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내용!! 강해!!

[스크랩] 민수기 강해 1

하나님아들 2014. 11. 20. 00:09

 

 

 

 

 

 

민수기 강해 1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1강. 민 1:1-19 싸움꾼 97.2.9 주일오전 설교


지난 주일 새벽에 예배당에 오기 위해서 집에서 택시를 탔습니다. 그런데 청구 사거리에서 우회전 차선에서 직진을 하려고 하던 한 승용차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던 사람을 칠뻔 했습니다. 그러자 제가 타고 있던 택시 기사가 대뜸 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직진할 차가 왜 우회전 차선에 서 있노. 저건 인간도 아니야' 제가 듣기에 좀 민망할 정도로 심한 욕을 하는 것입니다. 그 욕을 들으면서 저는 제 나름대로 '아하 이 운전수는 교통법규를 잘 지키려고 애를 쓰는 분인가보다 그래서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은 사람을 보면 화가 나나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은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동신교를 건너 회전이 금지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동신교에서 좌회전을 하면 예배당이 무척 가까움)버젓이, 아주 당당하게 좌회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순간의 황당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그 택시기사에게는 남이 차선을 위반하는 것은 인간도 아닌 짓이 되고 자기는 차선을 위반해도 괜찮은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을 아십니까?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는 최대한으로 관대해지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못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사람은 남의 죄는 잘보는데 자기의 죄는 보지를 못합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행동을 해도, 그 사람은 죄를 지은 것이고 자신은 그때 형편과 사정이 어쩔 수 없어서 하게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이해하실 것이라고 관대하게 넘어갑니다. 이렇게 자신은 자신에 대해서 관대하게 넘어가는데 만약 남이 꼬투리를 잡고 시비를 걸면 당장 하는 말이 '당신이 내 사정을 알고나 하는 말이냐?'고 공격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은 남의 사정은 전혀 돌아볼 줄 모르고 책망하기 바쁘고 욕하기 바쁩니다. 이것이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과 싸우는 삶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싸우는 삶은 없이 항상 남의 잘못만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비판을 일삼고, 용서를 하지 못하고, 결국에 신앙생활은 자기 자신만 잘하고 있는 줄로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분명 자신이 왜 교회를 다니는지, 예수님을 왜 믿어야 하는지 분명한 그 이유를 모르고 신자라는 이름을 걸치고 있게 됩니다. 남의 티나 눈에 들어오고 자신에 대해서는 볼 줄을 모르는데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물론 '천당가기 위해서'라는 대답은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것은 세상 사람도 다 압니다. 세상 사람을 붙들고 '저 사람들이 왜 교회갈까요?'라고 물어 보십시오. '천당가려고 교회가겠죠.'라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을 알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교회로 모인다는 우리들만큼은 그 빈약한 대답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물론 천당가는 목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천국으로 인도받기 위해서는 과정이 있습니다. 천국으로 인도받는 자에게서 보여져야 할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진심으로 천국이 소망으로 되어 있다면 그자에게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전혀 없이 단지 '천국가기 위해서 교회나온다'라고 해버릴 것 같으면 그야말로 놀고먹다가 천국 가겠다는 고약한 심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돌아봅시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수많은 세월을 교회를 다녔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다면 과연 무엇에 목표를 두고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왔고, 무엇 때문에 기도하면서 살아왔습니까? 여기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내리기가 곤란하시다면 여러분은 단지 막연하게 천국만 생각하고 교회에 다녔을 뿐이지 여러분을 교회로 부르신 하나님의 마음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신앙을 평가절하하거나 무시하고자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오늘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민수기가 바로 그런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제가 우리들에게 있는 문제점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 버리고 민수기를 들여다본다면 여러분은 민수기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의 티나 들여다보고 비판이나 하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교회다녀주는 것으로 다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헌금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열심을 원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신 것은 한마디로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라'는 말을 거꾸로 하면 무슨 말입니까? '너는 인간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인간이냐, 인간이 아니냐는 말은 외형적인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잠시 창세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진짜 인간의 모습이 나옵니다. 진짜 인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형상을 지닌 인간입니다. 즉 죄짓기 전의 아담과 하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형상에 대한 설명은 복잡하니까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신학공부 시간이 아니니까 그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냥 간단하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기를 원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런 인간이 죄를 짓고 나자 맨처음 잃어버린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짜 인간의 모습인 '형상'입니다. 따라서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정상적인 인간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 그것이 바로 정상적인 인간이 아닌 모습입니다. 결국 외형을 가지고 인간이다, 아니다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상적인 인간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 우리가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실현시켜 볼만한 세상으로 보십니까? 물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꿈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열심히 일해 볼만한 곳으로 보여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아는 신자라면 분명 이 세상은 잘못된 세상으로 비춰지게 될 것입니다. 정상적인 세상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세상이 아니라면 그런 세상은 싫어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렇다면 결국 기대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또한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여지지 않는다면 자신은 그런 인간의 모습에서 벗어나고자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애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인간은 자연히 언제나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고 마음을 다해서 목숨을 다해서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께 두기보다는 세상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자체가 바쁜 세상을 중심으로 살게 되고, 세상이 흔들리면 나도 흔들리고, 세상이 불안하면 나도 불안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안심하고 하나님만 믿으라'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교회는 다닌다고 주일이면 예배당에 나와 앉아있으니 설교를 들어봐야 나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이해되지 않는 말로 그쳐버리고, 그냥 흐리멍덩하게 앉아 있다가 돌아가 버리는 그런 세월을 살아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신자들의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이 문제가 여러분께 있습니까? 있다면 오늘 우리는 분명한 결정을 해야 합니다. '나는 어떤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가?' 여러분, 비정상적인 인간이라도 좋으니까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잘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다음 주일부터 당장 교회에 나올 필요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시면 됩니다. 열심히 일하면 돈은 벌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사는 것이 소원이시라면 여러분은 이제부터 저와 함께 민수기의 여정을 걸어가시면 됩니다. 민수기를 한발자국씩 걸어갈 때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으로 자라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가만히 놀고 있는데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싸움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민수기는 레위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레위기를 마치고 바로 민수기를 설교했으면 이해가 좀 더 쉬울 것인데 순서가 좀 엉망이 된 것 같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레위기가 어떤 책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레위기란 한마디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거룩한 백성의 삶의 법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백성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들만큼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계명대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비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소유되어서 신자된 너희들만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 바로 레위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싸움이 필요한데 그 싸움이 어떤 싸움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 민수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기의 말씀을 하신 후에 모세에게 인구조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인구조사를 하는 목적은 싸움에 나갈 군사를 뽑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인구조사를 하는 기준이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모든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싸움꾼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 한평생을 싸움만 하고 살아가는 운명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해서 신자가 놀고먹다가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싸움을 하다가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싸움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서 천국에 가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만약 천국을 그렇게 갈 수 있다면 우리가 이시간 교회로 모일 이유가 없습니다. 네가 이렇게 핏대 올리며 설교 해야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천국은 싸워서 이긴 자가 가는 것임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신자들은 엉뚱한 싸움에 휩쓸려서 살아갑니다. 세상의 싸움에 휩쓸려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싸워야 할 싸움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세상의 싸움에 휩쓸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세상의 싸움이란 어떤 싸움입니까?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아지고, 더 성공하기 위해서 경쟁하는 것입니다. 남보다 적게 가지고 낮아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존심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시기하고, 미워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비정상적인 세상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싸워야 할 싸움은 어떤 싸움입니까? 싸움이란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싸움의 적은 나외에 다른 모든 사람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싸움의 적은 바로 나의 자존심입니다. 우리가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든 원인이 인간의 자존심, 자아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싸움의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습니다. 그 적이 지금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내 자존심입니다. 포기되지 않은 내 자아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부추기는 것, 이것이 바로 내 안의 사단입니다. 그래서 레위기에 등장하는 거룩한 백성의 모습의 기준은 모두 인간의 자존심이 포기되어진 가운데서 드러날 수 있는 삶에 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에 잘못된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십자가를 말하고 천국을 말하면서도 포기하도록 가르쳐야 할 자존심을 오히려 한껏 부추겨 놓고 있습니다. 누구는 헌금을 잘한다, 누구는 봉사를 잘한다고 하면서 인간의 자존심을 한껏 올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 나올 때 자신이 죄인임을 알겠습니까? 전혀 알리가 없습니다. 죄인임을 안다면 헌금잘하고 봉사잘하고 구제잘하는 죄인이겠죠.

 

 

 

 

때문에 저는 목사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어느 한 개인을 칭찬하면서 다른 사람을 자극하는 것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칭찬이 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뭔가 좋은 일을 하고서 누군가의 칭찬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다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편에서 여러분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사람의 칭찬이 귀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칭찬이 귀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사람의 영광을 바라고 하는 것은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여러분은 그 적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만약 적을 모르면 우리는 엉뚱한 적을 적으로 오인하고 그 적과 싸운다고 필요없는 힘을 낭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남들은 기도를 하루에 한시간 하는데 나는 10분도 못한다라고 생각될 때 거기에 자극을 받아서 자신도 하루 한시간 기도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쓸데없는 싸움입니다. 필요없이 힘을 낭비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의 신앙 자존심이 일으키는 문제인줄은 모르고 엉뚱한 것을 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적은 기도를 얼마 하느냐, 헌금을 얼마 하느냐, 전도를 몇 명했느냐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존심입니다. 그 자존심이 여러분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힘들게도 하고, 남을 미워하게도 하고, 시기하게도 하고, 인간관계를 힘들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세상으로 당하는 모든 문제들의 내면을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자기를 버리지 못한 자존심이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신자된 여러분이 예배당에서나 어디에서든 서로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때 절대 세상의 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많이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서 상처를 입은 지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의 것을 적게 소유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체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남이 세상 것을 자랑했다고 해서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면 그것 역시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자존심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 말씀드리면 우리의 적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가를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내 안에 있는 이 적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하고, 남을 미워하도록 하고, 시기하도록 하고 세상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내가 이길 수 없는 적입니다. 너무 강한 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이 적과 싸울 싸움꾼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싸움꾼은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의 힘은 내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힘입니다. 무엇이 힘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말씀입니다. 레위기에 말씀된 거룩한 신자의 삶의 모습에 대한 계명이 힘입니다. 내 모습은 비정상적인 모습임을 알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정상적인 모습을 가르쳐 주고 있는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 안의 내 적이 나를 어떻게 끌고가는 가를 언제나 눈치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을 싫어하며 하나님께 나를 맡기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 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자의 힘이란 한번 받으면 몇 달씩 계속 지속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40일 금식기도 한번 한 것을 가지고 평생을 우려먹기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단의 모습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40일 금식기도 한번 했다고 하나님의 능력이 저절로 주어지지도 않지만 설사 주어졌다고 해도 그 힘이 평생토록 지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힘이란 말씀 안에서 날마다 공급받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자신의 적을 발견하고, 자신에 죄에 대해서 회개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그리워하면서 현재의 자신을 미워할 때 그것이 곧 싸움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 싸우며 사시기 바랍니다. '누가누가 더 잘사나' '누가누가 더 기도 많이 하나' '누가누가 더 봉사 잘하나' 이런 싸움 말고 자존심이라는 마귀와 싸우십시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의 모습이 싫어서 죄와 멀어지기 위해서 싸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을 항상 소망하십시오. 이것이 참으로 성숙된 신자입니다.

 

 

 

 

 

2강. 민 1:47-54 은혜 97.2.16


지난 시간에 저는 뚜렷한 목적도 없고 ''라는 물음도 없이 교회에 다니는 현대교인들의 세태를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어떻습니까? '오늘 내가 왜 교회를 나가야 하는가?'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하시고 그 답을 분명히 내리시고 나서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여러분을 이 자리에 앉아있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아시고 계십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이 부분에 대해서 그토록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내려놓고 있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나가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가장 문제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생각할때는 참으로 잘한 일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정작 하나님 편에서는 전혀 기뻐하실 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교인들의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들 좋은 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자기들 좋은 대로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도 성경에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좋은 대로 마음대로 바꾸어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도 자기들 식으로 이해해 버립니다. 이런 와중에 십자가가 제대로 존재하겠습니까? 십자가도 자기들 좋은 대로 마음대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 '우리 선교단체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라고 떠들고 있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관이겠습니까? 설교도 내 마음에 드는 말이면 은혜있는 설교가 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면 설교가 잘못됐다고 여겨버립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자기를 위한 기독교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해야 하고, 나를 사랑하면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도와주어야 하고, 기도하면 응답해주어야 하는 나만의 하나님을 갖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그 이유를 무시해 버리고 하나님을 찾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그 나라가 여러분의 소망이라면 이러한 모습들은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종교적인 모습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물로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왜 자기들을 부르셨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해야 할 진짜 일을 잊어버리고 다른 이방 나라사람들과 똑같이 자기들을 위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하나님이 자기들을 도와주고 지켜주실 것만을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은 유월절 피의 정신이 흐르는 특이한 나라를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유월절 피의 정신을 보호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피의 정신을 담아서 보여줄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선택한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자기들을 위해서 존재하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유월절 피의 정신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소홀해진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지키고 보호하시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부름 받은 도구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모든 일은 바로 이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절대로 나 개인의 행복과 세상의 복을 위해서 나를 부르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뜻에는 무관심하면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사랑하니까 나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이것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모르면서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에 불과합니다. 이런 하나님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제가 가장 한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가 하나님을 믿는자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으면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라고 떠드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뭔가 세상에서의 일이 자기 생각대로 조금만 잘 풀려도 그것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갖다 붙입니다. 하지만 세상 일 잘 풀리는 것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서만 보여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서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 그들은 누가 사랑했기 때문에 일이 잘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성경이 어떻게 말하느냐 입니다. 내 생각에 맞느냐 안맞느냐는 것은 절대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애당초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는 전혀 맞지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성경이 맞다 안맞다라는 판단을 내리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서 하나님을 찾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온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버리지 못한채 하나님을 찾습니다. 내 교회를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왜 나를 성도로 부르셨는지 그 이유는 무시되어 버리고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고, 내 교회를 부흥시켜주는 하나님 정도로만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멸망당한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상적인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란 하나님으로만 기뻐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인간이 되고 싶다고 해서 우리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싸움에 나갈 준비를 위해서 모든 지파에게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계수에서 제외되는 지파가 있습니다. 그들은 레위지파입니다. 레위 지파는 싸움말고 성막을 지켜야 하는 일이 주어졌습니다. 레위인이 할 일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도록 성막의 사면을 둘러싸고 지키는 것입니다. 53절에 보면 "레위인은 증거막 사면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고 합니다. 레위인의 역할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레위인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지만 여기서 간단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레위인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증거막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증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누구든지 가까이 오는 자는 죽인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과 함께 하실 수 있습니까? 바로 레위인 때문입니다. 레위인이 증거막의 사면을 싸고 있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야 할 사람이 누군가 때문에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 은혜를 알려면 무엇을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야 할 사람들이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레위인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내가 잘나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레위인 때문에 살아있음을 알아야 레위인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레위인을 바라보려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신을 먼저 봐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어야 할 죄인임을 보지 못한 자는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싸움꾼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싸움에 나갈 계수함을 입은 자의 총계가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들의 숫자를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바라보아야 할 것은 지금 누구 때문에 자신들이 살아있느냐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기고 지는 것은 자기들의 실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위인 때문에 이스라엘이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는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죽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다른 은혜를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받을 수 없는 은혜를 이미 입고 있으면서도 다른 은혜를 달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은혜를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에 담겨 있는 은혜를 무시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아는 자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절부터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세상에서 뭘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서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을 보여주는 삶이란 어떻게 사느냐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지 무엇을 하느냐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보다는 '무엇을 하느냐'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고, 자랑을 할만한 일을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증거하는 삶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자기를 내세우는 삶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분명히 세상적인 조건을 놓고 따져볼 때는 웃을 수 없고, 기뻐할 수 없고, 감사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차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과연 이 세상에 세상 것을 가지고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갈 인간이 누구겠습니까? 세상 것을 가지고는 절대로 웃을 수 없고 감사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욕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 것을 통해서 기쁨이 있기를 원하고 감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언제나 기도하지 않습니까? 결국 세상에서 뭔가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고 살아가는 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좋은 일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뜻을 포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아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마음한쪽에는 여전히 나를 잘되게 해주시는 하나님, 나의 일을 도와주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분명히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따르지를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살리는 것은 그들의 힘도 군사력도 아니듯이 오늘날 우리를 살리는 것은 돈도 아니고, 우리의 노력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살리고 있습니다. 우린 날마다 은혜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을 자랑하지 않고, 예수님의 피를 자랑하고 전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의 삶입니다. 오직 은혜로만 기뻐하며 감사하고 살아가는 자 되는 것이 신자의 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그 사람은 신자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린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이미 죽은 자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서 포기하지 못한 자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은혜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돈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만으로 부족합니까? 이것으로 부족해서 자식이 대학에 합격하는 은혜를 구하고, 직장에서 승진하는 은혜를 구하고, 좋은 집을 장만하는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까? 그런 것들을 은혜라고 누가 말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은혜를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한 은혜는 모두 자기의 뜻을 포기하지 못한 인간들이 만들어 낸 가짜 은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피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3강 민 3:5-13 레위인 97.2.23


요즘 젊은 사람들이 어른을 모시고 사는 것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어른과 함께 사는 것을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른이 집안에 있으면 모든 중심은 어른입니다. 어른을 중심으로 집안이 움직입니다. 음식을 해도 어른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해야 합니다. 어디 놀러를 가고 싶어도 어른의 눈치가 보여서 마음대로 가지를 못합니다. 날마다 어른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고 잘못이 있을 때는 어른의 책망도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 어른을 모시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혹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어른을 모시고 살게 되었다면 어른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 간섭 안하고, 해준 대로 먹고, 귀찮게 안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의 삶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을 모시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른을 모시므로 인해서 주어지는 혜택 때문에 모시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맞벌이여서 아이를 맡기기 위해서랄지, 아니면 재산이 많아서 지금 잘 모시면 나중에 재산을 물려받을 때 유리할까봐서 모시려고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세태 속에서 진심으로 어른을 모시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는 지금 우리 나라의 윤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 모습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비꼬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잘못이 있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책망도 받고,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많은 신자들은 자기를 위한 삶을 버리지 못한 채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자기의 삶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게 잘못됐다, 저게 잘못됐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는 간섭을 싫어합니다. 내 삶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나님은 주는 용돈이나 받고 가만히 있으라는 식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즘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간혹 환경이 나빠지거나 하던 일에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하시느냐고 불만과 원망을 터뜨립니다. 그러다가 일이 잘되면 입이 벌어지면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떠듭니다.

 

 

 

 

자식이 부모를 멀리하는 것은 자신이 누구로부터 왔는가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아니었다면 나도 없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부모를 무시하거나 함께 사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고 자기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은 신자된 내가 누구로부터 온 자인가를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자입니다. 신자는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믿고 싶어져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부르셨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주님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부름 받지 않았는데 스스로 주님을 믿는자는 없습니다. 물론 스스로 교회에 나온 자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단지 종교인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들 스스로가 그런 자를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판단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일은 마지막 때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갈 때 신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 은혜를 모르면서도 신자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것을 너무 무시하고 삽니다. 부름 받았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가도 되는 것으로 멸시합니다. 동창회 모임이나 계모임은 절대 빠질 수 없어도 교회는 얼마든지 형편에 따라서 빠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만약 교회에 빠질 때마다 천둥이 친다거나, 집안에 일이 생긴다면 빠질 마음이 나겠습니까? 교회에 빠져도 아무 일이 없으니까 안심하고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교회에 빠질 때마다 무슨 일이 있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자가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교회에 빠질 때마다 몸이 아프게 한다거나 문제가 생기게 할 때 두려워서 교회에 나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억지로 나오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직장을 다녀도, 사업을 해도, 교회를 나와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서 움직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선택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부름받을만 해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부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부름 받았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꼭 무엇을 생각하느냐면 하나님은 일꾼을 불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불렀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놓고 그냥 놀고먹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부름 받은 신자로서 할 일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일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위해서 뭔가를 하는 일꾼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을 하려고 하면 꼭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일꾼을 찾습니다. 전도 잘하는 일꾼, 봉사 잘하는 일꾼, 교회일 열심히 하는 일꾼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 일꾼이라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일꾼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일꾼입니까? 아니면 단지 교회라는 사람들의 단체를 위한 일꾼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목사를 위한 일꾼입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일꾼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어디 능력이 없어서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꾼을 부르셨겠습니까?

 

 

 

 

하나님은 교회 부흥을 기대하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구제나 하고 선교나 하라고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제발 구제하고 선교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신자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포도원 품꾼 비유가 나옵니다. 천국을 품꾼을 부르신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부를 때 포도원을 위해서 일할 일꾼을 부르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일할 사람을 불렀다면 아침 일찍이 정한 수요만큼 부르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5번씩이나 불렀고, 마지막은 일이 다 마칠 시간에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품꾼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나 이런일 저런일 많이 했습니다'는 자랑이겠습니까? 애당초 일을 기대하고 부르신 것이 아니니까 그런 자랑은 주인의 마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마음을 가장 잘 안다면 놀고 있는 자기를 불러준 주인의 긍휼과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애당초 하나님은 일꾼을 부르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자기의 일을 내세우게 되면 먼저 부름 받은 품꾼같이 부름 받은 긍휼과 은혜는 무시해 버리고 자신의 일의 양을 내세우며 그만한 대우를 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말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가 왜 부름을 받았는가를 잘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레위인을 택한 이야기입니다. 7절에 보면 "그들이 회막 앞에서 아론의 직무와 온 회중의 직무를 위하여 회막에서 시무 하되"라고 말합니다. 레위인은 아론의 제사장 일도 담당하며 또한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즉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해야 할 일은 레위인이 특별히 뽑혀 나와서 대신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레위인을 바라보고 그 레위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했던 것입니다. 즉 레위인이 희생하고 섬기는 그 모습이 바로 자기들이 희생하고 섬겨야 할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앞에 레위인을 세워 놓으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레위인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레위인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희생을 배우고 섬김을 배우는 것입니다. 결국 레위인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기준입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정상적이지 못한 모습을 깨달아라고 우리 앞에 정상적인 모습을 가진 한 분을 세워놓으셨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앞에 완전한 제사장, 레위인으로 서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우리의 희생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섬김이 우리의 섬김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당장 반발을 할 것입니다. '목사님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같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삽니까?' 예, 맞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 것을 기대하고 우리 앞에 예수님을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알아라는 것입니다. 내딴에는 헌신한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헌신을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고, 섬긴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섬김을 보니까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남을 위해서 희생한다고 했는데 예수님을 보니까 내 희생은 그야말로 태양 앞에 반딧불보다 더 보잘것없는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라면 뭔가 했다고 해서 교만한 것이 아니라 좀더 주님의 마음으로 살려고 애를 쓰지 않겠습니까?

 

 

 

 

12,13절에 보면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이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합니다.

이 말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빠져나올 때 있었던 마지막 재앙은 장자 재앙입니다. 모든 처음난 것은 다 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만은 죽음을 면했습니다. 어린양이 죽음을 대신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린양이 대신해서 살아난 자를 가리켜서 처음난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린양을 레위인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어린양의 희생을 레위인이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레위인의 희생 때문에 생명을 얻은 자, 그자를 처음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처음난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생명을 얻을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부름 받은 것이 귀한 이유는 마지막 때 살아나는 처음난 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안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희생, 섬김이 나를 살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가지고 기뻐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자기를 대신해서 희생하는 어린양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는 레위인을 뽑아서 어린양의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누구를 들어서 어린양의 자리를 대신합니까? 그자가 바로 부름 받은 자입니다. 여러분 이제 하나님께서 왜 여러분을 부르셨는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을 양의 자리, 즉 십자가의 자리에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양의 희생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살리신 하나님이, 레위인의 희생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살리시고, 이제는 뽑혀 나온 자를 통해서 누군가를 살리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리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자리에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한 일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보여주는 십자가의 자리에서 사는 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 자가 바로 레위인입니다. 레위인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자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갈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레위인을 보면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신자는 바로 이러한 역할을 위해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역할을 감당하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4강 민 4:46-49 레위인의 봉사 97.3.2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을 다루는 법을 터득해 갑니다. 그중에 하나가 아이들이 싫어하는 일을 스스로 하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에게 약을 먹일 때, 또는 병원에서 주사를 맞힐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안하려고 한다고 해서 윽박지르면서 매를 들고 먹으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어이구 우리 ⼑⼑이는 약도 잘먹지, 옆집에 ⼑⼑이는 약도 못먹는다더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말도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해도 꼭 들어가는 것은 아이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는 이것도 못한다더라는 말을 함으로써 '아하 내가 이것을 하면 다른 아이보다 더 잘하는 것이 되는구나'는 생각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자기가 하기 싫은 일도 칭찬과 나는 다른 아이하고는 다르다는 차별의식에 힘입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나를 인정해 줄 때 더 잘하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이 나를 인정해주는 일에는 신바람이 나서 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항상 칭찬받고 대접받고 인정받는 자리에 있기를 원합니다. 반대로 남이 나를 인정하지 않고 대접하지 않을 때는 반발을 하게 됩니다. 뭔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대접을 받게 되면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를 못합니다. 그러다 결국에 하는 말은 '교회가 왜 이러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교회를 나오는 신자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교회를 나오게 되면 교회는 그리스도를 배우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교회를 통해서 어떤 유익을 얻으려고 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런 유익을 제공해 줌으로서 자기 교회에 계속 붙들어 놓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레위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우리가 있는 자리는 레위인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레위인의 자리란 한마디로 모든 칭찬과 대접받는 것을 포기한 자리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있는 자리도 아니고 큰 뜻을 품고 있는 자리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부르셔서 있도록 하셨기 때문에 있을 뿐입니다. 레위인의 자리는 그런 자리입니다. 신자다운 모습을 보여 가지고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겠다는 꿈도 없고, 우리 교회를 교회다운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레위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소망도 없습니다. 우리가 레위인의 자리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성도로 부르셨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레위인의 자리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우리가 레위인으로 살아갈 때 일어난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맙시다. 가령 내가 레위인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김과 희생을 보이면 안믿는 남편이 감화를 받아 가지고 교회를 나오게 될 것을 기대한다거나, 직장에서 불신자가 나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다거나, 이런 효과를 기대하고 레위인의 자리에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결국에는 '잘한다 잘한다'하니까 더 잘하려고 애쓰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레위인의 자리란 섬김과 헌신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설교가 좀 어려웠는지 모르겠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레위인이 회막에서 봉사하는 것은 레위인만의 봉사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해야할 봉사를 레위인이 대신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레위인을 보면서 '저 헌신은 바로 나의 헌신이다'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레위인은 이스라엘에게 헌신을 보여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식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인 섬김과 헌신을 보면서 저 섬김과 헌신은 내가 해야 할 일인데 예수님께서 대신하셨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주님의 희생과 섬김이 곧 내가 해야 할 일임을 알고 그 마음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레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도 내가 레위인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말씀으로 점검을 받지 아니하면 자신이 잘못된 자리에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과 자리를 확인하면서 레위인의 자리에서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런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사실 신자는 부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귀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 은혜를 모르고서 신자로 살아갈 수 없지만, 이 은혜를 안다고 해서 그 은혜에 주저앉아 날마다 나를 불러주신 것에 감사한다는 말만하고 있다면 그 역시 잘못입니다. 부름 받은 은혜를 안다면 왜 나를 부르셨는지,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고 그 뜻에 살기를 원하는 것이 진짜 신자된 모습입니다.

 

 

 

 

오늘은 레위인의 봉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린 '봉사'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교회를 위해서, 혹은 형제를 위해서 내가 헌신한다는 생각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내 몸을 쓰고, 돈을 쓴다는 것을 봉사라고만 생각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봉사하라고 하셨다면 그것도 모두 남을 도와주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라고 이해해 버립니다. 물론 봉사는 남을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봉사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봉사를 하면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레위인의 봉사를 좀 다른 시각에서 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서 레위인이 회막에서 봉사하듯 우리도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합시다는 얘기를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봉사합시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당장 '내가 무엇을 해야 봉사하는 사람이 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봉사가 짐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이 있으면 고민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기는 싫은데 안하면 봉사를 안하는 신자가 되고 하자니 싫고 어떻게 해야 하나' 이렇게 봉사라는 것이 큰짐이 되어버리고 고민거리가 되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섬김과 헌신은 짐이 되어서도 안되고 고민거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섬김과 헌신은 그리스도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신자만이 보일 수 있습니다. 봉사가 짐이 되는 경우는 '내가 저걸 안하면 신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때입니다. '내가 저 일을 안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나'이런 생각들이 봉사를 짐이 되게 하고 고민거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미 타인의 시선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의 자유를 잃어버린 상태이고 그런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해봐야 결국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하는 일이 되버립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타인이 자기의 일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을 때 마음에 큰 섭섭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회막에서 일하게 한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봉사를 어떤 정신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린 보통 봉사를 내가 남에게 베푸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즉 내가 해야 하는 일로만 생각하고 그쳐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봉사는 비록 그 일이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남에게 베푸는 것이지만 봉사를 통해서 배우는 자는 둘 다입니다. 앞서 레위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이스라엘은 레위인의 헌신을 보면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레위인은 이스라엘에게 섬김과 헌신을 보여주고 가르치는 것으로 그쳐버립니까? 그러면 레위인은 단지 섬김과 헌신을 보여주는 도구이고 레위인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까? 오늘날 신자들이 봉사를 한다고 하면서 이 부분을 지나치기 때문에 스스로 큰 잘못에 빠져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레위인이 하나님의 부름을 입어서 회막의 일을 명령받았다면, 그리고 그 일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하는 일이고 이스라엘이 그것을 보면서 뭔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회막에서 일하는 레위인도 배울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봉사를 내가 남에게 베푼다는 것만 생각하는데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봉사를 하라고 하신 것은 그 봉사를 통해서 자신이 뭔가를 배우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봉사를 하면서 내가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배우는 것이 없는 봉사를 하니까 자꾸 내가 남에게 베풀었다는 것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랑으로 가게 되겠죠?

 

 

 

 

설교를 할 때 성도들이 버려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나는 다 안다'는 것입니다. '다 아는 얘기를 또 뭐하려고 하나'이런 생각을 가질 때 여러분은 진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설교가 지식을 전달해 주는 것이라면 다 아는 얘기를 하면 안됩니다. 항상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지만 설교란 지식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새로운 것, 들어보지 못한 말을 가르치는 시간이 아닙니다. 나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말씀을 들을 때 배울 것이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가장 많이 받는 유혹은 뭔가 새로운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말을 함으로서 성도들의 인기를 얻어보려고 하는 유혹이 설교할 때마다 있게 됩니다. 다 아는 말을 하면 성도들이 듣기 싫어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말을 하고 들어보지 못한 말을 했을 때 그 결과는 이단으로 빠지는 것이었음을 아십니까? 새로운 말, 들어보지 못한 말은 사이비, 이단에서나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말은 없습니다. 날마다 들어보지 못한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새롭다는 것은 말씀이 나를 새롭게 한다는 것이지 말씀의 내용이 날마다 새롭게 달라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도 새로운 말을 기대하고 나오셨다면 여러분은 이 설교를 들으면서 '다 안다. 아는 얘기를 또 하나. 귀따갑다'라는 생각만 하다가 돌아가게 될 것이고 결국 배우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여러분이 과연 아는 것만큼 살아가고 있습니다. 천국은 지식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잘안다고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박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이 박힌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다 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까? 결국 다 아는데도 말씀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자신을 다시 한번 깨우치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바로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날마다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삶의 환경과 여건들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배우는 교육의 현장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실습현장이라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의 삶의 현장은 결코 여러분의 호의호식을 위한 조건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우기 위한 교육현장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염려와 걱정보다는 이 일을 통해서 나는 성경을 잘알고 하나님도 잘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배도, 기도도, 전도도, 봉사도, 헌금도,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을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배우기 위한 일로 여기셔야 합니다. 평소에 아무일 없이 살 때는 설교에 고개 끄덕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외치고, 걱정 근심하는 사람을 보면 '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나'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어려움이 생기므로 인해서 자기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민수기 4장은 레위인들이 회막의 일을 분담 받는 내용입니다. 레위지파는 고핫자손, 게르손 자손, 므라리 자손으로 구분됩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각각 분담을 시켰습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회막의 기구를 메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단지 회막의 일을 효과적으로 하도록 하기 위해서 레위인의 일을 분담하고 조직적으로 일을 시키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보통 일을 분담할 때는 불평을 하는 자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나는 왜 이런 어려운 일을 맡기느냐' '누구는 귀한 일을 하고 누구는 천한 일을 해야 하느냐'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레위자손들도 각자 맡은 일이 달랐습니다. 똑같이 어깨에 회막의 기구를 메는 일이기는 하지만 누구는 무거운 것을 멜 수도 있고, 누구는 가벼운 것을 멜 수도 있습니다. 또 누구는 증거궤, 상, 등대 같은 귀한 것을 멜 수도 있고, 누구는 널판, 말뚝, 줄 같은 하찮은 것(물론 성막의 기구에 귀하고 하찮은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예배당에 강대상은 귀하고 의자 같은 것은 덜 귀하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과 같습니다)을 메느냐는 불평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적인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선 자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레위인을 일을 위해서 부르지 않았습니다. 레위인들이 회막의 일을 통해서 뭔가를 배우고 그 배운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레위인은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일은 각기 다르지만 서로 다른 사람의 일을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는 것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도록 부름 받은 자라는 것을 평생을 회막에서 일하면서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 교육을 받기 위해서 레위인은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신자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에서의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욕심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섬기고자 힘쓰며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레위인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레위인의 모습을 완벽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결국 자기도 배워가는 것이지요. 내가 이런 일을 해서 남을 가르치겠다는 생각도 버리고 이 일을 함으로서 내가 배운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면 결국 그 사람은 봉사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섬김과 헌신을 배우게 될 것이고, 헌금을 하면서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을 배울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 모습이 열심히 주님을 바라보는 삶으로 보여지고 결국 그들도 주님을 배우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봉사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봉사는 내가 배우기 위한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빠지면 봉사는 결국 자랑으로 나타납니다.

 

 

 

 

회막봉사에 계수함을 입은 자가 8,580명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일에 부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벗어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싸움을 하면서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돈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도 배우고 또 보여주라고 부름 받은 여러분입니다. '다 안다'라고 하지 말고 배우는 일에 힘쓰기 바랍니다. 회막의 기구를 메면서 '우리는 세상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부름 받은 자다'는 것을 배우는 것 같이 여러분 자신도 하나님을 배우고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부름 받았다는 것을 배우십시오. 봉사를 하면서 배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봉사를 하도록 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노력을 가지고 남을 도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 이만큼 되었다는 것을 배우라고 봉사를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봉사합시다. 봉사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갑시다.

 

 

 

 

 

5강. 민 5:1-4 쫓아냄 97.3.9


군대를 갔다오신 분들은 훈련이나 어떤 작전을 나가기 전에 반드시 했던 '군장검열'이라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군인이 훈련을 나갈 때는 '몇 월 몇 시에 훈련 떠난다'는 말 한마디만 해놓고 정해진 날이 되면 곧바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떠나기 전의 준비가 매우 엄격합니다. 훈련을 위한 지침이 위로부터 하달됩니다. 즉 그 부대의 총책임자로부터 훈련을 위한 모든 준비단계가 하나하나 지시되고 그 지시사항에 따라서 제대로 준비되어있는지를 살피는 것을 '군장검열'이라고 합니다. 군장검열의 목적은 효과있는 훈련을 위해서입니다. 훈련에 방해되는 것들은 모두 없애야 합니다. 아무리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라도 부대의 총책임자인 대장이 지시한대로 따라야 하며 훈련에 방해되는 것이라면 가지고 가서는 안되고, 훈련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군장검열을 할 때는 암기해야 할 것을 묻기도 하고, 훈련에 방해되는 것 예를 들어서 술을 몰래 가지고 가는지, 또는 소형라디오를 가지고 가는지, 만약 대간첩 작전이라면 담배 라이터, 이런 것들을 검열하게 됩니다. 훈련이나 작전에 방해가 되고 해가 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훈련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군인다운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군인다운 군인이 되어야 실제 전쟁에서 잘 싸울 수 있기 때문에 연단과 군인의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군대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것은 오늘 본문이 바로 그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민수기를 시작하면서 전쟁, 즉 싸운다는 것에 대해서 맨 처음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싸움꾼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을 위한 준비가 10:10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진을 칠 때는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게 하시고 3,4장에서는 이스라엘 지파가운데서 레위지파를 부르셔서 그들이 성막에서 해야하는 일을 분담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부터 보면 우리의 대장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싸움을 위한 출발에 앞서서 군대로 출발하는 이스라엘이 어떤 자세로서 싸움에 임해야 하는가를 지시하는 하나님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앞에서 말한 대로 '군장검열'이라는 의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군대는 그 부대의 최고 지휘관이 요구하는 정신이 있고 자세가 있습니다. 밑의 지휘관은 오직 최고 지휘관의 요구에 따라서 부하들을 가르치고 다스려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요구사항이 모세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최고 지휘관의 요구사항을 무시해 버리고 밑의 지휘관이 자기 멋대로 자기의 생각을 전달하고 가르쳐 버린다거나 모든 군인들이 각기 자기 하고싶은 대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분명히 온전한 군대가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군대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 군대의 최고의 지휘관은 하나님입니다. 최고의 지휘관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 뭔가를 지시하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군대의 모습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본문을 통해서 생각할 것은 한 개인보다는 교회에 원하시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대 자체가 개인이 아니라 교회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이나 오늘의 교회가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이 곧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요, 이스라엘이 드러낸 잘못이 곧 우리에게서 보여지는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통해서 오늘날 진짜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이 아니면 그 교회는 교회도 아니며 하나님과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는 건물에 십자가가 달려있다고 교회되는 것이 아닙니다. 건물에 십자가를 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또 모여서 찬송하고 설교 듣는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도 얼마든지 찬송 부를 수 있고, 성경도 보고 설교도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런 식으로 교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이 있고, 목사가 있고, 성도가 있고, 조직이 있고, 찬송이 있고, 기도가 있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종교로서 교회되기 위해서는 그것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그런 것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되는 기준은 성경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엄격하게 성경을 기준 삼아서 성경에서 틀린 모습에서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은석교회는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모습인가를 점검해보는 아주 중요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에게 참으로 곤란하고 부담이 가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2절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모든 문둥병 환자와 유출병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를 자 진 밖으로 내어 보내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자는 교회에서 쫓아내라는 말씀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쫓아낸다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쫓아낸다는 것은 교회안에서 성경과 전혀 다른 이단사상을 퍼뜨리면서 교회를 혼란시키고 분열시킬 때와 같은 상황에서나 해당되는 정도이지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어지간한 것은 다 덮어버리고 쫓아내기는커녕 어쨌든 한사람이라도 더 붙들려고 애를 쓰는 것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한명이라도 더 늘려 보려고 총동원 전도주일을 수시로 하면서 교회에 오는 사람 시계도 주고, 수건도 주고, 컵도 주면서 한명이라도 더 모아보려고 발버둥치고, 내 교인 다른 교회에 안뺏기려고 먼 곳으로 이사를 가도 그곳까지 차를 보내면서 내 교회로 나오도록 붙들어 보려고 애쓰는 것이 교회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닙니까? 이런 교회에서 오는 교인을 쫓아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은석교회는 어떻습니까? 쫓아내는 교회입니까? 아니면 '목사님 교인수도 적고 전도도 못하는데 오는 교인이나마 잘 붙들어야죠'하면서 '믿음은 어쨌든 좋으니까 내 교회만 나와다오'하는 그런 교회입니까? 만약 이런 교회라면 은석교회는 오늘 당장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뭔가 돌이키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쫓아내는 것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2절에 보면 어떤 사람을 쫓아내도록 되어 있습니까? 문둥병자, 유출병자, 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시체를 가까이 한 자)는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정한 자입니다. 부정하다는 것은 생명에서 멀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과 상관없이 죽음 안에 있는 자는 이스라엘이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진에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과 상관없는 자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진, 즉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결국 교회가 교회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생명을 기준으로 생명 아닌 것은 다 나가라고 할 때입니다.

 

 

 

 

반발이 생깁니까? 하지만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교회의 부흥이나 건축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이나 건축은 사람의 소망이고 욕망이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교인수 많다고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예배당 건물있다고 천국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천국과 상관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입니까? 인간의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하나님의 요구로 교묘하게 바꾸어 놓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는 생명되는 것 외의 나머지 것에는 관심 두어서는 안됩니다. 한마디로 십자가에 외에 나머지 것에는 관심 두지 말자는 것입니다. 고전 2:2절의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는 말씀과 같이 은석교회가 오직 그리스도와 십자가외에는 아무것도 관심두지 않겠다는 믿음으로 모일 때 비로소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이는 거룩한 이스라엘로, 거룩한 교회로 모여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십자가외에, 생명외에 관심을 두는 것은 교회를 망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누구 하나라도 그리스도께 생명외에 다른 것을 원하고 나오신 분이 있으시다면 저는 그분은 은석교회에서 나가주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다 나가버리면 어떻하느냐는 걱정이 듭니까? 여러분, 설사 은석교회 교인이 한사람도 없어서 은석교회가 문을 닫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교회도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됐지 왜 자꾸 은석교회에 관심을 두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타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는 내교회에 관심을 둠으로서 일어난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여러분 마음에 드는 설교를 하는 교회로 가셔도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교회의 모습인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혹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교회에 나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교회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교회라는 의식 때문에 설교도 마음에 들지 않고 불만이 가득차있는데도 불구하고 쉽사리 다른 교회로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런 잘못된 틀 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중심으로한 삶의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무론 남녀하고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어 그들로 진을 더럽히게 말라 내가 그 진 가운데 거하느니라"고 하십니다. 부정한 자를 진 밖으로 쫓아내야 할 이유는 진안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진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중심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교회이기 때문에 더러운 것은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깨끗한 것은 뭐고, 더러운 것은 뭐냐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에는 오늘 본문 그대로 문둥병자도, 유출병자도 없습니다. 또 시체를 가까이 했다고 교회를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말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런 의미로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말하는 부정한 것의 의미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나님의 교회가 용납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문둥병자나 유출병자에 대한 규례는 레위기에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문둥병자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을 수 없는 병입니다. 만약 나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즉 문둥병자는 이스라엘 모두가 문둥병자와 같이 부정한 자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함을 입었음을 보여주는 도구이고, 유출병자도 마찬가지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가 다 더럽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유출병자가 만지는 것까지 다 더러워진다고 하셨고, 그런 유출병자가 깨끗해지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깨끗함을 입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빠져서는 안되는 것이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깨끗함과 더러움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이 세상에 더럽지 않고 깨끗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 밖으로 쫓겨가야 할 문둥병자, 유출병자, 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이 바로 하나님에게서 쫓겨가야 할 더러운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진 밖으로 쫓겨가는 그들을 보면서 '우리는 깨끗하다'는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저들과 같은 더러운 자인데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하나님이 거하시는 진안에 있다는 것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을 중심으로 은혜로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진의 모습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우리들도 의인들이 아니라 더러운자,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바로 진 밖으로 쫓겨가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누가 대신 쫓겨남을 당했습니까?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질고를 담당하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에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대신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질고를 짊어지실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히3:12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쫓겨남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깨끗함을 입고 지금 이렇게 하나님의 진안에 거하는 거룩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진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깨끗케 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무시하고 자기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 곧 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교회에서 쫓겨남을 당해야 할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이 쫓겨남을 당해야 할 모습이 아닌가'라고 살펴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바로 거룩한 교회에서 쫓겨나야 할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관심 두어야 할 것은 생명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살면서 마음에 번민이 생기고 염려가 생기고 걱정속에 빠지고 하나님도 믿기 싫고 교회도 나가기 싫은 마음이 드는 이유는 은혜를 바라보지 않고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이고, 생명에 관심 두지 않고 여러분의 생활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항상 자기를 보고 살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 힘든 것만 생각하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염려와 걱정에 빠져있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해결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십시오. 교회를 나가지 않는 것이 해결책이라면 얼마든지 안나오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아신다면 우리의 배후에서 일하시고, 우리의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도움을 구하십시오. 해결해달라는 도움이 아니라 '염려와 걱정에 빠져 있는 자를 용서하시고 제발 나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자가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러한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했는데 좋은 것을 구하는 자에게 어떻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제 쫓아낸다는 것에 대해서 정리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내어 보내라는 것은 어느 한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서로 감시하는 입장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본문에서 쫓아내라는 것은 죄인된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케 되었음을 무시하는 사고방식을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함을 입었음을 고백하는 자들이 모이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교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심을 항상 인식하며 모이는 교회는 절대로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의 힘을 자랑하고, 약자를 무시하는 사고방식은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반대되는 인간적 사고방식을 쫓아내는 설교가 중단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자기를 바라보고 살면 조금만 어려우면 낙심하고 염려하고 모든 일에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이 바라보고 관심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생명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렇게 하기가 힘듭니까? 당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은혜를 무시하는 옛사람의 모습은 쫓겨나가고 우리를 깨끗케 하신 은혜만을 바라보는 자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신자를 외면치 않으시고 성령을 통해서 일하시며 힘을 얻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6강. 민 5:5-15 하나님의 사람으로 97.3.16


지난 시간에는 여러분께 약간 부담이 될 수도 있고 뭔가 껄끄럽게 들릴 수도 있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내어쫓는 것이라는 말씀이 현대 교회의 정서에는 맞지 않는 말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에 하나 여러분의 기존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각 속에 갇혀 있는 하나님에 불과하게 되고, 그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하니라 여러분이 상상해서 만들어낸 하나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날마다 상상 속에서 수많은 것을 만들어내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것을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욕망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고 싶고, 이루고 싶고, 소유하고 싶은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그 욕망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만약 인간이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이루고 싶고 소유하고 싶은 것들이 현재 자신에게 주어져 있지 않을 때 상상속에서 그것들을 마음대로 누리고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환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환상 속에서 세상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환상이 인간을 죄로 이끌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마 10대나 20대의 남자들은 대개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 같은데, 버스나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될 때 흔히 어떤 상상을 하게 됩니까? 내 옆자리에 누가 앉을까에 대한 상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상은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혹시 예쁜 여학생이 앉으면 어떻게 말을 걸어 가지고 계속 사귈 수 있을까라는 상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상상에 빠져 있을 때 그 사람은 자연히 버스에 올라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예쁜 아가씨가 올라오면 '혹시 내 옆자리에 오는 것은 아닌가'라며 가슴 설레다가 다른 자리에 앉아버리면 실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상속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께 무엇을 부탁하겠습니까? '하나님 제발 내 옆자리에 예쁜 여자가 앉도록 도와주세요'라는 기도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결국 상상 속에 빠져 있던 이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자신의 상상을 현실로 이루어 주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한 예를 말씀드렸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마귀가 여러분에게 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면 자연히 상상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상을 현실을 이루어줄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는 항상 쫓아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그 말이 듣기에 거북했다면 그 이유도 결국은 은석교회에 대한 여러분의 상상, 환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니는 은석교회가 100명, 200명으로 점점 부흥이 되가지고 예배당도 멋있게 짓게 되는 상상이 있었기 때문에 내어쫓아야 한다는 말이 거북스럽게 들려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있는 교회 부흥은 명목은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부흥입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한 교회 부흥입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주장을 한다고 해도 이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환상을 철저하게 몰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은석교회에 대한 환상이 있다면 버리셔야 합니다. 아무리 선하게 보이는 환상이라도 그것은 인간의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님, 그러면 좋습니다. 교회 부흥에 대한 환상은 잘못이라고 해도 구제를 많이 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러한 생각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것도 환상이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모습의 교회냐를 보시는 것이지 어떤 일을 하는 교회냐는 것을 보시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진이 가지고 있어야 할 모습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고 그것이 10:10절까지 이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 뒤에서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은 병이 났을 때 낫게 해주시고,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멀리 계시다가 달려와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루 세끼 밥먹고 평범하게 직장 다니면서 생활하는 그것도 모두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열심히 살면서 주어지는 것을 가지고 거기에 맞게 사용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입이 적으면 구제를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없으니까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가난하면 때로는 하나님께 원망이 나오게 됩니다. 가난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가난한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이만큼 사는 것도 하나님이 도우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뻐하며 감사하고 산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으로 많은 구제를 한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아는 이 마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자기보다 약한 자를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주님이 허락하신 마음입니다.

 

 

 

 

은석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적든 많든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심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채우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으로 존재하면 되는 것입니다. 은석교인이 한명이든 두명이든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 모여서 예배드린다면 그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어쨌든 교회로 불러와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야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면서 그래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느냐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로 부르시는 것은 성령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허락하신 여건과 형편 속에서, 그 형편이 아무리 최악의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변함없이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이것도 못하면서 뭘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까?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은혜로 살지도 못하면서 누구에게 무엇을 전도하겠다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할 일은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서,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웃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전도하는 놀라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사람과 같이 세상을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세상을 살아가면 무엇을 보여주겠습니까? 신자는 비록 세상 사람과 함께 이 땅을 살고 있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즉 다르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다르게 사는 것인가를 가르치시는 것이 바로 10:10절까지의 말씀이고 바로 오늘 본문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더러운 자들을 내어보내야 할 이유가 진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진 가운데는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중심입니다. 제가 전에 집안에 어른을 모시고 사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집안에 어른이 있으면 모든 것은 어른 중심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도 어른이 싫어할 때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어른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어른에게 용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어른을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은석교회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은석교회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공경하는 것은 우리하고 싶은 대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우리의 생각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의 생각에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도 하나님이 그 가운데 거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눈치 보아야 할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 물어야 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사람은 항상 어리석은 생각만 하게 되어 있고 썩어질 세상에만 관심을 두게 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하나님 나라는 아예 마음에 두지도 않고 살아갈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은 무엇입니까? 언제나 우리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압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신앙생활의 어려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언제까지라는 기약이 없다는 것이 우리를 어렵게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현실에 대한 조급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환상 속에 빠져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환상을 현실로 바꿔줄 하나님만 바라보기 때문에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진 가운데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같이 거하는 모든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진안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배후에 계십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돕는 자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웃을 바라볼 때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까? 저 이웃의 배후에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안에 함께 거하는 이웃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이웃에게 범죄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범죄 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죄를 하나님이 갚으십니다.

 

 

 

 

본문 5-10절까지 보면 누군가에게 죄를 범하면 그 죄값을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해서 갚아주라고 명령하십니다. 만약 죄값을 받을만한 친족이 없으면 죄 값을 여호와께 갚아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죄값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오분의 일을 더해서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도 남에게 피해를 입혔으면 갚아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피해액수만큼 갚지 오분의 일을 더해서 갚아주지는 않습니다. 설령 더 많이 갚는다고 해도 그것은 미안함 마음 때문이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오분의 일을 더해서 갚아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제가 방금 말씀드리기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진안에 계시는 모든 백성의 배후에서 후원자로 계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웃을 해하는 것은 후원자이신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고, 그 죄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갚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때문에 시기심에서 아벨을 죽이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누구의 편으로 등장합니까? 아벨의 편에 서서 가인의 죄를 묻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벨의 편입니까? 아벨이 착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벨은 세상의 죄로 인해서 최초로 피해를 입은 자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언제나 세상 죄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 자의 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세상의 죄로 인해서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이것을 안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나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모임입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분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런 우리들의 모임 속에서는 세상 죄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입고 상처를 입는 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의 시기심 때문에, 나의 미움 때문에, 나의 말 한마디 때문에 억울하게 상처를 입고 피해를 입은 자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범했거든, 즉 나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이 있거든 오분의 일을 더해서 갚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분의 일이라는 것은 '우리는 세상의 죄가운데서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안에서는 세상 죄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자가 일어나면 안되는데 나의 죄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자가 발생했구나'는 것을 깨닫고 피해입은 자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랑으로 살아가라고 오분의 일을 더해서 갚아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 때문에 누가 피해를 입고 상처를 입었는가를 항상 살피면서 살아가십시오. 신자의 관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관계이지 세상 죄로 인해서 서로 피해 입히고 상처는 주는 관계가 아닙니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인간관계를 교회에서 보이면 안되는 것입니다.

 

 

 

 

미움이 일어난다고 미워해 버리고, 시기가 일어난다고 시기해 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향한 미움이 있을때, 시기가 있을때 그분의 배후에 누가 계시는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구원을 받은 내가 이웃을 미워함으로 여호와께 범죄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달라져 가는 것입니다. 세상 죄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입고 상처를 입은 자가 발생하지 않는 교회라면 그것이 진실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진입니다. 세상의 더러움을 쫓아내는 진의 모습입니다. 큰 교회 되는 것을 사모하지 마시고 이런 교회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1-31절까지 나오는 의심받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내가 부정하여서 남편이 아내를 의심하든지 아니면 아내가 부정하지 않았는데도 남편이 아내를 의심하고 있든지 그 의심을 제사장에게로 가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부정하게 되었을 때는 남편에게는 무척 큰 상처가 됩니다. 하지만 부정하지도 않은 아내를 의심하였을 때는 아내된 여인에게 큰 상처가 됩니다. 그러면 그속에서 누가 약자입니까? 누가 세상 죄로 피해를 입은 자입니까? 어느 쪽이든 상처를 입은 자입니다. 아내가 부정하였으면 남편이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부정한 일도 하지 않았는데 아내를 의심한다면 이 역시 아내가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간이 판단하지 못합니다. 누가 억울한 자인지 인간이 그 속을 모르는데 어떻게 압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16절부터의 이야기는 성막 바닥의 티끌이 어떤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억울함은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억울함을 당한 자의 편에 서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이 부정한 일을 했으면 그 여인은 백성의 저줏거리가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인이 부정한 일을 하지 않았으면 아무런 해를 받지 아니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도 하나님은 누구편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자의 편에 서 계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뭔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억울한 자의 편에 서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항상 억울한 자의 입장에서, 약자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두움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랑을 보이는 자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살려고 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7강. 민 6:1-8 나실인 97.3.23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과 같이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익된 것은 받아들이고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거부하는 습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습성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고 나에게 유익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유익은 영혼이 잘되게 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육신에 손해를 입히기도 하고, 괴로움을 주기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항상 육의 문제는 영혼이 잘되는데 걸림돌로 등장하기 때문에, 육이 곧 장애물이요 걸림돌인 것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 육을 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과 육이 동시에 다같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때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영과 육을 동시에 잘되게 하시기 위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육이 잘된다는 것은 곧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를 의미하는데,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못박아 두고 계십니다. 이러한 말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하나님께 나와서 복을 요구하고 성공을 요구하는 것은 도대체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입니까 말겠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교회가 이러한 말씀을 교묘하게 이용을 해서 재물을 섬기는 것을 교회에 바치지 않는 것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건축을 하는데 왜 헌금을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집을 짓는데 돈을 아끼는 것은 재물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재물을 아끼지 않고 헌금을 하고,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축복하셔서 만 배나 갚아주신다"고 말합니다. 재물에 욕심을 내지 말라고 해놓고 헌금하면 만 배나 갚아주신다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까 욕심을 가져라는 것입니까?

 

 

 

 

전혀 앞뒤가 맞지 않고 모순되는 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여기저기서 외쳐지고 있는데 한심스럽고 답답한 것은 그 말을 듣는 성도라는 하는 사람들이 그것이 잘못인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전혀 아닌 것이 말씀으로 위장되어 전파되고 있는데도 그 말에 속고 있습니다. 속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나오는 목적부터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오고 말씀을 듣는 목적이 주님을 찾고 주님을 배우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복과 세상의 평안을 찾기 위해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해주는 소위 축복 받는 비결, 기도응답 받는 비결, 성령 충만의 비결, 이런 사이비와 다를 바 없는 엉터리 말에 속아넘어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전혀 구분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참된 것을 거짓이라고 몰아붙이고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환영하는 것이 지금 이세대의 어두운 모습입니다.

 

 

 

 

목회자는 또 어떻습니까? 교회성장에 미쳐있습니다. 예배당 건축이 일생 일대의 꿈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사들의 입에서 어떤 말들이 나올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주님께 관심을 두고 나오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들이 아니라, 자기의 꿈과 욕심에 관심을 둔 자기의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가 여기저기 쫓아다니는 세미나도 개척교회 1년만에 몇백명 모았다는 목사가 강연하는 '교회 성장 세미나', 또는 교회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세미나 등입니다.

 

 

 

 

도대체 교회를 인간의 재능과 기술로 키워보겠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는 불신앙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불신앙을 넘어서 하나님을 팔아먹고 있는 사이비와 같은 작태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교회가 개척한지 2-3년 안에 100명을 넘지 못하면 그것은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과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는 신학교에는 '교회성장학'이라는 신학도 아닌 괴상한 학문이 가르쳐지고 있고, 몇 년 전부터는 '다락방 전도학교'라는 단체까지 생겨서 교회 성장을 열망하고 있는 목사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교회 성장에 관심을 두고 계셨다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늘 새벽예배의 본문이었던 요17장의 예수님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 기도에 과연 교회의 부흥이나 신자된 자들의 세상적인 축복이 언급되고 있습니까? 주님의 기도는 곧 주님의 관심이 무엇이었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느냐는 것도 기도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장에 관심을 두고 있으면 성장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고, 건축에 관심이 있으면 건축을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편히 살고 행복하게 사는 것에 관심이 있으면 세상의 복을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주님의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관심이 아니다는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과 상관도 없고, 하나님과 상관도 없고, 단지 종교 단체에 불과하면서 '나는 괜찮은 신자'다 '우리교단은 괜찮은 교단이다'고 착각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주님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찾고 주님만을 높이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교회입니다. 은석교회라는 조직을 위해서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기 위해서 주님을 찾는 교회가 주님이 함께 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이익을 위해서 주님을 찾고, 교회라는 단체를 위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결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교회를 위해서 주님이 계시지는 않습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높이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신자로 세움 받았지 신자된 자를 위해서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이제 우리의 운명이 뒤바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에는 세상이 전부인줄로 알고 오직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자였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한 진에 포함된 사람으로 부름 받은 뒤에는 내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운명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옛사람이 새사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옛사람으로 살던 때와 같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생각하고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항상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사람의 모습입니다.

 

 

 

 

새사람으로 부름 받은 신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으로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인가는 여호와의 진이 가져야 할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린 지금까지 거룩한 진은 더러운 것을 쫓아내야 하고, 하나님은 모든 자의 배후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나의 세상 죄, 즉 옛사람의 모습으로 인해서 피해를 입고 상처를 입은 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나실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주님께 관심을 두지 않고 신앙생활하는 교회와 신자들에 대해서 비판을 했지만, 사실 본문의 나실인이 어떤 존재인가를 안다면, 또 하나님은 우리가 나실인으로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껍데기만 있는 허울좋은 신앙생활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나실인은 히브리어로 '구별된 자'란 의미의 말입니다. 6장에서도 '자기 몸을 구별하여'라는 말이 12번이나 강조되어 나오는 것을 볼 때 나실인은 구별된 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기록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나실인의 삶을 통해서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나실인은 하나님이 정해서 뽑아 세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원하면 나실인으로 살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지만 나실인으로서 사는 삶이 결코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거나 즐거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실인은 자신이 기간을 정해서 나실인으로 구별된 삶을 살게 되는데 그 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뭔가 큰 축복이 주어진다거나 하는 약속도 없습니다. 나실인으로 살다가 그 기간이 끝나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다른 혜택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나실인으로 사는 것이 결코 수월한 것이 아닙니다.

 

 

 

 

나실인은 금지 사항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해야 합니다. 심지어 포도즙, 건포도, 생포도도 먹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머리에 삭도를 대면 안됩니다. 즉 머리를 깍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죽은 시체를 가까이 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나실인이 지켜야 할 규례입니다. 결코 쉬운 규례가 아닙니다. 그런데 나실인으로 살겠다고 서원한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자기의 이익과 탐욕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강조하는 것들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축복을 위해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대가를 바라고 자기를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 어려운 나실인의 삶을 살겠다고 자청하여 나서겠습니까? 대가도 바라지 않고 철저하게 구별된 삶을 살겠다고 나선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 외에는 없으리라 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관심을 두고 살기 때문에 나실인으로 자원하여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린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나를 여호와께 바치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주로 신학교에서 많이 쓰여집니다. 다시 말해서 목사가 되는 것이 자신을 여호와께 바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여호와께 바친다'는 말도 자식을 신학교 보내서 목사로 만들겠다는 의미로 쓰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몸을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은 목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선교사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는 것도 아니라 세상과 구별되이 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인생을 살지 않는 것, 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 내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롬 12장에 나오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의 의미도 세상과 구별되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몸을 내 몸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로 여기고 사는 것, 이것이 거룩하게 사는 것이고 여호와께 내 몸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나실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나실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도 앞서 말한대로 구별이었습니다. 포도와 관계된 것은 모두 끊어야 합니다. 포도는 이스라엘의 주식입니다. 가장 좋은 음식입니다. 가장 좋은 음식을 끊는다는 것은 세상의 좋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머리를 깍지 않는 것도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죽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은 생명과 연관이 없는 것은 가까이 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모 형제가 죽어도 장례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결국 나실인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부모 형제로부터 까지 멀어져야 하는 고통과 어려움의 삶입니다. 이렇게 삶으로서 나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나실인을 통해서 하나님께 자신이 드려진 삶, 하나님께 헌신된 삶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단이 설치고, 사이비가 설치고, 교회 아닌 교회가 설치는 이 어둠의 시대에 우리는 나실인에게서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나실인의 삶을 외면하고서는 신자로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구별이 없이 자신을 여호와께 헌신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헌신이란 돈 바치고, 내 노력을 바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신이란 구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기 때문에, 나는 내 마음대로 안산다. 내 하고 싶은 대로 안한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이런 헌신이 없이 우리는 신자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나실인의 구별을 단순히 세상적인 것을 안한다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를 들어서 노래방을 세속적인 것으로 생각해서 노래방에 가지 않고, 유행가 부르지 않고, 영화관에 가지 않고, 술 담배 안하는 것들을 구별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래방에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다른 것을 통해서 즐거움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유행가를 부르지 않아도 복음성가의 자극적인 음률을 통해서 유행가의 즐거움을 충족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노래방가고, 유행가 부르고, 술. 담배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것쯤은 이제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나실인의 구별은 세상을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나실인으로 살겠다고 자원한 사람은 세상에서 주는 즐거움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기쁨과 즐거움을 알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 다 하는 것 못해봤다고 해서 억울하다는 마음은 들지 않을 것입니다. 부자로 살지 못한다고 한탄할 필요도 없고, 내 교회 부흥 안됐다고 애가 탈 이유도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 대신이 이미 하나님의 기쁨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탄해야 하는 것은 세상 것을 누리지 못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좀 더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한탄해야 하고, 형제끼리 좀 더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두고 애가 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여러분들은 세상과 구별된 길로 나아가고 있는 자임을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13절부터 보면 나실인으로 서원한 기간을 무사히 마쳤을 때 행할 규례가 나옵니다. 나실인이 서원한 기간을 마치게 되면 예물과 함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18절에 보면 자기의 머리털을 잘라서 제물로 드리는 것이 나옵니다.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라고 합니다. 머리털은 나실인으로 살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그 머리털을 잘라서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사람의 신체의 일부가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이 나실인의 제도뿐입니다. 즉 자기의 헌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나실인을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찾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실인 되시는 분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완벽한 나실인입니다. 세상에서 온전히 구별된 삶을 보이시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나실인 되라는 말을 감히 드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나실인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드릴 말씀은 나실인의 삶을 통해서 뭔가를 배우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보여야 할 신앙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관심두고, 자신에게 관심 두고 살기보다는 주님께 관심 두고 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헌신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실인 되신 그리스도안에서 나실인의 모습을 보이는 삶입니다. 결국 오늘날 나실인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시고자 하십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죄 용서를 위해서 자신을 헌신시키는 모습을 보시고자 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을 찾기 위해서 나오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향해서는 나실인이 되십시오. 우리는 세상의 재미가 없어도 이미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진 자들입니다. 세상 것이 없다고 억울해 하지 마시고 '내가 과연 나실인의 모습을 지닌 헌신된 자로 세상을 살아가는가'를 끊임없이 살피십시오. 이것이 나실인 되신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8강. 민 6:22-27 축복 97.4.6


교회가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타락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은 '구별'의 명령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를 철저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서로 섞이고 타협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에도 하나님은 가나안의 모든 거민을 다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거민의 생활풍습과 사고방식을 따라서 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만의 특성이 있는데 그 특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의 희생을 통해서 만들어낸 거룩한 모임입니다. 이스라엘이 거룩하다는 것은 이스라엘로 모인 사람들이 뭔가 다르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이스라엘 되게 한 어린양의 피가 거룩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거룩하게 여김 받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구별이었습니다.

 

 

 

 

레위기 11:44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규례대로 하면 이스라엘은 땅에 기어다니는 것만 멀리 하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별이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아닌 사람들은 땅에 기어다니는 것도 음식으로 먹는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먹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구별되게 살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교회는 구별을 단지 이런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의 규례는 신약에 와서는 사라졌기 때문에 구약대로 음식을 가지고 구별되게 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규례도 단지 규례를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단순히 땅에 기어다니는 것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규례의 의미를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규례의 의미를 모른 채 규례를 지키는 것은 구별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레위기 11장에는 음식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구분하시고 더러운 것을 먹지 말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전에 레위기 설교할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더럽다는 것은 동물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동물들의 특성이 구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더럽다고 하신 것의 공통점은 모두가 땅에 밀착해서 살아가고, 땅과 하나가 되고, 하늘을 날면서도 땅의 썩은 것으로 살아가는 것들입니다. 반면에 깨끗하다고 하신 것은 모두가 땅에서 벗어나 있거나 땅에서 하늘로 뛰어오르는 것들이고, 굽이 갈라짐을 통해서 하나가 아니라 둘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암시하는 등, 세상과 구별을 의미하는 것들을 깨끗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레 11:44절에서 땅에 기어다니는 것으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신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더럽다고 하신 것은 어떤 특정한 동물들이 아니라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과 하나가 되어서 살아가는 그 사고방식 자체를 더럽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것은 세상과의 구별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어린양의 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고, 지금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무엇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 사람과 구별되었다'라고 생각합니까? 보면은 거의 모두가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으로 구별되었다고 여기는 옛날 이스라엘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규례의 의미는 무시하고 행동만을 가지고 구별을 자랑했듯이 오늘날도 행동만을 가지고 구별되었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 예배드린다는 것,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 이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구약에서도 세상과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구별을 요구하신 것 같이 오늘날도 세상과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구별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과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상식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결국 세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 의식이 있다고 해서 구별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구별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과 같은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절대로 구별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의식이 신자와 불신자로 구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에는 자기들의 종교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형태는 다르다고 해도 자기들이 믿는 신 앞에 나와서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경배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종교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배만이 아닙니다. 기도나 헌금이나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기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소원을 말하고, 자신의 정성으로 제물(헌금)을 바치는 것도 동일하고, 자신의 종교를 보급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신을 전파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다르다면 각기 부르는 신의 이름이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부르는 신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구별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종교가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엇을 요구합니까? 복을 원합니다. 절간을 찾는 사람들이 부처 앞에서 두 손 모아 비는 것이 무엇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팔공산 갓바위를 찾아가서 빌고 또 비는 것이 무엇입니까? 조상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후손들은 무엇을 빕니까? 신을 받았다고 하면서 작두 위에서 춤을 추면서 굿을 하는 무당들이 비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그리고 기도원을 찾아서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이 비는 것이 무엇이며,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헌금바치는 자들이 하나님께 비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여기에 대한 구분을 할 수 있겠습니까?

 

 

 

 

승려들이 큰절간의 주지를 맡는 것이 소원인 것과 목사들이 큰 교회의 당회장이 되고 싶은 것이 소원인 것과, 일반 사람들이 직장에서 높은 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과 다른 것이 뭡니까? 승려가 자기 절에 찾아오는 불자가 많아지고 돈도 많아져서 큰절간을 짓고자 하는 것이나, 목사가 교인 수 늘려 가지고 큰 교회 짓고자 하는 것이나 사업하는 사람이 사업 번창시켜 가지고 큰 회사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크게 되고자 하는 세상의 욕망 속에 빠져 있기 때문에 비록 종교의 모습은 다르지만 추구하는 바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구별이 아니며 세상의 사고방식 그대로 살아가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고방식이 같기 때문에 추구하는 바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갓바위를 찾아가든 하나님을 찾아가든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 모습이 같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는 것이나 갓바위를 찾아 기도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세상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를 못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통해서 구별을 보이겠다는 것입니까? 오늘 주제가 축복입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고 바라는 축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기 전에 장황하게 구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지금 기독교의 모습에는 전혀 구별이 없다는 것을 주지시켜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기독교적인 종교의식이 있는 것으로 '나는 신자로서 구별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시라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언젠가 '사랑한다면'이란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가 있었습니다. 불교 집안의 아들과 기독교 집안의 딸이 서로 사랑하게 되고 결혼함으로서 오는 종교 갈등을 주제로 삼은 드라마인데, 부처를 믿는 할머니가 그 아들과 손자에게 '부처님을 믿으면 부처님이 우리를지켜주신다'고 하니까 그 아들이 하는 말이 '세상에 부처 믿는 사람이 잘되고 하나님 믿는 사람이 잘되면 나머지 사람들은 다 못살아야 하는데 그래도 잘만 삽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복을 말할 때 세상의 것이 우리에게 풍족하게 주어지고 아무 탈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복이라고 여깁니다. 복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아마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상식일 것입니다. 더구나 복에 대해서 아주 집착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라 하면서도 어디에서도 세상과 다른 구별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모습들로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2주일 전에 저는 나실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실인은 한마디로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린 사람입니다. 나실인이 자기 몸을 구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몸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은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관심은 자기 몸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좀 더 풍족하게 좀 더 많은 것을 누리며 편안하게 살아볼까에만 모든 목적을 두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데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실인으로 사는 것만이 세상에서 구별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을 산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축복입니다. 23절에 보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라고 말합니다. 나실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뒤에 축복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축복은 나실인 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바친 나실인 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23절에서 나실인을 위하여 축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하라고 하시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은 나실인으로 살아야 할 존재들이며, 나실인같이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린 자만이 하나님의 복안에 거하는 참된 이스라엘임을 가르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복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 했다고 해서 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복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대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복을 생각할 때 '내가 받는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합니다. 그러나 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복아래 내가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것을 복으로 잘못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7절에 보면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합니다. 제사장 마음대로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해야 합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소위 축복권이라는 것을 가지고 교인들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려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제사장은 단지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자이지 제사장 마음대로 복을 주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출 20:24절을 보겠습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말합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해놓고 그곳을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번제와 화목제는 무엇입니까? 제물의 희생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희생이 있는 그 곳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고, 하나님은 그 위에 강림하셔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일을 기념한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기념하는 것인데, 기념하는 그 자리가 바로 제물의 희생이 있는 곳이라면 결국 제물의 희생 그 자체가 바로 여호와를 보여주는 일이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그 위에 복이 강림한다고 하셨으니, 결국 여호와의 복은 여호와를 보여주는 희생이 있는 곳에만 강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온전한 희생제물이 되셨고 누가 온전히 여호와의 희생을 보여주셨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는 제단이었고, 예수님 자신은 제단 아래서 여호와의 희생을 보여주시며 죽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복은 희생 제물 되신 예수님에게 강림하였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복이 되시며,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만이 여호와의 복 아래 거하는 것이 됩니다.

 

 

 

 

'아이고 복잡해라!' 복잡하고 머리 아프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복이 되시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복이 되신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니까 복의 의미가 세상과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복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으로 이미 복을 받은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로 이미 우리의 마음이 부요한데 또 무슨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로 부요한 자는 더 이상 세상의 것이 복으로 보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세상에 욕심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희생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그것이 곧 축복이 된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희생의 모습이란 곧 나실인의 모습을 의미한다는 것도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헌신하는 상태에 있는 나실인 된 자를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며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자는 나실인의 모습으로 희생과 헌신의 자리에서 구별되게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복 아래 거할 참된 신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복은 교회에 나온다고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나실인같이 희생과 헌신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 진짜 나실인의 모습을 보이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예수님에게 강림해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복을 찾지도 기대하지도 마십시오. 오직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 복안에 거하는 길입니다. 거짓된 복을 찾아 헤매이지도 마시고 참된 복을 누리십시오.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도 얻을 수도 없는 복이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신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실인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희생과 헌신의 자리에서 여호와를 기념하며 살기를 애쓰신다면 세상의 일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대로 하나님은 그런 신자를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함께 흘러가며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며 거꾸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미련하다, 어리석다는 조롱과 업신여김이 쏟아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좋아서 노래하고 즐거워하며, 그리스도로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복을 소유한 자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9강. 민 7:1-11 장막안의 세계 97.4.13


지난 시간에는 축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축복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공과 발전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정반대인 희생과 섬김의 자리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복은 온전한 나실인의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에게 강림하여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리하신 희생의 자리에 우리도 함께 하는 것만이 곧 복안에 있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복의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어떤 잘못에 있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장막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장막은 하나님이 출애굽기에서 모세에게 만들라고 지시하신 장막입니다. 출 40:17절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장막을 만들었는데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과 연결되어지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장막이 이스라엘에게 왜 주어졌는지 그 이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장막은 제물의 피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를 드리면서 자기들의 죄로 인해서 제물이 피를 흘리고 죽는 것을 봐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장막이란 이런 의미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필하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단 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라고 말합니다. 즉 장막을 거룩히 구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라고 하신 장막이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장막 외의 장막은 다 더럽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장막에만 함께 하십니다. 그 외의 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세우신 장막만이 거룩합니까? 희생의 피가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장막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일만이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거룩한 장막에서 일어나는 일과, 거룩하지 못한 장막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떻게 다르냐는 것입니다. 장막이 거룩하다는 것은 장막을 지은 재료가 거룩해서 장막이 거룩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장막에 기름을 바르고,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서 거룩히 구별했다고 하지만 기구 자체가 거룩해서 기름을 바른 것이 아닙니다. 장막이 거룩할 수 있는 것은 장막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입니다. 즉 희생이라는 일 때문에 장막은 거룩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장막 밖에서 일어나는 일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 봅시다. 장막 밖은 세상입니다. 그리고 장막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신자의 모임, 즉 교회라고 합시다. 우리는 교회를 거룩하다고 합니다. 왜 교회가 거룩한 것입니까?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거룩합니까? 아닙니다. 교회 밖의 세상과 뭔가 다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그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섬김과 희생입니다. 세상과 다른 정신으로 사는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남에게 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고, 자랑하고,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남을 누르는 것을 쾌락으로 삼으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결과로 자연히 약자들이 눌림 받고 업신여김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희생이 없는 장막 밖의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장막에서는 자기는 비참하게 되고 피흘리면서 남을 살리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막을 거룩하다고 합니다. 세상은 불의가 판을 치고 있지만 하나님의 장막 안에서는 정의가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모였습니다. 스스로 세상 사람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천국 가고 너희는 지옥 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뭘 믿고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모스 5:24절에 보면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라고 말합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즉 이스라엘에 공의도 없고 정의도 없다는 것입니다. 공의가 무엇이고, 정의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공의, 정의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치를 바로 세우고, 민주화를 이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누군가가 비참한 일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이웃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을 약자로 알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웃을 자기보다 약한 약자로 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공의이고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모여서 예배드린다고 교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아모스 5:21절부터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절기를 지키는 것을 미워하고 멸시하며, 성회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제사도 받지 않으시고 제물도 돌아보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찬송 소리도, 악기 소리도 듣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의가 없고 정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과시하고 약자를 업신여기는 불의를 행하고 있으면서 절기 지키고 성희를 드린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바로 이것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이런 성경 구절을 볼 때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하기사 애당초부터 여호와의 법을 세우고 여호와의 정의를 물같이 흐르게 하기 위한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오직 내교회 크게 만들어서 나도 힘좀 써보자는데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눈에 보일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깨달아가기 위해서 힘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만 힘쓰고 있으니 성경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겠습니까? 그런데 거짓된 목사가 가고 있는 망하는 길로 교인들도 함께 가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막 안의 세계는 장막 밖의 세계와는 전혀 다릅니다. 장막 안의 세계는 자기의 본 모습을 피흘리고 죽어 가는 제물을 통해서 바라보는 세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재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사회적인 지위, 재물, 이런 것에 자신의 모습들이 치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 속에 있는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을 치장하고 있는 것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자신도 역시 비참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건강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건강을 잃어봐야 알고, 지금이 최선의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도 더 힘든 환경으로 빠져들어가 봐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에 내가 함께 달린다는 것은 나의 비참한 모습을 미리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것이 뭐가 있든 상관없이 자기를 과시하지 않고,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입니다. 은혜를 모르고서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은혜라는 말을 많이들 합니다. 그러나 보면 진짜 은혜를 알고서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자기를 과시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건강하다면 이것은 내가 잘나서 건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라고 했을 때 이 사람이 과연 자신의 건강을 과시하고 자랑하겠는가?

 

 

 

 

나는 병들고 고생해야 하는 인간인데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설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입혀졌기 때문이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의 건강을 자랑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금 모습은 여러분의 본 모습이 아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 가운데 함께 하시기 때문에 지금 예배당에 나올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믿음에 대해서 소홀하게 여기고 살아갑니다. 돈버는 세상일에는 땀을 흘리면서 열심을 내고 살아가는데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갑니다. '저 사람이 정말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가?'라는 의문점이 들 정도로 믿음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갑니다. 급한 것은 돈이고, 자식 문제이지 믿음의 문제가 급하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예배당은 꼬박꼬박 나오고 있으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예배당을 나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모이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영광 돌리는 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고 이것이 곧 장막 안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신자로 살아가고 싶으시다면 장막 안의 세계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나는 약하고, 놀림받고, 비참하게 되어야 할 그런 인간인데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안절부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남과 비교해서 자기에게 없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있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생각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돈이 없습니까? 건강이 있습니다. 건강도 없습니까?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지 않습니까.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습니까? 생명이 있지 않습니까? 생명도 잃어버릴 지경입니까? 뭐가 걱정입니까. 하나님을 알았으니 세상의 생명을 잃는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 아닙니까? 이렇게 사는 자가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장막 안에서는 세상의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세상 것을 자랑할 수도 없고 과시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피흘리고 죽어가는 제물을 통해서 저주받은 우리의 비참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죽을 자가 살아있다는 것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져 있기 때문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막 안에서는 장막 밖의 세상의 사고방식이 보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족장들이 예물을 드립니다. 그 예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과 소 열 둘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드린 예물은 레위인에게 주어져서 레위인이 회막 봉사하는데 쓰여집니다. 족장들이 드린 수레와 소는 레위인이 장막의 기구들을 나를 때 사용됩니다. 이것은 결국 레위인들이 회막을 메고 옮기는 것은 그들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이스라엘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레위인이 회막 봉사를 맡았으니까 레위인에게 다 맡겨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수레와 소를 바침으로 우리 역시 장막을 메고가는 일에 동참하겠다는 뜻입니다. 레위인의 일은 레위인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만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은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회막의 일에 참여해야 하는데, 그것은 레위인과 같이 그들도 동일하게 회막을 메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를 제단으로 삼으시고 스스로 제물 되셔서 피흘리신 예수님은 온전한 레위인의 모습입니다. 그 레위인 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신자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똑같은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그 정신에 함께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신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일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말만 하고 있지 실제로 십자가를 지신 그 정신에는 동참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나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알지 못하고서 십자가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수많은 신자아닌 신자들이 자신의 비참한 모습은 보지 못한 채 십자가를 따른다고도 하고, 믿는다고도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것과는 전혀 다른 십자가의 모습들이 교회에서 보여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지 못한 은혜와 감사는 가짜입니다. 이것은 단지 자신에게 좋은 것을 주셨다는 데에 대한 말뿐인 감사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던 것을 하나님이 빼앗아 버리실 때 원망이 나오고 불평을 할 사람들입니다. 좋은 것이 있어서 감사했는데 감사할 좋은 것이 없으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전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예수님의 사도들은 전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했다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면서 세상 것을 자랑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장막 안의 세계와 장막 밖의 세계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장막 안에 거하고자 하면서 장막 밖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장막 안의 세계를 사모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장막 안은 그리스도안을 말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안의 세계와 그리스도 밖의 세계인 세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안에 살기를 원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 밖의 세계를 떠나기를 싫어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안을 원합니까? 세상을 원합니까?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원하신다면 세상에서 발을 빼는 것이 곧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을 가지고 자신을 보면 결코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장막에서 피흘려 죽어 가는 제물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세상의 조건이 좋다고 할지라도 결국 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더러운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 가치를 두지 않게 됩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는 것을 아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내 멋대로 살았고, 내가 나 된 것이 내 힘으로 된것인줄 알았던 것을 용서해 달라고 고백하는 자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막 안, 즉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자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아시려면 우리가 얼마나 힘없고 부족한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에 머무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장막에서 피흘려 죽어 가는 제물을 보면서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이고, 참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10강. 민 8:1-4 일곱 등잔 97.4.20


여러분이 잘 아시는 얘기를 하나 하고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소경 세사람이 코끼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지라 각기 손으로 만져보고 나서 각자 코끼리에 대해서 얘기를 합니다. 첫째 소경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졌습니다. 그 소경이 하는 말이 "코끼리는 굵은 통나무 같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둘째 소경은 코끼리의 코를 만졌습니다. 그는 "아니다 코끼리는 가늘고 긴 막대기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코끼리의 귀를 만져본 셋째 소경이 "아니다 코끼리는 부채같이 납작하게 생겼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소경이 자신은 볼 수 없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단지 손으로 만진 일부를 가지고 마치 전체를 다 본 것처럼 우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세 소경의 잘못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어쩌면 소경들의 잘못 안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는 눈앞에 성경을 펴놓았습니다. 성경을 하나의 거대한 코끼리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코끼리의 전체를 보고 나서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다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마 전체를 보고 있는 자라면 소경들과 같은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있습니다. 창세기만 보고 나서 하나님의 뜻은 이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만 보고 나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전체를 보고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만약 소경들이 자신은 보지 못한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자기가 만진 일부의 것을 가지고 코끼리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평생을 살다 죽는다면 그 사람은 결국 코끼리는 알지 못하고 죽는 것이 됩니다. 다만 잘못된 코끼리를 코끼리의 전부로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코끼리의 모습이 전부인 것인 줄로만 알다가 죽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소경과 코끼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 보지 못한 자입니다. 소경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소경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소경입니다. 우린 아무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성령이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나는 소경된 자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지식가지고 성경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은 항상 전체를 보지 못한 소경이 코끼리의 일부를 만져보고 그것을 코끼리의 전부인 것으로 여기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일부를 가지고 말하는 자와 전체를 보고 말하는 자의 이야기가 다를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코끼리의 전체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소경이라면 자신의 소경 됨을 인정하고 자신의 판단을 다 버린 채 전체를 본 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나는 전체를 보는 사람이고 여러분들은 일부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니까 내 말을 들으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소경이었던 자고, 여러분도 소경이었던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보게된 자가 되었습니다. 보게 되었다는 것은 성경을 전부 환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인간의 죄에 대해서 우리 안에서 고발하고 계시기 때문에 남들은 볼 수 없는 인간의 죄를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시로 옛사람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통해서 죄를 고발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는 자가, 다시 말해서 코끼리에 대해서 말한다는 자가 소경이어서 코끼리의 일부만 가지고 전부인 것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같이 잘못된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하는 일은 성경의 전체를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여러분에게 정직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들에게 소경 되었을 때 잘못 알고 있던 일부분을 버리지 않고 있다면 결국 전체를 말하는 자와 부딪히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 전체를 환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여러분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적어도 일부만 보고 판단한 차원이 아니라 성경의 전체에서 계시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에 대한 판단은 여러분 스스로가 하실 문제입니다. 다만 간곡히 부탁드리는 것은 일부를 가지고 전부를 거부하는 잘못은 범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행여 일부분을 가지고 잘못 판단한 것을 성경에서 계시한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로 잘못 알고 평생을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는 잘못이 여러분들에게 발생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는 인생의 일부만 보지 말고 전부를 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세상이 멸망당하는 계시록까지 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은 결국 심판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도 심판입니다. 전부를 보고 살아라는 것은 마지막 심판까지 내다보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 전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보고 그 일부에 치우쳐서 살아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재 주어지는 축복에 매달리게 됩니다. 지금 자기의 일이 잘되기만 원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찾아도 자기의 일을 도와주는 하나님을 찾게 되고, 성경을 봐도 꼭 그런 식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열왕기하 4장에서 엘리사가 과부를 도와준 이야기를 가지고 '여러분, 과부는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고 그릇을 빌어 왔을 때 하나님은 그 그릇에 기름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나올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릇에 축복이 차고 넘치도록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어느 날 새벽 기독교 방송에서 모 목사가 설교한 내용임) 이러한 얘기밖에 나올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이 잘되는 것만 바라는 좁은 시각으로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게 되고 결국 심판은 잊어버리고 세상과 똑같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전부를 바라보십시오. 현재만 바라보시지 말고 미래까지 같이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세상의 어려움에 실족하지 않고 그리스도안에서 굳건히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법궤를 모시는 지성소 밖의 성소에 대한 내용입니다. 출 25:23-40절과 37:10-29절을 보면 성소에 대한 규례를 볼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성소에는 진설병 상과 등잔과 향단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등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등잔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불을 꺼지지 않게 해야 했습니다(레 24:1-5). 즉 날마다 계속해서 빛을 비추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등잔의 맞은편에는 진설병 상이 있습니다. 그 진설병 상위에는 떡 12개가 있습니다(출 40:22-25, 레 24:5-6). 그리고 등잔은 진설병 위의 12개의 떡을 비추었던 것입니다. 중단되지 않고 날마다 계속해서 비춰져야 했던 빛입니다. 본문 2절의 "등을 켤 때에는 일곱 등잔을 등대 앞으로 비취게 할지리라"는 말씀을 보면 등잔은 맞은편을 비추도록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설병 상위의 12개의 떡을 비추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소의 구조를 상상하실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등잔이 12개의 떡을 비추고 있는 의미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등잔의 개수입니다. 본문에 보면 일곱 등잔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곱 등잔이라는 것은 등잔이 일곱 개라는 뜻이 아니라 불을 켤 수 있는 등잔이 가운데 한가지와 좌우 세 가지씩 나오게 한 등대라는 뜻입니다. 4절에 보면 등잔을 금을 쳐서 만들었다고 되어 있고, 출 25:31-36절에 보면 더욱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쳐서 만들었다는 것은 따로 따로 만들어서 갖다 붙인 것이 아니라 망치로 쳐서 일곱 등잔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일곱이라는 숫자의 의미입니다. 성경에 일곱이라는 숫자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창 2:2절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매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 일곱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하신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창조되었고, 세상이 보존되는 것도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 일곱이란 숫자의 의미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리고 등잔 맞은 편에 있는 12개의 떡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정리하면 일곱 등잔이 맞은편의 12개의 떡을 비추고 있는 모습은 어떤 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힘으로 보존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까? 등대의 불빛이 항상 꺼지지 않고 이스라엘을 비추고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의 빛이 쉬지 않고 우리를 비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숨쉬고 있고, 살아가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보호하심 때문입니다. 결코 우리들의 힘으로 우리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줄 착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생명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점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을 돕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 여러분이 나아오게 된 것은 우리는 부족하고 약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이 우리를 도우심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는 등잔 맞은 편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받아서 살아갈 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마 여러분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불만과 거부감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돕고 있고, 전능하신 힘으로 보호하고 계신다면 왜 나의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수없이 눈물로 기도했는데도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안계신 것이 아니냐는 낙심에 빠져보신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일부를 보고 제멋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왜 하나님은 나의 어려움을 도와주지 않으시냐'는 원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가르치면서 일부를 보고 제멋대로 판단한 하나님을 가르쳐 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신다. 어려울 때 믿음으로 기도해라 그러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목이 터져라고 외쳐왔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기도해도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기도가 부족하다느니, 믿음이 약하다느니, 다른 모르는 죄가 있다느니 하면서 말도 되지 않는 말로서 변명을 해왔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경이 자기가 만진 일부를 가지고 제멋대로 상상한 하나님입니다.

 

 

 

 

인생의 전체를 바라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현재만 바라보고 살지 말고 마지막까지 같이 바라보고 인생을 살아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인생이란 현재 풍족한 삶을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바라보고 산다면 마지막 심판때에 영혼이 잘되는 것에 모든 목적을 두고 살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금의 일만 잘되게 도와주신다면 나는 하나님을 더 잘 믿을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생각입니다. 믿음은 우리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믿음이 유지되어지는 것이라면 베드로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또 사실 현재 자기의 인생에만 관심을 두고 매달려 있는 것 자체부터가 이미 하나님께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의 영혼이 잘되게 하시는 것이지 육신이 잘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시지 결코 멸망을 부추기는 일은 하지 않으실 것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각과 우리의 시각의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보고 계십니다. 마지막 심판까지 보시고 우리를 돕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마지막은 보지 못하고 현재만 바라보면서 현재가 잘되기만 소원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잘못된 인생관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돕지 않으신다고 느껴집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여러분의 구원과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어려움을 쉬지 않고 주신다고 생각합니까? 어려움과 고통 속에 계속 빠뜨리신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그 일을 통해서 뭔가 구원의 일을 하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어려움과 고통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심판과 멸망의 고통은 영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구원의 일을 하십니까? 어려움과 고통에 빠지게 하시고, 때로는 생계수단까지 빼앗아 가시고, 먹고사는 일까지 힘들게 하시면서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전에는 내가 먹고 입고 아이들 가르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되어지는 것인줄 알았고, 하나님도 자기 일이 더 잘되어지기를 바래서 찾았는데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있고 없고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것이 곧 내 생명이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어려움으로, 고통으로 몰아가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의 일부만 보면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어려움 자체를 거부하면서 어려움이 있으면 무조건 하나님께 해결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어려움을 주셨다면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는 기도에 응답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사가 무엇이고, 어떤 식으로 일하시는가를 여러분이 잘 안다면 환난 속에서 구하는 기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해결해 달라는 기도는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막연하게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하면서 한숨만 쉬고 있지도 않습니다. 환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어집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시편 13편을 보면 오랜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한 다윗의 시가 나옵니다. 여기 보면 다윗은 오랜 환난 때문에 지쳤다거나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환난 속에서 다윗이 두려워하는 것은 환난 때문에 자신이 사망의 잠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즉 환난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눈이 가려져 버리는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밝혀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3절). 두 번째는 원수가 스스로 승리했다고 자축할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요동함으로서 그것이 자신의 대적에게 기쁨이 될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4절). 결국 다윗은 환난을 피하거나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다윗은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갔고, 또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환난도 결국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랜 환난 속에서도 그의 기도는 자기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한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전체를 보고 사는 자의 기도입니다.

 

 

 

 

일곱 등잔이 맞은 편의 12개의 떡을 비추는 것은 단지 우리의 육신의 일을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 1:4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성소 안에서 12개의 떡을 비취던 일곱 등잔의 빛이 이제는 빛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비추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빛은 곧 생명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일곱 등잔의 빛은 우리를 생명 되신 그리스도안에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잘 가르쳐주고 있는 것임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할 것은 빛되신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새사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을 위해서라면 이 땅의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을 원해야 합니다. 이런 인간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이 이러한 하나님을 보게 될 때 비로소 범사에 감사하는 자로서 세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11강 민 8:14-19 처음 난 자 97.4.27


제가 여러분께 강조한 것 가운데 하나가 '성경에서 계시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이 말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기사 사람의 지혜로 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로 알아 가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 이상 달리 강요할 성질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야 할 문제도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지혜로 깨닫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언제 어느 순간 성령이 일하실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저는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리고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그 날까지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을 외칠 따름입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갈수록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는 말을 주저없이 하고 싶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한국교회를 한 개인이 그런 식으로 매도할 수 있느냐고 따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기만 옳고 남들은 다 틀렸다고 한다'라고 하면서 이상하게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제가 틀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틀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교회와 교회가 아닌 것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교회라고 인정하는 모습 안에 들어 있으면 그것은 분명히 교회이고, 교회가 아니라고 하는 모습에 들어있다면 아무리 스스로가 '우리는 교회이다'라고 외쳐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교회가 아닙니다. 결국 자기 종교에 도취되어서 평생을 착각 속에 살다가 인생을 마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이유를 알고 교회로 모이는 것과 모르고 모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를 교회로 모이게 하신 이유를 알고 모이고 있다면 그 분은 교회에서나 세상에서 신자로서 할 일을 바로 찾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교회로 모이게 하시는지 이유를 모르고 모이고 있다면 그 분은 단지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오늘 그 이유를 알고 모이셨습니까? 만약 모르고 모이셨다면 오늘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앞서 한국교회가 엉망이다는 말을 했는데 그 이유를 잠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한국교회가 엉망이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주님을 섬긴다는 교회가 도리어 주님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 개인의 판단이 절대 아닙니다. 한 개인이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가지고 교회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즉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얼마든지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정서에 맞지 않아서 교회가 엉망이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이런데 교회는 이러기 때문에 엉망이다는 말을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현대의 교회들이 왜 성경에 맞지 않는지에 대해서 잠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5:31절부터 보면 마지막 심판때 민족을 분별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전에 설교를 했기 때문에 잘 아시는 내용일 것입니다. 거기 보면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으셨을 때 민족을 분별하는데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천국 간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아 영영한 불에 들어간다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천국갈 자와 지옥갈 자에 대해서 말씀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부인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천국갈 자고 누가 지옥갈 자입니까? 사람의 기준으로 천국 가고 지옥갈 사람을 말하라고 한다면 교회봉사 열심히 하고, 착한 일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보는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냐고 할 것입니다. 반대로 지옥갈 사람은 교회에 나오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다녀도 가라지 같은 신자가 있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교회 일에 관심두지 않고 봉사하지 않고 헌금도 하지 않고 기도도 안하는 성도는 가라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전혀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오른편과 왼편으로 구분되는 기준은 소자에게 어떻게 대했느냐로 결정됩니다. 마 25:40절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고 45절에 보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이 알지 못한 다른 모습으로 계셨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모습이 뭐냐면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작은 자로 변장을 해서 이 땅에 다시 오셨다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가 주님의 모습을 담은 계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극히 작은 자란 어떤 자를 가리킵니까? 35,36절을 보면 주님이 주리신 적이 있었고, 목마를 때가 있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가 있었고, 벗었을 때가 있었고, 병들었을 때가 있었고, 옥에 갇혔을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실제로 주님이 이런 모습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모습을 가진 자를 내세워서 이들에게 어떻게 대하는가를 통해서 누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주님의 피의 은혜를 아는가를 판단하시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나그네 되고, 옥에 갇힌 모습은 한마디로 약자를 의미합니다.

 

 

 

 

즉 지극히 작은 자란 구약에서부터 등장하는 약자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약자는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목마르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약자입니다. 그리고 이 약자를 선대하는 것은 자신도 곧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약자나 나나 같은 처지라는 입장에서 선대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약자의 모습으로 오시고, 약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결국 약자는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담고 계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약자를 대하는 것이 주님을 대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약자는 힘있는 자가 무시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분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약자를 선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입니까? 한국교회는 이런 점에서는 참 잘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나라들을 돕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약자를 선대하는 마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구제는 거의 모두가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게 베푸는 선심이거나 사람의 양심에서 일어나는 동정이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는 이렇습니다.

 

 

 

 

세상은 크고 많고 높은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다. 커야하고 많아야하고 높아져야 가치 있는 것,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고 많고 높은 것을 축복으로 여깁니다. 교회가 커지고 사람 수가 많아지고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들이 모두 주님의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어떤 모습입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주실 수 있는 큰 힘을 가진 주님입니다. 이들의 주님은 절대로 목수의 아들로 나사렛 사람으로 구유에서 태어나신 주님이 아닙니다. 이들이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것은 뻔한 일입니다.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무시합니다. 도시에 있는 큰 교회가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를 조금 보조하고 있다는 것으로 시골 교회를 자기들의 별장쯤으로 여겨버립니다. 큰 교회 목사는 작은 교회의 목사나 시골 교회의 목사를 무시합니다. 목사가 큰 교회라는 것을 힘의 배경으로 삼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전혀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작은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약자의 가치를 알겠습니까? 이들에게 약자는 단지 우리들의 힘으로 도와주어야 할 대상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도와줌으로서 자기들은 스스로 보람을 찾고 '역시 우리 교회는 선한 사업을 많이 하는 교회야'라는 만족을 누리면서 한껏 더 높아질 뿐입니다. 내교회, 내것이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이고, 지극히 작은 자로 오신 주님을 모르는 것이고, 십자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제가 한국교회가 엉망이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바로 저주를 받아 영영한 불에 들어갈 자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은석교회는 괜찮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은석교회가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자신들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극히 작은 자, 여러분보다 약한 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혹시 나보다 힘이 없고 약하다고 해서 뭔가 무시하는 태도로 대하지는 않는지 생각하십시오. 사람은 그 본성이 힘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힘없는 자는 무시하는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을 아는 신자라면 '나도 약자와 같은 처지인데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이만큼 살고 있을 뿐이다'는 것을 알고 약자들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돕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약자들이 눈에 보이는 대로 도와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뭐든지 의무로 생각하면 가식이 나오고 억지가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이 자신이 약자임을 알고 약자를 대할 때 돕고 싶고 나누고 싶은 마음은 저절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약자를 통해서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될 문제는 약자가 우리들에게서 하고 있는 역할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으며 우리를 판단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은 말하지도 않고 엉뚱한 마태복음만 가지고 길게 얘기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이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러한 정신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하게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잘 기억하시고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레위인을 하나님께 바치는 내용입니다. 15절에 보면 "네가 그들을 정결케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레위인을 요제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5-13절까지가 레위인을 하나님께 요제로 드리는 의식에 대해서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요제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방법의 하나로서 제물을 흔들어서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흔든다는 것은 '하나님께 이 제물을 바칩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인을 요제로 바치라는 것은 레위인은 하나님의 일만 하도록 구별되어서 바쳐진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전에 레위인에 대해서 설교할 때 드린 말씀과 같이 레위인은 이스라엘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일절 초태생 곧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으로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레위인은 처음 난 자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난 자란 누구를 말합니까?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자손 중 처음난 자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장자, 즉 혈통의 장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전에 말씀 드린 바가 있습니다. 17절 뒤에 보면 "내가 애굽 땅에서 그 모든 처음 난 자를 치던 날에 내가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고 하는 말씀을 있는데 이 말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애굽을 치실 때 맨 마지막 재앙이 장자 재앙입니다. 애굽에 있는 모든 장자를 죽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 속에서 살아난 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장자 재앙에서 구별된 자이고, 어린양의 피로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처음 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처음 난 자, 즉 장자는 장자로서의 할 일이 있습니다. 그 할 일을 레위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레위인이 장자의 역할을 위해서 뽑혀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레위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처음 난 자는 하나님의 장자로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이 땅에서 계속해서 해 낼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장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납니다. 때문에 장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리고 그 뜻을 실행하며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는 레위인의 회막 봉사를 통해서 계속 보여지게 됩니다. 제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다. 이제는 은혜를 아는 자로서 은혜로만 살아가자'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자가 누군가의 희생 때문에 살아났기 때문에 그 희생을 담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장자입니다.

 

 

 

 

세상은 애굽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심판 속에서 멸망을 받아야 할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처음 난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태어나는 것입니까? 멸망의 자리에서 같이 죽어야 할 자를 누군가를 희생시킴으로 살려냈다는 하나님의 일을 아는 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잘아는 자가 장자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갈 때는 그 원리에 의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죄속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은혜를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평생을 은혜 안에서 굳건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수시로 옛날 애굽의 사고방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에 레위인을 특별히 뽑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이 살아가는 것 같이 살아가서는 안될 신분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레위인을 뽑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누구를 통해서 그것을 배울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곧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0절에 보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 그대로 주님이 하시는 일은 곧 하나님의 일과 동일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는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7:11절에 보면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주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의 바램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은 계속 세상에서 보여지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피로 모으신 신자, 교회입니다.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과 주님의 뜻에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보이신 뜻이나 주님의 뜻에 함께 동참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과 주님과 함께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바로 천국 가는 자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제 앞서 마태복음을 들어서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신자라면 우리에게서는 주님의 모습이 보여져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약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세상의 힘과는 전혀 상관없는 분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강한 것을 추구하고, 힘을 선호하고, 약해지고 힘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주님을 섬기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다 죽는 다면 마지막때 가서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외침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레위인을 바라보면서 장자가 어떤 자이며 장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 같이, 오늘날 우리는 주님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가르침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신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하늘의 평강을 찾게 되실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여러분의 눈에는 약자가 보여지고 여러분이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을 찾을 수 있습니다.

 

 

 

 

레위인이 요제로 하나님께 바쳐진 것 같이 하나님께 바쳐진 자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은 레위인의 직무를 위해서 부름 받은 자입니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주라는 것이 거창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아는 자로서 은혜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힘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힘을 포기했기 때문에 세상과 같이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약자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자기 주위에 있는 약자를 바라볼 때 자신도 그와 같은 처지라는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약자를 무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르게 나아가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자기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배우십시오. 어떻게 하면 교회에 도움이 되고, 같이 하나님의 뜻안에서 하나된 지체들에게 유익이 될 것인가에 관심을 두십시오. 이렇게 사신다면 교회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내 기분이 안좋다고 해서 교회를 안나오는 일을 없을 것입니다. 장자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새롭게 태어난 자들입니다. 우리가 장자라면 가야 할 길은 주님이 가신 길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2강 민 9:1-8 유월절 97.5.4


히브리서 11:1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해석하면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미리 앞당겨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요,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증거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바라고 살아가십니까? 천국은 하나님의 약속이지만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도 없고 현재에는 이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러한 천국을 바라고 살아간다면, 천국을 바랄 수 있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보이지 않는 천국을 바라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에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볼 수도 없는 것을 바라고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보이지 않는 천국을 바라고 세상을 살아가고 계신다면 그 믿음이 바로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이고,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의 약속 또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약속이 이루어진다면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이 주어진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은 현재 눈에 보이는 것들에 기대를 걸게 하는 것도 아니고, 땅의 것을 내것으로 소유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믿음도 아닌 것입니다. 현재에 주어지지 않았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바라고 소망하고 살아가는 증거로서 주어진 믿음이라면 당연히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것을 바라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지 어떻게 눈에 보이는 현재의 것에 매이도록 인도하겠습니까? 따라서 믿음을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자에게만 허락하신 믿음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삶 자체가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하늘의 기업을 바라며 살았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것에 연연하지 않았고 하늘의 것을 위해서 세상의 것을 포기할 줄 알았습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많은 고통과 핍박을 받게 되어도 그들은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믿음이 없는 눈으로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눈에 보이지도 않고, 현재에 보장된 축복도 아니라, 알 수 없는 미래에 주어지는 복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증거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믿음은 절대로 인간의 자의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세상에 연연하지 않고 천국을 바라며 세상을 살아가신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분명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없는 자들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없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를 못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눈으로 확인하고 볼 수 있는 것에 소망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로서의 믿음이 없으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고 보이는 것에 매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결국 교회 안에서도 참된 믿음에 대한 판단은 보이는 것을 바라보느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느냐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자신 스스로가 믿음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즉 인간이 믿음의 기준을 만들어 세우게 되고, 그 기준에 어긋나면 믿음이 없는 자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준에 맞게 살면 믿음이 있는 자로 증명되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세워놓은 믿음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예배참석하는 것, 큐티하는 것, 기도하는 것, 십일조 하는 것, 모두 이런 것들이 아닙니까? 교회에서 이것들을 믿음이 있는 표로 강조하고 있고, 또 자신 스스로도 그것이 믿음의 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열심히 예배참석하고, 기도하고, 큐티하고, 십일조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런 행위들에서 뭔가 게을러지거나 예전보다 못해질 때 '믿음이 떨어졌다'고 하면서 불안해하게 되고 결국 믿음을 올려보려고 기도원을 찾아간다거나 부흥회를 참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으니까 보이는 것으로 자신이 믿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스스로 자기의 믿음에 만족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 일에 열심을 낼 때 왜 기분이 좋아지는지 아십니까? 자신의 믿음이 아주 좋은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열심이 자신을 신자다운 신자의 모습으로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아주 만족해하면서 교회 일에 열심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철야 기도회에 참석하면서 그러한 것으로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공부를 다니면서 '목사님의 말을 들으니까 힘이 빠진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에는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종교행위들을 통해서 믿음을 확인했기 때문에 종교 행위가 있으면 있을수록 자신의 믿음은 상승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믿음의 자부심을 가지게 되고 또 사실상 그것 때문에 뭔가 부지런히 했던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을 믿음의 힘으로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전혀 반대로 그러한 것들은 믿음의 증거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힘으로 뭔가 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니까 갑자기 끈 떨어진 연처럼 혼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행동하도록 부추겼던 뭔가가 사라져 버린 순간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행동을 하지 않을 때의 불안감 때문에 견디지를 못해서 다시금 부지런히 뭔가를 함으로서 자신을 달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저의 이런 말이 결코 행동을 부정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님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하는 말은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에 절대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믿음을 확인하려고 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행동은 단지 믿음이 있는 자로서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것이지 행동함으로서 믿음이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보이는 것에 믿음의 기준을 두게 되면 꼭 보이는 것에 매이게 되어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하라고 하셨을 때 왜 그것을 하라고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은 전혀 무시해 버린 채 단지 행동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잘못된 행동들이 수없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의 의미보다는 예배라는 의식에 매이게 되고, 기도를 하면서 왜 기도를 해야 하는지 보다는 기도한다는 것에 매이게 되고, 구제를 해도 구제가 무엇인지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구제했다는 것에 더 매이게 되는 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이해하시고 눈에 보이는 것에 매여있는 잘못된 믿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것의 증거로서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월절에 대한 규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3절에 보면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정도로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절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월절의 의식에 관심을 두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유월절의 의식이 중요하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물론 구약의 유월절은 오늘날의 예배로 바뀌었다고 말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것입니까?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이 없어진다는 뜻인데 이 말대로 하면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예배가 천국 가는 근거가 되어버리는데 성경에는 어디를 봐도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또 예배라는 의식이 천국에 가는 근거가 되는 것은 절대로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월절의 의식에 관심을 두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말씀하시면 그 방법까지 다 말씀을 하셨지만 그 모든 것은 의식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인가를 계시하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유월절에 행하는 모든 의식 하나하나에까지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키면서 하나님이 이 유월절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유월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은 구약의 유월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계시하시는지를 잘 깨닫고 유월절의 정신이 흐르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유월절이 맨 처음 제정된 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할때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유월절이 제정되고 있는 내용이 나오는데 6절과 18절에 보면 유월절은 정월 14일 해질 때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유월절은 정월 14일로 제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9장 11절을 보면 유월절이 한 번 더 추가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월절이 추가되는 이유는 혹 사람의 시체로 부정케 되어서 유월절을 지킬 수 없거나 먼 여행 중에 있어서 지킬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유월절이라는 날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날에 대해 의미를 둘 때가 많습니다. 주일이라는 날, 부활절이라는 날, 성탄절이라는 날에 대해서 의미를 많이 둡니다. 이 외에도 사순절 등 날에 대해서 이름을 붙여 가지고 의미를 두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날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유월절이 1월 14일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게 되거나 부득이해서 유월절을 드리지 못한 자들을 위해서 다시 한 번 2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신 것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유월절의 의미를 잊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유월절의 의미를 잊지 않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천국이 우리의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가는 것이고, 또 그 믿음도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만 주신 선물이라면 그냥 택한 자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천국가게 하시면 되지 무엇 때문에 유월절을 지켜라 뭘 해라고 요구하시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천국은 그냥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 뭔가를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천국은 사람이 바뀌어서 들어갈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유월절을 지켜라고 하시는 것도 '너희는 이런 인간이 되어라'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은혜의 땅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은혜의 땅에 그냥 쑥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땅에 살 수 있는 인간으로 달라져야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 유월절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키게 된 것을 큰 감사와 축복으로 알아야 하고,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게 된 것도 큰 감사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의 의미를 생각하고 오기보다는 예배에 참석한 것으로 만족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예배 참석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으로 달라져야 하는가에 의미를 두는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월절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달라진 인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1,12절을 보면 "이월 십 사 일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 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유월절에는 어린양을 먹고, 무교병을 먹고, 쓴나물을 먹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은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뼈를 꺾지 않은 채 먹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그 집안을 치려고 하다가 어린양의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갔다고 해서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사가 어린양의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갔다는 것을 안다면 어린양을 먹고, 무교병을 먹고, 쓴나물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에는 음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음식이 아닙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하거나, 맛있는 음식의 맛을 즐기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양고기를 먹으면서도 그것을 음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뼈를 꺾지 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뼈를 꺾는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뼈를 꺾지 말고 먹으라는 것은 죽을 필요가 없는데 죽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때 군병들은 예수와 함께 못박힌 자들의 다리는 꺾어서 죽음을 확인했지만 예수님은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36절에 보면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도록 하신 것도 죽음을 당할 필요가 없는 분이 애매하게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미 유월절의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데서부터 나타나있는 것입니다. 결국 뼈를 꺾지 않은 양고기를 먹음으로서 나 때문에 애매하게 죽은 희생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무교병과 쓴나물을 먹습니다. 무교병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말합니다.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은 맛이 없습니다. 그 맛없는 떡을 쓴나물과 함께 먹어야 합니다. 이것도 보면 맛을 위해서 먹는 음식의 의미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결국 무교병과 쓴나물은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누군가가 이렇게 맛없고 쓴 고생을 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곧 새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알아야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유월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사람의 모습은 희생을 아는 인간 되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애매하게 고생하면서 희생했다. 나는 누군가가 희생해서 천국 가는 인간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산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곧 새사람인 것입니다. 뼈를 꺾지 않은 양고기, 무교병과 쓴나물을 먹으면서 누군가의 희생덕분에 살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백성중에서 끊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이라는 의식을 지키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을 무시하고 있는 그 자체가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난 은혜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은혜의 땅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희생의 은혜를 아는 자가 들어갑니다. 즉 새사람된 자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생각할 때 교회에 오면서 아무 생각없이 단지 예배 한시간 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나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비록 교회에 올 때는 그런 생각없이 나왔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이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들을 때는 주님의 희생을 아는 새사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해야 할 것이고 세상에서도 새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소망이 희미합니다. 믿음을 보이는 것과 연관지어 버립니다. 새사람으로 살겠다는 열망이 없습니다. 7절에 보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사람의 시체로 인하여 부정케 되었거니와 우리를 금지하여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정기에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지 못하게 하심은 어찜이니이까"라고 합니다. 이들은 이방인을 의미합니다(14절). 이방인이라도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면 지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배려로 이월 십사일에 다시 한 번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신 것이 아닙니까?

 

 

 

 

누구든지 희생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나오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주님의 희생에 대한 열의가 있습니까? 신자라고 하면서 주님보다 세상이 좋은 이유는 주님의 희생에 대한 열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세상에서 돈버는 일에는 열심이고, 한푼이라도 못벌고 손해를 보면 근심이 되고 안타까운 마음이 그치지를 않지만 말씀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데에 대해서는 전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사람이 정결도 하고 여행 중에도 있지 아니하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유월절, 즉 어린양의 희생으로 살아난 은혜에 대해서 열의가 없는 자는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희생의 은혜에 열의가 있는 자라면 세상보다는 주님을 더 좋아할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주님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신자가 신앙생활하면서도 평강을 누릴 수 없는 것은 그 속에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만 사랑한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행동을 통해서 자기의 죄를 감추면서 믿음을 드러내려고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믿음이 아니며 새사람의 모습도 아닙니다. 신자는 주님만 그리워하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주님을 찾지 마시고 교회 밖에서도 주님의 희생을 생각하며 그 은혜 때문에 기뻐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로서의 믿음이고 진정한 예배의 삶입니다.

 

 

 

 

 

13강 민 9:15-23 여호와의 명을 좇아 97.5.11


여러분이 신앙생활하면서 조심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자기 스스로 뭔가 되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높은 자가 되고, 출세한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탐욕이고 죄가운데 있는 모습이다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신자를 죄가운데 있게 하는 것은 겨우 이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사람의 본성을 이용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끊임없이 뭔가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악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선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사람은 선한 것을 추구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국 잘못으로 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사람은 선악체계에 빠져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여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중요한 문제이고 또 신자들이 많이 속는 문제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선과 악의 구분을 무엇을 가지고 합니까? 행동을 가지고 합니다. 즉 눈에 보이는 어떤 행동을 가지고 이것은 선이고 이것은 악이다라고 규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악은 살인, 강도, 도둑질, 사기, 거짓말, 강간, 뇌물 등등 보편적으로 도덕에 위배되는 것이면 악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반면에 선한 것은 흔히 생각하는 선행,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하는 것들을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세상이 생각하는 선과 악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종교적인 선을 추가를 시킵니다. 구제, 기도, 주일성수, 성경보는 것, 봉사 등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모르긴 몰라도 선과 악에 대한 규정을 이런 식으로 내려놓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성경 보는 것을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한 것으로 생각하지 그것이 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누가 하겠습니까? 기도하는 것도 얼마든지 강조해도 부족할 선이라고 생각하지 기도 안에 악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구제나 봉사 선교 등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선한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해도 괜찮고 오히려 강조에 강조를 더해야 한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런 선한 행위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존경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인간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아까 여러분이 조심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스스로 뭔가 되어보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목사가 되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이 목사로서의 포부를 가지는데 '나는 교회 부흥에 매인 목사가 되지 않겠다. 나는 그야말로 복음만 전하는 목사다운 목사가 되어보겠다'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합시다. 이것이 잘못입니까, 잘못이 아닙니까.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전혀 잘못이 보이지 않습니다. 요즘같이 교회 부흥에 매여서 교회를 자기의 욕심의 도구로 삼아버리는 목사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부흥에 욕심 부리지 않고 복음만 전하는 목사다운 목사가 되겠다는 것이 얼마나 선하고 신앙인다운 생각입니까? 하지만 이 생각이 얼마든지 잘못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신이 목사다운 목사가 되겠다는 포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목사 된 것은 하나님이 되게 하신 것이고, 또 하나님이 말씀하신 복음만 전해라고 해서 목사 되게 하셨다는 것을 안다면 아무 생각없이 복음만 그대로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목사다운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흥에 매여서 목회하는 목사가 싫어서 자신은 그런 목사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아래서 부흥을 말하지 않고 오직 복음만을 말하려고 한다면 물론 듣는 신자들에게는 유익이 있겠지만 자신은 여전히 다른 잘못함에 빠져있는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자기가 스스로 되려고 하는 것이 잘못이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이러한 죄에 대해서 지적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이 신자로서 '나는 이런 신자가 되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을 잘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다운 신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되고 싶어하는 그런 신자가 되기 위해서 행동하는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구제는 선한 것이지만 신자다운 신자가 되기 위해서 구제한다면 결국 자기의 의를 이루기 위한 구제이지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구제는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라는 울타리 외에 여러분이 살아가는 사람의 모든 현장에서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가령 자기의 직업을 가지고도 이런 포부를 세울 수가 있습니다. 직업이 회사원이라면 나는 신자니까 회사에서 본을 보이는 이런 사람이 되야지라는 생각가운데 아랫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고 상사에게 순종하고 회사 일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또 교사라면 '나는 신자니까 이런 교사가 되야지'라는 포부를 가지고 자기가 생각하는 신자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가 있고, 간호사면 간호사대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환자들을 친절하게 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신자로서 가지는 시어머니상, 며느리상을 이루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지 마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항상 신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신자다운 신자가 되기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결국 자기를 위한, 자신이 원하는 어떤 모습이 되기 위한 행동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뭔가 되기 위해서, 뭔가 만들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비록 행동은 선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 편에서 선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TV를 보면 여러 가지 캠페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환경을 보호하자는 것, 이웃을 돕자는 것, 며칠 전에는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뒷사람을 생각해서 문을 닫지 않고 기다리는 작은 배려를 하자는 캠페인을 봤습니다. 물론 그런 행동들은 다 좋은 행동들입니다. 하지만 그 행동 자체가 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런 행동을 요구하는 이유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하자는 것입니다. 즉 뭔가 되고,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의 삶의 원리로 삼고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행동할 뿐입니다. 이것으로 다 된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것이지 행동 자체가 선이 아닙니다. 행동은 단지 말씀을 담아서 보여주는 그릇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행동이 없으면 말씀을 어떻게 보여주겠습니까? 그래서 신자는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서 행동할 뿐이고, 때문에 행동 자체가 선한 것이 아니라 선을 담고 있는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같은 행동이라 할지라도 선이 되는 것이 있고, 악이 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즉 구제를 해도 같은 구제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드린 것은 유월절에 대한 것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어떤 인간을 원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천국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되어야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으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보다는 내가 원하는 인간으로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을 담는 하나님의 그릇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내것을 담아 놓고 살아가는 나의 그릇으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수시로 말씀과 상반된 모습들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고,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오늘 현재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의 인도는 쉬지 않고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한 교육입니다. 절대로 여러분의 삶자체를 도우시고 편안하게 하시기 위해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우리 생활을 편안하고 손쉽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시는 인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말씀으로 인도 받는다는 것도 자기 생활의 편안함 쪽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가 품고 있는 선하다고 생각하는 목적을 도우시는 인도로 생각해 버립니다. 이런 결과로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신앙의 열매를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신자로 만들어져 가는데는 수많은 세월과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신자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원에 가서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해서 응답 받으면 그순간 당장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신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신자되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그 날까지 계속되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때문에 오늘의 믿음을 가지고 평생을 신앙 생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하루하루를 말씀으로 인도함 받으면서 살아가려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단시간에 신앙을 이루어서 그 신앙으로 평생을 우려먹으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빠른 시간에 신앙을 키우려고 산기도도 하게 되고 철야기도며 금식기도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방법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을 만들자 구름이 성막을 덮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성막을 덮었다고 합니다(15절). 출애굽기 13장에서는 이것을 기둥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성막 주위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다 볼 수 있도록 높은 기둥의 모습으로 떠오른 것 같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많은 목사님들이 구름기둥은 낮에는 시원하게 에어컨을 틀어준 것이고, 불기둥은 밤에 춥지 않도록 히터를 틀어주면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고 하면서 이런 좋으신 하나님인데 우리들의 인생을 좋은 길로 인도하시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을 의지하고 기다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과연 불기둥 구름기둥이 이스라엘을 춥지 않고 덥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있게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불기둥 구름 기둥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낮에는 잘 보이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의 모양으로 나타내셔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불기둥 구름 기둥은 하나님 자체입니다. 불, 구름 기둥이 움직이는 것은 단순한 기둥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그 기둥을 따라서 움직인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구름기둥, 불기둥만 바라보고 움직입니다. 다른 것은 전혀 보지 않습니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머무르게 하는 것은 오직 두 기둥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이 중심입니다. 기둥이 움직이는 것이 곧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그 명령을 좇아서 기둥을 따라서만 가는 것입니다. 기둥이 가면 가고, 서면 서고, 머무르면 머무르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유진하고 진행치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진행하였으니" 라고 말합니다. 구름이 머무르면 그 기간이 얼마가 되든지 자신들도 머무는 것입니다. 절대로 자기의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만 바라보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동일하게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 옛날 이스라엘 백성같이 구름기둥, 불기둥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하나님 자체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했던 기둥의 역할을 지금은 말씀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씀대로만 살아가면 됩니다. 그 외에 다른 목적과 의도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계셔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해야 할 것이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전에는 가만히 계십시오. 여러분이 설치면서 움직이는 것은 전혀 하나님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믿음은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할 일은 여러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환경과 상황을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단지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믿음의 모습을 드러내기에 주저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을 인간편에서 만들어 내가지고 하나님께 자랑하듯이 내보이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뭔가를 계산해서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성경의 인물을 통해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믿기는 했지만 오랜 세월을 기다리지 못해서 결국 자기의 열심으로 약속을 이루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또한 사울은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모두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지만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기름지고 좋은 것은 남겨가지고 온 것을 잘 압니다. 그러면 그러한 인간의 열심에 대해서 하나님이 칭찬하셨습니까?

 

 

 

 

믿음은 우리의 열심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일년동안이나 구름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이제 하나님의 인도가 멈춘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서 자기들의 생각을 앞세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세월이 얼마가 되든 구름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들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구름이 일주일이면 일주일 한달이면 한달, 이렇게 규칙적으로 움직였다면 아마 이스라엘은 구름을 바라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지 시간만 계산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구름은 바라볼 필요없이 시간만 되면 움직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자들이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을 바라보고 말씀 안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서 지시를 받는 것이 마땅한데도 말씀을 바라보지 않고 제멋대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스스로 어떤 규칙을 정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주일 성수라는 규칙이 있기 때문에 주일 되면 교회 나가면 그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라는 규칙이 있기 때문에 십일조 하면 됩니다. 그것으로 신앙생활의 모든 것을 때워버리기 때문에 언제나 말씀을 바라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성도들이 성경을 보는 것도 신자의 규칙상 보는 경우가 태반인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삶은 여러분이 과연 말씀대로 살아가는가를 보여주고 증명하는 실습의 현장입니다. 뭔가를 하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이 주어진 모든 삶의 자리에서 말씀의 지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십시오. 사실 우리는 내가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아도 이미 주어진 삶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기에도 바쁘고 힘든 사람들입니다. 이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신자다운 신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설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씀대로만 사십시오. 그러면 그 자체가 여러분에게는 무한한 행복의 삶이 될 것입니다.

 

 

 

 

 

14강 민 10:1-10 나팔을 불라 97.5.18


여러분의 지금 인생은 행복합니까 행복하지 못합니까. 아마 어쩌면 전혀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분이 있을 것이고, 행복하다가도 순간 불행을 느끼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여러분이 평생토록 불행을 느끼지 않고 행복만을 맛보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세상이 생각하는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여러분도 지금 행복을 기대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사람은 결혼을 할 때도 행복에 모든 목표를 두고 행복을 기대하고 행복을 꿈꾸며 결혼합니다. 하지만 행복이란 하늘로 날아가는 고무풍선처럼 결코 손에 잡히지를 않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불행을 느낍니다. 행복이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채워졌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반면에 불행이란 자기가 원하는 행복이 채워지지 않을 때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따라서 행복이란 순간이고 불행은 계속 지속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사람의 욕구라는 것은 무한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채움으로서 행복을 느끼려고 한다면 과연 그 사람에게 행복이 존재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평생토록 행복이 아니라 불행 속에 살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스스로 뭔가 되어지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의 문제이든 교회 밖의 문제이든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든 교회 밖에서든 스스로 뭔가 되어지려고 하는데서 이미 행복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뭔가 되어지려고 한다는 것은 어떤 목표를 세워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 사람은 그 목표를 위해서 일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목표가 이루어짐으로써 행복을 느끼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행을 느끼게 될 것이 당연합니다.

 

 

 

 

사람이 어떤 목표를 세운다는 것은 항상 상대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누군가가 성경을 일년에 한 번을 봤다고 한다면 '나는 두 번을 보겠다'는 식으로 목표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 사람보다 뛰어나겠다는 욕구를 가지고 목표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보다 더 예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예뻐지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자신보다 날씬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자기도 날씬해지려고 힘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다 자기보다 못난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예뻐지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세상 사람이 다 자기보다 뚱뚱하다면 날씬해지기 위해서 수고를 하겠습니까?

 

 

 

 

결국 스스로 뭔가 되어보려는 것도, 행복도, 불행도 모두가 다 경쟁의식 속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여러분에게 스스로 뭔가 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만 살아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렇게만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행복하게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행복이란 환경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상태입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다면 그것이 곧 행복입니다. 혹 행복을 환경에 둔다면 그 행복은 절대로 지속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변하지 않는 환경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행복의 조건을 돈이든, 자식이든, 직장이든 눈에 보이는 것에 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돈에 행복을 두면 돈이 사라질 때 행복도 같이 사라져 버립니다. 자식에 행복을 둘 때 그 자식이 사라지거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식으로 커갈 때 행복도 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불행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환경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만 살아간다면 경쟁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 아니겠습니까? 못생겼으면 못생긴 대로 뚱뚱하면 뚱뚱한대로 키가 작으면 작은 대로 그렇게 하나님 주신대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사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항상 불행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여러분이 세상을 힘들게 살고 계신다면 그것은 모두 여러분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절대로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환경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를 주시면 둘을 원하는 그런 악한 인간들입니다. 절대로 하나를 가지고 만족을 못합니다. 둘을 주시면 둘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셋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셋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주신대로 살아라'입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이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법칙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신대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형편으로 만족하며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내 주위에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만 없으면 행복하겠는데, 나보다 잘난 사람이 수두룩하고 그것 때문에 서로가 잘난 인간 되려고 싸우며 살아가는 세상인데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이 죄악가운데 있다는 증거는 서로가 잘났다고 싸우며 살아가는 것이 증거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는 왜 행복하지 못하나? 나는 왜 불행하나? 하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불행이 느껴지는지 그 원인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 원인은 세상의 죄 때문입니다. 세상의 죄는 하나님같이 되어 보려고 했던 것으로 시작하는데, 결국 자기 스스로 뭔가 되어 보려고 했던 그 욕망 속에서 자기보다 잘난 인간을 보면 참지를 못하고 시기가 드러나게 되고, 그 시기가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모습을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아벨보다 더 못하나'라는 자존심의 문제였으며 그로 인한 시기심, 그리고 시기심으로 인한 미움이 아벨을 죽이게끔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죄입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잘대해줄 때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미움과 원망과 섭섭함과 시기심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느끼는 마음의 고통이 어떠한 것인가도 다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증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기심, 미움, 경쟁,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이미 죄가운데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죄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법칙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딱 한 마디로 말해서 희생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희생이지 사실 희생이라는 말안에는 섬김, 사랑, 양보, 용서 이 모든 의미가 다 담겨 있는 것이 희생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희생하며 사십시오. 그것이 세상을 편안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희생이라는 말에는 왠지 부담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습성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남이 가진 것을 나도 가지기 위해서 힘쓰며 살았지 나에게 있는 것을 남을 위해서 나누는 삶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있는 힘을 모두 나를 위해 허비하면서 살아왔지 남을 위해서 나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부담이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남주라는 말에는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부담을 가지게 되는 것이 바로 죄인된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힘을 남을 돕는데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행복하게 사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세상은 모두 자기를 위해 살아가면서 행복을 찾으려고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힘을 모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힘을 모으려고 하지 말고, 혹 힘이 있거든 남을 도와주고 베풀고 사랑하는데 그 힘을 쓰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을 도와주는 보람 때문에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힘을 포기했기 때문에 자기보다 잘나 보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경쟁도 시기도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을 가진 자를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스스로를 고통으로 끌고가는 결과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힘을 가진 자를 부러워하며 살게 되면 결국 힘을 가진 자를 시기하게 됩니다. 미워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시기가 나쁘다고 생각하고 시기를 버리고 미움을 버리려고 한다고 해도 여러분들이 힘을 부러워하는 속성에 빠져 살아간다면 결코 시기와 미움 안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신자가 세상사는 지혜는 주어진 힘을 자기를 위한 힘으로 사용하지 않고 남을 위한 힘으로 사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 것을 왜 남을 주며 사느냐'는 생각은 버릴 각오를 하십시오. 여러분이 진심으로 신자로 사시기를 원하시고 마음의 짐을 덜어가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면 이 지혜를 배우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물론 남을 위해 살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해서 그것이 쉽게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힘으로 사는 것이 죄가운데 있는 모습임을 깨닫고 남을 위해 살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해서 그것이 쉽게 되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을 위해서 무엇이 우리에게서 버려져야 하는지도 분명히 하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기를 소원하고 나와야 합니다. 말씀에 충성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모여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팔을 불어라는 내용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불기둥, 구름기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기둥만 바라보면서 움직인다는 내용이었는데, 나팔을 불어라는 것은 인간편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보면 나팔의 기능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데 2절을 보면 소집과 진행의 기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팔을 부는 데에는 이 기능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9절을 보면 대적을 치러 나갈 때도 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희락의 날, 정한 절기, 월삭에도 나팔을 불게 되어 있는데 그때에는 번제물과 화목제물 위에 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말씀들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나팔을 불어라는 것이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모으고 길을 진행하기 위한 용도로만 말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대적을 치러 나갈 때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고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는 말씀을 보면 분명 나팔을 부는 데는 단순하지 않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그 의미를 하나하나 찾아가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나팔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출애굽기 19장입니다. 13절에 보면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을 보면 나팔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산 앞으로 불러모으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나팔이 여호와의 음성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면 그 나팔 소리를 여호와의 음성으로 듣고 그 소리에 순종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 보면 "제 삼 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뢰나 번개나 빽빽한 구름이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나팔 소리가 있는 것은 나팔 소리도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19절에 보면 "나팔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고 하는 말씀을 봐도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0:18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 난 뒤에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보고 두려워 떨며 모세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19절)라고 한 것을 봐도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출애굽기에서 나오는 나팔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나팔을 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리게 하신 소리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나팔을 불어라는 것은 이제는 이스라엘 스스로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바라보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모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나팔을 불면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를 원합니다'라는 의미로 부는 나팔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즉 나팔을 불면 모이고 진행했던 것은 말씀을 중심으로 모이고 말씀의 지시를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대적과 싸울 때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싸운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팔을 부는 것을 우리가 어렵고 힘들면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의 원수와 싸울 때 나팔을 불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듯이 세상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기도해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 질병이 여러분의 대적입니까? 돈이 없는 것이 여러분이 대적입니까? 세상의 힘든 일이 여러분의 대적입니까?

 

 

 

 

우리의 대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보게 하는 것이 대적이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멸망으로 끌고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질병이 우리를 멸망으로 끌고가는 것입니까? 돈이 여러분을 멸망으로 끌고 갑니까? 우리를 멸망으로 끌고가는 것은 질병 자체가 아니고 돈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의 옛사람입니다. 세상에서 힘을 추구하고 힘을 모으기 위해서 살아가고 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그 옛사람이 우리를 멸망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팔을 불어라는 것입니다.

 

 

 

 

즉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찾습니까? 말씀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대적은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괴롭고 어려울 때 나팔을 부십시오. 하지만 단지 여러분이 지고 있는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 나팔을 불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짐이 있다면 그 짐이 무엇 때문에 있게 된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고 계신 짐은 모두 외부에서 누군가가 지어준 것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 진 마음의 짐입니다. 환경이 절대 짐이 아닙니다. 죄가운데 있는 결과로 지워진 마음의 짐입니다. 욕심으로 살려는 것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하는 것 때문에 남과 비교하면서 자연히 지워진 짐입니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 해결 못합니다. 그럴 때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힘을 버리게 하십니다. 하지만 힘을 버리고 살아가는 그것이 신자에게는 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신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기도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해로운 것은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돈을 힘으로 삼고 있고 행복의 조건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돈을 달라고 기도한다면 과연 돈을 주시겠습니까? 돈이 힘인 사람은 돈이 있으면 더 교만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자존심으로 사는 사람에게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일을 주신다면 그것은 더 해로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주어진 은혜대로 살아라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돈에 힘을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은 돈이 있어도 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그런 신자는 처음부터 돈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있든 없든 주어진 대로 감사하며 살 것입니다. 있으면 남을 도우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을 얻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돈에 욕심을 버리려고 하는 미련한 신자는 없을 줄로 압니다. 욕심을 버리면 하나님이 주시지 않겠나라는 기대가 이미 욕심 가운에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10절에 보면 "또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 제물 위에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합니다. 번제물 화목제물은 모두 희생을 의미합니다. 즉 제물 위에서 나팔을 불어라는 것은 희생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찾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희생의 하나님을 찾지를 않습니다. 예수님 마음으로 희생하는 삶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신데렐라가 되고 백마 탄 왕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람들은 신데렐라가 되고 백마 탄 왕자가 되는 것에서 행복을 찾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신데렐라로 만들어 주시는 마법사도 아니고 백마 탄 왕자가 되게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우리를 희생하는 인간으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 희생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나팔을 불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어서 나팔을 불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억하시고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희생하며 살아가는 인간으로 만들어 가시고자 하시는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힘이 되는 것을 달라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왜 나오셨습니까? 행복한 인생을 원하시고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면 모으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지 마시고 버리기 위해서 찾으십시오. 우리 속의 옛사람을 물리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 되기 위해서, 우리들의 마음이 세상 것이 아니라 주님의 용서, 섬김,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는 그런 신자가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나팔을 부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아시고, 여러분을 기억하시고 찾아오셔서 도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을 행복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15강 민 11:1-19 이스라엘의 원망 97.5.25


인간은 늘 새로운 것을 원하며 살아갑니다. 새로운 것을 통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소유하게 되면 '좋다'는 느낌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또 다른 새로운 것에 눈길을 돌리며 그것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신에게는 더 이상 좋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남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는 상대방의 것이 자기의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을 가지고 '남의 떡이 커 보인다'라고 하는 것일까요?

 

 

 

 

남녀가 깊은 사랑을 했다고 할지라도 결혼 전과 결혼 후가 다른 이유도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속성 때문입니다. 결혼 전에는 평생을 자기의 아내가 될 한 여자만 바라보고 사랑하며 살 것 같았는데 막상 결혼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러한 느낌이 식어져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혼하고 함께 살아가는 아내에게서는 더 이상 새로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 전에 가졌던 신비스러움들을 모두 알고 난 뒤에는 더 이상 아내는 새로운 존재로 자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새로운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아무개 부인은 남자에게 화장 지운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더라' '당신은 항상 자다 깬 것 같은 부시시한 얼굴을 하고 있느냐' '아무개 부인은 애교가 철철 넘쳐흐르더라' '아무개 부인은 그렇게 깔끔하던데 당신은 이게 뭐냐'는 식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아내에게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 전에는, 또 결혼하고 나서도 얼마동안 그런 모든 모습이 좋아 보이고 아름답게만 보였는데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 아름다움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단지 다른 새로움을 요구하는 자신의 욕구가 불평이라는 모습으로 상대방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도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합니다. 머리 모양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바꾸기도 하고, 옷도 유행을 따라서 새로운 것을 입으려고 합니다. 돈있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가전 제품을 쉽게 바꿉니까?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새로운 것을 소유하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발산하지 못할 때 그 원망과 불평이 남편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남편이 반찬 투정을 하면 '남들처럼 돈만 많이 벌어와봐 날마다 임금님 수랏상같이 해줄테니' '남들은 남편 잘만나서 하고 싶은 것 실컷 하면서 사는데 나는 당신 만나서 이모양으로 산다' '아무개집 남편들은 부인 데리고 외식도 자주 간다는데 당신은 이날 평생 외식한번 제대로 시켜줘 봤나?' '아무개집 남편은 부인 생일이면 꽃도 선물하면서 무드가 있던데 당신은 지금까지 나한테 꽃 선물해준 적이 있나'하면서 바가지를 긁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만 가지면 행복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막상 소유하고 나면 다시금 허탈감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전도자가 한 첫마디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1:8에 보면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한 솔로몬이 왜 인생에 대해서 허탈감을 가졌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소유하지 못한 자가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만물은 항상 새로움을 원하는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을 소유함으로 행복을 누려보겠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이러한 심정은 우리가 솔로몬처럼 되어보지 않는다고 해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평소의 삶을 곰곰이 생각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모두가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것을 쫓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원하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소유하면서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과연 거기에 행복이 있던가요? 새로운 것을 소유했을 때 행복이 있던가요? 새로움은 또 다른 새로움을 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의 욕망에 따라 새로운 것에 대해서 목말라하며 살지만 해아래에는 새로운 것이란 없기 때문에 결국 평생을 만족은 전혀 모른 채 목말라하며 살다 죽는 서글픈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만족이 없는 것 때문에 끊임없이 원망하다가 불평하다가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행복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옵니다. 교회에 오면 행여 새로운 것이 있을까라는 기대감속에 교회를 찾았더니 새로운 분위기, 새로운 환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새로움에 빠져서 재미있게 교회생활합니다. 교회 가는 것이 즐겁고, 주일이 빨리 왔으면 하는 심정으로 삽니다. 교회의 모임이라면 빠지지 않고 참석하게 됩니다. 그것을 보고 기존의 신자들은 처음 나온 사람이 신앙이 참좋다고 칭찬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를 못합니다. 또 다른 새로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생활이 시들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는 교인들에게 끊임없이 뭔가 새로운 것을 제공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합니다. 여기저기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새로운 것이 없나 하면서 기웃거리게 됩니다. 가게(교회)가 새로운 상품(교회 프로그램)을 진열하지 않으면 손님(교인)이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서 교회 돈을 써가면서 여기저기 다니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이 인기가 있다고 하니까 수십 만원의 돈을 들여서 제자훈련을 배웁니다. 큐티라는 것을 보급해보기도 합니다. 교인들이 관심둘 거리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 총동원전도주일, 40일 특별새벽기도회, 양로원 방문, 고아원 방문, 찬양집회, 은사부흥집회, 환경운동, 등등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이러한 프로그램에 시들해져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교인들은 새로운 사람, 즉 새로운 목사를 원하게 됩니다. 목사에 대해서 식상해진 것입니다. '모 교회는 목사가 능력이 있어서 몇 년만에 3배로 부흥했다더라' '아무개 목사는 인품이 좋다더라' '저 교회 목사는 심방을 잘한다더라'고 하면서 은근히 목사에게 압력을 넣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좀 해봐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던 것이 단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치 결혼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고 좋아만 보이던 것이 결혼 후에는 견딜 수 없는 단점으로 보여지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 오면서도 하나님께 관심이 없고 자신의 자아 실현과 만족을 위해서 오기 때문에 죄인된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신에게 은혜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말해도 마음은 냉랭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도 마음은 요지부동이고, 천국을 말해도 머리 속에서는 여전히 세상이 굴러다니고, 마음은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데 대한 불평과 원망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러한 원망의 모습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도 원망을 합니다. 어떤 원망입니까? 고기가 없고 애굽에서 먹었던 생선, 수박, 부추, 파, 마늘 등이 없다는 원망입니다. 이런 것이 없어서 정력이 쇠하여 졌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출애굽기에서부터 원망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쓴물 때문에, 먹을 것이 없는 것 때문에, 마실 물이 없는 것 때문에 원망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때문에 지금 이스라엘에게 먹을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만나가 있습니다. 즉 본문의 원망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파서 하는 원망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비한 음식이 있습니다. 꿀섞은 과자같이 맛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싫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달라는 것입니다. 만나만 먹고 고기, 수박, 생선, 파, 마늘을 먹지 않으니 몸에 힘이 없다고 합니다. 분명히 애굽에서 먹던 것이 생전 먹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전에 있었고 먹어 보았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만나에 질리자 옛날 애굽의 것이 새롭게 느껴지고 좋은 것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을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은석교회의 모습이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집사님 한분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목사님의 말투가 너무 무뚝뚝해서 상처를 받고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을 부드럽게 하도록 고쳐줄 수 없느냐는 다른 교인들의 요구사항을 저에게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 졌습니다. 서글퍼지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저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은석교회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4년 이상을 은석교회에서 오직 십자가만 전했으니까 그래도 교인들이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하나님만을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타교회의 목사들이 외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설교를 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교회 부흥이나,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에는 전혀 관심두지 않고 그저 죽으나 사나 십자가만 전하는 설교를 가만히 듣고 있는 교인을 보면서 제 나름대로는 신자들이 뭔가 복음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의 환상을 하나님은 여지없이 깨뜨리시면서 인간에 대한 기대를 철저하게 빼앗아 가버리셨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모릅니까? 지금까지 모든 힘을 쏟으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하나님에 대해서 분간도 하지 못하고 믿음에 대해서 판단을 하지 못합니까? 도대체 지금까지 뭘하면서 신앙생활한 것입니까? 결국 여러분은 지금껏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렸지만 그 모든 것이 자기 만족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에 대해서 싫은 소리한다는 것이 저를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하나님께 관심이 없는 모습이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목사에 대해서 새로운 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습에는 식상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이 없는 목사에 대해서 짜증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제가 성격을 고치고 무뚝뚝한 말을 그야말로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말로 고친다고 합시다(불가능한 일이지만, 만약 그렇게 고쳤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의식한 가식이고 위선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결국 얼마가지 않아서 목사에게 또 다른 새로운 모습을 요구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무뚝뚝함을 굳이 고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의 무뚝뚝한 성격이 복음의 장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목사의 인품 때문에 교회에 왔다면 그 사람은 목사를 믿고 목사를 의지하게 되고 목사를 통해서 신앙의 만족을 누리려고 하지 예수님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의 인품을 통해서 교인을 교회에 붙들려고 합니까? 그것을 전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전도는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도라는 것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사람을 교회에 붙들어 놓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교회로 끌어 모으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만 확실하게 전한다면 그리스도만 확실하게 전한다면 전도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을 전하느냐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사람을 붙드느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목사의 말투에까지 시비를 걸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사람의 일로 여기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사람을 붙드냐에 모든 관심을 두게 되고, 결국 인간관계를 통해서 교인을 붙들려는 발상까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마귀의 일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위로자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는 것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세상 것을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내 기분을 채우고, 내 마음을 풍족케 하고 즐겁게 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원망이 나옵니다. 하지만 여러분, 세상적인 소유나 여러분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기분좋은 말이나 칭찬들이 다 헛된 것인줄 모릅니까? 목사의 부드럽고 상냥한 말이 여러분을 천국 보내는 길이라면 저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고치겠습니다. 하지만 목사의 말투가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는 여러분의 기분을 맞춰주고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친교단체가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목사에게 헛된 기대를 겁니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목사에게는 아무런 기대도 걸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저에게 걸 기대는 단지 복음뿐입니다. 저에게서는 오직 복음만 찾으십시오. 누가 여러분을 멸망의 자리에서 구해주시겠습니까? 오직 예수님입니다. 목사가 아닙니다. 목사는 단지 여러분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를 전혀 가감하지 않고, 인간의 욕심도 보태지 않고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여러분께 하는 전도요, 오늘도 이 자리에 서게 된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의 관심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부추, 수박, 생선, 파, 마늘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도 하지만 이것들이 있어야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관심이 온통 이런 것으로 가득차있는데 눈에 하나님이 보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그들에게 다가가도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아오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오셨고, 여러분이 눈뜨고 바라보는 자연 환경을 통해서도 오셨습니다. 여러분이 보는 꽃 한송이에까지 하나님의 음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지나쳐 버립니다. 자연을 그냥 자연으로 보고, 꽃을 그냥 꽃으로 봐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머리속에 다른 관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목사에게 다른 기대를 거는 이상 저는 그 기대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힘 쓸 것입니다. 목사라는 인간을 보지 않고, 목사라는 한 인간을 통해서 여러분의 기분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모든 기대를 거는 여러분이 되도록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고 사람들의 기분을 맞춰주는 것은 연예인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의 환심을 사서 다음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은 시장터에 사이비 약장수가 약을 파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기분과 만족을 위해서 교회를 찾지 마십시오. 교회는 여러분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위문공연하는 곳이 아닙니다.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만 신뢰하십시오. 세상에서 새로움을 찾지 마시고 그리스도안에서 날마다 새로움을 찾기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16강 민 11:10-15 모세의 원망 97.6.1


흙으로 지음 받은 우리는 지금 이시간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피가 우리의 온 몸을 돌고 있다는 것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숨을 쉬고 심장이 뛰게 하는데 우리는 전혀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가슴에는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의지로 뛰고 있습니까?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에서 심장이 뛰고, 피가 돌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이 나에게 일하시고 나를 돕고 계신다는 증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이후로 세상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습니다. 세상이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고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러한데 하물며 세상만물의 극히 작은, 먼지 같은 우리들의 존재여부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인간의 생존 여부도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려주시면 사는 것이요 죽이시면 죽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살려고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삶을 자기 스스로 꿈꾸면서 그것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스스로 괴로워하고 고통 속에 빠지며 자신의 신세를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원망을 신에게로 돌립니다.

사람은 자신의 괴로움의 원인을 모두 외부에 두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 그 원인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괴로움의 조건이 외부, 즉 환경에 있다면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같은 환경에 있으면서도 괴로움을 벗어버리고 사는 사람은 간혹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괴로움을 느끼는 환경 속에서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생의 괴로움이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기를 괴롭히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고, 하나님이 살려주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인데, 자기의 인생에 대해서 아무런 권한도 힘도 없는 인간이 자기의 인생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주관하려고 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주님이 살려주는 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지 마십시오. 자신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인생이든 어떤 모습이든, 그 인생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자신에게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성격은 이랬으면, 외모는 이랬으면, 가정 환경은 이랬으면 하는 부분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불만으로 이어지고 괴로움으로 이어지고 시기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부족하지 않고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볼 때는 부족함 투성이인 것같이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자기를 바라보게 되고, 결국 엉뚱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시비 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현재 자기의 인생, 자기의 모습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를 감사하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신 것을 망각해 버린다면 결국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인생, 자신의 원하는 모습과 현재의 것을 비추면서 괴로움과 원망으로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일을 좀 더 잘할 수 있는 환경이란 따로 없습니다. 외모도 하나님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미스 코리아에 나가서 1등한 것하고 하나님의 영광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격 또한 하나님의 일과 상관이 없습니다. 소위 신자다운 성격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현재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아시고 현재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신자로 살려고 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스라엘의 원망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원망은 단순한 불평 한마디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4절에 보면 울었더라고 말합니다. 즉 그들은 현재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며 울면서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그들의 원망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주관하려는 애굽의 습성 때문이었습니다. 살려주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습성 때문에 원망하게 된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으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생존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그들은 인생의 즐거움이 없다는 것에 짜증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의 즐거움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먹었던 것들입니다. 세상 것을 소유함으로 누리는 즐거움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성경도 좋고, 말씀도 좋고, 믿음도 좋지만 그래도 세상 것이 좀 있어야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지않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해도 세상 것이 없으면 즐겁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실 우리들도 말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즐거움을 말하지만 정작 즐거움은 세상 것을 소유한데서 얻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즐거움이 다 헛되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장사 없다고 했습니다. 죽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을 꼭 죽어봐야 알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아신다면 미리부터 그러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이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며, 세상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평안과 즐거움으로 삼고 인생을 살아가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갑부나 권력가도 죽음 앞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합니다. 돈, 권력이 죽음에서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사십니까? 아름다운 모습에 만족하며 삽니까? 팔팔한 건강에 만족하며 삽니까? 돈이 있고 좋은 집이 있고 좋은 차가 있는 것에 만족하며 삽니까?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는 것에 만족하며 삽니까? 여러분, 자기의 모습을 죽음이라는 자리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싸늘하게 식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여러분을 멸망의 자리에서 구원해 주실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것을 안다면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숨을 쉬며 살아가는 이 순간 여러분의 머릿속은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하고, 여러분의 마음은 천국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날마다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주님을 아는 것으로 즐거워하며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의 머릿속에는 애굽의 것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는데 세상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는 방법이 세상 것을 통해서 만족을 누리고 즐겁게 사는 것 하나만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영원히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외면하고 삽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나의 심장을 뛰게 하셔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심장은 자동적으로 당연히 뛰고 있는 것으로만 알고 모든 관심을 돈에만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질 수가 있고 세상을 얼마든지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차 있으니 하나님이 살려주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항상 불평과 원망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만 원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인도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모세까지도 원망을 합니다. 모세의 원망은 무엇입니까? 11절부터 보면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나이까 라고 합니다. 또 15절에 보면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라고 합니다.

 

 

 

 

지금 모세의 불평은 이 백성들은 다 하나님 백성인데 왜 나에게 맡겨 가지고 나를 이 고생을 시킵니까? 차라리 이렇게 할바에야 나를 죽여주는 것이 내게는 은혜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 불평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만 원망한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도 아주 심한 원망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세의 원망에서 모세의 어떤 잘못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모세는 지금 개인주의적인 신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께 부름 받고, 또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이유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하나 예수 잘 믿고 천국가면 되는데 내가 왜 다른 신자 때문에 고생을 해야 하느냐는 식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에게 붙여주셨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모세는 아마 자기 혼자라면 얼마든지 이 고생 안하고 편안하게 하나님 믿으며 살 수 있는데 괜히 지도자로 앞장 서가지고 안들어도 될 원망을 듣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원망은 목사들에게서 흔히 보여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잘되고 교인들이 목사 대접 잘하고 떠받들면 하나님 저를 목사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라고 하지만 교인들이 목사에게 등을 돌리고 분란이 나고 목사에게 우리 교회에서 나가주세요 라고 할 때 목사는 하나님 왜 나를 목사 되게 해서 이 고생을 하게 합니까? 라는 원망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 안되고 그냥 직장이나 다녔으면 내 신앙만 잘 지키면 됐을 것인데 괜히 목사가 되가지고 남의 신앙까지 간섭을 해야 하고 염려를 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목사는 하나님이 왜 자신을 목사로 세우셨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지도자를 내세우신 것은 단지 모세의 힘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며 인도하심을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역할을 해야 할 모세는 자기의 힘을 드러내어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힘을 드러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이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 하나만 들고 백성들 앞에 서게 하신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뭡니까? 모세는 아무것도 배우는 것 없이 지도자 역할만 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모세는 모세대로 신앙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모세는 그토록 하나님께 원망 잘하고 불평만 내세우는 그런 백성들도 끊임없이 사랑하시고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세도 같이 느껴야 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원망을 한몸에 받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람들이 언제나 목이 곧은 자세로 하나님께 나올 때의 하나님의 마음을 느껴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목사를 여러분과 다른 위대한 존재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누군가를 목사로 삼으신 것은 그 사람이 위대해서도 아니고 신앙이 특출해서도 아니고 능력이 있어서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목사를 해야만 하나님을 더욱 깊이 깨달아갈 수 있고, 십자가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목사를 시킨 것입니다. 때문에 목사는 고생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고생을 하나님 때문에 애매하게 받는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그러한 고생을 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모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는 고생을 피할 수 없습니다. 대우받고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목사가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자기만 멸망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까지 멸망으로 끌고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교회를 부흥시키라고 하나님이 자신을 목사로 세웠다고 우기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그런 목사들로 인해서 교회가 엉망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목사하기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목사가 왜 힘들다고 생각합니까? 목사가 힘든 것은 자기 신앙뿐만 아니라 남의 신앙까지 간섭하고 생각하고 염려를 해야하는 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고통을 체험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되어 있는 목사인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자기들만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고 그들을 위해서 열심히 앞장서고 있는 모세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하나님께 원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모세를 지도자라는 입장에 세워놓고 목사의 얘기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세의 원망이 소위 목사라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평신도라고 말하는 여러분 모두에게도 국한되는 말씀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목사와 평신도를 구분하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에서야 목사가 있지만 교회 밖을 나가면 여러분들이 목사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베드로전서 2:9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씀합니다. 저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동일한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제가 목사라고 해서 다른 특별한 은총, 특별한 신앙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동일하게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냄을 입은 자들입니다. 왜 우리를 빛으로 불러 내셨습니까? 베드로는 그 이유를 명확히 말합니다.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 즉 우리의 구원자의 아름다운 덕,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이신 희생을 선전하라고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일을 하는 자를 가리켜서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결코 어떤 직책을 구분하고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은석교회의 목사는 저 혼자가 아니라 여러분 모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각가정에서 목사의 역할을 해야 하고,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자리에서 목사, 곧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란 세상이 생각하는 것 같이 어떤 집단의 성장 발전을 위해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사람들이야 나라를 성장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는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선전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역할을 하기를 꺼려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적당한 선에서 끊으려고 합니다. 손해가 없을 정도에서, 고난이 없는 정도에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만약 여러분을 그러한 힘든 상황으로 집어넣으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그런 상황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더 깊이 느껴라고 하신 것임을 아십시오. 고난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분께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세의 원망을 통해서도 나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린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애매한 고난으로 여기며 원망과 불평을 해댄 적이 한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자신의 신앙만 잘 지키면 된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해서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린 모두가 내 편한 것만 원했고, 나만 잘되면 그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신앙은 관심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다른 예수를 따라가도 단지 내 교회 교인이 줄어든다는 것만 서운해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옛모습을 알아야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바로 알려줄 수 있습니다. 나나 다른 사람이나 똑같이 옛사람의 모습인데 자신의 애굽적인 모습도 발견하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알리겠다는 것입니까? 지금 소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전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는 자신을 보지 못한 채 그리스도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한 채 그리스도를 말하기 때문에 올바른 죄를 지적하지 못하고, 생명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편하게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고난은 신자의 필수과목입니다. 복이 있는 자는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신자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목사를 보고 신앙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장로를 보고 신앙생활 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의지하면 이스라엘과 같은 원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20년 30년이 넘게 했으면서도 아직까지 목사를 바라보고, 목사의 지시를 기다리고, 목사가 시킨 대로하려고 하는 것은 그 동안 하나님을 헛믿었기 때문이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성경적이고 무엇이 성경적인 것이 아닌지를 바로 판단하고 성경적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에 매이지 마시고 노회에 매이지 마십시오. 목사든 노회든 성경과 어긋나는 것을 요구할 때는 그것을 지적하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신앙입니다. 성도가 서로 만나 대화할 때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할 때 거기에 쉽게 쏠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원망은 이스라엘에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가운데 섞여 사는 무리가 먼저 탐욕을 품음으로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아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같이 따라나온 이방민족인 것 같습니다. 이들이 불평을 하자 뭔가 내심 불만이 있던 이스라엘이 거기에 동조를 해버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해도, 무슨 말을 해도 성경을 기준으로 두고 하십시오. 누군가가 잘못된 말을 하면 그것을 지적해 줄 수 있는 그런 수준의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목사를 바라보고 목사를 기준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교인과 하나님 사이에 목사가 끼어 있으면 안됩니다. 장로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님도 교인들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목사에게 불만인 사람들은 장로님을 부추기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 장로님은 옳고 그름의 판단도 없이 교인들에게 끌려갈 때 그것이 교회를 잘못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뜨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하면 신앙생활 하는 길입니다. 이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17강 민 11:24-30 여호와의 신 97.6.8


교회에 가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믿음으로 살아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라'는 말일 것입니다. 저도 목사가 아닌 일반 성도로서 교회에 다닐 때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 말을 들으면서 저의 마음에 찔리는 것은 새벽기도 나가지 않고, 성경을 제대로 보지 않고, 예배에 가끔 빠지는 일 등이었습니다. 이런 찔림이 새벽기도에 나가고, 성경을 하루에 몇 장씩 정해놓고 보게 되고, 예배는 절대 빠지지 않음으로서 자동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찔림의 원인들이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나 자신의 결심에 의해서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신앙생활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기억하고 목회를 나와서 설교를 할 때도 이러한 신앙생활, 믿음을 무척 강조하였습니다. 그때부터도 헌금얘기는 유치해서 일년에 한번정도 할까말까했지만 교회 봉사에 대한 얘기, 새벽기도에 대한 얘기, 주일오후, 수요일 예배에 참석하라는 얘기는 수도 없이 하면서 목회라는 것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밝히 보고 난 뒤에는 그런 말들이 사라졌지만, 그때는 왜 이러한 하나님을 깨닫지 못했던가에 대해서 가끔씩 아쉬운 마음을 가지곤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몰랐던 목사로 인해서 많은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짐을 안겨주고 그들에게 참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하지 못한 데에 대한 아픔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참된 것을 보게 하시고 또 주저없이 전하게 하신 믿음을 허락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삽니다. 만약 아직까지 참된 진리에 대해서 눈이 어둡다면 진리 아닌 것을 진리라고 설교하고 가르치면서 나혼자 멸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까지 멸망으로 끌고가는 사단의 하수인으로 남아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진리를 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경험이 있기에 저는 신자들이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무엇을 오해하기 쉬운가를 잘압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믿음으로 산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문제에 있어서도 신자들은 오해를 합니다. 저는 목사로부터 이 말을 들은 신자들이 그 말을 어떤 생각으로 받아들일지 충분히 상상이 갑니다. 그러면 은석교회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이란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까?

 

 

 

 

전통적인 생각대로라면 제가 예전에 가졌던 생각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일단은 생활을 신앙생활과 일상생활, 이렇게 둘로 구분 지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일상생활은 교회 밖에서 교회와 연관없이 살아가는 의식주에 대한 생활로, 신앙생활은 기독교라는 종교와 연관된 것으로서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결국 일상생활은 제외한 채 종교생활의 열심에 빠져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봉사를 열심히 하고, 기도도 부지런히 하고, 성경도 많이 보고, 예배도 빠지지 않음으로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러한 종교 행위들을 전혀 강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는다고 소리친 적이 없고, 성경보지 않는다고, 주일오후 수요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책망한 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것을 강조해 버리면 여러분은 제가 강조한 것을 실천함으로서 그것이 신앙생활인줄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여러분이 그것을 자기 편함으로 이용해 버리는 잘못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즉 목사가 강조를 안하니까 잘됐다는 식으로 그냥 자기 편안함에 빠져 살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여러분 편해라고 강조를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무엇을 해도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행위를 부지런히 한다고 해서 그것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종교행위에 상관없이 삶 자체를 말합니다. 즉 신앙생활, 일상생활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삶전체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물을 뿐입니다. 그런데 자꾸 종교행위를 신앙과 연관지어서 생각하면 삶속에 극히 일부의 종교행위를 포함시킴으로서 자신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버립니다. 이것을 제가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침에 큐티를 하고 기도를 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할 위험성이 많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행위를 그만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무엇을 한다 안한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전혀 의미를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한마디로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너무 애매한 말 같습니까?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산다'는 이 말이 여러분에게 너무 어렵게 들려진다면 전에도 언급한대로 여러분들이 그동안 몇가지 종교행위에 대한 실천을 신앙생활로만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살아라는 말이 애매하게 그리고 어렵게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린 두 주일 동안 이스라엘의 원망과 모세의 원망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원망은 자기들이 먹고 싶은 세상 음식이 없다는 것 때문에 발생했고, 모세의 원망은 개인주의적 신앙을 드러내는 결과라고 했습니다. 이 둘 모두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은 모습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둔다는 것은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래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주인을 자기로 삼고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함으로서 본래의 인간의 자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살아가는 그냥 일상생활이고 이스라엘이나 모세의 원망은 바로 이런 삶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사는 삶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이러한 삶에 치우쳐 살아가는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깊이 새겨들으셔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먹고 싶은 것이 없다고 해서 원망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몇 번 먹고 나면 먹기 싫어지는 법입니다. 하물며 이스라엘은 약 일년의 세월 동안 만나만을 먹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옛날 애굽에서 먹었던 음식이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애굽의 것을 먹고 싶어하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쉽게 그들을 욕할 수만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충분히 그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너무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만나를 일년동안이나 먹게 해놓고는 애굽 것을 먹고 싶어한다고 해서 재앙을 내리실 수 있는 것입니까? 아무리 원망을 했다지만 그 원망은 극히 당연한 원망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에 애굽의 것을 먹고 싶어하고, 원망했다고 해서 재앙을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원망할 조건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망할 조건이지만 하나님을 믿으니까 무조건 원망하지 말라는 것은 억지입니다. 원망할 조건이지만 원망이 나오지 않는 것이 믿음이지 억지로 참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의지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문제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자기 마음대로 사먹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자기 마음대로 사서 가지면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즐거움으로 삼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인줄로만 압니다. 때문에 자기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지 못할 때 자신의 환경에 대해서 원망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원망에 재앙을 내리신 것은 자기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즐거움의 전부가 아니라 다른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때문입니다. 다른 기쁨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것 먹고, 갖고 싶은 가지고, 입고 싶은 것 입으면서 사는 것이 행복의 전부인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 살아가는 목적을 입고 먹고 가지는 것에만 두고 살지 않습니까? 이것은 짐승과 같은 수준의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것이 채워져야 비로소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진다고 해서 그것이 여러분을 구원시켜줍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자꾸 그런 것에 매여 살아갑니까? 차원이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이라는 세계를 바라보지 않고 살기 때문에 원망이 나온 대로 원망해 버리고 불평이 나온 대로 불평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원망이 나온 대로 원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재앙을 받게 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참된 이스라엘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신이란 여호와의 영, 즉 성령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먹고 싶은 애굽의 음식이 없다고 원망을 끄집어 낸 이스라엘 사람중 그들을 대표할 수 있는 장로 칠십 인에게 신이 임하게 하십니다. 즉 칠십 인은 이스라엘 전부를 대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칠십 장로에게 신이 임하게 하신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전부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칠십 장로들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해서 먹고사는 것만이 사는 길이 아님을 보여주시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지만 그들의 삶의 전부는 여호와가 아니라 먹고사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한 칠십 인을 내세웁니다. 신이 임한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예언을 했습니다. 예언을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말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였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기 몸에 매여 사는 이스라엘에게 신에 붙들린 자의 사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신이 임한 자로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세상을 사는 자는 세상것 마음대로 하고 산다고 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고 살게 됩니다. 또 다른 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자의 삶입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29절에 보면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선지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선지자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입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 붙들려 있습니다. 선지자치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계획한대로 살아간 자가 없습니다. 말도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말만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삶을 원하십니다.

 

 

 

 

내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내것은 없습니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의 것입니다. 우린 여호와의 것을 여호와의 마음에 맞게 사용할 뿐입니다. 내 돈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내 몸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했다는 것은 '너희들 마음대로 못산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임했을 때는 예언을 하지만 신이 떠나면 예언을 못합니다(25절). 또 신이 임하는 것도 하나님 마음대로이지 우리가 신이 임하도록 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진중에 있던 두 사람에게도 신이 임한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그 녹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에 머물고 회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신이 임하였으므로 진에서 예언한지라"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칠십 인을 회막에 모이게 하셨는데 두명은 어쩐 일인지 모이지 않았고 그냥 진중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오지 않고 그냥 집에서 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 같으면 누구에게 성령이 임해야 옳습니까?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자에게만 성령이 임해야 옳지 예배도 안드리고 놀고 있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신은 진중에 있는 자에게도 임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신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신 대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자격을 보고 주시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성령 받기 위해서 기도한다거나 어떤 방법을 구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성령 받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하고 있기는커녕 예수를 핍박하고 있던 자였음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칠십 인의 장로를 따로 뽑아서 그들이 회막에 있든 있지 않든 하나님의 뜻대로 신이 임하게 해서 자기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까? 회막에서만 예언을 한 것이 아니라 진중에서도 예언을 한 것은 회막이든 진중이든 상관없이, 즉 교회이든 교회 밖에서의 생활이든 상관없이 신이 임한 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지 못할 자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다 선지자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모두가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 되어서 자기 몸을 위해서 자기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놀고 싶다고 내 마음대로 놀고, 내 입이라고 내 마음대로 말하고, 내 돈이라고 내 마음대로 쓰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 따라 사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기를 소원하십시오.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지기를 소원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사는 길입니다. 세상을 여러분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왜 자꾸 여러분이 주인 되어서 육신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십니까?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앙이 잘못되어 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것은 내 인생은 하나님이 주인이니까 내 마음대로 살지 않겠다는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의 음성을 기다리거나 꿈을 꾸면서 계시를 받아라는 뜻이 아닙니다. 날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옛사람의 습관과 행실을 버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만나만 먹어서 싫증이 나는 그런 환경에서 비록 애굽의 것이 먹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고 해도 그런 삶을 통해서 애굽이 전부가 아니라 약속의 땅이 우리의 전부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원망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여러분이 지키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헛수고하는 것이며 그만큼 고통만 더할 뿐입니다.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여러분은 단지 하나님께 사용되어지고 성령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선지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육신을 죽이며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일을 스스로 자원해서 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무엇을 소망하며 삽니까? 저는 여러분께 이것을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여러분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성령이 함께 한 자로서 육신을 죽이며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이 필요로 하신 곳에서 사용되어지는 선지자의 삶을 원하십니까? 과연 어느 것이 마지막때 사는 길이겠습니까? 어느 편에 서서 살아가시겠습니까? 잠시 동안의 재미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18강 민 12:1-16 온유함 97.6.15


사람은 뭔가 큰 기쁨이 있을 때 상대적으로 작은 일에는 너그러워지고 양보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양보할 수 없고 분명히 짜증내고 다투었어야할 일도 다른 큰 기쁨을 가져다 준 일이 있을 때 그 기쁨 때문에 짜증내고 다툴 일도 양보해 버리는 여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유가 얼마나 가겠습니까? 잠시후면 그 큰 기쁨도 별 것 아닌 것으로 되어버리고 다시 예전처럼 짜증내고 양보하지 못하는 삶으로 되돌아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살자는 강조를 많이 합니다. 의학자들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들 합니다. 사회가 바빠지고 항상 뭔가에 쫓기는 듯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에 힘쓰라고 말합니다. 마음의 여유가 사람을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여유를 가진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를 원하면서 삽니다. 지금처럼 쫓기는 듯한 삶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등산도 가고, 여행도 하고, 취미생활도 하면서 느긋하게 마음 편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굴뚝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금방 뒤쳐지게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자신은 쉬고 싶고 여유를 부리고 싶지만 내 옆사람이 쉬지 않고 있고 여유를 부리지 않기 때문에 자신 또한 쉴 수 없고 여유를 부리지 못합니다.

 

 

 

 

요즘 고액과외가 사회문제로 등장해 있습니다. 그런데 한달에 몇백만원하는 도저히 믿지 못할 과외를 자식에게 시키기 위해서 어머니가 부업까지 해야 하는 그런 지경에서 항상 어머니들의 말은 '시키고 싶어서 시키는 것이 아니다. 남들은 다 시키는데 나혼자 안시키면 그만큼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즉 내 자식만 뒤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고액과외를 몰고 온 것입니다. 이런 사회 현상 때문에 몇백만원짜리 과외를 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액과외를 비판하면서도 나도 뒤쳐질 수 없다는 생각에 몇십만원 이라도 들여서 과외를 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영어회화다 컴퓨터다 해서 바쁘게 살아갑니다. 모르면 뒤떨어진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떠나지 않고 있고,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는 나보다 앞서 있는 누군가 때문에 편치 못하고 괴롭고 부담으로 남아 있는데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편안한 마음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결국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아니 더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은 더욱 더 조급하고 성급하게 됩니다. 일을 시작하면 금방 좋은 결과를 얻으려고 애를 쓰고 그러다 보니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지고 결국 스트레스만 쌓여갈 뿐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한낱 바램으로 그쳐버린채 오늘도 내일도 뭔가에 쫓기듯 바쁘게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로 인해서 양보보다는 조그만 일에도 짜증내고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매스컴에서 양보하며 살자고 캠페인을 한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가 없는 이상 되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있으려면 그만큼 상대적으로 큰 기쁜 일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쁜 일이 있다고 해도 그 기쁨이 계속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런 큰 기쁨을 줄만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것도 기대하기 힘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사람은 항상 여유없이 평안없이 자기의 목표와 유익을 위해서 양보도 없고 너그러움도 없이 짜증과 다툼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여유를 가지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여유라는 것은 거의 모두가 가진 자의 여유입니다. 돈에 불편이 없고, 자식들이 문제없는 환경 속에서 누리는 여유입니다. 저는 이것을 가진 자의 여유, 가진 자의 너그러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여유가 아닙니다. 가진자에게서 나타나는 느긋함일 뿐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만약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다면 바로 가진자로서의 느긋함이 아닌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환경으로 인한 느긋함에서 온 여유는 환경이 바뀌면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마음의 여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원하는 여유로운 삶은 모두가 환경이 충족되어짐으로 주어지는 여유입니다. 가진자로서의 여유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여유로운 삶을 위해서 바쁘게 살아가고 조급하게 살아가고 쫓기듯 살아가다 보니까 여유를 얻기 위해서 여유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과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고 계시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마음의 여유란 세상의 것을 소유함으로서 누리는 여유나, 세상의 큰 기쁨이 주어짐으로서 누리는 여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러한 여유는 진정한 여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엇인가를 소유함으로 누리는 여유라는 점에서는 맞습니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소유냐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유가 있습니까? 타인의 유익을 위해서 양보하고, 세상을 너그럽게 살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뭔가에 쫓기듯 여유를 잃어버리고 양보하지 못하고 항상 염려하고 근심하며 조그만 일에도 짜증을 내고 불화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은 분명 신자로서 찾아야 할 것을 찾지 못하고 가져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여유는 세상의 것을 포기함으로서 주어집니다. 세상의 것 때문에 여유를 잃고 산다면 세상의 것을 포기해야 여유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자는 세상 사람같이 땅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평생 여유를 모른 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유란 세상을 중심으로 사는 자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여유는 세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카타콤의 순교자'란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로마가 기독교인을 탄압하면서 기독교인을 불에 태워죽이고, 맹수에게 먹히게 하는 탄압 속에서도 기독교인들은 지하묘소에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암흑으로 가득찬 동굴 속에서 그들은 평화를 누렸습니다. 지하묘소에 있는 무덤의 묘비에는 한결같이 '평화 속에 잠자다'는 문구가 적혀있었습니다. 이것이 박해 속의 초대교인들의 마음의 여유였습니다. 언제 붙들려서 불에 태워죽고 맹수에 먹혀 죽을지 모르는 형편 속에서 동굴에 몰래 모여서 기뻐하며 떡을 떼고 잔을 나누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죽으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 때문에 기뻐했던 사람들입니다. 도저히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가지는 여유는 오직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앙이 너무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교회를 탄압하는 세력도 없고, 좋은 예배당에서 편안하게 예배드리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예배의 소중함도 잃어버리고, 온통 마음이 세상에 쏠려있다 보니까 말씀을 들으면서도 생각은 다른데 가있고, 결국 세상사람과 차이가 없는 별볼일 없는 신자로 전락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뭔가 특이함이 없습니다. 내세울 것도 없고, 보여줄 것도 없는 너무 가난한 상태입니다. 자신만만하게 믿음은 이런 것이라고, 신앙의 즐거움은 이런 것이라고 말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과 똑같이 마음의 여유가 없이 쫓기듯 살면서 똑같은 일로 화내고, 똑같은 일로 짜증내고, 똑같은 일로 양보 못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특별한 좋은 것이 우리들 마음에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초대교회 박해자들의 죽음도 두렵지 않은 뜨거운 소망, 세상이 알지 못한 비밀이 우리들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 비밀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사는 삶의 비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에 대해서 비방하는 내용입니다. 비방의 원인으로 드러난 것은 모세의 결혼입니다. 아마도 모세의 아내였던 미디안 제사장의 딸인 십보라가 죽어서 재혼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재혼의 상대가 구스 여자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구스 여인이란 구스 지방의 여자라는 뜻인데 왜 구스 여자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겠습니까?

구스란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를 말합니다. 결국 구스 여인은 흑인 여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이 여자는 애굽에 노예로 끌려온 여자로 추정됩니다. 노예란 천한 여자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입니다. 그런 여자가 이스라엘이 해방되어서 애굽에서 나올 때 같이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 집안의 일로 생각한다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의 이웃에 아들이 흑인 여자와 사랑해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한 아들이 있다고 합시다. 여러분들은 제 삼자의 입장에서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사랑한다면 할 수 있나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는데 결혼시켜야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아들이 그렇다고 합시다. 어떤 태도를 보이겠습니까? 따라서 미리암과 아론의 모세를 비방하는 태도는 그렇게 무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적 입장에서 볼때입니다. 우린 항상 시각이 달라야 합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해도 세상적인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결혼은 단순한 한 개인의 결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서 보여주는 결혼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천한 구스여인과 결혼하게 함으로서 우리에게 뭔가를 알리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는 아무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는 자에게만 보여지는 것이 계시입니다. 그래서 계시를 깨닫는 것은 우리의 지혜가 아니고 성령의 지혜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계시를 깨닫는 것은, 즉 말씀을 깨달아 안다는 것은 말씀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말씀 때문에 참을 수 없는 것이 참아지고, 말씀 때문에 양보할 수 없는 문제가 양보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말씀에 다스림 받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좋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것을 가지면서 사는 것이 당연한데 말씀을 대할 때마다 세상 것보다는 하나님으로 즐거워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있는 자이고 비밀을 간직한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말씀으로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한 개인의 삶에도 계시를 담아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구스여인과 결혼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흔히 신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주님을 찾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잘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교회왔다갔다 한다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실제로 한 개인의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가 가장 천한 여자인 구스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큰 삶을 가져오는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 미리암과 아론은 오히려 모세를 비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자의 자리에 있습니까? 모세의 자리입니까? 아니면 미리암과 아론의 자리입니까?

 

 

 

 

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합니다. '승하더라'는 것은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즉 모세의 온유함이 지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 뛰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온유함의 증거로서 구스여인을 취한 것을 보여줍니다. 온유함을 성격으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온유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남들은 용납할 수 없는 일에도 얼마든지 자기를 양보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때문에 온유란 곧 마음의 여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마음의 여유없이 산다면 그 이유는 온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마음으로, 온유함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은 문제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을 가지고 생각해 보십시다. 보통 세상 기준은 사위를 구하든 며느리를 구하든 자기 체면과 가문을 생각하고 구합니다.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흠이 없고 번듯한 집안과 사돈을 맺기를 원하고 자랑할만한 사위 며느리를 원합니다. 제아무리 서로가 사랑한다고 해도 부모의 기준에 어긋나면 반대합니다. 이것을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드라마에 보면 이런 경우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럴 때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지 말고 자신의 입장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마음의 여유가 없이 세상 기준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반대하고 거절할 수밖에 없는 것을 양보하는 것이 곧 온유인데 과연 이런 온유함이 쉽게 보여지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다스려지는 자라면 가능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2절에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고 합니다. 아마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은 모세의 결혼문제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에게도 하나님이 말씀을 내리시는 선지자인데 왜 자기들과 의논하지 않고 모세 혼자 일을 처리하는데 대한 불만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온유하지 못하고 마음의 여유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자기의 위치가 낮아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결혼 문제도 미리암이나 아론과 의논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의논을 미리 했다면 새삼스레 결혼 문제를 이유 삼아 비방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문제에서도 모세 혼자서 결정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비방에 대해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데 세사람을 회막으로 불러 모아서 말씀을 하십니다.

 

 

 

 

6-8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한마디로 모세는 너희와 다르다고 하십니다. 다른 선지자는 꿈으로 이상으로 알리고 말씀하셨지만 모세는 대면하여 명백히 말했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라는 사람을 아주 특별하게 대우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모세가 뭔가 특별해서 특별하게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통사람과 똑같은 모세라는 한 인간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서 보여주는 그릇으로 사용하실 뿐입니다. 따라서 모세라는 인간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 담겨 있는 계시가 특별한 것입니다. 즉 모세를 통해서 드러난 계시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지 모세라는 개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닌데도 미리암과 아론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모세가 자기들과 의논하지 않고 혼자하는 것이 불만이었던 것입니다.

 

 

 

 

온유란 하나님을 알고 말씀에 순종하는 그 자체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천한 구스여인과 결혼함으로 보여주고 자신에 대한 비방에도 그냥 넘어가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러한 온유함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8절에 보면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형상을 본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형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확히 알기는 힘듭니다. 어쨌든 모세를 온유함으로 이끌 수 있을 정도의 놀랍고 귀한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여호와의 형상이란 신약에서 예수님을 말합니다(고후 4:4, 골 1:15). 그렇다고 모세가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고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구속자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그 광채를 본 자라고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의 귀하고 찬란하고 영광된 것을 보고 아는 자이기 때문에 세상의 것은 얼마든지 양보하고 용납하고 넘어갑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구약에서 온유한 자는 모세입니다. 신약에서 온유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위치에서 구속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천한 자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천하다고 무시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고 자기와 똑같은 자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예수님의 온유도 가장 천한 우리들을 용납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천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신부라고 하십니다. 또 장차 우리와 혼인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다시 오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온유입니다.

 

 

 

 

그런데 미리암은 비방합니다. 하나님은 미리암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문둥병에 걸리게 합니다. 문둥병은 저주받은 자의 표시입니다. 결국 미리암 너도 구스 여인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미리암의 비방은 '나는 다르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생각이 모세의 온유를 이해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유함으로 사는가를 묻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늘의 귀하고 영광된 것을 아는 자로서 세상을 초월하고 살아가는 믿음, 그 온유로 사는지를 묻습니다. 여러분 온유로 사십니까?

 

 

 

 

그러나 우리의 삶은 너무나 마음의 여유가 없이 온유함으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초월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그만 일 때문에 상처를 입고 짜증을 내고 양보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내 자식은 달라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보다 못한 자는 무시하게 됩니다.

 

 

 

 

마음을 하늘에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것을 안다면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기뻐하고 평안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온유입니다. 그 뜻에 복종하고 온유함으로 살기를 소원하고 힘쓰십시오. 우린 너나 나나 똑같은 문둥병자였습니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었다면 모두 저주 아래서 죽어야 할 자였습니다. 십자가 덕분에 이렇게 말씀을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기쁨을 아는 자로서 온유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9강 민 13:25-33 무엇을 보는가? 97.6.22


여러분!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천국이 좋습니까? 아니면 육신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풍부한 세상이 좋습니까? 이 질문은 둘 중에 어느 쪽을 더 사랑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즉 '세상도 좋지만 천국이 더 좋다'는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양다리 걸치는 답에 불과합니다. 대다수의 신자들은 세상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 '천국이 좋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소위 교인이니까 집사니까 자신의 종교체면을 위해서 할 수 없이 하는 말에 불과한 경우가 수두룩합니다. 거의 대다수가 이런 식으로 천국을 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봅니다.

 

 

 

 

혹, 자기 체면이 아니라 진짜 천국이 좋아서 좋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그냥 막연하게 천국은 좋은 곳이니까 좋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고의적으로 여러분의 믿음을 부정하거나 깎아 내리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현 교회의 실태를 정직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남의 믿음을 그렇게 함부로 판단할 수 있습니까?'라는 반감을 가질 수도 있음을 잘 압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제 생각만 가지고 남의 믿음을 함부로 판단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분명히 뭔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해서 판단하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마 13:44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비유는 천국이란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인데 어느 정도의 가치냐면 자기의 모든 소유와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가치입니다. 따라서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는 자기의 소유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 자기의 소유를 사랑하고 지키면서 동시에 천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분명히 천국은 자기의 소유를 버리는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에 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천국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모든 소유를 다팔아서 살만큼 가치 있는 천국입니까? 천국을 쉽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천국은 싸구려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나라에 어떻게 죄인된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함부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천국은 하나님의 허락으로만 들어갑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이 죄를 지은 후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서 지키게 하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천국에 가는 것은 아무런 장애가 없는 탄탄대로가 아닙니다.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넓은 길은 분명히 멸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천국에 가겠다고 하면서 넓은 길을 고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소유를 다 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유도 지키고 천국도 내것으로 만들고자 하기 때문에 좁은 길을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넓은 길을 가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믿고 천국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행위 아닙니까?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곧 예배, 십일조 등이 아닙니까? 이것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입니다. 소유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하고 괴로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의 결과는 멸망임을 아십니까? 수없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을 드린 것인데 모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신다면 왜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습니까? 설마 멸망을 각오하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교회에 나오실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멸망이 아니라 천국을 원하고 있으면서 잘못된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마귀의 시험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신자가 천국 가도록 그냥 두고만 보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는 것이 마귀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언제나 천국보다는 세상을 보도록 만듭니다. 세상의 것이 보일 때 자연히 천국에 대한 관심이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천국에 대한 관심에서 희미해져 있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종교행위에 열심을 일으킵니다. 그렇게 되면 열심히 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은 믿음이 있고,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소망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넓은 길을 가면서 구원받는다고 착각하는 마귀의 시험에 빠진 모든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지 묻고 싶습니다. 멸망을 각오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가십시오. 하지만 교회에 나오면서 멸망을 각오하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저는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가 멸망을 두려워하고 천국을 소망하고 나오신 분임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좁은 길에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천국은 분명히 좁은 길입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포기해야 할 정도의 좁은 길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내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고자 하는 열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열심이 있습니까?

 

 

 

 

옛날에 이 열심을 보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갈렙입니다. 물론 여호수아도 포함되지만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나타나지 않게 때문에 갈렙의 이름만 언급하겠습니다.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본문을 간단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앞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그냥 들어가면 되는데 그들은 정탐꾼을 보내서 미리 그 땅을 탐지하고자 합니다. 그 땅에 사는 거민들의 숫자나 힘의 여부, 가구수 등을 조사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왜 미리 탐지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현실에 대해서 자기들이 판단하고 자기들 나름대로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의도입니다. 지금 인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나 똑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해라 의지해라고 목이 터지도록 외치지만 결국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 경험과 판단이 아닙니까? 결국 이스라엘이 정탐꾼을 보낸 것부터가 이미 인간을 믿고 있는 불신앙입니다.

 

 

 

 

인간은 현실을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합니까? 힘입니다. 힘이 있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경험과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강한 자 앞에서는 자연히 굴복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애굽의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정탐꾼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신 것도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들어가지 못한 것은 순전히 인간들이 자기의 경험과 기준으로 살아가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결과임을 보여주고, 그 속에서 누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는 자인가를 가려내기 위해서입니다.

 

 

 

 

12명의 정탐꾼은 약속의 땅을 40일 동안 이곳 저곳을 조사하고 돌아옵니다. 그 땅은 과연 좋은 땅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광야와는 비교도 안되는 낙원과 같은 땅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23절의 말씀과 같이 "포도 한송이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매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취하니라"고 한 대로 광야에는 없는 것들로 풍부했습니다. 그렇지만 정탐꾼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고민과 걱정을 잔뜩 안고 돌아옵니다. 그 땅은 비록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지만 그 안에는 이미 힘이 센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8절에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라고 합니다. 그 좋은 땅이 아무도 없이 비어있는 땅이면 아주 손쉽게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는 것보다 더 쉽게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인데 안타깝게 그 땅에 이미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에 비해서는 엄청난 힘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들에 비해서 자신들은 메뚜기 같았습니다. 그들은 낙심합니다. 자기들의 경험으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더 힘이 있어야 했는데 자기들은 힘이 없고 메뚜기 같습니다. 그래서 정탐꾼은 약속의 땅을 악평합니다(32절).

 

 

 

 

그런데 갈렙은 달랐습니다. 30절에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 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라고 말합니다. 갈렙이 가나안 거민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정탐꾼과 같이 똑같이 그들을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한쪽은 낙심을 하고 갈렙은 들어가면 이긴다고 합니다. 갈렙이 이스라엘에게는 충분히 가나안 거민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들어가자고 말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갈렙은 무엇을 보았기 때문에 다른 정탐꾼은 들어갈 수 없다고 한 땅을 걱정 말고 들어가자고 한 것입니까?

 

 

 

 

지난 시간에 미리암이 모세를 원망한 것 때문에 문둥병이 걸린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미리암의 문둥병은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 받습니다. 갈렙은 이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갈렙을 제외한 정탐꾼들의 현실은 자기들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가나안 거민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갈렙이 보고 있는 현실은 미리암을 문둥병 걸리게 하고 고쳐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렙과 다른 정탐꾼의 서로 다른 현실입니다. 가나안 거민이 대장부 같고 힘이 세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 현실은 보지 못하고 가나안 거민이 있다는 그 현실에만 집착을 합니까? 그러니까 낙담을 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땅에 대해서 악평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천국에 가지 못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어떤 현실을 바라보고 삽니까? 나는 메뚜기고 저들은 대장부라는 현실을 바라보고 삽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평생을 낙담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현실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은혜로서 우리를 도우시는 현실을 바라보십시오. 이것이 신앙입니다. 대장부가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 아니겠습니까?

 

 

 

 

천국은 쉬운 나라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 보내시기 위해서 장애물이 될만한 모든 것을 하나하나 치워주시고 빨리 들어오라고 손짓하면서 기다리고 계시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은데 어려운 일이 많아서 힘들어서 못믿겠다는 것도 단지 변명에 불과합니다. 천국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욕심을 포기하기 전에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세상에서 대장부로 힘이 있는 자로 살아야겠다는 자신의 포부,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힘있는 자와 자신을 비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낙심하고 결국 하나님께 나와서는 나도 대장부같이 되게 해달라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우린 너무 욕심이 많습니다. 욕심이 많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이 분수에 지나치게 많이 가지려고 하는 것이 욕심이 아니라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 편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그 자체가 이미 욕심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욕심이 천국을 가로막습니다. 마귀는 인간의 욕심을 동원시켜서 천국에서 멀어지도록 합니다.

 

 

 

 

주의할 것은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욕심과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는 경쟁입니다. 경쟁이 없으면 발전할 수 없습니다. 경쟁의 기본은 욕심입니다. 욕심이 없는 경쟁 또한 없습니다. 경쟁은 누구를 이겨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 것도 목표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 자체가 다릅니다. 경쟁은 세상에 목표를 두고 있지만 신자는 목표를 그의 나라와 그 의에 두고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이것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목표를 두고 살기 때문이고, 자기 경험을 가지고 판단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힘있는 자가 제일이다는 경험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힘이 되는 것에 욕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고, 또 하나님도 잘 믿고 싶은 욕심도 있는데 이 두가지 욕심을 다 충족시키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쪽보다는 자기의 욕심 쪽으로 스스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신자된 자라면 교회로 모이는데 지장을 주는 다른 피곤할 일은 얼마든지 삼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욕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은 주일 오전으로 만족해버리고 나머지는 온통 자기의 뜻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무엇에 관심을 두고 교회로 오십니까?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천국이라는 보화를 살 각오를 가지고 오십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가 없이 교회에 오고 하나님을 찾으신다면 그런 사람은 정탐군들 같이 조그만 어려움이 있어도 금방 낙심해 버리고 불평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등을 돌려버리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내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내 즐기고 싶은 것 다 즐기고, 얻고 싶은 것 다 얻어가면서 실컷 놀다가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알면 알수록 들어가기 힘든 나라입니다. 대장부가 지키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고 살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현실을 바라보고 산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세상은 불완전합니다. 불완전 것을 바라보지 말고 완전한 천국을 바라보며 사십시오.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들을 가로막는 어떤 장애물들이 힘이 센 대장부 같이 보인다면, 그것은 아직 여러분들의 눈에 세상만 현실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거민은 결코 대장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세상적인 시각에서 보면 힘이 센 자들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면 대장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렙의 시각이었습니다. 갈렙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편에 서서 현실을 바라보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려움을 현실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로 보일 것입니다.

 

 

 

 

 

20강 민 14:1-12 원망 97.6.29


사람들은 하나님을 든든한 '보디가드'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디가드의 역할을 하나님이 해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위 하나님을 '나를 지키시는 분'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일을 도우시고 나의 몸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믿으면 믿은 것만큼 갚아주시는 하나님으로 여깁니다. 복을 받지 못하고 어렵게 사는 것은 뭔가 신앙에 문제가 있어서이지 신앙생활만 제대로 하면 모든 어려움은 물러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부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시고 산성이시라고 했습니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면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보디가드 역할을 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오늘 새벽 예배에 유다서를 말씀드렸습니다. 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누구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었다고 말씀합니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지키십니까? 아닙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지키심을 입은 자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지키심을 입으며 삽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키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흘리신 그 피를 위해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기 위해서 사단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헛된 일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분고분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을 따라갈 선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그리스도를 벗어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시간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키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지 결코 여러분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할 때 믿음은 필연코 잘못 오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수많은 교회가 믿음을 왜곡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도 결국 하나님은 누구를 위하여 일하시는가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는 분이라면 어려움도 환난도 없이 편안하게 세상을 살다가 천국에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수많은 사람들, 선지자들,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 누가 과연 편안한 삶을 누렸습니까? 누가 하나님 덕분에 복을 받아 세상 것을 풍족히 누리면서 인생을 살았습니까? 오히려 매맞고 수치 당하고 죽기까지 해야 했던 인생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이 과연 신앙이 없어서 벌을 받느라고 그런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부름 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런 인생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계획을 위해서 수많은 선지자 제자들은 그런 어려움과 고통으로 빠져들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매맞을 상황에서 매를 맞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수치 받을 상황에서 수치를 받지 않도록 건져주시고, 죽음의 상황에서 죽음을 면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매맞게 하시고 수치 당하게 하시고 죽음도 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시는 것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바로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살았지 개인의 삶의 행복을 위해서 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라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부름을 입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부름을 입어서 성도가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면 왜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 개인의 일을 위해서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확실한 답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행여 두 가지 모두를 취하지는 마십시오. 사람은 하나님의 일과 개인의 일 두 가지 모두에 관심을 두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 개인의 일에 관심을 두면서 하나님의 일을 언급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일을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핑계이고 수단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이 돈을 벌어야 하는 정당성을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라고 갖다 붙이는 것입니다. 즉 '구제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돈을 벌어야 하나님의 일도 많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 '선교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 때문에 선교헌금을 보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돈이 없으면 어떻게 구제하고 어떻게 선교하는가? 선교헌금을 보내지 못하면 다 굶어죽을 것이 아닌가?'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맞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하나님의 일은 돈이 한다는 결론이 되어 버립니다. 돈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못한다는 것이 됩니다. 결국 돈있는 부자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되지 않습니까?

 

 

 

 

선교하러 가서 돈이 없어 굶어 죽는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들은 건강하게 살아서 열심히 여기저기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만을 선교라고 여기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굶어 죽는 것도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주님을 위하는 삶입니다. 물론 일부러 굶고 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위해서 사는 성도의 모습인가를 바로 알자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포부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포부를 위해서 일합니다. 가령 목사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포부로 삼은 사람이 목사가 되었다면 무엇을 위해서 일하겠습니까? 자기 포부를 이루기 위해서 일하지 주님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쫓겨나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야 하는데, 자기 포부가 살아있기 때문에 자신의 포부를 도와줄 여건이 있는 교회에서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교회에서 쫓겨 나오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전한 자라면 아무 소리 안하고 나오는 것이 주님을 위해 사는 자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포부가 살아있다면 순순히 나오지 못합니다. 교회를 자신의 포부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한마디로 누구를 위해서 사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여러분을 성도로 부르시고 또 지켜주시는 것인데 여러분은 과연 누구를 위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십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사십니까? 확실한 답을 내리셔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와 자기를 버리고 사는 자의 차이가 어떤가를 잘 배우시기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는 두 가지 현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들어가야 할 약속의 땅에 대장부 같은 힘있는 자들이 지키고 있는 현실과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현실입니다. 가나안 땅을 탐지한 정탐꾼들 중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을 대장부가 지키고 있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정탐꾼들은 대장부라는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바라봅니다. 그 결과는 낙심입니다. 그런데 낙심은 정탐꾼들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어가면 이긴다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듣지 않고 들어가면 죽는다는 10명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소리 높여 부르짖으면 밤새 곡하였습니다(1절). 이들은 울고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신앙의 한계였습니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어려움에 봉착하자 그들이 할 일은 낙심하고 한탄하며 우는 것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자기들의 입장만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하나님이 잘못 인도해서 이런 결과를 가져왔으니까 전부 하나님이 책임져야 한다는 식으로 울고 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들이 과연 진심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들인가라는 의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분명 이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을 향해서 가고는 있었지만 진심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소원하고 모세의 뒤를 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는 2,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 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인도가 잘못됐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인도일 바에야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스라엘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라면 끝까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간다'라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말씀한다고 해서 그것을 신앙이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 입장에서 제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지, 아니면 입술은 하나님을 부르지만 속마음은 세상을 향해 있는 것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실제 여러분들이 이스라엘과 같은 입장에 처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악담을 한다고 나무라지 마십시오. 이것은 물론 저를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에 대해서 전혀 갈등을 겪지 않았고 교회를 다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도 해보지 않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갈등을 해야 할 상황에 빠진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등과 고민을 겪어보지 못한 믿음은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을 신뢰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남들이 어려움 속에서 갈등하는 것을 쉽게 신앙이 없는 행위로 단정해 버립니다. 때문에 우리의 속마음이 드러나고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갈등하고 고민해야 하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추구하고 바라보지 말아야 할 것을 바라보고 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간다고 하면서 항상 애굽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대장부 같은 가나안 거민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9절에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니"라고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오히려 그들은 '우리 밥이라'고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나머지 이스라엘 사람들, 이들은 왜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까? 한쪽은 자기만 보고 있고 한쪽은 하나님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를 인도하시면서 수많은 기적을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베푸신 이적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어려웠을 때 하나님이 도우시면 그것으로 기뻐했고 지나면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도우셨는가는 잊어버리고 눈앞의 어려움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편안하십니까? 별 어려움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십니까? 고민하고 갈등해야 할 상황이 없어서 좋아하십니까? 편안하다고 그 편안함을 즐기시지 마십시오. 편안할 때 어려움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즉 편안할 때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추구하고 원해야 할 것을 확고히 하고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하면서 편안함을 즐기는 자신이 되지 않도록 말씀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삶을 부지런히 살아갈 때 어떤 일이 닥친다고 해도 쉽게 낙심하고 울고 한탄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땅이 삶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자신의 편안함이었고 세상의 복이었습니다. 내 한몸 편하게 잘살면 그것으로 모든 것을 만족해 버리는 자들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을 향해서 광야를 걸어가면서도 약속의 땅만 도착하면 어떤 어려움도 없이 애굽에서보다 더 좋은 인생을 살 줄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기들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시는 분이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장애물을 보자 마자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을 하고 애굽을 그리워한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에 가지 못할 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위해서 삽니까? 여러분 자신의 인생입니까? 아니면 주님을 위해서 삽니까? 주님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세상 일 때문에 주님께 소홀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천국을 바라보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여러분 자신이 과연 천국에 합당한 자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셔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이 되어야 약속의 땅으로 인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쉽게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천국으로 인도함 받기를 원하신다면 먼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인가를 검토해야 합니다. 천국에 간다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기를 버린 인간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행동을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으로 규정짓습니다(11절). 하나님보다 대장부를 더 두려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의 대장부 같은 자들도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한 분으로 여겨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봤으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아니한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신 이유는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세상에 보이시기 위함인데 백성이란 자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들은 백성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풍요로운 삶을 도우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성도로 부르신 것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여러분에게 힘든 일이 있게 하십니다. 어떤 장애물을 앞에 두고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을 통해서 살아계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보여지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자기를 바라보면 낙심과 원망과 울음만이 남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볼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것을 고생이라 여기지 마십시오. 나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나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도구라 생각하고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럴 때 어떤 힘든 일이라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21강 민 14:36-45 산자와 죽은자 97.7.6


사람이 교회에 나온다는 것을 종교적인 문제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즉 교회에 나오는 것을 '나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라는 차원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찾아 나오는 것과 기독교라는 종교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세상은 교회에 나가는 사람을 향해서 '저들의 종교는 기독교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을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분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 것을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로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들어온 여러분들이라면 믿음과 종교를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으로서의 기독교는 분명 하나님과 연관이 있지만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전혀 구분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귀가 제공하는 기독교라는 종교에 푹 빠져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향해서 우려하는 것은 여러분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매이는 것입니다. 종교에 매이게 되면 하나님을 전혀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단지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만을 머리에 담아 두고 있을 뿐입니다.

 

 

 

 

우린 지금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우상을 섬기는 인간의 종교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의 공통점은 자기를 위한 신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신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인간이 말하는 신은 도덕과 윤리와 양심을 좋아하고, 그 가르침대로 착하고 바르게 살면 그 대가로 세상에서 복을 주고 죽어서도 살기 좋은 나라에 들여 보내주는 신입니다. 이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생각입니다.

 

 

 

 

모든 종교를 보면 신의 가르침과 인간의 생각이 일치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이 원하는 것을 인간편에서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종교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종교가 서로 다르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교리적인 문제를 접어두고 다른 종교의 가르침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틀렸다고 반박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불교라는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선한 것이 동일합니다. 또한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악도 동일합니다.

 

 

 

 

여러분이 '나는 기독교인이다'는 생각을 버리고 여러분이 알고 있는 모든 종교의 가르침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생각과 틀린 것이 있습니까? 인간의 상식에 어긋난 가르침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모든 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면 세상의 그 누구라 할지라도 틀렸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상식과 소원에 일치합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는 각각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를 말하면서 '인간은 한 혈통'이라는 것만 생각하지만 사실 아담과 하와는 인간의 한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하나를 말합니다. 인간의 죄는 인종, 민족, 시대, 모든 것을 초월해서 동일합니다. 인종에 따라 다르지 않습니다.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죄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 아담의 죄가 지금 이 시대에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물론 본질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아담의 죄가 그대로 보여진다는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게 된 본질적인 동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은 같은 죄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비록 종교가 다르다고 해도 보여지는 죄는 같으며, 같은 죄의 본질 속에 있는 인간이 추구하고 선호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공통적으로 같은 것을 추구하고 선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하며 죄에 대한 징벌이 있고 선에 대한 상이 있습니다. 죄와 선도 종교에 따라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죄를 말하고 같은 선을 말합니다.

 

 

 

 

종교는 인간의 상식과 일치한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을 돕고 인간을 위한 종교로 시작하고 마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의 본질은 자기 중심인데 자기 중심인 인간이 종교를 만든다면 그 종교는 인간을 위한 종교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인간의 상식과 일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종교 문제를 길게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기독교가 종교화되는 것을 아주 많이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기독교가 점차 종교화되어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종교화되어 있는 기독교에서 종교의 틀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의미로 하는 말입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생명이 없습니다. 단지 인간의 야망만이 담겨 있을 뿐입니다. 영생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에 대한 약속만 보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일치하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거부하고, 인간의 생각과 모든 상식을 부숴 버리는 종교가 아닌 기독교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으로서의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와 전혀 공통점이 없으며 오히려 그런 인간의 종교를 고발하고 심판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것은 오직 죄인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윤리, 도덕적으로 바른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도 얼마든지 착하고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는 착하고 바르게 살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착하고 바르게 사는 인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두고 사는 인간 되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여러분께 다시 한번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상식 선에서 이해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한다면 굳이 성령의 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상식이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지혜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미 인간의 상식이나 지혜는 모두 무시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머리 속에서는 인간의 상식이 떠나지를 않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를 너무 쉽게 생각해 버리고, 하나님도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셨다면 제일 먼저 여러분의 상식선에서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부분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도 아울러 명심해야 합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이 만들어 낸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 즉 우상에 불과합니다. 그런 하나님 아닌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생명을 안겨주지 못합니다. 애당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신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 신에 도취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요즘 일본에는 사이버 인간(여자)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사이버 인간이란 인간이 컴퓨터를 이용해서 가상으로 만들어 낸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컴퓨터 상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앞으로 토크쇼를 진행하는 사회자 역할까지 하게 한다고 합니다. 인간이 조작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상 인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호하는 모습으로 얼마든지 가공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을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앞으로 그 가상 인물인 사이버 여자를 사랑한다는 남자까지 나설 줄도 모릅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도 이와 같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가상 신을 신으로 여기며 섬깁니다. 그리고 그 신이 자기들과 함께 하고 자기들을 도와줄 것으로 착각하며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신이 먼저가 아니라 언제나 인간이 먼저입니다. 인간을 위한 신이고 인간을 위한 종교이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는 인간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양보해야 하고, 인간의 소원에 하나님이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의 틀 안에 있는 현재 기독교의 실상 그대로입니다. 여기에는 생명은 없고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그래서 제가 종교의 틀을 벗자고 말씀을 드리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자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상식에 순종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면 저는 여러분을 전혀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생명의 길에 대해서 소개한다고 해도 여러분의 마음이 다른데 있다면 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하나님을 말씀 드려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이 가 있는 쪽으로 움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생명이든 죽음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것이 가나안을 정탐한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상식으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인간의 상식으로 믿었습니다. 대장부같이 힘센 사람과 힘없는 약한 사람이 싸울 때 힘없는 자가 진다는 것은 인간 상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은 무시하고 자기들의 상식대로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인간의 상식을 무시한 행동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상식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상식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그들의 상식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중 누가 죽고 누가 삽니까? 37,38절을 보면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그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고 합니다. 10명의 정탐꾼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33절의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말씀을 보면 나머지 백성들도 40년동안 서서히 죽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살리시는 분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죽이시는 하나님도 같이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것만 남겨 놓으시고 나머지는 다 죽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자가 죽고 어떤 자가 사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죽이시는 인간은 자기 상식대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상식이 앞서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된다고 하는 것도 자신은 안된다고 소리칩니다. 하나님은 버리라고 하는데 자신은 버릴 수 없다고 버팁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상식과 부딪히는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끝까지 자기를 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죽음이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상식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들어갑니다. 제 아무리 믿음의 열심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상식에서 나온 열심이라면 하나님은 전혀 마음 두지 않습니다. 애당초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은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39절부터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말을 듣고 자기들이 범죄 했다고 소리치면서 아말렉과 가나안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승리가 아니라 패배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인과 싸우겠다고 쳐들어갔는데 하나님은 왜 함께 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않느냐, 가나안 땅을 차지하느냐 차지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갈 만한 사람이 되었느냐를 중요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가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단지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를 원하신다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단결해서 가서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하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즉 땅을 차지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신의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신의 흉내를 낸다는 것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상식을 가지고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단어를 갖다 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없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온다고 해서 다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살려주신 그런 인간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의 힘에 눌리지 않고 하나님을 우선으로 하고 말씀에만 순종하는 인간만이 삽니다. 내 상식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인간, 그런 인간만이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인간의 힘을 모아서 가나안 땅을 정복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성공을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종교사업을 열심히 해서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고 엉뚱한 일에 매달리면서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원칙이 있습니다. 만약 그 누구라도 이 원칙에서 벗어난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제아무리 사람들이 보기에 선하고 교회에서 크고 위대한 일을 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자는 멸망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그 원칙을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원칙은 인간이 자신의 힘과 노력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우고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이 원칙 안에서만 기독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원칙을 벗어나면 그것은 생명으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한낱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불과할 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원칙대로 움직이고 살아가야 할인간입니다. 이 원칙을 따라 살지 않을 때 그 결과는 망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잃어버린 원래의 안식을 찾아주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 상식대로 움직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우지 않고 자신의 힘과 능력을 앞세우고 있는 결과를 잘 배워야 합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앞세우기 때문에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힘과 능력을 앞세우면 자기보다 힘이 세고 능력이 많아 보이는 상대 앞에서는 기가 죽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지 마십시오. 인간이 자신의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일이 이루어지는 모든 계획과 방법까지도 내 생각대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인간 종교와 다른 점도 이것입니다. 인간 종교는 모두 자신의 소원을 들고 신을 찾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법까지도 다 자기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자기의 소원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오직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순종하기만 원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방법이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편하고 좋은 방법으로만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엄청난 장애물을 우리 앞에 두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 힘으로 싸워서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싸움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만을 구할 뿐입니다. 울음이 나오는 순간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종교의 옷을 벗지 못하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닌지 자신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종교의 틀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하나님의 뜻은 무시한 채 인간의 소원과 경험과 상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들어 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도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상식을 가지고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실 것이다'라고 제멋대로 지어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주장하는 하나님은 모두다 교회의 성공을 원하고, 윤리와 도덕적인 인간, 양심적인 인간 되기를 원하는 하나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것이 신자로서 자신의 할 일을 다한 것으로 여깁니다.

 

 

 

 

인간은 도덕이든 윤리든 양심이든 다 자기 유리한대로 이용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만약 누가 도덕과 윤리와 양심을 말한다면 과연 그 사람이 자신이 도덕과 윤리와 양심 때문에 해를 입어야 할 상황에서까지 그것을 주장하고 내세우는지를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상식과 경험은 다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서 힘 쓸 것이고,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머물러 살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22강 민 15:32-41 여호와 너희 하나님 97.7.13


얼마 전에 TV에서 고려대 교수를 지냈던 김용옥 씨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강의 내용중 '오늘날의 독재자는 어린아이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저는 그 말에 많은 공감을 하였습니다. 그분은 어린아이를 현시대의 독재자로 키우는 사람들은 바로 부모들이라고 질타했습니다. 소위 부모라는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독재자'로 키우고 '막가파'로 키운다는 것입니다.

 

 

 

 

요즘 부모님들의 자식에 대한 열의는 아주 대단합니다. 내 자식을 사회에서 번듯하게 출세시키기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다는 식으로 자식을 양육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뛰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매사에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데, 자신감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기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을 치기보다는 감싸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율성을 키워준다는 취지아래 자식의 행동을 통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매를 들지 않으려고 하고 자식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분별하게 뭐든지 들어줍니다. 자식이 사랑스럽고 귀엽다는 표시를 기죽이지 않고 통제하지 않고 야단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어떻게 매를 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부모들이 자식을 독재자로 만들어 갑니다. 모든 일을 자기 중심으로 하려고 하고, 부모가 자기 말을 다 들어주듯이 남들도 자기 말에는 다 복종을 해야 하고, 무엇이 잘못된 일이고 남에게 피해가 되는 일인가는 전혀 무시해 버린 채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면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것이 요즘 아이들이 아닙니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어른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길거리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은 어른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어른에 의해서 통제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습니다. 자유라는 명목 아래 자기가 우상이 되어서 자신의 생각을 따라 자신의 희망사항대로 움직이려고 하고, 어른은 무조건 자기들의 생각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여깁니다. 원하는 것은 무조건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쩔쩔맵니다. 부모가 자식의 눈치를 보며 삽니다. 심부름을 하나 시켜도 '나 공부해요''나 숙제해요'라는 말 한마디에 꼼짝을 못합니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내세울 무기는 공부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습니다. '나 공부해요'라는 말 한마디가 부모를 꼼짝못하게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자녀가 우상이 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저는 오늘날 자녀문제에서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은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심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자식에 대해서 어떤 관심을 가지고 사십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훌륭한 자녀로 성장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다 좋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녀로 성장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제가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부모가 내 자녀가 교회를 출석했는지에 대한 관심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시험 때라서 교회에 갈 수 없다고 하면 '알았다. 교회가지 말고 공부해라'고 하는 것이 지금 부모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앞서 말한 대로 공부한다는 것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시켜 버리는 세태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녀들의 문제점이 아니라 바로 부모의 위치에 있는 어른들의 문제점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야 자기들의 생각과 상식대로 자녀를 키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아는 분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모든 명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여러분은 자식을 키우는 문제에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야하는데 과연 지금 여러분들은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자녀들을 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부모된 여러분들부터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자녀들을 대하고 있습니까? 자녀를 의식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제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지옥을 두려워한다고 하면서도 자식이 지옥으로 가는 것은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식이 지옥으로 가도록 부추기고 도와주고 있는 지금 현실을 볼 때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식이란 부모된 자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라고 있는 자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께 자식을 보내주신 것은 자식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을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의 신앙의 나태함과 게으름에서 깨어나라고 자녀를 보내신 것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귀하게 여기는지를 자녀를 통해서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자녀가 여러분을 지켜봅니다. 자녀를 바라보면서 내 자식이다, 귀엽다, 사랑스럽다고 하면서 무조건 예뻐하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을 아는 자녀로 키워야 한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고민하는 자세를 먼저 가져야 합니다. 자녀를 보면서 자신의 신앙의 삶을 점검할 수 있는 부모가 진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부모일 것입니다.

 

 

 

 

제가 자녀문제를 말씀드리는 것은 그동안 하나님에게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많이 언급했는데 과연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시는지 자녀를 양육하는 것을 통해서 생각해 보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지, 아니면 여전히 내중심으로 사는지는 여러분이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는 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산다면 공부, 출세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믿음을 우선으로 할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믿음보다는 공부, 출세를 앞세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위해서 믿음의 문제를 잠시 보류하는 것도 인정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대학 합격한 후에도 얼마든지 신앙생활 할 수 있으니까'라는 생각이 하나님을 위해서보다는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공부를 한 후에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결국 육신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믿음보다는 자신을 앞세우게 되어버릴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목사, 장로, 집사이고 봉사를 잘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신앙이 좋다는 칭찬을 수없이 받으면서 자녀에게는 공부를 우선으로 하고, 출세를 요구하고, 공부를 잘해야 남에게 기죽지 않고 살 수 있고, 공부가 네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라고 가르친다면 과연 그것이 믿음이 있는 모습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이며 진심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자녀를 지옥으로 밀치고 있으면서 과연 자녀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이 신앙을 부서뜨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르치지 않고 오직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만 가르칩니다. 교회가 신자를 독재자로 막가파로 만들어 갑니다. 신자 한사람 한사람이 교회에서 독재자로 군림합니다. 목사만 독재자가 되어 가고 목사만 막가파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가 자기에게 미쳐있습니다. 오직 자기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자기가 우선입니다. 세상만 막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도 신자도 막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뒷방이나 차지하고 있는 늙은 어른 정도로 여깁니다. 어른은 어른인데 자식에게 꼼짝하지 못하고 주는 밥이나 먹고 헛기침이나 하고 있는 어른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도무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서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만을 강조하다보니까 신자들이 하나님을 산타클로스나 인자하신 할아버지 정도로 인식해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도 하나님을 여러분 마음대로 상상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해서 신앙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서우신 분이라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바로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민수기 15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일에 대해서 지시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유아를 제외하고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14:23,24,31). 그런데 하나님이 새삼스럽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일에 대해서 지시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가나안 땅에서 살 수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말씀하심으로서 지금의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는가를 교육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세력을 더 두려워한데 있습니다. 대장부가 눈에 보이자 이제는 가나안 땅이고 뭐고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어서 빨리 하나님이 약속하신 좋은 땅에 들어가서 편안하게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마음만으로 가득차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애굽의 재앙에서 살아났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제사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제대로 인식해야 했던 것입니다. 제사란 하나님이 죄인된 인간과 함께 하실 수 없고 만나실 수 없기 때문에 특별히 마련하신 만남의 장소라고 했습니다. 무턱대고 제사드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물을 바치면서 제물의 죽음 속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제물이 죽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의 운명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물을 드리면서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며 말씀에 복종하고자 할 때 그 자가 바로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범죄했을때는 하나님께 그냥 나오지 못합니다. 소나 양을 대신 잡아 죽여야 합니다. 죄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무서우신 분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 예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를 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발견하고 모세와 아론과 회중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죽이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에 나무했다고 죽이라고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만약 지금도 이 말씀같이 한다면 누가 과연 하나님께 나오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안식일을 범한 사람을 온 회중이 죽이도록 하심으로서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합니까? 먼저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규례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안식이란 애초에 하나님의 안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안식의 조건은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존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안식이 깨어진 것은 인간이 말씀 안에서 살지 못하고 자기에게 눈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의 규례를 말씀하신 후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심으로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잊지 말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이라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이것을 아는 자만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를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몸을 더 귀하게 여겼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가나안에서 살 수 없는 모습으로 가르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 사람은 나무쯤이야 하면서 가볍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리 가볍게 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은 전혀 용납하지 않으신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가볍게 들려집니까? 지금 우리가 주일에 나무하러 가지 않았다고 해서 안식일을 잘 지키고 있는 것일까요? 주일에 교회에 출석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출석한다고 해도 세상을 여러분의 수고와 노력으로 살아가려고 힘쓴다면 그것이 곧 안식일을 범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린 지금 이스라엘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다 죽는다는 것을 듣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나무 하나 한 것을 가지고 죽이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떨림이 없고 두려움이 없고 당당하게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는 힘없는 늙은이 정도로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멸망의 모습임을 기억합시다. 여러분의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도저히 주일에 교회에 나올 수 없는 형편이 아니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나와야 할 이유는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일에 교회에 나옴으로 '나는 내 수고와 노력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 산다'는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주일에 육신의 일 때문에 교회를 뒤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내 수고와 노력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내 힘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가지를 지시하십니다. 이스라엘 대대로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옷을 멋있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39,40절에 보면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고 합니다.

 

 

 

 

청색 끈 달린 술을 옷에 붙여서 옷을 입을 때마다 술을 보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키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술을 달아라는 말씀이 안식일에 나무한 사람을 온 회중이 돌로 죽인 뒤에 나온 것으로 보아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에 날마다 대하게 되는 옷을 통해서 여호와의 계명을 어긴 자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생각나도록 하시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39절에 방종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통제하지 않고 자기의 욕망에 이끌려서 내 마음에 드는 대로 내 보기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방종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방종한 삶의 모습을 그대로 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죄에 대한 점검도 없이 우리들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제멋대로 살아가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떠들고 있는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들에게 술의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찾으십시오. 인자한 할아버지, 산타클로스 같은 하나님은 사단이 제공하는 가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은 그리스도의 피안에서만 베풀어집니다. 방종으로 살면서 무턱대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생각하는 것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언제나 말씀을 여러분의 옷의 술로 삼고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자신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말씀이 들려질 때마다 소홀히 듣지 마시고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로 들으십시오. 직장을 다니건, 사업을 하건, 자녀를 키우건 모든 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만 바라보고 쫓아가십시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신자다운 신자가 되는데 관심을 두시기 바랍니다.

 

 

 

 

 

23강 민 16:1-14 고라의 반역 97.7.20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을 가볍게 보지 말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방종으로 치닫는 삶이 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이 나에 의해서 다스려지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마음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마음에 두고 살기 때문에 모든 일을 자기 중심적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면서도 천국을 말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기 중심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교회 일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증거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살아있지 않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부인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를 좇으려거든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가 살아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린 하나님을 경외한다거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산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신자이면서 불신자와 전혀 차이가 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자기에게 기쁨이 되고 자기에게 즐거움이 되고 자기에게 편하고 이득이 되는 쪽으로 모든 행동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옛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자도 이러한 인간의 본성과 똑같이 살아갑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인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불신자와 전혀 다를 바가 없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란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 변화된 자를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을 죄로 여기고 그 본성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늘의 인간의 성품으로 세상을 살고 싶어서 애를 쓰고 갈급해 하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이런 신자라면 일년 365일을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서 살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하나님이 생각날 때만큼은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려고 할 것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그 표가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놓치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견디지를 못합니다.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자기에게서 사라질 때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다시 돌려달라고 외치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 중심적인 옛사람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고 자신이 주인 되지 못하고 팔팔하게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은 결코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전혀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자의 표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순간 여러분 자신은 없습니다. 마음이 뜨겁고 꿈에서 무엇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체험을 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만 내 가슴속에 살아계시고 그 순간 나라는 존재는 전혀 의미가 없어지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중심으로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는데 설교를 들으면서, 성경을 보면서, 기도하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잘사느냐는 관심은 사라져 보이지 않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느냐는 그 마음만 남아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없이 천당 가보겠다고 교회 나오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조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가 부인되지 않고 설교를 듣기 때문에 나를 위한 하나님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를 반역한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자들이었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가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레위의 자손 고라와 르우벤 자손인 다단 아비람 온이 서로 결탁을 해서 다른 족장들과 함께 모세를 반역합니다. 3절에 보면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라고 합니다. 지금 이들은 모세에게 '너하고 우리하고 다른 것이 뭐냐 우리도 거룩한 자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계신데 왜 너만 잘난척하고 높은 자리 차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무조건 거룩한 자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거룩한 자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교회에 나온다고 그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것을 잘 듣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누구에게 함께 하시냐를 깨달으시고 '나는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실 만한 신자인가'를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반역을 한 사람들은 비록 우리도 거룩하고 하나님이 함께 한자라고 큰 소리쳤지만 그들은 전혀 거룩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는 9,10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신 것이 작은 일이 아니어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는 말씀에서 고라는 봉사의 일을 크고 작은 일로 구분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은 작은 일, 모세와 아론이 하는 일은 큰 일로 여기고 우리도 너희와 다를 바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너희들만 높은 자리에서 우리를 다스리느냐고 반역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큰 일 작은 일을 따지게 됩니다. 사람이 크게 보이는 일을 더 하고 싶어하고 작은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것은 크게 보이는 일에 칭찬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칭찬이 많다는 것은 자기에게 기쁨입니다. 보람이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부인되지 못하고 살아있기 때문에 큰일에는 앞장서려고 하지만 작은 일에는 무관심하고 그런 일은 못배우고 나보다 못한 사람이나 하는 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다단과 아비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이들을 부르자 거절합니다. 그러면서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13절)고 공격합니다.

 

 

 

 

다단과 아비람은 르우벤 자손입니다. 르우벤은 혈통적으로 장자지파입니다. 때문에 이들이 고라에게 동조하게 된 것은 아마 자신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사람은 장자지파가 되어야 하는데 장자지파가 아닌 모세가 지도자로 되어있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불만이 지금 모세가 자신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여보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즉 백성을 잘 살게 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우리들의 왕으로 행세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야당이 대통령을 공격할 때면 언제나 백성들을 잘살게 해주지 못하는 것을 들고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고라나 다단 아비람 모두는 모세의 지도자직이나 아론의 제사장직이 인간 마음대로가 아닌 하나님이 세우신 것임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맡은 일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자기가 부인되지 않는 채 하나님을 찾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모세를 반역한 이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교회를 찾아 나왔으면서도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가 살아있는채로 나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 중심으로 판단합니다. 자기에게 좋으면 좋은 것으로 여기고 자기에게 나쁘면 나쁜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절대로 손해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사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부인한 채 이 자리에 나오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은 마음에 두고 있다면 여러분 자신은 이 자리에 없는 것입니다. 내 계획, 내 욕심은 이 자리에 없습니다. 오직 있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만 남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린 채 봉사하는 것입니다. 고라는 레위인으로서 제사를 돕는 일을 맡았습니다. 고라가 만약 자기를 잊어버리고 하나님만 마음에 두는 삶을 살았다면 자신이 맡은 일이 어떤 일이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기쁨과 감사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고 자기를 여전히 마음에 둔채 일을 했기 때문에 모세에게 불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만 마음에 둔 신자로 하나님을 찾읍시다. 그럴 때 우리는 나 자신의 편함과 이익을 우선으로 하기보다 형제의 유익을 우선으로 하는 신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무엇을 하든 그 마음은 형제의 유익을 위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생각이라면 그 일이 무엇이든 당장에 중지하십시오. 귀찮으면서도 할 수 없이 하는 일은 서로에게 부담만 줄뿐입니다. 일을 하고 나서도 즐거움이 없습니다. 나 한사람의 수고와 노력으로 여러 사람이 즐거움을 얻는다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채 일을 하기 때문에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자기 자랑이 나오고 상대적으로 적게 했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일을 작은 일로 여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시기하게 되고 '네가 뭔데'라는 반역의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자는 자기가 부인된 채 하나님을 찾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신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만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산다면 누구에게 욕을 먹든,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하든 실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망이든 낙심이든 그런 마음은 모두가 자기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은 바로 이런 마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남을 도와주고 좋은 일한다고 해서 다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만족과 보람을 중심으로한 이웃사랑이 많습니다. 참된 이웃 사랑은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합니다. 자기를 잊어버린 채 자기의 행동이 남에게 피해가 안될까 먼저 생각하게 되고, 자기 행동이 남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은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보여지는 일을 하려고 하게 됩니다. 자기가 깨어지지 않은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에서 하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린 채 이웃을 생각하며 아무리 작게 보이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신자에게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이런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없이는 아무리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불신자와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신자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큰소리 칠 것입니다. 그것이 고라 일당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는 아무리 신자라고 소리쳐도 여전히 옛사람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겉으로는 신자이면서 여전히 옛것에 매여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옛것에 아니라 새것에 매여 사는 자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옛것에 매여 있으면서 새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옛것을 충족시켜주는 새것을 원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옛것을 다 버리고 오직 주님으로만 만족하겠다는 의도가 없습니다. 옛것을 가진 채로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말에서도 행동에서도 오직 옛것만 보여질 뿐입니다.

 

 

 

 

자기를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봉사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해도 고라 일당의 반역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불평과 불만 속에서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만족을 위해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라고 하면서 불신자와 똑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항상 자기 사랑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실체를 폭로합니다. 그러나 옛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우리들은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만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자기를 잊고 오직 하나님만 마음에 두고 살고자 힘쓰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24강 민 16:31-40 심판 97.7.27


지난 금요일 저녁에 TV에서 '자연의 분노'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습니다. 자연의 재해가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을 다루면서 상대적으로 자연이 얼마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다룬 내용입니다. 회오리바람이 한 번 지나가자 그 자리에는 집도 논도 남아 있지를 않았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집이라도 힘없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폭풍이 지나가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폭풍과 함께 해일이 밀려오자 도시가 물에 잠겨 버립니다. 특히 화산이 폭발하면서 흘러내리는 용암이 한마을 전체를 덮어버리고 이러한 자연재해로 인해서 수만명,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는 내용들은 참혹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고작 재해의 징조를 미리 알아내고 대피하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과학의 힘은 재해를 막는 것이 아니라 재해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자구책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연의 힘이라고 하고 자연의 분노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어찌 자연의 힘이겠습니까? 바로 온 우주를 다루시고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TV를 보면서 노아 때에 일어났던 홍수 심판을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홍수 심판에 대한 얘기를 들으실 때 어느 정도의 두려움과 참혹함을 느끼십니까? 온 세상이 물에 잠겨 버리는 홍수 심판은 여러분이 눈으로 보았거나 겪었던 어떤 자연의 재해에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홍수 심판을 까마득한 아주 먼 옛날의 일로만 여겨버립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우습게 여겨버립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단지 유년부들에게 해주는 옛날 성경 이야깃거리에 불과했습니다. 웃으면서 들었고 재미있게만 들었습니다. 과학자들에게는 홍수 심판이 역사적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노아의 방주를 찾아다니는 흥밋거리, 연구거리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노아 때 사람들이 당한 그 참혹함은 잊어버린 채 말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노아 홍수를 자신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얘기로 여깁니다. 하나님이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마음이 느긋해진 것일까요? 그렇다면 불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약속은 기억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너무 무시하고 살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내 몸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았습니다. 심판을 하나님의 농담 정도로 여기면서 살았습니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온 시뻘건 용암들이 온 도시를 뒤덮으면서 모든 것을 남김 없이 태워버리는 장면들은 마치 마지막 때의 불심판을 연상케 했습니다. 그날 TV를 통해서 방영되는 내용들은 자연을 통해서 심판을 외치는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으로 들려졌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을 마음에 두고 사십니까? 그렇다고 심판에 대한 무서움과 두려움에 갇혀 지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을 마음에 두자는 것은 과연 마지막때 누가 살아남는 자가 되느냐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고라의 반역을 말씀드렸습니다. 고라는 모세에게 '우리도 거룩하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너희만 지도자의 일을 하느냐'고 대항했습니다. 고라는 자신들은 당연히 신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높은 지위나 눈독들이고 빨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편안한 삶을 살기에만 바쁜 그들이 스스로를 신자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도 이스라엘 민족이고, 또 홍해를 건넌 체험도 했고, 하나님께 부름 받아서 성막의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라 무리에게 모세는 과연 누가 하나님이 택하신 자인지를 구별하기 위해서 특별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 방법은 아론과 고라 무리 모두가 각기 향을 피운 향로를 가지고 회막문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멸시한 자는 땅이 입을 열어서 그들을 삼켜버릴 것이라고 합니다(29,30). 모세의 말이 끝나자마자 땅이 갈라집니다. 그리고 고라의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물건까지 다 삼켜 버립니다(32,33). 또한 고라를 추종했던 250명의 족장은 들고 있던 향로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을 태워버렸습니다(34,35). 여러분, 이렇게 무섭고 참혹한 심판의 이야기를 그저 담담하게 들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옛날 모세를 반역했던 고라의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고라의 이야기는 마지막 때에 심판으로 소멸되고 음부로 들어갈 자는 어떤 사람이냐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본문에서 마지막 때에 누가 심판으로 들어갈 자이고 누가 남을 자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한마디로 고라같이 하면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고라같이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고라같이 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도자에게 대항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혹 이 본문을 가지고 어떤 목사들은 교회의 성도들이 함부로 목사에게 대항하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는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고라 일당을 보십시오. 지도자인 모세에게 대항하다가 멸망을 당했습니다. 여러분도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에게 대항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목사에게 대항하면 그 죄를 하나님이 갚으실 것입니다" 이러한 엉터리 말로 성도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고라는 모세에게 대항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것을 여호와를 멸시한 것으로 말합니다. 30절에 보면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으로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속을 삼켜 산채로 음부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의 말대로 땅을 열어서 그들을 삼킴으로 고라 일당이 여호와를 멸시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모세에게 대항한 것이 여호와를 멸시한 것이 됩니까? 그것은 모세가 중보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중보자란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과의 관계를 위해서 하나님이 중간에 세우신 분을 말합니다. 물론 그분은 신약에서는 예수님이시지만 지금 본문에서는 모세가 그 역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4:13-18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으로 인해서 그들을 멸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기도로 인해서 그 멸망을 면하게 됩니다. 이것이 모세가 중보자의 위치에 있음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로 인해서 살아난 자들입니다. 14:19절에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옵소서"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죄악으로 인해 멸망당하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그들이 신앙생활을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중보자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라 일당이 모세를 대항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세우셔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동안 그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는데 자기들도 모세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자 모세의 자리를 자기들도 차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즉 자신들도 거룩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얼마든지 모세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세우신 중보자 때문에 살고 있음을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땅으로 하여금 입을 벌리게 하셔서 고라와 그 식구들을 삼켜버리게 하시고 그 일당들은 불로 소멸시켜 버린 것은 한마디로 땅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노아 홍수의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홍수가 끝나자 노아는 여호와를 위해서 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과 새를 취하여 번제를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시는 사람의 죄 때문에 세상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인간의 죄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를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가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재난으로 죽는다면 살아있는 나나 죽은 그 사람이나 똑같은 죄인입니다. 뭔가 하나님 앞에서 잘한 것이 있기 때문에 살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은혜로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중보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 중보자의 희생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존재성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고라도 자신이 은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했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면서 자기의 존재성을 부각시켰던 것입니다.

세상이 보존되는 것은 정결한 존재의 희생 때문입니다. 신자가 해야할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무시하는 자는 땅위에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고라 일당이 멸망당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38절에 "사람들은 범죄하여 그 생명을 스스로 해하였거니와 그들이 향로를 여호와 앞에 드렸으므로 그 향로가 거룩하게 되었나니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편철을 만들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리라 하신지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고라 일당을 태워죽인 향로를 쳐서 편철을 만들어서 그 편철로 제단을 싸라고 명하십니다. 편철이란 함석같이 납작하게 편 쇠를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룩한 향로가 편철로 변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역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때마다 제단을 싸고 있는 편철로 변한 향로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편철을 볼 때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스스로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38절에 향로로 편철을 만드신 이유가 그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표는 십자가입니다. 영광의 주님께서 이 땅에 영광의 모습으로 오시지 못하고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셔야 했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며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은혜를 은혜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주를 바라보면서 저 피는 나의 욕심 때문에 나의 죄 때문에 흘려지는 피임을 아는 순간 진짜 나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마지막에 남을 자는 바로 이들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발견하십니까? 그 부끄러움 속에서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깊이 깨달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활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욕심 속에서 살아가는지, 내가 얼마나 사랑이 없는 자인지, 내가 얼마나 은혜를 무시하며 사는 자인지 여러분의 삶속에서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라 일당의 심판을 바라보면서 '잘못했으니까 심판 받는구나'로 끝나면 아직 뭔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고라 일당의 심판 속에서 바로 나 자신이 땅속으로 빠져 들어가야 할 존재이고 향로의 불에 의해서 타죽어야 할 악한 존재인데 중보자의 희생이 나를 살리고 있다는 것까지 깨달을 때 그 사람이 곧 은혜를 아는 자인 것입니다. 이런 신자는 세상을 살아갈 때 결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고라와 같이 나도 거룩하고 나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다는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은 주님의 죽음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모른다면 인간에게서 나올 것은 원망이요 불평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고라 일당의 심판을 보고서도 은혜를 알지 못한 자의 입에서는 원망만 나옵니다. 41절부터 보면 모세의 말에 의해서 고라 일당의 장막에서 떠남으로 심판을 면하게 회중들이 다시금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원망의 내용은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입니다. 즉 모세와 아론 너희들 때문에 저 사람들이 죽었다는 원망입니다. 심판받아 죽은 자들을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우깁니다. 철저하게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들의 생각과 고집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고라 일당과 똑같이 모세를 반역합니다. 그들의 눈으로 고라 일당의 심판을 목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악한 죄인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로 인해서 백성들에게 염병이 발생합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에 향을 피워서 백성을 위해서 속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론이 산자와 죽은 자의 사이에 섰을 때 염병이 그치게 됩니다. 결국 또 다시 그들은 중보자의 은혜로 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죄인인 우리는 중보자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입니다. 우리는 심판을 보면서도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우매한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어떻게 스스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중보자의 희생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인 것을 한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심판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십시오. 마지막때 남는 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잊지 마십시오. 고라 일당이 심판을 받아 음부에 빠졌다면 고라같이 하는 자는 틀림없이 마지막때 음부에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만약 고라 일당의 심판이나 이스라엘이 염병이 들어서 14,700명이 죽었다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모세에게 반항했다고 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신 것을 이해하실 수 없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심판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의 심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여유 있는 마음으로 심판 당한 자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심하다'는 원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심판을 절대로 잊으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 심판에서 여러분을 은혜로 붙들고 계시는 중보자의 피흘리시는 희생의 손길을 가슴 깊이 느끼셔야 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부끄러움을 찾으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고 죽여도 할말없는 그런 존재가 이렇게 주님께 나와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아니 중보자의 은혜를 아신다면 굳이 제가 감사하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자연히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시간도 나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사람은 그것으로 행복이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참으로 복된 신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가지고도 누릴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 자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신자로 살아가기를 기도하며 힘씁시다.

 

 

 

 


25강 민 17:1-13 죽은 지팡이 97.8.3


신자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자신을 가리고 있는 모든 옷을 다 벗은 채 나와야 합니다. 실제 옷을 벗고 나오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발견할 수 있도록 외식적이고 가식적인 것을 다 벗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7절에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씀대로 하면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보시고 계시는데 실상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을 바라볼 때 아무 부족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왜 주님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세상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세상의 조건들 때문에 자신들의 실상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치장하고 있는 세상의 조건들이 아무 부족함이 없는 자신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을 바라보면서 흐뭇해하고 스스로 만족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조건들을 주셔서 남들 앞에 기죽지 않고 당당히 나설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가리고 있는 세상의 모든 조건을 벗긴 채 라오디게아 교회를 바라보셨습니다. 부요한 것, 그들이 부족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준 세상의 모든 것을 벗겨버린채 그들을 바라보신 주님의 눈에 비춰진 라오디게아 교회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다시금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신가를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할 때 하나님을 잘 안다고 여기십니까? 신자가 하나님을 잘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라오디게아 교회의 실상을 자신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곧 지금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인간의 실상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많은 것들이 입혀져 있습니다. 누가 입혀준 것이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 입은 것입니다. 자신의 약점, 단점, 부끄러운 부분을 적당히 가리워 줄 뭔가를 걸쳐 입습니다. 그것은 지식일 수 있고, 도덕일 수 있고, 재물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종교 행위일 수 있고, 아름다운 외모일 수도 있고, 공부 잘하는 자식일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옷들을 입은 채 하나님을 찾아 나오기 때문에 '나는 부족함이 없다'라고 소리치면서 죄인인 인간의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신학을 공부해서 제아무리 학문적으로 이론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박학다식(博學多識)하게 말할 수 있다고 해도 하나님 보실 때는 '너는 나를 모른다'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바리새인이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대해서도 도저히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종교 행위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큼 철저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결국 인간의 실상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옷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옷에 가려진 자신들의 실상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의를 자랑했고, 반면에 세상의 옷을 입지 못하고 있던 세리들, 창녀들은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조건을 가지고 상대방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행위가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자신 스스로에게 갇혀져 갈 뿐이었습니다. 자기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뿐입니다. 자신은 부족함이 없고 의로운 자로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다같은 죄인이 아니라 나는 죄인이라도 너보다는 선한 죄인이다는 생각에 갇히게 됩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줄 옷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너희는 죄인이다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지만 그 말은 자신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말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다면 몇 년을 살고 무슨 일을 하며 살았든 그 삶은 의미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적당한 도덕과 적당한 양심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살았다고 해서 인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점잖은 채 한다고 해서 신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점잖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옷을 벗고 모이는 곳입니다. 자신을 가리는 옷을 입은 채 모였을 때 우리에게서는 계속해서 편견과 경쟁과 오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편견과 경쟁과 오만이란 인간이 입고 있는 세상의 조건들, 자신을 가리고 치장하기 위해서 걸치는 옷을 서로 비교하고 자랑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헛됨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끝까지 자신을 위장하고 감추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인생은 결국 헛됨으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헛된 존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에게, 자신의 인생에 가치를 두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치 없고 헛된 존재인가를 발견하기를 원하시는데 말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헛됨을 아는 사람이요, 불신앙인은 자신의 헛됨을 모르기 때문에 이것저것 세상의 옷을 입어서 자기를 가꾸고 위장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오실 때는 세상의 모든 옷을 벗고서 나오십시오. 여러분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워서 보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옷을 벗고서 자신의 실상을 바로 보시면서 나오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죽은 자로서 나오셔야 합니다. 목사로서가 아니라 죄인된 자로서 나오셔야 합니다. 장로로서가 아니라 죄인된 자로서, 죽은 자로서 하나님을 찾으셔야 합니다. 그럴 때 생명 되신 주님께만 나 자신을 맡기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피난처이고 산성이 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 기도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최고의 기도일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종교라는 또 하나의 옷을 입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기독교라는 종교를 자신을 위장하고 감추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지 마십시오. 그 어떤 이유로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용납할 수 없으셨던 이유도 종교를 통해서 자신을 위장했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의인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도덕이란 옷을 입기 위해서도 아니고, 양심이라는 방패를 가지기 위해서도 아니고, 인격이라는 담을 세워서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그런 가식의 옷을 다 벗어버리기 위해서, 인간 본연의 실체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모든 편견과 오만과 경쟁이 사라진 채 한분 하나님에 대해서 한 마음으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종교 생활이 아니라 진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신을 말씀해 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모세와 아론에게 반역했던 고라 일당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고라 일당의 반역은 자신들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중보자에 의해서 살아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들도 자기 나름대로 세상적인 옷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세나 나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한 결과는 땅이 갈라져 그들을 삼키고 향로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을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우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못한 부분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자손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족장들에게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에 각 지파의 족장들의 이름을, 그리고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게 하신후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만나시는 증거궤 앞에 그 지팡이들을 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음날 지팡이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8절에 보면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고 합니다. 아론의 이름을 쓴 지팡이에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살구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나머지 지팡이는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마른나무 막대인 지팡이가 하루사이에 움이 돋는다는 것도 이상한 일인데 하루 사이에 지팡이에서 열매가 맺는다는 것은 이 일은 분명히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에 도저히 의심을 가질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생명과 죽음을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즉 아론의 지팡이만 생명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죽은 모습이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모두 죽은 자이다. 그것이 너희들의 정직한 실체이다. 그런데 왜 자신의 존재에 가치를 두려고 하느냐?'는 것을 지팡이를 통해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상태에 있는 불쌍한 인간을 생명이 있는 나라로 보내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죽음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참된 생명을 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죽음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은 생명이 아니라 헛된 것에 불과한 자신의 가치를 부각시키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생명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목사가 있게 하시고 여러분을 교회로 모이게 하시는 것도 죽은 지팡이에 불과한 여러분들에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생명을 공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혹 세상에서 그럴듯한 옷을 하나라도 더 걸쳐서 자신의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을 가리면서 남이 자기를 알아주는데 관심을 두고 사시지는 않습니까? 그럴 때 여러분은 누군가가 자신보다 잘하거나, 높아지거나, 나보다 더 인정을 받을 때 그것을 참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라 일당과 같이 '네게 뭔데'라는 불평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싹이 나지 아니한 죽은 지팡이는 바로 우리들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죽은 지팡이는 얼마를 지나도 죽은 지팡이입니다. 죽은 지팡이에 꽃을 달고, 열매를 달아 놓는다고 해서 생명이 있는 지팡이로 변할 수는 없습니다. 옛말에 '개꼬리 3년 지나도 황모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죽은 지팡이는 교회를 몇 년을 나온들 죽은 지팡이 그대로입니다. 죽은 지팡이에 무엇으로 치장을 한들 역시 죽은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죽은 지팡이가 자신에게 꽃을 달고 열매를 달고서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살아있는 지팡이다'라고 스스로 자부심을 가진다면 과연 그 지팡이가 옳은 것입니까? 이 지팡이는 자신은 살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진짜 생명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지 않을 것이고 생명을 좇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와 여러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참된 생명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아니면 죽은 지팡이에 불과한 여러분 자신을 치장하기에 급급하십니까? 인간의 본질은 죽음입니다. 죽음에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비참함과 고통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죽음의 비참함과 고통을 세상의 것으로 가린채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부요하다 부족하다고 하면서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세상에서의 경쟁은 죽은 지팡이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죽은 지팡이는 한낱 죽은 지팡이에 불과한데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싸운다니 우습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을 헛된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은 지팡이가 아름다워봐야 그것 역시 꽃을 달아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 꽃은 조금 지나면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지팡이 자체에 생명이 없기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 시들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만족하며 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면 그것 역시 자신의 본질을 바라보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자신의 본질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비록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론이 살아 있는 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론도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이 죽은 자입니다. 아론도 아담의 후손으로 죽어야 할 죄인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아론의 지팡이만 살았습니까? 5절을 보면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론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아론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죽은 자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살기 위해서는 아론에게 나와야 합니다. 아론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론이라는 인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아론도 같은 죽은 자이기 때문에 아론이란 인간을 따라간다고 해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론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론을 택하셔서 아론을 통해서 생명의 길을 제시하셨기 때문에 아론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생명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지 아론이란 인간 자체를 따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손길을 잡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세와 아론을 반역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지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생명의 손을 내밀고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도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저를 이 교회에 세우셔서 저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생명의 손을 내밀고 계실 뿐입니다. 저를 따르지 마시고 저를 통해서 제시되는 생명을 붙드십시오. 여러분이 저를 따르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저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저는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선한 목사도 되지 못합니다. 삯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저를 통해서 전파되는 말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을 깨닫고 그 생명의 손길을 잡으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살길이요 이 시간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없다면 여러분은 헛된 시간을 보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론을 택하셔서 보여주시는 생명의 손길은 무엇입니까? 아론은 제사장입니다. 즉 제사장의 정신 안에 생명이 감춰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저주와 죽음 가운데 있는 자를 하나님이 은혜로 생명이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는 중보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까? 완전한 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영생이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안다면 나를 가리워주고 치장시켜주는 세상의 옷이 관심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은혜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분을 택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 외에는 생명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신자되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얻으려고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려고 하기보다는 설교를 듣고 스스로 신자가 되보려고 합니다. 스스로 선한 사람되어서 하나님이 천국 보내지 않고는 못배길 수 없을 정도로 수준 높은 인간이 되보려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우린 죽은 지팡이여서 영생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도 영생에 자신의 힘을 보태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괜히 미안한 마음을 가집니다. 이것이 바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서도 잘났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당당해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편함을 위해서 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같은 사람입니다. 제 말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는 변함없으시고 여전히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무엇을 해도 죽은 지팡이라는 입장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했다는 것을 자신을 치장하기 위한 도구로 삼지 않게 될 것이고, 경쟁하거나 비교하지도 않을 것이고, 나는 하는데 남은 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격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죽은 지팡이로서의 자신의 본질을 알고 생명의 손길을 붙잡는 참된 신자의 모습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메모 :

'구약 내용!!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신명기 강해 2  (0) 2014.11.20
[스크랩] 신명기 강해 1  (0) 2014.11.20
[스크랩] 민수기 강해 2  (0) 2014.11.20
[스크랩] 레위기 강해  (0) 2014.11.20
[스크랩] 출애굽기 강해 2  (0) 2014.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