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창세기 해설
오경 개관
오경 이름의 설명
* 현재 오경(the Pentateuch)은 구약 정경 속에서 창세기로부터 신명기까지의 다섯 권의 책을 가리킨다.
- 이 다섯 권의 책은 랍비 전통 속에서 히브리어로 하미샤 훔쉐 핫토라(hrwth yvmx[1] hvymx)라고 불린다. 이 히브리어 이름은 “가르침/율법(토라)의 다섯 개의 오분의 일”이라는 뜻이다. - 위의 이름들은 아마 헬라어 이후의 오경의 이름의 기원이 된 듯 하다.
- 토라 두루마리(세페르 토라, hrwt rps)는 손으로 쓴 토라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토라 두루마리는 엄격한 기준에 의해 생산되며, 유대교에서 가장 신성시 된다.
- 반면 인쇄본은 후마쉬(vmwx)라고 한다.
- 헬라어 이름은 “다섯 개의 책” 혹은 “두루마리”이다.
헬라어: pentateucoj (penta, “5” + teucoj, “scroll, 두루마리; “book, 책”)
라틴어: pentateuchus
영어: Pentateuch
* 오경 각 책의 제목은 유대교 전통 속에서는 책의 처음의 중요한 몇 단어로부터 파생되었다.
창세기: 브레쉬트(tyvarb), “태초에”-첫 단어
출애굽기: 쉐모트(twmv), “이름들”ß “이것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들이다”(붸엘레 쉐모트 브네 이스라엘)이란 문구에서 파생
레위기: 봐이크라(arqyw), “그가 부르셨다”-첫 단어
민수기: 브미드바르(rbdmb), “광야에서”
신명기: 드바림(~yrbd), “이것은 그 말씀들이다”(엘레 핫드바림)이란
문구에서 파생
오경은 다섯 권?: 육경, 사경, 구경[2]
* 구약성경의 첫 구성물은 꼭 다섯 권이어야만 하는가?
(1) 6경(오경 + 여호수아서) (Hexateuch)
- H. Ewald (Bonfrère [1625]; Spinoza [1670]; Geddes [1972]의 자취를 따라)의 6경 주장 이후 6경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유행을 탐
(예)
J. Wellhausen의 6경 연구서(Die Composition des Hexateuchs und der
historischen Bücher des Alten Testaments, 1866; 3rd ed. 1899).
G. von Rad, The Problem of the Hexateuch (1966).
- G. von Rad는 소위 “역사적 신조”(historical creed)라는 것을 주장했다.
이 신조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기원에 대한 핵심을 담고 있다.
이 신조들은 신 6:21-23; 26:5-9; 수 24:2-13에서 발견된다.
이 신조들은 땅의 선물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오경은 틀리고, 여호수아서가 포함된 6경이 맞다.
(2) 4경(창-민; 신명기 제외) (Tetrateuch)
- M. Noth, A History of Pentateuchal Tradition이 von Rad의 견해 공격하면서 신명기를 따로 떼서 뒤의 역사서들과 연결시킴.
- Noth의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1) 4경 속에는 “신명기적”(Deuteronomic) 본문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약간의 추가 본문들 뿐이다. 그러므로 4경과 신명기는 문헌상의 연결이 없다.
(2) 오경의 문서들은 여호수아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즉 4경은 여호수아서에서 연속되지 않는다. 따라서 6경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3) 신명기는 소위 “신명기적 역사”(Deuteronomistic History) (여호수아서-열왕기서)란 것의 서론으로 작용하고 있다.
- 신 1-3장은 민수기의 내용을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명기가 역사서의 서론으로 작용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가 않다면 신 1-3장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MC: 역시 Noth는 문학성에 대한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반복이라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신 1-3장은 또한 민수기의 무덤덤한 반복도 결코 아니다. 현재의 본문 내에서 신 1-3장은 완전히 논리적으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 Noth의 견해에 따르면 신명기적 역사는 “신명기의 빛 속에서” 읽혀야만 한다.
(4) 오경은 4경이 신명기적 역사와 합쳐져서 거대하고 단일한 역사적 작품으로 형성되었을 때에야 존재하게 되었다.
- 신명기는 오경의 결말로서 기능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이것을 수-왕의 역사기록으로부터 분리시켜줄 필요가 있게 되었다.
* Noth는 4경이 독립적으로 존재했다는 주장을 하는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4경이 정복의 기록까지 연결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MC: 여기에 Noth의 논리적인 모순이 존재한다.)
* 4경의 존재를 더 적극적으로 언급한 사람은 스웨덴 학자 Engnell이었다. 그에 따르면 현재의 4경은 P(제사장 기자, the Priestly Writer)의 작품이었다. 이 P는 고대의 구전 전승들을 수집하고 편찬했다.
- 원시적 신명기(the primitive Deuteronomy, Dt)와 신명기적 역사는 이 P의 4경과 구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 Engnell은 이 이상 자신의 이론을 구체화하지도, 발전시키지도 않았다.
(3) 9경(오경 + 수, 삿, 삼, 왕) (Enneateuch)[3]
* 9경 전통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창세기-열왕기서로 구성된 저작이 세상의 창조로부터 바벨론 유수까지를 포괄하는 단일저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중심 주제는 땅이다.
- D. N. Freedman은 이 단일저작은 이스라엘의 “제 1 일 역사”(the Primary History)이다.
- 이 제 1 역사는 역대기, 에스라서, 느헤미야서로 구성된 역대기적 역사(the Chronicler’s History)와 구분된다.
제 1 역사는 창조부터 바벨론 유수까지, 제 2 역사인 역대기적 역사는 창조부터 이스라엘의 재건까지를 다룬다.
* 이 주장을 하는 학자들의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의 역사”는 땅의 정복으로 끝나지 않는다.
- 예를 들어 삿 2:8, 10은 출 1:6, 8과 연결되어 있다. (중요인물 죽음; 모르는 새 세대의 등장)
- 이러한 문학적 “괄호”(bracket)들은 내러티브 덩어리들을 서로 연결시켜주며, 이스라엘 역사의 다른 시대들을 연결시켜준다.
(2) 책의 연대기적 구성이 이 포괄적 역사의 단서를 보여준다.
- 출 12:40-41은 이스라엘이 애굽에 430년 살았다고 말한다(참고, 창 15:13 400년)
- 솔로몬 성전은 출애굽의 480년만에 지어진다(왕상 6:1) (430+50).
- 솔모몬 성전 건축이 제 4 년인데, 이것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멸망 때까지의 연대가 역시 430년이다. 여기에 50년의 바벨론 유수 기간을 더하면 480년이 된다. (이 480의 기간은 대략적인 것임에 유의하라.)
(3) 블렌킨솝(Blenkinsopp)은 오경이 모세의 죽음(신 34장)으로 끝날 수 없는 이유를 세 가지(a/b/c) 제시한다.
a. 여호수아서가 없다면 족장들에게 주어진 땅의 약속은 성취되지 못한 채 끝이 난다. 참고로 수 21:43-45는 정복이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성취라고 말한다.
b. 창조(창 1장), 성막 건설(출 35-40장), 약속의 땅에서의 성막의 설치(수 18-19장) 사이에는 상응성이 존재한다. 또한 솔로몬 성전은 출애굽 후 480년 만에 지어졌다(왕상 6:1).
c.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언약과 율법에의 순종이다.
- 신명기적 역사는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인해 땅에서 쫓겨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창 2-3장의 아담과 하와 역시 불순종으로 인해 땅에서 쫓겨난다.
* 9경 개념이 많은 재미있는 통찰들을 던져주기는 하지만 아직은 역사비평학적인 견지에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여전히 오경[4]
1. 신명기 34:10-12
* 신명기 34:10-12는 오경과 구약의 나머지 책을 나누어주는 “결정적인 구분선”(the dividing line)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본문의 내용은 다음의 세 가지 점을 주장한다.
a. 모세는 모든 선지자보다 위대하다.
- 이 점은 모세의 율법이 구약의 다른 모든 계시보다 우월한가 하는 것의 토대이다.
- 구약에서의 오경의 권위는 모세의 특별한 영감에 기초한다.
b. 모세의 위대성은 여호와와의 특별한 관계에 기인한다.
- 모세의 여호와와의 특별한 관계는 출 33:11; 민 12:6-8(참고, 요 1:18; 3:11) 등에도 표현되어 있다.
- Ska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세와 여호와는 “막”(screen) (즉, 꿈이나 이상[vision] 등; 참고, 민 12:6-8)이나 중계자(intermediary)가 없는 “직접적 접촉”(direct contact)을 통한 관계이다.
c. 출애굽은 이스라엘 역사의 토대(foundational)가 되는 사건이다.
-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à 이스라엘이란 국가적 존재의 출범은 다윗이나 솔로몬이 아니라 모세에 기인한다.
à 이스라엘의 존재는 왕조나 정복 활동 이전부터이다.
2. 정경 제 2 부분(전후 선지서): 그 시작과 끝이 오경의 존재 확인
a. 수 1:1-8
* 선지서(즉 전선지서)의 첫 본문인 이 본문은 오경과 선지서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의 사항들을 명시해준다.
(1) 여호수아는 모세의 계승자이다.
(2) 모세는 여호와의 종(에베드 아도나이)이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종자(므샤레트 모쉐)이다.
- 모세는 여호와와의 관계에 의해서 그의 정체성이 표현되지만 여호수아는 모세와의 관계에 의해서 그의 정체성이 표현된다.
MC: 여호수아서 24장에 가면 여호수아 역시 “여호와의 종”이라고 불린다.
(3) 모세와 여호수아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그러나 이 연속성은 모세의 시대에 시작된 일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4) 여호수아의 성공은 그가 “모세의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하는 것이다(7-8절).
- 이러한 성공의 기준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걸쳐서 계속 적용된다(왕하 17:7-23)
MC: 솔로몬: 왕상 2:2-4 (특히 3절)이 더 확실.
b. 말 3:22-24
* 선지서의 마지막인 말 3:22-24도 비슷한 사항들을 담고 있다.
말4: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말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4: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 이 본문은 여호수아 1장과 inclusio를 형성하고 있다.
* 이 장의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a. 선지서들은 모세의 율법에 비추어서 읽어야 한다.
b.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c. [Ska는 이 본문이 신명기 법이 모세의 율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언급]
d. 선지자들 중 엘리야만 언급.
-엘리야만 언급된 이유는 그가 모세와 가장 닮았기 때문이다(왕상 19장; “사십일 사십야, 출 24:18; 34:28; 신 9:9; 왕상 19:8).
* MC: 여기에서 “모세의 법”이라는 표현에만 주목하면 될 듯.
3. 정경 제 3 부분: 그 시작과 끝이 오경의 존재 확인
* 참고: 구약정경상의 성문서는 시편으로 시작해서 역대기로 끝이 난다.
1. 시편 1편: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
* 이 시편 1편의 내용들은 시편과 성문서를 율법과 연결시키는 기능.
- 의인과 악인의 구분 기준은 율법의 묵상이다. 율법은 또한 판결의 기능도 한다(시 1:5-6).
- 율법은 여호와의 율법(토라트 아도나이)이라고 불려진다.
- 시편 1편은 시편과 모든 성문서의 글들(the Writings)을 여호와의 율법에 대한 묵상으로 이해하도록 초대한다.
* 시편 1편과 여호수아서 1:1-8은 연결되는 표현들이 많다.
- “율법을 주야로 묵상”
- “네가 하는 모든 일에 형통”
à MC: 이런 점에서 볼 때 시편 1편은 의도적으로 여호수아서 1:1-8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마 구약정경의 편찬 과정에서 분명히 이 점은 계산된 것으로 생각된다.
2. 대하 36:22-23
* 이 대목은 좀 약하다.
* 여기에서 Ska는 고대의 구약 정경상의 순서는 역대기-에스라서-느헤미야서가 아니었나 추론한다.
- 이 경우 느헤미야서의 중심은 8장이다. 거기에서 모세의 율법은 중요하다.
오경 정경 정리
* 신 34:10-12가 구약의 나머지 책들과의 확실한 구분선이 된다.
* 정경의 제 2 부분(선지서), 제 3 부분은 오경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오경의 구조
이러한 구성은 다시 도식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창//출 1-18//출 19-민 10(시내산 본문) //민 11-36 //신명기(분량 1/3이 시내산)
출 19-민 10 및 그 주변 문맥의 세부구조
A. (출 15:22-18:27: 광야여행 I)
B. 출 19-40장 성막의 건설
X. 레위기
B´. 민 1-10장 성막의 분해(광야여행의 재개)
A´. (민 11-21장: 광야여행 II-요단강 건너편 도착)
모세오경의 광야사건의 구조[5]
시내산 출 19-민 10
|
출 15:22-18:27 민 11이하
출 15:22-27(첫 사건) 민 11:1-3(첫 사건)
창세기의 구조
창세기의 구조와 톨레돗 문구(Toledoth Formula)
* 대부분의 학자들은 톨레도트(twdlt)가 창세기의 구조의 뼈대라고 생각한다(총 11번).[6]
1:1-2:3 서막
1) 2:4-4:26 하늘과 땅의 역사
2) 5:1-6:8 아담의 가족사
3) 6:9-9:29 노아의 가족사
4) 10:1-11:9 노아 아들들의 가족사
5) 11:10-26 셈의 가족사
6) 11:27-25:11 데라의 가족사
7) 25:12-18 이스마엘의 가족사
8) 25:19-35:29 이삭의 가족사
9) 36:1-37:1 에서의 가족사
36:1,9에 각각 “톨레돗” 문구가 사용되고 있음.
10) 37:2-50:26 야곱의 가족사
* 이 구조는 놀랍게도 설득력이 없다.[7]
1)이 과연 하늘의 땅의 역사인가?
à 이 점은 물론 2:4a가 1:1-2:3의 결론이라고 하면 해결되기는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경우 다음의 톨레돗 문구들을 해석할 때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이 후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 2:4-4:26는 아담의 가족사가 되고, 5:1-6:8은 노아의 가족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6:9-9:29는 셈, 함, 야벳이 가족사가 되어야 하며, 10:1-11:9는 셈의 가족사여야 한다.
à 톨레돗 문구를 앞으로 올려 읽는 것도, 뒤의 서론으로 읽는 것도 일관되게 본문의 내용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2) 6-9는 노아의 가족사인가?
6)이 과연 데라의 가족사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인가?
8)이 이삭의 가족사라고 불리울 수 있을 만큼 이삭이 전면에 두드러진 인물인가?
9) 에서와 관련해서는 “톨레돗”이 두 번 사용된다(36:1, 9). 에서가 이 표현을 두 번 받을 만큼 중요한 인물인가?
(* 참고로 이 구조는 창세기의 전체 구조를 P문서의 톨레돗 구조가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다.)
* 그러나 톨레돗은 어떤 식으로든 창세기의 내용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1) 나는 이 문구는 그 앞뒤의 본문에 대한 서론이나 결론이 아니라 상당히 느슨히 사용된 문구라고 생각한다.
(2) 또한 이 문구는 11:27-32의 “데라의 족보”나 36:1,9 등의 에서의 족보들(36:1-5; 36:9-14 혹은 36:9-19)에서 보듯이 많은 경우는 해당 가계 목록의 서론일 뿐이지 그 뒤이어 나오는 내러티브 부분까지를 포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3) 2:4와 37:2의 경우는 어쩌면 이 톨레돗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느슨하게, 그리고 의미의 일관성 없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à 그러므로 톨레도트에 대한 논술이 거의 모든 창세기 주석의 서론에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 것은 별로 신경쓸 거리가 아니다. 이 것이 창세기 이해에 정말 눈을 열어주는 경우는 거의 없는 듯 하다.
à 19세기 말에 Bernard Duhm이 이사야서의 소위 “종의 노래”가 독립된 문헌들이라는 것을 주장한 바가 있다. 이 이론은 한 때 상당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지금도 이 용어는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이 “종의 노래”가 결코 주변 문맥과 분리될 수 없다는 지적들에 의해 크게 신뢰성을 상실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이론에 회의를 품고 있다. 또한 T. N. F. Mettinger라는 학자는 A Farewell to the Servant Songs란 책을 써서 Duhm의 이론에 도전했다. 나는 Mettinger의 책 제목을 흉내내어 A Farewell to the Toledoth Formulas가 나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창세기의 구조
* 톨레돗 포뮬라 없이 창세기의 구조를 분석해 볼 때 창세기는 크게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뉜다.
창 1-11장: 원역사
창 12-50장: 족장사
- 여기에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원역사와 족장사(그리고 성경의 내러티브)는 결코 두부 모 자르듯이 자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내러티브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위의 경우에서도 창세기의 이 두 부분은 11:27-32의 데라의 족보를 통해서 연결된다.
1-11 (11:27-32) 12-50
- 이런 연결고리들을 통한 연결은 다른 경우들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 창 6-9장의 노아 홍수와 그 앞의 문맥은 5:28-32의 라멕의 노아 출산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다.
(2) 창 10장의 노아의 후손의 족보는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란 반복구들을 담고 있다(10:5, 20, 31). 이 반복구들은 11장의 바벨탑 사건의 서론격인 11:1과 얽힌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10장의 족보는 11장의 바벨탑 사건의 이후의 상황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 창 12-50장의 족장사 역시 두부 모 자르듯이 구조를 나누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창 11:27-50:26까지의 본문을 아브라함부터 요셉까지 각 인물의 등장과 죽음을 기준으로 해서 나누어보면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창 11:27-25:11 아브라함(Abraham Cycle)
창 21:1-35:29 이삭(Isaac Cycle)
창 25:19-49:14 야곱(Abraham Cycle)
창 37:1-50:26 요셉(Jacob Cycle)
이 구조를 조금만 유의해서 살펴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각 인물들의 이야기에는 본문상으로, 그리고 연대기상으로 서로 겹치는 부분들이 있다. 일례로 아브라함의 죽음은 25:1-11에 기록되어 있다. 반면 이삭의 21:1-7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두 인물의 기록은 21:1-25:11에는 겹쳐서 나타난다. 또한 이삭의 죽음은 35:27-29에 기록되어 있고, 그의 아들 야곱의 탄생은 25:19-26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25:19-35:29의 방대한 분량은 두 사람의 삶이 겹치는 부분이다. 물론 여기에 언급된 중첩 부분들에서 동시대를 살아간 두 사람이 같은 정도로 활약을 한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중첩 부분에서 이삭의 역할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22장의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이야기 정도가 그나마 그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서도 많은 설교들이 제시하는 바와는 달리 그의 역할은 지극히 수동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야곱의 생애와 겹치는 부분에서도 그의 역할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가 유일하게 독자적인 중심인물로 활동하는 26장과 축복 문제를 다루는 27장에서만 그는 등장인물로 활동하며 야곱의 나머지 인생에서 그의 역할은 거의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들의 구조를 그림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들 속에서 두드러진 인물은 아브라함과 야곱이다. 그리고 이 중에서 야곱이 아브라함보다 더 중요성을 띤다. 반면 이삭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과 자기 아들 야곱 사이에 끼여서 존재감이 상당히 작다. 요셉의 경우 그가 등장하는 본문은 이삭보다 상대적으로 길기는 하지만 사실상 그의 삶은 그의 아버지 야곱의 삶과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겹친다. 이 그림이 보여주는 관찰사항들을 좀 더 자세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 째, 아브라함의 죽음(25:1-18)은 야곱의 탄생(25:19-26)과 아예 맞닿아 있다. 이삭이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순간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삭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본문은 26장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의 본문 구성상으로는 이 26장은 25:19-34의 야곱의 탄생과 팥죽 사건 이후에 배열되어 있다. 이런 배열의 결과 이삭이 독자적인 인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는 기회는 최소한 내러티브상으로는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둘 째, 야곱과 요셉의 경우 37-50장에서 이 둘의 활약상은 상당 부분 겹친다. 사실 요셉만이 무대 위에서 독자적인 주인공으로 활동하는 것은 38-41장 정도이다. 나머지 장들에서는 거의 모든 경우 야곱이 항상 무대 위에 존재한다. 그는 42장에서 재등장한 이후 창세기 50장 전반부까지, 즉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까지 거의 계속해서 등장한다. 즉 야곱은 창세기 25-50장까지 절반이 넘는 장들 속에서 계속 주인공, 혹은 중요인물로서 등장한다.
셋 째, 창세기 37-50장의 소위 요셉 이야기 속에서도 언뜻 보면 주인공이 요셉인 것처럼 보이지만[8] 내용을 좀 더 깊이 살펴 보면 요셉은 야곱과 열두 아들들이 애굽 고센에 안착하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데 있어서 도구로 사용되는 존재일 뿐이다. 요셉은 이 아들들 중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더 큰 것 뿐이다. 이 점은 요셉이 독자적인 활동을 하는 39-41장을 제외하고는 야곱과 열두 아들들이 계속적으로 거의 전 장면에 요셉과 함께 존재한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요셉의 독자적인 활동 장면 역시 야곱과 열두 아들의 애굽 정착을 위한 준비과정으로써 그러한 것이다. 이 점은 45:5-8과 50:19-21에서 요셉 스스로가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따라서 37-50장은 사실은 요셉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 가족의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또한 창세기 38장의 존재 역시 37-50장을 요셉 이야기로 읽기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9] 이 본문에는 야곱의 가족 중 오직 유다만 독자적으로 등장하는데, 이것은 거의 예외적인 경우이다. 이 장은 요셉의 이야기와 더블플롯으로 맞물리는데, 이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요셉 이야기와 연관을 맺도록 되어 있는 것은 유다와 요셉이 이스라엘의 나중의 역사에서 주인공이 될 북왕국과 남왕국의 지배적인 지파들의 조상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에서 유다와 요셉이 어떻게 얽히든지는 상관없이 이 38장의 유다에 대한 에피소드 역시 37-50장을 요셉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 가족의 이야기로 읽어야 함을 잘 보여준다.
넷 째, 플롯적인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창세기 이후의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사람은 야곱이다. 그가 낳은 열두 명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수장들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세기의 플롯의 방향은 어떻게 아브라함을 통해 시작된 구속의 역사가 야곱을 통해서 열두 지파를 이루었으며, 이들이 어떻게 애굽에 들어가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섯 째, 요셉이라는 인물이 독자적인 중요성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자기 아버지 야곱의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종속된 인물이라는 점은 그와 그의 아버지 야곱의 죽음 기사를 통해서 확인된다. 야곱의 죽음과 그에 따른 후속조치에 대한 내용은 창 50:1-21에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어 요셉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창 50:22-26에 나온다. 창 50:22에 따르면 요셉은 110세를 향유했다. 이 숫자가 실제의 연대기적인 숫자가 아니라 창세기의 족장들의 이상적인 삶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일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10] 내러티브의 흐름상 요셉이 야곱의 죽음 후 바로 죽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그냥 실제 숫자로 보고 계산을 해도 야곱의 죽음과 요셉의 죽음 사이에는 23년의 공백이 있다. 하지만 이 23년의 기간을 내레이터는 완전히 간과하고 야곱의 죽음과 요셉의 죽음을 바로 이어서 배열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창세기의 중심에는 사실상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가장 직접적인 조상인 야곱이 서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야곱 탄생 이전의 이야기들은 야곱으로 흘러 들어가며, 야곱이 죽는 것과 더불어 창세기는 막을 내리는 것이다.
여섯 째, 창세기에서 그 중요성에 있어서 야곱에게 유일하게 필적할 수 있는 인물은 아브라함이다. 그는 11장 마지막에 등장해서 25장 초두에 끝을 맺음으로써 거의 15장에 이르는 분량에 등장한다. 하지만 야곱은 25장 중반에 등장해서 50장의 거의 끝 부분까지의 본문을 차지함으로써 아브라함보다 거의 두 배의 본문에 등장하고 있다. 이 점 역시 창세기의 진정한 주인공은 야곱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처럼 위의 모든 사항들을 고려해 볼 때 분량이나 존재감에 있어서 창세기의 주인공은 야곱이라고 할 만하다. 그의 탄생과 죽음은 창세기의 절반이 넘는 본문에 등장하고 있으며, 그의 죽음은 곧 창세기의 끝과 동일시된다. 이렇게 볼 때 창세기는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야곱의 몸을 통해 탄생하였으며, 애굽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다루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핵심적인 내용의 중심에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단일 조상으로서의 야곱이라는 인물이 서 있다.
* 이처럼 성경 내러티브의 내용들은 각 부분이 서로 아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창세기: 시작의 책
세상의 시작(창 1-2장)
인류의 시작(창 1-2장)
결혼의 시작(창 2장)
죄의 시작(창 3장)
구원의 시작(창 3:15; 6-9장; 12장 등)
각종 문명의 시작(창 4장)
출생의 시작(창 4:1)
살인의 시작(창 4장): 가인
죽음의 시작(창 4장): 아벨
영생의 시작(창 5:24): 에녹
국가의 기원(창 10-11장 )
인간의 종교(무화과 나무 옷)과 하나님의 구원(가죽 옷)의 대조의 시작
구속사의 진정한 시작(창 12:1-3): 아브라함,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스라엘의 시작(창 12-50장): 아브라함-시조; 야곱-12지파의 조사
창세기 1-11장: 원역사
성경의 창조기사는 두 개로 구성되어 있다. 1:1-2:3 창조기사 I 2:4-25 창조기사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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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25 창조기사 II
3장 타락
4:1-5 가인과 아벨: 첫 살인
5장 셋 계보
6-9장 노아 홍수
10장 세상의 지파들
11:1-11 바벨탑 사건
11:12-26 셈의 족보
11:27-32 데라의 족보: 아브라함의 배경
* 창 1-11장을 접근할 때 유의할 사항
- 창세기의 기록은 있었던 모든 사실을 완벽하게 다 기록한 글이 아니라 그 시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선택적으로 언급한 것.
- 이 선택과 상세함의 기록정도는 경우에 따라서 차이가 난다.
- 그러므로 본문에 안 나타난 점보다는 나타난 점에 집중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이전에는 회의론자들이 이 점들을 중시해 왔지만, 이제는 점차 창세기가 철저한 기록이 아니라 선택적인 기록이라는 사실을 대부분 인정한다. 하나님께서 이 선택적인 내용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바가 있음을 인전한다면, 본문의 줄거리에 나타난 중요한 점들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이다” (아더 컨덜, 창세기-출애굽기: 15).
- 1-11장은 창조와 세계의 시작 때에 일어난 여러 일들의 신학, 정신, 인간이고통을 겪게 된 이유 등의 문제를 간략히 제시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고, 이후는 그 문제의 해결을 지향한다.
- 글의 주요 관심사와 분량은 상응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경 및 창세기에서의 글의 분량을 생각해 볼 때 1-11장은 창세기의 정말 관심사가 아니다.
- 다시 말하면 오경 및 창세기는 문제의 원인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결에 관심이 있다.
-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1-11장은 창조부터 역사의 시작 때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한 상세한 과학적,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 그러므로 성경을 과학적 지식과 연결시켜서 다루는 데에는 항상 조심해야한다. 물론 우리가 가진 정보로 성경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항상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과학적 지식에 맞추어서 성경을 재단하려는 태도는 위험하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글들을 접근할 때 성경이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야지 아닌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 구조: 각 부분 연결고리 고려
- 원역사가 어디에서 끝나고, 족장사가 시작할까?
- 사실 본문은 이 두 부분을 나누어주고 있지 않다. 11:26/27을 보면 내용이 반복된다. 이렇게 두 부분은 연결되어 있다. 또한 11:27-32는 원역사와 족장사의 중첩부분이다.
창 1:1-2:3 제 1 창조 기사[11]
* 1장은 반복적인 문구가 많이 나타난다.
(1) “하나님이 가라사대”(10회: 3,6,9,11,14,20,24,26,28,29)
(2) 명령구, “~이 있으라”(8회: 3,6,9,11,14,20,24,26)
(3) 성취에 대한 보도: “그대로 되니라”(7회: 3,7,9,11,15,24,30)
(4) 창조 행위 기술, “하나님이 만드사”(7회: 4,7,12,16,21,25,27)
(5) 결과 승인 문구(7회: “4,10,12,18,21,25,31)
(6) 이름 짓거나 축복하는 말씀(7회: 5[x2], 8,10[x2],22,28)
(7) 날짜에 대한 언급(6/7회: 5,8,13,19,23,31[2:2])
* 7회의 반복구가 두드러짐.
* 3일과 6일이 강조됨
(MC: 나중의 창조의 6일의 도표에서 보게 되겠지만 첫 3일은 3일에서 정점에 이르고, 나중 3일은 제 6일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리고 결국은 제 7일에 의해 모든 창조는 끝을 맺는다.)
두 날 모두 “하나님이 가라사대”가 다중적으로 사용되고, 몇 중의 구조를 띠고 있음.
1:1-2 서론: “하늘과 땅” 창조
한자말 “천지”는 온 세상, 우주와 동일한 의미.
히브리어 “하늘과 땅”도 마찬가지(merism: 제유법[12]).
땅은 창조된 것인가? 아닌가?
(MC: 성 오거스틴은 고백록 제 11-13장에서 창세기 1장에 대해서 자세히 다룬다. 그 중에서 오거스틴은 이 1:1의 “하늘과 땅”은 이후에 나오는 표현들과는 다르게 이해해야 함을 지적한다.) (참고: 김용규,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서울: 휴머니스트, 2010], 349쪽 이하).
(MC: 성경신학자들이 가진 한계들 중의 하나는 너무 계몽주의적 사고를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1+1=2이지요. 하지만 조금만 해석학적 지평을 넓혀서 생각해보면 1+1의 답은 무한대의 다양한 가능성에 열려 있습니다. 위의 김용규가 지적하듯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란 주기도문의 표현에서 “하늘”은 어디일까요? 결코 허블의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하늘은 아닐 것입니다. 과학의 눈으로 이 하늘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가 도착하는 종착역은 리차스 도슨의 결론 뿐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은 그런 물리적 세계를 가리키는게 아니지요. 창세기 1:1의 하늘과 땅 역시 통상적인 어법과는 다르게 읽는 것이 조금 더 타당성을 갖겠지요.)
1:3-5 첫 째날
빛의 창조: 보시기에 좋았더라.
빛과 어두움을 나누심
1:6-8 둘 째날
궁창(=하늘)을 만드셔서 물과 물을 나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심.
1:9-13 셋 째날
a. 9-10절: 뭍이 드러나게 하심*
b. 11-12절: 식물을 만드심(식물은 제 6일의 생물들의 식량)
c. 13절: 결구, 날짜에 대한 언급.
* “하나님이 가라사대”란 말이 두 번 나오고,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 한 번 나온다. 이 두 말이 제 6일과 마찬가지로 이 날의 기록을 구조적으로 나누어준다.
물을 한 곳으로 모으고 뭍이 드러나게 하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
더라)
이 땅은 1:2의 땅?
뭍에서 식물을 내게 하심(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4-19 넷 째날
광명
해, 달, 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0-23 다섯 째날
물의 동물들/하늘의 새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축복하심: 최초의 축복을 받은 것은 인간이 아니라 바다와 공중의 생물들
22절: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hrp, hbr, ~ymh-ta alm, hbr)
1:24-31 여섯 째날
* “하나님이 이르시되”란 말이 구조 분석에 중요(24,26,28,29). 여섯 째 날에만 총 네 번이 반복된다(וַיֹּ֣אמֶר אֱלֹהִ֗ים).
-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란 말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 세 째 날과 마찬가지로 이 문구들이 이 날에 대한 기록의 구조를 나타내준다.
a. 24-25절: 땅의 짐승 창조
b. 26-31절: 사람 창조
1) 창조(26-27절)
2) 지상 명령(28)
3) 음식공급(29-30)
d. 31 결론: 31절은 1장 전체의 창조 기록에 대한 정리이기도 하다.
2:1-3 일곱 째날-결론
“일곱 째날”이 세 번 반복됨à 일곱 째 날에 대한 강조
안식
축복하심
거룩하게 하심: “구분하게 하다”
1일 |
|
4일 |
발광체들 |
2일 |
하늘/물의 나뉨 하늘 위의 물과 |
5일 |
새들과 물고기 하늘의 짐승과 물의 짐승 |
3일 |
뭍과 물 나눔(수평적 나눔) 식물 (뭍은 식물의 처소) |
6일 |
동물들과 사람 |
7일 |
안식일 |
[1] vm,xo: 오경이나 시편의 다섯 개의 책의 각각을 가리키는 용어. 이것이 복수 연계형으로 쓰이면 yvem.xu/yvem.Wx가 됨.
[2] 이 단원의 내용은 주로 J. L. Ska, Introduction, 3-9의 정리.
[3] cf. 유대교 정경에서 원래 룻기는 성문서 중의 하나,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는 각각 두 개의 책이 아니라 하나의 책임. 이 책들이 상하로 나뉜 것은 70인경 전통.
[4] 이 단원의 내용은 주로 J. L. Ska, Introduction, 9-15의 정리.
[5] 시내산은 오경의 총 187장 중 59장(출 19-민 10)의 무대가 된다. 이 것은 오경의 중심이 어디 있는 지를 보여줌.
[6] 이 단어는 창세기에서 굉장히 다양한 의미로 번역되었다. “대략”(창 2:4; 36:1,9); “…자손의 계보”(5:1); “사적”(事績) (6:9); “후예”(10:1; 11:10,27; 25:12,19); “약전”(略傳) (37:2).
[7] 이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는 Duane Garrett, Rethinking Genesi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1), 91-106을 보라.
[8] 통상적으로 이 장들은 요셉 이야기란 칭호로 불려진다. 예를 들어 G. W. Coats, From Canaan to Egypt: Structural and Theological Context for the Joseph Story (CBQMS 4; Washington: Catholic Biblical Association, 1976); R. E. Longacre, Joseph: A Story of Divine Providence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89) 등은 아예 요셉 이야기를 그 책 제목으로 하고 있기까지 하다.
[9] 이런 난점 때문에 Coats는 바로 앞의 각주에 언급된 37-50장의 연구서에서 아예 이 38장을 완전히 배제해버리기까지 했다.
[10] C. J. Labuschane, “The Life Span of the Patriarchs,” OTS 25 (1989), 121-27; J. G. Williams, “Number Symbolism and Joseph as Symbol of Completion”, JBL 98 (1979), 86-87 등. 이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는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 18-50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95), 709-710을 보라. 이들에 따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숫자는 다음과 같은 도식을 따르고 있다:
아브라함: 175 = 7 x 52
이삭: 180 = 5 x 62
야곱: 147 = 3 x 72
요셉: 110 = 1 x (52 + 62 + 72)
이 도표에서 보듯이 족장들은 나이를 인수분해한 바에 따르면 7,5,3,1의 내림차순으로 숫자가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곱해지는 제곱수는 5,6,7로 올림차순으로 되어 있다. 요셉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세 사람의 나이의 숫자를 종합한 것이다. 이러한 분석이 맞을 경우 요셉은 세 족장의 모든 이야기들을 종결 짓는 역할을 한다. 그의 죽음으로 창세기가 끝이 나는 것이 더 이상 적절할 수가 없다.
[11] Schnittjer, Torah Story, 제 4 장의 내용이 사색의 중요한 발단이 되었으며, 또 현 강의안의 상당 부분의 내용을 차지하고 있다.
[12] 사물의 한 부분만으로 사물 전체를 나타내는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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