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열심
박영선 / 새순출판사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욥 다윗, 엘리야, 베드로의 인물들을 살펴보고 그들의 삶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나누는 게 이 책의 개략적인 내용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믿음의 자손 아브라함, 그리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셨던 야곱이나 요셉과 같은 이들이 결코 처음부터 그 믿음이 커다란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 분명 성경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여러 번 의심을 품고 하나님께 되묻는 이야기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깊다는 데에만 초점을 두고 본다.
하지만 저자인 박영선 목사님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한 부분을 성경을 통해 보이시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각자 연단해 가시는 과정을,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 지를 보여준다. 또한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우리 삶에 조명해 보면서, 우리 또한 지금은 이렇게 믿음이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이 많지만 여러 상황과 관계를 통해 주님 안에서 연단시키고 계심을 인지하도록 해준다. - double J -
-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도박을 하듯 인간의 믿음을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믿음은 꺼내놓는 도박이 아닙니다. 어디다 모아두는 돈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고 넘치신 사랑의 열심입니다. 그 설득에 녹아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설득해 오십니다.
- 성서는 ‘믿음’을 진술할 때에는 그것이 자랑이나 삯으로 가지 않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곧 ‘믿음이란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려고 하는 대상에게서 조건을 찾지 않고 결과를 주는 방법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얻었을까요? 우리가 믿어서 얻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들을 이 자리까지 끌어다 놓으신 것입니다.
- 신앙생활 중에서 언제나 제일 어려운 유혹은 나로부터 말미암는 힘과 원인을 찾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좌절하면 십자가가 맥이 없어지고, 내가 실패하면 하나님이 실패하는 것 같은 감정이 우리를 부여잡고 있습니다. 구원은 내가 하나님께 요청하지 않았을 때, 이미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완성하시는 작업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구원 얻은 자로서 완성의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실패하고 실수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신 일을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 “아브라함은 일단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바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불평하지 않았고 지체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까지 인도함을 받도록 지도하신 ‘하나님의 무한히 참으시고 인도하시는 열심 있는 손길’에 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을 처음부터 대단한 의인으로 사용했다면 마치 아인슈타인과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를 데려다 놓고 수학 경시대회를 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초등학교 아이가 질 것은 너무나 뻔한 결과를 놓고, “아인슈타인은 역시 뛰어나다. 그는 대단하다. 그는 구구단을 외웠는데 하나도 안 틀렸는데 초등학생은 틀렸다”고 한다면 맞는 비교일까요? 이처럼 우리들의 신앙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로부터 산출되는 것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때가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도함을 받고 있고 성장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하나님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내놓아라”고 할 때, “네!” 하고 순종할 수 있는 자리까지 이르게 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그토록 대단한 분인 모양이구나”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상상할 수 있는 차원입니다. 아브라함의 사건의 교훈은 바로 이것입니다.
-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뺏으려고 한 그 행동 자체는 하나님 앞에 상 받을 일은 아닙니다. 그 사건과 방법은 마땅히 꾸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고백은 그 무엇을 갖다 놓고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고백이요 자세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이랬기 때문에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이쪽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 우리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은 우리가 착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으로 인정치 아니하시고 우리의 불법을 먼저 사해주셔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도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어서 예수를 믿도록 인도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게 하셨는데 이제 우리가 넘어졌다고 해서 버리시겠습니까?
- 사랑이란 상대방이 위협이나 이해관계를 떠나 인격적 수준의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나를 사랑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을(우리를)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낫다.” 그가 ‘아브라함보다 낫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안다’는 뜻입니다. 왜 야곱이 그런 주장을 한다고 생각합니까? 무엇을 근거로 야곱이 하나님을 자기의 부여조보다 더 잘 안다고 하는 근거를 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야곱이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많이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큰 진리입니다.
- 결국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데 이만큼 ‘자신이 있는 자’로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교만이거나 자랑이 아닙니다.
- 야곱이 하는 이야기 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부분은 “나로 말미암아 축복이 나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축복을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끼리의 비교라면 ‘누가 하나님을 더 잘 아는가?’의 싸움이지, ‘누가 더 잘났는가?’의 싸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희망을 주는 이야기입니까!
- 우리의 우상은 형상이 있고 보이는 우상으로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귀신을 의식 없이 섬기는지 아십니까? 물론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앙에 모시고 있을 뿐이지, 보좌 우편에는 맘몬(mammon ; 물질지상주의=배금주의)이라는 신을, 보좌 좌편에는 권세라는 신을 두고 섬기면서 우리들은 이를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또한 집 안에서 키우고 있는 애완동물인 ‘게으름’과 ‘자존심’을 양 옆구리에 끼고 다니고 있으면서 우리들은 얼마나 많이 아니라고 그러면서 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우상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전폭적인 관계를 조금이라도 방해하는 것은 다 우상이라고 성서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은 누구입니까? 나 자신일 뿐입니다. 나 자신의 만족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일에 제일 큰 분노를 일으킵니까? 그것은 ‘이해관계’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고, 나에게 고통이 있고, 내가 귀찮아 해야 될 일 만큼 나에게 분노를 가져다주는 것은 없습니다. 반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는 족속들입니다.
-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을 인간이 동의한 적은 없습니다. 인간을 과대평가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3대 본성은 악하고, 게으르고, 변덕장이라는 것입니다. 개인마다 개성대로 거기에 여러 가지가 붙습니다. 더럽고, 치사하고,,, 여러 가지가 개성대로 붙는 것이지만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 하나님과 우리들의 고집 대 고집으로 붙을 싸움은 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고집이 센가하면 그의 별명이 ‘영원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 우리가 남이 우리보다 잘 사는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놀라는지 모릅니다. 주기도문에 있어서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하는 구절에 대해서도 여러 사람의 견해가 있지만 여기서의 ‘시험’은 다른 시험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제일 큰 시험은 예수를 믿는 사람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의 이 세상에서의 형편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 신자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대목은 내 인생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이 훈련시키는 손에 있는 것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싸우느냐 하면 내 고통을 기준으로 해서 싸웁니다. “억울합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의 원통함과 고통이 기준이 아니고 옳고 그른 것도 기준도 아닙니다. 다만 ‘성장’이 기준입니다. 철이 드는 ‘자리’입니다.
- 세워주셨으니까 떠들고, 안 세우시니까 바둑이나 두고, 내 인생은 이제 아예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의 모든 주권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세우면 서고 누이면 누워있으니 도대체 뭐가 어렵겠습니까! 대신 누일 때 서려고 하고, 세울 때 눕고 싶어 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망하는 짓입니다. 내가 서있고 싶다고 서지 말고, 내가 눕고 싶다고 눕지 말고, 하나님이 세우실 때 서고, 눕힐 때 누우면 그것처럼 정확한 싸이클은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에서 만사형통해집니다. 하나님께서 괄시당하라고 할 때 괄시 받으면 됩니다. 이것보다 쉬운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안 받으려고 하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자존심 상하게 하면 자존심 상해버리면 됩니다. 상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시면 당당해집니다.
- 우리는 훈련이 왜 필요한지 지금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쓸 날이 옵니다. 그 때 쓸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붙잡고 이 시련의 터널을 통과시키십니다. 그것이 바로 욥의 고백입니다.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이 훈련을 다 마치시면 내가 정금이 된다는 사실 하나밖에는 나는 모르겠다.(욥23:10)”
-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요구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요구행위가 그른 것은 ‘네가 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먹은 것으로만 힘을 냅니다. ‘금식’은 먹는 것을 끊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내 손으로, 물질의 힘으로는 내기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금식이 ‘힘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는 가장 완벽한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 세상에서는 일단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아놓고 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진으로 안 나타나신다’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살아놓고 급하면 회개하면 되니까... 언제든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기로 하셨으니까...’ 이것이 우리가 사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1. 아브라함
① 갈대아우르
믿음은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모든 신자는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 설득 당한 자들입니다. 설득 당하는 것 중에 맨 나중에 설득 당하는 것이 '이해'입니다.
'이해'부터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부터 설득하고, 인생을 설득하고, 그리고 맨 나중에 설득 당하는 것이 '이해'입니다. 우리들의 운명이 하나님 안에 설득 당해서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인정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기 이전에 우리들의 인생이 하나님 손에 인도되고 있다는 사실로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브라함 생애에서 하나님이 표현하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깊으신 계획입니다.
② 애굽에 가다
아브라함은 '갈대아우르'에서부터 이삭을 요구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고 두고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생애 맨 마지막에 요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수준에 이르지 않은 사람에게 심지도 않고 거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되지 않은 것을 미리 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되도록 하신 후에 달라고 하십니다.
③ 믿음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란 일단 한번 해보는 것이다. 한번 맡겨보자'
그러나 이것은 도박이요, 투기입니다. 믿음이란 맡겨보는 도박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다 알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부분을 향해 덮어놓고 우리 자신을 던져 넣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믿음만큼 확고한 것은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정답 이상의 것이요, 아는 것 이상의 것이요, 알아도 잘 아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매달리고, 전적으로 거기에다 나를 맡기고 싶은 지경에까지 들어간 것을 말합니다.
'내가 믿었다는 근거가 있어서 구원이라는 결과가 당연히 오고, 저 사람은 구원이라는 것이 내려져야 할 근거인 믿음이 없기 때문에 구원을 못 얻었다'고 쉽게 생각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해버린다면 그 '믿음'에 대해서 '믿음'이라고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삯의 법칙'이 됩니다.
성서는 '믿음'을 진술할 때에는 그것이 자랑이나 삯으로 가지 않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곧 '믿음이란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려고 하는 대상에게서 조건을 찾지 않고 결과를 주는 방법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들을 중생시키시고, 설득시키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행위 이외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신 것이 무엇인지 이해되는 날, 내 입으로 "주를 믿습니다!"라는 자발적인 항복의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란 다른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구원의 필요성을 모르는 장님, 잠자는 자, 사망한 시체를 가리켜 성서는 죄인이라고 합니다.
'조건'과 '원인'으로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확인할 수 없다면, '자기 최면에 빠졌는지 아니면 구원 얻었는지'를 무엇으로 확인합니까? 그 확인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구원을 얻은 자가 아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구원을 얻지 못한 자가 모든 것을 흉내 내어 그럴듯한 표정을 하고 그럴듯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관계가 있으며, 우리가 구원 얻을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우리들의 생각 속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늘 머리 속에 있는가, 없는가를 스스로 물어보도록 하십시오.
성서가 죄와 구원 얻은 자를 딱 갈라놓는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이쪽은 사망의 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오히려 증오심이 있을 뿐이고, 다른 쪽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있고, 인식이 있고, 그분과 모든 것을 연결해서 생각을 합니다.
④ 할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들의 가장 좌절된 실패와 수치로 범벅이 된 상황이야말로 축복의 시작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할례를 받았다'는 '거룩하다'는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할례를 행하라'는 말씀을 '너희는 거룩하라'는 뜻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잘라 버린다'는 뜻입니다. 곧 '끊어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끊어 버리라'는 것은 쉽게 우리의 팔을 하나 잘라 버린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죽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⑤ 이삭
'예정'이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정된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으로 세 발짝 갔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서 100보 갔다가 왼쪽으로 꺾어서 얼마 갔다가..'이런 식으로 그려놓은 어떤 도표를 좇아가는 것을 예정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하실 때는 계획을 가지는 지성이 있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일단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바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불평하지 않았고 지체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까지 인도함을 받도록 지도하신 '하나님의 무한히 참으시고 인도하시는 열심 있는 손길'에 있습니다.
2. 야곱
① 장자권
우리 마음에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왜 에서를 택하지 않고 야곱을 택했는가?"하는 것입니다. '택한다'는 것은 '조건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뜻은 우리가 시험을 봐서 합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으셨기 때문에 붙잡혔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을 '예정의 교리'라고 하고 '택함의 교리'라고도 합니다.
성서에서 진술하는 것은 야곱을 하나님이 택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을 '놓아 기르지 않고 간섭해서 기른다'는 것이지 야곱이 에서보다 나아서 하나님이 야곱을 택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을 택했기 때문에 그에게 그의 인생을 맡기지 아니하시고 택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는 '목적을 둔 시작'을 하셨다는 것이 바로 '택함'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인생은 그의 인생대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꾸 간섭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끌고 오시려고 하는 것이 야곱의 인생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야곱의 불순종 간에 일어나는 갈등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그를 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복중에서 이미 정하셨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밖에 없도록 운명이 결정지어진 사람입니다. 그것이 야곱의 전 생애입니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태어나서부터 로봇같이 인도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가 마음껏 반응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한 개인으로 나섭니다.
신앙 문제에 대해 야곱과 에돔이야 말로 가장 대표적으로 신앙인과 불신앙인이 갈라서는 상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와 '필요치 않다'는 상징의 대표적인 두 인물입니다. 그래서 성서에서 에돔(에서)을 그렇게 많이 때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서를 향하여 내리시는 저주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한 사람을 붙들고 저주를 하신 예가 없습니다.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영적인 교만한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내리실 멸망과 진노에 대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어서 예수를 믿도록 인도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게 하셨는데 이제 우리가 넘어졌다고 해서 버리시겠습니까?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가는 길에 이제 얼마나 얻어 맞으면서 가는가, 칭찬을 받으면서 가는가 하는 이것 밖에 없습니다. 결정된 곳까지 가긴 갈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도망갈 방법이 없습니다. 말을 안 들으면 한 대 더 맞고 오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택했다'라고 합니다.
나의 실수와 나의 부족이 나의 운명을 번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신나는 것은 없습니다.
② 벧엘
야곱이~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이 벧엘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야곱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이 있는 곳을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다리는 올라갈 때만 쓰는 것이 아니라 내려올 때도 쓰는 생활기구입니다. 그런데 이 사다리는 누가 놓았는가? 야곱이 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놓으신 것입니다. 내려오시려고 놓으신 것입니다. 야곱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구원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야곱의 생애 중에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그가 뿌린 씨를 돌이킬 수 있을 때마다 열매로 본다는 것입니다. (염소 등)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저토록 평안하게 살도록 내버려두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고달픈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달픔을 야곱에게 아주 심각하게 하나님께서 그의 ‘돌이킬 수 있는 생애’의 정면에다 들이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야곱에게 하란을 갔다 올 것 없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땅을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땅을 소유할 수준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야곱으로 하여금 이 과정을 밟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은 구약의 율법과 형벌의 차원에서 우리를 이쪽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닙니다. 가시철망을 쳐서 오직 한 길만을 뚫어놓고 이길 이외의 길을 가면 죽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열어놓고 가고 싶은 데로 다 가게 해놓고 싸우는 '사랑의 자존심'싸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리 눈에 보기에 좋은 곳으로 갔던 것의 결국이 무엇이었는가를 우리로 하여금 돌이킬 시간이 늦기 전에 앞서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무엇이 벌어져도 그것이 나에게 결국 축복이 되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그것을 얼마만큼 아느냐의 싸움입니다.
③ 얍복나루
야곱의 생애에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알고, 구원의 의미를 아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주'로 대접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생애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는 두 가지를 요구 받습니다. 곧 '구세주요, 주'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믿는 자이지만 그러나 한번도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의 인생이 만들어지도록 요구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강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자기의 소원을 자기의 힘으로 빼앗고 만들어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주인입니다. 그것이 야곱입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이때는 이미 야곱이 자기가 누구였던가를 더 이상 회개할 수 없는 차원까지 자세를 낮추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떨어지는 축복,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우리의 생애가 내 손에 있다면 우리는 조만간 얍복 나루터에 걸릴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주가 되지 않는 그런 신앙을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려가며 몰아쳐서 주인이 되거나, 공포의 주인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항복을 받는 주인이 되신다는 점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있습니다.
얍복 나루터에 선 야곱이 아니라 얍복 나루터에 세우시는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입에서 오늘도 참으로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하루속히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섬기는 이 훈련을 "정말 긴장하고 해야겠구나!" 하는 두렵고 떨리는 결심을 해야만 되는 지점에 초대받는 것입니다.
④ 그의 말년
'네 아비의 축복(야곱의 축복)이 네 부여조의 축복(아브라함, 이삭의 축복)보다 나아서..'
야곱이 하는 이야기 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부분은 "나로 말미암아 축복이 나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축복을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끼리의 비교라면 '누가 하나님을 더 잘 아는가?'의 싸움이지, '누가 더 잘났는가?'의 싸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아브라함보다 낫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야곱이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많이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큰 진리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데 이만큼 '자신이 있는 자'로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인생을 무엇으로 만들어내실 것을 목적하시고, 어디를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삼아서 공부를 시키고 훈련을 시키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손에 무엇을 쥐게 하며, 우리가 남 앞에 어떤 대접을 받는가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아는가'의 싸움입니다.
야곱의 생애가 우리들에게 준 교훈은 무엇입니까?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래도 "야곱보다는 낫다"입니까? 아닙니다. 야곱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칠 수 있었다면 "난들 왜 못 외치겠느냐!"는 것을 성서가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담대함은 나를 근거한 담대함이 아니라 내가 정말 누구인지를 알고 녹아지고 녹아져야 하는 데 있습니다.
3. 요셉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을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고, 이삭은 선택된 하나님의 사람의 유업을 설명하고 있으며, 구원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성화되는 것이 야곱이었다면, 요셉은 성화가 시행착오와 잘잘못을 고쳐놓은 지점 이상의 '성장의 자리까지, 영화의 자리까지 끌고 간다'는 상징입니다.
야곱이 자기의 잘못과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는 일들에 대하여 그가 자기를 베어내고 뿌리를 뽑아내고 수술을 한 상징이었다면 요셉은 자기의 잘못이 없는데 환난을 당하는 차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거북한 것은 자격에 걸맞지 않은 자리에 초대받는 것입니다.
천국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같이 하나님께서 단장을 하시고 준비시킨다는 말씀은 그 옆에 앉을 우리가 그 신부를 맞을 신랑의 모습에 부끄럽지 않게 훈련된다는 것이 전제 조건입니다.
예수 믿으면 훨씬 복잡해집니다. 가장 편한 방법, 제일 좋은 방법은 이것입니다. 편하게 살다가 '돌아가시기 5초 전'에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좋습니다. 가장 확실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군대에서 제대하고 예비군으로 편성이 되면 영원한 계급을 달고 갑니다. 그것은 더 이상 진급이 되지 않습니다. 제대하고 나면 더 이상 진급할 수 없습니다. 진급의 유일한 기회는 현역일 때뿐입니다.
우리가 만일 죽기 5초전에 회개하고 천국에 닥 들어가면 우리의 계급이 무엇으로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되십니까? 거기는 영원토록 살아야 할 장소입니다.
바로 그 훈련에 관한 이야기가 요셉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잘못에 관한 지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고자 하는 작품을 위하여 훈련 받는 자리에 초대받는다." 요셉은 어떻게 초대받았더냐?"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제일 큰 시험은 예수를 믿는 사람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의 이 세상에서의 형편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원수들이 땅땅거리며 사는데 놔두십니까? 그리고 왜 불의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을 괴롭히는데 놔두시는 겁니까?" - 하박국
우리가 생각하면 하나님 편에 선 자가 축복을 얻고, 하나님 편에 선 자가 하나님 편에 안 선 자를 패주어야 옳습니다. 아니 패주는 건 그만 두더라도 최소한 갈라져서라도 서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이없게도 거꾸로 우리를 팹니다.
이 문제는 조금 전에도 이스라엘 역사에서 말한 바와 같이, '누구에게는 무엇을 목적하고 있고 누구에게는 그 목적한 것이 없다'는 그 구별에서 분명해집니다. (내 아들과 남의 집 아이와의 차이)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하여 나에게서 잘라져 나가야 하는 일이 있고, 고쳐져야 할 일이 있으며, 만들어져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거기에 늘 믿음과 확신과 웃음으로 대치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아이고, 대고'가 나올지 모릅니다. 어떤 때에는 악을, 악을 쓸지도 모릅니다.
4. 모세- 위인이 아닌 범인
우리 신앙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하나님이 누군지를 권위적 차원에서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대로 하십니다. 하나님이 80살에 부르면 부르는 거고, 120살에 부르면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언제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온 천하는 그 앞에 잠잠할지라"입니다. 여기에 승복해야 합니다.
5. 욥 -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로의 시련
성서의 구절을 추적해 보면 욥이 하는 이야기는 전부 이렇습니다. "하나님 억울합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이 일을 당해야 합니까?"
내 인생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이 훈련시키는 손에 있는 것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싸우느냐 하면 내 고통을 기준으로 해서 싸웁니다. "억울합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의 원통함과 고통이 기준이 아니고 옳고 그른 것도 기준도 아닙니다. 다만 '성장'이 기준입니다. 철이 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러기에 그가 우리의 인생을 주장하시며 나로 가장 축복된 길을 위하여 오늘을 준비하시는 일인 줄 알고 감동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6. 다윗 -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누구냐' 하는데 대하여 다윗이 드디어 깨닫습니다. 인간에게서 선이 나올 수 없고, 그가 가장 선한 차원에서 만드는 것 마저도 죄라는 사실을 압니다. 시편 51:1~5절에서의 말씀을 다윗이 밧세바 사건 때문에 깨닫게 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죄는 지금의 실수가 아니라 그가 '죄 밖에 지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성서는 이 부분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다'라는 것을 이런 개념에서 정의합니다. 인간이 가장 선한 일을 행한 것도 죄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는 것입니다. )
7. 엘리야 - 세미한 음성의 하나님
신자의 신앙생활에서 어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나타나주지 않으시는 것 때문에 신앙의 혼동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십시오.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비밀의 원 뜻은 미스터리입니다. 안보여줘서 모르는 것이 시크릿이라면 보여주는 것을 봐도 모르는 것을 미스터리라고 합니다.
지금 엘리야의 가장 큰 소원은 이것입니다.
'내가 믿고 아는 하나님을 저 원수들도 알게 나타나 주십시오. 이세벨도 알고 아합도 알게 나타나 주십시오.
천국은 거듭난 자가 아니면 깨달을 수 없는 모습으로 와 있어 누구나 오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모든 사람 앞에 '보란 듯이 증명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넘어집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들어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영광과 능력을 감추고, 심판을 보류하고, 초대하는 자의 모습으로 있기 때문에 감추어진 보물로, 씨앗으로 자기의 영광을 보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괄시를 받고 있습니다. 오해를 당하는 모습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자신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라는 것이 가장 큰 기준입니다. '성서에 대하여 내가 어떤 자세를 가지는가?' 이것만큼 더 확실한 기준은 없습니다.
눈 뜬 사람인지 감은 사람인지 무얼 보고 압니까? 이곳에서 저곳까지 걸어가게 해서 앞에 서 있는 기둥에 부딪치지 않고, 계단 따라 똑바로 올라간다면 눈 뜬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이 멀었다가 뜬 기억이 있어야 눈을 떴다는 것을 믿겠다'고 합니다. 보고 다니면서도 "하나님, 전 눈 뜬 기억이 없어요"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천국이란 국토나 영토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영어의 kingdom이라는 말은 그 개념이 reign, dominion이라는 뜻으로 통치권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국토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영토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구름 위에 있는 땅이 여기에 내려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권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나님께서 주권을 행하시면 거기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나라에 임하옵시고......"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주권에 항복하는 신하가 되겠나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그의 통치권이 시행될 졸병이 있으면 여기까지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 기도를 하는 당사자가 하나님의 졸병 노릇을 하면 거기까지 하나님의 영토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해야 되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열쇠를 우리가 쥐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 거기가 하나님의 땅이 되는 것이고 내가 거부하면 '적국에 망명한 꼴'이 됩니다.
엘리야를 기억합시다.
세미한 음성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 우리가 얼마나 많은 순간에 강한 바람을, 지진을 부르려고 하고 있는가와 대비해 본다면 우리는 새삼 새롭게 힘을 얻을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초대와 신비에 미쳐서 슬퍼할 틈도 없고 괴로울 틈도 없을 것입니다.
8. 베드로 -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낫냐?
오늘날 신자들에게서 꼭 뽑아 버려야 할 단어가 있다면 '능력'이라는 단어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되지 말고, '충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두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서 '사랑'은 다 아가페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질문에서의 '사랑'은 필레오입니다. 세 번째는 두 번이나 물으신 것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을 이렇게(필레오) 들으시고 급수를 낮추어서 '필레오'라고 물어 오십니다. 베드로가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에 더 높은 급수로 물으시고 '그렇다'고 했는데 더 낮은 급수로 내려왔으니 앞의 대답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믿어 준다는 것일까요, 안 믿어 준다는 것일까요? 안 믿어 준다는 것입니다.
왜 베드로가 근심했는가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왜 베드로가 근심을 했을까요? 이것이 베드로가 하나님 앞에서 꼭 훈련되어야 되는 지점입니다.
베드로가 이제 배우는 것은 그가 가진 자신과 그가 가진 결심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배웁니다. 이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베드로가 이 시점에서 첫째 알아낸 것은 '내가 확신한 것이 내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결심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 결과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자신이 할 일이란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배웁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면 된다'라는 것과 '내가 최선을 다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아는 차원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할 일은 무엇일까요? 라는 물음에 베드로의 대답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며 한다는 것은 '일의 결과'가 누구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까? 바로 '내 손'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제 그것이 내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차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은 '일의 결과가 내 손에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요 헌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하나님 사람된 헌신'인 것입니다.
'해서 된다'면 이제 무슨 뜻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해도 안 되면 그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결과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갖는 신앙 고백이요, 사랑이요 열심입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정말 내가 맞는다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이것이 맞는가, 저것이 맞는가가 아닌 싸움이 우리 앞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맞는 길이고 저것도 맞는 길일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 말을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가, 저렇게 하는 것이 옳은가? 물론 무엇이 진리냐를 따지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 이상으로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분일 뿐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옳은가, 틀린가?'라는 것 이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녀로 서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토록 재미가 없고,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하기 시작하면 옳고 그른 것은 둘째, 셋째 문제가 됩니다.
사랑을 하는가? 사랑을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이 내가 옳게 살았느냐 틀리게 살았느냐 이전에 사랑을 하고 계시는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루하루의 삶이 재미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신앙 행위와 신앙의 열심이 하나님에게 이익이 되고, 이웃에게 이익이 되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이름으로 행세했어도 다 사기'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베드로가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입니다.
우리가 이제 다시 살펴본 베드로에게 어떤 일들이 생겼느냐는 그가 얼마나 높아졌기 때문에 생겼느냐가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네 최선을 다하라. 그것으로 결정나는 것은 아니지만 네가 내 부름에 순종하여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때 내가 너를 통하여 내 일을 하리라"
"주여 제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우리의 사랑은 참으로 보잘것 없습니다. 그 보잘것 없는 것을 알고 그 진심을 꺼내놓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그 때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마음껏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가 한 일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 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aksh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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