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순서가 꼭 나이에 따른 순서여야 할 이유도 증거도 없다.
다음으로 고찰해야 하는 구절은 창10:21이다. 우선 우리말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개역은 이를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라고 번역함으로써, 개역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번역문은 과연 히브리어 원문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까? 여기서 "야벳의 형"이라고 번역된 문제의 구절을 히브리어 원문 및 고대 번역문인 칠십인역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 두 가지면 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충분하다고 본다.
창10:21의 이 문제의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본문은 ('둺히 예쵛 하가돌')이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와 모음 부호를 무시할 경우 이 히브리어 구절은 두 가지의 직역이 가능하다: 1)'야벳의 큰 형제(brother)', 2)'큰 (자) 야벳의 형제'. 다시 말해서 '크다'('하가돌')라고 하는 형용사가 '야벳'과 '형제' 중 어느 것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이 문구의 해석이 달라진다. '야벳'을 수식할 경우 야벳이 형이 되고, '형제'를 수식하면 셈이 형이 된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 부호의 기능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구두점 역할일 것이다. 맛소라 성경의 엑센트는 여기서 '크다'가 '야벳'을 수식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맛소라 학자들은 야벳을 셈의 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칠십인역 역시 맛소라 학자들의 견해를 지지해준다. 이 구절에 대한 칠십인역의 번역문(ՁՄՅՋՖٍ ԩՁՖՅՈ ՔՏՕ ՌՅՉՆՏՍՏՒ)에 있어서 명사 '야벳'과 형용사 '크다'는 동일한 2격(소유격)을 취하고, '형제'는 3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큰 자'는 셈이 아니라 야벳인 것이다.
셈이 야벳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은 창11:10을 통하여서도 찾아볼 수 있다.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라는 이 기술에 의하면, 셈이 일백세가 된 것은 홍수 후 이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이레 후 곧 2월 17일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40일을 내렸으며 (창7:9-12), 그들이 방주 밖으로 나온 것은 노아가 601세 되던 해 2월 27일이었으니 (창8:14-19), 노아 홍수는 햇수로 볼 때 2년이나 지속된 장기간의 대사건이었다. '홍수 후 2년'('슈나타임 둺하르 하마불')이란 히브리어 문구는 분명히 홍수 사건이 완전히 끝난 후 또 두 해가 흐른 뒤의 일임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에게 노아 나이 600세와 601세의 두 해는 홍수해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그후 두 해(노아 나이 602세와 603세)가 지나, 노아의 나이가 대략 604세가 되던 해에 셈은 나이 100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셈은 노아가 504세가 되던 해에 태어난 셈이 된다. 이상 고찰한 바를 창5:32("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과 묶어서 볼 때, 셈은 결코 노아의 맏아들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증거로서 창9:24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창9:20-27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있을 때 그 아들들이 취한 행동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내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 중에서 분명치 아니한 점은 도대체 함의 아들 가나안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많은 독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저주를 받은 것은 함이 아니요 그의 아들인 가나안이다.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15:16, 19-21 등 참조). 이 저주를 항간에 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흑인 전체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창9:24에 기록되기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하였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작은'('하카탄')을 위하여 '둘째'라는 각주를 덧붙임으로써, 이 아들이 다름 아닌 '함'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함에 대한 저주가 없음을 고려할 때, 여기서 말하는 '그 작은 아들'은 아마도 함이 아니라 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경우, 이 작은 아들이 '행한 일'은 무슨 저주받을(25, 27하반절) 악한 행실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축복을 받아 마땅한(26-27상반절) 아름다운 행실을 가리키게 된다.
이상으로 우리는 야벳이 셈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찰해 보았다. 노아의 세 아들중 다만 함의 연령상의 위치가 확실치가 않다. 창9:24의 '작다'('하카탄')나 10:21의 '크다'('하가돌')라는 형용사가 반드시 최상급으로서 '막내'나 '맏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히브리어 어법을 따라서 최상급으로 이해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 세 아들의 가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야벳(2-5절), 함(6-20절), 셈(21-31절)의 순서로 열거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나이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상의 모든 고찰을 종합하여 가장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야벳은 노아 500세 되던 해에, 함은 노아 502세 되던 해에, 그리고 셈은 노아 504세 되던 해에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불행하게도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번역가와 성경 해석가들은 노아의 세 아들이 셈, 함, 야벳의 차례로 태어났다고 믿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창10:21 본문에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 현대 역본이 그런 것처럼,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맛소라 성경의 히브리어 본문과 고대 역본인 칠십인역을 따를 경우,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철저히 금하시고 있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과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아무리 시험이라고 하지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의혹 때문에 과거 유대인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갖가지 해석을 시도하였다. 여기서는 먼저 고대 유대인들의 해석중 하나를 예루살렘 타르굼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한다.
'타르굼'은 통일적인 하나의 성경 역본이 아니다. 그 시대도 다르거니와 역자 또한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다양한 종류의 '타르구밈'(타르굼의 복수형) 전승이 전해진다. 모세 오경만의 아람어 역본을 두고 볼 때, 온켈로스의 타르굼은 비교적 문자적 번역을 시도한데 반하여,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은 온갖 주석적 요소로 가득차 있어서 주석가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타르굼이라고 하겠다. 이 예루살렘 타르굼은 그 최종 편집이 상당히 늦은 시기에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그 안에 보존된 주석적 요소들중 상당한 부분이 예수님 이전부터 전해진 것들로 추정되기에 이러한 타르굼의 전승은 예수님 당시 구약 성경에 대한 유대인들의 해석을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 연구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창22:1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상당히 흥미있는 주석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우선 그 본문을 우리말로 옮겨 보기로 하자.
이 일들 후에 이삭과 이스마엘이 다투었다. 이스마엘이 말하였다: "내가 장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자 이삭이 말하였다: "내가 아버지 부인 사라의 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너는 내 모친의 여종인 하갈의 자식일 뿐이다." 이스마엘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나는 열 세 살에 할례를 받았으니 너보다 더 의롭다. 만일 내게 거절할 뜻이 있었더라면 나는 얼마든지 할례를 받지 않았었을 것이다." 이삭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나이 지금 서른 일곱이 아니냐. 만일 거룩하시고 찬양받으실 분이 나의 모든 지체를 요구하신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겠다." 그 즉시로 이 말들이 우주의 주께 들려졌고, 또한 그 즉시로 주의 말씀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위에서 보는대로 예루살렘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스마엘이 이삭의 비위를 건드리는 말로 그에게 도전해오자 이삭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적 태도를 주저함없이 발설한다. 자신의 모든 지체라도 주저하지 않고 바치겠다는 이삭의 선언이 결국 이러한 시험의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 이 타르굼의 설명이다. 특별히 아브라함이 시험받을 때 이삭의 나이는 37세로 되어 있다. 이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일을 사라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라는 127세에 죽었으므로(창23:1), 이때 이삭의 나이가 37세가 되는 점에 착안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이삭의 나이를 37세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22:1 본문은 상당히 흥미있는 해석을 보여주긴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은 설명일까 하는 데에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는 고대 유대인 랍비들의 지나친 추측에서 나온 해석이 아닌가 한다. 이와는 달리 요세푸스의 설명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더 설득력이 있다. 요세푸스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시험해 보고자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이때 이삭의 나이를 25세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이때 이삭의 나이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이나 요세푸스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번제 나무를 지우고 산을 오르게 했다는 점으로(창22:6) 미루어 이삭이 결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막 치려하는 순간에 이삭의 반응이 어떠하였을까? 고대 유대인들은 이에 대하여도 관심이 컸다. 먼저 예루살렘 타르굼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다음은 창22:10에 대한 예루살렘 타르굼의 본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손을 내밀어 칼을 집어서 자기 아들을 잡으려 하였다. 이삭이 자기 아버지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영혼이 고통 중에 분투하지 않도록 저를 꼭 붙잡아 매세요. 그래야만 아버지의 제물에 흠이 없겠고 저도 멸망의 구덩이로 던져지지 않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눈은 이삭의 눈을 쳐다보았으나, 이삭의 눈은 저 높이 천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삭은 그들을 볼 수 있었으나, 아브라함은 보지 못하였다. 높은 곳에서 천사들이 화답하였다: "우리 가서 땅 위의 저 두 별난 사람을 보자. 하나는 잡는 자요, 다른 하나는 잡히는구나. 잡는 자는 주저함이 없고, 잡히는 자는 그 목을 길게 내미는구나."
예루살렘 타르굼은 이삭의 순종과 신앙심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세푸스 또한 이에 뒤질세라 이때의 상황을 아브라함과 이삭 부자(父子) 사이의 눈물겨운 대화 내용을 통하여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요세푸스의 경우에도 이삭의 믿음과 순종이 돋보인다.
비록 이런 기록들이 추측에 불과하기는 하겠지만, 이때 이삭의 순종과 믿음에 대하여는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직 40이 되지 않은 젊은 나이의 이삭은 원하기만 하였다면 100세가 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고대 유대인들의 몇몇 성경 해석을 통하여 이삭의 믿음이 돋보이게 묘사된 데 반하여, 신약성경은 창세기 22장과 마찬가지로 이삭 보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7-19)고 하였고, 야고보 역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1)고 역설하고 있다.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애굽기 1:1-5)
야곱과 더불어 이집트에 내려간 야곱 가문 사람들의 숫자는 칠십인역에서 다섯 명이나 더 불어난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의 발언은 칠십인역과 일치한다 (행7:14):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그럼 먼저 문제의 출1:5의 맛소라 성경 및 칠십인역 본문을 직역하여 아래에 옮겨놓기로 하자. 문맥을 볼 수 있도록 맛소라 성경의 1:5 앞에 1:1-4의 내용을 괄호로 묶어 기입해둔다.
(맛소라 성경)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이집트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베냐민, 단, 납달리, 갓, 아셀.)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명인데,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칠십인역)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야곱에게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오인이었다."
출1:5에 있어서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차이점이란 아주 간단하다. 첫째로 두 구절의 순서가 서로 바뀌었고 (칠십인역에서는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가 절의 맨 앞에 나온다), 둘째 인원수 면에서 맛소라 성경에서는 '70명', 칠십인역에서는 '75명'으로 서로 다르다. 여기서 사마리아 오경은 맛소라 성경과 일치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창46:8-27에 나오는 보다 상세한 목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도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을 비교해보기로 하자. 창46:8-27은 내용상 1)레아 소생(8-15절), 2)실바 소생(16-19절), 3)라헬 소생(20-22절), 4)빌하 소생(23-25절), 5)종합(26-27절)으로 쉽게 나뉜다. 8절에서 19절에 이르기까지 표기상의 미미한 차이점을 제하고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은 서로 일치한다. 23-25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라헬 소생'(20-22절)의 명단에 있어서 칠십인역은 맛소라 성경과 차이점을 보이며, 따라서 '종합'(26-27절)에 있어서도 인원상의 차이점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20-22절 나란히 배열해보기로 하자.
맛 소 라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과 아릇이니,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사명이요. |
칠십인역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므낫세의 시리아 여자 첩이 그에게 낳은 아들들은 마길이요, 마길은 길르앗을 낳았다. 므낫세의 동생 에브라임의 아들들은 수델라와 다한이요, 수델라의 아들들은 에뎀이다.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이요, 벨라의 아들들은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이요, 게라는 아릇을 낳았다.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팔명이요. |
위의 표에서 보듯이 칠십인역에는 몇몇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들 삽입문에 대한 정보는 민26:35-36; 대상7:14; 8:3-5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목적은 아마도 창50:22-23("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이집트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의 영향을 받아, 요셉의 자손을 한 두 대(代) 더 보여주고 아울러 부자 관계를 정확하게 밝히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칠십인역에는 다섯 사람의 이름(마길, 길르앗, 수델라, 다한, 에뎀)이 더 들어 있지만 마지막에 '18명'으로 합을 낸 문제점이 보이기도 한다.
26절에 있어서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은 완전히 일치한다: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 륙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이다." 이 숫자에는 야곱 자신, 요셉, 및 요셉의 두 아들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로 다음의 27절에서는 20절에서의 차이점과 관련하여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 사이에 차이점을 보인다.
(맛소라 성경)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명이었더라."
(칠십인역) "이집트 땅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일곱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오명이었더라."
이상을 통하여 칠십인역의 '66명'을 설명하자면, 33(레아의 소생과 야곱을 합한 수) - 1(야곱) + 16(실바의 소생) + 11(베냐민과 그의 자손) + 7(빌하의 소생) = 66이 된다. 그리고 '75명'은 66 + 1(요셉) + 7(요셉의 자손) + 1(야곱)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칠십인역 22절의 '18명'은 어쩔 수 없이 라헬의 소생 중 요셉을 제외한 숫자로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수는 신10:22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이 절의 경우 칠십인역도 '75명'이 아닌 '70명'으로 읽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창세기 46장과 출1:5에 나타나는 사본상 차이점은 칠십인역의 의도적 편집 작업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맛소라 성경이 원래의 본문을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맛소라 성경을 통해볼 때, 창46:8-27의 기록은 몇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야곱의 아내들을 비롯하여 모든 며느리나 손주 며느리 등 여자들이 숫자 계산에 들어오지 못한 반면에(26절 참조), 유일하게 레아의 딸 디나와(15절) 아셀의 딸 세라(17절)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다른 말로 가정을 이루지 아니하고 지낸 것이 아닌가 한다. 디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창세기 34장 참조).
둘째, 레아 소생을 계수함에 있어서 야곱 자신을 포함시켜 그 수는 모두 '33명'에 이른다(15절).
세째,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할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자손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연대를 계산해 볼 경우,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베레스에게 이집트로의 이주를 즈음하여 두 아들이(12절) 이미 생겨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이 무렵 베냐민에게(민26:38-40; 대상7:6-7에 의거, '손자를 포함하여') 열 명의 아들이 생겨났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이들은 틀림없이 이집트로의 이주 후에 태어난 자손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70명'(또는 '75명')은 이집트에 내려간 실제의 정확한 인원이라기 보다는 이집트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민족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 야곱의 자손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출1:5)이라는 문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이러한 히브리적 사고 방식의 타당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히7:9-10 참조: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피 남편 모세 (출애굽기 4:24-26)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야웨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출4:24-26).
출4:24-26의 난점은 히브리어 문장의 번역에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사본학적인 문제도 아니다. 짧으면서도 전후 문맥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간단한 문단은 그 역사적 상황과 그에 대한 배경을 설명함에 있어서 많은 이론들을 만들게 한 성경 난제중의 하나이다.
야웨께서 왜 그리고 어떻게 모세를 죽이려 하셨나? 이러한 일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문맥을 통해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너무나 돌연적이고 이상스럽기까지 하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후, 이미 장인에게 요청하여 그로부터 허락도 받고(출4:18), 또 다시 야웨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는(출4:19), 아내와 두 아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는 중이 아니던가(출4:20)?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출4:22-23): "너는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야웨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이러한 일 다음에 기록된 내용이 바로 본문의 이상한 사건이다.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몇 가지 분명한 사실로는: 1)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심, 2)십보라가 아들 (아마도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할례를 행함, 3)이때야 비로소 모세가 화를 면함, 4)이 일로 십보라가 모세를 '피 남편'이라고 부름 등을 들 수 있다.
모세는 이때까지 자기 '아들'(20절의 복수형과는 달리 여기 25절에서는 단수형으로 언급됨)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무슨 일로 왜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이제까지 할례를 행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물론 첫째인 게르솜의 경우에도(출2:22 참조) 그가 과연 할례를 받았는지에 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모세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의 아내 십보라는 그 이유가 아들의 할례에 있음을 깨닫고는 즉시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로 실제로 모세는 죽음을 면하게 된다.
이때 십보라가 모세를 향하여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고 내뱉는데, 이 말은 한편으로는 일종의 분노와 자포자기가 함축된 말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의 특별한 사명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과 확인으로 들린다.
본래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셔서 그의 후손이 대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언약이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17:9-11). 이 명령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14)는 준엄한 경고로 끝을 맺는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에게만 해당하는 할례 예식은 틀림없이 남자들에 의하여 집행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출4:24-26 본문에서 모세가 아닌 십보라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는 사실 역시 특이하다. 24절의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라는 표현은 아마도 모세가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든가, 아니면 그가 무슨 특별한 위험에 빠져있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순전히 하나님과만 연관시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모세는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 수 없는 상황이었겠고, 자연히 그의 아내인 십보라가 이 일을 집행하여야만 했을 것이다.
아울러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은 모세보다는 십보라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모세는 한때 특별한 사명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지시에 대하여 자기는 부족하다면서 머뭇머뭇한 적이 있다(출3:11; 4:10, 13 참조). 이러한 모세의 태도로 인하여 하나님이 모세에게 노를 발하신 적은 있으나(출4:14 참조), 이런 일로 그를 죽이려 하신 것 같지는 않다. 더군다나 출4:24-26 본문에서는 모세의 위기에 대하여 할례가 주된 원인임을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에서는 십보라에 대하여 별 기록을 담고 있지 않다. 아마도 십보라로서는 그녀의 남편 모세에게 부여된 특별한 사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이행한다는 것이 모세 본인 못지 않게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멀리 이집트에서부터 '굴러 온 복'을 어찌 하루 아침에 놓칠 수 있으랴. 두 아들과 함께 남편을 따라 낮선 땅 이집트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너무나 처절하고 무거웠던 것이 아닐까? 남편이 구해야 하는 백성은 자기의 민족이 아니요 남편의 민족일 뿐이요, 이집트는 자기의 사랑하는 남편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 아니던가.
성경은 이집트로 향하는 모세의 가정, 아니 모세와 그의 아내 사이에 교차되는 감정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이처럼 유추해보는 수 밖에 없다. 두 아들은 그만 두고라도 아내 십보라의 마음 속에 있는 온갖 감정과 생각은 모세의 마음을 충분히 괴롭히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 모세와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들의 두 아들은 - 이집트로 향한다.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준엄하고도 분명한 명령 때문에.
이때 길의 숙소에서 일어난 사건은 모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십보라에게도 하나님이 내리신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준엄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로서 십보라는 자기 남편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할례의 집행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기 남편, 더 나아가서는 자기 남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중요성과 엄숙함을 재확인한다. 바로 이 언약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이 '사지'(死地)로 명령을 받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십보라는 이 냉정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 자기 아들의 양피를 베어 피를 냄으로써.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는 그녀의 외침은 그녀의 이러한 심경을 잘 대변해준다고 하겠다.
'피와 죽음'이란 관계를 두고 볼 때, 이 사건은 성경의 다른 몇몇 기록과도 연관성을 가진다. 우선 앞서 언급한대로 바로 앞의 출4:22-23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 재앙은 출애굽기 12장에 묘사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죽음을 면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간접적이긴 하지만 모세의 아들의 피가 모세의 개인적인 재앙을 면하게 하였다. 모세의 둘째 아들 엘리에셀의 이름을 설명하는 구절에서도 또한 다소나마 이런 맥락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파라오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출18:4).
출4:24-26에 기록된 사건으로 인하여 모세는 십보라와 두 아들을 장인에게로 돌려보내고 홀로 이집트로 떠난 것 같다. 그래서 출18:2-6에서 우리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 보내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 두 아들을 데렸으니.....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 아내로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 그가 모세에게 전언하되 그대의 장인 나 이드로가 그대의 아내와 그와 함께한 그 두 아들로 더불어 그대에게 왔노라"라는 기록을 보게 된다. 아마도 모세는 이 일을 통하여, 자기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신 하나님의 엄정(嚴正)하심과 그의 분명하신 목적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고는, 다시는 거역하거나 주저함이 없이 철저히 순종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인간 가운데 하나님의 강림(降臨)이 있다는 사실은 피조계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관심 내지는 간섭을 의미한다. 사실상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와 더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의 역사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신다. 이러한 간섭은 인간편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간을 지으신 이후로 인간을 그대로 두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강림 또는 임재(유대인들은 이를 가리켜 전문 용어로 '슈키나' 라고 한다)에 관하여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다. 구약 성경 중에서 하나님의 강림에 관한 기록중 가장 중요한 곳을 찾으라면 역시 출애굽기 19장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19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강림은 어느 개인이나 소수의 몇몇 사람 또는 작은 무리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목격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임하였다.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도 구름을 동반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 놀라운 광경 앞에서 두려움으로 떨며 모세의 중재를 요구하였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나타나신 것은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게끔 하는 목적이 있었다(출19:9; 20:20).
이제 필자가 고찰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강림에 관하여 출애굽기 19장에 기록한 사건이 시간적으로 언제 있었던 일이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출19:1)는 우리말 개역성경을 읽을 때, 정확하게 언제를 가리키는지 분명치가 않다. 여기 '제 삼월'중 '월(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데쉬'는 본래 '새롭다'라는 뜻에서 파생하여 '매월 달이 새로 뜨기 시작하는 월삭(月朔)'(new moon)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가 '월삭'을 뜻하는 경우로는 민29:6; 삼상20:5, 18, 24, 34; 왕하4:23; 사1:13; 겔46:1, 6; 암8:5; 시81:4 등을 들 수 있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총 281회 출현하는 이 단어는 그중 22회의 경우만 '월삭'의 뜻으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모두 '달'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그 때에'로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다시 직역하면 '이 날에'가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호데쉬'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월삭'의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출19:1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광야에 도착하여 시내산 앞에 장막을 친 것은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계산하여 제3월이 되는 바로 그날'이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이러한 해석을 근거로 하여 출19:1에 아예 '초하룻날'이라는 문구를 첨가하여, 각각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표준새번역)와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공동번역)로 번역하였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간'(출19:3) 날은 아마도 이제까지 설명한 '제3월 1일'이거나, 아니면 그 다음날일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말씀을 들은(출19:4-6) 모세는 이를 백성의 장로들에게 전해주고는(출19:7) 다시 백성의 반응을 하나님께 회보한다(출19:8). 출19:4-8에 기록된 일들이 모두 마치기까지는 아마도 하루 이틀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모세로부터 회보를 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앞에서 영광중에 나타나실 계획을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야웨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야웨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출19:10-11). 마침내 하나님이 말씀하신 "제3일 아침에 산 위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있었고, 심히 큰 나팔소리도 울려퍼졌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동반한 이 무서운 광경으로 인하여 "진중의 모든 백성은 다 두려워 떨었다" (출19:16).
첫째 달인 아빕월(출12:2 참조) 14일 저녁에 어린 양을 잡아 먹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출12:6-9 참조)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 그날 밤(아마도 제1월 15일 새벽, 출12:29-42 참조) 이집트를 떠났다. 성경의 역법을 따라 계산할 경우,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떠난 날(제1월 15일)로부터 하나님이 시내산에 나타나신 날(대략 제3월 3~6일 사이)까지는 대략 50일이 된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신 날을 오순절로 믿고 있다. 사실 이러한 계산은 거의 틀림없이 맞는 것이다. 오순절은 봄에 첫 곡식을 수확하여 첫 이삭 한 단을 흔들어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레23:15-16). 문제는 첫 이삭 한 단을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이 언제냐 하는 것인데, 레23:11, 15에 '안식일 이튿날'이라고 한 이 날은, 그 문맥상 유월절/무교절과 나란히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계산이 맞다면 오순절은 무교절중에 들어있는 일요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무교절중에 이집트를 나왔으므로, 그로부터 대략 50일이 지난 날은 오순절이 될 가능성이 크다.
모두가 아는 바대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교회 중에 강림하신 날도 바로 오순절이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이날 교회 위에 임하신 성령은 각 믿는 이의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삶을 인도하신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은 언제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탄절(개신교와 천주교의 12월 25일)은 성경 및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으로서, 일단 무시할 필요가 있다. 성경 연대기 학자 폴스틱(Eugene Faulstich, Witnesses for Jesus the Messiah, Spencer, 1989)은 여러 가지 역사 및 천문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을 (그레고리 역법으로 환산하여) 주전 6년 5월 14일로 제시하고 있다. 폴스틱이 제시한 유력한 근거들중 하나는 초대교부중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예수님의 탄생일자를 이집트 역법에 따라서 '파콤월 25일'로 기록한 것(The Stromata I.xxi)이다. 폴스틱은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태어난지 제8일, 곧 그가 할례받은 날이 바로 오순절이었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인용한 책, 6쪽).
만일 출애굽기 19장을 통하여 우리가 살펴본 연대기 재구성과 예수님의 탄생에 관련하여 폴스틱이 도출해낸 결론이 맞는 것이라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강림은 모두 오순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오순절의 의미를 재삼 강조하면서 되새길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왕 나온 김에 사도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마침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여기서 '가운데'라는 말은 '어느 개인 안에'가 아니라 '무리 중에'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시내산에서 성부 하나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에 오실 때 빽빽한 구름으로 임하지 아니하시고,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서 쓸쓸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고백하고 있다. 요한은 산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시던 날 온 누리를 덮었던 그 빛난 구름을(마17:1-8; 막9:2-8; 눅9:28-36 참조)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을 보았던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름으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요한은 이 사실에 감사 감격하여 이 글을 기록하고 있으며, 자신의 기록을 읽는 이들이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를 믿을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시내산 사건보다 더욱더 놀라운 일로서 하나님이 자신의 위엄을 가리시고 은혜와 진리로써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처음 오셨을 때의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그가 다시 오실 때는 현저한 하나님의 영광중에 오신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가 다시 오실 때 다음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3-4).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위기 1:1-17)
레위기 제1장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코르반) 중 번제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다른 예물이나 희생 제사에서도 그렇거니와 희생물로서 사용되는 동물은 제한되어 있다. 동물의 분류 내지 명칭에 있어서 히브리어는 우리 말과 약간 다르기 때문에 우리 말 성경 독자에게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번제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동물은 크게 '가축'과 '새'로 나뉜다. 가축중에는 '소'와 '양떼'('쫀')가 가능한데(1:2), 다같이 '흠 없는 수컷'이어여 한다(1:3, 10). '쫀' 중에는 다시 '양과 염소'가 가능하다(1:10). 이런 분류는 레3:1, 6, 7, 12; 5:6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독자는 레1:2, 10; 3:6; 5:6 등의 '쫀'은 1:10; 3:7의 '케쎄브'와는 달리, 양과 염소를 모두 포함하는 낱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성경에 일반적으로 '양(羊)'이라고 번역되는 낱말 '쫀'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 떼를 두루 가리키는 집합 명사이다. 한편 '쎄'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항상 단수로만 사용되고, '쫀'은 항상 복수로서 사용된다. 따라서 '쫀'은 '쎄'의 복수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30:32은 단수와 복수로서 이 두 낱말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쫀')로 두루 다니며 그 양('쎄') 중에 아롱진 자와 점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히브리어 '쫀'과 우리말 '양떼'의 의미 영역이 서로 다른만큼, 자연히 여기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읽을 경우, 레1:2에서 "누구든지 야웨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라고 읽은 독자는 레1:10의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혹시 염소가 추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10절의 '떼'는 2절의 '양'과 더불어 다같이 히브리어 '쫀'을 번역한 것이요, 한편 10절의 '양'은 히브리어 '케쎄브'를 번역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번역상의 난점은 출12:3, 5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출12:3에서 히브리어 낱말 '쎄'에 대하여는 개역과 표준새번역 공히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뒤의 5절을 통하여 볼 때, 이 낱말은 여기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를 다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 말에 양과 염소를 다같이 가리킬 수 있는 단어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 번역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확한 의미는 문맥(이 경우에는 출12:5)을 통하여 파악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우리말 개역의 경우 3절과 5절 모두에서 '쎄'를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반하여, 표준새번역의 경우 3절에서는 '어린 양'으로 5절에서는 '짐승'으로 서로 달리 번역되어 있다. 필자에게도 무슨 묘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개역이든 표준새번역이든 번역문만을 읽는 독자들에게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나답과 이비후의 죽음 (레위기 10:1-2)
레위기 8장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제사장 위임식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모세의 주재하에 열리는 이 위임식은 7일 동안 물로 씻기고, 옷을 입히고, 관유를 바르고, 속죄제와 번제와 위임제를 바치고, 피를 뿌리고, 식사하는 일 등이 반복된다(레8:6-34). 레위기 9장은 7일 동안의 위임식이 끝난 후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제8일에 처음으로 시행하는 일종의 취임식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이날 행사는 아론의 주관하에 거행된다. 그리고 이 날의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는 8장의 위임식과는 달리 이전에 명령을 받은 바가 없고, 새롭게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 날 취임식을 위한 준비가 마친 후,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8-11절), 아론의 아들들을 위한 번제(12-14절), 백성을 위한 각종 제사(15-21절)가 집행된다. 그리고는 아론의 축복과 하나님의 응답이 뒤따른다(22-24절).
레위기 10장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모든 제사를 마치고 제사장 응식을 먹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성경은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죽임당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나 그 상황 설명이 그리 명료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먼저 레10:1-2의 기록을 여기에 옮겨 놓기로 하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야웨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야웨 앞에서 죽은지라."
여기 '다른 불'이란 히브리어 표현 '에쉬 사라'를 옮긴 것이다. 이 표현은 역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 민3:4; 26:61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본문들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나답과 아비후는 '야웨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하여 많은 주석가들은 '불을 번제단에서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화를 입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번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향로에 채워서 분향하라'(레16:12)는 지시는 사실상 이 사건 이후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레16:1 참조). 그리고 역시 이 사건 이후, 고라 무리의 반역이 있었을 때,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취하고 (번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고 명한 적이 있다(민16:46). 이 두 경우 외에 "단 위의 불을 가져다가 향로에 담는 장면"은 마지막으로 신약 성경의 계8:5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고찰해 볼 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이유를 단순히 '다른 불', 곧 일부 주석가들이 말하는 바, '번제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불을 취하여 분향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시원한 대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비합법적인 분향' 때문이라고 한다. 출30:9의 "너희는 그[=분향단] 위에 다른 향('크토레트 사라')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라"는 명령은 이 사건 이전에 있었던 지시이다. 이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예를 들어, Keil & Delitzsch, Levine) 출30:9와 레위기 10장 본문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하면서, '다른 향을 살라 바치는' 행위를 얼마든지 '다른 불을 드리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위의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나답과 아비후가 죽게 된 데에는 단순히 이들 두 가지중의 어느 하나나 또는 두 가지 이유 모두로 인한 것 이상으로 더 복합적인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레16:1에 "아론의 두 아들이 야웨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야웨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이어 야웨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론에게 지시하신 말씀이 적혀 있다: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레16:2-4). 이 말씀을 통해 볼 때에, 아론의 두 아들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방자하게 지성소로 들어 가려다가(또는, 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시는 올바른 분향 방법에 대한 말씀으로까지 계속된다: "향로를 취하여 야웨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야웨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다" (레16:12-13).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술에 관한 지시를 내리셨다는 사실이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레10:9). 우리는 이 구절만 가지고는 이 날 과연 나답과 아비후가 술을 마시고 회막에 들어간 것인가 하는 여부를 판가름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날의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후손에게 술에 관하여 엄명을 내리셨다는 점이다. 나답과 아비후의 음주 여부는 그만 두고라도, 적어도 이 날 두 사람은 회막 안에서 무언가 경망된 짓을 하였기에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경망된 행동이 혹시 음주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보게 된다.
아울러 이 일 후에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레10:3)고 하신 야웨의 말씀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 그에게 가까이 할 수 있는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자세와 태도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나답과 아비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두 사람이 회막 안에서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일을 저질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야웨의 불'은 그분께 가까이 하여 그분이 원하시는대로 제사하는 이들의 제물을 사름으로써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환희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레9:22-24 참조: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야웨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동일한 '야웨의 불'은 그분 앞으로 방자하게 나아오는 자는 가차없이 불살라 처벌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형벌은 고라 무리의 반역 사건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민수기 16장).
오멜 절기와 부활 (레위기 23:9-14)
처음 난 것으로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친 것은 비단 사람이나 짐승 뿐만은 아니다. 율법은 식물의 첫 열매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칠 것을 명하고 있다(출23:19; 34:26). 여기서 토지 소산이라 함은 각종 곡물과 과일 및 올리브 기름 등 일체의 농산품을 가리킨다(민18:12 참조). 레위기에서는 특별히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전에 첫 이삭 한 단(= '오멜')을 야웨께 바칠 것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야웨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레23:10-14).
칠칠절 곧 오순절의 날자는 이 첫 이삭을 바치는 날에 달려있다. 15-16절에 의하면 칠칠절은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결정된다. 물론 해마다 기후나 기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 첫 이삭을 거두는 날이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유월절은 대략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의 4월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의 곡물(주로 보리와 밀) 추수는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에 거의 이루어진다. 이 사실은 첫 이삭 단을 바치는 날이 유월절 또는 무교절과 시간상으로 밀착되어 있음을 설명해준다.
'오멜'을 흔드는 날, 곧 레23:11, 15의 '안식일 이튿날'에 관하여는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학자들간에 논란이 많다. 필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하여 이 '첫 이삭 한 단'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흔드는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찌기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암시적으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유월절 기간에 죽으시고 안식후 첫날에 다시 살아나셨다. 죽은지 사흘만에 살아나셨으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은 무교절 한 주간 중의 일요일이 될 것이다. 레위기 23장에서 '오멜'을 굳이 '안식일 이튿날'(이 표현은 민33:3; 수5:11의 '유월절 다음날'과는 구분됨)에 드리라고 한 것은 이 구절이 다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상징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레23:11의 '안식일 이튿날'은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고전15:20). 바울이 사용한 '첫 열매'라는 낱말 역시 구약 성경의 냄새를 물씬 풍겨준다. 과거 바리새인으로서 율법 연구에 혼신의 노력을 쏟았던 바울인지라 율법의 구절구절이 그의 머리 속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언급하면서 율법의 첫 소산에 대한 규례를 염두에 두었음에 틀림없다. 이상의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레위기 23장의 '오멜'과 관련시킬 수 있고, 또 그 날짜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오멜' 절기가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이듯이(레23:14),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히 기념할 날이다.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모세의 율법 가운데 안식년과 희년(禧年) 제도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안식년과 희년을 산정하는데 있어서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7'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정확한 산출 방법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견해 차이를 보인다. 먼저 안식년의 기간과 관련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야웨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레25:3-5).
이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성경의 역법(曆法)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의 역법에서는 해의 주기(=365.242196일)와 달의 주기(=29.530588일)가 함께 사용된다. 해의 주기는 날과 해(年)의 기준이 되고, 달의 주기는 절기와 달(月)의 기준으로 쓰인다. 1주일 7일의 개념과 하루가 대략 해질 무렵인 오후 6시에 시작한다는 점은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되었다. 12달의 이름은 차례대로 1)니싼 또는 아빕, 2)십 또는 이얄, 3)씨반, 4)타무스, 5)아브, 6)엘룰, 7)에타님 또는 티슈리, 8)불 또는 마르헤스반, 9)키슬레브, 10)테ꕛ, 11)셰밭, 12)아달이고, 13)베아달은 윤달이다. 달이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날이 초하루가 되고 완전히 그믐달로 변할 때가 그 달의 마지막 날이 되기 때문에, 1년의 기준이 되는 해의 주기와 맞추기 위하여 윤달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 역법에 따른 한 해는 니싼월(봄)에서 시작하여 다시 니싼월로 돌아오는 주기를 취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서 1년중 농업의 주기는 제7월, 곧 티슈리월(그레고리력의 9-10월에 해당)에 시작하여 그 다음해 티슈리월에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주요한 농산품인 보리와 밀과 포도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자면, 티슈리월에 시작되는 밭갈기와 (보리 및 밀)씨뿌리기, 니싼월에서 씨반월 사이에 걸친 보리와 밀 수확, 티슈리월에 끝나는 포리 수확의 순서가 된다. 레25:3을 따라, '6년 동안 파종하며 6년 동안 과수원을 관리할' 경우 제6년에 수고한 결과는 제7년 니싼월에 시작하여 티슈리월 이전까지 거두게 된다. 따라서 땅은 안식년 첫 달(니싼월)부터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7월(티슈리월)부터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다음으로 희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희년 산정에 관하여 레25:8-9은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라고 밝히고 있다. 이 구절은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희년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레25:10-11("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의 '제 오십년' 때문에 희년을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아니라, 그 다음 해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럴 경우 희년이 끼는 주기는 7년 동안에 안식년(희년도 일종의 안식년임)이 두 번씩 발생할 수 있으므로 농업상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레25:10-11의 '제 오십년'은 한 희년을 '제1년'으로 계산할 경우 다음 희년이 '제50년'이 되므로 얼마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로 인정하는 우리 한국인들의 나이 계산법과 비교해보면 이런 계산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희년을 매 '일곱번 째의 안식년'과 동일한 때로 이해할 때, 희년과 관련된 많은 의문점들이 사라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농업주기로 인하여 안식년이 사실상 제7년 제7월(티슈리월)에 시작하는 것처럼, 희년 역시 '일곱번 째의 안식년' 제7월, 곧 티슈리월 10일에 나팔을 크게 분 후 시작하게 된다. 구약 성경 난제(I)-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Old Testament Difficult Passages I
-Genesis, Exodus, Leviticus-
저자: 김경래 Author: Kyungrae Kim, Ph.D.
펴낸 곳: 도서출판 대장간 Publisher: Daejanggan Press (Anyang, Korea)
초판일:1998년 8월 25일
목 차 Contents
머리글
제1부. 창세기 난제
창세기 1장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 (창1:1-31)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 (창1:26; 3:22; 11:7)
온 지표면을 적신 큰 물덩어리 (창2:6)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2:7)
선과 악을 안다는 것 (창2:9, 17; 3:5, 22)
여자의 후손과 뱀 (창3:15)
생명나무와 영생 (창3:22-24)
가인의 출생에 대하여 (창4:1)
창4:7의 올바른 번역과 이해 (창4:7)
우리 들로 나가자 (창4:8)
야웨의 이름을 부르다 (창4:26)
하나님의 아들들 (창6:1-4)
노아 방주에 들어간 동물의 수 (창6-7장)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9:18; 10:21)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 (창5:3-32; 11:10-32)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언제 죽었나? (창11:32)
이스마엘의 운명에 관한 예고 (창16:12)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에서에 대한 예언 (창27:39-40)
야곱과 천사의 씨름 (창32:24-30)
요셉의 노예 정책 (창47:21)
세겜을 한몫 더 받은 요셉 (창48:22)
요셉에 관한 예언 (창49:22-26)
제2부. 출애굽기 난제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1:1-5)
모세의 미디안 생활과 이집트 왕의 죽음 (출2:23)
하나님의 이름 '야웨' (출3:14)
이집트 탈출을 위한 광야 사흘길 (출3:18; 5:1-3; 8:27)
피 남편 모세 (출4:24-26)
유월절의 제정과 그 의미 (출12:1-14)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시간 (출12:6)
이스라엘 자손의 이집트 체류기간 (출12:40-41)
만나의 정체 (출16:13-36)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가축으로 인한 농작물 손상 (출22:5)
염소 새끼와 어미젖 (출23:19)
우림과 둠밈 (출28:30)
하나님의 약속과 그 위기 (출애굽기 32장)
야웨의 책 (출32:32-33)
모세의 또 다른 회막? (출33:7-11)
이름으로 아는 것 (출33:12, 17)
제3부. 레위기 난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레위기 1-3장)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1:1-17)
제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제사장의 몫 (레1:9, 13 등)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레4:1-6:7)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레10:1-2)
성경의 '문둥병' (레위기 13-14장)
유출에 대한 규례 (레위기 15장)
이스라엘 자손이 섬기던 수염소 (레17:7)
오멜 절기와 부활 (레23:9-14)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십일조의 의미 (레27:30-33)
참고 문헌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세기 2:7)
"야웨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우리말 개역 성경에 등장하는 이 창2:7에 대한 번역문은 일반 독자들이나 심지어는 설교자들에게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말하는 이 오해란 앞서 창세기 1장에서 다른 동물들을 단순히 '생물'이라고 부른데 반하여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생령'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우리말에 있어서도 '생령'(生靈)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생령'(生靈)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네페쉬 하야'인데, 이는 이미 창1:20, 21, 24, 30에서도 나오는 표현으로서 개역 성경은 그곳들에서 '생물'이나(1:20, 21, 24) 또는 단순히 '생명'으로(1:30)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네페쉬 하야'란 표현은 또 창2:19; 9:10, 12, 15, 16에도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인간 외의 동물계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다른 동물과 동일한 '네페쉬 하야'인 우리 인간을 달리 표현하고자 만들어낸 '생령'이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에게 그릇된 생각을 조장할 수 있는 것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번역문이라고 하겠다. 이 경우 오히려 표준새번역의 '생명체'라는 번역이 훨씬 더 적합한 번역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라는 표현은 인간과 다른 동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페쉬 하야'라고 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2:7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그 안의 '생령'이라는 번역문을 버리고, '살아있는 존재' 내지는 '생명체'라는 번역문을 가지고 읽을 때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생명체'가 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호흡'이 필요한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칠십인역에서는 창2:7의 '네페쉬 하야'를 다른 경우에서처럼, (프쉬케 소싸)로 번역하였다. 헬라어에서 이것은 인간 뿐 아니라 인간 외 모든 동물계까지 가리킬 수 있는 표현이다. 칠십인역에서 '네페쉬 하야'의 '네페쉬'를 보통 '영(靈)'을 뜻하는 (프뉴마)로 번역하지 않고 그것과 구분되는 (프쉬케)로 번역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번역을 적절히 활용하여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고전15:45).
개역 성경은 고전15:45을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읽고 있다. 여기서 '산 영'과 '살려주는 영'은 각각 (프쉬케 소싸)와 (프뉴마 소오포이운)을 번역한 문구이다. 이 인용문구의 출처인 창2:7에서 이미 '생령'이라고 번역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결국 그 연속성을 어기지 못하고 (프쉬케)와 (프뉴마)의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다 '영(靈)'으로 번역한 듯하다. 바울이 의도한 바를 살리려면 여기서도 창2:7과 마찬가지로 '산 영' 대신 '살아있는 존재'나 '생명체'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우리 들로 나가자 (창세기 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이 구절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것은 히브리어 원문상의 난해구절도 아니요, 번역상의 문제도 아니다. 다만 사건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간단하여서 무언가 빠진 느낌을 줄뿐이다. 창4:8은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라는 문구로 시작되기 때문에 바로 이어서 가인이 아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록했을 법하지만, 그런 내용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사마리아 오경과 고대 주요 역본들은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다음에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이러한 사본학적 증거들 때문에 최초의 원본에 이 문구가 들어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우리말 역본들중 개역 성경이 아무런 난외주도 없이 맛소라 사본의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옮긴데 반하여,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본문 가운데 이 문구를 끼워놓고 난외주에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한편 이 구절에 대한 한 가지 흥미 있는 주석적 요소는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4:8>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말하였다: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 그들 둘이 들로 나갔을 때에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기에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는데,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지지 않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있구나. 그래서 네 제물은 열납되고 내 제물은 열납되지 않았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고,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진다. 그리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없다. 그러나 내 행실의 열매가 네 것보다 더 좋았기 때문에 내 제물이 네 것을 제치고 열납된 것이다."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없다.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악인에게 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있으며,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고, 악인에게는 벌이 있다." 이 일 때문에 그들은 빈 들판에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마침내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덮쳤다. 그는 돌로 동생의 이마를 쳐서 그를 죽여버렸다.
여기 우리말로 번역하여 인용된 타르굼 내용은 결코 창4:8의 원본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아마도 과거 유대인 사이에 유행하였을 주석적 요소를 반영할 뿐이다. 길게 첨가된 주석적 내용 중에는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도 포함되어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에서도 다시 이 문구가 원래의 히브리어 본문에서 번역된 것인지, 아니면 번역자가 주석적인 요소중 일부분으로서 첨가한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이런 경우에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본문 중에는 이 문구를 넣지 않되, 난외주를 이용하여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된 고대 사본이나 역본들이 있음을 언급해주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물론 예루살렘 타르굼의 긴 주석적 내용을 우리말 역본에 소개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아들들 (창세기 6:1-4)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야웨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神)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6:1-4).
창6:1-4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학자들간에 쉽게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신학계에 구구한 해석사를 남긴 성경 난제중의 난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해 내려오는 여러 해석중 어느 하나가 분명히 맞는 해석이라면, 이 구절은 하나의 난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많은 성경학자들의 그릇된 신학적 사고방식을 반증해주는 사실이 아닐까? 필자는 여러가지 견해를 이 지면에 소개하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옹호 내지는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류의 서적이 이미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히려 본문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통하여 필자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설명하고자 한다. 다른 훌륭한 학자들의 해석을 재현하는 내용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국내의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이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우선 1절의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대하게 된다. 이 낱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하아담'은 정관사 '하'와 명사 '아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 끝에서 '하아담'을 복수형 대명사 어미로 받는 것으로 보아('그들에게서'; 히브리어로 '라헴'), 이것은 고유명사로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보통명사로서 아담으로 시작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딸들'과 역시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2, 4절의 '사람의 딸들'('브노트 하아담')은 인류, 곧 인간 사회에서 태어나는 '딸들'을 가리킴이 너무나 분명하다.
2절과 4절에는 이들 '사람의 딸들'의 상대역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브네 하엘로힘')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여기 말고 욥기에 또 다시 등장한다(욥1:6; 2:1; 38:7). 욥기에서 우리가 문맥을 통하여 분명히 아는 대로, 이 표현은 우리 인간이 아닌 '하늘의 영적인 존재', 소위 '천사들'을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서 단3:25에 아람어로 '바르 엘라힌'이 있는데, 이는 '신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역시 영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시29:1; 89:6(히브리어 성경에서는 89:7)에 나오는 '브네 엘림'은 직역하면 '신들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이 표현 역시 천사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것이 만일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에 관한 언급이라면, 이에 대하여 조물주께서 무언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시고(3절) 또 이러한 혼인 관계로 유별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은(4절)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사 경건한 가문의 아들과 불경건한 집안의 여자, 또는 귀족층 남자와 서민층 여자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결과적 사실을 만족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이처럼 창6:1-4의 본문에서 이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간 세상의 남자를 가리키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으므로 자연히 누군가 '인간 사회' 밖의 존재이어야만 하겠고, 아울러 앞서 제시한 바, 욥기와 기타 유사 문구의 도움을 얻어 얼마든지 '천사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표현 자체와 전체적 문맥을 통하여 이런 식의 유추는 가능하지만, 다만 이러한 이해에 대한 신학적 걸림돌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22:30; 막12:25) 때문에 학자들은 선뜻 상기한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눅20:34-36에서는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좀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이제는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의 사람들을 가리켜 "천사와 같다"고 하신 것은 그들과 천사들이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 밝히 보는대로,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휘오이 테우', ՕՉՏՉ ՈՅՏՕ)이라고 부른 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와 같게 변한 그들의 새로운 신분 때문이 아닐까.
다시 창세기 6장으로 돌아와, 칠십인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에 대하여 '하나님의 천사들'('호이 앙겔로이 투 테우', ՏՉ ՁՃՃՅՋՏՉ ՔՏՕ ՈՅՏՕ)이라는 번역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은 칠십인역 말고도 외경 에녹서(6:1-6)와 요세푸스(유대인 고대사 1권 3장 1절) 등을 통하여도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신약 성경의 몇몇 구절도 창6:1-4의 해석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먼저 벧후2:4-5에서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신' 일과(4절)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홍수로 인간 세상을 멸하신 일'을(5절)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벧전3:19-20의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는 기록 역시 이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구절(벧전3:19-20)을 '그리스도께서 고난 즉 죽음을 부활로 이기신 후, 전에 타락하여서 옥에 갇혀 있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신 것'이라고 본다. 옥에 갇힌 이들 천사들은 벧후2:4("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말고, 유다서 6절("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벧전3:19-20과 벧후2:4-5에서 이들 천사들의 투옥과 홍수 심판 기사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이들 '타락한 천사'라고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특별히 유다서 6절에서 천사 타락을 언급한 후 바로 이어 나오는 7절("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을 통하여, 우리는 천사 타락이 성적인 범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신약 성경의 몇몇 기록은 창6:1-4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해석을 반증하기 보다는 오히려 변증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 영적 존재인 천사가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 다만 우리는 소돔 사람들이 롯을 찾아온 두 천사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기록을 통하여(창19:5; 벧후2:6-8) 이런 가능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따름이다. 천사와 인간의 성적 결합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로 간주되어,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창6:3은 이런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서 하나님이 취하시고자 하는 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무서운 죄악은 비록 악한 천사들로부터 시작되긴 하였으나, 인간('하아담')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 그 안에 죄의 결과를 뿌려놓았기 때문에, 인간 역시 그 죄값을 모면할 수 없게 된다.
창6:3에서 야웨께서 말씀하시는 바 '나의 신(ࠉࠇࠅ࠘)' 곧 '하나님의 영(靈)'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하나님의 생명의 숨(生氣)'(창2:7 참조)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서 보통 '영(靈)'으로 번역되는 '루둽'과 '숨'으로 번역되는 '네샤마'는 동의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사람의 딸들이 악한 천사들의 무질서한 행위에 이용된데 대하여 분노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제동을 거신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영은 육체인 사람 속에 영원히 거하지 아니할 것이다. 여기서 '영원히'란 말은 '레올람'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을 번역한 것으로서, '영원히'라는 뜻도 되지만 '오래도록'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창6:3의 "120년"은 아마도 하나님이 새로 정하신 인간의 수명을 가리킬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대략 900세 정도로 '오래도록'(='레올람') 수명을 누려 왔었다 (창세기 5장의 족보 참조).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 안으로 단축시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타락한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합하여 낳은 자식들은 평범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창6:4에서 히브리어를 소리나는 그대로 음역하여 '네필림'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용사요, 고대에 유명한 자들'이었다. '네필림'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칠십인역('호이 기간테스')을 따라 '거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필림'은 이곳 말고 유일하게 민13:33("거기서 또 네필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에만 등장한다. 민13:33의 상반절을 직역하면,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네필림 중에서 아낙 자손 네필림을 보았다"가 된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이들이 보았다는 아낙 자손은 헤브론에 거하던 세 사람으로서,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라고 그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민13:22, "또 남방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이집트 소안보다 칠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천사와 인간 사이에 특별한 거인이 태어나, 고대에 '용사로서 유명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창6:4의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라는 문구는 이 일이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비정상적인 결합이 언제까지 지속되었을까?' 하는 물음에는 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만일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으로 인하여 이런 일이 중단된 것이라면 모세, 여호수아 시대의 '네필림'(민13:33)은 이런 결합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거인'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창6:1-4에 기록된 사건과 홍수 심판의 연관성이다. 창6:5("야웨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에서는 인간의 죄악이 언급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홍수 심판이 있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서 언급되었다. 창6:1-4에 나오는 바, 타락한 천사의 행위에 대한 기록은 그 위치로 보아, 역시 홍수 심판의 원인 중 하나로서 묘사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들도 입증해주고 있다.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세기 9:18; 10:21)
일반적으로 노아의 세 아들은 셈, 함, 야벳의 순으로 일컬어진다 (창5:32; 6:10; 7:13; 9:18; 10:1; 대상1:4). 대부분의 성경 독자들은 이러한 배열로 인하여 그들의 나이 역시 같은 순서대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노아에게 셈, 함, 야벳의 순서로 아들들이 태어난 것인가? 우리는 성경 본문을 통하여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어 번역본들에 나타나는 성경 오역이 바로 그것이다.
개역 성경은 창5:32을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조그만 글자로 인쇄된 "된 후에"는 원문에 없으므로 문맥을 고려하여 번역문에 삽입한 것이다. 표준새번역 역시 이를 같은 뜻의 "노아는 오백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창5:32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노아가 오백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이다. 이 문장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에 세 쌍둥이가 태어남, 2) 이들 세 아들이 노아가 오백세 되기까지 차례대로 태어남, 3)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 첫 아들이 태어나고 그 다음에 차례대로 다른 두 아들도 태어남. 히브리어 어법상 앞의 두 가지 보다는 세번째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역과 표준새번역 둘다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순서가 꼭 나이에 따른 순서여야 할 이유도 증거도 없다.
다음으로 고찰해야 하는 구절은 창10:21이다. 우선 우리말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개역은 이를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라고 번역함으로써, 개역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번역문은 과연 히브리어 원문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까? 여기서 "야벳의 형"이라고 번역된 문제의 구절을 히브리어 원문 및 고대 번역문인 칠십인역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 두 가지면 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충분하다고 본다.
창10:21의 이 문제의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본문은 ('둺히 예쵛 하가돌')이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와 모음 부호를 무시할 경우 이 히브리어 구절은 두 가지의 직역이 가능하다: 1)'야벳의 큰 형제(brother)', 2)'큰 (자) 야벳의 형제'. 다시 말해서 '크다'('하가돌')라고 하는 형용사가 '야벳'과 '형제' 중 어느 것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이 문구의 해석이 달라진다. '야벳'을 수식할 경우 야벳이 형이 되고, '형제'를 수식하면 셈이 형이 된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 부호의 기능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구두점 역할일 것이다. 맛소라 성경의 엑센트는 여기서 '크다'가 '야벳'을 수식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맛소라 학자들은 야벳을 셈의 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칠십인역 역시 맛소라 학자들의 견해를 지지해준다. 이 구절에 대한 칠십인역의 번역문(ՁՄՅՋՖٍ ԩՁՖՅՈ ՔՏՕ ՌՅՉՆՏՍՏՒ)에 있어서 명사 '야벳'과 형용사 '크다'는 동일한 2격(소유격)을 취하고, '형제'는 3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큰 자'는 셈이 아니라 야벳인 것이다.
셈이 야벳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은 창11:10을 통하여서도 찾아볼 수 있다.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라는 이 기술에 의하면, 셈이 일백세가 된 것은 홍수 후 이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이레 후 곧 2월 17일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40일을 내렸으며 (창7:9-12), 그들이 방주 밖으로 나온 것은 노아가 601세 되던 해 2월 27일이었으니 (창8:14-19), 노아 홍수는 햇수로 볼 때 2년이나 지속된 장기간의 대사건이었다. '홍수 후 2년'('슈나타임 둺하르 하마불')이란 히브리어 문구는 분명히 홍수 사건이 완전히 끝난 후 또 두 해가 흐른 뒤의 일임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에게 노아 나이 600세와 601세의 두 해는 홍수해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그후 두 해(노아 나이 602세와 603세)가 지나, 노아의 나이가 대략 604세가 되던 해에 셈은 나이 100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셈은 노아가 504세가 되던 해에 태어난 셈이 된다. 이상 고찰한 바를 창5:32("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과 묶어서 볼 때, 셈은 결코 노아의 맏아들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증거로서 창9:24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창9:20-27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있을 때 그 아들들이 취한 행동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내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 중에서 분명치 아니한 점은 도대체 함의 아들 가나안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많은 독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저주를 받은 것은 함이 아니요 그의 아들인 가나안이다.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15:16, 19-21 등 참조). 이 저주를 항간에 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흑인 전체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창9:24에 기록되기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하였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작은'('하카탄')을 위하여 '둘째'라는 각주를 덧붙임으로써, 이 아들이 다름 아닌 '함'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함에 대한 저주가 없음을 고려할 때, 여기서 말하는 '그 작은 아들'은 아마도 함이 아니라 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경우, 이 작은 아들이 '행한 일'은 무슨 저주받을(25, 27하반절) 악한 행실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축복을 받아 마땅한(26-27상반절) 아름다운 행실을 가리키게 된다.
이상으로 우리는 야벳이 셈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찰해 보았다. 노아의 세 아들중 다만 함의 연령상의 위치가 확실치가 않다. 창9:24의 '작다'('하카탄')나 10:21의 '크다'('하가돌')라는 형용사가 반드시 최상급으로서 '막내'나 '맏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히브리어 어법을 따라서 최상급으로 이해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 세 아들의 가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야벳(2-5절), 함(6-20절), 셈(21-31절)의 순서로 열거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나이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상의 모든 고찰을 종합하여 가장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야벳은 노아 500세 되던 해에, 함은 노아 502세 되던 해에, 그리고 셈은 노아 504세 되던 해에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불행하게도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번역가와 성경 해석가들은 노아의 세 아들이 셈, 함, 야벳의 차례로 태어났다고 믿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창10:21 본문에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 현대 역본이 그런 것처럼,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맛소라 성경의 히브리어 본문과 고대 역본인 칠십인역을 따를 경우,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철저히 금하시고 있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과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아무리 시험이라고 하지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의혹 때문에 과거 유대인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갖가지 해석을 시도하였다. 여기서는 먼저 고대 유대인들의 해석중 하나를 예루살렘 타르굼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한다.
'타르굼'은 통일적인 하나의 성경 역본이 아니다. 그 시대도 다르거니와 역자 또한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다양한 종류의 '타르구밈'(타르굼의 복수형) 전승이 전해진다. 모세 오경만의 아람어 역본을 두고 볼 때, 온켈로스의 타르굼은 비교적 문자적 번역을 시도한데 반하여,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은 온갖 주석적 요소로 가득차 있어서 주석가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타르굼이라고 하겠다. 이 예루살렘 타르굼은 그 최종 편집이 상당히 늦은 시기에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그 안에 보존된 주석적 요소들중 상당한 부분이 예수님 이전부터 전해진 것들로 추정되기에 이러한 타르굼의 전승은 예수님 당시 구약 성경에 대한 유대인들의 해석을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 연구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창22:1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상당히 흥미있는 주석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우선 그 본문을 우리말로 옮겨 보기로 하자.
이 일들 후에 이삭과 이스마엘이 다투었다. 이스마엘이 말하였다: "내가 장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자 이삭이 말하였다: "내가 아버지 부인 사라의 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너는 내 모친의 여종인 하갈의 자식일 뿐이다." 이스마엘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나는 열 세 살에 할례를 받았으니 너보다 더 의롭다. 만일 내게 거절할 뜻이 있었더라면 나는 얼마든지 할례를 받지 않았었을 것이다." 이삭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나이 지금 서른 일곱이 아니냐. 만일 거룩하시고 찬양받으실 분이 나의 모든 지체를 요구하신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겠다." 그 즉시로 이 말들이 우주의 주께 들려졌고, 또한 그 즉시로 주의 말씀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위에서 보는대로 예루살렘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스마엘이 이삭의 비위를 건드리는 말로 그에게 도전해오자 이삭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적 태도를 주저함없이 발설한다. 자신의 모든 지체라도 주저하지 않고 바치겠다는 이삭의 선언이 결국 이러한 시험의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 이 타르굼의 설명이다. 특별히 아브라함이 시험받을 때 이삭의 나이는 37세로 되어 있다. 이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일을 사라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라는 127세에 죽었으므로(창23:1), 이때 이삭의 나이가 37세가 되는 점에 착안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이삭의 나이를 37세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22:1 본문은 상당히 흥미있는 해석을 보여주긴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은 설명일까 하는 데에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는 고대 유대인 랍비들의 지나친 추측에서 나온 해석이 아닌가 한다. 이와는 달리 요세푸스의 설명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더 설득력이 있다. 요세푸스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시험해 보고자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이때 이삭의 나이를 25세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이때 이삭의 나이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이나 요세푸스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번제 나무를 지우고 산을 오르게 했다는 점으로(창22:6) 미루어 이삭이 결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막 치려하는 순간에 이삭의 반응이 어떠하였을까? 고대 유대인들은 이에 대하여도 관심이 컸다. 먼저 예루살렘 타르굼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다음은 창22:10에 대한 예루살렘 타르굼의 본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손을 내밀어 칼을 집어서 자기 아들을 잡으려 하였다. 이삭이 자기 아버지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영혼이 고통 중에 분투하지 않도록 저를 꼭 붙잡아 매세요. 그래야만 아버지의 제물에 흠이 없겠고 저도 멸망의 구덩이로 던져지지 않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눈은 이삭의 눈을 쳐다보았으나, 이삭의 눈은 저 높이 천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삭은 그들을 볼 수 있었으나, 아브라함은 보지 못하였다. 높은 곳에서 천사들이 화답하였다: "우리 가서 땅 위의 저 두 별난 사람을 보자. 하나는 잡는 자요, 다른 하나는 잡히는구나. 잡는 자는 주저함이 없고, 잡히는 자는 그 목을 길게 내미는구나."
예루살렘 타르굼은 이삭의 순종과 신앙심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세푸스 또한 이에 뒤질세라 이때의 상황을 아브라함과 이삭 부자(父子) 사이의 눈물겨운 대화 내용을 통하여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요세푸스의 경우에도 이삭의 믿음과 순종이 돋보인다.
비록 이런 기록들이 추측에 불과하기는 하겠지만, 이때 이삭의 순종과 믿음에 대하여는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직 40이 되지 않은 젊은 나이의 이삭은 원하기만 하였다면 100세가 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고대 유대인들의 몇몇 성경 해석을 통하여 이삭의 믿음이 돋보이게 묘사된 데 반하여, 신약성경은 창세기 22장과 마찬가지로 이삭 보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7-19)고 하였고, 야고보 역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1)고 역설하고 있다.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애굽기 1:1-5)
야곱과 더불어 이집트에 내려간 야곱 가문 사람들의 숫자는 칠십인역에서 다섯 명이나 더 불어난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의 발언은 칠십인역과 일치한다 (행7:14):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그럼 먼저 문제의 출1:5의 맛소라 성경 및 칠십인역 본문을 직역하여 아래에 옮겨놓기로 하자. 문맥을 볼 수 있도록 맛소라 성경의 1:5 앞에 1:1-4의 내용을 괄호로 묶어 기입해둔다.
(맛소라 성경)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이집트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베냐민, 단, 납달리, 갓, 아셀.)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명인데,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칠십인역)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야곱에게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오인이었다."
출1:5에 있어서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차이점이란 아주 간단하다. 첫째로 두 구절의 순서가 서로 바뀌었고 (칠십인역에서는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가 절의 맨 앞에 나온다), 둘째 인원수 면에서 맛소라 성경에서는 '70명', 칠십인역에서는 '75명'으로 서로 다르다. 여기서 사마리아 오경은 맛소라 성경과 일치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창46:8-27에 나오는 보다 상세한 목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도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을 비교해보기로 하자. 창46:8-27은 내용상 1)레아 소생(8-15절), 2)실바 소생(16-19절), 3)라헬 소생(20-22절), 4)빌하 소생(23-25절), 5)종합(26-27절)으로 쉽게 나뉜다. 8절에서 19절에 이르기까지 표기상의 미미한 차이점을 제하고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은 서로 일치한다. 23-25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라헬 소생'(20-22절)의 명단에 있어서 칠십인역은 맛소라 성경과 차이점을 보이며, 따라서 '종합'(26-27절)에 있어서도 인원상의 차이점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20-22절 나란히 배열해보기로 하자.
맛 소 라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과 아릇이니,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사명이요. |
칠십인역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므낫세의 시리아 여자 첩이 그에게 낳은 아들들은 마길이요, 마길은 길르앗을 낳았다. 므낫세의 동생 에브라임의 아들들은 수델라와 다한이요, 수델라의 아들들은 에뎀이다.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이요, 벨라의 아들들은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이요, 게라는 아릇을 낳았다.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팔명이요. |
위의 표에서 보듯이 칠십인역에는 몇몇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들 삽입문에 대한 정보는 민26:35-36; 대상7:14; 8:3-5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목적은 아마도 창50:22-23("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이집트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의 영향을 받아, 요셉의 자손을 한 두 대(代) 더 보여주고 아울러 부자 관계를 정확하게 밝히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칠십인역에는 다섯 사람의 이름(마길, 길르앗, 수델라, 다한, 에뎀)이 더 들어 있지만 마지막에 '18명'으로 합을 낸 문제점이 보이기도 한다.
26절에 있어서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은 완전히 일치한다: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 륙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이다." 이 숫자에는 야곱 자신, 요셉, 및 요셉의 두 아들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로 다음의 27절에서는 20절에서의 차이점과 관련하여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 사이에 차이점을 보인다.
(맛소라 성경)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명이었더라."
(칠십인역) "이집트 땅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일곱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오명이었더라."
이상을 통하여 칠십인역의 '66명'을 설명하자면, 33(레아의 소생과 야곱을 합한 수) - 1(야곱) + 16(실바의 소생) + 11(베냐민과 그의 자손) + 7(빌하의 소생) = 66이 된다. 그리고 '75명'은 66 + 1(요셉) + 7(요셉의 자손) + 1(야곱)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칠십인역 22절의 '18명'은 어쩔 수 없이 라헬의 소생 중 요셉을 제외한 숫자로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수는 신10:22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이 절의 경우 칠십인역도 '75명'이 아닌 '70명'으로 읽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창세기 46장과 출1:5에 나타나는 사본상 차이점은 칠십인역의 의도적 편집 작업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맛소라 성경이 원래의 본문을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맛소라 성경을 통해볼 때, 창46:8-27의 기록은 몇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야곱의 아내들을 비롯하여 모든 며느리나 손주 며느리 등 여자들이 숫자 계산에 들어오지 못한 반면에(26절 참조), 유일하게 레아의 딸 디나와(15절) 아셀의 딸 세라(17절)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다른 말로 가정을 이루지 아니하고 지낸 것이 아닌가 한다. 디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창세기 34장 참조).
둘째, 레아 소생을 계수함에 있어서 야곱 자신을 포함시켜 그 수는 모두 '33명'에 이른다(15절).
세째,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할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자손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연대를 계산해 볼 경우,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베레스에게 이집트로의 이주를 즈음하여 두 아들이(12절) 이미 생겨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이 무렵 베냐민에게(민26:38-40; 대상7:6-7에 의거, '손자를 포함하여') 열 명의 아들이 생겨났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이들은 틀림없이 이집트로의 이주 후에 태어난 자손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70명'(또는 '75명')은 이집트에 내려간 실제의 정확한 인원이라기 보다는 이집트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민족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 야곱의 자손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출1:5)이라는 문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이러한 히브리적 사고 방식의 타당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히7:9-10 참조: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피 남편 모세 (출애굽기 4:24-26)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야웨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출4:24-26).
출4:24-26의 난점은 히브리어 문장의 번역에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사본학적인 문제도 아니다. 짧으면서도 전후 문맥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간단한 문단은 그 역사적 상황과 그에 대한 배경을 설명함에 있어서 많은 이론들을 만들게 한 성경 난제중의 하나이다.
야웨께서 왜 그리고 어떻게 모세를 죽이려 하셨나? 이러한 일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문맥을 통해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너무나 돌연적이고 이상스럽기까지 하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후, 이미 장인에게 요청하여 그로부터 허락도 받고(출4:18), 또 다시 야웨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는(출4:19), 아내와 두 아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는 중이 아니던가(출4:20)?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출4:22-23): "너는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야웨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이러한 일 다음에 기록된 내용이 바로 본문의 이상한 사건이다.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몇 가지 분명한 사실로는: 1)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심, 2)십보라가 아들 (아마도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할례를 행함, 3)이때야 비로소 모세가 화를 면함, 4)이 일로 십보라가 모세를 '피 남편'이라고 부름 등을 들 수 있다.
모세는 이때까지 자기 '아들'(20절의 복수형과는 달리 여기 25절에서는 단수형으로 언급됨)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무슨 일로 왜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이제까지 할례를 행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물론 첫째인 게르솜의 경우에도(출2:22 참조) 그가 과연 할례를 받았는지에 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모세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의 아내 십보라는 그 이유가 아들의 할례에 있음을 깨닫고는 즉시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로 실제로 모세는 죽음을 면하게 된다.
이때 십보라가 모세를 향하여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고 내뱉는데, 이 말은 한편으로는 일종의 분노와 자포자기가 함축된 말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의 특별한 사명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과 확인으로 들린다.
본래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셔서 그의 후손이 대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언약이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17:9-11). 이 명령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14)는 준엄한 경고로 끝을 맺는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에게만 해당하는 할례 예식은 틀림없이 남자들에 의하여 집행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출4:24-26 본문에서 모세가 아닌 십보라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는 사실 역시 특이하다. 24절의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라는 표현은 아마도 모세가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든가, 아니면 그가 무슨 특별한 위험에 빠져있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순전히 하나님과만 연관시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모세는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 수 없는 상황이었겠고, 자연히 그의 아내인 십보라가 이 일을 집행하여야만 했을 것이다.
아울러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은 모세보다는 십보라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모세는 한때 특별한 사명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지시에 대하여 자기는 부족하다면서 머뭇머뭇한 적이 있다(출3:11; 4:10, 13 참조). 이러한 모세의 태도로 인하여 하나님이 모세에게 노를 발하신 적은 있으나(출4:14 참조), 이런 일로 그를 죽이려 하신 것 같지는 않다. 더군다나 출4:24-26 본문에서는 모세의 위기에 대하여 할례가 주된 원인임을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에서는 십보라에 대하여 별 기록을 담고 있지 않다. 아마도 십보라로서는 그녀의 남편 모세에게 부여된 특별한 사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이행한다는 것이 모세 본인 못지 않게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멀리 이집트에서부터 '굴러 온 복'을 어찌 하루 아침에 놓칠 수 있으랴. 두 아들과 함께 남편을 따라 낮선 땅 이집트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너무나 처절하고 무거웠던 것이 아닐까? 남편이 구해야 하는 백성은 자기의 민족이 아니요 남편의 민족일 뿐이요, 이집트는 자기의 사랑하는 남편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 아니던가.
성경은 이집트로 향하는 모세의 가정, 아니 모세와 그의 아내 사이에 교차되는 감정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이처럼 유추해보는 수 밖에 없다. 두 아들은 그만 두고라도 아내 십보라의 마음 속에 있는 온갖 감정과 생각은 모세의 마음을 충분히 괴롭히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 모세와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들의 두 아들은 - 이집트로 향한다.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준엄하고도 분명한 명령 때문에.
이때 길의 숙소에서 일어난 사건은 모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십보라에게도 하나님이 내리신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준엄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로서 십보라는 자기 남편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할례의 집행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기 남편, 더 나아가서는 자기 남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중요성과 엄숙함을 재확인한다. 바로 이 언약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이 '사지'(死地)로 명령을 받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십보라는 이 냉정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 자기 아들의 양피를 베어 피를 냄으로써.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는 그녀의 외침은 그녀의 이러한 심경을 잘 대변해준다고 하겠다.
'피와 죽음'이란 관계를 두고 볼 때, 이 사건은 성경의 다른 몇몇 기록과도 연관성을 가진다. 우선 앞서 언급한대로 바로 앞의 출4:22-23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 재앙은 출애굽기 12장에 묘사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죽음을 면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간접적이긴 하지만 모세의 아들의 피가 모세의 개인적인 재앙을 면하게 하였다. 모세의 둘째 아들 엘리에셀의 이름을 설명하는 구절에서도 또한 다소나마 이런 맥락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파라오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출18:4).
출4:24-26에 기록된 사건으로 인하여 모세는 십보라와 두 아들을 장인에게로 돌려보내고 홀로 이집트로 떠난 것 같다. 그래서 출18:2-6에서 우리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 보내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 두 아들을 데렸으니.....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 아내로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 그가 모세에게 전언하되 그대의 장인 나 이드로가 그대의 아내와 그와 함께한 그 두 아들로 더불어 그대에게 왔노라"라는 기록을 보게 된다. 아마도 모세는 이 일을 통하여, 자기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신 하나님의 엄정(嚴正)하심과 그의 분명하신 목적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고는, 다시는 거역하거나 주저함이 없이 철저히 순종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인간 가운데 하나님의 강림(降臨)이 있다는 사실은 피조계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관심 내지는 간섭을 의미한다. 사실상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와 더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의 역사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신다. 이러한 간섭은 인간편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간을 지으신 이후로 인간을 그대로 두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강림 또는 임재(유대인들은 이를 가리켜 전문 용어로 '슈키나' 라고 한다)에 관하여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다. 구약 성경 중에서 하나님의 강림에 관한 기록중 가장 중요한 곳을 찾으라면 역시 출애굽기 19장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19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강림은 어느 개인이나 소수의 몇몇 사람 또는 작은 무리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목격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임하였다.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도 구름을 동반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 놀라운 광경 앞에서 두려움으로 떨며 모세의 중재를 요구하였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나타나신 것은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게끔 하는 목적이 있었다(출19:9; 20:20).
이제 필자가 고찰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강림에 관하여 출애굽기 19장에 기록한 사건이 시간적으로 언제 있었던 일이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출19:1)는 우리말 개역성경을 읽을 때, 정확하게 언제를 가리키는지 분명치가 않다. 여기 '제 삼월'중 '월(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데쉬'는 본래 '새롭다'라는 뜻에서 파생하여 '매월 달이 새로 뜨기 시작하는 월삭(月朔)'(new moon)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가 '월삭'을 뜻하는 경우로는 민29:6; 삼상20:5, 18, 24, 34; 왕하4:23; 사1:13; 겔46:1, 6; 암8:5; 시81:4 등을 들 수 있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총 281회 출현하는 이 단어는 그중 22회의 경우만 '월삭'의 뜻으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모두 '달'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그 때에'로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다시 직역하면 '이 날에'가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호데쉬'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월삭'의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출19:1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광야에 도착하여 시내산 앞에 장막을 친 것은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계산하여 제3월이 되는 바로 그날'이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이러한 해석을 근거로 하여 출19:1에 아예 '초하룻날'이라는 문구를 첨가하여, 각각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표준새번역)와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공동번역)로 번역하였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간'(출19:3) 날은 아마도 이제까지 설명한 '제3월 1일'이거나, 아니면 그 다음날일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말씀을 들은(출19:4-6) 모세는 이를 백성의 장로들에게 전해주고는(출19:7) 다시 백성의 반응을 하나님께 회보한다(출19:8). 출19:4-8에 기록된 일들이 모두 마치기까지는 아마도 하루 이틀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모세로부터 회보를 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앞에서 영광중에 나타나실 계획을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야웨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야웨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출19:10-11). 마침내 하나님이 말씀하신 "제3일 아침에 산 위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있었고, 심히 큰 나팔소리도 울려퍼졌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동반한 이 무서운 광경으로 인하여 "진중의 모든 백성은 다 두려워 떨었다" (출19:16).
첫째 달인 아빕월(출12:2 참조) 14일 저녁에 어린 양을 잡아 먹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출12:6-9 참조)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 그날 밤(아마도 제1월 15일 새벽, 출12:29-42 참조) 이집트를 떠났다. 성경의 역법을 따라 계산할 경우,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떠난 날(제1월 15일)로부터 하나님이 시내산에 나타나신 날(대략 제3월 3~6일 사이)까지는 대략 50일이 된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신 날을 오순절로 믿고 있다. 사실 이러한 계산은 거의 틀림없이 맞는 것이다. 오순절은 봄에 첫 곡식을 수확하여 첫 이삭 한 단을 흔들어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레23:15-16). 문제는 첫 이삭 한 단을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이 언제냐 하는 것인데, 레23:11, 15에 '안식일 이튿날'이라고 한 이 날은, 그 문맥상 유월절/무교절과 나란히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계산이 맞다면 오순절은 무교절중에 들어있는 일요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무교절중에 이집트를 나왔으므로, 그로부터 대략 50일이 지난 날은 오순절이 될 가능성이 크다.
모두가 아는 바대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교회 중에 강림하신 날도 바로 오순절이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이날 교회 위에 임하신 성령은 각 믿는 이의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삶을 인도하신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은 언제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탄절(개신교와 천주교의 12월 25일)은 성경 및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으로서, 일단 무시할 필요가 있다. 성경 연대기 학자 폴스틱(Eugene Faulstich, Witnesses for Jesus the Messiah, Spencer, 1989)은 여러 가지 역사 및 천문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을 (그레고리 역법으로 환산하여) 주전 6년 5월 14일로 제시하고 있다. 폴스틱이 제시한 유력한 근거들중 하나는 초대교부중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예수님의 탄생일자를 이집트 역법에 따라서 '파콤월 25일'로 기록한 것(The Stromata I.xxi)이다. 폴스틱은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태어난지 제8일, 곧 그가 할례받은 날이 바로 오순절이었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인용한 책, 6쪽).
만일 출애굽기 19장을 통하여 우리가 살펴본 연대기 재구성과 예수님의 탄생에 관련하여 폴스틱이 도출해낸 결론이 맞는 것이라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강림은 모두 오순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오순절의 의미를 재삼 강조하면서 되새길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왕 나온 김에 사도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마침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여기서 '가운데'라는 말은 '어느 개인 안에'가 아니라 '무리 중에'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시내산에서 성부 하나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에 오실 때 빽빽한 구름으로 임하지 아니하시고,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서 쓸쓸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고백하고 있다. 요한은 산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시던 날 온 누리를 덮었던 그 빛난 구름을(마17:1-8; 막9:2-8; 눅9:28-36 참조)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을 보았던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름으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요한은 이 사실에 감사 감격하여 이 글을 기록하고 있으며, 자신의 기록을 읽는 이들이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를 믿을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시내산 사건보다 더욱더 놀라운 일로서 하나님이 자신의 위엄을 가리시고 은혜와 진리로써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처음 오셨을 때의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그가 다시 오실 때는 현저한 하나님의 영광중에 오신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가 다시 오실 때 다음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3-4).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위기 1:1-17)
레위기 제1장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코르반) 중 번제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다른 예물이나 희생 제사에서도 그렇거니와 희생물로서 사용되는 동물은 제한되어 있다. 동물의 분류 내지 명칭에 있어서 히브리어는 우리 말과 약간 다르기 때문에 우리 말 성경 독자에게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번제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동물은 크게 '가축'과 '새'로 나뉜다. 가축중에는 '소'와 '양떼'('쫀')가 가능한데(1:2), 다같이 '흠 없는 수컷'이어여 한다(1:3, 10). '쫀' 중에는 다시 '양과 염소'가 가능하다(1:10). 이런 분류는 레3:1, 6, 7, 12; 5:6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독자는 레1:2, 10; 3:6; 5:6 등의 '쫀'은 1:10; 3:7의 '케쎄브'와는 달리, 양과 염소를 모두 포함하는 낱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성경에 일반적으로 '양(羊)'이라고 번역되는 낱말 '쫀'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 떼를 두루 가리키는 집합 명사이다. 한편 '쎄'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항상 단수로만 사용되고, '쫀'은 항상 복수로서 사용된다. 따라서 '쫀'은 '쎄'의 복수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30:32은 단수와 복수로서 이 두 낱말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쫀')로 두루 다니며 그 양('쎄') 중에 아롱진 자와 점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히브리어 '쫀'과 우리말 '양떼'의 의미 영역이 서로 다른만큼, 자연히 여기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읽을 경우, 레1:2에서 "누구든지 야웨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라고 읽은 독자는 레1:10의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혹시 염소가 추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10절의 '떼'는 2절의 '양'과 더불어 다같이 히브리어 '쫀'을 번역한 것이요, 한편 10절의 '양'은 히브리어 '케쎄브'를 번역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번역상의 난점은 출12:3, 5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출12:3에서 히브리어 낱말 '쎄'에 대하여는 개역과 표준새번역 공히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뒤의 5절을 통하여 볼 때, 이 낱말은 여기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를 다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 말에 양과 염소를 다같이 가리킬 수 있는 단어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 번역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확한 의미는 문맥(이 경우에는 출12:5)을 통하여 파악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우리말 개역의 경우 3절과 5절 모두에서 '쎄'를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반하여, 표준새번역의 경우 3절에서는 '어린 양'으로 5절에서는 '짐승'으로 서로 달리 번역되어 있다. 필자에게도 무슨 묘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개역이든 표준새번역이든 번역문만을 읽는 독자들에게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나답과 이비후의 죽음 (레위기 10:1-2)
레위기 8장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제사장 위임식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모세의 주재하에 열리는 이 위임식은 7일 동안 물로 씻기고, 옷을 입히고, 관유를 바르고, 속죄제와 번제와 위임제를 바치고, 피를 뿌리고, 식사하는 일 등이 반복된다(레8:6-34). 레위기 9장은 7일 동안의 위임식이 끝난 후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제8일에 처음으로 시행하는 일종의 취임식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이날 행사는 아론의 주관하에 거행된다. 그리고 이 날의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는 8장의 위임식과는 달리 이전에 명령을 받은 바가 없고, 새롭게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 날 취임식을 위한 준비가 마친 후,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8-11절), 아론의 아들들을 위한 번제(12-14절), 백성을 위한 각종 제사(15-21절)가 집행된다. 그리고는 아론의 축복과 하나님의 응답이 뒤따른다(22-24절).
레위기 10장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모든 제사를 마치고 제사장 응식을 먹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성경은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죽임당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나 그 상황 설명이 그리 명료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먼저 레10:1-2의 기록을 여기에 옮겨 놓기로 하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야웨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야웨 앞에서 죽은지라."
여기 '다른 불'이란 히브리어 표현 '에쉬 사라'를 옮긴 것이다. 이 표현은 역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 민3:4; 26:61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본문들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나답과 아비후는 '야웨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하여 많은 주석가들은 '불을 번제단에서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화를 입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번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향로에 채워서 분향하라'(레16:12)는 지시는 사실상 이 사건 이후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레16:1 참조). 그리고 역시 이 사건 이후, 고라 무리의 반역이 있었을 때,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취하고 (번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고 명한 적이 있다(민16:46). 이 두 경우 외에 "단 위의 불을 가져다가 향로에 담는 장면"은 마지막으로 신약 성경의 계8:5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고찰해 볼 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이유를 단순히 '다른 불', 곧 일부 주석가들이 말하는 바, '번제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불을 취하여 분향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시원한 대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비합법적인 분향' 때문이라고 한다. 출30:9의 "너희는 그[=분향단] 위에 다른 향('크토레트 사라')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라"는 명령은 이 사건 이전에 있었던 지시이다. 이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예를 들어, Keil & Delitzsch, Levine) 출30:9와 레위기 10장 본문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하면서, '다른 향을 살라 바치는' 행위를 얼마든지 '다른 불을 드리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위의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나답과 아비후가 죽게 된 데에는 단순히 이들 두 가지중의 어느 하나나 또는 두 가지 이유 모두로 인한 것 이상으로 더 복합적인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레16:1에 "아론의 두 아들이 야웨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야웨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이어 야웨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론에게 지시하신 말씀이 적혀 있다: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레16:2-4). 이 말씀을 통해 볼 때에, 아론의 두 아들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방자하게 지성소로 들어 가려다가(또는, 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시는 올바른 분향 방법에 대한 말씀으로까지 계속된다: "향로를 취하여 야웨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야웨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다" (레16:12-13).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술에 관한 지시를 내리셨다는 사실이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레10:9). 우리는 이 구절만 가지고는 이 날 과연 나답과 아비후가 술을 마시고 회막에 들어간 것인가 하는 여부를 판가름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날의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후손에게 술에 관하여 엄명을 내리셨다는 점이다. 나답과 아비후의 음주 여부는 그만 두고라도, 적어도 이 날 두 사람은 회막 안에서 무언가 경망된 짓을 하였기에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경망된 행동이 혹시 음주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보게 된다.
아울러 이 일 후에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레10:3)고 하신 야웨의 말씀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 그에게 가까이 할 수 있는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자세와 태도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나답과 아비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두 사람이 회막 안에서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일을 저질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야웨의 불'은 그분께 가까이 하여 그분이 원하시는대로 제사하는 이들의 제물을 사름으로써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환희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레9:22-24 참조: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야웨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동일한 '야웨의 불'은 그분 앞으로 방자하게 나아오는 자는 가차없이 불살라 처벌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형벌은 고라 무리의 반역 사건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민수기 16장).
오멜 절기와 부활 (레위기 23:9-14)
처음 난 것으로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친 것은 비단 사람이나 짐승 뿐만은 아니다. 율법은 식물의 첫 열매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칠 것을 명하고 있다(출23:19; 34:26). 여기서 토지 소산이라 함은 각종 곡물과 과일 및 올리브 기름 등 일체의 농산품을 가리킨다(민18:12 참조). 레위기에서는 특별히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전에 첫 이삭 한 단(= '오멜')을 야웨께 바칠 것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야웨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레23:10-14).
칠칠절 곧 오순절의 날자는 이 첫 이삭을 바치는 날에 달려있다. 15-16절에 의하면 칠칠절은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결정된다. 물론 해마다 기후나 기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 첫 이삭을 거두는 날이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유월절은 대략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의 4월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의 곡물(주로 보리와 밀) 추수는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에 거의 이루어진다. 이 사실은 첫 이삭 단을 바치는 날이 유월절 또는 무교절과 시간상으로 밀착되어 있음을 설명해준다.
'오멜'을 흔드는 날, 곧 레23:11, 15의 '안식일 이튿날'에 관하여는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학자들간에 논란이 많다. 필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하여 이 '첫 이삭 한 단'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흔드는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찌기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암시적으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유월절 기간에 죽으시고 안식후 첫날에 다시 살아나셨다. 죽은지 사흘만에 살아나셨으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은 무교절 한 주간 중의 일요일이 될 것이다. 레위기 23장에서 '오멜'을 굳이 '안식일 이튿날'(이 표현은 민33:3; 수5:11의 '유월절 다음날'과는 구분됨)에 드리라고 한 것은 이 구절이 다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상징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레23:11의 '안식일 이튿날'은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고전15:20). 바울이 사용한 '첫 열매'라는 낱말 역시 구약 성경의 냄새를 물씬 풍겨준다. 과거 바리새인으로서 율법 연구에 혼신의 노력을 쏟았던 바울인지라 율법의 구절구절이 그의 머리 속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언급하면서 율법의 첫 소산에 대한 규례를 염두에 두었음에 틀림없다. 이상의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레위기 23장의 '오멜'과 관련시킬 수 있고, 또 그 날짜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오멜' 절기가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이듯이(레23:14),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히 기념할 날이다.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모세의 율법 가운데 안식년과 희년(禧年) 제도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안식년과 희년을 산정하는데 있어서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7'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정확한 산출 방법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견해 차이를 보인다. 먼저 안식년의 기간과 관련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야웨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레25:3-5).
이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성경의 역법(曆法)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의 역법에서는 해의 주기(=365.242196일)와 달의 주기(=29.530588일)가 함께 사용된다. 해의 주기는 날과 해(年)의 기준이 되고, 달의 주기는 절기와 달(月)의 기준으로 쓰인다. 1주일 7일의 개념과 하루가 대략 해질 무렵인 오후 6시에 시작한다는 점은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되었다. 12달의 이름은 차례대로 1)니싼 또는 아빕, 2)십 또는 이얄, 3)씨반, 4)타무스, 5)아브, 6)엘룰, 7)에타님 또는 티슈리, 8)불 또는 마르헤스반, 9)키슬레브, 10)테ꕛ, 11)셰밭, 12)아달이고, 13)베아달은 윤달이다. 달이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날이 초하루가 되고 완전히 그믐달로 변할 때가 그 달의 마지막 날이 되기 때문에, 1년의 기준이 되는 해의 주기와 맞추기 위하여 윤달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 역법에 따른 한 해는 니싼월(봄)에서 시작하여 다시 니싼월로 돌아오는 주기를 취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서 1년중 농업의 주기는 제7월, 곧 티슈리월(그레고리력의 9-10월에 해당)에 시작하여 그 다음해 티슈리월에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주요한 농산품인 보리와 밀과 포도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자면, 티슈리월에 시작되는 밭갈기와 (보리 및 밀)씨뿌리기, 니싼월에서 씨반월 사이에 걸친 보리와 밀 수확, 티슈리월에 끝나는 포리 수확의 순서가 된다. 레25:3을 따라, '6년 동안 파종하며 6년 동안 과수원을 관리할' 경우 제6년에 수고한 결과는 제7년 니싼월에 시작하여 티슈리월 이전까지 거두게 된다. 따라서 땅은 안식년 첫 달(니싼월)부터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7월(티슈리월)부터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다음으로 희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희년 산정에 관하여 레25:8-9은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라고 밝히고 있다. 이 구절은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희년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레25:10-11("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의 '제 오십년' 때문에 희년을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아니라, 그 다음 해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럴 경우 희년이 끼는 주기는 7년 동안에 안식년(희년도 일종의 안식년임)이 두 번씩 발생할 수 있으므로 농업상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레25:10-11의 '제 오십년'은 한 희년을 '제1년'으로 계산할 경우 다음 희년이 '제50년'이 되므로 얼마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로 인정하는 우리 한국인들의 나이 계산법과 비교해보면 이런 계산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희년을 매 '일곱번 째의 안식년'과 동일한 때로 이해할 때, 희년과 관련된 많은 의문점들이 사라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농업주기로 인하여 안식년이 사실상 제7년 제7월(티슈리월)에 시작하는 것처럼, 희년 역시 '일곱번 째의 안식년' 제7월, 곧 티슈리월 10일에 나팔을 크게 분 후 시작하게 된다. 구약 성경 난제(I)-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Old Testament Difficult Passages I
-Genesis, Exodus, Leviticus-
저자: 김경래 Author: Kyungrae Kim, Ph.D.
펴낸 곳: 도서출판 대장간 Publisher: Daejanggan Press (Anyang, Korea)
초판일:1998년 8월 25일
목 차 Contents
머리글
제1부. 창세기 난제
창세기 1장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 (창1:1-31)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 (창1:26; 3:22; 11:7)
온 지표면을 적신 큰 물덩어리 (창2:6)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2:7)
선과 악을 안다는 것 (창2:9, 17; 3:5, 22)
여자의 후손과 뱀 (창3:15)
생명나무와 영생 (창3:22-24)
가인의 출생에 대하여 (창4:1)
창4:7의 올바른 번역과 이해 (창4:7)
우리 들로 나가자 (창4:8)
야웨의 이름을 부르다 (창4:26)
하나님의 아들들 (창6:1-4)
노아 방주에 들어간 동물의 수 (창6-7장)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9:18; 10:21)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 (창5:3-32; 11:10-32)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언제 죽었나? (창11:32)
이스마엘의 운명에 관한 예고 (창16:12)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에서에 대한 예언 (창27:39-40)
야곱과 천사의 씨름 (창32:24-30)
요셉의 노예 정책 (창47:21)
세겜을 한몫 더 받은 요셉 (창48:22)
요셉에 관한 예언 (창49:22-26)
제2부. 출애굽기 난제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1:1-5)
모세의 미디안 생활과 이집트 왕의 죽음 (출2:23)
하나님의 이름 '야웨' (출3:14)
이집트 탈출을 위한 광야 사흘길 (출3:18; 5:1-3; 8:27)
피 남편 모세 (출4:24-26)
유월절의 제정과 그 의미 (출12:1-14)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시간 (출12:6)
이스라엘 자손의 이집트 체류기간 (출12:40-41)
만나의 정체 (출16:13-36)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가축으로 인한 농작물 손상 (출22:5)
염소 새끼와 어미젖 (출23:19)
우림과 둠밈 (출28:30)
하나님의 약속과 그 위기 (출애굽기 32장)
야웨의 책 (출32:32-33)
모세의 또 다른 회막? (출33:7-11)
이름으로 아는 것 (출33:12, 17)
제3부. 레위기 난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레위기 1-3장)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1:1-17)
제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제사장의 몫 (레1:9, 13 등)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레4:1-6:7)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레10:1-2)
성경의 '문둥병' (레위기 13-14장)
유출에 대한 규례 (레위기 15장)
이스라엘 자손이 섬기던 수염소 (레17:7)
오멜 절기와 부활 (레23:9-14)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십일조의 의미 (레27:30-33)
참고 문헌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세기 2:7)
"야웨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우리말 개역 성경에 등장하는 이 창2:7에 대한 번역문은 일반 독자들이나 심지어는 설교자들에게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말하는 이 오해란 앞서 창세기 1장에서 다른 동물들을 단순히 '생물'이라고 부른데 반하여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생령'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우리말에 있어서도 '생령'(生靈)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생령'(生靈)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네페쉬 하야'인데, 이는 이미 창1:20, 21, 24, 30에서도 나오는 표현으로서 개역 성경은 그곳들에서 '생물'이나(1:20, 21, 24) 또는 단순히 '생명'으로(1:30)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네페쉬 하야'란 표현은 또 창2:19; 9:10, 12, 15, 16에도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인간 외의 동물계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다른 동물과 동일한 '네페쉬 하야'인 우리 인간을 달리 표현하고자 만들어낸 '생령'이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에게 그릇된 생각을 조장할 수 있는 것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번역문이라고 하겠다. 이 경우 오히려 표준새번역의 '생명체'라는 번역이 훨씬 더 적합한 번역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라는 표현은 인간과 다른 동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페쉬 하야'라고 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2:7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그 안의 '생령'이라는 번역문을 버리고, '살아있는 존재' 내지는 '생명체'라는 번역문을 가지고 읽을 때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생명체'가 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호흡'이 필요한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칠십인역에서는 창2:7의 '네페쉬 하야'를 다른 경우에서처럼, (프쉬케 소싸)로 번역하였다. 헬라어에서 이것은 인간 뿐 아니라 인간 외 모든 동물계까지 가리킬 수 있는 표현이다. 칠십인역에서 '네페쉬 하야'의 '네페쉬'를 보통 '영(靈)'을 뜻하는 (프뉴마)로 번역하지 않고 그것과 구분되는 (프쉬케)로 번역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번역을 적절히 활용하여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고전15:45).
개역 성경은 고전15:45을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읽고 있다. 여기서 '산 영'과 '살려주는 영'은 각각 (프쉬케 소싸)와 (프뉴마 소오포이운)을 번역한 문구이다. 이 인용문구의 출처인 창2:7에서 이미 '생령'이라고 번역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결국 그 연속성을 어기지 못하고 (프쉬케)와 (프뉴마)의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다 '영(靈)'으로 번역한 듯하다. 바울이 의도한 바를 살리려면 여기서도 창2:7과 마찬가지로 '산 영' 대신 '살아있는 존재'나 '생명체'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우리 들로 나가자 (창세기 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이 구절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것은 히브리어 원문상의 난해구절도 아니요, 번역상의 문제도 아니다. 다만 사건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간단하여서 무언가 빠진 느낌을 줄뿐이다. 창4:8은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라는 문구로 시작되기 때문에 바로 이어서 가인이 아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록했을 법하지만, 그런 내용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사마리아 오경과 고대 주요 역본들은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다음에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이러한 사본학적 증거들 때문에 최초의 원본에 이 문구가 들어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우리말 역본들중 개역 성경이 아무런 난외주도 없이 맛소라 사본의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옮긴데 반하여,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본문 가운데 이 문구를 끼워놓고 난외주에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한편 이 구절에 대한 한 가지 흥미 있는 주석적 요소는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4:8>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말하였다: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 그들 둘이 들로 나갔을 때에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기에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는데,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지지 않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있구나. 그래서 네 제물은 열납되고 내 제물은 열납되지 않았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고,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진다. 그리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없다. 그러나 내 행실의 열매가 네 것보다 더 좋았기 때문에 내 제물이 네 것을 제치고 열납된 것이다."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없다.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악인에게 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있으며,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고, 악인에게는 벌이 있다." 이 일 때문에 그들은 빈 들판에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마침내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덮쳤다. 그는 돌로 동생의 이마를 쳐서 그를 죽여버렸다.
여기 우리말로 번역하여 인용된 타르굼 내용은 결코 창4:8의 원본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아마도 과거 유대인 사이에 유행하였을 주석적 요소를 반영할 뿐이다. 길게 첨가된 주석적 내용 중에는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도 포함되어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에서도 다시 이 문구가 원래의 히브리어 본문에서 번역된 것인지, 아니면 번역자가 주석적인 요소중 일부분으로서 첨가한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이런 경우에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본문 중에는 이 문구를 넣지 않되, 난외주를 이용하여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된 고대 사본이나 역본들이 있음을 언급해주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물론 예루살렘 타르굼의 긴 주석적 내용을 우리말 역본에 소개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아들들 (창세기 6:1-4)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야웨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神)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6:1-4).
창6:1-4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학자들간에 쉽게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신학계에 구구한 해석사를 남긴 성경 난제중의 난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해 내려오는 여러 해석중 어느 하나가 분명히 맞는 해석이라면, 이 구절은 하나의 난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많은 성경학자들의 그릇된 신학적 사고방식을 반증해주는 사실이 아닐까? 필자는 여러가지 견해를 이 지면에 소개하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옹호 내지는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류의 서적이 이미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히려 본문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통하여 필자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설명하고자 한다. 다른 훌륭한 학자들의 해석을 재현하는 내용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국내의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이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우선 1절의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대하게 된다. 이 낱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하아담'은 정관사 '하'와 명사 '아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 끝에서 '하아담'을 복수형 대명사 어미로 받는 것으로 보아('그들에게서'; 히브리어로 '라헴'), 이것은 고유명사로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보통명사로서 아담으로 시작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딸들'과 역시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2, 4절의 '사람의 딸들'('브노트 하아담')은 인류, 곧 인간 사회에서 태어나는 '딸들'을 가리킴이 너무나 분명하다.
2절과 4절에는 이들 '사람의 딸들'의 상대역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브네 하엘로힘')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여기 말고 욥기에 또 다시 등장한다(욥1:6; 2:1; 38:7). 욥기에서 우리가 문맥을 통하여 분명히 아는 대로, 이 표현은 우리 인간이 아닌 '하늘의 영적인 존재', 소위 '천사들'을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서 단3:25에 아람어로 '바르 엘라힌'이 있는데, 이는 '신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역시 영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시29:1; 89:6(히브리어 성경에서는 89:7)에 나오는 '브네 엘림'은 직역하면 '신들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이 표현 역시 천사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것이 만일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에 관한 언급이라면, 이에 대하여 조물주께서 무언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시고(3절) 또 이러한 혼인 관계로 유별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은(4절)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사 경건한 가문의 아들과 불경건한 집안의 여자, 또는 귀족층 남자와 서민층 여자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결과적 사실을 만족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이처럼 창6:1-4의 본문에서 이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간 세상의 남자를 가리키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으므로 자연히 누군가 '인간 사회' 밖의 존재이어야만 하겠고, 아울러 앞서 제시한 바, 욥기와 기타 유사 문구의 도움을 얻어 얼마든지 '천사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표현 자체와 전체적 문맥을 통하여 이런 식의 유추는 가능하지만, 다만 이러한 이해에 대한 신학적 걸림돌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22:30; 막12:25) 때문에 학자들은 선뜻 상기한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눅20:34-36에서는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좀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이제는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의 사람들을 가리켜 "천사와 같다"고 하신 것은 그들과 천사들이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 밝히 보는대로,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휘오이 테우', ՕՉՏՉ ՈՅՏՕ)이라고 부른 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와 같게 변한 그들의 새로운 신분 때문이 아닐까.
다시 창세기 6장으로 돌아와, 칠십인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에 대하여 '하나님의 천사들'('호이 앙겔로이 투 테우', ՏՉ ՁՃՃՅՋՏՉ ՔՏՕ ՈՅՏՕ)이라는 번역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은 칠십인역 말고도 외경 에녹서(6:1-6)와 요세푸스(유대인 고대사 1권 3장 1절) 등을 통하여도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신약 성경의 몇몇 구절도 창6:1-4의 해석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먼저 벧후2:4-5에서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신' 일과(4절)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홍수로 인간 세상을 멸하신 일'을(5절)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벧전3:19-20의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는 기록 역시 이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구절(벧전3:19-20)을 '그리스도께서 고난 즉 죽음을 부활로 이기신 후, 전에 타락하여서 옥에 갇혀 있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신 것'이라고 본다. 옥에 갇힌 이들 천사들은 벧후2:4("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말고, 유다서 6절("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벧전3:19-20과 벧후2:4-5에서 이들 천사들의 투옥과 홍수 심판 기사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이들 '타락한 천사'라고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특별히 유다서 6절에서 천사 타락을 언급한 후 바로 이어 나오는 7절("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을 통하여, 우리는 천사 타락이 성적인 범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신약 성경의 몇몇 기록은 창6:1-4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해석을 반증하기 보다는 오히려 변증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 영적 존재인 천사가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 다만 우리는 소돔 사람들이 롯을 찾아온 두 천사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기록을 통하여(창19:5; 벧후2:6-8) 이런 가능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따름이다. 천사와 인간의 성적 결합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로 간주되어,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창6:3은 이런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서 하나님이 취하시고자 하는 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무서운 죄악은 비록 악한 천사들로부터 시작되긴 하였으나, 인간('하아담')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 그 안에 죄의 결과를 뿌려놓았기 때문에, 인간 역시 그 죄값을 모면할 수 없게 된다.
창6:3에서 야웨께서 말씀하시는 바 '나의 신(ࠉࠇࠅ࠘)' 곧 '하나님의 영(靈)'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하나님의 생명의 숨(生氣)'(창2:7 참조)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서 보통 '영(靈)'으로 번역되는 '루둽'과 '숨'으로 번역되는 '네샤마'는 동의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사람의 딸들이 악한 천사들의 무질서한 행위에 이용된데 대하여 분노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제동을 거신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영은 육체인 사람 속에 영원히 거하지 아니할 것이다. 여기서 '영원히'란 말은 '레올람'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을 번역한 것으로서, '영원히'라는 뜻도 되지만 '오래도록'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창6:3의 "120년"은 아마도 하나님이 새로 정하신 인간의 수명을 가리킬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대략 900세 정도로 '오래도록'(='레올람') 수명을 누려 왔었다 (창세기 5장의 족보 참조).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 안으로 단축시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타락한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합하여 낳은 자식들은 평범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창6:4에서 히브리어를 소리나는 그대로 음역하여 '네필림'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용사요, 고대에 유명한 자들'이었다. '네필림'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칠십인역('호이 기간테스')을 따라 '거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필림'은 이곳 말고 유일하게 민13:33("거기서 또 네필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에만 등장한다. 민13:33의 상반절을 직역하면,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네필림 중에서 아낙 자손 네필림을 보았다"가 된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이들이 보았다는 아낙 자손은 헤브론에 거하던 세 사람으로서,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라고 그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민13:22, "또 남방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이집트 소안보다 칠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천사와 인간 사이에 특별한 거인이 태어나, 고대에 '용사로서 유명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창6:4의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라는 문구는 이 일이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비정상적인 결합이 언제까지 지속되었을까?' 하는 물음에는 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만일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으로 인하여 이런 일이 중단된 것이라면 모세, 여호수아 시대의 '네필림'(민13:33)은 이런 결합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거인'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창6:1-4에 기록된 사건과 홍수 심판의 연관성이다. 창6:5("야웨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에서는 인간의 죄악이 언급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홍수 심판이 있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서 언급되었다. 창6:1-4에 나오는 바, 타락한 천사의 행위에 대한 기록은 그 위치로 보아, 역시 홍수 심판의 원인 중 하나로서 묘사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들도 입증해주고 있다.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세기 9:18; 10:21)
일반적으로 노아의 세 아들은 셈, 함, 야벳의 순으로 일컬어진다 (창5:32; 6:10; 7:13; 9:18; 10:1; 대상1:4). 대부분의 성경 독자들은 이러한 배열로 인하여 그들의 나이 역시 같은 순서대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노아에게 셈, 함, 야벳의 순서로 아들들이 태어난 것인가? 우리는 성경 본문을 통하여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어 번역본들에 나타나는 성경 오역이 바로 그것이다.
개역 성경은 창5:32을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조그만 글자로 인쇄된 "된 후에"는 원문에 없으므로 문맥을 고려하여 번역문에 삽입한 것이다. 표준새번역 역시 이를 같은 뜻의 "노아는 오백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창5:32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노아가 오백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이다. 이 문장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에 세 쌍둥이가 태어남, 2) 이들 세 아들이 노아가 오백세 되기까지 차례대로 태어남, 3)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 첫 아들이 태어나고 그 다음에 차례대로 다른 두 아들도 태어남. 히브리어 어법상 앞의 두 가지 보다는 세번째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역과 표준새번역 둘다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순서가 꼭 나이에 따른 순서여야 할 이유도 증거도 없다.
다음으로 고찰해야 하는 구절은 창10:21이다. 우선 우리말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개역은 이를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라고 번역함으로써, 개역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번역문은 과연 히브리어 원문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까? 여기서 "야벳의 형"이라고 번역된 문제의 구절을 히브리어 원문 및 고대 번역문인 칠십인역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 두 가지면 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충분하다고 본다.
창10:21의 이 문제의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본문은 ('둺히 예쵛 하가돌')이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와 모음 부호를 무시할 경우 이 히브리어 구절은 두 가지의 직역이 가능하다: 1)'야벳의 큰 형제(brother)', 2)'큰 (자) 야벳의 형제'. 다시 말해서 '크다'('하가돌')라고 하는 형용사가 '야벳'과 '형제' 중 어느 것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이 문구의 해석이 달라진다. '야벳'을 수식할 경우 야벳이 형이 되고, '형제'를 수식하면 셈이 형이 된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 부호의 기능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구두점 역할일 것이다. 맛소라 성경의 엑센트는 여기서 '크다'가 '야벳'을 수식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맛소라 학자들은 야벳을 셈의 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칠십인역 역시 맛소라 학자들의 견해를 지지해준다. 이 구절에 대한 칠십인역의 번역문(ՁՄՅՋՖٍ ԩՁՖՅՈ ՔՏՕ ՌՅՉՆՏՍՏՒ)에 있어서 명사 '야벳'과 형용사 '크다'는 동일한 2격(소유격)을 취하고, '형제'는 3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큰 자'는 셈이 아니라 야벳인 것이다.
셈이 야벳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은 창11:10을 통하여서도 찾아볼 수 있다.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라는 이 기술에 의하면, 셈이 일백세가 된 것은 홍수 후 이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이레 후 곧 2월 17일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40일을 내렸으며 (창7:9-12), 그들이 방주 밖으로 나온 것은 노아가 601세 되던 해 2월 27일이었으니 (창8:14-19), 노아 홍수는 햇수로 볼 때 2년이나 지속된 장기간의 대사건이었다. '홍수 후 2년'('슈나타임 둺하르 하마불')이란 히브리어 문구는 분명히 홍수 사건이 완전히 끝난 후 또 두 해가 흐른 뒤의 일임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에게 노아 나이 600세와 601세의 두 해는 홍수해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그후 두 해(노아 나이 602세와 603세)가 지나, 노아의 나이가 대략 604세가 되던 해에 셈은 나이 100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셈은 노아가 504세가 되던 해에 태어난 셈이 된다. 이상 고찰한 바를 창5:32("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과 묶어서 볼 때, 셈은 결코 노아의 맏아들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증거로서 창9:24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창9:20-27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있을 때 그 아들들이 취한 행동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내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 중에서 분명치 아니한 점은 도대체 함의 아들 가나안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많은 독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저주를 받은 것은 함이 아니요 그의 아들인 가나안이다.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15:16, 19-21 등 참조). 이 저주를 항간에 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흑인 전체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창9:24에 기록되기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하였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작은'('하카탄')을 위하여 '둘째'라는 각주를 덧붙임으로써, 이 아들이 다름 아닌 '함'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함에 대한 저주가 없음을 고려할 때, 여기서 말하는 '그 작은 아들'은 아마도 함이 아니라 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경우, 이 작은 아들이 '행한 일'은 무슨 저주받을(25, 27하반절) 악한 행실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축복을 받아 마땅한(26-27상반절) 아름다운 행실을 가리키게 된다.
이상으로 우리는 야벳이 셈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찰해 보았다. 노아의 세 아들중 다만 함의 연령상의 위치가 확실치가 않다. 창9:24의 '작다'('하카탄')나 10:21의 '크다'('하가돌')라는 형용사가 반드시 최상급으로서 '막내'나 '맏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히브리어 어법을 따라서 최상급으로 이해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 세 아들의 가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야벳(2-5절), 함(6-20절), 셈(21-31절)의 순서로 열거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나이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상의 모든 고찰을 종합하여 가장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야벳은 노아 500세 되던 해에, 함은 노아 502세 되던 해에, 그리고 셈은 노아 504세 되던 해에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불행하게도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번역가와 성경 해석가들은 노아의 세 아들이 셈, 함, 야벳의 차례로 태어났다고 믿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창10:21 본문에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 현대 역본이 그런 것처럼,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맛소라 성경의 히브리어 본문과 고대 역본인 칠십인역을 따를 경우,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철저히 금하시고 있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과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아무리 시험이라고 하지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의혹 때문에 과거 유대인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갖가지 해석을 시도하였다. 여기서는 먼저 고대 유대인들의 해석중 하나를 예루살렘 타르굼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한다.
'타르굼'은 통일적인 하나의 성경 역본이 아니다. 그 시대도 다르거니와 역자 또한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다양한 종류의 '타르구밈'(타르굼의 복수형) 전승이 전해진다. 모세 오경만의 아람어 역본을 두고 볼 때, 온켈로스의 타르굼은 비교적 문자적 번역을 시도한데 반하여,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은 온갖 주석적 요소로 가득차 있어서 주석가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타르굼이라고 하겠다. 이 예루살렘 타르굼은 그 최종 편집이 상당히 늦은 시기에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그 안에 보존된 주석적 요소들중 상당한 부분이 예수님 이전부터 전해진 것들로 추정되기에 이러한 타르굼의 전승은 예수님 당시 구약 성경에 대한 유대인들의 해석을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 연구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창22:1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상당히 흥미있는 주석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우선 그 본문을 우리말로 옮겨 보기로 하자.
이 일들 후에 이삭과 이스마엘이 다투었다. 이스마엘이 말하였다: "내가 장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자 이삭이 말하였다: "내가 아버지 부인 사라의 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너는 내 모친의 여종인 하갈의 자식일 뿐이다." 이스마엘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나는 열 세 살에 할례를 받았으니 너보다 더 의롭다. 만일 내게 거절할 뜻이 있었더라면 나는 얼마든지 할례를 받지 않았었을 것이다." 이삭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나이 지금 서른 일곱이 아니냐. 만일 거룩하시고 찬양받으실 분이 나의 모든 지체를 요구하신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겠다." 그 즉시로 이 말들이 우주의 주께 들려졌고, 또한 그 즉시로 주의 말씀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위에서 보는대로 예루살렘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스마엘이 이삭의 비위를 건드리는 말로 그에게 도전해오자 이삭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적 태도를 주저함없이 발설한다. 자신의 모든 지체라도 주저하지 않고 바치겠다는 이삭의 선언이 결국 이러한 시험의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 이 타르굼의 설명이다. 특별히 아브라함이 시험받을 때 이삭의 나이는 37세로 되어 있다. 이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일을 사라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라는 127세에 죽었으므로(창23:1), 이때 이삭의 나이가 37세가 되는 점에 착안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이삭의 나이를 37세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22:1 본문은 상당히 흥미있는 해석을 보여주긴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은 설명일까 하는 데에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는 고대 유대인 랍비들의 지나친 추측에서 나온 해석이 아닌가 한다. 이와는 달리 요세푸스의 설명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더 설득력이 있다. 요세푸스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시험해 보고자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이때 이삭의 나이를 25세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이때 이삭의 나이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이나 요세푸스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번제 나무를 지우고 산을 오르게 했다는 점으로(창22:6) 미루어 이삭이 결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막 치려하는 순간에 이삭의 반응이 어떠하였을까? 고대 유대인들은 이에 대하여도 관심이 컸다. 먼저 예루살렘 타르굼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다음은 창22:10에 대한 예루살렘 타르굼의 본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손을 내밀어 칼을 집어서 자기 아들을 잡으려 하였다. 이삭이 자기 아버지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영혼이 고통 중에 분투하지 않도록 저를 꼭 붙잡아 매세요. 그래야만 아버지의 제물에 흠이 없겠고 저도 멸망의 구덩이로 던져지지 않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눈은 이삭의 눈을 쳐다보았으나, 이삭의 눈은 저 높이 천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삭은 그들을 볼 수 있었으나, 아브라함은 보지 못하였다. 높은 곳에서 천사들이 화답하였다: "우리 가서 땅 위의 저 두 별난 사람을 보자. 하나는 잡는 자요, 다른 하나는 잡히는구나. 잡는 자는 주저함이 없고, 잡히는 자는 그 목을 길게 내미는구나."
예루살렘 타르굼은 이삭의 순종과 신앙심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세푸스 또한 이에 뒤질세라 이때의 상황을 아브라함과 이삭 부자(父子) 사이의 눈물겨운 대화 내용을 통하여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요세푸스의 경우에도 이삭의 믿음과 순종이 돋보인다.
비록 이런 기록들이 추측에 불과하기는 하겠지만, 이때 이삭의 순종과 믿음에 대하여는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직 40이 되지 않은 젊은 나이의 이삭은 원하기만 하였다면 100세가 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고대 유대인들의 몇몇 성경 해석을 통하여 이삭의 믿음이 돋보이게 묘사된 데 반하여, 신약성경은 창세기 22장과 마찬가지로 이삭 보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7-19)고 하였고, 야고보 역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1)고 역설하고 있다.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애굽기 1:1-5)
야곱과 더불어 이집트에 내려간 야곱 가문 사람들의 숫자는 칠십인역에서 다섯 명이나 더 불어난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의 발언은 칠십인역과 일치한다 (행7:14):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그럼 먼저 문제의 출1:5의 맛소라 성경 및 칠십인역 본문을 직역하여 아래에 옮겨놓기로 하자. 문맥을 볼 수 있도록 맛소라 성경의 1:5 앞에 1:1-4의 내용을 괄호로 묶어 기입해둔다.
(맛소라 성경)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이집트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베냐민, 단, 납달리, 갓, 아셀.)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명인데,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칠십인역)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야곱에게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오인이었다."
출1:5에 있어서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차이점이란 아주 간단하다. 첫째로 두 구절의 순서가 서로 바뀌었고 (칠십인역에서는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가 절의 맨 앞에 나온다), 둘째 인원수 면에서 맛소라 성경에서는 '70명', 칠십인역에서는 '75명'으로 서로 다르다. 여기서 사마리아 오경은 맛소라 성경과 일치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창46:8-27에 나오는 보다 상세한 목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도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을 비교해보기로 하자. 창46:8-27은 내용상 1)레아 소생(8-15절), 2)실바 소생(16-19절), 3)라헬 소생(20-22절), 4)빌하 소생(23-25절), 5)종합(26-27절)으로 쉽게 나뉜다. 8절에서 19절에 이르기까지 표기상의 미미한 차이점을 제하고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은 서로 일치한다. 23-25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라헬 소생'(20-22절)의 명단에 있어서 칠십인역은 맛소라 성경과 차이점을 보이며, 따라서 '종합'(26-27절)에 있어서도 인원상의 차이점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20-22절 나란히 배열해보기로 하자.
맛 소 라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과 아릇이니,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사명이요. |
칠십인역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므낫세의 시리아 여자 첩이 그에게 낳은 아들들은 마길이요, 마길은 길르앗을 낳았다. 므낫세의 동생 에브라임의 아들들은 수델라와 다한이요, 수델라의 아들들은 에뎀이다.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이요, 벨라의 아들들은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이요, 게라는 아릇을 낳았다.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팔명이요. |
위의 표에서 보듯이 칠십인역에는 몇몇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들 삽입문에 대한 정보는 민26:35-36; 대상7:14; 8:3-5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목적은 아마도 창50:22-23("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이집트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의 영향을 받아, 요셉의 자손을 한 두 대(代) 더 보여주고 아울러 부자 관계를 정확하게 밝히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칠십인역에는 다섯 사람의 이름(마길, 길르앗, 수델라, 다한, 에뎀)이 더 들어 있지만 마지막에 '18명'으로 합을 낸 문제점이 보이기도 한다.
26절에 있어서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은 완전히 일치한다: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 륙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이다." 이 숫자에는 야곱 자신, 요셉, 및 요셉의 두 아들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로 다음의 27절에서는 20절에서의 차이점과 관련하여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 사이에 차이점을 보인다.
(맛소라 성경)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명이었더라."
(칠십인역) "이집트 땅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일곱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오명이었더라."
이상을 통하여 칠십인역의 '66명'을 설명하자면, 33(레아의 소생과 야곱을 합한 수) - 1(야곱) + 16(실바의 소생) + 11(베냐민과 그의 자손) + 7(빌하의 소생) = 66이 된다. 그리고 '75명'은 66 + 1(요셉) + 7(요셉의 자손) + 1(야곱)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칠십인역 22절의 '18명'은 어쩔 수 없이 라헬의 소생 중 요셉을 제외한 숫자로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수는 신10:22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이 절의 경우 칠십인역도 '75명'이 아닌 '70명'으로 읽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창세기 46장과 출1:5에 나타나는 사본상 차이점은 칠십인역의 의도적 편집 작업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맛소라 성경이 원래의 본문을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맛소라 성경을 통해볼 때, 창46:8-27의 기록은 몇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야곱의 아내들을 비롯하여 모든 며느리나 손주 며느리 등 여자들이 숫자 계산에 들어오지 못한 반면에(26절 참조), 유일하게 레아의 딸 디나와(15절) 아셀의 딸 세라(17절)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다른 말로 가정을 이루지 아니하고 지낸 것이 아닌가 한다. 디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창세기 34장 참조).
둘째, 레아 소생을 계수함에 있어서 야곱 자신을 포함시켜 그 수는 모두 '33명'에 이른다(15절).
세째,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할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자손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연대를 계산해 볼 경우,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베레스에게 이집트로의 이주를 즈음하여 두 아들이(12절) 이미 생겨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이 무렵 베냐민에게(민26:38-40; 대상7:6-7에 의거, '손자를 포함하여') 열 명의 아들이 생겨났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이들은 틀림없이 이집트로의 이주 후에 태어난 자손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70명'(또는 '75명')은 이집트에 내려간 실제의 정확한 인원이라기 보다는 이집트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민족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 야곱의 자손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출1:5)이라는 문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이러한 히브리적 사고 방식의 타당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히7:9-10 참조: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피 남편 모세 (출애굽기 4:24-26)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야웨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출4:24-26).
출4:24-26의 난점은 히브리어 문장의 번역에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사본학적인 문제도 아니다. 짧으면서도 전후 문맥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간단한 문단은 그 역사적 상황과 그에 대한 배경을 설명함에 있어서 많은 이론들을 만들게 한 성경 난제중의 하나이다.
야웨께서 왜 그리고 어떻게 모세를 죽이려 하셨나? 이러한 일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문맥을 통해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너무나 돌연적이고 이상스럽기까지 하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후, 이미 장인에게 요청하여 그로부터 허락도 받고(출4:18), 또 다시 야웨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는(출4:19), 아내와 두 아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는 중이 아니던가(출4:20)?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출4:22-23): "너는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야웨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이러한 일 다음에 기록된 내용이 바로 본문의 이상한 사건이다.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몇 가지 분명한 사실로는: 1)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심, 2)십보라가 아들 (아마도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할례를 행함, 3)이때야 비로소 모세가 화를 면함, 4)이 일로 십보라가 모세를 '피 남편'이라고 부름 등을 들 수 있다.
모세는 이때까지 자기 '아들'(20절의 복수형과는 달리 여기 25절에서는 단수형으로 언급됨)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무슨 일로 왜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이제까지 할례를 행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물론 첫째인 게르솜의 경우에도(출2:22 참조) 그가 과연 할례를 받았는지에 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모세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의 아내 십보라는 그 이유가 아들의 할례에 있음을 깨닫고는 즉시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로 실제로 모세는 죽음을 면하게 된다.
이때 십보라가 모세를 향하여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고 내뱉는데, 이 말은 한편으로는 일종의 분노와 자포자기가 함축된 말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의 특별한 사명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과 확인으로 들린다.
본래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셔서 그의 후손이 대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언약이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17:9-11). 이 명령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14)는 준엄한 경고로 끝을 맺는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에게만 해당하는 할례 예식은 틀림없이 남자들에 의하여 집행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출4:24-26 본문에서 모세가 아닌 십보라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는 사실 역시 특이하다. 24절의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라는 표현은 아마도 모세가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든가, 아니면 그가 무슨 특별한 위험에 빠져있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순전히 하나님과만 연관시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모세는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 수 없는 상황이었겠고, 자연히 그의 아내인 십보라가 이 일을 집행하여야만 했을 것이다.
아울러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은 모세보다는 십보라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모세는 한때 특별한 사명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지시에 대하여 자기는 부족하다면서 머뭇머뭇한 적이 있다(출3:11; 4:10, 13 참조). 이러한 모세의 태도로 인하여 하나님이 모세에게 노를 발하신 적은 있으나(출4:14 참조), 이런 일로 그를 죽이려 하신 것 같지는 않다. 더군다나 출4:24-26 본문에서는 모세의 위기에 대하여 할례가 주된 원인임을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에서는 십보라에 대하여 별 기록을 담고 있지 않다. 아마도 십보라로서는 그녀의 남편 모세에게 부여된 특별한 사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이행한다는 것이 모세 본인 못지 않게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멀리 이집트에서부터 '굴러 온 복'을 어찌 하루 아침에 놓칠 수 있으랴. 두 아들과 함께 남편을 따라 낮선 땅 이집트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너무나 처절하고 무거웠던 것이 아닐까? 남편이 구해야 하는 백성은 자기의 민족이 아니요 남편의 민족일 뿐이요, 이집트는 자기의 사랑하는 남편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 아니던가.
성경은 이집트로 향하는 모세의 가정, 아니 모세와 그의 아내 사이에 교차되는 감정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이처럼 유추해보는 수 밖에 없다. 두 아들은 그만 두고라도 아내 십보라의 마음 속에 있는 온갖 감정과 생각은 모세의 마음을 충분히 괴롭히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 모세와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들의 두 아들은 - 이집트로 향한다.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준엄하고도 분명한 명령 때문에.
이때 길의 숙소에서 일어난 사건은 모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십보라에게도 하나님이 내리신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준엄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로서 십보라는 자기 남편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할례의 집행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기 남편, 더 나아가서는 자기 남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중요성과 엄숙함을 재확인한다. 바로 이 언약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이 '사지'(死地)로 명령을 받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십보라는 이 냉정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 자기 아들의 양피를 베어 피를 냄으로써.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는 그녀의 외침은 그녀의 이러한 심경을 잘 대변해준다고 하겠다.
'피와 죽음'이란 관계를 두고 볼 때, 이 사건은 성경의 다른 몇몇 기록과도 연관성을 가진다. 우선 앞서 언급한대로 바로 앞의 출4:22-23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 재앙은 출애굽기 12장에 묘사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죽음을 면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간접적이긴 하지만 모세의 아들의 피가 모세의 개인적인 재앙을 면하게 하였다. 모세의 둘째 아들 엘리에셀의 이름을 설명하는 구절에서도 또한 다소나마 이런 맥락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파라오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출18:4).
출4:24-26에 기록된 사건으로 인하여 모세는 십보라와 두 아들을 장인에게로 돌려보내고 홀로 이집트로 떠난 것 같다. 그래서 출18:2-6에서 우리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 보내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 두 아들을 데렸으니.....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 아내로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 그가 모세에게 전언하되 그대의 장인 나 이드로가 그대의 아내와 그와 함께한 그 두 아들로 더불어 그대에게 왔노라"라는 기록을 보게 된다. 아마도 모세는 이 일을 통하여, 자기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신 하나님의 엄정(嚴正)하심과 그의 분명하신 목적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고는, 다시는 거역하거나 주저함이 없이 철저히 순종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인간 가운데 하나님의 강림(降臨)이 있다는 사실은 피조계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관심 내지는 간섭을 의미한다. 사실상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와 더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의 역사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신다. 이러한 간섭은 인간편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간을 지으신 이후로 인간을 그대로 두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강림 또는 임재(유대인들은 이를 가리켜 전문 용어로 '슈키나' 라고 한다)에 관하여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다. 구약 성경 중에서 하나님의 강림에 관한 기록중 가장 중요한 곳을 찾으라면 역시 출애굽기 19장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19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강림은 어느 개인이나 소수의 몇몇 사람 또는 작은 무리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목격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임하였다.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도 구름을 동반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 놀라운 광경 앞에서 두려움으로 떨며 모세의 중재를 요구하였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나타나신 것은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게끔 하는 목적이 있었다(출19:9; 20:20).
이제 필자가 고찰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강림에 관하여 출애굽기 19장에 기록한 사건이 시간적으로 언제 있었던 일이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출19:1)는 우리말 개역성경을 읽을 때, 정확하게 언제를 가리키는지 분명치가 않다. 여기 '제 삼월'중 '월(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데쉬'는 본래 '새롭다'라는 뜻에서 파생하여 '매월 달이 새로 뜨기 시작하는 월삭(月朔)'(new moon)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가 '월삭'을 뜻하는 경우로는 민29:6; 삼상20:5, 18, 24, 34; 왕하4:23; 사1:13; 겔46:1, 6; 암8:5; 시81:4 등을 들 수 있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총 281회 출현하는 이 단어는 그중 22회의 경우만 '월삭'의 뜻으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모두 '달'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그 때에'로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다시 직역하면 '이 날에'가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호데쉬'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월삭'의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출19:1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광야에 도착하여 시내산 앞에 장막을 친 것은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계산하여 제3월이 되는 바로 그날'이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이러한 해석을 근거로 하여 출19:1에 아예 '초하룻날'이라는 문구를 첨가하여, 각각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표준새번역)와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공동번역)로 번역하였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간'(출19:3) 날은 아마도 이제까지 설명한 '제3월 1일'이거나, 아니면 그 다음날일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말씀을 들은(출19:4-6) 모세는 이를 백성의 장로들에게 전해주고는(출19:7) 다시 백성의 반응을 하나님께 회보한다(출19:8). 출19:4-8에 기록된 일들이 모두 마치기까지는 아마도 하루 이틀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모세로부터 회보를 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앞에서 영광중에 나타나실 계획을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야웨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야웨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출19:10-11). 마침내 하나님이 말씀하신 "제3일 아침에 산 위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있었고, 심히 큰 나팔소리도 울려퍼졌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동반한 이 무서운 광경으로 인하여 "진중의 모든 백성은 다 두려워 떨었다" (출19:16).
첫째 달인 아빕월(출12:2 참조) 14일 저녁에 어린 양을 잡아 먹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출12:6-9 참조)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 그날 밤(아마도 제1월 15일 새벽, 출12:29-42 참조) 이집트를 떠났다. 성경의 역법을 따라 계산할 경우,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떠난 날(제1월 15일)로부터 하나님이 시내산에 나타나신 날(대략 제3월 3~6일 사이)까지는 대략 50일이 된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신 날을 오순절로 믿고 있다. 사실 이러한 계산은 거의 틀림없이 맞는 것이다. 오순절은 봄에 첫 곡식을 수확하여 첫 이삭 한 단을 흔들어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레23:15-16). 문제는 첫 이삭 한 단을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이 언제냐 하는 것인데, 레23:11, 15에 '안식일 이튿날'이라고 한 이 날은, 그 문맥상 유월절/무교절과 나란히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계산이 맞다면 오순절은 무교절중에 들어있는 일요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무교절중에 이집트를 나왔으므로, 그로부터 대략 50일이 지난 날은 오순절이 될 가능성이 크다.
모두가 아는 바대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교회 중에 강림하신 날도 바로 오순절이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이날 교회 위에 임하신 성령은 각 믿는 이의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삶을 인도하신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은 언제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탄절(개신교와 천주교의 12월 25일)은 성경 및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으로서, 일단 무시할 필요가 있다. 성경 연대기 학자 폴스틱(Eugene Faulstich, Witnesses for Jesus the Messiah, Spencer, 1989)은 여러 가지 역사 및 천문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을 (그레고리 역법으로 환산하여) 주전 6년 5월 14일로 제시하고 있다. 폴스틱이 제시한 유력한 근거들중 하나는 초대교부중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예수님의 탄생일자를 이집트 역법에 따라서 '파콤월 25일'로 기록한 것(The Stromata I.xxi)이다. 폴스틱은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태어난지 제8일, 곧 그가 할례받은 날이 바로 오순절이었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인용한 책, 6쪽).
만일 출애굽기 19장을 통하여 우리가 살펴본 연대기 재구성과 예수님의 탄생에 관련하여 폴스틱이 도출해낸 결론이 맞는 것이라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강림은 모두 오순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오순절의 의미를 재삼 강조하면서 되새길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왕 나온 김에 사도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마침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여기서 '가운데'라는 말은 '어느 개인 안에'가 아니라 '무리 중에'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시내산에서 성부 하나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에 오실 때 빽빽한 구름으로 임하지 아니하시고,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서 쓸쓸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고백하고 있다. 요한은 산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시던 날 온 누리를 덮었던 그 빛난 구름을(마17:1-8; 막9:2-8; 눅9:28-36 참조)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을 보았던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름으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요한은 이 사실에 감사 감격하여 이 글을 기록하고 있으며, 자신의 기록을 읽는 이들이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를 믿을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시내산 사건보다 더욱더 놀라운 일로서 하나님이 자신의 위엄을 가리시고 은혜와 진리로써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처음 오셨을 때의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그가 다시 오실 때는 현저한 하나님의 영광중에 오신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가 다시 오실 때 다음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3-4).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위기 1:1-17)
레위기 제1장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코르반) 중 번제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다른 예물이나 희생 제사에서도 그렇거니와 희생물로서 사용되는 동물은 제한되어 있다. 동물의 분류 내지 명칭에 있어서 히브리어는 우리 말과 약간 다르기 때문에 우리 말 성경 독자에게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번제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동물은 크게 '가축'과 '새'로 나뉜다. 가축중에는 '소'와 '양떼'('쫀')가 가능한데(1:2), 다같이 '흠 없는 수컷'이어여 한다(1:3, 10). '쫀' 중에는 다시 '양과 염소'가 가능하다(1:10). 이런 분류는 레3:1, 6, 7, 12; 5:6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독자는 레1:2, 10; 3:6; 5:6 등의 '쫀'은 1:10; 3:7의 '케쎄브'와는 달리, 양과 염소를 모두 포함하는 낱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성경에 일반적으로 '양(羊)'이라고 번역되는 낱말 '쫀'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 떼를 두루 가리키는 집합 명사이다. 한편 '쎄'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항상 단수로만 사용되고, '쫀'은 항상 복수로서 사용된다. 따라서 '쫀'은 '쎄'의 복수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30:32은 단수와 복수로서 이 두 낱말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쫀')로 두루 다니며 그 양('쎄') 중에 아롱진 자와 점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히브리어 '쫀'과 우리말 '양떼'의 의미 영역이 서로 다른만큼, 자연히 여기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읽을 경우, 레1:2에서 "누구든지 야웨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라고 읽은 독자는 레1:10의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혹시 염소가 추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10절의 '떼'는 2절의 '양'과 더불어 다같이 히브리어 '쫀'을 번역한 것이요, 한편 10절의 '양'은 히브리어 '케쎄브'를 번역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번역상의 난점은 출12:3, 5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출12:3에서 히브리어 낱말 '쎄'에 대하여는 개역과 표준새번역 공히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뒤의 5절을 통하여 볼 때, 이 낱말은 여기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를 다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 말에 양과 염소를 다같이 가리킬 수 있는 단어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 번역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확한 의미는 문맥(이 경우에는 출12:5)을 통하여 파악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우리말 개역의 경우 3절과 5절 모두에서 '쎄'를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반하여, 표준새번역의 경우 3절에서는 '어린 양'으로 5절에서는 '짐승'으로 서로 달리 번역되어 있다. 필자에게도 무슨 묘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개역이든 표준새번역이든 번역문만을 읽는 독자들에게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나답과 이비후의 죽음 (레위기 10:1-2)
레위기 8장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제사장 위임식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모세의 주재하에 열리는 이 위임식은 7일 동안 물로 씻기고, 옷을 입히고, 관유를 바르고, 속죄제와 번제와 위임제를 바치고, 피를 뿌리고, 식사하는 일 등이 반복된다(레8:6-34). 레위기 9장은 7일 동안의 위임식이 끝난 후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제8일에 처음으로 시행하는 일종의 취임식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이날 행사는 아론의 주관하에 거행된다. 그리고 이 날의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는 8장의 위임식과는 달리 이전에 명령을 받은 바가 없고, 새롭게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 날 취임식을 위한 준비가 마친 후,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8-11절), 아론의 아들들을 위한 번제(12-14절), 백성을 위한 각종 제사(15-21절)가 집행된다. 그리고는 아론의 축복과 하나님의 응답이 뒤따른다(22-24절).
레위기 10장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모든 제사를 마치고 제사장 응식을 먹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성경은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죽임당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나 그 상황 설명이 그리 명료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먼저 레10:1-2의 기록을 여기에 옮겨 놓기로 하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야웨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야웨 앞에서 죽은지라."
여기 '다른 불'이란 히브리어 표현 '에쉬 사라'를 옮긴 것이다. 이 표현은 역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 민3:4; 26:61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본문들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나답과 아비후는 '야웨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하여 많은 주석가들은 '불을 번제단에서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화를 입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번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향로에 채워서 분향하라'(레16:12)는 지시는 사실상 이 사건 이후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레16:1 참조). 그리고 역시 이 사건 이후, 고라 무리의 반역이 있었을 때,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취하고 (번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고 명한 적이 있다(민16:46). 이 두 경우 외에 "단 위의 불을 가져다가 향로에 담는 장면"은 마지막으로 신약 성경의 계8:5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고찰해 볼 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이유를 단순히 '다른 불', 곧 일부 주석가들이 말하는 바, '번제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불을 취하여 분향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시원한 대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비합법적인 분향' 때문이라고 한다. 출30:9의 "너희는 그[=분향단] 위에 다른 향('크토레트 사라')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라"는 명령은 이 사건 이전에 있었던 지시이다. 이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예를 들어, Keil & Delitzsch, Levine) 출30:9와 레위기 10장 본문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하면서, '다른 향을 살라 바치는' 행위를 얼마든지 '다른 불을 드리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위의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나답과 아비후가 죽게 된 데에는 단순히 이들 두 가지중의 어느 하나나 또는 두 가지 이유 모두로 인한 것 이상으로 더 복합적인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레16:1에 "아론의 두 아들이 야웨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야웨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이어 야웨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론에게 지시하신 말씀이 적혀 있다: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레16:2-4). 이 말씀을 통해 볼 때에, 아론의 두 아들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방자하게 지성소로 들어 가려다가(또는, 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시는 올바른 분향 방법에 대한 말씀으로까지 계속된다: "향로를 취하여 야웨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야웨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다" (레16:12-13).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술에 관한 지시를 내리셨다는 사실이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레10:9). 우리는 이 구절만 가지고는 이 날 과연 나답과 아비후가 술을 마시고 회막에 들어간 것인가 하는 여부를 판가름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날의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후손에게 술에 관하여 엄명을 내리셨다는 점이다. 나답과 아비후의 음주 여부는 그만 두고라도, 적어도 이 날 두 사람은 회막 안에서 무언가 경망된 짓을 하였기에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경망된 행동이 혹시 음주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보게 된다.
아울러 이 일 후에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레10:3)고 하신 야웨의 말씀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 그에게 가까이 할 수 있는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자세와 태도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나답과 아비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두 사람이 회막 안에서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일을 저질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야웨의 불'은 그분께 가까이 하여 그분이 원하시는대로 제사하는 이들의 제물을 사름으로써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환희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레9:22-24 참조: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야웨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동일한 '야웨의 불'은 그분 앞으로 방자하게 나아오는 자는 가차없이 불살라 처벌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형벌은 고라 무리의 반역 사건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민수기 16장).
오멜 절기와 부활 (레위기 23:9-14)
처음 난 것으로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친 것은 비단 사람이나 짐승 뿐만은 아니다. 율법은 식물의 첫 열매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칠 것을 명하고 있다(출23:19; 34:26). 여기서 토지 소산이라 함은 각종 곡물과 과일 및 올리브 기름 등 일체의 농산품을 가리킨다(민18:12 참조). 레위기에서는 특별히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전에 첫 이삭 한 단(= '오멜')을 야웨께 바칠 것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야웨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레23:10-14).
칠칠절 곧 오순절의 날자는 이 첫 이삭을 바치는 날에 달려있다. 15-16절에 의하면 칠칠절은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결정된다. 물론 해마다 기후나 기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 첫 이삭을 거두는 날이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유월절은 대략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의 4월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의 곡물(주로 보리와 밀) 추수는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에 거의 이루어진다. 이 사실은 첫 이삭 단을 바치는 날이 유월절 또는 무교절과 시간상으로 밀착되어 있음을 설명해준다.
'오멜'을 흔드는 날, 곧 레23:11, 15의 '안식일 이튿날'에 관하여는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학자들간에 논란이 많다. 필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하여 이 '첫 이삭 한 단'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흔드는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찌기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암시적으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유월절 기간에 죽으시고 안식후 첫날에 다시 살아나셨다. 죽은지 사흘만에 살아나셨으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은 무교절 한 주간 중의 일요일이 될 것이다. 레위기 23장에서 '오멜'을 굳이 '안식일 이튿날'(이 표현은 민33:3; 수5:11의 '유월절 다음날'과는 구분됨)에 드리라고 한 것은 이 구절이 다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상징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레23:11의 '안식일 이튿날'은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고전15:20). 바울이 사용한 '첫 열매'라는 낱말 역시 구약 성경의 냄새를 물씬 풍겨준다. 과거 바리새인으로서 율법 연구에 혼신의 노력을 쏟았던 바울인지라 율법의 구절구절이 그의 머리 속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언급하면서 율법의 첫 소산에 대한 규례를 염두에 두었음에 틀림없다. 이상의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레위기 23장의 '오멜'과 관련시킬 수 있고, 또 그 날짜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오멜' 절기가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이듯이(레23:14),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히 기념할 날이다.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모세의 율법 가운데 안식년과 희년(禧年) 제도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안식년과 희년을 산정하는데 있어서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7'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정확한 산출 방법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견해 차이를 보인다. 먼저 안식년의 기간과 관련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야웨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레25:3-5).
이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성경의 역법(曆法)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의 역법에서는 해의 주기(=365.242196일)와 달의 주기(=29.530588일)가 함께 사용된다. 해의 주기는 날과 해(年)의 기준이 되고, 달의 주기는 절기와 달(月)의 기준으로 쓰인다. 1주일 7일의 개념과 하루가 대략 해질 무렵인 오후 6시에 시작한다는 점은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되었다. 12달의 이름은 차례대로 1)니싼 또는 아빕, 2)십 또는 이얄, 3)씨반, 4)타무스, 5)아브, 6)엘룰, 7)에타님 또는 티슈리, 8)불 또는 마르헤스반, 9)키슬레브, 10)테ꕛ, 11)셰밭, 12)아달이고, 13)베아달은 윤달이다. 달이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날이 초하루가 되고 완전히 그믐달로 변할 때가 그 달의 마지막 날이 되기 때문에, 1년의 기준이 되는 해의 주기와 맞추기 위하여 윤달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 역법에 따른 한 해는 니싼월(봄)에서 시작하여 다시 니싼월로 돌아오는 주기를 취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서 1년중 농업의 주기는 제7월, 곧 티슈리월(그레고리력의 9-10월에 해당)에 시작하여 그 다음해 티슈리월에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주요한 농산품인 보리와 밀과 포도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자면, 티슈리월에 시작되는 밭갈기와 (보리 및 밀)씨뿌리기, 니싼월에서 씨반월 사이에 걸친 보리와 밀 수확, 티슈리월에 끝나는 포리 수확의 순서가 된다. 레25:3을 따라, '6년 동안 파종하며 6년 동안 과수원을 관리할' 경우 제6년에 수고한 결과는 제7년 니싼월에 시작하여 티슈리월 이전까지 거두게 된다. 따라서 땅은 안식년 첫 달(니싼월)부터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7월(티슈리월)부터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다음으로 희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희년 산정에 관하여 레25:8-9은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라고 밝히고 있다. 이 구절은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희년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레25:10-11("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의 '제 오십년' 때문에 희년을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아니라, 그 다음 해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럴 경우 희년이 끼는 주기는 7년 동안에 안식년(희년도 일종의 안식년임)이 두 번씩 발생할 수 있으므로 농업상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레25:10-11의 '제 오십년'은 한 희년을 '제1년'으로 계산할 경우 다음 희년이 '제50년'이 되므로 얼마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로 인정하는 우리 한국인들의 나이 계산법과 비교해보면 이런 계산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희년을 매 '일곱번 째의 안식년'과 동일한 때로 이해할 때, 희년과 관련된 많은 의문점들이 사라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농업주기로 인하여 안식년이 사실상 제7년 제7월(티슈리월)에 시작하는 것처럼, 희년 역시 '일곱번 째의 안식년' 제7월, 곧 티슈리월 10일에 나팔을 크게 분 후 시작하게 된다. 구약 성경 난제(I)-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Old Testament Difficult Passages I
-Genesis, Exodus, Leviticus-
저자: 김경래 Author: Kyungrae Kim, Ph.D.
펴낸 곳: 도서출판 대장간 Publisher: Daejanggan Press (Anyang, Korea)
초판일:1998년 8월 25일
목 차 Contents
머리글
제1부. 창세기 난제
창세기 1장에 대한 언어학적 고찰 (창1:1-31)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 (창1:26; 3:22; 11:7)
온 지표면을 적신 큰 물덩어리 (창2:6)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2:7)
선과 악을 안다는 것 (창2:9, 17; 3:5, 22)
여자의 후손과 뱀 (창3:15)
생명나무와 영생 (창3:22-24)
가인의 출생에 대하여 (창4:1)
창4:7의 올바른 번역과 이해 (창4:7)
우리 들로 나가자 (창4:8)
야웨의 이름을 부르다 (창4:26)
하나님의 아들들 (창6:1-4)
노아 방주에 들어간 동물의 수 (창6-7장)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9:18; 10:21)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 (창5:3-32; 11:10-32)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언제 죽었나? (창11:32)
이스마엘의 운명에 관한 예고 (창16:12)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에서에 대한 예언 (창27:39-40)
야곱과 천사의 씨름 (창32:24-30)
요셉의 노예 정책 (창47:21)
세겜을 한몫 더 받은 요셉 (창48:22)
요셉에 관한 예언 (창49:22-26)
제2부. 출애굽기 난제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1:1-5)
모세의 미디안 생활과 이집트 왕의 죽음 (출2:23)
하나님의 이름 '야웨' (출3:14)
이집트 탈출을 위한 광야 사흘길 (출3:18; 5:1-3; 8:27)
피 남편 모세 (출4:24-26)
유월절의 제정과 그 의미 (출12:1-14)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시간 (출12:6)
이스라엘 자손의 이집트 체류기간 (출12:40-41)
만나의 정체 (출16:13-36)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가축으로 인한 농작물 손상 (출22:5)
염소 새끼와 어미젖 (출23:19)
우림과 둠밈 (출28:30)
하나님의 약속과 그 위기 (출애굽기 32장)
야웨의 책 (출32:32-33)
모세의 또 다른 회막? (출33:7-11)
이름으로 아는 것 (출33:12, 17)
제3부. 레위기 난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레위기 1-3장)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1:1-17)
제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제사장의 몫 (레1:9, 13 등)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레4:1-6:7)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레10:1-2)
성경의 '문둥병' (레위기 13-14장)
유출에 대한 규례 (레위기 15장)
이스라엘 자손이 섬기던 수염소 (레17:7)
오멜 절기와 부활 (레23:9-14)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십일조의 의미 (레27:30-33)
참고 문헌
'생명체'로서의 인간 (창세기 2:7)
"야웨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우리말 개역 성경에 등장하는 이 창2:7에 대한 번역문은 일반 독자들이나 심지어는 설교자들에게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말하는 이 오해란 앞서 창세기 1장에서 다른 동물들을 단순히 '생물'이라고 부른데 반하여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생령'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우리말에 있어서도 '생령'(生靈)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생령'(生靈)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네페쉬 하야'인데, 이는 이미 창1:20, 21, 24, 30에서도 나오는 표현으로서 개역 성경은 그곳들에서 '생물'이나(1:20, 21, 24) 또는 단순히 '생명'으로(1:30)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네페쉬 하야'란 표현은 또 창2:19; 9:10, 12, 15, 16에도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인간 외의 동물계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다른 동물과 동일한 '네페쉬 하야'인 우리 인간을 달리 표현하고자 만들어낸 '생령'이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에게 그릇된 생각을 조장할 수 있는 것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번역문이라고 하겠다. 이 경우 오히려 표준새번역의 '생명체'라는 번역이 훨씬 더 적합한 번역문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라는 표현은 인간과 다른 동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페쉬 하야'라고 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2:7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그 안의 '생령'이라는 번역문을 버리고, '살아있는 존재' 내지는 '생명체'라는 번역문을 가지고 읽을 때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생명체'가 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호흡'이 필요한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칠십인역에서는 창2:7의 '네페쉬 하야'를 다른 경우에서처럼, (프쉬케 소싸)로 번역하였다. 헬라어에서 이것은 인간 뿐 아니라 인간 외 모든 동물계까지 가리킬 수 있는 표현이다. 칠십인역에서 '네페쉬 하야'의 '네페쉬'를 보통 '영(靈)'을 뜻하는 (프뉴마)로 번역하지 않고 그것과 구분되는 (프쉬케)로 번역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번역을 적절히 활용하여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고전15:45).
개역 성경은 고전15:45을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읽고 있다. 여기서 '산 영'과 '살려주는 영'은 각각 (프쉬케 소싸)와 (프뉴마 소오포이운)을 번역한 문구이다. 이 인용문구의 출처인 창2:7에서 이미 '생령'이라고 번역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결국 그 연속성을 어기지 못하고 (프쉬케)와 (프뉴마)의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다 '영(靈)'으로 번역한 듯하다. 바울이 의도한 바를 살리려면 여기서도 창2:7과 마찬가지로 '산 영' 대신 '살아있는 존재'나 '생명체'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우리 들로 나가자 (창세기 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이 구절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것은 히브리어 원문상의 난해구절도 아니요, 번역상의 문제도 아니다. 다만 사건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간단하여서 무언가 빠진 느낌을 줄뿐이다. 창4:8은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라는 문구로 시작되기 때문에 바로 이어서 가인이 아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록했을 법하지만, 그런 내용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사마리아 오경과 고대 주요 역본들은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다음에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이러한 사본학적 증거들 때문에 최초의 원본에 이 문구가 들어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우리말 역본들중 개역 성경이 아무런 난외주도 없이 맛소라 사본의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옮긴데 반하여,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본문 가운데 이 문구를 끼워놓고 난외주에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한편 이 구절에 대한 한 가지 흥미 있는 주석적 요소는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4:8>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말하였다: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 그들 둘이 들로 나갔을 때에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기에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는데,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지지 않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있구나. 그래서 네 제물은 열납되고 내 제물은 열납되지 않았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이 세상은 자비로 창조되었고, 선행의 열매로 다스려진다. 그리고 심판함에 있어서 치우침이 없다. 그러나 내 행실의 열매가 네 것보다 더 좋았기 때문에 내 제물이 네 것을 제치고 열납된 것이다." 가인이 대답하여 아벨에게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없다.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악인에게 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벨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심판도 심판자도 다른 세계도 있으며, 의인에게 좋은 상급이 있고, 악인에게는 벌이 있다." 이 일 때문에 그들은 빈 들판에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마침내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덮쳤다. 그는 돌로 동생의 이마를 쳐서 그를 죽여버렸다.
여기 우리말로 번역하여 인용된 타르굼 내용은 결코 창4:8의 원본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아마도 과거 유대인 사이에 유행하였을 주석적 요소를 반영할 뿐이다. 길게 첨가된 주석적 내용 중에는 '오라. 우리 함께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도 포함되어 있다. 예루살렘 타르굼에서도 다시 이 문구가 원래의 히브리어 본문에서 번역된 것인지, 아니면 번역자가 주석적인 요소중 일부분으로서 첨가한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이런 경우에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본문 중에는 이 문구를 넣지 않되, 난외주를 이용하여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문구가 삽입된 고대 사본이나 역본들이 있음을 언급해주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물론 예루살렘 타르굼의 긴 주석적 내용을 우리말 역본에 소개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아들들 (창세기 6:1-4)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야웨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神)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6:1-4).
창6:1-4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학자들간에 쉽게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신학계에 구구한 해석사를 남긴 성경 난제중의 난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해 내려오는 여러 해석중 어느 하나가 분명히 맞는 해석이라면, 이 구절은 하나의 난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많은 성경학자들의 그릇된 신학적 사고방식을 반증해주는 사실이 아닐까? 필자는 여러가지 견해를 이 지면에 소개하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옹호 내지는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류의 서적이 이미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히려 본문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통하여 필자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설명하고자 한다. 다른 훌륭한 학자들의 해석을 재현하는 내용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국내의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이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우선 1절의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대하게 된다. 이 낱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하아담'은 정관사 '하'와 명사 '아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 끝에서 '하아담'을 복수형 대명사 어미로 받는 것으로 보아('그들에게서'; 히브리어로 '라헴'), 이것은 고유명사로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보통명사로서 아담으로 시작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딸들'과 역시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2, 4절의 '사람의 딸들'('브노트 하아담')은 인류, 곧 인간 사회에서 태어나는 '딸들'을 가리킴이 너무나 분명하다.
2절과 4절에는 이들 '사람의 딸들'의 상대역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브네 하엘로힘')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여기 말고 욥기에 또 다시 등장한다(욥1:6; 2:1; 38:7). 욥기에서 우리가 문맥을 통하여 분명히 아는 대로, 이 표현은 우리 인간이 아닌 '하늘의 영적인 존재', 소위 '천사들'을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서 단3:25에 아람어로 '바르 엘라힌'이 있는데, 이는 '신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역시 영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시29:1; 89:6(히브리어 성경에서는 89:7)에 나오는 '브네 엘림'은 직역하면 '신들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이 표현 역시 천사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것이 만일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에 관한 언급이라면, 이에 대하여 조물주께서 무언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시고(3절) 또 이러한 혼인 관계로 유별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은(4절)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사 경건한 가문의 아들과 불경건한 집안의 여자, 또는 귀족층 남자와 서민층 여자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결과적 사실을 만족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이처럼 창6:1-4의 본문에서 이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간 세상의 남자를 가리키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으므로 자연히 누군가 '인간 사회' 밖의 존재이어야만 하겠고, 아울러 앞서 제시한 바, 욥기와 기타 유사 문구의 도움을 얻어 얼마든지 '천사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표현 자체와 전체적 문맥을 통하여 이런 식의 유추는 가능하지만, 다만 이러한 이해에 대한 신학적 걸림돌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22:30; 막12:25) 때문에 학자들은 선뜻 상기한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눅20:34-36에서는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좀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이제는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의 사람들을 가리켜 "천사와 같다"고 하신 것은 그들과 천사들이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 밝히 보는대로,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휘오이 테우', ՕՉՏՉ ՈՅՏՕ)이라고 부른 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와 같게 변한 그들의 새로운 신분 때문이 아닐까.
다시 창세기 6장으로 돌아와, 칠십인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에 대하여 '하나님의 천사들'('호이 앙겔로이 투 테우', ՏՉ ՁՃՃՅՋՏՉ ՔՏՕ ՈՅՏՕ)이라는 번역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은 칠십인역 말고도 외경 에녹서(6:1-6)와 요세푸스(유대인 고대사 1권 3장 1절) 등을 통하여도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신약 성경의 몇몇 구절도 창6:1-4의 해석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먼저 벧후2:4-5에서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신' 일과(4절)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홍수로 인간 세상을 멸하신 일'을(5절)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벧전3:19-20의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는 기록 역시 이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구절(벧전3:19-20)을 '그리스도께서 고난 즉 죽음을 부활로 이기신 후, 전에 타락하여서 옥에 갇혀 있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신 것'이라고 본다. 옥에 갇힌 이들 천사들은 벧후2:4("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말고, 유다서 6절("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벧전3:19-20과 벧후2:4-5에서 이들 천사들의 투옥과 홍수 심판 기사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이들 '타락한 천사'라고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특별히 유다서 6절에서 천사 타락을 언급한 후 바로 이어 나오는 7절("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을 통하여, 우리는 천사 타락이 성적인 범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신약 성경의 몇몇 기록은 창6:1-4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해석을 반증하기 보다는 오히려 변증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 영적 존재인 천사가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 다만 우리는 소돔 사람들이 롯을 찾아온 두 천사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기록을 통하여(창19:5; 벧후2:6-8) 이런 가능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따름이다. 천사와 인간의 성적 결합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로 간주되어,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창6:3은 이런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서 하나님이 취하시고자 하는 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무서운 죄악은 비록 악한 천사들로부터 시작되긴 하였으나, 인간('하아담')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 그 안에 죄의 결과를 뿌려놓았기 때문에, 인간 역시 그 죄값을 모면할 수 없게 된다.
창6:3에서 야웨께서 말씀하시는 바 '나의 신(ࠉࠇࠅ࠘)' 곧 '하나님의 영(靈)'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하나님의 생명의 숨(生氣)'(창2:7 참조)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서 보통 '영(靈)'으로 번역되는 '루둽'과 '숨'으로 번역되는 '네샤마'는 동의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사람의 딸들이 악한 천사들의 무질서한 행위에 이용된데 대하여 분노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제동을 거신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영은 육체인 사람 속에 영원히 거하지 아니할 것이다. 여기서 '영원히'란 말은 '레올람'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을 번역한 것으로서, '영원히'라는 뜻도 되지만 '오래도록'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창6:3의 "120년"은 아마도 하나님이 새로 정하신 인간의 수명을 가리킬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대략 900세 정도로 '오래도록'(='레올람') 수명을 누려 왔었다 (창세기 5장의 족보 참조).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 안으로 단축시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타락한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합하여 낳은 자식들은 평범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창6:4에서 히브리어를 소리나는 그대로 음역하여 '네필림'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용사요, 고대에 유명한 자들'이었다. '네필림'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칠십인역('호이 기간테스')을 따라 '거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필림'은 이곳 말고 유일하게 민13:33("거기서 또 네필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에만 등장한다. 민13:33의 상반절을 직역하면,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네필림 중에서 아낙 자손 네필림을 보았다"가 된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이들이 보았다는 아낙 자손은 헤브론에 거하던 세 사람으로서,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라고 그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민13:22, "또 남방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이집트 소안보다 칠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천사와 인간 사이에 특별한 거인이 태어나, 고대에 '용사로서 유명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창6:4의 "당시에 땅에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라는 문구는 이 일이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비정상적인 결합이 언제까지 지속되었을까?' 하는 물음에는 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만일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으로 인하여 이런 일이 중단된 것이라면 모세, 여호수아 시대의 '네필림'(민13:33)은 이런 결합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거인'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창6:1-4에 기록된 사건과 홍수 심판의 연관성이다. 창6:5("야웨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에서는 인간의 죄악이 언급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홍수 심판이 있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서 언급되었다. 창6:1-4에 나오는 바, 타락한 천사의 행위에 대한 기록은 그 위치로 보아, 역시 홍수 심판의 원인 중 하나로서 묘사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들도 입증해주고 있다.
노아 세 아들의 연령별 순서 (창세기 9:18; 10:21)
일반적으로 노아의 세 아들은 셈, 함, 야벳의 순으로 일컬어진다 (창5:32; 6:10; 7:13; 9:18; 10:1; 대상1:4). 대부분의 성경 독자들은 이러한 배열로 인하여 그들의 나이 역시 같은 순서대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노아에게 셈, 함, 야벳의 순서로 아들들이 태어난 것인가? 우리는 성경 본문을 통하여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어 번역본들에 나타나는 성경 오역이 바로 그것이다.
개역 성경은 창5:32을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조그만 글자로 인쇄된 "된 후에"는 원문에 없으므로 문맥을 고려하여 번역문에 삽입한 것이다. 표준새번역 역시 이를 같은 뜻의 "노아는 오백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창5:32의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노아가 오백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이다. 이 문장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에 세 쌍둥이가 태어남, 2) 이들 세 아들이 노아가 오백세 되기까지 차례대로 태어남, 3) 노아가 오백세 되던 해 첫 아들이 태어나고 그 다음에 차례대로 다른 두 아들도 태어남. 히브리어 어법상 앞의 두 가지 보다는 세번째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역과 표준새번역 둘다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순서가 꼭 나이에 따른 순서여야 할 이유도 증거도 없다.
다음으로 고찰해야 하는 구절은 창10:21이다. 우선 우리말 번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개역은 이를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은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이다"라고 번역함으로써, 개역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들 번역문은 과연 히브리어 원문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까? 여기서 "야벳의 형"이라고 번역된 문제의 구절을 히브리어 원문 및 고대 번역문인 칠십인역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 두 가지면 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충분하다고 본다.
창10:21의 이 문제의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본문은 ('둺히 예쵛 하가돌')이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와 모음 부호를 무시할 경우 이 히브리어 구절은 두 가지의 직역이 가능하다: 1)'야벳의 큰 형제(brother)', 2)'큰 (자) 야벳의 형제'. 다시 말해서 '크다'('하가돌')라고 하는 형용사가 '야벳'과 '형제' 중 어느 것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이 문구의 해석이 달라진다. '야벳'을 수식할 경우 야벳이 형이 되고, '형제'를 수식하면 셈이 형이 된다.
맛소라 학자들이 고안해낸 엑센트 부호의 기능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구두점 역할일 것이다. 맛소라 성경의 엑센트는 여기서 '크다'가 '야벳'을 수식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맛소라 학자들은 야벳을 셈의 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칠십인역 역시 맛소라 학자들의 견해를 지지해준다. 이 구절에 대한 칠십인역의 번역문(ՁՄՅՋՖٍ ԩՁՖՅՈ ՔՏՕ ՌՅՉՆՏՍՏՒ)에 있어서 명사 '야벳'과 형용사 '크다'는 동일한 2격(소유격)을 취하고, '형제'는 3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큰 자'는 셈이 아니라 야벳인 것이다.
셈이 야벳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은 창11:10을 통하여서도 찾아볼 수 있다.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라는 이 기술에 의하면, 셈이 일백세가 된 것은 홍수 후 이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이레 후 곧 2월 17일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40일을 내렸으며 (창7:9-12), 그들이 방주 밖으로 나온 것은 노아가 601세 되던 해 2월 27일이었으니 (창8:14-19), 노아 홍수는 햇수로 볼 때 2년이나 지속된 장기간의 대사건이었다. '홍수 후 2년'('슈나타임 둺하르 하마불')이란 히브리어 문구는 분명히 홍수 사건이 완전히 끝난 후 또 두 해가 흐른 뒤의 일임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에게 노아 나이 600세와 601세의 두 해는 홍수해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그후 두 해(노아 나이 602세와 603세)가 지나, 노아의 나이가 대략 604세가 되던 해에 셈은 나이 100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셈은 노아가 504세가 되던 해에 태어난 셈이 된다. 이상 고찰한 바를 창5:32("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과 묶어서 볼 때, 셈은 결코 노아의 맏아들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증거로서 창9:24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창9:20-27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있을 때 그 아들들이 취한 행동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를 내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 중에서 분명치 아니한 점은 도대체 함의 아들 가나안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많은 독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저주를 받은 것은 함이 아니요 그의 아들인 가나안이다.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15:16, 19-21 등 참조). 이 저주를 항간에 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흑인 전체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창9:24에 기록되기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라고 하였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작은'('하카탄')을 위하여 '둘째'라는 각주를 덧붙임으로써, 이 아들이 다름 아닌 '함'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 함에 대한 저주가 없음을 고려할 때, 여기서 말하는 '그 작은 아들'은 아마도 함이 아니라 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경우, 이 작은 아들이 '행한 일'은 무슨 저주받을(25, 27하반절) 악한 행실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축복을 받아 마땅한(26-27상반절) 아름다운 행실을 가리키게 된다.
이상으로 우리는 야벳이 셈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찰해 보았다. 노아의 세 아들중 다만 함의 연령상의 위치가 확실치가 않다. 창9:24의 '작다'('하카탄')나 10:21의 '크다'('하가돌')라는 형용사가 반드시 최상급으로서 '막내'나 '맏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히브리어 어법을 따라서 최상급으로 이해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 세 아들의 가계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야벳(2-5절), 함(6-20절), 셈(21-31절)의 순서로 열거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나이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상의 모든 고찰을 종합하여 가장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야벳은 노아 500세 되던 해에, 함은 노아 502세 되던 해에, 그리고 셈은 노아 504세 되던 해에 태어났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불행하게도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번역가와 성경 해석가들은 노아의 세 아들이 셈, 함, 야벳의 차례로 태어났다고 믿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창10:21 본문에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 현대 역본이 그런 것처럼,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맛소라 성경의 히브리어 본문과 고대 역본인 칠십인역을 따를 경우, 셈을 야벳의 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시험 (창세기 22장)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철저히 금하시고 있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과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아무리 시험이라고 하지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의혹 때문에 과거 유대인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갖가지 해석을 시도하였다. 여기서는 먼저 고대 유대인들의 해석중 하나를 예루살렘 타르굼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한다.
'타르굼'은 통일적인 하나의 성경 역본이 아니다. 그 시대도 다르거니와 역자 또한 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다양한 종류의 '타르구밈'(타르굼의 복수형) 전승이 전해진다. 모세 오경만의 아람어 역본을 두고 볼 때, 온켈로스의 타르굼은 비교적 문자적 번역을 시도한데 반하여, 일명 '가짜 요나단 타르굼'이라고도 불리는 '예루살렘 타르굼'은 온갖 주석적 요소로 가득차 있어서 주석가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타르굼이라고 하겠다. 이 예루살렘 타르굼은 그 최종 편집이 상당히 늦은 시기에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그 안에 보존된 주석적 요소들중 상당한 부분이 예수님 이전부터 전해진 것들로 추정되기에 이러한 타르굼의 전승은 예수님 당시 구약 성경에 대한 유대인들의 해석을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 연구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창22:1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상당히 흥미있는 주석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우선 그 본문을 우리말로 옮겨 보기로 하자.
이 일들 후에 이삭과 이스마엘이 다투었다. 이스마엘이 말하였다: "내가 장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자 이삭이 말하였다: "내가 아버지 부인 사라의 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너는 내 모친의 여종인 하갈의 자식일 뿐이다." 이스마엘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나는 열 세 살에 할례를 받았으니 너보다 더 의롭다. 만일 내게 거절할 뜻이 있었더라면 나는 얼마든지 할례를 받지 않았었을 것이다." 이삭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나이 지금 서른 일곱이 아니냐. 만일 거룩하시고 찬양받으실 분이 나의 모든 지체를 요구하신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겠다." 그 즉시로 이 말들이 우주의 주께 들려졌고, 또한 그 즉시로 주의 말씀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위에서 보는대로 예루살렘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스마엘이 이삭의 비위를 건드리는 말로 그에게 도전해오자 이삭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적 태도를 주저함없이 발설한다. 자신의 모든 지체라도 주저하지 않고 바치겠다는 이삭의 선언이 결국 이러한 시험의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 이 타르굼의 설명이다. 특별히 아브라함이 시험받을 때 이삭의 나이는 37세로 되어 있다. 이 타르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일을 사라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라는 127세에 죽었으므로(창23:1), 이때 이삭의 나이가 37세가 되는 점에 착안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이삭의 나이를 37세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타르굼의 창22:1 본문은 상당히 흥미있는 해석을 보여주긴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은 설명일까 하는 데에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는 고대 유대인 랍비들의 지나친 추측에서 나온 해석이 아닌가 한다. 이와는 달리 요세푸스의 설명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더 설득력이 있다. 요세푸스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심을 시험해 보고자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이때 이삭의 나이를 25세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이때 이삭의 나이에 대하여 예루살렘 타르굼이나 요세푸스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번제 나무를 지우고 산을 오르게 했다는 점으로(창22:6) 미루어 이삭이 결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막 치려하는 순간에 이삭의 반응이 어떠하였을까? 고대 유대인들은 이에 대하여도 관심이 컸다. 먼저 예루살렘 타르굼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다음은 창22:10에 대한 예루살렘 타르굼의 본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손을 내밀어 칼을 집어서 자기 아들을 잡으려 하였다. 이삭이 자기 아버지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내 영혼이 고통 중에 분투하지 않도록 저를 꼭 붙잡아 매세요. 그래야만 아버지의 제물에 흠이 없겠고 저도 멸망의 구덩이로 던져지지 않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눈은 이삭의 눈을 쳐다보았으나, 이삭의 눈은 저 높이 천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삭은 그들을 볼 수 있었으나, 아브라함은 보지 못하였다. 높은 곳에서 천사들이 화답하였다: "우리 가서 땅 위의 저 두 별난 사람을 보자. 하나는 잡는 자요, 다른 하나는 잡히는구나. 잡는 자는 주저함이 없고, 잡히는 자는 그 목을 길게 내미는구나."
예루살렘 타르굼은 이삭의 순종과 신앙심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세푸스 또한 이에 뒤질세라 이때의 상황을 아브라함과 이삭 부자(父子) 사이의 눈물겨운 대화 내용을 통하여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요세푸스의 경우에도 이삭의 믿음과 순종이 돋보인다.
비록 이런 기록들이 추측에 불과하기는 하겠지만, 이때 이삭의 순종과 믿음에 대하여는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직 40이 되지 않은 젊은 나이의 이삭은 원하기만 하였다면 100세가 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고대 유대인들의 몇몇 성경 해석을 통하여 이삭의 믿음이 돋보이게 묘사된 데 반하여, 신약성경은 창세기 22장과 마찬가지로 이삭 보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7-19)고 하였고, 야고보 역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1)고 역설하고 있다.
이집트에 내려온 야곱 가족 (출애굽기 1:1-5)
야곱과 더불어 이집트에 내려간 야곱 가문 사람들의 숫자는 칠십인역에서 다섯 명이나 더 불어난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의 발언은 칠십인역과 일치한다 (행7:14):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그럼 먼저 문제의 출1:5의 맛소라 성경 및 칠십인역 본문을 직역하여 아래에 옮겨놓기로 하자. 문맥을 볼 수 있도록 맛소라 성경의 1:5 앞에 1:1-4의 내용을 괄호로 묶어 기입해둔다.
(맛소라 성경)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이집트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베냐민, 단, 납달리, 갓, 아셀.)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명인데,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칠십인역) "그리고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 야곱에게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오인이었다."
출1:5에 있어서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차이점이란 아주 간단하다. 첫째로 두 구절의 순서가 서로 바뀌었고 (칠십인역에서는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다'가 절의 맨 앞에 나온다), 둘째 인원수 면에서 맛소라 성경에서는 '70명', 칠십인역에서는 '75명'으로 서로 다르다. 여기서 사마리아 오경은 맛소라 성경과 일치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창46:8-27에 나오는 보다 상세한 목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도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을 비교해보기로 하자. 창46:8-27은 내용상 1)레아 소생(8-15절), 2)실바 소생(16-19절), 3)라헬 소생(20-22절), 4)빌하 소생(23-25절), 5)종합(26-27절)으로 쉽게 나뉜다. 8절에서 19절에 이르기까지 표기상의 미미한 차이점을 제하고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은 서로 일치한다. 23-25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라헬 소생'(20-22절)의 명단에 있어서 칠십인역은 맛소라 성경과 차이점을 보이며, 따라서 '종합'(26-27절)에 있어서도 인원상의 차이점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맛소라 성경과 칠십인역의 20-22절 나란히 배열해보기로 하자.
맛 소 라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과 아릇이니,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사명이요. |
칠십인역 | 이집트 땅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므낫세의 시리아 여자 첩이 그에게 낳은 아들들은 마길이요, 마길은 길르앗을 낳았다. 므낫세의 동생 에브라임의 아들들은 수델라와 다한이요, 수델라의 아들들은 에뎀이다.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이요, 벨라의 아들들은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훔빔이요, 게라는 아릇을 낳았다.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합 십팔명이요. |
위의 표에서 보듯이 칠십인역에는 몇몇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들 삽입문에 대한 정보는 민26:35-36; 대상7:14; 8:3-5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목적은 아마도 창50:22-23("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이집트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의 영향을 받아, 요셉의 자손을 한 두 대(代) 더 보여주고 아울러 부자 관계를 정확하게 밝히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칠십인역에는 다섯 사람의 이름(마길, 길르앗, 수델라, 다한, 에뎀)이 더 들어 있지만 마지막에 '18명'으로 합을 낸 문제점이 보이기도 한다.
26절에 있어서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은 완전히 일치한다: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 륙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이다." 이 숫자에는 야곱 자신, 요셉, 및 요셉의 두 아들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로 다음의 27절에서는 20절에서의 차이점과 관련하여 칠십인역과 맛소라 성경 사이에 차이점을 보인다.
(맛소라 성경)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명이었더라."
(칠십인역) "이집트 땅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일곱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이집트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오명이었더라."
이상을 통하여 칠십인역의 '66명'을 설명하자면, 33(레아의 소생과 야곱을 합한 수) - 1(야곱) + 16(실바의 소생) + 11(베냐민과 그의 자손) + 7(빌하의 소생) = 66이 된다. 그리고 '75명'은 66 + 1(요셉) + 7(요셉의 자손) + 1(야곱)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칠십인역 22절의 '18명'은 어쩔 수 없이 라헬의 소생 중 요셉을 제외한 숫자로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수는 신10:22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이 절의 경우 칠십인역도 '75명'이 아닌 '70명'으로 읽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창세기 46장과 출1:5에 나타나는 사본상 차이점은 칠십인역의 의도적 편집 작업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맛소라 성경이 원래의 본문을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맛소라 성경을 통해볼 때, 창46:8-27의 기록은 몇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야곱의 아내들을 비롯하여 모든 며느리나 손주 며느리 등 여자들이 숫자 계산에 들어오지 못한 반면에(26절 참조), 유일하게 레아의 딸 디나와(15절) 아셀의 딸 세라(17절)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다른 말로 가정을 이루지 아니하고 지낸 것이 아닌가 한다. 디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창세기 34장 참조).
둘째, 레아 소생을 계수함에 있어서 야곱 자신을 포함시켜 그 수는 모두 '33명'에 이른다(15절).
세째,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할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자손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연대를 계산해 볼 경우,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베레스에게 이집트로의 이주를 즈음하여 두 아들이(12절) 이미 생겨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이 무렵 베냐민에게(민26:38-40; 대상7:6-7에 의거, '손자를 포함하여') 열 명의 아들이 생겨났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이들은 틀림없이 이집트로의 이주 후에 태어난 자손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70명'(또는 '75명')은 이집트에 내려간 실제의 정확한 인원이라기 보다는 이집트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민족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 야곱의 자손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출1:5)이라는 문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이러한 히브리적 사고 방식의 타당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히7:9-10 참조: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피 남편 모세 (출애굽기 4:24-26)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야웨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출4:24-26).
출4:24-26의 난점은 히브리어 문장의 번역에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사본학적인 문제도 아니다. 짧으면서도 전후 문맥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간단한 문단은 그 역사적 상황과 그에 대한 배경을 설명함에 있어서 많은 이론들을 만들게 한 성경 난제중의 하나이다.
야웨께서 왜 그리고 어떻게 모세를 죽이려 하셨나? 이러한 일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문맥을 통해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너무나 돌연적이고 이상스럽기까지 하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후, 이미 장인에게 요청하여 그로부터 허락도 받고(출4:18), 또 다시 야웨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는(출4:19), 아내와 두 아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는 중이 아니던가(출4:20)?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출4:22-23): "너는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야웨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이러한 일 다음에 기록된 내용이 바로 본문의 이상한 사건이다.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몇 가지 분명한 사실로는: 1)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심, 2)십보라가 아들 (아마도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할례를 행함, 3)이때야 비로소 모세가 화를 면함, 4)이 일로 십보라가 모세를 '피 남편'이라고 부름 등을 들 수 있다.
모세는 이때까지 자기 '아들'(20절의 복수형과는 달리 여기 25절에서는 단수형으로 언급됨)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무슨 일로 왜 둘째인 엘리에셀에게 이제까지 할례를 행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물론 첫째인 게르솜의 경우에도(출2:22 참조) 그가 과연 할례를 받았는지에 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모세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의 아내 십보라는 그 이유가 아들의 할례에 있음을 깨닫고는 즉시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로 실제로 모세는 죽음을 면하게 된다.
이때 십보라가 모세를 향하여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고 내뱉는데, 이 말은 한편으로는 일종의 분노와 자포자기가 함축된 말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편의 특별한 사명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과 확인으로 들린다.
본래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셔서 그의 후손이 대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언약이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17:9-11). 이 명령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14)는 준엄한 경고로 끝을 맺는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에게만 해당하는 할례 예식은 틀림없이 남자들에 의하여 집행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출4:24-26 본문에서 모세가 아닌 십보라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는 사실 역시 특이하다. 24절의 "야웨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라는 표현은 아마도 모세가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든가, 아니면 그가 무슨 특별한 위험에 빠져있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순전히 하나님과만 연관시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모세는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 수 없는 상황이었겠고, 자연히 그의 아내인 십보라가 이 일을 집행하여야만 했을 것이다.
아울러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은 모세보다는 십보라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모세는 한때 특별한 사명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지시에 대하여 자기는 부족하다면서 머뭇머뭇한 적이 있다(출3:11; 4:10, 13 참조). 이러한 모세의 태도로 인하여 하나님이 모세에게 노를 발하신 적은 있으나(출4:14 참조), 이런 일로 그를 죽이려 하신 것 같지는 않다. 더군다나 출4:24-26 본문에서는 모세의 위기에 대하여 할례가 주된 원인임을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에서는 십보라에 대하여 별 기록을 담고 있지 않다. 아마도 십보라로서는 그녀의 남편 모세에게 부여된 특별한 사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이행한다는 것이 모세 본인 못지 않게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멀리 이집트에서부터 '굴러 온 복'을 어찌 하루 아침에 놓칠 수 있으랴. 두 아들과 함께 남편을 따라 낮선 땅 이집트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너무나 처절하고 무거웠던 것이 아닐까? 남편이 구해야 하는 백성은 자기의 민족이 아니요 남편의 민족일 뿐이요, 이집트는 자기의 사랑하는 남편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 아니던가.
성경은 이집트로 향하는 모세의 가정, 아니 모세와 그의 아내 사이에 교차되는 감정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이처럼 유추해보는 수 밖에 없다. 두 아들은 그만 두고라도 아내 십보라의 마음 속에 있는 온갖 감정과 생각은 모세의 마음을 충분히 괴롭히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 모세와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들의 두 아들은 - 이집트로 향한다.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준엄하고도 분명한 명령 때문에.
이때 길의 숙소에서 일어난 사건은 모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십보라에게도 하나님이 내리신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준엄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로서 십보라는 자기 남편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할례의 집행을 통하여 하나님과 자기 남편, 더 나아가서는 자기 남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중요성과 엄숙함을 재확인한다. 바로 이 언약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이 '사지'(死地)로 명령을 받아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십보라는 이 냉정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 자기 아들의 양피를 베어 피를 냄으로써. '참으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이요'라는 그녀의 외침은 그녀의 이러한 심경을 잘 대변해준다고 하겠다.
'피와 죽음'이란 관계를 두고 볼 때, 이 사건은 성경의 다른 몇몇 기록과도 연관성을 가진다. 우선 앞서 언급한대로 바로 앞의 출4:22-23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차 이집트에서 있을 장자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 재앙은 출애굽기 12장에 묘사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죽음을 면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간접적이긴 하지만 모세의 아들의 피가 모세의 개인적인 재앙을 면하게 하였다. 모세의 둘째 아들 엘리에셀의 이름을 설명하는 구절에서도 또한 다소나마 이런 맥락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파라오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출18:4).
출4:24-26에 기록된 사건으로 인하여 모세는 십보라와 두 아들을 장인에게로 돌려보내고 홀로 이집트로 떠난 것 같다. 그래서 출18:2-6에서 우리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 보내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 두 아들을 데렸으니.....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 아내로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 그가 모세에게 전언하되 그대의 장인 나 이드로가 그대의 아내와 그와 함께한 그 두 아들로 더불어 그대에게 왔노라"라는 기록을 보게 된다. 아마도 모세는 이 일을 통하여, 자기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신 하나님의 엄정(嚴正)하심과 그의 분명하신 목적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고는, 다시는 거역하거나 주저함이 없이 철저히 순종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오순절과 하나님의 강림 (출애굽기 19장)
인간 가운데 하나님의 강림(降臨)이 있다는 사실은 피조계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관심 내지는 간섭을 의미한다. 사실상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와 더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의 역사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신다. 이러한 간섭은 인간편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간을 지으신 이후로 인간을 그대로 두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강림 또는 임재(유대인들은 이를 가리켜 전문 용어로 '슈키나' 라고 한다)에 관하여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다. 구약 성경 중에서 하나님의 강림에 관한 기록중 가장 중요한 곳을 찾으라면 역시 출애굽기 19장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19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강림은 어느 개인이나 소수의 몇몇 사람 또는 작은 무리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목격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임하였다.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도 구름을 동반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 놀라운 광경 앞에서 두려움으로 떨며 모세의 중재를 요구하였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나타나신 것은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게끔 하는 목적이 있었다(출19:9; 20:20).
이제 필자가 고찰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강림에 관하여 출애굽기 19장에 기록한 사건이 시간적으로 언제 있었던 일이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출19:1)는 우리말 개역성경을 읽을 때, 정확하게 언제를 가리키는지 분명치가 않다. 여기 '제 삼월'중 '월(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데쉬'는 본래 '새롭다'라는 뜻에서 파생하여 '매월 달이 새로 뜨기 시작하는 월삭(月朔)'(new moon)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가 '월삭'을 뜻하는 경우로는 민29:6; 삼상20:5, 18, 24, 34; 왕하4:23; 사1:13; 겔46:1, 6; 암8:5; 시81:4 등을 들 수 있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총 281회 출현하는 이 단어는 그중 22회의 경우만 '월삭'의 뜻으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모두 '달'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그 때에'로 번역된 히브리어 문구는 다시 직역하면 '이 날에'가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호데쉬'는 월삭과 그 다음 월삭 사이의 기간, 곧 '달(month)'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월삭'의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출19:1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광야에 도착하여 시내산 앞에 장막을 친 것은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계산하여 제3월이 되는 바로 그날'이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이러한 해석을 근거로 하여 출19:1에 아예 '초하룻날'이라는 문구를 첨가하여, 각각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표준새번역)와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공동번역)로 번역하였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간'(출19:3) 날은 아마도 이제까지 설명한 '제3월 1일'이거나, 아니면 그 다음날일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말씀을 들은(출19:4-6) 모세는 이를 백성의 장로들에게 전해주고는(출19:7) 다시 백성의 반응을 하나님께 회보한다(출19:8). 출19:4-8에 기록된 일들이 모두 마치기까지는 아마도 하루 이틀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모세로부터 회보를 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앞에서 영광중에 나타나실 계획을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야웨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야웨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출19:10-11). 마침내 하나님이 말씀하신 "제3일 아침에 산 위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있었고, 심히 큰 나팔소리도 울려퍼졌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동반한 이 무서운 광경으로 인하여 "진중의 모든 백성은 다 두려워 떨었다" (출19:16).
첫째 달인 아빕월(출12:2 참조) 14일 저녁에 어린 양을 잡아 먹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출12:6-9 참조)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 그날 밤(아마도 제1월 15일 새벽, 출12:29-42 참조) 이집트를 떠났다. 성경의 역법을 따라 계산할 경우,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떠난 날(제1월 15일)로부터 하나님이 시내산에 나타나신 날(대략 제3월 3~6일 사이)까지는 대략 50일이 된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신 날을 오순절로 믿고 있다. 사실 이러한 계산은 거의 틀림없이 맞는 것이다. 오순절은 봄에 첫 곡식을 수확하여 첫 이삭 한 단을 흔들어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레23:15-16). 문제는 첫 이삭 한 단을 야웨 하나님께 바치는 날이 언제냐 하는 것인데, 레23:11, 15에 '안식일 이튿날'이라고 한 이 날은, 그 문맥상 유월절/무교절과 나란히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계산이 맞다면 오순절은 무교절중에 들어있는 일요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무교절중에 이집트를 나왔으므로, 그로부터 대략 50일이 지난 날은 오순절이 될 가능성이 크다.
모두가 아는 바대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교회 중에 강림하신 날도 바로 오순절이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이날 교회 위에 임하신 성령은 각 믿는 이의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삶을 인도하신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은 언제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탄절(개신교와 천주교의 12월 25일)은 성경 및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으로서, 일단 무시할 필요가 있다. 성경 연대기 학자 폴스틱(Eugene Faulstich, Witnesses for Jesus the Messiah, Spencer, 1989)은 여러 가지 역사 및 천문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을 (그레고리 역법으로 환산하여) 주전 6년 5월 14일로 제시하고 있다. 폴스틱이 제시한 유력한 근거들중 하나는 초대교부중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예수님의 탄생일자를 이집트 역법에 따라서 '파콤월 25일'로 기록한 것(The Stromata I.xxi)이다. 폴스틱은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태어난지 제8일, 곧 그가 할례받은 날이 바로 오순절이었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인용한 책, 6쪽).
만일 출애굽기 19장을 통하여 우리가 살펴본 연대기 재구성과 예수님의 탄생에 관련하여 폴스틱이 도출해낸 결론이 맞는 것이라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강림은 모두 오순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오순절의 의미를 재삼 강조하면서 되새길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이왕 나온 김에 사도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마침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여기서 '가운데'라는 말은 '어느 개인 안에'가 아니라 '무리 중에'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시내산에서 성부 하나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에 오실 때 빽빽한 구름으로 임하지 아니하시고,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서 쓸쓸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고백하고 있다. 요한은 산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시던 날 온 누리를 덮었던 그 빛난 구름을(마17:1-8; 막9:2-8; 눅9:28-36 참조)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을 보았던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름으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요한은 이 사실에 감사 감격하여 이 글을 기록하고 있으며, 자신의 기록을 읽는 이들이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를 믿을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시내산 사건보다 더욱더 놀라운 일로서 하나님이 자신의 위엄을 가리시고 은혜와 진리로써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처음 오셨을 때의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그가 다시 오실 때는 현저한 하나님의 영광중에 오신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가 다시 오실 때 다음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3-4).
양과 염소에 대한 통칭 (레위기 1:1-17)
레위기 제1장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코르반) 중 번제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다른 예물이나 희생 제사에서도 그렇거니와 희생물로서 사용되는 동물은 제한되어 있다. 동물의 분류 내지 명칭에 있어서 히브리어는 우리 말과 약간 다르기 때문에 우리 말 성경 독자에게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번제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동물은 크게 '가축'과 '새'로 나뉜다. 가축중에는 '소'와 '양떼'('쫀')가 가능한데(1:2), 다같이 '흠 없는 수컷'이어여 한다(1:3, 10). '쫀' 중에는 다시 '양과 염소'가 가능하다(1:10). 이런 분류는 레3:1, 6, 7, 12; 5:6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독자는 레1:2, 10; 3:6; 5:6 등의 '쫀'은 1:10; 3:7의 '케쎄브'와는 달리, 양과 염소를 모두 포함하는 낱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성경에 일반적으로 '양(羊)'이라고 번역되는 낱말 '쫀'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 떼를 두루 가리키는 집합 명사이다. 한편 '쎄'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항상 단수로만 사용되고, '쫀'은 항상 복수로서 사용된다. 따라서 '쫀'은 '쎄'의 복수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30:32은 단수와 복수로서 이 두 낱말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쫀')로 두루 다니며 그 양('쎄') 중에 아롱진 자와 점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히브리어 '쫀'과 우리말 '양떼'의 의미 영역이 서로 다른만큼, 자연히 여기에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서 우리말 개역 성경을 읽을 경우, 레1:2에서 "누구든지 야웨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라고 읽은 독자는 레1:10의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혹시 염소가 추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10절의 '떼'는 2절의 '양'과 더불어 다같이 히브리어 '쫀'을 번역한 것이요, 한편 10절의 '양'은 히브리어 '케쎄브'를 번역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번역상의 난점은 출12:3, 5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출12:3에서 히브리어 낱말 '쎄'에 대하여는 개역과 표준새번역 공히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뒤의 5절을 통하여 볼 때, 이 낱말은 여기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를 다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 말에 양과 염소를 다같이 가리킬 수 있는 단어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 번역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확한 의미는 문맥(이 경우에는 출12:5)을 통하여 파악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우리말 개역의 경우 3절과 5절 모두에서 '쎄'를 '어린 양'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반하여, 표준새번역의 경우 3절에서는 '어린 양'으로 5절에서는 '짐승'으로 서로 달리 번역되어 있다. 필자에게도 무슨 묘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개역이든 표준새번역이든 번역문만을 읽는 독자들에게 오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나답과 이비후의 죽음 (레위기 10:1-2)
레위기 8장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제사장 위임식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모세의 주재하에 열리는 이 위임식은 7일 동안 물로 씻기고, 옷을 입히고, 관유를 바르고, 속죄제와 번제와 위임제를 바치고, 피를 뿌리고, 식사하는 일 등이 반복된다(레8:6-34). 레위기 9장은 7일 동안의 위임식이 끝난 후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제8일에 처음으로 시행하는 일종의 취임식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이날 행사는 아론의 주관하에 거행된다. 그리고 이 날의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는 8장의 위임식과는 달리 이전에 명령을 받은 바가 없고, 새롭게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 날 취임식을 위한 준비가 마친 후,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8-11절), 아론의 아들들을 위한 번제(12-14절), 백성을 위한 각종 제사(15-21절)가 집행된다. 그리고는 아론의 축복과 하나님의 응답이 뒤따른다(22-24절).
레위기 10장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모든 제사를 마치고 제사장 응식을 먹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성경은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죽임당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나 그 상황 설명이 그리 명료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먼저 레10:1-2의 기록을 여기에 옮겨 놓기로 하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야웨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야웨 앞에서 죽은지라."
여기 '다른 불'이란 히브리어 표현 '에쉬 사라'를 옮긴 것이다. 이 표현은 역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 민3:4; 26:61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본문들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나답과 아비후는 '야웨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야웨 앞에 분향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하여 많은 주석가들은 '불을 번제단에서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화를 입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번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향로에 채워서 분향하라'(레16:12)는 지시는 사실상 이 사건 이후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레16:1 참조). 그리고 역시 이 사건 이후, 고라 무리의 반역이 있었을 때,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취하고 (번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고 명한 적이 있다(민16:46). 이 두 경우 외에 "단 위의 불을 가져다가 향로에 담는 장면"은 마지막으로 신약 성경의 계8:5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고찰해 볼 때,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이유를 단순히 '다른 불', 곧 일부 주석가들이 말하는 바, '번제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불을 취하여 분향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시원한 대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비합법적인 분향' 때문이라고 한다. 출30:9의 "너희는 그[=분향단] 위에 다른 향('크토레트 사라')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라"는 명령은 이 사건 이전에 있었던 지시이다. 이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예를 들어, Keil & Delitzsch, Levine) 출30:9와 레위기 10장 본문 사이의 연관성을 지적하면서, '다른 향을 살라 바치는' 행위를 얼마든지 '다른 불을 드리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위의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나답과 아비후가 죽게 된 데에는 단순히 이들 두 가지중의 어느 하나나 또는 두 가지 이유 모두로 인한 것 이상으로 더 복합적인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레16:1에 "아론의 두 아들이 야웨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야웨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이어 야웨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론에게 지시하신 말씀이 적혀 있다: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레16:2-4). 이 말씀을 통해 볼 때에, 아론의 두 아들은 위임식 제8일, 곧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여 식을 행하던 날, 방자하게 지성소로 들어 가려다가(또는, 들어갔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시는 올바른 분향 방법에 대한 말씀으로까지 계속된다: "향로를 취하여 야웨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야웨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다" (레16:12-13).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술에 관한 지시를 내리셨다는 사실이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레10:9). 우리는 이 구절만 가지고는 이 날 과연 나답과 아비후가 술을 마시고 회막에 들어간 것인가 하는 여부를 판가름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날의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후손에게 술에 관하여 엄명을 내리셨다는 점이다. 나답과 아비후의 음주 여부는 그만 두고라도, 적어도 이 날 두 사람은 회막 안에서 무언가 경망된 짓을 하였기에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경망된 행동이 혹시 음주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보게 된다.
아울러 이 일 후에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레10:3)고 하신 야웨의 말씀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 그에게 가까이 할 수 있는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자세와 태도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나답과 아비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두 사람이 회막 안에서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일을 저질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야웨의 불'은 그분께 가까이 하여 그분이 원하시는대로 제사하는 이들의 제물을 사름으로써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환희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레9:22-24 참조: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야웨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야웨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동일한 '야웨의 불'은 그분 앞으로 방자하게 나아오는 자는 가차없이 불살라 처벌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형벌은 고라 무리의 반역 사건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민수기 16장).
오멜 절기와 부활 (레위기 23:9-14)
처음 난 것으로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친 것은 비단 사람이나 짐승 뿐만은 아니다. 율법은 식물의 첫 열매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칠 것을 명하고 있다(출23:19; 34:26). 여기서 토지 소산이라 함은 각종 곡물과 과일 및 올리브 기름 등 일체의 농산품을 가리킨다(민18:12 참조). 레위기에서는 특별히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전에 첫 이삭 한 단(= '오멜')을 야웨께 바칠 것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야웨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레23:10-14).
칠칠절 곧 오순절의 날자는 이 첫 이삭을 바치는 날에 달려있다. 15-16절에 의하면 칠칠절은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결정된다. 물론 해마다 기후나 기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하여,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 첫 이삭을 거두는 날이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유월절은 대략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의 4월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의 곡물(주로 보리와 밀) 추수는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에 거의 이루어진다. 이 사실은 첫 이삭 단을 바치는 날이 유월절 또는 무교절과 시간상으로 밀착되어 있음을 설명해준다.
'오멜'을 흔드는 날, 곧 레23:11, 15의 '안식일 이튿날'에 관하여는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학자들간에 논란이 많다. 필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하여 이 '첫 이삭 한 단'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흔드는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찌기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암시적으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유월절 기간에 죽으시고 안식후 첫날에 다시 살아나셨다. 죽은지 사흘만에 살아나셨으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은 무교절 한 주간 중의 일요일이 될 것이다. 레위기 23장에서 '오멜'을 굳이 '안식일 이튿날'(이 표현은 민33:3; 수5:11의 '유월절 다음날'과는 구분됨)에 드리라고 한 것은 이 구절이 다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상징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레23:11의 '안식일 이튿날'은 무교절 중의 '일요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고전15:20). 바울이 사용한 '첫 열매'라는 낱말 역시 구약 성경의 냄새를 물씬 풍겨준다. 과거 바리새인으로서 율법 연구에 혼신의 노력을 쏟았던 바울인지라 율법의 구절구절이 그의 머리 속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언급하면서 율법의 첫 소산에 대한 규례를 염두에 두었음에 틀림없다. 이상의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레위기 23장의 '오멜'과 관련시킬 수 있고, 또 그 날짜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오멜' 절기가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이듯이(레23:14),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히 기념할 날이다.
안식년과 희년의 산정 방법 (레위기 25장)
모세의 율법 가운데 안식년과 희년(禧年) 제도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안식년과 희년을 산정하는데 있어서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7'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정확한 산출 방법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견해 차이를 보인다. 먼저 안식년의 기간과 관련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야웨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레25:3-5).
이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성경의 역법(曆法)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의 역법에서는 해의 주기(=365.242196일)와 달의 주기(=29.530588일)가 함께 사용된다. 해의 주기는 날과 해(年)의 기준이 되고, 달의 주기는 절기와 달(月)의 기준으로 쓰인다. 1주일 7일의 개념과 하루가 대략 해질 무렵인 오후 6시에 시작한다는 점은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되었다. 12달의 이름은 차례대로 1)니싼 또는 아빕, 2)십 또는 이얄, 3)씨반, 4)타무스, 5)아브, 6)엘룰, 7)에타님 또는 티슈리, 8)불 또는 마르헤스반, 9)키슬레브, 10)테ꕛ, 11)셰밭, 12)아달이고, 13)베아달은 윤달이다. 달이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날이 초하루가 되고 완전히 그믐달로 변할 때가 그 달의 마지막 날이 되기 때문에, 1년의 기준이 되는 해의 주기와 맞추기 위하여 윤달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 역법에 따른 한 해는 니싼월(봄)에서 시작하여 다시 니싼월로 돌아오는 주기를 취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서 1년중 농업의 주기는 제7월, 곧 티슈리월(그레고리력의 9-10월에 해당)에 시작하여 그 다음해 티슈리월에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주요한 농산품인 보리와 밀과 포도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자면, 티슈리월에 시작되는 밭갈기와 (보리 및 밀)씨뿌리기, 니싼월에서 씨반월 사이에 걸친 보리와 밀 수확, 티슈리월에 끝나는 포리 수확의 순서가 된다. 레25:3을 따라, '6년 동안 파종하며 6년 동안 과수원을 관리할' 경우 제6년에 수고한 결과는 제7년 니싼월에 시작하여 티슈리월 이전까지 거두게 된다. 따라서 땅은 안식년 첫 달(니싼월)부터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7월(티슈리월)부터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다음으로 희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희년 산정에 관하여 레25:8-9은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라고 밝히고 있다. 이 구절은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희년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레25:10-11("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의 '제 오십년' 때문에 희년을 '일곱번 째의 안식년'이 아니라, 그 다음 해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럴 경우 희년이 끼는 주기는 7년 동안에 안식년(희년도 일종의 안식년임)이 두 번씩 발생할 수 있으므로 농업상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레25:10-11의 '제 오십년'은 한 희년을 '제1년'으로 계산할 경우 다음 희년이 '제50년'이 되므로 얼마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로 인정하는 우리 한국인들의 나이 계산법과 비교해보면 이런 계산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희년을 매 '일곱번 째의 안식년'과 동일한 때로 이해할 때, 희년과 관련된 많은 의문점들이 사라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농업주기로 인하여 안식년이 사실상 제7년 제7월(티슈리월)에 시작하는 것처럼, 희년 역시 '일곱번 째의 안식년' 제7월, 곧 티슈리월 10일에 나팔을 크게 분 후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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