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내용!! 강해!!

[스크랩] 신명기 강해 3

하나님아들 2014. 11. 20. 00:10

 

 

 

 

 

 

 

신명기 강해 3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이스라엘의 정신 (신 25:5-12)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세상의 것을 모르면 많은 불편이 따르게 되고, 때로는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전세를 계약할 때는 등기부 등본을 떼어 봐야 한다든지, 나중을 위해서 가등기를 미리 해놔야 한다는 것 등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상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식에 무지할 때 때로 커다란 손실을 입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알아야 하는 것도 많아집니다. 문명은 발달하는데 지식이 문명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결국 문명에 뒤쳐지는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흰머리가 난 반백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색하고 친숙할 수 없는 컴퓨터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발전한 세상 문명에 뒤떨어진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학생들이 힘들고 지쳐도 밤늦도록 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도 고도로 발달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배우기 싫어도 배워야 하고 알기 싫어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을 머리에 쑤셔 넣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가르치고 배우는데 집착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사람이란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하고 또 그것만을 가치 있는 지식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와중에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지식이 있다면 과연 그것에 관심을 두겠습니까?

 

 

 

 

세상을 사는 것이 목적이고 세상에 가치를 두고 있는 자라면 세상의 지식에 모든 가치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마음을 두고 가치를 두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 다른 세상의 지식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세상의 지식이라는 것을 단순히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많이 아는 것으로 이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말씀드린 다른 세상의 지식이란 단순히 성경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마음의 눈이 열려지고, 열린 눈으로 성경을 볼 때 그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게 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지식입니다.

 

 

 

 

이렇게 열린 마음의 눈으로 알게 된 하늘의 지식은 성도로 하여금 세상에서 발생되어지는 일 때문에 고민하고 낙심하고 초조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성령이 임한 자는 단지 성경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대하지 않을 것이고, 성경과 신학지식으로 자기 배를 채우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 의해서 이용되어지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철저하게 그리스도만을 증거 합니다. 그 성경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은 인간을 그리스도 앞에서 굴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진심으로 두손들고 주님이 나의 왕이라는 고백으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이 우리 앞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누구라 할지라도 성경을 대했다면 먼저 주님 앞에 무릎이 꿇어지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릎이 꿇어진 그 상태로 형제에게 나와서 자신을 굴복시킨 주님을 소개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소위 가르치는 자들이 이것을 도외시할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나 신학교 교수처럼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은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을 대할 위험이 농후합니다. 그렇게 되면 가르침으로서 밥 먹고 살아가는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한 성경에 되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부터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결국 자신을 굴복시킨 주님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경에 등장하는 주님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버리게 됩니다.

 

 

 

 

교회란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기 위한 목적으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로 모여야할 이유는 성경을 배우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우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배우고 성경을 알아가는 것에 즐거움을 두지 마시고,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에 즐거움을 두십시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그리스도를 알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쌓아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아감으로서 자연히 자신이 굴복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굴복시킨 주님의 능력과 위대함을 마음껏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이유입니다. 신자가 과연 세상 어디에 가서 나를 굴복시킨 주님의 위대함과 능력을 자랑하면서 이 기쁨에 함께 동참하기를 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교회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형제들이 모인 교회, 신자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주님을 자랑하고 형제들과 함께 기뻐하며 은혜를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예배드리고 설교를 통해서 성경을 배우려고 교회로 모인다면 그는 참으로 불쌍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그리스도는 없이 단지 앎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결코 신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관심은 성경 지식이지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교묘하게 위장한 불신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고도의 신학지식을 쌓아 놓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기 자신을 내세우게 됩니다. 주님께 굴복 당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굴복되어지는 것을 싫어하고 자기 것을 주장하는 모습을 비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바라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입니다. 이 세상이 아닌 새하늘과 새땅이 여러분의 마음 전체를 차지한 가운데 그리스도에게 굴복되어져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앞에 옵니다'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 나오는 진실된 그리스도의 형제된 모습이 그리울 뿐입니다. 목사인 저나 여러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같이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자기의 죄를 통회하며 주님만 의지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형제로 만나지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오직 주님만 자랑하는 교회가 되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목사인 제가 단지 성경을 가르치는 기능적인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고, 신자인 여러분이 교회를 바라볼 때 단지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배우는 곳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아는 자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말하는 자를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택을 말하는 자를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 앞에 굴복 당한 자를 기뻐하십니다.

 

 

 

 

목사로서 단호하게 말씀드릴 것은, 만약 여러분이 고도의 성경 지식을 습득하고 싶으시다면 은석교회로 오지 마시고 신학교를 가십시오. 저는 성경도 모르고 신학도 모르는 무지한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에게서 배울 수 있는 성경 지식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같은 자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습니까? 저는 다만 성경을 보면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뿐이고, 저를 다스리시고 있는 주님에 대해서 알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알게 된 주님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소개하는 이유도 우리 함께 이런 주님 안에서 천국을 맛보며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여러분이 자신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이 말씀을 대하는가를 점검하십시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계시하시고자 하는지에 대한 관심인지, 아니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구절을 목사가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성경을 펼쳐 놓고만 있는지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오늘의 말씀을 대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 5-10절까지의 말씀은 시형제결혼법, 또는 계대 결혼법이라고 불리는 고대 사회의 풍습입니다. 즉 시형제 결혼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독특한 결혼법이 아니라 다른 사회에서도 흔히 시행되고 있던 풍습이라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와 같이 시형제 결혼법, 즉 형제가 아들이 없이 죽거든 그 죽은 형제의 아내는 타인에게 시집을 가지 못하고 죽은 남편의 형제가 그 여자를 아내로 취하여 그 여인의 낳은 첫아들로 형제의 대를 잇게 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가문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가문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가문이란 혈통의 이어짐이기 때문에 다른 피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자기 가문을 떠나서 남자의 가문으로 들어가서 남자의 혈통을 이어주는 것이 의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가문에 들어온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을 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죽은 여자는 다른 남자를 통해서 남편의 혈통을 이어갈 수는 없는 것이고, 결국 같은 혈통이고 같은 피인 형제를 통해서 남편의 가문을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형제 결혼법, 또 계대 결혼법이라고 불리는 풍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결혼법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지켜야 할 규례로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회에서도 시행하고 있는 풍습을 굳이 이스라엘에게 규례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독특성을 계시하시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나라로서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에 지니고 살아가야 할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애굽의 종에서 벗어난 백성이기 때문에 이러한 구원정신이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전체의 정신으로 확산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영원토록 유지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유지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은 혈통이 아니라 정신이 살아있는 나라입니다. 그 정신은 앞서 말한 대로 은혜와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혈통이 관심이 아니라 종의 자리에서 해방을 맛보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정신으로 굳게 존재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 정신을 잊지 않고 종이었던 이스라엘의 본질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내에 고아와 과부와 객이 발생하게 합니다. 즉 약자를 발생하게 하심으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본실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의도에서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자신의 본질을 약자를 통해서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약자들이 힘에 의해서 고통받고 눌림 받은 모습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24장의 말씀대로 이웃의 맷돌을 저당 잡는다든지, 돈을 빌려줄 때 저당 잡은 것을 해가 지도록 돌려주지 않는다든지, 가난한 품군의 삯을 당일에 주지 않고 미룬다든지, 객이나 고아라고 해서 그 송사를 억울하게 판결한다든지, 곡식을 벨 때 객과 고아와 과부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도 남김 없이 거둬들일 때 하나님은 그러한 행동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되었던 자신들의 본질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정신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로 간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 역시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하나님의 규례를 통해서 확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규례에 다른 사회에도 있는 풍습을 동원하신 것은, 같은 모습의 풍습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차별성을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인간 사회의 시형제 결혼법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혈통 보전입니다. 순수한 자기 혈통을 보존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남편이 죽은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주지 않고 같은 형제에게로 시집보내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관심은 자기 혈통에 있었던 것입니다. 순수한 혈통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해서 형제의 아내를 형제가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시형제 결혼법은 단순한 인간 혈통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나라입니다. 언젠가 약속의 후손이 가져올 영생에 모든 기대를 걸고 세상을 살아가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서 이름이 끊어진다는 것은 곧 영생에 참여함이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이름이 이어진다는 것은 약속 안에서 계속 영생의 소망이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로부터 이름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 힘쓴다는 것은 장차 주어진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단지 자기 혈통을 보존하기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이방 나라와 이스라엘의 차별성을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가느냐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내 가문, 내 혈통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약속의 나라에서 끊어짐을 염려하는 것으로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낳은 첫 아들로 하여금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사라지지 말아야 할 정신이었습니다.

 

 

 

 

자기가 낳은 아들을 형제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형제에게 주어버리는 것은 희생입니다. 형제는 이러한 희생을 통해서 죽은 형제의 기업을 이어줘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죄를 처리하고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심정에 동참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심정에 앞서 동참했던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내어버리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심정에 동참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7절부터 보면,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 취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사실을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고, 장로들은 형제의 아내로 하여금 그 형제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고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고 말하도록 합니다. 신을 벗긴다는 것은 종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을 말하고, 침뱉음을 당한 것은 수치를 받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기 희생을 거부하고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 마음에 약속의 후손이 오심으로 성취되어지는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희생으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어짐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약속의 후손이 오심으로 성취되어질 영생이었습니다. 약속이 주어진 나라로서 그 약속이 성취되어질 것을 소망하고 이스라엘에서 그 이름을 이어가는 것은 결국 메시야가 오심으로 주어질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광야보다 모든 것이 풍족한 나라입니다. 풍족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에 취해서 보이지 않는 약속에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형제 결혼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약속 안에서 천국을 소망하고 살아가는 나라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11-12절의 말씀도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 한 사람의 아내가 자기 남편을 치는 자의 음낭을 잡거든 그 여인의 손을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어찌 보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규례이지만, 하나님이 중요시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 규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음낭이란 이스라엘을 이어가는 씨를 말합니다. 때문에 음낭을 상하게 한다는 것은 씨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영생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무시한 행동이기 때문에 손을 찍어버리라고 말합니다. 결국 약속의 후손을 통해서 영생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용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속에 담겨있는 약속의 정신은 희생입니다. 희생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자기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희생을 거부했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수치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약속 안에서 미래를 바라보면서, 눈에 보이는 세상에 취하지 않고 천국을 소망하고 하나님의 희생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갈 때 죄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도 형제를 천히 여기지 않아야 했고(1-3절), 일을 시키되 먹여가면서 시켜야 했으며(4절), 저울추를 공정하게 해야 했던 것입니다. 돈을 벌어 잘 살기 위해서 장사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소망하는 자로서 자기 이익을 위해 살아가지 않음을 보여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아말렉이 이스라엘의 피곤함을 틈타서 뒤에 쳐진 약한 자들을 친 것을 기억하고 아말렉이란 이름을 도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약한 자를 골라 친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약자임을 모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위는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약자를 골라서 약자를 치는 행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약자임을 안다면 약자에게든 강자에게든 공평하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장차 주어질 천국을 소망하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정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이어지는 천국을 소망하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유함에 취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서 우리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감사하고 그 은혜와 사랑의 정신으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는 죽은 자이고, 이스라엘에서 끊어짐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내 이름이 약속 안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안다면 이제부터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소망하는 것은 약속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맏물 (신 26:1-11)


사람은 끊임없이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을 기대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할 때 '세상 살 재미가 없다'고 하면서 투덜대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무엇 때문에 투덜대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언젠가 여러분이 만족하고 감사하고 기뻐했던 것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어제는 만족과 감사와 기쁨이었던 것이 오늘에는 불평의 대상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이제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는 마음을 순간적으로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그런 마음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세상 전부를 소유하고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인 이상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다른 좋은 것이 자신의 눈에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 좋은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심에 사로잡힌 이상 또 다시 불만족과 불평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날 때부터 현실에 만족할 수 없는 구조로 태어난 것입니다. 현실이 풍족하다고 해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빈곤하다고 고생이 된다고 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풍족하면 풍족한 대로 평안하면 평안한대로 빈곤하면 빈곤한대로 불만과 불평을 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심지어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을 때 그 선물에도 불만을 내뱉습니다. 선물이란 공짜로 주어진 것입니다. 없었는데 공짜로 주어져서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없었던 때를 생각하면 있으면 있는 것만큼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인간은 없었던 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소유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물에도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왕이면'하면서 더 큰 것이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현재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면 그것이 없었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없었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것만큼 남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정신이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는 정신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맏물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맏물이란 처음 맺은 열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에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 그 토지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라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행동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중요하다면, 그냥 수확물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서 바치면 될 것인데 유독 맏물을 바치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 왜 굳이 그 이름을 두시라고 택하신 곳으로 맏물을 가지고 가서 제사장 앞에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라는 것입니까? 오늘 이 말씀은 단순히 바친다는 것에 중요성이 있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맏물을 바친다는 것에 중요성을 두고서는 직장에 취직을 하고 맨처음 받은 월급을 통째로 교회에 바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농사를 지어서 맨 처음 거둔 수확물을 목사에게 갖다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맏물이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맏물을 바쳐야 할 곳은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시는 땅, 즉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셔서 얻게 한 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이스라엘은 구경도 못하고 들어가 보지도 못할 땅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얻게 되어지는 모든 곡식과 소산물은 하나님 덕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힘으로 모든 난관을 헤치고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분명 모든 소산물은 자기들의 것이라고 큰 소리쳐도 하나님은 할말이 없습니다. 자기들의 힘과 능력으로 얻은 것인데, 그것으로 큰소리치고 자랑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뭐라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그냥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한 땅이라고 구제적으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은, 결국 그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 덕분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덕분에 약속의 땅에 들어갔으면 약속의 땅에서 주어지는 것, 누리는 것, 그 모두는 하나님 덕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약속의 땅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고, 들어오지 못했다면 약속의 땅에서 얻은 모든 소산물들은 자기들의 것이 될 수 없었음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손수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김을 매면서 농사를 지어서 소득을 거둬들였다고 할지라고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 덕분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은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은 '우리는 하나님 덕분에 이 땅에 들어왔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애굽의 종으로 고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팔자였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맏물을 하나님이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은 '애굽의 종으로 살던 우리가 이렇게 자유를 누리고 약속의 땅에서 농사 짓고 살아가면서 이런 풍성한 소득을 거둬들인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결코 가나안에서 거둬들인 소산물의 처음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곡식으로서의 맏물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곡식을 갖다 바친들 하나님이 그것으로 밥을 해 드십니까 아니면 떡을 해 드십니까? 곡식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신자들이 교회에 바치는 돈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고, 몸으로 봉사하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이러한 거짓말은 결국 저주를 쌓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원하신 것은, 곡식으로서의 맏물이 아니라 맏물을 들고 오는 그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마음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미리 만들어 놓으신 환경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개척을 하고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살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냥 들어가서 누리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약속의 땅의 모든 것을 누리는 대가는 '이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잊지 말라' 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기 전에 미리 세상을 만들어 놓으신 것과 같은 차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창조는 하나님 홀로 말씀으로 이루신 일입니다. 인간은 맨 나중에 창조되어서 있는 것을 누리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알고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 증거로는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세상의 것을 은혜가 아닌 자기 소유욕에서 바라보았다는 증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은혜를 벗어난 증거는 무엇으로 드러나는가 하면 12-15절에 나오는 십일조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 부분은 맏물에 대한 설명을 마친 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맏물을 들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갑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은 제사가 드려지는 곳을 말합니다. 즉 피가 흘려지고 하나님의 희생이 있는 곳으로 맏물을 들고 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소산물은 이스라엘의 힘으로 거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희생 덕분에 주어진 은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맏물의 출처가 어디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맏물을 들고 왔을 때 제사장은 그것을 받은 후에 이스라엘의 옛날 처지와 현재의 은혜에 대해서 되새겨 볼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5-1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5-11절까지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어떤 상태에서 벗어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는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내 조상은 유리 하는 아람 사람으로서'라고 말합니다. 유리 하는 아람사람이라는 것은, 한곳에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다니는 유랑민이라는 뜻입니다. 즉 나그네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이 유리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후손 역시 유리 하는 인생을 물려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유리 하는 자를 하나님은 애굽으로 가게 하셔서 정착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크고 강대한 하나의 민족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애굽 사람에게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이 그 음성을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고통과 산고와 압제에서 놓여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되새기라고 합니다. 결국 이 맏물은 우리의 손으로 거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진 은혜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맏물에 들어있는 의미입니다. 맏물을 바친다는 것은, 맏물만 바치면 나머지는 너희 것이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나머지에 대한 인간의 소유권을 인정하기 위해서 맏물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맏물, 처음 것이란 처음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뒤에 생산되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맏물을 바친다는 것은, 맏물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고 여호와의 은혜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맏물에는 이스라엘의 존재성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존립 자체가 하나님이 있게 하셔서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아니라면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맏물은 단순히 '소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11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는 말씀에서 복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이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알고 있기 때문에 맏물을 가지고 자기 혼자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레위인, 객과 함께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레위인이나 객은 똑같은 세상의 것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세상 것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자기들의 힘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생이며 고통일 것입니다. 오늘날도 소유 없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레위인과 객이 어떻게 복을 인식하며 다른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레위인과 객을 자기들의 즐거움에 참여시켰을 때 가능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레위인과 객과 함께 나누었을 때 소유 없는 그들이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레위인이나 객은 이스라엘의 옛날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소유가 없고 유리하던 모습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존재하고 있고, 이 소산물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레위인과 객을 귀찮아하지 않고 자기들의 은혜의 즐거움에 참여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스라엘은 맏물을 바치면서 은혜를 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데 한편에서 레위인과 객이 주리고 고통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이스라엘이 말하는 은혜는 모두가 가짜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12절).

 

 

 

 

말 3:8에 보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은 것을 가지고 도적질을 했다고 하면서 책망을 하십니다. 도적질이란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십일조와 헌물이 도적질이라면 십일조와 헌물은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자기 것으로 삼아버렸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지금 거의 모든 교회에서 이 말씀을 가지고 십일조를 안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에서 말하는 십일조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십일조는 세상에 기업이 없는 레위인의 생계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말한 대로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한 것도 됩니다. 즉 십일조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 바치도록 한 것입니다. 너희만 배부르지 말고 세상에 기업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소산물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모두가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복에 함께 즐거워 할 수 있도록 십일조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라기 당시에 이스라엘은 십일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고아 과부 나그네 레위인같이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고 꾸려갈 수 없는 자들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배려가 점점 소멸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자기의 힘으로 거둔 자기 소유로 인정을 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도적질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본질을 알고, 본문에서처럼 우리 조상이 유리하던 아람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현재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은혜임을 잊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본질을 잊어버리게 되면, 현재의 환경에 빠지게 되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자기들의 노력과 힘으로 이룬 결과인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 이루었기 때문에 내 소유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고, 내것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을 아까워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자연히 레위인 객 고아 과부를 위해서 십일조를 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무 것이나 소득의 10%를 내면 그것이 십일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득 중에서 처음 난 것, 맏물이 십일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맏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맏물 때문에 삽니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이 온 이스라엘에 퍼질 때 그것이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은혜로 산다는 정신이 이스라엘의 정신이 되면, 이스라엘은 자연히 레위인과 고아 과부 객을 위해서 십일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 사랑이며 율법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이 성취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풍요로움에 빠지게 되자 풍요를 누리는 것에만 정신이 팔리고 은혜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는 희미해지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누구 덕분에 살아왔는가에 대해서 희미해집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삼아버립니다. 그래서 자연히 이웃 사랑의 모습인 십일조를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십일조란 맏물의 은혜를 아는 자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소득의 10%를 교회에 낸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십일조로 여기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십일조는 맏물의 은혜를 아는 것이지 소득의 10%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소득의 10%만 내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할 의무를 다한 것으로 가르쳐버리는 것은 성경을 이용한 사기극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교인들을 멸망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레위인이나 객이나 고아 과부는 소득이 없습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맏물의 은혜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맏물의 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맏물의 은혜를 아는 이스라엘이 자기 손에 있는 것을 나누어 줄 때 레위인과 객과 고아 과부들도 전혀 소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맏물의 은혜에 함께 참여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맏물의 은혜를 나누어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애당초 이 세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죽어야 할 자들이고 객과 고아와 과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참된 이스라엘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맏물의 은혜를 나누어주심으로서 우리가 복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배부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존재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존재할 가치도 없는 인간들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맏물의 은혜를 나누어주심으로서 예수님의 즐거움과 복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실천하신 이웃 사랑이 우리들을 복으로 인도하시고 즐거움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려지게 되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잘난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객과 고아 과부 같은 처지이고 세상에 존재할 가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이웃 사랑으로 다가오신 예수님의 그 은혜만이 귀하게 느껴질 것이고, 은혜만 의지하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 크나큰 위로를 얻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은혜를 팽개치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이웃 사랑 때문에 내가 나될 수 있었다는 것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삽니다. 그저 내가 잘나서 예수 믿고, 내가 잘나서 성경을 알게 되고, 내가 잘나서 교회 다니고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랑이 나올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고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항상 사랑과 은혜를 나눌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를 모르는 자는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것을 내세우고 자기 것으로 이웃을 대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비판이 나오고 구별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십니까? 그러나 동의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내가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가를 봐야 합니다. 은혜와 사랑으로 산다면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에게서는 은혜와 사랑이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의만 하고 믿는다는 말로만 그쳐버린다면, 오히려 여러분은 사랑과 은혜를 이용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맏물이 되시는 주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하늘의 복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민 (신 26:16-19)


사람이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세상에서 환영받는 존재로 살다가 죽어서도 하나님께 환영받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하나님의 법칙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서로 대립되어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환영을 받으면 하나님 편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도 환영받고 하나님께도 환영받는 인생이 되기를 꾀하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소외되기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집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다수의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수에 반항하는 것은 결국 자기 소외를 불러오는 것이라는 것을 잘알기 때문에 비록 마음속으로는 굴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외적으로는 굴복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로 되어 있습니다. 만약 어느 누군가가 다수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편다면, 그 사람은 집단으로부터 소외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흔히 세상에서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불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들을 한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에 의를 세우는 것이 다수의 무리에서 소외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다수의 불의에 대항하여 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이들은 자기 스스로 위로를 만들어 내어서 다수에서 소외된 아픔을 이겨나가고자 애쓰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다수로부터 미움 받고 소외되고 핍박을 받는 것을 내가 의롭고 옳기 때문에 오는 핍박이라고 여김으로서 소외와 핍박을 오히려 자기 위안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수의 힘에 의해서 교도소에 갇힌다고 해도 떳떳하게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교도소에 들어가는 것까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도구로 삼아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더 기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기의 이념 싸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이런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수에 의해서 소수가 핍박을 받는 것이 있을 수 있고 소수가 다수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는 모습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신자의 임무는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세상에 보냄 받은 것은 교회를 개혁하는 것도 아니고 종교를 개혁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선지자들이 당시 사회의 종교상에 굴하지 않고 죽음의 위협과 핍박에서도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들이 종교개혁을 위한 의지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지자들을 잘못된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관심은 개혁이 아니라 단지 자기 앞에 있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을 통해서 썩어빠진 이스라엘의 종교를 개혁해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는 것만이 선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말은 해야 한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다수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죽음의 위협을 받는 가운데서도 그것을 자신의 의의 결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참된 선지자의 공통적인 조건은 자신에게 어떤 핍박이 온다고 해도 상관없이 이 모두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발생한 상황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수에게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무리로부터 소외되고 추방될 위험이 다분히 있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상황으로 믿고, 오직 주님만을 바르게 증거 하겠다는 것이 참된 선지자일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상황은 악한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것도 아니고, 선한 의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어떤 상황이든 그 속에는 하나님이 개입해 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어떤 고통과 핍박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계획에 의해서 발생되는 상황으로 받아들일 때 핍박을 받는다고 해서 낙심하고 화낼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 그것을 자신의 의로 삼을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다만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만 즐겁게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해서 항상 부정적인 말만 한다고 해서 선지자가 아닙니다. 고통받고 어렵게 살아간다고 해서 역시 의인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인되는 것이기 때문에 수난과 고통을 마치 자신의 의의 증거인 것처럼 미화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수난 받음과 어려움 당함과 고생하며 살아가는 것을 자신의 의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자기와 같이 수난 받지 않고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자가 아닌 것처럼 보여지게 됩니다. 이것도 역시 참된 신자로서의 모습이 아닙니다.

 

 

 

 

신자는 수난을 즐기고 고통을 즐기고 어려움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자는 다만 예수님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고 하늘의 비밀이며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갈 뿐입니다. 고난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어려움을 받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거기에 순종할 뿐입니다. 말씀이 원하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것이고, 예수님이 전부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소외되는 것도 두려움 없이 자신에게 맡겨진 말을 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세상에서 고난받고 소외된 것에 대해서 낙심하고 슬퍼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이 모르는 그리스도를 알고 있고, 끝나버릴 세상 속에서 영원한 하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이 감사가 그를 세상 속에서 이기는 자로 남아있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알고 있고, 그 세계를 마음에 두고 살고, 그 세계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믿고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 어두움의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과 원칙대로 시행되고 끝날 것임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끝나버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살아가는 어리석음을 좇아가지 아니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과연 그렇게 살아가십니까? 세상을 끝나버릴 땅으로 보고 있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아가십니까? 그렇다면 그 분은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진노의 자식으로 멸망 받아야 할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랍고 엄청난 은혜와 축복으로 다가온지라 스쳐 지나갈 세상의 일 때문에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성민이란 말 그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란 하늘 나라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늘 나라 사람이 세상에서 잠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하늘나라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100평 짜리 빌라와 다 쓰려져 가는 초가집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100평 짜리 빌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잠시 초가집에 살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나는 100평 짜리 빌라가 있는 사람이다. 잠시후면 내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잠시 동안의 초가집도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초가집에서 호의호식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얼마든지 우습게 여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초가집에서는 비교도 되지 않은 새로운 삶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는 이러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성민이라는 것은,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신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신분이 공짜로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얼마든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가는 신자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여호와의 성민은 하늘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세상은 초월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고 반응하는 인간이 바로 여호와의 성민입니다. 자기는 돌아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죽는 것이 본향인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서 여호와의 성민으로 살아가는 자에게서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이러한 성민으로 살아가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철저하게 세상의 사람으로 살다가, 죽어서는 여호와의 성민으로 대접받기를 원하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재미없는 이상한 말로 들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기 전에 많은 규례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성민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말씀하고 있는 모든 규례들은 성민들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는 특징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맏물과 십일조도 역시 단순히 바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에게 바치는 것은 인간들의 주특기입니다. 바치는 것은 성령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맏물과 십일조를 통해서 '우리는 망해야 할 사람들이고 고아 과부 객과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즐거워하고 배부르게 된 자들입니다'라는 고백은 성민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즉 맏물과 십일조를 통해서 누군가가 죽어야 할 우리들에게 은혜를 나누어줌으로서 우리가 배부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영을 받은 성민 밖에 없는 것입니다.

 

 

 

 

19절에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신다'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직접 모든 세상 위에 뛰어난 자로 만드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인간은 죄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설사 하나님이 뛰어난 자로 만드신다고 해도 순식간에 다시금 죄로 빠져 들어갈 인간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뛰어나게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하십니다. 즉 예수님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분이 되시고 여호와의 성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와 함께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자로 여김 받고 여호와의 성민으로 여김 받는 것입니다.

 

 

 

 

뛰어난 자라는 것을 세상의 시각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세상적으로 뛰어난 자는 능력이 있고 모든 면에서 월등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뛰어난 자는 세상과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약속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것을 우습게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은혜만을 자랑하고 내세우는 사람, 이런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자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다수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돈에 굴복하지 않고, 양심을 팔아서 출세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16,17절에 "오늘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네가 오늘날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 소리를 들으리라 확언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때문에 지금까지 모세가 말했던 규례들은 행하자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맏물과 십일조 되시는 예수님이 은혜를 나누심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간이 과연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 규례들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인간의 의지와 사고방식으로 실천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러한 규례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 또 가나안 땅에서 그대로 지키고 행하라고 하십니까?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 규례는 한마디로 말해서 사랑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사랑의 나라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어질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러한 규례를 통해서 장차 메시야가 오심으로 이루어질 새로운 나라에 대한 소망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즉 인간은 지키고 행할 수 없는 규례와 법도를 이스라엘이 안고 있음으로 해서 이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행할 수 있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만이 고아와 과부와 객과 같은 자기들에게 은혜를 나누어주심으로서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받게 하시고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살아있을 때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에 매이지 아니하고 약속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일단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철저하게 인식을 해야 합니다. 자신을 향한 모든 가능성이 포기되어져야 자기 말고 제 삼자를 향해서 눈을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망해야 할 죄인이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받고, 여호와의 성민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시고 행하시고 완성하심으로서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받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분이 되신 예수님이 맏물이 되시고 십일조가 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나누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맏물은 뒤의 것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맏물의 뒤에 난 것은 맏물이 아니면서도 맏물로 여김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보배로운 백성이 될 수 없고, 여호와의 성민이 될 수 없으면서도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받고 성민이 될 수 있었던 신비이며 기적입니다. 이러한 비밀을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오직 오늘날 약속의 땅인 성령 안에 살아가게 된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비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밀을 알게 된 자는 참으로 복된 자라 할 수 있고, 이 복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우습게 여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는 자연적으로 사랑의 흔적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예수님의 마음인 성령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에 의해서 은혜를 나누는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민이라는 복된 신분을 망각하고 산다면 그 마음은 이웃을 향해서 닫힌 마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으로 뛰어난 자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그 사람에게서는 하늘의 복을 아는 넉넉한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모습이 보여지게 됩니다. 내 스스로 뛰어난 믿음을 가진 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분을 의지하고 있고, 그 분이 자기에게 매이지 아니한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 분 안에 있는 신자 역시 자기에게 매이지 아니한 사람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매이지 아니한 삶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보여주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늘의 복을 아는 자로서 세상에서 구별된 뛰어난 인생을 살아갈 수있기 바랍니다.

 

 

 

 

 

요단강 (신 27:1-8)


인간이 신을 찾는 것은 '자기 구원'이라는 욕망에서 나오는 원초적인 현상입니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자기 구원에 매인 인간이 각기 자기 마음에 드는 종교를 하나씩 골라서 신의 이름을 부르며 종교적 형식을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를 향해서 이런 말을 하면 '맞다'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지만 기독교까지 포함해서 말을 하면 얼굴을 붉히면서 반발을 합니다. 그런데 반발을 하는 그 심리를 파헤쳐 보면 겉으로는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이유를 내세우지만 사실은 내가 믿고 있는 종교를 부정한다는데 대한 반발입니다. 즉 종교적 자존심이 상한데 대한 반발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것을 지키고자 합니다. 그것이 종교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이 자신이 선택하고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령 옷을 샀는데, 누군가가 그 옷을 보면서 '잘못 샀다'라고 하거나 값을 물어보고는 '나는 얼마에 샀는데 당신은 바가지 썼다'라고 할 때 누구나 기분이 상하게 됩니다. 이유는 옷을 잘못 샀다거나 돈을 많이 지불했다는데 대한 서운함이 아니라 자신에 선택하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들었다는데 대한 반발인 것입니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서는 항상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싶어합니다. 그 이유도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곧 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선택한 기독교에 대해서 누구라도 부정적인 말을 하면 즉시 반발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종교에 매어있는 '종교중독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괜히 절에 가기를 꺼려하고, 지나가다가 절이 보이면 지붕에 돌이라도 하나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것이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이 과연 복음을 아는 믿음에서 나타나는 의로운 행동이겠습니까? 그것은 단지 자기 것이 옳다고 하는 종교적 우월감이며 불교를 기독교의 적으로 간주한 적대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종교에 매인 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불교를 적으로 간주한 적은 없습니다. 사실, 기독교인으로서 절에 가기를 꺼려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나라에 유명한 절의 거의 모두는 경치가 수려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구경하러 가겠다는데 꺼려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절에 한번 갔다고 시험에 든다거나 믿음이 흔들린다면 그것이 신앙입니까? 하나님이 절에 갔다고 벌주는 그런 하나님이겠습니까? 불교에 적대감을 보이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한 것이고 믿음이 있는 자의 태도로 생각하는 분도 많겠지만 사실 그것은 신앙과 조금도 상관이 없는 것이고, 오히려 사단의 세력에 매어있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기독교란 종교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이라는 신을 선택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기독교를 '나의 종교'로 하나님을 '나의 신'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종교' '나의 신', 즉 내가 선택한 나의 것으로 생각할 때 앞서 얘기했던 '내 것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 작용할 수밖에 없고, 그럴 때 나의 기독교와 나의 하나님에 대한 그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기독교, 나의 하나님은 결국 자기 구원을 위한 종교와 신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종교론, 신론에서 표출되는 사상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하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에 매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편이 아니다'는 말에 반발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편이 아니다는 말은 '자기 구원'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말인데, 누가 과연 이러한 말에 순순히 수긍을 하겠습니까?

 

 

 

 

'자기 구원'이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자기들을 구원시켜주는 메시야였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구원자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기 구원의 희망을 무너뜨리는 것은 결코 메시야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 구원이라는 욕망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섬겼고, 때문에 하나님은 철저하게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들 앞에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세상을 호령하고 심판할 수 있는 강한 자의 모습으로서 그동안 자신들을 압제하고 핍박했던 자들에 대한 원한을 복수해주고 그동안 고생한 대가로서 행복한 미래를 보장해 줄 메시야가 아니라 버림받고 힘없이 죽어갈 약한 자의 모습이 메시야라고 할 때, 이 사실은 유대인들에게는 대단한 충격이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고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하필이면 버림받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고 죽어버린 메시야의 실체는 이 세상을 향해서 자기 구원이라는 욕망을 하나님 앞에 내밀 수 없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자기 구원에 대한 욕망으로 접근했던 하나님은 스스로를 계시하신 여호와가 아니고 인간들이 창작해낸 우상이라는 것이 버림받고 죽어버린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버림받고 십자가에 죽어버린 모습으로 오셨는데, 하물며 멸망 받아 마땅한 악한 우리들이 아들을 버림받은 모습으로 보내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감히 내 구원을 요청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둘로 구분이 됩니다. 하나는 여전히 자기 구원에 매어서 나를 위한 신을 찾는 자들과, 하나는 나는 구원받을 가치조차도 없는 인간임을 예수님 통해서 발견하고 '하나님 저는 저주받아 마땅한 자입니다'라는 자기 구원을 포기한 자, 즉 자신을 죽음에 던진 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신앙이 처음과 나중이 변하지 않고, 환경에 의해서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구원에 매어서 나의 하나님을 찾는 신앙은 하나님이 뭔가 자기편에 서 있지 않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때 흔들리고 당황하게 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그리고 아무리 기도하고 매달려도 그 어려움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난관으로 빠져 들어갈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의심하게 되고, 원치 않은 결과들을 대하게 될 때 낙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버림받아 마땅한 자로 여기는 신앙은 어떠한 일에도 흔들림이 없고 변함이 없습니다. 이미 버림받아 마땅한 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버림받은 것 같은 일을 겪는다고 해도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발생한 참된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한가지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 경험이 없고서는 흔들림이 없는 신앙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경험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본문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넜을 때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은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고 율법의 모든 말씀을 돌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돌을 에발 산에 세우고 거기서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철기를 대지 않은 돌단을 쌓은 후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3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했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열조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살게 하시기 전에 이러한 복잡한 절차를 거치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약속의 땅과 약속의 땅이 아닌 땅의 사이에는 요단강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치 홍해를 건너지 않고서는 애굽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갈라진 홍해를 건넌 것을 애굽과의 완전 결별로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요단강을 건넌 것을 약속의 땅이 아닌 세상과의 완전 결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요단강을 가운데 두고 서로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은 기존의 세상에 대해서 결별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세상이란 환경이 다른 새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세상과 살아가는 방식이나 사고나 상식이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이 세계가 곧 약속의 땅의 세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신명기의 규례들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실천해야 할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한마디로 이웃 사랑입니다. 이것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나타나는 세상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은 이 법칙이 무시되고 무너지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단강을 건너기 전과 건넌 후의 세상의 차이는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구분이 됩니다. 즉 요단강을 건너기 전의 세상은 자기 사랑, 자기 구원으로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요단강을 건넌 후의 약속의 땅이라는 세상은 자기 사랑이 아닌 이웃 사랑이 법칙이 되어서 살아가야 할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갑자기 이웃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돌변될 수는 없습니다. 요단강 물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신비한 효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철야기도회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요단강 이전 세상의 법칙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요단강 이후의 세상 법칙, 즉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법칙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비밀은 율법이 기록된 돌들이 어디에 세워지느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돌들은 에발 산에 세워집니다. 에발 산에 대한 얘기는 신명기 11:29절에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는 말씀을 보면 약속의 땅에는 에발 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심 산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27:11절부터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절반씩 나눠서 한편은 그리심 산에 세워서 백성을 축복하게 하고, 한편은 에발 산에 세워서 백성을 저주하게 하십니다. 한마디로 에발 산은 저주의 산이며 그리심 산은 축복의 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후에 율법을 기록한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율법을 기록한 돌들을 에발산, 저주의 산에 세우고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에 돌을 세우고 제사 드리기를 원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축복을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스스로 저주의 자리에 서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저주는 나에게서 멀어지고 축복만이 다가오기를 소원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더러 에발 산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에발 산에 세우시는 것은, '내가 바로 저주받아 마땅한 자다'는 경험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요단강을 건너고 앞으로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저주의 자리로 끌어내리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죽음이라는 경험이었습니다. 이 경험이 그들을 이웃 사랑이라는 삶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단강 이전의 세상에서는 자기 죽음이라는 경험이 없습니다. 자기 죽음은커녕 모두가 나 살자고 남죽이는 방식과 법칙에 매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구원에 매어 있기 때문에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한 세상과 결별한 약속의 땅, 즉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땅에서는 남의 유익을 위해서 오히려 내가 피해를 감수하는 정신만이 용납되는 곳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요단강을 건넜다고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넘으로서 자기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자기 죽음'이라는 경험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 존재인가를 앎으로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악함과 더러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된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가를 절실히 깨닫고 스스로 '나는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이다'는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이것이 에발 산에 서는 것이며, 저주받아 마땅한 나는 오직 거룩한 제물의 희생의 피로서만 살 수 있다는 의미로서 번제를 드리고 그것이 결국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임을 화목제를 통해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죽음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이 경험을 가리켜서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물을 것은 '과연 자기 죽음이라는 경험을 갖고 있습니까?'라는 것입니다. 자기 죽음이라는 경험이 없이 신앙을 말하지 마십시오. 자기 죽음의 경험이 없는 자는 결국 요단강 이전의 세상의 법칙과 사고방식을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위주로 살아가게 되고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자기 죽음의 경험이 없이는 '나는 그래도 괜찮은 인간이고 저 사람보다는 낫다'라는 생각에서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게 될 것이고,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을 무시하는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에발 산에서 자신들이 바로 죄인의 상태이고 저주받을 상태라는 것을 상기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은혜의 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은혜의 땅이라는 것은 먹을 것을 풍성하게 내려주시는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을 은혜의 땅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나안 땅에만 들어가면 은혜를 받아서 잘살아 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은혜의 땅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들어와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는 것을 아는 자가 살아갈 수 있는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들어올 수 없는 자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죽음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저주받아야 할 자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약속의 땅에 들어왔을 때 '저주받아 마땅한 내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인도 하셨기 때문이다'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가리켜서 상한 심령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에발 산에서 드리는 번제는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올 때 그것이 하나님과의 화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자기 죽음을 경험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시편 51: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정한 마음'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된 '정직한 영'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시 51: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상한 심령은 자기 죽음을 경험한 심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복이 되는 상태로 말합니다. 에발 산은 저주를 받는 산이 아니라 저주를 선포하는 산입니다. 그리고 그리심 산은 축복을 받는 산이 아니라 축복을 선포하는 산입니다. 결국 에발 산에 서는 것은 상대편에서 선포되는 복을 받는 것이고, 그리심 산에 서는 것은 반대로 저주를 받는 자리가 됩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합니까?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저주의 상태와 죄인의 상태를 깨닫고 하나님께 나올 때 그것이 바로 복을 받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신의 윤리 도덕 교양을 내세워서 '나는 괜찮은 인간이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그리심 산에 서고자 할 때 그 결과는 저주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가 에발 산에 자신을 세운 경험, 즉 자기 죽음이라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하찮게 보이거나 드러나지 않는 일은 하기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나같이 믿음이 있는 신자는 그보다 더 크고 위대하고 보람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환상입니다. 자신의 윤리와 도덕과 교양 가지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에발 산에 세워 놓고 보면 그러한 모든 것이 위선이고 허구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세상을 살아갈 때는 예수보다는 돈을 더 필요로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을 에발 산에 세운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과 저주받은 상태에 대해서 캄캄하기 때문에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해 갈 수 있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나 그 정신은 여전히 요단강 이전의 세계에서 뛰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죽음은 십자가의 경험입니다. 이 십자가의 경험이 계속될 때 그것이 기도로 이어지고 사랑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 죽음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생명의 가치를 모릅니다. 다만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육체가 숨쉬고 살아가는 것에만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살다가 멸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다르기를 바랍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의 세상이 아니라 건넌 후의 세상에서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인식하고 자기 죽음을 경험한 자로서 오직 그리스도로 더불어 살기를 소원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더불어 사는 인생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하지만 육으로 끝날 인생이 아니라 영으로서 영원한 생명으로 남아있어야 할 인생이기에 그리스도로 더불어 사는 인생을 결코 포기할 수 없음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저주와 아멘 (신 27:9-26)


사람에게는 누구나 경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 '자기 경험'이라는 틀 안에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경험'이라는 이 틀 안에서 옳고 그름의 판단이 내려지고, 지식의 전달이 이루어지고, 자녀를 교육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진리로 여기며 그 경험을 타인에게 전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자식에게 '학교 다닐 때 공부 안하면 커서 후회한다'는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부모의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부모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안한 것이 어른이 되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후회로 다가오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 경험을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가르칠 때도 자기 경험의 틀 안에서 가르치게 됩니다. 수십년 주부로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해서 며느리를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발생하는 것이 뭔가 하면, 상대방을 자기 경험의 틀 안에 끌어들이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보니 이렇더라'는 것을 타인에게 가르침으로 인해서 타인에게 자기 경험을 전달해주고, 자기 경험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합니다. 경험이란 특정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각자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 경험이라는 틀 안에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럴 경우 경험과 경험이 부딪힐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은 끊임없이 경험과 경험의 부딪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대차이라는 것도 결국은 경험과 경험의 부딪힘입니다. 부모의 세대가 경험한 것이 다르고, 자식의 세대가 경험한 것이 다릅니다. 여기서 '누구의 경험이 옳으냐?'라는 것은 둘째 문제입니다. 문제는 누구라도 자기 경험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갈등이라는 것이 발생하게 됩니다.

 

 

 

 

앞의 예를 다시 말씀드린다면,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후회한다'는 것은 부모의 경험이지 자식의 경험이 아닙니다. 지금 자식에게 있어서의 경험은 오락실 가고, 영화 구경하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결국 부모와 자식의 갈등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 경험을 고집하고 살아갑니다. 자기 경험이 옳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수십년 세상을 살아오면서 자기도 모른 사이에 자기 경험이라는 굳건한 성을 하나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을 무너뜨리고 부정하는 세력이 다가오면 온 힘을 다해서 막아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한 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 경험에서 굳어진 자기 생각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축적된 경험이 원칙이 되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타인에게 요구하는 과정에서 부딪힘이 발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타인에게도 자기만의 원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경험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자에게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옳은 경험이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의 예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안하면 나중에 커서 후회한다'는 말을 틀렸다고 할 부모의 세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겪은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회사에 취직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학교 다닐 때 좀 더 열심히 공부할 걸'이라는 후회를 안해본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후회는 누구나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후회한들 무엇합니까? 지나간 세월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후회란 현재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에 대한 불만족은 결국 불평과 짜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불평과 짜증은 불행을 낳을 뿐입니다. 때문에 '열심히 공부할 걸'이라는 후회는 결국 잘못된 경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잘못된 경험을 옳은 것으로 생각하고 자식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며칠전 신문에 전면 광고가 하나 실렸습니다. 내용은 '땡큐'라는 서비스에 가입을 하면 시내전화를 무료로 쓸 수 있고, 시외전화는 하반기부터 무료로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조건은 15초 동안 회사에서 제공하는 광고를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5초의 광고만 들으면 시내, 시외 전화를 얼마든지 무료로 쓸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광고가 쉽게 납득이 가십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한 것은 '공짜는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뭐든지 '그 대가가 있다'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쌓아온 경험입니다. 그럴 때 누군가가 '공짜로 준다'는 자기 경험을 얘기하면 의심을 하게 되고 부정을 하게 됩니다. 저 역시 그 광고를 보지 않았다면 시내, 시외 전화를 무료로 쓸 수 있다는 것에 의심을 했을 것입니다. 물론 광고 자체까지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공짜는 없다'는 자기 경험이 그 광고를 사람을 속이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회사에서는 광고를 듣게 하는 것으로 이미 그 대가를 받은 것입니다. 전화를 걸때마다 듣는 광고가 자연스럽게 머리에 남아있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나중에 물건을 살 때 자연스럽게 그 광고의 제품을 선택하게 된다는 판매전략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공짜는 없다'는 경험이 맞을 수도 있고, 또 '공짜는 있다'는 경험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15초의 광고를 듣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고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전화비를 버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공짜로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경험이 옳은 것입니까? 공짜는 없다가 옳은 것입니까 아니면 공짜는 있다가 옳은 것입니까? 그 누구도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각기 경험에서 나온 생각을 옳은 것으로 우기며 그 속에서 경험과 경험의 부딪힘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이란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온 죄악의 현장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여러분이 경험한 모든 것은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에서 얻어진 것입니다. 오직 자기 유익을 위한 삶에서 얻어진 경험을 과연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삶의 지혜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입니까? 결국 우리는 '자기 경험'을 옳은 것으로 내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이라는 것은 모두가 자기 사랑이라는 이기적 본성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교회에서 자신의 경험을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기 경험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 교회로 모이는 것인데,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사랑과 자기 이기심에서 쌓은 경험을 교회에서 내세우고 주장하고 옳은 것으로 말하면서 자신의 경험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경험이라는 것은 모두가 자기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이기적 본성에서 나온 경험이기 때문에 자기 경험을 옳은 것으로 주장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경험은 모두가 죄악의 산물이요 더러운 것이고 쓰레기 같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경험 중에 '남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자'는 경험이 있었습니까? 세상은 '내가 유익을 얻었다'는 것만을 옳은 경험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얻어진 경험을 교회로 끌어들이면 결국 교회가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참된 경험은 오직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있었던 경험, 바로 그 경험들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죽지 않고 하늘로 간 에녹의 경험, 이삭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의 경험, 자기 뜻과는 전혀 다르게 야곱에게 축복을 하고 만 이삭의 경험, 하나님과 싸우다가 환도뼈가 부러진 야곱의 경험,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의 경험, 하나님께 불려 나와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모세의 경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이고 나단 선지자로부터 죄에 대한 책망을 받고 침상을 적시도록 회개의 눈물을 흘린 다윗의 경험, 오직 하나님이 말씀만 전하다가 죽음을 당한 선지자들의 경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고 자기들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세상을 살아가다가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멸망을 당한 이스라엘의 경험, 바로 이러한 경험들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경험들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성경에 등장한 인물들의 경험은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경험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이 경험들만이 우리들에게 무엇이 진리이고 비진리인가를 가르쳐주는 참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도 바로 이 경험들이 우리들의 경험이 되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들의 세상 경험들이 더러운 것으로 인식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들에게 필연코 있어야 할 경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난처한 것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주에 대해서 아멘 하라는 것은 인간의 경험에 전혀 어긋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은 자신에게 유익 되는 것에 대해서 '아멘'하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중심으로 해서 복이 되어지는 것만 옳은 경험으로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경험과 정반대의 경험이 본문에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선포에 대해서 '아멘'하라고 말씀합니다. '저주의 선포에 대한 아멘' 이것이 약속의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에게 있어야 할 새로운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후의 세계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기 이전의 세계에 대해서는 미련을 두면 안됩니다. 애굽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약속의 땅에서 고집을 하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저주에 대한 아멘 입니다.

 

 

 

 

요즘 교회를 보면 아멘이라는 말을 너무 남발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읽고 나면 아멘하고, 목사가 설교할 때도 아멘하고, 기도하고 나서도 아멘을 하는 사실 아멘의 의미를 너무나 모르고 있는 현실입니다. 심지어는 목사가 설교하면서 우스개 소리를 해도 아멘을 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아멘의 뜻을 자기 기도에 대한 응답의 확신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고 나서 아멘 하는 것을 '내가 지금 한 이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는 의미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아멘이란 '내가 기도한대로 이루어질 줄로 믿는다'는 기대감이나 응답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어집니다'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저주가 부어진다는 것은 사실입니다'라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기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험한 자가 '진실로 그렇다'는 아멘을 할 수 있는 것이지 경험을 해보지도 않은 자가 '아멘'한다는 것은 억지이고 가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억지와 가식의 아멘이 교회를 가득 메우고 있는 현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주에 대한 아멘은 실제로 저주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가령 16절에서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모를 경흘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에 대해서 아멘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이 옳지만 세상 살다보면 소홀히 할 수도 있는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반발을 할 것입니다. 이 반발 역시 자기가 중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바빠서 부모에게 소홀히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어쨌든 내가 살아야 할 것이 아니냐?'는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부모는 하나님의 계시 전달자입니다. 따라서 부모를 경홀히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를 경홀히 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 즉 말씀을 경홀히 한 결과는 저주라는 것을 그들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아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온 후의 삶은 원망과 불평으로 이어지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한 예로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모세에 대한 고라의 반역은 곧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고라 자손과 고라에게 동조한 자들의 멸망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원망하자 염병이 들어서 죽은 자가 14,700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것 외에도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말씀에 복종하지 않을 때는 곧 저주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로서 '이러이러한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할 때 '아멘'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요단강 이전의 세계와 요단강을 건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단강 이전의 세계는 각자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는 세계입니다. 남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진리가 무엇이겠습니까?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하면 성공한다' '남 의지하지 말고 자기 인생은 자기 스스로 책임져라'는 등의 말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단강 이전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경험인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면 저주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자기 하기 나름이다'는 경험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저주를 받는다는 말은 신의 억지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단강 이후의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그곳에서는 '자기 하기 나름이다'는 인간 경험이 통용되지 않습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진다'는 경험들이 모두가 더러운 것으로 치부되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새로운 법칙만이 통용되는 세계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경험했기에 '이렇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아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에서 벗어나면 저주라는 것을 분명히 경험했고 알고 있기 때문에 '진실로 그렇습니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저주에 대한 아멘은 '앞으로 제가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에서 벗어난 채 살아가면 나에게 저주가 임할 것을 진실로 믿습니다.'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 은혜의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의 아멘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렇게 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할 때 12가지를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을 12가지만 잘 지키면 된다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12가지는 모두가 앞에서 말씀했던 것들에 대한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모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은혜의 땅에서는 오직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은혜의 땅은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는 것을 철저하게 삶의 중심으로 하고 살아가는 땅입니다. 그리고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고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약자를 억누르지 않는 것을 통해서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고 있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지 않을 때 하나님의 저주가 나에게 임한다는 것을 아는 땅입니다. 이것이 요단강 이전의 세계와 다른 점입니다.

 

 

 

 

요단강 이전이나 이후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할 때 저주가 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법칙입니다. 그러나 요단강을 건넌 후의 약속의 땅의 다른 점은 저주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무시할 때 저주가 임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다른점입니다. 하지만 요단강 이전의 세계, 즉 자기 죽음이라는 경험이 없는 세계는 오직 자기 하기 나름이기 때문에 은혜를 무시할 수밖에 없고,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모르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땅은 하나님의 저주를 아는 땅입니다. 은혜의 땅이라고 해서 은혜만 있고 저주가 없는 땅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은혜의 땅은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이며 만약 이것을 무시할 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다'는 것을 아는 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 선포에 대해서 '아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멘은 '그렇게 되어질 것을 믿는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진실로 그렇습니다'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느 세계에서 살아가십니까? 자기 중심과 자기 사랑에서 체험된 자기 경험을 내세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저주를 아는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저주를 아는 세계를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저주를 받는 것임을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주를 아는 자가 과연 하나님과 이웃보다는 자기 사랑에 눈이 멀어 살아가려고 하겠습니까? 저주를 아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질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자는 어떤 모습이냐?'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자기 할 일하며 그것을 진리라고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저주를 아는 신자는 하나님이 저주 선포에 아멘을 하면서 하나님만 사랑하고자 하고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약자를 무시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있는 교회에서 배울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의 경험인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아는 자로서 결국 자신이 저주받을 자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것은 '내가 저주받아야 할 자였습니다'입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은혜의 땅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 안에서 이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주받아야 할 자가 살아있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복있는 자입니다. 오직 이 경험만이 진리입니다. 이 경험으로 살아가는 자는 이미 자신을 저주의 자리에 세웠기 때문에, 쓸데없이 세상 것으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자기 것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많이 가지기 위해서 애쓰지 않습니다. 무시 받았다고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저 있는 대로, 하나님이 주신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저주받을 자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은혜입니다'라는 감사와 함께 새로운 세계에서 은혜의 경험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복 (신 28:1-14)


신자가 '성경을 안다'라고 할 때 앎의 의미는 성경에 대한 지식의 차원에서의 앎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다는 의미의 앎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스스로 계시하신 책입니다. 때문에 성경을 대하는 신자의 바른 시각은 자신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안다' '성경을 이해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이해가 되어진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성경을 대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성경을 안다. 나는 성경을 이해한다'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교회를 다니고 설교를 듣고 성경에 대해서 배워가면서, 창세기가 어떤 책이고 출애굽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며 아브라함의 아들이 누구이고 야곱의 12아들의 이름과 예수님 제자들의 이름을 줄줄 암기하고 성경에 기록된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성경을 안다 이해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어지기 전에는 결코 앎은 앎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앎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앎에 대해서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여러분 각자 나름대로의 앎이 형성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학문이 될 수도 있고, 과학일 수도 있으며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이나 지혜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앎은 분명히 배움과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진 앎일 것입니다. 배움과 경험이 없이는 앎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앎의 범위는 자기 삶의 영역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즉 자신이 배우고 경험한 것만큼만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한 것은 나의 배움과 경험을 뛰어 넘은 또 다른 배움과 경험, 즉 앎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누구도 자신의 앎을 참된 것이고 진실된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들은 각자 자신의 삶의 영역 안에서의 배움과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진 자기의 앎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판단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오해라는 것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각각 다른 앎의 차이에서 다른 이해와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견해차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시각의 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자신의 말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나의 말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앎의 차이 때문입니다. 앎의 차이, 즉 견해와 시각의 차이가 있을 때는 비록 상대방이 내 말을 이해했다고 해도 결국 말을 한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이해를 하게 됩니다. 말을 한 사람은 자기의 견해와 시각에서 말을 했고, 듣는 자 역시 자기의 시각과 견해를 가지고 들었기 때문에 말을 한 사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이해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쉽게 각 지방에서 쓰이는 용어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전에 코미디에서 우스개 소리로도 많이 하던 말인데, 남자가 여자에게 '만나자'는 말을 할 때 보통 지방에서는 거절의 말로서 '싫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경상도 사투리에는 싫다라는 의미로서 '언제예' 또는 '어데예'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제가 경상도 사람이 아니어서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 틀리다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만약 경상도 남자가 아닌 다른 지방의 남자가 이 말을 듣는다면 언제 만나자는 것이냐, 또는 어디에서 만나자는 것이냐라는 말로도 들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러한 예를 들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각기 다른 지방이라는 환경에서 형성된 시각과 견해에서 발생한 오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오해를 풀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시각과 견해를 가지고 상대방의 말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한 당사자의 의도와 마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들의 시각과 견해에 이러한 오류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무시한 채 오로지 자기 시각과 자기 견해로 형성된 자기 앎을 기준으로 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삶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오해와 착오를 일으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오류와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의 앎을 가지고 성경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앎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이 성경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시각과 견해를 가지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지, 말씀을 듣는 우리들의 시각과 견해에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과 견해는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하늘의 시각이며 하늘의 견해입니다. 하늘의 시각과 하늘의 견해가 성경으로 우리에게 계시되어진 것인데, 그것을 하늘이 아닌 땅의 시각과 견해를 가지고 대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한다면 과연 바른 해석과 이해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경험과 인간의 견해를 가지고 멋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내지 말라는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경험한 그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땅이라는 환경 속에서 형성된 우리들의 시각과 견해에 맞는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땅의 상식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한다면 분명 오류를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 역시 인간들이 많은 오류를 만들어 내고 있는 말씀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배울 수 있는 복에 대한 개념은 무엇입니까? 즉 세상은 복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분명 땅에서 잘되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높아지고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된 상태를 복으로 이해합니다. 즉 인간의 탐욕이 충족되어진 상태를 복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복을 자기 자신의 팽창과 번성으로 이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서 배우고 경험한 앎을 가지고 복을 대했을 때 나오는 답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것을 정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세상 경험과 앎을 통해서 나오는 복에 대한 개념을 벗어버리고 전혀 새로운 하늘의 개념에서 말하고 있는 복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을 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복을 자기 팽창과 자기 번성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에 대한 세상의 공통적인 시각이며 이해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은 전혀 다른 의미의 복을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앎을 가지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복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1,2절을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까? 거의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는 조건으로 말씀에 대한 순종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즉 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리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은 인간이 잘만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최초로 복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창세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창 2:3절에 보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라 일곱째 날을 복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하게 하신 것도 일곱 째 날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곱 째 날을 복주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복과 거룩과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일곱 째 날이 복된 것은 말씀의 완성을 담고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안식 역시 말씀의 완성 안에서만 안식이 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말씀이 세상에 그대로 유지되는 것에 있고, 그 상태가 곧 거룩이며 하나님이 안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 째 날을 복주셨다는 것도 특정한 한 날에 대한 복이 아니라 말씀이 완성된 상태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중점은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이 복을 함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말씀대로 존재할 때 말씀이 함유하고 있는 복이 세상에 확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창 1:2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 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는 말씀도 인간에게 세상에서 팽창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존재하는 인간으로서 세상에 팽창되고 번성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확산되는 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한마디로 말해서 복의 상태란 세상에서 인간이 팽창하고 번성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팽창과 번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말씀에 복을 주셨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말씀을 순종하면 네게 복이 임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복의 상태가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말씀에 대한 순종, 그것이 바로 복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에 의해서 무너진 말씀의 세계를 다시금 회복하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이며 열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복의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신나는 말씀입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 몸의 소생과 토지 소산과 짐승새끼 우양의 새끼도 복을 받고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이 나를 치는 모든 대적을 다 물리치신다고 하고 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고 꾸어줄 지라도 꾸지 아니하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신나는 복의 말씀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어느 한구석에서도 부족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도록 복으로 가득가득 채워주신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가 바라고 원하는 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이 자신에게 와주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에 대한 세상의 시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인된 우리들의 탐욕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관심은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이 세상에 확산되고 팽창하고 번성하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인간이 이뻐서가 아니라 말씀이 확산되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을 잘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씀에 순종한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과연 세상에 말씀에 순종한 인간이 존재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니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세상 인간은 아무도 복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목사가 자기 집을 심방해서 복을 빌어주면 그것이 복이 될 줄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복이란 누가 빌어준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인간에게만 주어질 뿐입니다. 헌금한다고 복이 오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봉사했다고 해서 복이 오는 것도 아닙니다.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이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헌금과 봉사 예배하는 이런 것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면, 이런 일에 열심이었던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을 당한 것입니까? 때문에 우리 중에 아무도 말씀에 순종한자가 없다면,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복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오늘 본문을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누가 말씀에 순종했는가?'입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말씀이 완성된 그 자리에 복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완성된 그 자리가 바로 거룩한 자리이며 하나님의 안식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완성된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곳은 바로 예수님 자체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을 완성하셨습니다. 즉 인간에 의해서 무너진 말씀의 세계가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에 순종하심으로서 회복되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일곱째 날에 주어진 복과 거룩과 안식이 모두 예수님 안으로 흡수가 되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복이며 거룩이고 안식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것이고 복과 거룩 역시 그리스도안에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기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복이 되는 것을 예수님이 아닌 전혀 다른 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거룩도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고 안식일 역시 예수님이 아닌 한 날을 통해서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팽개쳐 버린 채 온통 자기 생각과 자기 시각을 가지고 성경을 난도질 해버린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현대 교인들은 복이라고 하는 덫에 걸려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내가 덫에 걸렸다는 것을 알기만 해도 좋겠는데, 아예 덫에 걸려 있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캄캄합니다. 덫이라는 것은 짐승을 잡기 위해서 놓는 것입니다. 덫에 짐승이 걸려들게 하기 위해서는 짐승이 덫에 걸릴만한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매력은 먹을 것입니다.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짐승은 덫은 보지 않고 먹을 것만 봅니다. 그리고 덫에 걸렸으면서도 덫에 걸려있던 먹을 것을 먹느라고 자신이 덫에 걸린 것도 모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복이라고 하는 덫에 걸린 현대 교인들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번성하고 팽창되는 것만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 복은 덫이며 복이 제공하는 세상 것은 훌륭한 미끼입니다. 시 69:22에 보면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밥상과 평안이란 모두가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의 밥상과 평안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올무가 되게 하고 덫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 앞에 올무, 덫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으로 나타나고 우리들이 가장 원하는 것으로 우리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밥상과 평안이라는 올무와 덫에 걸린 채, 그것에 복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그것만 주면 원이 없다고 외쳐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늘의 복이 복으로 보일 리가 없습니다. 하늘의 복은 그저 육신의 복에 덤으로 갖다 붙여진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혼이 잘된다는 말보다는 영육간에 잘된다는 말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바라는 것은 육신의 잘됨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간단하게 말해서, 이스라엘이 말씀대로 순종하면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이스라엘은 말씀에 대해 실패하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이 아니라 14절부터 말하고 있는 대로 저주에 놓인 상태가 되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말씀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말씀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만 복이 있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하나님이 세우신 예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은 저주 아래 놓인 우리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된 것을 말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국 복은 성령이 임한 자로서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새로운 나라를 알게 된 신자들은 더 이상 기존의 자기 경험과 자기 배움으로 채워진 앎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경험이나 배움을 통해서 이루어진 자기 시각은 거짓된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새롭게 경험한 자기 죽음, 자기 부인의 시각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성경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가게 된 것을 복으로 여긴다면 세상에 대한 욕심은 자연히 적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욕심을 복으로 알고 욕심을 챙기기 위해서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받게 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을 자랑하고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았다는 식이고 남이 받은 것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불평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복이라는 덫에 걸려 살아가는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실태입니다.

 

 

 

 

복의 세계는 말씀의 세계입니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말씀이 어떤 유익이 되었느냐를 생각하지 말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내가 돈을 얼마 벌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세계가 내 안에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가게 된 것이 참된 복임을 아신다면 더 이상 세상의 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마시고 다만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으로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복입니다.

 

 

 

 

 

저주 (신 28:15-19)


복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강렬합니다. 복은 곧 삶의 질적인 향상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삶의 질의 향상을 위해서 노력하고 땀흘리는 인간으로서는 '복'이라고 하는 단어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란 힘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은 곧 행위를 연상하게 합니다. 복이 되는 행위와 복이 되지 못하는 행위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복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스스로 삼갈 것은 삼가고 행할 것은 행하려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종교인이든 종교인이 아니든 관계없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살아가는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의 근거는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이점에 대해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복의 근거가 될만한 잘난 행위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에 대해서 포기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보고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고 일곱째 날을 복 주실 때 인간이 복을 위해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를 드렸습니까? 십일조를 하고 봉사를 했습니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이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애당초부터 하나님은 복의 근거로서 인간의 행위를 기준 삼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을 받는 원칙으로 인간의 행위를 기준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의 원칙을 철저히 무시하고 인간이 세운 원칙을 고집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 고집이 오히려 복을 밀쳐내고 있는 것임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말씀에는 관심 없이 복에만 관심을 두고 성경을 대하는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보시고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설사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인간, 즉 죄짓기 전의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을 보시고 복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존재에 큰 의미를 두지 마십시오. 인간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되어진 천지창조 안의 하나의 구성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화가가 풍경화를 그릴 때 미리 그 머리 속에 그리고자 하는 풍경이 완성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가령 산은 어떤 모양으로 그리고, 산밑에는 시냇물을 그리고, 시냇물 옆에는 자그마한 집을 그리고, 그리고 그 옆에는 장작을 패고 있는 농부를 그리겠다는 구도를 미리 완성하고 하나하나를 그려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 화가의 그림에 그려지는 모든 것은 화가가 그리고자 하는 그림의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화가는 자기 머리 속에 구상된 그림을 위해서 하나하나를 자기 화폭에 담고 있을 뿐이지, 그림 속에 그려진 한 농부를 위해서 산을 그리고 시냇물을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림을 완성하고 난 화가의 만족과 기쁨은 무엇을 향한 것입니까? 그림 전체입니까? 아니면 장작 패는 농부나 산입니까? 당연히 화가는 완성되어진 그림 전체를 바라보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림 전체가 자신의 구도대로 그려졌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지 그림 속의 구성물 하나하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이해하신다면 천지창조에서 인간의 존재라는 것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위대하거나 귀한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애초에 구상한 대로 완성되어진 그림을 보고 기뻐하는 것 같이 하나님은 계획한대로 완성되어진 창조세계를 바라보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의 일을 바라보고 기뻐하시는 것이지 절대로 창조세계의 구성물에 지나지 않은 인간의 행동을 바라보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은 구성물인 인간을 향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완성된 그 자체를 향해서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이란 말씀이 완성된 날입니다. 일곱 째 날을 복주신 것도 일곱째라고 하는 한 날이 복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일곱 째는 하나님이 일하신 말씀의 완성을 바라보고 안식하시고 기뻐하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날을 바라보고 복을 주시는 것도 아니고 인간을 바라보고 복을 주시는 것도 아니고 오직 말씀을 바라보고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오늘날 우리의 관심 역시 자연히 날이 아니고 인간도 아니라 말씀에 두어야 하는 것이 극히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삼가 듣고 지켜 행하면 복을 주시겠다는 것은, 말씀을 잘 지켰으니까 그 상으로 복을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인간을 통해서 말씀을 보호하고 지탱하고 유지하는 그 책임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는 인간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도 말씀을 위해서 복이지 인간을 위한 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복, 즉 사람의 질적인 향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을 삶의 질적 향상으로 기대하는 것은 결국 관심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데반이 복받은 사람입니까? 사도 바울이 복받은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과연 복받은 삶을 살았습니까? 그 어느 누구도 우리들이 기대하는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은 고난과 죽음으로 연결된 삶이었습니다. 그것도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 때문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된다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사는 자에게 복이 주어진다면,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사는 자는 세상에서 복을 받고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소위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았다고 하는 모든 자들의 삶의 결과는 고난과 죽음이었다는 것이 오늘 우리들을 난감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분명히 우리들의 상식으로 복과 고난은 함께 자리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고난은 복의 반대이며 말씀을 지키지 않은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징벌로 여기는 것이 우리들의 상식입니다. 이런 상식세계에서 누군가가 '고난이 곧 복이다'라고 외친다면 분명 그는 미친 자가 아니면 전혀 다른 상식세계에서 온 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외침이었습니다. 마 5:10,11절을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핍박을 받고 욕을 받는 것을 복이라고 말씀하는 분, 그분이 바로 말씀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신자란 말씀을 간직하고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수모와 핍박을 받고 거쳐야 할 사람입니다. 오직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복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지키고 보호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는 사람은 저주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없는 곳에는 저주만이 주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저주를 하실 때에도 행위를 보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보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은 저주하실 때도 오직 말씀을 보시고 저주하십니다. 즉 말씀이 없는 인간을 저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처럼,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28장에서 저주에 대한 말씀은 절대로 가볍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복에 대한 말씀보다도 무거운 비중을 차지한 채 기록되어 있습니다. 15-68절까지의 저주에 대한 말씀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저주라고 하는 커다란 그물이 우리에게 덮쳐온 느낌을 받습니다.

 

 

 

 

흔히들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 또는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좋으심, 인자하심, 자비하심이라는 개념 안에는 저주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나에게 좋은 일이 있게 하신다는 개념에서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 저주하시는 하나님이란 개념 안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어떤 인간이 저주를 좋아하겠습니까? 저주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신 28장에서의 저주는 무섭다 못해 소름이 끼치게 하는 저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저주 안에서 좋으신 하나님이란 말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신28장에서 1-14절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15-68절까지의 말씀만 두고 생각할 때 과연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이 어울린다고 생각합니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저주를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즉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가 임한다고 했으니까 말씀에 순종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말하면서 어떤 점에서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은 온화하고 따뜻한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온화하고 따뜻한 분이 아닙니다. 타협이 통하지 않는 융통성이 없는 분이고 오직 자기 것만 소중히 여기고 자기만 아시는 분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무시무시한 저주를 내리시는 분을 과연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에게 잘해주신다는 의미에서 인자하시고 자비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 적인 시각과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과 저주에 대해서도 세상 적인 시각과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복을 말하면서도 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저주를 말하면서도 저주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야단들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나서는 그 자체가 말씀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사람들은 말씀을 십일조나 바치고 주일 지키고 구제하고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것 정도로 여깁니다. 그렇게만 하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되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보다 더했던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말씀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저주는 피하고 복은 받아보겠다고 '순종'을 외치는 것이 아닙니까?

 

 

 

 

언젠가 '말씀은 인간에 의해서 정복되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인간편에서 말씀을 순종하겠다는 것은 말씀을 정복해보겠다는 발상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못해서 저주를 받아야 한다면 내가 말씀을 순종을 해 보임으로서 저주도 자기 자신에게는 무용지물이라는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교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껏 말씀을 지켜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지켜온 말씀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지키고 무엇에 순종했습니까?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러분 속에 먼저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속에 말씀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말씀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십계명입니까? 산상수훈입니까? 과연 무엇을 가지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안타깝게도 현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합니다. 다만 일요일 되면 교회에 나와주고 헌금해주고 가끔 남 도와주고 교회 일에 참여해주는 것으로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과연 성경 66권의 그 많은 내용들이 겨우 그런 것에 순종할 것을 말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까? 예수님을 모르면서 예수를 말하고 하나님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말하고 말씀을 모르면서 말씀을 말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말씀을 안다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이 복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저주의 현장에서 나타납니다. 저주할 자리에서 저주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로우심입니다. 인간의 문제점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인간이 저주를 피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이 복을 받겠다고 설치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율법으로 다가옵니다. 율법이란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율법에 순종한 자가 없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따라서 말씀은 우리를 죽음이라는 자리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 나는 죽어야 할 자이고 저주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는 고백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보면 지난 주일과 똑같이 말씀이 다만 저주로 교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고 들에서도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바뀌어져 있습니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 네 몸의 소생과 토지의 소산과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는다고 하고,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 말씀도 역시 저주를 받는 자리가 따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가 곧 저주의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저주의 말씀을 대하면서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 당해야 할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말씀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해서 눈이 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직한 실체는 저주의 자리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15-68절에서 말하는 저주를 하나하나 읽어보십시오. 그 모든 것이 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하나 감사와 자비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인이 병이 들어 고생을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벌을 받았다고 수군댑니다. 그러나 병든 당사자는 자기의 병을 통해서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돈도 명예도 다 부질 없는 것이고 오직 영원한 하나님 나라만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병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병든 것은 과연 저주입니까 아니면 복입니까? 분명히 복입니다. 질병 자체가 복이라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통해서 진정한 복에 대해서 눈이 뜨인 것이 복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고 자비하심입니다.

 

 

 

 

저주라는 것은 우리를 고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는다고 심술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발견할 수 있는 현장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서 저주를 선포하는 에발 산에 율법을 기록한 돌을 세우고 저주를 선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저주를 이기고 등장한 백성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저주를 이기는 방법이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저주의 자리에 밀어 넣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저주를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의 피만이 저주를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는 복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저주의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저주로 밀어 넣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알 수 없고 그리스도를 알 수 없고 저주를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저주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만 바라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래 저주 아래 있어야 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라고 다시금 이스라엘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체를 깨달은 사람이 인간이 죄에 의해서 죽어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하나님이 보내신 어린양, 즉 메시아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갈 3:1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누구입니까? 교회 나오는 사람입니까? 목사 장로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자신이 저주받을 자임을 알고 하나님의 은총만 바라보는 자입니다. 내가 저주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아는 자만이 나 대신 저주 아래 있게 된 분을 바라보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주의 자리에서만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복이 아닌 다른 복을 기대하고 살아가는 자리에는 저주받으신 예수님 대신에 세상 복을 나눠주는 예수만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저주를 통해서 우리의 죄인 됨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 대신 저주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럴 때 참된 복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시고 피흘리신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복을 아는 자는 자연히 세상보다는 예수님이 좋을 뿐입니다. 이러한 신자들이 저주가 나오면 '아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주 위에 서서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비를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풍족 (신 28:47-57)


믿음은 곧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따라서 삶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믿음을 담아서 보여주는 그릇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삶이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말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제가 입만 열었다 하면 강조하는 '기도하고 성경보고 예배드리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신자가 기도하는 것은 삶이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성경보고 예배드리는 것도 역시 삶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뭔가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생각하기를 기도하고 성경보고 예배드리며 살아가는 것을 믿음의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삶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하루 생활 속에서 '이것이 삶입니다' 라고 특별히 내세울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특별히 ''이라는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루 24시간 모두가 삶입니다. 심지어 저녁에 잠자는 것까지 삶이며, 화장실 가는 것까지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루 생활 속에 특별히 믿음의 삶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여기십니까? 숨쉬고 잠자고 밥먹고 화장실 가고 직장에 다니는 것은 그냥 삶이고, 그속에서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 등은 믿음의 삶으로 구분되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밥먹을 때 기도 안하고 먹으면 그냥 삶이고 기도하고 먹으면 믿음의 삶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삶속에 그냥 살아가는 삶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일상적인 생활이라고 여기는 밥먹고 잠자고 직장에서 일하는 것들은 믿음과는 별개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속에서 성경묵상하고 기도하는 것들을 가지고 믿음생활이라고 따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담고 살아가는 삶은 주님과의 동행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 보면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고, 예배를 잘 드리고, 부지런히 성경묵상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유다서를 보면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예언하면서 살았습니다. 즉 에녹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담겨있었던 것입니다. 에녹은 무엇을 해도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동행입니다. 노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아의 삶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삶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심판을 염두에 둔 삶이었습니다. 먹고 마시면서도 세상은 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이 목적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동행입니다. 즉 자신의 목적이 포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삶에 심판이 담겨 있는 것, 이것이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특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삶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연관시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요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와달라는 기별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바로 가시지 않고 이틀을 더 유하시면서 늑장을 부립니다. 결국 나사로가 죽고 난 뒤 도착한 예수님을 보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한 말은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을 오기 전까지는 주님이 없는 인생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찾아와서 고쳐주는 분으로 바라봤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이라는 말은 나사로가 병들고 죽어갈 때 그들과 주님은 별개의 관계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얼마나 근심이 되고 걱정이 되고 조바심이 일어났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마르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 25,26)라는 말씀에 대해서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라고 대답합니다. 과연 이 대답을 삶이 있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기 전에는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은 것으로 알았습니다. 즉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던 그 자리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아직 오시지 않은, 안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들의 삶이 아니면서도 얼마든지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만약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주님이 자신들의 삶이었다면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 가는 그 순간에도 주님은 그 자리에 계시는 분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가 죽는 것도 주님의 뜻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담긴 삶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이 밥먹고 직장에서 일하는 모든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심지어 술먹는 자리에 참석했다면 그 자리에까지도 주님이 계십니다. 이렇게 주님이 내 삶의 전부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을 믿음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아플 때에도 주님이 함께 하시고 있음을 알 것이고, 하는 일이 안되고 꼬일 때에도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안할 때든 괴로울 때든 기쁠 때든 슬픈 때든 항상 변함없이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곧 삶이 있는 믿음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믿음의 삶을 주님이 나의 삶 전체가 되어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종교 행위나 착한 행위 등으로 생각을 해 버리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을 일상적인 삶과 믿음의 삶으로 구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행동, 즉 믿음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착한 행동이나 종교적인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신앙에 대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7절을 보면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풍족해지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생각 같으면 풍족하면 오히려 더 하나님을 잘 섬기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풍족해지니까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이 이해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로 심판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는 마치 여호와의 동산처럼 아름답고 애굽처럼 모든 것이 풍족한 땅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풍족하면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을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풍족하고 모든 일이 순탄하게 잘 되어갈 때가 가장 위험한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풍족하고 하는 일이 순탄하게 잘 되어질 때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만큼은 하나님의 도움이 별 필요가 없다는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은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리기를 삶이 없이도 이런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다든지 예수님을 마음에 두고 산다든지 하는 판단을 섣불리 내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풍족함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그 마음이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나보다 부족하게 살고, 고통과 괴로움에 파묻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내가 잘한게 뭐가 있다고 나같은 것을 이렇게 풍족하게 살아가게 하십니까?'라는 감사가 진심으로 그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면 분명 그 사람은 하루하루가 은혜로 가득 채워진 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래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풍족함과 순탄함 가운데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풍족과 순탄함에 대해서 당연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식이 점차 희미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풍족에서 느끼던 감사도 역시 희미해집니다. 감사가 희미해지고, 은혜에 대한 의식도 희미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은 신앙생활의 권태입니다. 삶에서 감사와 은혜를 느끼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교회를 통해서 채우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교회 다니는 것을 취미생활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취미생활은 내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바라볼 때 내 신앙생활의 기쁨을 채워주고, 교회 다니는 즐거움을 채워주는 곳으로 여겨버린다면 그것은 교회를 취미생활의 장소로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을 내 삶으로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취미생활은 풍족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풍족하기 때문에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를 가지고 집안도 꾸미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교회도 찾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오늘 돈 만원이 없으면 죽는다고 할 때 그런 여유가 나오겠습니까? 자식이 순탄하게 커주고 말썽을 부리지 않을 때 사람은 자식에 대한 여유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으로 인해서 고통을 많이 받은 사람은 자식문제로 하나님께 나올 때는 참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럴 때 이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교회가 사랑이 있다 없다에 관심 둘 여유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부르면서 내 자식이 하나님을 잘 믿고 착하게 해달라는 부르짖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지금의 교회 생활이 배부른 여유에서 나오는 취미생활이 아닌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의 교회 생활을 일부러 부정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과연 여러분이 아무 것도 없고 진짜 먹고살기 힘든 그런 지경에 처했는데도 '하나님'을 부르면서 교회를 찾아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을 묻고 싶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48절에 보면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말씀들을 보면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은 정도를 자기가 낳은 자녀까지 먹는 것으로 말합니다. 평소 아이들을 미워하고 성격이 난폭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54절 56절을 보면 유순하고 연약한 남자,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라고 할지라도 그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현재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고 상상해 보십시다. 과연 지금의 신앙생활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신28장에 나오는 저주의 경우를 모두 내 한몸에 집중시킬 때 과연 우리들이 질병과 실패와 궁핍한 삶속에서 교회를 바라보고 사랑이 있다 없다, 교회가 이렇다 저렇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저주하신다는 그 내용들이 단 하나라도 나에게 떨어졌을 때 우리의 마음은 다른데 여유를 두지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부르면서 두손들고 나올 뿐입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풍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리거나, 간절함으로 나온다거나, 하나님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긴박함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유를 가지고 교회를 쳐다보니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교회의 모습이 보여지게 되고 거기에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여유를 가지고 교인들을 바라보니까 교인들에게 대해서 이런 저런 평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풍족함으로 인해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여호와를 섬기지 못하게 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래의 인간은 오직 하나님만을 나의 기쁨과 나의 즐거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본래의 인간은 결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기쁨과 즐거움의 통로로 삼지 않습니다. 교회도 나에게 즐거움이 될 수 없고, 돈도 기쁨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교회나 돈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은 결국 일시적인 것이고, 그것들이 사라지면 내 기쁨과 즐거움도 함께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힘들고 어렵다 싶을 때 항상 마음속으로 되새기는 성경구절은 하박국 3:17-19절의 말씀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있어서 기쁨과 즐거움의 통로가 무엇인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 때문에 즐거워 할 수 있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이 기쁨과 즐거움은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할지라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면, 신앙생활의 기쁨과 즐거움을 나와 함께 교회로 모이는 다른 교인들의 행동 때문에 잃어버린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입니까? 내가 다니는 교회의 분위기나 다른 무엇인가 때문에 믿음의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그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그것은 지금까지 여호와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 한 것이 아니라 착하고 인품 좋고 사랑이 많은 성도 때문에 기뻐했고, 내 마음에 쏙 드는 교회의 분위기로 인해서 즐거워했다는 결론 밖에 되지 않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교인과 교회로 인해서 얻고 있었던 기쁨을 다시 교인과 교회로 인해서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풍족함과 여유 속에서 나 자신의 종교생활의 만족을 채우려고 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풍요로움이 여러분의 덫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물론 풍요로우면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풍요로 인해서 여러분이 먹고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마음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풍요로움이 우리들의 덫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 28장의 하나님의 저주를 담고 살아가면 됩니다. 지금의 풍요를 즐기기 전에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렸을 때를 상상하라는 것입니다. 건강도 사라지고, 직장도 사라지고, 돈도 다 없어지고, 집도 없어졌을 경우를 상상해 보면 됩니다. 과연 내가 그런 지경을 당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상상하면서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주어진 것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국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구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기쁘게 해주지 못하는 것은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기고 나에게서부터 잘라내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풍요는 작은데 담겨 있는 주님의 은혜를 무시하게 만듭니다. 직장 잘 다니고 꼬박꼬박 월급 받으면서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다보니까 하루 세끼 밥먹는 것 속에 담겨있는 주님의 은혜가 무시되어집니다. 그러나 나중에 직장을 그만두게 되고 하루 세끼 밥먹는 것도 힘들어질 때, 예전에 아무 걱정 없이 밥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 모두가 은혜였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다 저렇다 투덜대는 것도, 교회로 모일 수 있다는 그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역시 모이고 싶어도 모일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때, 예전에 마음놓고 교회로 모일 수 있었던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작은데 담겨 있는 은혜를 풍요로 인해서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점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고 자꾸 엉뚱한데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기도를 안해서 그렇다. 성경을 보지 않아서 그렇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잠들고 일어나는 그 잠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셨음을 잊지 않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대하는 밥상에도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함을 잊지 않고, 직장에서 일하는 속에서 함께 하셨고, 내가 길가다가 넘어지는 그때도 주님은 함께 하고 계셨음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분명히 작은데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풍요를 누려도 풍요에 빠지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언약 (신 29:1-13)


사람에게는 누구나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인간이 좋아하는 것을 공짜로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쟁취해야 하고 소유해야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곧 돈입니다. 결국 인간이 돈을 버는 목적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취하여 소유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세상에 좋아하는 것이 없으면 돈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만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돈이면 그것으로 넉넉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의식주의 해결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커다란 집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한 집을 소유하기 위해서 안먹고 안입고 안쓰면서 오랜 세월을 고생을 해야 합니다. 자식들의 성공을 좋아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은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합니다. 여러 가지 좋은 살림살이들을 구입하고 취미 생활을 하기 위해서도 수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돈이라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내 수중에 들어와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단지 바라만 보고 포기한 채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나보다 많이 소유하고 넉넉히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하면서 세상의 불공평을 느끼게 됩니다. 있는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없는 것에 불만을 내뱉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돌아볼 때 과연 앞서 말한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없는 것을 바라보고 불평을 하기보다는 있는 것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신자로서 하나님을 믿겠다고 일요일이면 빠지지 않고 교회로 모이고 있지만, 사실상 그 마음은 믿는 자의 마음이 아닐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고 싶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싶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교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뭔가 세상에 대해서 또는 교회에 대해서 욕구불만으로 가득한 채 나오는 발걸음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욕구불만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대한 욕구 불만, 자식에 대한 욕구 불만, 남편에 대한 욕구 불만, 교회에 대한 욕구 불만, 목사에 대한 욕구 불만, 타인에 대한 욕구 불만, 이 모두가 사실은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필연코 욕구불만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욕구 불만은 불평과 불만으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구 불만은 여러분에게서 삶의 만족과 기쁨과 즐거움 모두를 잃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빠진 독에 평생토록 물만 부어 넣다가 끝나버릴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인생은 세상의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며 살고 높은 권력과 힘을 가진 인생이었다고 할지라도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었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족이 없는 삶은 맛있는 것을 먹어도 기쁨이 없습니다. 좋은 옷을 입어도 즐거움이 없고 사는 것 자체가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족은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해도 좋은 옷을 입지 못해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만족을 나 자신의 욕구불만으로 인해서 잃어버린다면 참으로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현재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만족이란 내가 원하는 것으로 마음이 채워질 때 나올 수 있는 것인데, 원하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만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설령 돈이 있고 없고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는 분명 자기의 마음을 채워주는 뭔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식이 착하고 공부를 잘한다면 그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채워주었기 때문에 돈이 없어도 자식으로 기뻐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만족은 자식이 부모의 속을 썩이게 될 때는 사라져 버릴 만족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만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기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인생에서 진정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은 평생을 욕구 불만과 불평 속에서 살아가는가 봅니다.

 

 

 

 

그런데 제가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입니다. 신자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세상을 떨쳐 버리겠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신자들이 교회를 찾아 나오는 이유부터가 이미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욕구 불만의 해소를 위해서 교회를 찾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한 욕구 불만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분명 하나님을 부르면서 자기 하는 일에 복을 달라고 애걸할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욕구 불만이 있는 사람은 자식을 잘되게 해달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뭔가 자기의 원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교회를 찾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의 성공을 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소망에 부응하는 것은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인생이 내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순탄하게 흘러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러한 삶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욕심 부리지 않겠습니다. 그저 아무 일 없이 지금 이대로만 살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을 그러한 길로 밀어 넣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실패가 없고 어려움이 없는 인생을 살아오셨다면 그러한 생각을 하기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인생을 살아오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다만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불평과 불만으로 지내오셨다면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스스로 밀쳐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절에 보면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사 모압 땅에서 또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이 이러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언약을 세우신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압 땅에서 다시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십니다. 이것은 언약의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에 언약을 변경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언약의 내용은 호렙산이나 모압땅이나 동일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세운 언약을 모압 땅에서 다시 반복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2-6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실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애굽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친히 목격을 했습니다. 재앙을 통해서 애굽을 치시고 장자가 죽어 가는 엄청 난 재앙 속에서도 그들은 살아났습니다. 더구나 애굽의 군사가 쫓아오는 긴박한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바다를 가르시고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애굽 군사는 모두 물에 수장을 시켜버렸습니다. 이러한 기적들을 친히 목격을 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분명 넘치는 감격과 흥분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감사하고 구원을 찬양하면서 앞으로 하나님만 섬기겠노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의 이스라엘의 찬양을 보면 그들의 그때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떠하겠습니까? 여러분이 보는 눈앞에서 바다가 갈라지고 병든 자가 낫고 귀신이 쫓겨가는 기적을 목격을 했다면 과연 담담한 마음 그대로이겠습니까? 아마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을 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을 알았다. 이제는 하나님만 믿고 살겠다'는 각오를 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이 두 번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호렙산에서의 언약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세월을 지나기 전의 언약입니다. 그러나 모압 땅에서의 언약은 40년의 광야생활후의 언약입니다. 다시 말해서 40년간 광야에서 고생했던 어려움과 고통이 없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만 맛본 상태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40년이란 세월을 고생하고 난 뒤에 알게 된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호렙산에서의 언약이 더 진실 되겠습니까, 아니면 모압 땅에서의 언약이 더 진실 되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의 기적으로 마음이 떠있는 상태에서의 하나님보다는 40년 동안 고생하고 살아오면서 알게 된 하나님이 더 진실 되고 마음 가까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하신 언약은 이스라엘의 삶에 깊숙이 자리하는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40년 광야 생활을 통해서 깨달아야 했던 것은 5,6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너희로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면서 이스라엘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은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시며 능력이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자기들의 힘과 노력으로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6절에 보면 떡도 먹지 못하고 포도주나 독주도 먹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며 세상의 음식을 맛보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늘의 양식인 만나로서 광야를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먹이시고 살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배우고 깨달아야 했던 것은 '우린 오직 여호와의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의도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 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자기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광야에서의 40년이란 고통의 세월이 생각하기도 싫은 기간일수도 있습니다. '좀 더 편한 길로 인도하실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고생스러운 길로 인도하시는지 모르겠다'는 불평과 불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실제 이스라엘은 그러한 원망과 불평 속에서 지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 말씀이 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오고 기적을 목격하고 광야 40년의 세월을 지내오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 상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스스로 하나님을 알아갈 수는 없습니다. 기적을 베풀어서 애굽에서 건져내도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바다를 갈라서 건너게 한 엄청난 기적을 경험하게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광야 40년의 세월을 자기들의 노력이 아니라 하늘의 양식을 통해서 살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지탱되고 있는 자신의 인생을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방식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과연 광야 40년의 세월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까? 광야 40년의 고통의 세월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닐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깨달으려고 하기보다는 나의 고통을 앞세우면서 불평과 불만을 내뱉은 것이 바로 우리들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시고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시는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외면한 채 단지 내가 힘들고 어렵다는 것만 내세우고 소리질렀던 삶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깨달아야 했던 것은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광야에서 40년을 고생하게 하신 그 뜻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만 이스라엘이 깨닫는다면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광야에까지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나아온 모든 삶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음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이스라엘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다시금 이스라엘에게 언약과 맹세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금 함께 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함께 하지 아니한 이스라엘, 즉 자손 대대로 지켜져야 할 언약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살아가는 자는 복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저주라는 것을 다시금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국 신 28장의 저주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내 힘 가지고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스라엘이 재앙을 받고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을 받는다면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언약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임을 열방도 알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스라엘의 전부를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복이고 생명이며 무엇이 저주이고 사망인가를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아는 자를 찾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가 곧 하나님을 아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안다고 하는 자는 많으나 진심으로 은혜를 아는 자가 드뭅니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앞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고자 하는 인생을 살아갈 때 그 사람은 자신의 삶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왜 힘들게 하시는지, 왜 고생하게 하시는지, 왜 모든 일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12,13절에 보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향하여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 여호와께서 이왕에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맹세, 다른 말로 언약에 참여하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으로 자기 백성을 삼으십니다. 언약에 참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 언약에는 오직 어린양의 피의 은혜가 담겨있을 뿐입니다. 저주는 오직 이 피의 은혜에 참여하지 않는 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과연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피로 기뻐하고 살아가는 인생인지, 아니면 세상 것으로 기뻐하고 살아가는 인생인지를 판가름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여러분을 풍족하게 하기도 하시고 힘들게 하게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은혜로 사는가를 판가름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모든 일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자기 욕구가 포기되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채워진 삶이 되기 바랍니다.

 

 

 

 

 

오묘한 일 (신 29:22-29)


인간에게 있어서 생존은 본능입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날 때부터 이미 생존을 향한 끊을 수 없는 집착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이란 생존을 도와주는 것이고, ''은 생존을 방해하는 것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은 자연적 현상입니다. 이와 같이 생존을 도와주는 선은 환영을 하며 받아들이고, 생존을 방해하는 악은 힘을 다해서 밀쳐내는 세상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존에 관심을 두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관심을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존 문제에 대해서 골몰하고 살아가는 인간을 향해서 생명을 알린다는 것은 핍박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생존이냐 생명이냐' 우리는 이 갈등 속에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생존과 생명을 둘 다 취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존 문제에 집착을 하면 생명에서 멀어지게 되어 있고, 생명에 관심을 두면 생존문제에서 멀어지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일이지만 생존은 인간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위해서 일하시지만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존 문제를 돕는다!' 아쉽게도 성경에 이러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고 있는 성경 전체가 인간의 생존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문제를 중점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존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온 자는 성경의 하나님을 증거했을 때 커다란 실망을 안고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존 문제를 도와주는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우상'이라는 이름으로 인간 세계에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존이 존재 이유로 되어 있고, 모든 관심이 생존 문제에 쏠려 있는 세상에서 '생명'이 인기 없는 과목으로 내팽개쳐지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생존 문제에다가 덤으로 생명을 끼워서 준다면 얼씨구나 하고 환영을 할 것입니다. 사실 현재 교회에서 말하는 것들이 생존 +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복음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을 위해서는 생존 문제에 대한 관심을 끊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 16:25절에서도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셨고, 영생에 관심을 두고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도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쫓으라는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떡(생존)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오는 군중을 피해서 달아나 버리는 것을 봐도 예수님은 우리의 생존 문제에는 관심을 두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오직 생명을 보여주고 생명을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생존 문제는 단지 육신을 살리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생명은 영혼을 살리는 것이고 영원히 사는 문제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소경을 만나면 소경의 눈을 띄워 주시면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본 자가 진짜 눈을 뜬 자이고 생명을 보지 못한 자는 눈을 뜨고 있다고 해도 소경이라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씀을 하신 후에 사람들이 배가 고파하자 오병이어라는 기적을 행하시면서도 그 목적은 사람들의 배를 불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병자를 만나서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 들린 자를 만나서 귀신을 쫓아내시었던 모든 일들은 인간의 생존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만이 아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한 개인 개인과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통해서 하셨던 모든 일은 결코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개인을 잘되게 하든 못되게 하든, 또는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번성하게 하든 멸망하게 하든 그 모든 일 속에는 '생존'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문제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생존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승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통해서 하늘의 생명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날 때부터 자기 생존에 관심을 두고 태어난 인간이 하나님이 하신 일,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들을 자기 생존과 연결시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준 생명의 떡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는데, 생존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은 그 기적을 '자기 배부름'이라는 생존의 문제로 이해해 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쫓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바로 이런 모습으로 예수님을 대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생존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자들을 향해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6,27)고 말씀하십니다. 즉 생존 문제를 썩은 양식이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 일하는 그것이 곧 썩은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즉 생명을 위해서 살아가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에 대한 갈등이 발생합니다. 오직 생명을 위해서 살라고 하시니까 '지금 당장 급한 내 생존 문제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라는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모세가 바로를 만나 내 백성을 내 보내달라고 요구했지만 바로는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고역을 내리게 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에게 그것 때문에 우리가 더 고생을 하게 되었다고 원망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자기 생존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둠으로서 '하나님의 생명'보다는 단지 현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고생을 하는 삶에서 벗어날 것만 생각했지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바로가 가져다 준 고역을 다만 모세 때문에 겪게 된 고생으로만 바라봤던 것입니다. 즉 배후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고생을 단지 고생으로만 바라보고 고생에서 벗어나기만 소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보다는 생존에 집착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삶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단지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살아가는 생존을 꿈꾸고 원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들의 그런 기대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습니다. 즉 인간의 생각과 상식을 뛰어 넘어서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오묘한 일'이라는 말로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29절에 보면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묘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오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법칙은 세상 상식과 법칙을 따라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법칙과 원리를 따라서 일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 속에서 오묘한 그 이치와 뜻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하늘의 법칙을 따라서 살아갈 때입니다. 그러나 만약 세상의 법칙과 상식을 고집하고 살아간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서 그 오묘한 이치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묘한 일이라고 해서 무슨 신비스러운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세상의 상식과 법칙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오묘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냥 보통 일이고 일상적인 일이지만 하늘의 눈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 속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놀라운 진리와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앞에서 예로 들었던 예수님이 행하신 오병이어를 생각해 볼 때 사람들은 오병이어라는 기적 자체를 오묘한 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병이라는 기적이 오묘한 일이 아니라 그 기적이 담고 있는 '하늘의 떡'이라는 것에 오묘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의 상식과 법칙으로만 오병이어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단지 예수님을 따라가면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기적이란 단지 눈앞에서 벌어진 놀라운 현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는 단지 기적으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떡을 말해주는 표적으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오병이어의 오묘함은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했던 조그만 떡과 물고기를 통해서 '하늘의 떡을 통해서 얻어질 영원히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참 생명'을 나타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오묘함을 단지 생존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인간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명의 문제냐 생존의 문제냐'라는 각기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때, 한쪽은 오묘함을 깨닫게 되고 다른 한쪽은 단지 썩어질 양식을 구하는 차원으로만 그쳐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왜 호렙산에서 언약을 하시고 또 다시 모압 땅에서 약속을 하시는가에 대한 것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세월을 고생하고 난 후에 생각하는 하나님과 40년의 고생을 하기 전에 생각하는 하나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이스라엘을 나오도록 하신 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의 생존 문제를 떠나서 하나님의 언약안에서의 생명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또 40년간 광야에서 편한 삶을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생존 문제로 인해서 고생을 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오묘한 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이스라엘이 생존 문제에 집착을 하고 생각한다면 나올 것은 원망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가?' 그 뜻과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현재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고생스러운 환경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를 굶어죽게 하고 목말라 죽게 하려고 애굽에서 나오게 했는가?'라는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애굽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아니었습니까? 결국 생존 문제에 집착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애굽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40년을 지내게 하신 하나님의 일은 단지 고생이었지 결코 하나님의 오묘한 일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 40년의 세월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오묘함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신 8: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대로 40년의 고생의 세월에 담겨진 오묘함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오묘함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단지 고생하는 것으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한숨이고 신세타령이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언약 안에 참예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원히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게서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는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는 내 백성이다'고 인정함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약안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 일을 돕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언약에서 벗어날 때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여호와의 진노로 인해서 심판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이 무너진 것 같이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들이 진노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절한 까닭임을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22-28절). 이것이 진노와 재앙에 담겨 있는 오묘함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오묘한 일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구석구석에 담겨 있습니다. 다만 생존에 집착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무지함과 미련함 때문에 하나님의 오묘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은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삶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임을 잊지 마십시오.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개입되지 않은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일이라는 것은 그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늘의 생명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지 결코 우리의 생존을 도와주기 위해서 개입하신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생존 문제를 도와주기 위해서 개입하신다면 이스라엘에게 언약이니 생명이니 라는 말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 어디에도 우리의 생존 문제를 돕는 하나님, 예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 16:23절에 보면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말리는 베드로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그것을 말립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으로 보면 베드로의 태도가 합당합니다. 스승이 고난받고 죽겠다고 하시는데 '예 죽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할 제자가 있겠습니까? 스승이기에 말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말리는 베드로를 향해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라고 책망을 하신 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단지 예수님 한 개인의 죽음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자기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죽음을 단지 생존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그것이 사람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일은 하늘의 생명을 위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비록 베드로의 말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말이었다고 해도 예수님으로부터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는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무리 내 진심으로 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생존을 벗어나서 생명을 향한 마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람의 일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한 기도, 생존을 위한 예배, 생존을 위한 헌금, 생존을 위한 설교,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입니다.

 

 

 

 

고전 2:11-14을 보면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 즉 오묘하고 신령한 일을 분별하고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성령이 함께 한 자는 자연히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롬 8:5-6절을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씀하는 것도 생존과 생명의 문제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생존을 좇아 사는 자는 결국 자기의 생존의 문제만을 생각할 것이고, 생명을 좇아 사는 자는 하늘의 일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 영의 일은 무엇이고, 사람의 일 육신의 일은 무엇이니까?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종교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영의 일이며 일상생활에서 살아가는 것은 사람의 일 육신이 일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생존의 문제에 집착해서 생존을 위해서 생존을 쫓아 살아가는 모든 것을 사람의 일 육신의 일로 말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좇아 살아가는 것은 그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대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오묘한 일입니다. 단지 우리들이 생존에 집착하고 생존에 쫓겨 살아가다보니까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고 살았을 뿐입니다. 따라서 생명을 좇아 살아가는 신자에게 있어야 할 사람의 태도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우연으로 돌리거나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일을 통해서 저에게 어떤 오묘한 진리를 가르치고자 하십니까?'라고 물으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 하나하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귀한 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본래 인간의 모습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 항상 자기 생존보다는 먼저 하나님을 생각할 줄 아는 신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생존에 위협을 주는 상황이 닥쳤다고 해도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서 나더러 하늘의 생명만을 소망하라고 하시는구나'라는 오묘한 하나님의 일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존재 이유를 벗어나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먹고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존재 법칙입니다. 생존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의 삶의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신자는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하늘의 생명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교회를 찾는 것은 우상입니다. 그런 우상을 섬겨서 천당 간다고 우기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통한 생명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오묘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을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저런 일을 겪게 하십니다.

 

 

 

 

인간이 생존에 집착하고 살아가는 것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땀을 흘리고 고생을 해야 먹고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이러한 형벌 속에서 고생하지 않는 편안함을 추구하다 보니 돈을 외치게 됩니다. 고생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고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고 살아가는 생존에 집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거절합니다. 생명이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고생스런 삶은 징벌의 연속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고생을 통해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분명한 수긍이 있어야 하고 그 속에서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사모하는 자, 즉 생명을 좇는 삶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생존을 위해서 살았던 삶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서 하루하루를 살으셨던 삶입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생존이 아닌 생명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이 될 때 우리의 삶속에서 깨달아지는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는 무궁무진 할 것입니다.

 

 

 

 

 

실패와 성공 (신 30:1-10)


인간을 생각할 때마다 인간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도 같이 병행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같이 생각하지 않고 인간만 생각하면 필시 인간을 최고로 여겨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이 하나님인양 행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배후에서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항상 겸손함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어떤 일도 자신의 업적으로 가로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입니까?' '하나님,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세상 사람들과 같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인생입니까?' 이렇게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묻고 자신의 인생을 점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겸손이며 하나님이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신자입니다.

 

 

 

 

신자가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만드시고 나서 팽개쳐 버리고 '너희들 마음대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드실 때부터 하나님이 원하시고 계획하신 바가 있기 때문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당연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을 생각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을 점검할 때도 '하나님께 물으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고 붙잡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며 사는 것이 신앙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점검했다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고 산다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 하나하나를 하나님께 묻고 살아갈 때 내 인생 깊숙이 세밀하게 개입되어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내 힘으로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없고 모두가 하나님의 뜻아래서 진행되어지고 있는 인생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발 앞에서 조용하게 무릎 꿇으면서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그 말 한마디가 신앙의 진수이며 겸손과 온유함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 멋대로, 자기에게 유익 되고 편리한 대로 처리하면서 하나님께 묻지를 않습니다.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하면 하나님의 뜻이고 유리하지 않으면 뜻이 아닌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간 중심으로 존재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신은 거짓된 신이며 우상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중심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창조주를 무시하고 모독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뭔가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여러분에 필요에 의해서지 만들어진 피조물의 요구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만든 자는 자신에게 필요 가치가 없어진 것은 언제라도 버려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인생이라는 것을 살아가고 있으며 이런 일 저런 일을 겪게 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무엇인가 뜻이 있어서 하신 일이라면 담담하게 따르는 것이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힘든 일을 겪으신 분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당신이 당해보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하지 한번 당해봐라 그런 말이 나오나'라는 반발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목사인 나는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신자로서 바른 삶이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결국 '당신도 한번 당해봐라 그런 말이 나오나'라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살고 있는 증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저 역시 힘든 일을 겪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에게 가르쳐 주시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사랑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삶속에서 세밀하게 개입하시고 일하시는데 정작 우리들은 그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혹 소경으로 귀머거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들의 인생에 개입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고 해서 행여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성공한 인생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개입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피조물 중심으로 존재하는 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 중심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시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괴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것은 나의 소원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에 세상 사람들은 참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생각하는 신이란 자기들의 인생을 도와주는 역할로서의 신을 생각할 뿐이지 신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자기 인생 속에 뛰어드는 신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우리 인생에 개입하신 분입니다. 이것은 아예 우리가 지음 받고 세상에 존재할 때부터 '내 인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세상에 펼쳐 내기 위해서 부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애당초 '내 인생'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인간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고 허수아비나 로보트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아서 노골적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는 말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렇게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피조물에게 있어서 자기 주권이나 자기 권리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에게 오로지 존재 이유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 의해서 존재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가장 정확한 분석이며 결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염려하고 걱정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고 삶에 대해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려고 하지만 자신이 원하고 추구하는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모습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은 저마다 부자로 살고 싶어하고 부자로서 세상에 존재하고 싶어하지만 부자로 존재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여건이 없는 것입니다. 돈 많은 부모를 둔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세상에 높은 지위를 가진 것도 아니고, 한 마디로 말해서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부자로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숨을 쉬고 신세를 한탄하면서 하늘을 원망하기도 하고 근심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인생살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신자는 스스로 존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되어져 살아갈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존재하고자 힘쓰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주어진 여건과 환경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되어져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고 무엇인가 뜻이 있고 계획이 있어서 지으셨다면, 나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과 여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포석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현재의 환경에서 벗어나서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주어진 것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물론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중심을 벗어나지 못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산다는 것이 힘들고 불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신자라면 이것이 신자로서 바른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러한 삶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약속의 땅에서 쫓겨날 것을 미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어떻다는 것을 미리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을 염려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을 때 다시금 이스라엘을 불러모으실 것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29장의 이야기와 연결 지어 생각해야 합니다. 29장에서 하나님은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언약에 참예하여 살아갈 것을 말씀하십니다(29:12). 언약에 참예하여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약이 구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구원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농사도 짓지 못하고 헤매고 다녔지만 옷이 낡아지지 않고 신이 해어지지 않았으며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았던 것과 같이 은혜가 우리를 감싸고 인도하고 있음을 알고 언약을 믿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할 때 그들에게서 보여지는 우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고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 위에 붓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내어서 다른 나라에 던져 버리신다고 하십니다(29:28). 그렇게 되었을 때 쫓겨 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흩으신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겠다(30:2,3)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로 쫓겨간 가운데서 다시금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이 일이 마음에 기억 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다른 나라로 쫓겨가는 징계를 받았다고 해도 그 가운데서 '이 일'이라는 것을 마음에 기억하지 못할 때는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셨던 일은 29장에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언약의 내용들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어떨 때 복을 받고 어떨 때 저주를 받을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이 언약에 참예 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힘을 믿고 살 때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뽑아 내어서 다른 나라로 던져 버리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실제로 다른 나라로 쫓겨감을 당했을 때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건너기전 하셨던 말씀을 기억한다면 자신들이 쫓겨남을 당하고 다른 나라로 던짐을 받게 된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기억함으로서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다시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대하는 것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지 않는 인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언약도 잊어버리고 땅의 풍족함에 빠져서 살아가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기대를 걸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왜 쫓겨나야 하는지 그 이유를 미리 말씀하심으로서 쫓겨났을 때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자기 죄를 알고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이스라엘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는 것은 말씀을 잘 지키는 인간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새기는 인간이기를 원합니다. 실패한 경험을 토대로 해서 말씀을 새기라는 것입니다. 실패하기 전에 말씀을 대하는 느낌과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상태에서 다시 한번 말씀을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말씀은 자신의 실패를 낱낱이 고발하고 실패 속에서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만을 노래하는 참된 이스라엘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명기의 말씀이고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구원이란 우리 쪽에서 대충 말씀을 지킴으로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실패한 자리에서, 인간 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만 모든 희망을 두고 사는 것이 참된 백성이며 구원받은 자입니다. 따라서 말씀에 실패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마음에 두고 산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지킬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서 어느 정도는 지켜야 한다'고도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자기에게 편리한 대로 적당히 조절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라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어느 정도는 성공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종교적 행동을 높이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면'이라는 말씀입니다. 2절에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이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3절에서 말씀한 대로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다시 모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또 8-10절까지의 말씀도 '돌아와 다시 말씀을 순종하고 명령을 행하면 복을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에 실패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로 쫓으셨는데 말씀이 기억나거든 다시 돌아와서 말씀에 순종하라는 이 말씀이 어찌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보고 행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11-1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행할 수 있는 조건은 말씀이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명령을 행하라고 할 때 우리는 고민을 합니다. '어떻게 행할까?' '할 수 있는가?'라고 고민하지만 하나님은 명령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다 밖에 있는 것도 아니라 우리의 입에 있으며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즉 말씀이 입에 있고 마음에 있는 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뜻을 깨달을 수가 있고, 그 말씀이 마음에서 행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이 마음에 있게 되는 것은 누구의 일입니까?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을 두시고 그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고, 깨달음을 따라 살아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의 말씀이 스스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말씀이 내 마음에 있으면 율법 하나하나를 행할 수 있다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율법이란 하나하나를 실천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함유하고 있는 정신을 우리에게 말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사랑이 없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것이 바로 말씀에 대해서 실패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인정하지 못하신다면 자신의 삶을 세밀하게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과연 사랑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하나 만나도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만나져야 합니다. 과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삶에서 과연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비쳐지고 있습니까? 결국 우리들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삶은 말씀에 실패하고 있는 모습만 잔뜩 안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우리 속에 말씀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실패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를 보지 않고 예수님을 보게 되어 있으며 그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오직 말씀을 자신의 생명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과연 무엇을 생명으로 여기고 살아가는가를 점검하는 것을 도와줍니다. 내가 무엇을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가를 우리들의 삶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돌아볼 때 자신의 실패를 발견하게 되고 실패의 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대해서 눈이 떠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여러분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까? 말씀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말씀이 여러분의 입과 마음에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부자 되는 것입니까?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들여다보시고 다시금 사랑 없음을 한탄하면서 통회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함께 하심 (신 31:1-13)


지금 우리들의 신앙의 눈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눈이 떠진 상태에서의 신앙입니까? 우리들은 성경을 배웠다고 말하고, 성경을 알고 이해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정작 우리들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또 그리스도에 대해서 띄어진 눈으로 믿고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교회가 전통을 말하고 교리를 말하지만, 그 전통이나 교리를 성경에 비추어서 다시 검토하려고 애써본 적이 있습니까? 교회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것이니까 거부하면 안될 것 같고, 교단이 인정하고 있는 교리이니까 틀렸다고 말하면 안되고, 목사가 말한 것이니까 무조건 맞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눈 뜬 소경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도 없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눈이 띄어 있는지도 모르면서 신앙을 말하고 교회를 찾고 있는 이런 안타까움을 언제까지 느껴야 할지 참으로 답답하기만 합니다.

 

 

 

 

신앙은 절대로 맹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앙은 눈이 뜨인 상태입니다. 단순히 설교를 듣고 성경을 배워서 알고 있는 수준을 넘어서 자기 나름대로의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설명을 들었다고 해서 예수님이 알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설명은 단지 내 삶에서 예수님을 알게 되고 찾아가고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지, 설명 자체가 우리들의 속에서 믿음을 일으켜주고 예수님을 신앙하도록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들었다면 실제 자신의 삶에서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이라면 분명히 내 삶에서 나를 향해 말씀하고 나를 만나시고자 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내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체험하고 만난 예수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과를 먹어본 사람과 먹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과를 먹어본 사람이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사과 맛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과 맛을 알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과 맛은 직접 사과를 사서 먹어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사과 맛에 대해서 설명을 해준 것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사과 맛에 대한 설명만 듣고 '나는 사과 맛을 안다'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분명 잘못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맛보고 알고 있는 사과 맛이 아니라 단지 들은 지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사과 맛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사과 맛을 설명한다는데 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자기가 들었던 사과 맛을 그대로 말할 뿐이지 자기가 맛을 본 사과 맛에 대해서는 전혀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과 맛은 최초에 설명한 어느 한사람의 말이 그대로 전해지고 전해질뿐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을 사과 맛으로 알게 되고, 또 그것으로 사과 맛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과 맛을 알기 위해서 사과를 먹는 수고를 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누군가가 직접 사과 맛을 보고 자신이 느낀 또 다른 맛을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밀쳐낼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사과를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 외에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는 사과 맛에 대한 설명만 인정하겠다는 의도인 것입니다.

 

 

 

 

제가 사과를 예로 들어서 말씀을 드렸지만 이것이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한 말인가 하는 것은 다 눈치를 챘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도 이런 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눈이 띄어진 상태에서 내가 알고 있는 예수가 없습니다. 지난주일 오후에 말씀드린 대로 머리에 세상이 말하는 예수는 존재하는데, 내 가슴에 살아있는 예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경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해서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도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런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내가 들어서 알고 있는 하나님을 전부로 여기고 하나님에 대해서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풍조나,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삶에서는 전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도 않는 풍조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몸은 교회를 찾고 머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삶은 제멋대로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것이 가슴에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버젓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길을 가면서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대담성을 날마다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너무 몰아 붙인다는 생각도 할 것입니다. 사실 저 역시 설교를 쓰다 보면 상대방을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벼랑 끝으로 몰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제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답답함은 저에 대한 답답함이며 한심스러움은 저에 대한 한심스러움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저의 이러한 답답함과 한심스러움이 저 뿐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상태와 문제점으로 느껴진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고 그리스도를 떠난 우리의 인생은 허무함으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믿어지신다면 우리의 답답함에 시원함을 줄 수 있는 생수를 찾아 같이 길을 떠나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을 주는 구절은 6절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행하시고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시지 않을 것이니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말씀은 분명히 우리에게 힘이 되고 희망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하신다는 구절 하나만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버린다면 결국 우리들의 머리 속에서 결론 내려지는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서 함께 하는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머리와 머리를 통해서 전해 내려온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의 삶에는 양면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때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울 일이 있고 슬픔이 있고 괴로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시고 함께 동행하시는데도 얼마든지 괴로운 일들 슬픈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를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기에 괴로움은 우리들의 잘못에 대한 징계로 돌려버립니다. 슬픈 일들, 괴로운 일들, 울어야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내려진 징계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징계를 받지 않기 위해서 잘못함을 범하지 않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6절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으니까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먹어라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이런 이해가 바로 가슴이 살아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머리로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필요한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소중한 것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부족함이 없이 공급해 주시기 위해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러한 혼란에 빠진 채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을 보면서 소중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소중한 것이 아닌 필요한 것을 구하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알아서 공급하십니다. 때문에 필요한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소중한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의가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은 단지 필요한 것일 뿐 소중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은 구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은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부족하고 없다고 해서 낙심하고 슬퍼하고 살맛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이방인의 모습과 똑같은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고 세상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지만 성경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하나님은 필요한 것이 아닌 소중한 것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필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찾는다면 결국 전혀 다른 하나님, 즉 우상을 찾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믿는다고는 하나 생명력이 없고 죽어있는 듯한 신앙생활이 연속되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소중한 것을 찾지 못하고 필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에 매어있고 갈급해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을 새롭게 재정립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알아 가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 31장부터의 이야기는 모세가 자기의 죽음을 앞에 두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을 향해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말을 전하고, 또 율법을 주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초막절이 되면 모여서 율법을 낭독하고 모든 백성으로 율법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라는 당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모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머리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삶을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입니다. 특히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있고, 평생을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살았다고 할 수 있는 모세로서는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두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절에 보면 "곧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일백이십 세라 내가 더는 출입하기 능치 못하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하는데, 모세가 이 말을 아무런 감정이 없이 했겠습니까? '여호와가 나에게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다 그래서 나는 요단을 건너갈 수 없다'는 말을 할 때의 모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내가 오늘날 일백이십 세라 내가 더는 출입하기 능치 못하고'라는 말도 늙어서 기력이 딸려서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말로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는 말로 보아야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일은 모세의 손을 떠나서 여호수아에게로 옮겨집니다. 그렇게 되면 모세의 할 일은 다 끝나게 됩니다. 할 일이 끝났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을 모세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나는 요단을 건너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러한 말을 하면서 자신이 왜 요단을 건널 수가 없는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과거 가데스에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는 말씀을 어기고 반석을 두 번 침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20:12)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요단을 건너갈 수 없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알게 된 하나님은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자'는 결코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지 않으시는 분이었습니다.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만 믿고 여호와만 의지하고 여호와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요단을 건너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함께 하심과 전혀 다른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도와주시고 힘을 주시기 위해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설령 모세가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두 번쯤은 눈감아 주면서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라'는 말씀으로 끝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은 반석을 두 번 친 모세와 같은 모습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모세로 하여금 요단을 건너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소중한 것은 약속의 땅이 어떤 땅인가를 가르치는 것이었지 모세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세가 천국 갔느냐 가지 못했느냐는 따지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관심이 아니라 모세의 잘못을 통해서 약속의 땅에 합당하지 않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모세는 이스라엘만큼은 약속의 땅이 어떤 땅인가를 알기를 원했고, 또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그 땅의 속성에 맞지 않는 모습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당부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나는 요단을 건너지 못한다'는 말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었는데 지도자가 요단을 건너지 못한다는 것은 백성들로부터 '당신이 지도자냐'라는 야유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마음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잘못을 들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을 알고 있는 모세의 마음이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란 무엇을 보여주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자는 자신의 잘남을 보여주는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못남과 부족함과 죄인 됨을 보여주면서 이러한 인간의 마지막은 죽음이며 따라서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을 수밖에 없음을 말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어떤 사고방식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 이유는 우리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고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속에 있는 잘못된 사고방식, 잘못된 생각들을 끄집어내시면서 그러한 것들은 천국에 적합하지 않는 것이니까 징계해서라도 버리게 하기 위해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모세는 자신의 잘못으로 요단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요단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 살아가는 것은 결코 우리의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태어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인생의 본질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왜 사는지, 왜 슬픈 일들이 일어나고, 괴로운 일들이 끊이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평생을 근심과 걱정 속에서 헤매고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생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말씀의 비밀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게 되고 마음에 소중히 간직하게 되는 것은 하늘의 생명이지 않습니까? 이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된 자는 자연히 그 마음이 강하고 담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온통 자기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신자도 역시 자기 일에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고 사는 자입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괴로운 일들, 슬픈 일들, 죄까지도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는 도구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이런 모습이 천국에 합당한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주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말고, 징계해서라도 천국에 합당한 모습으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하나님을 좋아해야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가나안 땅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40년의 고생의 세월을 마치고 그들이 해야 할 것은 전쟁을 통해서 가나안 민족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약속의 땅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쫓아내야 할 것은 가나안 민족의 사고방식, 반석을 두 번 친 모세와 같은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도 물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사고방식이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야 할 싸움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 현실이 약속의 땅이고, 오늘날의 천국에 대한 개념입니다.

 

 

 

 

천국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면 안됩니다. 세상에서의 천국이란 생각하는 것처럼 살기 좋은 낙원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싸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민족을 쫓아내기 위해서 싸워야 했던 것 같이, 오늘 우리들도 가나안의 사고방식과 싸워야 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흔히 '천국 같은 교회'라고 할 때 끝없는 환상 속에서 사이좋고 친절하고 분위기 좋은 교회를 연상하지만, 사실 천국 같은 교회는 가나안의 사고방식을 용납하지 않고 싸우는 교회입니다. 그런 것이 무슨 천국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천국은 살기 좋은 환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싸움 속에서 함께 하고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을 삽니다.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강하고 담대함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것, 병드는 것, 고통스런 일이 발생하는 것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난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질병을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가난을 이기고 질병을 이기기 위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과 질병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기 위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가난을 통해서 보여주고 질병을 통해서 보여주며 고통스런 일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일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세상을 향하여 담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으로 산다는 것이 힘듭니다. 그럴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들의 속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책망하시고 징계하십니다. 그리고 소중한 것으로부터 떠나지 않도록 붙드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반복되는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 때문에 담대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마음놓고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지으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히 짓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죄 가운데서도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변함없이 하늘나라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삶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줄 수 있고, 여러분의 가슴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신앙으로 굳게 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실체 (신 31:14-29)


'인간에게 육체가 없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마치 영이신 성령님 같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육체가 없는 상태로 세상에 존재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물론 비싼 밥 먹고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는 생각이지만, 사실 저는 요즘 '육체가 귀찮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을 보면, 먹고 입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육체를 위한 것입니다.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루 세끼 꼬박 꼬박 먹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 직장을 다니고 장사를 하면서 육체를 혹사시켜야 합니다. 결국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육신을 혹사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육신을 가리는 옷을 위해서 돈이 있어야 하고, 또 그 돈을 벌기 위해서 고생을 합니다. 육신은 좀 더 맛있는 음식을 원하고, 좀 더 멋있는 옷을 원합니다.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고생과 땀을 흘려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인생이란 오직 '육신'이라는 몸뚱아리 하나를 위해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 행동 하나하나가 육신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에 끌려가는 생각, 육신에 끌려가는 행동, 이것이 바로 인간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볼 때 인간에게 육신이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고생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육신'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순간에 삶의 목표가 사라져 버립니다. 배부름이라는 목표가 사라지고, 멋있는 옷이라는 목표가 사라지고, 육신의 편안함을 위해서라는 목표도 사라져 버립니다. 먹을 것, 입을 것, 편안함, 이러한 것들이 사라져 버렸을 때 인간이 과연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겠습니까? 인간의 존재 이유가 육신에 있었는데 그 존재 목표가 사라져 버렸을 때 분명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들의 인생이 육신을 위한 인생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의 욕망이나 불만 등 모든 것도 역시 육신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이며, 고생을 하고 피곤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그 모든 이유도 역시 '육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육신이 없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 것입니다.

 

 

 

 

그런데 태초의 인간의 삶은 육신이 없는 삶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제 말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육신이 없는 영의 상태로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있으되 육신을 위한 삶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육신이 있다 해도 삶의 목표가 육신을 떠나 버린다면 그것은 육신이 없는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즉 먹을 것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입을 것을 위해서 살지 않고, 내 육신의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 삶은 분명 육신 때문에 존재하는 삶이 아닙니다. 육신이 있으되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삶, 이것이 인간의 본래의 삶이었습니다. 이 삶이 안식이며 평안이며 행복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안식, 행복이란 환경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육신이 있으되 육신을 떠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신을 떠난 삶의 목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창 1장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로서 세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찬 것 같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정복되어지는 삶을 살아가야 한 것입니다. 이것이 태초에 지음 받은 인간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육신은 단지 그 일을 위해서 주어진 수단이요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즉 육신이 삶의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흙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인간의 육신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을 하나님의 뜻으로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것, 이것이 하나님의 바램이고 의지이고 기쁨이었습니다. 인간은 단지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만드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육신은 그 일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육신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목표를 자기 육신에 두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이 정복되어지고 다스려지고 팽창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 육신으로 세상이 다스려지고 팽창되기를 바라는 쪽으로 관심을 돌려버린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내 육신에 가치를 두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자기 육신의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삶을 소비하는 인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걱정이 생기고 염려가 생기며 불안함과 초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든 것이 육신과 연결되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모두가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진정한 그 이유와 목표를 잃어버린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반발을 합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가 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인정해 버리면 자기 자신이 부인되어지기 때문에 반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육신이라는 단단한 줄에 붙들려서 끌려가는 상태이기 때문에 모든 인생을 자기 육신을 위해서 살아갈 각오로 단단히 무장을 한 사람에게 '하나님을 위해 살아라'는 말이 정상적인 말로 들려 질 수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왜 우리의 육신을 아무런 가치 없는 흙으로 만들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육신과도 연관시켜 생각합니다. 즉 우리의 육신이 힘들고 고생스러운 일을 당할 때 편안함으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을 연상하면서 '사랑'을 언급합니다. 내가 내 육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도 내 육신을 사랑하실 것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애초부터 인간의 육신을 사랑하셨다면 무엇 때문에 하찮은 흙으로 만드신 것입니까? 왜 우리가 귀하게 생각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이나 희귀한 물질로서 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애당초 우리의 육신에는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으셨기 때문이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형상대로'와 '흙으로'라는 말씀입니다. '형상대로'라는 것은 형상이 사람을 지은 재료라는 말이 아니라 무엇을 목표로 해서 지어졌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목표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형상이 없습니다. 때문에 형상을 시각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안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 즉 기능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세상에 보이기 위한 존재로서 지어졌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의 일이 아닌 자기 육신에 관심을 두고 결국 자기 육신을 위한 자기 일에 삶의 목표를 두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형상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인간의 가치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재할 때입니다. 그러나 지금 육신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안에서는 그 어떤 가치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지상에서 최고의 윤리를 간직한 채 살아간다고 해도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본래의 모습이 없는 이상 인간에게는 그 어떤 가치도 없습니다. 육신도 역시 썩어질 흙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신이 있으되 육신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삶, 여러분은 이 인간의 본래의 삶이 그립지가 않습니까? 저는 이 삶이 그립습니다. 육신에 매어있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세상을 새털처럼 가볍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육신이 있다는 그 것 때문에 마음은 있으되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제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며 오늘도 주님을 찾을 뿐입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0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당하게 될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들이 미래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미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말을 여러분이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하겠습니까? 아마도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무시한다 어떻게 우리를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가?'라고 반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자신들보다도 우리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십니다. 그것은 배부르고 풍족하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인간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이 배부르고 풍족하다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겠습니까? 분명히 아니라고 도리질을 할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내가 지금 배고프고 풍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부족한 것이 채워지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을 못 섬기지 배부르고 편안하고 풍족하기만 하다면 열심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지 어떻게 다른 신을 섬길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님이 말한 다른 신이라는 의미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사람은 쉽게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하지 않습니다. 배부르다고 다른 종교로 바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다른 신이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 때문에 산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신이 되어 나를 지배할 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가령 돈을 생각해 봅시다. 돈이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즉 돈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돈에 의해서 지배를 당할 때 그것이 죄입니다. 왜냐하면 돈에 자신의 육신을 맡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돈이 신이 되어서 자기를 주장하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세상은 돈에 의해서 지배를 당합니다. 돈은 인간의 육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육신을 편안하게 하고, 먹을 것 입을 것을 구입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소유하고자 하고, 돈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양심도 팽개칩니다. 하나님도 팽개쳐 버립니다. 배부름과 풍족함을 맛본 이상 그것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될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내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조차 망각해 버리고 오직 육신을 위해서 존재하게 되버립니다. 이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기독교란 종교 안에서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뭔가를 할 때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배부르고 풍족해도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배부르고 풍족해도 그것에 매이지 않을 수가 있는가입니다. 즉 배부름과 풍족함을 포기하라고 하실 때 얼마든지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포기할 수 있다면 배부름과 풍족함에 매이지 않는 것이고, 포기할 수 없다면 결국 배부르고 풍족하게 살아가는 삶에 매어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시는 것은, 절대로 이스라엘의 편안한 삶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민족을 쫓아내시면서 이 땅에서 망해야 할 존재는 누구이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존재할 자는 누구인가를 온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의 육신의 배부름과 편안함이 목적이 아닙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배부름과 풍족함을 얻었다고 해도 그것조차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요 도구로 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주어진 배부름과 풍족함에 빠져서 다른 신을 섬길 것을 미리 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배부름과 풍족함에 빠져서 이방신을 음란히 쫓을 것을 미리 내다 보셨다면 아예 처음부터 배부름과 풍족함을 주지 않고 궁핍하게 하시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궁핍하게 한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만 섬길 수 있을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그들은 궁핍함 속에서 지금껏 고생해온 자기 육신의 고생의 보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따른 원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40년이란 세월을 고생하면서 고생에 대해 보상을 받을 때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상은 가나안 땅에서 주어질 것을 기대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꿈꾸고 있는 것은 자기 육신입니다. 즉 자기 사랑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의 어려운 세월을 지나면서 배워야 했던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시고 지키시며 보호하셨기 때문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의 편안함을 꿈꾸고 있다면 이미 배부름과 풍족함에 매어있는 상태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육신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신이 있는 이상 고생이 없는 편안함을 추구하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생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에게 땀흘리고 수고하여야 먹고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고생'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비록 우리가 볼 때는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나름대로는 고생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생을 당연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고생을 줄여보고 싶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고생을 줄이고 인생을 즐기면서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욕망을 간직한 채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목적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40년간 고생했으니까 그 보상으로 편안하고 즐거운 삶을 주겠다는 의도는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고생 끝, 행복 시간이라는 환상에 젖은 눈으로 가나안을 바라보고 있다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배부름과 풍족함에 빠질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고생을 안하고 세상을 살고 싶어하고, 고생 없이 천국을 가고 싶어합니다. 지난주에 말한 대로 '무통분만의 시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 오셔서 고생하시고 천국을 이루신 예수님의 모습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는데, 교인들은 돈 때문에 눈물 흘리고 안타까워하며 살아갑니다. 천국에 맞는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고 안달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처럼 돈을 벌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달을 하고 있습니다.

 

 

 

 

잠 23:4-5를 보면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합니다. 부자가 되지 마라는 것이 아니라 부자 되려고 애쓰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재물은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리는 허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부자가 되려고 애를 쓰면 고생을 하게 됩니다. 돈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아껴야 합니다. 먹을 것 먹지 못하고 입을 것 입지 못하면 한푼 두푼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남들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려야 하고 많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아진 돈은 결국 자신의 고생의 대가입니다. 고생의 대가로서 손에 쥐어진 돈이기 때문에 돈에 대해서 포기할 수 없습니다. 돈을 자신의 전부로 여깁니다. 그런 사람이 만약 돈이 날아가 버렸다고 합시다.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재물을 허무한 것으로 보시는데, 정작 교인들은 재물을 인생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출석하고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목사 역시 재물을 허무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 위에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돈 위에 세워진 교회가 되버렸습니다. 돈이 교회 되게 하고, 돈이 교회를 만들어 내는 세상입니다. 온통 배부름을 추구하고 풍족함을 목표로 뛰어 다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서 복음을 외치니까 복음을 비웃고 거부합니다.

 

 

 

 

눅 16:14를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라는 말씀대로 돈을 좋아하는 마음 앞에서 복음을 외치니 복음을 비웃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 분위기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일을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구제를 위해서, 돈을 주신다는 생각들이 교회는 돈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돈을 사랑치 말라는 것은 교인들을 향한 말이고, 교회는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교인들에게 있는 돈을 교회로 옮기고자 하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것들이 음란이고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며 27절의 말씀대로 목이 곧고 패역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왜 굳이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십니까? 들어가 봐야 배부름과 풍족함에 빠져서 이방신이나 섬길 그들임을 아셨으면서도 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십니까? 그것은 그들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우리가 배부르고 풍족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들을 배부르고 풍족한 환경으로 집어넣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배고플 때는 하나님을 원망한 자들이, 배부르고 풍족하니까 이제는 이방신을 섬기고 음란히 행하는 죄가 가나안 땅에서 들통이 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바로 내 육신을 바라보고 살았던 그 마음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이며 적이었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할 일은 '우리가 바로 하나님이 원수이고 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런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교회 세우고 선교하고 구제하는 열심을 기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아무리 교회를 세우고 자기들 나름대로 열심히 뭔가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모두가 인간의 일로만 보일 뿐입니다.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한 가운데 행해지는 행위는 자기 찬양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있지만 육신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 이것이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우리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붙들려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성령이 세상에 오시는 이유도 우리를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가는 자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려 있다는 것만큼 편한 것이 없습니다. 강하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육신의 편안함과 배부름을 위해서 애를 쓰고 살아가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인생 자체를 포기한 자의 말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육신을 위해서 살지 말고 인생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라는 것입니다. 즉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없는 것처럼 산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되는 듯하다가도 안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할 수는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성령이 오셔서 하는 일이지만, 어쨌든 육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항상 배부름과 풍족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면서 참으로 가치 있는 삶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살아가는 자기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 죄에 대해서 미워하십시오. 열심히 미워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내 머리가 되셔서 내 모든 것을 주관해 주기를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내가 왜 사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 것이고 쓸데없는 육신에 애착을 가지기보다는 천국에 애착심을 가지고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아는가 (신 32:1-12)


옛날부터 우리 나라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사람을 '짐승보다 못한 놈'이라고 욕을 하면서 사람 취급을 안해왔습니다. 지금은 개인주의 사상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 속에서 누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는다거나 은혜를 끼치는 일들이 줄어들었고, 또 남에게 은혜를 끼치며 살아갈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배은망덕이라는 말조차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지만, 옛날에는 이웃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도와주고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갚는 것을 중요시하게 여기고 그것을 인간다운 모습으로 생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자기 사랑'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보다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받은 은혜까지 등을 돌리는 일들이 허다하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키우지 말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인간은 받은 은혜에 대해서 등을 돌리는, 짐승보다 못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짐승은 자기를 키워준 주인을 물지 않는 법인데 인간은 그렇지 못함에 대해서 꼬집는 말인 것입니다.

 

 

 

 

또한 받은 은혜를 중요시하는 말로서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것은 받은 바 은혜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사람다움의 모습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옛말을 종합을 해보면, '인간은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받은 것을 감사할 줄 알고 또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사람다운 모습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자에게도 등을 돌려버린다. 이것은 짐승보다 못한 짓이다. 결국 인간은 옛날부터 사람다움을 잊어버리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지 않겠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은혜도 잊어버리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자에게도 등을 돌려버릴 만큼 악한 것이 인간이라면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야 말해서 뭘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은혜를 은혜인줄 아는데서 비롯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을 은혜로 고백하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말과 같은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안다는 것과 같은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믿는 자는 이미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참 쉽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확신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백지 한 장을 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그 답을 쓰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으로 그 백지를 메워 나가겠습니까? 여러분이 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기껏해야 지금 여러분의 머리를 채우고 있는 얄팍한 지식의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이것 말고 덧붙일 사랑이 있습니까? 덧붙인다고 해봐야 '천지를 창조하셨고,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이지 않겠습니까? 물론 여러분은 '그것이면 됐지 또 뭐가 필요한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우리는 많은 물음 앞에서 할 말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면서 이스라엘의 멸망은 어떻게 된거요?'라고 묻는다면, 또 '하나님은 사랑이라면서 북한에서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은 뭐고 소말리아에서 배고파 죽어 가는 어린이들은 또 뭐요?'라고 묻는다면 과연 여러분은 그러한 사회적인 모습들과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연결지어 대답하겠습니까? 설마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벌받는 것입니다'는 무식한 말로서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지는 않으시겠죠?

 

 

 

 

사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실로 하나님을 체험하고 만나고 느끼지 못하고서는 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느끼기 위해서 애써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신비적인 현상으로서의 만남과 체험과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적인 현상과 기적과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사랑 안에 거하도록 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많은 신비적인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엄청난 기적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고 만났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기적으로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로 변화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기적으로 인해서 일시적으로 하나님을 찬양을 하기는 했지만, 배가 고프자 하나님을 원망해 버립니다. 이스라엘이 만나고 체험했던 하나님은 단지 기적이라는 매개체를 통한 것이었기 때문에 기적이 사라지고 배고픔과 목마름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닥치게 되었을 때 인간의 본연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며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도와주려면 도와주는 쪽으로 일관되게 진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쩔 때는 애굽에 재앙을 내리고 애굽의 군사를 바다 속에 몰살시키면서까지 도와주시다가, 또 어쩔 때는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고, 이방 군사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하시다가 또 패배하게 하시는, 도저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불안할 때 과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이거다'라는 확고한 답을 내릴 수 있습니까? 그래서 결국 '내가 잘하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못하면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말도 안되는 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유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로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부르는 노래이기는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무엇을 노래하고 있습니까? 본문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제대로 보답하는 자로 살아갈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0-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지키시고 보호하셨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10절에서 하나님이 택한 자기 백성을 어디에서 만나신다고 하십니까? 놀랍게도 황무지이며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고 보호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호화로운 호텔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칠고 척박하고 살기 힘들고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는 황무지에 우리를 만나십니다. 짐승들이 부르짖는 무서운 곳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런데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편하고 좋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한 우상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황무지,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시고 '내가 너를 지킨다 내가 너를 호위한다 내가 너를 눈동자 같이 보호한다'는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원하는 편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은 '내가 너를 편안한 삶으로 인도할 것이다. 내가 너를 크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내가 너를 성공하게 할 것이다'는 말로써 신자들을 유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1절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흔들어 놓고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새끼를 향해 날아와서 날개를 펼쳐서 다시 받아 올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즉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흔들어 놓는 데도 어미로서의 뜻이 있다면, 파닥거리고 떨어지는 새끼를 못 본체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독수리는 하늘을 날면서 모든 시선을 새끼에게 집중합니다. 그런 새끼가 있는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떨어뜨린다면 그것은 어미가 원하는 새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어미의 사랑은 새끼에게 먹을 것을 날라주는 것만이 아니라 하늘을 날면서 새끼를 지키고 보금자리를 흔들어 버리는 모든 것까지 포함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새끼가 하늘을 날며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또 어미가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자기를 떨어뜨리는 것에 불평을 하고 단지 어미가 먹이를 물고 날아와서 자기 입에 넣어줄 때, 즉 자기 입에 뭔가 들어가는 것이 있을 때만 사랑을 생각한다면 과연 어미의 사랑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 수준의 사랑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수준이 꼭 이와 같습니다. 마치 하늘을 날면서 그 시선을 새끼에게 두고 바라보고 있는 독수리처럼,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새끼를 떨어뜨리는 독수리처럼 하나님도 하늘에서 그 모든 시선을 우리에게 두시면서 우리를 지키시고, 또 때로는 우리의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떨어뜨리면서 하나님이 원하는 자녀로 만들어 가시는데, 이 모든 것이 사랑인데 정작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내 입에 뭔가 들어오고,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을 말하는 그런 수준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은혜를 알고 사랑을 안다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평소에는 부모님의 사랑은 생각지도 않고 부모님의 입장을 생각하기는커녕 자기 입장만 내세우며 살아가다가 '어버이 날'이라고 해서 꽃 한 송이 달아 주고 선물 하나 하고서는 마치 부모님을 사랑하고 사랑에 보답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이 닳도록 말하면서도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만 내세우며 살아가다가 주일 되면 예배하고 헌금 드리고 절기에 감사헌금 하는 것으로 마치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사랑에 감사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사랑을 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철없는 아이들의 수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10살 때 느끼는 것이 다르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을 때 느끼는 것이 다르고, 인생을 살면서 쓴 맛 단 맛 다 체험했을 때 느끼는 사랑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겨우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게 되고, 먹고 싶은 것을 먹게 되었을 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어린아이의 수준에서 느끼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사랑에 대한 느낌이 달라지는 것만큼 은혜도 깊어지고 은혜를 은혜인줄로 알게 되었을 때 사람 또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는 옛말은 비록 인간 관계에서 소중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지는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시간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봅시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랑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안다면 과연 아는 것이 어느 정도이고 어떤 수준입니까? 이것은 우리들이 어떤 경우에 은혜를 말하고 감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업이 잘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취직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입학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큰집으로 이사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등등 교회에 바쳐지는 감사헌금의 명목들이 대부분 이런 종류입니다. 모두가 받았다는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받은 것을 은혜로 알고 사랑으로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받아서 기분 나쁜 사람이 없습니다. 받아서 기분 좋고 기분이 좋아서 고마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속에 이러한 감사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면 그야말로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날마다 은혜가 넘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사는 신앙인이 아니라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사입니다.

소위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하는 신앙인들이 이런 수준의 감사와 사랑에 머물러서야 되겠습니까? 받아서 기분 좋고, 기분 좋아서 감사하는 수준의 믿음이라면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사랑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받아서 기분 좋고 감사하는 수준이라면 받은 것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취직시켜 준 것이 은혜라면, 취직이 안되었을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건강하게 해 주신 것이 은혜라면 건강하지 못하고 병들었을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 믿고 모든 일이 순탄하게 잘 풀려나가는 것이 은혜이고 사랑이라면, 사업이 망하고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게 되었을 때 그래도 그 은혜와 사랑이 유지되겠습니까? 필시 은혜와 사랑은 원망으로 뒤바뀌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는 사랑은, 받아서 기분 좋은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은 독수리이고 우리는 그 새끼라는 관계에서 얻어지는 사랑입니다. 독수리가 새끼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하늘을 날면서 새끼를 주시하고 있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사랑입니다.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새끼를 떨어뜨리는 것도 역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여러분 마음 깊숙이 느껴지기를 바랍니다.

 

 

 

 

4절에 보면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고 말합니다. 공덕이 완전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은 완전하신 일이기 때문에 불공평이 있을 수 없고 거짓이 있을 수 없고, 불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야 자기 이익을 위해서 양심을 속이고 법을 무시고 뇌물을 받으며 거짓과 불공평으로 나아가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목사라고 해서 치우치지 않으시고, 헌금을 많이 했다고 해서 봐주는 것이 없고, 봉사를 많이 했다고 해서 더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부터 인간을 보고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는 단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있을 뿐이지 잘하고 못하는 것에 의해서 구별되는 백성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하시고 공평하시고 진실하시고 정직하신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지금껏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우리의 행위를 조건 삼아서 받고 못받는 것을 계산하면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5절의 말씀대로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세계로 인도하시고자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만드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일에서 하나님은 반석입니다. 흔들림이 없고 변하는 것 없이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내 손에 쥐어지는 것, 내 입에 들어오는 것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변하는 것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면서 살아갑니다. 손에 쥐어지는 것으로 은혜를 말하고 사랑을 말하는 수준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는 것으로는 안심을 하지 못합니다. '지키신다면 내가 잘살아야지'라는 불평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합니다. 사랑에 깊이 빠져들지 못한 어린아이 같은 모습입니다.

 

 

 

 

6절에 보면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고 말합니다. 지금 신자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얻으시고 지으시고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이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얻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살아올 수 있었음을 잊어버립니다.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지으시고 세우셨기 때문에 성령 안에 세움 받은 자로서 주님을 찾을 수 있었음을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우매무지한 백성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언제나 세상에 굳게 서기를 바라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얻으시고 지으신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세계에 굳게 서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이 진정한 자녀로서의 참된 마음인데 오늘날 우리는 이 마음을 상실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자녀라고 하면서 은혜를 말하고 사랑을 안다고 합니다. 왜 이같이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이 교회 지어바치고, 돈 바치고, 몸바치고, 시간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것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 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바치는 것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바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보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아는 자로서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행동도 아니고 정성과 노력도 아닙니다. 다만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얻으셨다.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 하나님이 나를 세우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나를 만드시기 위해서 일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리 요구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를 아는 자로 살아갈 것을 요구할 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아는 것보다는 내가 받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은혜도 모르고 사랑도 모르는 사람이 아닌 자의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의 세대는 아버지를 상실했습니다. 오직 자기만 살아있는 세대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든 그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 관심거리입니다. 모든 일을 자기들의 힘으로 처리하려고 합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도대체 아버지의 은혜를 왜 그렇게 보답하는 것입니까?

 

 

 

 

신앙생활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못하면서도 아버지께 자기 신앙을 부탁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를 상실한 신앙인입니다. 물론 이것을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죠. 단지 교회를 다닌다는 것 때문에 가지고 있는 명목상의 신앙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또한 우리들의 보금자리를 굳게 지켜주시는 사랑으로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를 지키시고 눈동자 같이 보호하시는 것이지만, 그것이 결코 보금자리를 향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들이 보금자리를 굳게 붙들고 그 속에 안주하려고 할 때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떨어뜨리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얻으시고 하나님의 세계에 굳게 세우시기 위해서 오늘도 독수리가 새끼 위에서 그를 바라보며 날고 있는 것처럼 우리 위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보금자리를 흔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떨어지는 새끼를 못본체 하지 않으시고 날개로 받으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으로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불안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셨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뭔가 극적인 순간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감격적인 경험을 하지 못해서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는 것에 시들해지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하루 세끼 먹으면서 굶지 않고 살아온 것은 과연 누가 지켜주고 보호해준 결과입니까?

 

 

 

 

그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도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 결과입니다. 말씀을 들을 줄 알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로 교회에 모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얻으시고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에 주어진 결과입니다. 이 사랑에 시들하고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버리고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왜 이같이 보답하느냐?'고 외치십니다.

 

 

 

 

사랑을 아는 자는 세상보다 하나님이 크게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제대로 보답하는 신자입니다. 세상여건 때문에 불평불만 하지 말고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설령 보금자리가 흔들려서 떨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오늘도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말씀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외칠 것이고, 여러분에게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기적이 일어날 때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사랑으로 채워진 마음, 그것으로 이미 복된 자이고 자유자이며 세상이 두렵지가 않은 자입니다.

 

 

 

 

우리 함께 이런 신자로 살아가기를 원합시다. 마음은 원이로되 그렇게 되어지지 않을 때 낙심만 하지 말고 하늘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그 부탁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여러분을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떤 황무지에서라도 광야에서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의 종말 (신 32:20-30)


신앙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축복이라고 말하는 행복이란 '어떤 사람이 되어졌느냐?'에 그 근거를 두고 있고, '어떤 사람이 되어졌느냐?'는 문제는 곧 '마음의 변화'를 묻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마음의 변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마음의 변화를 어떻게 말합니까?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마음의 변화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지혜'라고 부릅니다. 결국 행복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느냐 없느냐에 그 근거를 둔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복의 근거를 소유에 두고 있습니다. 소유를 통해서 행복을 찾고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무엇을 소유한다고 해도 소유로부터 오는 행복은 일시적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 또한 소유를 해봤기에 '소유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는 제 말에 고개를 끄덕일 줄로 압니다.

 

 

 

 

만약 소유함으로서 행복해진다는 말이 진리이고 사실이라면 '부자는 행복하다 그리고 가난한 자는 불행하다'는 말이 세상 속에서 만고 불변의 법칙으로 통용되어져 왔어야 합니다. 그러나 소유함으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세상에서조차도 '부자는 행복하다'는 말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소유하기를 원하면서도, 소유하면 뭔가 행복해질 것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면서도 '부자는 행복하다'는 말은 틀렸다는 것을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소유 자체가 행복이 아님을 알면서도 소유하고 싶어하고 소유하면 세상을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유하지 않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부자는 행복하다'는 말이 잘못된 것 같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는 말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소유에서 오는 행복을 말하기도 합니다. 모든 근심 걱정은 소유로부터 오는 것이니까 소유가 없으면, 즉 무소유로 살아가면 근심 걱정의 원인이 사라지니까 행복해질 수 있다는 논리를 폅니다. 이 말이 가능할 수는 있습니다. 소유가 없이 무소유로 살아간다면 분명 인간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인간 가운데 과연 무소유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집 없고 돈 없다고 해서 무소유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것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다못해 지하도에서 노숙하는 세계에도 자기 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좀 더 따뜻하고 편한 장소를 먼저 차지하고 그것을 자기 자리로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침범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땅도 아니면서 먼저 그 자리에 앉았다는 것만으로 자기 영역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보기 어려운 광경이지만, 옛날 완행열차라는 것이 있을 때는 지정 좌석이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먼저 앉으면 목적지까지는 내 자리로 주장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좌석을 확보하기 위해서 개찰을 하면 바쁘게 뛰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시대에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창문으로 자신의 보따리를 집어 던져 놓고는 그 자리를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광경입니다. 내 보따리가 먼저 자리에 있다는 것으로 목적지까지는 내 소유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무소유로 살아가는 인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앞의 제 말에 대해서 부정을 하신다면 인간으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소유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 소유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지 않습니까?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은 끊임없이 자기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무소유로 산다면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있겠지만, 무소유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없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단지 직장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돈도 버리고 산 속에 홀로 틀어 박혀서 산천을 벗삼아 세상을 잊어버리고 산다고 해도 '자기'라는 굴레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자기'라는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자신을 돌아보고 비교하면서 자존심이 상하고 자기 빈곤감을 느끼면서 모든 즐거움과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생활이 아닙니까?

 

 

 

 

그래서 인간은 소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행복을 소유와 무소유의 관계에서 찾기보다는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마음의 변화에서 찾아야 합니다. 소유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소유하지 않았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마음의 변화, 즉 지혜가 있음이 행복의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예배드릴 때마다 기도하면서 입버릇처럼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반복합니다. 그 말만 들으면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같고 날마다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날마다 살아가는 삶이 실제로 기도처럼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입으로는 예배 순서에 따라 찬송가 몇 장 몇 장을 부르면서 은혜가 된다고 하면서도, 과연 우리들의 삶은 찬송가처럼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헌신으로 헌금을 바친다고 하지만 그것이 진심으로 우리 삶의 얼마만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 있고, 예배와 생활이 나누어져 있고, 말씀과 행동이 각각 구분되어 있음을 더욱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입에서는 감사가 나오지만 삶은 실제로 행복하지 못하고, 헌신은 하면서도 하루하루가 마음에서 우러나온 기쁨으로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도 행복을 느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식의 종교의 병폐이며 예배 중심적인 신앙의 한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근거로한 마음의 변화가 없이 행복과 기쁨의 삶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교회에서 헌신을 하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하며 시시때때로 빠짐없이 예배를 드려보십시오. 그것이 과연 여러분에게 기쁨과 행복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까?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이러이러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복이 있다는 것은 곧 행복하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이 있는 자는 소유가 있고 없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단지 마음의 변화를 말할 뿐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온유한 자, 화평케 하는 자 등등 복있는 자의 모습은 모두가 마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마음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습니까? 마음은 내 뜻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뭔가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음으로서 마음이 변화될 수는 있습니다. 생각하는 바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이 지혜가 있음으로서 변화된 마음인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20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고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종류요 무신한 자녀임이로다"라고 말하고, 29절에서는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부터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홀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고 함께 하심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배부름과 풍족을 얻게 하십니다. 배부름과 풍족으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15절에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라는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게 되자 하나님을 발로 찼다는 것입니다. 배부름과 풍족함에 이르게 되자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이 여겼다고 합니다. 소유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셨다는 증거물로 나누어진 것인데, 그렇다면 소유가 있음으로 인해서 더욱 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랑에 감사하며 하나님만 찬양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소유 자체를 사랑해 버린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고 진노를 격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문제점이자 오늘 우리들의 문제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얼굴을 숨겨 버리고 그들의 종말이 어떠한지 보시겠다는 것입니다(20절). 그 종말의 모습이 21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29절에서 이 종말을 아는 것을 가리켜서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의 종말은 세상의 종말만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곧 나 자신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종말을 생각할 때는 '세상이 망하는구나'라는 것으로 그쳐버릴 것이 아니라 '나 역시 망하는 존재다', 즉 자기의 종말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의 종말을 깨닫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배부름과 풍족함에서 여호와를 발로 차버리고 하나님을 버리며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고 진노를 격발하게 하였다면, 오늘 우리가 바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소유가 풍족한데 여호와를 왜 믿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배부르고 많은 것을 소유한 자로서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고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는데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는 인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종말은 곧 우리의 종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종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패역하고 무신한 자녀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지혜란 종말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끝이 나고 내가 어떻게 끝나는가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 있는 자입니다. 이 지혜가 있음으로서 마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종말에 소유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종말에는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종말을 깨닫고 자기의 끝을 바라보고 사는 자는 '나에게 끝까지 남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변화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에 끝까지 미련을 두고 붙들려고 합니다. 소유가 사라지는 것을 아까워하고 아쉬워합니다. 또 남보다 적은 소유에 대해서 자존심 상해하고, 적게 주어진 것에 대해서 불평을 합니다. 이것이 이미 행복과 기쁨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아무리 찬송하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헌금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의식으로 시작해서 의식으로 끝나는 것이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자신이 바쳐지는 것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상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지혜 있는 자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 종말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자기 종말을 생각하며 사십니까?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고 진노를 격발케 한 당사자가 바로 우리이며, 그런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의 불에 의해서 청년 남자와 처녀와 젖먹는 아이와 백발 노인에 이르기까지 망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종말임을 생각하며 사십니까? 이것이 정녕 우리들의 종말이라면 우리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고 비전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소망과 비전이라는 것들은 모두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아닙니까?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말하고 비전을 말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발로 차버리는 것이고 배반하는 것이고 질투를 일으키고 분노를 격노케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종말을 잊고 살아갑니다. 세상의 종말, 자기의 종말 모두를 잊고 살면서 열심히 자기 소유를 위해서만 땀흘리고 일하며 살아갑니다. 종말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 것을 배설물로 여기지 못하고,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자랑하고 우쭐거리려고 합니다.

종말의 자리에 자기를 세워 놓고 보면 사실 남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종말은 모두가 똑같기 때문입니다. 종말은 천국이냐 지옥이냐로 구분될 뿐이지 천국 안에서 또 다른 비교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지옥에서도 비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들이 끝까지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목사로 일한 사람은 평신도보다 더 많은 상을 받고 봉사 헌신을 많이 한 사람도 역시 상을 받을 것이고 헌금을 많이 한 사람 역시 큰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함으로서 천국을 행복이 있을 수 없는 천국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비교가 있는 자리에 행복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종말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종말은 모든 자가 동일합니다. 배부르면 하나님을 차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고 자신의 소유를 사랑함으로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는 것에는 모든 인간이 동일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음부 깊은 곳까지 태워버리시겠다는 종말을 피할 인간이 없고, 좋은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뭔가 다른 종말을 맞이하는 인간이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종말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을 보게 되면 여러 가지 차별과 비교 속에서 수많은 계층의 인간으로 구분되지만, 종말을 생각하고 보게 되면 모든 인간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기 있고 얼굴이 잘생긴 탤런트와 나 자신을 비교하면 여러 가지 차별이 발생하지만 종말 앞에서는 동일합니다. 재벌과 가난한 자를 비교하면 분명 차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말 앞에서는 오직 한가지만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 받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종말 앞에서는 무엇을 했다 안했다 가졌다 못가졌다가 통용되지 않습니다. 단지 "너는 하나님만 사랑하였느냐"를 물을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6:22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종말에 묻는 것은 '주를 사랑하였느냐' 이것 하나입니다. 그런데 종말을 생각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내가 주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기보다는, '저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가졌는가?'를 생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불행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이 연속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종말을 생각할 때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본질을 본질 그대로 보지 못하고 세상의 직위나 소유의 정도, 또는 행위를 덧붙여서 바라봅니다. 예를 들어서 - 1이 있고 + 1이 있다고 할 때, 이 둘은 똑같이 1입니다. 그러나 +가 붙어 있고 -가 붙어 있음에 따라서 1을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1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 앞에서 인간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종말은 1이라는 숫자에 붙어있는 +나 -를 떼어버립니다. 즉 1만 바라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은 저를 '신 목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해서는 '○ 장로' '○ 집사'라고 부릅니다. 세상은 목사와 장로 집사와의 관계에 차별을 둡니다. 즉 1만 보는 것이 아니라 + 와 - 를 함께 보는 것입니다. 결국 +1과 -1이 서로 다르듯, 목사와 장로 집사를 서로 다르게 구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을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종말을 생각하게 되면 목사와 장로 집사라는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다만 인간만이 남을 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선행을 베풀었다고 해도 종말 앞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한 것도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죄인인 인간만 남을 뿐입니다. 죄인인 인간 사이에 비교할 것이 있고 자랑할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자기 발견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를 발견했을 때, 목사도 장로도 의미 없는 것이고 오직 망해야 할 내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만이 의미 있는 분으로 남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종말을 생각하는 지혜로 인해서 변화된 마음인 것입니다. 이 마음의 상태가 곧 행복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본질을 발견했을 때, 목사는 목사대로 장로는 장로대로 그 의미가 새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기 종말을 잊어버리고 종말에 대해서 안심하고 대비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종말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가 크다는 것이 종말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전도를 수천명 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분노를 수그러뜨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 때문에 더욱 더 질투를 일으킬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교회에 올 때는 자기 종말을 체험한 자로서 와야 합니다. 그리고 종말을 보여줘야 합니다. 종말에 목사도 남지 않고 장로도 남지 않고 재건교회라는 교단도 남지 않고 웅장한 예배당도 남지 않고 나의 선행도 남지 않고 봉사하고 헌신했던 내 믿음도 남지 않고 오직 남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을 부지런히 보여주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종말을 체험한 신자로 모이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종말 앞에서 태워지고 사라질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랑한다면 십자가뿐입니다.

 

 

 

 

비교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남의 것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고 내것을 지키고자 발버둥치는 마음도 없는 이 상태가 바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종말을 생각하며 삽시다. 내안에 십자가가 있다면 종말에 남을 것은 오직 그것 하나입니다. 그것 하나 바라보고 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 있는 신자이며 마음이 변화된 신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말에 남아있지 않는 것을 미리 팽개쳐 버려라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각자 다르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좋고 나쁨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것, 이것은 나쁜 것이라고 구별하지 말고 작으면 작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그 역할이 있고 의미가 있음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어차피 종말에는 다 사라지고 없는 것들인데, 좋고 나쁜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모두 우리가 스스로 세운 기준이고 그 기준 역시 세상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지 않습니까?

 

 

 

 

자기 종말을 생각하며 살 때, 우리는 너무 욕심을 부리며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쓸데없는 것에 목숨 걸고 집착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종말은 우리에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세상의 흔적들을 훌훌 털어 버리게 할 것입니다. 다 털어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금 현재 나 자신을 돌아봅시다. 그럴 때 모든 것이 넘치는 은혜로 자리할 것이고 그것이 곧 여러분에게 행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신 32:31-43)


기독교 안에서는 기독교를 참된 종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신이고 나머지는 모조리 우상이기 때문에 유일하신 참 신을 섬기는 기독교만 참된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안에서 밖을 향하여 외치는 종교적 아집이요 고집일 뿐 세상은 결코 기독교만 참된 종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말하기를 모든 종교는 같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 볼 때 도대체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르는 신의 명칭이 다를 뿐, 추구하는 것이나 목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들이 자기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기독교를 향해서 '그래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만 참 신이고 너희들의 기독교만 참된 종교다'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스스로 참된 종교라고 말하면서 참된 모습은 떼어 내 버리고 단지 종교로서의 모습만 열심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참인지도 모를뿐더러, 아예 처음부터 참된 것에는 관심 없이 단지 종교의 옷만 열심히 껴입고 있는 실정인 것입니다. 몸은 비쩍 말랐는데 옷을 너무 껴입어서 겉으로는 비대하게 보이고 몸조차 마음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뒤뚱거리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이라고 보여집니다. 기독교가 진심으로 참된 종교로서 세상에 보여지기 위해서는 '종교'에는 관심을 끊어버리고 오직 ''에만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 참된 것이 우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 오늘날 세상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만이 참되다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은 거짓된 것임이 기독교를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기독교라고 이름하는 단체가 세상의 거짓을 드러내고 참된 것, 즉 진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기독교가 지금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진리가 아니며, 우상을 섬기는 거짓 종교라고 매도하는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보여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지금 세상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눈이 어떨 것 같습니까? 아마 같은 물에서 같이 놀고 있는 한패로 여길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고 안믿는 것만 다를 뿐, 믿는다고 하는 사람도 나와 같은 물에서 같이 놀고 있다고 여기고 있지, '역시 참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어서 그런지 우리하고는 생각하는 차원부터 다르다'는 느낌을 주고 있지를 못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부터 스스로 점검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과연 참된 것, 즉 진리만을 좇아가는가 아니면 참된 것을 외치기는 하지만 여전히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서 종교를 추구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하고 난 뒤에 '기독교만이 참되다'는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기독교라는 종교의 참됨을 증거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참된 것, 진리에는 전혀 관심도 없이 그리스도를 말하고 기독교를 참된 종교라고 말하는 그 허구성을 깨닫자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참된 것인지 자신 조차도 모르면서 기독교를 참되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내 것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 기독교의 잘못이라면 같은 물에서 같이 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같은 물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자를 같은 물에 있게 하신 것은 같이 놀아라고 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놀고 있는 물 자체가 멸망의 자리요 심판의 자리임을 증거 하라고 우리를 같은 물에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물에서 같이 놀고 있으면서 아무리 진리를 외치고 복음을 외친다고 한들 과연 진리가 진리로서 복음이 복음으로서 드러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결국 진리의 훼방자, 복음의 원수는 기독교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리를 알고 복음을 안다고 하는 바로 우리 자신들이 진리의 훼방자이며, 복음의 원수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란 성실한 믿음과 착한 성품 행동을 가진 인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 밖에도 성실한 믿음은 존재하고 착한 성품과 행동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가지고 신자라고 주장하거나 진리의 모습으로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신자란 자신의 삶과 죽음에 우리가 진리라고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셔서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삶과 죽음을 그리스도께 맡긴 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는 것도 주께서 하신 일이고 죽는 것도 주께서 하신 일임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아직 나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이고, 죽는다면 내가 해야 할 사명이 다 완료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같은 물에 있어도 같이 놀지 않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는 세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한분이신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가 보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가 없이 우린 감히 '신자'라는 말을 언급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신자라고 생각하든 교인이라고 생각하든 그것은 여러분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마지막 때 새 하늘과 새 땅에 포함될 참된 신자만큼은 여러분 마음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 속에서 결정되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스스로 신자라고 생각하려면 여러분의 배후에 누가 계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신자입니다'라는 이 고백 한마디는 '나는 착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교회를 다닙니다' '나는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이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물론 우리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은 하지만, 그 하나님은 우리 삶에 직접 개입하셔서 우리를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죽어갈 때 '살려달라'고 외치면 달려와서 살려주는 꼭두각시 같은 하나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기독교 안의 신자가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신자 역시도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살아갈 때는 내 힘으로 살고 있다고 여기고 살려주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죽어갈 때는 죽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려달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참된 것을 잊어버리고 세상과 같은 물에서 같이 놀고 있는 기독교도 아니고 신자도 아닌 모습입니다.

 

 

 

 

본문 39절에 보면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살려주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죽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낫게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상하게도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분이 우리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서낭당의 고목이나 길가에 서있는 장승처럼 내 밖에 서 있는 신이 아닙니다. 내가 필요할 때 찾고 달려오는 신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영으로 계시면서 나의 주인으로 역사 하시는 분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나의 주인으로서 영으로 계시는 분을 이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운 것으로도 형상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실재를 내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흔히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을 보여 봐라'고 하는 것도 영으로서 우리 안에서 우리 주인으로 내주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영으로서 우리 안에서 내주 하시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내가 곧 내 삶의 주체인줄로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밖에 서 계시는 장승처럼 여겨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실상은 자기가 주인 되어서 자기 뜻대로 세상을 살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죄가 있고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심으로써 살 수 있는 존재인데 자기 스스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어리석음의 인생에서 남는 것은 허무와 괴로움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께서 우리를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상하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신다면, 이러한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라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나를 살리는 것도 죽이시는 것도 상하게 하시는 것도 낫게 하시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살고 죽고 병들고 낫는 삶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으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사는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를 살아올 때 그들이 목마르고 마시고 주리고 배부른 모든 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배후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주리게 하신 것도 이유가 있고 누구도 맛보지 못한 만나를 먹게 하신 것도 이유가 있으며 목마르게 하신 것도 그들을 낮추신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단지 그것을 보지 못함이 곧 인간의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이 어리석음이 인간으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만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 현실에 집착해서 잘되면 교만하고 못되면 불평과 원망을 내뱉으면서 항상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오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여러분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분과 분명한 관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분께서 내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해 계시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내 인생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내가 열심히 일해서 이만큼 돈을 모았고 오늘날 이만큼 소유하게 되었다는 생각만큼 어리석은 생각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열심히 일하고자 해도 건강이 없으면 일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절약하고 아껴서 돈을 모은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돈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신다면 돈은 여러분의 수중에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직장에 다니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열심히 사업을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하신 것이며, 얼마나 모았든 모을 수 있고 소유할 수 있게 된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이 배후에서 일하신 결과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모아놓은 것이 내 손에 빠져나가고, 있던 것이 사라져 버리는 모든 것도 역시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그 진리를 세상에 드러내라고 하시는 일임을 아는 것이 바로 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돈을 많이 벌지 못하고 남들보다 어렵게 살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현실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래서 좀더 많이 벌어서 편안한 삶을 살아가는 현실을 꿈꿀지도 모르지만 바로 그것이 멸망당한 자들의 모습이었음을 아십니까? 눅 17:27-29절에 보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노아의 때나 롯의 때의 특징은 종말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지도 몰랐습니다. 그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신자도 역시 얼마든지 시집가고 장가들고 할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고 팔고 집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다른 점은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시집가고 장가가게 된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고, 사고 파는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으며, 집을 짓는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신 것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보여주라고 일하신 것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집가고 장가가며 살고 팔고 집 짓는 것을 현실로 생각해 버리고 그 현실로 기뻐하고 즐거워 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고, 종말을 잊어버린 것이며,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 현실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멸망의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32-33절에서도 그것을 말합니다.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쓸개 포도니 그 송이는 쓰며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악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소돔과 고모라와 똑같은 정신을 가지고 자기들의 소득물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같은 물에서 같이 놀아버리는 것입니다. 종말이 어떠하며 하나님이 심판이 있고 진노가 있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에 대해서 원수를 갚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열심히 일하고 돈 벌고 집사고 자식 가르치고 성공하는 것을 현실로 여기지만, 그래서 좋지 않은 현실에서 벗어나서 좋은 현실을 살아가기를 꿈꾸지만 신자가 바라보는 현실은 전혀 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상하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는 하나님이 배후에서 일하시는 것, 그것을 현실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눈에 보이는, 내가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가짜이며 무대에 세워진 세트에 불과하고 진짜는 내 배후의 세계에서 진행되어지고 있는 일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것을 보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내가 살아있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얼마든지 죽이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계획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볼 것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시는 계획이지 내가 살고 죽는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가 엉망이고 이러 저런 일들이 터질 때 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 뒤죽박죽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정치가 엉망이든 잘되든 세상에 무슨 일이 발생하든 분명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고, 그 마지막은 종말입니다. 이것을 모르고서 신자라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음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밥을 먹어도 자기 일을 위해서 먹을 것이고, 직장을 다녀도 자기를 위해서 다니게 되고, 돈을 모아도 자기를 위해서 모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종말을 모르는 노아의 때의 모습이고 소돔과 고모라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플 때 누가 아프게 하시는지를 아는 것이 참다운 지혜입니다. 건강하게 살아갈 때 누가 살리고 계시는지 알고 밥을 먹어도 누가 먹게 하시는지를 아는 것, 이것이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 속에서 참다운 것으로 좇아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른다면 그는 불신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일하실지 그 마지막이 무엇인지 내가 왜 살고 있으며 내 배후에 누가 계시는지를 모른다면, 그는 비록 교회당을 찾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성경을 보는 종교인은 될지언정 결코 참된 신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40-42절을 보면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노라 나의 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의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에 심판을 잡고 나의 대적에게 보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할 것이라 나의 화살로 피에 취하게 하고 나의 칼로 그 고기를 삼키게 하리니 곧 피살자와 포로된 자의 피요 대적의 장관의 머리로다 하시도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만 현실로 여기고 세상 것으로 웃고 울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세상에 대해 전쟁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전쟁을 하신다는 의식이 전혀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을 즐기기에만 바쁘고 편안하게 사는 것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지 예수님 편에 서서 싸우는 삶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같은 물에서 같이 놀기에 바쁘다 보니 복음이 아닌 것과 싸우려고 하지 않고 타협이라는 편한 길을 찾아갑니다. 이것이 사단에 붙들려서 죽음을 무서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실제입니다.

 

 

 

 

41절에 나의 대적에게 보수(복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전쟁입니다. 그 전쟁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외면하고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내 힘으로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전쟁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배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 편에 서서 전쟁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진리가 귀하지 않고 복음이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힘들게 해서까지 진리 편에 서야 할 이유가 없고 복음만 고집해야 할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속이 눈에 보이는 현실로만 가득차 있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자기 꿈을 실현시켜줄 것을 찾아 헤매고 있을 뿐이지 진리니 복음이니 하는 것에는 이미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들과 싸우실 것입니다. 43절에 보면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항상 보이지 않는 것에서 참된 것을 찾기보다는 보이는 것에서 참된 것을 찾고자 했습니다. 진리와 복음보다는 세상의 것을 더 간절히 원하고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뭔가가 손에 주어지면 내 힘으로 여기고 우쭐거렸습니다. 있던 것이 사라질 때는 하나님께 불평을 하면서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는 생각조차 안하면서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죄밖에 아는 것이 없고 죄속에 파묻혀 살아온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 속에 주님이 오셔서 사단과 싸우십니다. 사단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 세상이라는 현실에 대한 헛된 망상을 깨뜨리심으로서 우리 죄를 알게 하고 죄를 씻어주십니다. 그 전쟁을 통해서 발생하는 전리품이 바로 주님의 백성입니다. 전쟁을 통해서 얻어진 주님의 백성은 주님만 바라보게 되고, 주님의 전쟁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는 자가 되었음을 감사하고 주님만 가장 귀한 분으로 알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배후에서 나를 하나님의 백성 만들기 위해서 내 속에 들어와서 헛된 꿈을 부숴뜨리는 하나님의 실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세상의 배후에서 그리고 여러분의 배후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왜 전쟁을 하시는지, 왜 우리로 하여금 살게도 하시고 죽게도 하시고 상하게도 하시고 낮게도 하시는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내고자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역시 하나님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여러분의 인생과 현실은 잘먹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기 위한 인생이고,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지기 위한 인생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세상 일에 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며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참을 아는 신자이고, 같은 물에 있되 같이 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마지막을 알리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축복 (1) (신 33:1-5)


성경의 주제는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세상의 종말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만을 생각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 종말이 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면서 1:7절에서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라는 말씀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재림하실 때 모든 사람이 그를 보는데 예수님을 찌른 자들도 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찌른 자도 본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세상의 죄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그 죄로 인해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십자가의 마지막은 종말입니다. 지금은 괜찮은데 나중에 망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 십자가가 존재함으로서 세상의 종말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보면서 종말을 잊어버리고 다만 피흘리신 불쌍한 예수님만 상상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살기 좋은 낙원으로 데려다주는 십자가만을 연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인간들이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눈물이나 흘리고 있으라고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항상 반역만 하고 날마다 예수님을 찔러 대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낙원으로 인도하려고 있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십자가'를 말하고 '주님의 고난' 운운하면서 눈물 흘리다가, 돌아서면 주님과는 남남이 되어 버리고 세상을 향해서 미소짓고 달려가는 자들을 복주기 위한 십자가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세상은 심판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하다는 것을 명확히 드러내는 증거물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이 새롭게 인식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 희망을 두고 열심히 수고하고 땀흘리면 내가 원하는 낙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그러한 모든 수고와 땀이 헛된 것이라는 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은 세상에 대한 초조감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세상으로 인한 초조감이 있다면 그것은 말씀을 들을 자세가 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초조감이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현재 자기 위치가 불안정하다는 것에 대한 초조감이 있을 수 있고, 그로 인해서 장래 문제에 대한 불확실함 때문에 초조해 할 수 있습니다.

 

 

 

 

자식에 대해서 초조해 한다면 그 이유는 뻔합니다. 자식이 현재 공부를 못한다거나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라고 할 수 있는 조건들을 보이지 못할 때 '저게 나중에 뭐가 되려고 저러나'라는 초조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의 문제만이 아니라 직장이나 사업 공부 모든 분야에 있어서 미래에 대한 확실성을 가지지 못함으로서 초조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때문에 초조해지는 것은 세상을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나 사이에 십자가를 걷어버리기 때문에 초조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우리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지금 세상은 2000년이니 뭐니 하면서 21세기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지만, 인간이 아무리 땀흘리고 노력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루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든다고 해도 마지막 때 하나님은 '너희가 주를 어떻게 대했나'를 물으실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믿는다면 우리는 초조해 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속죄 제물의 완성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있음으로 이미 속죄제물이 완성된 것인데 무엇 때문에 초조해 하는 것입니까?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이미 확정되어서 이 세상에 계시로 주어진 이상, 신자가 '다 이루었다'는 말씀 앞에서 장래 문제로 인해 초조해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장래가 속죄제물 되신 주님 안에 확정되고 보장되어 있다는 것인데,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현재의 위치나 장래의 문제 때문에 초조해할 이유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신자가 초조해 하며 산다면 그것은 믿는 자가 아니고 십자가를 모독하는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십자가를 말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산다고 하지만 십자가와 전혀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은, 땅에 있는 우리가 항상 하늘의 뜻을 생각하고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지금 하늘에서 하나님은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계시고 일하시는지를 생각하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뜻이 아닌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내가 불려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장래를 생각하면서 초조해 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대학을 못가면 어쩌나' '나중에 자기 밥벌이도 제대로 못하면 어쩌나'라는 초조감으로 마음이 불안하지만, 자식 역시 내 뜻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나에게 보내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잠시 나에게 맡겨진 것으로 생각한다면 초조해 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일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초조감이 사라지지 않고, 초조감을 해결하기 위해서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도 역시 이 초조감에서 나오는 애타하는 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장래의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확실한 것을 지금 나에게 달라는 것이 기도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해서 교회로 발걸음을 돌리는 이유는 거의 대다수가 현재 위치와 장래 문제에 대한 초조감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뭔가에라도 매달리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그 마음이 교회로 발걸음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오늘날 현대인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이 세상을 살고 있는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믿음이란 우리를 굳게 붙드는 힘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는 속죄제물의 완성이 미래의 확실성으로 그 속에 굳게 자리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는 자에게 초조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며 사는 자에게 초조감이란 왔다가도 금방 사라져 버릴 안개와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초조감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초조해도 억지로 참아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자체를 행복으로 여겨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리스도를 행복으로 여기려고 해도 안되는데 어떻합니까?'라는 반문을 하고 싶습니까? 그리스도를 행복으로 여기고 싶어도 안되는 것은 끝까지 자기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에게 행복이 되면 나는 근심도 없고 초조감도 없고 불안도 없는 평안한 마음으로 기쁘게 살아가겠지'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볼 때 그렇게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역시 난 안돼'라고 자기에게 실망하고 결국 장래의 문제까지 흔들려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붕괴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사람은 자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인해서 초조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붕괴'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자리할 때 '자기 붕괴'라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서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고 말하는 말씀을 보면 33장은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하고 있는 축복의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축복을 안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는 말을 보면 오늘날 현대인들이 상상하고 있는 축복의 하나님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에 빠져있는 인간은 필연코 자기에게 도움을 주고 자기를 유익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축복의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면 성경은 분명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시편이나 여러 성경에는 하나님을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삶을 돕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도우신다는 것이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도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뜻을 위해서 존재하고 인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돕는 하나님은 우상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축복이라고 외치는 것도 역시 가짜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2-3절을 보면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들고 오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오른손에 무엇이 있습니까? 돈입니까? 승진입니까? 큰집입니까? 멋진 예배당입니까? 하나님의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고 오시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아는 자가 진짜 복 있는 자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오른 손에 있는 불같은 율법의 복을 아는 자는 주의 발아래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습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여 오늘은 무슨 말씀을 주시렵니까'하면서 QT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말씀에 의해서 자신이 붕괴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수류탄을 던졌다고 할 때, 그 수류탄을 받은 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류탄이 터짐으로서 자기 자신은 산산조각으로 분해되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수류탄을 받은 자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류탄이 던져질 때 피하고 도망치려고 하지 누구도 그것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마치 이와 같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새해가 되면 목사가 성경구절을 적은 쪽지를 뽑아 주면서 그것이 한해 동안 그 가정에 주는 말씀이라고 말한답니다. 그리고 말씀이 적힌 쪽지를 받은 가정에 우리 가정에 이런 귀한 말씀을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헌금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정마다 주기 위해서 쪽지에 성경구절을 적는다면 과연 어떤 구절을 적어 놓겠습니까? 몽땅 듣기에 좋은 말들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씀을 받으면서 은혜가 된다고 하고 감사하다고 헌금을 하는 작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장래에 대한 보장도 아니고 희망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장래의 초조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붕괴입니다. 마치 수류탄이 우리 가슴에 집어넣어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 붕괴, 이것이 말씀을 받게 된 자의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주어질 때 왜 자기 붕괴를 가져오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오른손에 불같은 율법이 있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냥 율법이 아니라 불같은 율법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불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불이라는 것은 태워버리는 것이고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 율법을 축복으로 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것은 축복은 율법, 즉 말씀에 의해서 내가 태워지고 사라지고 심판을 받는 것, 자기 붕괴가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고 오시는 축복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모든 죄를 드러내고 심판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나의 모든 죄가 드러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숨겨 있던 죄까지 다 드러남으로서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치장하고 있었던 도덕과 윤리까지 벗겨짐으로서 부끄러운 자신의 실체가 여지없이 발각되는 현장이 말씀의 자리입니다. 그로 인해서 '나는 괜찮은 인간이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희망 기대감들이 모두 다 무너질 때 사람은 자기 붕괴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붕괴 속에서 비로소 내 앞에서 나를 가로막고 심판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말씀이란 내가 듣고 이해하고 인정한다고 해서 말씀을 받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말씀을 들은 자이지 말씀을 받은 자는 아닙니다. 진정한 축복의 현장은 주의 발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은 수류탄과 같습니다. 내 속에서 말씀이 터질 때 나라는 존재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 아끼며 사랑했던 것들, 열심히 쌓아왔던 것들, 고이고이 간직해 왔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붕괴되고 사라지고 없어지는 현상이 내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진심으로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하고, 그래서 말씀의 사람이 되고, 말씀에 순종하게 되고, 말씀에 이끌려가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왜 보십니까? 왜 말씀을 듣습니까? 설교가 없으면 예배가 아니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듣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헛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말씀을 봅니까? 그것도 역시 헛일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말씀을 대할 때 내가 붕괴되어지기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철저히 나를 붕괴시켜 주십시오'라는 간절함으로 말씀 앞에 나오는 것, 이것이 진심으로 말씀을 받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가 되었다는 것, 참으로 놀라운 축복의 자리로 이끌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는 것은 주의 발아래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 자 되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말씀을 받는 자 되게 하는 것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일을 가지고 쉽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일이 잘되는 것이 사랑이고 축복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잘되는 것에 대해서 할말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말씀을 너무 소홀히 여깁니다. 말씀을 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에게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순간은 그 말씀에 의해서 내가 어떤 자인가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말씀을 받느냐 밀쳐 내느냐에 따라서 내가 무엇을 따라 사는가가 발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우리에게 자기 붕괴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에게 위기를 가져오고 우리를 위태롭게 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 때문에 내가 위태로워지는 것이 싫어서 말씀을 밀쳐낼 때 그로 인해서 내가 바로 주님을 찌른 자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신 것은 주님이 하신 말씀들 하나하나가 인간을 위태롭게 하고 소중히 생각하고 아꼈던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불같은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마지막때는 말씀에 의해서 심판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지금 말씀이 있는 현장에서 말씀을 선택하고 말씀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장차 천국갈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갈 자 지옥갈 자라는 것은 나중에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심판하실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있는 지금 이미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붕괴가 없는 말씀은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우리는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깨어지는 그 순간에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말씀이 없는 삶은 결국 허무로 끝나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말씀이 소중한가를 생각하십시오. 말씀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세상 것들을 모두 무너뜨리고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에 소중합니다. 말씀이 없이는 우리의 죄가 무엇인가를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모르면 자기 의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의가 드러난 현장에서 가려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마지막 때 심판의 기준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현재의 자기 위치나 장래에 대해서 초조감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자기 붕괴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현재나 장래에 대해서 확실성을 심어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 것으로 초조해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세상에 대해서 초조하기 때문에 말씀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고, 말씀이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참된 축복에 대해서 눈이 가려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죽입니다. 우리를 붕괴시킵니다. 무엇하나 의지할 것 없고 붙들 것 없는 세상의 실체에 대해서 깨닫게 합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합니다. 그리고 현재나 미래에 대해서 우리의 가장 확실한 보증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속죄제물의 완전성을 의지하고 살아가게 합니다. 헛된 것이 무엇이고 확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고 산다는 것이 자기의 것이 무너지고 주님의 것을 의지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옴으로 가능하게 되어졌음을 알고 그동안 세상에 의해서 가려졌던 주님을 말씀으로 인해서 확실하게 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축복 (2) (신 33:6)


하나님은 인간의 인생을 도와주는 분이 아니라 반대로 인생을 소유하시고 하나님 마음대로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반발을 합니다. 그 이유는 나의 인생은 내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인데 왜 하나님 당신 마음대로 사용하느냐?'는 것입니다. 인생을 자기 것으로 알고 자기의 열심과 노력으로 자신의 인생을 지키려고 하고 멋들어진 인생을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인간이고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내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입니다. 어느 인간이 자기 스스로 세상에 태어납니까? 인간은 부모의 뱃속에 잉태되면서부터 태어나고 죽기까지 자기의 선택에 의해서 인생을 꾸려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인생의 선택권이 인간에게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권력 있고 돈있고 좋은 환경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에도 태어나고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태어난다는 그 자체가 인생은 우리 것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주관에 의해서 우리의 인생이 만들어지고 인도함 받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그분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던져진 것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인생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왜 우리에게 인생이 주어졌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 쓸데없는 것에 힘을 낭비하지 않고 인생을 주신 분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인생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운명을 개선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자기 운명을 책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무지함입니다. 이런 무지한 인간이 지혜를 얻게 되었다면 그 지혜는 과연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게 하겠습니까? 지혜는 내 인생을, 내 운명을 붙들고 있고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스스로 살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알게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것을 몰랐던 것이 우리들입니다. 인생이란 우리들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우리들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대로 되어진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사람들은 들어올 수 없는 그리스도안이라는 축복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인생에 관심을 두는 자들은 많았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고민을 하는 사람도 많았고,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에 빠진 사람도 많았습니다. 산다는 것이 뭔지 죽는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항상 결론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근본을 모르기 때문에 해답이 나올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에 대해서 확실하게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게 하셨고 하나님이 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나게 하시고 살다가 죽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를 모르고 은혜를 모르는 이 세상에서 은혜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는 자료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에 대한 해답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는 갈등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사용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쓰여지고 있다는 것까지는 그런 대로 군소리 없이 받아들일 수가 있는데, 문제는 어떤 모습으로 쓰여지고 있느냐입니다. 가령 돈 많은 부자 되게 하시고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한 인생이 되게 하셔서 나를 쓰신다면야 얼마든지 환영을 하겠는데 그렇지 않고 고생하고 힘들게 사는 인생이 되게 해서 쓰신다면 누구나 기겁을 하고 도망쳐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떻게 사용하시든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린 오직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게 되는 가에만 관심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인생을 포기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자기 인생을 포기했다고 하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포기했다는 것은, 내 힘으로 내 인생을 가꾸고 개척해 보려는 욕망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 있으면 있는 자로서 은혜를 증거하는데만 관심을 두고, 돈이 없으면 없는 자로서 은혜를 증거하는데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을 아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 소유 당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들고 오시는 축복은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그 말씀 앞에 엎드려서 말씀을 받는 자 되게 하시는 것에 대해서도 알았습니다. 말씀 앞에 엎드리고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말씀을 선택해서 내가 내 의지에 의해서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선택하고 말씀이 나에게 오셔서 나를 말씀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의 사람이란, 말씀을 지키고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소유된 사람입니다. 말씀이 신자를 소유해서 말씀이 의도하는 대로 인도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말씀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서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복은 내가 소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 당한 것을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에게 소유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는 도구로서 사용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복입니다.

 

 

 

 

그래서 축복의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지 하나님더러 자기에게 와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 역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머리되신 분을 따라가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따라간다'는 말에는 자기 인생에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면서 주님의 은혜를 세상에 증거하고자 살아 갈 때 인생은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펼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정하고 받아들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축복을 자기 인생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으로 오해해 버렸습니다. 예수님 역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으로 왜곡시켜 버린 것이 현 교회입니다. 이러한 왜곡 속에서 나오는 인간의 모든 종교 행위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껍데기를 둘러 쓸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잘보여서 복받겠다는 욕심이고, 십일조는 하나님께 나의 정성을 확인시켜서 복을 누리겠다는 욕심입니다. 기도 역시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지고 싶어하는 욕심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우린 꼭 욕심이 없이 사는 것처럼 들리는데, 사실 우리 역시 욕심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지 않습니까? 우리 입에서는 복음이 나오고 우리 마음도 주님을 믿는 것처럼 생각이 되는데, 사실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욕심이 살아서 꿈틀거리고 내 인생에 대해서 포기되어지지 않은 집착도 여전하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들을 어떻게 믿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복음이 무엇인가는 알고 있지만 복음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주님을 안다고 하지만 주님만 따라가는 삶도 살지 못하고,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역시 말씀에 대해서 실패한 자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우리들을 어떻게 믿는 자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말했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인가 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이 다 이루셨고 완성하셨는데 우리가 나서서 보태어야 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인가를 행동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했다거나 부족했다는 얘기 밖에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무엇인가 하지 못한 것 때문에 스스로에게 낙심하고 실망한다는 것은, 여전히 은혜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신자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언제나 실패자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실패자가 성공자로 바뀌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신앙이 아닙니다. 실패자가 자기의 실패를 아는 것이 바로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자기의 실패를 알았을 때,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나는 분명 실패자인데, 내 속에는 예수님을 믿을 만한 조건도 자질도 전혀 없는데 어떻게 해서 아직까지 주를 주로 믿는다고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뜬 자가 바로 성공자이고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인간이 실패했다고 해서 실망하시고 실패한 인간에 대해서 책임을 묻고 버려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실패자에게 다가오셔서 말씀이 그를 소유하심으로서 주를 믿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인간으로 하여금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을 선택하시고 소유하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명기 33장은 이스라엘을 축복하시는 내용입니다만, 축복을 인간이 잘해서 세상의 좋은 것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는 개념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신명기를 살펴봤지만 이스라엘이 잘했다고 말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온통 실패하는 모습들만 나열되어 있는 것이 신명기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의 주제는 '인간은 죄인이다'는 것입니다. 실패한 죄인 주제에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죄 값은 사망이라는 말씀대로 죽어야 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져야 할 당연한 대가가 아닙니까?

 

 

 

 

본문을 다시 보면 "르우벤은 살고 죽지 아니하고 그 인수가 적지 않기를 원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르우벤을 향한 축복입니다. 이 말은 르우벤 지파가 살아서 번창하기를 바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보고 르우벤 지파가 좋은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르우벤이 받은 축복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르우벤이 과연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창 49:3,4를 보면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야곱이 죽을 때에 자기 열 두 아들에게 각각 후일에 당할 일을 미리 말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르우벤에게 결코 좋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르우벤의 미래는 탁월치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창 35:22절에 보면 르우벤이 서모인 빌하와 통간한 내용이 나오는데, 아비의 침상을 더럽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르우벤은 장래가 탁월치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르우벤은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서모와 통간한 것이 잘못입니까? 서모와 통간했다는 것 자체를 두고 잘못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윤리이고 도덕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서모와 통간하지 않은 사람은 의로운 자가 되버립니다. 야곱은 르우벤을 향해서 서모와 통간한 것 때문에 탁월치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비의 침상을 더럽혔기 때문에 탁월치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서모와 통간했다는 행동 하나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비의 침상을 더럽히는 것으로 말함으로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서모와 통간한 자는 저주 받는다가 아니라 아비의 침상을 더럽히는 자는 저주받는다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나쁜 행동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된 행동을 하게 하는 뭔가가 우리 속에 본질로서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르우벤이 서모와 통간하는 것도 서모와 통간했기 때문에 죄인이고 그러니까 너는 저주 받아라는 것이 아니라, 서모와 통간하는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이미 르우벤 안에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죄가 바로 아비의 침상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레위기 18:8절을 보면 "너는 계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아비의 하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계모의 하체를 아비의 하체와 일치시킴으로서 계모의 하체를 드러내는 것은 결국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경우를 보면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고 쓰러져 있을 때 함이 아비의 하체 드러낸 것을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여기에서 함과 셈 야벳의 행동은 둘로 구분이 됩니다. 아비의 하체, 즉 아비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고 가리는 행동과 아비의 수치를 드러내는 행동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함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셈을 축복하는데 셈 자체를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셈의 하나님을 찬송함으로서 그러한 행동을 드러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사건이 말하고 있는 것은, 노아의 식구가 홍수 속에서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데, 그 은혜를 드러내는 것은 축복이고 가리는 것은 저주받을 모습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치를 가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방해하는 함의 행동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고 볼 때 르우벤이 서모와 통간한 것은 곧 아비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살렸다는 은혜성을 모독하고 가리는 것이기 때문에 저주받을 모습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결국 르우벤의 악함은 서모를 통간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했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러한 악함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부끄러움을 보지 않으시고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드러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부끄러움을 가려줄 줄 알고, 다른 사람의 부끄러움을 통해서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들은 이웃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일에 열심입니다. 이웃에게 부끄러움이 되고 수치 되는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재미있어 하고 즐기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웃의 부끄러움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르우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르우벤이 곧 저와 여러분이고, 따라서 우리가 저주받을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르우벤이 죽지 않고 살고 그 인수가 적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야곱은 르우벤의 장래에 대해서 탁월치 못할 것이라는 저주를 했는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하신 축복의 말씀에는 죽지 않고 살고 번성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한 저주는 무용지물이고 허풍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이 르우벤을 저주한 것이나 하나님이 모세를 축복한 것은 모두가 르우벤이라는 한 개인을 향한 장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장래를 르우벤을 통해서 미리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르우벤 같은 그런 정신은 저주받을 정신임을 말함으로서 르우벤과 같은 속성을 드러내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저주 안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축복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저주 안에 있는 인간이지만 하나님이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야곱의 저주와 하나님의 축복이 전혀 상반된 것이 아니라 축복이 무엇인가를 더욱 밝히 말해주는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상세하기 말씀드리느라고 얘기가 복잡하게 나열된 것 같은데, 간단하게 말해서 르우벤을 향한 하나님의 복은 저주를 극복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즉 저주 안에 있는 자가 저주를 극복한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를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해야 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편에서 하시는 일일뿐입니다. 인간은 단지 저주 안에 있던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고 저주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이며 이 일에 여러분을 사용하시고자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내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 지금까지 내 힘으로 세상을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내가 열심히 일하고 직장 다녀서 그 수입으로 자식 키우고 먹여 살리고 집도 장만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여러분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다만 보이지 않는 분이고 배후에서 일하신다는 어떤 기적적인 사건이나 느낌이 없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무시하면서 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를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이 과연 여러분의 자질입니까? 여러분 스스로 믿음을 만들어 내었고 여러분 스스로 주님을 선택해서 믿어온 것입니까? 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 믿음의 출처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며 그 믿음이 나를 붙들어서 주님을 믿게 했다면 결국 나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고 내 스스로 인생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자료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옆에 부끄러움을 범한 이웃이 있을 때 그 부끄러움이 곧 나의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웃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 수치를 회개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신자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증거하라고 여러분에게 인생이 주어져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곳이지 자기를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자기를 자랑할 때 그 순간 나의 자랑으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웃이 있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교회의 하나됨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은혜 안에 있고 은혜를 믿느냐 입니다. 저주 안에 있는 우리가 생명 안에 있게 되었다는 이 은혜에 대해서 아무런 감사함이 없다면 그것은 인간의 본질인 저주, 즉 사망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모든 것을 통해서 저주 안에 있는 자신의 실태를 발견하시고, 저주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놀라운 피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을 차지할 때, 마음껏 그 은혜만 자랑하고 증거하는 인생이 되기 바랍니다.

 

 

 

 

 

축복 (3) (신 33:7)


인간은 세상에서 좋은 것이라고 판단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과 상관이 있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가령 누군가가 복권에 당첨되어서 7억이라는 돈을 거머쥐었다고 할 때, 그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게 됩니다. 이웃의 아무개 아들이 서울대에 합격을 했으면 그 좋은 일이 자기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세상의 좋은 것들이 모두 자기와 상관이 있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살아가지만, 살아 갈수록 세상일이 자기 바라는 대로 되어지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남들은 세상의 좋은 것과 연관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유독 자기 자신에게서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때 불공평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불만과 불평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인생은 어둠이고 고독이고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세상과 교통하면서 세상이 제공하는 '좋은 것'들이 하나하나 자기의 수중에 자리하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을 집약해서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과 세상과의 관계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세상과의 단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단절하게 하시고 새로운 세상이신 예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만드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 눈을 뜨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가 곧 성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말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 전혀 무감각하고 소경이 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과의 탄탄한 연결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이 내 차지가 되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관심거리는 '하나님이 있다 없다'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다 다시 살아나셨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있든 없든 그것은 관심 없고 다만 있다고 믿어 줄테니까 제발 세상의 좋은 것들을 나에게로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주일 만들고 부활주일 만들어서 예수님의 고난을 슬퍼하고 부활을 기뻐할 테니까 그런 우리들을 외면하지 말고 우리가 바라는 소원들을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행동들이 내가 잘되는데 도움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단절을 두려워합니다. 세상과 단절되면 마치 자기 인생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에서 단절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수고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 앞에서 세상과의 단절을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인생 포기를 요구하는 것이었고, 인생 포기란 자기 자신에게 어떤 의미도 두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이 민중들의 귀에 달갑게 들려질 리가 만무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복음이라는 이름 아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지고 있지만 과연 말씀 하나 하나가 여러분에게 달가운 말씀으로 다가옵니까? 과연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고 내 인생의 전부라는 느낌이 여러분에게 살아있습니까? 말씀 속에서 영원을 내다보며 영원이 있기에 잠시 잠간의 세상에서의 인생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들이 여러분에게 존재하고 있습니까? 만약 인생을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이 계신다면 저는 그분에게 인생의 이치를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것입니다.

 

 

 

 

요 15:19절에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택함을 입은 자는 예수님과 함께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러한 말씀들이 세상에 자기 자리를 구축하려는 자들을 당황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항상 세상과 친화하고 교통하여 세상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한 인간세계에 오신 예수님이 택함 받은 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이 인간들의 마음에 옳은 진리로 남아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남아있고 살아서 싹을 내고 열매를 맺게 된다면, 예수님의 비유처럼 그 마음은 옥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세상에서 누구의 마음이 옥토이겠습니까? 옥토 같은 마음 밭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옥토 같은 마음 밭으로 가꾸자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그것도 역시 엉터리입니다. 옥토란, 돌밭 가시밭을 개간해서 만들어진 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상태는 개간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단절되고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 마음이 조금 개간한다고 해서 세상의 미움을 당연하게 여기고 예수님을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옥토란 주님이 만드신 밭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돌밭 가시밭이 옥토로 뒤바뀐 것입니다. 옥토이신 주님이 내 속에 들어오심으로서 옥토의 모습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사람은 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미움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세상과 단절하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도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하란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뭐가 참된 성도의 모습이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앙생활이며, 세상과 성도의 관계가 어떤 것임을 말씀드림으로서, 현재 세상에서 어떤 자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확인하라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과연 세상과 똑같은 수준에서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택한 자의 모습이 보여지는 신자로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내가 없는 세상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고 해도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역시 무의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천국이 온다고 해도 나와 연관되지 않는 것이라면 아무런 가치도 없고 기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앞서 말한 대로 모든 것을 자기와 연관시키기 위해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가 세상에서 당당히 신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복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복으로 기뻐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의 실체를 하나하나 파헤쳐보면 점차 우리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무너지는 듯한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딛고 있었던 디딤돌이 사라져 버리고 전혀 디딤돌 같지 않은 것이 내 발 밑에 놓여 있음을 알고 그 디딤돌을 못미더워 하고 불안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딛고 올라선 디딤돌은 결국 모래 위에 세워진 것이고, 주님께서 놔주신 그 디딤돌만이 굳건한 반석임을 발견하게 될 때 그때부터 인생은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서 밝은 빛을 달려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단절된다고 해도 두렵지가 않고 좋은 것들이 내 수중에 없다고 해도 아쉬울 것 없는 당당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은 비록 세상이 볼 때는 쓸쓸한 것 같고 볼품없이 보일지 몰라도 주님이 보실 때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증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이러한 인생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대해서 볼품없이 보여진다고 해서 섭섭해하지 마시고 다만 주님의 증인으로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임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주님의 증인으로 세상에 남아 있는 신자의 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7절을 보면 "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로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축복에 대해서 2주 동안 말씀을 드렸지만, 어느 것 하나도 우리의 상식으로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축복이라고 제공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앞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7절의 말씀을 아무리 뜯어 봐도 복이라고 인정할 만한 구석은 전혀 없습니다. 혹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라는 문구를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하나님이 유다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것을 복으로 생각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다 응답해 주신다면 부자 되고 성공하는 것은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하나님께서 유다의 기도를 들어서 소원성취하게 해주시는 것은 없습니다. 유다에게만 아니라 모든 자들에게 소원성취를 위한 하나님으로 다가오시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우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7절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7절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서 우린 하나님의 참된 복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복있는 자'가 어떤 자인가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자신을 복있는 자로 바라보게 되어질 때, 없으나 있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먼저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라는 말씀의 의미를 설명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라는 말을 유다의 기도에 응답해달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 응답자체가 축복이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다가 기도를 했다 안했다 응답을 받았다 안받았다에 관심을 두지 마시고, 과연 하나님이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는 그 조건이 뭐냐는 것을 살펴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응답을 하시는가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응답하실만한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것이 있을 때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했으니까 응답하시겠지'가 아니라 내가 한 말이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되는 것들인가? 에 관심을 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유다에 대한 시각도 '유다가 한 말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것이 어떤 것이었느냐?'를 찾는 것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유다가 한 말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면 유다가 등장하는 창세기를 살펴봐야 합니다. 먼저 창 49:8절을 보면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야곱이 유다를 축복할 때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고 말을 하고, 또 10절에서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말할 정도로 유다를 높이고 있는 것은 유다에게 높임을 받을 만한 뛰어난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한 말은 열 두 아들이 보여줬던 행실과 삶의 태도를 근거해서 장래 되어질 일을 미리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열 두 아들을 내세워서 하나님 앞에서 저주가 되는 삶과 복이 되는 삶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유다를 높이고 축복하는 것은, 유다 자체를 높이고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와 같은 삶의 태도가 하나님 앞에서 높임 받고 축복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높임 받는 유다의 삶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요셉이 국무총리로 있는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가는 사건 속에서 드러납니다. 요셉은 양식을 구하러 온 형제들에게 정탐꾼이라는 누명을 씌워서 시므온을 붙잡아 둡니다. 그리고 말째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풀어 주겠다고 말합니다. 유다는 집으로 돌아가서 어떤 일이 있어도 베냐민을 데려오겠다고 다짐을 하고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다시 형제들이 돌아가는 길에 베냐민의 자루에만 은잔을 넣고, 그것을 구실 삼아서 베냐민을 도둑으로 몹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다시 인질로 삼게 됩니다. 여기서 유다의 반응은 창 44:33절에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라는 말씀대로 '나를 대신 종으로 삼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다가 자신이 스스로 종이 되기를 자처하고 대신 베냐민을 돌려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게 된 것은 유다가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입니다(창 44:20-32).

 

 

 

 

결국 33절의 유다의 말은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을 해함으로서 아버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삶의 태도가 이제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태도로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에 '내가 종이 될테니까 베냐민은 돌려 보내달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것입니다. 유다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서 요셉을 만나게 되었고 모든 형제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은 유다의 정신, 즉 희생의 정신을 중심으로 해서 인도될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심으로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피의 정신을 따라갈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피의 정신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피의 정신과 어긋나게 살아가는 세상과 싸우고 이겨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입니다. 이 운명에 참여되는 자가 곧 복있는 자입니다.

 

 

 

 

'그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라고 말씀하는데, 유다가 싸워야 할 싸움이 무엇입니까? 희생의 정신을 모독하는 세상의 삶의 방식과의 싸움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유다의 축복이란 하나님의 이 싸움에 참여된 자로서 살아가는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축복이고,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과 전혀 다른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러한 축복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도저히 축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축복이라고 말씀할 때 '과연 그렇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싸움에 참여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복안에 있는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을 이기는 힘은 '희생'입니다. 희생이란 내가 죽는 것인데, 이것을 힘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힘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을 말합니다. 지배하고 군림하고 다스리면서 살아남는 것이 곧 힘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곧 이긴 자가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힘은 '희생'이며, 이긴자라는 것은 희생된 자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창 49:8절에 보면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유다에게 힘을 줘서 그 힘으로서 원수를 이기게 하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세상적인 시각에서의 승리를 약속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마 26:52)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힘을 쓴 자는 힘으로서 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힘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힘의 세계는 세상입니다. 힘을 모으고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은 힘없는 자로 오셔서 힘에 의해서 희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것을 통해서 세상이 망해야 할 죄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희생하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사람들이 여전히 힘을 추구하고 살아갑니다. 힘을 복으로 여기며 힘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주의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힘을 추구할 때, 그 힘에 의해서 약자가 해를 입습니다. 그것은 결국 힘에 의해서 예수님이 희생당하셨던 십자가의 사건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힘을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자의 싸움이란 힘을 얻어서 그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힘으로 사는 세상에서 힘을 포기하고 희생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이 곧 싸움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이 싸움에 참여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유다에 대한 모세의 축복은, 희생으로 세상을 이기는 희한한 싸움에 참여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나의 원수로 간주해서 싸우는 싸움에 쓰임 받는 것, 이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 이것 주세요' 이런 사람은 아직까지 축복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더 달라고 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하나님의 일을 하려니 돈이 부족합니다 부족한 돈을 채워주세요'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돈 달라는 것이 교묘하게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 되버리는 것입니다. '선교를 하려는데 돈이 없습니다' '구제를 하려는데 돈이 없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가 돈을 좋아하는 인간의 핑계거리일 뿐입니다.

 

 

 

 

희생과 섬김에 돈이 필요합니까? 건강해야만 합니까? 많은 지식이 필요하고, 높은 지위가 필요합니까? 그런 것은 전혀 필요 없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희생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곧 나의 생명이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그 희생이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다스리며 순간순간 그리스도의 희생이 보여지는 쪽으로 밀어붙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 예수님의 희생이 귀하다고 하고 그 희생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말은 잘하면서 정작 예수님이 나를 붙들고 희생의 자리로 끌고 들어갈 때 그 손을 쳐버리는 삶이 아니었습니까? 남의 희생에는 감동하고 기뻐하고 귀하게 생각하면서 내 자신이 희생하는 것은 싫어했던 우리들이 아니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러한 삶의 태도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가 주의 자리에서 다스리고 있는 신자에게서는 분명 희생의 모습이 보여질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성령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는 했지만 나의 희생을 싫어하고 거절했던 우리의 죄가 발견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멀리했으며 구원은 좋아했지만 희생의 피는 싫어했는가가 발견되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원수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강권해서 희생이 보여지는 삶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할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인생을 그리스도의 희생을 증거하는 싸움에 사용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희생의 피의 흔적이 담겨 있는 그 마음이 높임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복있는 자입니다.

 

 

 

 

이러한 복을 거절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복이냐?'고 소리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알고 희생을 생명으로 여기고 아들을 희생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나를 희생의 싸움에 사용해 주소서'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희생했느냐를 묻지 마시고, 내가 주님의 희생에 참여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가를 확인하십시오. 희생의 싸움에 사용되어지기를 원하신다면 그분이 바로 마지막 때 승리자이고 복된 자입니다.

 

 

 

 

 

축복 (4) (신 33:8-1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 문답 1문에 보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일 되는 목적이란 제이 제 삼의 목적이 추가로 주어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제일 되는 목적만이 참된 목적일 뿐 나머지는 인간이 가져서는 안되는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세상에 난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기 위해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오직 제일 되는 목적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리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세상에 나게 하신 이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자기의 인생이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태어남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이 없는 자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오늘은 어떻게 쓰시겠습니까?'를 물으면서 하나님께 쓰여지는 것을 내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자가 신자입니다. 이런 말이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에게는 당연한 말로 들려지지만, '자기 인생'이 살아있는 자에게는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듣기 싫은 말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래 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꼭 생각하지 못하고 놓쳐 버리는 것은, '하나님께 영화로움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실 문제이고 하나님의 마음이지 결코 인간 편에서 결정하거나 내세울 부분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도 우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난 후에 말해야 할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세상의 것을 누리고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고 오로지 인간을 하나님 멋대로 사용해서 자신의 영광을 찾으려는 분이시라고 했을 때,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육신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즐거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 마음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기준을 만들 수 없습니다. 가령 나는 돼지고기는 싫어하고 쇠고기만 좋아하는데, 쇠고기는 싫어하고 돼지고기만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가 돼지고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너도 돼지고기 좋아하지'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고 내게 기쁨이 되는 것이 따로 존재하듯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내게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된다고 해서,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가져서는 안됩니다.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무엇이 영광이 되는 것인가?'를 물으면서 하나님께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에든지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고 자기 편한 대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라고 해도, 나에게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면 관심을 끊어버립니다. 일단 나에게 기쁨이 되고 유익이 되는 것이어야 받아들이려는 자세로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예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즐거워 할 목적조차 없습니다. 단지 나에게 영광이 되었을 때, 나에게 기쁨이 되었을 때, 나의 영광과 나의 기쁨에 하나님을 끌어드리는 것 밖에 없습니다. 도대체가 하나님의 영광에 내가 뛰어들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에 뛰어들겠다는 각오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즐거워하기보다는 즐거움의 조건을 온통 세상 속에서 파헤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이 아닌 나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교회 안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라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제일의 목적으로 삼고 모여야 할 것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교회라는 단체 아래 모여든 인간의 기쁨을 위해서 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제공해야 사람들을 붙들어 놓을 수 있고, 또 외부에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교회다운 교회의 기준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키고 도덕적 욕구를 채워주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찾는 사람 편에서 자기 마음에 만족이 될 때 '아 이 교회가 더 낫구나'라는 평가를 내리기 때문에, 이것을 잘 알고 있는 목사로는 교회라는 단체를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교회가 사람들의 즐거움이 되도록 해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잠시 피곤한 마음과 몸을 쉬기 위한 휴게소가 되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말에 대해서 '심하다' '너무 비판적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하다거나 비판적으로 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인간의 것을 최소한이나마 붙들고 있으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 인간은 이런 존재다. 왕창 다 망해 버려야 할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손에서 놔버리기가 아까운 것이 아닙니까?

 

 

 

 

신자가 인간의 것을 모두 놔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에서 세상을 본다면, 나 자신을 포함한 인간들의 더러움과 죄악에 대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의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교인들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심과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애초부터 하나님의 본심과 뜻을 알아서 거기에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교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욕구 성취를 위해서 모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만 살아있는 것이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열심과 충성과 봉사도 살아있는 것을 교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자기 즐거움을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힘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든 자기의 즐거움에 침범하거나 자기 즐거움을 소멸시키는 자는 누구라 할지라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것을 잃게 하는 것이라면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오늘날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음성으로 들려지는 것도 아니고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을 쓰는 것도 아니라 문서화된 성경 자체로 끝났기 때문에 '성경이야 해석하기 나름이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인간의 것을 고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사 하늘에서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을 쓴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손가락이 나타나서 계시를 글로 쓴다고 했을 때 성경과 다른 말을 쓰겠습니까? 역시 성경에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쓰실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반대의 것을 새로운 계시로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글이 쓰여진다고 해도 그 내용이 역시 인간의 것을 철저히 부정하는 내용이라면 어떤 핑계와 구실을 대서라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 뻔합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자가 하늘에 나타난 글씨라고 해서 믿을 리가 만무합니다. 단지 하늘에서 손가락이 나타난 신비로운 현상에만 관심을 집중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자라고 이름하는 자들로서 다시 한번 스스로를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나의 기쁨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가?' '나는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서라면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자세로 살아가는가?' '내 인생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도구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함으로서 다시 한번 우리의 현재를 확인하고 오늘의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본문은 유다에 이어서 레위를 향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축복함에 있어서 그냥 '앞으로 잘 살아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모습을 드러내어서 축복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축복했으니까 우리도 축복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위해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복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복을 받으려는 탐욕으로 말씀을 대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복인가를 깨닫고 현재 내가 어떤 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깨닫는 것이 말씀을 대하는 신자로서 바른 자세입니다. 내가 이미 복안에 있고 복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또 다른 복이 필요하겠습니까? 복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깨달았는데 복 아닌 것에 매어서 마음졸이고 근심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대하면서 현재 자신의 복에 대해서 다시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신자가 복된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기 인생에 대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기쁨을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인생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인간 편에서 자기 인생을 바라보고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내 인생을 인도하고 책임지려고 한다고 해서 내가 의도한대로 인생이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생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려는 사람이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인도한대로 따라가는 사람이나 결국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순간순간이 결정되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애쓴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 인생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을 하게 되면 여러분의 오해를 막기 위해서 꼭 해드리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 인생을 위해서 아무런 힘도 쓰지 말라면 그냥 가만히 놀고먹고 있어도 된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직장을 다닌다면 그 직장은 내가 힘써서 들어간 직장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이 직장으로 인도하셨다고 생각하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는 목적 역시 내 인생을 책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직장에 하나님이 나를 보내셔서 나를 도구로 삼아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생각에서 열심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마 6:31-32절을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너희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하나님의 책임 아래 있고, 들의 백합화가 하나님의 책임 아래 있습니다. 살고 싶다고 해서 죽어야 할 자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또 신자가 빨리 천국 가고 싶다고 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죽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 사용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용 기간이 끝났을 때 인생이 마감되는 것이지 우리 마음대로 인생을 마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인생을 우리 욕심대로 이뤄보려고 애를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용되는 그릇으로 존재하는 것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누가 부자로 살든 권력을 누리든 그것으로 자기 인생을 비교하고 판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부자로 사는 것은 우리의 바램이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부자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릇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 사람은 부자로 살아서 좋겠다'는 마음은 하나님은 생각지 않고 자기를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레위는 어떠했습니까? 8,9절을 보면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그는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 형제들을 인정치 아니하며 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쉽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 말씀을 간단하게 말하면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부모 형제 자식을 죽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칭찬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부모 형제 자식들을 죽이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곧 복된 자의 자리에 있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칭찬을 하신다는 것은 단지 우리의 행동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칭찬을 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칭찬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위 지파가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부모 형제 자식을 죽인 것은 하나님이 마음에 일치가 된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마음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복안에 살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 축복의 비밀을 누가 알겠습니다. 자기 인생의 성공에 모든 목표와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엔들 관심이 있겠으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레위 지파의 칭찬을 복으로 인정하기에는 난처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 때문에 부모 형제 자식을 죽인 것을 칭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본문의 이 이야기는 과거의 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계명을 받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산밑에서 모세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모세가 더디 내려오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이것은 믿고 있던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자기들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기 위해서 인간의 노력과 방법을 끄집어 낸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반항을 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지 금송아지가 아니었습니다. 출 32:26절에 보면 모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이 말씀은 여호와 편에 서서 여호와의 인도를 받을 자와 금송아지를 만든 것처럼 계속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책임지며 살아갈 자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때 금송아지를 만들 때 개입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 모세의 말에 따라서 레위 지파가 여호와 편에 서겠다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인도함 받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지 금송아지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금송아지를 만들 때 그냥 만든 것이 아닙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패물을 바쳤습니다. 즉 금송아지에는 자기가 아꼈던 금붙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 편에 서겠다는 것은, 내가 아꼈던 모든 것도 포기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내가 아꼈던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 편에 서서 사는 자의 모습이고, 이 편에 레위 지파가 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편에 서지 아니하고 금송아지 편에 선 자들을 모두 죽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자기 동생도 있고 형제도 있었다는 것입니다(출 32:29). 이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여호와께 헌신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레위 자손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씀 편에 서서 형제와 자식까지 죽인 레위 지파가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복을 내리겠다고 하셨으면 그들이 받은 복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레위 자손이 부자가 되었습니까 아니면 권력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까? 레위 자손에게는 소위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복을 누린 모습이 없습니다. 분명히 레위 자손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하셨는데, 주어진 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여호와여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 그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말하는 복은 재산을 풍족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 자손을 대적하는 자들의 허리를 꺾어 버리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역시 재산을 풍족하게 해달라는 복을 말하지만, 레위 자손이 재산에 풍족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레위 자손은 재산과는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주어진 분깃이 없고 소유 재산이 없는 자가 레위 자손들인데 그들에게 재산의 풍족을 말한들 무슨 해당사항이 있겠습니까? 결국 주어진 분깃이 없는 자들에게 재산의 풍족을 말한다는 것은 그림의 떡이고 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재산을 단지 세상의 돈으로, 부요해 지는 소유로 생각하기 때문에 오는 혼란입니다. 재산이란 세상에서 힘입니다. 결국 재산이 풍족하게 한다는 것은 힘있는 자가 되게 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는다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을 다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레위 자손을 축복하셨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만약 레위 자손을 축복하셨다면 말씀 편에 서서 형제 자식을 죽인 사람들만 아니라 대대로 레위 자손이라면 조상의 행위 때문에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복은 혈통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복은 혈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이어집니다. 즉 말씀 편에 서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모 형제까지 죽이는 그 정신을 따라서만 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레위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축복이란 내 집안이 잘되고 내 사업이 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편에 서서 말씀이 인도하고 말씀이 주관하고 말씀이 활동하고 말씀이 대우받는 그런 가정이 되기 위해서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인간된 것, 이것을 가지고 복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리를 인도할 때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말씀 편에 선 자가 되었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서있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우리가 죽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말씀 편에 서 있는가 말씀 밖에 서 있는가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부터 말씀 편에 서지 않으면 그는 레위 자손이 아니고 복과도 거리가 먼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8절에 보면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둠밈과 우림은 이스라엘을 판단하는 기구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판단할 수 있는 자는 주의 경건한 자라는 뜻이고, 경건한 자는 말씀 편에 서서 부모와 형제까지 죽일 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으로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말씀 편에 서서 말씀을 위해서라면 부모 형제도 포기할 수 있는 정신으로 사느냐?'를 묻습니다. 참으로 부담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부모 형제가 말씀을 벗어나면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 편에 서서 말씀이 아닌 것은 모두 하나님의 원수된 것으로 여길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인간 관계나 혈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사용하신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말씀의 원수된 것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싸움에 있어서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힘을 주시고 대적의 허리를 여호와께서 꺾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지금 이 시간 말씀 편에 서 있는가? 말씀의 도구로서 사는가?'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도구로 살아갈 때 내 인생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자질이나 나의 직장이나 가정은 말씀의 도구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떡이 아니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를 어려운 상황으로 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내 어려운 것만 내세우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말씀 편에 서지 아니한 자는 죽여 버리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말씀을 싫어하는 자들입니까? 사사건건 내 인생을 들이대면서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 인간이 말씀을 생각하게 되고 말씀을 앞세우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복에 참여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이 사람된 것이 복입니다.

 

 

 

 

돈 버는 일에 마음 뺏기지 말고 말씀으로 사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 모든 마음을 빼앗겨야 합니다. '나같은 것도 말씀을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는 인간 되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인간으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과는 달리 불속에도 밀어 넣으시고, 가시밭길도 가게 하셔서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고, 우리를 이런 인생으로 인도하실 때 실망하지 마시고 낙심하지 마시고 세상 것 달아난다고 아까워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복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축복 (5) (신 33:12-17)


인간은 항상 자신이 몸담고 있는 환경과 처지에 대해서 반항적인 기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가능하면 못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 부위를 뜯어고치는 성형수술처럼 인생도 뜯어고치고 싶다는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는 성형외과가 잘되는 것처럼, 아마 인생을 고쳐주는 병원이 있다면 문전성시를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인생을 고쳐보고 싶어서 사람들이 찾는 곳이 있습니다. 무슨 철학관이라든지, 무당집, 무슨무슨 동자라고 하는 점 집들, 이런 곳들이 인간의 인생을 담보로 해서 돈벌이를 하는 곳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생각들이 십자가와 원수된 것이라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찬란한 인생만 보장된다면 얼마든지 사탄에게 내 영혼도 팔 수 있고, 천국이라는 것도 포기할 수 있다는 기질만 내보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땅의 영광과 땅의 것으로 자기 배를 채우는 인생에 모든 목적을 두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빌 3:18절에 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까? 십자가의 원수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2천년 전에 예수님을 로마인에게 넘겨준 유대인만도 아니고 예수님을 창으로 찌른 로마 군병만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땅의 자랑과 영광과 자기 배를 채우는 인생의 목적을 포기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란 예수님의 적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적에게 있어서 영원한 천국이라는 미래는 절대로 보장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천국,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적'이랄지 '십자가의 원수'란 말에 대해서 두려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곧 그리스도의 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신자를 찾기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마치 천연기념물을 찾는 듯한 느낌입니다.

 

 

 

 

인간이 자기 인생을 고쳐보고 싶은 열망을 가지는 것은, 세상 영광과 세상에서의 자기 장래성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과 이유가 이토록 예수님의 정신과 다르니 나오는 것은 한숨이고 남는 것은 눈물이고 주름살입니다. 장래의 불확실함이 두려움과 근심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항상 힘들고 괴로울 뿐입니다. 인간은 인생의 눈물과 괴로움을 환경 탓으로 돌려버립니다. 환경이 좋지 않아서 힘들고 괴로운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사람들은 이 말씀을 대하면서 예수님이 마치 우리의 운명을 바꿔주고 인생을 개조해주는 '인생 서비스맨'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가 지고 가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덜어내 주고 가볍게 만들어 주는 '도우미'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셨던 것처럼 살아가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사신 것처럼 산다면 '무거운 인생의 짐'이라는 것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짐이 없어진다고 해서 나에게 짐이 되는 환경 자체가 바뀐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환경은 그대로입니다. 다만 짐을 짐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식으로 세상을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영광 포기입니다. 포기하되 죽기까지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짐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항상 다른 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자기 영광을 포기함으로서 짐이 짐되지 않는 예수님의 삶의 방식보다는 자기 일이 잘됨으로서 환경이 개선되고 그로 인해서 짐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세상의 방식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가 주님의 일로만 끝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같이 죽자던가,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항상 내 인생에 영광이 되고 자랑거리가 될만한 일만 들고 오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같이 죽기를 요구하시는 예수님은 기피하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영광에 매어 사는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입에서는 쉴새 없이 진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진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나를 도와주는 그리스도일 때 진리이지 자신의 영광과 자랑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그리스도는 결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된 자의 생각입니다.

진리를 말하면서 참된 진리를 내버립니다. 천국을 말하면서 참된 생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말하면서 오히려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가득찬 것이 바로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 자신들의 현실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예수님과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치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은, 세상을 판단하는 시각 자체가 다른 것을 말합니다. 즉 축복을 바라보는 시각, 저주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치관의 다름에서 나타난 결과는 충돌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된 자는 세상에서 자기에게 영광이 되고 자랑거리가 되는 모든 것은 축복이라고 여깁니다. 축복과 저주를 육신을 중심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는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축복이라고 여깁니다. 자기 영광과 자랑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저주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만 원하고 또 벗어난 자체를 축복으로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자기 육신에 영광이 되고 자랑거리가 될만한 것만 찾고 추구하는 세상에서 신자는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를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한 힘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세상의 영광과 자랑거리를 포기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저주로 볼 수 있는 시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말씀도 역시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신자들에게만 생명의 말씀으로 남을 것입니다.

 

 

 

 

축복과 저주가 결코 인간의 생각과 기준에 의해서 정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주라고 하신 것이 저주일 수밖에 없고 복이라고 하신 것이 복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과 저주를 제대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나의 가치관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치관으로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복으로 제시하고 있습니까?

 

 

 

 

먼저 12절에서 베냐민의 복을 말합니다.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맞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는 것이 베냐민에 대한 축복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 복을 받는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둬야 하는 것은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말입니다.

 

 

 

 

베냐민을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장차 되어질 베냐민의 일에 대해서 말한 내용은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의 말을 비추어 볼 때 베냐민은 도저히 여호와의 사랑을 입을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로 바뀌었고 여호와의 보호를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저주의 상황이 축복으로 뒤바뀐 것입니다.

 

 

 

 

우리는 베냐민이 복을 받게 된 이유를 베냐민 안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대신 요셉에게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땅의 보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라고 말합니다. 요셉을 형제 중 구별한 자로 말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구별하셔서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요셉 개인의 영광과 자랑을 위해서 구별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요셉 개인에게는 죽음이었고 고통이었습니다. 형제들로 인해서 인생이 엉망이 되버린 자가 바로 요셉입니다. 야곱에게는 죽은 자로 되었고, 형들로 인해서 애굽에 팔려갔습니다. 그리고 종으로 지내면서 온갖 고초를 다 겪었던 자가 요셉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모든 일이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로 알게 되었습니다. 즉 요셉은 형제들을 살리기 위한 희생의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잘했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쓰여진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내세워서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살 수 있는 방식은 희생이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즉 앞으로 이스라엘은 '희생'으로 살아가는 존재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자가 희생한 자 때문에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복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의 정신은 이스라엘 속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어서 이스라엘을 건지시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세와 아론에게 대항을 합니다. 자신들에게 부가되어진 고초가 모세와 아론 때문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그냥 애굽에서 살도록 가만히 놔뒀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인데, 괜히 자기들을 구출한다고 바로의 비위를 상해서 더 큰 고초를 겪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축복과 저주에 대해서 거꾸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겐가 매어있는 상태를 가지고 축복과 저주로 보기보다는, 육신을 중심으로 축복과 저주를 분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건지실 때, 흠없는 어린양의 대신 죽는 죽음으로서 그들을 죽음의 세계 밖으로 옮겨 놓았던 것입니다. 대신 죽는 희생이 없이는 죽음의 세계 밖으로 탈출할 수 없는 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복의 상태는 애굽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몸이 애굽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축복이 아니라 애굽이라는 세계의 틀 자체를 벗어버리는 것이 축복입니다. 애굽이 저주라는 것은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즉 애굽은 죽음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나라인 애굽에 대한 미련을 벗어버리고 어린양의 피로서 새롭게 형성된 그 나라에 소속되는 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어린양의 피를 근거로 할뿐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그들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오직 죄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면 그것은 그들 안에 어린양의 피의 흔적이 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이스라엘을 살리신 이유도 그들이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베냐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역시 베냐민이란 인간을 중심으로 한 사랑이 아니라, 요셉의 희생을 중심으로 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베냐민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요셉의 희생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베냐민을 보호하시고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는 이유도 베냐민이 요셉의 희생으로 살아난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복이란 인간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것이고, 오직 희생의 피를 중심으로 그 피에 소속된 것만을 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희생의 피 안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 16:25-26절에 보면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온 천하와 생명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온 천하를 얻겠느냐 아니면 생명을 얻겠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무엇을 얻겠습니까? 참으로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온 천하는 우리에게 무한한 영광과 자랑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그러나 생명이란 말 그대로 생명 그 자체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을 얻은 자로 산다고 해서 누군가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대우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며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꼬리표가 끈덕지게 따라붙을 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별 재미없는 생명을 포기한 채, 많은 것을 보장해주는 온 천하라는 것에 마음 뺏긴 채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것이 저주의 상태입니다. 이 저주를 저주로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생각이 바뀐 사람이고,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애굽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생명이라는 복안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복은 구별된 자로 부름 받고 희생했던 요셉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는 누가 계십니까?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대속한 자로 우리들 사이에 오신 예수님이 곧 우리들의 복입니다. 우린 예수님 덕분에 살고 있는 자들이 아닙니까? 죽음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로 옮김 받은 자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세상에서 생명이 너무나 무가치한 대접을 받다보니 그리스도의 대속 또한 무가치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노래하고 귀하게 여기고 찬양하는 무리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이 복의 무리인 것입니다.

 

 

 

 

'생명 그까짓것'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비록 축복을 저주로 여기고 저주를 축복으로 아는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피라든가 십자가라는 것이 아무런 필요가 없고 가치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무한한 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그는 첫 수송아지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열방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만민이요 므낫세의 천천이리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요셉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그러나 요셉이라는 인간을 가리켜서 한 말이 아니라 요셉이 보여줬던 이스라엘을 위한 희생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희생의 정신은 힘없고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들소의 뿔같이 힘이 있고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고 에브라임의 만만과 므낫세의 천천과 같은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힘과 영광을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안됩니다. 세상의 힘이 아니라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입니다. 세상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세상 것이 영광일 수 없습니다. 오직 가치 있는 것은 하늘의 것으로 보기 때문에 영광된 것은 하늘의 생명일 뿐입니다. 이러한 가치관과 의식으로 달라져서 산다면, 그것으로 이미 복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세계 안에서 축복과 저주가 뒤바껴버린 사실에 대해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로의 압제 아래서라도 육신이 편안한 것을 원했습니다. 그것을 복으로 여겼습니다. 죽는다 할지라도 애굽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택한 백성은 약속의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나라가 아닌 나라에는 오직 저주라는 법칙만이 통용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의 중요성을 모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산다는 것보다는 몇십평 짜리 으리으리한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더 중요하고, 대속의 은혜로 사는 것보다는 좋은 옷 입고 좋은 자가용 굴리면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보다는 육신이 잘되는 것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서울대에 들어가는 것을 더 귀한 일로 여기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을 기뻐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자로 산다는 것은 인간 본래 마음으로는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뻐할 수 없다면 그 상태가 곧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저주의 운명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바뀐 것입니다. 따라서 저주와 축복을 제대로 아는 신자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서 나 자신이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난 운명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기뻐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운명이 바뀐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사람입니까? 생각이 바뀐 사람이고 가치관이 바뀐 사람입니까? 세상이 좋아하지 않는 십자가를 좋아하고 그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죽기를 소원하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이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여러분은 행복자입니다. 29절에 보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을 행복자라고 말합니다. 행복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으로 주어진 구원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하고 생명의 세계로 옮겼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는 분명 여호와의 구원만으로도 행복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자에게는 예수님의 피가 힘이요 기쁨입니다. 과연 행복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모세의 죽음 (신 34:1-12)


모든 인간의 활동은 자기 존재를 유지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세상에 존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활동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려웠던 시절에는 자기 존재 유지라는 것이 단지 먹을 것, 입을 것으로 국한될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날 경제력이 증가되면서 살만하고 여유가 생기게 되자 자기 존재 유지는 먹을 것 입을 것이라는 범위를 뛰어 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먹을 것 입을 것이 이미 해결된 상태에서 이제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눈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가치 없는 인간이 아니라 가치 있는 인간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인간에 대한 평가 기준은 그 사람이 세상에 도움이 되느냐에 있습니다. 누구라도 사회가 발전하고 나아지는데 도움이 되고 필요한 인간이라면 그는 세상으로부터 가치 있는 인간으로서 대우받고 사랑 받게 됩니다. 즉 인간의 존재 가치가 향상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가치 있는 직원은 회사의 발전과 향상에 도움이 되는 직원임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직원이 사랑 받고 대우받는 것이 사회의 법칙입니다. 가정에서도 역시 돈을 많이 벌어서 가정을 유지할 수 있고 자녀들의 원하는 것을 마음껏 제공해 줄 수 있는 가장이 대우를 받고 사랑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가장으로서 가족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가족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못하고 가정 유지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지 못하는 가장은 가치 없는 가장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잃어서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끊어진 가장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돈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가치가 하락된 것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돈을 벌지 못함으로서 세상에서나 가정에서나 무가치한 인간으로 전락되었다는 것이 고통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존경받고 칭찬 받을만한 일을 했다는 것 자체가 '나는 가치 있는 인간이다'는 것을 증거 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는 인간들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비록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종교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 유지를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필요한 분, 우리 교회의 기둥, 우리 교회에 없으면 안되는 분'이라는 칭찬을 들으며 타인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지 절대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포기하지 못한 자는, 모든 활동이 자신의 존재 가치 향상에 도움이 될만한 일만 하게 됩니다. 말한 대로 애당초 하나님의 영광이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존재 가치가 향상될 수 있는 일인가에 관심을 두고 거기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시하게 보이는 일은 나보다 존재 가치가 덜한 사람이 해야 할 일로 여기고, 존재 가치가 높은 나는 좀 더 가치 있는 일을 해야 위신이 선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 5:44절에 보면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분명히 단언하고 있는 것은, 하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세상의 자기 영광을 구하고 사는 자는 절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영광을 포기하지 못한 자는 그가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든 상관없이 믿음이 없는 자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인간이 보기에 믿음이 있는 것 같은 행위를 한다고 해도 자기 영광을 포기하지 못한 모습을 내비칠 때는 그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 들통이 나는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람들의 모든 활동은 자기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영광을 줄 수 있는 것을 가치 있는 일로 여기고 그 일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자기 활동을 통해서 자기 이름이 높아져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어떤 활동을 해도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게 됩니다. 성도란 이미 자기 가치를 포기한 자입니다. 스스로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앞에서 자신의 더러움이 폭로가 되고, 그 더러움 앞에서 자신의 가치 없음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영광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높아지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오늘날 신자라고 이름하는 자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부지런히 말씀을 듣기도 하지만, 문제는 말씀이 의도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근본 취지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대하면서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말씀을 대하면서 '어떻게 하면 나에게 영광이 될까'만 생각하기 때문에 말씀의 근본 취지와는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서 영광을 얻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도 영광이 될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요 17: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오직 아들이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할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우리의 죄를 폭로시킴으로서 인간은 도저히 영화롭게 될 수도 없고 영광을 얻을 수도 없는 죄인임을 알게 하셔서 자기 영광을 포기하게 하시고, 대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인간 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면, 그것으로 생명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해서 믿음이 있는 신자로 칭찬과 존경을 받고, 사회에서도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세상으로부터 영광을 얻게 되면, 그것으로 마치 영원한 생명을 확보한 사람으로 착각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존경받고 사랑 받는 가치 있는 인간이니까 당연히 생명도 보장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 21:31절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소위 가치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종교적 영광을 독차지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먼저 세리와 창기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리와 창기가 먼저 들어가고 그 다음에 바리새인들이 들어간다는 순서적인 얘기가 아니라, 가치 없는 인간으로 치부하고 무시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세리와 창기를 존경받고 가치 있는 인간으로 대우받던 바리새인들보다 앞에 세움으로서 천국은 인간의 가치와 영광을 앞세워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인간의 영광이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자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입니다. 따라서 자기 영광을 포기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쓸모 있고 가치 있고 보람있는 일을 하고 있는 인간으로 여긴다면 천국은 그런 자를 거부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명기를 마치면서 자기 영광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한 인간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본문은 모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에는 모세의 죽음이 나오지만, 우리는 모세의 죽음을 나이가 많아서 자연히 죽는 죽음으로 인식하면 안됩니다. 7절을 보면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고 말합니다. 즉 모세가 나이가 들긴 했지만 신체적인 허약으로 인해서 죽은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눈도 흐려지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죽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죽이신 죽음이었습니다.

 

 

 

 

5절을 보면 모세가 죽은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모세의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 성취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모세의 죽음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분통이 터질만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고 광야 40년을 거치면서 지금껏 고생을 해온 사람입니다. 모세의 수고를 본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모세가 앞장서서 개선장군처럼 들어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한 영웅으로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대우를 받고 존경을 받아야 마땅한 자가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말에 '죽 쒀서 개준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까지 온갖 고생을 다한 모세는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죽어야 하고, 약속의 땅은 모세 대신 여호수아가 지도자로 세움 받아서 들어갑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런 일을 당한다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힘들 것입니다. 자신이 수고하고 힘쓴 대가는 모두 자신에게로 모으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영광의 순간 앞에서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세상과 단절돼야 한다고 할 때, 과연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약속의 땅에 들어가 보고나 죽게 해주세요'라는 애원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대로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이 보이는 비스가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보게 됩니다. 그 땅에 얼마나 들어가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열망보다는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죽게 하신 것입니다.

 

 

 

 

살고 싶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더 살고 싶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거역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영광스런 존재가 되고 싶고 사랑 받는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은 본능이지만, 자신의 가치가 포기되어져야 할 순간에 그것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일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용하신 것은 결코 모세를 세상의 영웅으로 만들거나 존경받는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하나님이 일을 하실 뿐입니다. 그 계획에 의해서 모세를 죽이실 때 죽이시는 것뿐입니다. 모세는 바로 이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내가 약속의 땅에 앞에서 죽어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죽어야 말씀이 성취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약속의 땅이라는 감격의 순간을 앞에 두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끝까지 자기 영광을 챙기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미움받을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영광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에서 2천년전의 사건과 같은 사건이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자기 영광 자기 기쁨 때문에 주님이 무시당하고 죽으십니다. 인간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활동할수록 주님은 그런 인간에 의해서 짓밟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주님을 높이는데 두어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어려움에 처하든지 풍부에 처하든지 오직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이 증거 되는 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그럴 때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있고,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주님의 뜻이라면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고, 자신의 괴로움도 실패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참으로 힘든 것은 '살아야 한다'는 욕망이 우리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실패하면 안되고 죽으면 안된다. 성공해야 하고 살아야 한다'는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쓸모 없고 가치 없는 자로 전락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나 성공만을 꿈꾸며 살게 되고, 실패가 오게 되면 낙심하고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의 욕망이 성취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요 사랑이요 은혜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심으로서 말씀을 성취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모세가 자기 영광을 고집 피우며 죽기를 싫어했다면 결국 누구의 일이 방해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일이 방해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의 실패까지도,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실패하면 안돼'라는 생각은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지 못한 모습이고,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자신에게 가치가 될만한 일만을 고르게 될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패와 죽음을 들고 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실패가 없고 성공만 있는 자기 세계를 꿈꾸고 살아갑니다. 화목한 가정, 재벌은 아니더라도 원하는 것은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풍부함, 자질이 있는 자식들, 예쁜 아내와 성공한 남편, 이런 것으로 둘러 쌓여 있는 자기 세계를 꿈꾸고 삽니다. 이것을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이 환상이 실패와 죽음을 들고 오시는 하나님을 밀쳐 버리고, 오직 성공과 생존만을 들고 오시는 하나님을 환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직 성공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삽니다. 실패는 저주로 여깁니다. 때문에 평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다가도 실패가 다가오면 사랑이 끊어져 버리고 맙니다. 실패에 의해서 끊어지는 것은 애당초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유혹이나 칼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는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실패 때문에 끊어지는 사랑이라면 애당초 사랑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나보다 못한 자의 자식은 내 자식보다 공부를 못해야 한다는 생각들, 이런 것들이 우리를 철저히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밀쳐 내고 있는 것들입니다.

 

 

 

 

10절에 보면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애굽에서 기적을 베풀고 홍해를 갈라지게 한 것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자신이 죽어야 할 때를 아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죽으면 안돼'라는 심정으로 삽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으로 감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왕 살아있는 것 성공한 자로 세상에 남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자신의 인생이 누구의 손에 쥐어져 있는지,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인생을 어떻게 쓰시고자 하시는지, 그 의도를 완전히 묵살해 버리는 것입니다.

 

 

 

 

신명기를 마치면서 여러분이 다시금 염두에 두셔야 하는 것은 '인간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고 영광 받는 존재가 되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신자는 어떤 모습으로든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쓰여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부자 되고 성공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실패도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실패해서는 안돼'라는 것은 결국 자신은 전혀 손해 보지 않고 고통도 당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다가 천국 가기를 원하는 이기적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이러한 욕망으로 모일 때, 교회에는 희생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희생이란 자기의 손해를 의미하는 것인데, '나는 실패하면 안돼'라는 자기 사랑으로 교회를 나온다면, 결국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고 희생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일로 여기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사는 신자입니다. 그리고 살아있을 동안에 자기 영광과 자기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무시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오직 살아있음으로 감사하시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 하는 도구로 쓰십시오.

 

 

 

 

교회에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나는 세상에서 실패해도 괜찮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이 사라질 때 드러내십시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사십시오. 이러한 신자는 결코 자기 영광과 자기 기쁨과 자기 존재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위대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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