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강해 2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십일조 (신 14:22-29)
오늘날 교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떠벌리는 것들을 보면 그 순서가 뒤바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자기 욕심을 앞세우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실 리가 없는데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자기 일에 끌어 모아 제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설령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내'가 한다고 생각하는 한 그것은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한 자기 일이 되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주님의 정신에 대한 순종을 배우기 위함인데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린 채 아무리 선한 일을 한들 그것이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말썽을 부리고, 봉사를 많이 한 사람들이 그 헌신을 자기 공적처럼 내세우는 이유도 결국 이 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가 이 도리를 가르치는데 게을리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교인들의 열심을 자극해서 헌신과 봉사를 하게 함으로서 교회를 빨리 부흥시켜야 한다는데만 관심을 기울여 왔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에게 행위만 강조했지 마음을 가르치지 못한 것입니다. 행위가 있으면 무조건 옳은 것으로 강조했고, 아무리 마음이 있다해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은 틀린 것이고 신앙이 아닌 것으로 질타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로 교회는 성장했지만 교인들의 심성은 참으로 심각할 정도로 강퍅해 졌습니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이 본질을 뒤바꾸고 말았습니다. 마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신자를 부르신 것처럼 교회가 교인들을 일의 종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하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일을 많이 할수록 큰 일군으로 칭찬 받는 현실 속에서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배워 간다는 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버렸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교회의 일은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누누이 강조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교회 일을 위한 신자로 나오는 것을 염려했고, 시켜서 하고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일이고 좋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내 마음을 기르는데는 미흡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어서 하고 스스로 원해서 하고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견딜 수 없어서 하는 일들이 되어져야 그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위해서 일이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5:17절에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내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독단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19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하는 일을 보고 일하셨습니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예수님이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일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곧 아버지의 일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일하신 것이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둘이면서 둘이 아닌,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요 10: 30)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날 교회는 이 순서를 무시해 버린 채 제멋대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고, 또 해보겠다고 날뛰고 있는 실정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일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했느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로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했느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로 구분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성령님께서 일하신 결과입니다. 한번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끝까지 붙드시고 도우십니다. 성령께서 일하신다면 결국 우리도 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십일조'에 대한 규례입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 드리기 앞서서 하나님의 일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먼저 언급한 것은 십일조, 즉 우리가 생각하는 수입의 십분의 일을 교회에 바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종교단체이든 그 단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코 '돈'이 필요합니다. 돈없이 유지되는 단체는 없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돈이 개입되기 마련입니다. 어떤 명목으로든 돈을 거두게 되고, 그 돈으로 자기 단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은 돈많은 단체가 강하고 힘있는 단체로 인정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종교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에는 '거룩'의 의미를 붙입니다. 신에게 돈을 바치는 것은 단순히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헌신하는 거룩한 헌물이며 신은 그 헌물을 바치는 자를 기억하여 복을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은 신에 대한 헌신을 돈으로서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이런 틀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돈을 바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돈을 바치는 것이 헌신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성경의 십일조는 돈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왜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셨고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배우셔서 과연 나 자신이 십일조의 정신 안에서 살고 있었는지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이 성민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성민이란 거룩한 백성으로서 세상과 구별된 존재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구별이란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인데, 독특한 사고방식이란 예수님께서 오셔서 은혜와 사랑으로 이루어주신 새로운 세계의 사고방식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서 애굽과 전혀 다른 세계인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이 두 나라는 사고방식이 각각 다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애굽적 방식은 버리고 새로운 나라의 방식으로 사는 삶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이 새로운 나라의 삶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가 '십일조'인 것입니다. 결국 십일조에는 새로운 세계의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지 돈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느냐?'는 고민은 아직까지 새로운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자기에게 매어있는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흔히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럼 십일조를 하지 말란 말이냐?'라고 반박을 합니다. 이러한 반박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목사들이나 또는 십일조를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목사들로서는 십일조에 대한 바른 이야기를 했을 때 두려운 것은 당연히 교회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돈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또한 신자는 십일조를 열심히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큰 신앙으로 여기고 하나님도 역시 그러한 자기를 어여삐 봐주신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기 때문에 반발을 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둘 다 하나님께는 관심 없고 자기에게만 관심 있었다는 것을 '십일조를 하지 말란 말이냐?'는 말로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또한 '십일조란 없습니다'라는 말을 흐뭇하게 여기는 것도 그 속셈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평소에 돈이 아까워서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껄끄러웠는데 '십일조란 없다'라는 목사의 말이 마음의 부담을 해소시켜주는 것 때문에 그 말을 반가이 여기고 흐뭇해하는 것 역시 하나님이 관심이 아니라 자기에게 매어있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오늘 우리는 '과연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란 무엇인가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을 대하는 신자의 바른 태도입니다.
'십일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십일조를 요구하신 하나님은 과연 이스라엘이 어떤 백성 되기를 원하셨느냐는 질문이 됩니다. 십일조를 하라는 규례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들도 '십일조란 무엇이냐?'를 배워가면서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를 함께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고 인간을 위해서 일이 있듯이 인간을 위해서 십일조의 규례를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십일조란 무엇입니까? 우선 십일조는 내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23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십일조란 바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바친 십일조로 함께 먹고 즐거워 하는 것에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우라고 하십니다. 결국 십일조의 규례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일조를 바쳤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권속들이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가운데 배워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쳤느냐? 얼마나 바쳤느냐? 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거리가 아닙니다. 24-26절에 보면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너무 멀어서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서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그 돈으로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사서 권속들과 함께 먹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심은 십일조를 바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서로 모여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바친 십일조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이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22절에 보면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우린 보통 십일조를 내면서 내 소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감사의 마음으로 바친다고들 합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십일조를 바친 것으로 신자로서 해야 할 감사와 의무는 다 한 것으로 간주하고 나머지 돈에 대한 권리를 자신이 차지합니다. 즉 십일조를 십분의 구에 대한 권리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세워놓으신 규례 정도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토지 소산의 십분의 일이란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셔서 너희들을 은혜의 땅으로 인도하셨음을 잊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그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우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오고 이 소산물을 얻게 된 것은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시고 싸우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들어와서 소산물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다'는 것을 서로 나누고 기뻐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즐거움은 단지 먹고 마시는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지탱되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기뻐하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십일조를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침으로서 내 소득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삼는 것은 삶과 소득을 구별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득이란 내가 일한 것에 대한 대가입니다. 그리고 일이란 곧 우리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 전체가 일이지 않습니까? 결국 소득이란 삶에서 주어진 자그마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삶속에 소득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 결코 삶과 소득을 구별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십일조란 소득의 십분의 일이 아니라 '지금 내 삶은 하나님의 희생으로 생겨난 삶입니다'라는 고백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의 의미로 말하자면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 전체가 주님의 희생 덕분에 생겨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주어진 믿음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삶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 다니고 학교 다니고 가정일 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동일합니다. 믿은 후에 신학교를 가고 선교사를 가고 교회 일에 열심을 내게 되는 그런 변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처음 교회를 다니게 된 자의 처음 열심이고 열성이지 믿음의 삶이란 그런 변화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주어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령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내 인생은 내 열심과 노력으로 개척하면서 살아가는 것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알고부터는 지금까지 내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오만함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자신을 주님의 세계로 인도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든 못다니든, 돈이 많든 적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관계없이 그 모든 것은 은혜의 세계안에서 주어지는 조그만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직장을 못다녀도 은혜 안에 있는 것이고, 공부를 못해도 역시 은혜 안에 있으며, 돈이 없어도 은혜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희생으로 주어진 새로운 세계입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곧 십일조입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은혜 안에 있는 자로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제외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모두가 같은 신세였습니다. 모두가 종이고 나그네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덕분으로 새로운 세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은혜 안에서는 처음 신분 그대로입니다. 강자 약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강자 약자가 구분되어서 약자가 제외되고 따돌림당하는 것은 이미 은혜의 세계가 깨뜨려진 결과입니다. 그래서 27절에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없는 자라고 저버리는 것은 십일조의 정신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내가 하나님의 복안에 있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즉 나같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복안에 살게 된 것을 감사할 때 그것이 십일조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됩니다. 신자는 이런 마음으로 자원해서 기쁨으로 교회에 헌금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내가 지금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교회에 헌금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예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이 믿음 없는 자기 수준을 보여 주는 솔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없으면서, 은혜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십일조라는 행위 하나 때문에 믿음 없음을 믿음 있음으로 착각해 버린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오히려 해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 더불어 사는 인생이고 누군가가 살려주는 인생입니다. 이것을 확인하면서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곧 십일조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십일조의 정신이 확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함께 먹고 즐거워 할 수 있고, 우리 가운데 어렵고 힘든 자가 있을 때 그들과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것으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친 십일조가 다시 이스라엘로 주어져서 그것으로 먹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것으로 간주된 상태에서 먹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나는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산다'는 것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리셨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것을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주님의 몸으로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내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은석교회는 무엇으로 기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주님의 몸과 피로 기뻐하며 모입니까? 주님의 몸과 피로 기뻐한다면 염려하고 불안하고 걱정하는 인생이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를 배우게 하는 규례입니다. 십일조는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현장이 되어야 하며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인정하는 현장입니다. 이런 마음이 29절과 같이 기업이 없는 레위인, 객 고아 과부들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것으로 먹고사는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 덕분에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내것이란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살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고 십일조 안에서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면제의 삶 (신 15:1-11)
말라기 3:8,9절을 보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교인들로 하여금 십일조를 안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공포의 구절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십일조를 안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고, 그것은 저주를 받는 길이다'라는 말로서 교인들에게 엄포를 놀 때 본성적으로 저주를 두려워하는 인간들로서는 십일조를 안한다는 것은 실로 모험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울며겨자먹기로 십일조를 하면서 그 돈이 헛된 돈이 되기를 싫어하는 마음에 십일조로 인해서 자신에게 복이 주어지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는 말씀에 기대를 걸고 십일조를 하게 됩니다. 즉 저주를 피함과 동시에 복을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함으로서 10절의 말씀이 자신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바쳤다고 해서 복을 주고 돈을 바치지 않았다고 해서 저주를 내리는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종교꾼들이 상상해 낸 사이비 하나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돈을 기준으로 해서 복과 저주를 나누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돈뿐만이 아닙니다. 종교 행위(예배, 전도, 구제, 선교, 봉사, 기도, 성경 읽기 등등)를 기준으로 해서도 복과 저주를 구분하지도 않습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도 복안에 살게 하시는 하나님, 그분이 바로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복, 즉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자기 자식보다 귀한 것이 있습니까? 내 자식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귀한 아들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를 잘하는 사람에게 아들을 주셨습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성경 보는 사람에게 아들을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즉 인간의 행위는 전혀 보지 않으시고 택한 백성들에게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복과 상관없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를 안하면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까? 오늘날의 십일조는 단지 소득의 십분의 일을 교회를 위해서 내어놓는 것이지 구약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십일조는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는 말씀의 의미도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내어놓지 않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십분의 일을 내어놓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면 결국 나의 소득에서 하나님의 것은 십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십분의 구는 내것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도적질은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챙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 도적질하는 것으로, 그리고 저주를 받는다는 심한 말씀으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까?
말라기 당시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 같이 스스로 생활을 해 나갈 수 없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점차 희미해져 갔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일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십일조로 함께 먹고 즐거워 할 때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고 함께 먹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또 이스라엘은 매 3년마다 소산의 십분의 일을 내어서 저축을 해야 했는데, 그 용도는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 그리고 나그네 고아 과부들로 하여금 배부르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나 혼자 즐겁게 먹고 마시고 배부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소득이 없는 자들과 함께 먹고 배부르기 위해서 나누는 십일조 였던것입니다. 이것이 말라기에서 말씀하는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배려에 대해서 소홀해져 갔으며 내 배만 부르면 된다는 식으로 없는 자의 배고픔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등 약자들을 위해서 3년마다 따로 십분의 일을 저축하라는 규례는 이웃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일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서 하나님 성전의 창고가 비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규례를 세우신 것은, 단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회 속에 가난한 자들을 있게 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수차례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만약 가난한 자들이 불쌍해서 그들을 돕기 위해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다면 굳이 인간들에게 십일조를 요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가난한 자들에게 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구제 역시 단순히 없는 자들을 돕는 차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회 속에 가난한 자들을 있게 하신 것이나, 그들을 위해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은 발전하고 번영한 힘있는 국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 국민이 단결해서 나라를 위해서 힘써 일하는 국민성을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사를 열심히 시행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하는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만 애굽에서 나올 때의 이스라엘을 원하실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는 모두가 종이고 나그네고 객이었던 사람들입니다. 즉 너나 할 것 없이 약자였습니다. 모두가 고아이고 과부 같은 신세였습니다. 부자 가난한 자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구출하셔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들은 애당초부터 자기 것이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약속의 땅에서 씨를 뿌리고 경작을 해서 추수를 한다고 해도 그 수확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단지 십분의 일을 낸다고 해서 십일조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득에서 처음 난 것, 맏물이 곧 십일조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난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치고, 다시 그것으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을 통해서 우린 여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살고 있는 자임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다' 이것이 약자의 정신이고, 여전히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위치에서 살아갈 때 가질 수 있는 고백인 것입니다. 약자는 하나님이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우린 하나님 때문에 살아가는 민족이다'는 이 정신에 대해서 결코 희미해지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약자의 정신이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정신이 온 국가에 퍼지는 것이 이웃 사랑의 내용이고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결국 가난한 자는 이것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서 이스라엘 사회에 있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든 것이 풍족해지기 시작했을 때 과거의 자신의 위치와 처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망각해 버리고 자기 노력과 힘으로 얻은 것처럼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삼아버립니다.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함으로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도 나를 복되게 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여겨버린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로 인해서 소외된 계층은 자연히 약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약자가 소외되고 무시되고 그들이 굶주린다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그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이러한 정신 아래서 바라볼 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즉 오늘 본문은 앞서 나오는 십일조의 정신이 이스라엘 내부에 확산되었을 때 나타나야 할 이웃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상식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행하기도 무척 곤란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이러한 본문을 대하면서 상당한 곤란과 번민에 처하기도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희색이 만면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이용하여 득을 보려는 욕심도 생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7년을 '면제년'이라고 정하고 7년이 되면 이웃에게 돈을 꾸어준 사람은 그 돈을 면제하라고 합니다. 또 8,9절을 보면 가난한 형제가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고 하고, 혹 면제년이 가까웠다고 해서 주지 않으면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없는 자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지만 있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무거운 짐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7년이 되면 면제를 해줘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꾸어주기를 요구하면 꾸어주라고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은 돈이 있어야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고 있는 사람들에게 빌려준 것을 7년째에는 면제해 줘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물론 적은 액수라면 충분히 면제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그렇게 큰돈이 아닐 때는 자신의 의로움을 세우기 위해서도 충분히 면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돈일 때는 사정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러한 면제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우선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규례는 단지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면제하라는 말씀도 7년이 지나도록 빌린 돈을 갚지 못한 가난한 자의 사정이 딱해서 그들을 돕기 위해서 세우신 규례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본문과 같은 말씀을 통해서 '가난한 자들을 도웁시다'라는 교훈을 이끌어 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의 말씀을 인간의 도덕과 윤리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1절에 보면 "매 칠 년 끝에 면제하라"고 합니다. 매 칠 년이란 안식년을 말합니다. 즉 면제는 아무 때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년 끝에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안식년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죄로 인해서 깨어진 안식이 하나님의 희생 덕분으로 회복되는 날입니다. 즉 하나님의 희생으로 인간의 죄가 면제됨으로 이스라엘이 안식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노동을 쉼으로서 맛보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노동의 대가로 안식을 누리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면제받음으로 안식을 누리게 된 자로서 그 안식을 배우고 가르치라는 의미로서 빚을 면제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돈을 빌려준 사람은 면제해 줌으로서 '나도 하나님의 희생 덕분에 죄가 면제됨으로서 안식을 누리는 자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고, 가난해서 돈을 갚지 못한 자는 면제받음을 통해서 역시 '나는 하나님의 면제해 주심 덕분에 안식을 누리는 자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면제를 모를 때, 그 사람에게는 '면제하라'는 규례가 짐이 되고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 18:21-35절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의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하고 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은 결국 주인으로부터 받은 면제를 마음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면제 역시 하나님으로부터의 면제를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에게는 짐이 되고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의 희생에 의해서 빚이 탕감되어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쏟아 부음으로 우리의 죄의 빚을 갚으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십일조는 맏물이며, 신약에서 맏물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맏물을 받으시고 그 맏물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우리는 맏물을 먹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맏물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예수님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오늘도 우리는 그 몸과 피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의미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십일조의 정신이 확산되어 있는 이스라엘이라면 안식년 끝에 빚진 자를 면제한다는 것은 능히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죄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빚은 자기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즉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죄의 빚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자였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자의 실체입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희생으로 인해서 죄의 빚을 탕감 받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복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자기에게 빚을 지고 그 빚을 갚지 못해서 쩔쩔매는 가난한 자는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자신의 거울인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발견하고 그렇게 저주 아래 놓인 죄의 빚을 갚아주셨기 때문에 안식을 누릴 수 있었음을 안다면 그 감사함과 은혜 안에서 빚을 면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면제하라'는 규례를 통해서 원하시는 것은 서로 빚을 탕감해주는 아름다운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면제를 마음에 담고 그 정신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되는 것이었습니다.
'면제하라'는 말씀 안에는 우리 죄를 면제하신 하나님의 희생 안에서 구원을 확인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면제해준다는 것은 빚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지 빚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 죄를 면제하신다는 것은 죄의 값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지 죄가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죄의 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값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확인하라는 것이 면제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십일조의 규례나 면제의 규례 등을 통해서 확인하며 살아가도록 하셨지만 오늘 우리들은 그런 규례가 필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법의 완성자로서 규례의 정신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규례를 통해서 은혜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주님의 은혜를 확인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이스라엘은 복을 받게 되는데, 그 복은 가난한 자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린 한가지 이상한 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명령대로 지켜 행하면 복을 준다는 것은 흔히 들었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복을 받는다고 할 때 우리의 상식은 말씀대로 행하는 나자신에게 복이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복받았다는 것은 내가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남이 잘 된 것을 가지고 내가 복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복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이것이 말씀을 듣고 명령을 다 지켜 행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결국 개인적인 복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전체에게 주어지는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는 것은 가난했던 자들에게 돈을 줘서 가난을 없애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물질의 부유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는 것은 이스라엘 모두가 하나님의 희생의 은혜의 부유함을 누리게 됨을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 자체가 복안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자로 오셔서 율법을 이루심으로 그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우리는 가난한 자가 아니라 은혜의 부유함을 누리고 사는 복된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자가 참으로 가난한 자이며 불쌍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은혜의 부유함으로 사는 자는 가난한 자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합니까?
7-10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 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 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인간 사회에서 가난한 자란 귀찮은 존재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자는 국가에 도움이 안됩니다. 오히려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또 사람들은 자기 주위에 가난한 자가 오는 것을 꺼려합니다. 부유한 친척은 반갑게 맞이하고 가까이 하면서도 가난한 친척은 멀리 하려고 하고 만나는 것을 귀찮아합니다. 만나면 도와줘야 할 대상이지 나에게 도움을 줄 힘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사회이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사회는 그러한 모습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고 손을 움켜쥐지 말고 요구하는 대로 꾸어주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면제년에 빚진 것을 면제해주는 정신이 살아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7년째만 은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죄의 빚을 면제받은 은혜의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내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의 부유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통해서 나눠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바로 그 도구로 쓰시고자 하십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은혜의 부유함이 나눠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살므로서 모두가 하나님의 복안에 거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신자는 나누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돈만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있는 자는 돈을 나누면 되고, 건강이 있는 자는 건강을 나누면 됩니다. 병이 든 사람은 병든 속에서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면 됩니다. 이것이 모두가 부요함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 나누어야 할 형제이고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 이웃은 내가 찾아서 선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웃을 찾아서 그 다음에 그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은 내가 사랑할 대상을 찾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찾게 되면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7절에서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라고 말씀합니다. 즉 내가 어디에서 살든지 이웃은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님을 말씀합니다. 사랑할 대상은 하나님이 만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상황이란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지독한 가난뱅이가 왔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상황입니다. 문제는 사랑할 준비가 된 마음으로 살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눅 10:30-37절에 보면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강도 만나서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주신 상황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상황을 피합니다. 사랑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사랑할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와 사마리아 사람은 한쪽은 도움이 있어야 살아날 수 있는 처지이고, 한쪽은 도와줄 수 있는 건강과 여유가 있는 사람으로 만난 것입니다. 즉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가 자신을 도와줄 힘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자비와 불쌍히 여김 받는 관계가 이웃 관계입니다. 따라서 내 이웃은 누구냐? 라는 질문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을 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을 무능한 자라는 위치에 놓고 볼 때 누가 나를 도울 수 있는 분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진정한 이웃은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 안에서 평소 '나는 아무 것도 없는 자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며 살았던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자를 만나게 해도 그 사람을 자기와 같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가난한 자로 동일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평소 많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라는 교만으로 살았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만들어 주신 축복을 누리는 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강도 만난 자를 자신의 처지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런 마음에서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나타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강퍅히 대하지 말고 손을 움켜쥐지 말고 요구하는 대로 꾸어주라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혹, 본문의 말씀을 대하면서 '그렇다면 앞으로 누가 나에게 돈 좀 꾸어달라고 하면 거절해야 하나 빌려줘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결국 끝까지 나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겠다는 고집밖에 되지 않습니다. '돈을 꾸어주라' 는 것이 아닙니다. 꾸어주고 싶으면 꾸어주십시오. 본문의 말씀은 너희들이 주님의 사랑을 아는 자로 살아가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사는가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있게 하신 가난한 자를 통해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런 부유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신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강제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가난한 자와 나누도록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하신 기적의 일을 깨닫고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살도록 하십니다. 기적의 일이란 도저히 탕감 받을 수 없는 빚을 진 우리들을, 강도 만나서 남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었던 우리들의 죄를 면제해 주시고 찾아오셔서 도와주신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큰 일 덕분에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무능하고 가치 없는 우리들이 대속의 은혜 때문에 새생명을 누리고 복안에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자기의 무능함을 알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을 대하도록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은혜를 깨달은 자는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자신에게 있는 것을 형제들과 함께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눌 수가 없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크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크게 보인다면 상대적으로 세상의 것들은 작아지고 의미없는 것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그럴 때 아무런 부담 없이 나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크신 분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크신 분으로 자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 것은 작아지기 바랍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의 자리에서 여러분이 만나게 되어지는 모든 사람을 자신과 같은 위치에 만나고 여러분을 통해서 은혜의 부유함이 나눠지기를 바랍니다.
자유자 (신 15:12-23)
교회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굳이 몸이라고 표현한 것은 개인이 아니면서도 조직이 아닌 이상한 관계가 곧 교회이며 그 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개인이 아니면서도 조직이 아니라는 말을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는 개인이 아니다'는 말은 교회에서는 '나'를 주장하거나 '나'가 중심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나 개인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구원 역시 나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교회의 구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개인을 거부하는 것은 조직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교회가 개인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조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명백히 판단하면 이미 한국교회는 조직화된 교회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직은 철저하게 개인을 용납하지 않고 조직을 위해서 개인이 희생하기를 요구합니다. 오직 조직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 존재하는 도구가 곧 개인입니다. 때문에 개인이 조직에 해로움을 끼칠 때 그 조직은 그 개인을 징벌하고 축출합니다. 따라서 개인은 철저하게 조직에 매어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개인의 주장이 옳다고 해도 조직의 대다수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자기 주장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조직 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직은 조직을 지키고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규칙과 법을 제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규칙과 법에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부여합니다. 누구든 조직이 제정한 법과 규칙을 위배할 때 조직의 이름으로 제재를 가하게 됩니다.
조직은 개인을 거부하기 때문에 개개인이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직을 대표할 한 인물을 조직의 중심으로 내세웁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 대표자의 지배와 다스림을 받고 순종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조직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인간의 모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조직으로 발전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조직의 특성이 그대로 살아있는 조직화된 교회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조직화된 교회는 자연히 그 교회를 대표한다고 하는 목사 중심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각의 사회적 위치와 능력에 따라 직분이라는 것을 부여받습니다. 말로는 봉사 직분이라고 하지만 은연중 직분의 구별이 발생하고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좀더 높은 지위, 좀 더 강한 힘을 소유하기 위해서 경쟁과 싸움을 하게 됩니다.
교회는 개인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고 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교회에서는 나를 주장해서도 안되고 누군가에게 매어서도 안되고 교회라는 조직을 위해서 살아서도 안되고 오직 몸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강조 드리고 싶은 것은 그 누구의 종도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조직에 매이지도 말고, 목사라는 한 인간에게 매이지도 말고, 오직 그리스도에게 매인 자로서 자유자로 살아가면 됩니다. 이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세상의 보편적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면제'라는 규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말씀도 지난 시간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이렇게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이름으로 주어질 때 우리로서는 뭔가 불만이 싹트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 상식을 깨뜨리는 이 특이한 나라를 하나님은 자기의 나라로 인정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싫든 좋든 그 나라 방식을 나의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밀쳐냄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지향하고 있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삶이 무엇이고, 저주를 받는 삶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 14:29절 마지막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약자들을 무시하지 않고 자기와 같은 자리에서 함께 배부르게 하는 것이 복받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또 15:10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마지막에도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한 말씀을 보면 본문 역시 이스라엘이 지향해야 할 복된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신자 역시 이 삶을 지향하고 살아야 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세상 나라의 삶의 방식과 천국을 지행하고 살아가는 천국 백성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확실한 차이점을 발견하고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종에 대한 규례입니다. 12절에 보면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 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 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같은 동족이 가난 때문에 종으로 팔린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경우 육 년을 섬기고 제 칠 년이 되면 자유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냥 놓아주는 것이 아니라 14절에 보면 종에게 후히 줘서 내어 보내라고 합니다. 돈을 주고 종으로 살때에는 6년을 계약하고 산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자기 것으로 산 것입니다. 그런데 7년이 되거든 본래의 자유인으로 돌아가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종은 주인의 재산입니다. 그런데 그 재산을 포기하라고 할 때 순순히 순종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빚진 자를 면제하라는 말씀이나 종을 7년이 되거든 자유하게 하라는 말씀이나 똑같이 재산권의 포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왜 7년이 되거든 재산권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셨는지 그 의미에 대해서 자세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알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은 애굽으로부터입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을 종으로 부려먹었습니다. 힘으로 지배하고 압제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세상 힘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상 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자유함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단지 행동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힘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앞서 인간 조직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지금 사람들은 자유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조직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직을 무서워하고 조직에 지배를 받으면서 조직에서 밀려날 것이 두려워서 할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자유인이 아닌 여전히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종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자유자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7년이 되거든 모든 종을 자유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종을 산 주인으로 하여금 종을 자유하게 하심으로서 종으로 있던 사람이나 주인으로 있던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유의 하나님이다. 우린 모두 종으로 있던 자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함을 얻었다. 우린 누가 누구를 지배할 수 없는 관계이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라고 할 때 그 교회가 하나님의 참된 은혜로 모이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모든 성도가 자유자로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목사에게도 매이지 않고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모든 성도가 동일한 자유자로 모일 때 비로소 그 교회는 은혜 안에 모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사람은 그 누구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에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뛰어나고 능력이 있다고 소문이 난 목사라고 할지라도 구원에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교회가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목사라는 직분, 장로라는 직분이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며, 봉사나 헌금이라는 행위들이 구원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리의 구원에 하등에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것들에 매이는 것입니까? 그러면서도 어떻게 자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피 아닌 다른 것에 매이고 그것들의 눈치를 보며 신앙생활을 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피를 땅바닥에 팽개치고 짓밟고 있으면서도 입으로만 그리스도의 피를 내세우는 위선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여러분이 무엇에 매어 살아가는가가 판가름 나게 될 것입니다. 목사가 교회에서 쫓겨날 것을 두려워 할 때 목사는 교인들에게 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노회의 눈치를 보고 총회의 눈치를 보면서 자기 한몸 지키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목사는 하나님의 종입니까, 아니면 인간의 집단에 불과한 교단의 종입니까? 교단의 종으로서 교단에 충성하고 열심히 봉사하면 교단으로부터는 유능한 목사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으로부터는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일진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결코 양보하지 않겠다는 용기는 '나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창출되는 용기일 것입니다. 이런 용기 있는 신자가 진심으로 자유함으로 살아가는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교회에서 직분 하나 얻어보겠다고 목사 눈치를 보는 것이나, 나에게 복이 될까 해서 교회에 봉사하고 목사에게 잘하는 것들은 모두가 자유자가 아닌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세상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쌍두마차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결국 세상에서 죽지 않고 위대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상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고, 자연히 나에게 도움을 주는 자에게 종속되고 그 지배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교회에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마시고 여러분의 자유로 행동하십시오. 목사가 싫어할까 봐서 못하고, 다른 교인들이 나를 믿음 없는 사람으로 볼까봐서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것은 결국 '나는 사람의 종이다'는 것을 공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여러분 마음껏 자유로 행동하되 그 자유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신자의 신분까지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잊지 않으시면 됩니다. 즉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이 목사 때문도 아니고 내 체면 때문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들이 예배에 빠지고 나서 목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종을 자유하게 함으로서 자신의 재산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나, 면제년에 빚진 자의 빚을 면제해 줄 수 있다는 것은 돈에 매이지 않은 자에게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이 돈에 매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돈보다 더 큰 것을 얻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속입니다. 15절에 보면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였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9-23절의 말씀에서 이 대속을 위해서 자신의 피를 흘린 자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 피흘림을 기억하면서 먹는 삶을 살아갈 것을 말씀합니다. 즉 날마다 대속의 큰 은혜를 기억하며 그 피로서 살아가는 신자는 이미 세상의 그 무엇보다 큰 것을 얻은 자이기 때문에 돈에 매이거나 사람에 매이지 않고 자유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7년째에 종에게 자유함을 주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나도 너와 동일하게 종으로 살던 자인데 여호와께서 나를 속하므로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대속의 큰 은혜가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그 무엇보다 큰 것을 얻은 자로서 그 부유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빚을 면제함으로 종을 자유하게 함으로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이웃과 나눌 수 있다면 이러한 부유함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교회에 매이지 않고 사람에 매이지 않고 누구의 종도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종으로만 살아가신다면 그 역시 대속의 부유함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크게 보이지 않고 세상 것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에 그것에 매이고 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16,17절에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함으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주인이 종을 자유하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종이 주인의 사랑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 사랑에 감동해서 영원토록 주인의 사랑에 거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주인의 종이 되고자 할 때 주인은 그것을 거부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주인의 종이 되었다는 표시로 송곳으로 귀를 뚫으라는 내용입니다.
이때 주인과 종의 사이는 돈이 개입된 주인과 종이 아니라 사랑이 개입된 관계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맺어지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종으로 자유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보여주고, 자발적으로 종이 되고자 하는 종을 받아줌으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종으로 삼아서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나는 자유자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종에서 자유자로 속하여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자 하는 것, 이것이 참된 자유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참된 자유자는 사랑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자를 의지하는 것이지 뭔가에 매어서 억지로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의 종입니다.
여러분은 은석교회에 왜 나오십니까? 친구가 있어서 나오는 것입니까? 부모님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까? 내가 세운 교회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러한 것은 주님에게 매인 자가 아니라 사람에게 매이고 교회에 매인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시는 것은 주님을 사랑해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뭔가 은석교회가 마음에 안들고 싫지만 이왕 다니던 교회니까 할 수 없이 계속 다닌다거나, 은석교회에서 집사 되었으니까 다닌다면 그분은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의 은혜 때문에 자발적으로 교회에 나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결국 그분이 하는 모든 일은 억지가 될 수밖에 없고 아무리 교회에서 봉사를 한다고 해도 그 봉사는 자신을 위한 것이지 결코 사랑을 나누고 은혜를 나누는 봉사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은석교회에는 주님의 대속만 크게 보이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교회에서 봉사하기를 원하시는 분만 남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몸인 여러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자발적으로 교회로 모이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에 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말씀을 통해서 세상에 매이지 말고 우리를 대속해준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신자되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뭔가에 매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뭐든지 여러분 쪽에서 자발적으로 할 수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나를 높이기 위한 자발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행동하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
절 기 (신 16:1-8)
지난 시간에 자유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유자란 세상에 매이지 않고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하지만 내가 내 힘으로 세상을 초월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자유자로 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이란 우리들의 힘으로 초월하고 벗어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인간의 본질과 교통되고 있는 세상에 매인 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인간이 세상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에게 매인 자유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다스릴 때 가능한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언제나 나 아닌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할 운명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린 주님을 벗어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세상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살리고 있음을 내 마음속에 분명히 한다면 우리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자유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자유자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세상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는 생각 아래 세상과 동화되어서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에 자신도 맞추고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결국 세상에 붙들려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면서 각기 자기 나름대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동 하나하나를 분석해 보십시오. 과연 독자적인 행동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행동은 비록 스스로는 독자적인 생각과 판단 아래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신의 옳고 그름의 판단에 의해서 행동되어지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낼 때 그 동기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 아래 보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남들은 다 보내는데 내 아이만 보내지 않을 때 뒤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작용한 결과라는 생각은 안해보셨습니까? 아이들에게 왜 대학가기를 요구합니까? 아이가 공부에 취미가 있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서 대학에 가고자 한다면 부모로서 보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부모인 우리들은 다른 아이들이 다 가니까 보내려고 하고, 자신의 체면 때문에 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현 사회가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사람 취급을 안해주는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에 사회에서 사람취급 받기 위해서 대학가고 대학 보내는 것은 아닙니까? 사실 우리의 행동이란 남들이 하니까 나도 따라서 하는 행동이 대부분입니다. 이것을 모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 인생은 독자적인 생각과 판단 아래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모든 행동이 주변 환경과 사회 구조, 그리고 시대적인 요구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하고 남들이 안하니까 나도 안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 인생을 살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TV 드라마나 여러 프로그램을 봐도 자기 것이 상실된 채 모두가 모방된 것 투성이입니다. 저것이 인기가 있다 싶으면 금방 그것을 모방해서 방송합니다. 자기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것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 역시 자유함 속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인생을 살아가지 못하고 모방된 삶에 붙들려 행동되어질 때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구별점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모방함으로서 신자의 독특성, 교회의 구별성이 사라진 채 세상과 하나되어진 모습만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독특성 구별성이 사라진 채 다만 남의 것을 모방하기에만 바쁩니다. 복음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어느 교회가 이런 것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교인들이 많이 늘었다더라는 것에 더 관심을 둡니다. 물론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배우는데 무슨 잘못이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것이라는 것이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나에게 득이 되고 교회에 득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교인들이 좋아하고 교회의 인기에 도움이 되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데 효과가 있는 것들을 좋은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교회 성장에 하등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될 수 없으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비난과 배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방이라는 시각 속에서 오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16장에서 말하고 있는 소위 절기라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지금 은석교회는 부활절이나 맥추절 추수절 등 어떤 절기를 지킨다는 개념 없이 모이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교회가 다 하고 있는 것을 안한다는 불만이 있을 수 있고, 뭔가 허전한 느낌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안한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일어났을 때 과연 그 불만이 무엇을 바탕으로 해서 발생하고 있느냐를 분석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적인 이유 속에서 싹튼 불만이라면 언제든지 저에게 그 불만을 얘기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이유가 아니라 다만 개인적인 종교적 재미가 충족되지 못하는데 따른 불만이거나 한국교회라는 단체가 행하고 있는 것을 거부하는데 따른 불만이라면, 저는 그 불만은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단지 인간의 종교적 열망의 불충족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절기를 지키지 않아야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절기가 어떤 정신을 담고서 주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 없이, 헌금을 거둬들이고 종교적 재미를 위한 행사에 치중한 절기라면 신앙에 아무 득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이 성경의 모든 절기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신자에게는 매일이 맥추절이고 추수절이고 부활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교회가 다 하는데 우리도 해야 하지 않느냐?'라고 한다면 저는 그것을 자기 것이 없는 모방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다른 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하든 그것이 은석교회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국교회가 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고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단체를 따라가는 것이고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고 남의 것을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것을 모방하려고 하지 말고 자기 것으로 살아가려고 하십시오. 성령의 자유함에서 나오는 기쁨에 의한 자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남이 하기 때문에 나도 하는 충동적인 것이 될 때는 도중 포기와 후회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기쁨에 의해서가 아닌 타인의 행동을 모방하는 충동에서 헌금을 약속했을 때 결국 후회함 속에서 사도를 속이는 결과를 가져온 것과 같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경을 기준으로 했을 때 옳은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것이라면 다른 눈치를 보지 마시고 그대로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그 행동을 비난하고 욕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대해서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셨으면 되는 것이지 사람이 나를 인정하고 안하고에 우리의 운명이 걸린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방이 아닌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절기의 의미가 무엇이기에 현 교회들의 절기에 대한 태도가 잘못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절기 폐지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절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릴 뿐입니다. 절기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았을 때 절기에 대한 인간의 잘못된 인식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6장에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라고 불리우는 유월절과 칠칠절(오순절), 초막절(수장절)이 나옵니다. 이 세 절기는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 정신이 계속 이어지는 절기이기 때문에 유월절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절에 보면 "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유월절 예식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유월절이라는 것은 유월절의 주인은 여호와다는 뜻입니다. 즉 유월절은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월절은 어떤 여호와를 보여줍니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기 위해서 희생하신 여호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통해서 자신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희생하신 여호와를 기억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유월절에 먹어야 했던 떡은 고난의 떡이었습니다. 3절에 "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 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너의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유교병이란 누룩을 넣어서 만든 맛있는 떡을 말합니다. 반면에 무교병은 누룩을 넣지 않고 밀가루만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딱딱하고 맛없는 떡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고난의 떡'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떡을 먹으라는 것은 무교병은 먹고 배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 의미를 담고 가르치기 위해서 주어진 떡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무교병을 먹었다고 해서 그 자체가 고난이 아니라 무교병을 먹음으로서 자신들이 약속의 땅이라는 복안에 살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주어졌음을 잊지 말도록 하기 위해서 유월절을 지키라 하고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유월절에 세부적으로 지켜야 할 규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월절의 기간 동안에는 사경내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4절). 그리고 첫날 해질 때에 제사드린 고기는 밤을 지내어 아침까지 두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4절). 그리고 유월절 제사는 반드시 자신들의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드려야 하고(5,6절), 제사 드리는 시간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질 때에 드리고(6절),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구워먹고 아침으로 장막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7절). 그리고 육 일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제 칠 일에는 여호와 앞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말아야 하는 것이(8절) 이스라엘의 유월절입니다.
이러한 유월절의 규례를 보면 아주 복잡한 듯 보이고 유월절이라는 절기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의식과 방법으로 제시되어 있는 듯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이러한 의식들이 지켜지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 담겨서 전해지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이 알고 그 마음을 자신들의 마음으로 삼을 때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지키는 방법 하나하나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여러 마음이 아니라 한가지 마음입니다. 즉 유월절을 지키는 규례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마음이 규례 하나하나에 담겨져 반복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말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간단하게 말하고 돌아서 버리지만, 그러나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지기까지 하나님 편에서 어떤 수고와 힘씀과 고난과 희생이 뒤따라야 했는가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유월절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구원받고 약속의 땅에 오기까지 하나님 편에서 어떤 수고와 고난과 희생이 있어야 했던가?'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유월절이며 유월절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세부적인 규례들은 그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수고와 고난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복안에 살고 있다면 복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다만 복을 누리는 것에 치우쳐 버리는 것으로 그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복이 주어지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어야 했던가를 앎으로서 이스라엘 자신도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의 형편은 앞일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가운데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고 느긋하게 애굽인의 환영을 받으면서도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3절의 말씀대로 급속히 나왔습니다. 그것도 밤에 나왔던 것입니다. 애굽인이 제발 빨리 나가달라고 재촉하는 가운데 평소 같으면 잠잘 시간에 급하게 빠져나온 것입니다. 급하게 나오느라고 발교되지 못한 떡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라고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고 고기는 아침까지 두지 말라고 하고 제사는 초저녁 해질 때에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런 의식 하나하나를 통해서 자신들이 애굽에서 나오던 때를 다시금 상기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에서 뭉그적거리고 살아가야 할 존재가 아니라 빨리 빠져나와야 하는 사람들이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무교병을 먹는 것이나 고기를 아침까지 두지 않는 것이나 제사를 초저녁 해질 때에 드리는 이 모두가 '이스라엘 자신들이 어디에서부터 빠져나온 특이한 종족들이며, 그들의 행동과 모든 삶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줘야 할 책임이 있는 인생이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세상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고 기대를 걸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열심히만 하면 뭔가 될 것같은 착각 속에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신자로서의 인생을 살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지 못한 모방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일년에 한차례 유월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급속하게 빠져나오게 하신 그 마음과 똑같아야 했습니다. 그 마음이 곧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마음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마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곧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즉 유월절은 악하고 더러운 세상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고난의 떡을 먹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마음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칠칠절, 즉 맥추절이고 초막절 즉 추수절이라면 오늘날 교회들이 하나님이 주신 세상의 좋은 것들을 가지고 감사하자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칠칠절의 규례를 보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10,11절)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초막절 역시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하라(15절)고 말씀합니다. 이 규례들은 단지 주어진 소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들고 나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복이 누구로부터 주어지는가를 잊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네 힘과 네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난과 희생과 수고를 통해서 주어지는 복임을 잊지 말라고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는 제사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바로 이 자리에 복이 임한다고 말합니다. 즉 복이란 하나님의 희생을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모든 소출을 바라보면서 이것은 내가 수고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수고로 주어진 것임을 깨닫고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 정신으로 드리는 칠칠절이고 초막절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복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게 된 이것이 주님의 희생과 수고 덕분으로 주어진 복임을 알고 감사하면서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칠칠절이고 초막절입니다. 즉 맥추절이고 추수절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좋은 것이 주어졌다고 해서 감사하는 것과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좋은 것이 주어졌을 때 감사하는 것은 시키지 않아도 잘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절기란 세상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영원한 복안에 거하게 하신 것을 감사하라는 것인데 지금 절기는 세상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에서 잘되게 하신 것을 감사하는 인간의 절기로 전락돼 버린 것입니다. 이런 절기를 남들이 한다고 해서 우리도 해야 하겠습니까? 절기를 지키지 않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한 교회 아니냐, 혹 이단 아니냐'라는 소리를 듣기를 두려워하는 것도 결국은 그리스도에게 매인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매어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난의 떡을 먹는 유월절 정신은 '나는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희생과 도우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자기의 모든 힘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수고와 노력을 해도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수고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셨기 때문이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월절의 정신 가운데서 드려지는 칠칠절과 초막절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소산물의 출처가 어디인가를 찾아갈 때 결국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즉 하나님의 고난과 희생이 있는 그 자리더라는 것을 깨닫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의 출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에 있음을 잊지 않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날마다 감사함으로 살아가면서 세상에 눈 돌리지 아니할 때 그것이 이미 절기를 지키고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안에서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굳이 날짜를 정해서 절기를 지키고 헌금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 덕분에 살고 있는 자신을 잊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을 제하라 (신 17:1-13)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될 수 있으면 깨끗한 상태로 나오려고 노력합니다. 좀 더 깨끗하고 멋있는 신앙인이 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합니다.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느껴지면 속히 그것을 보충해서 마음의 거리낌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아무 거리낌이 없는 마음으로, 부족함이 없는 모습으로, 악함과 추함이 없는 깨끗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앙인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위선과 거짓과 억지를 가져오게 되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본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는 뭔가 위장할 만한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나오세요'라고 말할 때 '담배라도 끊고, 술이라도 끊고'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것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신 앞에 죄없는 모습으로, 신이 싫어하는 행동을 버린 채 떳떳하게 나서고 싶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죄인을 부르셨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회에 나오기 전의 이야기이고 일단 교회에 나왔으면 교회 나오기 전과 달라져야 하고 변화된 모습이 되어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말씀을 배워도 좀처럼 변화되지 않고 항상 동일한 모습만 보이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낙심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변화되고 싶어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또한 변화되고 싶어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고 싶어할까요? 이점에 대해서 우리는 솔직하게 자신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판단할 때 신앙인들이 변화되고 싶어하는 이유는 자기 확인이고, 자기 만족이며, 신앙적 자존심이라고 봅니다. 내가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변화되고 달라진 모습으로 자신의 신앙을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자신에게서 극히 인격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싶어하는 의도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신앙인들이 생각하는 변화라는 것은 모두가 윤리와 도덕적 차원에서의 변화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참된 변화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본성적인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적 모습이란 훈련받고 교육받아서 습득하게 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인간 안에 자리하고 있는 습성들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습성들이 주어지는 상황과 여건에 의해서 하나하나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인간이라도 속에 내재하고 있는 본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은 자신의 약점과 흠되는 것은 감추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드러나서 자기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요소들은 감추고 위장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은 훈련받고 가르침 받아서 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행동입니다. 이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롭게 되어서 참된 변화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담배끊고 술 끊고 화를 안내고 게을리 하던 기도를 열심히 하게 되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변화라고 말하지만, 그리고 이런 변화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에 계시되어진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변화를 기뻐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변화할 수 없습니다. 변화한다는 것은 죄인이 의인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속에서 아무리 변화하면 뭐합니까? 결국 죄인 그대로가 아니겠습니까? 술 끊고 담배끊는다고 해도 죄인은 여전히 죄인입니다. 무엇을 해도 죄인인 우리들이 과연 뭘 해서 의인되겠다는 것입니까? 그럼에도 끝까지 스스로 의인 되보고자 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만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진 인간의 모습은 흠없는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흠없는 모습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도저히 만나실 수 없고 받으실 수 없는 흠있는 존재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변화는 무엇이겠습니까? 흠있는 존재가 흠없는 존재로 다시 뒤바뀌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 하나님은 기뻐하시면서 우리를 받아주실 것입니다. 과연 이런 변화가 우리에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착한 일을 함으로서, 그리고 종교적인 일을 통해서 인간의 흠집이 메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흠집을 메우기에 급급합니다. 착한 행동을 통해서 다른 나쁜 행동을 보상하고 메우려고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모습만이 아니라 종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점이라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과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일 때 그것이 자신의 약점으로 남을 수 있고, 타인에게 흉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좀 더 멋있고 근사한 자신을 보여주고 과시하고 싶어하는 본성이 자리하고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 그대로를 보여주지 못하게 하는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참된 변화를 흠집이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인간의 본성은 자신을 가리고 위장하는 것입니다. 흠이 되고 흉이 될만한 것은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인간이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인간의 본성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변화라는 것은 현재의 자신의 모습에서 좀 더 고차원적이고 수준 높은 모습으로 나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무릇 흠이나 악질이 있는 우양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무 흠이 없고 병들지 않은 깨끗한 제물입니다. 흠있는 것, 병든 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흠없는 것, 병들지 않은 건강한 것만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의 피조물은 흠없고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피조물에 죽음이 찾아들고 질병이 찾아든 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질병이 있고 죽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흠없고 깨끗한 제물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자신을 고치고 변화한다고 애써봐도 질병에서 해방될 수 없고 죽음에서 해방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피조물의 모습에서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나 자신의 흠있는 모습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다만 착한 일하고 예배드리는 행동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일에 열심이지만, 그렇다면 기독교인보다 더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그럴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하나님은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는 것이지 결코 착한 일을 했다고 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는 뜻이 됩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해도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결국 믿음이 기준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신자의 변화란 믿음의 차원에서 생각해야지 결코 행동의 차원에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흠있고 없고의 문제도 믿음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흠있다는 것은 십일조 하지 않고 예배 빠지고 기도하지 않는 등의 행위의 부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 창조주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며 흠없는 피조물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원래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올 수 있습니까? 없다면 우리들은 다같이 죄를 안고 있는 흠있는 자신의 모습을 들고 하나님께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흠있는 것은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흠있는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9절에 보면 "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로 나아가서 물으라 그리하면 그들이 어떻게 판결할 것을 네게 가르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성중에서 송사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판결하기가 어렵거든 제사장과 재판장에게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과 재판장이 판결한 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이 만일 천자히 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12절)고 합니다. 즉 제사장과 재판장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은 죽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악이고 악을 용납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재판장은 성중에서 해결 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즉 인간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위해서 제사장이 있고 재판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해결 할 수 없는 죄는 제사장과 재판장이 시키는대로 행함으로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흠있는 인간은 죄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누군가를 통해서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12절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본문에서는 도적질 강도 이런 것들을 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 재판장을 통해서 죄를 해결하지 않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죄를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시는 분을 우리 가운데 보내셨는데 그분의 말을 천자히 하고, 즉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듣지 않고 제멋대로 죄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니까 그 악을 제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죄있는 모습을 그대로 들고 나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을 감추고 꾸미면서 죄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갑니까? 죄있으면서 죄없는 척 하는 것은, 세상의 인간 모두를 죄인이고 흠있는 썩어질 피조물로 규정하고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내신 예수님을 무시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는 악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안에서 제하여질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해도 자기 죄를 모르고 죄를 들고 예수님께 나오지 않으면 천국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신자의 냄새가 안난다고 교인들을 야단을 치기 일쑤입니다.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자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 신자의 냄새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훌륭한 인격과 인품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 신자의 냄새가 아니라 종교인의 냄새입니다. 자신을 수양한 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냄새를 풍기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냄새란 자신의 죄를 그대로 드러낸 가운데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총회 목사 계속교육'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때 개회예배 때 설교하시는 목사님께서 '어느 장로가 말하기를 목사 냄새가 나는 목사가 없어서 신학교를 위해서 돈을 내지 못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하면서 목사 냄새 나는 목사가 되자고 설교한 것입니다. 저는 그 설교를 들으면서 목사 냄새라는 것을 무엇이라고 말할까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나도 목사 냄새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인지도 모르는 목사 냄새를 풍기기 위해서 힘쓰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설교를 듣고 '목사가 생각하는 목사 냄새가 뭘까?'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결국 결론은 훌륭한 인품이라는 것으로 내렸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감동하고 존경하는 목사의 모습은 모두 인품입니다. 잘 훈련되어지고 수양이 되어진 인품에서 나오는 모습을 목사 냄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 냄새를 풍겨야겠다고 생각하는 목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훌륭한 인품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고 훌륭한 인품을 보이기 위해서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위장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목사는 드러난 자기의 인품을 무기 삼아서 교인들에게도 인품을 소유한 신자가 될 것을 설교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당당한 입장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목사에게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필요하겠습니까?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이미 위장되어진 인품이 모든 흠집과 죄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가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상태가 되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악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목사 냄새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든 신자이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표는 자기를 위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합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이 바로 신자의 냄새를 발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냄새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한 형제요 자매인 지체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들은 진짜 신자의 냄새를 전혀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다운 행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목사다운 행동, 또는 목사 냄새라고 말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면서 목사인 자신을 바라보고 목사에게 접근하는 신자들을 그리스도께로 밀어붙여주는 목사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인들을 자기의 수족으로 삼으려고 하는 종교 세계에서 과연 신자들을 오직 그리스도에게로만 밀어붙이기 위해서 자신까지 포기하는 목사가 얼마나 될지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저까지 포함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목사는 나는 목사가 아닙니다'를 통해서 신자들로 하여금 목사에게 전혀 기대 걸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도 목사는 우리보다 더 나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목사라는 인간도 별 수 없구나'라는 실망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교인들이 실망할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 하지 않아도 평소에 하는 대로만 살아가면 교인들은 얼마든지 목사에 대해서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목사가 목사답게 보이려고 하고, 장로가 장로답게 보이려고 하는 이 모든 것은 사단의 미혹에 빠진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자답게 보이라거나, 목사답게 보이라거나, 장로답게 보이라는 명령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는 신자는 흠있는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깨닫고 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를 남다른 인간으로 바라보게 만들면 교인들은 목사를 통해서 그리스도께로 나가려는 의도를 가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목사가 우상이 되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2-7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명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하는 것을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역시 이런 자를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집니다. 어떤 인간도 인간으로부터 경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악이 될 뿐입니다. 신자가 날마다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보임으로서 얻어지는 유익은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가운데 날마다 그리스도가 오심을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참된 감사는 자신의 죄가 발견되어진 현장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한 십자가의 감사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자기의 유익을 기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옳고 그름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말씀이 옳다한 것을 사람들 앞에서 옳다고 시인하지 못하고 말씀이 그르다고 한 것을 사람들이 옳다고 하기 때문에 같이 옳다고 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나의 더러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제사장 되시는 주님께 감사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감추려고 하지 말고 발견하려고 하십시오. 죄를 발견함으로서 그리스도의 피흘림에 감사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흠없는 자로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더러움과 죄를 감추고 위장하려는 악에 빠지지 말고 죄를 발견하고 드러내면서 그리스도의 피흘림에 감사하면서 살아있는 신자로서 한평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왕 (신 17:14-20)
하나님은 깨끗한 것, 완전한 것만 원하십니다.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 것은 거부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흠있는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 속에 죄를 씻어주는 기능을 가지신 분을 두신 것입니다. 죄를 씻어주는 기능을 가진 분을 죄인인 우리들에게 두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때문에 인간은 죄를 씻어주는 분을 거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깨끗한척하고 신자인 척하는 인위적인 행동이나 방법을 통해서는 절대로 하나님께 나올 수 없음을 선포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지 못한 신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위장하고 감추기 위한 인위적인 행위를 하기에 바쁘고 거룩한 척하고 깨끗한척하는 이중성만 잔뜩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했던 선한 행동들이 머리 속에 맴돌고 있기 때문에 죄는 발각 당하지 않고 자기 행위 속에 깊숙이 감춰져 버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돋보이고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를 찾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신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평상시 살아갈 때 선한 행동을 하고 자신을 신자답게 만들려고 애쓰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과 비교해서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감추고 위장하려고 하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내며 사는 것이 살아 계신 주님을 의지하는 신자의 믿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악한 마음이 타인에게 발각 당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속에는 가시를 품고 있으면서도 얼굴에는 미소를 띄고 친절히 대하는 것도 결국에 자신의 악한 마음이 발각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는 타인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경받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데, 그 조건 가운데 하나가 악한 모습을 철저히 감추고 선한 것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선이고 위장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인간관계란 서로서로가 이런 위장과 위선에 속고 속이는 관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상대방의 악함이 발각되었을 때 '속았다'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로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아무 거리낌없이 자신의 악한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고백하는 인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자신의 악함이 발각 당하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남들이 나 자신의 더러운 마음을 알아채는 것을 왜 싫어합니까? 그 이유는 한마디로 아직까지 자신이 포기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고 삽니다. 그래서 체면, 위신, 명예 등에 집착해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부인하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자기를 인간다운 인간으로 가꾸어 보려는 욕망 속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악함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가 자기의 왕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왕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되어지기를 원하고 순종이 아닌 지배욕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왕이란 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권력이든 돈이든 힘이 될만한 것을 소유하고 있어야 그 힘을 무기 삼아서 약자를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누구나 이런 욕망이 있습니다. 사극에서 왕이 등장하여 천하를 호령하고 세상의 모든 일이 왕의 말 한마디에 의해서 좌지우지 될 때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왕이었으면'하는 환상을 품게 됩니다. 내가 왕만 된다면 뭐든지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갖고 싶은 것도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왕을 동경하는 것입니다.
이런 욕망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누군가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혹 순종한다고 해도 순종함으로서 주어질 이익 때문에 순종하는 척할 뿐입니다. 결국 굴욕감 속에 순종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이란 주어질 이익에 대한 기대도 없이, 억지가 아닌 자발적으로, 굴욕감이 아니라 기쁨의 마음으로 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인간이 누구에게 이런 순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순종이 아닌 소유욕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서는 순종이란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본성을 지닌 인간이 하나님께 나왔을 때 자기의 본성대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한다면 어떤 믿음이 보여지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소유하려고 하는 잘못된 믿음만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말하고 있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내가 아니라 나를 위한 하나님을 찾습니다. 내가 하나님 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편 주기만을 고대합니다. 이것이 자기의 소유욕을 버리지 못한 인간의 악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인간의 삶을 3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죄짓기 전의 단계입니다. 이때 인간은 악을 모르고 선한 상태로 살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이 구제를 했습니까? 십일조를 했습니까? 아니면 착한 일을 했습니까? 아담은 다만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며 살았을 뿐입니다. 결국 선은 행동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기며 크든 작든 많든 적든 관계없이 감사하면서 그 은혜를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상태는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땅에서는 이러한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악을 행한 자로서 악에게 질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인간의 상태입니다. 착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속에서의 본성이 착함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득을 따라 살도록 붙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 마음은 착함과 선함을 따라 살고 싶은데 현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핑계를 댑니다. 결국 옳고 그름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앎과 행동을 달리하며 사는 것이 인간이지 않습니까? 이미 악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삶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과 300년간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워간 에녹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에녹은 우리에게 죽음에 처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세상과는 결별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서에 보면 에녹은 심판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에녹은 장차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음에 대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심판을 알았기 때문에 경건치 않음을 좇아갈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떤 단계에서 살아갑니까? 첫 번째 단계는 인간에게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두 번째 단계로 사느냐 아니면 세 번째 단계로 사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 즉 악에 의해 지배를 받고 살아갑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살고 있습니까? 라는 물음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왕을 세울 때 지켜야 할 법칙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왕이라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땅에도 왕이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왕은 모든 사람들의 위에 군림하는 우두머리를 말합니다. 아랫사람을 지배하고 다스립니다. 대신 왕의 책임은 나라를 부강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국가만 부강되고 경제가 발전해서 잘살게만 된다면 국민은 그것으로 대만족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왕을 원합니까? 자기들을 잘살게 해줄 왕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뽑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민중들이 원하는 대통령은 잘살게 해주는 능력이 있는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이 도덕적으로 잘못됐다고 해도 나 배부르게 해주고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면 그것으로 최고의 대통령인 것입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행 사건으로 떠들썩합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클린턴 대통령의 인기는 별로 하락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선거때 조그만 도덕적 흠만 드러나도 인기가 떨어지고 스스로 후보를 사퇴하는 나라에서 대통령이 비서를 성추행 했다는 사건 속에서도 인기가 변하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클린턴 대통령의 재임 기간 동안 미국의 경제가 많이 부흥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를 잘살게 해주는 대통령이라면 도덕적인 흠도 얼마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자기 소유욕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과연 어떤 왕을 원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번에 한나라 당의 총재가 된 이회창 씨는 도덕성을 자신의 무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중들은 자신이 배고프고 어렵게 되면 도덕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하게 정치를 한다고 해도 민중들을 배부르게 하지 못하면 그는 비판을 받고 무능한 대통령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왕을 통해서 자신의 소유를 더욱 확고하게 하고 늘려가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우시겠다고 하는 왕은 전혀 다른 모습의 왕입니다. 먼저 15절에 보면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거하면서 이방 나라같이 왕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거든 너희들 마음대로 왕을 세우지 말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왕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왕이 필요 없는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시에만 순종하며 살면 되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이방나라를 바라보고 그들처럼 왕을 세워서 우리도 잘살고 싶다는 욕망으로 나갈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왕을 세우려면 이렇게 세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을 세우되 끝까지 이스라엘다운 모습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원한다면 강력한 능력을 가진 자를 우두머리로 세워서 자기들도 이방 나라처럼 잘살아보자는 욕심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왕을 원하겠습니까? 소위 지도력 있고, 능력이 있고, 재능이 있는 왕을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민 중에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라고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를 왕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가 왕이 되어야만 이스라엘이 끝까지 선민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굳이 왕을 세워서 그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겠다면 내 마음을 잘 알고 내 뜻을 너희에게 잘 전할 수 있는 그런 자를 세워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왕이야말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잘 이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러한 왕을 하나님이 세우셨을 때 그 왕을 환영할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당연히 세상에서 잘살고 땅의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살아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자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환영할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장차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통해서 참된 하나님의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로 구분되게 됩니다. 그 왕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세상에 오신 왕을 환영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참 백성이고, 밀쳐내는 자는 백성이 아닌 것으로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6,17절을 보면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왕은 세상에 대해서는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왕의 힘이고 국력입니다. 국력이 없으면 나라를 지탱하고 보호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나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말을 많이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힘은 여호와이고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지키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왕이 보여줘야 했던 것입니다.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것도 세상의 쾌락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또 자기를 위해서 은금을 많이 쌓아두지 말라고 하는 것도 돈을 힘으로 삼고 돈으로 살아가는 왕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왕의 모습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은 이런 왕으로 인해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잘못될 때 이스라엘 전체는 징계를 받아야 했습니다. 왕 한사람이 잘함으로서 이스라엘이 복을 받고 왕 한사람이 잘못함으로서 이스라엘 전체가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다윗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볼 때 이스라엘에 세움 받을 왕은 참으로 특이한 왕입니다. 세상 왕과 전혀 반대입니다. 세상 왕은 자기 나라를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힘을 기릅니다. 그것이 군사력이고 군사력은 말을 많이 가짐으로서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돈이 있어야 발전될 수 있고 경제가 발전한 나라의 왕이 큰소리 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자기의 권력을 이용해서 쾌락을 누리고자 하는 것도 세상 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이런 모든 것을 포기한 왕입니다. 세상 나라의 왕은 인간의 능력과 힘에 의해서 국가의 유지되고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과 자비하심에 의해서 나라가 유지된다는 것을 믿는 자입니다. 그 자만이 이스라엘의 참된 왕의 자격이 있습니다. 나라를 부강시키는데에는 관심 없고 오직 백성들의 죄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의 길로 가지 않도록 그 앞에서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 것은 포기하고 오직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18,19절에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질 요소, 즉 세상 것은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율법책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안된다는 믿음만 고집하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은 그 왕을 보고 왕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만 따르는 민족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이스라엘이 세상 것을 포기하고 국가의 부강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것에만 관심 두고 사는 왕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으로 결국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임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속에 세상 것이 포기되지 않고 왕을 통해서 잘살아보고 싶은 욕망으로 산다면 세상 것을 포기한 왕은 환영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어떤 왕을 원하느냐가 지금 이스라엘이 무엇을 바라고 사느냐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왕을 원하십니까?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우신 참된 왕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세상 것을 포기한 채 오직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자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이 배척했습니다. 왕다운 강한 힘이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당신 같은 왕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결론이 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교회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난무하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영접하고 그 왕에게만 순종하고 따르는 참된 예수님의 백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과연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상 것을 포기하고 오신 예수님인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세상 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이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선행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이려고 하고, 거대한 건물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이려고 합니다. 전도하고 선교하고 구제하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이고 왕을 따르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강한 힘을 가지고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는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존경받을만한 조건이 전혀 없습니다. 가문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왕이라고 내세울만한 구석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분은 바로 이러한 분이고, 우리가 왕이라고 따르는 분이 바로 이러한 분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인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우리들의 죄에 있었습니다. 자기 백성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잘 아셨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왕으로 영접하고 따르는 그분의 백성이라면 어떤 길을 가야 마땅하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왕과 함께 세상 것을 포기하는 길로 나가야 하고, 힘을 포기하는 길로 나가야 합니다. 교회 부흥이나 내가 잘되는 것에는 전혀 관심 두지 않은 채 오직 내 죄를 위해서 오신 나의 왕되신 주님 앞에서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하면서 '나는 예수님으로만 삽니다'라는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새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새롭게 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는 것은 우리의 왕이신 분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셨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왕은 세상 것은 포기한 채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왕을 찾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가증한 행위 (신 18:9-14)
우리는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과학과 문명 문화와 전혀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미개인'이라고 부릅니다. 신발도 신지 않고 옷도 입지 않고 자동차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비행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큰 나무 잎으로 대강 엮어서 만든 천막 같은 집에서 발전도 없이 다만 하루 먹고살기 위해서 짐승이나 사냥하며 살아가는 그들을 보고 소위 문명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야만인, 미개인이라고 하면서 무시하고 비웃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극도의 원시인, 또는 미개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오늘날의 인간을 비교해 볼 때 다른 점이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미개인의 모습과 문명인의 모습에서는 어떤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차이점이라고 해봐야 신발을 신고 옷을 입고 다니며 자동차를 운전할 줄 알고 지하철을 이용할 줄 아는 등의 과학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의 혜택을 입고 있을 뿐이지 과학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법을 배워서 이용하는 것이지, 실제로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어떤 원리로 어떤 부품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움직이는지 그 원리도 모르면서 다만 자동차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운전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문명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자동차를 운전할 줄 모르면 미개인이 되는 것입니까?
인간을 문명인과 미개인으로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과학을 기준으로 해서 문명인과 미개인으로 구분해야 하는 것입니까? 과학이 발달한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을 볼 때 한국은 미개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문명과 야만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기 우월에서 등장한 낱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문명과 야만을 과학과 문화를 가지고 구분하려고 하지만, 사실 인간을 놓고 그 행동을 비교해 본다면 문명과 야만의 구분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문제가 되어온 일이지만 한국 사람이 보신탕을 즐기는 것 때문에 유럽 쪽의 나라들로부터 야만인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를 한 식구처럼 여기는 그들의 문화적 시각에서 나온 판단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럽 쪽에서도 얼마든지 우리가 혐오하는 것들을 식용으로 삼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회적인 환경과 문화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문화가 기준이 되어서 야만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소위 문명인과 야만인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과연 본질적인 차이점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옛날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그 인간과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문화를 배우고 도덕과 윤리를 배우고 인격을 배워왔던 오늘날의 인간과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말씀드린 대로 과학과 문화를 가지고 그 차이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배우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문화란 시대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화되어 갑니다. 따라서 오늘의 문명이 내일에는 야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컴퓨터를 처음 구입할 때는 소위 286이라고 불리는 기종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286 컴퓨터를 이용하는 사람은 문명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몇 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286 컴퓨터를 쓰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지금 286은 아예 사용할 수 없는 기종으로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286만이 아니라 386, 486도 퇴보하고 이제는 586도 점점 퇴보해 가는 추세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발달하는 과학은 어제의 문명을 오늘에는 야만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학과 문화를 기준으로 문명과 야만을 구분한다면 결국 영원한 문명도 야만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문명과 야만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과학과 문화가 전혀 없었던 몇 천년 전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날아다니는 오늘의 인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문명은 쉬지 않고 발전하고 진화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전혀 진화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화된 것은 문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전혀 진화되지 않은 채 에덴동산에서의 죄의 모습이 그대로 오늘의 인간들에게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로 인간 세계에서는 많은 윤리학자들과 도덕군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공자 맹자 장자 등 수많은 학자들이 등장해서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윤리를 가르쳤습니다.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윤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전혀 변화하거나 진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 인간의 죄의 모습과 오늘 우리들의 죄의 모습에서 전혀 차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과학의 혜택 속에서 문명인으로 산다고 해서 소위 미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인간의 죄는 동일합니다. 모두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육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바로 나 자신의 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복술자,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해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9절)라고 말씀합니다. 본받지 말라는 가증한 행위란 앞서 말씀드린 그런 자들을 가까이 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지금은 그런 것을 미신이라고 하면서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고 점을 치는 사람들을 미개인 취급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렇게 간단하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무당을 불러서 굿도 하지 않고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점을 치지도 않았다'라고 해서 나 자신은 오늘 본문 앞에서는 깨끗한 인간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앞서 말한 그들이 하는 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0절에 보면 아들과 딸을 불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가 나옵니다. 이것은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자기 자식을 불에 태워서 제물로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이방 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성행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지금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10절의 말과 오늘 우리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자식을 바치지 않는다고 해도 자식의 역할을 하는 것은 많이 있습니다. 십일조가 자식의 역할을 하고 있고 우리의 봉사가 자식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지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복술자란 점을 치면서 인간의 복을 예언해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복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것은 하지 말아라는 식으로 인간을 화를 피하고 복으로 유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교회에서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이렇게 하면 화를 피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복술자와 똑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오늘날의 교회가 복술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점쟁이를 찾아가지 않는 대신 교회 와서 점쟁이를 찾고 있는 것에 자나지 않습니다.
길흉을 말하는 자란 날자와 시간을 따지면서 미래의 길흉에 대해서 미리 말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사할 때 소위 손없는 날을 택한 것이나 결혼 날짜를 따지는 것들을 말합니다.
요술하는 자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람을 뜻하고, 무당 역시 신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받아서 그 능력으로 화를 물리치고 복을 끌어들이는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진언자란 신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그 계시를 통해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계시 운운하면서 신자들을 미혹하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떠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접자란 신과 접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사람을 말합니다. 귀신을 불러내어서 귀신으로부터 미래의 길흉을 미리 듣고 그것을 말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박수는 남자 무당을 가리킵니다. 초혼자란 죽은 귀신의 영을 마음대로 초청할 수 있다는 사람입니다. 죽은 영을 불러내어서 그 힘으로 앞으로의 일을 미리 예언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용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용납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면서 그들이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용납하지 말라는 말로만 이해해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 앞에서 쉽게 떳떳한 마음을 가지고 '난 아니야'라는 당당한 마음으로 앉아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복술자 길흉을 말하는 자 무당 등 이런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들이 하는 일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들이 무엇이었습니다. 모두가 인간의 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화는 피하고 복은 끌어들이자는 속셈에서 복술자를 찾고 길흉을 말하는 자를 찾고 점쟁이를 찾고 무당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화와 복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발상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을 원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탐욕 때문입니다. 세상을 모든 기대를 걸고 세상에서 실패하지 않은 인생을 살려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에 일이 잘 안될 때는 점치는 자를 찾아서 화에서 벗어나서 복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물어보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인정하신다면 과연 그러한 본질적인 욕망이 교회에서 보여지지 않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교회란 인간의 욕망으로 사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그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은혜로 사는 신자에게 화, 복의 구별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화라고 생각하는 좋지 않은 일들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셔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방법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되면 복이고 못되면 저주라는 개념에서 살아가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께 붙들린 채 천국을 향해 끌려가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만 복으로 알고 그 복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인생이기 때문에 무당을 찾고 복술자를 찾고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자식을 바치는 일들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세상의 복과 화의 기준을 그대로 끌어 들여서 복술자 점쟁이 무당 등과 똑같이 화를 물리치고 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푸닥거리를 서슴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부흥회, 안수기도 등등 이런 모든 것들이 인간의 복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에게 복이 된다고 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무당으로 복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과 연관시키지 마십시오. 안좋은 일이 있으면 '내가 주일을 안지켰더니' '십일조를 안했더니'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내가 잘하면 복을 주고 못하면 화를 내리는 분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과 전혀 상관없이 일하십니다. 행동을 잘한다고 해서 복을 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목사님 그렇다면 우리가 행동을 잘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겠네요'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그 질문을 통해서 지금까지 잘해보려고 했던 것들이 결국 하나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발각 되버립니다.
제가 신자된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발 잘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하지도 못한 사람이 잘하려고 발버둥칠 때 그 사람은 제풀에 쓰러지고 맙니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가십시오. 인간은 애당초 하나님 앞에서 잘할 존재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나는 잘했다'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여전히 더러운 자고 악한 자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어떤 행동을 통해서 자기 잘남을 보이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주어진 여건과 환경에서 작으면 작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며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이런 신자가 미래의 길흉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무당이나 박수를 찾아서 그 힘으로 화를 물리치고 복을 얻고 싶은 마음을 갖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지고 못가지고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기 때문에 남들보다 못가졌다면 못가진 속에서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을 드러내면 되는 것이고, 많이 가졌다고 해도 교만하지 않고 자기 힘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에 믿음을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욥기서에서 사단이 하나님에게 욥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은 세상적인 많은 것을 줬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이 그런 것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서 사단에게 욥을 치도록 허락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된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하며 살아가는 것은 세상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보이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세상 것을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변함없이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일 때 그 자가 진실된 하나님의 신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신자에게는 세상 것을 가지고 못가지고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화와 복에 대해서 이미 초월해 버렸다고 말할 수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를 물리치기 위해서 이렇게 하고, 복을 얻기 위해서 이렇게 하라는 세상의 말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단지 무당을 찾지 말고 복술자를 가까이 하지 말고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란 인간의 힘으로 화와 복을 조절해 보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무당을 찾고 점을 치고 궁합을 보고 결혼이나 이사를 할 때 날자와 시간을 따지는 것입니까? 인위적으로 화를 피하고 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이것은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법칙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은 철저하게 은혜의 법칙으로 살아가는 땅이기 때문에 그 은혜의 땅에서 가증한 것은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무당 복술자 등의 사람들을 용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미개인이든 문명인이든 인간이 전혀 진화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 행복과 자기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채 살아가는 인간의 죄가 아담의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통해서 내려지는 결론입니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세상을 희망적으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심판의 장소이고 망할 장소로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세상을 심판의 장소로 보지 않습니다. 노력만 하면 자기의 꿈을 키울 수가 있고 자기 소원과 계획을 이룰 수 있는 장소로 봅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 대해서 포기하지 못한 인간이 자신에게는 자기의 꿈을 이룰만한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뭔가 조언을 얻고 힘을 얻기 위해서 무당을 찾고 점치는 자를 찾는 것이 아닙니까? 그 행위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에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포기 없이 희망을 가지고 교회로 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세상일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을 통해서 자기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한 채 예배하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은 1-8절까지 말씀하고 있는 '레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레위인은 특별한 족속입니다. 남들은 다 가지고 있는 세상 기업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족속들입니다. 세상 것을 힘으로 생명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생명으로 삼고 살아가야 하는 족속이 레위인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일해서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을 가지고 먹고 살아갑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관심 속에서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앙이 잘못되어 있다면 자연히 레위인도 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고 삶도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신앙이 어떤가를 보여주는 도구로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레위인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신앙으로 바로 산다면 레위인 되신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면서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려고 애를 쓰게 될 것이고, 신앙으로 바로 살지 못한다면 자연히 예수님께도 관심이 없어질 것이고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지는 것이 당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추구하는 것은 복이기 때문에 교회는 십자가 없이 복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찾는 무당 집단이 되고 말 것이 자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헛됩니다. 헛된 세상에서 헛된 것을 붙들기 위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마시고 헛되지 않은 예수님만 생명으로 삼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알 때 헛되지 않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 (신 18:15-22)
인간은 잃어버린 에덴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에덴은 곧 낙원이며 낙원은 평화와 안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잃어버린 평화와 안정을 찾아서 한평생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평화와 안정이 외부적인 요인들에 인해서 방해를 받거나 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이 혼자서 가만히 누워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의 평화와 안정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홀로 가만히 누워있다고 해도 인간의 상상과 환상은 끊임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결국 상상과 환상은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불행의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고 그 순간 이미 평화와 안정을 잃어버리고 불안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상상 속에 만들어진 미래의 불행에 대해서 염려하게 되고, 그 해결책으로 신의 힘을 빌리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래를 미리 안다는 것은 자연적인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인간이나 신의 힘을 빌어서 미래에 일어날 불행에 대해서 미리 간파하고 거기에 대한 대비를 함으로 불행은 모두 피해 가고 행복만 고스란히 취하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인 것입니다. 이 욕망 속에서 찾게 되는 것이 바로 무당, 복술자, 점치는 자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죄라는 것을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아 그렇구나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었구나'라고 하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끝까지 자기 사랑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무당일 수밖에 없고, 복술자고 점치는 하나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고 말씀합니다. 완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 흠도 하나 없이 완벽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니라 자기 사랑으로 하나님을 찾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라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어떤 마음으로 나와야 하는가는 이미 말씀 안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 스스로 신을 찾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신을 찾기에 효과가 있고 또 신이 좋아할 만한 방법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법적화 함으로서 또 하나의 성경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에서 소위 헌법이라고 말하는 예배 모범이 아닙니까? 신자가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성경을 통해서 찾는 것이 당연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인간이라면 자기 것을 다 버려둔 채 오직 말씀이 요구하는 바를 찾아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성경에서 말씀하지도 않은 것을 인간이 제멋대로 상상해서 예배 모범이라 이름하고 법적화해서 이것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장로교 예배모범이라는 법의 이름으로 이단운운 한다면 그것을 과연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방법에 쌍수를 들고 환영할 존재는 사단 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사단이 배후에서 인간의 방법을 옹호하고 거들어 주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뭔가 눈에 보이는 결과들이 나타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방법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철저하게 인간의 방법을 죽이고 무너뜨려야 합니다. 인간의 법을 죽여야 하고 인간의 교리를 죽여야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교리만이 살아남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인간의 방법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장로교의 헌법이고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인정한 교리라고 해서 그것을 성경처럼 인정하고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즉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은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해서이지 교리나 헌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그들이 성경을 먼저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법과 교리를 먼저로 한 결과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들도 제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적이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란 교리를 지키는 단체가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단체입니다. 교리를 지키는 단체는 다만 기독교라는 종교를 세우기에 급급한 인간단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내던져 버리고 교리만 붙들고 있으면 기독교 되는 줄로 착각하는 종교꾼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리란 성경을 통해서 발견되어지는 것이지 결코 교회 헌법이나 교리를 통해서 발견되어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신자로 하여금 진리에 대해서 고민하고 갈등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박탈해 버린 채 교회에서 제공하는 정답만을 받아들이고 그 정답만 따라오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성경은 알고 행동은 있지만 진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실천적 무신론자'들만 양산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 교리를 인정하고 교회 법에 순종하면 신실한 신자로 인정해 주는 것은, 신자를 진리로 인도하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라는 자기 단체에 귀속된 충성된 신하로 묶어두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위한 신자가 아니라 교회라는 조직을 위한 신자로 전락시켜 버리고 함께 지옥으로 끌고 가는 저주받을 짓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은 도외시한 채 인간의 방법을 앞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은 광범위한데 인간이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라고 반박합니다. 이러한 반박이 바로 평소에 성경에 대해서 포기한 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통해서 나타납니까? 말씀입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말씀 하나하나가, 사건 하나하나들이, 인물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서 등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느냐는 반문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무당, 복술자, 점치는 자 등을 용납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인간이 상상하고 연구한 방법을 가지고 신을 섬기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자가 바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를 통해서입니다. 15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에 선지자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선지자가 없기 때문에 세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당시에는 모세가 선지자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시겠다는 것은 모세 역시 완벽한 선지자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16절의 말씀과 출애굽기의 말씀을 연결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호렙산에서 여호와께 선지자를 구했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출 20:18-19절에 보면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의 말씀을 들을 때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봅니다. 그것을 본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떨면서 모세에게 '당신이 직접 우리에게 말하라'고 요청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 아닌 다른 선지자를 구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 더러 '당신이 말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 요청대로 지금모세가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일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종합해 보면 결국 어떤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모세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설 선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선지자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7,18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17,1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입에 두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즉 모세는 하나님이 세우시고자하는 선지자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겠다고 합니다. 모세와 같다는 것은 모세가 하는 일,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이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세우시겠다는 것이고, 하나를 세우신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세우시고자 하는 참된 선지자는 오직 한분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장차 하나님이 세우실 선지자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고, 구약에 나타난 다른 선지자들 역시 장차 나타날 한분 선지자를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우실 선지자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백성들이 요구한 것은 여호와의 음성을 직접 듣지 않고 다시는 이 큰불을 보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을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죽을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대신 말씀을 전할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이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깨달은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때 죽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결코 대신 말씀을 전할 사람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중보자를 원하는 쪽으로 나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진심으로 중보자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죽어야 할 인간임을 아는 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중보자를 바라보고 진심으로 중보자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느냐"고 교인들을 다그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는 말씀을 통해서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말씀은 신자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함과 자기 사랑만 잔뜩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 아닌 말씀 속에서 과연 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자들이 과연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필요로 하겠습니까? 주님만이 나를 살린다는 간절함 속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나오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가나안 민족과 같이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찾는 거짓된 신앙일 뿐입니다.
교회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민중들이 거부하고 반대하는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민중들이 말씀을 반대할 때는 말씀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자까지 함께 반대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민중들로 거부 받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계까지 위협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민중들이 거부하지 않고 반대하지 않을 말을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민중들의 영적 생명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보다는 현재의 자리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차있기 때문에 결국 다른 복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을 볼 때 어느 한사람도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고자 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전하여 준 말씀만 그대로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민중들의 반대를 받고 그들의 손에 의해서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말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도 과연 하나님의 뜻이 너무 광범위해서 그 뜻은 다 알 수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뜻밖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법을 준수하고 교리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그리스도의 피에 모든 기대를 거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에 어떤 다른 것을 추가하지 마십시오. 선교한다거나, 구제한다거나, 교회를 부흥시켜야 한다거나, 예배당을 짓는 것들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하면서 교인들을 끌어들여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선교안하고 구제안하고 예배당 안짓는 교회는 하나님의 뜻밖에 있다는 결론이 되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보자를 내세워서 대신 전하게 하는 것은 죄인된 인간이 말씀을 직접 듣게 되면 죽어야 하기 때문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자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자입니다. 말 그대로 말씀을 대언하는 대언자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이란 어떤 것입니까? 과연 선지자가 대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과 같이 인간의 복을 빌어주고 위로나 해주고 도덕과 윤리를 말하는 말씀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선지자의 말에는 그런 말씀이 조금도 섞여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을 외치고 평안을 외쳤던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는 인간이 추구하는 복이나 평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모세에게 대신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하게 된 말씀은 십계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우실 선지자가 대언할 말씀도 십계명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십계명의 정신을 완벽하게 나타내 보일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신다고 할 때 그 선지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완성자로 오셨고, 율법을 완성시킨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제 우리는 말씀으로 오시고 선지자로 오신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말씀이라고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말씀이 육신 되어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선지자로 계십니다. 예수님이 따로 다른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통해서 완벽하게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 1:1-2절에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이 마지막 때 하나님은 아들로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이며 또 다른 계시가 존재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죽어야 할 우리가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말씀 앞에서도 죽지 않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20절의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예수 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한다면 그는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여러분, 선지자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외에 다른 말씀이나 계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지, 교회를 위해서 일하거나 교단을 위해서 일하는 것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종교를 옹호하지도 않고 인간의 교단을 옹호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단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광 받으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며 주님께 내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도피성 (신 19:1-13)
교회가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은 '하나님 나라 확장'입니다. 기도를 할 때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합시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 확장'이란 세력 확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인간의 몸속에서 암덩어리가 확장되어서 온 몸을 점령해 버리는 것 같이, 이 세상을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차근차근 점령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마을, 농촌 구석까지 십자가가 세워진 예배당을 세움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겠다고 나섭니다. 이것이 소위 교회가 감당해야 할 최대의 임무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교회의 현실을 두고 생각할 때마다 저의 머리에 맴도는 것은 '현대 교회는 성경을 포기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성경을 말한다고 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과 뜻이 실려 있는 말씀 그대로의 성경이 아니라 온통 인간의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 '인간의 말'일 뿐입니다. 천국이나 부활 등은 교회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의 소원이며 관심입니까? 목사가 교회를 찾아온 교인에게 '예수님이 관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관심인 사람은 이 교회에서 나가주세요'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듣기에는 아주 귀에 거슬리는 말이고 '목사로서 어떻게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들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대해서 많은 안타까움을 가집니다. 듣기에는 극단적인 말이 될 수 있는 이런 말까지 해서라도 교회가 무엇이며 우리의 구주이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여러분에게 알려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소위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사람으로서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은 교회가 아니고, 자기 자신도 아니며, 하나님 나라 확장이 아니라 바로 주님입니다. 십자가 지시고 피흘리시며 죽으신 주님에만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이 신자로서 당연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종교적인 일들이 마치 주님의 뜻인 양 오해된 채 난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탐욕 속에서 벌어지는 종교적인 일들이기 때문에 보여지는 것도 모두가 인간의 탐욕으로 나타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세력 확장이란 인간의 탐욕입니다. 탐욕이란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보면서 더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명목을 내세워서 내 교회를 확장시키고자하는 탐욕이고, 내 교단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탐욕이며 나아가서는 내가 믿고 있는 종교의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입니다. 그 탐욕인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옷을 입은 채 사람들을 착각으로 빠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세력의 확장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하나님 나라 확장은 전혀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이미 하나님 나라가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된 것인데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야 한다니 그것이 무슨 말이냐라고 따져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늘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기독교라는 단체의 세력확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마피아의 대부입니까? 예수님이 폭력 조직의 우두머리입니까? 마피아나 폭력조직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다른 조직과 죽고 죽이는 싸움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음이라는 것이 과연 이런 식으로 확장되어지는 것입니까? 이 지구상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늘어가고 교회 숫자가 늘어가는 것이 과연 '하나님 나라 확장'일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실 확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껏 교회가 확장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생각할 때 어떤 의미를 가지고 확장이란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확장이란 세력이 넓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하나하나 찾으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지 결코 인간에게 맡겨진 사명도 아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우린 단지 주님께 부름을 입은 사람으로서 주님을 나의 왕으로 섬기며 주님의 마음에 복종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신자가 여기저기서 발견되어지는 것,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저는 은석교회가 주님께만 관심을 가지고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신자가 늘어가기를 원하는 것이지 결코 교인 수가 늘어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마음도 아니고 주님의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인수가 많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주님만을 왕으로 섬기며 주님을 따르고 있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님의 마음이 퍼져있는 나라입니다. 신자가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깨닫게 되고 그 마음으로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나라, 즉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고, 우리는 과연 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선지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장차 선지자 하나를 세우실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장차 세우실 선지자가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실 선지자가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실 선지자, 그분이 행동하는 하나하나가 앞으로 그분에 의해서 인도함 받을 이스라엘이 지향하고 나타내야 할 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모습에 대해서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장차 세우실 선지자에 의해서 인도함 받는 나라는 바로 이런 나라다'라는 것을 여러 정황들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도피성'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됨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피성은 오늘 본문에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부터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도피성을 세우라는 것은 백성의 편리를 위해서 마련한 하나의 제도가 아닙니다. 도피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도피성'을 통해서 신자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며, 신자가 모이는 그 모임에서는 어떤 모습이 보여져야 하는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도피성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우연히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마련한 장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사람을 죽였는데 그것 때문에 사형을 당하면 억울하니까 억울함을 없게 하기 위해서 도피성을 만든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위한 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도피성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이라면 애당초부터 하나님께서 실수로 살인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셔야 당연합니다.
본문에서도 실수로 사람을 죽인 예를 말합니다.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산에 갔는데 도끼질을 하다가 도끼가 빠져서 옆 사람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면 무엇 때문에 실수로 사람을 죽이도록 하시고, 또 다시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도피성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으셨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은 도피성을 만들게 하시고 또 이스라엘 안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있게 하셔서 그 사람을 도피성으로 피하도록 하심으로서 이스라엘 전체에 뭔가를 가르치시고 배우게 하려는 의도가 있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도피성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함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마음에 담고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회에는 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단체를 결성할 때면 필연코 등장하는 것은 법과 규칙입니다. 법과 규칙은 단체 보호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단체를 보호함으로서 단체 안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게는 국가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국가의 법은 국가의 존속을 위하고 국가의 유익을 위한 법입니다. 국가에 유익 되고 국가가 발전함으로서 국가에 소속된 백성들에게 유익이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국가 보호가 법과 규칙의 목적이며 기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법과 규칙을 잘 지키는 나라일수록 선진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국가라는 것은 법과 규칙을 통해서 백성들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국가와 다수의 유익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법과 규칙이라는 울타리 안에 매어 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도 법이 있습니까?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도 분명히 기준이 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없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은 법이 신자를 통제하는 것도 아니고 신자의 자유가 법에 의해서 얽매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기준 되는 것은 있지만, 그 기준에 통제 받는 것이 아니고 기준을 지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법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기준은 있지만 기준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지켜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삶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도피성이란 제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기준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임을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은 자와 실수로 죽이게 된 자를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보수자의 손으로부터 목숨을 지킬 수 있는 곳은 오직 도피성 한 곳 뿐입니다. 그곳에서만큼은 자기의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자의 가족도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피했을 경우에만큼은 복수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수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보수자가 자기 가족의 복수를 앞세워서 말씀도 무시해 버린다면 도피성으로 쳐들어가서 살인자를 죽여서 복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도피성으로 피해서 목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는 제사장이 거하고 있는 도피성에서 제사장의 은혜와 보호로 자신의 생명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자의 가족은 도피성으로 피해서 제사장의 은혜 아래 있는 자에 대한 복수를 포기함으로서 모두가 제사장의 은혜라는 방식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도피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라는 원칙과 기준 아래 살아가야 할 나라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이란 바로 이 도피성의 정신 아래 굴복하는 자가 늘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 19:8-10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열조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또 네가 나의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림이 없게 하라 이같이 하면 그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신 땅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항상 그 길로만 행할 때에 도피성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무죄한 피를 흘림이 없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명령대로 행할 때, 즉 도피성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도피성의 정신이 세상으로 확장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전도, 또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신 그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로만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로 인해서 도피성의 정신이 드러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도피성의 실체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원한 도피성이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주안에서 산다는 것은 도피성 안에 거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도피성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성에 피한 자는 제사장이 죽으면 자유를 얻어서 세상에 나올 수가 있습니다. 죄없는 자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피성 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죄없는 자로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의 은혜와 긍휼이 삶의 기준이 되어서 그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하지 못한 미움과 복수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긍휼하심에 사로잡혀서 용서라는 자유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용서하라'는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 되신 주님 안에서 배우게 된 긍휼과 은혜에 의해서 이끌려 갈 뿐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되는 일이 발생하고 억울하게 죽는 일이 발생하게 하심으로서 용서하고 용서받는 가운데 그리스도로 인해서 살아난 긍휼과 은혜를 잊지 말아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실수 없이 살 수 없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하시고 있는 일임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은 열심히 노력하고 일해서 부강한 나라로 만들라고 주신 땅이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온 땅은 죄에서 용서받은 자만 살 수 있게 하신 용서의 땅입니다. 은혜와 긍휼이 살아있는 땅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항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를 잊지 말라고 애매하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발생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주신 땅은 성령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에 의해서 다스림 받고 살아가는 신자의 사회는 은혜와 긍휼이 기준이 되어서 용서함과 용서받음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석교회는 과연 은혜와 긍휼이 기준 되어서 용서함과 용서받음이 나타나는 교회입니까?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나타나는 일이라면 내 개인의 유익쯤은 포기할 마음이 있습니까? 이 마음으로 사는 자가 바로 믿는 자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서로 미워하고 원한을 가지는 것은 모두가 긍휼과 용서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의 피로서 용서받았음을 잊지 마시고,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게 된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긍휼과 용서의 모습이 마음껏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 웃 (신 19:11-21)
교회는 세상과 다른 사회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고방식이 통용되어서는 안되는 특이한 단체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통용되고 보여진다면 그것은 분명 교회가 교회로서의 모습에서 이탈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 세상의 사고방식이 보여진다면 그 이유는 스스로 신자라고 말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교회로 모이면서도 '왜 교회로 모여야 하는지'그 이유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고 시간이 되면 아무 생각 없이 교회에 가야 하는 날로 생각하고 나왔을 뿐입니다. 종교적 무의식이 여러분을 교회로 나가도록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마음에 둔 채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닌 이상 여러분에게서는 세상의 사고방식이 그대로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고 있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성경에서 계시되어진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는지, 아니면 단지 인간의 생각으로 상상되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고 있는지를 냉철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믿음을 점검하는데 있어서 결코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을 믿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속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치고 예수님을 안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이 약해서 문제라는 말은 하겠지만 '안믿는다'는 말은 안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판단할 때 '너희들이 나를 믿기는 하지만 그 믿음이 약해서 문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성령 받기 전의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믿음은 있는데 그 믿음이 약하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나는 믿음이 없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나는 틀림없이 주님을 믿고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느낌이고 감정이며 자기 행동을 근거한 판단이었을 뿐이지 주님이 보실 때 그것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 역시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에 맡기면 안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스스로에게 속아넘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역시 내가 내 마음을 볼 때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의심하지도 않고 그 나라에 가는 것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나는 분명 하나님 나라를 믿고 있으며 소원하는 신자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이런 나에게 '너는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한다면 벌컥 화를 내고 달려들 것입니다. 그것은 수십 년간 교회를 다니며 예수님을 믿어온 자신에 대한 모독이고 무시이며 독선이라고 따질 것입니다.
목사에게 가장 모독적인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은 믿음이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목사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적어도 평신도인 우리들보다는 믿음도 좋고 오직 주님만 생각하고 소원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좋기 때문에 신학교 가고 목사가 되었다고 여깁니다. 목사 스스로도 '나는 목사다'는 것 때문에 전혀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되어서 교회일 하는 것을 '최고의 주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고의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 목사가 '믿음이 없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상상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목사처럼 탐욕으로 뭉쳐져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그 탐욕이 교회라는 것에 의해서 감춰져 있을 뿐이고 하나님 일이라는 명목으로 위장되어서 정당화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습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교회는 웅장한 예배당 건물에 수천 명의 교인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제공되어지는 월급과 자가용, 멋있는 사택이 관심거리일 뿐입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이 천국을 소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에게 '당신은 천국에 관심이 없다'라고 하면 화를 냅니다. 그 이유는 천국에 대한 문제 때문이 아니라 목사라고 하는 자신의 직위를 무시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결국 목사라는 직위가 한 인간의 믿음과 구원을 보증해 버리는 현실이 목사들을 대단한 착각으로 빠뜨려 버린 것입니다.
저는 지금 목사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라는 인간을 예로 들어서 여러분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장로는 장로대로 착각에 빠질 수가 있고, 권사는 권사대로 집사는 집사대로 믿음의 착각에 빠져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고, 장로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고, 권사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고, 집사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고, 교회를 오래 다녔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스스로에게 속지 않는 길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는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직책과 연륜을 버리고 오직 성경을 통해서 믿음을 점검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역시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 나라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심으로 그 나라를 소원하는 흔적인지를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이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는 인간이 멋대로 상상해서는 안되고 성경을 통해서 그 모습을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도피성이 바로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실수로 살인하게 된 자가 제사장이 있는 도피성으로 피하고, 죽은 자의 가족들은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에 대한 복수를 거두어야 합니다. 즉 오직 제사장의 긍휼에 자신을 맡기고 복종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란 주님의 긍휼로만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이 나라를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살아갈 때 긍휼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란 하나님의 긍휼을 법으로 삼고서 모이는 모임이며 긍휼을 법으로 삼고 모일 때 보여지는 것은 오직 긍휼일 수밖에 없습니다. 긍휼을 알고 긍휼에 복종하고자 하는 사람은 복수라고 하는 옛 본성도 버리게 되어집니다. 이런 마음이 있을 때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그 믿음으로 모이는 교회는 필연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은석교회를 이런 교회로 만들어 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 되어지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긍휼을 보여라 했다고 해서 보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옛 본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옛 본성을 주님의 긍휼이 극복하고 긍휼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이 만들어 가신다고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린 단지 그것을 믿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긍휼만 높여야 할 자들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진심으로 천국을 알고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 주님의 긍휼로 가는 나라라는 것을 안다면, 긍휼만을 원하고 긍휼만을 높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로 살지도 않고 긍휼만 높이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천국을 사모한다'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따라서 여러분은 '나는 주님을 믿고 있다' '나는 하나님 나라를 소원한다'라고 말하기 전에 '나는 긍휼만을 높이고자 하는가?' '나는 진심으로 긍휼을 기뻐하며 살고 있는가?'부터 먼저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주님의 긍휼로 살지 않는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만약 긍휼로 살지 않을 때 보여지는 현상이 오늘 우리들 가운데서 보여진다면 우리도 결국 긍휼로 가는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두고 살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본문을 보면 긍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긍휼의 법으로 살아가지 않는 자들이 이웃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11-13절까지는 이웃을 미워하여 계획적인 살인을 한 사람에 대한 처벌이 나오고, 14절에는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고, 15-21절까지에는 위증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이 모두는 이웃과 연관되어 일어나는 문제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인간적인 문제들은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긍휼만을 높이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 가를 통해서 긍휼을 높이는지 아니면 옛 본성을 앞세우며 살아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미워해서 계획적으로 살인한 사람이 도피성으로 피하거든 성읍의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서 그를 잡아다가 보수자, 즉 복수하고자 하는 죽은 사람의 가족에게로 넘겨서 죽이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그런 자를 긍휼이 보지 않고 무죄한 피흘린 죄를 이스라엘에게서 제할 때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복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로 존속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미움에서 고의로 살인한 사람은 가차없이 이스라엘에서 제하는 것이 이스라엘로 존재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현재의 교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의 법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실행하였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그 율법에 담겨있는 의미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야 합니다.
미움에서 계획적으로 살인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무시하고 자신의 감정과 고집으로 살아가는 불신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를 긍휼이 여기지 말고 제하라는 것은, 교회는 이런 사고방식을 용납하지 말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보다도 자신의 감정과 고집을 앞세워서 이웃을 미워하는 사람을 용납하는 것은 결국 함께 악에 빠지는 것이 되기 때문에 제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 관계에서 얼마든지 미움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나를 욕하는 자를 미워할 수 있고, 나보다 잘된 자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잘못되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가 옛 본성의 모습일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이웃에 대한 미움이 발생할 때 자기 감정과 고집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에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욕하고 해하는 자에게 초점을 두지 말고 그를 향해서 미움이 일어나는 자신에게 초점을 두고 주님의 긍휼에 복종하지 못하고 있는 자기를 책망하고 치는 것이 긍휼에 복종하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죄덩어리로 태어나는 인간에게 이웃은 단지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방해꾼으로 여길 뿐입니다. 혹 이웃에 대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일에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고 경쟁자의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린 살면서 '저 사람만 없었으면'하는 마음을 가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저 사람만 없었으면 내가 승진했을텐데'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이고, 학교에서도 '저 얘만 없었으면 내가 일등할 수 있는데'라는 악감정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 아닙니까?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나보다 잘난 이웃은 내 주위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악입니다. 이러한 악이 이웃에 대해서 악한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자기 자존심과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비록 교회를 나오고 목사라고 할지라도 교회에서 제해버려야 할 불신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힘있는 이웃이 아니라 나보다 힘이 없는 이웃이 있을 때는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그 예가 14절에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 곧 네 기업 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조상들이 정한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 23:10 -11에 보면 경계표를 옮기는 것이 왜 악한 일인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외로운 자식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너를 대적하사 그 원을 펴시리라" 이 말씀에 보면 이웃의 경계표, 즉 지계석을 옮기는 것은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 대한 횡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로운 자식이란 힘이 되는 부모가 없는 자식을 말합니다. 힘이 있다고 해서 힘없는 자의 것을 침범하는 것, 이것도 역시 주님의 긍휼을 무시하고 있는 불신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힘있는 자에게 대해서는 미워하고 시기하며 힘없는 자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눌러버리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모습이고 교회에서 제하여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가진 자의 힘에 굴복하고 그 힘을 이용해서 이득을 보려고 한다면 그 교회는 불신자의 집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5절부터 나오는 위증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위증이란 무엇입니까?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꾸며서 거짓을 말함으로서 이웃을 함정에 빠뜨리고 해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인간의 완악함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자신과 사이가 나쁜 사람을 이 사람 저사람에게 험담을 하는 것입니다. 험담 자체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부풀려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러한 악한 모습들이 교회에서도 많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교인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이 사람 저사람에게 전화하면서 험담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악입니다.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해서라도 이웃을 해치려고 합니까? 그 이유는 말씀드린 대로 자신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방해가 되고 손해가 되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좋게 말할리가 없습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신의 주위에서 밀쳐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래의 마음입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신의 이득을 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거짓말로 이웃이 해를 입든 말든 상관없이 오직 자신의 이득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에 지배를 받은 채 교회를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보여져야 할 교회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불신앙적인 언행들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위증, 거짓말은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사람이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본문 역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는 교훈으로 그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거짓말은 이웃을 해치고서라도 내 이득을 꾀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방식에서 이탈된 세상의 사고방식 그대로이기 때문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멸시하는 것이 곧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악입니다.
악을 살인하고, 약한 자의 것을 빼앗고, 거짓말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세상 수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다만 살인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바르게 산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수준은 전혀 다릅니다. 미움이나 살인, 약한 자를 억누름, 거짓말, 이런 모든 행위가 도출되는 근본적인 문제를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망각한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산다는 것을 망각한 것을 근본 문제, 즉 악으로 말씀합니다. 은혜와 사랑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살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 힘으로 자기의 이득을 꾀하며 살기 때문에 이웃에 대한 악한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와 사랑으로 사는 나라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에 두고 그 나라를 소원하며 산다면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기뻐하며 살고자 하는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은혜와 사랑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더 채우기 위해서 이웃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약한 자를 누르고, 거짓말을 하며 살아간다면 과연 그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결국 그 사람은 자기가 상상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두고 있었을 뿐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오늘 본문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자는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에 대한 우리들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멸시하며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악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이 최선의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기 때문에 현재의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결국 피해를 입는 자들은 우리의 이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간다면 자연히 이웃에게 그 득이 돌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로 모이면서 이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가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교회의 모습을 상실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이란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 이웃에게 득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게 하신 존재입니다. 이웃을 통해서 주님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손해를 보시고 이웃인 우리들에게 이득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가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는 이웃의 득을 위해서 살아가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나는 믿음이 없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가지 않는 존재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금 자신의 부족을 고백할 때 이것을 가지고 '믿는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여러분의 행동을 통해서 자신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살아가는가를 점검하십시오. 이웃에 대한 여러분의 행동에는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지의 여부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나는 과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사는 자인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공포심 (신 20:1-9)
인간에게는 공포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홀로 깊은 산중을 걸어갈 때 오는 공포심이 있고, 요즘 같이 회사마다 구조조정이라는 것을 할 때 '혹시 내가 퇴출 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공포심도 있고, 사업 실패에 대한 공포심도 있습니다. 학생은 학생 나름대로 시험에 대한 공포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할 공포심이라든지, 아니면 성적이 떨어질 것에 대한 공포심이라든지, 또는 취업이 어려운 요즘 졸업한 후 취직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듯 모든 인간은 비록 환경이 다르고 일하는 분야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공포심만큼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공포심을 가지는 원인과 이유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하나 추적을 해보면 결국 하나로 모아지게 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문제입니다. 인간의 공포는 생존문제에서부터 돌출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생존이 위협받고 흔들리게 될 상황에 처하게 될 때, 또는 그런 상황이 예상될 때 인간은 알 수 없는 공포심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자연발생적입니다.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도 인간의 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때 아담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의 죄는 아담에서부터 찾아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부끄러움을 아담에게서 찾아볼 수 있듯이 공포심 역시 아담에게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삶의 방식은 은혜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이 살게 하신 은혜로 사는 것이 본래의 인간모습입니다. 그때는 인간이 스스로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었습니다. 생존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실패에 대한 공포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날그날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면서 살려주신 대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을 살리는 것은 생존의 욕망이 아니라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단이 말한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눈을 돌렸을 때 인생의 목표는 자기 발전으로 달라져 버립니다. 은혜보다는 생존이 앞서 버린 것입니다. 은혜가 아니라 내가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불신앙의 인간이 되버렸습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이 되버린 것입니다. 그로부터 인간은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주관하는 분이 있다. 그분이 하시는 대로 내 인생을 맡기고 주어진 대로 감사하고 살아가자'가 아니라 '내 인생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 바로 내 것이다. 내 힘으로 살아가야 하고 내가 책임져야 할 인생이다'는 쪽으로 방향전환을 해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생존에 관심을 두게 되자 자연히 생존에 위협을 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공포심을 가지게 되고, 그 존재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신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에게는 자기 인생을 방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살만한 일을 했을 때는 신에 대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령 신자가 주일 예배를 참석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주일 예배에 빠지는 것을 싫어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한 사람으로서 징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창 3:9.10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것은 벗은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즉 벗었다는 것을 나쁜 것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벗은 것은 나쁜 것이고, 하나님은 나쁜 것을 싫어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나쁜 일을 한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서 자연히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그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생존에 대한 위협을 느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포라는 것은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으로서는 떨쳐버릴 수 없는 올무입니다. 그렇다면 공포를 떨쳐버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존으로부터 공포가 왔기 때문에 생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생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숨쉬는 생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숨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숨을 쉬어도 부자로서 쉬고 싶어하고, 세상에서 남들이 부러워 할만큼의 조건을 소유한 채 숨을 쉬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러한 생존 욕구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인간은 죽는 그 순간까지 공포심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근심과 걱정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이란 처음과 나중을 놓고 생각하면 모든 인생이 동일합니다. 태어나서 죽는다는 것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있는 과정입니다. 공포라는 것은 모두 그 과정이라는 것에 관심을 두고 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태어남부터 시작해서 죽음까지를 포함한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에서 죽음을 삭제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유독 생존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기 전까지의 과정이야 어떻게 살아왔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인데, 과정에 집착해 버리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잘살아보려고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죽음을 생각하기 싫어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된다는 공포들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세상의 모든 짐을 벗어버리고 안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곧 육신의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신자 역시 공포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을 수밖에 없는 공포심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공포심을 해결하는 길은 생존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생존이라는 올무에 매어서 태어나는 인간이 스스로 그 올무를 벗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릴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필연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않고서는 공포심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두려움을 가진 것은, '벗었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착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이 벗은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네가 지금 어떤 인간으로 되었느냐?'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처음 창조한 그 모습 그대로의 인간이냐 아니면 사단에 의해서 타락된 인간이냐를 묻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여러분께 가지시는 관심은 '어떤 인간으로 되었느냐?'이지 '주일을 잘 지키는 신자이냐?' '기도를 많이 하는 신자이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주일을 잘 지키는 신자를 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일을 못지키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에 대한 공포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에게 매어있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3절에 보면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날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인하여 놀라지 말라"고 합니다.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군사들이 두려움이 없이 용맹한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무기들로 무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전쟁에 참여한 군사들이 담대하지 못하고 용맹하지 못한다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용맹하다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상대방보다 힘이 약하다고 해도 얼마든지 용맹스럽게 싸울 수가 있습니다. 나라를 지키고자하는 애국심이 얼마든지 인간을 용맹스럽게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6.25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던 군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겁내지 말고 두려워 말고 떨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은 너희들은 용맹스런 군사가 되라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두려워하느냐 두려워하지 않느냐를 통해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있느냐 거부하고 있느냐를 판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니라 할 것이며"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행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도와서 승리하게 할 것이니까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아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기보다는 '너희는 본래부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던 자들이 아니냐?'는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두려워하고 떨고 겁을 내고 있다면 하나님께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는 것을 보니까 우리가 지금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이 4절과 같은 본문을 보면 어떤 식으로 생각하게 됩니까? 모두가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와주셔서 승리하게 하신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것을 믿지 못해서이다'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에 있어서 두려움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 두려움을 물리쳐 달라고 하고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는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다만 두려움을 가져다 준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두려움은 생존에 대한 욕망에서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예를 5절부터 말씀을 합니다. 먼저 5절에 보면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 즉 준공식을 하지 못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6절에서는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7절에는 여자와 약혼을 하고 그 여자를 취하지 못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두려워서 마음에 겁을 내는 사람도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것은, 하나님의 군사로서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군사는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용맹스러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둔 자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둔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를 초월한 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뜻이 됩니다. 살든 죽든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지 내가 주관하는 문제가 아님을 아는 자만이 두려움이 없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집을 건축한 사람은 전쟁에 참여해도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둘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대신 새 집이 그 마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새 집을 지어서 아직 낙성식을 안했다는 것은 새 집에서 살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새 집을 지어 놓고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전쟁에 나왔다면 과연 아쉬움은 무엇이겠습니까? 새 집에서 사는 것을 기대했던 것이 다 무너져 버린 상태에서 그 사람은 '전쟁에서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이 그 집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남좋은 일만 시키는 것은 아니냐?'는 번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새 집 때문에 전쟁에서 살고 싶어할 것이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이상 죽기를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새 집으로 가득차 있고 하나님을 두지 않고 있는 결과인 것입니다.
포도원을 만들고 과실을 먹지 못한 것도 같은 경우입니다. 자신의 수고와 땀이 들어 있기 때문에 열매를 기다리는 마음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돌려보내라는 것입니다. 여자와 약혼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앞둔 사람은 앞으로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갈 인생 계획으로 가득차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죽어버리면 물거품이 되버립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전쟁에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이 모든 경우는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전혀 엉뚱한데 가 있는 사람들이 무슨 하나님의 군사로서 전쟁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죽으면 내 것을 다른 사람이 가로챌 것이 아니냐는 생각으로 골몰한 사람이 군사로서 전쟁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결국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너희는 어떤 인간이냐?'입니다. 즉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사는 인간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관심거리가 그 마음을 차지한 채 살아가고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다른 관심거리로 우리 마음을 채운 채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에게서는 공포심이라는 것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즉 어떤 문제에 대해서 공포심을 가지고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내 마음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이 없는 인간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원래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본래의 인간에게는 두려움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에덴동산은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상황이나 문제들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과연 두려움을 안겨다 주는 상황이 주어졌기 때문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아직 있지도 않은 일을 미리 앞당겨서 그 결과를 예측하면서 걱정하는 일들이 거의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기우'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 것입니다. 인간은 쓸데없는 일에 걱정하는 존재입니다. 가령 사랑하는 두 남녀가 결혼을 해서 아무런 걱정거리도 없이 아주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걱정이 없겠습니까? 이럴 때 인간은 아무 걱정거리가 없이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것을 걱정하게 됩니다. 소위 지금의 행복이 깨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렇듯 모든 두려움이란 모두가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함께 하기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이 없는 인간을 원하신다는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사는 인간을 원하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결국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있다는 것은, 새 집을 지었다는 것도 없고 포도원도 없고 약혼한 여자도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자신의 소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유가 없는데서는 잃어버릴 것도 없고, 잃어버릴 것이 없기 때문에 공포나 두려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래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인간을 원하시는 하나님이 만약 우리를 간섭하시고,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신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하고 넘어지고 실패하게 하는 그 과정 속에서 두려움을 가지고 공포심을 가지는 우리들에게 '너희가 과연 나를 마음에 두고 사느냐?'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주님만 바라보게 하심으로서 점차 생존의 욕구로부터 멀어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까? 1절에 보면 '말과 병거와 민중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많은 것이 적은 것을 정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가진 자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많고 적은 비교의식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2절에 보면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거든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라는 말씀을 보면 제사장이 백성을 향해서 두려워 말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제사장이 백성에게 두려워 말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에게 많은 적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사장은 모든 것을 어린양이 피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제사장은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가 있는 민족이지만 이방인 어린양의 피가 없는 민족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있고 없고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는 이미 홍해사건을 통해서 체험한 이스라엘입니다. 똑같이 갈라진 바다에 들어갔지만 어린양의 피를 체험한 이스라엘은 살았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그들을 쫓던 애굽은 죽었습니다. 결국 생명은 피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피가 없는 민족은 전혀 두려워할게 없다는 것이 제사장의 믿음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고 피가 아닌 썩어질 것을 바라볼 때 두려워 할 수밖에 없고 공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제외한 인생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자로 살든 거지로 살든 권력자로 살든 약자로 살든 누구나 똑같이 죽음이라는 문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피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볼품이 없는 것 같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고 돈보다도 쓸모 없는 것같이 생각이 될 때가 있겠지만 그것은 죽음을 보지 않고 과정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리스도의 피는 여러분이 세상에서 생존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에게 많은 돈을 안겨주지도 못할 것이고 자식을 잘되게 하지도 못할 것이고 힘을 주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할 때 그리스도의 피는 여러분의 운명을 바꿔버립니다. 그 때는 천하를 가져온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피 앞에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를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능력을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소유를 가지고 생존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체험한 제사장들입니다. 그 피가 여러분을 의롭게 할 것이고, 이스라엘이 홍해를 통과하게 한 것같이 죽음을 통과하게 할 것입니다. 인생의 과정보다는 마지막에 시선을 두고, 썩어질 소유보다는 그리스도의 피에 마음을 두고 살고자 할 때 두려움에 떨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평 화 (신 20:10-20)
신자란 인간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책임감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책임도 다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현 신자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들이 인간에 대한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책임감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실 뿐입니다.
인간에 대한 책임감이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서로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합니다. 이 도리를 잘 지키면 그 사람은 착하다는 칭찬을 받게 되고, 지키지 못하면 나쁘다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인간에 대한 도리를 다함으로서 칭찬을 받을 때 그것을 신자의 도리라고 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도덕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책임을 다하려고 하기 이전에 하나님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는 인간을 원하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인간에게 책임을 다하는 신자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는 신자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신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인이다'는 자신의 실체를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다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자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면 그 사람은 이름만 신자라고 붙이고 있는 것이지 결코 신자의 모습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자라면 하나님에 대한 신자의 책임을 다하는 인간으로 살게 해달라고 하면서 비록 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위해 살아보려고 애를 쓰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고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자입니다. 이것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세상 사람과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느 범주에 속한 자로 살고 있는지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마음으로 나오는 자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로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책임을 잘 감당한 것처럼 떳떳하게 교회에 나오고 있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처럼 나오고 있습니다. 신자의 책임은 교회에 잘 나와주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자의 책임은 죽도록 충성해도 부족하고 설사 내 목숨을 바친다고 해도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든지, 목사든 평신도든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에 대한 책임으로 사는 자가 되야 합니다. 그럴 때 서로가 인간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교인들의 눈치를 보고, 교인은 목사의 눈치를 보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책임만 생각한다면 목사는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오직 복음만 전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럴 때 주님의 일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며 모이는 교회는 잘난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못난 자입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책임, 교회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모이기 때문에 결국 잘한 사람, 못한 사람의 구분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책임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0절에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할 때에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평화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온 거민으로 네게 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만일 너와 평화하기를 싫어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성을 칠 때 그냥 치지 말고 먼저 평화를 선언하고 그 평화를 받아들이면 함께 거하고 그렇지 않으면 성을 쳐서 다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입장에서 성경을 볼 때 난처한 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인간은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도공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작품은 가차없이 망치로 깨뜨려 버리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피조물을 없애버리는 것은 하나님으로서 당연한 권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대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시각을 가지기보다는 '하나님은 무서우신 분이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자기편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하나님의 입장만 고수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의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만 남기실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살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익은 세상에 아까울 것이 없고 겁날 것도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이 전멸을 당하는 경우는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입니다. 그러면 평화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의 평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인간의 평화는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전쟁이 없는 것, 이것이 세상의 평화이고 세상은 이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없다고 해서 평화는 아닙니다. 겉으로 사이좋게 지낸다고 해서 평화가 아닙니다. 가정이 화목하다고 해서 평화가 아닙니다. 이러한 평화는 불신자의 가정에도 많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평화란 인간과 인간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사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성을 향해서 '평화'를 선언한다는 것은 '우리 서로 싸우지 말자'라는 평화가 아니라 '너희들 하나님과의 사귐에 들어올래'라는 의미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귐에 들어오겠다고 회답하고 문을 열면 함께 거하고 사귐을 거부하고 대적하거든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지 아니하면 모두가 진멸당한다'는 것입니다. 16절의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평화는 소중한 것입니다.
마 10:12절에 보면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말씀하는 것도 결국 그 집이 화목하고 아무일 없이 편안하기를 기도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안이 함께 하는 가정,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제대로 되는 가정이 되기를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천사가 모든 집을 방문해서 어린양의 피가 발려져 있지 않은 집은 심판하고 피가 발린 집은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때 피를 발랐다는 것은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란 곧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그 사귐에 들어온 집은 심판의 천사가 그냥 지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어느 가정에 가서 하나님의 평화를 기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 가치 있는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없애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가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든 그리스도의 피를 영접한 자는 가치 있는 자로 취급받고 피를 거부한 자는 가치 없는 자로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를 영접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들어갔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다른 사람의 가정에서 '이 가정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이 가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이루는 가정이 되게 해달라는 뜻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조건 성을 쳐부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는 것은 그 평화를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서 싸워야 할 대상을 구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역할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이 세상에서 평화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길이라는 것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 선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나온 자는 하나님 편으로 살 것이고, 거부한 자는 진멸당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10장에서는 나올 때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평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더 높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소원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소원을 위해서는 남의 손에 있는 것을 내것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차지하려고 하고 뺏기지 않으려고 하는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평화를 선언한다는 것은, 남보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한 인생은 살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선언한 평화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라도 우리 힘으로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잘 살 수 있다'는 의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오늘날 신자가 하나님께 가져야 할 책임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에 살면서 하나님으로 감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자의 책임이요 평화입니다. 이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잘난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책임을 앞세우면, 자신이 인간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했던 것들이 생각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잘한 것을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자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면 내가 잘한 것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만 감사하고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 '나는 죄인입니다'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런 고백을 하면서 회개하는 신자가 '나 잘났다!'고 자랑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 하는 신자입니다. 하나님과의 갈등이 없는 신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어떤 식으로 인도하신다고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그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겨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평화가 함께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 한 그것이 곧 천국입니다. 무엇을 차지하고 얻으려고 하는 욕심은 여러분의 평화를 깨뜨려 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은 서로가 차지하고 얻고자 하고 되고자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교회보다 가치가 없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피가 내가 교회에서 이름을 내는 것보다 더 가치 없는 것입니까? 목사라는 직책보다 장로라는 직책보다 은석교회라고 하는 집단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더 귀하고 가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귀한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데 뭘 더 바라고 무엇으로 자신을 더 채우려고 합니까? 십자가로 부족하고 십자가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그 마음이 주님으로 채워지지 못하고 세상 것을 더 갖다 부으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평화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돈이 없고 권력이 없고 지식이 없는 것은 겨우 몇 십년 세상을 살면서 좀 불편을 당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화를 밀쳐내는 것은 영원토록 고통을 당해야 하는 일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할 일은 평화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평화를 선언하는 것이 여러분의 일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여러분이 싸워야 할 싸움은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고, 공부를 더 잘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나는 예수님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돈 없어도 괜찮고 공부 못해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가는 싸움입니다.
그렇다고 집에서 빈둥거리고 놀면서 돈도 벌지 말고 공부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공부를 하되 공부 잘해서 남들보다 더 성공하는 것이 목표가 아님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돈을 벌되 돈벌어서 성공하는 것이 목표가 아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라는 것입니다. '너도 돈으로 살지 말고 그리스도로 살아가자' 이 싸움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 한 신자는 두려울게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구원받았음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가장 가치 있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않는데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목사를 해도 총회 노회 눈치 보지 않고 하나님이 전하라고 한 복음만 전하기에 힘쓸 것입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하고, 예는 예라고 하면서 말씀만 드러내고자 할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권력을 두려워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책임으로만 살아가십시오.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게 되면 두려움과 근심만 남을 뿐입니다. 그리스도가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인간되었음을 감사하고 그것으로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평화로 살아가는 신자이기 바랍니다.
무엇으로 사는가? (신 21:1-9)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인간의 뜻과 계획이라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무능한 것인가를 깨달을 기회가 있습니다. 겨우 직장을 구했는데 병이 든다든지 물건을 납품할 회사를 구했다 싶었는데 그 회사가 부도가 난다든지 등등의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낙심을 하고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 것인가?'라고 하면서 한숨을 쉬기도 하고 하늘을 향해서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잘 안될 때, 그 때 비로소 내 뜻보다도 더 높은 다른 뜻이 나를 이끌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고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사 55:9)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기치 못한 일을 당하면 당황을 하고 어찌할 줄 모르면서 허둥거리게 됩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오직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기도하는 순간에도 내 속에는 여전히 내 뜻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고 하면서도 속에는 내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뜻은 네 뜻보다도 높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일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 앞에서 내 뜻을 내세워서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이 내 편 되어 주기를 원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지 내 뜻을 위해서 일하는 분이 아닙니다. 내 뜻이 포기되어질 때 하나님이 뜻이 나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지 내 뜻이 살아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앎으로서 내 뜻을 이루는 데 도움을 얻어보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 46:10절에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살아보겠다고 허우적대고 발버둥치는 자를 향해서 '가만히 있으라'고 하십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하나님 됨을 아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예기치 못한 위기가 닥쳤을 때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에 쉽게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마음 깊이 알고 있기 전에는 순종되어질 수 없는 말씀입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라고 하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떤 관계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에 대해서 철저하게 절망하고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절감하고, 상대적으로 나는 먼지 같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음을 마음속 깊이 절감할 때 나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들에 피살당한 시체가 엎드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 사람을 죽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럴 경우에 어떻게 일을 처리할 것인가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우리 식으로 한다면 범인을 찾아낼 수 없는 살인 사건의 경우 그냥 미해결 사건으로 덮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다릅니다. 2절에 보면 피살당한 시체가 있는 곳에서 각 성의 거리를 재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체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성을 다른 성을 대표해서 살인 사건을 해결할 성으로 정합니다. 시체로부터 가장 가깝게 있기 때문에 너희들의 성에 살인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살인자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성을 그 대표로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살인 사건을 해결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에게는 저주가 임합니다. 1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한 땅에서"라고 말씀합니다. 그냥 땅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한 땅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땅입니다. 은혜의 땅에서 살 수 있는 원칙은 은혜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 은혜의 원칙을 벗어난다면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을 내 뱉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의 땅에서 누가 죽였는지 알 수 없는 억울한 죽음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원칙을 무너뜨린 행위입니다.
창 8:20절에 보면 홍수 후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하나님께 정결한 짐승과 새를 잡아서 번제를 드립니다. 이것은 부정한 자신들이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노아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 1)고 하십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번성과 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 되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인간들에게 계속 전해지기를 원하셔서 하나님은 고기를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노아 홍수의 후의 세상은 새로운 세상임을 말해줍니다. 홍수 전까지는 땅이 아벨의 피흘림을 하늘에 호소하여 저주를 안고 있는 땅이었지만, 이제는 물로 씻음 받은 은혜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유지되는 생명임을 잊지 말라고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피흘리는 자는 은혜의 원칙을 거부한 자로 간주하고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셈과 함과 야벳의 사건입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었을 때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자신들의 옷으로 덮어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원칙을 그대로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함은 수치를 공개함으로서 수치를 가려주심으로 생명을 얻은 은혜의 원칙을 더럽히고 맙니다. 그것을 알게 된 노아는 함에게는 저주를 하고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합니다. 즉 함은 왜 세상이 저주를 받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되고 셈과 야벳은 이런 행위를 하는 자가 땅위에서 하늘의 복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본문을 살펴 볼 때 중요한 것은 가나안 땅, 즉 은혜의 땅에 피흘림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피흘림은 저주의 원인입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고 있는데, 형제의 피를 흘렸다는 것은 결국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은혜의 땅으로부터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아야 할 사건입니다. 그래서 시체로부터 가장 가까운 성이 대표가 되어서 살인자를 알 수 없는 피흘림에 대해서 속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속죄의 방법은 성의 장로들이 아직 부리우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여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심지도 못하는 골짜기로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곳에서 송아지의 목을 꺾어 버립니다. 알 수 없는 살인자 때문에 죄없는 송아지가 아무 이유 없이 골짜기로 끌려가서 목이 꺾여 죽어야 한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모든 장로들은 그 골짜기에서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말하기를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고 말합니다. 송아지의 목을 꺾고 그 위에 손을 씻으면서 '우리는 무죄합니다'라는 고백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단지 우리는 살인을 하지 않았다는 결백을 주장하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피와 상관없는 무죄자임을 고백하라는 것은 약속의 땅이 어떤 원칙에 의해서 유지되는 땅인가를 잘 알고 있다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알기 때문에 죄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알지 못한 살인자에 의해서 이스라엘 전체가 저주를 받아야 할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애매한 송아지가 끌려가서 목이 꺾여 죽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살인을 했든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너희들 가운데 살인이 일어났으면 은혜의 땅은 너희를 저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저주가 송아지의 죽음을 통해서 제하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세상은 대속이라는 원칙 아래 존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살인 사건으로 인해서 송아지의 목을 꺾어야 했고, 그것을 근거로 무죄자의 피흘린 죄가 제하여짐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대속이라는 원칙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만 죄 안짓고 나만 떳떳하고 나만 바르게 살면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세상은 내가 바르게 됨으로 유지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내가 바르게 살기 때문에 내가 저주를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교회가 말하기를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자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할 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내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있을 때 나는 저주와 상관이 없는 자가 되었다고 여깁니다. 저주는 살인하고 도적질하는 나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소금으로 빛으로 살기 위해서 애를 쓰고 바르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신에게는 저주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다시 말해서 심판에서 벗어난 것만 생각하지 심판 아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해 버린 것입니다.
신자가 심판에서 벗어났다면 그 사람은 죄 용서의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죄 용서의 경험이 있다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무서움을 간직한 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죄를 싫어하고 죄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심판에서 벗어난 것만 좋아하고 심판에 대한 무서움을 간직하지 않은 채 산다면 죄에 대해서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살인자가 발생해도 내가 한 것이 아니니까 하면서 무관심한 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망각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심으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신자는 필연코 죄의 심판과 용서의 흔적을 같이 지니고 살아갑니다. 즉 용서하심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에 대한 무서움을 간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죄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자가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내 호흡은 나의 의지가 아니요 호흡하게 하시는 분의 은혜임을 알게 될 때 호흡을 하면서도 겸손해질 수 있고, 왜 나로 하여금 호흡하게 하시는지 그 뜻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두손 놓고 가만히 있으면 모든 일이 다 된다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라 할 때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살리는 자가 따로 있음을 믿는 자이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고 자기의 의도대로 되지 않은 일이 있다고 해도 허둥대지 않고 조용하게 하늘의 뜻을 물어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원래 자기의 뜻을 이루고자 애쓰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아는 신자는 자기의 뜻을 앞세워 살려고 했음이 잘못임을 알게 되고 자기의 뜻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것이 가만히 있음으로서 하나님 됨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스스로 서려고 하고 스스로 되어 보려고 하는 자신의 잘못이 발견되어지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고 심판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회개할 수밖에 없고 스스로 하고자 하는 자신의 뜻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죄용서를 말할 때 한가지 분명히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죄를 지음으로서 하나님이 어떤 피해를 입었느냐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가해자를 향해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 앞에 죄용서를 구하면서 나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조차 모르고 죄용서를 구한다면 결국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주는 전문가가 되버립니다.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는 동등한 입장에서의 사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신랑이고 친구라고 말하니까 많은 사람들은 동등한 입장에서의 신랑, 친구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 때문에 피해를 입으신 분이 그 피해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나에게 신랑으로 친구로 다가오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 때문에 당하신 예수님의 피해는 염두에 두지도 않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대접만 해드리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내가 살고 있다는 은혜까지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8,9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 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사함을 받으리니 너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여 무죄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고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들이 살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살인 사건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땅에서는 그것이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까지 나의 죄로 여겨야 하는 것이 은혜의 땅입니다. 죄용서함 받은 흔적으로 사는 땅이 은혜의 땅이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경멸하고 거부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죄를 경험한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시고 죄는 은혜의 땅을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에 죄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그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의 땅을 더럽히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피해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는 그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이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용서함 받은 은혜로 모이는 집단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죄에 대한 미움과 경멸이 있어야 합니다. 죄지은 자를 미워하고 경멸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의 피흘리심을 더럽히는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거부하는 것이 성령 안에서 사는 신자이고 이것이 거룩한 교회입니다. 나만 죄짓지 않으면 된다는 것은 이미 죄속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얼마든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을 때 '나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입장에 서서 누군가를 비판하고 교회에 문제가 있음을 비난하고 원망한다면 그것은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 의만 내세우는 처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의 문제는 그 문제를 누가 일으켰든 상관없이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한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루속히 문제를 해결해서 교회를 안정시키려고 하게 되면 한 몸으로서 죄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8절에서와 같이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라는 애타는 마음을 배울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은석교회를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니고 사랑이 충만한 교회로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그러한 기대와 원함이 있다면 그것은 환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필연코 실망만 남게 될 것이고, 결국 교회를 향해서 '왜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습니까?'라는 불만만 토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는 열심히 사랑하려고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사랑을 하지 않으니까 내 사랑이 효과가 없다'는 불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란 죄용서를 받은 자로서 죄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모이면 됩니다. 그리고 죄의 모습이 보여진다면 함께 죄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마음 아파할 때 은석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으로 살아감을 보여주는 흔적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와 결혼 (신 21:10-1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규례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보통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행동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인을 한 범인을 알 수 없다면, 미해결 사건으로 남겨두면 그만인 것을 가지고, 시체로부터 가장 가까운 성의 장로들을 불러오고 제사장을 불러오고 한번도 부리지 않고 멍에를 매지 않은 송아지의 목을 꺾고 그 위 손을 씻으면서 '우리는 무죄하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고 이스라엘의 죄사함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런 행동의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믿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알 때 이해되어지는 것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안다'는 것을 서로 분리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즉 믿는 것이 구속사역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듣기에는 이상한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교회 나온 목적이 되어버리면 믿기 위해서 애를 쓰는 인간적인 수단과 행동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에게 믿음을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믿음의 선택권을 맡기고서 '나를 믿으라'는 식의 요구를 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서는 절대로 믿음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주셨던 십계명을 봐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에 '나를 믿으라'는 조항이 없습니다. 다만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셨고. '아무 형상이나 만들어서 그것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고,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을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않는 것, 어떤 형상이든 만들어서 섬기지 않는 것,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믿음의 명령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믿으라'는 말 한마디면 될 것을 가지고 이렇게 복잡하게 여러 가지로 세분해서 말씀하고 계시는가를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십계명의 말씀들은 '이렇게 하면 너희가 나를 믿는 것이다'라는 의미의 계명이 아니라 '믿음이란 바로 이런 모습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십계명을 대하는 현대 교인들의 실수는 십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십계명에 접근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너희가 나를 믿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계명이며, 따라서 십계명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들로서는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믿으라'를 요구하지 않고, '너희를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를 잊지 않고 있느냐를 묻고 계실 뿐입니다. 즉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은 하나님이되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그 여호와로 존재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때 '목사님, 믿는 것이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를 잊지 않는 것이나 같은 것이 아닙니까?'라는 반문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를 잊지 않고 마음에 두고 사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그런데 제가 굳이 믿음과 여호와를 아는 것을 분리해서 말씀 드린 것은, 현 한국교회의 정서가 '믿음'을 말할 때 '우리를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구속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여호와'임을 아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 편에서 해야 할 종교적 행동으로 이해하는 쪽으로 대부분 쏠려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염려해서 굳이 믿음과 앎을 분리해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구해주시고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믿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을 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자기 자신을 종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된 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즉 자신을 종되었던 천한 자로 인식하지 않는 앎이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천한 종으로 인식하고 그런 자신이 하나님의 놀랍고 크신 사랑과 자비에 의해서 자유자로 놓여나게 된 그 은혜를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그 믿음에서 행동은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 관심도 목적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에만 모든 관심을 두라고 말씀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님을 믿어 보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믿는 자의 표상으로 생각하고 맹목적으로 실천하려고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어진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실천만 머리에 담고 있고 실천에만 모든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지난 주일이나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이 나오면 그것을 이해하기가 상당히 난해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에 초점을 두고 생각한다면 본문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될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것임을 전제해야 합니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서 발견하고 싶어하시는 신자됨의 흔적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하나하나가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여러분이 모인 교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주님이 피흘리셨던 그 사랑의 현장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고, 또 교회가 흩어져서 각자 가정으로 모일 때도 역시 주님의 십자가의 정신이 드러나는 가정을 이루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가정과 연결되기 때문에 가정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살아갑니다. 남녀가 결혼을 할 때도 이 사람과 결혼을 하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을 꿈꾸며 하게 됩니다. 물론 그러한 것이 결국 자기만의 환상이었고 헛된 꿈이었고 부질없는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발견하게 되겠지만, 어쨌든 모든 사람은 행복을 꿈꾸며 가정을 이루는 것이 사실입니다.
간혹 TV에서 방영하는 문화강좌를 들을 때에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라고 하면서, 서로 이해하라, 서로 양보하라, 대화를 많이 하라, 참아라, 상대방의 약점을 보지 마라 등등의 실천사항을 제시하는 것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결국 내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이해하려고 하고 양보하려고 하고 참아라는 것인데, 아무리 참고 이해하고 양보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인내와 의지에 의해서 억눌려진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면 과연 행복이 존재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앞서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드린 것 같이 '내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말 역시 가정이 행복해지면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내 힘과 의지를 가지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고 한다면 없는 웃음을 만들어 내야하고 억지로 참아야 하고 억지로 양보해야 하는 결과가 생기기 때문에 결국 이것은 불행의 씨를 점점 키우는 것이지 결코 행복은 아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정을 갖게 하신 것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서 다른 사람에게 신자로서의 본을 보이면서 살아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즉 우리의 행복에 목적을 두고 가정을 이루신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서도 말하는 것이고 그들도 얼마든지 행복한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가정의 행복이 기독교의 목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행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가정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고 행복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어떤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행복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되면 결국 성경을 볼 때도 자기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보게 되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아, 저렇게 하면 내 가정이 행복해질 수 있겠구나'라는 것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신자가 생각해야 하는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두고 생각할 때 '어떤 가정이 과연 십자가의 정신이 살아있는 가정인가?'입니다. 즉 가정을 생각할 때도 자기 행복을 위주로 생각하지 말고 심판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깨닫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구원을 이루어 가는 기회로 삼아라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와의 관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이 모든 것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기회로 삼을 때 가정은 구원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가정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전쟁을 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심으로 승리를 하고, 그들을 사로잡은 후에 포로 중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어서 그를 아내로 삼고자 할 때의 규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하기 곤란한 점은 포로는 곧 노예이고 노예는 주인에게 있어서는 한낱 재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혹 여자 포로가 아름다워서 주인의 마음에 들었다면 그리고 아내로 삼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주인의 마음대로 아내로 삼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포로라고 할지라도 아내로 삼을 때에는 어떤 절차를 거치라고 말씀합니다. 절차란 다름이 아니라 12,13절의 말씀대로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포로의 의복을 벗고, 그 부모를 위하여 일 개월 동안 애곡한 후에 네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 남편이 되고 그는 네 아내가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단지 노예에 지나지 않은 여자를 아내로 삼을 때 이런 번거러운 절차를 거치도록 하신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즉 남자가 어떤 여자가 마음에 들어서 그 여자를 자기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을 단지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결혼으로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혼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라는 의도가 살아있는 규례인 것입니다.
포로가 주인의 부인이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신분이 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종의 신분을 벗어버리고 주인과 동등한 신분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포로된 신분으로서 주인의 사랑을 받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라고 합니다. 머리를 밀거나 손톱을 베는 것은 결례 의식, 즉 깨끗케 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포로는 이방인입니다. 즉 깨끗지 못한 이방인으로 있다가 이제는 더러운 것을 다 벗어버리고 깨끗한 자가 된다는 의미로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로의 의복을 벗는 다는 것은 노예의 신분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부모를 위해서 일 개월 동안 애곡하라는 것은, 이방 나라 백성의 신분으로 있을 때의 육적인 관계를 완전히 벗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는 예전의 부모와 예전에 살던 땅과는 완전히 결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한 후에 그 여자의 남편이 되고 그 여자는 아내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포로를 아내로 맞이할 때의 규례입니다.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배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너희들은 애굽의 포로된 자였고 노예로 있었던 자인데, 내가 너희를 사랑함으로 포로된 신분에서 자유를 얻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주인대로 '나도 저 여인과 같이 노예였던 사람인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종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고, 포로는 포로대로 주인의 사랑 때문에 종의 신분을 벗어버리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서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즉 남자를 통해서 여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의 의미이며 가정의 의미입니다.
결혼은 소유욕입니다. 물론 말은 사랑으로 결혼한다고 하지만, 사랑으로 결혼한다는 그 자체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고 싶은 소유욕인 것입니다. 소유욕이 서로 맞아떨어질 때 '우리 결혼하자'가 성사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결혼 그 자체에 커다란 의미를 두게 되면 결혼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상실하게 되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 그 자체에 의미를 두게 될 때, 사람은 결혼에 대해서 환상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 환상이 헛된 꿈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결혼 자체가 흔들려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결혼한 후 얼마되지 않아서 이혼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는 이유도 결혼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는데서 오는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도 처음에는 아름다워서 아내로 삼고자 결혼했지만 결혼 이후에 그 아내를 기뻐하지 않게 되었다면 그 여자를 마음대로 가게 하되 절대로 돈을 받고 다시 팔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 즉 종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시 종되었던 신분에서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에 이러한 자기 신분을 안다면 여인을 다시 버린다고 할지라도 결코 종으로 팔지는 말고 마음대로 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결혼하고 이혼하는 모든 문제에까지 단순한 남녀간의 관계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흔적을 발견하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내가 잘되고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아는 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과연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는지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하나하나를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구원을 배우고 깨달아 가는 귀한 기회로 삼고자 하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이런 얘기가 또 나옵니다. 15-17을 보면 이번에는 한 남자가 두 여자를 둔 경우를 얘기합니다. 한 남자가 두 여자를 데리고 살 때 두 여자를 동시에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이란 한 대상을 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여자도 사랑하고 저 여자도 사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곱이 여자는 넷이었지만 진심으로 사랑한 부인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랑이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지 여러 사람에게 동일하게 배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두 아내를 두었을 때 얼마든지 한 여자는 사랑하고 한 여자는 미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여자가 똑같이 아들을 낳았는데 하필이면 미워하는 여자가 낳은 아들이 장자로 태어납니다. 당시 장자는 두 몫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의 아들에게 재산을 더 주고 싶어하지 미워하는 여인의 아들에게 재산을 더 주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아들이 더 사랑스러운 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하나님은 사랑 받는 자의 아들을 미움 받는 자의 아들보다 더 앞세우지 말고 미움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해서 그에게 두 몫을 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런 규례를 통해서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합니까?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자기 감정입니다. 그러나 누가 장자로 태어나느냐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즉 장자의 권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미워하는 여인의 자식이라고 해도 장자로 인정하라는 것은 인간의 감정으로 행동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복종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스라엘이 이해한다면 결혼을 통해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겠습니까? 자기 자신도 종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함을 얻은 자였다는 것을 알고 자기 아내에게 그 은혜를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 관계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존재로서 서로를 바라볼 뿐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은혜와 신랑으로서 신부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친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는 통로입니다. 그러면서 아내를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통해서 예수님의 섬김의 위대함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결혼은 자기의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안의 새로운 것으로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 후에도 자기 것을 고집함으로서 삐꺽거리게 됩니다. 결혼은 내 이기심과 고집을 발견하는 기회이지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나를 발견했을 때 저절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모 (신 21:18-23)
신앙인이란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서 말씀에 의해 인격이 다스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중심으로만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은 언제나 자기의 것을 내어놓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내어놓으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의해서 인격이 다스림을 받는다면 결국 인간의 인격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어진 새로운 인격을 드러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인격이란 거듭난 인격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성령의 열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에 의해 다스림 받기 때문에 성령에 의한 인격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새로운 인격이라고 하니까 예전보다 더 승화되어진 인격으로 상상하면 안됩니다. 예전, 즉 말씀을 중심으로 살기 전의 인격과는 전혀 다른 인격입니다. 인격이 나아진 것이 아니라 예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인격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것은 포기하고 하나님의 것을 내세우는 인격입니다.
성령은 신자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해 갑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신자는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볼 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에게 그러한 경험이 있습니까? 피로 얼룩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게 되면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동안 자신이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 '나는 이것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 내 딴에는 이정도면 착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고 양심대로 살았다고 내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 행위들, 그 모든 것들이 다 쓰레기요 헛된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신의 것을 포기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남는 것은 영원한 사랑이요 은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의 것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인의 삶이며 신앙인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인격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대하는 것을 보면, 십자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가오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서 사형을 당한 예수라고 하는 한 인물에 대한 연민이요 동정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일을 나 때문에 당했다고 하니까 겉으로나마 미안한 척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십자가'를 외치면서 눈물 콧물 흘리면서 회개한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신앙이 많은 사람으로서의 한 의식의 과정일 뿐, 자신이 파괴되어지는 참된 회개의 열매는 전혀 기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뭔가 버려지는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어떻게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인이란 말씀에 의해서 그 인격이 다스림을 받으면서 오직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자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가정이란 어떤 가정이겠습니까? 신앙의 가정이란 교회 다니는 가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가정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신앙인이 모인 자그마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 가정에서 보여지는 것은 역시 하나님만 중심으로 사는 모습일 것입니다. 각자가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 받으며 사는 모습만 나타나야 하는 것이 신앙의 가정입니다. 그러나 역시 순수한 신앙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옛 본성도 함께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때로는 성령과 상관이 없는 모습을 자주 내 비취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십자가와 결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혼은 곧 가정과 연결되기 때문에 '십자가와 결혼'을 '십자가와 가정'으로도 얼마든지 바꾸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결혼이란 오직 십자가를 중심으로 사는 신앙인의 결혼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신앙인의 결혼은 자기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의 결혼은 '내가 과연 십자가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깨닫기 위한 하나의 도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실천하는 최초의 삶의 현장입니다. 따라서 가정에서부터 십자가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보여지지 않은 사람이 가정 밖, 즉 사회 속에서 살아갈 때 십자가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역시 교회에서도 십자가의 정신을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구원의 흔적을 발견하는 기회'입니다. 내가 과연 어느 편에 서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 귀한 기회입니다. 이러한 결혼의 의미를 무시한 채 오직 자기 인생과 자기 행복만을 주장해 버린다면 결국 그 가정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가정들이 흔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것을 고집하고 자기 것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나'라고 하는 틀 안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에, 또 다른 '나'로 존재하고 있는 실체와 마찰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간섭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틀을 가지고 상대방을 평가하면서 자기 틀에 맞추도록 하기 위한 가르침이 상대방에게는 간섭과 잔소리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모두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성격과 취향이 다릅니다. 서로 다른 '나'가 모여서 가정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정에서 '나'를 주장하게 되면 분명히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어른과 아이의 문제라면 보이지 않는 싸움이 잠재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특히 부모가 자식을 부모의 틀에 맞추게 하려다 보면 그것이 자식에게 잔소리와 간섭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식에게 가정의 유익을 위해서 취할 행동을 교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강제로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공동의 유익, 즉 가정이나 학교에서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행동을 포기할 줄 아는 것을 배워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각기 자기 생각이나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내 것이 맞으니까 내 방식을 따라라'고 서로가 고집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틀과 사고방식으로 모인 가정의 경우이고, 신앙인의 가정은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앙인의 가정은 말씀에 다스림 받고 오직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의 가정에서는 '나'가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기준으로 내세워져야 합니다. 너도나도 다 사라지고 오로지 하나님의 사고방식이 살아서 그 가정을 지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누구의 틀도 아닌 하나님의 틀에 우리 각자를 맞춰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가정의 행복과 평안이라는 것은 자동적으로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가정이 바로 이런 가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있을 뿐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틀에만 맞추어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것은 오늘 본문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자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가정에 아들이 있습니다. 이 아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착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면 별 문제가 없겠는데,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라고 할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단순히 부모 말을 듣지 않고 말썽 부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부모에게 행패를 부리는 아들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아들이 있을 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간혹 신문에 보면 부모에게 폭행을 하는 아들을 벌해 달라고 경찰에 아들을 고소하는 부모가 나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것은 아주 잘한 것이라고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부모가 아들을 다스리지 못해서 남에게 해를 입히고 있다면 그 아들을 공권력에 맡겨서라도 바르게 만들어 보겠다는 그 마음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부모들은 아들이 경찰에 붙들려 가는 것이 더 안타까워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아들을 죽음의 길로 내 몰아 버립니다. 이스라엘의 부모는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아들을 잡아서 성읍 장로들에게 데려 갑니다(19절). 그리고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20절)고 고발을 합니다. 그러면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 자식을 돌로 쳐죽이게 되는 것입니다(21절).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내에서의 악을 제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가정이요 부모였습니다.
완악하고 패역한 한 아들을 죽이는 이유는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모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역할자입니다. 즉 자식은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식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누누이 말씀을 드렸지만 십계명에서 중요한 것은 전문입니다. '나는 너희를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로라'는 이 말씀이 십계명을 해석하는 중심입니다.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악이란 약속의 땅에서 애굽적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완악과 패역은 애굽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애굽적 사고방식은 부모를 단지 자신을 낳아준 자로만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서의 이스라엘에게 부모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받는 통로입니다. 따라서 부모를 거역함은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자로 인정을 하지 않는 것이고, 이것은 곧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은 그러한 악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이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약속의 땅은 죄를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죄가 해결되어야 희망이 있는 땅이고 미래가 약속되는 땅입니다. 그래서 22,23절을 보면 사람이 죽을 죄를 범해서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았을 때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해서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합니다. 죄에 대해서만큼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복종하는 이스라엘이 말씀으로 살아가고 하나님만 중심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결혼을 할 때도 보여져야 하고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할 때도 보여져야 했던 것입니다. 즉 모든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인 가정, 그 가정만이 참된 이스라엘의 가정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도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가정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물론 자녀가 패역하고 완악하고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을 때 죽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고 말씀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자식이 있을 때 그 자식을 결코 용납하지 않고 부모에게서 짤라내겠다는 심정으로 자녀를 양육해야 할 필요성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가정에서 중요한 것은 부모입니다. 먼저 부모가 확고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서있을 때 비로소 자녀에 대한 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신앙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이 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소관이지 부모의 소관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한 것 같이 자식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전해야 할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식을 대할 수가 있습니다. 즉 자식에게서 세상의 성공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자식보다는 성공해서 부모의 위신과 체면을 높여주는 자식을 더욱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에게서 바른 가르침이 나올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모는 자식에게서 죄가 보여지면 아예 이스라엘에서 제거해 버립니다. 물론 부모로서 안타까운 마음과 애통하는 마음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심정으로 자식을 죽이는 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인인 부모로서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식에게서 보여지는 불신앙적인 요소는 결코 용납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지 않고 반드시 차단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자식을 책망하며 대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식이 부모를 생각할 때 '우리 부모는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에 대한 부분만큼은 확고한 중심을 가지고 살아가신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식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부모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보면 부모가 자식을 야단칠 때는 거의가 공부를 못했을 때입니다. '너 이래가지고 나중에 뭐가 될래?'하면서 공부에 대한 매는 부지런히 들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매는 전혀 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으로서는 '우리 부모는 신자이면서 하나님 말씀이 중심이 아니라 내가 공부 잘하는 것이 중심인 분이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식을 멸망으로 밀어 넣고 있는 부모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아예 부모부터 천국에 대한 관심도 없고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를 멸망의 불구덩이로 밀어 넣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심각성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즘 같이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하는 이때에 제가 신앙인의 부모된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자식들에게 돈에 의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이 없다고 해서 염려하고 걱정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게 되면 자식들은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부모부터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돈 때문에 흔들리는데, 그것을 보는 자녀가 하나님 중심으로 굳건하게 설 수 있겠습니까? 신앙인으로서 자식의 머리에 남아야 할 바른 부모상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부모이지 '돈 잘 버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많은 돈을 벌어서 자식 호강시키고 좋은 대학 보내서 공부시키는 것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최고의 일로 여길지 모르지만, 마지막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가 죽듯이 자식도 역시 죽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부자가 무엇을 호소했습니까? 지옥의 고통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에 있는 자기 형제들에게 이 고통을 알려서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저로서는 이 부자의 호소가 바로 저와 여러분의 호소가 될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얼마 전에 고액과외로 나라가 시끄러운 적이 있었습니다. 한 달에 백만 원은 보통이고 수백이 넘는 과외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보면서 그들을 욕했을지 모르지만 혹 여러분에게 그들과 같은 돈이 수중에 쥐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들은 고액을 들여서라도 자식을 유명한 사람에게 과외를 시켜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자식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자란 자식이 사회에 나갔을 때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겠습니까? '돈이면 다된다'는 사고방식에 빠진 채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한 예를 들어서 말씀을 드린 것이지만 지금 우리들이 바로 그런 식으로 자식을 양육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자식에게 안정감을 주는 가정은 돈에 흔들리지 않고 돈에 매이지 않고 자식이 공부를 못해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굳건히 서 있는 부모가 있는 가정입니다. 그럴 때 자식은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고 두려움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식들이 말씀에 어긋나게 살면서 전혀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단지 공부를 못하고 성적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고 마음이 흔들린다면 결국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을 보여준 것입니까? 우리 모두 부모로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입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부모는 늘 평소에 자식들에게 신앙적인 행동을 보임으로서 자식들이 천국에 도착할 수 있을 때까지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설령 지금 자식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한숨 쉬면서 자식만 나무라지 말고, 우선 내가 부모로서의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했는가를 돌아보면서 자신부터 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성령께 맡기고 이제부터라도 신앙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오직 진리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중심이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일에도 마음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있는 모습은 자식에게 평안을 주고 안정을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조그만 세상일에도 근심하고 염려하는 모습은 자식에게 불안감만 남겨 줄뿐이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특히 부부 싸움하는 것을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은 금물입니다. 돈 때문에 싸우고,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싸우고, 일이 잘 안된다고 짜증만 내는 그런 모습을 자식들이 목격할 때마다 가정으로부터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가출하는 것은 재미가 아닙니다. 가정에서 안정을 찾지 못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안정을 찾아서 떠나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을 위해서 가장 중심점이 되어야 할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먼저 신앙의 중심으로서 하나님만 중심으로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위상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버지들이 가정에서 천덕꾸러기가 되어간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돈 때문입니다. 돈을 버는 아버지는 가정에서 대우받고, 돈을 벌지 못하면 대우받지 못하는 그런 세상 풍조 때문에 아버지들이 가정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입니다. 큰소리를 치지 못하고 아내와 자식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아버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들에게 있어서 확고한 중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을 벌 때는 돈을 번다는 것이 진리이고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심점이 사라져 버리자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의 아버지라면 비록 돈 한푼 벌지 못한다고 해도 진리 때문에 아버지로서 그 위치를 확고하게 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런 아버지가 요구되고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느껴집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어머니가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가정에서 구원자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하나님만 의지해라' '돈을 사랑하지 말아라' '주님의 희생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라' 이런 말을 자식에게 할 수 없다면 참으로 불쌍한 부모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부모 자격이 없는 부모입니다. 그저 육신으로 부모이고 자식을 먹이고 공부시키기 위해서 돈 버는 기계일 뿐, 진정한 부모는 아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부모가 자식을 멸망으로 밀어붙이겠습니까? 자식에게 하나님만 중심으로 살아가는 부모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돈이 아니라 진리를 유산으로 남겨줄 수 있는 부모이기 바랍니다. 아무 것도 없어도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 할 수 있는 참된 신앙인의 가정은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만 중심으로 하고 말씀에만 복종하는 가정입니다.
형 제 (신 22:1-4)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성경을 대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이로 인해서 성경은 한낱 잔소리만 늘어놓은 책으로 전락되어 버린 실정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잔소리로 여기고 듣습니다. 설교가 끝나면 하나님은 뇌리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천국, 지옥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시큰둥합니다. 지옥이라는 곳에 대해서도 전혀 무반응입니다. 천국에 대해서도 마음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천국은 가면 좋은 곳으로, 지옥은 가기 싫은 곳으로만 여길 뿐입니다.
이런 교인들에게 교회는 자신이 기독교인으로 행세하는데 필요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불러주는 신에 불과합니다. 성경 역시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한 권 마련한 책일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은 가죽표지에 금색이 칠해지고 쟉크가 있고, 주석과 여러 가지 설명과 글씨에 빨간색 파란색 등 총천연색으로 잘 꾸며진 멋있는 최신 성경입니다. 그리고 주일이면 성경이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교회를 향합니다. 예배당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고 기도합니다. 예배당에 오면 가장 먼저 기도하는 것이 신앙이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주보를 펴고 먼저 광고를 봅니다. 무슨 재미있는 행사가 없는지를 살피고 주보를 덮고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찬송을 부릅니다. 드디어 고급 천으로 만들어진 검은 가운에 노란 천을 목에 걸친 목사가 등장을 합니다. 목사의 인도에 따라서 찬송 부르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헌금을 하고 축도를 하면 드디어 주일 하루 일과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남은 볼일을 보면 됩니다.
이것은 종교화되어진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은석교회 신자는 이러한 모습과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염려를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종교화된 신앙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이 종교화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과 자비로움에 감사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하나님의 심판을 인식할 때 발생하는 것이고, 그 두려움 속에서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십자가가 내 생명이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려움이 없이 십자가를 말하는 것은 모두 가짜이고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성경을 대한다면 과연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잔소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듣기 싫은 소리를 억지로 듣는 것에 불과합니다. 다 알고 있는 것을 또 다시 반복해서 들어야 하는 따분함과 짜증만이 몰려 올 뿐입니다. 그러면서 간혹 들려오는 우스개 소리에 짜증을 해소하면서 지루한 시간을 견딜 것입니다.
과연 성경은 여러분에게 무엇입니까? 깊이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일치된 삶을 살아가고자 성경을 대하셨습니까? 마지막 때 멸망에 빠지는 실패한 인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성경을 대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은 틀림없이 여러분의 가슴을 찌르는 비수로 다가올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죄의 모습이 낱낱이 드러나는 아픔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 아픔속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가 어떠한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에 퍼짐으로서 여러분에게서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안주해 버릴수록 성경은 하기 싫은 것을 요구하는 부담거리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존재한다면 성경은 여러분을 새하늘과 새땅으로 인도하는 인도자로 다가올 것입니다. 과연 어떤 마음에서 성경을 대합니까?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나님 나라의 길을 알려주고, 어둠에서 나에게 빛을 발견하게 해주는 말씀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귀찮아하는 요즘의 시대에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과 전혀 다른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맞는 백성이 있고, 세상 나라에 맞는 백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세상 나라에서 살기가 버겁습니다. 자신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 나라 사람은 하나님 나라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방식이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고 거부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흔히들 '천국 가고 싶다'는 말들을 하지만 그들이 상상하는 천국은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이거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이 꿈꾸는 인간이 살기에 최상의 삶의 환경일 뿐입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천국도 그 표현을 보면 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인 환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21:4절에 보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합니다. 눈물을 씻겨주시고 사망, 애통하는 것, 곡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아무런 근심 걱정 없는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라를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에 맞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나라에 맞는 사람을 고르실 때 인격이 있다거나 세상 욕심을 버렸다거나 착한 일을 많이 한 것을 보고 고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맞는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맞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들은 세상에서 한가지 특징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자기의 수고와 노력과 열심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오직 한 분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자체가 예수님의 공로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찬양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맞는 백성은 세상에서부터 자기의 공로는 보지 않고 예수님의 공로만 의지하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과연 누가 그 사람인가를 구분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누가 하나님 나라에 맞는 백성인가?'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형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형제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을 보고 하나님 나라 백성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종교와 상관없고,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이 내 맘에 들고 나에게 잘해주고 성격적으로 잘 맞는 사람이라면 친절하게 잘 대해주고 어려울 때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또 설령 전혀 모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려움에 빠진 것을 알았을 때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형제를 돕는 문제는 그런 차원의 얘기가 아닙니다. 만약 그런 차원에서의 형제라면 성경도 결국 윤리에 지나지 않게 되고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구분점이 사라지고 맙니다.
성경에서 형제를 도울 것을 말할 때는 형제를 돕는 그 마음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형제를 돕는 것은 그냥 형제가 어려움을 당했기 때문에 돕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도와주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신자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이 살아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형제를 대하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도와준 자만이 천국에 가서도 끊임없이 예수만을 높이고 찬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네가 혹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릴지니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무릇 형제의 잃은 아무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서 그것을 일으킬지니라"고 말씀합니다. 형제의 소나 양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거든 그냥 지나치지 말고 끌어다가 형제에게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혹 형제의 집이 멀면 집으로 끌고와서 형제가 찾아오기까지 잘 돌봐주라는 것입니다. 또 형제의 나귀와 소가 길에서 넘어진 것을 보면 반드시 일으켜 세워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이것이 별로 어렵지 않은 실천사항처럼 보여질 것입니다. '이것이 뭐 그렇게 하기 어려운 것이냐? 이정도로 천국 간다면 아무나 가겠다'라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형제 같으면 형제의 소유물에 대해서 보호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좋지 않은 형제라면 형제의 소나 양이 길을 잃고 헤매 일 때 '잘됐다'라는 마음으로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습니다.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자이기 때문에 그 형제가 재산상의 손해를 입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상대방을 형제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형제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흔히 형제 자매란 호칭을 많이 쓰기도 하는데, 과연 형제가 무슨 의미의 말입니까? 세상적인 시각에서 형제란 서로 피를 나눈 혈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형제란 혈족 관계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비록 혈족으로 형제라고 해도 서로 미워하고 경쟁하고 원수같이 지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형제라는 것은, 같은 교회에 출석하기 때문에 형제라는 것도 아니고, 혈족으로서의 형제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에서의 형제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같은 사고방식 안에서 성립되는 형제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이라는 곳을 눈앞에 두고 모세로부터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서 듣고 있습니다. 즉 약속의 땅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땅이기 때문에 은혜가 이스라엘의 중심 사상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가 중심 사상으로 되어 있을 때 형제에 대해서 본문과 같은 모습이 보여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만약 이스라엘 내에서 형제의 소나 양에 대해서 본문과 같은 태도를 보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내에서 은혜라고 하는 중심 사상이 깨어진 결과임을 말해줍니다. 즉 형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느냐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걸맞은 은혜의 사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겠다는 것이 본문의 의도입니다.
형제에 대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새롭게 정립하셨습니다. 마 12:50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혈족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관계, 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는 관계 속에서 새로운 형제관계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현재 혈족 관계를 모두 무너뜨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형제도 버리고 부모도 다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형제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새롭게 형성됩니다. 아무리 혈족으로 맺어진 관계라고 해도 그 속에서 싸움과 미움이 발생하는 것은 결국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속성으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싸움과 미움이 존재하는 것이 과연 형제입니까? 그것은 그냥 혈족 때문에 할 수 없이 형제라는 법적 관계를 유지할 뿐이지, 사실 만나기 싫고 함께 하기 싫은 마음이 있는데 그것을 형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기 때문에 형제라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보통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는 비유입니다. 눅 10장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율법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라고 되묻습니다. 그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고,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굽니까?'라고 묻습니다. 율법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고 싶어서 이웃이 누구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에게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가깝게는 내 옆집을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넓게 생각하면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이 될 것이고 더 넓게 생각하면 같은 시, 같은 도, 같은 나라, 결국 마지막에는 모든 지구인이 다 이웃이고 하나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 올림픽을 할 때도 '손에 손잡고'를 부르면서 모든 지구인이 다 한 이웃이고 하나라는 캠페인을 했고,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망상일 뿐입니다.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과도 이웃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해서 다른 나라 사람을 이웃으로 여기겠습니까? 옆집과도 손익의 문제가 발생하면 언성을 높이고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국가는 자기 나라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나라를 이용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이웃이 성립될 수 있으리라 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것을 봤으면서도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무관심이었고, 귀찮은 일을 떠맡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다가가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즉 자비를 베풀고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혈족이고 옆집에 사는 관계라고 해도 그것은 이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지고 '사마리아 사람같이 자비를 베풀어라'라고 한다고 해서 그 말대로 실천할 수 있는 문제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자비란 내 속에 자비가 존재할 때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날 때부터 자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자비할 뿐이지 타인에게까지 자비하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자비를 베풀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결국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이나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나는 자비를 아느냐'인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길을 잃어버린 소나 양이 나옵니다. 그리고 넘어진 나귀가 나옵니다. 이와 같이 길을 잃어버리고 넘어진 모습을 바로 나 자신의 모습으로 봐야 합니다.
눅 15장에 보면 예수님은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는 들에 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이웃을 불러 함께 즐거워한다고 말씀합니다. 또 어떤 여자가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부지런히 찾다가 찾으면 벗과 이웃을 불러 즐긴다고 말씀합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가 누구입니까?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자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이 자비를 아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로 모이는 성도들에게서 자비가 보여져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교회가 천국의 모습을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소나 양을 그냥 버려두지 않고 데리고 와서 형제에게 찾아주고, 넘어진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단지 인간의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내가 바로 잃어버린 소와 양이고 넘어진 나귀인데, 그리스도께서 나를 찾으셨고 나를 일으키셔서 내가 천국 가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형제라는 것은 모두가 잃어버린 자이고 넘어진 자라는 위치에서 그리스도의 자비를 깨닫고 그 자비로 살아가게 될 때 가능한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자비를 아는 마음으로 서로 만난 교회에서 경쟁과 미움과 다툼이 발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형제끼리 다툼과 미움과 시기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자비로 살아가지 못한다는 증거임을 알고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자비를 외면하고 산다면 그는 분명 신자도 아니고 천국갈자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천국의 속성인 자비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비와 사랑으로만 가득 채워진 천국을 소망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소망하는 천국은 오직 자기만을 높여주고 자기만을 칭찬하는 천국일 것입니다. 만약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자와 똑같은 대우를 해주면 당장 하나님께 팔 걷어붙이고 달려들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이었습니다. 이것은 길을 잃어버린 양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 그들을 들어가게 하십니다. 모든 것이 자비입니다. 이 자비를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면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본문과 같은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의 관계를 깨는 것은, 자기에게 소유된 것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시각이 형제의 관계를 깨버립니다. 따라서 신자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적신'의 위치에서 형제를 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빈 몸이었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주어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확인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모일 때 비로소 형제라는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보여지는 것은 천국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이 없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확인해야 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귀한 줄 알고 살고 있느냐?'는 자기 확인입니다. 형제를 사랑치 못한 자기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보다는 세상의 것을 더 귀한 것으로 여기고 세상에 기울어져 살았던 자기 모습을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같이 주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자들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자비 때문에 살아난 강도 만난 자입니다. 똑같이 주님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에 '누가 못났다 누가 잘났다'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만날 때 그것을 가지고 형제라고 말합니다.
신자의 독특성 (신 22:5-12)
오늘날 교회들을 보면 갈수록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고 그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교회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고 교회 일에 너무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회 일에 몰두해 있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좋은 일이고 영광을 돌리는 일이 아니냐?'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교회가 교회 일에 몰두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내 교회'라는 강한 집착 속에 빠져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교회'에 집착된 이상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그만큼 희미해져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집착! 교회 일에 대한 몰두! 비록 목사들은 이런 것을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악한 자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관심이 교회에 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에게 있느냐는 것은 신자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회에 관심을 두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냐? 라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인간의 종교성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교회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그리스도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의 전문가는 목사들입니다. 목사가 '이 교회는 내 교회다'라는 집착에 빠져있기 때문에 관심은 자연히 '내 교회'가 되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 교회가 관심인 목사가 그리스도에게도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시에 두 가지를 사랑할 수 없고 관심 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에 관심을 두면 다른 하나는 자연히 관심 밖으로 밀려갑니다. 따라서 목사들은 교회에 집착하고 관심 두는 것을 탐욕이 아닌 믿음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교회와 예수님을 하나로 합해버린 것입니다.
즉 교회를 위한 것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고 예수님을 위하는 것이 곧 교회를 위하는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서 천국에 관심이 없고 오직 내 교회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자신의 믿음 없음을 교묘하게 가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까지 이에 동조하고 가세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현대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관심들이 사라져간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은석교회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계시다면 그 집착을 끊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교회 일에 몰두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단 하나, 주님께 집착하시고 주님께 몰두하시고, 주님만 사랑하고자 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최선의 길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모든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투자된 나의 수고와 노력과 물질에 대해서도 계산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집착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은석교회를 위해서 어떤 투자를 하고 고생을 하고 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남아 있다면 이 시간 그 모든 생각을 다 버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한 것이 뭔가?'를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주님께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주님만 바짝 따라갈 수 있는 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교회에 집착하지 말고 교회 일에 몰두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은, 여러분이 만약 교회에 대한 집착과 몰두에 빠져 버린다면 여러분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상이 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보다도 교회가 관심사가 되버립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잘되기보다는 내가 잘되고 내 교회가 잘되는 것을 원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것은 천국과 전혀 상관없는 반대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심각한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부인하는 세계입니다. 내 것이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내 것이라는 자기 소유개념을 생각하지 않는 이상한 나라가 그 마음속에 시작된 사람이라면 분명 그 나라의 모습을 나타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과연 내 교회라는 집착을 나타내 보이겠습니까? 물론 이러한 사람되는 것은 인간적인 방법과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함께 하셔서 그 속에 하나님 나라를 이룬 자에 한해서 사고방식이 교체되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자기 소유개념으로 살지 않고, 소유개념이 없기 때문에 경쟁하지 않게 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나라가 그 마음에 시작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말로는 부지런히 '천국을 가고 싶다' '천국이 좋다' 고 하면서도 오히려 자기 자신은 갈수록 자기 소유욕으로 충만해지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복을 받아서 남보다 편안하게 잘살아볼까만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분명 영생과는 정반대의 길을 달리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를 통해서는 세상의 모습만 보여질 뿐 천국의 모습이 보여질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형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형제라는 관계 역시 그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사람들이 모였을 때의 관계를 의미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냥 인간의 모임은 친교일 뿐, 형제는 아닙니다. 친교란 굳이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의 친교는 교회 안에서보다 더 끈끈한 정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싸웠다고 해도 술 한잔 마시면서 풀어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풀어버리는 것이 없습니다. 가슴속에 묻어둔 채 미움만 키울 뿐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멋있게 복수할 기회만 찾습니다. 이것이 형제이고 교회입니까? 입으로만 형제요 자매라고 하면 뭐합니까? 진정한 형제 자매의 관계를 보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남남이지 형제 자매라고 할 수 없습니다.
형제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만나고 맺어지는 관계이지, 내 교회라는 관계에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즉 같은 은석교인이기 때문에 형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집착을 해버리면 결국 경쟁은 필수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고, 경쟁 대상인 이웃 교회는 자연히 형제가 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의 집착과 소유욕은 복음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은혜까지 거부하게 해버린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내 교회에 집착한 목사의 입에서는 복음을 위장한 인간의 탐욕이 전파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위장된 사탄의 말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을 분간하는 것은, 자기 소유욕을 떠났을 때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길에 서있을 때 무엇이 탐욕이고 무엇이 죄이며 무엇이 교회 아닌 모습인가가 적나라하게 보일 것입니다. 눈뜬 자로서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구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구분한 신자는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을 정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항상 남에게 지려고 합니다. 지고자 하는 가운데 무엇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잃어버린 자, 넘어진 자들만을 모아놓은 곳입니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알고, 넘어졌던 나에게 다가오셔서 일으켜 주신 은혜를 아는 자들이 모인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보여지기 위해서는 필히 나 자신부터 '내가 바로 잃어버린 자였고 넘어진 자였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교회의 순수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보고 '순수하다'고 하고 혹은 '때가 묻어있지 않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본래의 모습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순수한 인간은 어떤 인간이겠습니까? 처음 창조할 때의 본래 인간의 모습을 가진 인간이 누구이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순수함은 아담의 타락으로 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한 선악과에 대한 집착이 인간의 순수함을 파괴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이 세상에 어디에서도 순수한 인간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순수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사셨던 모든 모습은 순수한 인간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세상의 때가 잔뜩 묻어있는 자신의 더러움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더러움이 발각된 사람들은 더러움을 인정하기보다도 더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순수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여버렸습니다. 예수님만 죽여버리면 자신들의 더러움을 감춘 채 깨끗한 인간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순수성을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에 대한 자기 집착이 전혀 없이, 자신은 완전히 포기되어 있고 하나님만 높이고자 하는 모습을 통해서 인간이 잃어버린 순수성이 무엇인가를 고발하셨습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 자체가 바로 순수성을 잃어 버린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증표임을 증거 하셨던 것입니다. 성전에 집착하고, 제사에 집착하고, 십일조나 구제나 금식 기도 등의 자기 행위에 집착하는 그런 모습들이 순수성이 파괴된 악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더러움의 찌꺼기인 것입니다.
본래의 인간에게는 집착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창조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만이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본래의 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에 확산되도록 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었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먹지 말아야 할 것은 먹지 않고 먹도록 허락하신 것만 먹는 구별만 있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 세계의 질서입니다. 이 질서가 깨어진다면 세상은 다시금 무질서로 돌아가게 됩니다. 무질서란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모든 것을 멋대로 바꾸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서 1:6절에서 말한 대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사탄처럼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지키지 않고 본래 인간의 창조의 자리에서 떠남으로서 인간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무질서의 세계가 되버린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이 없이 자기가 기준 되어 살아가는 세계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으로 인해서 새로운 세계가 탄생됩니다. 그 세계는 본래의 인간의 모습이 회복된 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서 자기 지위와 자기 자리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자기 욕심과 자기 집착으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이 있게 하신 자리에서 명확한 구분을 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5절에 보면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남자는 여자들이 입는 옷을 입으면 안되고, 여자는 또 남자의 옷을 입으면 안된다는 의미의 말씀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요즘 옷을 보면 남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옷이 많습니다. 아내가 입는 옷을 남편이 입을 수도 있고, 남편이 입던 옷을 아내가 입을 수도 있습니다. 또 남동생이 입는 옷을 누나가 빌려 입을 수도 있고, 누나의 옷을 남동생이 입을 수도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의 의복을 입고 남자가 여자의 의복을 입는 경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여자로 살기를 싫어하고 남자로 살고 싶어할 때 남장을 하는 것입니다. 또 남자가 여자로 살고 싶어할 때 여장을 합니다. 흔히 '게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경우입니다. 사람이 남자로 태어나든 여자로 태어나든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남자로 태어난 자는 남자의 자리와 그 위치에서 할 일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여자의 자리와 위치에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증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가 여자가 되고 싶어할 때, 여자가 남자가 되고 싶어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인간의 순수성이 사라진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본래의 순수한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벗어나서 내가 원하는 자리에서 있고 싶어하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이라고 하는 구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6,7절을 보면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보면 자연을 보호하라는 말씀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복과 장수로 연결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이 복을 누리고 장수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질서 안에 순종할 때만입니다.
그렇다면 새 둥지에서 새 새끼나 알을 보거든 새기는 취하여도 어미는 반드시 놓아주라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와 연관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어미를 놓아줬다고 해서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미를 놓아주는 그 마음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일치되는 마음일 때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어미와 새끼를 보면서 저들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살고 있는 존재임을 의식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이 없이 새를 봤을 때 새끼보다는 어미가 식용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어미를 취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창조 세계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해 버린 처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바라볼 때도 인간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의식을 가지고 바라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이 의식이 있는 자라면 분명한 구분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8절에 "네가 새 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 흐른 죄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고 합니다. 지붕에 난간을 만든다는 것은 타인을 위한 안전장치입니다. 누군가가 지붕에서 떨어질 것을 미리 방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보다도 타인의 생명을 중시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지붕에 난간을 만든다면 그만큼 번거롭고 비용이 더 들어갈 수 있습니다. 비록 나에게는 손해지만 타인의 생명을 고려할 때 난간이라는 안전장치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는 자기의 안전을 생각하고 튼튼한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내 집을 지으면서도 타인의 생명까지 염려한다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피조물이다'는 의식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신임을 알기에 그 은혜가 타인의 생명을 보호하는 쪽으로까지 나눠지는 것입니다. 9-11절에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는 것이나,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고, 양털과 베실을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는 것은, 명확한 구별된 삶을 의미합니다.
약속의 땅에서의 삶이란 구별된 삶입니다. 세상의 풍습과 혼합되지 않는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드러내어야 할 땅입니다. 그런데 그 땅에서 세상의 풍습과 혼합이 된다면 이스라엘의 순수성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무질서입니다. 세상과 혼합된다는 것은 혼란이며 무질서입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세상에 질서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세우시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도구로 부름 받은 민족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존중해야 하고, 자기가 원하고 꿈꾸는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세계에서 감사하고 살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과의 구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별된 민족이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고, 소와 나귀를 함께 멍에 메어서 밭을 갈지 말고, 양털과 베실을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12절에서 "입는 겉옷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고 함으로써 항상 입고 다니는 겉옷에 달린 술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볼 것 같으면 이스라엘은 분명히 어떤 독특한 특성을 가진 민족들이고 그 특성을 제대로 유지하는 것이 곧 세상과 구분된 가운데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순종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독특성을 잃어버릴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말로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떠들 것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이 보여지고 있느냐를 봐야 합니다. 교회는 분명 교회로서의 독특성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와 기독교는 분명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예수님과 부처를 혼합시키려고 합니다. 종교의 교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고방식 자체가 혼합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와 불교의 구분점이 사라져 버립니다. 물론 교회에는 십자가가 있고 절간에서는 목탁 소리가 들려오는 구분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의 구분일 뿐, 중요한 것은 사고 방식 자체가 구분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고 도외시 할 때 인간들 스스로 자기 세상을 창조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무엇이 기독교이고 무엇이 세상종교인가가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고 그 창조에 순종하고 살아가고자 할 때 인간은 자기 창조를 포기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 이루어서 내가 원하는 세계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하고 살아가는 순수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하는 자들은, 현재 창조된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힘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발버둥을 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신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자기가 원하는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른다면 과연 그것이 하나님이 질서에 순종하는 교회의 모습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교회는 이미 세상과 혼합되어서 교회의 특성을 잃어버린 인간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교회에 집착을 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교회를 생각하게 되고 그러한 교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신자로서의 독특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명확한 구분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비진리인가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다면 여러분은 진리가 아닌 것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을 것이고 세상 사고방식에 혼합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과 어두움의 구분이 없고 혼란스럽고 창조 질서가 깨어진 세상에, 빛과 어두움을 구분하고 혼란과 질서를 구분하고 창조 질서에 순종하는 순수한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오셨습니다. 그 분을 여러분이 믿고 있고 마음에 모시고 살고 있다면 여러분에게서는 자연스럽게 신자의 독특성이 배어 나올 것이고, 그 독특성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세상 사고방식과 구분된 삶을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자기가 제일이고 자기를 위해 살고 있지만, 신자는 오직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증거물로서 피조물의 위치와 자리에서만 살아가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 (신 22:13-30)
세상의 혼란과 무질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과 질서에서 벗어남으로서 야기된 것입니다. 창조 질서는 인간 개개인의 계획과 목표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제공해준 완벽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고 노래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순수성이며 말씀에 의해서 창조된 창조세계에서 말씀을 기초로 한 완벽한 질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질서가 깨어지는 원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인간이 자기에게 눈을 돌릴 때입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관심을 둔 그 순간이 바로 질서가 깨어지고 혼란과 무질서의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사회의 어지러움은 인간 개개인이 자기의 계획과 목표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어지러움을 '법'이라고 하는 강제규약과 '윤리와 도덕'이라는 인간 상호간의 규칙을 통해서 해소하고 질서를 유지해 보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무질서와 혼란의 세상을 질서로 회복하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저마다 자기 계획과 목표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담겨 있는 그 뜻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자기 계획과 목표를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계획과 목표에 순종하는 것이 무질서와 혼란을 벗어나서 질서의 세계로 회복하는 길임을 의미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계획과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에만 철저하게 순종하신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종속 관계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원래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말씀을 기초로 한 관계였기 때문에 창조주와 피조물의 만남의 자리도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피조물이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창조주와의 관계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말씀의 자리에서 벗어남으로서 창조 질서가 무너졌다면 그 질서의 회복은 오직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무엇이 질서의 회복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살고 있고 피조물된 인간의 본질을 아는 신자라면 그에게서 어떤 모습이 보여져야 하겠습니까? 과연 어떤 모습이 순수한 신자의 모습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계획과 목표를 고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하고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자기를 고집하지 아니하는 인간, 이보다 더 순수한 인간은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모습이 되어야 하고 구약의 이스라엘 모습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교회를 고집하고 교단이 교단을 고집한다면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사는 모습이겠습니까? 이렇게 자기를 고집하고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사고방식이 '나'와 '너'의 관계를 남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와 너'의 관계는 인간 관계를 경쟁관계로 뒤바꿔 버렸습니다. 그래서 같은 교회 안에서도 '나 너'가 존재함으로서 경쟁하게 되고, 같은 교단 안에서도 교회와 교회가 경쟁하고 같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교단과 교단이 경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자기를 고집하고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하등에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느 한구석에도 신자로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기독교의 냄새가 풍기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혼합된 채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혼란만 잔뜩 늘어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신자의 독특성이란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피조물의 위치와 자리를 굳게 지키고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의 우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육체일 뿐입니다. 인간의 순수함이 완전히 사라진 채 자기에만 집착하면서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도 멀리하고 말씀도 팽개쳐 버린 육체요 흙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각하고 감정이 있고 언어가 있다는 등의 여러 가지를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지금껏 인간의 생각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타인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고, 감정은 미움과 시기로 돌진했고, 언어는 타인을 욕하고 속이고 거짓말하는 쪽으로 발달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순수함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모두가 남자와 여자라는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예로 들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서 여러분이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럴 경우에는 이렇게 해라'는 하나님의 법을 법 자체로만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키기 위한 법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성경을 오해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어떤분이신가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헌법을 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존재성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즉 이스라엘의 순수한 모습, 무엇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모습이요 정신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바로 법입니다. 따라서 법의 외형적 요구에 순종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법이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을 이해하고 그 속에 자기를 내 던지는 것이 복종입니다. 단지 법을 지킨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설사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법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를 미워해서 그에게 누명을 씌운 자에게는 이렇게 해라'는 법이 있습니다. 이 법을 실천한다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어느 국가라고 해도 얼마든지 이런 법을 정해서 지키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이스라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에 복종하는 단체이지 외형적인 법에 복종하는 단체가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법은 단지 법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담고 있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 법의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둑질 안하고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지켰다고 큰소리 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본문은 모두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의 처리문제입니다. 먼저 13-21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동침한 후에 그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쫓아내기 위해서 비방거리를 만들어 누명을 씌우는데, 그 누명은 아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부정한 여인으로서 나와 결혼했다는 누명을 씌우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그것이 누명으로 밝혀진다면 남편에게 일백 세겔의 은을 벌금으로 받아서 여자의 아비에게 주고 그 여자는 남자의 평생토록 버리지 못할 아내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처녀가 아니었음이 밝혀진다면 그 여자를 돌로 쳐죽이라고 합니다.
22절에서는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했을 때 둘 다 죽이라고 합니다. 22-24절 역시 약혼한 처녀가 성에서 만난 남자와 통간을 하면 둘 다 죽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약혼까지도 결혼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즉 결혼을 약속한 그 자체를 비록 동침은 안했다고 해도 이미 결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25-27절에는 남자가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강간하였을 때 남자만 죽이고 처녀에게는 아무 일도 행치 말라고 합니다. 28-29절에는 남자가 처녀와 통간하였다면 처녀의 아비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를 평생에 버리지 못할 아내로 삼아라고 합니다. 그리고 30절에서는 아비의 후실을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든 규례가 어떻게 보면 단순한 도덕법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사실 이 규례 안에는 이스라엘의 순수성은 무엇을 통해서 보여져야 하는가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단순한 남녀 관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 질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살펴봐야 합니다. 창세기 2: 20-25절을 보면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여자란 남자인 아담이 도와주기 위한 상대라는 것입니다. 흔히들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하면서 남자의 존속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남자의 갈빗대로 돕는 배필을 만드셨다는 것은 '나는 나' '너는 너'의 관계로서 돕는 상대가 아니라 '네가 곧 나'라는 관계에서 도와줘야 할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여자를 보고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즉 네가 곧 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 질서이며 남자와 여자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의 배필로 만드신 것은, 창조시부터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할 것을 의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오늘날의 결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창조 질서 안에서의 결혼은 세상적인 결혼과 그 의미가 다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결혼을 자기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의 이익과 행복을 얻어내기 위한 통로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이기적인 심성, 즉 자기를 고집하는 무질서 속에서의 결혼은 결국 인간에 의해서 파괴되고 그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 질서에서의 결혼, 즉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셔서 남자와 함께 하게 하신 것은 남자로 하여금 돕는 상대를 만드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란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의 관계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돕는 자이고 여자는 도움을 받는 자입니다. 이것이 결혼의 순수성이며 창조 질서 안에서의 결혼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함으로서 하나님을 잊지 아니하고 창조 질서 안에서 복을 누리고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남자는 돕는 자의 위치와 자리에서, 여자는 도움을 받는 자의 위치와 자리에서 서로의 역할을 보여줌으로서 하나님은 돕는 자이시고 인간은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지 말 것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신랑을 사랑을 베푸는 예수님의 역할로, 신부를 신랑에게 순종하는 교회의 역할로 비유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고 순종하는 그 관계가 창조 질서가 회복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결혼입니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는 결혼을 통해서 인간이란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사는 약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않아야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만 살아가야 할 약한 자임을 알라고 돕는 배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고집하고 살아가는 오늘의 세상을 보면 결혼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행복을 고집하면서 만나고 합쳐지는 것이 결혼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이용하고 남자는 여자를 이용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처음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고 해놓고서는 결혼하고 나면 나하고 맞지 않는다고 해서 이혼을 합니다.
며칠전 결혼한지 1년된 연예인 부부의 이혼 얘기가 TV에 방영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혼 사유는 여자는 남자가 자기 친정 식구에게 잘해주지 않는다는 것이고, 남자는 여자가 자기 식구들에게 잘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너'로 생각하는 것이고 자기 혈육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의 식구와 나의 식구로 구분하여 생각하고 있고, 여자는 결혼하면 남자인 나의 식구에게만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는 여자대로 남자를 '너'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자가 나의 식구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부부는 무촌이라고 합니다. 무촌이기 때문에 함께 할 때는 한몸이지만 등돌리면 가장 먼 남남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촌수가 있다는 것은 나와 너의 관계이지만 무촌의 관계는 '네가 곧 나'라는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창 2:24절에서도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하는 것도 결혼하면 부모를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몸이라는 관계는 혈족의 관계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 즉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의 관계임을 의미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한 부부가 서로 자기 혈족을 주장하면서 자기 혈족에게 잘해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불만을 내뱉고 이혼한다는 것은 결국 처음부터 '너와 나'라는 각각의 관계로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며느리를 데리고 있는 남자의 가족들은 뭔가 서운하게 들릴 것이고 불만이 일어날 수 있겠지만, 만약 그런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며느리를 맞이할 때 단지 부려먹기 위한 수단으로 맞이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남자의 부모가 며느리를 맞이할 때도 내 자식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내 집에 들어온 여자로 대한다면 아마 부려먹겠다는 의식은 사라질 줄로 압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 질서 안에 살아가는 부부의 모습입니다.
남자는 돕는 자이고 여자는 도움을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은, 남자는 강자이고 여자는 약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여자의 신체구조를 남자보다 약한 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강한 자인 남자로 하여금 여자를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의 창조의 세계는 강자와 약자가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세계였습니다.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고 도와주고 사랑하며 약자는 강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강자에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창조 질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질서가 무너짐으로서 강자는 약자에게 힘으로 군림하게 되고, 약자는 강자에 의해서 억압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약자들은 강자가 되려고 합니다. 소위 '여권신장운동'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약자로 살기가 싫어서 강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남자에게 눌리고 억압받는 것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눌리기 싫어서 강자가 되겠다는 것은 결국 내가 강자가 되어서 그동안 받은 설움을 갚아주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내가 강자가 되어서 너를 누르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질서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부부가 결혼해서 서로 초반부터 누르겠다고 마음먹는 것, 이것이 바로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의 관계가 무너진 무질서입니다. 남자는 여자를 억압하고 큰소리치는데서 남자다움이 과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약자인 여자를 도와주는데서 남자의 남자다움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결혼을 마련하신 것은 단지 부부로서의 아름다운 삶을 살아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부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잊지 말 것을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동침을 한 후에 아내가 미워집니다. 이것은 남자의 본성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면밀히 살펴보면 남자는 여자를 정복하는 것이고 여자는 남자를 독점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남자가 결혼하기 전에는 사랑하는 자기 여자에게만 관심을 두다가 결혼하고 동침한 후에는 점차 자기 아내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됩니다. 이것은 내가 소유한 것에 대한 것보다 소유하지 않은 것에 더 흥미를 느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한 술 더 떠서 미워진 아내를 쫓아내기 위해서 처녀가 아니라는 누명을 씌웁니다. 이것이 곧 자기만을 생각하는 인간의 죄의 모습입니다. 강자로서 약자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약자의 처지와 행복과 고통과 상처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만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강자에 의해서 약자가 이용당하고 이용가치가 없을 때에는 쫓김 받는 이 세상에서 신자가 보여야 할 순수성은 강자로서 약자를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부 관계를 통해서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처녀가 아닌 상태에서 결혼한 것이 밝혀진다면 그 여자를 죽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한 남자만 바라보고 의지해야 할 여자의 자리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인간이 다른 의지할 힘을 마음에 가진 채 하나님을 의지하는 척하고 찾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하는 것도 역시 여자를 보호해야 할 남자로서 여자의 일생을 망치는 행위를 하는 것은 강자의 횡포이며, 또 남편만 의지해야 할 아내로서 다른 남자와 통간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가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죽이라는 것입니다.
죄인된 인간은 언제나 상대방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어주려고 하기보다는 해를 입히는 존재로 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인간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관계인데 오히려 해를 입히는 가해자의 관계가 되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나와 너라는 인간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본문에서 '죽여라'는 말씀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죄는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창조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 세상이 심판 받아야 하는가를 선언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약자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약자이기 때문에 무시하고 천대하고 죽여버린 그 모습이 바로 심판 받아야 할 세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약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23절부터 보면 약혼한 여자가 성에서 남자를 만나 통간하면 둘 죽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남자는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기 때문이고, 여자는 성읍에 있으면서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들에서 남자를 만나 강간을 당한 여자라면 남자만 죽이고 여자는 그대로 두라고 합니다. 이유는 들에서는 소리를 질러도 구원해줄 자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약자의 모습은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약자가 할 일은 힘을 길러서 강자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약자의 모습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기려고 하지 말고 도움을 청하는 것, 이것이 약자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를 지르지 아니한 여자는 죽이라는 것은, 성이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면 얼마든지 도와줄 자가 달려올 수 있는데도 소리를 지르지 아니한 것은 이미 약자의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죽이라고 합니다.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고 죽이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즉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설려고 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구원자가 다가와도 밀쳐내 버릴 자가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자로서 강자이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인간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돕고 도움 받는 부부의 관계를 통해서 나는 연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필요로 하는 가정이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강자가 군림합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분은 과연 약자로서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강자가 되기 위해서 살아가십니까? 약자의 자리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봤습니까? 설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고 해도 혹시 강자가 되기 위한 구함은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예수님은 신랑으로서 우리를 돕는 자이시고 자기 목숨까지 버리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부로서 할 일은 약자로서 강자이시고 신랑이신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의 도움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것을 의지한다면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은 죽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약자로 살아갑시다. 약자의 자리에서 강자이신 하나님을 체험합시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살아갑시다. 그것이 신부된 신자의 아름다움입니다.
여호와의 총회 (신 23:1-8)
교회란 사단의 권세를 이겨야 할 단체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권세는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합니다. 이것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사단의 권세를 이겨야 할 일을 인간에게 맡기시지 않았습니다. 사단의 권세는 예수님이 이기십니다. 따라서 신자는 예수님 안에서만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진실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단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는 교회, 즉 예수님 안에서 모이지 못하는 교회, 그것을 교회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분명히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교회는 분명히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따라서 교회가 그리스도안에서 모인다면 분명 그 능력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사단의 권세를 이기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필경 그리스도안에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면 형식적인 제도를 갖추고 조직력을 확장하고 굳게 세우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체계적인 제도와 강한 조직력이 있는 교회가 힘있는 교회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마치 큰 교회는 예수님이 관심을 더 가져주고 시골구석에 노인분들만 몇 있는 그런 교회는 예수님도 아예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체계적인 제도, 강한 조직력, 경제력, 교인수, 큰 건물, 이런 것들이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권세는 죽음입니다. 이 권세를 예수님은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자기를 추종하는 무리를 모아 들여서 단체를 결성하고 체계적인 조직과 의식을 만들고 경제력을 모아 들여서 사탄의 권세와 싸우셨습니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힘없는 자였습니다. 때리면 맞고 죽이면 죽는 모습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면서까지 '능력이 있으면 자기를 구원해 봐라'는 조롱을 들으면서까지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 하신 것이 없습니다. 자기를 보호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하늘의 천사를 동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 성취를 위해서 묵묵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권세를 이기시는 힘이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제공했던 것은 모두가 세상에서 강한 힘을 가지고 성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죽기 위해서 오셨던 예수님은 살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상 것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의 능력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그리스도안에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필연코 보여질 수밖에 없는 능력, 사탄도 두려워하는 권세, 그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과 똑같이 살고자 아니하는 것입니다. 죽기 위해 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죽음의 권세를 가지고 다가온 사탄을 이기는 놀라운 능력이며 권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탐욕 속에서 강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여념이 없습니다. 올해 100명이면 내년에는 200명을 목표로 합니다. 200명이 달성되면 또 다시 500명을 목표로 하고 교인들을 다그칩니다. 끊임없는 욕망 속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능력을 상실한 채 껍데기만 교회인척하고 있는 인간 종교 단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 능력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는 죽기 위해 사셨던 모습을 통해서 사탄을 이기는 능력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요 12:25절에 보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죽기 위해 사는 것이 곧 영원히 사는 길이라는 이상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살기 위해 살아가는 땅입니다. 그런 땅에 죽기 위해 살아가는 단체가 발생하는데, 그것이 곧 교회이고 그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서 만들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인간에 의해서 해체되는 단체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만들어진 교회는 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조직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유지하고 지탱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법으로서 교인들을 붙들어 두려고 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합니다. 이 정신이 없으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교회를 바라보는 마음은 어떻습니까? 교회에 어떠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까?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있는 교회로 존재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인간의 열심과 노력을 총동원해서 날이면 날마다 교인수가 불어나고 그럴듯한 교회 건물도 소유하고 교육관에 주차장 시설까지 번듯하게 갖추어 놓고 이런 저런 행사 속에서 개인적인 보람도 느끼며 지루하지 않게 교회생활을 할 수 있는 멋들어진(?) 교회를 원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정신으로 모여지는 교회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고 사탄의 권세에 무릎을 꿇은 사단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절, 2절, 3절, 8절을 보면 '여호와의 총회'라는 단어가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총회란 여호와의 백성들이 다 모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총회란 오늘날 교단의 총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단의 총회는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간 조직이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총회란 여호와에 의해서 창조되어진 단체를 의미합니다. 총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이스라엘이라는 혈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만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된 것은 자기들 스스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탄생되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탄생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총회만이 마지막 때 남는 유일한 단체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총회는 지상에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단체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창조되어서 지상에 내려온 여호와의 총회와, 지상에서 인간들이 모여서 자기들 멋대로 교회라고 이름 붙여서 만들어낸 단체와는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그 구별은 생각 자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여호와의 총회의 사고방식과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고방식과 일치하고 있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일치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바로 여호와의 총회에 소속된 교회이고 일치하지 않는다면 교회라는 껍데기만 둘러쓰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총회가 하나님의 창조작업에 의해서 발생한다면, 교회 역시 하나님의 창조 작업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작업은 세상에 있는 것을 보완하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없는 것 가운데서 있게 하시는 것이고, 죽은 것 가운데서 살리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작업은 지상에서 인간들이 내세우는 것은 모두 부인해 버립니다. 오직 하나님 홀로 하시는 것이 창조작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창조작업에 의해서 발생한 존재입니다. 죽은 자였던 우리가 산 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홀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마치 내가 신자답게 되고 싶어서,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애썼기 때문에 믿음 있는 신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창조 작업을 부인하고 스스로 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홀로 하신 창조작업을 알고 그 사실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이 모인 교회는 다만 내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교회가 크다 작다'를 이미 초월한 교회입니다. '재정이 많다 적다'를 벗어버린 교회입니다. '내 취향에 맞는 교회여서 재미있다'는 자기 생각에서 떠난 자입니다.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이 계시는 것만으로 든든하게 서가는 교회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교회는 인간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작업, 즉 하늘로부터 난 교회인 것입니다. 이 교회만이 마지막때 심판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로 모인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기도 많이 하는 교회, 성경 많이 보는 교회, 선교 열심히 하는 교회, 이런 것에 관심을 두고 모이는 것이 과연 교회다운 모습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신자가 교회로 모이는 최종적인 이유는 마지막때 남는 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내가 남고 싶다고 해서 남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남긴 자의 반열에 속해있어야 남은 자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운이 좋으면 남은 자가 될 것이니까 그냥 운명에 맡기고 되는대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 남은 자가 될 수는 없지만, 과연 내가 남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가를 점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살아남기 위해서 내 모습을 점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자기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고 교회를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뭘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사는가를 점검하십시오. 여호와의 총회는 여호와만 사랑하는 자의 무리입니다. 그리스도인해서 탄생되어진 교회 역시 여호와만 사랑하고 그리스도만 사랑하는 무리입니다. 그리스도 외에 사랑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어야 합니다. 교회까지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교회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라는 반문을 합니다. 예, 교회를 위해서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위해서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여호와의 총회이고 마지막때 남는 자입니다. 이 단체는 세상의 그 누구도 흔들지 못하고 허물지를 못하고 저주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여호와의 총회, 즉 교회를 저주한 자를 저주해 버리고 축복한 자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지상에 세워진 건물과 조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마음에 담고 모이는 성도의 무리를 가리켜 말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토록 중요한 것이 '여호와의 총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총회에 합당치 못한 자가 들어오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자를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거부를 하는 것입니까? 1절에 보면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신낭이 상했다는 것이나 신이 베였다는 것은 남자구실을 할 수 없게 된 자를 의미합니다. 즉 자손을 번식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자를 여호와의 총회가 거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민족으로서 대대로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어야 할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은 전달되지 못하고 단절되고 맙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대를 이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총회, 즉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이 모여서 그 마음이 끊어지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전달되고 이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자들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끊어지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저 아무나 교회에 들어오면 좋아합니다. 숫자가 늘고 교회가 부흥된다는 것 때문에 누구라도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대환영합니다. 일단 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말씀을 배우고 신자로 자라갈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교회인데, 그런 교회에서 무슨 진리된 말씀을 들을 수가 있고 그리스도를 배울 수가 있습니까? 교회란 오직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자 하는 신자들이 모이는 모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나가달라고 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말입니다.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기를 싫어하는 자가 개입된다면 몸의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입니다.
2절에 보면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 대까지라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생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호세아서 5:7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희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자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저희와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는 말씀을 보면 사생자란 곧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나은 자식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총회는 여호와에 의해서 창조되어진 모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한 것은 여호와에 의해서 탄생되어진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에 의해서 탄생되어진 것, 그것이 곧 사생자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총회는 이러한 사생자는 십대까지라도 거부해 버리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에 의해서 탄생되어진 것이 아니라면 거부하겠다는 것이 여호와의 총회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생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서는 하나님의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의 것만 나타낼 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만 가지고 모여드는 것이 총회의 순수한 모습인데 인간의 것을 가지고 모여들 때 총회의 순수성이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생자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만 가지고 모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하나님 백성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생자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것을 내어놓습니다. 자기의 것을 자랑하고 자기 공로를 내세웁니다. 교회는 철저하게 이러한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내가 헌금한 것을 자랑하고 기도한 것을 내세우고 자기 신앙이 좋다는 것을 떠들어대는 것들은 그 속에 하나님의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것을 발산하는 사생자들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사생자만 잔뜩 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것을 내어놓지를 못하고 인간의 것만 내어놓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랑하지 못하고 인간의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생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스스로 된 줄로 착각을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생자는 철저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3절에 보면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이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떡과 물로 영접하지 않고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던 것에 대한 복수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축복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나라는 그 누가 저주한다고 해도 저주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안에는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을 저주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함께 하고 있는 하나님의 복을 보지 못하고, 단지 인간이 저주하면 저주가 되고 축복하면 축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고 있는 거룩한 모임입니다. 결코 누가 저주한다고 해서 저주가 되는 모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에 담고 사는 신자는 그 누가 저주한다고 해도 축복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이 마음에 없는 사람은, 십일조를 안하면 저주를 받고, 목사에게 잘못하면 화가 오고, 교회에 봉사 안하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발람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던 모압, 암몬의 모습과 같은 것이고 이것은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5,6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너의 평생에 그들의 평안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에 두고 살지 못한 자는 평생에 평안과 형통이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 주위에서 여러분을 저주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과연 네가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영원한 복을 믿고 사느냐'는 것을 확인하라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총회라고 해서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일이 잘 될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총회에 세상 것으로 시험하는 무리가 들어옵니다. 그럴 때마다 신자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진정한 복을 마음에 두고 있는 지를 확인하라고 세상 것으로 시험하는 자가 있습니다.
7,8절을 보면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그들의 삼 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고 합니다. 에돔 사람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은 이들을 감정으로 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이 자기 땅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을 도와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얼마든지 반감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애굽 또한 이스라엘이 종으로 있을 때 고생을 시킨 나라이기 때문에 감정이 좋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총회에 인간의 감정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총회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으로만 유지되어야 할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방해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낭이 상하고 신이 베이고 사생자요 모압 암몬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방해하는 쪽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생명으로만 이어져야 할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는 나로 인해서 단절되어 버리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어서 내어놓지 못하는 사생자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복을 마음에 두고 살지 못하고 복과 저주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러한 모습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총회는 세상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고 미미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 유일하게 남는 것이 여호와의 총회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총회에는 희생제물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총회는 그 제물이 흘린 피를 중심으로 모여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영원한 복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교회가 세상이 볼 때는 미미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에는 희생 제물로 오신 그리스도의 피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피를 중심으로 모여든 여러분들이야말로 영원한 복을 미리 받은 자들이고, 따라서 교회는 복의 단체인 것입니다. 이 교회를 저주한 자를 하나님이 저주해 버리실 만큼 교회는 귀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묻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을 모른 채 교회로 모인다면 그는 분명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진정으로 영원한 복을 마음에 두고 이 자리에 모인 백성이라면 여러분을 통해서 복이 확산되어야 합니다. 복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세상의 것은 가치 없음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만으로 더불어 살아가고자 할 때 여러분을 통해서 약속이 이어질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혹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면, 자신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지도 못할 정도로 가치 없는 존재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런 나를 위해서 피흘리신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마지막때 남을 여호와의 총회,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여호와의 진 (신 23:9-14)
교회에서 예수님만을 선포하고 땅의 것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의 것을 바라보고 살 것을 말하기가 아주 난처한 현실입니다. 사람은 땅의 생활이 지장을 받지 않고 있을 때 종교쪽에 마음의 여유를 두게 됩니다. 그런데 땅의 생활이 지장을 받고 있고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이 산적해 있는 시점에서 예수님만으로 감사하는 삶을 말한다는 것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아마 그 마음속에는 '목사 당신도 이런 일을 한번 당해봐라 예수님만으로 감사할 수 있는지!'라는 반발심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즉 '예수님만으로 감사하라'는 말에 고개를 끄떡일 수 있는 것도 세상의 것에 대해서 근심 걱정이 없는 여유로움 속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IMF로 인해서 수입이 많이 줄어서 지출도 줄이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과연 무엇에 대한 지출을 가장 먼저 줄이는가를 조사했을 때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것은 오락과 취미생활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락과 취미생활이라는 것이 삶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돈의 여유로움과 마음의 여유, 이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 바로 오락이며 취미생활입니다. 그런데 수입이 줄었다는 것은 돈의 여유가 사라졌다는 것이고, 돈의 여유가 사라짐으로서 마음의 여유까지 같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에 자연히 오락과 취미 역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즉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 생활이 오락과 취미의 범주 안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라면 돈이 줄어들고 마음의 여유가 줄어든 현실 속에서 어떤 영향을 받겠습니까? 오락과 취미에서 고개를 돌려버리듯이 교회, 예수님을 향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에 발을 끊는 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마음을 끊어버립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신 예수님, 예수님만으로 감사하고 살아갈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마음을 끊어버리고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그리고 어려운 현실을 도와주고 위로해주고 평안을 가져다 줄 나만의 예수를 찾게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답답해서,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이것을 기독교라는 종교를 통해서 해소해 보고자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 앞에서 하늘의 것만 말하고 예수님만을 말한다는 것은 아주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저도 역시 이러한 난처함이 있습니다. 은석교회도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으로 감사하자'는 말을 하기가 참으로 난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 것이 일시적이나마 마음에 위로가 되는가를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저는 목사에게는 교인들의 입장과 환경에 비례한 자신의 입장과 처지를 위해서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제한하고 조정할 하등의 권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렇게 어려운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여러분이 사는 길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입장에 끌려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목사는 성도 여러분의 입장을 들고 하나님께 나가는 대리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을 들고 여러분께 나오는 자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땅의 것으로 인해서 아픔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고 힘든 일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목사는 오직 하나님의 입장만 대변해야 할 자리에 있습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입장만 대변하는 자리에서 충실한 것, 그것이 바로 저도 살고 여러분도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드릴 것은, 하나님께 나오실 때 여러분의 입장은 접어두고 나오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입장이 어떤 것인 가에만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입장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다면 여러분 자신의 처지와 입장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내가 당하는 어려움과 괴로움 힘든 것들이 단지 나 개인을 고통스럽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장난이 아니라 믿음 없는 자들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의 고통과 어려움을 '나'라고 하는 시각과 입장에서 본다면 좌절과 절망과 낙심과 불만 밖에 없으나 다른 자를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시각과 입장에서 보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면 분명히 자신의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여가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해결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교회로 모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하시면서 개인의 입장을 고수한 채 나오신다면 그 어떤 하나님의 말씀도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만 말하기가 난처하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개인의 입장만 고수하고 있을 때의 제 심정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가 개인의 입장은 접어두고 하나님의 입장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이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나오셨다면 예수님만 말하는 저는 참으로 신이 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나의 입장을 가지고 본다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고 도대체 성경에 왜 이런 말을 기록했는지 아리송할 수밖에 없는 내용입니다. 몽설에 대한 얘기, 배설물에 대한 얘기, 도대체 하나님은 이러한 말을 무엇 때문에 계시라고 하는 성경에 기록하신 것입니까? 그리고 9절에 보면 "네가 대적을 치러 출진할 때에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갈지니" 라는 말씀을 합니다. 악한 일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후에 몽설과 배설물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악한 일이란 곧 몽설 하는 것, 배설하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자가 몽설 하는 것이나 배설하는 것은 모두가 생리현상입니다. 인간의 의지로 조절할 수 있거나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몽설이란 몽정이라는 말로서 무의식 즉 꿈속에서 여자와 성관계를 가짐으로서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생리현상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조절하거나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억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악하다고 말합니다. 배설하는 것 역시 인간이 억제하거나 참을 수 없는 생리현상입니다. 이렇듯 둘 다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발생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악하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우리 개인의 입장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해답은 전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몽설하고 배설하는 것은 악한 것이니까 하지 말자'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할 것입니까?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아주 쉽게 그 의미를 알아갈 수 있습니다. 마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업친데 덮친다는 격으로 이런저런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 그런 일들이 하필이면 자신에게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기 입장에서 보면 전혀 이해가 안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되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여호와의 총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호와의 총회는 신낭이 상한 자, 신이 베인 자, 사생자,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들어올 수 없다는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의 총회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어지는 관계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탄생되어진 사람들의 모임이며 이 모임은 이미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여 있기 때문에 땅에서 아무리 저주를 해도 그 축복이 취소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총회를 저주하고 괴롭히는 무리들이 주위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내 자신이 하늘의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땅의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라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까? 우선 1-8절까지 보면 총회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비해서 오늘 본문에서는 진이라고 하는 말을 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물론 '총회'나 '진'이라는 말은 결국 여호와의 백성의 무리라는 점에서는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여호와의 백성이라는 단체의 의미로만 생각하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은 백성이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숙제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이라고 하는 것은 총회와는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접근되어지고 있습니다. 총회는 '어떤 무리'라는 의미로서 다가오지만 '진'이라는 것은 '어떤 무리가 가지고 있는 성격'의 의미로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진'은 '진지'를 말합니다. 군인들이 전쟁을 하기 위해서 모여있는 장소입니다. 9절에서도 '네가 대적을 치러 출진할 때에'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오늘 본문은 전쟁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은 자기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 사람대 사람의 전쟁을 하는 군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서 싸우는 군대를 말합니다. 자기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원수와 싸워야 할 군대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그 지휘자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대장 되어서 하나님의 지휘를 받으며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군대가 있는 진지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진지라면 그에 합당한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싸움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도대체 하나님의 군대가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원수와 싸운다고 하는데 그 원수가 누구입니까? 이렇게 말하면 흔히 '사단이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단이다'라고 하는 말 뒤에는 '나는 사단이 아니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 자신이 사단이 아닌지 사단인지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인간의 원래의 모습은 피조물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자리는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은혜를 망각해 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현재의 존재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자기가 원하는 모습을 구축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반항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보다는 내 노력과 힘으로 살아간다는 생각에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행동과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들에게 원래 인간의 모습이 있습니까? 피조물의 자리에서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으로 살아가십니까? 인간은 이미 그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미 육이 된 인간에게서는 참된 인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마귀의 생각으로 가득찬 채 내 인생과 내 삶에 치우쳐서 나의 소원과 내 목표를 위해서 수고하고 땀을 흘리고 있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도 내 입장만 고수하고 내세우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단은 누구입니까? 사단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 사단이고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겠습니까? 결국 싸움의 대상은 내 안과 밖에 항상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로서 여호와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은혜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모든 것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싸움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해야 하는 것은 힘을 기르기 위한 훈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해야 하는 것은 진을 거룩히 하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붙이시려고 네 진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합한 것을 보시지 않음으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진을 거룩히 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싸움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진을 거룩히 해야 할 이유는 여호와께서 진중에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레 11:45절에 보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그분이 이스라엘의 군대 대장이십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로서 하나님과 같이 거룩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진중에 행하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싸움은 거룩대 비거룩의 싸움입니다. 거룩으로서 비거룩을 드러내고 공격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싸움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거룩 되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자격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이스라엘이 거룩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적을 치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을 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룩은 부정한 것과의 구별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몽설이고 배설물 처리법입니다. 10,11절을 보면 몽설함으로서 부정하게 된 자는 진 밖으로 나갔다가 해질 때에 목욕을 하고 해진 후에 진에 들어오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것과 거룩이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하루는 해가 져서 다음날 해질 때까지로 계산합니다. 그렇다면 몽설 함으로 부정한 자는 해질 때 목욕하고 해진 후에 들어오라는 것은 정결한 자로서 새날을 시작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몽설을 부정하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문자 그대로 몽설 자체를 부정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 부정하다는 것은 인간 자체가 부정한 자라는 뜻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로서 비거룩과 싸워야 할 자이기 때문에 항상 부정한 것으로부터 구별되게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12,13절에서 말씀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대변을 볼 때는 작은 삽을 들고 진 밖으로 나가서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대변을 본 후에 다시 그 배설물을 덮으라는 것입니다. 배설물이 더럽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더러움이 아니라 인간의 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더럽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더러운 것을 진밖에 구덩이를 파고 배설한 후 흙으로 덮으라는 것도 역시 부정한 것, 더러운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행하시는 군대의 진에서는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거룩을 들어서 비거룩을 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룩한 것만이 마지막때 남고 비거룩한 것, 즉 더러운 것은 모두 태워져 사라지고 맙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필요한 것은 비거룩의 존재들이 마지막 때 할말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존재인 하나님의 군대를 통해서 비거룩한 자들의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나'라고 하는 입장에서 나를 보면 한 개인이고 오직 내가 중요한 존재이고 그러기 때문에 나의 삶이 편하고 부족함이 없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입장에서 보면 저와 여러분은 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내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이 중요한 것이고 그 일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내 개인의 입장은 무시되고 덮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 나를 보면 지금 당장 돈 버는 것이 중요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게 되면 돈버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군대답게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정한 것을 몰아내고 날마다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군대다운 모습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비거룩한 세상을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 존재인가를 가르쳐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몽설이나 배설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몽설하고 배설하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기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부정한 존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깨끗함을 얻을 수가 없고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피가 부정한 우리를 깨끗이 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거룩을 입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피를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피가 나를 깨끗케 한다는 것을 고백하며 내 스스로 거룩하게 되려고 하는 노력을 중지할 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거룩함을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이 거룩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서 모든 일을 해보려고 하는 비거룩의 무리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거룩을 입고 사는 군대로서 살아갈 때 날마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나의 거룩을 만들어 내고 나의 힘으로 깨끗해지려고 하고 내 힘으로 살아보려고 하는 사고방식과의 싸움입니다. 항상 자기 입장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살려고 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이 왜 살고 있는지 존재의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때로 왜 고통이 오고 어려움이 오는지 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새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군대로서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교 회 (신 23:15-25)
교회가 무엇입니까?라고 할 때 '교회는 세상의 온갖 어려움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온전히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 즉 신앙과 순종의 인간들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곧 우리이며 우리가 곧 교회입니다. 고전 3:16절에서도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에게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성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라면 교회는 곧 죄인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이상적인 욕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교회에 대한 이상적인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소위 서로 사랑하고 정이 넘치는 아름다운 교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면서 빛을 발견하고 온전히 하나님만 신뢰하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자 하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분명 교회는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공동체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인간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신앙인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교회에 나온 자에게 믿음을 가르쳐서 믿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에 대한 이상적인 욕심을 버리자고 말한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상적인 욕심이 오히려 교회를 붕괴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그리스도의 대변자로 굳게 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를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요구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예수님의 대변자로만 굳게 서있지 못하는 것은 모든 관심을 교회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교회는 설교의 중심이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하자'는 요구사항만 남발하는 설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붕괴되어진 교회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교회답게 보이고 이상적인 모습이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십자가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고 그 정신이 발산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는 모든 관심을 예수님께 두고 철저하게 예수님의 대변자로만 존재할 때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는 교회 자신에게 관심을 두거나 교회 자신이 목적이 되면 안됩니다.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라든가 '이런 교회로 만들어 보겠다'는 발상은 대단히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상입니다. 그 순간 이미 관심은 예수님이 아니라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이 아닌 교회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나는 우리 교회가 좋다' '나는 우리 교회가 싫다'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말을 소위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에게서 수도 없이 많이 들어봤습니다. '교회가 싫어서 교회에 나가기 싫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습니다. 다니는 교회가 싫어서 다른 교회로 옮기는 사람도 많이 봤습니다. 물론 그것이 진리의 문제이고 복음의 문제라면 사정은 다릅니다. 그 교회에서 전해지는 복음이 복음이 아닐 때는 얼마든지 복음이 있는 것으로 옮길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복음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지 내가 원하는 교회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라면 그 사람의 관심은 예수님이 아니라 교회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맞는 교회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아닌 교회에 관심을 두고 교회를 찾아 나온다면 그 사람은 신앙인이 아닌 교회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개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교회인을 양성하는 양성소로 전락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교회가 좋아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좋아서 교회를 찾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기 위해서 교회를 찾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알게 된 것으로 교회가 받아들여지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교회로 모여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신앙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좋아서 교회를 받아들이고 교회로 모여지는 것이라면 교회에 대한 좋다 싫다는 감정이 마음에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좋다' '싫다'는 것은 선악체계로 살아가게 된 인간의 특징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두고 '좋다' '싫다'고 할 때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취미, 성격, 생각,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서 자기만의 기준이 형성되고 그 기준에 의해서 '이것은 좋다' '이것은 싫다'는 판단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두고서도 어떤 사람은 좋다고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싫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을 금하셨던 것입니다. 선악을 알면 각기 자기가 기준 되어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현 인간의 실체가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자는 교회 일을 위해서 교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을 위해서 교회로 모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신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신자가 있습니다. 교회에 목적을 둔 교회는 이미 붕괴되어진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아닌 하나님 나라에서 존재의 목적을 찾는 교회는 끝까지 버티는 교회로 남을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고 이상적인 욕심을 두지 않습니다. 간혹 흔들리고 부딪히고 눈살 찌푸릴 일들이 발생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목적을 두고 '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자기 이상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그는 분명 자신의 이상에서 벗어난 교회를 보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일시적인 것이지만, 영원한 것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모이는 교회라면 분명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는 단지 교회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목적을 두고 교회를 사랑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인간의 자기 사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자들 안에서 자연스럽게 되어지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5,16절 말씀을 보면 "종이 그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 주인에게로 돌리지 말고 그가 너의 성읍 중에서 기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 거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종이 도망왔거든 그 종을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지 말고 그가 살고자 하는 곳을 택해서 함께 살고 그를 압제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린 이 말씀을 통해서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이 주인을 피하여 도망을 쳤다면 그것은 분명 포악한 주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주인이라면 도망친 종을 다시 돌려보냈을 때 주인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당시 이방 나라에는 종이 도망을 치면 다시 원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라는 조항이 있었다고 합니다. 종은 주인의 재산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종의 고통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다만 주인의 입장에서 재산을 보호하고자 하는 조항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종에게 이방 민족처럼 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종으로 있었습니다. 자유가 없고 주인으로부터 학대 받으면서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서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하나님이 품에 안아 주심으로서 종에서 자유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라고 종이 도망쳐 왔을 때 주인에게 돌려보내지 말고 그가 원하는 곳에서 함께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을 볼 때마다 '우리가 저자와 같이 애굽의 종으로부터 도망쳐 나와서 하나님의 품에 안긴 자들이다'는 것을 되새겨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아 주시지 않았으면 영원히 고통속에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나다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끊어지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이스라엘이며 교회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받아주셨기 때문에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었다면 우린 여전히 사단의 종으로서 죄에 눌리고 자유 없는 고통의 세월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자유도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란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희생을 밟고 자유 안에 살아가게 된 자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때문에 신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된 것으로 이미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생각하는 자가 신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도망친 종으로 돌려보내지 말라고 하신 것은, 종이 불쌍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모습을 담아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담아두시고 그 사랑과 자비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랑과 자비를 행하는 자 되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를 의지하고 산다면 자연히 이스라엘안에서는 하나님의 모습이 사랑과 자비가 보여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의지하고 모이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에 반대되는 것이 있습니다. 17,18절을 보면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이 있지 못할지니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고 말합니다. 창기의 번 돈,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 같은 자란 17절을 보면 미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동이란 예쁜 남자를 말합니다. 즉 남자 접대부로 생각하면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남자든 여자든 자기 몸을 팔아서 번 돈을 여호와의 전에 바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돈을 내는 자가 몸을 판 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망각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헌금하는 인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헌금하기 이전에 인간이 되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복종하는 표로서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을 팔아서 돈을 번다는 것은 자기 몸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이 돈을 벌었다'는 표로서 헌금을 하는 것인데, 몸을 팔아놓고서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오직 돈벌기 위해서 몸을 팔고 있으면서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일로 여긴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돈을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와 자비하심에 복종하는 자로 존재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해주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을 좋아하시고, 헌금하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무엇인가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헌금할 것을 요구하고, 헌금만을 요구하다 보니까 무조건 돈내는 것이 최고로 여겨져 버리는 것입니다. '어쨌든 돈많이 벌어서 많이 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 헌금을 많이 할 수 있고, 헌금을 많이 해야 교회 건물도 짓고 목사 월급도 많이 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몸 팔아서 돈버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에 목적을 두기 때문에 돈없으면 안된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사는 것이 신자이고, 그런 신자들의 모임이 교회라면 그 교회의 특징은 '우리는 돈없어도 산다'는 외침일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 돈이 없을 때 여러 가지 불편한 것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된 교회는 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주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으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돈이 안들어오기 때문에 교회가 안된다는 생각으로 '헌금하라'는 것을 강조 해버린다면 결국 그것은 은혜와 자비로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돈으로 모이는 교회가 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몸파는 것, 즉 매춘과 같은 것입니다.
19,20절 말씀도 보면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형제에게 꿔준 것이 있을 때 그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다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종에서 자유자로 살아가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산다는 것은 내게 있는 것은 내가 번 것이 아니다는 사상입니다. 즉 내것이 아닌데 어떻게 이자를 받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와 사랑으로만 모여진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에서 교인들끼리 돈놀이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혹 돈을 빌려줄 일이 있으면 이자를 받지 않고 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용해서 돈을 빌릴려고 한다면 그것 역시 안됩니다. 하나님은 형제간에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과정에서 이자를 받지 않음으로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되새겨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자를 받지 않고 빌려줘도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가르침 받을 수 없는 타국인에게는 이자를 받아도 괜찮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을 볼 때 이러한 규례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에 의해서 모여진 교회라는 공동체는 서로서로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서 모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회에 목적을 두면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교회를 만들려고 하지 않아도 신자가 서로서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고 배우기 위해서 모인다면 자연스럽게 세상이 따라올 수 없는 하늘 나라만의 독특한 모습을 비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은혜와 자비로 사는 삶을 떠나있는 것이고, 교회는 이미 붕괴된 것입니다.
또 21-23절을 보면 서원한 것은 반드시 행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물을 드리기로 자원을 했다면 그것은 입으로 언약한 대로 반드시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린 이 말씀을 하나님께 한번 작정한 것은 반드시 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특히 헌금을 작정했다면 그것은 반드시 행해야지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어떻게든 그 돈을 손해보게 하실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대로 신앙인이 모인 공동체는 각자 자기 믿음을 자랑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과 미련함과 믿음 없는 모습은 다른 형제들의 삶과 믿음의 모습을 통해서 배우고 깨달아가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나로 인해서 보여지는 믿음의 행동은 나 한사람의 유익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에게 은혜로 살고 믿음으로 사는 삶을 가르쳐주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자기 편함을 앞세우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를 목적으로 나오지 말고 교회를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위는 은석교회라는 단체의 성장과 발전에 촛점이 맞춰지면 안됩니다. 함께 은혜로 사는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잊지 않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께 붙들려서 쓰여지는 도구로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물을 바치고자 자원을 했거든 더디 하지 말고 입으로 언약한 대로 시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자원한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을 어긴 죄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자원한 대로 하지 않음으로서 형제에게 '서원을 해도 하기 싫으면 안해도 되는구나'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형제를 위해서 서원한 것을 시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24-25절의 말씀은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포도를 따먹을 때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지만 그릇에 담지는 말라고 합니다. 또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 갔을 때에도 손으로 이삭을 따는 것은 되지만 낫을 대지는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또 어떤 의미의 말씀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포도원의 포도를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나에게 포도를 먹게 해서 배부르게 하신 분은 여호와시니 내일도 역시 나는 하나님이 은혜로 먹고 살아가는 존재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포도를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는 세상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내것 네것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는 세상에서는 남의 것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다릅니다. 내가 벌어서 내 힘으로 챙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함께 나눌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나의 삶은 하나님께 달려 있지 내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포도를 그릇에 담는다는 것은, 지금 배부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서 내일까지 미리 준비하려는 불신앙이며 욕심입니다. 곡식을 낫으로 베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 손에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챙기고 모음으로서 미래까지 자기 힘으로 대비해 보려는 탐욕에서 나온 행위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인간이 되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인간인가 하면 은혜로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보이는 세상에 살고 보이는 것들이 필요한 삶을 살아가지만 그래도 소망은 보이지 않는 하늘 나라에 두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주시는 은혜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간이 되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과연 이렇게 살아가십니까? 제가 이것을 묻는 것은 이런 행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려고 해도 우리의 욕심이 방해한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 엉터리 같은 나를 사랑하시고 품에 안아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희생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린 지금 주님의 피를 밟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잘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바로 도망친 종인데 그리스도가 받아주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자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모여서 교회를 위해 어떤 큰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내가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 보여주고 배우자고 모였습니다. 나를 위해서 교회로 모인 것이 아니라 형제를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모일 때 여러분은 하나님께 복종되어질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께 복종되어진 자로 살아갈 때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은혜가 각자의 삶을 통해서 마음껏 발산될 것입니다.
약자 (신 24:17-22)
신자가 교회로 모일 때 필히 생각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본질입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며 모일 때 왜 자신이 하나님께로 나와야 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의 종교 생활은 생각 자체가 없습니다. 불교인들도 왜 부처를 찾아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생각이 없고, 기독교인들도 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생각이 상실된 채 부처를 찾고 그리스도를 찾고 있습니다. 물론 '어쨌든 불교인이 절에 가는 것은 부처를 찾는 것이고, 기독교인이 교회에 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됐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믿으라고 하느냐?'고 투덜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깊은 생각이 없이 신을 찾는 것은 결국 자기 욕망에 이끌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자신의 욕망이 신을 찾게 하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 속에서 신이 찾아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실, 이점은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하며 살아가십니까? 하루종일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고 묵상하며 살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질이란 생각한다고 해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서 '나의 본질이 뭘까? 그래 나의 본질은 죄인이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본질에 대한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생각하는 것이고 들어서 아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인간의 언행입니다. 인간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는 인간의 본질이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인간이란 구조적으로 어떤 존재인가?'가 그의 언행에 그대로 담겨진 채 발산되는 것입니다. 물론 평소에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언행을 통해서 본질을 어느 정도 감출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언행을 가장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도보다 앞서서 본질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언행은 인간의 본질을 그대로 싣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평소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그 정체를 드러내주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때문에 단순히 '나의 본질은 죄인이다'는 것을 생각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언행 하나하나를 통해서 '역시 나는 악인에 지나지 않는구나'에 대해 스스로 인정 할 수 있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 나는 죄인이야'라고 생각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아니나 다를까 나는 악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구나'라는 것이 스스로 인정되어졌을 때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드리는 것은, 많은 신자들이 지식적으로 '인간은 죄인이다'는 것을 말하고는 있지만 스스로 죄인임이 인정되어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현대 교회의 실태입니다. 교회에 죄인이 없이 모두가 제 잘났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관심을 둘 것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할까?'가 아닙니다. '내가 과연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여러분의 최대한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으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는 소위 '믿음의 형제'라고 부르고 있는 이웃이 있음으로 인해서 증명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본질을 싣고 있는 언행은 어떤 대상을 향해서 발산하게 되어 있는데, 바로 여러분 옆에 있는 이웃이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의 본질을 이끌어 내는 도구로서 하나님이 여러분의 옆에 존재하게 하신 것입니다. 나보다 잘나 보이는 이웃을 내 옆에 있게 하심으로서 항상 시기하고 경쟁하고 미워하는 본질을 끄집어내시고자 하신 것이고, 나보다 못나 보이는 이웃을 있게 하심으로 약한 자를 무시하고 힘을 과시하고 압제하기를 좋아하는 본질을 끄집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웃을 통해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고,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임이 인정되어질 때 비로소 그는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할 진정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신자의 삶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교회는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다니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믿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믿어지고 의지되어지는 사람은 분명 자신의 본질을 아는 자인데, 인간이 인간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아는 자는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를 말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고, 그 본질을 바탕으로 한 삶은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본질은 한마디로 말해서 22절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게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고 합니다. '종'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삶의 환경이 어떻게 변하고 재물을 얼마나 소유를 하고 살아가게 되든 상관없이 그들의 본질은 종입니다. 만약 그들이 '종'이라고 하는 본질에서 떠날 때 그들 가운데 종과 같이 눌리고 무시 받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장의 말씀도 도덕과는 전혀 상관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자에게서 보여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이러이러한 행동을 해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종되었던 자임을 아느냐. 안다면 너희에게서는 이러이러한 모습이 보여져야 하느니라'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신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 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몽땅 신자에게 있어야 할 실천의 덕목으로 받아들여 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 대한 행함의 요구로 받아들이게 될 때 필히 발생하는 것은 행할 수 있는 것과 행할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분량만큼 행할 수 있는 것만 최선을 다해서 행하고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행할 수 없는 말씀에 대해서는 덮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도 신자가 실천해야 할 덕목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22절에서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하시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1-21절까지의 말씀은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자에게서 보여질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실천해야 할 덕목이니까 실천해라'가 아니라 '이것은 자신이 종이었다는 본질에 대해서 기억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인데, 너희들은 과연 어떠냐?'를 묻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가난한 자의 심정은 가난한 자가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현실이 현재 자신의 모습과 동일할 때 일체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현실의 환경은 달라도 일체감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을 벗어나서 자신의 본질로 찾아들어 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질이 종이었다면, 지금은 비록 종이 아니라 할지라도 종의 자리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종으로서 종을 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은 약자입니다. 압제 당하는 자입니다. 고통 속에서 사는 자이고 세상에 대한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러한 삶을 불행으로 여깁니다. 약자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약자의 자리에 자신을 집어넣을 때 정상적인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에 나오는 약자, 즉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본모습이 바로 그와 같았다는 것을 알 때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자기 힘 포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1-5절까지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남자는 강자로 등장을 하고 여자는 도움을 받아야 할 약자로 등장합니다. 약자는 항상 강자로부터 피해를 입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것이 여자에게는 남자로부터 내어 쫓김을 당하는 것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역시 여자와의 이혼 문제를 말합니다. 1절에 보면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람들이 듣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나쁜 쪽으로 이용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즉 아내가 싫어졌을 때 이혼 증서만 써주면 얼마든지 쫓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그런 식으로 이용을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혼증서'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혼 증서를 써준다는 것은 이혼을 당한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로 재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즉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여자는 부정한 일을 한 외에는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할 수가 없습니다. 부정한 일을 해서 쫓겨남을 당했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이혼 증서를 써서 여자를 보호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치 되는 일이라는 것이 여자가 부정한 일을 한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부정함을 보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정한 여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혼 증서를 써주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수치 되는 일이란, 남자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아내에게 어떤 결함이나 다른 여자보다 못난 부분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수치가 되는 경우입니다. 그것이 신체적인 결함일수도 있고, 결혼 전에는 미처 몰랐던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자가 자신에게 수치가 된다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여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혼을 하려거든 이혼 증서를 써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여자는 부정한 일을 한 것이 없이 이혼을 당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를 써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여자로 하여금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갈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자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혼 증서만 써주면 얼마든지 이혼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혼 증서를 써주라는 것을 통해서 자기의 정욕으로 살아가는 남자의 잘못됨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혼을 당한 여자가 재혼을 했는데 재혼한 그 남편이 죽었거나 그도 여자를 버렸을 때 전남편이 그를 다시 취하지 못하도록 하는 말씀도, 모든 일이 힘이 있다고 해서 그 힘으로 인간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4절에서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라고 말씀하는데, 여자가 몸을 더럽히게 된 이유는 남자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재혼하고 홀로된 여자를 다시 취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여자가 몸을 더럽히게 홀로 살아가게 된 모든 이유가 바로 남자의 욕심 때문이었음을 두고두고 잊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5절의 말씀도 역시 약자인 여자를 위한 말씀입니다. 결혼을 했으면 군대도 보내지 말고 어떤 직무도 맡기지 말고 일년 동안 아내를 즐겁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역시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는 말씀입니다. 6절에서 맷돌의 전부나 그 윗짝을 전집(저당하여 잡는 것)하는 것은 그 생명을 전집 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도, 맷돌은 곡식을 갈아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도구인데 그것을 저당 잡는 다는 것은 가난한 자들이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것까지 뺏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생명을 저당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7절은 사람을 납치하여 종으로 부리고 팔아먹는 인신매매를 말합니다. 이 역시 힘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하고, 8,9절의 문둥병의 이야기는 내가 바로 문둥병자임을 알고 문둥병자를 대하라는 것이고, 10-13절에서도 이웃에게 꾸어줄 때 스스로 집안에 들어가 저당을 잡지 말고 꾸는 자가 스스로 주는 것을 받아라고 하고, 혹 꾸는 자가 가난하거든 저당물을 해질 때에 반드시 돌려주라고 합니다. 그 이유도 가난한 자가 저당 잡힐 것은 옷밖에 없는데, 옷이라는 것은 인간의 최소한의 생계이기 때문입니다. 14-15절에서는 곤궁하고 빈한한 일군의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는 것도 가난한 일군은 그날 품삯이 그날의 생계인데 그것을 미룬다면 그것은 곧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16절의 말씀은 아비나 그 자식이나 각자 자기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각각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6절의 말씀은 앞뒤의 말씀과는 달리 이렇게 해라는 요구가 없습니다. 앞뒤의 말씀은 모두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는 요구를 하시는 말씀인데, 16절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예로 들어서 인간은 결국 각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강자가 약자를 도와줘서 약자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강자는 강자로서의 책임이 있고 약자는 약자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책임이 있기 때문에 강자는 약자를 압제해서는 안되고, 약자는 약자대로 자신의 신세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한탄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17절도 객이나 고아라고 해서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고,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고 합니다. 19-22절의 말씀도 고와와 과부를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밭에서 곡식을 벨 때 벨 것을 잊어버린 밭이 있거든 다시 가서 베려고 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놔두라고 합니다. 감람나무나 포도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씀을 드렸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이것들을 하나하나 그대로 지켜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을 때 이러한 모습들이 보여지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24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18절과 22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18절)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22절)는 이 말씀들은 '네 자신이 바로 저들처럼 옛날에 종으로 살고 압제 당하고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로 살고 과부와 고아처럼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이 아니냐'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본질을 잊어버린다는 그 자체는 주위에 있는 약자들을 돌아보지 않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약자를 돌아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힘을 가지고 괴롭히고 고통을 가중시키는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약자를 통해서 나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약자가 내 주위에 있다는 것만으로 귀찮아하고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까? 이것은 약자를 단지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턱대고 약자를 도와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통해서 힘으로 살아가고 강자 되기를 소원하고 살아가는 우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약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오로지 좀 더 잘살고 좀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가는데 정신 팔려있는 우리들의 불신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국 주위에 약자를 통해서 불신앙을 고발 받고 '내가 바로 망해야 할 죄인입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개 숙이고 하나님께 나오는 그 사람이 진실된 신자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약자와 나눌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잠 14:31절에서 말씀하기를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이 가난하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가난한 사람을 돈 없다고 해서 힘이 없는 자라고 해서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은 곧 뜻이 있어서 가난하게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똑같은 형편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힘을 가진 자로, 어떤 사람은 가진 것이 전혀 없는 약자, 가난한 자로 살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난하게 태어나는 것도,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죽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포함된 것입니다. 우린 여기에 불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가난을 이유로 하나님께 불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가난을 이유로, 가난하기 때문에 우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가난이 없는 세계입니다. 가난이 없는 세계라는 것은 물질이 풍족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부자에 대한 구분을 가지지 않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가난은 악이고 부자는 선이라는 개념이 없는 세계입니다. 가졌다 못가졌다라는 개념으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천국은 가난이 없는 나라입니다. 이 세계를 소망하며 산다고 하는 신자들이 돈에 매달리고 부자 되기를 소망하며 산다는 것은, 결국 천국을 소망한다는 자체가 단지 신자라는 이름을 위한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약자는 나보다 힘이 없고 무시 받아야 할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무시 받는 것은 자본주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돈이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힘입니다. 여러분이 이 천국을 소망하신다면 이 세상에서부터 그리스도를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이 보여져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어떤 약자라도 여러분에 의해서 무시를 받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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