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내용!! 강해!!

[스크랩] 신명기 강해 1

하나님아들 2014. 11. 20. 00:09

 

 

 

 

 

 

신명기 강해 1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천 국 1 (신 1:6-18)


신자가 천국을 생각할 때 자칫 한가지를 빼어놓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천국에서는 어떤 생활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천국에서는 어떻게 어떻게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천국에서의 삶의 방식입니다. 천국에서는 이러이러한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신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삶의 방식을 알아야 자신이 세상을 살 때 비춰지는 모습에서 어떤 것이 천국과 반대되는 것인지를 알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신자들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만 좋아하지 천국이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다만 슬픔이 없고 고통이 없고 아픈 것이 없고 눈물이 없다는 것만 좋아할 뿐입니다. 왜 그러한 것이 없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항상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공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누가 선물을 준다고 하면 선물의 내용에만 관심을 두지 선물을 주는 사람의 마음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선물만 있으면 되지 선물을 준 사람의 마음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자들의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천국을 주시겠다고 하니까 천국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천국 자체만 좋아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신자들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천국을 좋아하기 전에 그 천국에 넣어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인간의 근본은 땅입니다. 땅에서 태어나서 땅에서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근본입니다. 그런 인간을 하늘나라에 넣어주시겠다고 합니다. 하늘나라는 장차 우리가 살 나라는 되지만 우리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 나라는 성경대로 하나님의 나라이고 아들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사들이 살고 있는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천국에 보내주시겠다고 하니까 마치 자기의 나라가 된 것처럼 설쳐댑니다.

 

 

 

 

세상에는 세상 나름대로의 법칙이 있고, 하늘 나라에는 하늘나라대로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 두 법칙은 서로 상반됩니다. 공존할 수 없는 법칙입니다. 한쪽은 깨어지고 버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의 법칙을 보이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사시던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나라에서의 삶의 방식을 보이신 것입니다. 내 나라는 바로 이런 나라라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말씀을 통해서 천국에서의 삶의 정신을 눈치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삶을 미리 연습하고 배우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교회입니다. 내가 직접 실습하고 배우기 위해서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힘쓰지 않고 단지 좋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교회에서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단지 교회가 교회다워짐으로 해서 그 혜택을 누려보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신자들이 참된 신자의 모습으로 살고 사랑을 보임으로서 나타나는 결과를 자신이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교회가 왜 사랑이 없느냐는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 사람은 교회가 사랑이 없는 것이 다른 신자들이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사랑이 없기 때문에 교회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천국을 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좋은 것에 대한 욕망에 불과합니다. 천국이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는 자리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 나라는 바로 그런 정신이 유지되는 나라이고, 그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십자가를 아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이 보이신 천국의 정신을 실습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갈 가나안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 땅이 비록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섣불리 들여놓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계십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신명기가 바로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호락호락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게 하지 않습니다. 1절에 보면 "이는 모세가 요단 저편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하세롯과 다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을 지척에 두고 웬 공부를 또 해야 합니까? 가나안 땅 가까이 오게 하셨으면 그냥 들어가게 하시면 될 일이지 무엇 때문에 또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새로운 말씀들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긴장을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지금의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봤다면 말씀을 다시 선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구원하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들어가게 하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은 따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지금의 은석교회를 교회로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신자로 보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점이 우리를 긴장되게 만듭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가나안 땅 앞에서 다시 말씀이 선포되는 것은 이미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법을 받은 자로서 광야 생활을 했는데 과연 그 말씀에 맞게 살았는가를 고발하기 위해서 다시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악한 본질을 낱낱이 파헤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에서 말씀을 듣습니까?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는 입장에서 한가지 말씀드릴 것은 설교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설교라면 설교는 매주일 선포될 때마다 새로운 말을 해야 하고 새로운 성경 지식을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식의 전달은 새로운 것을 전달될 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이 없을 때는 더이상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 지식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지식이 아니라 고발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주일에도 이 자리에 모여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모여서 설교를 듣습니다. 왜 또 설교를 들어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신명기의 입장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주일에 예배당 문을 나설 때는 분명히 말씀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한 주간 살아가실 때 말씀이 있는 자로 사셨습니까? 말씀이 요구한 삶을 제대로 사셨습니까? 모두 실패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의 말대로 모친의 죄중에서 태어난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말씀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또 다시 말씀을 설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이 여러분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해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인간이 얼마나 죄악에 파묻혀서 도저히 선의 가능성이 없는 자인가를 깊이 깨달아라고 말씀이 또 선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여호와의 법을 선포하시는 것은 그들이 잊어버렸을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가나안 땅에서 실천해야 할 행동지침을 내려주시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서 과거를 해석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법을 받은 자로서 그 삶이 어떠했는가를 다시금 법으로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이방인과 똑같이 악한 자이고 말씀에 실패한 자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둘 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는 가나안 족속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도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찾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고발 받고 있는 것이 신명기입니다. 1장에서 요단강을 건너가기 직전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지금의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하나님을 버리고 떠날 마귀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말씀을 통해서 말씀에 실패한 자기들의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른 자들이나 자기들이나 똑같은 더러운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자기의 실패 속에서도 여전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감사와 겸손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은 '우리는 비록 말씀에 실패한 자들이지만 여호와의 이름은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말씀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정신입니다. 우리는 저들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포기할 때 요단강을 건너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단강 앞의 이스라엘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말씀 속에서 자신의 실패를 깨달으십시오. 그 어떤 가능성도 두지 말고 철저하게 실패한 자임을 아십시오. 교회는 하나님께 대하여 말씀에 대하여 실패한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말씀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분이 있다면 교회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성공했는데 무엇 때문에 교회를 찾고 회개를 하고 주님을 의지합니까?

 

 

 

 

교회가 실패한 자들만 모인다는 것은 크나큰 의미가 있습니다. 성공자가 없기 때문에 잘났다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실패자이기 때문에 모두가 욕먹어야 하고 고개를 들지 못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나는 덜 실패했다'고 하면서 고개를 살며시 쳐들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실패자로 모이는 교회, 그 교회가 천국의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잘난 자 못난 자로서의 차이가 없고 모두가 실패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쳐다 볼 수 없는 죄인으로만 나올 때 '나 잘했다'고 고개를 쳐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실패를 모른 사람은 요단강을 건너갈 수 없습니다. 자기 실패를 모른 자가 요단강을 건너가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의 체제가 흔들려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돕기 위해서 각지파에서 두령을 세우라고 하십니다. 모세를 돕는 지도자를 세우게 되는데, 지도자란 어떤 사람인가하면 권력을 가지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체제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일을 하는 것이 지도자입니다. 즉 지도자를 통해서 천국으로 인도함 받는 것입니다.

 

 

 

 

먼저 지도자는 누가 됩니까? 13절에 "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명한 자를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두령을 삼으리라 한즉" 지도자는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명한 자로 골라 세웁니다. 이것을 세상적인 시각에서 보면 학벌도 높고 경제가 어려울 때 그것을 잘 해결할 수 있는 지혜도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져 있는 사람을 골라서 세우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지혜와 지식이란 그런 뜻이 아닙니다.

 

 

 

 

16,17절을 보면 지혜와 지식이 있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 때에 너희 재판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너희 형제 중에 송사를 들을 때에 양방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의 타국인에게도 그리할 것이라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로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이것이 지혜와 지식이 있는 지도자, 즉 재판장의 할 일입니다. 결국 지혜와 지식이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부강한 나라만들고 교회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혜와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지식입니다.

 

 

 

 

재판장으로서 중요한 것은 공평입니다. 세상을 공평하게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그 지도자를 통해서 천국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재판을 공정히 하라는 것은 억울한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은 약자가 강자에게 눌렸을 때 발생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억울한 자가 발생하는 것은 옛 애굽의 풍습에 매여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애굽은 힘의 나라입니다. 힘이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힘없는 자는 힘있는 자에게 착취당하고 눌리면서 억울함을 당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빠져 나온 이스라엘 안에서 억울한 자가 발생했다는 것은 애굽의 풍습이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풍습이 아닌 새로운 천국의 체제를 지도자를 통해서 보임으로서 이스라엘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인데, 그것이 곧 공정입니다.

 

 

 

 

천국은 억울한 사람이 없는 나라입니다. 억울함이 없다는 것은 계급이 없고 힘의 체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공정해야 합니까? 앞서 말한 대로 모두가 실패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잘났고 못났고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공정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도 애굽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애굽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자신에 의해서 억울한 자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천국을 앞에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묻습니다. 천국 앞에서 세상을 잊어버리고자 하십니까? 세상을 잊어버리지 못할 때 여러분은 공정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신자의 할 일은 공정을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지도자로서, 여러분이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이 되어서 공정을 보임으로 다른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천국의 체제가 확산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목사를 돕기 위해서 장로, 권사, 집사를 세웠다는 뜻의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 것도 맡지 않은 평신도를 돕기 위해서 목사를 세우고 장로, 권사, 집사를 세운 것입니다. 목사란 신자 한사람 한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만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성도들에게 천국에서는 해서는 안될 것들을 전하면서 천국의 모습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세상을 공정하게 바라보십시오. 즉 모든 자를 공정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힘없는 자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고 힘이 있다고 해서 굽실거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쳐야 할 것은 세상을 공정하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로 모여서도 드러나게 됩니다.

천국은 힘의 체제가 완전히 사라진 나라입니다. 그 천국을 이 땅에서부터 은석교회로 모여서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지도자로서 나오십시오. 목사도 여러분도 똑같이 우리의 지도자이신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주님의 정신을 드러내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천국으로 만들어가야 할 사람들이고 성도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말씀 앞에서 자신을 고발당하고 나는 실패한 자임을 자각하면서 실패한 나인데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사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에게 세상은 공정하게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실패와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으로 인한 억울한 자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잊어버렸을 때 세상에는 여러분 때문에 억울함을 당한 자가 발생하게 됨을 잊지 마십시오.

 

 

 

 

요단강은 '나는 저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포기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땅입니다. 때문에 수시로 땅의 생각과 땅의 체제가 흘러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린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몸 하나 내 맘대로 할 수 없고, 생각조차 내 마음대로 안되고 믿음도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우리들이 내세울게 뭐가 있겠습니까? 우린 다같이 천국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힘을 포기한 자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마음속에 힘을 두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 두십시오. 그리고 실패한 자로서 주님께 나오십시오. 그럴 때 교회는 천국의 모습을 넉넉하게 보일 것이고 공정함이 살아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일에 힘쓰는 지도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천 국 2 (신 1:19-33)


사람은 날 때부터 생명에 대한 집착력을 소유하고 태어납니다. 생명에 대한 집착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행동을 자기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에 의미를 두고 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은 자기의 생명과 연관이 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생명에 위협을 느끼면 불안해하고 생명의 안전에 보장을 받으면 마음에 평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속에서 싹트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입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하나님을 믿지 않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왜 사람은 날 때부터 하나님을 불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겠습니까? 그것이 곧 자기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는 본성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은 내 생명의 보호자'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불신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생명의 보호자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내 생명이 보호되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보다도 세상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세상이 자기 생명을 지켜주고 보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세상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세상으로부터 뭔가 자기 생명을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힘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것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구하는 것들을 살펴보십시오. 모두가 자기 생명을 유지하고 지키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결국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웃지 못할 일이 소위 교회라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사업이 잘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그 사람의 소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업에 있는 것입니까? 그 사람은 사업이 잘돼야 자기 생명이 안전한 보장을 받을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모든 소원을 사업에 두고 있습니다. 대학에 합격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학 들어가는 것이 자기에 대한 보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학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마음을 지닌 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이 좋은 나라라고 하기 때문에 가고 싶은 것이지 천국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단지 자기 생명의 연장을 꾀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천국은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천국은 분명히 믿음이 있는 자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깨끗한 자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과연 믿음이 있는 자가 있습니까? 천국에 들어갈 만큼 깨끗한 자가 있습니까? 천국은 인간에게는 봉쇄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창 3:24절에 보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천국으로 가는 길은 타락한 인간에게는 철저하게 봉쇄되어져 있습니다.

천국은 교회 나오듯이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살고 계시는 깨끗한 나라에 더러움만 가득 안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들어 갈 수 있습니까? 때문에 천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제대로 알고 또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신자라면 '천국 간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에 대해서 부정을 해야 합니다. 흔히 신자들은 자기의 신앙 행위를 근거 삼아서 천국의 여부를 판단하곤 합니다. 열심히 하면 천국에 갈 것으로 여기고 열심히 하지 못하면 가지 못할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어떤 열심 가지고도 깨끗한 나라에 갈 수 있는 근거는 못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자기에 대해서 실패감을 느끼고 좌절을 해야 합니다. 천국은 내 노력과는 무관하고 내 행위와도 무관하고 나로서는 아무리 해도 천국은 나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사실 죄인인 인간들은 천국에 보내줘도 살지 못합니다. 자기의 본성과 반대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조금만 착한 모습을 보여도 칭찬 듣고 존경받았는데 천국에서는 그런 것으로는 입도 벙긋 못하는 곳입니다. 너무나 완벽하게 깨끗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일 조금 한 것으로 자랑할 수 있고, 내 양심을 내세울 수 있는 곳은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모두가 죄인들만 모여 사는 곳이고 나보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많은 곳이 세상이기 때문에 자기의 착함과 의로움을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꾸 죄인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죄인들끼리 자기를 비교하기 때문에 자신이 좀 더 나아 보인 사람 같고, 나아 보이기 때문에 자기는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같은 교회 안에서도 '나는 저 사람보다는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에 대해서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해 보이는 행동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안된다'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더 나아 보여도 '나는 못간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면 할수록 헌금하면 할수록 기도하면 할수록 '이것 가지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마음속에 새겨야 합니다. '나는 안된다, 나는 못간다'는 것을 깊이 인식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내가 가는 나라가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붙잡고 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 때 나를 붙잡고 계신 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의지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교회로 모이는 것도 뭔가 해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은 아무리 해도 가능성 없다는 것을 깨닫고 또 깨닫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죄 안짓기 위해서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죄인이고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재인식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인간의 가능성 없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정탐꾼을 보낸 사건입니다. 약속의 땅이 어떤 땅인가를 알아보겠다고 정탐꾼을 보낸 것은 선한 일입니다. 22절에 보면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라고 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말에 대해서 모세는 선히 여겼다고 23절에서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정탐꾼을 보낸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라고 했으면 그냥 들어가면 되지 왜 정탐꾼을 보내는가? 그것이 불순종이다'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정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습니까?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장대 같은 민족들, 힘이 센 아낙 자손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기를 즐겨 아니하고 낙심하고 '우리를 죽이려고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다'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힘이 센 민족을 발견하고 불안과 공포를 느꼈습니다. 한마디로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공포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를 발견할 때는 필연코 공포와 불안감이 몰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인간의 대응책은 생명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부터 피해버리거나 아니면 타협하는 것입니다. 불안과 공포는 상대에 비해서 자신의 약함을 의식했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상대보다 자기의 힘이 월등함을 발견했을 때 불안과 공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살아야 한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강한 존재가 자기를 가로막을 때 인간은 타협 내지는 피함이라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힘이 센 장대 같은 아낙 자손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죽는 것이 무서웠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세상을 살면서 이러한 두려움과 불안을 많이 느끼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십니까?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면서 미리 힘센 사람들을 다 쫓아내시고 이스라엘이 편안히 들어가서 그 땅에 거하도록 하시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약속의 땅이 어떤 땅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29-31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너희의 힘으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시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안아서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고, 또 하나님이 안아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으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갓난아이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다 큰 아이를 안아서 인도하지 않습니다. 혼자서 설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기 때문에 안아주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고 안아주셔야 겨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인간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안고 계시는 분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어떤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가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도 내 생명을 지켜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인간은 세상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세상과 타협하려고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상의 것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를 안으셔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문제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하시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아낙 자손을 바라보지 말고 너를 안고 이곳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있는 분도 아닌데 어떻게 바라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곳까지 온 것이 내 힘이 아니라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덕분이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을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살아가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앞에 장대 같은 인간이 가로막든 누가 가로막든 상관없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불안해하고 낙심합니까? 갓난아이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품에 안겨서 부모를 바라보는 아이는 불안도 없고 걱정 근심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인도할 것이고 부모가 자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해줄 것을 믿기 때문에 집안이 망하고 어려워진다고 해도 아이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른은 조금만 어려워도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살아갑니다. 누구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어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아이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 같은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위협이 오고 시련이 오는 것은 세상은 나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안고 있는 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나를 안고 있는 분이 충분히 이 시련을 이길 수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시련 속으로 밀어 넣으십니다. 이스라엘이 들어가야 할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의 힘으로 들어갈 수 없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힘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약속의 땅을 막아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 안겨 있는 자기를 발견한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땅으로 만드셨습니다. 천국은 하나님께 안겨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 삶을 이 땅에서부터 보여줘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설교는 우리의 현실과 직결됩니다. 현실과 상관없는 설교는 설교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현실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의 설교는 여러분께 어떤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안겨서 살아가는 것이 최고로 바른 삶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불안과 염려와 근심 걱정은 하나님께 안겨 있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 의해서 생명의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을 믿으면 되는데, 생명을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공포에서 떠나지를 못하고 자꾸 죄와 타협하면서 죄와 더불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하나님께 안겨서 들어가는 나라라면 이 땅에서부터 그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천국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까지 오게 된 것은 여러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안아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세상을 그렇게 보지 못합니까? 하나님께 안겨서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장대 같은 아낙자손이 보일 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불안해하고 낙심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아낙 자손 조차도 하나님의 손에 있고 하나님이 싸우신다는 것을 왜 잊어버리고 사십니까?

 

 

 

 

아이가 아니라 어른으로 사는 자는 모든 일을 자기가 다하려고 하게 됩니다. 자기 힘으로 생명을 지키며 세상을 살아가고 자기 힘으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부르되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어떤 일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일이 잘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생명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게 되고 영생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은 육신의 편한 길을 약속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도 그것이 영생의 길임을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기면 영생의 길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고 내 생명이 보장되고 육신이 편한 길만 찾아갈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우리를 안아서 영생의 길로 들어가시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가는 길에는 필연코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인생은 단 일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뭐가 불안하고 뭐가 걱정이 됩니까? 왜 자기 힘으로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고 합니까? 그래봐야 나오는 것은 세상에 대한 굴복이고 죄와의 타협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십시오. 하나님께 안겨서 살아가는 것보다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죄와 타협하면서 발버둥치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가득차 있을 것입니다. 내 생명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만 움직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온통 머리 속은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내 생명을 지킬 수 있는가?'로만 가득차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이 교회가 내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도움이 안되는가에만 관심을 둘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이 천국갈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예수님이 계십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신 분입니다. 나는 더러운 자이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이지만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넉넉하게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손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는 그 나라에 들어가는 자 된 것입니다. 신자가 자랑할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여러분이 발견해야 하는 것은 참된 자아입니다. 참된 자아를 발견할 때 나 같은 것을 붙들어서 천국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서 예수님만 커지고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신자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생명을 보존하고 지키는 길을 가려고 하지 말고 생명을 잃어버리는 길로 가려고 하십시오. 그것이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좁은 길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안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넉넉히 이기는 천국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천 국 3 (신 1:34-46)


신자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시고 계시는가를 알지 못하고서 신앙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신자의 자리로 부르셨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하나님이 부르신 의도에 맞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나를 사랑하셔서 천국 보내주시고 세상에서 나를 지키셔서 평안하게 살도록 해주시기 위해서 나를 부르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일을 하며 살아갑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서, 온 몸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힘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습니까? 설령 하나님이 사랑해주겠다고 찾아오셔도 부끄러워서 숨어야 할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 아닙니까? 자신의 인간 됨을 안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버젓이 고개를 들고 '하나님 나를 사랑해주세요'라고 요청할 수 있으며 내 일이 잘 안된다고 하나님께 삿대질을 해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신앙이 없는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신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누누이 말씀드린 대로 단지 여러분을 천국 보내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신자로 부르셨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은 무엇을 위한 선택입니까? 하나님의 선택은 여러분을 도구로 삼기 위한 선택입니다. 어떤 도구인가 하면 이 세상의 악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입니다. 땅의 악의 정체를 파헤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창 3:15을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후 땅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터로 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여자의 후손이고, 누가 뱀의 후손인가 하는 점입니다. 뱀의 후손이라고 해서 머리에 표시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뿔이 난 것도 아닙니다. 또 여자의 후손이라고 해서 얼굴에 광채가 나면서 어떤 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세상에 뱀의 후손, 즉 악의 정체가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는 쪽으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이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통해서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차별을 두고 대하신 것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기준으로 두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아벨의 제사가 선해서 하나님이 아벨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택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다만 선택된 자는 자기의 의로 인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인격과 자질과 가능성을 가지고 스스로 의를 창출해 내려고 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반발해서 아벨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된 자와 선택되지 않은 자, 즉 여자의 후손의 모습과 뱀의 후손의 모습을 특징지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선택된 자는 자신에게는 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에 선택되지 않은 자는 자신에게도 의를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 대해서 기대를 걸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선택하신다는 문제에 대해서 반발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에게도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해 달라고 합니다. 선을 행할 가능성이 있고,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인간은 무능한 존재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이것이 악의 모습입니다. 이런 악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짓된 신은 인간의 노력과 정성과 행동에 대해서 칭찬해주고 거기에 합당한 상을 내려주는 우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신자로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바로 이러한 악을 세상에 나타내라는 의도에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신자가 할 일은 부름 받은 자신에 대해서 대견해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고백하면서 오직 하늘로부터 주어진 의 때문에 생명을 얻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부름 받은 신자의 할 일입니다. 그런 신자를 통해서 세상에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인간의 노력과 정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할 일을 만들어 내려고 하고, 자기의 열성을 의로움으로 치장하려는 인간의 정신이 곧 악의 모습인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즉 선택은 나의 구원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를 나오고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을 가지고 다 끝난 것으로 여겨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종교생활 하면서 세상에서 편히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세상의 악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죄인 되었을 때 부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자각하면서 자기 의에 대해서는 포기한 채 오직 하늘에서 오신 의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여러분에게서 보여진다면 여러분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교 성적표를 만들어 놓고 점수를 매기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 천국이 성적으로 들어가는 나라라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점수는 몇점이겠습니까? 100점입니다. 완전한 100점이 아니면 받아주지 않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 선택되어진 은혜에 의해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의를 내세울 수 없고 자기에게 가능성을 둘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마치 하나님이 성적표를 들고 점수를 적고 계시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읽기 과목, 기도 과목, 헌금 과목, 봉사 과목 등등이 있고 우리에게 시험을 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하면 높은 점수를 줘서 나중에 천국에 가게하고 또 우등상도 준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사단의 하수인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방해자로 등장해 있는 실체입니다.

 

 

 

 

저는 현대 교회의 실체를 고발하는 것보다는 혹 은석교회가 하나님의 일에 방해자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신자라고 큰소리치면서 오히려 사단의 하수인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로서 살아가지 않는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를 선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배당에 모여서 하나님 부르고 기도하고 찬송 부른다고 해서 선한 모임이라고 단정짓지 마십시오. 복음이 바르게 설교되지 않으니까 악한 교회고, 바르게 설교되어지면 선한 교회라고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즉 은석교회를 선한 교회로 여기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바로 설교되어진다고 해서 선한 교회로 단정지어 버리면 여러분은 은석교회에 다닌다는 것만으로 자신을 선한 쪽으로 생각해 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은석교회를 악한 교회로 보고 계십니까? 악한 교회로 보셔야 합니다. 만약 은석교회를 선한 교회로 보고 계셨다면 그것은 아마 내가 다니는 교회이기 때문일 수 있고, 아니면 죄가 무엇인지 몰라서일 수도 있습니다.

 

 

 

 

35절에 보면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자녀들과 선악을 분변치 못하는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악한 세대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악한 세대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상식과 인생 경험을 토대로 해서 가능성을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상식과 경험을 가지고 약속의 땅의 들어갈 수 있는 여부를 판단했습니다. 결론은 못들어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악한 세대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즉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그들의 상식과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오고, 홍해를 건너고, 만나를 먹고, 수십 년을 다녀도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발을 부르트지 않는 것은 결코 그들의 상식과 경험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두사람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지내온 힘을 은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자신들의 상식과 경험을 앞세워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못들어간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 악한 세대의 모습이고 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은혜를 말하면서도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는 것은 무엇입니까? 열심히 하니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고, 열심이 없으니까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불안해하는 것이 과연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껏 자신의 힘으로 종교생활을 해왔을 뿐입니다. 지금까지의 믿음이 오직 은혜였음을 아는 신자는 천국을 앞에 두고서 자신의 상식과 경험 열심을 토대로 해서 천국의 여부를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린 악합니다. 목사인 저도 악하고 여러분도 악하고 은석교회도 악합니다. 그 무엇도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의 은혜만 의지할 뿐입니다. 이것이 악한 세대 속에서 천국 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신 이유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에 자신을 내어 맡기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도해 주신 그 자리에서 나타내야 할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자리를 나름대로 정해놓고 살아갑니다. 기뻐하고 감사하고 은혜를 노래할 조건들이 마음속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즉 내가 원하는 자리로 인도해 줬을 때 감사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살아가는 신자는 기쁨과 감사의 자리를 스스로 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인도해주신 현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을 실천하고 있는 신자입니다.

 

 

 

 

신자들이 천국을 상상할 때 떠올리는 것은 좋은 환경입니다. 하지만 좋은 환경이 천국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잘못되어 있으면 고통과 근심과 걱정과 염려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얼마든지 좋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과 근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천국은 환경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좋은 환경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상태가 달라지기를 원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가 바로 천국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마음 상태가 아니라 좋은 환경에만 관심을 둔 채 살아갑니다. 그 욕망이 이어지는 것이 좋은 환경으로서의 천국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욕망의 화신입니다. 욕망의 불길 속에 자기를 내던진 채 자신을 태워가고 있습니다. 욕망의 성취를 위해서는 조그마한 가능성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아가서는 가능성까지도 스스로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관심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나의 육신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쯤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다는 각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종교적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이 무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세대의 모습입니다. 도무지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좀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의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모르십니까? 아신다면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에 실려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악한세대의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죄인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신자로 부르신 이유도 여러분이 어떤 쓸모가 있고 사용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무가치한 것이 인간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들어가는 것이지 소유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땅에 대한 소유의 가능성이 사라졌을 때 통곡을 하게 됩니다. 45절에 "너희가 돌아와서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통곡 소리를 듣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통곡은 자기를 앎에 대한 회개의 통곡이 아니라 욕망의 단절로 인한 통곡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통곡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세상일이 자기 마음대로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대로 안될 때 분풀이를 하게 됩니다. 남자는 술을 마시고 여자는 눈물을 흘림으로서 자기 욕망이 차단되고 단절되는데 대한 화를 내뱉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욕망의 차단은 하나님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원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41절에 보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반발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고 너희가 각각 병기를 띠고 경솔히 산지로 올라가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

 

 

 

 

이스라엘은 들어갈 수 없다는 땅에 기어코 들어가 보겠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나안 민족과 싸우지 않겠다고 해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다면 들어가 싸우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그들의 삶이 은혜의 체제가 아니기 때문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지 자기들의 행동에만 기준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안들어 간다고 해서 하나님이 화나신 것이라면 들어가 싸우면 된다는 생각은 결국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주자는 식입니다. 기도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화내신다면 기도하면 될 것이 아니냐는 것과 같습니다. 봉사하지 않아서 복을 못받는 것이라면 봉사하면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멋대로 가지 말라한 길을 가고서는 자기 뜻대로 안된다고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면 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멋대로 기도하면 된다고 우겨놓고는 안들어준다고 성질 내는 것입니다. 많이 가지고, 높아지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인간이 되는 것이 먼저인데도 인간될 생각은 하지 않고 엉뚱한 짓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통곡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애당초 세상일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는데 어떻게 자기 뜻대로 세상이 되어지기를 바랍니까?

 

 

 

 

여러분, 세상일이 누구의 뜻에 의해서 움직여져야 합니까? 내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세상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져야 한다는 것이 여러분의 생각이라면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슬퍼하지 말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 뜻이 무너지는 순간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만들어 준 상황에 대해서도 전혀 인정을 하지 않고 원망하고 울면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천국은 우리의 힘으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것을 아신다면 지금부터 자기의 힘으로 살지 말고,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지 말고, 은혜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을 보이십시오. 달라진 인간의 모습을 보이십시오. 악한 세대의 악이 무엇인가를 보이십시오. 이것을 위해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은혜였음을 잊지 마시고 앞으로 남은 인생도 은혜를 따라 살기로 작정하십시오. 그리고 현재 주어진 환경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나에게 되어진 일임을 알고 거기에 순종하는 자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의 입에서는 통곡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의 외침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고 천국은 이런 신자가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땅 (신 2:16-25)


결혼한 부부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목표로 삼는 것이 집장만이라고 합니다. 5년 계획, 10년 계획 등 철저한 계획 아래서 저축하고, 맞벌이하고, 이 계획을 위해서는 아이를 낳는 것까지 뒤로 미루면서 내 집을 갖는 것에 모든 소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비둘기집 같은 집이라도 하나 장만하게 되면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다는 마음으로 뛸 듯이 기뻐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그토록 집에 집착을 할까요? 세상에는 좋은 것도 많고 가지고 싶은 것도 많은데 무엇 때문에 가장 우선적으로 집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입니까? 단지 남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갖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내 집을 마련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집에 대한 집착은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집만이 아닙니다.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도 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것보다 집에 대해서 강한 집착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집을 땅에서의 자신의 안식처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들어갈 집이 있고, 쉴 수 있는 나만의 집이 있다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셋방살이하던 사람이 집을 장만했을 때 그 집에 아무리 작은 집이라고 할지라도 내집이라는 것 때문에 그 집에서 푸근한 안식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조금 지나면 그것도 사라지고 좀 더 나은 집에 대한 집착에 빠져 살아가게 되지만 어쨌든 처음 집을 샀을 때는 집으로부터 안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자기의 땅, 또는 집을 갖고자 하는 것은 땅에서의 안식처를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땅, 내 집이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구축한 것입니다. 떠돌아다니지 않고 확고하게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는 것이 곧 든든한 안식처를 마련한 것입니다. 주부들이 집을 가꾸는 것을 보면 셋방이나 전세, 즉 남의 집에서 살 때보다는 내집에서 살 때 더 많은 정성을 들여서 가꾸고 치장을 합니다. 물론 내집이라는 애착심도 있겠지만 그 속내면에는 확고한 내 안식처이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안식하고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 분위기로 만들어 보려는 마음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전쟁입니다. 고통과 복잡함과 어지러움의 세계입니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 나만의 공간, 나만의 안식처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쉴 수 있는 공간을 찾아 헤매이는 것입니다. 그 안식처가 일차적으로 내집이며, 집에서 안식을 얻지 못할 때는 결국 다른 안식처를 찾아서 떠돌게 되는 것입니다. 신문이나 TV에 보면 갈곳이 없어서 공원을 배회하는 노인분들의 얘기가 나옵니다. 그분들은 세상에 자기의 안식처가 없는 분들입니다. 집이 없어서 공원에서 배회하시겠습니까? 집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집이 안식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집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집이 있는데 안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내 집이 아니라 자식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내 집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큰소리칠 권리가 사라지고 집주인인 자식의 눈치를 보며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현상은 집에 대한 권리가 바뀌는 순간 나타납니다.

 

 

 

 

부모는 집에 대한 권리를 잃은 자로서 아들은 내 집, 내 안식처를 확보한 자로서 위치가 뒤바뀐 것입니다. 이제 부모는 자식으로부터 안식처를 제공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때문에 자식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누구의 눈치를 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결국 집에서 잃어버린 안식을 찾기 위해 공원을 배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장소를 찾아서 안식처가 없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지나간 인생을 후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살이는 물레방아 돌 듯 돌고 도는 것입니다. 어느 특정한 인간만이 겪는 인생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겪게 되는 물레방아 인생입니다.

 

 

 

 

지금껏 개인이 집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개인을 지나서 어떤 단체, 회사, 국가로까지 나아가도 동일합니다. 땅을 확보하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이 있는 곳에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회사도 많은 땅을 확보하려고 하고, 국가도 많은 땅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옛날부터 있어 왔던 전쟁은 모두 땅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지금도 일본 한국이 조그만 섬에 불과한 독도를 놓고 다투는 이유도 결국 바다라는 땅을 좀더 많이, 그리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이렇듯 국가가 좀 더 많은 땅을 확보하기 위해서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땅이 많을수록 존재기반이 확고하게 다져지기 때문입니다. 즉 땅에서 땅을 확보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더욱 확산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땅에 애착을 가지고 삽니다. 내 집에 애착을 가지고 삽니다. 하지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땅에 애착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내 집은커녕 머리 둘 곳도 없으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린 모두 세상에 머리 둘 곳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예수님과 우리들과의 차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차이가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집을 버리고 다리 밑에서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땅에서 머리 둘 곳도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것에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사람이 집을 장만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의 안식처를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머리 둘 곳을 확보함으로서 마음의 쉼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우리를 향해서 문제를 삼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왜 집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집을 가지고 있는 것이 세상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머리 둘 곳이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세상에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는 것은 집을 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머리 둘 곳이 없이 살면서도 안식을 누리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마음으로 사셨기에 땅에 머리 둘 곳이 없이 살면서도 안식을 누리고 평안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이 없이 사신 것은 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시면 못하실 것이 없으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신 것이 무슨 가난의 본을 보이고 청빈의 본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에 보이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신 것은, 하나님은 세상을 머리 둘 곳도 없을 만큼 더러운 곳으로 보신다는 폭로입니다. 그만큼 더러운 곳이기 때문에 땅에 대해서는 전혀 애착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땅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땅이라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이 처음에 땅을 창조하실 때는 온 땅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충만하기를 원해서입니다. 창 1:27,28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통해서 온 땅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채워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함으로서 땅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아담의 형상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깨끗한 곳은 하나도 없고 죄로 더러워진 땅이 되고 만것입니다. 예수님도 바로 이 마음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수님과 같이 세상을 애착을 가질 수 없는 더러운 곳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결코 세상을 더러운 곳으로 보지 않습니다. 세상과 같이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살아가면서 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죄악가운데 태어나고 살면서 더러움에 물들었기 때문에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땅은 의가 되시는 주님을 용납하지 않고 죽였습니다. 의를 용납하지 않는 땅, 그 땅은 하나님의 심판 속에 사라질 땅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땅에 애착을 가지고 땅에서 즐기지 못해서 안달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믿는 신자의 모습입니까?

 

 

 

 

오늘 본문에도 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명기 2장의 주된 이야기는 하나님이 주시는 땅만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지 않은 땅이 나옵니다. 4절에 에서의 자손의 지경을 지날 때 그들과 다투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에게는 한발자국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8절에는 모압 광야 길로 지날 때 모압을 괴롭게 하지 말고 그들과 싸우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역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9절에서 암몬 족속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미 그 땅에 거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다니면서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수많은 민족들이 자기 땅을 가지고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그들이 배워야 하는 것은 세상에는 우리가 거할 땅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은 자기 땅을 가지고 정착해서 잘살아 가는데 이스라엘은 땅없이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세상은 우리가 머물 수 없는 곳임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이 우리의 소망이라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외에 다른 땅에서 자리 잡아서는 안될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땅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더러운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에 안식처를 마련하기 위해서 살지 마십시오. 더러운 땅에 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세상 사람과 똑같이 다투며 살아가는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땅을 얻기 위해서 그들과 다투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내 자리를 확보해서 안식을 누린다고 해도 조금 지나면 확보한 자리를 좀 더 늘이고 싶어하게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시 다투는 삶이 되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많은 땅을 지나면서 '저 땅은 내 땅이 아니야'라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우리들이 살 땅은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땅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땅에 내가 살 땅이 아니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의 더러움과 악함을 발견하면서 '나는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땅에 들어갈 사람이다' 는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다투는 삶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지금 학생들은 학교에서 다투고 있습니다. 이 땅에 확고한 자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다투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부모들도 이것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내 자리를 확고하게 하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에서의 자기 자리를 위해서 싸우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위해서 싸워야 할 자임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사실 여러분은 어떤 싸움에 모든 힘을 쏟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얻기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까? 아마 전자의 싸움에 모든 힘을 쏟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은 우리가 싸우고 다툰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소유하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7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싸우고 다툼으로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을 주고 부족함이 없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는 것이지 자기 힘으로 양식을 구하고 자기 자리를 마련하며 사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인간다운 인간 되는 것입니다.

 

 

 

 

싸움과 다툼이 있는 삶은 피곤함이 있을 뿐입니다. 뺏기 위해서,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싸우고 다퉈야 하는 것이 땅의 인생입니다. 싸움과 다툼의 연속인 삶속에서 어찌 피곤함이 없겠습니까? 사람들은 그 피곤을 자신이 싸움으로 뺏은 전리품을 바라보면서 해소하려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계속되어지는 싸움과 다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피곤과 고통 속에서 안식 없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없는 자의 삶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땅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람의 땅을 탐내고 산다면 그도 역시 피곤함과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이 싸우고 다투지 않아도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이 하셨습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그들이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고 누리고 싶은 대로 누릴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하게, 즉 양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필요한 것을 다 제공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약속한 땅 외에 다른 땅에 애착을 두거나 욕심을 내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 안에서 얼마든지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풍족이란 많아서 풍족이 아니라 내가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면 풍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세상에 살게 하신 것은 나그네 인생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미리 앞서서 나그네 인생을 살았던 이스라엘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내 자리 만들어서 정착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정착하려는 순간부터 이미 싸움과 다툼이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나그네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땅을 향해서 부지런히 달려가야 할 나그네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것을 배우라고 여러분을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신자의 땅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죄가 가득한 땅에 머리 두고 살아라고 우리를 세상에 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땅에 내 자리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서 타협하고 아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양심을 속이고 불의와 타협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땅의 노예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바로 이것을 배워라고 여러분을 직장으로 보내시고 가정으로 보내시는 것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24절에 보면 "너희는 일어나 진행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 땅을 네 손에 붙였은즉 비로소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신 땅이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네 손에 붙였다고 합니다. 붙였다는 것은 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싸워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만이 하는 독특한 싸움입니다. 상식적인 싸움은 힘겨루기입니다. 힘을 겨루어서 그 결과에 따라서 승자 패자가 가려지는 것이지 미리 승자와 패자를 결정지어 놓고 싸우라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싸움의 결과로 승리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싸워놓고도 그것을 자기들의 승리로 보지 않은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세상을 살면서 내 힘으로 싸우고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여러분의 힘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여러분께 붙여주신 것으로 봐야 합니다. 만약 싸우지도 않았는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수긍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 노력이 들어갔는데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신자가 들어갑니다. 천국에 들어와서도 자기 힘을 자랑하지 않을 사람을 들여보내시는 것입니다. 34절에 "그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진멸하였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진멸해 버리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존재할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이 붙여주시는 것을 감사히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싸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존재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시혼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나 시혼이나 같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는 특별한 사랑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이 시혼을 치면서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시혼이 진멸당할 때 우리가 바로 진멸당해야 할 자들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살려 놓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참된 이스라엘의 본분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자리를 만들기 위해 살지 마십시오. 아무리 든든한 자리를 만들어도 그 안에 안식과 평안은 없습니다. 안식은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붙여주시는 것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주신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새땅은 이런 사람이 차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곧 온유한 사람이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모릅니다. 세상이 모르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시고 마지막까지 새 땅에 들어 갈 수 있는 가치 있는 인간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기쁨 (신 3:23-29)


인간들의 세계에는 역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장 작게는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크게는 세계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순간부터 역사는 이미 시작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될 수 있는 것이 있고,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역사입니다. 개인의 역사는 태어나서부터 죽기까지의 삶 전체입니다. 한 가문의 역사는 그 가문이 형성되었을 때부터 사라질 때까지의 존재 그 자체가 역사입니다. 또 국가의 역사 역시 국가가 형성되었을 때부터 종말될때까지 존재하였던 것 자체가 역사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역사를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역사로서의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이 말하는 인간의 역사란 세상에 남길만한 크고 가치 있는 사건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사람들은 자서전, 또는 회고록이라는 것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그 내용은 모두가 평범한 삶이 아니라 인생 속에서 뭔가 남길만 하고 드러낼 만한 크고 위대한 일들을 나열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낼 만한 것들을 역사로서 가치 있는 것으로 보고 나머지는 역사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봅니다. 이것은 가문이나 국가의 역사에서도 동일합니다. 아니 모든 역사가 이와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 발생하는 것은 작은 것의 희생입니다. 가치 없이 보이는 것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희생되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한마디로 영웅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로서의 가치 있는 것을 내세우다보면 결국 등장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과 그 일을 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그 인물을 중심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습니다. 왕정시대의 국가는 왕을 중심으로 역사가 기록됩니다. 백성이 있어야 왕의 존재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왕을 중심으로 기록되는 것입니다. 결국 왕의 역사는 백성들을 희생시켜 버립니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역사가 기록되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아주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제 얼마후면 월드컵 경기가 벌어집니다. 월드컵은 세계적인 축구시합입니다. 이 경기에서 승리한 나라는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됩니다. 따라서 월드컵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축구는 11명이 하는 경기입니다. 그런데 경기 후에 영웅이 되는 사람은 골을 넣은 한 두명에 불과합니다. 그 외 나머지는 영웅이 된 사람의 뒤에 가려집니다. 90분을 땀흘리며 뛰었지만 결국 한 두 사람을 영웅 만들기 위해서 땀흘린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분명히 자기 혼자 힘으로 골을 넣은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점수를 올렸다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의 노고와 땀이 한 사람에게로 모두 집중시켜 버립니다. 마치 다른 사람은 승리에 전혀 도움이 안되었던 것처럼 여겨버립니다. 물론 실력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 두사람에게만 관심이 집중되어 버립니다.

 

 

 

 

이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선수들은 자신을 부각하기 위해서 힘을 쓰게 됩니다. 경기를 하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내가 영웅 되기 위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남에게 주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개인 플레이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국가를 위한 경기가 아닌 나 개인이 영웅 되기 위한 경기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역사란 영웅을 중심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역사에 의해서 가려지는 존재가 필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국가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할지라도 국가가 왕이나 대통령 때문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란 백성으로 인해서 형성됩니다. 왕없는 국가란 있을 수 있어도 백성 없는 국가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백성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가령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그 순간에 산골짜기에서 농사짓는 백성이 있습니다. 엄밀히 그도 국가의 역사 속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역사는 산골짜기에서 농사짓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영웅 중심으로 나아갈 때 인간은 자연스럽게 영웅적인 것이 아닌 행위는 무가치하고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를 든 대로 세상이 골을 넣은 선수에게만 관심을 두고 그들만 영웅 대접을 할 때 자연히 골을 넣지 못하고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 선수로서는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 할 수 있고 90분간의 자신의 노력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인생을 힘들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영웅 중심이지만 하나님은 영웅 중심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은 크고 가치 있게 보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을 위대한 영웅으로 부각합니다. 한 인간이 영웅으로 부각되어지기 위해서는 그 뒤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고 희생한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큰 것만이 성공이고 작은 것은 성공이 아니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연히 무엇에 관심을 가지게 되겠습니까? 크고 높아지는 성공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인생의 목적도 여기에 두게 됩니다. 작은 것은 가치 없는 것으로, 실패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의 뒤에 가려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남들이 알아주는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크게 되어지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지 작게 되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자신의 지금까지의 인생을 곰곰이 돌이켜 보기를 원합니다. 무엇을 위한 삶이었고, 무엇이 되어지기 위한 인생이었는가를 곰곰이 되짚어 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과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실된 믿음의 정신으로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신자의 인생은 분명히 기쁨과 즐거움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생의 즐거움을 잃어버렸다면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 원인을 잘못된 인생의 방향에서 찾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드릴 것은 모세의 기도입니다. 우린 모세의 기도 내용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면서부터 순탄하게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로 인해서 고생을 하며 나왔습니다. 그리고 40년의 광야 생활을 거치면서 오직 목적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백성들로부터 좋은 호응만 받은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모든 원망과 불평을 홀로 다 감당하면서 요단강까지 온 모세로서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입니다. 그럴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25절에 보면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이것이 모세의 기도입니다.

 

 

 

 

모세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기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기도도 역시 거의 모세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모세는 이미 민 20:12절에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어 갈 수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하나님께 가나안 땅을 보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 것은 단지 가나안 땅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라기 보다도 자신의 인생을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는 일에 쏟아 부은 모세로서 막상 가나안을 앞에 두고 저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지금까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인생을 살아온 자신에 대해서 실패감을 느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성취입니다. 인생의 목적이었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인생을 마감하고 싶은 것이 모세의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모세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수십 년을 오직 가나안 땅이라는 것만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이 막상 가나안 땅을 바로 코앞에 두고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인생을 마감해야 한다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모세는 자기 인생의 목적이었던 것을 자기 손으로 성취하고 싶어서 가나안 땅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신자들의 기도가 모세의 기도 수준을 넘지 못한다고 말씀드린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기 성취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2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 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만 해도 족하다는 것은 요단강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해서 온 것으로 족한 줄 알아라는 뜻입니다.

 

 

 

 

지금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통해서 자기 인생의 보람을 찾으려고 합니다. 자기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중심적인 위치에 있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기 성취에서 인생의 보람을 찾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성공 뒤에 자신이 가려지는 것을 거부하게 되고 자신이 앞에 부각되어지기 위해서 힘쓰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어갈 사람으로 여호수아를 세웁니다. 여호수아가 할 일은 모세가 하지 못한 일을 계속 하여 성취하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수아의 일은 모세의 일이 계속 이어진 것이지 모세와 별개의 일을 부여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여호수아의 일이 성취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일이 성취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자기 사명의 성취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비록 자기의 손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지만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루어질 일을 미리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 신자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여호수아의 일을 자기의 일과 별개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그 일이 중지되지 않고 다시 여호수아로 이어진 것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단지 내가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만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큰 실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신자는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자기 일로 여기면 안됩니다. 자기 일로 여기면 결국 자기 성취에 목적을 두게 됩니다. 신자가 모든 일을 자기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의 성취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기 성취로 끌어 당겨버리면 결국 그 일은 자기 손으로 해야 한다는 욕망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 일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일의 공로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을 참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 영웅의 인생을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영웅의 인생이라고 해서 세상에서 위대하고 유명한 인물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뜻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말하는 영웅의 인생이란 뒤에 있는 것보다는 앞에 있으려고 하는 인생을 말합니다. 자기 성취를 위한 인생을 말합니다. 내 손으로 뭔가 이룸으로서 내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인생은 뭔가 했다는 것에 가치를 두면 안됩니다. 신자는 언제나 뒤에서 남들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작은 것으로 여기며 무시하고 관심 두지 않는 일에 충성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앞세우기 위해서 내가 희생되어지는 것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일이 성취되어지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다시 축구 경기를 예로 들면 월드컵에서 승리하는 것이 국가를 위한 일이고 봉사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골을 넣지 못해서 유명해지지 못하고 단지 뒤에서 다른 선수를 도와주는 역할만 했다고 하더라도 국가를 위해서 봉사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국가대표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도 내 손으로 이루고 성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신자들의 봉사를 보면 자기 성취를 위한 봉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영웅이 되고 자신의 이름이 부각되어지고 자기 보람을 위해서 하는 봉사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연히 위대해 보이는 일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작아 보이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그런 일은 나보다 못한 자들이 맡아서 할 일이지 나 같은 사람은 좀더 위대하고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희생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가치 없다고 여기는 것은 희생이 자기 성취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지금은 세상이 예수님을 영웅중의 영웅으로 대우합니다. 위대한 성자, 위대한 위인으로 대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예수님의 본질을 알았다고 해도 계속 영웅으로 위인으로 대우하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지금 세상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바리새인들 앞에 나타나셨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틀림없이 영웅으로 대접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바로 세상이 생각하는 영웅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난 예수는 영웅이 아니라 자기들의 적이었습니다. 믿고 따르고 순종할 만한 가치 있는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신자가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웅이 되거나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무시당했으면 나도 무시당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세상에서 욕을 받았으면 나도 욕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았으면 나도 미움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생하는 것, 작은 것, 드러나지 않는 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어떻게 주님을 따르겠다고 할 수 있습니까? 결국 그가 말하는 주는 성경의 주가 아니라 자기가 상상한 주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러분, 영웅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위대해 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작은 것의 가치를 상실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에서의 만족은 찾지를 못할 것입니다. 작은 것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큰것에만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이 어떻게 작은 것으로 넘치는 인생에서 만족을 누리겠습니까? 내가 작아지는 것,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것, 남들이 나를 몰라주는 것, 여기에 마음두지 마시고 다만 남을 위해서 봉사했고, 희생했고, 도움이 된 것으로 족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더 많은 일을 해서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가지지 마십시오. 신자는 다만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분량 속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요단강까지가 모세의 분량이라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면 됩니다. 요단강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동안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위해서 살았다는 것으로 족한 줄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성취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실패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동안의 모세의 수고와 봉사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희생이 없이는 여호수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세가 수고하고 희생한 것이 있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열매를 거둘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열매를 누구의 손으로 거두게 되든 그것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내 손으로 일한 것이기 때문에 내 손으로 직접 열매를 거두고 싶어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크고 위대한 것에서 인생의 보람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진리는 작고 가치 없이 보이는 것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신자는 아무도 가치 없이 여기는 봉사와 희생 속에서 인생의 가치와 보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내가 했으니까 내가 칭찬을 받아야 하고 내가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그렇지 못하면 여러분은 언제나 자기에 대해서 실망하고 자책하면서 스스로 큰 구덩이에 빠지는 결과만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 주부들이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집안 일 하는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일로 여기고, 스스로 아무 능력도 없는 자로 여기고, 인생의 실패자로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인생의 무기력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집안 일도 가족을 위한 희생으로 봉사로 보지 못합니까? 하나님이 가정 주부를 하게 하신 것은 가정에서 봉사하라고 하신 사명임을 왜 모르십니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가치를 따지지 말고 다만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는 일인지만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씨뿌리는 것입니다. 열매를 거두는 것까지 여러분의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만 말없이 뒤에서 봉사하고 희생하면서 항상 작은 것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신자가 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진리 안에서 인생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규례와 법도 (신 4:1-8)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 말을 무시하고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담이나 하와는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해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타인의 죽음도 보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죽음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경험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뭔가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직접 경험한 것이나 목격한 것들입니다. 가령 아이들이 태어나서 기어다니고 걸어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엄마의 감시는 철저해집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아이들에게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것들이고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접근하게 됩니다.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을 만지게 되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게 됩니다. 그리고 자라가면서 서서히 자신에게 해가 되고 유익이 되는 것들을 경험하게 되고 그 경험이 기준이 되어서 가까이 할 것과 멀리 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것을 어떤 잘못에 대한 결과로 제시한다면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겠습니까? 가령 아버지가 아이에게 어떤 지시를 내립니다. '몇 시까지 숙제를 마쳐라 하지 못했을 때는 회초리 10대다'라고 했을 때 그 아이가 아버지의 말대로 정한 시간에 숙제를 마치기 위해서 애를 쓴다면 과연 그것이 아버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까? 아니면 자기 경험에 의해서 알고 있는 고통을 피하기 위한 선택과 결정입니까? 후자입니다. 아이들은 매맞는 것에 대한 고통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아버지의 말대로 숙제를 마치지 못했을 때 자신에게 주어질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순종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죽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선악과를 따먹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고 주의하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지 마라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일 뿐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신 것은 단지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이리 저리 따져보고 자신에게 해롭다고 생각될 때 금지하고 주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금지하는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죽으리라'는 것은 인간이 말씀에 순종치 않았을 때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 내리실 마지막 결과입니다. 물론 그 결과는 인간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불순종의 결과로 제시하신 것은 경험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조심해서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가 아까워서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지키기 위해서 아담에게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선악과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면 인간이 경험한 것을 불순종의 결과로 제시하셔야 했습니다. 인간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제시하시거나, 만약 두려운 것이 없다면 두려움을 가지도록 먼저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그래야 두려움 속에서 스스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선악과가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본래의 인간 모습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으로 창조된 인간이 말씀에 순종하는 본래 인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경험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죽음이라는 것을 불순종에 대한 결과, 즉 인간의 마지막으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죽음이란 말씀에 순종치 않고 본래의 인간의 모습을 벗어버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 결과이지 결코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인간으로 남게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이란 말씀에 대한 순종 그 자체이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믿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알게 하신 후에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라고 하셨을 때 인간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그것은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인간 스스로의 선택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결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그 외에 어떤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어서 믿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결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대 교회에서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부가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교회는 축복과 저주를 믿음의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현재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축복과 저주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축복은 좋은 것 저주는 나쁜 것이라는 생각 아래 축복은 물질의 풍요와 소원 성취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알고 있고, 저주는 있는 물질도 잃어버리고 엄청난 손해와 고통을 발생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누구나 축복은 얻고 싶고 저주는 피하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때문에 믿으면 축복이 오고 믿지 않으면 저주가 온다라고 할 때 사람들은 축복을 선택하고 저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믿음이라고 생각되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목사가 십일조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할 때 교인들은 저주를 피하고 축복을 받기 위해서 십일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아담 이야기를 해본다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단지 선악과를 먹는 행위를 금지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인간이 말씀에 순종하는 본래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다른 계산이나 이유 없이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차원에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죽는다는 것은 말씀에 순종치 않는 인간의 결과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이지 죽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워서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어떤 수단이나 조건도 동원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하시는 여러 가지 징벌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됨을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지 결코 징벌을 수단으로 삼아서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창조된 본래의 모습을 팽개쳐버린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이 지으신 땅에서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말씀대로 죽음이 밀려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음을 안고 태어납니다. 산 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 있는 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둠으로 가득 채워진 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꿈과 야망에 파묻힌 채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으로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어딜 가도 말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죄요, 죽음의 모습뿐입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세상과 전혀 다른 새로운 나라를 세우십니다. 본래의 인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죽음 속에서 생명을 안고 있는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나라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절에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앞서 말한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담에게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여기에서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면 살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은 본래의 인간 모습을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본래의 인간 모습이 회복되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는 것이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면 결국 본래 인간 모습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규례와 법도에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현실의 욕망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에만 순종해야 할 인간이 자기를 바라보고 자신의 욕망에 순종해 버릴 때 인간은 자기의 위대함을 위해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목사가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가 날로 커질 때 그것을 목회 성공이라고 떠들며 자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했더니 되더라'고 하면서 자신의 기술과 재주를 과시하게 됩니다. 교인들은 자기들이 돈 내면서 다니는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더 커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교회 다니는 보람으로 여깁니다. 이렇게 큰 것을 좋아하고 높아지고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죽음에 처한 인간이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과 연관된 규례와 법도는 죽음에 처한 인간의 모습과 반대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라는 말씀을 단순하게 생각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십계명이나 그 외 다른 말씀들을 잘 지키면 지옥가지 않고 천국에 간다는 정도로 이해해 버립니다. 사실 지금의 교인들이 뭔가 말씀대로 산다고 할 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거의 모두가 이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정해준 법칙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현세에서는 축복으로 연결되고 죽어서는 천국으로 연결되어진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믿음은 믿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사실 아담이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뭔가 자기 방어를 위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고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을 통해서 죽음에 처한 인간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 것처럼, 우리가 오늘날의 세상을 어둠과 죽음에 갇힌 땅으로 바라보게 될 때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규례와 법도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거치적거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합니다. 뭔가에 구속당하고 매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법이라는 것도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지키는 것이지 좋아서 지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도에 대한 신자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준행한다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짐스러워하고 부담스럽게 여기면서도 지키지 못했을 때 닥쳐올 수 있는 징계가 두려워서 억지로 끌려가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규례와 법도를 준행할 때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신자가 그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나라 말고 다른 나라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며 사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맞지 않는 일입니다.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습니다. 세상의 상식이 있습니다. 그 상식과 방식을 넘어설 때 그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눈총을 받고 밀침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란 세상의 상식을 넘어서고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를 좋게 보고 세상에서 이루고 싶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자기의 소망에 걸림돌이 되는 규례와 법도라는 것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가 좋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정말 좋다면 자연히 세상 나라는 싫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맞는 신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규례와 법도를 준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라는 것은 규례와 법도에 나온 세부적인 것을 하나하나 지키라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규례와 법도를 하나하나 지켰다고 해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않는 행동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본래의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만 순종하는 본래의 인간 모습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악과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으로 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신자로서 지켜야 할 세부 지침을 정해서 가르치고 지킬 것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내가 기도하고 십일조하고 주일 지킴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되려고 하는 것이 잘못이다는 것입니다. 한국교인들은 규칙을 완벽하게 지켜 가지고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당당한 신자가 되려고 합니다. 완벽하게 지켜서 복을 받아내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좋지 못한 의도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은 은혜가 아니라 어떤 조건이 충족됨으로 얻어지는 결과가 되어버립니다. 지금 수많은 교회들이 믿음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늘에서 주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규례와 법도에 대한 준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규례와 법도에 준행하는 자는 어떤 모습을 나타내게 됩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규례와 법도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입니다.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좋아하고 감사하는 인간되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으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바로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규례와 법도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인간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3절에"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을 인하여 행하신 바를 너희가 목도하였거니와 바알브올을 좇은 모든 사람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서 진멸하셨으되"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은 민 25장에 나오는 사건으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신을 더 좋아하고 이방여인과 간음함으로서 모두 죽여버린 사건입니다. 즉 그들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규례를 어겼기 때문에 죽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만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따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죽이신 것입니다. 이방신을 섬기고 이방여인과 간음한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따로 두고 있는 마음에서 나온 행위인 것입니다.

 

 

 

 

인간이 죽음에 처한 이유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으로 살지 못하고 인간이 따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정하고 그것을 위해 살았을 때 주어진 결과입니다. 그리고 생명은 반대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면서 하나님만 좋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는 것입니다.

 

 

 

 

6절에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고 말합니다. 지켜 행하라는 것은 항목 하나하나에 대한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것으로 부족함이 없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곧 지혜이고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욕심대로 살지 못하도록 합니다. 인간이 욕심대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최고로 알아야 합니다. 결국 규례와 법도를 하나하나 실천함으로 욕심대로 살지 않는 인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만 최고로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욕심에 이끌리지 않게 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규례와 법도가 지향하는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최고로 믿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 이미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 말을 계속 반복해서 하는 이유는 많은 신자들이 규례와 법도를 준행한다는 것을 세부적인 항목 하나하나에 대해서 실천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늘에서 준비하신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준비한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이미 자기를 포기한 낮아진 사람이기 때문에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이름 나는 일, 자기를 높일 수 있는 일을 따로 정하고 그 일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는 신자입니다.

 

 

 

 

 

돌판과 하나님 (신 4:15-24)


(다음 이야기는 실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 제 목 - 큐티, 당신도 이렇게 하십니까?

 

때는 21세기를 코앞에 바라보는 1998년 새 봄의 어느 날. 이른 아침 모 대학 캠퍼스 한쪽 구석에 한 무더기의 대학생들이 모여 있다. 그중 리더격으로 보이는 사람이 먼저 입을 연다.

 

리더 : "자, 여러분이 미치도록 기다리던 큐티 시간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은 창세기 12장 10절부터 20절까지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이 도중에 애굽에 내려갔던 때의 이야기죠? 조용히 묵상하시고, 함께 은혜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리더 : "각자가 묵상하신 내용을 서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짓궂게 웃으며) 자, 오늘 아주 오랜만에 나오신 태지 자매부터 시작해 볼까요?"

 

태지 : "(겸연쩍어 하며) 예, 그동안 아침에 피곤하다는 핑계로 큐티 모임을 못 나왔는데요, 갈수록 말씨도 거칠어지고 하루가 개운하지 않아서 다시 나오게 되었어요.

 

리더 : "그래요, 우리는 날마다 큐티를 하고, 그날그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먹고 살아가야 하는 거예요. Q.T.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친구들의 삶은 거칠어지고 삭막하게 변할 수밖에 없답니다. (태지 자매 쪽을 보고) 태지 자매님, 앞으로는 절대 빠지지 마시고요, 계속 말씀해 보세요"

 

태지 : "네, 저는 오늘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느꼈어요. (성경을 펴서 짚으며) 10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기근을 만났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더 큰 축복을 하셨어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단련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한 것이었음을 배웠고, 저도 이제부터는 어려움이 닥칠 때 실망하지 않고 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도록 노력하겠어요. (옆자리 미지를 바라보며) 이상입니다."

 

미지 : "저는 아브라함의 지혜를 배웠어요. 기근이 들자 그는 곧바로 나일강이 있는 기름진 애굽으로 내려갔고, 결과적으로 큰 재산 을 얻게 되었거든요. 게다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함으로써 혹시 생길지 모를 위험을 예방했다는 점은 아브라함의 놀라운 처세술이었다고 봐요. 크리스천들 중에 외골수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흔히 듣는데, 그것은 여기 아브라함의 교훈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 속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죠."

 

성지 : "(따지듯이) 잠깐만요. 아브라함이 자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믿지 않은 불신앙이었다고 알고 있는 걸요? 바로에게 아내를 첩으로 주고 양과 소와 노비 등을 얻은 것은 결국 자기 아내를 판 행위나 마찬가지잖아요? 저는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자가 신앙에서 떠나면 이렇게까지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고, 신앙을 더욱 굳게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리더 : "아, 예, 후지 자매님 생각도 좋은 생각이네요. (엄숙하게) 하지만 성경 말씀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거예요. 그 다양함 속에서 각자가 나름대로 은혜를 받는 것이랍니다. 성경은 참으로 신비한 것이거든요. 미지 자매님 계속 하세요."

 

미지 : "예를 들어 이런 경우가 있어요. 어제가 주일이었잖아요? 교회를 가려고 막 나서는데 교수님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제가 토요일에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마무리 부분을 조금 수정하면 A+를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직접 지도해 주신다면서 학교에 나오라는 거예요. 교수님과 이야기한 뒤 저녁 예배에 참석했죠. (감격에 찬 눈빛으로) 이처럼,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은혜 주실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죠. 너무 감사해요."

 

리더 : "그렇습니다. 물론 주일에는 교회에 가야 하겠지만, 미지 자매님의 경우 교수님을 찾아간 것이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왔잖아요? 우리 크리스천에게는 특별히 '융통성'이라는 것이 부족하기 쉽죠. 그것을 조심해야죠. 그럼, 이제 영지 형제님 차례이군요."

 

영지 : "저는 성경에 대해 새삼 놀랬어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인간적 연약함까지도 숨김없이 적고 있다는 것이죠. 저는 성경이 다른 신화책들과는 달리 정말 솔직한 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더 신뢰가 가네요."

 

성지 : "저도 그래요. 조금 덧붙이자면, 여기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브라함의 연약한 모습을 통해 모든 인간이 결국은 연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조상도 실패하는 것을 보아라, 인간은 그런 존재란다, 하고 말이죠. 그리고 또 저는 거짓말을 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제 저녁 열우씨랑 영화를 보고 늦게 들어갔는데, 어머니께는 버스가 안 와서 늦었다고 거짓말을 했거든요. 근데 기분이 계속해서 찝찝하더라구요. 성경에서도 아브라함이 솔직하게 아내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누이라고 속여서 바로에게 책망 받게 되잖아요. 살아가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죠."

 

리더 : "네,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 마지막으로 후지 자매님은요?"

 

후지 : "(시무룩하게)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큐티 교재를 들여다보며) 그냥, 여기 교재에 나와 있는 예화가 제 가슴에 와 닿아요. 참 뭉클한 이야기잖아요. 하나님께서 오늘은 저에게 이런 방식으로 은혜를 주시는가 봐요."

 

리더 : "저는 조금 특이하게,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순종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 같으면 남편이 다른 남자에게 첩으로 가라고 했을 때 화를 내고 이혼하자고 했을 텐데, 사래는 아브라함에게 순종해서 바로에게 갔어요. 정말 대단한 순종이 아닐 수 없죠. 사래의 순종처럼, 나에게 참으로 힘든 것이 요구될 지라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오늘 묵상하신 말씀을 하루 동안 생활에 적용하면서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흩어졌다. 몇몇은 수업을 받으러, 몇몇은 도서관으로. 큐티 시간에 묵상한 말씀을 하루 동안 생활에 적용하며 살기 위해서….

 

 

 


위의 글은 인터넷 기독잡지인 THE VOICE라는 월간지에 "큐티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위의 글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십니까? 대학생들이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큐티를 하는 것을 대견스럽게 생각하십니까? 위의 글들이 비록 실화가 아니라 가상적인 내용이라고 하지마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어떤 식으로 접근하고 있는지에 대한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한분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습니다. 이 교단과 저 교단의 하나님이 다르고, 이 교회와 저 교회의 하나님이 다르고, 이 사람과 저 사람의 하나님이 다릅니다. 각기 제 마음에 맞는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심각한 것은 다른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지 못하는 하나님은 우상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접근해 들어가는 방식이 하나님쪽에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들의 생존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인간 나름대로 접근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생존 문제는 각기 다릅니다. 위의 글에서 본바와 같이 학점이 문제인 사람은 아브라함이 사래를 아내라고 속인 것을 가지고 융통성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그 학생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융통성을 인정하시고, 그 융통성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교수를 찾아가서 높은 학점을 받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생존을 초점으로 해서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이 묵상이라는 것을 하고 있지만 그모습을 살펴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식을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크나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을 위해서 일하시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거룩을 위해서 우리의 생존도 포기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 머리 속에는 오직 나 자신의 생존문제만 가득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거룩을 포기해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 인간의 눈에 '포기'를 요구하는 하나님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보인다면 살기 위해서 땀흘리고 애쓰는 자신의 열정을 가상히 여겨서 복을 내려주는 하나님만 보일 뿐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상이라고 말하고 있고, 탐욕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골 3:5).

 

 

 

 

하나님은 열심 있는 신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를 잘하고 큐티를 잘하면서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숙해져 가는 신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으시고자 하는 것은 어떤 인간이 아니라 '흠없는 어린양의 형상'입니다. 신자는 이 어린양의 형상이 담겨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형상의 흔적이 있는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형상이 어떤 것인가를 규례와 법도를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지난 시간에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은 문자화 된 법을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규례와 법도를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정신이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사는 것은 내 힘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사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떡으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떡으로 사는 인생은 장자의 재앙에서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었듯이 죽어야 할 인생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사는 인생은 세상의 떡이 결코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희생으로 산다는 것을 믿고 떡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말씀으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떡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떡이 얼마나 있느냐 없느냐에 매이지 않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양의 희생의 형상이 담겨 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 형상을 발견하셨을 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떡을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합니다. 떡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선교사로 나간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돈이 없어서 선교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선교는 돈이 한다'라는 말이 됩니다. 이 말이 얼마나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는 교만에 찬 인간의 말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신 8:2,3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신 것은 고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언제나 떡을 의지하고 떡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교만을 낮추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은 떡과 무관한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돈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은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행 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신자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규례와 법도를 주신 하나님으로 등장합니다.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화염 중에서 말씀하셨는데 음성뿐이어서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두 돌판을 주십니다. 돌판에 기록된 내용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돌판에 기록된 규례와 법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돌판에 기록된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돌판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어떤 형상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호렙 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깊이 삼가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16절부터 나오는 대로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을 보이지 않으셨고 이스라엘은 말씀만 들었을 뿐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형상이 없는 분을 대체할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다른 하나님을 제조해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구원을 위해서 자기 힘으로 삼을 그 어떤 것도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 자기에게 힘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발판 삼아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권력을 발판으로 삼고 돈을 발판으로 삼아서 세상을 살고자 합니다. 자신에게 권력도 돈도 없으면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형제나 친척이나 친구들을 발판 삼아서 살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사라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보다도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을 마음에 담고 살아갑니다. 그 마음에는 말씀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말씀이 없기 때문에 소멸 당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24절에 "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로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 어떤 형상도 인정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소멸의 기준은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하셨고, 모든 것이 말씀대로 존재하는 것이 최고의 질서이고 하나님의 기쁨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말씀에서 벗어났습니다. 어디에서도 말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소멸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소멸 속에서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규례와 법도입니다. 그리고 규례와 법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순종하는 사람은 새로운 창조 속에서 영원히 살게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말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고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것을 힘으로 삼아서도 안되고 발판으로 삼아서도 안됩니다. 규례와 법도를 주신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아무리 소유를 해봐야 지식으로 신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신학을 배운 목사들, 또는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신앙이 높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신학을 배우고 연구한다고 해서 신자되고 구원받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신학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으로 채워져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규례와 법도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죄악 속에 파묻혀 있는 인간의 본질을 낱낱이 드러내고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신자답게 보일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다운 행동과 신자답지 못한 행동에 대해서 나름대로 기준을 정하고 규칙을 세우게 됩니다. 술 담배 안하기, 말을 부드럽고 상냥하게 하기,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하기, 등등 여러 가지 규칙을 정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신자다워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죄악된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본성인가 하면 자기 성취와 자기 만족이라는 본성입니다. 신자다운 행동을 하나하나 실천함으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이고, 그럴 때 마음 뿌듯함을 느끼는 자기 성취와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하면서 점차 못난 인간에서부터 벗어나고 잘난 인간으로 발전해 간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발전이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땅에 들어갔다고 해서 괜찮은 인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못난 인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못난 인간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못난 인간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신명기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는 설교라고 했습니다. 왜 가나안을 앞에 둔 시점에서 설교를 해야 합니까? 그것은 말씀에 실패한 시점에서 다시 말씀을 통해서 자신들을 점검함으로서 죄인으로서 못난 인간으로서 들어가야 할 나라가 가나안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못난 인간으로 남아 있어야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규례와 법도는 우리 쪽에서는 말씀을 못 지킨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신명기입니다. 말씀을 대충 지키며 살면 복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기존교회의 생각이지만 그것은 다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규례와 법도를 대충 지키면 되는 실천법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못난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이 규례와 법도, 즉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기는 애당초 틀린 일이고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주기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지킴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완벽하게 이루신 그 분을 바라고 믿어야 한 것입니다. 그 어떤 세상 적인 발판도 다 제거되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실 발판임을 알고 주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말씀 안에 있는 신자의 모습이고, 흠없는 어린양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천국은 오직 주님을 발판으로 여기고 주님만 의지하는 자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인간편에서 뭔가 들고 나와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되고 천국 가는데 협조하겠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이루심으로 그 의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우린 은혜라는 말 앞에서 할 말이 없는 인간입니다. 인간이란 그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완성하셔서 주신 것을 감지덕지하며 받아 누리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뿐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편에서 완벽하게 성취해 가실 것입니다. 방해를 받는다고 중간에 중지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도운다고 해서 더 빨리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해봐야 하나님의 일을 방해만 할뿐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죽어야 하는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 자비가 10가지의 규례로 등장하는 것이 십계명이고 그것을 한마디로 줄인 것이 사랑입니다. 롬 13:10에 보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한 말씀대로 사랑은 모든 율법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도덕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도덕이라는 것은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상대방을 위해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상대방 쪽에서 나를 불쌍히 여겨준 것입니다. 즉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나같이 못나고 죽어야 할 인간을 위해서 죽으신 분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계속해서 못난 인간, 즉 약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사는 것이며 어린양의 흔적을 담고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랑을 알고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을 자랑할 뿐이고 주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것이 말씀으로 사는 신자입니다.

 

 

 

 

 

십계명 (신 5:1-21)


지난 시간에 하나님은 자신을 '소멸하는 불'로서 소개하고 계심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소멸해 버리십니다. 그것을 어떤 형상이든 만들지 말라는 규례로서 당부하셨습니다. 어떤 형상이든 만들지 말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자기 힘으로 발판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눈에 보이는 형상을 힘으로 삼으면 안됩니까? 세상은 말씀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은 오직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지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말씀으로 유지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말씀을 벗어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주심으로 세상이 다시금 말씀으로 유지되어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순순히 하나님의 의도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법으로 자기를 재어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아버린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통해서 오히려 자기의 의만 더욱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십자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법을 적당히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발상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옛날에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그것으로 이미 할 일이 끝난 것으로 여깁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우리들이 잘하고 있는지 지켜보고만 계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믿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믿음에 대한 문제는 다 해결됐고, 이제 남은 것은 교회에 봉사하고 충성하면서 교회를 부흥시키고 복을 받아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라든지 믿음이라든지 은혜라든지 천국에 대한 얘기를 하면 손을 내저어버립니다. 이미 다 아는 얘기니까 그런 고리타분한 얘기는 들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것이고 다 뗀 과목이니까 그냥 넘어가고 '축복'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만 가르쳐달라고 할뿐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더욱 확실하게 응답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헌금하는 것이 하나님이 더 기뻐하는 것이 되는가? 어떻게 예배드리는 것이 더욱 거룩하고 은혜로운 예배가 될 수 있는가? 다리를 꼬고 예배드리는 것은 옳은 것인가 틀린 것인가? 라는 문제들을 가르쳐주기를 요구할 뿐입니다.

 

 

 

 

복을 받는데 도움이 될 행동과 걸림돌이 될 행동을 구분하면서 복이 되는 행동을 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십자가가 무엇을 요구하는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십자가와 함께 죽어야 할 존재인지도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도 모르기 때문에 목사들은 예배당의 평수, 재정의 정도, 교인 숫자 등에 자신의 가치를 두면서 다른 목사들과 차별시하고, 신자들도 재산과 교회에 헌금하는 액수, 세상에서의 지위, 직분 등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차이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흉내를 내고 있는 사단의 집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십자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셨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단지 '이왕 주셨으니까 지켜주겠습니다. 대신 지킨 만큼 하나님도 보답을 해주세요'라는 발상을 가지고 십계명을 대할 뿐입니다. 십자가란 곧 인간의 죽음에 대한 선포입니다. 죽음이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끝나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 앞에서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미스코리아도 의미 없습니다. 단지 흙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와 가장 추한 여자가 함께 있다고 해도 죽음은 그 둘을 동일하게 흙으로 볼뿐입니다.

 

 

 

 

단지 가죽이 덮여 있고 숨을 쉬고 있는 잠시동안만 세상으로부터 예쁘다는 부러움을 살뿐이고, 못생겼다고 무시를 받을 뿐이지 잠시가 끝나면 똑같은 흙입니다. 죽음 앞에서 목사와 평신도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것이 의미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흔적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엉뚱한 데 관심을 두기보다는 오직 십자가에 관심을 두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십자가도 십계명도 모두 자기 목적을 위해서 이용해 버린다면 그것을 어떻게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십계명은 계속 살아있는 율법이므로 지켜야 한다느니, 지금은 복음의 시대이기 때문에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느니 하면서 논란을 벌이고 있지만 이것은 십계명에 대한 오해와 혼란 때문에 빚어진 결과입니다. 십계명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잣대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처럼 살아가는 세상을 원하시고 나머지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십계명을 통해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자기 잣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자기 잣대로 하고 있습니다. 쌀을 팔거나 고기를 파는 정육점에 가보면 저울이 있습니다. 저울이 있는 상점마다 '우리 가게 저울은 정확합니다'라고 하지만 저울이 정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확인하는 기관은 따로 존재합니다. 그 기관의 판단에 따라서 저울의 정확성이 결정되는 것이지 자기 가게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정확하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가 한 판단이 정확하다는 결론을 쉽게 내리면 안됩니다. 어떤 한가지 일을 가지고도 사람들의 의견이 저마다 다릅니다. 그 이유는 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잣대가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상식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지식이 다른데 어떻게 잣대가 같을 수가 있고 판단이 같을 수가 있습니까? 그럴 때 다툼이 등장합니다. 저마다 내 판단이 옳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한번쯤은 내 잣대가 틀린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을 해볼만한데도 쉽사리 자기 잣대에 대한 의심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사람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게 저울의 정확성을 판단하는 기관이 따로 존재하듯이 우리의 잣대가 바른지 틀린지를 판단하는 진짜 정확한 잣대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판단하는 잣대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는 무조건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가장 정확한 잣대에 자기를 재어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잣대에 나를 맞추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이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생각에 나를 맞추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잣대에 나를 맞추면서 하나님보시기에 내가 어떤 모습인가를 항상 살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됨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잣대에 맞추어 들어가는 것이 곧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그 잣대 역할을 십계명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의 잣대에 자기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잘못된 잣대에다가 하나님을 맞추어 버리면서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위 '확신'이라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버립니다. 확신이란 자기 생각을 자기가 믿는 것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확신은 말씀이 아닌 것도 말씀이라고 고집 부리게 하고,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이라고 우기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의로워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의의 잣대는 하나님께 있으며 의의 판단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린 다만 하나님의 잣대에 나 자신을 비추면서 잘못됨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자기를 맞추어 가고자 힘쓸 뿐입니다.

 

 

 

 

하나님의 잣대는 십계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십계명을 잘 지키면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구원받을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는 것이 십계명인 것입니다. 십계명을 지켜서 어떤 혜택을 얻어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십계명은 지키면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복을 받은 신자로 하여금 주어진 복을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고자 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는지의 여부가 십계명을 주심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3절에 보면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십계명은 출애굽기에서 이미 모세를 통해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미 세워진 언약입니다. 그들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조들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은 우리 열조와 세운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백성들과 세워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언약은 죽은 자와 세워진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와 세워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현재 하나님의 은혜로서 살아있는 사람과 세워진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옛날 이스라엘과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살아있는 저와 여러분의 문제로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십계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6절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구속하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앞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하며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표가 바로 십계명입니다. 말로만 '하나님이 나의 왕입니다. 나를 다스리시옵소서'라고 하면 진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지의 여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지 십계명을 통해서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십계명이란 하나님이 나를 구속하셨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은 사람만이 지킬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살렸다는 것을 아는 신자만이 1계명의 말씀대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 외에 의지하고 힘으로 삼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2계명은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자는 죽고 다시 살아난 존재입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 새로운 인생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신 분을 위해서 사는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입니다. 그 어떤 것도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아무 형상이라도 만들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어떤 형상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부담이 되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이 말씀은 누가 진심으로 하나님만 사랑하느냐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3계명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한 장소에서 거룩하게 불러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신 여호와의 이름을 자기 욕심을 성취하기 위해서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기도할 때 자기 소원 성취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은혜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4계명은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주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안식일은 노동이 없는 날입니다. 천국은 노동으로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라 은혜로 사는 나라입니다. 그것은 노동을 쉼으로서 맛보라는 것입니다. 노동을 쉰다는 것은 그만큼 수입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돈을 의지하고 돈이 최고인 사람은 노동을 쉴 수가 없습니다. 안식일은 돈으로 사는 날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날입니다. 6일은 돈을 최고로 알고 살아가다가 하루 쉬었다고 해서 안식일이 아닙니다. 돈이 있든 없든 돈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나를 살린다는 것을 알고 돈을 의지하지 않으면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부모는 하나님의 계명을 책임지고 가르치고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음은 부모의 명령이 싫기 때문입니다. 간섭을 받기 싫어하고 자기 자유로 살고 싶어하는 습성 때문에 부모를 거역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도 역시 간섭입니다. 따라서 부모를 공경치 못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말씀에 순종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경을 보는 것입니다.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이웃의 생명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고 있음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살인은 미움과 시기를 그 동기로 하여 출발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웃이 나보다 성공했을 때 시기하게 되고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이 잘된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내가 이웃의 잘됨을 시기한다면 하나님의 하신 일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 됩니다.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부란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관계입니다. 때문에 지금의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8계명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하나님이 나눠준 환경과 운명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나눠진 환경이 있고 운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나눠진 삶에 감사하고 충실해야 합니다.

 

 

 

 

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는 것은 이웃을 해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웃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 해를 입혀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함께 구속함을 받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한 몸된 관계가 서로 해친다면 은혜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됩니다. 10계명은 이웃의 아내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것을 탐낸다는 것은 반대로 내것을 나눠줄 마음이 없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신자에게는 자기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나눠야 할 사람들이지 이웃의 것을 탐내어야 할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십계명을 보면 크게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4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고 5-10계명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는 1-4계명까지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고,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도 5-10계명까지의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하나님의 잣대로서 우리에게 등장하며 십계명이 우리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이루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를 판단하는 하나님의 잣대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고 이웃을 위해서 몸을 버리시고 피흘리신 주님이 지금 우리의 잣대가 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자기의 잣대로 자기를 바라보면서 나는 의롭게 살았다고 까불고 양심대로 살았다고 큰소리치고 나는 착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이 있고 괜찮은 인간이라고 소리치는 모든 사람들을 할말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롬 3:24절에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신자를 의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 자체가 의인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흘리신 공로로 되어진 것이기에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 앞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내 세울 것이 없습니다.

 

 

 

 

은혜를 알고 은혜의 자리로 들어왔으면 은혜로 살아가는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나를 위해서 피흘리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나도 이제부터 주님처럼 살고 싶습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나올 때 그것이 곧 거룩이며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십계명이 우리의 잣대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잘못됨을 낱낱이 드러내고 옳은 인간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장 옳은 인간의 모습이 예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예수 앞에 설 때마다 모든 교만이 사라질 수밖에 없고 내 모습 그대로는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이것을 약자라고 합니다. 약자란 강자에게 굴복해야 합니다. 참된 강자는 하나님입니다. 그 강자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그대로 하나님께 들고 나와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아는 자는 오직 긍휼과 자비만 의지할 것이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기에 사랑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선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자신의 악함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나야말로 가장 믿음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나는 사랑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만이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습니다.

 

 

 

 

 

인간의 실체 (신 5:22-33)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 간다'라는 말이 분명히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제 마음 한구석에는 뭔가 불편함이 사라지지 않고 반발심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때가 많습니다. 인간이 못돼서도 그러겠지만 믿음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턱대고 예수 믿는다 하고 죽으면 자동적으로 천국가게 되는 줄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통념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으로 통하는 문은 너무 좁고 또 우리 스스로는 그 길을 찾을 수도 없고 갈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천국 가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제 마음인 듯합니다.

 

 

 

 

종교는 '신은 존재한다'로 시작합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종교는 없습니다. 신은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이 그 신을 찾아서 나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종교입니다. 신을 찾고 싶고 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 초월의 욕망입니다. 신을 찾아서 만나기만 하면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단번에 이루질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을 초월할 수 있고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 잡혀서 신을 부르고 신을 찾고 신께 나아가고자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종교적 노력과 열심이 신을 만나느냐 만나지 못하느냐의 갈림길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노력과 열심을 자신의 종교에 쏟아 붓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종교란 옆구리에 차고 있는 술병과도 같습니다. 기쁠 때 꺼내서 한잔함으로 기쁨을 자축하고, 슬플 때도 역시 한잔하면서 슬픔을 달래고 자신의 괴로움을 잊어버리는 술의 역할을 종교가 하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이 신을 대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기쁜 일이 있으면 신에게 감사하면서 자신의 기쁨을 자축하지 않습니까? 슬픈 일이 있으면 신을 찾아서 원망하고 하소연을 하면서 슬픔을 달래고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느 인간이고 종교를 선택했을 때 종교가 자신의 절대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절대화되기 위해서 종교를 선택할 뿐입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더욱 굳건히 서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종교인 것입니다. 이들은 종교를 선택할 때부터 이미 내세에 대해서는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내세는 종교 속에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즉 종교를 선택하면 그순간 이미 내세의 모든 문제까지 해결되어 버리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 역시 이런 종교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지 않습니까? 현대인들이 교회를 대하는 모습이 어떠합니까? 옆구리에 찬 술병처럼 여기지 않습니까? 목사의 강단에는 자신의 기쁨을 자축하는 감사의 봉투들이 끊이지 않고 올라오고, 기도 소리 속에는 자신이 절대화되기 위해서 신을 찾고, 슬픔 속에서 신을 원망하는 목소리가 가득 들어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자신이 기독교란 종교를 선택한 순간부터 이미 천국이라는 구원의 문제는 해결되어 버린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마음대로 찾아갈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생명나무로 막혀 있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께로 갈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로마서 11:33절에 보면 하나님께 가는 길은 막혀 있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막혀 있는 길을 인간이 무슨 수로 뚫고 들어갑니까?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신다면 절대로 여러분 마음대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다리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내 정성과 열심을 앞세워서 다리를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만든 다리는 결국 여러분을 멸망으로 빠뜨리게 할뿐입니다.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다리는 모두 성수대교와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레위기 11:45절에 보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시 거룩해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거룩은 거룩과 통합니다. 따라서 거룩 되지 못한 것은 거룩 앞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과연 우리는 거룩합니까? 무엇으로 거룩의 여부를 판단하겠습니까?

 

 

 

 

거룩이란 인간의 상상으로 제멋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의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말씀 드리면서 십계명은 지켜야 할 계명이 아니라 우리를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잣대로서 주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으로서 우리를 판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세상의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의 의를 드러내거나 자랑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잣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인간은 거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십계명으로 증명되었고,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존재임이 발각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스스로 거룩해지기 위해서 온갖 윤리와 도덕을 등장시켜서 의를 제조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존재인데도 불구하고(롬 11:32) 스스로 순종해서 하나님께 나가려고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다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교회의 모습에서 벗어나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인간은 죽어야 할 존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물론 말로는 인간은 죽어야 할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죽어야 할 존재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다시 살았다'고 하면서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로서 행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피로 살았다는 것은 자기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죽어야 할 존재임을 아는 것이 산 자가 된 것입니다. 나는 죽어야 할 죄인에 지나지 않음을 알기에 자신의 그 무엇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생명의 길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이고, 곧 생명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죄는 죽음의 실체를 모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천국에서 끊어진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천국을 탐내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시작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부터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서 인간은 생명과 단절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생명과의 단절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모든 인간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저와 여러분도 물론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이 단절이 다시 이어지고 회복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마음대로 나아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교회는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새롭게 창조되어지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용서를 값싸게, 그리고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하나님의 용서를 일방적으로 선포함으로 인해서 교인들을 이중 인격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려고 하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사탄의 자녀로 살아가는 이중 인격자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6일간 나쁜 일 해도 주일에 교회 와서 용서를 구하면 예수님의 피는 나의 용서 구함을 거절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마차가지입니다. 설교할 때는 섬김을 말해도 설교를 마치면 교인들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죽음이라고 하는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데서 오는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용납하시고 신자로 인정하십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다시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이스라엘이 십계명을 받았을 때의 태도를 다시금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계명을 들었을 때 태도는 '예,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겠습니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면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실체에 대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26절에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라고 합니다. 이들은 육신을 가진 자는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린 여기에서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것이 참된 하나님을 만난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나니 나는 죽어야 할 죄인임을 알았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부인하고 나오는 사람은 참으로 드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은 인간이 지어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죽음의 현장 속에서만 발견되어 질뿐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고 그 운명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말씀만으로도 자신들의 죽음을 실감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음성도 직접 들을 수 없음을 알고 모세에게 대신 하나님 가까이 나아가서 말씀을 듣고 우리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을 만나게 된 이스라엘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태도를 옳게 보십니다. 28절에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너희의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라고 하신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옳게 보시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죽음의 실체를 깨닫고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대신 하나님께 나가서 말씀을 듣고 전해줄 중보자를 구하는 그 마음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꼭 있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마음인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수많은 믿음의 대상 가운데 한 분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나가실 수 있는 분임을 알고 주님만 의지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앞에는 너무나 많은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인간들 스스로 많은 다리를 만들어 놓고 이 다리가 안되면 저쪽 다리로 건너보겠다는 심사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안되면 성경 보는 것으로, 성경 보는 것으로 안되면 헌금으로, 헌금도 안되면 봉사하는 것으로라도 해보겠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은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닫힌 문을 자기가 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도와 봉사와 열심으로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닫힌 문은 주님만이 열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지 않는 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닫혀 있는 문을 우리가 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주제를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십자가 안에서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맛볼 수 있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세상의 성공에 희망을 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노력과 열심에 가능성을 두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에만 모든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화려한 것을 보장하는 거짓된 약속보다는 십자가 안에서의 생명을 보장하는 참된 약속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분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29절에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받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외한다는 것은 어떤 행동이나 의식을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상태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라고 합니다. 이같은 마음이란 육신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음을 알고 대신 하나님께 나아갈 중보자를 앞세우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 마음으로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오늘날로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나는 하나님께 갈 수 없는 죄인임을 알고 그리스도를 구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찾는 신자는 결코 자기 것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그리스도를 제대로 아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들은 하나님은 인간들의 정성과 열심을 받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신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내쪽에서 뭔가 열심히 해보려고 하지만 마음대로 안될 때 근심하게 되고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함이란 인간의 열심과 노력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마음을 기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 때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은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신 일입니다. 우리에게서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내 편에서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까? 이것은 신앙이 아니며 늘 무거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찾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해방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을 인간이 직접 찾아갑니다. 그리고 신을 찾아가기 위해서 온갖 종교적인 의식과 열성을 드러냅니다. 인간과의 사이에 막혀있는 신이 아니고 열려있는 신입니다. 누구든지 정성과 열심만 있으면 신께 나올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세상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전혀 다릅니다. 인간이 만든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같이 인간 스스로 신을 찾아가는 것이지만, 성경에서 계시되어 있는 기독교는 중보자를 내세웁니다. 인간은 그리스도 뒤에서 죽어야 할 내가 저분 때문에 살고 있음에 대해서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휘장이 찢어진 것을 가지고 신약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단지 일회성으로 규정짓는 사단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지금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려있다면 그리스도는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 없는 분이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다만 '당신이 고생하고 죽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하면서 죽음을 생각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고난주일이지 않습니까? 지금의 고난주일은 다만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생각해주는 제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너무 심하다'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 되느냐?' '지금 교회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주님을 따르고 있는데 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느냐?'라고 반박하고 싶으십니까? 심한 것도 아니고 제가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다른 길이 없기에 다른 길로 가지 말라고 외치고 있을 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만 바라보자고 외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만 바라봅시다'라고 말하면 인정하고 가만히 있으면서 '교회를 바라보지 맙시다' '자기 기도를 바라보지 맙시다' '자기가 헌금한 것을 바라보지 맙시다' '십일조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아닙니다'라고 덧붙이면 기분 나빠하고 마음 불편해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척하면서 실상은 자신의 힘과 노력과 열심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당신에게 이르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27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뿐임을 알았습니다. 거기에 뭔가 보태고 뺄 것이 없습니다.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모습입니다.

 

 

 

 

33절에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이 말씀은 지금껏 수차에 걸쳐서 말씀드린 대로 법을 하나하나 실천하라는 뜻의 말씀이 아닙니다. 가령, 사람들은 착하고 선한 사람을 가리켜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법을 철저히 잘 지키기 때문에 법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법을 지키느냐 안지키느냐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 사람의 성품이 이미 법을 충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품을 보고 말하는 것이지 법의 실천 여부를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마음으로 이미 법을 충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을 충족한다는 것은 무엇을 해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종교가 아니라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교회로 부르신 것은 바로 이런 사람되기를 원해서입니다. 헛되고 부질없는 것에 힘쓰지 마시고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행함과 사랑 (신 6:1-9)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는 말을 많이 하면서도 정작 '사람답다' 는 것이 무엇인지 미처 깨닫지도 못한 상태에서 말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지에 대해서 기준도 없이 그냥 입에서 나온 대로 내뱉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면 다 신자냐? 신자다워야 신자지"라고 말한다고 합시다. 이 경우도 역시 '신자답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적인 기준도 깨닫지 못한 채 그냥 자기 생각으로 내뱉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신자다운 것은 어떤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무엇을 보고 신자답다, 또는 신자답지 못하다고 판단하셨습니까?

 

 

 

 

'답다'라는 말은 어떤 기준이 있어야 가능한 말입니다. 가령 누군가를 보고 '여자답다'라고 할 때는 여자다운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가능한 말이 됩니다. 여자다운 것이 어떤 것인지 기준도 없으면서 '여자답다'라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그 사람이 여자답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답다'라고 할 때도 역시 인간다운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먼저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기준에 비추어서 인간답다, 인간답지 못하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세상의 시각과 성경적인 시각이 확연하게 구분이 됩니다. 세상이 보는 인간다운 기준은 인격과 도덕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성경에서의 인간다운 기준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완벽하게 드러내신 분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인간답다, 인간답지 못하다라는 말을 할 때는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린 모두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인간다운 예수님을 기준으로 두고 볼 때 세상에 그 누구도 인간다운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인간다운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다워야 한다'라는 말속에는 인간다운 그 분을 지향하고 그분 같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꾸 '되라'고 말씀하고 계시고,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이렇게 하지 말고 저렇게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인간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 맛을 우리가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답게 살아가는 맛을 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사는 맛'보다는 '세상을 사는 멋'에 치중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을 맛있게 살아볼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세상을 멋있게 살아볼까?'에 마음이 쏠려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인간답지 못한 인간이 더욱 더 인간답지 못한 길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도는 우리에게 인간다운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지켜서 인간다워지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인간다운 모습에서 얼마나 거리가 멀어져 있는가'를 알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인간다워 질 수 없습니다. 인간다운 모습이 제시되고, 기준이 세워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림의 떡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 서면 주눅이 들 수밖에 없고, 잘난체 하고 큰소리 치다가도 예수님만 생각하면 입이 다물어지고 고개가 숙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신자다운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법도를 주신 목적에 합당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신자다운 모습을 하나님의 법도의 실천 여부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법도를 실천하면 할수록 신자다워진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실천' 또는 '행함'이라는 짐에 눌린 채 신앙생활 아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세상사는 맛과 멋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신앙생활 역시 멋있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폼나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의 맛을 아는 것이지 신앙생활을 멋있게 하는 것도 아니고 폼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맛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멋있게 하고 폼나게 해보려고 애쓰기 때문에 자꾸 이것저것으로 자신을 치장하게 되고 자기의 헛점을 가리려고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짐으로 다가오게 되고 그 짐으로 인해서 신앙생활의 맛을 잃어버리고 행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자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신경을 쓰고 살아가는 것은 아직 신앙의 맛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자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관심을 둬버리면 그 순간부터 마음속에 '이것을 해야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부담을 안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 이런 상태에서 과연 신앙의 행복을 맛볼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요한1서 2:27절에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성령을 받은 신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 스스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라,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율법의 가르침이 없다고 할지라도 성령 안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좀 애매하게 들릴 것입니다. '성령이 가르쳐주신다는 것이 뭔가?'하는 의문이 들것입니다. '계시를 받아라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가르쳐주신다는 것을 신비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이 가르쳐주신다는 것은 신자가 진리인 말씀 안에 거하고 살아갈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쓸데없는 것으로 고민하기보다는 날마다 말씀 안에 거하면서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따르고자 하는 애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사랑을 발견할 때 모든 문제는 해결되어집니다. 신앙의 맛도 역시 주님의 사랑을 발견할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율법의 문제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모두 해결되어집니다. 때문에 율법적인 문제로 인해서 아직 혼란을 겪고 있는 신자가 있다면 그분은 아직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적인 여러 문제들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르고자 하는데서 출발한 것이라면 주님의 사랑을 깊숙이 알게 됨으로서 그 문제도 모두 사라질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은 5절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내가 잘 살 수 있을까'에 관심 두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을까'에 모든 관심을 기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맡겨진 실천적인 문제로 보시면 안됩니다. 즉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들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할만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보려고 애쓴다면 결국 제풀에 지치고 말 것입니다. 지금 많은 신자들이 신앙에 낙심하고 지치고 방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려고 애쓰다보니까 해도해도 끝이 없게 되고 결국 낙심하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조건을 보고 함께 하실만하면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씀에 거하지 못하고, 잘못을 범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보지 못하고 자신이 열심히 함으로써 그 결과를 가지고 기쁨을 누리려고 하기 때문에 쉽게 지치고 낙심하게 되고 금방 기뻤다가도 금방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자기를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일들을 누리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왜 자꾸 뭔가를 하려고 애쓰십니까? 우리가 뭔가 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신자이고, 이런 감사로 사는 것이 신앙의 맛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십일조를 잘하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함께 하시고,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함께 하지 않는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여러분이 기도를 못하고 헌금을 못하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신자들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수 있는 조건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는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될 때 '감사'라는 말이 나오고 뭔가 부족하고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감사'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전 5:18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감사는 모든 일에서, 어떤 경우에서라도, 다시 말해서 내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가운데서도 감사는 사라져서는 안될 부분입니다. 신앙생활을 잘못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심을 알 때 감사는 자연히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겠다고 애쓴다고 해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때 저절로 감사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때 사랑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리에는 '그러면 이제부터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내 마음대로 살면 되는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인간의 실체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하라 하지 말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사랑하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배우기에 힘쓰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하지 말란 말이냐?'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서 뭔가 자기 마음의 홀가분함과 자기 편함을 찾으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관심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신앙생활을 해보려고 하는 것도 잘못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내세우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피를 내세워서 마음놓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이런 잘못을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를 기준으로 한 가운데 그런 잘못된 신앙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나는 왜 죄를 지어서는 안되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할 때도 '지옥 가기 때문에'가 아니고 '징계를 받을까봐'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죄를 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고, 구원받은 신자의 상태이고, 인생의 참된 맛을 알고 신앙의 맛을 아는 신자인 것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라면 율법이 시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자연적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기도에 대한 문제도 법적인 차원, 즉 기도를 해야 신자답다라는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면 기도를 많이 했을 때는 그것이 자기에게 힘이 되고 기쁨이 되는데 하지 못했을 때는 낙심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할 때 자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좇아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저절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모든 문제가 이와 같습니다.

 

 

 

 

로마서 13:9,10절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역시 모든 계명은 사랑에 다 들어있다고 합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간음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간음을 하지 못하도록 나를 붙든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아래 있습니다(롬 6:14).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율법을 잘 지킬 것인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있을까에만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6-9절의 말씀인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 지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법적인 위치에서 이해하게 된다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애써야 하고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에 행할 때든지 누웠을 때든지 말씀을 강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갈 인간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본문의 말씀은 법적인 차원에서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체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 되어라는 의미의 말씀으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니까 안하겠다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않는 행동은 할 수 없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입니다.

 

 

 

 

1절에서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 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라고 말씀하는 것도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것은 어떤 규칙이나 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가르치며 앉았을 때든, 누웠을 때든, 일어날 때든, 걸어갈 때든 이 말씀을 강론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은 말씀을 지킬 수 없습니다.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키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모든 것을 대신 이루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신자는 무엇을 하든지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생명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율법의 영향을 받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을 받아 살아가는 것이며 은혜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역사 하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이 순탄하게 쉽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순간 되어졌다고 해서 계속 유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으라' '지켜라'는 권면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믿어야 하고 내가 지켜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사랑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주님께만 순종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날마다 진리 위에 굳게 서있기를 권면하는 말입니다.

 

 

 

 

사단은 항상 신자에게 찾아와서 유혹합니다. 은혜와 사랑을 벗어나서 자기를 바라보게 함으로 자신이 마치 신자가 아닌 것으로 오해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신자가 되어보라고 부추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누구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확인함으로서 진리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고 지키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사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절대적 신앙 (신 6:10-19)


에덴동산은 좋고 나쁜 것의 구분이 없는 절대적인 세계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가 좋았던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절대적인 세계를 상대적인 눈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좋고 나쁜 것의 구분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적인 세계에서 인간을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상대적인 시각을 가지고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된 인간에게는 아무리 좋은 것도 좋은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다가도 더 좋은 것이 보여지면 좋던 것도 금방 싫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의 인간 모습이고, 세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절대적이지만 이 세상은 상대적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좋고 나쁨이란 구분이 없이 오직 좋다는 개념만 존재하는 절대적인 나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각기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좋고 나쁜 것으로 구분을 하는 상대적인 나라인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가지게 된 것은 선악개념입니다. 즉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좋다 나쁘다는 구분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두 욕망에 근거를 둔 자기 중심적인 판단입니다. 흔히 사람을 보고 '간사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선악개념 때문입니다.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우는 것이 인간이지 않습니까? 어떤 분명한 주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 마치 바다 위에 떠밀려 돌아다니는 낙엽처럼 이리저리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는 인생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주관을 가지고 산다고 하지만 결코 아닙니다. 주관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그 어느 것에도 지배를 받지 않고 자기의 생각과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환경입니다. 인간을 울게 하고 웃게 하고, 화나게 하고, 슬퍼하게 하고, 기뻐하게 하는 것 모두가 환경입니다. 다만 자신도 깨닫지 못한 가운데 환경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 자기 나름대로 주관을 가지고 산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자기 욕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좋다, 나쁘다, 불행하다, 행복하다하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불행을 느끼는 것은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하는 상대적 시각 때문입니다. 가령 시골에서는 행복하고 단란하게 잘 살던 사람이 도시로 이사가서는 쉽게 행복이 사라져 버립니다. 시골 학교에서 1등하던 아이가 서울로 가니까 하위를 맴돕니다. 결국 시골에서 1등 하던 것 때문에 기뻐하던 기쁨은 사라지고 맙니다. 아이의 실력은 그대로이고 단지 서울엔 공부를 더 잘한 아이가 많아서 등수가 뒤로 밀린 것뿐인데도 기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또 시골에서는 착하고 알뜰한 자기 아내가 최고인줄 알고 살았는데 서울서 살다보니까 더 멋있고 예쁜 여자들이 많이 보여지고 결국 자기 아내는 세련되지 못하고 촌티가 줄줄 흐르는 시골 아낙네의 모습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아내의 모습은 시골에서나 서울에서나 변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더 예쁘고 더 멋있는 여자를 보게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또 하나의 기준으로 형성되어서 기존에 자기 아내를 바라보던 좋다는 기준을 무너뜨려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대적인 시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어제 좋던 것도 더 좋은 것이 발견되어지면 한순간 좋지 않은 것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상대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결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행복에 불과할 뿐입니다. 또 다른 더 좋은 것에 대한 기준이 형성되면 지금의 행복은 더 이상 행복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이란 상대적인 시각이 아니라 절대적인 시각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을 지으셨을 때에도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면 그것으로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신 것을 우리의 기준을 가지고 또 다시 좋다 나쁘다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또 반대로 하나님이 나쁘다고 하신 것을 우리가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절대적 시각입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시각에서만 은혜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시각에서는 은혜될만한 것만 골라서 은혜라고 합니다. 즉 은혜될만한 것이 있고 은혜 되지 못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이 기준이 되어서 은혜와 은혜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시각으로 은혜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 감사를 느끼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업 잘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취직 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집을 사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감사합니다' '생일을 감사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감사의 대부분이 다 이런 종류의 것들입니다. 그라나 받아서 기쁘고 감사하는 것, 이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신앙인이 아니라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사입니다. 받은 것이 있고, 감사할 만해서 감사하는 것은 믿음이 없고 하나님을 몰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사업잘 되는 은혜라면 사업 안될 때는 은혜가 없는 것입니까? 건강한 것이 은혜라면 병들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받은 것이 은혜라면 받은 것이 없고 오히려 잃은 것만 있을 때는 은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은혜가 없는 신앙은 있을 수 없는 만큼 신앙 역시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절대적 신앙이란 환경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좋은 것이 주어졌을 때에도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나쁘게 여겨지는 것이 주어졌을 때에도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절대적 신앙입니다. 이렇게 자기 기준으로 세워진 좋다 나쁘다를 뛰어 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 때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0.11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만 볼 것 같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이렇게 해줄테니까 나만 섬길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은 돈이 없고 힘들어서인데, 돈만 많이 주고 어려움만 없다면 하나님을 믿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만약 인간이 풍족한 것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만 신앙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아마 굳이 본문과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라고 말씀하는 이유도 인간은 풍족하고 넉넉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씀입니다. 신자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은 생활이 힘들기 때문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도 아니며 자식이 말썽만 부리기 때문도 아니라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 생활을 잘못하는 이유가 모두 환경에 있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환경만 좋으면 신앙생활에는 자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기준으로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를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내가 평안하고 넉넉한 가운데서 나오는 여유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어도 금방 낙심하게 되고 원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적 신앙에서의 사랑이 아니라 상대적 신앙에서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다.'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이것만으로 우리는 평생을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근거가 마련된 셈입니다. 상황과 여건을 봐가면서 복종할만하면 복종하는 것은 상대적입니다. 나에게 손해가 없을 것 같으면 복종하는 것은 복종하는체 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신앙에서 나오는 복종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상황과 여건이 자기에게 불리해지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멀리할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사랑입니다.

 

 

 

 

신자가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고 섬겨야 할 근거는 또 하나 있습니다. 12절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냥 배부를 때 여호와를 잊지 말아라고 해도 되는데 왜 굳이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이라는 설명을 붙이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빠져 나올 때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이야기할 때마다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을 빠져 나온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냐 아니면 어린양의 피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해야합니다.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나온 것이라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되버립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 됩니다.

 

 

 

 

애굽에서의 마지막 재앙은 '장자 죽음'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애굽의 구분이 없습니다. 애굽의 장자만 죽이신 것이 아니라 누구든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와 문지방에 묻어 있지 않으면 다 죽였습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과 애굽의 구분이 없습니다. 즉 모두가 죽어야 했는데, 유독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바른 사람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생명의 근거는 어린양의 피에 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애굽의 것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애굽의 것으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은 애굽의 것이 아닌 어린양의 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단지 '여호와를 잊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세상의 좋은 것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 때문에 사는 자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를 잊어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들이 세상에 빠져 살아가면서도 예배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는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이십니다. 그냥 인도하여 내신 것이 아니라 어린양을 희생시켜서 피를 흘리게 해서 인도해 내셨습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잊지 않은 신자는 예배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이다'는 것을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살리고 있음을 알기에 세상 것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여전히 세상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상대적인 신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것이 넉넉하면 입이 벌어지면서 '하나님 하나님'하다가 뭔가 힘들다 싶으면 금방 표정이 변하면서 원망을 하게 됩니다. 출애굽은 단지 애굽에서 빠져 나온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을 고생시키고 억누르는 바로의 손에서 벗어난 것을 출애굽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의 손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그것으로 고생이 끝난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어디를 가서 살아도 인간으로서 삶에 대한 고통과 고생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애굽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어디에서 살든 상관없이 애굽의 삶을 산다면 그곳이 곧 애굽입니다.

 

 

 

 

애굽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먹고살아야 하고, 자식들 공부 시켜야 하고, 학원도 보내야 하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우리를 끄집어내었다는 것은 이러한 현실과 상관이 없는 삶으로 집어넣었다는 뜻입니다. 현실을 신경 안써도 될 풍족한 곳으로 집어넣었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 즉 상대적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 절대적 기준이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기준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적인 기준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성경과 나 자신의 충돌이 발생합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 어려운 부분도 바로 이것입니다. 상대적인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절대적 기준을 제시해야 하는 것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피, 생명 외에는 어느 것도 인정을 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는 자꾸 다른 것도 인정을 해 달라고 떼를 쓰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어려운 것도 인정을 해주고, 사업이 잘되야 하는 것도 인정을 해주고, 자식이 성공해야 하는 것도 인정을 해주고, 교회가 부흥해야 하는 것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요구를 잘라버립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외에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자가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는 항상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피흘리시고 죽으신 주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피흘리신 몸으로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그 앞에서 주님 피는 보지 않고 나 배부른 소리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피흘리시고 죽으신 십자가 앞에서 내가 돈 번 것이 무슨 자랑거리이고, 교회 부흥된 것이 그토록 좋아할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죽으신 세상에서 너무 나만 바라보고 안일하게 살아온 것은 아닙니까? 주님이 피흘리신 것은 생각지도 않고 우선 나 고생하고 힘든 것만 앞세우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나는 불행하다'라고 생각되거나, 세상을 산다는 것이 힘들고 재미없다고 느껴지거든 지금 내 자신이 상대적 기준에 매여서 경쟁과 비교의식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조용히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주위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지 마시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두고 보십시오. 여러분의 죄 때문에 피흘리시고 죽으신 그분 앞에서 자신의 고민과 한탄을 털어놔 보십시오. 그래도 예수님 앞에서 할말이 있거든 하십시오. 그래도 원망이 나오거든 원망하십시오. 하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에 절대적인 기준을 두지 못하는 자신만큼은 미워하십시오. 그럴 때 회개하게 되고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면서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상대적이 아닙니다. 인간의 선악체계인 좋고 나쁨을 뛰어 넘은 믿음입니다. 좋은 것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 있다 해도 '여호와는 변함없이 여호와이시다'는 믿음이 곧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을 행복 되게 할 것입니다. 나쁜 것 속에도 인간의 얕은 생각으로는 감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생각하는 좋고 나쁘다는 기준으로 알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치 않는 고난과 시련 속에도 나를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상대적 기준, 즉 내 욕망에 의해서 구분되는 좋고 나쁨을 뛰어 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시련과 절망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믿음은 이러한 절대적인 사랑 속에서만 탄생되어지는 것입니다.

 

 

 

 

16절부터 보면 맛사에서의 시험이 나옵니다. 아름답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주어지기 이전에 맛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출 17장에 보면 맛사에서의 사건이 나옵니다. 가나안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 앞에 물이 없는 땅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물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 이름을 맛사라고 한 것입니다.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원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무척 난처하게 하는 것입니다. 원망하지 않을 상황에서 원망한 것을 책망한다면 이해하겠는데, 물이 없어서 목이 말라죽을 지경이 된 상태에서 원망이 나온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상대적 기준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각입니다. 절대적인 기준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것은 결코 원망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라는 절대적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으로 굳게 세워지는 신자되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양육하는데에도 이러한 절대적인 기준으로 양육하십시오. 세상과 똑같이 상대적 기준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한다면 결국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제일인줄 아는 또 하나의 마귀자식을 키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부 드릴 것은 여러분의 상대적 기준을 가지고 좋다 나쁘다를 구분하지 말고 사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모두가 선한 일이지 나쁜 일은 없습니다. 다만 내 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나에게 이익이 안되고 손해가 된다고 해서 악하다고 판단할 뿐입니다. 맛사는 주님만 바라보는 절대적 신앙으로 통과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신앙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출애굽의 하나님 (신 6:20-25)


오늘날 교인들이나 종교단체, 또는 교파들은 종교라고 하는 깊은 수렁 속에 빠진 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는 믿음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는 성경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관심을 둔 채 신을 찾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데, 아예 처음부터 말씀에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있으니 이러한 지적과 책망을 받게 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죄에 대한 지적을 발견하고 말씀 안에서 책망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며 놀라운 복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현대의 교회를 바라볼 때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소중히 여기신가를 모른다는 점입니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은 관심 없이 자기에게 소중한 것만 생각하고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나에게 소중하고 내 교회에 소중한 것이라고 해서 하나님도 소중히 여기신다는 생각은 큰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을 쓰레기로 여겨버리십니다.

 

 

 

 

가령 선교라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지금 교회들은 선교를 소중히 여깁니다. 교회가 해야 할 귀한 일이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게으른 교회고 교회다운 교회가 아닌 것으로 여길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과연 선교를 소중하게 생각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교를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편에서 선교는 마땅히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당연히 선교를 좋아하실 것이라고 단정짓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 여러분의 마음에는 거부감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교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보려는 마음보다는 거부감과 반발부터 앞서는 것은 내 생각과 상식이 앞서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생각과 상식 속에 하나님을 가둬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과 생각 속에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생각과 상식에 가둬두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고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종교업적을 쌓아가고 그것을 지키는 일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아무리 복음을 말해도 그것이 자신의 종교업적을 부정하고 무너뜨리는 사상이라면 철저하게 거부하고 맙니다. 진짜 복음은 자신의 종교업적을 칭찬해주고 옹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탐욕 속에서 제조되어진 것을 스스로 복음이라고 주장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끼리 힘을 모아서 자기 단체를 잘 운영해 가는 종교조직을 찾으시는 것도 아니고, 전통과 역사가 있는 단체를 찾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관심을 두시고 찾으시는 것은 '흠없는 어린양의 흔적'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신 것도 '어린양의 흔적'이 있는 국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아는 신자라면 항상 '흠없는 어린양'의 중요성과 가치를 깨닫고 자신에게서도 어린양의 흔적을 찾아가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특이한 국가입니다. 떡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국가가 아니라 이제는 말씀으로 유지되는 국가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양의 피로서 살아난 사람들만이 나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또 홍해가 갈라지고 그 속을 건너서 살아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은 물과 양식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드러낸 것입니다.

 

 

 

 

만약 애굽을 빠져 나온 이스라엘이 애굽에서와 똑같이 물과 양식으로 생존되는 삶을 살아간다면 과연 애굽과 구별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유독 이스라엘만이 홍해에서 빠져 죽지 않고 살아나야 할 근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만 살리셨겠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살리실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린양의 피의 흔적이 주어진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의 약속 때문에 그들을 살리신 것이지 이스라엘이란 민족성 때문에, 또는 그들이 예뻐서 살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것을 깊이 깨닫는다면 그들은 어떤 삶을 보여야 합니까? 그것은 가장 먼저 '생존'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생존을 위해서 물과 양식이 필요했지만 이제 하나님 앞에서는 양식과 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피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시는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하나님이 신자를 향해서 또는 교회를 향해서 무엇을 기대하실지에 대해서 자기들 멋대로 상상합니다. 착한 일을 하고, 선교를 하고, 교회를 성장시키고, 다른 종교보다도 교세가 커지는 것을 기대하시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개념들을 정립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인간의 종교성과 상식을 통해서 만들어진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우상이며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거짓된 신입니다. 자기를 위한 자기의 하나님을 찾는 것, 이것이 우상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찾으시고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이 무엇이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20절에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 하거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증거, 말씀, 규례, 법도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서로 각각 구별되고 독립된 4종류의 명령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즉 증거가 있고, 또 다른 말씀이 있고, 또 다른 규례가 있고, 또 다른 법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여호와께서 명하신 것을 4가지의 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가르칠 때 아들의 입장에서는 '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규례대로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인간은 자기 좋을 대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곧 자기 기쁨과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불만이 있을 수도 있고, 반발이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질문을 할 때 이렇게 대답하라는 해답을 하나님이 직접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답이 21-2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이 규례와 법도를 지켜야 할 이유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 그것만으로도 이스라엘은 대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서 가르치는 말씀을 지킴으로서 주어지는 복이나 대가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말씀을 지켜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나오라'는 말 한마디로 되어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22절에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 온 집에 베푸시고"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기 위해서 애굽과 바로에게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잘 아는 10가지 재앙입니다.

 

 

 

 

10가지 재앙은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지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은 모두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등장하심으로 인간의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될 때, 이스라엘은 애굽의 농산물로 연장하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며 또 다른 생명이 있음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드러낸 것이 10번째 재앙인 장자의 재앙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통해서 죽음 속에서 살아난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죽음 속에서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인해서 보호받은 집단'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 집단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0재앙은 단지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한 애굽에 대한 공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별하는 것이 10재앙입니다. 즉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개입된 집단, 즉 이스라엘은 산 자이고 하나님의 아들로 취급받습니다. 그러나 희생의 피가 개입되지 않은 집단, 즉 애굽은 죽은 자로 취급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된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산 자된 이스라엘이 예전의 이스라엘과의 모든 연결 고리를 끊어버린 삶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의 이스라엘은 애굽과 똑같이 농산물로 생명을 연장하는 집단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죽은 자라는 것에는 동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속에서 희생의 피로서 보호받고 살아난 산 자된 자들이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보인다면 죽은 자와 산 자의 구별점이 모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데, 유월절은 어린양의 희생이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반복되어짐으로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취급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것도 희생의 피안에서 함께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동행도 어린양의 희생의 피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지 결코 인간 자체와의 동행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 비밀을 알지 못한 자는 결국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말하고 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도 역시 하나님은 희생의 피가 반복되지 않는 것은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것도 인간이 기도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계속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의 피를 반복할 때 그 피속에서 함께 하시고 동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교회는 어린양의 피의 흔적은 관심도 없이 다만 십자가만 내걸고 하나님을 불러대고 예배를 드리고 여러 가지 종교사업을 부지런히 하고 있으면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동행해주시는 교회가 되는 줄로 알고 있으니 이것이 곧 '여호와를 모르는 바로'와 같은 것이고 멸망당할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것은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바로 아는데 있습니다. 여호와는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주어진 참된 생명을 모르고 오직 자기의 힘으로 생명을 유지해보고자 하는 세력들과 싸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죄없으신 분의 희생을 통해서 죄있는 자들을 구출해내는 자비의 정신을 보이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이 자비의 정신을 모른다면 여호와의 원수된 자요, 여호와를 모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과 명령과 규례를 주신 것은 바로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아라'는 의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말씀은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아라는 것입니다. 죄인된 자를 구출하기 위해서 죄없으신 분이 희생하신 그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을 아느냐는 것이 곧 말씀이고 규례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말씀과 규례와 법도에 대해서 물을 때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면 정말 교회다운 교회들이 많이 보입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고 구제하고 소말리아 난민을 위해서 식량을 보내고, 식량을 보내기 위해서 한끼 굶는 운동을 벌이고, 굶주리는 북한을 위해서 쌀 보내기 운동에 앞장서고, 하나님을 찾고 예수를 찾으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착각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하면 교회가 되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차원 높은 도덕과 윤리로 치장을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교회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교회는 오직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개입되어야 교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희생의 피의 흔적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다운 교회는 모든 관심이 희생의 피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피의 흔적보다는 자신의 종교사업을 확장하고 번성시키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결과로 그치고 말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홍해사건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홍해 사건은 어린양의 피가 개입된 이스라엘은 산 자요, 피가 개입되지 않은 애굽은 죽은 자라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애굽 군사는 홍해에서 죽고 이스라엘은 살아난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살아날 만한 어떤 귀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까?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께 귀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살아난 것은 이스라엘에게 개입되어 있는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자 속에서 산 자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인간의 힘과 노력에 전혀 의존하고 있지 않음을 배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스스로의 노력과 희생과 은혜와 자비로서 모든 일을 성취해 나가십니다. 이스라엘은 단지 그러한 하나님을 보여주는 그릇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뭔가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희생과 은혜를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희생과 은혜에 모든 것을 맡기고 안심하고 살 것을 요구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는 결국 오늘날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목표를 이루어 보려고 하는 종교성과 대치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4절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희생과 사랑과 자비를 마음에 담고 살아가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희생과 자비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이것이 복을 누리는 것이며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희생과 자비를 마음에 품고 산다는 것은 어린양의 희생의 흔적을 지니고 산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하나님은 선교를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은 선교하고 구제하고 예배하는 인간의 행위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오직 피의 흔적입니다. 선교를 하든 구제를 하든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피의 흔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교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피의 흔적을 보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지금까지의 말씀을 실제 현재 신자들의 삶에 적용시키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통해서 희생의 피가 개입된 집단이 되었을 때 그들에게서 보여져야 할 삶의 모습은 첫째는, 애굽에서와 같이 농산물로 목숨을 유지하는 차원이 아니라 말씀으로 유지되는 생명이 나타나야 한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를 위하고 자기에게만 관심 두고 살아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인간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의 삶도 그와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상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모든 이유가 하나님의 기적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힘으로 애굽을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이적과 기사를 베풀었습니다. 오늘도 역시 우리 힘으로 세상에서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그 기사와 이적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바라보게 된 신자들은 이제부터는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할 줄 알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노래하면서 자기의 무가치함과 죄임 됨을 고백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이고, 옛날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끊이지 않음으로 출애굽이 계속되어져야 했던 것처럼 오늘 신자들도 계속되어지는 출애굽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5절에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의로움은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신자의 의로움은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은혜와 자비를 안다는 뜻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는 자로 선택되었습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는 것인가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인간은 먹고사는 것이 관심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십시오. 인간의 본성은 먹고사는 것, 내 몸에 관심을 두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항상 하나님이 나를 간섭하시고 다스리셔서 내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자식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세상에서 성공한 자식이 아니라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아는 자식이 되게 해달라고, 만약 그렇지 못할 때 하나님이 때려서라도 신자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고 피의 흔적을 지닌 채 날마다 출애굽하며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성 민 (신 7:1-11)


성경은 항상 세상을 둘로 나누어서 보고 있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세상의 멸망과 함께 사라져야 할 사람이고, 한 종류의 사람은 세상의 멸망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에서 영원히 존재할 사람입니다. 세상을 이렇게 둘로 나누어 놓고 사람들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백이면 백 모두가 후자의 사람되기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당신은 과연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에서 영원히 존재할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을 쳐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세상을 둘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고, 신자들 역시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에서는 이 구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볼 때는 세상이 둘로 나누어지는데, 정작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는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모르는 자들을 저주하고 아예 사람으로 인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세상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무리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라고 저주를 퍼붓고 벌레 취급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얼굴에 어떤 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저주받은 사람같이 세상을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만도 아니고 열심히 일하고 웃으면서 잘 살아가는 것을 보고 성경이 그들을 구분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잊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사회 생활을 하면서 이웃을 만나면서 과연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멸망 받을 사람으로 보여지고 있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경우에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 뒤에 드리워져 있는 멸망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단지 그 몸에 치렁치렁 걸치고 있는 세상의 것만 눈에 보이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이마에라도 멸망 받을 자의 표가 찍혀져 있으면 그것을 볼 때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을 몰라서 멸망 받을 자다'는 생각을 가지겠지만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이상 그 점에 대해서는 순간순간 잊어버리고 살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 믿으나 안믿으나 다른 것이 하나 없고 마찬가지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덮어버리고 세상을 볼 때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사람을 보면서 '나와 별다를 바 없이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과 나를 비교할 때 나는 교회 다니고 저 사람은 절에 다니는 것 빼놓고는 전혀 다른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내가 과연 하나님의 백성, 즉 성민답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심사숙고 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는 분명히 차이점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점은 외모나 환경적인 조건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의 차이점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고방식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내가 과연 성민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려면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고, 내 하는 일들이 잘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정신으로 사느냐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성민의 모습은 누가 모방을 할 수 없습니다. 어느 회사에서 좋은 제품을 만들어서 인기가 있으면 금방 그것과 비슷한 것을 모방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법으로 똑같은 것을 만들지 못하도록 막고 있기에 망정이지 만약 법이 없었다면 똑같은 것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모방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좋은 부모, 좋은 스승, 좋은 회사까지도 모방해 냅니다.

 

 

 

 

'이러이러한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라고 하니까 좋은 부모 소리 듣기 위해서 시키는 대로 하려고 합니다. 금요일이 스승의 날이었지만, 이런 스승이 좋은 스승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좋은 스승이란 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대로 실천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방입니다. 원래 자기 모습을 스스로 자제하거나 감추고 다른 모습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모방입니다. 이 모방에는 종교적인 것도 한몫 끼고 있습니다. 즉 좋은 교회, 좋은 목사 등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특히 목사들이 좋은 목사 되기 위해서 모방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본래의 자기 것을 감추고 좋은 목사라고 생각되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에 모든 힘을 쏟고 있습니다. 좋은 목사로 일컬음 받는 것이 자신의 자리를 굳게 세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 목사가 좋은 교회 만들기 위해서 온갖 좋다는 것을 다 끌어들여서 좋은 교회 만들기 위해서 기를 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역시 좋은 교회 되어야 좋은 소문이 날 것이고 좋은 소문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란 모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역시 모방할 수 없습니다. 모방할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하고 어렵다기 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모방하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는 것이 신자의 모습이고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모방을 하는 것도 자기에게 유익이 있을 때 합니다. 모방을 함으로서 오히려 손해가 온다면 아무도 모방을 하지 않습니다. 신자 됨이 바로 그렇습니다. 교회 됨이 바로 그렇습니다. 아무도 모방을 할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 신자의 모습이고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에게서 찾아봐야 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좋은 성격을 찾는 것도 아니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복 받은 삶을 찾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신자됨의 증거를 찾으라고 한다면 결국 인격 좋고 돈많은 사람이 신자라고 일컬음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인격이 좋고 돈이 많은 사람과 어떻게 신자됨을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의 혼동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성민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그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 있는가를 점검하면서 결코 신자된 우리 자신을 세상 사람과 똑같이 보면서 살아가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 편치 못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 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라고 말씀을 보면 '아무리 하나님을 안믿는 이방인이지만 좀 너무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민족을 진멸하고, 진멸하면서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아라고 말씀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방인에게 이토록 잔인할 정도로 엄하시고 전혀 그들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우린 이 본문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엄청난 차별 대우를 볼 수 있습니다. 한쪽이 한쪽에 의해서 진멸을 당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잘되게 하고 이방인은 아예 남겨 놓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얘기들이 허황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의심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는 허황된 이런 얘기들은 빼버리고 허황되지 않은 말을 해버립니다. 사람들에게 납득이 될 수 있고, 이해가 되고, 좋아할 만한 말만 골라서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입니다.

 

 

 

 

앞서 말하기를 성경은 세상을 둘로 본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세상을 둘로 나눕니다. 진멸 당할 자와 진멸시키는 자입니다. 진멸 당할 자는 악한 족속이고, 진멸시키는 자는 의로운 족속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서로 그 어떤 연결점이나 타협점이 없습니다. 완전한 단절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라고 하고 그들과 혼인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혼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아름다운 꽃밭을 가꾸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꽃밭에 벌레가 들어와서 아름답게 가꾼 꽃을 상하게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그 벌레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꽃밭을 지키기 위해서 벌레를 잡아서 없애버릴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마음이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명령도 우리를 위한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기 위한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를 복주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잘 지키면 복주고 못 지키면 벌주기 위한 명령이 아닙니다. 지금껏 교회 상식은 잘하고 못하고에 상벌이 달라지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잘해보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복이란 은혜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상벌 차원이 아닙니다. 5절의 명령도 그와 같습니다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명령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상을 싫어하시고 우상은 철저하게 짓밟으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우상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철저하게 무너뜨리십니까? 우상은 인간의 자기 사랑의 증거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신을 찾습니다. 자기를 지켜주고 보호해줄 능력자를 찾습니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곧 우상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신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신입니다.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며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신입니다. 다만 인간이 생각한대로 움직여 줘야 하고, 인간이 하자는 대로 따라와 주기를 바라는 신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이러한 우상을 깨뜨리고 찍고 불사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상이 아님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멸하고, 우상을 무너뜨리라는 것은 단지 가나안 민족을 벌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며 약속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분명히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서는 결코 이방인과 같은 삶의 모습이 있어서는 안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멸망을 보고 어떤 것이 멸망의 모습인가를 마음에 새기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진멸하면서 재미있어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즉 이방인을 진멸하면서 '내가 저들과 같이 산다면 나도 저들과 똑같은 결과를 당하게 될 것이다'는 것을 가슴깊이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깨뜨리고 찍고 불사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채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세상을 진멸 당하고 불사름을 당할 멸망의 장소로 보지 않고 오히려 축복의 장소로 여기면서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민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6,7절에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을 성민으로 택하심이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가장 수효가 적은 민족, 가장 힘이 약한 민족을 택하셔서 성민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과 하나님의 다른 점입니다. 우상은 적은 수효가 아니라 많은 수효를 기뻐합니다. 힘이 주어지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반대입니다. 수효가 적은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고 힘이 약한 것을 기뻐하는 분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하나님은 수가 많은 것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교회 부흥을 외치고 숫자를 늘이기 위해서 힘쓰는 것은 결국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임을 단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성민으로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자체에 선택할 만한 조건이 없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가장 적은 민족이었습니다. 힘이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성민으로 선택하셨습니다. 8절에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조상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성민으로 택하시고 바로의 손에서 끄집어 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스라엘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성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9절에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라고 합니다. 성민된 이스라엘이 해야 하는 일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대까지 하나님께서 인애를 베푸시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민은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셨음을 알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뭔가 남들처럼 많은 것을 남기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부끄러워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교회에서 남들처럼 하지 못한 것 때문에 자존심 상해하고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랑 받을 만한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셔서 성민으로 택하셨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멸망의 모습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은 자기를 보고 자신이 한 것만큼 당당한 태도로 신을 찾고, 신이 자기를 사랑할 조건을 미리 갖추고 나오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밖에 있는 것이고, 그 때문에 진멸을 당해야 한 것입니다.

 

 

 

 

신자는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일을 하셨는가?'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만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성민의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은 자신만 크게 보이고 하나님은 크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민은 하나님이 언약을 이행하심으로 성민 되었음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신실하시다고 하는 것은 한번 하신 언약은 파기하지 않으시고 지키고야 마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이루고야 마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를 성민 되게 하셨다는 것을 아는 자가 곧 성민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언약을 이루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민된 자는 오직 그리스도만 보이게 되고 그리스도만 자랑할 뿐입니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이루어진 과거의 사건을 주목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이런 성민의 모습을 누가 모방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사는 사람이 과연 세상의 크고 작은 것에 매여서 살아가겠습니까? 가장 적은 수의 민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이방인과 똑같이 크고 많은 것을 좋아하면서 그것을 위해서 신을 찾고자 하겠습니까? 때문에 성민은 자기를 보지 않고 사는 자이며, 은혜로만 즐거워하는 자이며, 비록 작은데서라도 전혀 힘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성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애는 이런 성민에게서는 끊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들에게 과연 이런 성민의 모습이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로만 신자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민이라고 떠들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민다운 모습이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결혼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눈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귀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방 사람이 더 좋아 보일 때 그들은 이방인과 혼인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도 단지 결혼을 하지 않으면 무조건 성민 된다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조건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 귀하게 보이는 사람이 성민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민은 세상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한쪽은 멸망당할 자이고 한쪽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입니다. 따라서 성민은 세상을 똑같이 보지 않습니다. 둘로 구분하여 봅니다. 아무리 힘이 있고 크고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아무리 적은 것을 소유하고 약하고 힘이 없는 자라고 할지라도 성민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성민답게 큰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은 것에 실망하지 않으며,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만 바라보고, 언약이 이루어진 십자가를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영생의 나라는 성민된 자가 들어가는 나라임을 잊지 마십시오.

 

 

 

 

 

올 무 (신 7:12-26)


부모들이 가정에서 자식 때문에 겪는 갈등과 고민 중의 하나가 공부 문제입니다. 부모 치고 자식이 공부를 못하는데 마음 태연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공부하기 싫어하는 자식이 공부하라는 부모님 말 한마디에 순순히 공부할 자식도 없습니다. 인상을 쓰고 언성을 높이고 매를 들어야 겨우 책상머리에 앉아서 공부하는 척 할뿐입니다. 그러나 그 머리 속에는 온통 다른 생각이 떠돌면서 공부하고는 멀어져 있는 것이 지금 자식들의 현실이고, 또 부모들도 예전에 다 체험했던 일들이다. 하기 싫어하는 공부를 억지로 시킨다고 해서 되어질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또 공부 안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기도 참으로 난감하고 앞일도 걱정되는 것이 부모 마음입니다. 야단이라도 치면 '누가 공부 안하고 싶어서 안하는줄 알아요! 해도 안되고 하고 싶은 마음이 안 일어나는 것을 어쩌란 말입니까? 나도 답답해 미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반발합니다. 이런 자식과의 싸움에서 '저 웬수'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부는 해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이, 신자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공부해라해도 공부에는 전혀 마음 두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척하면서 유행가에 팝송에 정신 팔려 있는 아이들처럼, 냉정히 따져보면 우리들의 신앙이라는 것도 결국 공부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대하고 있는 자식들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의 눈에 자식이 그렇게 보이듯 하나님의 눈에 우리들이 바로 그렇게 보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사실 공부하기 싫은데도 불구하고 야단 맞고 매맞을까봐서 억지로 책상에 앉아 책 펴놓고 A. B. C는 부지런히 읽고 있는데 귀에는 카세트 이어폰을 꽂아 놓고 유행가 가락에 발장난 치고 있는 자식과 같은 그런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공부란 억지로 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어른들의 교육방법은 공부를 못하게 하는 요소를 찾아서 없애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유행가를 듣지 못하도록 카세트를 빼앗아 버린다든지, 전자 오락실을 가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감시한다든지, 연예인들에게서 유행하는 옷이나 머리 모양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든지 뭐가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요소는 모조리 아이들로부터 떼어놓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제재를 가한다고 해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은 생각입니다. 카세트를 빼앗아 버린다고 해서 유행가가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락실을 가지 못하게 한다고 해서 오락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오락실을 가서 공부를 못하나, 오락실엔 가지 못했지만 그것 생각한다고 공부 못하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말한다면 교회가 지금껏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금지하고 막아왔지만 결국 그것이 신앙생활을 잘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술 담배가 신앙생활의 방해꾼인양 술 먹지 말라 담배 피지 말라고 외쳐왔지만 술안먹고 담배 안 피운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욕심을 억제하고 죄를 없애려고 해봐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없애지도 못하고 막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내려지는 결론은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신자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하면서 아무리 신자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려고 해도 인간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식이 부모의 말대로 그대로 움직이고 순종한다면 성공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유행가 듣지 말라하면 듣지 않고, 오락실 가지 말라하면 안가고, 공부해라 하면 다른데 신경 안쓰고 공부만 한다면 분명히 성공은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12-16절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13-16절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조건은 12절의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네게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법도대로 실천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약속한 땅에서 세상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복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말씀대로 살지 못한 이유가 복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까? 다시 말해서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장차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공부를 안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실력이 좋으면 나중에 자기 인생에 크게 득이 되고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압니다. 또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도 다 있습니다. 하지만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것은 공부가 하기 싫고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하기 싫고 왜 안되는 것입니까?

 

 

 

 

성공하는 것은 나중 일입니다. 우선 눈에 보이고 하고 싶은 것은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서 노는 것입니다. 지금 부모들은 이런 시절을 지내지 않았습니까? 공부하면 성공한다는 것을 몰라서 공부를 안했습니까? 다 알면서도 게을리 하다가 어른이 되어서 실력이 필요한 세계를 접했을 때 비로소 후회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볼 때 신앙이란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다고 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듯이 교회 나오고 성경 펴놓고 있다고 해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나오고 성경책을 펴놓고 찬송을 불러도 여러분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고개를 흔들고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해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고 오히려 여러분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생각은 여러분을 붙들고 괴롭힐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런 한계를 '하루에 성경을 몇 장 읽어라' '하루에 몇 분 기도해라' '성경을 손으로 직접 써라'는 등의 행위적 규례들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까? 불가능합니다.

 

 

 

 

지금의 신자들이 성경을 보기 싫어서 보지 않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기 싫어서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아는 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엇이 복이 되는 길인가를 알고 있지만 자기 뜻대로 그 길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겨우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기사 잔소리 듣기 싫다고 뛰쳐 나가버린 사람도 많은데 앉아있는 것만도 대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앉았으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정상적인 신자가 되어가고자 이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과 25절에 보면 '올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올무라는 것은 사냥꾼이 짐승을 잡기 위해서 놓은 덫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의 우상을 섬기거나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면 그것이 올무가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올무로 인해서 복을 받지 못하게 됨을 말씀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올무에 들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 올무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들고 그들을 괴롭힙니다. 말씀을 지켜야 할 줄을 알면서도 그것이 복이 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올무에서 놓여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올무란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 성민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이스라엘이 성민된 것은 7,8절의 말씀대로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은 연고로, 여호와께서 다만 사랑하심을 인하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성민 되게 하였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성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철저하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성민 되게 하신 방식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수효를 보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수효를 보지 말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만 여호와께서 사랑하셔서 성민 되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에만 감사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이 지키심으로 성민 되었으니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고 이렇게 살아갈 때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마귀의 올무에 붙들려 있는 인간은 성민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17절에 보면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 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들의 수효를 보고 두려워 할 것에 대해서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이 있을 때 "그들을 두려워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목도한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그와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행하실 것이요 "(18,19절) 라고 말씀하시면서 수효를 보지 말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올무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결국 수효를 두려워했었습니다. 그들의 힘을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에 대한 믿음보다는 내 앞에서 나를 가로막는 자들의 힘을 더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마귀의 올무입니다. 마귀는 신자들이 약속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약속이란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만 힘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귀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전혀 효력이 없고 실현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탐을 보냈을 때 가나안 민족이 장대 같다는 말만 듣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의심을 가진 것이 아닙니까? 이 올무로 인해서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수효를 보고 두려워하고, 보이는 것 때문에 보이지 않는 약속에 대해서 희미하고 의심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자신의 힘을 더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올무라면 이 올무는 한마디로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복음을 전할 때 마귀는 노회 총회라는 세력을 앞세워서 목사를 두려워하게 할 수 있습니다. 노회 총회의 말대로 순종하지 않았다가는 목사라는 직에서 짤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일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약화시키게 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올무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권력과 수효가 두려워서 복음을 복음대로 말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마귀의 계책이 승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직장에서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가면서 믿음의 모습을 나타내고자 할 때 여러 사람들로부터 핀잔과 반대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위의 눈총이 두렵거나 회사에서 쫓겨날 것이 두려워서 믿음의 모습을 감추고자 할 때 마귀가 승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수효를 보고 두려워 할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앞에 두려움의 대상이 있을 때, 굴복해 버리면서 '내가 힘을 길러서 저 두려움을 이기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힘을 길러서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힘으로 두려움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그 누구도 나 위에 군림하는 자가 없는 힘을 길러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결국 아무리 힘을 길렀다고 해도 또 다른 힘있는 자 앞에서는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힘을 주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을 물리치고 그들을 봐도 두려워하지 않을 많은 수효와 힘을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유는 말씀드린 대로 힘을 준다해도 또 다른 힘센 민족 앞에서는 다시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방법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힘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힘이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전혀 쓰지 않으신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그 강한 손과 편 팔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고, 오늘날 우리들을 세상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올무를 벗어버리는 길입니다.

 

 

 

 

올무란 그것을 벗기 위해서 힘을 쓰면 쓸수록 더욱 자신을 조여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스스로 올무를 벗기 위해서 힘을 쓴다는 것은 결국 더욱 더 올무에 조여지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은, 우리가 힘쓸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힘과 능력은 하나님께 있으니 너희는 다만 하나님을 기억하고 안심하라는 것이 말씀이고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공부는 나는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임을 깨닫고 스스로 뭔가 해보려는 포부를 버리고 가만히 하나님만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참으로 힘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현실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자꾸 우리에게 뭔가 해볼 것을 부추깁니다. 해보면 좋은 결과가 주어질 것으로 유혹합니다. 말씀대로 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될 것같은 의심이 들게 합니다. 손해가 될 것같은 생각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손짓에 끌려가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닌 것이 우리들의 삶의 실체이지 않습니까? 이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살아오시면서 수없이 많은 두려운 일들을 겪고 또 그것을 이기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지나온 자리에서 과거의 두려움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왜 그때 그토록 두려워했고 근심 걱정에 빠졌던가?'라고 하면서 뭔가 후회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우린 항상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초조해하고 두려워합니다. 두려워했던 것이 별 것 아니었다는 것을 지나고 나서 깨닫지 마시고 두려움이 있는 현장에서 깨닫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공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 두려움이 될만한 일들로 우리를 가로막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순간이 곧 올무에 매이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질 때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아이가 빵점을 받아왔을 때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남편이 애를 먹일 때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비하면 시시한 것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 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순간순간 그런 깨달음이 있음으로서 세상을 두려워하고 부러워하고 일이 잘 안된다고 짜증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리에 잊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할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모든 법도와 규례를 완전하게 지키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말씀에 약속되어 있는 모든 복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으면 잘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약속된 복은 눈에 보인 약속의 땅에서 실현될 것들입니다. 즉 약속이 눈에 보인 땅인 만큼 눈에 보인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약속의 땅은 보이지 않는 땅입니다. 따라서 복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이는 땅, 보이는 복은 보이지 않는 복을 약속하는 그림자였습니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복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무에 매이지 않는 것이고, 우리를 세상에서 구출하신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여러분에게 참된 복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자신에게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분임을 알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누가 뭐래도 복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임을 알 때 세상의 좋고 나쁜 것을 초월하게 됩니다. 좋은 것이 없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내 비록 나쁜 것이라고 해도 거절하지 않겠다는 용기로 살아가게 됩니다. 좋은 것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하나님만이 내 여호와라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건강하게 해주셔서 믿는 것이 아니라 병들게 하셔도 믿습니다. 사업 잘되게 해주셔서 믿는 것이 아니라 망하게 하셔도 믿습니다.

 

 

 

 

나쁜 것이라고 생각되는 속에도 인간의 낮고 얕은 생각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한 뜻'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내가 생각하는 좋고 나쁘다는 개념으로 판단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치 않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나를 붙드시고 이끌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자가 올무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올무란 내 쪽에서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못된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복으로 안 순간 세상의 좋고 나쁨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신자의 삶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올무에 매여서 두려움에 빠져 살지 마시고 참된 복안에서 살아가는 신자이기 바랍니다.

 

 

 

 

 

광 야 (신 8:1-10)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떡이 사람을 살리는가, 말씀이 사람을 살리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들을 기다린 것은 젖과 꿀이 있는 약속의 땅이 아니라 광야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는 땅입니다. 오히려 비록 종으로 살았지만 애굽에서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풍부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애굽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광야라는 장소가 왜 필요했습니까?

 

 

 

 

2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광야는 시험의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낮은 자리로 고통의 자리로 이끌어 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높은 자리에서, 좋은 것이 풍부하고, 평안이 지속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거부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욥 1:9절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이 욥의 집과 소유를 감싸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반발한 것입니다. 사단은 욥이 아무리 의롭고 진실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의로움은 까닭 없는 의로움이 아니요, 이유 없이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욥을 복되게 해주셨고 보호하셔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긴 것이지,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고 주어지는 것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사단의 욥에 대한 평가입니다.

 

 

 

 

이 말을 보면 사단은 인간을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득이 되면 만면에 미소를 띄면서 접근하고, 그렇지 못하면 태도가 돌변되는 인간 내면의 속성을 사단은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이 욥의 친구들과 그 부인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친구들은 복을 받는데에도 까닭이 있듯이 징벌을 받는데도 필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의식 수준입니다. 그들은 소위 '의로운 사람의 고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서 애굽에서 구출 받은 사람들이 바로 자기들인데도 불구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도하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고생을 하고 고통을 받게 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고난이 왜 주어졌는지 하나님의 의도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속에 사단이 끼여들게 되고 시험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까닭과 이유를 없애 보는 시험입니다. 사단은 하나님께 욥의 소유를 쳐보라고 합니다. 소유한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섬기고 받은 축복을 빼앗겨도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지 않는지 흔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좋은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흔드시는 것입니다. 은혜가운데서 허락하신 좋은 것들을 빼앗아 가시기도 하시고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는 고통의 자리로 집어넣기도 하십니다. 의로운 자가 고난을 당하거나 신실한 믿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이런 경우입니다. 이 시험 속에서 믿음의 여부가 밝혀질 것입니다.

 

 

 

 

신자는 광야를 피해서 천국으로 갈 수 없습니다. 광야를 거치지 않고 건너뛸 수 있는 천국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교회를 옴으로서 광야를 피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전에 반드시 광야를 거치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의 시험을 거치셨습니다.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간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될 것들을 제공하는 사단의 시험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떡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경배의 대상은 세상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시듯,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시듯, 우리 역시 광야로 인도함 받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우리들이 과연 무엇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증명될 것이고 바로 그것을 찾아서 버려야 하는 것이 바로 광야입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은 애굽의 삶의 방식이고, 말씀으로 사는 것은 천국의 삶의 방식입니다. 애굽은 떡이 생명으로 되어 있는 나라이지만, 천국은 말씀이 생명으로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서로가 전혀 다른 나라이기 때문에 광야를 통해서 애굽의 삶의 방식을 버리도록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신자가 천국을 소망하고 산다는 것은 단순한 인간으로 살아가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떡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떡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은 단순한 인간으로 살기를 거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에게 생명 되는 것이 떡 아닌 다른 뭔가가 있기 때문에 떡에 눈 돌리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떡이 없어도 염려하지 않고 흔들림이 없이 살아야 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매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 인간 수준에 머물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인간 수준에 머물러 버리면 짐승과 똑같이 자기 욕심에 붙들려서 본성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았습니다. 자기들이 손수 손으로 만들어 먹거나 일을 해서 수확한 것을 먹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먹던 것을 요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생전 보지도 못한 만나를 내려주신 것도 애굽의 음식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살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의복도 해어지지 않았고 발도 부릍지 않았던 것도 '너희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광야에서 살고 있습니다. 애굽의 삶의 방식이 버려지기를 요구받는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는 광야가 싫고 없었으면 좋겠다는 불평보다는 광야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신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광야란 애굽의 것을 포기해야 하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대로 애굽의 것을 더욱 든든히 하기 위해서 뭔가 하려고 합니다. 착한 일을 하고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려고 하는 모든 것이 애굽의 것을 포기한 가운데 나오는 자연스러운 믿음의 행동이 아니라 애굽의 것을 자기 소유로 굳건히 세우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포기가 아니라 더욱 깊은 집착과 미련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보시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여 시험하십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그들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서는 누구든 하나님을 부를 수 있고 하나님이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높은 자리를 쳐서 낮은 자리로 끌어내리십니다. 그리고 '그래도 내 명령과 규례를 지키며 살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높은 자리에 있기도 하지만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되는 경우도 수없이 많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기억하는 신자라면 낮은 자리에서 '그래도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갈래?'라고 하는 여호와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거쳤던 광야에 내가 지금 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된 나라로 인도하시는 과정임을 깨닫고 낮은 자리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말씀만이 자신의 생명 됨을 고백할 때 그것이 곧 떡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광야란 우리를 높이는 곳이 아니라 낮추는 곳입니다. 때문에 광야를 살면서 높아지기를 원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뜻과 대치되고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지금 많은 신자들이 가지는 갈등과 방황이 모두 이런 문제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낮아지기를 싫어하는 것 때문에 갈등과 방황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지 못한 채 헤매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토록 이스라엘을 낮추어서 말씀으로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확인하시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천국에서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진짜 삶은 가나안에서의 삶입니다. 광야는 다만 약속의 땅을 위한 준비된 것에 불과합니다. 신자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사는 것이 전부이지만 신자는 다릅니다.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단지 우리를 천국에서 천국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람되게 하기 위해서 천국에서 필요 없는 것을 버리게 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버리라고 살게 하시는데 오히려 가지고 모으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을 어떻게 천국에 갈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11절에 보면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라고 합니다. 7-10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아름다운 땅, 살기 좋은 땅, 모든 것이 풍성한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풍성한 축복, 즉 높아진 자리에서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음을 인하여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스라엘이 높은 자리에서 교만하지 않고 모든 것의 출처를 여호와로 인정한 가운데 하나님만 찬송하는 삶을 살아갈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그들을 낮추셨습니다. 낮추어진 자리에서도 감사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높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14절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하고 17절에서도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잊어버림은 교만에서 나옵니다. 교만은 내 능력과 내 힘으로 이 모든 소유를 얻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천국에서 용납될 수 없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낮은 자리에 처하게 하셔서 인간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낮아진 자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자는 높아진 자리가 아니라 낮아지는 자리를 더욱 사모할 것이고,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 바라보기를 기뻐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교인을 높은 자리로 인도하려고 애를 씁니다. 교회부터가 낮아진 자리를 외면하고 높아지는 자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 속에 과연 죄인들의 친구로 오신 예수님이 계시겠습니까? 죄인들의 친구로 오신 예수님은 교회 스스로 쫓아 내버리고 화려한 옷으로 치장을 하고 위대하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다가온 거짓 예수를 환영하고 있는 실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높은 자리에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낮아진 자리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셨습니다. 신앙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면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은 낮은 자리에서 십자가지신 분 외에는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과연 낮아진 자리에 오신 예수님이 살아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낮아진 자리를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낮추실 때 내가 과연 그 낮은 자리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려고 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것이 광야를 살아가는 신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높은 자리를 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높아지는 자리가 내 마음을 비우고 말씀으로 살아가게 하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를 사는 신자에게 있어야 할 의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들이 지금 광야를 살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인식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광야로 보지 않고 단지 천국 가기 전에 육신을 가지고 사는 장소로만 봐버립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교회생활 충실히 잘하고 착한 일도 대강 하면 천국 간다고만 생각하는 것이 신자들을 천국과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서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시험입니다.

 

 

 

 

여러분, 광야를 고생의 장소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광야를 고생의 장소로 생각하는 한 여러분은 광야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광야는 고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에게 주신 은총입니다. 광야가 고생이 아니라 은총이라는 것은 세상을 떡으로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사는 자에게만 이해될 것입니다. 천국은 천국이 아닌 사고방식은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아들이기 때문에 여러분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사단의 사고방식을 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이 은총과 사랑이 이해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광야가 이해되어진다면, 그리고 광야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기를 소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분명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백성입니다.

 

 

 

 

5절에서도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시고, 아들이기 때문에 광야로 인도하셔서 마음을 낮추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광야에서 고생스럽다거나 피할 길이 없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 가운데 오히려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확인되어질 때의 기쁨은 아들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은 성경을 가까이 하고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성경대로 실천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복이 되어서 세상에서 잘살게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말씀을 이용해서 높아지고자 하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상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도록 창조된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창조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창조의 원칙이 있는 자리로 되돌려 놓고자 하십니다. 인간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왔습니다. 내 힘과 내 능력으로 내게 필요한 것을 얻으며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인간은 높아진 것이 마치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인 양 생각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실 때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얻은 것을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애당초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고 삽니다. 내것이 아니라면 내 손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빼앗긴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내손에 잠시 맡겼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신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과연 이런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것이 기도이고 묵상입니다. 엉뚱한 것 때문에 마음 쓰고 힘들어하면서 다른 기도, 다른 묵상을 하지 마시고 '내가 과연 그런가?' 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데 모든 힘을 쓰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세운 목표와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오지 마시고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에 순종되기 위해서 나오시기 바랍니다. 높아지는 나의 목표를 바라보고 나오지 마시고 낮은 자리로 이끌어서 세상 사고방식을 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고 나오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을 낮아지게 한 그 자리 그 사건은 여러분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은총과 사랑으로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신다면 교회는 여러분의 낮아짐이 실천되는 현장이 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범위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이와 같습니다. 다른 점은 신자는 그 주어진 범위 안에서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는 주어진 범위로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벗어나고자 힘씁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실망이고 실패입니다. 주어진 범위 안에서 사는 것, 이것이 낮아진 마음입니다.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배우라고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광야에서 살게 하십니다. 자기를 보지 말고 낮은 자리에 처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덕분에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광야에서 하나하나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으셨다면 광야에서 나그네로 살게 됨을 당연하게 여기십시오. 광야에 정착하려고 하지 말고 약속의 땅, 천국에 정착하는 날을 소망하며 사십시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여러분을 세상에서 복된 자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 되게 하고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광야에서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인간의 의 (신 9:1-8)


인간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있음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인간의 행함과 하나님의 행함을 연결시키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즉 자신에게 어떤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의 선한 행동의 대가로서 주어진 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쁜 일이 있으면 자연히 혹 내가 잘못한 일이 있지는 않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상선벌악'(賞善罰惡)의 하나님입니다. 즉 상을 받을만해서 받았고 벌을 받을만해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신지식을 가진 인간들은 좋은 일은 모두 상으로, 나쁜 일은 벌로 연관짓게 됩니다. 그리고 나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부정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한 자신의 행위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슨 잘못이 있기에 이런 일이 있게 하는가?'라고 하면서 주어진 결과에 대해서 반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도 저 사람처럼 착한 일을 했는데 왜 나에게는 이런 일이 있게 하느냐?'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인정을 하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간증하기를 '제가 십일조를 철저하게 잘했더니 하나님이 이러이러한 복을 주셨습니다'라고 할 때, 그 말을 듣고 하나님께 반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잘하는 모든 교인들에게 좋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교인은 십일조를 잘하는데도 항상 일이 꼬일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십일조를 잘했더니 복을 주셨다'는 말을 들으면 과연 그 말을 인정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불평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때문에 기도하면 복이 주어지고, 주일성수하면 복이 주어지고, 십일조하면 만배로 갚아주신다고 하는 말들은 하나님을 팔아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고 하는 장사치들의 허무맹랑한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면서도 인간이 의를 행할 수 없는 존재임을 부정해 버리는 자들입니다. 구원을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구원을 받을만한 의의 자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고 말한다면 결국 구원 = 긍휼이란 방식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구원을 받고 믿음이 주어지고 거듭나면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서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생기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라고 할 때도 성령을 받으면 없던 신비한 능력이 생기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질이 한꺼번에 생기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성령의 강약에 따라서 그 자질의 정도도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거듭남 = 성령 충만 = 선한 행동, 이러한 방식에 빠져 있는 것이야말로 성경의 흐름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처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현대교인들의 신앙생활은 구약 이스라엘의 경로를 그대로 밟아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구약의 이스라엘은 실패한 것을 자신들은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기사 이스라엘은 하지 못했던 선교를 열심히 하고 있고, 자기 민족밖에 모르던 이스라엘과는 다르게 다른 나라까지 구제를 한다고 열심을 내고 있으니 옛날의 이스라엘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만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죄는 선교를 하지 않고 자기나라 밖에 모른다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자기에게 의의 근거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죄란 자기에게서 의의 근거를 찾는 것입니다. 즉 내가 구원받을만 해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상을 받을만해서 받고 복을 받을만해서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죄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수많은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도우심으로 되었다고 말은 하면서도 은혜가 주어지고 주님이 나를 도우시는 근거를 자기 자신의 행동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은혜가 주어지는 것도 뭔가 은혜를 받을만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위장한 자기 의입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은혜'를 말함으로서 자기의 의를 더욱 상승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인간의 악입니다. 자기에게 도취된 채 자기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자기에게 도취되고, 열심히 구제하고 선교하는 자신에게 도취되고, 열심히 주일성수하는 자신에게 도취된 채 좋은 일만 있으면 '역시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라고 하면서 결국 자기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종교인들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자기 도취로부터, 자기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고 주님의 의만 사모한다면 자기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있음을 철저하게 부정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그 어떤 종교적 행위도 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때 좋은 일속에서는 겸손할 수 있고, 나쁜 일 속에서는 그것을 당연히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신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인간의 선과 의를 모두 심판해 버렸습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알고 거듭나고 성령을 받은 신자라면 선을 행하려고 힘쓰는 쪽이 아니라 자신에게 전혀 어떤 기대도 걸지 않는 쪽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이러한 말을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 편을 들어주지 않고 인간 편에 서 있지 않은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뭔가 열심히 하고자 하는 분발심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열심까지 무너뜨리는 말이라고 배척해 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인간의 모습이고, 이런 인간의 모습이 옛날 이스라엘에게서 또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도 옛 이스라엘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 2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그 백성은 네가 아는바 장대한 아낙자손이라 그에게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크고 강대한 나라와 부딪힐 것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어떤 어려움에 처할 것인가를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의 힘으로 쫓아 낼 수 없는 강한 민족을 이스라엘 앞에 두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이것이 강한 민족을 이스라엘 앞에 두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과 같은 일을 당한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분명히 우리가 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편을 들어주셨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가령 공부는 못하지만 교회를 다닌 학생과 공부는 잘하는데 교회를 다니지 않는 학생이 같은 학교에 시험을 봤을 때 교회 다닌 학생은 공부를 못하는데도 합격을 하고 교회를 다니지 않은 학생은 공부를 잘하는데도 불합격을 했다면 여러분에게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겠습니까? 틀림없이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에 다니는 자신의 행동을 의로 여기는 것이 됩니다. 비록 은혜를 말하지만 의의 근거는 자기에게 있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잘 나온 학생과 잘 나오지 않은 학생이 있을 때 교회 잘나온 학생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틀림없이 주일을 잘 지키기 때문에 복을 받은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칭찬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강대한 아낙 자손을 물리치실 때 그 일의 원인을 자신에게 둘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로워서,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어서, 택한 백성이어서, 이런 식으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초부터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십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의로워서 그들을 복주기 위해서 아낙자손을 물리친 것이라면 결국 아낙자손들은 이스라엘 때문에 공연한 피해를 입은 결과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낙자손을 물리친 것은 이 민족들이 악하기 때문에 쫓아내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악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무엇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자기 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아낙 자손과 똑같이 악한 인간이고 멸망 받을 존재들인데 이렇게 살려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찾으시는 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찾으시는 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엉뚱한 것만 의라고 고집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아는 것인데, 자신의 행함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도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나 아낙 자손이나 똑같이 악한 인간으로 보신다면 무엇 때문에 아낙 자손의 악만 보시고 그들을 쫓아내시며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지 자기들의 의로움 때문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것을 안다면 절대로 자신의 행위를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착함이나 의로움을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런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 받아 신자가 된 것은 우리의 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행함을 내세우면 안됩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악한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우리를 살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신자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내세웁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자답다는 것을 자기 의로움과 착함을 통해서 인정받고자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의를 의지하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려는 악한 죄의 모습입니다.

 

 

 

 

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인간이 스스로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뿌리깊이 박혀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도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선언합니다.

 

 

 

 

목이 곧다는 것은 자기 의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굽힐 줄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나에게 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인으로서의 겸손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교만한 마음으로 삽니다. 이것이 목이 곧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도 목이 곧은 백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악한 인간이고 멸망을 받아야 할 인간임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하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조금만 좋지 않은 일이 있어도 원망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우린 이것을 광야에서 나타난 이스라엘의 원망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인간을 전혀 호의적으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선한 행동을 보이고 착하게 살고 의로운 행동을 나타낸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호의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직 죄인으로만 보실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기도하면서도 자신이 죄인임을 잊어서는 안되고, 성경을 보면서도, 예배를 드리면서도, 주일 성수라는 것을 한다면 그것을 하면서도 '나는 죄인이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 것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왜 듣기 싫어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행위에 선한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행위에 선한 것이 있다면 인간의 구원은 굳이 예수님의 피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이 곧은 백성이 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격노케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제일 잘하는 것입니다. 7절에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한 일은 여호와를 거역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거역하던 일을 다시금 언급하고 있는 것이 29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는 말이 아니라 오늘 은석교회,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온통 여호와를 격노케 하는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조금만 잘한 것이 있어도 그것을 잊지 못하고 내심 마음에 담아두면서 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그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왜 '너희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다. 죄인이다'는 것을 거듭 외치고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 의로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의로움에 빠져 버린다면 우리를 대신해 의로 오신 분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은혜를 외친다고 해도 자기 의를 내세운다면 은혜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피를 외친들 무엇합니까? 그 마음속에 자기 의가 살아있다면 십자가의 피는 한낱 장식용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닙니까?

 

 

 

 

29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죄악을 행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등장합니다. 죄의 해결은 이스라엘이 하지 못했습니다. 죄의 결과는 멸망이었지만 그 멸망을 모세가 해결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격노케 하고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을 멸하고자 했을 때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사십 주야를 산에 거하며 떡도 마시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기도함으로 심판을 면한 것입니다(9, 18, 25). 즉 이스라엘 백성의 죄로 인해서 모세가 고통을 당했던 것입니다. 즉 지금 이스라엘이 살아 있는 것은 그들의 의가 아니라 모세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서 되어진 일 때문에 이스라엘이 살아난 것입니다. 결국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천국가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늘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사이에서 되어진 일 때문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것을 잊는다면 우린 결국 자신의 의를 내세우게 될 것이고, 그것이 곧 목이 곧은 죄의 모습인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강퍅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의 죄를 보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신 것은 이 땅에 약속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말씀을 받고 있을 때 산밑의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것 때문에 모세는 40일 동안 떡과 물을 먹지 않는 고통을 겪어야 했고,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긍휼속에 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의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일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여전히 목이 곧은 백성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주님의 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기도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자기의 착함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자기의 의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신자는 다만 그리스도의 피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곧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자기의 의를 자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돌판과 언약궤 (신 10:1-11)


사람은 항상 자기 입장이 먼저입니다. 내 입장이 곤란해지고 어려워지고 힘들어지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지 나 때문에 누군가의 입장이 곤란해지고 힘들어지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주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입장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어려움이 없을 때 자기에게 문제가 없다는 여유 속에서 비로소 상대방을 생각해 줄 수 있는 것이지 자기 입장보다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자기 입장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은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은혜갚음을 하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으로 살기 때문에 은혜갚음도 자신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고 피해가 주어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또 그 은혜를 안다고 해서 과연 은혜를 갚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람들의 착각은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잘못됨은 하나님의 은혜를 갚겠다고 설치는데 있습니다. 교회의 타락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신자가 되라고 강조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여러분, 도대체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죽어야 할 우리를 대신해서 자기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 아들까지 죽일 수 있습니까? 자기를 죽일 수 있습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갚겠다고 하는 행동들은 모두가 자신이 손해보지 않는 범위 안에서의 것들입니다. 이정도의 것은 자신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것들만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입장을 철저히 지키는 가운데 신자로서의 도리를 지켜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존심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으니까 은혜를 갚으며 살아가야 한다' 는 생각이 있다면 먼저 '내가 과연 하나님 때문에 내 입장을 모두 포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내 가족도, 내 소유도, 내 지위도 모두다 포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은혜 갚겠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십자가도 알고 하나님의 은혜도 알고 사랑도 알고 있지만 나는 내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한다'라는 것을 인정하신다면 감히 은혜 갚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은혜를 갚겠다고 나서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은 한 것만큼 은혜에 대한 부담감을 덜게 됩니다. 가령 A란 사람이 B란 사람에게 10,000원짜리 점심을 대접받았습니다. 그럴 때 A란 사람은 '내가 점심을 대접받았으니까 나도 대접을 한번 해야지'라는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부담을 덜기 위해서 B란 사람에게 5,000원짜리 점심을 한번 대접했다고 할 때 5,000원만큼의 부담을 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을 하기 위해서 봉사하고 헌금했다고 할 때 필경 그 사람은 자신이 한 것만큼의 부담을 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 것이고 다만 옛날에 잠깐 도움을 받은 정도로 생각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옛날에 받은 것에 대해서 조금씩 갚아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옛날에 있었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한꺼번에는 못 갚고 평생토록 살아가면서 조금씩 갚겠다는 발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할수록 은혜에 대한 부담감이 줄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부담이 줄어갈수록 상대적으로 자신의 행함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말하지만 은혜를 전혀 모른 사람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옛날에 이스라엘 땅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하신 단 한번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사건을 옛날에 있었던 은혜의 사건으로만 생각하고 우린 단지 그 혜택을 받아서 산다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에 대해서 큰 부담을 가지지 않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지 나는 아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를 말하는 사람들이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도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날마다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 장본인이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감히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오늘 은혜를 얼마간 갚았다고 합시다. 내일은 예수님을 죽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죽인다는 것은 날마다 죄를 짓고 산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날마다 죄속에 삽니다. 주님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주님의 중보 덕분에 망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 은혜 갚는다고 해도 죄 때문에 또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상태이기 때문에 우린 감히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갚겠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은혜를 갚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 입장에서만 살아가는 이스라엘이 마실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을 때 원망을 했습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진멸을 당해야 했습니다. 또 실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진멸하고자 했습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또 지금도 역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살려 주신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죄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해결하는 해결사가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 해결사 덕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해결사가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떠받드는 것이지 진노가 사라진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 해결사의 역할을 한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사십 주야를 엎드려서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모세의 기도로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 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중보 기도'라고 합니다. 중보 기도란 단지 남을 위해서 기도해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 기도란 말씀을 무너뜨린 쪽의 그 책임을 대신 지는 것을 말합니다. 즉 중보 기도란 말씀을 멸시하고 무너뜨린 사람들의 책임을 대신 짐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지속되도록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보 기도는 주님의 기도를 말하는 것이지 절대로 내가 남을 위해서 하는 기도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지금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너희들이 살아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기도한 덕분이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살아있는 것은 너희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은혜 때문이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 때문입니다. 특히 가나안 땅, 즉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는 오직 은혜를 아는 자만 살 수 있는 땅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는 제발 너희들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내고 은혜에만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백성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내용의 말씀입니다. 1절에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고 합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모세를 산 위로 불러서 계명을 새긴 돌판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돌판을 받아서 내려올 때 산밑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돌판을 깨뜨려버립니다. 출애굽기 24:1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처음의 돌판은 하나님께서 주신 돌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의 돌판이 깨어지고 다시 계명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돌판을 모세가 준비해서 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두 번째 돌판을 만들 때는 모세더러 친히 돌판을 만들어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처음의 돌판이 깨어진 이유는 이스라엘의 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저히 받을 수 없는 더러운 자들이었습니다. 즉 인간의 죄가 깨뜨린 돌판이 산밑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돌판을 깨뜨린 책임을 지겠다는 의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어긴 죄의 책임을 땅에서 누군가가 해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시키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를 책임지시고 해결하심으로서 은혜가 우리에게 지속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지금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의 행위 속에서 장차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누군가가 책임지고 해결하지 않으면 구원은 영원히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책임을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담당하시고 죄문제를 다 해결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 모세가 돌판을 만들어서 산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돌판만 만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나무궤도 하나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나무궤의 용도는 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또 5절에 보면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고 한 말씀을 보면 나무궤는 모세가 다시 받은 돌판을 넣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의 돌판은 모세가 직접 들고 내려 왔습니다. 그 결과는 돌판이 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받은 돌판은 미리 준비한 나무궤에 넣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돌판을 그대로 들고 내려오면 처음과 마찬가지로 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돌판을 들고 올 때의 이스라엘이나 두 번째 돌판을 들고 올 때의 이스라엘이나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즉 여전히 죄인이고 더러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돌판을 그대로 들고 오면 또 다시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돌판을 나무궤에 넣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돌판으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돌판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계명이 그대로 내려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계명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김으로 이미 계명을 무너뜨려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속에 계명이 존재할 가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돌판을 나무궤에 넣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죄는 말씀을 지킴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인으로서 죄지을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돌판을 나무궤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돌판을 집어넣은 나무궤는 언약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약궤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아실 것입니다. 언약궤의 뚜껑은 속죄소라고 하기도 하고 시은좌라고 하기도 합니다. 즉 죄를 씻어주는 장소이고 은혜의 자리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지성소에 피를 들고 들어가서 언약궤의 뚜껑에 뿌립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돌판을 나무궤, 언약궤에 넣은 것은 '이제부터 너희는 말씀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죄를 책임지고 흘려진 피를 믿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를 믿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과연 피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완전히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실천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신자의 도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의 본성을 모릅니다. 사람은 실천하면 하는 것만큼 그것을 자기 의로 여기게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또한 야고보서에서 2:10절에서 율법을 하나만 범해도 모두 범한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이냐 죄인이냐는 것은 피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통해서 결정됩니다. 그리고 피를 믿는 자는 자기의 부족과 악함을 알기 때문에 감히 말씀을 실천해 보겠다고 나서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에 실천하지 못해도 피의 은혜가 나를 살리고 있음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신자가 육으로 난 사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판과 언약궤는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은혜 갚겠다고 나서지 말고, 말씀을 실천해 보겠다고 설치지 말고 다만 피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피를 믿는 신자는 결코 자신의 윤리와 도덕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피를 앞세우고 피를 기뻐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희생은 인간의 희생이 의라는 껍데기를 쓰고 삐쳐 나오는 것을 막아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중점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너는 네 입장에서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입장은 말씀을 지킴으로서 신자로서 성공하고자 합니다. 왜 피가 흘려야 했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피를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 피의 의미도 모른 채 믿는다는 말만 남발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입장, 피를 흘리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에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늘날 신자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입장에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챙기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기 입장에서 자기 이익을 챙기고자 할 때 모든 행동은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도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하게 되고, 기도도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하게 되고, 교회에 나오는 것도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나오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두 번째 돌판을 나무궤에 넣도록 하셨는지 그 이유를 마음에 새기고 돌아가십시오. 돌판을 궤 넣어서 인간이 전혀 손대지 못하도록 하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제 인간은 말씀을 지킴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피가 뿌려짐으로서 그 피로 인해서 구원받는 것을 믿고 주님의 피만 높이고 피만 증거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를 높이고 피만 증거하면서 은혜로 살아가는 삶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8,9절에 보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언약궤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들은 땅에 기업이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가 기업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양식이 기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삶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보여줬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할 일은 은혜로 사는 것뿐입니다. 피만 높이고 피만 증거하면 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기업으로 알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 입장을 내세웠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야 할 태도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피의 은혜를 잊지 말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잊지 말고 살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행위가 나를 살렸음을 잊지 말고 하찮은 우리 행위를 내세우지도 자랑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갈 때 여러분을 통해서 은혜와 사랑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할 일은 지금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업으로 알고 주님만 높이고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 (신 10:12-22)


12절 말씀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묵중한 중압감과 부담입니다. 그냥 여호와를 섬기라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우리 인생이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를 모두 하나님께 두고 있으며, 직장을 다녀도 자식을 키워도 모두가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 인생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내 인생에서 얼마를 떼어서 여호와께 바치라면 그것은 억지로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아예 내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요구에는 반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인생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의미하는 길로 순순히 들어갈 인간이 누가 있겠습니다. 때문에 믿음이란 죽음과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무한한 포부와 가능성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믿음을 자기 성취의 도구로 이용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되는 일이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단 내 인생의 포기를 요구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12절에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는 말씀을 볼 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하나님이 뭔가 대가를 주시겠지'라는 얄팍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까?'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목사가 여호와를 섬기는 법으로서 몇가지 규칙을 정해주면 그 규칙에 의해서 움직이면서 '나는 여호와를 잘 섬긴다'는 자기 도취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현대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처음 돌판과 두 번째의 돌판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은 말씀을 책임질 수 없는 악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처음 돌판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는 모세가 돌판을 만들어서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것은 땅에서 누군가가 죄를 책임지고 해결함으로 말씀이 유지되는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시키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 의미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것이 두 번째 돌판을 언약궤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을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오직 말씀을 깨뜨리는 존재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두 번째 돌판이 언약궤 안에 들어가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악한 자들이다'는 인식을 항상 가져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은 이스라엘이라면 12절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합니까? 우린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자들이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한 사람들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고라는 말씀 앞에서 '잘 알겠습니다. 이젠 여호와만 섬기겠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말씀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여호와만 섬기라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다라는 선언을 들었을 때 '우린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악함을 모르고 그 악함 때문에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말씀을 순종해 보겠다고 설치게 됩니다. '하나님 무엇을 바칠까요?' ' 하나님, 뭘 어떻게 할까요?'라고 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힘과 건강과 소유물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만족 시켜보고자 힘쓰게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기쁨은 오직 완벽에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완벽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면 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아니냐? 안하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 완벽히 못한다고 해서 아예 안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이냐?'라고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의 잘못이 인간의 행위에 의미를 두는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완벽히 못하니까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행위에 있어서는 완벽이 아니면 기뻐하지 않으심을 알고 무엇을 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생각을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12절을 말씀을 대하면서 어떤 생각을 가졌습니까? '그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만 섬겨야지'라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것은 인간의 인간됨을 모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아가지 못한 죄인이었습니다'는 자신의 상태를 그대로 고백할 수 있다면 그분은 인간의 인간됨을 철저히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우리 힘으로 하나님을 섬겨보자'라고 하는 사람들과 싸워야 합니다. 저들이 섬기기 위해서 행동하면 나는 아무 행동도 안함으로서 싸우라는 것이 아니고, 저들이 섬김의 행동을 하면서 그것을 의로 내세울 때 신자는 자발적으로 한 행동이 있다고 해도 '이것이 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여전히 죄인이다'는 것을 나타냄으로서 저들의 잘못을 고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종교적 행동을 보게 되면 그래도 자신이 뭔가 믿음이 있어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순간이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행동을 보고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을 보고 자기 행동을 바라보십시오. 그순간 우리는 오직 죄속에서 뒹굴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이순간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대부분의 신자들은 별 생각 없이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동안 부지런히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왔고, 봉사도 많이 했고, 헌금도 부지런히 하며 살아온 우리들에게 사실상 믿음이 없었음을 드러냅니다. 믿음은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오고 봉사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그 요구 앞에서 우린 그동안 나의 인생을 위해 살았고 하나님을 이용했을 뿐이지 내 인생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만 섬기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구나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요구하심을 16절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목이 곧지 않은 백성으로 사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목이 곧다는 것은 마음에 할례를 행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상태였습니다.

 

 

 

 

목이 곧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14,15절에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하늘 아래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된 자로서 결코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죄로 더러워진 세상, 즉 자신들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도 무시한 채 오직 자신을 위해서, 세상에서 강한 자가 되기 위해서, 신처럼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을 통해서는 도저히 영광을 받으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마음과 그 성품도 역시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을 거부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만물이 여호와께 속한 세상을 살면서도 내것이라는 소유개념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들 마음에는 ''라는 존재가 살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의 할례란 이러한 인간의 실체를 낱낱이 파악하고 고개를 숙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목을 곧게 하지 말라는 것은 인간 자체가 변하고 달라지고 신앙의 수준이 높아지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뭔가 달라지고 변화된 모습을 느낄수록 더 목이 곧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목이 곧지 않은 신자, 즉 마음에 할례를 받은 신자는 어제의 믿음으로 오늘을 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주님을 믿을 수 없는 목이 곧은 백성이 바로 나 자신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오늘도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지켜주실 것을 요청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할례란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자름으로서 다른 민족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과의 차별성을 성경에서는 거룩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상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말이 다르고, 풍습이 다르고, 먹는 음식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고 세상에 존재 의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핏줄이 아닌 전혀 다른 핏줄로서 발생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가문과는 전혀 상관없이 발생한 민족임을 보여주는 것이 할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할례를 받았다고 해도 할례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거룩의 정신, 약속민으로서의 정신이 삭제되어 버리면 할례를 행하지 않은 이방인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됩니다. 즉 이방인과 함께 멸망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할례는 몸에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16절의 말씀과 같이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입니다.

 

 

 

 

몸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가 하나님께 철저하게 예속된 이스라엘을 나타냅니다. 할례를 받는 것은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소유이듯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소유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발생한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민족의 모든 삶은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을 보여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내 인생을 위해서 산다는 생각을 버리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거룩의 모습입니다. 신자는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받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땀흘리고 노동해서 얻은 대가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쓰면서 살아가겠다는 것은 신자에게는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를 받아 살아가는 거룩한 백성의 모습입니다.

 

 

 

 

결론적으로 마음의 할례란 세상 만물이 여호와의 것이며 나 자신까지도 여호와께 속한 자임을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여호와의 거룩을 나타내고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제공되어진 것임을 알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할례를 행하지 않은 사람은 무엇이든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습성만 드러냅니다. 그 습성 속에서 나타난 병폐가 무엇인가 하면 믿음, 성령, 은혜 모든 것은 자기 소유화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을 소유해서 천당 가려고 하고, 성령을 소유해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종교적 능력자가 되고 싶어하고, 은혜를 소유해서 행복한 삶을 꿈꾸는 모든 것이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소유개념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키라 섬기라고 하니까 인간됨의 실체도 모르고 지키고 섬겨보겠노라고 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이 곧은 모습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나에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과연 여러분 속에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 속에 믿음이 있다면 왜 하나님만 사랑하지 못하시고 세상을 버리지 못합니까? 왜 능력을 행하지 못합니까? 믿음을 내가 소유하고 내가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께 소유된 자로서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그리스도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연약한 자임을 인정하느냐는 관계개념이 믿음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소유가 있으면 소유된 것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어떤 이익을 얻어내려고 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자기 소유로 여긴 자들이 믿음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얻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유한 것은 서로 경쟁하고 비교하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기 때문에 믿음을 경쟁하고 비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더욱 크게 부각시키고자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여호와 앞에서 인간 됨을 알지 못하고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인생은 내 힘이 아니고 내 노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이라고는 죄만 짓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은혜로 감싸고 계셨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왔다. 나는 세상 사람처럼 내 소유를 주장하지 않겠다'라고 하는 것이 마음의 할례입니다. 이것을 신약의 의미로 말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약자이기도 합니다. 자신에게서는 아무 것도 나올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서 뭔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자신에게서 뭔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때 그것을 내 힘으로 끄집어내기 위해서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대로 안될 때 스스로 낙심하게 됩니다. 뭔가 보여지면 그것을 자기 자랑거리로 삼아버립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신은 선한 것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더러운 자임을 알 때 설사 선한 것이 보여진다고 해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여기게 됩니다. 구약에서 이 모습을 보여주던 사람들이 고아 과부 나그네입니다.

 

 

 

 

18절에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고아 과부 나그네 편에 서서 일하십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소유도 없고 권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들 편에 서 계시는 것은 이들이 이스라엘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나그네를 사랑해야할 이유는 그들도 예전에 애굽 땅에서 나그네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로서 눌림 받고 멸시받고 천대받던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출 받았습니다. 이들이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있는 증거는 나그네를 사랑함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즉 약자를 무시하고 누르는 것은 애굽적 사고방식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애굽적 사고방식을 자르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면 고아 과부 나그네는 이스라엘 속에서 무시당하고 천대받으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현재의 은혜를 자기 소유로 삼아버린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약자 편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약자의 하나님이란 다만 약자를 도와주라는 개념이 아니라 너희가 바로 약자임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약자를 통해서 자신이 약자임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만약 외모를 보신다면 우린 강한 힘을 얻기 위해서 힘써야 하고 믿음의 표를 드러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종교적 행위에 몰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그런 행위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선교사를 보낸다고 야단이고, 북한 선교를 위해서 헌금을 한다 하고, 한끼를 금식해서 모은 돈으로 외국에 굶는 사람들을 도와준다고 해도 하나님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은 그런 사랑의 행위를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것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에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그런 종교적 윤리와 도덕적인 행위를 기뻐하셨다면 무엇 때문에 세상을 멸망하십니까? 세상이 아무리 죄악으로 가득 찼다고 하지만 우리 주변 곳곳에서는 윤리적 선한 일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분들을 봐서라도 멸망은 삼가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은 외모를 보신다고 할 때 가정하고 따질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라는 말 한마디로 종교적, 윤리적 선한 행위도 의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관심도 되지 못하고 기쁨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마음의 할례, 즉 우리들의 마음에 거룩의 씨가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거룩과 비거룩의 구별은 마음의 할례입니다. 겉모습이 아닙니다. 따라서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철저하게 자신의 외모를 드러내고 자기를 과시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런 인생을 살아갈 것을 충분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외모를 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보지 않겠다고 하시고 관심 두지 않겠다고 하신 외모에 신경을 쓰십니까? 믿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고, 존경받을 행동을 하고 싶어하는 것들이 외모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무시당하고 멸시 당하는 약자들이 발생하는 데 그들은 드러낼 외모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약자를 사랑하는 것은 단지 윤리적 마음씨가 아니라 내가 약자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러나는 행동입니다. 마음의 할례는 세례를 뜻합니다. 세례란 '죽은 나를 그리스도의 은혜가 살렸읍니다'는 고백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나를 살리고 있기 때문에 이제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안에 내가 사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고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믿음으로 사는 신자라면 자신이 주님의 피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잘압니다. 여러분에게 이 마음이 있다면 주님만 높이십시오. 21절에 그는 네 찬송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찬송이 되도록 하십시오. 자기를 찬송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우린 하나님을 거부한 자들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부르시고 성령이 이끌어서 주님의 은혜를 알게 된 것입니다. 애굽의 사고방식이 고개를 일으킬 때 날마다 그 마음을 자르시고 하나님의 것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

 

 

 

 

 

은혜의 땅 (신 11:8-17)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씀을 이해하는 방향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신자란 말씀을 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뜻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말씀을 이해하고 행동을 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뜻이 우선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인간은 두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두고 말씀을 대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실천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자기의 노력으로 열심히 충족시켜 드리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말씀 하나하나를 자신의 실천 목표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부류의 인간은 인간의 가능성을 포기한 채 말씀을 대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요구를 충족시켜 드릴 수 없는 악한 기질로 가득한 인간이며 도저히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더러운 자들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실천이라는 자기 가능성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고 오히려 자신이 더욱 악한자임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떤 행위가 존재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요구 앞에서는 먼지 같은 미미한 것임을 알고 자랑 자체를 부끄럽게 여길 뿐입니다. 이들에게 있는 것은 심판 속에 멸망을 받아야 마땅한 자신이 살아있음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결국 이들은 말씀을 대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 마음속에 더욱 크게 부각될 뿐입니다.

 

 

 

 

여러분, 이 두부류의 인간중 누가 과연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다'는 인간의 가능성을 앞세우며 실천을 독려하면서 행동으로 신자됨의 표를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철저히 인식하면서 오직 살려주시는 주님의 은혜만 바라보는 사람이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신자라면 뭔가 신자다운 행동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즉 신앙이 주어졌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 신앙으로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신앙을 소유하려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지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면서 의로운 행동을 일으키는 에너지가 아닙니다.

 

 

 

 

신앙을 소유화할 때 인간은 신앙의 경쟁을 하게 됩니다. 자기 소유를 남과 비교하면서 경쟁하는 것은 인간의 습성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자기 신앙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 행함에 강도를 더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신앙이겠습니까? 서로 경쟁을 일으키는 것이 신앙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무가치함을 안다는 것은 일회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번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깨달았다고 해서 인간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항상 숨어있는 본성이 갈등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날마다 자신의 악함을 고백하면서 '나는 날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입니다'는 고백을 자연스레 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이며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마음의 할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행동을 전혀 안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행동은 자연스럽게 있게 됩니다. 자발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귀하게 볼뿐입니다. 때문에 이들은 타국에 선교사로 간 행동이나 일반 가정생활이나 특별히 구분을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선교사를 갔다 해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 생계를 위한 것이라면 불신자가 자기 생계를 위해서 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뭔가 특별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사단이 노리는 함정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있으면 그만큼 남도 도와주게 되고, 봉사도 헌신도 남다를 것이라는 마음이 스스로를 올무에 매이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은혜로 산다'라고 고백한 인간으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자 하게 하고 사랑의 행동을 계획하고 실천하게 함으로서 은혜가 아닌 행위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고 인간의 노력과 열심으로 스스로 세운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땅이 바로 애굽 땅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들어가야 할 땅은 애굽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 즉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땅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땅을 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애굽 땅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이 두 땅이 살아가는 방식이 서로 판이하게 다릅니다. 10-12절을 보면 애굽 땅은 '파종한 후에 발로 물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즉 애굽 땅에서 농사 지을 때는 인간이 물을 모아놓은 후에 그 물을 발로 수차를 돌려 대는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 농사를 짓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라고 합니다. 즉 물을 모아놓을 수도 없고 따라서 인간이 발로 수차를 돌려서 물을 댈 수도 없는 땅입니다. 그러면서 12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고 합니다. 세초부터 세말까지라는 것은 일년 내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은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아니라 일년 내내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땅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자기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살려고 하는 애굽 방식을 그대로 도입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은혜의 땅이 거부합니다. 여호와의 눈이 항상 지키시고 보살피는 땅이기 때문에 잘되든 못되든 항상 주님의 은혜로 살아감을 잊지 말아야 하는 땅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다' '명령을 지킨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절에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후에 2절부터 6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신 일, 광야에서 행하신 일, 땅을 열어서 다단과 아비람을 삼키신 일 등을 말씀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끌어내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고, 광야에서 수많은 원망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지키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망각하고 다단과 아비람은 스스로 높아지고자 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심을 보이시기 위해서 땅을 열어서 삼키도록 했습니다. 결국 1절에서 말씀하는 직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는 민족으로 부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오늘 성도들이 맡은 직임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 장로 이런 것이 직임이 아니라 직분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야 할 신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여러분의 직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직임을 받은 자가 지켜야 할 것은 자기 노력이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1절이 바로 그와 같은 의미입니다.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는 것은 항목 하나하나를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이 내포하고 있는 그 정신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8-25절까지가 모두 이러한 의미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13절에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즉 자신의 노력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은혜가 나를 존재케 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모든 마음을 두고 살면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14,15)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신을 섬기면, 즉 인간의 욕심을 앞세우고 스스로의 수고와 노력으로 살아보고자 할 때는 비를 내리지 않고 소산을 내지 않아 아름다운 땅에서 멸망하도록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안다면 그들이 행할 것은 무엇입니까? 18-20절에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이 살아가야 할 삶의 원칙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신자는 항상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지는 않겠지만 앉았을 때든 행할 때든 누웠을 때든 일어날 때든 성경을 잊지 말고 가까이 하며 항상 성경 읽기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고 가르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은혜의 땅에서는 삶의 중심이 오직 은혜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무슨 행동을 하든지 은혜로 산다는 것을 잊지 않고 한다면 그것이 곧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스라엘의 삶의 원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무엇입니까?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 안에서 사는 삶은 오늘날 신자들의 성령 안에서의 삶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은혜라면 세상에 매어 살던 우리들이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 되었다면 그것 역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안에 거하는 신자에게 마땅한 삶의 모습은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은혜는 받을 가치도 없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아무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성령 안에 있는 모습입니다. 신자는 무엇을 해도 이런 입장에서 해야 합니다. 목사도 '나는 아무 가치 없는 인간이다'는 입장에서 해야 하고, 장로도 이런 입장에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쓸데없는 힘의 경쟁을 하지 않고 설사 수모와 멸시가 있다고 해도 원래 자기 모습에 대비함으로서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1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돌보시고 지키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령 안의 자기 백성을 이렇게 쉬지 않고 돌보시고 지키십니다.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여호와로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가나안 땅에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고 먹고 배부를 것이라는 말씀을 오늘 신자들도 하나님이 세상 것으로 부족함이 없이 배부르게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가나안 땅은 눈에 보이는 땅입니다. 그 땅에서 하나님이 지키시고 돌보시는 표는 땅에서 나는 소산물의 충만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은혜의 땅은 성령 안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배부름은 세상의 소산물과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이 있을 뿐입니다. 갈 5:22,23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 안에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성령 안에서만 살면 어디에서 살아도 그 자리가 천국이요 무엇을 해도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고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 사는 신자는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공급되어짐을 잊지 않습니다. 밥먹을 가치도 없고 물 마실 가치도 없는 인간에게 먹이시고 마시게 하시는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럴 때 혹 주리고 목마른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이것이 원래 나의 모습임을 생각하고 그동안 배부르게 하신 것을 감사하며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라면 이미 배부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인간의 본래 실체임을 안다면 얼마가 주어지든 그것은 모두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하늘의 양식임을 알고 먹었을 때는 신령한 양식이지만 단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한 음식으로 먹을 때는 썩을 양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거나 내일을 위해서 남겨 놓았을 때는 모두 썩어버렸던 것입니다. 은혜가 아닌 인간의 수단과 노력으로 살려고 하는 애굽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먹고 마시면서도 내 힘이 아닌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잊지 않을 때 여러분이 먹고 마시는 것은 신령한 음식, 신령한 음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서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고 그 힘으로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주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은혜로 사는 자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산다면 여러분은 어디에서 살든지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이 지키시고 돌보시는 신자입니다. 피흘려 여러분을 사신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놓지 않고 끝까지 지키실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내가 이래가지고 천국 가겠나?'라고 걱정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믿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러면 마음대로 살아도 되느냐?'라고 반문한다면 그것은 관심이 자기에게 있다는 증거입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자기 행위 때문에 믿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나도 주님이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에 관심을 두느냐의 차이일 것입니다.

 

 

 

 

교회는 은혜로 사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따라서 교회서는 자랑이 있을 수 없고, 경쟁이 있을 수 없고, 비교하고 시기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의 원리만이 흘러야 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에만 부지런히 할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는 그 흔적이 보여지는데 열심일 뿐입니다. 이 마음이 날마다 여러분의 삶과 삶으로 이어질 때 성령 안에서 배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도 남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애굽의 것으로 배고파함으로 은혜의 배부름을 누리지 못할 뿐입니다.

 

 

 

 

 

택하신 곳 (신 12:1-14)


지난 시간에는 애굽과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방식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애굽은 자기의 수고와 노력으로 살아가는 땅이지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나안 땅에서는 수고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식물을 얻어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서도 식물을 얻기 위해서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바탕으로 한 수고와 노력은 자신의 능력과 힘을 바탕으로 한 수고와 노력과는 전혀 다릅니다. 자기를 바탕으로 한 수고와 노력에는 결과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즉 자신이 목적하고 원하는 결과를 스스로 얻어내기 위해서 수고하고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굽입니다. 따라서 애굽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은혜를 언급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원하는 결과가 달성되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를 바탕으로 한 수고와 노력은 결코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어떤 수고와 노력을 했다 하더라도 결과를 자신이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수고와 노력에 대한 결과가 어떤 형태와 분량으로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수고와 노력은 자기가 했지만 주신 분은 여호와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며 은혜로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려고 합니다. 스스로 인생의 목표를 세워놓은 채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평생을 삽니다. 무엇 때문에 평안을 잃어버립니까? 인생 목표를 자신이 세우고 달성 또한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목표가 달성됐다 하더라도 잠시 행복을 맛볼 뿐 또 다시 더 높은 목표를 정하고 더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애굽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인생입니다. 스스로 평안과 행복을 파괴하고 있으면서도 누군가가 자기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목표를 정하고 살아갈 수는 있지만 책임지는 분은 여호와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목표가 달성되지 않은 책임을 여호와께 따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든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기의 수고와 노력의 대가가 얼마가 주어지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하는 것이 은혜로 사는 신자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인생의 지혜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삶은 평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대부분이 현재의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합니다. 직장에 대해서든, 자식에 대해서든, 아내와 남편에 대해서든, 환경에 대해서든 모든 부분에 있어서 '이렇게 말고 이렇게 되었으면'하는 환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었으면'하는 환상이 현재의 삶에 대해서 불만을 일으키게 되고, 그 불만으로 인해서 평안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었으면'하는 것은 현재에 대한 불만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은혜의 바탕 위에 서있지 못하는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행복과 평안은 결코 주어지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 통로가 막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욕심이 행복을 멀리 쫓아 버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복의 통로가 막혀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그 통로를 뚫어보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하고 기도하는 종교 행위 역시 복의 통로를 뚫어보기 위한 인간의 열성으로 전락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을 다른 차원에서 구분한다면 애굽 땅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사는 땅이지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열심히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는 내 이름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있습니다. 내 이름이 없기 때문에 이름이 높아지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름을 높여주는 신은 우상입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우상을 멸하라는 차원으로 쉽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3절 마지막에 보면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고 합니다. 즉 이름과 이름의 싸움입니다. 우상의 이름은 멸하고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는 곳, 그 곳이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느 곳이든 단을 헐고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상을 불사르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우상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용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우상을 만들고 그 이름을 높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가장 먼저 이름을 가집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그 이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름이 곧 그 사람의 전부입니다.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성공한 인생이고 이름이 낮아지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고 천대받고 무시 받는 이름으로 전락된다면 그것은 실패한 인생으로 여깁니다. 오직 내 이름만 높이기 위해서 수고하고 노력하는 곳, 그곳이 바로 애굽입니다. 그리고 내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의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든지 그 우상을 멸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어느 곳에서든지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한 인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의 땅에서 살아가는 신자가 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나아가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5,6절을 보면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라고 말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제사하는 것입니다. 왜 꼭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제사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무 곳에서나 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곳이 특별한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모두 아닙니다. 택하신 곳이 중요한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택하신 곳이 어디냐를 알려면 하나님의 이름이 어디에 있느냐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 곳에서나 제사하지 못하고 택하신 곳에서만 할 수 있었다면 이것은 오늘날도 같습니다. 오늘날도 역시 아무 곳에서나 예배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바로 이점을 알고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출 20:24절에 보면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말합니다.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란 제사가 행해지는 곳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것은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고, 제사란 흠없고 죄없는 제물이 죽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일이란 자기 희생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란 법궤 위에 피가 뿌려지는 일이 행해지는 성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장소에 솔로몬이 날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성전이 세워지게 되고 지금은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일을 하신 주님이 곧 성전이기 때문에 주님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져 있고 따라서 그리스도가 오늘날의 택하신 곳이란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이라는 장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그것이 곧 택하신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리스도안에서 예배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우상을 깨뜨리고 불사르는 것은 우상의 이름을 멸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이 높임 받는 것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임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소원을 간직한 채 나온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우상 섬기듯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장소에서는 흠없는 제물이 희생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장차 하나님의 희생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희생할 수밖에 없는 일을 보여주는 장소에서 인간이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희생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희생을 진심으로 아는 신자라면 자기 이름은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이름이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을 보면서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택하신 곳에서만 예배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희생이 없는 예배는 예배로 여기시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로 택하신 곳에서의 인간의 자기 자랑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랑이란 자기에게 가치를 두는 것인데, 자신에게 가치를 두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희생의 의미를 알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이란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고 하셨습니다. '주여 주여'라고 부른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신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택하신 곳, 그곳에서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안에서 주님을 부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이란 내 이름은 높여지지 않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일만 높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희생 앞에 내 이름은 아무런 가치도 없음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내 이름은 무너지고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 그 자리가 오늘날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신 택하신 곳, 즉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하고 많은 권능을 행한다고 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불법을 행하는 것으로 단정하셨습니다(마 7:22,23). 행위 자체가 불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법칙에서 어긋나는 모든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4절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가나안 사람들처럼 여기저기서 자기들 마음대로 신을 섬길 장소를 찾아서 신을 섬기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생각대로 자기 멋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절에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즉 광야에서는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였지만 가나안 땅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택하신 곳에서만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마음대로 생각하고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서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복이 주어집니다. 복은 주어지는 통로가 지정되어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복이 아닙니다. 출 20:24절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 복이 강림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복이란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는 그 자리에 강림하는 것이지 인간이 선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강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가 복의 통로가 되지 못한다면 자기 행위에 대해서 그 어떤 의미도 두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가치를 두려고 합니다. 이 행위 때문에 자신에게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은 자기의 행위를 통해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행위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신자는 자기 이름을 포기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만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인간은 결국 모두가 헛됨으로 끝나게 됩니다. 내 이름이 부서지고 내 이름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복이 강림합니다. 그러나 그 복도 역시 우리의 이름을 높여주는 복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복이 주어질 때 내 이름이 높아질 것을 기대한다면 그 사람은 애당초부터 자기 이름에 관심을 두고 하나님께 나온 자입니다. 아예 자기 이름에 기대를 두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것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주어진 것으로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것이고 그것이 곧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은 나 때문에 하나님이 희생하셨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십자가 밑이고 내가 죽어지고 없어진 자리입니다. 이 마음이 없이 예배한다고 나서는 것은 예배도 아니며 여기저기서 자기 마음대로 예배하는, 즉 우상을 섬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이 자리에 모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여지는가를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인간의 이름을 높이고 인간의 이름에 가치를 두면서 모인다면 그 어떤 장엄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는 십자가를 믿는 그 자리가 복이 주어지는 장소입니다. 자기 이름이 있는 곳에는 복이 주어지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이름이 있는 곳에는 피흘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모두가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기 이름을 죽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사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그런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 이름이 포기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울 때 그때 '주여'라고 부르는 그 자리가 복이 강림하는 자리일 것입니다.

 

 

 

 

애굽은 인간의 욕망으로 사는 장소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자기를 위한 우상을 만들어 낼뿐입니다. 이시간 여러분 스스로에게 냉정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애굽 방식이 아닌지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자기 욕망 성취가 아니라 오히려 포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헛됨이고 썩어짐이며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임을 알기 때문에 여호와를 신앙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신앙으로 인해서 어떤 득이 주어질 것을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가장 큰 득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만 산다면 무엇을 잃어도 괜찮은 것이 신앙입니다. 이미 복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무너지는 것이며 내 이름의 가치를 헐고 깨뜨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한곳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한곳에서만 우리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예배가 예배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욕망이 포기되지 못한 채 나온 자리이고 예배하는 것이라면 결코 예배가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 이름을 두신 한 곳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그 택하신 곳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신자가 할 일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시고 제물 되신 것 때문에 우리에게 복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내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은혜로 주어진 것을 형제와 나누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형제를 향한 마음이 열려질 것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여러분이 누리는 복을 나누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피와 교회 (신 12:15-28)


남자들이 여자에 대해서 말할 때 '여자란 참으로 복잡한 인간이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아마도 주위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쉽게 마음이 변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좋은 것 같다가도 금방 싫어하고 싫어하는 것 같다가도 금방 좋아하는 여자의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복잡하다'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적으로 따져볼 때 여자만 복잡한 인간이 아닙니다. 여자의 감정과 마음이 쉽게 변하고 쉽게 흔들리는 것은 여자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여린 마음이 주위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지 유독 여자만 복잡한 인간이어서가 아닙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이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신체구조가 복잡하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행동하고 감각하고 보고 듣고 평가하는 모든 것들이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앎과 삶이 하나되어 나타나는가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행동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알고 있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령 길을 가는데 불량배 여러 명이 한 사람을 폭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지나가던 누군가가 목격을 했다고 합시다. 그럴 때 앎은 어떻게 작용을 합니까? 앎은 인간의 속에서 도와주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삶은 앎이 외치는 쪽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또 다른 내 속의 외침이 앎의 외침을 눌러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현장을 외면해 버리고 못본척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 사람은 도와주지 못했다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게 됩니다. 앎의 외침을 외면한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여기서 양심의 가책은 지극히 윤리적이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이 작용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가 스승을 판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다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역시 신앙과 관계없이 윤리적이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자책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도와주지 못했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 역시 가책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가책이라는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볼 궁리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자기 합리화입니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서 할 수 없었다. 한 놈만 있었어도 내가 뛰어 들어서 도와주었을 텐데 이것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양심의 짐을 벗고자 하게 됩니다. 이렇게 인간은 앎이 요구하는 대로 삶이 움직이는 단순한 구조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속에서 외치는 여러 가지의 목소리에 의해서 삶이 움직이는 아주 복잡한 구조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복잡한 얘기이지만 이런 얘기를 굳이 드리는 것은 인간이 어떤 식으로 세상으로 살고 있는가를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사실 인간이 복잡하게 살아가게 된 이유도 죄 때문이고, 이런 복잡한 얘기를 여러분께 해야 하는 것도 역시 죄 때문입니다. 처음 인간의 삶은 결코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복잡한 말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자기 탐욕에 갇히게 되었을 때부터 복잡한 존재가 되버린 것입니다. 이젠 앎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탐욕에 의해서 움직이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옳은 것인가?'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고자 하는 자기 사랑이 개입되어서 수없이 교차되는 생각과 계산 속에서 '나에게 득이 된다. 해가 되지 않는다'는 답이 산출될 때 행동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앎과 삶이 하나 되지 못한 채 자기 사랑이라는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실체입니다. 이런 굴레 속에서 살기 때문에 비록 좋은 일을 한다 할지라도 조심스럽게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가령 누군가가 어렵기 때문에 도와준다고 할 때 친한 관계일수록 쉽게 돕지를 못하고 상대방의 자존심을 염두에 둡니다. 그리고 최대한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는 방법으로 조심스럽게 돕게 됩니다. 결국 죄가 남을 돕는 것조차도 복잡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자존심이란 죄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죄의 산물이 형제의 사랑까지도 복잡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믿는 것은 이 복잡한 구조로 얽혀 있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 사랑과 탐욕이 얽히고 설킨 채 생각하고 행동하는 복잡한 삶이 아니라 단 하나, 주님의 사랑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세계는 주님의 사랑만 있을 뿐입니다. 내 사랑, 내 탐욕, 내 목표, 내 계획, 내 자존심, 내 인생, 내 교회, 이런 것들은 다 사라지고 주님의 사랑이 내 속에서 외치는 그 목소리에만 순종하는 세계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을 맛보면서 영원한 사랑의 세계를 소망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주님의 사랑의 흔적이 항상 발견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의 흔적이 스며있는 교회로 모여지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당연히 주님의 사랑입니다. 내 사랑과 탐욕을 덮어 버리기에 충분한 주님의 사랑과 희생에 눈이 뜨일 때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희생이 내 마음에 자리할 때 우리는 사랑의 흔적이 스며있는 교회로 모여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사랑의 흔적이 스며있는 교회의 모습을 옛날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규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제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가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안에 산다는 것은 자기 욕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희생과 사랑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기 사랑이라든가, 자기 자랑이라든가, 자기 욕망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신자가 서로 모일 때 그 모임, 즉 그 교회는 형제를 향한 열린 마음으로 사랑과 은혜를 나누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초점이 제물을 먹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28절까지 계속해서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제물을 먹는 일은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단을 중심으로 되어져야 하는 일임을 언급합니다. 17,18절을 보면 제물을 각 성에서 먹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먹으라고 합니다. 다만 각 성에서 먹을 수 있도록 허락된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멀거든'(21절)의 경우에 한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결국 택하신 곳이라는 것은 장소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장소가 중요하다면 아무리 멀어도 그 장소까지 오라고 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단 중심이란 소위 고정된 교회 중심을 말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교회가 신자들을 교회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 신앙을 교회 중심으로 사는 것으로 강조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앙생활은 고정된 교회, 즉 예배당 중심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곳에는 제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에서는 제물의 피를 쏟아내고 고기를 태우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반복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은혜의 땅의 삶의 법칙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애굽은 떡으로 살지만 가나안 땅은 말씀으로 삽니다. 그러나 애굽의 삶의 방식에 길들어져 있는 이스라엘은 말씀으로 사는 은혜의 방식에 쉽게 수긍하고 적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단에서 피가 뿌려지고 고기가 태워지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심으로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배우도록 하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규례와 법도를 실천하고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들을 택하신 곳에 세워진 제단에서 벌어지는 피의 사건으로 인도해 갑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복이 강림하는 자리이고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 가운데 하나가 고기를 서로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정한 자, 부정한 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없습니다. 제물을 바치지 않은 레위인도 함께 먹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즉 세상의 복잡한 인간 관계가 다 사라지고 오직 피에 의해서 죄를 용서받고 즐거워하는 백성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제물의 희생의 피로 인해서 즐거움을 누리고 그 피를 중심으로 화목의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보여져야 할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요 6:53)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단 중심으로 살지 아니하면 생명과는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예수' 하면서 왜 자꾸 죽기 위해 살지 않고 살기 위해 사느냐는 책망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벌어지는 제물이 피를 흘리고 죽는 사건은 죽음과 생명이 교차되는 현장입니다. 제물의 죽음은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의 종결과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사는 삶의 새로운 시작을 담고 있습니다. 그 새로운 시작이 곧 제단 중심의 삶이고 이 삶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를 통해서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렇게 살아갈 것 같으면 교회에 무관심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제물이 죽는 것만이 아닙니다. 피 흘린 제물의 고기를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은 고기가 아까워서 나눠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규례로 정해진 일입니다. 즉 제물이 희생하는 것으로 제사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나누어 먹음으로 제사가 계속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신자의 문제점은 나누는 것에 대해서 너무 무심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주일에 예배 한번 드리는 것으로 종결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어떻게 보면 주일 예배가 신앙생활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고난과 박해가 있던 시절에는 모이라는 강요를 하지 않아도 날마다 숨어 모이면서 서로 위로하고 힘이 되면서 주님을 소망하는 신앙으로 고난을 견뎌나갔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박해가 사라지면서 점차 모임에 소홀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없는 것을 좋아하지만 결국 마귀는 고난이 없는 것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단지 예배 참석에 힘쓰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 중심으로 사는지 제단 중심으로 사는지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단에는 나혼자만 나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사하며 이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기를 소원하는 형제들이 함께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제단에서는 제사 드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물의 고기를 나눠 먹는 일로 계속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형제와 형제가 서로 나누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 사랑과 희생이 내 마음속에 자리하게 되었다면 분명히 사랑과 희생은 움직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향해 움직이겠습니까? 나와 함께 제단에 나와서 주님의 희생에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형제들을 향해서 그 흔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 있어야 할 화목의 생활입니다.

 

 

 

 

신자가 주님의 죽으심 때문에 내가 산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자신도 날마다 죽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세워 놓고 살아갈 것입니다. 인간의 복잡성은 내가 살기 위해서 살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계산하고 머리 굴리면서 나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윤리와 양심에 따라 살아갈 수 없습니다. 윤리와 양심도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적당한 선에서 베풀어지게 됩니다. 이런 현실에서 윤리적 인간, 양심적 인간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자기를 위한 윤리이고 자기를 위한 양심이지 형제를 위한 윤리와 양심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의 모습 그대로 교회로 모이기 때문에 이름은 교회라고 하지만 보이는 모습은 나를 위한 신앙, 나를 위한 구원, 나를 위한 교회, 나를 위한 예수뿐입니다. 이런 현상들은 은석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여러분에게 신앙의 자유를 많이 말씀드렸습니다. 교회에도 매이지 마시고, 목사에게도 매이지 마시고, 오직 진리에 매인 자로서 자유롭게 신앙생활 하실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분명히 나를 위한 자유가 아니라 형제의 유익을 위한 자유로 발전되어야 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염려스러운 것은 목사가 어떤 규칙과 법적인 것을 강조하지 않는 것을 자기 편함으로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목사가 어떤 행동 수칙을 정해서 강요하지 않는 것은 신앙이란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즐거움과 기쁨으로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지 목사의 말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하라 해서 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아니며 신앙도 아니고 십자가의 정신도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께 전혀 강요하지 않고 다만 주님의 사랑과 희생이 어떤 것인가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희생의 정신에 의해서 살 것을 말씀 드렸지만 드러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고자 힘쓰는 모습보다는 목사의 강요가 없는 자유를 즐거워하고 누리는 모습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모임에 대한 자유가 좀 더 모이기를 힘쓰는 쪽으로 나아가기보다는 폐하는 쪽으로 발전되고. 헌금에 대한 자유가 좀 더 나누기 위해서 힘쓰는 쪽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내것을 아끼는 쪽으로 활용되고, 봉사에 대한 자유가 즐거움으로 형제를 위해서 무엇인가 할 일을 찾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편함과 형제에 대한 외면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제단에서 서로 모여 고기를 나누어 먹으라는 말씀 속에서 각자 자기 자신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란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이며 그 삶에는 형제와 고기를 나누어 먹는 것도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삶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신앙 생활은 제단 중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고 죽기 위해서 살고 있다면 세상은 결코 방해물이 되지 못합니다. 다만 세상에 대한 포기가 없고 아직까지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잡다한 일들이 계속해서 방해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바쁘게 움직여야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바쁜 일들을 중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쁜 일이 중심이 되어서 살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바쁜 일 다음의 문제가 되버립니다. 바쁘니까 하나님도 이해하시겠지라고 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자기 욕심을 이루는데 더 열심을 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바쁘게 하신 것이 돈 벌어서 헌금 많이 하라는 뜻이겠습니까? 바쁜 가운데도 제단 중심,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를 묻기 위해서 바쁘게 하신 것으로는 왜 생각하지 못합니까? 신자는 바쁠 때일수록 기도하면서 내가 지금 바쁘다는 것 때문에 제단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를 살피면서 주님의 십자가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들이 있어야 합니다.

 

 

 

 

신자는 주님의 피를 떠나면 생명과 상관없는 존재가 됩니다.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이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아신다면, 나의 전부를 버린다고 해도 생명만은 포기할 수 없음을 아신다면 세상을 복잡하게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때그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형편 속에서 주님의 피를 즐거워하며 그 즐거움으로 형제를 위해 봉사하고 나누면서 자유함으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이루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세상에 미련을 벗어버리지 못한 우리의 죄와 탐욕을 깨닫고 이런 나 때문에 피 흘리시고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에 감사하고 기도하면서 즐거움으로 함께 모인 형제들에게 사랑의 흔적을 보이며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신자의 인생입니다.

 

 

 

 

 

신자의 할 일 (신 13:1-11)


'예수 믿고 나서 신자의 할 일이 뭔가?' 라는 질문을 하면 대부분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전도하고 사회에서 좋은 일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신자로서 교회에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고 좋은 일도 해야 할 필요성이 있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가장 중요한 점을 잊어버린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신자의 할 일은 뭔가?'라고 질문했을 때 여기에 타당한 대답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분들은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내가 지금 주님을 믿고 있는데 주님을 믿는 것이 신자의 할 일이라니 그것이 무슨 말이냐?'라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여기서 소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자신에 대해서 '나는 믿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점입니다. 이미 믿고 있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그 믿음을 더욱 키우고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음의 행동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봉사로 이어지고 사회적인 좋은 일로 이어지게 됩니다. 믿음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만 하지 주님을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는 믿음은 이미 자신에게 있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현 교인들이 이해하는 믿음은 '믿음 없는 인간이 믿음을 소유해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런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던 내가 어찌어찌 해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지는 느낌은 '나는 이제부터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씨가 내 속에 심겨진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앞으로 교회에 다니면서 할 일은 부지런히 믿음의 씨를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믿음의 씨를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교회에 봉사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성경도 봐야하고 좋은 일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스스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분위기를 통해서, 또는 교회에서의 가르침에 의해서 배우게 됩니다. 때문에 이러한 가르침 속에서 자라온 교인들이 '예수 믿은 후에 할 일'에 대해서 물을 때 '믿는 것'이라고 대답하면 이해를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나는 지금 믿고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러한 사람들에게 '믿은 후에 할 일은 믿음이 자라는 것'이라고 말하면 '맞다'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에는 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자란다는 것은 분량을 의미하는데 믿음에 분량이라는 뜻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를 하게 된 것은, 믿음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믿는 자로 교회에 오지 말 것을 강조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믿는 자로 오게 되면 자기에 대한 오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믿음이 없는 자로 교회로 오시고 믿음 없는 자로 성경을 볼 때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나는 믿음이 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시는 분이라면 신자의 할 일이 '믿는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하실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가 믿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믿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도 옳다고 인정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생각에는 착하게 살고 칭찬 받는 삶을 살고 신자다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분명 세상 적으로 보면 좋은 생각입니다. 착하게 살아보겠다는 데 그것을 나쁘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좋은 생각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좋아하신다는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착하게 사는 것은 인간의 염원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인간에게 착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착함을 기대할 수 없는 인간에게 '착하게 사는 것'을 신자의 할 일, 즉 신자의 사명으로 주셨다면 그것은 분명 모순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착함을 원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착함이지 인간에 대한 착함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은 인간관계에서의 착함을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윤리적 인간의 윤리적 생각입니다.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착함은 '하나님만 신앙'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신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만 신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된 여러분이 날마다 해야 할 신자의 일, 즉 사명입니다.

 

 

 

 

사명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명이란 목사 장로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 가고 성가대에서 일하고 교사로 일하는 것이 사명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남들보다 노래를 조금 잘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은 성가대에서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달란트라고도 얘기합니다.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는 교회에서도 주일학교에서 교사로 일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노래를 잘 부르든 요리를 잘하든 손재주가 있든 그것은 재능이고 재주이지 사명은 아닙니다. 성가대는 단지 노래에 재능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노래 자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래를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들으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의 할 일은 하나님만 신앙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믿는 자로 사는 것이 여러분의 할 일,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날마다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여전히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해야 할 일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은혜의 땅이라는 점도 잊지 말고 본문을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 안에서 사는 신자의 삶이라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다른 신들을 좇아 섬기고, 다른 신을 섬기자고 꾀는 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처리법이 죽이는 것입니다. 5절에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고 되어 있고, 9절에도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라고 말하고, 10절에서도 '너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고, 14,15절에서도 죽이라, 진멸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은 그러한 사람은 은혜의 땅에서 살 수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질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1절에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라는 말씀을 보면 선지자, 꿈꾸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이고, 꿈꾸는 자는 신비한 체험과 경험을 계시로 내세우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을 죽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죽어야 할 자입니까? 2절 말씀에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거짓 선지자와 꿈꾸는 자들은 이적과 기사를 내세우면서 다른 신을 섬기자고 꾀이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유혹의 중점은 나를 위한 이적과 기사이고 나를 위한 신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이 드러납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신앙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사적인 일을 바라보게 합니다. 자기 문제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 이것이 다른 신을 섬기게 하는 것이며 은혜의 땅에서 용납될 수 없는 악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이적과 기사에 약합니다. 눈으로 직접 신기한 일을 목격했을 때 그것을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버립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이러한 이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거짓 신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이적과 기사를 보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신기한 이적과 기사에 마음을 두고 있을 때 결국 마귀는 그 틈을 노립니다. 신기한 이적과 기사로 나타나서 꾀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따라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들이 기도원에 가서 신기한 체험을 하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고 방언을 하게 되고 병고침을 받았다고 하니까 자신도 기도원에 가서 그런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어하는 것들이 바로 다른 신을 좇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체험, 개인적인 문제 등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라고 하는 모래알보다 작은 문제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의 일이라고 하는 엄청난 큰 일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다른 신은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문제만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의 욕심을 드러내게 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땅에서 잘라져야 할 모습이기 때문에 신자를 꾀이는 다른 신을 죽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자기 개인적인 문제 해결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다른 힘이 곧 꿈꾸는 자고 무당이고 거짓선지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분명히 신자들의 개인적인 문제에 하나님을 연관 시켜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개인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볼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죽을병이 들었다가 기도원가서 나았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내 문제이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죽을병이 들었다가 나은 것에는 온 교회가 놀라고 신기해하고 평생을 잊어버리지 않을 듯이 자랑하고 떠들고 간증하고 다니면서,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죽을 죄인이 살아나고, 멸망의 자리에 있던 자가 생명의 자리로 옮김 바가 되고, 심판 속에서 건짐 받게 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놀라워하지도 않고 신기해하지도 않고 시큰둥하게만 여겨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결국 다른 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보다는 내 문제가 더 관심거리라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자를 죽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5절에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속량하여 내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노력과 자기 힘으로 사는 애굽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땅으로 옮긴바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아직까지 자기 노력으로 살고자 하는 염원이 잔재해 있습니다. 그런 염원을 부추기고 다시금 자기 노력으로 살도록 꾀이는 존재가 거짓선지자이고 꿈꾸는 자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신은 다른 신, 즉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은혜로 사는 것보다는 내 문제를 위해서 내 스스로 노력하고 힘쓰고자 하는 애굽 방식에 더 미련을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의 할 일은 날마다 다른 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이러한 할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돌아가는 신자가 많습니다. 신자로서 할 일은 주일에 교회 와주는 것으로 종결되었다고 여겨버립니다. 하나님은 내 속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하늘에 계시는 분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된 채 내 즐거움과 내 개인의 삶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현 신자들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껍데기만 신자 모양을 하고 내용은 세상사람과 동일한 사명 없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사명 있는 신자로 살아가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할 일은 날마다 다른 신을 찾아 죽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다른 신을 섬기도록 꾀이는 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사는 것입니다. 설령 형제요 자녀요 아내요 친구라고 할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다른 신입니다. 6절에 "네 동복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라고 말합니다. 이들을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8,9절)라고 합니다. 아무리 육신적으로 가까운 사이라고 할지라도 애석히 여기지 말고 죽이라는 것이 여호와의 명령입니다. 단호한 말씀입니다.

 

 

 

 

다른 신은 신자를 은혜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자기 개인 문제를 위해 살도록 꾀입니다. 하나님께만 돌아가야 할 영광을 인간에게 돌아가도록 합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찾아내서 잘라버리면서 사는 것이 신자의 할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살아난 자들입니다. 자기를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정신 때문에 살아난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할 일이 뭐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은혜만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외에 다른 것이 은혜를 가장해서 접근할 때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것이 신자의 할 일입니다.

 

 

 

 

다른 신은 내 가정에, 내 직장에, 내 사업에, 심지어 내 자신 속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신을 믿는 사람의 특징은 항상 자기 개인 문제, 즉 자신이 잘되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는 것에 있습니다. 결국 교회를 찾고 하나님을 찾아도 개인 문제에 관심을 두고 찾는다면 그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신은 여러분의 마음에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된 여러분이 할 일은 날마다 여러분의 마음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개인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을 죽여야 하고 부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해야 할 사명입니다.

 

 

 

 

5절에 끝에 보면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악은 무엇입니까? 악은 절에 가고 부처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개인과 연결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자기 의 이익을 위한 믿음으로, 봉사도 자기 이익을 위한 봉사로, 이처럼 모든 것을 자기와 연관짓는 것을 악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애굽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주식을 샀는데 주식 값이 올라서 돈을 벌었다고 합시다. 그럴 때 대부분은 하나님이 나를 도우셨다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을 자기 개인을 돕는 분으로 연결짓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고 애굽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주식이 올랐을 때 하나님은 주식 값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은 마음대로 하시는 분임을 바라본다면 주식 값이 올라서 돈을 벌든 내려서 손해를 보든 여전히 그 마음속에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신자가 이런 신앙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기 포부와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결국 다른 신으로 빠지는 결과만 가져올 뿐입니다. 우리에겐 아직도 내 힘으로 살아보려는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은혜로는 부족하다 더 달라'고 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내 포부와 욕망을 옹호하는 다른 신의 접근을 쉽게 용납하며 다른 신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발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잘되든 못되든 하나님의 은혜인줄로 알고 감사하며 삽시다'라는 말에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린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시면 못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우십니다'라는 거짓 선지자의 말을 용납하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9절에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고 합니다. 죽일 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나도 너와 똑같이 죽을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죽임을 당한 자를 나와 같은 자로 인정함으로서 나도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할 악한 자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신은 내 손으로 부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신이나 나나 한통속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원수된 나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 이러한 인식이 없이 교회를 찾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당당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린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항상 다른 신의 꾀임을 용납하면서 자기 개인의 문제에 빠져 살아갑니다. 다른 신은 내 안에 있음을 알고 내가 죽어야 할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은혜가 마음에 자리할 때 오직 그 은혜만 높이고자 힘쓰십시오. 내 개인의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 바라보고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신자된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여호와의 성민 (신 14:1-2)


지구상에는 수많은 나라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있습니다. 국가는 인간에 의해서 발생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 탄생된 나라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스라엘은 뭔가 특이성을 지닌 채 세상 속에 존재하게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탄생의 배경에는 애굽의 심판이 있습니다. 애굽을 치시고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애굽의 심판 없이도 얼마든지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미리 약속하신 대로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가게 하시고 그곳에서 400년 동안 자손들이 번창하게 하시고 애굽의 심판을 통해서 비로소 이스라엘로 출발하게 하신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고 구원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스라엘을 생각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신 애굽을 같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한 국가를 건설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악한 세상에 참된 생명을 계시하시기 위한 도구로서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계획하신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구원을 보여주는 삶인가를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첫 출발부터 피를 경험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심판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피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을 가져다주는 천사가 문설주에 발린 어린양의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감으로서 살아난 사람들이 애굽에서 빠져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피를 경험한 자들의 모임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죽음의 심판 속에서 피를 경험함으로서 살아나는 체험을 하도록 하십니까? 그것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할 일은 어린양의 피를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속에서 피로 인해서 살아난 경험이 없는 자는 결코 피를 증거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출발부터 피를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애당초의 목적이었다면 구태여 그들을 애굽으로 보내고 400년간 고생하게 하시고 심판을 경험하고 피를 경험하도록 하였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뭔가를 담아서 보여줘야 하는 그릇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담아야 할 내용들을 미리 체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하나님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과 같이 전도하면서 여기저기 교회를 세우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할 일은 다만 심판 속에서 피로 인해서 살아난 체험을 그대로 몸에 담고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신 것은 애굽이라는 국가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애굽의 사고방식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들이 애굽의 사고방식과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생존이 가능했던 것은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라는 지시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지시를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과 비교해서 특별히 다른 나라였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했던 것입니다.

 

 

 

 

약속이란, 한 자손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거룩한 나라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방식에 의해서 거룩한 나라가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흠없는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흠없는 어린양이 애굽 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감으로 함께 죽어야 할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해서 발생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들은 약속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삶을 보여야 했고, 약속을 간직한 삶은 어린양의 피를 의지함으로 확실히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 신자의 할 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자가 해야 할 일,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자로 부르시고 교회로 모이게 하신 것은 우리를 그릇으로 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담아서 전달하는 역할로서의 그릇입니다. 그 일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신약에 와서는 교회를 뜻합니다. 따라서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하는 것은 인간들의 기준이나 상식을 기준으로 해서는 안되고 구약에서 무엇이 참 이스라엘이었던가를 밝히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애굽과 이스라엘의 구분이 피에 있었던 것만큼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의 구분은 역시 피 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과연 그리스도의 피를 담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외형적인 모습이나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담고 있어야 할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설교하는 교회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늘 십자가를 담고 십자가를 드러내고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가 해야할 일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분명히 세상으로부터 구별될 수밖에 없습니다. 흠없는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과 애굽을 구별시켰다면 그리스도의 피는 세상과 신자를 구별합니다.

 

 

 

 

1,2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믿는 자를 그냥 '신자' '자녀'라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의 자녀' '여호와의 성민' '자기 기업의 백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들은 여호와의 자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상 만민 중에서 택함 받은 자가 여호와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때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닫혀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너무 무디어져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은혜, 새로운 사랑이 아니라 낡고 퇴색되어진 은혜요 사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젠 더 이상 더럽고 악한 우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셔서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은혜와 사랑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순수함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굳어지고 무디어진 그런 상태로서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감각이 무디어져 갑니까? 그 이유는 자신을 선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나는 신자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못박고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백성으로 삼으신 은혜가 반복될수록 은혜에 대한 마음이 굳어지고 무디어지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못박고 하나님께 나오시면 안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될 자격이나 있습니까? 한 주간의 삶속에서 자녀 됨을 과연 얼마나 보여주며 삽니까? 그런 우리가 어떻게 떳떳하게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큰소리치며 하나님께 나올 수가 있습니까? 때문에 우린 항상 우리를 자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나올 때, 그토록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사랑과 은혜로서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함으로서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가 아닌 자로 나왔다가 자녀가 되어 돌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녀 아닌 자가 자녀된 그 배경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될 수 있었던 것은 흠없는 어린양의 피 때문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된 것은 흠없는 어린양의 피가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과 같이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가치 있고 귀한 존재라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언제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증명됩니다. 따라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을 선물 받을 자로 택하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믿음을 이해한 신자는 '내가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역시 주님을 믿는 믿음이 나에게 주어진 것을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라는 뜻으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주어진 것을 귀하게 여길 때 내가 여호와의 자녀 되고 거룩한 백성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귀한 복을 받은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실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보다 한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들이기 때문에 변함없이 교회로 부르셔서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살지 못한 우리의 허물을 발견하게 하시고,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신 이 모든 것들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확인할 때 그 사랑은 어제의 사랑이 아니라 오늘 깨달은 새로운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들이 모두 생략된 채 '나는 자녀다'라는 생각 아래 맹목적으로 교회에 나오고 돌아가 버린다면 그속에서 새로움이 없는 것은 극히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이미 자녀 됨에 대한 은혜와 사랑이 무디어지고 상실된 신자아닌 신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녀답게 산다는 것이 귀찮고 부담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다면 분명히 자녀로서의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별입니다. 애굽의 심판이 애굽적 사고방식을 행한 심판이었다면 이제 이스라엘은 애굽적 사고방식과 대치된 관계에서 살아가야 한 것입니다. 그것이 구별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산다는 것은 믿음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거꾸로 살고 세상의 상식과 반대로 산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조롱 받을 수밖에 없는 비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녀의 삶을 자녀 됨에 대한 사랑과 은혜와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요구할 때 과연 그들이 순종하겠습니까?

 

 

 

 

그러면 여호와의 성민으로 구별되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본문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의 이마의 털을 밀지 말라'고 말합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살을 베는 것이나 눈썹 사이의 이마의 털을 미는 것은 모두 가나안 민족의 풍습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이 풍습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산 사람이 뭔가 하는 것은 가나안 사람들만의 풍습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들은 살을 베지 않고 눈썹 사이의 털은 밀지 않지만 다른 형태로 죽은 자를 위하는 것은 있습니다. 제사를 드린다거나, 묘를 잘 쓰기 위해서 터를 보는 것이나, 귀신을 달래기 위해서 무당을 부르는 것들이 다 죽은 자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 사람이 굳이 죽은 자를 위해서 뭔가 하는 그 이유는 죽은 귀신들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있는 자신들의 일이 잘되기를 원해서입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인생의 헛됨을 깨닫고 헛되지 않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에서의 자기 인생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죽은 귀신의 도움을 받으려고 죽은 자를 위해서 뭔가 하는 것이 곧 우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죽은 자를 위해서 살을 베지 말고 털을 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행위에 대한 금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세상에서 헛되지 않은 인생으로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 되이 사는 것은 세상은 헛되고 쓸데없는 것임을 알고 헛되지 않은 영원한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마음이 채워지기보다는 헛된 세상의 것으로 살아가는 신자아닌 신자는 여호와의 성민으로 산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피흘리신 사랑으로 내 손잡고 가실 때 그 사랑에 끌려가는 기쁨을 아는 사람은 세상은 헛되다, 이 땅의 마지막은 죽음 뿐이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에게는 평안이고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참으로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성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날마다 먹는 음식에까지 성민의 모습을 담아 놓는 조치를 하십니다. 3-21절까지 보면 음식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네발 달린 짐승 중에 새김질 못하고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은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새김질 못하는 것은 다시 태어남이 없는 것이고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은 구별이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중에는 비늘 없는 것은 먹지 말라고 합니다. 비늘 없는 물고기는 땅에 밀착되어 살아가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이 역시 성도에게 있어야 할 구별의 모습을 가리는 것입니다. 새중에서는 땅에 있는 죽은 시체를 즐겨 먹는 새는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땅의 더러운 것을 취한다면 그것은 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곤충 중에서도 땅으로부터 뛰어 오르지 못하는 것은 먹지 말도록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구별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먹으라고 하신 것은 이것과 반대의 의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땅에서 살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살 사람이다. 땅의 것이 힘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 우리 힘이다'는 것을 항상 새기면서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성민의 구별된 삶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을 교회에서만 보지 말고 날마다 집에서도 보는 것입니다. 날마다 집에서도 말씀을 대함으로서 '나는 하늘에서 살 여호와의 성민이다' 는 것을 되새기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는 삶에 게으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모든 생활 속에서 '나는 여호와의 성민이다'는 의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린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피 때문에 성민될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내는 삶에 모든 힘을 기울어야 합니다. 이런 의식으로 산다면 나에게 돈이 없어도 괜찮고 남이 무시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그분이 우리를 '너는 나의 거룩한 백성이다'라고 하셨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 신자는 세상에서 어떤 힘든 일을 당한다고 해도 굳건하게 살아갈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말씀을 통해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는 여호와의 성민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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