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내용!! 강해!!

[스크랩] 민수기 강해 2

하나님아들 2014. 11. 20. 00:09

 

 

 

 

 

 

민수기 강해 2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26강 민 18:1-7 제사장 97.8.10


회사가 자기네 상품을 선전할 때 덧붙여서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유사품에 주의하시고 ○○ 마크를 꼭 확인하세요'라는 말입니다. 유사품이란 다른 회사의 상품을 모방한 가짜를 말합니다. 유사품은 정품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정품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유사품을 정품으로 속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선 가짜와 구별을 잘 못하기 때문이고 또 값이 싸기 때문입니다. 값이 싸다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진짜가 아닌 가짜를 구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진짜를 값싸게 샀다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유사품은 정품 앞에서는 가짜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유사품이 정품과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유사품 소유자는 자기 것이 정품이라고 우깁니다. 정품을 가진 자 앞에서 '네것이 가짜고 내 것이 진짜다'라고 우기는 촌극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짜를 진짜라고 우겨도 상품을 만들어낸 회사가 유사품이라고 판정할 때는 할말이 없습니다. 결국 그동안 가짜를 진짜로 여기며 진짜를 값싸게 샀다고 좋아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한탄을 하게 될 것이고 진짜를 가짜라고 우겼던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유사품이 여기저기에서 진짜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위조지폐, 위조수표, 가짜 한우, 가짜 꿀, 가짜 참기름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며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가짜들에 속는다고 해도 약간의 물질의 손해를 보는 정도로 그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장래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는 유사품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유사한 그리스도에 대해서 주의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도 유사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만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도 유사한 복음에 대해서 주의할 것을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고후 11:4절을 보면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라고 합니다.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란 말을 합니다. 이것을 쉽게 사이비 종교를 용납하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물론 사이비 종교도 포함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진짜 복음이라고 믿게 만드는 유사 복음입니다. 사이비 종교는 한마디로 조잡한 모방이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이비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의 탈을 쓰고 있는 이리와 같은 유사품은 정품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진짜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고 오히려 유사품을 정품이라고 우기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유사 복음은 결코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못합니다. 오히려 멸망으로 빠지게 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고를 들어보십시오. 갈 1:6-9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 즉 복음을 모방한 유사복음에 대한 심각성을 말합니다. 다른 복음도 예수를 말합니다. 다른 복음도 십자가를 말합니다. 다른 복음에도 성령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복음과 유사하다고 할지라도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에 비춰보면 가짜임이 금방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유사품을 쫓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갈 1:10을 보면 유사복음은 사람들의 기쁨을 위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유사한 복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금 세상은 유사복음이 진짜 행세를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가짜를 진짜라고 우기고 진짜를 가짜라고 우기면서 참된 복음을 멀리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유사복음이 아닌 참된 복음을 알고 있다고 자신합니까? '내가 좇아가는 복음은 나를 생명으로 인도해주는 참된 복음이다'는 것을 굳게 자신합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은석교회에서 전하는 복음이기 때문에 참된 것입니까? 신윤식 목사가 전하는 복음이기 때문에 참된 것입니까? 교회를 보고, 사람을 보고 복음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저교회는 진짜 교회답다. 그러니까 저 교회에서 전파되는 복음도 진짜일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또 '아무개 목사님은 인격도 훌륭하고 성품도 좋고 욕심도 없고 진짜 목사다운 목사니까 저 목사님이 전파하는 복음은 진짜일 것이다'라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이러한 실수를 사람들이 많이 합니다. 교회와 사람에 대한 믿음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그 교회에서 말하는 복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다른 복음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교회라는 것 하나 때문에 교회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성령, 십자가, 복 등등 모든 것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 없다라고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석교회는 어떻습니까? 유사 복음이 아닌 참된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교회입니까? 여러분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참된 복음이란 증거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은석교회니까 참된 복음이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팔은 안으로 굽고 가재는 게편이라고 은석교회 다니는 교인이기 때문에 내가 다니는 교회를 편드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유사품과 정품의 구분은 그 상품을 제조한 회사가 가장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는 단지 눈으로 보고 '이것이 진짜 같다, 저것이 가짜 같다'는 추정을 할뿐이지만 상품을 만들어낸 회사는 '이것은 이러이러해서 진짜입니다'라고 진짜의 조건을 하나하나 들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의 진위 여부도 누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제아무리 유사한 복음을 가지고 내가 진짜라고 주장해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다르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교인들이 많습니다. 교인과 신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인은 교회가 만들어 내지만 신자는 하나님이 만들어 냅니다. 교인은 생명이 없는 죽은 자이지만 신자는 생명을 소유한 산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인은 주님을 따르지 않지만 신자는 주님을 따라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교인입니까? 신자입니까? 교인은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고 돌아가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살아있고 이기주의를 가득 담고 있는 옛사람 그대로이지만 신자는 설교를 듣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자신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되어 돌아갑니다. 자기 자신보다는 하나님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연구하고 잘 안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앞세우면 신자가 아닙니다. 결국 유사품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기게 만듭니다. 십자가도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기는 자리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인 자기를 앞세우게 하는 것은 절대로 그리스도가 아니오 십자가가 아닌 유사 복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오늘도 하나님께서 은석교회를 보실 때 유사복음을 말하고 신자가 아닌 교인을 만들어 내는 엉터리 교회가 되지 않고 자기 자신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소중히 하고 주님을 따르는 진자 신자들로만 풍성한 교회 되기 위해서 우린 오늘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린 모두 죽은 지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은 '우린 다 죽었다'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살아있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었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생명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죽음의 실체를 보지 못한 자는 생명이 소중하지 않습니다. 소중한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일 뿐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보지 못하고 '나는 살아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유사 복음은 이렇게 교인에 불과한 사람들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서 '죽었다'라는 선포가 아니라 인간을 이모저모로 치장해주는 일을 도와줍니다.

 

 

 

 

민 18:1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족은 성소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요 너와 네 아들들은 너희가 그 제사장 직분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제사장이 있게 합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는 일을 합니다. 제사장으로 하여금 죄를 담당하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와도 죽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랑이고 자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제사장에게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신이 죽은 지팡이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자신은 죽은 지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때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17:12,13절을 보면 그 모습이 나와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에게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가까이 나아가는 자 곧 여호와의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다 죽사오니 우리가 다 망하여야 하리이까"라고 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지팡이는 그대로이고 아론이 지팡이만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실체를 알게 됩니다. 자신들은 죄로 인해서 죽은 자이고 망할 수밖에 없는 자임을 알 때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자리에 죄를 대신 담당하는 제사장을 세우심으로 두려움을 기쁨으로 바꾸십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아 가는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죄로 인해서 죽은 자이고, 다 망하여야 할 가치 없고 형편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사랑과 자비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말하는 사랑과 자비는 결국 유사 복음에서 나온 가짜에 불과합니다. 사랑과 자비는 돈이나 벌게 해주고, 병이나 고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과 심판 속에 있어야 할 우리를 누군가가 대신 그 죄를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는 생명으로 끄집어내신 것을 사랑이요 자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케 할 분을 세우신 것, 그것을 사랑 자비라고 하는데 그 사랑과 자비가 곧 우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용서는 '그래 네 죄 용서해줄께'하고 말 한마디로 간단히 끝난 문제가 아닙니다. 용서란 대신 죄를 담당할 분을 세우신 것입니다. 내 죄 때문에 대신 고생하고 십자가에 달려서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신 비참한 꼴을 당한 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 그리스도의 피로 내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면 그 말 한마디로 간단히 내 죄가 해결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한번으로 끝났고, 이제는 옛날 2000년전에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만 하면 간단하게 죄가 해결된다고 여깁니다. 이런 사람들이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겠습니까?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만하면 얼마든지 해결되는데 과연 내 죄 때문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겠습니까?

 

 

 

 

오늘날 신자들이 용서를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용서를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내가 죽은 지팡이고 하나님 앞에서 망해야 할 자인 것도 모르고, 죄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용서도 쉽게 생각해 버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도 남의 일로 여기고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가 더 소중하고 자신을 더 앞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신자가 아닌 교인의 자리에 머물러 버리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유일하게 구원받은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달린 한편 강도입니다. 성경은 무엇 때문에 한편 강도의 구원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까? 구원은 곧 강도와 같은 그런 모습 안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눅 23:39절에 보면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중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한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강도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다고 간단히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강도를 통해서 보여진 믿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강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것을 업신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도 자기의 죄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자기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죄를 보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죽은 자임을 알지 못합니다. 때문에 '하나님 나를 구원시켜 주옵소서'라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구원을 기다리는 신자의 모습이라고 생각되겠지만 사실은 자신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죽은 자임을 전혀 알지 못하는 증거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자신은 죽은 자임을 알고 자신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전혀 두지 않는 사람은 오직 주님의 긍휼만 기다립니다. 구원을 위해서 뭔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귀한 줄을 알고 자기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다른 강도입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한 강도를 꾸짖습니다. 눅 23:41절에 보면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이 강도는 자신의 죄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한 일,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는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달린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면서 죽는다는 것을 이 강도는 십자가에 함께 달려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신을 부탁하게 됩니다. 구원시켜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입니다. 나를 생각해 달라는 것은 내 구원은 주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의지할 것은 오직 주님의 사랑과 긍휼입니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비워버린 모습입니다. 이것이 겸손한 신자의 모습이며 예수님이 찾는 자기 백성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가 이 강도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신자의 마음은 자기의 욕심은 다 비워버리고 오직 긍휼과 은혜만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간 탕자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왔을 때 한 말은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으니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죄를 안자의 모습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아버지의 은혜와 자비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는 어떻습니까? 신자라고 자처하는 교인들은 어떻습니까? 품꾼으로 써달라는 것이 아니라 한자리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 '내가 구원받지 못하면 누가 받느냐'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린 다같이 살 수 없는 자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망해야 할 악한 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린 가능성이 없는 인간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나만 챙기는 이기주의로 가득찬 실패자들입니다. 이것을 스스로 자인할 때, 실패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린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눈을 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면서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유사 복음이 아무리 사랑과 자비를 말한들 그것이 과연 복음이겠습니까? 이들이 말하는 사랑과 자비는 인간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랑과 자비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우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성령이 자리할 수 없고 은혜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사장은 죽어야 할 옛사람을 새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남을 위해서 자기 몸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제공하기 위해서 자신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이것이 신자된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도 십자가의 사건 앞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남을 평가할 때도 십자가의 사건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제대로 발견하고 나서 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다른 복음은 자기에게 가능성을 둡니다. 때문에 죄인이라고 하는 인간의 실체를 모릅니다. 열심히 하면 그것이 구원을 가져오는 줄로 압니다. 내 죄를 담당했던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지 옛날에 지나간 사건으로 여겨버립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내 죄를 담당해 줄 필요 없이 인간의 적당한 도덕과 윤리와 선함과 교회에 대한 봉사와 열심있는 종교행위를 가지고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복음은 인간에게 전혀 가능성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죽은 자일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망하고 죽어야 자신의 실체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 죄를 누군가가 담당했음을 압니다. 그 은혜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발견합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에서 사랑과 자비에 대해서 눈을 뜹니다. 그리고 나는 비록 품꾼으로 살아도 아버지의 품에 있다는 그것만으로 행복해 하고 감사하면서 살게 됩니다. 자신을 채우려고 애 쓸 필요도 없습니다. 다 쓸데없는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복음 안에서 주님을 찾고 있습니까?

 

 

 

 

 

27강 민 18:21-26 십일조 97.8.17


어떤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에 대한 청년의 반응은 근심이었습니다. 영생에 관심을 두고 예수님을 찾아 왔고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뻐하고 돌아가야지 무엇 때문에 근심을 합니까? 돈 때문이었습니다. 청년은 돈의 지배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돈을 버리라고 합니다. 즉 주인을 돈에서 주님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결국 청년은 자신의 주인인 돈을 버리라는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청년은 차라리 하나님을 무시하면 했지 돈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청년은 영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온 것 같았지만 사실은 영생이 돈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영생을 포기하는 것도 고통이지만 돈을 포기한다는 것은 더욱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청년은 돈을 포기하지 않은 영생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영생에 관심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면 말씀을 듣고 난 후의 여러분의 마음은 기쁨입니까 아니면 근심입니까. 영생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보다는 돈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이 더 컸던 청년의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청년과 같이 돈이라고 하는 기존의 주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이 자리에 나왔다면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큰 근심거리만 안겨주는 말씀이 될 수밖에 없음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청년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청년이 가지고 있는 영생에 대한 개념은 돈을 여전히 주인으로 섬기면서도 행위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영생이었습니다. 돈을 주인으로 섬긴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한 행위만 있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세상에 전혀 매여 있지 않은 예수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청년은 돈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인간에게서도 선한 행위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돈 때문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주님의 피를 업신여기는 사람에게서 무슨 선한 행위가 나오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생각들은 아예 처음부터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은 청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돈도 포기하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이 단지 영생에 대한 욕심만 가지고 나옵니다. 그리고 청년처럼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묻습니다. 목사에게 그 일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선하다고 생각되는 행위를 하며 사는 것을 가지고 '신앙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청년은 자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뭔가 행하고, 충성을 다하고, 바치고, 자기의 성의를 다 보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청년의 착각이었습니다. 자기 것이 있다는 착각입니다. '내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로 출발하는 것이 신앙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자신의 정성과 성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접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 청년의 생각이었고 오늘날 기존 교인들의 뿌리 깊은 생각들입니다.

 

 

 

 

신앙은 '내 것은 없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내것이 있는 한 신앙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소유에 대한 울타리를 더욱 단단히 하는 가운데 그나마 영생을 포기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 뭐 할까요? 무엇을 하면 복을 주고 천국도 보내주시겠습니까?'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십일조이지 않습니까? 물론 십일조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하신 십일조를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인간을 더욱 돈의 노예로 만들어 가고 종교사업을 위한 기부금으로 전락시키고 만 것이 바로 신자라고 자처하는 교인들입니다.

 

 

 

 

십일조가 삶의 안전과 보호와 풍요를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사고, 미래의 천국까지 미리 예약해 놓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참으로 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 종교계의 현실 속에서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이 말씀하신 십일조의 의미를 이해함으로 십일조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지는 신자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돈이 아닙니다. 오늘날 목사와 교인들은 십일조를 가운데 두고 한쪽은 더 바치게 하고 한쪽은 덜 바쳐보려고 서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말라기 3:8절을 인용하면서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다 그래 가지고 잘사나 보자'라고 엄포를 놓고, 교인은 교인대로 '교회가 너무 돈만 밝힌다 목사가 헌금만 강요한다 교회가 썩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돈을 지키기 위해서 헌금을 강조하는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돈의 노예로 세상을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가 오늘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전에 여러분께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의 노예된 상태에서 이 말씀을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저는 오늘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헌금을 하라는 얘기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헌금을 강조하는 현 교회에 반발한 의협심 때문도 아니고 성경을 바르게 이해한다는 저 개인의 의로움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성경에서 말하지 않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돈의 노예된 상태에서, 여전히 돈이 주인으로 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 설교를 들으시면 결국 여러분은 자신의 소유를 좀더 아끼고 교회를 향한 쓸데없는 지출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십일조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아야 할 이유는 헌금을 강조하는 교회를 비판하기 위한 목적도 아니고 십일조를 내지 않고도 천국 갈 수 있다는 안도감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돈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왔던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과연 우리가 영생이 포기되는 고통보다는 돈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왔던 죄인이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눈을 뜨면서 오직 주님만을 주인으로 삼고 주님의 은총과 사랑에만 매달려 살아가고자 하는 신자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란 그 기원이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에게 십의 일을 바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 일부터 설명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상당히 복잡해지기 때문에 오늘 본문 안에서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를 바치도록 명령하십니다. 십일조를 내라고 하신 이유는 21,22절에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어서 레위 자손이 하는 회막의 일을 갚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기에 십일조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의미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레위인에게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받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일조의 중요성은 소득의 십분의 일이라는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바쳤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십일조의 의미를 돈에 두고 있기 때문에 돈이 아까운 마음에서 헌금에 대한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얼마를 해야 하느냐 나같이 가난한 사람도 헌금을 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마음을 보시지 돈을 보시겠느냐'는 등등의 핑계를 찾아내면서 헌금에 대한 탈출구를 찾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이것은 돈에 관심을 두고 사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는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일조가 누구에게 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십일조를 내야할 당위성을 말하기 위해서 구제를 내세우기도 합니다. 20절에 보면 레위인은 땅의 기업도 없고 분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십일조를 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쉽게 생각해서 하나님이 십일조를 내라고 하신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라고 하신 것이라고 결론지으면 곤란합니다. 십일조의 목적은 구제가 아닙니다. 물론 신 26:12절을 보면 십일조가 땅의 기업이 없는 레위인, 객, 고아, 과부들의 몫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단순히 없는 자들을 돕는 차원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드러내고 있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의 어린양의 희생만큼은 대대로 잊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어린양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희생을 잊어버릴 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마련하신 장치가 세상에 기업이 없는 자들을 있게 하시고 그들에게 십일조를 바치게 해서 그것을 통해서 세상에 기업도 없이 고아와 과부와 같은 비참한 모습이었던 자신들이 어린양의 희생으로 인해서 살아났다는 것을 계속해서 찾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계속해서 복안에 머물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십일조라는 것은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그 행동이 가상해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복안에서 살아가는 신자가 그 복이 어디서부터 오는가를 깨닫고 복의 출처를 인정하는 행위로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복의 출처는 희생입니다. 이 희생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움 받은 사람들이 바로 레위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십일조가 레위인을 향하는 것도 십일조가 결국 희생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받는 레위인들이 평소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해주는 대가로 십일조를 바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죄뿐만이 아니라 그 무엇에 대한 대가도 아닌 것입니다. 한쪽은 희생하는 자, 또 한쪽은 그 희생 덕분에 살아있는 자의 사이에 십일조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복은 희생을 보여주는 제사장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일조라는 율법을 통해서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을 통해서 복이 주어집니다. 십일조는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곧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은 대제사장 되셔서 희생의 의를 완벽하게 보여주신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다른 통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대 교회가 십일조를 복의 통로로 고집 한다면 결국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불필요성을 내세우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바쳐야 할 십일조는 세상 물질이었습니다. 세상 물질에는 인간의 죄가 담겨 있습니다. 돈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돈 때문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돈 때문에 말씀을 경시하면서 오로지 돈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 물질에는 인간의 죄가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십분의 일을 레위인에게 바치라고 합니다. 자신의 죄를 담당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죄의 산물인 물질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레위인은 그것을 받음으로 회막의 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회막에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레위인이 담당해줍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레위인에게 십일조를 내면서 단지 도와준다거나 돈을 낸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죄의 산물을 바치면서 죄없는 상태를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레위인이 죄때문에 피해를 입은 자의 자리에 있는 것 같이 누군가 우리의 죄 때문에 피해를 입은 자리에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있는 상태를 좋아하십니까 죄없는 상태를 좋아하십니까. 악한 세상을 좋아하십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좋아하십니까. 물론 이구동성으로 죄없는 상태를 좋아하고 천국을 좋아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염려스러운 것은 그것이 바로 앞서 말했던 부자 청년의 차원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예전의 상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새로운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죄없는 상태를 좋아한다는 것은 돈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기를 소원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돈에 우리의 모든 죄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기심, 다툼, 미움, 시기, 사기, 욕심, 거짓말, 살인, 간음, 이런 모든 것이 다 돈에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죄없는 상태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돈을 포기하는 것을 영생의 문제보다 더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은 돈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천국까지 확보하려는 욕심이 아니겠습니까?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땅의 죄있는 것이 죄없는 상태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레위인의 희생을 통해서입니다. 십일조는 '내가 비록 죄악가운데서 살아가지만 나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기를 원합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복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며 복이 어디로부터 주어지는가를 알고 그것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당신의 희생으로 내가 죄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십일조를 이상하게 가르친 것 때문에 교인들은 집안에 조그만 우환만 생겨도 십일조를 생각하곤 합니다. 또 교회의 운영을 위해서는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죄없는 상태를 사모하고 희생 속에서 죄용서의 긍휼과 사랑을 잊지 말고 살아라고 주신 법을 인간들이 자신의 욕심을 위한 수단으로, 종교집단의 재정을 채우기 위해서 이용하는 법으로 바꿔 버린 것입니다. 십일조는 모든 관심을 죄용서에 두고 살아라는 뜻입니다. 죽어야 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십분의 일을 바침으로 나머지 십분의 구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희생덕분에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십일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약에서는 어떤 식으로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우선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구약과 같이 물질에 대한 십일조는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십일조가 물질이었지만 지금은 우리의 몸 자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돈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매여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가 아니라 주 예수입니다. 즉 예수님이 나를 다스리시고 나는 그 앞에서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헌신하는 것이 오늘날의 십일조의 뜻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십일조라는 돈을 낸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할 일 다한 신자로서 떳떳함을 가지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받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는 십일조라는 돈으로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체를 다 드려도 갚기에 부족한 것이 주님의 은혜고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겨우 돈 얼마로서 덮으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하찮은 싸구려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주인은 돈이 아니고 주님입니다.' 이런 고백으로 나오는 것이 십일조를 하는 것입니다. 한평생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용서에 모든 것을 걸고 주님께 온전한 헌신을 하며 살아가는 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를 가지고 주님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돈을 포기하라는 주님의 말에도 근심이 되지 않습니다. 네 욕심으로 살지 말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라는 말씀에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런 마음으로 나오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기업으로 분깃으로 여기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업은 하늘나라입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기업도 분깃도 없습니다.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레위인의 기업과 분깃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있는 세상을 부러워 하지 말고 죄없는 거룩한 나라를 마음에 두고 종신토록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고 있는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마음이 있어지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고 합니다. 레위인도 받은 십일조 가운데 십일조를 하나님께 거제로 바쳐야 합니다. 이것은 레위인도 죄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임을 말해줍니다. 죄용서는 완벽한 제사장의 자리에서 희생을 보여주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질 뿐입니다.

 

 

 

 

이러한 정신에 근거할 때 헌금이란 '나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돈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자로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를 고백하는 마음입니다. 때문에 참된 헌금은 주님만이 복의 전부인 것을 아는 자가 드릴 수 있습니다. 돈을 섬기고 돈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무리 헌금을 한들 그것이 어떻게 선한 행동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헌금은 교회가 강요하거나 어떤 압력도 행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항상 자발적으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담아서 가져나온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액수를 정해서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은혜 안에서 언제나 자발적으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생각해서 내는 것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헌금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인에게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은 돈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교회는 망하든 흥하든 하나님이 유지하는 것이지 돈이 유지하는 것이 아님을 부정하는 것이고, 교회라는 조직에 미쳐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헌금을 하셨습니까? 왜 하셨습니까? 교회에 빈손으로 오기가 미안해서 바친 것입니까? 헌금은 교회에 들어오는 입장료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십일조의 정신을 잘 이해하시고 죄악된 세상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돈보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더 사모하고 기다리는 그런 마음 되어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28강 민 19:20-22 부정한 인간 97.8.24


22절에 보면 "부정한 자가 만진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부정한 자에게서는 부정한 것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부정한 자는 무엇을 해도 부정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사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부정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에 대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정한 짓을 해야 부정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정한 짓을 한적이 없고 오히려 착한 일만 하고 있는데 어떻게 부정한 인간이냐고 반발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하면 도저히 그 말을 인정을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지금까지 나쁜 짓을 한적이 없는데 왜 내가 죄인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판단의 기준을 행동에 둡니다. 즉 착한 일을 하면 그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하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자신이 남들같이 착한 일을 못해서 착한 사람이라는 말은 듣지는 못해도 최소한 남에게 해를 입히는 나쁜 일은 한적이 없으니까 나쁜 사람은 아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착한 일 나쁜 일에 관계없이 인간은 더러운 존재라고 선언합니다. 살아있는 성자로 전세계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테레사 수녀도 부정한 인간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제가 전에 사람에게는 선에 대한 욕심도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남을 돕고 싶은 욕심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욕심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평생을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면서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병이 들어서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직 가난한 자들이 저렇게 많습니다. 제가 좀 더 그들을 도와주어야 하는데 왜 나를 병들게 하십니까? 제가 그들을 좀 더 도와줄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십시오'라고 했다면 여러분은 이 기도가 옳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틀리다고 생각합니까? 세상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 사람처럼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돕기 위해서 건강을 달라고 하는데 그것이 왜 나쁘냐고 따져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이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병이 든 것에 대해서 용납을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착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건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병이 들면 그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는데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내가 가난한 사람들을 더 많이 도와줄 수 있도록 나를 도우셔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고, 그동안 자신이 가난한 사람을 도왔던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 그들을 책임지셨던 것이다는 생각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병이 들었다는 것을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싶은 선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병을 주신 일에 대해서 용납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시각입니다.

 

 

 

 

우린 이것을 바울의 예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병이 있었다는 것을 다 잘 아실 것입니다. 간질인지 안질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은 그 병으로 인해서 복음을 전파하는데 지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육체에 가시, 또는 사단의 사자라고 말합니다(고후 12:7). 바울은 이것이 자신에게서 떠나도록 하기 위해서 세 번 주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 12:9 상반절)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면 복음을 좀더 잘 전파하기 위해서 가시와 같은 것을 없애달라는 것은 참으로 신자다운 기도이며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능력의 약함과 강함에 상관없이,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을 몰랐을 때 바울은 가시가 자기에게서 떠나기를 원했습니다. 가시가 떠나가야 좀 더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의 응답을 통해서 인간의 약함이 곧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전혀 그 어떤 인간에게도 기대를 걸지 않고 의미를 두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단지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뿐입니다. 만약 신자가 세상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을 구분하고 하나님께 나온다면 그는 결국 교회 안에서도 행동을 가지고 믿음 있는 신자, 믿음 없는 신자로 구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에게 아주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설교하고 나거나 또는 청년들에게 강의를 한 후에 흔히 하는 질문은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까?'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무엇을 해도 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한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것은 지금껏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신자되고 착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을 해도 그것은 더러운 것이고 우리를 신자되게 하지도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런 반발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무엇을 해도 죄라면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죄가 없는 것입니까? 사람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아무것도 안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안하는 인간은 죽은 자입니다. 사람은 하다못해 잠을 자면서도 꿈을 꾸고 몸부림을 칩니다. 즉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도 일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행동을 안한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서는 끊임없이 미움과 분냄과 살인과 간음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 15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이 음식을 먹으면서 손을 씻지 않은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자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1절)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들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는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17-20절)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글자 그대로 인간의 행동이 인간을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착한 행동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속에서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이 나오는 인간은 다 더럽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러운 인간이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다고 해서 죄인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무엇을 하나 안하나 죄인, 부정한 자라는 굴레는 벗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인간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했을 경우에만 나쁜 인간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시각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착한 행동을 해서 착한 사람이 되자고 강조합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윤리와 도덕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세상을 좀더 좋은 환경으로 유지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착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살기 좋은 환경으로 변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이 착하게 살자고 강조하는 것이나 또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나쁜 행동은 안하려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하며 살고자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악을 멀리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 나쁜 짓이라고 생각되는 행동을 자제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죄가 되는 행동을 했을 때 지금의 자신의 위치와 사회적인 명성에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묻고 싶은 것은 죄를 멀리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에 멀리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벌 안받고 자신의 체면과 지위에 손상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멀리하는 것인지입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보다는 나 자신을 위해서 죄를 멀리하고 선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선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해서 선을 추구한 것입니다.

 

 

 

 

인간은 부정하다는 선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 인간이 '나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착한 사람이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며 사는 인간인데 무엇을 한들 자기 이익을 벗어난 행동이겠습니까? 인간은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모든 행동이 자기가 기준입니다. 자신에게 이로운 것은 좋은 것이고 해로운 것은 나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세상이 실패로 보는 것은 해로운 일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성장, 발전, 출세, 성공, 이런 것들과 반대되는 것은 모두 실패로 말합니다. 망하는 것이 실패고 죽는 것이 실패입니다. 때문에 세상적인 시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실패에 불과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실패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났는데 그래도 실패입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실패라고 여기지 않으신다면 사도나 선지자들의 죽음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시각에서야 '왜 죽나?'라고 하겠지만 여러분들은 '주님을 위한 죽음'으로 여기며 결코 실패한 인생이라고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실패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죽음이 실패가 아닙니다. 물론 그들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드러나기 때문에 실패가 아닌 성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내 죽음이 아니라 남의 죽음이기 때문에 가볍게 아무런 부담없이 '실패가 아닌 성공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들의 죽음을 실패로 보지 않는다면 결국 나 자신의 죽음도 실패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망하고 죽게 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다는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비록 망하지만 그 망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고, 몰랐던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하늘을 향한 눈이 떠졌다면 그 망함을 과연 실패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그것을 실패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기준은 성장과 발전이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겠다고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들이 여전히 이런 기준과 시각으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이 여러분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면 그 분은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을 성공이라 하고 망하고 죽는 것은 실패라고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모든 힘을 쏟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실패를 두려워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대학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역시 그것을 실패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세상의 시각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실패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것입니다. 교회를 안나오는 것이 실패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를 나오든 안나오든 상관없이 하나님 입장이 아니라 자기 입장에서 세상을 산다면 그 자체가 이미 실패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입장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더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인간은 왜 부정한가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은 현재 착한 행동 여부에 상관없이 부정한 존재라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날 때부터 부정한 자로 태어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입장만 주장하고 내세우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부정한 인간에 대해서 모릅니다. 하나님은 예수쟁이가 말하는 신이고, 자기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세상에서 나쁜 짓 안하고 적당하게 착하게 살면 착한 인간이 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정결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극구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쁜 짓을 한 일도 없는데 죄인이라고 하는 말부터가 기분 나쁜 것이고, 씻을 죄도 없는데 죄를 씻어야 한다는 것이 이치에 안 맞는 말이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하나님께 나오십니까? 인간의 부정함이 무엇인가를 알고 나오십니까?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확실히 파악하고 나오십니까? 인간의 행위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고 나오십니까? 인간은 무엇을 해도 악한 것이고 죄인의 모습 그대로라는 말을 받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전혀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하실 일에 대해서만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하신 일만이 우리를 살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20절에 보면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고 합니다.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한다는 것은 부정한 인간이 자신의 부정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입니다. 나는 정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결케 하는 물로 씻김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성소를 더럽힌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인간은 총체적으로 부정합니다. 어느 한부분만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자동차가 고장나면 고장난 부속품만 갈아 끼우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정함은 어느 한 부분을 고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인간에게는 선한 부분이 있고 악한 부분이 있어서 악한 부분만 제하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선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자신의 의로 여기며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행동은 피하고 선한 행동은 추구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무시하며 성소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정한 인간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입니까? 우선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삶자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껏 직장 다니고 공부하고 사업을 했다면 그것을 팽개치고 뭔가 좀더 신앙적인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직장을 팽개치고 신학교를 간다든지, 선교사로서 먼 오지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신앙적인 행동과 신앙적이지 않는 행동을 구분하는 세상적인 기준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해도,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부정한 존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악한 것은 우리 속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행동은 모두 내 입장에서 사는 것입니다. 내 몸을 유지하고 보존하고 가꾸고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모든 행동을 이것을 중심으로 행해집니다. 사업을 해도 나 자신을 위해서하고, 공부를 해도 나의 발전과 성공을 위해서하고, 돈을 벌어도 나를 위해서 벌고, 자식을 키워도 나를 위해서 키웁니다. 이것이 부정한 인간의 자기 중심적인 삶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와 같이 자기 입장에서 살아가는 삶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전에는 무엇을 해도 내 입장에서 나를 위해서 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살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무엇을 하지 않아도 그 머리 속에는 자기보다 하나님을 우선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질 때 자신의 편함과 이익을 계산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을 핑계거리로 내세웁니다.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은 본능인데 이것을 어떻게 벗어버릴 수가 있습니까?'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사단의 소리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을 벗지 못해서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본능으로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길임을 알기 때문에 본능에 안주하고자 내세우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은 본능과 싸워서 이기라거나 본능을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부정한 인간의 본능이 어떤 것인가는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능에 매여 살아가지 않으려고 힘쓰라는 것입니다. 매사를 내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정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29강 민 20:1-13 반석 97.8.31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 된지가 112년이 되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기독교가 종교놀이화 되어 간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종교놀이라고 말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놀이의 특성이 오늘날의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그대로 보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놀이라는 것은, 필연코 재미를 동반합니다. 재미가 없는 놀이는 이미 놀이의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은 '나는 지금 재미를 위해서 논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을 향해서 '여러분은 종교놀이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할 때 분명 여러분은 반발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분명히 놀기 위해서 교회 나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오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나름대로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교회에 온 것인데 무엇 때문에 종교놀이라고 하느냐는 반발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이라는 특성을 이해하시면 제말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한 대로 놀이는 재미가 동반되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놀이라는 것을 어떤 틀과 형태를 가진 오락으로만 생각합니다. 즉 집에서 TV보는 것은 놀이가 아니지만 고스톱 치는 것은 놀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틀과 형태 속에서 즐기는 것만이 놀이가 아닙니다. 놀이의 본질은 재미입니다. 즉 재미를 찾아서 움직이는 그 자체가 놀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고 한 사람은 가만히 누워 있습니다. 두 사람중 누가 놀이를 하고 있습니까? 말한 대로 우린 놀이라는 것을 어떤 틀과 형태를 가지고 있는 오락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컴퓨터 게임을 놀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무엇을 하든 자신의 재미를 위해서 한다면 그것은 놀이입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도 놀이이고,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재미있다면 가만히 누워 있는 것 역시 놀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컴퓨터 게임 하는 것을 놀이라고 하지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은 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만히 누워 있으면서 나는 놀이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게임을 하는 사람에게 '재미있게 노는구나'라고 말하면 그것을 이해하지만 가만히 누워 있는 사람에게 '재미있게 노는구나'라고 말하면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은 비록 교회에 오실 때 놀기 위해서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교회에서 재미를 찾으신다면 그것은 결국 놀이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에게 재미있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재미있는 일에 몰두하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가 교회에 오면서 비록 '나는 놀러간다'라는 생각은 가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에게 재미를 주는 교회를 기대하고 재미가 없을 때 교회에 애 대해서 식상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모든 것이 바로 종교놀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놀이라는 것은 굳이 영화보고, 여행을 가고, 골프를 치고, 컴퓨터 게임을 하고, 고스톱을 치는 것만이 놀이가 아닙니다. 재미를 추구하는 모든 것이 놀이입니다. 놀이란 자신에게 재미가 되는 행동 그 자체가 놀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저는 오늘날의 교회의 모든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것이 놀이화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유년부나 학생부 청년부 모든 교육들이 놀이화되어 갑니다. 재미없는 것에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고 멀리하기 때문에 우선 재미를 제공하고자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아신다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현대 교회가 재미를 벗어나서 움직이는 것이 있습니까?

 

 

 

 

많은 신자들은 보면 재미를 앞세웁니다. 심방도 재미로 다니고, 구역예배도 재미있기 때문에 참석하고 재미없으면 참석하지 않고, 교회도 재미있으면 부지런히 나오고 재미없으면 오전예배만 겨우 나오고 나머지는 모두 생략해 버리고, 성경공부를 해도 재미로 하려고 하고 이런 것들이 바로 현대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단지 종교놀이로 여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물론 전혀 재미를 느끼지 말고 재미를 줄만한 것은 모두 거부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재미를 기준으로 하지 말고 재미를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재미를 제공해 주느냐 못해주느냐로 교회를 판단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재미를 찾으신다면 그것은 결코 신앙이 아니고 종교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놀이가 교묘하게 종교라는 틀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접근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찬양집회라는 것을 많이 합니다. 요란한 악기를 동원해서 복음성가를 불러대며 율동을 하고 열광적으로, 때로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반면에 학생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쫓아다니면서 열광하고 그들의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까지 흘려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른들은 축구를 보며 열광하기도 하고, 야구 농구를 보면서 열광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찬양집회에서의 열광은 은혜스럽고 거룩한 것이고 나머지는 단지 오락입니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재미를 중심으로 한 놀이이고, 자신에게 재미를 제공해주는 것에 열광하는 모습에 불과한 것이고, 다만 종교인은 종교의 틀을 통해서 그 재미를 찾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찬양집회를 해서는 안된다거나 재미를 모두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찬양집회를 안한다고 해서 사람이 재미를 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미를 배격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저는 신자가 교회에 나올 때 재미를 기준으로 해서 나와서는 안되고, 교회도 신자들을 교회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 재미를 기준으로 재미를 제공하기 위해서 힘써서도 안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재미를 느낀다면 얼마든지 즐거워하십시오. 다만 재미를 기준으로 하지는 마십시오. 재미를 찾지를 마십시오. 여러분이 찾을 것은 다만 하나님입니다. 이런 정신이 아닐 때 여러분의 신앙은 단지 종교 놀이로 그쳐버릴 것이고, 기독교는 배부른 자의 여가 선용을 위한 도구로 그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사람이 재미를 찾는 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삶에 여유가 없고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재미를 찾지 않습니다. 삶에 절박한데 재미를 찾을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 노는 것도 삶에 여유 있는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외식을 하고, 여행을 하고, 볼링을 하고, 수영을 하고, 친구를 찾아다니며 노는 것도 모두 사람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제가 염려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교회를 여유 있는 생활 속에서 누리는 하나의 취미생활쯤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니다'라고 쉽게 생각하지 말고 깊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말한 대로 여러분 스스로는 취미생활로 교회를 선택한 것도 아니고 놀기 위해서 교회를 찾아 나온 것도 분명히 아닌데 정작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놀려고 해서 노는 것이 아니라 결국 놀이가 되어버릴 수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의 신앙을 깎아 내리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말이 여러분의 신앙을 무시하고 있는 말로 들려진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여러분이 분명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자 하신다면, 적어도 여러분의 의식 속에 천국이라는 것이 살아있다면 제 말을 흘려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종교놀이에는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런 점들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물이 없어서 하나님께 원망했다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원망했다는 얘기는 그동안 수없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원망은 이스라엘의 주특기였습니다. 그러나 원망이 이스라엘의 주특기였다면 결국 오늘날 우리들의 주특기도 원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원망이 일어난 장소는 광야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원망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광야는 시험의 기간입니다. 신 8:2,3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십 년간 광야에서 생활하게 하신 것은 가나안 정탐때 하나님을 원망한 것에 대해서 징벌하시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만한 사람으로 달라져 가기 위한 가르침을 받고 시험을 받는 장소였습니다. 결국 광야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이스라엘에게는 시험이요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알기 위함이었고, 사람은 세상의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만나가 제공되는 곳이 광야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러분들에게 광야는 무엇입니까? 광야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은 후의 인생 전체를 말합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 자체가 이스라엘과 똑같이 우리를 낮추시며 우리를 시험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고자 하시는 기간이고, 우리는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시는 기간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보다 먼저 하나님의 시험을 받았던 이스라엘의 경우를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했을 때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서 그들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하나님이 시험을 친다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어떻게든 행복하게 살아가고 편안하게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에만 관심을 두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내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평가를 내리실까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삽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지금 나를 평가하고 계시는데 나는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아가는가?'는 의식을 항상 가지고 주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이런 의식들이 사라지고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천국갈 자신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천국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갈수록 희미해져가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희미해져 있기 때문에 교회가 한낱 여가선용의 장소요 자기 재미를 위한 수단이요 배부른 자의 종교로서 종교 놀이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반발하실 것 같아서 한가지 극단적인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5절에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라고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물이 없어 원망을 합니다. 그런데 단지 물이 없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과 함께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원망합니다. 그들은 배가 고파서 먹을 것 타령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그들에게는 만나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환경을 원망한 것입니다. 목이 마르자 물도 없고 더군다나 먹을 것도 전혀 없는 환경에 대해서 그들은 불만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시험하는 문제였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직장 잃어버리고, 더군다나 건강까지 잃어버려서 돈을 벌 수도 없고, 설상가상으로 자식까지 병이 들고, 병원 다닌다고 집까지 다 날려버린 그런 상황이 여러분에게 주어졌다면 여러분은 원망을 하겠습니까? 안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차라리 죽고 싶다고 합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극한 상황에 빠졌을 때의 우리들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기만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달라지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것은 사람이 달라지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기만 바라보는 그런 인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인간으로 달라져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말씀을 듣습니다. 이스라엘은 충분히 달라질 기회가 있었습니다. 8절에 보면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고 하십니다. 지팡이로 반석에게 명해서 물을 내라는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그 지팡이가 어떤 지팡이 입니까?

 

 

 

 

출 17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오늘 본문과 동일하게 물이 없어서 원망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식으로 물을 주었습니까? 6절에 보면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을 마신 경험이 있습니다. 반석에서는 물이 나올 수 없습니다. 물이 나올 수 없는 곳에서 물이 나오게 하신 하나님을 이미 그들은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지팡이였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모세의 지팡이를 보면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믿어야 했던 것입니다. 파종할 땅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지팡이를 봄으로서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이 나오게 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했던 것입니다. 즉 항상 현실에 매여서 불만과 원망 속에 살았던 이스라엘이지만 현실을 초월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스라엘로 달라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출 17장의 모습이나 민 20자의 모습이나 하나도 틀리지 않고 똑같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경험한 것은 우린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체험한 자로서 이제 후로는 은혜로 사는 자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만 살아가는 삶으로 달라져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그들이 그렇게 달려졌는지를 시험하시고자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다시 인도하신 것인데 이스라엘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의식을 행했고 또 그들 스스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달라짐이 없이 옛사람 그대로 였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달라졌습니까?' 믿음의 세월이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구원의 근거는 못됩니다. 하나님은 달라진 인간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달라진 인간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끄집어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물이 없는 곳으로 무화과도 포도도 석류도 파종할 땅도 없는 것으로, 그야말로 희망도 없고 소망도 가질 수 없는 극한 현실로 몰아 넣는다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과연 달라진 인간으로 하나님을 찾는지를 보시고자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십시오. 그리고 그 속에서 여러분이 평소에 고백했던 믿음을 드러내십시오.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드러내십시오. '나는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우는 귀한 기회로 여기십시오. 이것이 달라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달라진 인간이란 자신이 깨어진 인간을 말합니다. 자신이 깨어진 인간은 자기를 보지 않습니다. 자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보면서 같이 죽었기 때문에 그런 신자는 원망과 불만이 아니라 오로지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종교 놀이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생명으로서의 기독교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은혜를 아십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아신다면 여러분 스스로 자신이 십자가와 함께 죽은 자인지 확인하십시오.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원망과 불평없이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달라졌는지를 보셔야 합니다. 한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모세와 아론까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모세와 아론이 천국가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고 단지 천국갈 수 없는 한 예를 모세와 아론의 행동을 통해서 보여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고 했습니다.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행위를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행위'로 규정하십니다. 하나님은 반석을 명령만 하면 물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반석을 두 번친 것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말씀대로 하지 않고 반석을 친 것은 자신의 경험, 자신의 생각, 자신의 혈기를 앞세운 결과입니다. 즉 인간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의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고전 10:4에 보면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합니다. 즉 출애굽해서 이스라엘이 물이 없다고 원망을 했을 때 그로 인해서 반석이 매맞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반석이 매를 맞음으로 이스라엘은 반석으로부터 신령한 음료를 마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단지 물을 마셨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원망 때문에 반석이 깨어짐을 당한 것을 바라보고 자신들도 함께 깨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자기를 중심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달라져야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안다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며 사는 자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달라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 반석을 쳤던 자신의 경험을 앞세우고, 자신의 생각, 혈기를 앞세웠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믿지 못한 것이고 여호와를 거룩하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용서 받는 용도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너희도 같이 죽었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죽은 자로서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라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달라진 사람으로 하나님을 찾습니까? 어떤 현실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로 달라졌습니까? 이것을 시험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극한 상황으로 이끄실 수도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 주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기쁨과 행복은 주님과 함께 죽고 말씀에만 순종하며 사는 신자만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의 은혜를 아신다면 또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며 사셔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교회를 찾는 것은 여가선용 정도로 여기고, 놀이하는 식으로 내 재미를 위해서 찾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최선을 다해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 주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30강 민 21:4-9 불뱀과 놋뱀 97.9.7


현대의 기독교는 하나님을 인간의 이해와 상식이라는 틀에 가두어 두고 있습니다. 즉 자기의 틀 안에서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자기의 틀에 하나님을 가둔다고 해서 갇힐 하나님도 아니시지만, 결국 인간의 틀에 갇히지 않으시고 자유롭게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간의 틀 안에서만 생각하고 그분을 찾아가려고 할 때 전혀 엉뚱한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해가 되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 나의 상식에 맞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이해와 상식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와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 있을 때 자연히 그것을 거부하게 되고 반감을 가지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세대차이라는 것도 이런 경우에 속합니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윤리 도덕이 자신의 상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상식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이해와 상식은 여러 가지를 기준으로 해서 형성이 됩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문명이 기준이 될 수 있고, 환경이 기준이 될 수 있으며, 지식이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명, 환경, 지식의 범위를 벗어난 일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지 못하게 되고, 만약 그 범위를 벗어난 일이 발생하면 그 일에 대해서 반감을 드러내면서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옛날 사람들은 하늘을 나는 거대한 비행기를 볼 때 그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거대한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을 보면 비행기가 난다는 것은 믿지만 그 무거운 쇳덩어리가 수백 명의 사람을 태우고 하늘을 난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쉽게 납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문명이 이해와 상식의 기준이 되어 있는 경우입니다.

 

 

 

 

또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를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부자들은 자신들이 돈 쓰는 것을 사치라고 하면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난한 자들은 돈 좀 있다고 해서 비싼 것을 막 사들이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환경이 이해와 상식의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문명이나 환경 지식이 기준이 되어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이해시킬 수 있고, 또 설사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공통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세대차이라고 해서 요즘 청소년들의 문화를 어른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것도 역시 자라온 환경이 다른 특정 세대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 모든 세대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는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성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남녀노소나 빈부차이, 지식의 차이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동일합니다. 때문에 인간의 본성에서 벗어난 일에 대해서는 세상의 모든 인간이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벗어난 일에 대해서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인간을 이해시킬 수 없습니다. 과학적인 문제는 과학으로 이해시키면 되고, 의학적인 문제는 의학으로, 철학적인 문제는 철학으로, 심리적인 문제는 심리학적으로 이해시키면 되지만 본성의 문제만큼은 그 무엇으로도 이해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알아야 인간이 어떤 일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상식적으로 납득하지도 못한 채 반감을 가지고 거부하게 되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생명에 대한 보호입니다. 즉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고 자신의 생명을 강하게 하고 확대시키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사람은 결국 이것을 뿌리로 해서 모든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이상 그 생명을 좀 더 확대시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며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서 살아있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채 언제나 좀 더 잘 살아보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옷을 입어도 옷 그 자체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옷을 통해서 자신을 최대한 돋보이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때문에 내 몸에 편하고 내 마음에 드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꼭 다른 사람에게 '이 옷 어떠니?'라고 물어보게 되는 것입니다. 옷을 입었을 때 자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지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상식입니다.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이 상식과 본성과 반대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에 죽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마 16:25에 보면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요 주를 위해서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리라'는 의미와 같은 말입니다. 또 요 12: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또 자기 생명을 사랑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정한 이치고 상식입니다. 누가 이것을 깨뜨릴 수 있습니까? 이것을 깨뜨리는 사람은 어느 특정 인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인간의 이해와 상식과 본성은 하나님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 이것을 자주 강조하느냐면 인간은 자기의 틀을 벗어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틀 안에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 자주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행동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하게 됩니다. 교회를 나오는 것도 자기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종교이고 하나님입니다. 나를 살려주는 하나님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항상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교회에 나오시면서 '나를 죽이시는 하나님' '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나오신 분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덕분에 고생스럽던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또 홍해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기들만 살고 애굽 군대는 죽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일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좀 더 편한 삶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했던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인생 길이 전혀 다른 길이었습니다. 고통과 고생이 기다리는 길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터져나오게 된 것입니다.

 

 

 

 

본문 4,5절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호르 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을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지금의 하나님이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자기들의 생각에 하나님은 살려주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살려주기는커녕 오히려 식물도 없고 물도 없는 곳으로 몰아 넣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살려주는 하나님이 왜 우리를 죽게 하느냐고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통해서 참된 기독교,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하고 인간의 본성에 맞는 상식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자기 생명에 대한 인간의 탐욕과 집착력을 옹호하고 부추기는 것은 오히려 멸망으로 인도하는 거짓된 기독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고생의 길로 인도하신 것은 그들에게 감춰져 있는 죄를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죄가 드러나지 않음으로 해서 죄를 발견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죄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도하십니다. 남보다 뒤쳐지게 해서 자존심이 상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남보다 앞서 있을 때는 마음의 여유 속에서 신앙에 문제가 없는 줄 알았는데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알고 죄의 해결을 통해서 안식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관심이 자기의 생명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살려주는 분이지 죽이는 분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게 불뱀을 보내셔서 그들을 더 큰 고통과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불뱀이란 붉은 점이 있는 뱀으로서 한번 물리면 불에 데인 것처럼 심한 통증을 느끼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 불뱀을 이스라엘에게 보내서 그들을 물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뱀을 보내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까? 있는 불뱀도 없애줘야 당연한 하나님인데 오히려 불뱀을 보내서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문제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고통 자체를 아예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내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산다는 의미는 육신의 생명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쉼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안에서의 안식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필연코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가 죄입니다. 죄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한탄하고 절망해 봐야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그것이 곧 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원망할 때 불뱀을 보내신 것은 죽음 속에서만 참된 생명이 싹트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을 죽이시고 새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살리시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8,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살리는 방법은 놋뱀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스라엘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불뱀을 물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그것이 자기들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7절에 보면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 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그들은 불뱀을 자기들의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단순히 징계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면 하나님은 불뱀을 없애 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혹 여러분도 그러한 기도를 해보신 적이 없습니까? 사람들은 어떤 어려움이 발생하면 당장 자신의 죄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어려움을 징계로 여기고 자신의 죄를 돌아본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사실 죄를 찾으려고 하는 이유가 속히 죄를 찾아내서 회개함으로 지금의 어려움이 사라지도록 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살기 위한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바라보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후로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위해서 회개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지금 이스라엘이 꼭 그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불뱀이 자신들의 원망의 결과임을 알았지만 여전히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뱀을 그대로 두고 이스라엘을 살리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모세가 만들어서 장대 위에 달아맨 놋뱀을 바라보는 자만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뱀을 여전히 그대로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좋은 환경을 만들어서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상식과 이해에 맞는 기독교는 아예 처음부터 고통의 길로 인도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혹 뭔가 잘못이 있어서 고통으로 인도하셨다고 해도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금방 좋은 환경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이 대개 생각하는 은혜도 불뱀이 있는 상황에서 불뱀이 사라지는 것이지 불뱀이 여전히 있는 은혜는 도저히 상상하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은혜, 사랑은 불뱀이 여전히 있는 가운데 놋뱀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놋뱀을 바라보는 자만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가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하심 때문이다'는 것을 아는 자만 산다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놋뱀을 바라본 자는 누구입니까? 뱀에게 물린 자입니다. 뱀에게 물리지 않았으면 놋뱀을 바라볼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은 살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자신을 살려주는 놋뱀을 바라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산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죽은 존재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겨우 이해한다고 해도 죽었다가 나중에 다시 부활하는 정도일 뿐이지, 살았다 하나 죽었다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국 자신은 죽은 자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갈급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생명은 죽은 자만 원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생명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신자라고 해도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알지 못한다면 생명을 바라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여놓고 살리시는 방법을 취하시는 것입니다. 원망이 나오도록 하시고, 그 죄속에서 죽게 하시고, 자신의 죽음을 알게 하셔서 생명 되는 분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세상은 절대로 이러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하나님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놋뱀을 바라보기 전의 이스라엘 같이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불뱀을 물리쳐 주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지 불뱀은 그대로 둔 채 고통과 죽음이 여전히 있는 가운데 단지 놋뱀을 바라보면 산다고 하신 하나님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놋뱀을 바라보라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놋뱀을 바라보는 사람된 것이 곧 구원이고 그리스도안에서 쉼을 얻는 것입니다.

 

 

 

 

'놋뱀을 바라보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입니까?'라고 하겠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아무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을 때 놋뱀을 만들어서 심심풀이로 바라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불뱀에 의해서 죽어 가는 가운데 놋뱀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저런 어려운 일로 마음이 심란하고 염려와 고민으로 가득차 있을 때 그것에는 신경 쓰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한다면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처럼 독선적인 말도 없는 것입니다.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요 3:14,15절을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놋뱀을 바라볼 때 살았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삽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할뿐입니다. '나는 죽은 자이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라는 것을 알고 주님만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놋뱀이란 별 볼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저히 자신을 살려줄 만한 어떤 힘도 없이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 지신 주님의 공로 때문에 천국 간다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만 바라보십니까? 죽은 자로서 바라보십니까? 자신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바라보십니까? 죽은 자로 바라보신다면 오직 주님께 구할 것은 생명일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보석이 무슨 소용이며, 돈이 무슨 소용입니까? 죽은 자에게는 오직 생명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주님께 생명이 아닌 엉뚱한 것을 구하게 됩니다. 자신의 생명을 더욱 가치 있게 해줄 세상의 것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죽이십니다. 원망이 나오도록 하시고, 고통으로 끌고가시면서 죄가 드러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은 죽은 자임을 알게 하시고 자신에 대해서 포기하게 하시고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주님의 은혜만 구하도록 합니다. 세상에서의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쉼을 얻는 영원한 생명에 모든 관심을 두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일을 이해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복안에 있습니다.

 

 

 

 


31강 민 21:10-20 우물의 노래 97.9.14


신자가 성경을 봐야 하는 이유는 성경을 읽어야 믿음 좋은 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철저하게 가려져 있는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가려져 있는 분입니다. 때문에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달리 말하면 세상은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구원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란 글자 석자를 아는 차원이 아니고 사도신경을 외우고 주기도문을 외운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도 아니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10번, 아니 100번을 읽었다고 해서 아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증표가 되어버리면 구원의 근거가 아주 이상하게 되어버릴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가려져 있는 분입니다. 가려져 있는 분이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자신이 조금씩 부서져 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로 다가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애당초 하나님과 전혀 반대편에 있는 자신의 본성을 부수지 않고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전의 내가 죽지 않고서는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모두 우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를 죽이신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 자체를 깨뜨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고전 3:16절이나 고후 6:16절에 보면 우리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라는 뜻인데 이 성전의 의미는 야곱을 통해서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야곱이 에서와 이삭을 속인 일로 인해서 집을 떠나게 된 후 한 곳에 머물렀을 때 꿈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광경을 보고 그 곳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곳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던 일을 아실 것입니다. 그때 야곱은 서원하기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지켜주시고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이때만 해도 야곱은 하나님은 자기를 지켜주고 자기를 살려주는 분으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벧엘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때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저는 자로 돌아왔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어서 돌아왔습니다. 야곱이란 약탈자란 뜻입니다. 그 약탈자의 모습이 깨어진 자로 다시 벧엘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창 35:15절에 다시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때의 벧엘은 의미가 다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야곱과 말씀하셨던 그 장소에 거하신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때의 하나님의 집이란 의미는 놀랍게도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란 인간자체를 의미합니다. 야곱이 곧 벧엘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야곱은 하나님이 거하실 거처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못된 인간성이 깨어지고 은혜로 풍성케 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거처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곧 성전이라는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보다도 나를 앞세우는 우리의 본성을 죽이시고 대신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케 해서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거처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 삼겠다고 하신 말씀을 우습게 여기지 마십시오. 마지막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만 남기시고 다 멸하신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성전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각각 다른 성전이 아니라 참성전이신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실 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교회는 죽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깨어지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케 된 자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관심을 두고 모이는 무리를 가리켜서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외에는 교회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지상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눈에 보이는 교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관심 두고 있는 교회는 성전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만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전된 교회의 교인 같으면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나는 눈에 보이는 것에는 마음두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싸움은 언제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싸움입니다. 어느 쪽에 뜻을 두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시는 것은 보이는 것에 미련 두고 살아가는 인간 본연의 욕망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에 모든 소망을 두는 새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럴 때 놋뱀, 즉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깨어진 참된 이스라엘, 즉 참된 교회의 신자로서 세상을 살아갈 때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물을 두고 노래하는 장면입니다. 이 우물의 노래가 어떻게 참된 신자의 삶에 대해서 말해주는지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문제로 삼고 싶은 것은 감사가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거의 일회성의 감사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한번 소유한 것에 대해서는 감사를 하지 않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한 것은 감사의 목록에서 제외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땀흘리며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감사의 조건을 만들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애쓴다는 것은 이미 이전의 은혜에 대해서는 잊었다는 뜻입니다. 이전의 것은 작아 보이고 새로운 것이 더 커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커 보이는 새로운 것이 주어지지 않은 이상 그 사람은 이전에 있었던 감사와 기쁨은 사라진 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해서 낙심하고 불행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까지 고요하고 평안한 인생을 살아오셨습니까? 아니면 바다에서 파도가 치듯 흔들리는 인생을 살아오셨습니까? 저는 여러분께 아무런 일이 없는 평안한 삶을 사셨는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바다에서 파도가 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고요한 그런 삶이었는지 아니면 파도가 없으면 고요하다가도 파도만 치면 이리 저리 흔들리는 그런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 파도가 치면 그 파도에 따라서 마음이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파도가 칠 때마다 흔들리는 마음과 원망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올 수는 없는 문제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오늘 이시간에 도대체 왜 파도가 칠 때 고요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깨닫고 파도에 상관없이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살아가는 그런 신자되는 것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인생에 파도가 칠 때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파도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고요하게 해 줄만큼 힘이 되는 것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도 힘으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풍랑 속에서 그 실체를 확실하게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때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두려워하면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풍랑에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향해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말은 '너희가 나를 믿는다면 풍랑에 상관없이 너희들 마음은 평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우리의 힘으로 여긴다면 우린 풍랑에 상관없이 평안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지 못한 이유는 내 인생을 내 힘으로 스스로 책임져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불어닥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내 인생은 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이 뜻대로 하시겠지라는 믿음이 우리를 고요함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풍랑 속에서의 고요함, 이것이 곧 안식이며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합니다. 오늘 모든 것, 그리고 내일의 모든 것도 선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그 겸손함이 있는 신자가 곧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교인인 것입니다.

 

 

 

 

지금 광야를 떠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참으로 비참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떠도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면서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입니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늘에서 많은 양식이 내려오는 것도 아닙니다. 겨우 하루 분의 양식만 주어졌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거지입니다. 내일의 것이 없고 오늘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 6:31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내일의 것을 가지고 염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것은 오늘의 것으로 감사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것을 스스로 정해놓고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즉 이방인들은 내일의 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오늘을 살아가는데, 언제나 내일의 것은 오늘 것보다 더 좋은 것이기를 기대하는 습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런 습성으로 살지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교회의 특징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의미를 언제나 미래에 둡니다. 미래가 좋아야 인생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라는 것이 과연 여러분에게 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미래는 영원한 미래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내일이 미래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내일이 오면 내일은 오늘이 되고 다시 또 내일이 있게 됩니다. 결국 세상에서의 미래는 죽음으로 끝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좋은 미래를 통해서 행복과 기쁨을 얻고자 한다면 평생토록 죽을 때까지 행복도 기쁨도 없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성도라면 내일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좋은 내일을 기대하며 살기보다는 언제나 오늘에 충실하고, 오늘에 최선을 다하며 살뿐입니다. 오늘은 현재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내일도 오늘이요 모레도 오늘입니다. 이렇게 내일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하는 신자야말로 풍랑에서도 고요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17절, 18절에 보면 "그 때에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가로되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이 우물은 족장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홀과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라는 이스라엘의 노래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그 대상을 보면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우물물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물물에 대해서 감격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인생에 깊은 의미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가나안을 향한 길은 평탄하고 가기 좋은 길이 아니라 골짜기와 비탈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렇게 험난한 길로 인도하신 뒤에 브엘로 인도하셔서 우물에서 물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시는 우물에 감격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우물의 물은 이스라엘에게 새롭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전에도 이 우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물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은혜로 여기지도 않았던 것이 지금에는 놀라운 은혜로 느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옛날에는 하찮게 보이고 작은 것으로 보여서 은혜로 여기지도 않았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은혜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골짜기와 비탈길로 이어졌던 힘든 광야생활, 즉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힘든 인생살이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 팔팔하고 자기를 의지하고 살 때는 은혜도 아니고 하찮게만 보여진 것이 어려운 인생살이를 거듭하면서 자신을 의지하는 것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시점에서 다시 이전의 것을 바라보니까 그것이 놀랍게도 큰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자신의 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음을 비로소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물물의 은혜를 험한 인생의 여정을 지난 후에 비로소 발견한 것입니다. 우물물의 은혜를 발견 한 후 그들은 우물물로만 행복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행복이란 환경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달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한 교훈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인간은 언제나 미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환상 때문에 오늘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시시하게 봐버리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의지합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주로 얼마든지 미래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의 원하는 미래를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찾아서 행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았던 인간이 험한 인생을 지내고 난 후 노년에 옛날을 회상할 때 '그때가 좋았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인생을 힘들게 살아가신다면 그 인생을 통해서 잃어버린 은혜와 감사를 되찾을 귀한 기회인줄 알아야 합니다. 예전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귀한 은혜인줄도 모르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버렸던 것이 힘든 인생 속에서 참으로 귀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오늘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처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옛사람이 죽어져야 합니다. 보이는 것에 매이고, 큰 것만 기대하고 살면서 감사도 잊어버리고 은혜도 잊어버리고 조금만 풍랑이 불어도 흔들리고 낙심하고 원망하며 살았던 우리의 옛사람이 깨어지고 부서진 그 자리에 하나님의 집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가십니까?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고, 작은 것에 감격하고, 작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살아가십니까?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안다면 그 신자는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은 것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분 주위에 가득히 넘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풍랑이 일어도 작은 것에 담겨 있는 은혜는 여러분의 주위에 넘치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면 풍랑 속에서 그 마음은 고요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생각할 때 자신의 인생이 너무 험하고 골짜기와 비탈길로 이어지는 인생의 연속이라고 생각되어지신다고 해도 행여 그것으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다만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물물을 두고 노래할 수 있는 그런 신자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인생 속에서 잃어버리고 지나쳐 버린 은혜와 감사를 찾아가시면 됩니다.

 

 

 

 

이젠 더 이상 환상에 지나지 않는 미래에 매여 살지 마십시오. 미래에 대한 환상은 오늘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오늘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린다면 결국 그 사람은 기쁨과 행복이 없는 오늘을 살게 될 것이고, 그 삶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오늘 행복한 사람은 내일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기쁨이 없고 행복이 없는 사람은 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두려움과 흔들림으로 불안한 세월을 살아가는 인생으로 끝나버릴 것입니다.

 

 

 

 

우물의 노래가 여러분 삶과 가정에서 솟아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우물물을 주시기 위해서 언제나 말씀으로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작은 것의 은혜와 감사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큰 것을 기대하는 욕심 안에는 불만과 원망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껏 여러분 자신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고 낙심케 했던 것은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 아니라 오늘에 만족하지 못하고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살았던 나의 욕심인 것을 아시고 그러한 마음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신자의 최선의 삶입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삶으로 자라가기 바랍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작은 것을 노래할 줄 아는 신자되어서 은석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우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겸손한 사람으로서 보이지 않는 교회의 신자로서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보여주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32강 민 22:1-14 종교와 신앙 98.9.21


오늘날 신자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두려움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애처럼 조그만 일에도 두려워하고 가슴 조마조마하며 살아가는 것이 요즘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자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이 보입니다. 자신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같은 착각 속에서 하루하루를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그 신들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인간의 두려움을 감싸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인간의 공포심에서부터 등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두려움이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두려움 속에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옛날에는 과학을 몰랐기 때문에 발생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옛날에는 해나 달이 가려지는 일식이나 월식이 있는 날이면 많은 두려움을 가지곤 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에는 해가 가려져서 대낮에 컴컴해지고 달이 자취를 감추는 것들이 아주 큰 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천둥이나 번개가 치면 자신의 잘못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거나 유성이 떨어지면 나라에 큰 일이 생길 것으로 여긴다거나 하는 모든 것들이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지게 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과학이 발달한 요즘에는 그러한 두려움들을 다 벗어버리고 살고 있습니까? 사실 과학이 첨단을 걷고 있는 요즘에도 인간은 이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식이나 월식을 보고서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식, 월식이 왜 일어나는지 과학적으로 잘 배웠기 때문입니다. 천둥 번개 친다고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서 벼락맞을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천둥 번개도 우리의 죄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자연 현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천둥 번개가 칠 때 자신의 죄 때문에 벼락을 맞을까 두려워하면서 벌벌 떤다면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유성이 떨어져도 하나의 천체의 현상으로 보지 그것 때문에 나라에 큰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모든 자연의 현상들과 천체의 현상들이 과학에 의해서 그 모습을 다 드러냈다고 해서 인간이 두려움을 벗어버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여전히 두려움 가운데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 두려움은 과학을 초월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나라의 대덕연구단지라고 하면 최첨단의 과학단지입니다. 거기에는 과학의 박사들만 모여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미신과 과학은 전혀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덕연구단지를 준공했을 때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돼지 머리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냈습니다. 최첨단의 과학기지 앞에서 고사를 지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왜 고사를 지냅니까? 자기들의 연구단지가 잘못되지 않도록 지켜달라는 것 아닙니까? 즉 그들 속에는 자기들의 꿈이요 소망인 연구단지가 행여 잘못될까하는 두려운 마음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두려움입니다.

 

 

 

 

또 아무리 물리학 박사, 전기공학 박사라고 할지라도 4라는 숫자는 왠지 기피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미국은 13일의 금요일을 그토록 싫어한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좋지 않은 재앙이 일어날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입니다. 결국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서 우주의 신비가 벗겨지고 자연의 실체를 알아간다고 해도 인간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천둥 번개가 칠 때 그 두려움이 나타나고,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나면 두려워했지만 지금은 그런 자연 현상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고 할지라도 뭔가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궁합을 미리 보는 것도 결혼 후의 잘못된 부부관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고 결혼식 날짜를 가리는 것도 같은 이유이지 않습니까? 장래 일을 알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인간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예배당을 건축할 때 무엇을 합니까? 고사는 지내지 않지만 기공예배라는 것을 드립니다. 기공예배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배당 짓는 것이 순조롭도록 도와주시고 완공될 때까지 사고없이 잘 끝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것 아닙니까? 돼지머리만 올리지 않았을 뿐이지 그것은 고사 지내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배당 지으면서 발생할 수 있는 예측할 수 없는 장래 일에 대한 두려움을 기공예배라는 것을 통해서 달래는 것입니다. 물론 말이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지만 기도하는 것이나 설교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모두가 하나님이 잘 지켜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던가요.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예측 불허의 앞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앞서 말한 대덕단지의 과학자들 가운데도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을 믿지 않는 그들이 과연 누구를 향해서 고사를 지냈겠습니까? 결국 인간은 평소에는 신을 의도적으로 부정하다가도 두려움이 발생하면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종교라고 합니다. 물론 기독교, 불교, 이렇게 종교의 이름은 없고 신의 이름도 없다고 할지라도 막연하게나마 신을 찾아가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종교심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종교심은 두려움 속에서 더욱 확대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언제나 신과 더불어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두려움이 발생할 때 신에게로 숨고자 합니다. 그런데 신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결국 신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에게로 숨는 것입니다. 신을 움직일 수 있고 신과 대화할 수 있고 신을 기분 좋게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숨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무당입니다. 무당은 신과 대화하며 신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무당에 의해서 복과 저주가 조절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두려움을 무당을 통해서 해소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현대인들은 무당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당의 자리에 다른 것을 가져다 놓습니다. 두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니기 때문에 나름대로 무당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고사를 지내는 것, 궁합을 보는 것, 결혼 날짜 이사 날짜를 따지는 모든 것이 무당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무당의 자리에 다른 것을 대체해 놓은 것입니다. 과학자들에게 '당신 무당을 믿는가?'라고 하면 백이면 백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당은 미신이라고 하면서도 고사를 지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사는 미신이 아니고 그냥 풍습이고 문화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자기 속에 감추어져 있는 예측할 수 없는 두려움, 불안감을 고사라는 것을 통해서 해소해 보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절대로 무당을 믿지 않습니다. 무당은 미신이라고 펄쩍뜁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에 옛날 무당과 똑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앞서 말한 대로 옛날 사람들은 무당은 신의 비위를 맞추고 신의 복과 저주를 조절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두려움을 무당을 통해서 보호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마치 어린애들이 무서울 때 엄마 치마폭으로 숨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서는 두려움에 살아가는 신자라는 사람들이 누구에게로 숨어들고 있습니까? 목사에게로 숨어드는 것입니다. 목사를 통해서 보호받고자 합니다. 목사는 신의 비위를 맞추고 신의 복과 저주를 조절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면서 철저하게 목사에 의해서 자신을 보호받고자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종교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 주제가 종교와 신앙입니다. 종교와 신앙은 철저하게 분리됩니다. 종교를 가지고서는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오직 신앙이어야 만이 천국에 합당한 자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신자들이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전혀 구분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신앙으로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참된 신앙은 오히려 배척을 해버립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압 왕인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 한 가운데 발람을 시켜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21:21절부터 보면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에게 아모리 땅을 지나갈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모리 땅에는 그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리 왕 시혼은 도리어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아모리를 쳐서 그 땅을 점령하고 바산 땅까지 점령합니다. 그것을 본 모압왕 발락에게 두려움이 생길 것은 당연합니다. 그 두려움에 대한 발락의 행동은 점술가인 발람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고 부탁합니다.

 

 

 

 

6절에 보면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고 합니다. 발락은 저쪽을 저주해 버리면 자신들이 이길 수 있을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으로 저쪽의 신을 저주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에 떠는 인간들의 심성에서 나온 종교입니다. 이러한 종교를 가지고 기독교가 신앙이라고 우기는 데서부터 교회는 타락의 길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교입니까? 신앙입니까? 종교는 세상을 살면서 이런 저런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무엇하나 의지해서 그 두려움을 해소하고 마음 편하게 살고자하는 그런 심성으로 교회를 나오고 하나님 찾고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내 이익 말고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차이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하나님을 잘 의지해서 하나님 덕분으로 자신의 일이 잘 해결되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입니다. 종교와 신앙의 차이는 한마디로 종교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신앙은 하나님에게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자신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 마지막 때는 종교가 아닌 신앙을 가진 자만 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쫓겨날 자는 종교를 가진 자이고 남을 자는 신앙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마지막때 남을 집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의해서 쫓겨난 아모리나 바산도 종교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신앙이 밀려들어올 때 인간의 종교는 쫓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발락의 두려움이었던 것입니다.

 

 

 

 

발락은 발람을 통해서 자신의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합니다. 발락은 발람이 복을 빌면 복이 주어지고 저주하면 저주가 주어지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목사를 향한 시각과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목사가 축복하면 복이 주어지고 저주하면 저주가 주어지는 줄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설령 그렇게 알고 있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목사의 눈치를 보면서 교회생활을 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목사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래서 종교에 빠진 많은 신자들이 목사의 눈치를 보면서 목사에게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를 무당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 가는 것은 신자라고 자처하는 수많은 종교인들입니다. 발락이 자신의 두려움을 의지하고 맡기기 위해서 복술의 예물, 즉 복채를 가지고 발람에게 나오는 것 같이 신자들이 목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급급해하고 행여 목사에게 잘못보일까봐 전전긍긍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한국교회안에 만연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에 나왔습니까? 목사를 눈치를 보려고 나왔습니까? 목사를 섬기려고 나왔습니까? 교회에서 봉사하려고 나왔습니까? 이것도 저것도 다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신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곳에 내가 도구로 쓰여지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발락은 복을 육신에 이익이 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반면에 저주는 여러 가지 재앙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복은 확장되는 것이며 저주는 소멸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의 개념에 빠져 있다보니까 예측할 수 없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면서 복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적인 복을 말하면 그 반응은 진짜 복을 쫓아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참된 복을 저주의 모습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자신들이 상상하는 저주의 모습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이기 때문에 도저히 복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복을 받은 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복을 받은 자의 특징이 뭐냐면 복을 받은 자가 들어올 때 복을 받지 아니한 자, 즉 종교인들은 다 쫓겨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발락이 두려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는 곳마다 기존의 것이 쫓겨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락은 기존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새로운 복을 받은 자들이 자기에게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신앙적으로 자꾸 타락해져 가는 이유도 기존의 것을 지키려고 하는 것 때문입니다. 기존의 것은 그냥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복으로 다가오는 것은 신앙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종교성을 지키기 위해서 새로운 복을 밀쳐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어지는 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반응 역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새로운 복을 거부하는 종교성은 결국 그리스도까지 거부합니다. 주님이 나타나는 순간 내가 땀흘려서 모아놓았고 이룩해 놓았던 모든 재산, 명예, 내 이름 등이 다 물거품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복을 제대로 알지 못한 인간의 무지가 두려움을 낳습니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모든 것은 복으로 여기고 있는 것들이 자신에게서 소멸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신을 찾고 의지하고 목사를 의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복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모릅니다. 복에 대한 무지가 종교를 낳고 두려움을 낳습니다. 그리고 참된 복을 몰아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죽으신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상태는 어떤 것입니까? 희생을 아는 것입니다. 희생을 아는 상태가 복을 받은 상태입니다. 희생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복을 받은 자는 필연코 자신의 죄에 대해서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합니다. 죄가 곧 약점이 드러나면 자신은 약자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장점을 강조하고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가지 잘한 것을 가지고 열가지 잘못한 것을 가리워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일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노력한 것입니다. 그 무화과 나뭇잎이 지금으로 말하면 도덕일 수 있고, 윤리일 수 있고, 종교열성일 수 있고, 착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수치를 다른 무엇으로 적당히 가리고서는 깨끗한 척 양심 바른척하고 대중들앞에 나서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순순히 자신이 더러운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누구를 싫어하겠습니까?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감추는 사람들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이 등장하면 죄를 감추었던 사람들은 뭔가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죄를 고백하는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얘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싫어하고 마음 불편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정적인 얘기 말고 좀 긍정적인 얘기를 해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그러면 목사는 그 요청에 따라서 사람들 마음을 부담없이 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점술가인 발람이 8절에서 "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는 그러한 수준도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신 대로 말해주겠다는 수준도 되지 못하고 말을 해봐야 그 말은 결국 뇌물을 먹은 아부꾼의 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두려움은 잘못된 복의 이해에서 나옵니다.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고 약자가 되기를 싫어하고 수치를 드러내기 싫어하는 데서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그러면서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종교화된 기독교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교냐? 신앙이냐?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종교는 사라지고 신앙만 남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신앙은 참된 복을 받은 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발락이 발람을 찾는 식으로 하나님을 찾지 말고 목사도 찾지 마십시오. 그것은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앙은 인간이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뭘해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복받은 자라고 합니다. 누군가의 희생 때문에 자신이 살았다는 것을 깊이깊이 인정하면서 나보다는 희생하신 분을 더욱 앞세우고 그분만 높이기를 소원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신자가 진정한 신앙인이며 이렇게 기존의 자신의 모든 것을 쫓아낸 사람이라면 세상 사람같이 두려움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에게 두려움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죽으면 천당 가니까 좋다라고 살아가는 사람을 무엇으로 위협을 하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이런 신앙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3강 민 22:21-35 발람과 나귀 97.9.28


지난 시간에 죄를 지은 인간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무화과 잎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치와 약점을 가리고 싶어하는 인간의 죄인된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속성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이 속성이 보여집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TV를 볼 때 가장 부담없이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내용입니까? 그것은 나보다 못된 사람들이 등장해서 나보다 못된 행동을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드라마에서 어느 남편이 아내에게 극진히 잘해주는 내용이 나올 때 옆에 아내가 있으면 채널을 돌려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은 그 드라마의 남편같이 아내에게 잘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드라마의 남편을 통해서 약점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노골적으로 채널은 돌려버리지 못하지만 심기는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아내가 눈치없이 '당신도 저 사람같이 좀 해봐라'라는 말을 한마디라도 했을 때 아마 좋은 말로 대답할 남편은 그리 흔치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드라마에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등 못된 남편의 모습이 등장할 때는 아주 마음 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자기보다 못된 사람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은 아주 잘하고 있다는 것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수치를 은폐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속성에서 나타나는 행동의 단면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저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시중에 인기 있는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수치스러움을 고발하는 영화는 인기가 없습니다. 착한 사람이 등장해서 착한 일을 하는 캠페인성 영화는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영화는 보고 있어봐야 마음에 부담만 올뿐인데 누가 보려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영화는 인간의 수치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그저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입니다. 책도 도덕적인 책은 인기가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수치와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아주 두려워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앞에 나온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무화과 잎을 걸치고 나옵니다. 더러운 존재에 불과한 인간이 깨끗하게 보이는 것을 자신의 몸에 걸침으로서 떳떳하고 정정당당히 하나님 앞에 나서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의 수치는 감추고 대신 자신의 우월감을 내세울 수 있는 쪽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는 착한 사람으로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려고 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나서보려고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증거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판단하시는 기준은 착하고 도덕적인 말과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누가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느냐?'를 기준으로 해서 착한 사람으로 판단하십니다. 만약 세상에서 가장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를 짐승보다 못한 자로 취급해 버리실 것입니다. 이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귀와 발람이라는 인간이 등장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나귀와 발람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짐승보다 못한 인간의 모습에 대해서 고발하시는 한편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을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21절에 보면 발람이 나귀를 타고 모압의 귀족들과 함께 모압으로 향하게 됩니다. 발람이 모압을 가게된 이유는 15절부터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한 나머지 발락에게 사자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요청을 했던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발람은 모압의 사자들에게 나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할뿐이다라고 했고 하나님은 발람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12절)고 말씀하셨고 발람은 그 말씀대로 모압의 귀족들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이때까지 발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15절부터 보면 발람에게서 뭔가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발락은 발람이 오기를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앞서 보냈던 귀족보다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서 와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더 높은 귀족을 보냈다는 것은 발람을 그만큼 높이 대우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발람을 크게 존귀하게 만들어 주고 발람이 요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 줄테니까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합니다.

 

 

 

 

이 요청에 발람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18,19절에 보면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발락이 그 집에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압의 사신들과 함께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린 이 말을 보면 발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려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발람의 믿음이고, 또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 때문에 본문에서 발람이 가는 길을 여호와의 사자가 막아서고 또 34절에서 발람이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애당초 하나님이 발람에게 지시하신 것은 그들과 함께 가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왜 뒤에는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러한 점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입니다.

 

 

 

 

먼저 발람이 두 번째 사신들이 찾아왔을 때 다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는지 알아보겠다고 한 것은 잘못임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처음 사신들이 왔을 때 그들과 함께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사신이 왔다고 해도 그냥 그들을 돌려보내면 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또 다시 하나님께 묻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결국 발람에게는 귀족들을 따라서 모압으로 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발락이 재물과 세상 영광을 가지고 유혹하는 것을 뿌리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발람이 또 다시 하나님께 물어 보겠다고 한 것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에서가 아니라 혹 하나님의 지시가 바뀔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서였던 것입니다. 발람이 진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고자 했었다면 두 번이나 하나님께 같은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같은 질문을 두 번이나 했다는 것은 첫 번째 답에 대해서 그대로 순종하기 싫어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발람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첫 번째와 같이 '가지 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라'고 하십니까? 이것을 하나님이 뜻을 번복하는 것으로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아마 발람은 모압으로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신이 나서 갔을 것입니다. 자신이 바라던 대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들어주시는 것 같아서 기분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압 행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발람의 잘못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음을 본문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의 경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욥바로 내려갔을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의 길을 인정하시는 것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위에서 풍랑을 만났고 그 결과로 고기 뱃속으로 삼킴을 당했던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것으로 요나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발람도 하나님이 모압으로 가라고 하는 말씀에 나귀를 타고 떠났지만 그 길의 도중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발람의 모압 행을 허용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모압 왕 발락의 유혹에 빠져있는 발람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발람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귀를 이용하십니다.

 

 

 

 

발람이 나귀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나귀가 길을 가지 않고 밭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발람은 화가 나서 나귀를 돌이키려고 채찍질을 합니다. 그래도 나귀는 발람의 말을 듣지 않고 발람은 계속해서 매를 때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귀의 입을 열게 하시고 나귀는 발람을 향해서 말을 합니다. 30절에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  고 합니다. 나귀는 짐승입니다. 짐승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과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귀의 입을 열어서 인간과 대화를 하도록 하십니다. 나귀를 인간의 수준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시적이지만 나귀의 입을 열게 하심으로 상대적으로 발람을 나귀인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짐승인 나귀도 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인간을 고발합니다. 길을 가지 않고 버티는 나귀의 마음도 알지 못하고, 나귀처럼 행동도 하지 못하는 인간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나귀는 지금 여호와의 사자를 바라보고 행동합니다. 비록 자기 위에는 자기의 주인인 발람이 타고 있고, 매를 때리면서 길을 가기를 원하지만 나귀는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보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발람도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임을 알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합니다. 단지 나귀만을 보고 있습니다. 자기의 소유물이 나귀가 자기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내며 애꿎은 나귀만 매를 때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짐승보다 못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바라보고 행동하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보고 행동하면서 사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스스로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소유물을 바라보고 행동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발람과 같이 짐승보다 수준이 낮은 인간임을 지적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나귀도 나를 바라보고 행동을 하는데 너는 왜 나를 보지 않고 네 뜻대로 행동하려고 하느냐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발람은 지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발람 스스로는 하나님이 모압으로 가라고 해서 간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모압으로 가고 싶어했던 것은 발람의 마음이었습니다. 발람은 '나는 하나님께 물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 묻는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럴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이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거나 또는 내가 지금 하는 이 일이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그 기도가 과연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기며 자기의 일로 인해서 믿음이 방해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기도였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자신이 원하는 좋은 쪽으로 성취되기를 원하는 속마음을 감춘 기도였거나 아니면 자신의 믿음을 기도로서 증명하고 싶은 기도 아닌 기도였는지는 일에 대한 나중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맡겼다면 설령 일이 잘못되거나 잘 안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뜻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는 신앙이라고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현재 일이 잘 안된다면 그것이 현재 주어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또 다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지금의 이 형편에 순종할 수 없다는 거역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기의 일을 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치 발람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나귀가 자기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에만 화를 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내 일이 잘 되지 않으면 화를 내지 않습니까? 그 일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은 전혀 보지 못한 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24절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좌우에는 담이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는 하나님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길을 가고 있고, 막다른 길이고, 독안에 든 쥐입니다. 하나님을 믿든 안믿든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칠 수 없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하나님 앞에 설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한평생을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쳐서 잘살았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죽습니다. 죽음이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자의 마지막은 하나님 앞에서 마쳐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막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되어지는 인생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앞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우리 마음에 맞는 인생으로 빠져 나가보려고 애를 쓰며 살지만 그 애씀 때문에 우리의 심령이 상하고 영혼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발람은 자신이 여호와를 거역하고 있음을 자신을 가로막고 서 있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서야 깨닫게 됩니다. 31절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십니다. 그러자 비로소 발람의 눈에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여호와의 사자가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러자 발람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나귀가 바로 여호와의 주장을 받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여호와를 거역하고 있음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럴 때 발람의 입에서는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라고 고백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발람이 나귀를 때리면서 자기의 길을 가기를 재촉하는데 나귀는 가지 않고 버티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의 모습입니다. 인생을 여러분의 나귀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그 나귀 위에 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평생을 살아오시면서 여러분이 타고 있는 나귀가 여러분의 뜻대로 움직여지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마음대로 안되면 매를 때리면서 여러분이 원하는 쪽으로 나귀를 끌고 갈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나귀, 즉 인생과 무척 씨름하고 다투면서 살아온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나귀는 여러분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귀는 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탄 나귀 앞을 하나님이 가로막고 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몰랐을 때 내 힘으로 나귀의 길을 돌이켜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남는 것은 상처뿐입니다. 25절에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라고 합니다. 억지로 나귀를 길을 가게 하려고 했을 때 발람의 발이 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억지로 내 길을 가려고 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발람은 나귀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나귀를 통해서 발람을 상하게 하십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 말고 바라볼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을 바라보든 돈을 바라보든 바라볼 것이 있으면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이 바라보고 사는 그것을 통해서 더욱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상하게 하실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인생을 고통과 질고와 슬픔 속에서 영혼이 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안되는 인생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이 뜨여서 자기 앞에 서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내가 주인 되어서 내 마음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인생이 사실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린 비로소 하나님이 나를 지금의 이런 인생에 태우신 것은 나를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서 이런 환경으로 집어 넣으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람과 같이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인생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살았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왔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것을 깨닫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인생이 여러분의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이 여러분의 마음대로 움직여진다면 여러분에게 남는 것은 결국 죽음입니다. 33절에 보면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고 합니다. 나귀가 발람의 뜻대로 움직였다면 발람은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여러분의 뜻대로 움직였다면 여러분은 끝까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결국 멸망으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뜻대로 인생이 움직여 봐야 가는 길은 여러분의 탐욕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인생에 감사하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느냐를 묻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가리고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 세상 것을 끌어 모으는 인생을 살아가지 마시고 하나님을 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타고 있는 나귀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도 여러분을 더욱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데 쓰여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4강 민 23:1-12 의인의 죽음같이 97.10.5


목사인 제가 설교를 할 때마다 여러분 각자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신자로서 교회로 모였을 때 과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기대감을 가지고 나오셨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세계, 장차 주어질 영광된 세계에 대한 기다림으로 가득찬 채 나오셨는지, 아니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생활하면서 마음을 가득히 매웠던 현실에 대한 염려와 근심 걱정을 그대로 지닌 채 나오셨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저로서는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여러분께 설교하는 내용은 모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추구하고 기다리는 삶에 대해서입니다. 그런데 정작 설교를 듣는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세계를 추구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매여있는 상태라면 결국 저를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마음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공허하고 쓸데없는 말로 그쳐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듣는 여러분의 마음이 현실 세계에 대해서는 열려있지만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는 열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사인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는 것으로 할 일은 다 끝난 것이지만 여러분들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로 더욱 한발 다가가는 유익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현실 세계를 향해서 열려있는 여러분의 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쓸데없는 공허한 말로 여러분의 귓가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이 시간을 매우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살리는 하늘의 말, 하늘의 소리가 이 예배당을 울리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여러분을 살려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라고 또 살려 놓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인데도 불구하고 우린 여기에 너무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 자체부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실려 있는 것임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오로지 내 뜻과 내 계획을 위해서 움직이려고 하는 우리들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은석가족 친목회를 가지면서 시 24편을 읽고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온 우주 만물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 즉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은 하나님의 땅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린 어딜 가도 하나님의 땅을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땅을 밟으면서 '난 지금 하나님의 땅을 밟고 살아간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린 땅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땅이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고 물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숨을 쉬게 하는 공기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태양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어느것 하나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 놓으시고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기대하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환경을 계발해서 더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하나님이 주신 것 안에서 감사하면서 은혜를 알고 살아가는 인간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것들을 하나하나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하나님보다도 세상이 더 좋아집니다. 마음은 점차 하나님에 대해서는 굳게 닫혀져가고 세상을 향해서만 열려져 갑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도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도 관심 없고 오히려 허황된 말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정당하다는 것이 아니라 멸망 받을 자들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다릅니다. 세상에서야 천국, 영생, 부활이라는 이야기가 허황된 이야기고 한낮 정신나간 종교인들이 떠들어대는 이야기로 여긴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교회에서만큼은 그런 말씀들이 환영을 받아야 하고 설렘이 있어야 하고 기다리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하나님이 교회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허황되고 현실성이 없는 말로 치부되는 천국, 영생, 부활이라는 이야기가 교회에서도 현실성이 없는 허황된 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물론 믿는다는 말은 합니다. 하지만 믿는 모습이 보여지고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너무 희미합니다. 그러면서도 천국을 믿고 영생을 소망하고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단지 교인 되기 위해서이고 현실을 살 때 필요한 것은 역시 돈이고, 건강이고, 직장이고, 능력있는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 교인들의 모습이고 또 은석교회의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돈, 건강, 직장이 필요하고 죽어서는 영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영생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현실에서는 영생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영생이 취직하는데 도움이 되고, 건강에 도움이 되고, 돈 버는데 도움이 된다면 교회는 문전성시를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영생은 현실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때로는 현실을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있게 합니다. 이런 영생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결국 인기 없는 품목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교회를 잡화점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여러 가지 품목을 가져다 놓고 인기 있는 것은 앞에 진열하고 인기 없는 품목은 뒤로 밀려서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아 버립니다. 이것은 장사꾼이라면 당연한 경영방식입니다. 인기 없는 것은 더 이상 진열해서는 안됩니다. 인기 있는 것을 진열하고 판매해야 손님이 늘고 발전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잡화점이 아니라 단일품목을 판매하는 전문매장입니다.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품목은 영생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교회에서 제공하는 단일품목입니다. 설령 인기가 없어서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교회는 끝까지 한가지만을 고집해야 합니다. 망한다고 해도 한가지만을 고집하다가 망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실로 그리스도의 피로 세움 받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에게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 피를 가르치고 제공하라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는 인기가 없어서 장사가 안되니까 다른 인기 있는 품목을 가져다 팔겠다고 한다면 과연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라 하겠습니까? 제발 은석교회에서만큼은 그리스도의 피로 주어진 귀한 생명이 인기 없는 품목으로 전락되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영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영생으로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장차 주님이 오시고 영광의 나라가 주어졌을 때 다함께 그 나라에서 만나기 위해서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할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로 찾아 나오는 사람은 영생으로 인도 받기를 기대하고 나와야 합니다. 영생 외에 다른 것을 교회에서 기대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교회가 크냐 적냐는 것은 영생과 하등에 상관이 없는 말입니다. 큰 교회와 적은 교회의 영생이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큰 교회를 기대하는 것입니까? 영생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뭔가 공허한 말로 들리고, 허황된 말로 들리고, 비현실적인 말로 들리기 때문에 아무리 영생이라는 말을 들어도 기쁨이 없고 마음에 와 닫는 것이 없고 공허한 마음을 현실성이 있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채워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크게 짓고, 사람 수를 채우고, 선한 사업도 열심히 하고, 예배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여러 가지 행사를 벌임으로서 영생으로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공허한 마음을 메우려고 한 것입니다. 영생보다는 교회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비극은 사람들을 영생으로 인도해야 할 교회가 정작 영생을 기대하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다른 교회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은석교회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왜 교회에 오셨는지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마음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과 기대감을 가지고 오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런 마음이 아니라면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은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하고 공허한 마음 상태 그대로 돌아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빠져 있는 마음은 현실적인 것으로만 채워집니다. 마음이 이미 현실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현실적인 것이 아닌 영생으로 그 마음이 채워지겠습니까?

 

 

 

 

제가 염려하는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현실에 빠져서 항상 현실에 대한 부족함을 느끼고 살아가는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지 못한 채 교회에서 자신의 마음을 채울 수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영생으로 채워질 수 없는 마음으로 교회를 찾아 나오면서 교회를 나와도 기쁨이 없고 마음이 공허하다고 한탄하고 불만을 가지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여러분의 삶에서 있으나마나하고, 와도 그만 안와도 그만인 의미 없는 단체가 되어버릴 것이고 교회에서의 시간 역시 차라리 밖에서 친구를 만나는 시간보다 못한 시간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라고 하면서 신자 아닌 자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신자라고 할 때는 세상사람과 분명한 차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발람이 모압으로 가서 하나님의 지시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상사람들과 어떤 차이를 두고 대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8절에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창 12:3절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복의 근원이 되는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주어질 세상에 대한 혜택입니다. 누구든지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특별대우하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특별나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특별난 것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창대케 하시고자 하십니다. 결국 아브라함을 축복한다는 것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이 자기 이름의 창대를 버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창대케 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기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며 자기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아브라함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같이 자기를 포기하는 삶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그 역할이 이스라엘에게 이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그들을 축복한다는 것은 곧 '나도 나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는 고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함께 복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나중에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것입니다. 항상 현실에 눈을 돌리고 현실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은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신 그 모습이 이제 우리에게는 복의 근원입니다. 바로 그분, 자기를 희생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바로 그분을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는 결국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8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다스릴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받은 자를 내세워서 그자를 축복하면 복을 주고 저주하면 그자도 저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축복하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축복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축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축복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복을 빌어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을 환영하고 기뻐한다는 의미입니다.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십자가 안에 거하는 것이 복인줄 알고 주님 안에 살기를 소원하는 그것이 주님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축복하면서 교회에 나오십니까? 주님을 축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창대케 하기 위해서 나 하나는 포기해야하는 인생에 기꺼이 뛰어 들겠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찾아 나온다고 하면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며, 주님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생명은 내 마음을 채워줄 수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고 여전히 현실에 대하여 부족한 마음으로 교회에 나온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라고 해서 세상에서 뛰어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9절에 보면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홀로 처한다는 것이 복을 받은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입니다. 홀로 처한다는 것은 세상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몸이 아니라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습니다. 보통 나라와 달리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달리 생각하신다고 해서 열방 중에 뛰어난 나라가 되게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은 세상과 똑같이 살지 말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나와 부딪히고 나를 기쁘게 해주지 못하고 내 마음을 채워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면서 예수님처럼 되기는 싫어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되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처럼 되기를 소원하는 것, 그것이 주님을 축복하는 것이고 그자는 하나님이 복을 받아 삽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처럼 되고자 소원하십니까? 그렇게 되려고 힘쓰며 사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친 자로 마쳐지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발람의 소원이었습니다.

 

 

 

 

10절에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고 합니다. 발람은 자기의 종말이 이스라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바친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처럼 사는 것이 복이 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얘기들이 과연 우리들의 현실과 얼마나 연관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의 전부를 헌신하고 산다고 해도 우리의 현실은 전혀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시각에서 볼 때 신자가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이 참으로 쓸데없고 허황된 말로만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저주 안에 있는 증거임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영생과 멸망으로 가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축복하신 자를 축복하면 영생을 주시고, 저주하면 저주해 버리십니다. 현실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세상에 던지셔서 그것을 귀하게 생각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영생으로 인도하시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저주하시는 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발람이 자신이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바란다고 소원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새롭게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하셨습니까? 과연 예수님의 죽음같이 죽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보신 적이 있습니까? 영생이나, 천국에 대한 이야기는 현실과 동떨어진 머나먼 이야기로 생각하고 흘러 들어버리고 현실을 사는데 가치 없는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영생보다는 직장문제가, 결혼문제가, 자식문제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여러분에게 인기 없는 품목으로 밀려나 버린 문제가 또 다시 등장합니다. 오늘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말씀 앞에 나오는 시간마다 등장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여러분은 심각한 마음으로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두셨다고 했습니다.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 축복 편에 서시겠다면 이제 여러분이 할 일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자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삶을 사랑하며 내 삶 또한 주님 같기를 소원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동안 영생이 현실성이 없다고 관심 두지 않고 뒤로 밀쳐버렸다면 이제 오늘 그 영생에 관심을 두시고 새로운 신앙생활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발람의 소원처럼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는 기도와 찬양이 여러분에게서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분명히 여호와의 복에 거할 것입니다.

 

 

 

 


35강 민 25:1-13 평와의 언약 97.10.12


신앙생활은 힘으로 하지 않는다는 원리를 이해하십니까? 즉 신앙은 힘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힘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유명한 전쟁이야기인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잘 아실 것입니다. 조그만 소년인 다윗이 거인인 골리앗을 이긴 내용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상대방의 힘 앞에 기가 죽어있었습니다. 상대방과 자기의 힘을 비교해서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할 때 두려움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사람들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다윗이 등장해서 신앙은 힘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힘없는 다윗이 등장해서 거대한 세상의 힘을 부숨으로서 신앙은 힘을 축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을 빼고 하나님만 신앙하는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골리앗 같이 힘을 내세워서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 앞에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다윗을 내세워서 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들은 과연 골리앗 편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다윗 편에 서 있습니까. 골리앗을 동조합니까 다윗을 동조합니까. 혹 골리앗 같이 자기의 힘을 의존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다윗 편에 서있는다는 것은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힘의 전쟁의 방식을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힘없는 어린아이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믿음의 문제에서 신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보이지 않고 음성도 없는 분을 마치 눈 앞에 보이는 분처럼 믿고 행동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보이지도 않는 분을 있다고 우기고, 한낱 책에 불과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 그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때로는 크나큰 심적 부담이 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보이는 것을 믿고,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보이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천국 못 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다. 그것이 믿음이라면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인간은 스스로 잘 할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전혀 반대의 것을 요구합니다.

 

 

 

 

신앙생활이 어려운 것은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으면서도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세상의 힘이 없고, 기쁨과 즐거움의 조건이 전혀 없는데도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에 뭔가 반발심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옛날부터 죄의 문제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분과 보이는 것의 관계 속에서 등장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분을 믿고 의지하느냐, 아니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신뢰하지 못하고 대신 보이는 다른 것으로 보이지 않는 분을 대체했느냐를 가지고 죄의 여부를 따졌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죄입니다.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도 흔히 생각하듯이 착하던 사람이 갑자기 술과 노름에 빠지고 가산을 탕진하고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분을 신뢰하고 그분에게만 순종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분이 미덥지 못해서 대신 확실한 믿음을 제공하는 보이는 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 버린 것을 타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 일 계명은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외에 믿음의 대상을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2계명은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도 역시 보이는 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즐거움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능가해 버리는 것을 가지고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을 신앙한다는 것은 자기 포기와 힘든 인내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힘이 없어서 당하는 고통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럴 때도 변함없이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만 신앙하기 위해서는 놀라운 인내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내까지도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하고 오직 주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1, 2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서 머물러 있을 때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고 그들이 제사할 때 같이 그들의 신에게 절했다는 것으로 본문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소행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그리고 4절에 백성의 두령을 잡아서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면 하나님의 진노가 떠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으로 본문을 보면 쉽게 하나님의 교훈을 찾아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음행하지 말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는구나' 이것이 본문을 통해서 생각하는 보편적인 교훈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앞서 말한 인간의 타락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즉 보이지 않는 분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눈앞의 보이는 즐거움에 더 사로잡힌 인간의 죄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음행하지 마라는 것은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 단순한 음행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따르기보다는 보이는 즐거움에 치우쳐 있는 인간의 타락의 모습이 드러난 것입니다. 음행은 단지 인간의 타락이 맺어낸 하나의 열매였을 뿐입니다.

 

 

 

 

만약 음행과 우상 자체를 타락이라고 말해버리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음행하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나는 타락하지 않았다'라고 생각해 버릴 것입니다. 또 음행하지 말자, 우상 섬기지 말자는 강조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새사람이 되어간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새사람 되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새사람될 가망성이 없는 사람들이 주님이 아니면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음행 우상 등 인간의 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도 '너희는 그러지 말라'는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에서 보여주는 죄의 모습들을 '너희는 그러지 마라'는 교훈적인 차원에서 보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이 큰 실수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곧 나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 역시 이스라엘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은 음행을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으니까 우리는 음행을 하지 말자'라고 할 것 같으면 과연 인간은 음행을 피할 수 있습니까?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음행의 행동이 없다고 해서 자신은 음행의 문제에서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속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이스라엘이 음행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고,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겨서 진노를 받았다면 우리 역시 보이는 것을 신뢰하는 우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죄인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록돼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나쁜 행동이 기록돼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타락한 죄인의 정체가 폭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양심과 도덕과 윤리와 인격을 가지고 자신을 미화하고 더러운 모습을 가리면서 스스로 거룩한 신자인체 했던 우리의 죄의 모습을 여지없이 폭로해서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나오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도 보이는 것에 치우쳐 살아가는 타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신을 바라본 채 이 말씀을 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으로 인해서 그치느냐 입니다. 진노 아래 있는 자로 하나님께 나온 우리에게는 이것만큼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 안에 염병이 일어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염병이 '비느하스'란 사람으로 인해서 그치게 됩니다.

 

 

 

 

그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서 회막에 모여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그것을 본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의 막에 들어가서 그 남자와 미디안 여인을 찔러서 죽여 버립니다. 그럴 때 염병이 그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잘한 행동이 있어서 그것이 기쁨이 되어서 진노가 그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단지 하나님의 진노로 회막에서 울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한 것은 비느하스의 행동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보신 것이 아니라 비느하스를 보시고 진노를 그치신 것입니다. 이것을 13절에서는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고 말합니다. 비느하스의 행동이 이스라엘 전체를 속죄한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비느하스가 창으로 두 남녀를 찔러 죽인 것을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한 행동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시고 이스라엘을 속죄하십니다.

 

 

 

 

여기서 우린 다시 한번 한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하나님은 우리편이 아니시다'는 것을 여러번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도 아니고 우리편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편이라면 음행 했다고 해서 염병으로 24,000명이나 죽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그 뜻대로 행동하는 사람 편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 편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고 하나님은 비느하스 편에 서서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를 그치신 것입니다.

 

 

 

 

질투는 사랑을 바탕으로 해서 등장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이지 사랑하지 않는다면 질투도 없습니다. 즉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질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만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것을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음행을 하고 그 여자들이 섬기는 우상에게 같이 절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질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중에 비느하스가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그 행동을 인해서 이스라엘은 염병이 그치고 평화가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선 본문에서 말하는 평화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흔히 '평화'라고 하면 다툼이 없고, 아무 문제가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삶을 연상합니다. 또 마음의 평안함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평화를 공급받고 누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평화란 이런 차원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의 언약은 비느하스가 두남녀를 죽임으로서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평화라고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상태를 가리켜서 평화라고 말합니다. 평화란 아무일 없이 조용하다는 뜻으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평화가 주어졌다는 것은 그전에 다툼과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싸움이 없는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다툼, 싸움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평화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이 세상에 있었는데 그것을 어떤 사람이 해결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평화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적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적,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습, 그것이 1-3절에서 나온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즉 앞서 말씀드린 대로 보이지 않는 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피조물을 의지하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적이고, 진노의 대상이고, 싸움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물리쳤을 때 하나님의 평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스하스가 두 남녀를 죽인 것을 기뻐하시고 그것으로 평화라고 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행동한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고 평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마음으로 행동하십니까?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이 맞다고 하신 것을 나도 맞다고 할 수 있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십니까?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교회에 나오시면 평화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으로 하나님같이 죄를 미워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모든 것을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평화를 알 수 없습니다. 평화가 주어지기 위해서는 전쟁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와의 전쟁입니까?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자신의 사고방식과의 전쟁입니다. 이 싸움에서 나의 타락한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사고방식에 의해서 완전히 점령당할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평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음행한 두남녀를 죽이는 것 자체가 전쟁입니다. 이것이 제사장 직분이 소유해야 할 정신입니다(13절).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 속에 그대로 담겨 있어서 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질투심으로 행동하는 자가 등장하고 그 행동에 동조하는 사람에 한해서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정신을 그대로 보이신 분이 누굽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본받아서 그 마음으로 행동하시고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온전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속죄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편에 서서 죄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는 마음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질투가 곧 나의 질투가 되어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에 동조하지 않고 그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야 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 백성이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의 질투를 이해하십니까? 여러분에게 그 질투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질투로 찔러 죽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 여러분 안에 소리 없이 존재하고 있는 불신앙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비느하스의 입장에 서서 여러분 자신을 창으로 찔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마음자세로 여러분 자신과 싸우면서 여러분의 마음이 점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으로 점령되어 갈 때 하나님의 평화를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보이는 것에 매여 살아가는 자신을 정죄하면서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만 바라봄으로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36강 민 26:1-4 하나님의 군대 97.10.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들을 보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뭔가 특이한 단체로 만드시기 위해서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광야에 있습니다.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의 일을 겪습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수만 명이 죽어나가는 무서운 일을 겪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무엇 때문에 그처럼 혹독하게 이스라엘을 다루십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나라와 전혀 다른 나라를 만드시고자 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쫓아낼 만한 나라로 만드시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을 군사 훈련을 시켜서 힘이 강한 나라로 만드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 나라의 죄를 경고하고 그들의 죄와 싸울 수 있는 나라로 만드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세상의 죄를 경고하고 싸우기 위해서는 필히 요구되는 것은 이스라엘은 세상과 같은 죄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똑같은 죄에 빠져 있으면서 세상의 죄를 경고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죄를 경고하기 전에 오히려 먼저 자신이 경고를 받을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이 특별히 부르신 이스라엘이 세상과 같은 죄에 빠져 있을 때 가차없이 그들을 징벌하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오늘날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한사람 한사람은 우리들 신자를 의미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시각이 남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모델로 앞세워서 이스라엘을 때리시고 가르치시고 경고하시고 교훈 하시면서 오늘날 우리들이 이스라엘 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서 죄를 경고하고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단체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히 교회가 먼저 죄를 알아야 하고 죄와 멀어져야 하고 죄에 대해서 경고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하나님께 부름 받은 새이스라엘이면서도 세상과 같은 죄에 빠져있는 모습에 대하여 경고를 받고 그로 인해서 죄를 깨닫고 죄로부터 멀어지면서 세상에서는 죄에 대하여 경고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정작 신자인 우리들은 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교회로서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자기 개인의 일에 푹 빠져서 바쁘다는 핑계만 내뱉은 채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이면서 신자답지 못하고 교회이면서 교회답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솔직히 표현하자면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경고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과 똑같이 똑같은 죄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 오늘날 현대교회, 신자들의 솔직한 모습인데 그런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욕심 내지 말고, 교만하지 말고,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가난해도 정직하게 살고 낮은 자리에서도 기뻐하며 삽시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호화로운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수입한 돌을 처바르고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혈안이 된 수많은 교회들이 과연 욕심 내지 말고 살자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힘을 잃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신자로서 세상의 죄를 경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도 같은 모습이기에 말을 할 수 없는, 신자로서의 가치와 힘을 잃어버린 상태는 아닙니까?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교회는 나혼자 천국가면 다 되는 곳이 아닙니다. 신자는 어두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자로서 세상을 경고하는 자가 되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처럼 내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를 받고 죄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하나님의 경고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상한 것은 신자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받을 때의 태도나 세상이 교회로부터 경고를 받을 때의 태도가 같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마지막을 외쳐도 세상은 눈하나 깜박하지 않습니다. 멸망에 대하여 무척이나 대범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지금 나중 일에 대하여 신경 쓰고 관심둘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바쁜 일이 태산인데 어떻게 나중 일까지 신경 쓰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떠합니까? 똑같습니다. 세상과 똑같이 바쁘게 삽니다. 바쁘게 사는 것을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쁘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관심이 멀어지는 것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바쁘다는 것이 정당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쁘다 바쁘다 하면서 세상과 똑같이 마지막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살아가고 교회에 와서 경고를 들을 때도 단지 간섭 정도로 여겨버립니다.

 

 

 

 

바쁘다는 것이 굳이 직장을 다니고 공부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진 남녀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 바쁩니다. 그들에게는 교회보다는 데이트하면서 사랑을 속삭이는 일이 더 급합니다. 고전 7:33절에 보면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나누인다는 것은 하나님께 두어야 할 관심이 온통 아내에게로 쏠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아내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바쁜 것입니다. 시집간 여자도 마찬가지로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바쁩니다. 관심이 아내와 남편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세상을 경고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는 죄로부터 멀어져야 하고 진리와 의로 하나되어야 하며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다른데 관심을 둔 채 교회에 와서는 안되고 다른 것에 욕심을 두어서도 안됩니다. 오직 진리와 의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교회는 놀이터가 아닙니다. 다른 할 일이 없으면 찾아오고, 노닥거리고 시간 보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멸망을 향해 가는 세상을 경고하고 마지막에 살아남는 자가 되기 위해서 진리와 의로 하나된 단체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교회에 들어오게 된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여겨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교회 다니는 것이 자랑스럽지도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왔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둘아 가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로 모이는 우리부터 이런 마음인데 그런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향해서 마지막을 경고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 우리는 깊은 반성을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죄를 경고하는 것을 가지고 다른 말로 싸움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싸움꾼이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염병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 조상의 집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무릇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싸움에 나갈 마한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군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민수기는 1장부터 이러한 정신을 선포하고 시작합니다.

 

 

 

 

민수기 강해를 시작하면서 맨 먼저 말씀드린 것이 이스라엘은 싸움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민수기는 오늘 본문과 같이 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의 숫자를 세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1:2,3절을 보면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군대대로 계수하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각 종족의 두령과 계수한 숫자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도 같습니다. 5절부터 계수한 숫자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민수기를 시작하면서 숫자를 계수하라 하시고 또 26장에 와서 다시 숫자를 계수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는 시각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에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 국가로서 출발합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하나님의 군대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군대다워야 한다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최우선적인 과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민수기 1장에서 숫자를 계수하는 것은 그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이 어떤 식으로 살아야 군대다운 군대가 될 수 있는가를 광야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1장에서부터 25장까지에서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원망과 반역 등 모든 모습들은 하나님이 군대다운 모습이 아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죽은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은 군대에서 제외되는 것임을 경고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1장에서 계수한 군대의 숫자보다 26장에서 계수한 군대의 숫자가 적습니다. 전체 이스라엘로서는 1720명이 감소된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염병 후에'라고 합니다. 즉 26장에서 계수된 사람들은 염병을 무사히 통과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들에게만 기업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숫자의 변동사항은 하나님이 약속한 기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을 떠난 후 수많은 불평과 원망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동기는 모두가 자기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 힘으로 내가 살아가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왜 그런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까? 라는 것이 이스라엘의 원망이요 불평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은 가나안의 모습으로 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군대로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쫓아내야 할 이스라엘이라면 당연히 그들에게는 생존을 앞세우는 모습은 허락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생존이 아닌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를 지내면서 생존을 앞세웠던 사람들은 군대에서 제외됩니다.

 

 

 

 

그런데 군대라는 것은 적이 있어야 생깁니다. 싸울 상대가 없는 군대란 전혀 불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싸워야 할 대상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축복한 나라를 핍박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원수요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23:8절에서 발람이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라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은 자를 저주하는 자체가 곧 하나님의 원수여 하나님의 저주받을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가지고 '누구든 교회를 저주하면 저주받는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지상에 세워진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축복하시고 보호하시는 단체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이 축복하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누구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특성을 잃어버린다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저주가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군대로서, 언약백성으로서 가져야 자세를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의 저주는 그들 안에 임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자세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자기 자신부터 하나님의 군대에 대해서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를 못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이 축복한 그리스도의 몸을 핍박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 민족을 몰아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이스라엘 내부를 치는 것을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세상을 경고해야 할 군대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먼저 이스라엘 안의 세상의 죄의 모습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갑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실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세상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할까만 생각하지 먼저 우리의 내부를 치시는 하나님은 전혀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치십니다. 우리 안의 죄를 먼저 제거하십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대다운 모습은 자신은 징벌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을 때 그들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놋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놋뱀을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는 징벌 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라는 것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이 군대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안다는 것은 '나는 이제 내 생존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군대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교회가 군대로서의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유는 교회도 생존에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교회부터 하나님의 원수로 나서면서 어떻게 세상에 죄를 경고하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자부터 십자가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의 길을 싫어합니다. 오직 생존의 문제가 머리 속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채 살아갑니다. 이러한 우리를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 말씀이 존재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내부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과 싸우면서 살아갑니까? 여러분이 싸우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행여 생존의 문제, 먹고사는 문제와 싸우며 살지 않습니까? 교회는 분명히 진리와 의를 위해서 싸우는 군대인데 교회로 모이면서도 진리와 의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더 많은 것을 확보하고자 싸우는 것은 아닙니까? 어느 것이 진리이고 어느 것이 의의 편에 서서 살아가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관심을 닫아버리고 외면해 버리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진리와 의를 위해서 싸우라고 하나님이 선택해서 부르신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경고하라고 부름 받은 단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군대로서의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군대의 모습은 잃어버린 채 세상과 똑같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기의 생명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세상에 대해서 아부하고 타협하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자라 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이 축복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오히려 핍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로서 합당하지 않는 것은 군대에서 제외됩니다.

 

 

 

 

여러분이 모습은 어떻습니까? 과연 군대로서 필요한 모습을 갖추고 살아갑니까? 군대로서 필요한 모습은 죄를 안짓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겪었을 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철저하게 아는 것이었습니다. 놋뱀을 바라보는 마음이 필요하고, 어린양의 희생을 아는 마음이 필요하고, 비느하스 때문에 염병에서 살아남으로서 나도 죽어야 할 죄인이었음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단지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힘을 동원해서 내 생존의 문제를 내가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반역하는 적의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먼저 자신부터 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신의 가능성은 포기한 채 오직 말씀에 순종하면서 말씀으로 살고자 힘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로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가나안의 모습을 치시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곧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치십니다. 세상에서 죄를 경고하고 진리와 의를 드러내는 군대다운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교회로 부르셔서 우리를 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려고 하고 외면하려고 합니다. 생존의 문제에 전혀 도움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뭔가 자꾸 생존에 도움이 되는 쪽에 고개를 돌리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을 저주하고 있는 모습임을 아십니까?

 

 

 

 

이래도 아무 생각없이, 진리와 의에 대해서 전혀 관심도 두지 않은 채 교회로 오시겠습니까? 바쁘다고 하나님께 대한 관심을 외면해 버리시겠습니까? 교회 나오신다고 군대 된 것은 아닙니다. 군대다운 군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37강 민 27:1-11 기업을 주소서 97.10.26


벧전 5:8절에 보면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의 구원을 방해하고 장애물을 놓으려고 하는 것이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마귀에 대한 경계심이 너무 누그러져 있습니다. 마귀를 단지 뿔이 난 귀여운 도깨비 정도로 생각하고 맙니다. 어린아이들 동화에서나 등장하는 마귀할멈 정도로만 여깁니다. 마귀가 나타나도 문제없다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월드컵 경기에서 붉은 유니폼을 입고 한국선수들을 응원하는 응원단의 이름이 '붉은 악마'입니다. 악의 상징인 마귀, 즉 악마가 사람들의 뇌리에 악의 상징이 아니라 단지 지독한 집념과 극성꾼의 모습으로 박히는 것입니다. 또 여자 운동선수를 향해서 무슨 마녀라고 이름 붙이는 것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마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신자들만큼은 마귀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택한 자를 천국에 보내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마귀가 방해합니다. 신자의 신앙생활에는 끊임없이 적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자기 백성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지만 마귀의 관심은 택한 백성이 천국에 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싸움입니다. 마귀는 천국에서 거부하는 것을 신자에게 끊임없이 제공하며 유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한 것을 손에서 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과 싸움 속에서 신자는 살아갑니다. 물론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의 쪽에는 전혀 마음두지 않은 채 마귀가 제공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며 살아가 버리면 갈등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신자라면 갈등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유혹과 갈등을 신자가 잘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의 지혜와 의지로 이기려고 한다면 분명히 실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귀는 인간보다 더 지혜롭고, 의지가 더 강하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나약한 면과 약점을 잘 알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마귀는 인간이 이길 수 있는 것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물리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유혹하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라도 마귀를 이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성령이 계시고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간구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계십니다. 로마서 8:26절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31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결국 마귀와의 싸움은 주님이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승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승리의 결과는 무사히 천국으로 인도함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껏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여러분 자신의 믿음의 자질이나 노력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지금까지의 믿음의 공로를 자신의 노력과 의지에 둔다면 그것 역시 마귀의 유혹에 빠져 있는 결과입니다.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자신에게 공로를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아무리 신앙이 뛰어나고 의지가 있다고 해도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린 오직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과 주님의 확실한 기도 때문에 구원의 길로 인도함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도우시고 주님이 기도하시는데 누가 우리의 구원의 길을 방해하겠습니까?

 

 

 

 

제가 여러분께 왜 이런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하나님이 마귀와 싸우시고 우리를 도우시니까 여러분은 아무 염려 말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라는 뜻으로 드리는 말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성령님과 주님의 관심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데 있는데 과연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사는가를 생각하시라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것이지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무조건 천국으로 집어 넣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구원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신자가 할 일은 다만 성령님의 도우심과 주님의 기도에 우리의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의 도우심이 우리의 힘이 되어서 마귀의 유혹을 이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에 대한 결과의 혜택만 누릴 뿐입니다. 자기의 일을 보지 않고 주님의 일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을 내세우지 않고 주님의 일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늘 세상의 모든 일을 자기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죄인의 한계를 드러내며 살아갑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구원받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 구원을 위해서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설령 주님의 십자가를 언급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도 자신이 구원받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내뱉는 말이지 진심으로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가치 없는 나 자신 때문에 세상에 오시고 수치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사실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마귀의 유혹은 언제나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주님의 일보다는 자신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더 앞세우도록 합니다. 이런 유혹의 결과는 항상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달성해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게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십자가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게으른 신앙이라고 나무랍니다. 주님의 피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신자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십자가를 아는 믿음의 증표로 일어나서 행동하라고 외칩니다. 선교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윤리를 실천하고, 어두운 세상을 변화시키자고 합니다. 주님의 일은 십자가 지시는 것으로 끝났고 이제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겼으니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일을 도우는 신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흉내를 냅니다. 그리고 결국에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자기 몫의 영광을 챙기려고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주님 홀로 이루십니다. 모든 것이 주님 혼자만의 공로입니다. 우리는 피조물로서 주님이 하신 일의 위대성을 찬양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의로움입니다. 이 의가 구원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구원의 근거는 열심이 아닙니다. 의로움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피조물의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의로움입니다. 왜 이것이 의가 되느냐면 인간은 끊임없이 창조주인 하나님보다는 피조물인 자기 자신에게 더 신경을 쓰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신 것도 단지 열심히 모여서 예배드리고 기도할 것을 권유하는 말씀이 아니라 모임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자기 일에 몰두하며 살아가는지를 깨달아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구원의 문제를 이토록 강조하는 것은 많은 신자들이 구원에 대해서 오해를 하거나 소홀히 생각하고 살아가시는 모습이 많이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경계도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많이 발견합니다. 구원보다는 현재의 삶의 안락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너무나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말은 항상 구원을 받을까 못받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지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혹 자신의 과거나 현재의 신앙열심을 앞세워서 이 정도면 구원의 안정권안에 들어 있다는 안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버리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에는 분명히 제외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이 명단 그대로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정론이라는 것을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즉 어제 내가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을 바르게 했다면 어제의 신앙으로 나는 천국의 백성임이 확인됐기 때문에 앞으로 나는 필연코 구원받게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죄악으로 나가고 잘못을 해도 하나님께서 내 구원을 책임지실 것이니까 나는 안심이다는 이상한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애굽에 나와서 홍해를 건너고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했던 그 사람들도 결국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원망을 해서 불뱀으로 제외된 사람이 있고 염병으로 제외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구원 안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원망을 통해서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하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마지막까지 구원을 지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잘 배우시고 은석교회 여러분 모두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인내하시면서 구원을 잘 지키는 신자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기업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바로 슬로브핫의 딸들입니다. 당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각 지파의 숫자를 따라 기업을 나누도록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나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영원히 거한다는 표시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업을 대대로 물려줌으로서 후손들도 항상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토지를 빼앗기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상실하는 것으로 여겼고,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서 희년이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은총이 상실되지 않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땅 자체가 은총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이라는 기업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주어질 영원한 기업을 바라보며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여자들에게는 상속권이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므낫세의 현손 마길의 증손 길르앗의 손자 헤벨의 아들 슬로브핫의 딸들이 탄원을 하게 됩니다. 즉 아버지인 슬로브핫이 아들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기업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딸들에게도 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정당하게 여기시고 기업을 이어가는 법을 새롭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6-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 것입니까? 단지 여자의 상속권을 찾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여성의 권위를 인정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말씀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 말씀에서 신자가 어떻게 사는 것이 마지막까지 구원을 이루는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나안 땅에서의 기업을 포기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그들의 결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앞에 옳게 보였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결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계십니까? 신자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즐거워하고 사랑 때문에 기뻐하는 관계로 만나야 합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할 때는 환경에 상관없이 둘이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 푸근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헤어져 있으면 금방 다시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 남녀간의 사랑입니다. 만나자고 약속해놓고 약속 장소에 나가기 싫어하고 만나도 즐거움이 없고 부담만 된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닙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점검해 봅시다. 하나님을 만나면 즐겁습니까?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 때문에 기뻐하십니까?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기를 즐거워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 만나는 것이 귀찮고 예배드리기 싫은 차에 좋은 핑계거리가 생기면 그것을 핑계로 해서 예배를 뒤로해 버리지는 않습니까? 슬로브핫의 딸들같이 언약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는 안된다는 열망이 있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이런 열망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 좋아서 교회 나오고,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서 봉사하는 모습들이 희미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천국을 못가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럴 때 하나님이 왜 천국에 못들어갈 정도가 되었는지 그 이유를 말해보라고 할 때 여러분은 무슨 이유를 대겠습니까? 목사가 성경을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까? 기도회를 안해서? 봉사하라고 강조를 안해서? 부모가 교회 가지 마라고 핍박해서? 이런 것들은 분명히 천국 못가는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아마 이유라면 처음부터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이 없이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에 애당초부터 구원과 상관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슬로브핫의 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가지 못하는데 대한 안타까운 그 심정을 이해하시고 그 마음으로 교회를 나오셔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이 전부다'라는 그 열망으로 교회를 찾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흐르고 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왜 슬로브핫의 딸들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포기하지 못합니까? 땅이 없으면 먹고 살 수 없었기 때문이겠습니까? 남들한테 큰소리칠 수 없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 안에 거하는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된다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약속의 땅, 은혜의 땅에 들어가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열망이 전혀 없다면 어떻게 은혜의 땅에서 은혜를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뜨거움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런 마음이 없이 오셨다면 과연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무슨 도움이 되고 무슨 계시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오셨을 때 비로소 말씀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있는데 전혀 그런 마음이 없이 오셨다면 이시간 말씀은 여러분에게 무엇입니까? 이것은 비단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신 후부터 지금까지의 여러분의 모습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를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죽을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아는 순간 '이제부터 나의 전부는 하나님이다'는 열망으로 은혜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약속의 나라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전부인 사람은 무엇을 해도 하나님을 드러내고자 애씁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모든 일에 은혜를 나타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자신으로 인해서 손상되지 않도록 힘쓰고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 자신을 헌신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자신의 할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이 이 할 일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릅니다. 단지 주일에 예배 참석해주고 헌금해주면 그것으로 끝난 줄 알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할 일을 아십니까? 신자가 세상을 살면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뚜렷한 목표가 없이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힘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 일하고 신학교가서 목사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사명은 슬로브핫의 딸들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열망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인 됨을 알고 나의 죄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 은혜 안에서 '주님은 나를 위해 죽으셨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물으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돌이킬 때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여러분을 더러움으로 끌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여러분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주님이 기도하십니다. 여러분은 단지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만 잊지 마십시오. 자신의 부족을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주님의 생명만이 귀함을 놓치지 않을 때 그 믿음이 여러분을 천국에 있게 하실 것입니다.

 

 

 

 


38강 민 27:12-23 목자와 양 97.11.9


인간은 세상의 모든 일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죄악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인간의 한계점입니다. 이 한계점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이러한 실체만 분명히 깨닫고 자신을 바라본다면 아마도 지금의 교회는 전혀 다른 모습의 교회로 존재하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굳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계시라는 특이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으시면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도 생각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그 결과는 멸망이기 때문에 특별히 하나님의 마음을 계시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으시면 알 수 없습니다. 즉 세상에서는 배울 수도 없고 찾아볼 수도 없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계시라는 방법을 동원하신 것입니다. 즉 인간의 모든 상식과 경험과 지식과 생각들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이 계시입니다. 만약 인간의 생각과 상식에서 나오는 것들이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하다면 굳이 하나님께서 계시라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타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인간 스스로의 경험과 상식과 지식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없어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경험과 지식이 계시 역할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단지 종교에 불과한 기독교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이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생각과 상식과 경험과는 전혀 다른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 앞에 서서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계시에 순종하고자 하는 신자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상식과 경험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시에 순종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경험, 상식을 앞세우는 것은 절대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장한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절대로 여러분의 상식과 경험을 앞세워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식과 경험을 앞세우는 그 순간 하나님의 계시가 무시되고 짓밟힌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능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올해도 어김없이 교회의 연례행사로 등장하는 것이 수험생을 위한 특별기도회입니다. 내 자식이 대학에 합격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이고 경험입니다. 이런 상식과 경험을 앞세운 인간들이 찾는 하나님은 내자식을 대학에 합격시켜주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를 수호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인간의 열망에 함께 동조하고 부응해서 계시를 짓밟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열망과 인간의 욕심을 하나님과 연결시키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계시는 오히려 인간의 열망과 욕심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 앞에 정직하게 서 있는 증거는 자신의 모든 열망과 욕심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증거가 보이는지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도 각기 사람들마다 여러 가지 견해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상식과 경험은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방언이라는 것을 하는 신자는 방언하게 하는 예수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병고침을 받은 경험이 있는 신자는 병고치는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따로 있습니다. 인간의 상식과 경험을 초월한 예수님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따르기 위해서는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모든 생각을 과감하게 버리고 지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던 그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욕심을 따라서 예수님을 따랐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진정한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또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도 듣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소원과 고집만 앞세울 뿐입니다. 자기 열망과 욕심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에서 없애버리고 싶을 정도로 듣기 싫은 괴로운 소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가지고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쁜 소식이 자기 고집과 자기 생각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물을 때 예수님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자 청년에게 하신 복음, 즉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부자 청년에게는 영생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에게 그 말은 결코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괴로운 말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청년은 '괜히 찾아왔다'는 후회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복음이 무조건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고집과 자기 욕심과 자기 열망과 자기 경험과 상식을 앞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괴로운 소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머리를 움켜쥐고 '그것은 복음이 아니야'라고 거부하고 싶고 그 복음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은 심정만 일어날 것입니다.

 

 

 

 

교회가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것을 버리지 못한 자들은 괴로워하면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복음이라면 교회는 그 복음을 바로 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부자가 교회로 찾아오면 우리 교회를 돕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일군이라고 여겨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로 가지 않고 자기 교회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 안달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회를 돕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때문에 교회도 예수님의 입장에 서서 오직 영생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령 복음을 듣기 싫어해서 다 도망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서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데도 그 복음에 대하여 괴로워하지 않고 기뻐하면서 모여드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과 모든 소원들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 복음인데도 그것이 좋아서 모여드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기적 안에 있는 분들입니다. 백번 들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귀를 막고 듣기 싫은 소리일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복음에 자신을 맡기고 순종하고자 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성령이 함께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기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적 안에 있는 분들을 가리켜서 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바로 그 기적 안에 있는 분들이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이러한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목자와 양이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양없는 목자는 의미가 없으며 목자 없는 양이란 그 장래를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목자의 인도가 없고 목자의 지켜줌이 없는 양은 짐승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가 등장합니다. 목자는 양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고 양은 목자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목자는 목자다워야 하고 양은 양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양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목자는 목자가 아니며 목자를 따르지 않는 양 또한 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목자에게 있어서 참된 양이냐 아니냐의 구별은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느냐 알아듣지 못하느냐로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목자를 따릅니다. 반면에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망합니다(요 10:4,5). 따라서 교회는 목자다운 목자와 양다운 양이 서로 모여서 하나님의 구원받는 참된 무리로서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교회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양의 성품은 목자 아닌 가짜 목자의 음성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흔히 목사들이 교인들을 향해서 염소가 되지 말고 양같은 신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염소는 잘 들이받는 성질이 있는데 목사에게 반대하고 공격하는 것은 곧 염소 같은 신자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양은 온순하고 순종을 잘하는데 목사에게 순종을 잘하는 것이 곧 양같은 신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으로 가르신다는 말씀을 덧붙여서 목사를 공격할 때의 불이익에 대해서 엄포를 놓습니다. 즉 목사를 목자의 위치에 놓고 교인을 양의 위치에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목자가 아닙니다. 물론 목사가 목자의 역할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목자는 아닙니다. 참된 목자는 하나님이 인정하신 목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목자는 하나님이 심판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되어 있습니까? 목사도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목사라 해서 양과 다른 위치에 놓는다는 것은 인간의 외적인 조건으로 차별화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목자가 목자다운 모습에서 벗어났을 때 목자의 자격에서 제외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이미 예전에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을 인도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목자의 자격에서 제외된 것입니까? 그 이유가 14절에 나옵니다.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제 너희가 내 명을 거역하고 그 물가에서 나의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모세가 목자의 자격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가데스에서 발생했던 므리바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시 간단하게 가데스 므리바 사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에 거할 때에 마실 물이 없음으로 모세와 아론을 공박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이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자 하나님은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을 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생명을 위해서 물은 나오게 하셨지만 이 일로 인해서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아니했다는 이유로 인해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선언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목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단지 양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는 것이 목자가 아닙니다. 참된 목자는 세상에서 맛보지 못하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만나로서 물로서 가르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먹을 것을 요구했을 때 만나를 주신 것은 단지 그들을 배불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그들의 배를 위해서라면 애굽에서 먹었던 것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에서는 볼 수 없고 맛볼 수 없는 만나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만나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 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양식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한 물이 나올 수 없는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시는 것도 잠시후면 다시 목마를 물이 너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수가 너희를 살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목자는 하나님 편에 서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반석을 두 번 쳤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이 앞서있는 결과입니다. 모세는 출애굽기에서 이미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온 한번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반석을 명해라는 말씀을 뒤로하고 단지 이스라엘이 물 때문에 또 다시 자기를 원망하는데 대한 분노와 경험이 앞세워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석의 물을 통해서 '너희를 살리는 것은 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이다'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가려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로 하여금 목자의 자격을 잃어버리게 하는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은 결코 물도 아니고 양식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귀한 것을 주시고자 했습니다. 목자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고 양들에게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는 목자라고 하면서도 정작 양들은 단지 목숨을 유지하고 세상을 행복하게 살고 양식의 풍족을 누리는 쪽으로만 끌고간다면 그것은 절대로 선한 목자가 아니라 삯꾼 목자요 거짓 선지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도 목자도 하나님의 참된 생명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것을 제공하면서 교회를 유지하고 사람들을 붙들어 놓으려고 하는 것은 교회도 아니요 목자도 아닙니다. 사람의 경험과 상식을 앞세우고 있는 인간의 집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참된 양은 바로 그것들이 가짜임을 압니다. 목자의 음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거룩이란 깨끗함을 의미합니다. 깨끗하다는 것은 세상 것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 세상에서 구별되어 있는 것, 이것을 가지고 거룩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목자란 인간의 경험과 상식을 앞세우면 안되고 오로지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릅니다'는 것을 끝까지 고수하고 보여줘서 양들로 하여금 참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양들이 원망한다고 해도 변함없이 목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여주어야 할 모세가 자기의 경험과 상식을 앞세우게 된 것입니다. 자기를 욕하는 자에게는 분노하는 인간의 상식과 경험이 앞선 나머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가려진 것입니다. 자기를 욕하는 자에게 분노한다는 것은 희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자란 희생하는 자입니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목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참된 목자는 예수님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인도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대신 한사람을 세워서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말을 들으시고 모세 대신 그 자리에 여호수아를 세우게 되는데 18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에 감동된 자라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어떤 능력과 재주를 많이 발휘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합니다. 때문에 성령에 감동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목자는 양들 앞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인가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고 양은 목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아가고 구원으로 인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목자의 자리에서 목자의 모습을 제대로 보이신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참된 양은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것을 따라서 세상의 것은 썩어질 것으로 여기고 오직 영원한 생명 되는 것을 바라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의 마음을 양들에게 전하라고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예수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전하고 인간의 상식과 경험에서 나오는 예수를 전하고 세상의 복을 외치고 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리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멸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목자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목자 되신 예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이제 목자의 자리에서 목자의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야 할 사람은 목사이며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교회에서는 여러분이 목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만 교회 밖에서는 여러분들을 통해서 세상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즉 여러분이 목자로 살아가야 하고 선지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을 믿지 않고 세상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 만족하고 즐거워하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모습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직장에서 가정에서 보여주고 가르쳐야 합니다. 목자가 목자의 모습을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은 그 목자를 제외시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는 양이며 세상에 나가서는 목자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참된 목자이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목사가 여러분의 목자가 아닙니다. 주님만 여러분의 목자로 삼으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목자가 잘못된 모습을 보여도 거기에 영향받지 않고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는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목사를 바라볼 때 필연코 목사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가 예수님처럼 완벽한 모습을 보일 수만 있다면 목사를 바라봐도 되지만 목사도 세속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목사를 바라보고 있다면 목사에게서 세속적인 모습이 보여질 때 '아, 저래도 되는구나'라는 오해를 가지게 되고 결국 자신도 스스럼없이 세속적인 모습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잘못된다고 같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비록 성령에 감동되었다고 하나 그도 결국 인간입니다. 온전히 성령에 충만한 모습을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세상 양식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세상 것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참된 양으로서 참된 목자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목자이신 주님의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이 되어서 여러분이 성령에 감동된 자로서 목자의 모습을 보이며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39강 민 28:26-31 피와 안식 97.11.16


사람들은 모두 자유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세상을 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에게 어떤 굴레가 씌워질 때 인간은 그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서 애를 쓰게 됩니다. 굴레라는 것은 우리를 억누르는 것이고 압박을 주고 심적인 부담과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를 구속해 버립니다.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굴레 속에서 살기를 거부합니다. 직장이 굴레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공부가 굴레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가정이 자신의 굴레가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굴레를 쓰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굴레를 벗어나면 곧 자신은 세상으로부터 밀려나고 쓸모 없는 존재로 전락되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굴레를 거부하면서도 그 굴레 안에 있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굴레가 자신의 보호막이고 굴레가 힘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굴레를 쓰고 살아가야 하는 그 압박감이 현시대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굴레가 있습니다. 굴레를 벗어났다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을 초월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세상을 초월한 자가 누가 있습니까? 혹 세상에 연연하지 않고 말 그대로 세상을 초월해서 자기 마음껏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가정에 매이지 않고 직장에 매이지 않고 공부에 매이지 않고 이것저것 다 훌훌 털어 버리고 산천을 유람하면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는 것입니다. 제삼자가 볼 때는 그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초월한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저렇게 살아봤으면'하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아무리 세상을 초월해서 여기저기에 매이지 않고 마음껏 살아가는 사람도 한가지 굴레는 벗어버리지 못했습니다. 그 굴레가 무엇입니까? 바로 ''라는 굴레입니다. 세상을 초월해서 마음껏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누구를 위해서 세상을 초월한 것입니까? 바로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풍요로운 삶과 행복을 위해서 거추장스러운 것을 다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박사 검사 의사로서 사회에서 출세의 길을 달리던 사람들 10여명이 한꺼번에 절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속을 떠나서 진정한 구도자의 길을 걸어보겠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행동을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미친 짓거리로 보일 것입니다. 세상의 출세를 다 뿌리치고 아무것도 아닌 도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산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어리석게 보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 가족들이 큰 실망 속에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웠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참으로 대단하다는 평가를 내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영화를 미련 없이 떠나버린 그들의 행위에 위대함을 부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한편으로는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저것이 과연 세속이란 굴레를 벗는 길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볼 때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 세상을 등진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비록 그들이 직장이나 가족이라는 굴레는 벗어났을지 몰라도 ''라고 하는 굴레는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의 한계는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라고 하는 굴레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 채 살다가 죽는 것이 인간이다는 것입니다. ''라고 하는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을 바라보고 고민을 하고 번민과 고통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된 자유는 ''라는 굴레에서 벗어남으로 시작됩니다. 단지 세상을 초월했다고 해서 자유가 아닙니다. 만약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런 자유를 누린다면 세상은 그야말로 혼란으로 빠져들어가고 말것입니다. 모두가 직장을 버리고 학교를 버리고 가정을 버려버린다면 그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유는 나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라는 굴레를 벗어나 살아갈 때 직장에서도 직장에 매이지 않고 학교에서도 공부에 매이지 않고 가정에서도 가족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이지 않는 다는 것을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직장인, 학생, 가장, 주부로서의 의무와 책임에 소홀히 해도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의무와 책임을 성실히 이행하되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참된 자유이며 진정으로 세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은 이런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것이 한계입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나를 벗어나서 다른 분을 바라볼 것을 요구합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자기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사랑을 벗고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환경 여부에 상관없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환경에 의해서 사랑이 변하고 믿음이 변한다면 그것은 ''라는 굴레 속에서, 즉 자기 사랑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사랑도 믿음도 아닙니다. 단지 편안한 환경에서 누리는 마음느긋함과 여유 속에서 나오는 선심일 뿐입니다.

 

 

 

 

사랑은 불변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어느 한순간 화재로 인해서 여자의 얼굴이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버렸을 때 그때도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집에 불이 나서 하루아침에 모아논 재산이 다 사라져 버려도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렇게 어떤 환경에서도 사랑은 불변해야 합니다. 여러분 과연 이러한 불변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사랑이 과연 불변의 사랑입니까?

 

 

 

 

인간은 자기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한계입니다. 만약 자기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사랑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주어진 사랑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러한 사랑에 모든 소망을 두고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소망이 없습니다. 가슴을 헤집고 아무리 찾아봐도 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싶은 열망과 소망이 없습니다. 있다면 내 배부름과 편안과 행복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신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현대 교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지 배부름의 관계가 아닙니다. 배부르면 사랑하고 배고프면 원망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고 나서는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라면 소리 높여 찬양하고 떠들면서 목숨이라도 바칠 듯이 하더니만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문이 없는 환경이 주어지니까 찬송이 한순간 원망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배부름의 관계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이런 관계에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건강이 주어지고 양식이 주어지고 고통과 아픔이 주어진 것은 신자를 배부름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참된 자기 백성으로 삼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자식이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이도 나를 낳으신 부모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부모와 자식도 배부름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어도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진심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관계가 곧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제사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또 다시 제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제사에 대한 규례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제사 규례를 말씀하시는 것은 제사를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고 중요하니까 또 다시 강조하는 의미도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모세는 목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가나안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해 들어가지 못하고 그 역할이 여호수아로 교체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은 바로 교체한다는 말씀을 하시고 나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세가 목자가 인도자일 때나 여호수아가 인도자일 때나 변함없이 제사다는 것입니다. 즉 제사는 누가 이스라엘의 인도자가 된다 할지라도 변함없이 계속 이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모든 관심을 피에 두고 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피가 이스라엘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로 용서함 받는 것 외에 다른 길로 나가는 것은 저주받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31절에 보면 상번제를 드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상번제는 4절에 보면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제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 피로써 시작하고 마칠 때도 피로써 마치라는 것입니다. 피와 피사이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아침에 피를 흘리면서 '하나님 오늘 하루도 흠없는 양의 희생으로 삽니다'라고 기도하고, 저녁에 하루를 마치면서 '하나님 오늘도 죄지은 것 흠없는 양의 피로서 용서해주십시오'라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천국 백성입니다.

 

 

 

 

피와 피사이에서 오직 피를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은 제사로 시작해서 제사로 마치는 인생을 산다고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서 제사가 빠진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의미 자체를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나의 예물, 나의 식물 되는 화제, 나의 향기로운 것은 너희가 그 정한 시기에 삼가 내게 드릴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을 나의 예물, 나의 식물, 나의 향기로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피만을 기뻐하십니다. 피가 곧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물이며 식물이며 향기입니다. 다른 것은 더러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무지한 인간들은 자꾸 세상의 것, 더러운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보려고 아우성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분 좋게 만들어서 다른 혜택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헌금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나, 교회 일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나 그외 피를 제외한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러운 것일 뿐입니다. 신자된 여러분이 할 일은 오직 피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가 귀한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신자라고 하면서도 자꾸 엉뚱한 것을 요구하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귀한 줄을 안다면 그 사람은 교회를 나오는 것도 예수님이 피 때문에 자발적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라는 입장에서 언제나 여러분의 행동을 보면서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분이 과연 자발적으로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좋아서 그리스도의 피의 정신으로 살아가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모습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억지로 행동하는 것은 아닌지를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은 언제나 그 사람을 스스로 움직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강압적인 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강압이 들어가게 되면 저 사람이 과연 목사의 압력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눈치 때문에 하는 것인지의 여부가 불투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을 구분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여러분 스스로가 그것을 점검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강요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가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귀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서 하게 됩니다. 기도를 해도 유창한 기도를 함으로서 자기의 믿음과 유식함을 과시하려고 할 것이고, 직분도 인간의 조직 안에서의 자기 자리 확보 정도로 여겨버릴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귀하게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를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세상이 또 따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교회로 모이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는 다른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것이 있습니다. 공항에 가면 비행기를 타기 전에 검색을 합니다. 몸에 쇠붙이가 있으면 삐 소리가 울리는 문을 통과하면서 비행기에서 소지해서는 안될 위험물건을 가려냅니다.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소지할 수 있지만 비행기에서만큼은 소지해서는 안될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는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린 오늘도 그것을 찾아내서 벗어버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 합당한 삶에 대해서 배우고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다른 세상이란 노동이 없는 세상입니다. 26절에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노동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땀흘려서 일해야 먹고사는 나라입니다. 노동에는 기술과 능력이 포함됩니다. 기술과 능력이 있는 자는 노동의 효과가 뛰어납니다. 그 사람은 자연히 노동으로 살아가는 세계에서는 뛰어난 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그만큼 배부름과 안락이 보장됩니다. 반면에 노동의 기술과 능력이 없는 사람은 뒤쳐지고 하위 그룹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경쟁속에서 남을 눌러야 내가 살 수 있고 남이 뒤떨어져야 내가 앞서갈 수 있는 세상입니다. 때문에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는 것, 이것이 세상 법칙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 법칙이 전혀 통용될 수 없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노동이 없는 나라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노동을 하지 말라는 것은 그 열매는 우리의 노동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주어진 것임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살 때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천국에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힘으로 얻을 것이 전혀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며 살면 되는 나라입니다. 그것을 이 세상에서부터 미리 배우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일해서 벌어놓은 것으로 살아가지만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교회 다니고 기도해서 얻은 천국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흘리신 고귀한 피로 인해서 얻은 은혜 안에서 뛰놀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천국입니다. 이 천국을 세상에서 미리 살아가고 경험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노동이 없는 나라에서 사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내것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섬기기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모입니다. 이것을 성회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자기밖에 모릅니다. 자기 것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립니다. ''라고 하는 굴레 안에서 웃고 울며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천국은 내것이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단지 누리는 곳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내것이란 없습니다. 내것이 없기 때문에 기쁘게 나누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 세상에서부터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제사를 드리고 성회로 모이고 노동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천국을 배우십시오. 천국을 배우는 것이 곧 안식입니다. ''라는 굴레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웃을 수 있고 '못생겨도 나는 좋아'할 수 있는 그 나라를 지금부터 배워가십시오. 천국은 나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천국도 자기만을 위한 천국으로 생각합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기만 천국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나혼자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한 몸이 되어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때문에 지금부터 서로 모이면 사랑하고 도와주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교회로 모일 이유가 없습니다. 혼자서 하나님 부르면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란 모였을 때 드러나는 것이지 혼자 있을 때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신자는 사랑하기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우쭐거리고 자랑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숫자 채우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부흥시키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오직 사랑하기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세상사는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천국을 배우는 실습장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에서 세상 방식을 용납하고 세상법칙이 통용된다면 어떻게 천국을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상번제를 드리라는 것은 날마다 옛사람을 죽이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노동을 하지 말라는 것은 옛생활 태도를 버리고 천국의 삶을 배우고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하고 확고한 사실입니다. 비록 우리 몸은 심판 받을 세상에 거하고 있지만 장차 하나님이 마련하신 새로운 세상에 들어간다는 것을 마음에 담아 두시고 미리 그 나라에서의 삶을 이 땅에서 배우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자기를 포기한 나라인데 이 땅에서 자기 포기를 싫어하신다면 어떻게 천국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천국은 돈으로 사는 나라가 아닌데 돈에 매여서 돈 때문에 울고 웃는다면 어떻게 천국에서 사시려고 합니까? '나는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신자인가?'를 여러분의 마음 상태를 보시면서 살피시고 노동이 없는 나라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40강 민 28:26-31 열매의 모습 97.11.30


지난 추수감사주일에 드린 말씀은 하나님의 열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추수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있습니다. 사람의 추수는 각기 자신의 힘과 열심으로 일해서 맺어진 열매를 거두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추수는 하나님이 일하셔서 맺어진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매가 다릅니다. 사람이 일해서 맺어진 열매는 모두가 사람의 배를 불리기 위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열매는 인간 자체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셔서 새롭게 된 인간이 곧 하나님의 열매인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인간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진정한 추수감사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는 지난주일 하루가 아닙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새로운 인간으로 이 자리에 나오셨다면 추수감사는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추수감사는 여러분의 삶에서 일평생 멈추어서는 안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친히 하나님이 일하신 열매가 되어서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배를 위하는 열매를 바라보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열매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친히 일해서 뭔가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일하셔서 만들어진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교회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새로운 인간 만드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배를 위하는 자기의 일에만 몰두하고 거기에 자신의 전 인생을 낭비하고 살기에 바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 일에만 모든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일해서 맺어진 열매의 많고 적음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지 하나님의 열매에 대해서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 두지 않고 교회의 일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신자를 하나님이 일하셔서 맺어진 열매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보내어진 교회의 일꾼으로만 봅니다.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곧 신자의 본문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국 신자를 하나님의 일꾼이 아니라 교회를 위하고 교회에 도움이 되는 유능한 일꾼으로 만들어가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하는 근거는 무엇을 바라보고 모이느냐 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모이는 것과 교회를 바라보고 모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의 모습이 여기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참과 거짓의 모습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모인다면 그 교회는 항상 추구하는 것이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냐?'에만 모든 관심을 둘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교회를 바라보고 모인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교회를 위대한 교회로 만드는 것이냐?'에만 관심을 둘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바라보고 모이느냐의 차이입니다. 교회를 바라보고 모인다면 오직 자기가 속해 있는 교회가 위대해지고 커지고 칭송을 듣는 교회가 되는 것이 관심이지 하나님에게는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된 교회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항상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시선이 자기 자신을 향할 때 그 순간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열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이 나옵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이 농사지은 곡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농사지으신 열매를 드리는 의미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처음 드린 열매는 그들이 농사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 백성이 농사지은 것을 이스라엘이 추수한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일해서 거둔 것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을 들고 하나님께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에 노동을 하지 않음으로 해서 우리는 우리가 일해서 얻은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된 이스라엘이며 이들이 곧 진정한 하나님의 처음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일해서 자기가 얻은 열매로 살아가는데 자기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새로운 인간, 그들이 곧 하나님의 열매입니다. 이것이 지난 주일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오늘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처음 열매된 새로운 인간의 모습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은 노동을 쉬는 것과 번제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은 노동을 쉬고 번제를 드리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고 자기의 힘과 노력을 믿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며 살아가는 인간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로 맺어진 새로운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열매된 새로운 인간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다. 때문에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눈에는 세상에 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고 더러운지 비로소 발견하게 됩니다. 전에는 도둑질하고 강도가 많고 사기 치고 도덕으로 부패한 세상이 밉고 악하게 보였지만 하나님을 알고 새로운 인간되고부터는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않고 자기 힘만 앞세우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죄악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매된 신자는 신자로서 해야할 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된 자로서, 육에서 영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로서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다해야 할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 자신이 행해야 할 도리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순간 우리의 입에서는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신자의 도리와 책임감을 다하며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교회에 나와주고, 헌금하고, 교회 일하고, 이웃 도와주면서 착하게 살면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신자의 책임을 다한 것으로 여겼고 떳떳하게 살아왔는데 새로운 인간 되어서 하나님을 안 후에는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신자로서의 도리와 책임감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한 신자의 입에서 '주여 나를 용서하소서'라는 애타는 고백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신자의 도리를 다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열매로서의 삶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 교인의 도리를 다하고 교인의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때문에 지금의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용서를 구하는 죄인보다는 용서가 필요없는 떳떳한 의인들로만 가득해져 가는 실정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 앞에서 신자의 도리와 책임감을 다하고 살아가십니까? 그렇게 살지 못하신다면 여러분은 그 무엇을 가지고도 하나님 앞에서 떳떳해져서는 안됩니다. 평생토록 주일 한번 빠지지 않고 교회를 다니셨다고 해도 그것으로 떳떳해지면 안됩니다. 십일조하고 전도하고 성경을 많이 보셨다고 해도 그것으로 떳떳해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은혜만 의지하며 사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자신은 어떤 형편과 처지에 빠진다고 해도 하나님이 계시기에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인간을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러한 도리와 책임감으로 살고 있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수가 많고 교회가 커질수록 하나님 앞에서 떳떳함을 가지는 것이 현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구제를 많이 하고 선교를 많이 할수록 떳떳한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역시 하나님의 처음 열매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께 대한 도리와 책임감을 알고 있다면 하나님이 만드신 처음 열매를 찾는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인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가운데서 누가 하나님의 열매인가를 찾으십니다. 인간이 전도하고 인간이 설득해서 교회로 끌어들인 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셔서 맺으신 처음 열매를 찾고 계십니다. 교회는 이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37,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의 할 일은 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셔서 맺어진 열매를 추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매를 추수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고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입니다. 교회를 크게 만들어라고 제자들을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교인을 많이 끌어 모으라고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열매를 추수할 뿐입니다. 처음 열매를 찾아서 같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원하십니다. 어느 교회를 다니든 상관없이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누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의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누가 은혜만 바라보면서 인간의 도리와 책임감을 다하지 못한 죄를 고백하면서 겸손하게 살아가는가?' 이렇게 하나님의 열매된 자를 찾아서 같이 예배하고 영광 돌리라고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이 적다'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추수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의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는 것은 단지 일군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라 추수할 일군이 없는 현실에 대해서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추수에 동참하는 일군의 마음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모두 하나님이 추수에 동원된 일군으로서 모여야 합니다.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직책에는 의미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처음 열매로서 신자된 도리를 다하고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겠다는 마음으로 모여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교인을 향해서 '열매를 맺자'고 강요하는 것은 스스로 교회 아님을 증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가 할 일입니다. 열매가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까? 때문에 신자자체가 열매인데 열매인 신자더러 열매를 맺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란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발생되어진 결과를 바라보면서 흐뭇해하는 존재입니다.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에 대해서 스스로 감사하고 마음뿌듯해 하고 만족해합니다. 즉 '내가 열매인가?'를 돌아보기보다는 나무의 위치에서 '내가 만들어 낸 열매가 어떤가?'를 돌아보기를 더 즐겨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자신이 마련해논 비품이 있을 때 그것을 바라보며 흐뭇해하고, 자신이 전도한 사람이 교회를 잘 다닐 때 그를 바라보면서 자신에 대해서 대견스러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의 보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큰 것을 좋아하고 이름나는 것을 좋아하고 높아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그 본성에 신앙이 실릴 때 무엇을 위해서 교회에 나오고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을지는 능히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열매는 스스로의 힘으로 열매 되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의해서 열매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신자는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도의 말과 같이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 되었을 뿐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내 스스로 된 것이 아닙니다. 구제에 힘쓰고 봉사에 힘썼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어진 것이지 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참된 하나님의 열매입니다.

 

 

 

 

때문에 열매의 중요성은 나무에 있습니다. 어떤 나무에서 맺어졌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열매일 때 우리의 나무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열매는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그리스도처럼 죽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하신 뜻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나무일 때 우린 열매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우리들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매로서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자기 보람과 자기 기쁨과 자기 만족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보람된 자기 삶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려고 하고, 자기 만족과 자기 기쁨을 위해서 열심히 교회 일을 하면서 삽니다. 이것 때문에 세상을 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는 전혀 악한 모습이 아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열매로서 가져야 할 태도가 전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원하는 열망이 있습니까?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하려고 하고 신자의 도리를 다하면서 살기를 힘쓰고자 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셔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처음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일하심의 덕분으로 새롭게 된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열매란 인간이 일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인간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교회 사업의 어떤 결과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우리끼리 신나게 재미있어 하면서 신앙생활 아닌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 열매는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 처음 열매란 장자를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장자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오시면서 언제나 자신의 입장과 형편만 앞세우면서 짜증내고 불평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나오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고 이런 마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실까를 늘 염두에 두고 사십시오. 하나님의 열매이면 열매답게 하나님의 기쁨을 먼저 생각하면서 신자로서의 도리를 다하기에 힘쓰십시오.

 

 

 

 

우리 속에서는 언제나 마귀의 부추김이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열심 대신 인간의 열심을 내세우라고 부추깁니다. 하나님의 피 대신 인간의 피를 내세우라고 부추깁니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을 내세워서 인간의 가치를 포기하지 말라고 부추깁니다. 인간은 결코 무능하지 않으며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속삭입니다. 나의 희생과 나의 헌신을 앞장세워서 그에 상응한 대가를 받으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처음 열매되는 신자는 자기의 피흘림과 수고와 헌신을 보지 않고 신자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볼 뿐이며 부끄러워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길 뿐입니다. 은석교회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처음 열매의 모습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41강 민 29:1-6 7월의 제사 97.12.7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악은 상대적으로 선이 등장을 해야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선이 없는데 악의 모습이 드러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선을 선으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들에게는 눈이 둘 달린 것이 정상입니다. 날 때부터 모두가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늘에서 눈이 하나인 사람을 보내면서 이것이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때 여러분은 그것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눈이 둘 달려 있는 것을 정상으로 알고 살아왔던 사람이 한 개를 정상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보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자기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게 될 때 우리는 하늘서 보낸 정상적인 사람을 정상으로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을 둘러 볼 때 온통 보이는 것이 눈이 두 개인 사람이고 자기 역시 눈이 둘인데 어떻게 하나를 정상으로 인정하겠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악은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이 둘 달린 나라에 눈이 하나 달린 사람을 보내서 눈은 한 개가 정상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눈 하나를 없애라는 식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눈 하나 달린 사람을 세워놓으시고 너희가 비정상임을 인정하느냐를 묻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겠습니까? 날 때부터 눈이 둘이고 자기 주위도 모두가 눈이 둘인데 자신이 비정상이라고 인정이 되겠습니까? 이것을 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가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린 정상적인 사람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비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세상이 다른 것은 바로 이점입니다. 교회는 눈이 둘 달린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눈이 하나인 사람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비정상입니다. 우리는 눈이 하나인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극히 정상적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의 모습인 것을 인정하고 '지금의 내 모습은 비정상입니다. 나도 주님의 모습으로 살고 싶습니다'라고 외치면서 모여드는 것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교회란 눈이 두 개가 비정상인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눈 하나를 빼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눈 하나를 빼서 정상적인 사람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눈 하나인 사람을 바라보면서 그 모습이 정상적인 모습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인 것을 알고 자신의 비정상을 인정한다면 너희도 눈 하나인 사람으로 취급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도, 정상적인 인간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노력과 몸부림을 다해도 비정상적인 인간이고 죄인이며 정상적이고 의인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밖에는 없다하면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설교를 듣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인간이 달라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인간이 달라지기 위해서 교회를 다닌다면 그 역시 처음부터 교회를 잘못 생각하고 잘못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은 내가 달라져서 돌리는 것이 아니고 나같이 비정상적이고 악한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피흘리셨다는 것을 증거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항상 솔직해질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달라지려고 노력하게 될 때 결국 나타나는 것은 위선과 형식과 흉내내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이 달라지기를 원하는 것은 자기 사랑입니다. 자신이 달라짐으로서 만인으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고 싶어하는 자기 사랑의 욕망입니다. 자신이 변화되어짐으로서 자신의 믿음에 만족하고,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지고자 하는 열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꽃은 죄인이라는 땅에서만 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과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긍휼을 의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깊고 큰가를 알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셔야 합니다. 우리의 죄의 심각성과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의 실체를 발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긍휼이 상대적으로 더욱 더 강조되어지고 그리스도의 피가 더욱 더 높임을 받게 하기 위해서 죄인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교회의 역할은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드러내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십자가의 피의 공로의 위대성과 은혜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모일 때 우리는 우리의 일, 교회의 일을 앞장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앞장세우게 됩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일은 교회의 성장과 하등의 연관이 없습니다. 주님은 단지 죄인 아닌 자를 죄인 만들어 가기 위해서 일하실 뿐입니다. 피의 공로를 알게 하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그리스도의 피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을 믿는 것 대신 자기의 일을 자기가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단지 예수라고 하는 이름만 빌려올 뿐입니다. 예수라고 하는 이름을 앞세워서 온통 자기 일로 북적대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에 의미와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내 교회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있으니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집단이고 하나님의 적으로 등장한 집단일 뿐입니다.

 

 

 

 

50년 100년된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예배당의 예술성을 자랑하는 이런 모든 것이 그리스도보다는 내 교회에 가치를 두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까? 교회에 역사와 전통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교회는 십자가에 가치를 두고 십자가만 자랑하면 됩니다. 교회의 가치는 십자가를 통해서 증명되는 것이지 예배당의 예술성이나 50년 100년된 인간의 역사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인간의 가치평가이고 자기 사랑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의 할 일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목사의 할 일은 누가 그리스도의 피를 무시하는지 지키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가치 두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없습니다. 나도 내 교회도 그리스도의 피앞에서는 무가치한 것이고 썩어질 것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로 하여금 피흘리게 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하십니까? 신자는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일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제사드리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제사드리는 것이나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주님의 일이 되는 것은 주님의 일에 있어서 가장 큰 방해물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사단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를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부추깁니다. 자기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사랑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나를 미워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죽이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이것이 얼마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애초에 만드신 정상적인 인간은 이웃을 내 몸같이 여기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에 의해서 이웃보다는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그후로부터는 나 때문에 이웃이 피해를 입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평생토록 남에게 해로운 일 안하고 살았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숨을 쉬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이미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해야만이 피해가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안해서 이웃에게 피해가 되는 것도 있습니다. 자기 사랑으로 뭉쳐져 있고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거부함으로 상대적으로 피해를 입는 이웃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웃이 어려울 때 그들을 도울 자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거부함으로 어려운 자들이 더욱 고통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웃에게 사기 치고 고의적으로 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이웃에게 해를 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사랑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의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 욕망을 앞세움으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피해를 입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항상 마음에 담아두고 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칼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자기 입장을 내세우고 자기 자존심을 세우고 자기 고집을 위해서 수시로 상대방을 칼로 찌르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내 감정과 기분을 앞세움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피해를 주면 그 즉시 칼을 내세워서 방어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서로 웃고 만나고 악수하지만 언제 적이 될지 알 수 없는 인간 관계입니다. 서로 찌르고 찔림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평생을 가슴에 칼을 품고 살았는데 그 칼에 의해서 찔린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29장을 보면 7월 한 달은 제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1-6절은 나팔절에 대한 규례이고, 7-11절은 대속죄일 규례, 12-38절까지는 초막절에 대한 규례로 나눠져 있습니다. 그런데 각각 절기는 다르지만 그 공통점은 속죄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초막절에 대한 규례는 출애굽기 23장이나 레위기 23장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절기이지만 출애굽기나 레위기에서는 속죄제를 드리라는 말이 없습니다. 이것을 볼 때 출애굽기에서의 추수의 의미는 장래 약속의 땅에서 곡식을 먹는 것에 두고 있지만 민수기에서는 곡식을 추수하는 의미는 사라지고 속죄의 의미로 바뀌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땅에서 곡식을 추수해서 먹는다고 해서 죄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긍휼 하심과 용서에 의해서 사랑이 공급되고 생명이 공급된다는 의미가 새롭게 실려있는 것이 민수기의 초막절인 것입니다.

 

 

 

 

결국 7월의 제사는 속죄가 중심입니다. 속죄란 7절의 말과 같이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7월의 제사의 모든 중심을 속죄에 두고 계시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자를 원하십니다. 자기의 죄를 알고 인간의 악함을 아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쓸데없는 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회개하는 것임을 안다면 자신이 학력이 없고 돈이 없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낙심하고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학력이나 돈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자로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죽어야 한다' 이것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7월의 속죄입니다.

 

 

 

 

또 한가지 7월 제사의 공통은 속죄와 함께 노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동은 자신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노동을 쉬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의 노동에는 인간의 건강, 지식, 경험 등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쉬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도 그것은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을 제대로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이 쓸모 없다 하신 것을 가지고 자랑하거나 경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건강도 지식도 경험도 다 하나님의 일에는 쓸모 없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신자들이 그러한 것을 따지고 있다면 결국 자기 힘으로 노동을 해서 하나님이 일을 이루어보겠다는 심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신의 건강이나 지식을 내세워서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분명히 건강으로 일한다면 병들고 힘이 없고 나이 드신 분들은 아무 쓸모 없는 존재들입니다. 돈으로 일을 한다면 가난한 분들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지식으로 일한다면 많이 배운 사람들이 천당 가고 못배운 사람들은 지옥가야 하는 것입니까? 설사 이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교회에는 건강하고 지식이 있고 돈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버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지 못하고 자기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결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속죄하는 인간은 자기를 죽이는 자입니다. 노동을 쉬면서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쓰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신자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신자입니다. 자기에게는 쓸모 있는 게 전혀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자기 자랑이 나오지 않고 '하나님이 홀로 다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힘을 앞세울 때 그 순간 하나님의 일이 방해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모아갑니다. 자기 사랑이 부인되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석교회를 통해서 사랑을 얻고 싶어하시고 영광을 얻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자기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할 사랑을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도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하셨을 뿐입니다. 사랑이 보여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봉사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속에 칼을 품고 사는 인간입니다. 항상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인간입니다. 그런 나에게서 주님의 모습이 보여졌다면 그것은 나의 힘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곧 자기 사랑을 포기한 증거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모일 때 교회가 평안하고 가정이 행복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7월의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참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자기를 죽이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모이며 이웃과 이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어지는 이스라엘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사랑을 포기하고 자기를 죽이는 속죄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죽이지 못한데서 불행이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일보다는 자기 일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항상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해도 자기 사랑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를 죽이지 못한 채 하게 되면 결국 남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게 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아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먼저 나를 죽이는 제사를 드리게 하시는 하나님이 생각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피흘려 죽는 제물과 함께 여러분 자신이 죽어짐으로서 새로운 생명을 간직한 자로 새롭게 태어나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신자되기를 바랍니다.

 

 

 

 

 

42강 민 30:1-16 책임자 97.12.14


교회는 '그리스도도 사랑하는 무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만 사랑하는 무리'들입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채 그리스도의 피만 바라보고 나오는 자들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도 사랑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외에도 다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을 눈감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책임지심으로 흘리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죄를 책임지심으로 내가 살았고 생명이 유지됨을 아는 신자라면, 그 사람은 필연코 자신의 생명 자체인 그리스도의 피만 높이고 피만 전하고자 힘쓸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만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피만 높이고 그리스도의 피만 전하는 무리들입니다.'라고 말할 때 이 말 앞에서는 소위 교단이라는 것이 무의미하며 어떤 단체나 소속이라는 것이 모두 무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단을 따지고 소속을 따지고 단체를 따지면서 자기편을 가리고 찾고 있습니다. 이사를 가서 교회를 정할 때에도 '내가 전에 다니던 교회가 이런 교단이었는데 이 교회는 어느 교파입니까?'라고 하면서 교단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가 그리스도의 피만 높이는 설교인지, 교회가 오직 그리스도만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피만 높이고자 모이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교단이 어디고, 분위기가 어떻고 하면서 자신의 취미생활을 잘 도와주고 재미있게 만들어줄 인간 단체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은 동일하니까 그것은 제쳐두고 다른 기준, 즉 자기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요소가 있는지 없는지를 기준으로 해서 교회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예수만 높이고 예수만 나타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예수가 아니라 교회를 나타내고 교회를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더 좋습니다. 우리 교회로 오세요'라고 하면서 좀 더 많은 손님들을 자신의 교회로 끌어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피에는 관심이 멀어진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피를 전하지 않으려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교회 성장에 방해가 되는 십자가의 길은 살살 피해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의 위장에 불과하고, 교회는 자기 교회를 높이고 교단을 높이면서 교회와 교단을 전하는데 모든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교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전하는 선교단체가 아닙니다. 단지 겉은 그리스도의 피로 위장을 한 채 속은 자기 단체의 이념과 사상을 앞세우고 자기들의 목적을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는 단지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고 활동을 위한 위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모이는 목적을 전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창조과학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단체의 이름을 보면 이들이 무엇을 목적하고 모였는지 능히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애당초부터 그리스도의 피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과학을 가지고 창조를 인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과학을 통해서 창조를 증명하고 있으니까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과학으로 전도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관심은 누가 그리스도의 피를 믿느냐가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느냐에 있습니다. 즉 창조과학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충족성과 만족성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서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만족시키고 충족시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만으로는 부족해합니다. 뭔가 다른 참고서를 자꾸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성경을 믿기 위해서 다른 참고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조과학회는 그 참고서로서 과학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증거를 찾아내어서 그것에다가 하나님의 창조의 흔적으로 가치를 주고 더 점수를 주는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고 있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씀보다는 자신들이 찾아낸 과학적인 증거를 더 신뢰하고 더 높이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충족되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학적 증거를 통해서 충족되고 만족된다고 말합니다. 과학을 성경을 돕는 또 하나의 계시로 보는 것입니다.

 

 

 

 

창조과학회의 한 예를 말씀드렸지만 사실 모든 교회나 선교단체가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소속해 있는 단체를 보고 모이고, 내 교회를 바라보고 모이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피만을 바라보고 모이는 사람은 참으로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무엇을 바라보시고 모이셨습니까? 여러분의 눈에 그리스도의 피만 보여지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귀하게 자리하기 바랍니다. 다른 것은 버려라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십자가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전 2:2)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말고는 배우지도 않고 자기 머리속에서 다 지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십자가외에는 가치를 두지 않겠다는 의미의 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십자가의 피입니다. 골 1:21,22을 보면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책임져주신 피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책임져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안에서만 의인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우리 스스로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잘난체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선교단체는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죄와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을 해도 죄인입니다. 선교하는 죄인이고, 구제하는 죄인이고, 기도하는 죄인이고, 전도하는 죄인입니다. 자신이 기도하고 전도하고 구제하고 성경 보는 순간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는 착각을 하지 마십시오. 기도하건 하지 않건 성경을 보건 보지 않건 여전히 죄인입니다. 탐욕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인간이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 죄를 주님이 책임지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덕분으로 생명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 덕분에 일어난 일인데 그런데 우리가 노력하고 열심을 내자구요?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기도하자구요? 열심히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피를 보답하는 것이라구요?

 

 

 

 

그리스도의 피가 인간의 열심과 노력으로 보상이 될 만큼 하찮은 것이었습니까? 인간의 열심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보답해 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의 피의 가치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열심을 내시려면 자기를 죽이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열심을 내어서 그리스도의 피에 보답해 보려고 하는, 그래서 조금이나마 떳떳해져 보려고 하는 자신을 죽이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자신을 죽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결국 나의 죄를 책임져주신 그리스도를 다시금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이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죽은 존재이다'고 고백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입술로만 고백하는 일에 열심을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의 의미를 모두 여기에 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열심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이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내는 일에 쓰여져야 합니다. 가정도 부부관계도 직장도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내고 배우는 일에 쓰여지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 숨쉬고 있는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서원에 관한 규례입니다. 2절에 보면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즉 여호와께 서원한 것은 모두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뒤에 보면 서원을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3-5절을 보면 여자가 어려서 아비의 집에서 거할 때에 그 여자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을 때 아비가 그것을 알고도 아무 말이 없으면 서원을 행하되 만약 아비가 허락지 않으면 서원을 이루지 못해도 여호와께서 사하신다는 것입니다. 6-8절에는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 서원한 것을 이행하지 못하고 결혼했을 경우 비록 아버지가 서원을 허락했다고 하더라도 그 여자의 남편이 된 사람이 그 서원을 듣고도 가만히 있으면 서원을 행하여야 하지만 남편이 허락지 않으면 서원은 무효가 되고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사하신다고 합니다.

 

 

 

 

9-12절은 부녀들, 즉 결혼한 사람들의 서원에 대한 규례인데 과부나 이혼한 부녀들의 규례입니다. 남편이 죽거나 이혼한 부녀들은 자신들의 서원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지만, 남편이 있는 부녀들이 서원을 했을 때 남편이 아무 말이 없으면 선원을 행하여야 하지만 허락지 않으면 서원은 무효가 된 것이고 여호와께서는 그 부녀를 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서원의 규례를 보면 모두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규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의 서원을 남자가 책임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처녀일 때는 아버지가 책임집니다. 즉 아버지의 권위와 책임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하면 아버지가 책임자가 아니라 남편이 책임자가 됩니다. 즉 여자는 남자의 권위와 책임 아래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여자에 대한 무시로 보면 안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나타내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도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말씀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서원이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여자와 남자의 역할에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여자는 언제나 남자의 책임 아래 있다는 이 사실을 통해서 구원을 배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교회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교회가 어떤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고는 할 수 있지만 사실 여러분의 가정 직장 등 모든 삶에서 구원은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구약에서도 보여주고 계십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관계와 역할을 통해서 구원을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여자는 옛날 에덴동산에서 맨 처음 뱀에게 유혹 받고 선악과를 따먹은 역할을 맡고, 남자는 그러한 여자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책임짐으로 용서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자가 서원한 것을 남자가 허락지 않을 때 이행하지 않아도 여호와가 사하신다는 것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책임이 아래 있기 때문에 남자가 책임질 때 하나님은 그 죄를 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통해서 구원을 배우게 하시는데, 여자는 죄짓는 역할을 하고 남자는 옳고 그름을 바로 해서 여자를 책임지고 잘 간수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교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도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하나의 드라마입니다. 연출자의 지시에 의해서 움직여지면서 연출자가 의도한 바를 드러내기 위해서 힘쓰는 드라마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감독이고 연출자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목적하신 것을 드러내고 보여주라고 우리를 배우로 쓰시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나 가정이라는 것도 모두 이러한 의미 속에 있습니다.

 

 

 

 

여자는 에덴동산에서 이렇게 타락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남자는 타락해서 지옥가야 함에도 불가하고 남자가 모든 책임을 지고 대신 여자를 살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타락자이고, 남자는 책임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책임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8절에 "그러나 그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고 경솔히 입술에서 발한 서약이 무효가 될 것이니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사하시리라"고 합니다. 무효가 된다고 합니다. 또 15절에 보면 "그러나 그 남편이 들은 지 얼마 후에 그것을 무효케 하면 그가 아내의 죄를 담당할 것이니라" 남자가 여자의 죄를 담당하고 대신 여자의 죄는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책임진다는 보장만 있다면 여자가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해도 무효로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단지 남편이 하나님께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벌을 받으면 여자 쪽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무효로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남편 역할을 누가 하셨습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신부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무효화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책임져주는 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 죄를 무효화하신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죄가 있다고 해도 우리의 책임자가 있기 때문에 모든 죄가 무효화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가정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또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라고 가정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엡 5:23-25절을 보면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부부입니다. 남편은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아내는 교회의 자리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아내는 교회의 자리에서 남편에게 복종함으로서 나는 타락한 자였지만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책임지심으로 죄가 무효화되었음을 배우는 것이고, 남편은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죄를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이고 어려운 것인가를 깨달으면서 주님이 내 죄를 책임져 주신 것에 대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를 말하고, 주님이 내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주님께는 고통이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정을 통해서 부부를 통해서 배워 가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주님께 복종하고 있지 못합니다. 타락한 자이면서도 언제나 나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고 내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이 모습이 아내를 통해서 그대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주께 복종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지만 그럴 아내가 없습니다. 언제나 자기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말고 바로 그것이 주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주께 복종하지 못하고 있는 나의 모습으로 받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해야 할 남편의 역할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지 못합니다. 남편도 아내가 잘못을 했을 때 지적하고 책망하기에 바쁘지 아내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책임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배우는 것이고 십자가의 고통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이고 부부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란 단지 잘먹고 잘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내 죄를 담당하고 책임져서 나에게는 무효가 선언된 구원을 배우라고 하나님이 남녀를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처녀 총각들이 서로 짝짓고 만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내 마음에 드는 여자니까, 남자니까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것으로 그쳐버리면 안됩니다. 결혼 전부터 무엇을 위한 만남이고 결혼인가를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책임자와 죄인의 역할로서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보여주는 한편의 드라마를 위해서 만나게 되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를 그냥 무효화하신 것이 아닙니다. 책임자가 있기 때문에 무효화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자는 우리 죄를 담당하느라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죄를 담당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내 남편이 누구입니까? 나는 평생 그분을 놓치지 않고 그분께만 복종하고 섬기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이고, 이것이 구원받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나의 과거를 책임지시고 피흘리신 그분의 피를 바라보고 있다면 그 사람의 눈에는 그리스도의 피외에 다른 것은 전혀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순간 이것을 믿으신다면 오늘부터 인생을 새로 시작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과거를 담당하시고 책임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무효화 하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잊지 말고 보여주라고 부부로 살게 하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에는 다른 목적이 있으면 안됩니다. 오직 우리의 책임자로서 피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의 증인으로 만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앞에 다른 목적을 두지 마십시오. 오로지 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산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내 전부를 그리스도께 바치고자 하는 목적으로 모이시기 바랍니다.

 

 

 

 


43강 민 31:13-20 책망 97.12.21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가운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문제 때문에 애통해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의 문제 때문에 애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 의가 없음에 대해서 애통해하고, 믿는 자가 없음에 대해서 애통해하고 눈물 흘릴 줄 아는 심령을 가지는 자를 의미합니다. 때문에 세상이 의가 없음에 대해서 애통해 할 수 있는 신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신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순간 여러분은 무엇에 대해서 애통해하고, 무엇에 대해서 주려하고 목말라하고 있습니까?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제가 설교할 때마다 느끼는 갈등은 과연 이 자리에 의에 대해서 목말라하고 주려하는 분들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 의가 없는 것에 대해서 애통해하는 심령으로 교회로 모인 분들이 얼마나 되느냐는 갈등을 많이 느낍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의를 전함으로서 의에 대해서 주려하고 목말라하는 심령이 배부름을 얻게 하는데 도움이 되어주는 것인데 의에 대해서 목말라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의를 전한다고 해도 그의 의는 여러분들의 귓가에서 스쳐 사라져버리는 공허한 말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닌 말을 전한다는 것이나 내 관심사가 아닌 말을 40분씩이나 앉아서 들어야 한다는 것처럼 서로에게 고통 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십번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설교하는 목사가 생각을 달리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목사의 생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여러분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받는 저와 여러분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시간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하고 싶은 것은 대충 교회 다니고 대충 믿어서 천국가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은 버리시고, 오직 의에 대해서 주려하고 의 때문에 애통해하는 그런 심령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오시라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찾아 나오는 신자의 마음의 자세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는 것은 신자가 신앙생활 하는 것은 '전쟁'이라는 긴박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은 전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아마 요즘같이 경제가 흔들리고 불안하고 모든 것이 어려운 때에, 살아가는 것이 전쟁이다는 것은 절실하게 느끼실지 몰라도 신앙생활이 전쟁이라는 느낌은 별로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싸움이 없는 신앙생활이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싸움이 없다면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군사로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고, 자신의 적과 한통속이 되어서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전리품이란 싸움의 결과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신자들은 싸움은 없이 단지 전리품에만 눈독을 들이고 손을 벌리고 하나님을 찾는 형편입니다.

 

 

 

 

신자가 해야할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우리의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쟁은 모두 자기를 위한 전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쟁이란 하나님을 위한 전쟁인 것입니다. 그 전쟁에 군사로 나가야 할 사람이 신자들입니다. 3절에 보면 모세가 백성에게 사람을 택하여 싸움에 나갈 준비를 시키라고 합니다. 택함 받은 자의 역할은 싸움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싸워서 우리를 천국보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전쟁을 위한 군사로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단지 때가 되면 제사나 드리고 절기나 지키다가 천국 가도록 하기 위해서 선택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들을 교회로 부르신 것도 주일 되면 예배나 드리고 적당히 봉사나 하다가 천국보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을 위한 군사로서 부르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의 일은 싸우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적은 미디안입니다. 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지 미디안이라는 나라가 원수라는 것이 아닙니다. 3절에도 '여호와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되'라고 말씀합니다. 미디안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도록 유혹하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 징계를 받게 했던 나라입니다(25:1-9). 즉 미디안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게끔 만들었다는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원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중점을 두어야 할 부분은 미디안이 원수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의 길로 나가게끔 하는 그 무엇이 원수로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단지 미디안이란 나라 자체가 이스라엘의 원수라면 오늘날 새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교회된 신자들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어떤 나라가 우리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까?

 

 

 

 

이 말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처음에 하나님이 싸우셨던 대적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애굽이란 나라 자체가 원수가 되어서 싸운 것이 아니라 바로의 사고방식 자체가 원수가 된 것입니다. 바로는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이스라엘을 내어 보내기를 청했을 때 '여호와가 누구관데'라고 하면서 거절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에 10재앙을 내리시면서 애굽과 싸우셨던 것입니다. 즉 여호와를 모르는 것이 하나님의 원수이고 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디안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 갚음을 그들이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은 어떤 국가나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되는 사고방식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된 사고방식으로 존재할 때 그자는 이미 하나님의 원수된 것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점을 우리가 생각할 때 바로라는 인물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고, 미디안이라는 족속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반대하고 무시하고 우리를 죄악으로 끌어가는 사고방식이라고 할 때 오늘날 우리의 원수는 하나님을 안믿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신자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를 매우 심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가 여호와를 몰랐다는 것은 여호와란 이름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애굽은 요셉 때문에 여호와란 신의 이름을 충분히 듣고 살아온 나라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여호와가 누군관대'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것은 애굽이 지금처럼 번성된 것이 요셉이 믿는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무시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애굽이 강성한 것은 나의 능력과 지도력 때문이지 여호와란 신의 힘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는 얼마든지 여호와를 무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들이 여호와를 여호와로 인정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참으로 비관적인 모습만 보여지는 것이 오늘의 신자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독단적인 생각이고 판단이라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여호와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을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과연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안심하고 평안을 누리는 삶이 과연 우리들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은 헛된 것이고 썩어질 것이니까 세상것 보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라고 말씀하지만 과연 우리가 세상 보지 않고 하늘나라만 바라보고 살아갑니까? 우리 마음속에는 '여호와가 누군관대'라고 외치는 바로의 목소리가 숨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반대된 쪽으로 끌어가고 하나님보다도 세상을 더 섬기도록 하는 미디안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원수된 것이 내속에 자리하고 있고, 우리가 그 생각에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의 원수갚음은 바로 나를 향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치실 때 '너희가 왜 나를 모르느냐'는 것 때문에 애굽을 치신 것 같이 지금도 그 일을 이 땅에서 반복시키기 위해서 여러분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군사로서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옛날 애굽을 치셨던 그 심정을 우리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 전쟁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 우리는 '왜 세상이 하나님을 모르는가?'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하고, 세상이 하나님을 아는 의가 없음에 대해서 애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정작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부터 하나님의 심정은 외면해 버리고 모두가 자기 심정을 앞세우고 자기 일을 앞세우다 보니까 의에 주려하고 목말라하기는커녕 세상에 대해서 목말라하고 살아가는 모습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군사가 군사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 속에 '여호와가 누군관대'라는 바로의 사상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여호와가 누군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모른 자는 심판 받고 저주받을 수밖에 없음을 전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군사로서 하나님을 위해서 내 몸을 드려야 할 군사로서의 삶을 내가 방해하고 있습니다. 내 속에 바로의 목소리가 살아있어서 군사로서의 삶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책망을 받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과 전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15절에 보면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자들을 다 살려두었느냐"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탈취한 사람과 짐승을 가지고 당당하게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책망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까? 하나님의 책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우리가 신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바른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많은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책망을 말할 때 기도하지 않은 것, 헌금 안한 것, 주일에 예배 빠진 것, 단지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책망하시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책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전혀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을 잘 알기 위해서 오늘 이스라엘 군사들이 모세와 엘르아살에게 책망을 듣는 것을 자세히 알고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르아살이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것은 여자들을 살려둔 것 때문입니다. 여자를 살려둔 것을 책망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25장에 있었던 사건을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25장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여인과 음행 함으로서 염병에 걸리는 징계를 받습니다. 그때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미디안 여인과 동침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죽임으로서 염병이 그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미디안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의 행동을 가리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했다고 하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즉 미디안을 치라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비느하스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가운데 살아갈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치고 나서 여자를 살리고 데리고 옵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들로 하여금 음행 하게 하고 우상숭배하게 해서 염병에 걸려서 24,000명이 죽었던 하나님의 징계를 잊어버린 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미디안 사람을 쳐서 죽이라는 것은 사랑이신 하나님으로서는 이해가 안될 명령이고, 오히려 다 치지 않고 남겨서 데려온 것이 더 인간적이고 사랑이 있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죽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은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미디안인을 다 죽이기를 원하십니까? 이 하나님 마음을 알아야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란 하나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서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의 생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들에게 성경을 써라 했다면 모세와 엘르아살이 여자를 살려온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부분을 삭제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만 아니라 많은 부분을 삭제해 버리고 좀더 아름다운 내용으로 가득찬 성경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소설이 아닙니다. 우리의 상식과 바램을 무너뜨려 버리는 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 여호와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그들과 싸우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두 쳐서 진멸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자들을 남겼습니다. 결국 그들은 미디안을 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이로운 것, 좋은 것은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보다는 자기의 마음을 앞세워서 행동한 것입니다.

 

 

 

 

미디안을 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미디안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이스라엘에게는 자신들도 죽어야 할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미디안 때문에 음행했다고 해서 이스라엘은 잘못이 없는 것입니까? 미디안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살아있고 오히려 미디안을 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그들이 어떻게 자기들 멋대로 여자를 살려서 데려올 수가 있습니까? 결국 그들은 미디안을 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미디안을 죽이면서 피를 흘리고 죽어 가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역시 죽어야 할 자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책망을 들어야 한 이유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심판 받아 죽어야 할 존재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를 보여주어야 할 신자들이 그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많은 신자들은 여자를 살려서 데리고 온 이스라엘처럼 살아갑니다. 자기편에서는 잘한 일이고 칭찬들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하나님 편에서는 책망할 것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하며 교만해져 살아가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시고 살려주신 것은 이 세상에 죽음과 부활을 보여주라는 것 때문입니다. 심판 속에서 은혜로 살아난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기 위해서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 세상에 죽음과 부활을 날마다 재현하는 것입니다. 즉 신자를 통해서 심판과 부활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자기들의 일에 치우쳐있습니다. 자기를 위한 것이고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싸우고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 쳐서 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기에 좋고 이익이 되는 것은 남기고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자화자찬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자를 향해서 책망하실 것입니다.

 

 

 

 

17,18절을 보면 "그러므로 아이들 중에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안 여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다 너희를 위하여 살려둘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남자를 죽이라는 것은 남자를 하나님을 대적하는 군사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라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군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를 아는 여자도 죽이라는 것은 여자가 남자를 알았다는 것은 남자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남김없이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세상이 나쁘다는 것 잘압니다. 세상이 망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도 돈없으면 못살지 않습니까?'라는 식으로 자신에게 필요하게 여겨지고 이익이 되는 것들은 손에 쥐고 있으려고 하고 놓지 않으려고 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심판과 부활을 보여주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심판 받을 것에는 눈돌리지 않고 미련 두지 않고, '심판 받아 죽어야 할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 때문에 나는 은혜만 있으면 족하다'고 하면서 심판과 부활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을 심판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군사로 살아가는 전쟁입니다.

 

 

 

 

심판 속에서 무엇만이 남는가를 생각하십시오. 22,23절의 말씀은 누가 심판을 지날 수 있는 깨끗한 인간인가를 말합니다. 불속에서 견디는 것은 물을 지남으로서 깨끗케 되었을 때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심판 받을 자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한 자가 되었음을 알 때 불을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은혜로 살아가는 자이지 결코 땅의 것으로 사는 자가 아님을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그리고 하나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로 살아갑시다. 나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원수된 것만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44강 민 32:1-15 싸움회피 97.12.28


신자가 바른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기편의 위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습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철칙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한 하나님으로 알고 천국을 생각하기 때문에 천국이란 인간에게 행복을 제공해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마련하신 나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천국에서 고생하지 않고 잘먹고 잘사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천국이 아니라 극락입니다. 극락은 인간을 위한 나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아들의 나라로서 아들에게 복종해야 할 나라인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편의 위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 아니라 자기의 편의를 앞세울 때 그것을 지적하며 책망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따라서 제아무리 하나님을 언급하고, 그리스도를 말하고, 자기들이 정통이며 진리라고 주장한다 해도 믿음의 의미를 자기 편의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는 답을 내려야 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사리사욕이나 개인 축복, 자기 교회의 부흥을 꾀하는 무리를 부수기 위해서 이 땅에 왔습니다. 인간 개인의 발전 성장과 하나님을 결부시키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폭로하고 무너뜨리기 위해서 이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셔서 인간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낮은 자리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도 이같은 길을 가야 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담을 인류의 대표자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아담의 죄로 인해서 우리 역시 죄인되었고 사망에 처하게 되었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오셔서 부활하심으로 죄인된 우리가 살았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대표성에 대해서 전혀 반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대표자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부활이 곧 우리의 부활입니다.' 부활절이면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이 말은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줍니다. 부활이라는 달콤한 말이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자기 좋은 일인데 누가 부활을 싫어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대표성에서 사람들이 망각해 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낮아지심과 고난입니다. 주님이 낮은 자리에 오시고 낮은 자로 사셨다면 신자도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희생하시고 십자가를 지셨다면 우리 역시 자기 희생,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싫어합니다. 자신에게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대표성을 말하면서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인정하려는 나쁜 습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자기 기준을 가지고 교회를 바라보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진리가 아닌 것으로 판단해 버리게 됩니다. 채플린 흉내내기에서 진짜 채플린이 참석해서 3등을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흉내내기를 심사했던 심사위원들에게 각자 자기들만의 채플린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진짜가 진짜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예수님 흉내내기 대회를 벌이고 거기에 진짜 그리스도가 참석한다면 과연 1등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꼴등을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심사하는 인간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의 그리스도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시각이 진짜의 모습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진짜가 등장한다고 해도 진짜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사위원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가짜가 확실히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가장 지혜로운 것은 자신의 기준으로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어떤 것이 진짜 신자의 모습이고, 어떤 것이 잘못된 신자의 모습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판단에 따라서 우린 진짜 신자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진리는 성경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변호하는 것도 성경이고 천국을 보여주는 것도 성경입니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 참과 거짓을 분별할 뿐입니다. 목사의 말을 듣고 참과 거짓을 분별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목사는 단지 여러분에게 성경을 설명할 뿐입니다. 판단은 여러분 몫입니다. 그러나 결국 분별은 성령이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성령이 함께 하신다면 분명 성경에 대해서 들으실 때 여러분의 눈에 거짓된 것과 참된 것이 분명히 보여질 것입니다. 마지막때, 거짓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영을 분별하는 신자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나는 옳은데 너는 틀렸다는 자세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옳은 자의 입장에서 틀린 자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참된 진리란 나는 옳은데 너희는 다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틀렸고 더럽다면 나도 틀린 자이고 더러운 자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항상 옳은 것만을 말하지 않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옳은 자가 있고 틀린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너희는 모두 틀렸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그른 것을 함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옳은 것을 분별하게 되었고 옳은 것을 말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영이 주어졌기 때문이지 내가 옳은 사람이어서 옳은 것을 주장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결국 내가 옳은 것을 말하고 주장한다고 해서 내가 옳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말하기를 하나님을 자기편의 위주로 생각하면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주장한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자기 편의라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완전히 떠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의 자기편의 위주로 나아가려는 본성으로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오신 성령에 의해서 자기편의 위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잘못임을 알게 되었을 뿐이고, 성령에 의해서 자기 편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고자 힘쓰게 된 것뿐입니다. 그런데 바른 성경을 말한다고 해서 나 자신이 바른 사람되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생각하면 '내가 비록 바른 말을 한다고 해도 나는 더러운 자다'는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 요단강까지 와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으로 인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당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는 심히 많은 가축의 떼가 있었더라고 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가축을 키우는 것이 그들의 생계 방법이었습니다. 때문에 가축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부족이 없고 풍부하다는 것이고 가축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자신의 생애를 풍요롭게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관심을 가축에 두고 사는 르우벤과 갓 자손이 요단 동편에 있는 야셀 땅과 길르앗을 땅을 바라보니 그 땅들이 가축을 키우기에 아주 적당한 땅이었습니다. 야셀 땅과 길르앗 땅에서만 살면 가축은 더 번성을 하고 그렇게 되면 자기들의 삶은 더 풍부해 질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 가축이었습니다. 가축이 번성하고 잘되면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단 동편에 가축을 키우기에 적당한 땅이 보이자 그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자기들에게 주시는 땅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인도하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하나님 우리를 이렇게 좋은 땅으로 인도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우리는 이 땅에서 살고 싶습니다. 요단을 건너가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가축에 적당한 곳이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또 가로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요단을 건너가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가축을 기르기에 좋은 땅이 자기들의 눈앞에 보인 것이 더 큰 은혜였던 것입니다. 좋은 땅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이곳에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런 신앙이 자기편의 위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은혜를 생각하는 잘못된 신앙임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에게 은혜는 약속의 땅, 즉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생에서 풍요롭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과연 은혜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아파트 단지를 황금어장이라고 하면서 아파트 단지에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면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을 자기의 유익과 사리사욕에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거룩한 사업이고 빛과 소금이라고 외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번성을 노리고 행동하는 것이나 번성을 가지고 은혜라고 떠드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많은 분들은 교회가 번성되는 것이 어떻게 자기 사리사욕이며 잘못이냐고 따집니다. 교회의 번성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번성을 목적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홍수로 세상을 멸망하실 때 겨우 노아의 8식구만 구원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 아흔 아홉의 양보다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귀하게 여기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교회에 나오는 아흔 아홉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자'라는 경험이 있는 한사람을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운운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잘된 일을 가지고 옆에서 축하할 때 '뭘요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었습니다. 많은 교인들도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고, 또 전도를 할 때도 이런 식의 말로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복받읍시다' 이런 말로 이생에서의 번성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주실 줄로 믿습니다'는 믿음 아닌 것이 믿음으로 행세하고 있고 교회에서는 목사가 여기에 동조해서 믿음 아닌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실에 안주하도록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르우벤과 갓 자손 같은 사람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천국보다는 눈에 보이는 좋은 환경과 현실을 더 큰 은혜로 생각하며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으로 건너가기를 원하기보다는 좋은 현실을 더욱 원하는 우리들입니다. 천국의 은혜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조그만 것에 더 감동하고 더 감사하고 더 은혜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에게 르우벤과 갓 자손을 등장시켜서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앙입니까? 그것을 말하는 것이 6절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라고 책망합니다. '왜 싸우지 않으려고 하느냐?'가 모세의 책망입니다. 르우벤과 갓 자손은 싸워야 한다는 것에는 마음 두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가축을 기르기에 적당한 땅이 있는 것을 하나님의 복으로 여겼고 그 복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싸워야 한다고 합니다.

 

 

 

 

싸우는 것이 신앙입니다. 민수기의 시작은 싸움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군사로서 여호와의 전쟁에 동원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신자 역시 싸움에 동원된 사람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도 싸움은 필연코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과 싸워야 합니까? 바로 르우벤과 갓 자손 같은 사고방식과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백성을 낙심케 하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악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7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 갈 수 없게 하려느냐"는 말씀을 보면 모세는 그 두지파의 사고방식은 다른 지파를 낙심케 하는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정탐꾼의 얘기를 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말을 함으로서 다른 형제들을 낙심케 해서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주신 땅에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었던 사건을 말하면서 형제를 낙심케 하는 것에 대해서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낙심케 하는 사고방식과 싸워야 합니다. 르우벤 갓 자손과 같이 '이 땅이 좋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요단을 건너가지 않겠습니다'라는 현실에 안주하는 사고방식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싸워야 할 사람을 싸움이 싫어지게 만들고 현실로 만족하도록 만드는 사고방식이 신자의 싸움의 대상입니다. 결국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나를 해치고 미워하는 이웃이 아니라 바로 내속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은 싸움이라고 할 때 선뜻 하나님의 군사로서 싸움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싸운다는 것은 결국 현실에 안주하고나 하는 자신의 본성과의 대립을 말하는데 쉽게 이 싸움에 나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복을 받고 그 복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며 감사하면서 인생을 유지하고 연장하고 싶은 태만과 교만이 있는데 그것을 정면으로 거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자신의 환경이 성공과 번성으로 달리고 있고 별부족함이 없이 모든 일이 잘풀려가고 있는데 그냥 감사하고 예배에 안 빠지면서 교회에 다니면 되지 굳이 피곤하게 싸움이니 뭐니 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편안함이란 그속에 안주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좋은 것은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좋은 것, 편안한 것이 눈앞에 있는데도 그것을 거부하고 요단을 건너가서 싸움에 임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싸움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합니다.

 

 

 

 

르우벤과 갓 자손의 행동은 다른 지파들까지도 낙심케 만드는 것이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지런히 요단을 건너가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지파들에게 르우벤과 갓 자손의 행동은 참으로 낙심을 줄만한 것이었습니다. 가령 교회에서 열심히 천국을 바라보면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들은 현실을 자랑하고 현실에 만족하면서 싸움과 전혀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상처를 입고 낙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14,15절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열조를 계대하여 일어난 죄인의 종류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또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

 

 

 

 

지금 르우벤과 갓 자손의 경우를 열조를 계대하여 일어난 죄인의 종류라고 합니다. 형제를 낙심케 했던 죄를 이어서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들의 행동을 여호와를 떠난 것으로 책망합니다. 분명히 이들은 여호와를 떠나겠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요단을 건너가지 않고 동편의 땅에서 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여호와를 떠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군사로서 싸움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는 것 때문입니다. 이 두 지파의 경우가 여호와를 떠난 것이라면 지금 세상에서의 번성과 발전을 꾀하면서 이생의 복을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합니까? 모세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그들을 가리켜 '여호와를 떠난 자들'이라고 책망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은 싸움입니다. 싸움이 없다는 것은 현실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답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내속에 있는 세상의 유혹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날마다 자기와 싸우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번성하고 발전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이것으로 천국가지 못함을 압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천국갈 수 없는 죄인입니다. 나를 도와주소서' 이런 사람이 날마다 자기와 싸우는 사람인 것입니다. 형제는 이런 사람을 통해서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생의 것을 내세웠던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자신도 역시 자기와의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 교회입니다.

 

 

 

 

싸움은 자기를 부수고 무너뜨리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현실 때문에 이 싸움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날마다 자기를 쳐서 주께 복종시키십시오. 세상사람들은 자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포장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지만 신자는 반대로 자기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서지고 또 부서지십시오. 가루가 되어서 하나님이 나 자신을 하나님이 뜻하는 그릇으로 만드실 수 있도록 부서지십시오. 이 싸움을 죽을 때까지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신자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현실을 보면 현실에 주저앉아서 편안하게 신앙생활하고 싶은 생각만 들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가축 기르기에 좋은 땅이 아닙니다. 르우벤과 갓 자손은 약속의 땅을 가기 위해서 현실에 매이지 않는 싸움을 포기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가지 못하게 하는 나쁜 생각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이 나쁜 생각을 드러낼 때 이로 인해서 형제를 낙심케 하고 그들도 천국에 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르우벤, 갓과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세상의 축복으로 안주하고 싶은 본성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은 여호와를 떠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떠나게 하는 생각과 싸우기에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비록 힘들어도 싸움의 승리는 여러분에게 영원한 복을 안겨줄 것입니다.

 

 

 

 

 

45강 민 32:20-32 함께가라 98.1.4


교회의 본질은 ''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관계를 떠나서는 교회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자는 그 몸의 하나의 지체로서 서로 연합되어 존재한다는 것이 곧 교회입니다. 그러나 몸이라는 관계, 또는 지체라는 관계는 같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신자라는 것은 단지 인간 관계일 뿐입니다. 즉 세상에서 인간들이 서로 연합되어서 결성하는 단체나 모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신자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교회 =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관계성에 대한 것입니다.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희박하고 희박하다 못해 아예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로 모일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모입니까? 내가 만나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가 사랑해야 할 지체로 인식하고 모이고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이 점을 가슴 깊이 묻고 또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 개인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다면 교회에 모일 필요가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비록 교회로 모이지 않는다고 해도, 여러분 혼자 집에서 찬송 부르고 예배드리면서 지낸다고 하더라도 믿음이 있다면 구원받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홀로 집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 여러분이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누구에게 생명을 나눠주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면서 영생의 기쁨을 같이 공유하겠습니까? 여러분 가족입니까? 가족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가족이 아니고 친척이 아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단지 천국 가기 위해서라면 굳이 힘들게 교회까지 나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은 교회로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데 어떻게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는 생각도 가지지 마십시오. 믿음의 증거는 자기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지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 나오는 것이 믿음의 증거라면 한국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러분에게 교회 나올 필요가 없다는 것을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자기 개인만 생각하고 교회에 나오신다면 교회라는 본질이 전혀 살아 있지 않은 인간의 종교단체에 불과할 뿐임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인간의 종교단체에 불과하다면 굳이 교회로 모일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힘들게 교회로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나 각자 집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뭔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십자가의 은혜를 안다면 '나홀로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를 교회되지 못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원인은 '나홀로 신앙'입니다. '나만 잘되면 된다' '나만 교회 잘다니면 된다' '나만 신앙 있으면 된다' 이러한 생각들이 나홀로 신앙입니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관계가 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아무리 100명 200명이 모였다고 해도 각자 나홀로 신앙으로 모였다면 결국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자기 개인 하나로 그쳐버리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혼자 있어도 '' 하나이고, 같이 모여도 ''하나라면 굳이 같이 모일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 같이 신자는 자기 편의 위주로 살아가는 습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 편의 자기 중심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의 본질을 깨뜨리는 주범입니다. 르우벤과 갓지파가 자기 편의를 위해서 같은 형제인 10지파로부터 떨어지고자 하는 것이 형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과 편의만 생각하는 나홀로 신앙입니다. 신자는 이런 사고방식과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싸움을 위해서 신자는 서로 만나야 하고 만나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개인중심인가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홀로 살아가면 이러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자기 혼자 최고인줄 착각하게 되고 믿음에 선 줄로 여기게 됩니다. 자신의 문제점과 악한 모습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채 살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의 은혜는 단지 입술에만 존재할 뿐 마음에 자리하지는 못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또한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채 믿는척하는 것으로 그쳐버릴 위험이 많은 것입니다.

 

 

 

 

인간의 실패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발견하지 못한데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세상에서 성공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에 대해서 깨닫지 못한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 실패의 길을 걷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세상의 성공을 성공으로 보지 않고 모두 헛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 그것을 가지고 지혜라고 합니다. 그 지혜는 인간에 대해서 바르게 알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인간들 스스로는 능력이 있고 마음만 먹으면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큰소리치고 있지만 그렇게 힘있고 능력이 있고 똑똑한 인간이 왜 죽는 것입니까? 자기 몸 하나도 겨우 70년 80년 버티는 것이 전부이면서 능력 운운하면서 큰소리치는 것을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가소롭겠습니까?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죽어서 흙으로 사라져야 할 인간이 그리스도안에서 예수님의 기업과 영생을 누린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짜 인간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 인간은 모두 육에 불과하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육의 인간은 육만 생각합니다. 즉 자기 자신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잘되면 그것으로 최고의 만족이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만 여깁니다.

 

 

 

 

98년이 처음 시작하는 1월 1일에 팔공산 갓바위에 자기의 소망을 빌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을 빌었는지 물어보자 하나같이 '우리 가족이 건강하고 하는 일이 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갓바위에 자기의 소망을 가지고 나왔을 때 교회에서는 무엇을 하였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송구영신예배, 신년축하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무엇을 가지고 나왔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잘되는 것이 최고의 소망인 사람들, 이것이 육만 생각하는 육의 인간입니다. 갓바위를 찾아 나오든 하나님을 찾아 나오든 육의 인간이라는 것에는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임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는 나는 못났고 예수님만 최고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더욱 죄되게 드러낼 뿐입니다. 자기의 죄를 알 때 세상의 심판이 보이고, 하나님의 긍휼이 보이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아는 인간은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도 '나처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로 바라보게 됩니다. 똑같이 심판 받아야 할 인간인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구원받았음을 안다면 그 사람은 신앙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의 선후배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먼저 나왔든 뒤에 나왔든 그것이 우리를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로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감히 긍휼 앞에서 신앙의 높낮이나 선후배를 따지겠습니까?

 

 

 

 

인간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을 안다면 절대로 자신이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은 인간 되봐야 결국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 스스로 수준을 정하고 그 수준으로 도달하려고 애를 쓸 때 사람들은 자기보다 낮은 수준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무시하게 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더 나은 인간 되는 것에 목표를 두지 마십시오. 이것 역시 나홀로 신앙입니다. 나만 잘되고 나만 신앙 좋으면 된다는, 교회를 교회되지 못하게 하는 나쁜 생각입니다.

 

 

 

 

교회는 죄인인 내가 더욱 죄인되기 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보다 더 나은 인간 되려고 교회 나온다면 그 생각 때문에 자기보다 못한 자를 무시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교회가 깨어진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신자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상태를 죽을 때까지 유지해야 합니다. 재산이 많든 적든, 무식하든 유식하든 죄인의 상태는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차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되고 본질이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은 교회란 자기 개인의 신앙을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된 신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도와주고 함께 천국에 가기 위해서 서로 붙들어 주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개인의 유익과 편의를 위해서 형제를 외면하고 낙심케 하는 것은 교회를 깨뜨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항상 함께라는 인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여기에 대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르우벤과 갓 자손은 자기들의 목축을 위해서 요단을 건너가지 않고 동편에 머물겠다는 요청을 모세에게 하게 됩니다. 모세는 그들의 요청에 대해서 옛날 가나안 정탐꾼의 경우를 들면서 형제를 낙심케 하는 말이라고 책망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모세에게 말하기를 유아를 위해서 견고한 성읍을 지은 후에 형제와 함께 요단을 건너가서 그들과 함께 싸우고 형제들이 기업을 얻도록 도와준 후 돌아와서 요단 동편의 기업을 얻겠다고 합니다.

 

 

 

 

모세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형제와 함께 싸워서 형제가 기업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에게 맞는 땅이 있다고 해서 다른 형제는 기업을 얻든 말든 관심이 없이 자기가 찾은 땅에 주저앉아 버리는 것은 자기만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세는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장애가 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만약 르우벤과 갓 자손의 개인 편의주의에 의해서 다른 지파들이 낙심해 버린다면 비록 그들끼리 요단을 건너가서 가나안과 싸운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점령했다고 할지라도 땅을 분배하거나 다른 모든 문제에 있어서 르우벤과 갓 자손과 똑같이 개인만을 생각하고 개인의 이익을 주장하는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사람의 구별됨이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르우벤과 갓 자손을 요청을 결코 들어줄 수 없었고 함께 요단을 건너가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를 앞세우고 하나님의 긍휼을 말하면서 모이는 교회들이 각자 개인의 편의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편의 때문에 형제가 어떤 손해를 당하고 낙심을 겪게 되는지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은채 오직 자기 편의와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렇게 개인 중심으로 움직이는 우리들의 잘못에 대해서 책망을 들어야 할 것이고, 언제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관계성을 잃어버리지 않은채 교회로 모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함께 자라가고 함께 천국에 들어가야 할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잘했다고 해서 나 혼자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몸을 생각하지 않고 나 혼자만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다섯이 있다고 할 때 넷은 부모 속을 썩이고 망나니 같은 짓을 하며 다니는데 자식 하나가 성공했다고 할 때 과연 부모가 기뻐하겠습니까? 또 성공한 자식이 말썽부리는 다른 형제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면서 '나만 잘되면 제일이다'라고 살아갈 때 그 자식의 성공이 부모에게 기쁨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교회를 기뻐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들이 서로 지체로서 한몸으로 여기고 사랑하고 도와주면서 구원을 이루어갈 때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랑하기보다는 나를 사랑해 달라고 아우성들입니다. 위로해주기보다는 자기가 위로 받으려고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사랑 받고 위로 받기를 원하는 사람으로만 가득차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누어주고 공급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나누어지는 풍성한 모습의 교회가 아니라 모두 자기만 생각하는 메말라버린 모습만 보여줍니다. 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르우벤과 갓 자손같이 자기 편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요단을 건너서 형제를 위해서 함께 싸워주는 그 정신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여러분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옆을 돌아보고 형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도록 하고, 그것을 위해서 격려하고 때로는 책망을 하기도 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함께 가고자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형제가 구원을 이루어가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 일에 내가 도움이 되어주는 것, 이것이 신자이며 교회입니다. 모세가 두 지파에게 같이 가자는 것은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 천국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까?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주려고 하십시오. 여러분의 복의 근원의 자리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복을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복을 내보일 수 있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지체된 신자들의 조화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 혼자로서는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같이 어울리고 조화된 가운데 아름다움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이란 긍휼과 자비를 중심으로 모이는데 있습니다. 돈과 지식, 권력 등 세상적인 기준이 중심이 아니라 오직 긍휼과 자비가 중심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자신의 못남을 아무리 고백을 해도 무시가 없고 조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못난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그 모습이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것들을 마음놓고 고백하면서 자기의 죄인 됨을 외칠 수 있는 교회가 진실로 아름다운 교회이며 열린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없습니다. 있다면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난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순간 여러분에게 영생을 주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무엇을 하겠습니까? '나는 영생이 있는데 너는 왜 없나?'라고 하면서 누군가를 조롱하고 무시해야 합니까? '나는 기도도 많이 하고 예배도 안빠지고 헌금도 잘해 가지고 이렇게 영생을 얻었다'라고 하면서 영생 얻은 자신을 자랑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생이 주었다면 그순간부터 우리가 할 일은 나에게 주어진 영생, 즉 생명을 형제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다른 형제를 생명으로 이끌기 위해서 나에게 주어진 생명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신자로서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내가 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깨어지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다면 우리도 내가 깨어짐으로 생명이 흘러나오는 사람될 때 그것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내가 소유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나눠줌으로서 기뻐하는 살아있는 신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모세는 두 지파에서 요단 동편 땅이 좋고 그것을 가지기를 원한다면 먼저 형제가 함께 요단을 건너가서 싸우라고 합니다. 그후에 원하는 땅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내가 원하는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로 힘을 합하고 사랑을 나누며 은혜를 나누어야 할 때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여러분이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준비하시고 여러분을 기다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지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시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르우벤과 갓지파와 같은 사고방식은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천국에 도달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부모로서 자녀를 양육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주고 분배하면서 내 자식과 함께 천국에 가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세상의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부모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한 자녀가 되기만 원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망하고 심판 받는다고 말하면서 자식은 그 심판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부모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교회를 나오면서도 머리 속에는 나 개인으로 가득차있고, 뭔가 나누고 공급해주려고 하기보다는 내가 소유하는 것으로 기뻐하려고 하는 르우벤과 갓과 같은 사고방식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나홀로 신앙'으로 교회를 나오지 마십시오. 교회로 모일 때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까?'를 염두에 두고 모이십시오. '내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까?'에 여러분의 관심이 모아져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가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편의로 나갔다가 말씀을 통해서 회개하고 형제와 함께 하고, 또 다시 자기 편의로 나갔다가 회개하고, 이것이 교회로 모이면서 반복되어질 때 여러분은 조금씩 형제에게 뭔가 나누어주는 사람으로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46강 민 33:1-5 장자 98.1.11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조심해야 할 태도는 성경을 신을 연구하는 참고서로 보는 것입니다. 신학자란 하나님을 연구해서 그 결과를 발표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밥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신학 연구가 단지 밥 먹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고,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직업상 필요한 신으로 존재하게 될 위험성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에 절대 필요한 분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찾아야 하고, 겸손히 성경에서만 계시하는 하나님을 찾아서 신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연구하고 분석해서 자기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자기 신학의 깊이를 자랑하기 위해서 찾는다면 그것은 불신자가 단지 하나님이라는 신을 연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든 신자든 하나님을 찾는 것에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한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목사가 설교하는 것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으로 인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목사라는 직업으로 밥먹고 살기 위해서 설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의 배를 불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 역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순종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자기의 배를 위해서 찾는다면 불신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인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있지를 않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말씀이 자신을 인도하는 곳으로 끌려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인도 받아야 할 말씀을 스스로 차단해 버리고 자신을 이끄는 기도를 차단해 버림으로 말미암아 점차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멀어지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나도 함께 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가신 길과 자기가 가는 길을 따로 구별해 놓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신자들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고생하는 길을 가신 덕분에 나는 편안한 길을 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을 등쳐먹는 것이지 절대로 신앙이 아닙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면 고통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고통이 아닙니다. 고통을 종교화하는 것은 전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스스로를 고통으로 밀어 넣으면서 인내속에서 도를 찾고자 애씁니다.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손이 못에 박히고 창에 찔리는 고통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입니다.

 

 

 

 

룻기서에 보면 룻이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말을 듣지 않고 시어머니를 따라서 이스라엘로 갑니다. 그때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끝까지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은 효성을 운운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룻을 통해서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고난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나오미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다. 결코 나오미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을 잃어버리고 아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 되어서 돌아오는 처지였습니다. 룻은 그 모든 것을 다 목격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룻은 자기 시어머니를 그토록 철저하게 망하도록 하신 하나님을 자기도 믿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시어머니를 복주고 부자 되게 하신 하나님이라면 몰라도 철저하게 망하게 하신 하나님을 자기도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믿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께 버림받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리는 믿음의 길에 함께 하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고난이라고 합니다. 교회란 이 고난에 동참하는 무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설교는 이 고난이 싫은 사람은 돌아가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렸듯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좋을 사람만 나오라고 외치는 것이 설교인 것입니다. 이 고난의 길을 과연 누가 가겠습니까? 고난이 단지 외부의 핍박이나 밥굶는 고통이라면 얼마든지 인간의 힘과 의지로도 감수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려야 한다는데 과연 이 믿음을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그래서 고난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고 이해하지 않는 길을 나 혼자라도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우리를 이 고난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인도 받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인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인도해주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자신이 계획하고 목표하는 일들이 잘 풀려 가는 쪽으로 인도해주기를 바랍니다. 특히 교회에서 하는 일들은 다 하나님의 일이니까 틀림없이 좋은 결과가 주어지는 쪽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고통을 당해서 고난의 길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고 망하게 하신 하나님이실지라도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감사하면서 가야하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조롱할 수밖에 없는 믿음의 길을 외로이 가야 하기 때문에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 길로 인도함 받기를 원하십니까? 혹시 슬슬 뒤로 도망쳐 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신자는 이미 자기의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다 빼앗겨 버린 자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하나님께 나올 때 이미 다 빼앗겨 버린 무의 상태로 나왔다면 성공하는 속에서도 주만 바라볼 것이고, 망하는 속에서도 주만 바라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일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한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하나님께 다 빼앗기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내 것이 있기 때문에 내 것을 소유하고 지키기 위해서 고민과 걱정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래도 과연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다 잃어버린 무의 상태에서 주만 바라보고 주님의 고난에 함께 동행되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분만이 오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요단 가 모압 평지에 이르렀을 때까지의 노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의 관할하에 그 항오대로 애굽 땅에서 나오던 때의 노정이 이러하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 진행한 대로 그 노정을 이러하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모세의 관할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다시 하나님의 관할하에 있습니다. 때문에 모든 노정은 모세가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대로 노정을 따라 움직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알아서 움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직접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누군가 인도자를 세웠습니다. 그 사람이 모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인도자로 내세우기 위해서 미리 모세에게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처음에는 자기의 힘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힘을 내세운 것 때문에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쳐서 40년의 세월을 지내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나이 들어 힘이 없을 때 부르십니다. 그때 모세는 자신이 힘이 없음을 내세워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너를 보내며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모세 자신이 하는 일이 아님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그후부터 오직 하나님이 인도를 따라 움직였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부터 인도함 받는 것, 그것이 진짜 인도일 것입니다.

 

 

 

 

5-49절까지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와서 진쳤던 모든 노정이 나와 있는데, 그 가운데는 홍해로 가로막히고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는 그야말로 망하는 길로 인도함 받는 것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만난 모세가 인도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다른 좋은 길을 찾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만난 모세였기에 다른 길은 생각지 않고 비록 망하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주저 없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갔던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자기 생각과 판단을 앞세워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아는 자로부터 인도함을 받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는 참된 하나님께로 정확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만큼 아니까 내 스스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다'라는 생각이 있다면 고쳐야 합니다. 인도함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천국을 가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난 모세로부터 인도함을 받아야 할 이유는, 모세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후로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애굽에서 상상하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전에는 이스라엘에게 힘을 주셔서 그 힘으로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인줄 알았는데, 새롭게 만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힘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로만 유지되는 나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모세처럼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은총과 은혜로 유지되는 나라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애쓰는 것은 다 쓸데없는 것이고 오직 은총과 은혜로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기뻐하고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40년간 인도하셨던 것은 바로 이런 나라를 만드시기 위해서 그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심판 받고 사라질 세상의 것은 다 하나님께 빼앗겨 버리고 오직 은총과 은혜로만 살아가는 신자되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 신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기 싫어하시는 것은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심판해 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은총과 은혜를 아는 하나님의 아들만 남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올 때도 아들에 대한 심판이 있었습니다. 4절에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 여호와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올 때 애굽 사람들은 마지막 재앙으로 죽은 장자를 장사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노래부르며 구원받는데 한쪽은 울면서 죽은 아들을 장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마지막때 일어날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애굽의 장자가 죽음으로 만들어 진 것이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아들을 죽이고 대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드신 것입니다. 출 4:22,23을 보면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은 내 아들 장자이기 때문에 살 것이고, 바로의 장자는 다 죽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모세는 이스라엘은 살고 애굽은 죽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는 일을 겪게 됩니다. 모세는 방금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은 장자이며 바로의 장자를 죽여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로 만드실 것임을 들었습니다. 때문에 자기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당연히 하나님의 장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죽어야 할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애굽의 장자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죽이신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에게 죽게 되었을 때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아들의 양피를 베어서 모세의 발 앞에 던집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내게 피남편이다'는 말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모세는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피 남편은 곧 할례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할례는 육신을 죽이는 표입니다. 육신은 죽고 새롭게 살았다는 의미가 할례입니다. 결국 모세는 아들의 할례로 인해서 살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아들을 단지 혈통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애굽인을 죽여서 이스라엘을 살리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애굽인이든 이스라엘인이든 관계없이 누구나 육신을 죽이는 자가 산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육신을 죽이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죽일 수 없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롬 8:14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영, 즉 성령으로 인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이 아들인데, 지금 살펴본 대로 구약에서는 누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애굽의 장자가 죽은 가운데서 아들이 발생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육이 죽어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성령에 의해서 육신을 죽이는 자, 즉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육신을 죽인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인 행위와 노력과 힘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나올 때 애굽인은 모든 장자를 장사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앞으로 하나님의 장자의 모습을 나타내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이스라엘의 수많은 노정 역시도 장자 되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였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것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키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아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를 드러내는 행동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들을 이 땅에 만들고 싶어하시고, 그런 사람들만 모아서 천국을 이루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주님이 참된 하나님의 장자로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우리의 인도자입니다. 주님의 인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살고자 힘써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잃은 자로서 오직 은총과 은혜로 감사하는 삶을 배우고자 자기의 모든 것을 잃은 상태로 하나님께 나오고자 해야 합니다. 이런 신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아들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런 인도함 받기를 원하면서 하나님을 찾아 나오십니까? 왜 오늘날 신자들에게서 하나님의 은총이 보여지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모든 것을 잃은 자로서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언가가 여러분의 가슴속에 살아서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은혜로 살고자 힘쓰시는 분들이라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끌려가는 신자가 되기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서 끌어가 주지 않으면 나는 애굽의 장자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알고 간절히 주께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모든 것을 잃은 자로서 은총과 은혜로만 감사하는 나라인데, 우리가 어떻게 옛사람의 모습으로 이 인도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영으로 인도함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인되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하는 것은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해줄 인도자를 찾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 모세를 통해서 인도함 받았듯이 오늘 우리들도 모세를 통해서 인도함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인도를 받았듯이 오늘 우리들도 역시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께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사도들을 통해서 인도함 받는 것입니다. 때문에 말씀을 차단해 버리고 기도를 차단해 버린 상태에서 인도를 받겠다는 것은 말도 안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다운 태도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인도자는 말씀 안에 존재합니다. 그런데 말씀에 벽을 쌓고 있으면서 과연 무엇으로 인도 받고자 하는 것입니까? 목사가 여러분을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목사 역시 말씀을 통해서 인도 받을 뿐입니다. 결국 말씀에 벽을 쌓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로 인도 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자리로 인도 받기를 원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곧 애굽의 장자를 죽이고 자기 아들을 만드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외로운 믿음의 길이지만 주님이 함께 동행하심을 믿으시고 하나님의 인도 받기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한 천국에 살게 될 것입니다.

 

 

 

 


47강 민 33:50-56 찌르는 가시 98.1.18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당신은 필요 없는 존재다'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가치 있고 인정받고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어느 곳에도 필요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될 때의 절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없을 때 일이 잘 안돼는 것을 보면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면서 쾌감을 가지게 되지만, 반대로 자기가 없는데도 일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고 잘되어갈 때 '내가 무엇 때문에 있나?'라는 절망감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회사에서 퇴직을 당하는 직장인들의 가장 큰 절망감도 역시 자신이 회사에서 필요치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서 오는 자괴감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 노상 하는 얘기도 '나는 이제 아무데도 쓸모가 없어'입니다. 그래서 노인분들이 모여 폐지를 주워서 이웃을 돕거나 청소를 하거나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생각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자의 가치는 '세상에 얼마나 필요한 자인가?'라는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신자의 가치는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되어져야 할 문제입니다.

 

 

 

 

이럴 때 많은 분들은 신자의 가치관을 열심히 하고 많이 하는 것에 두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신자는 자신을 가장 가치 없는 인간으로 보는 신자입니다. 자신을 가장 가치 없고 무능한 인간으로 보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가치 있고 귀한 신자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가치 있는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나는 가치 없는 인간입니다'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가치 있는 신자가 되어지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은 행동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가치 없는 인간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신자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만 내세울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믿음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의 본질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쓸모 없는 존재이고 하나님 앞에서 무용지물인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지식층이고 소위 고위 종교계층의 사람들인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낮은 계층의 사람들인 죄인, 세리, 창기들이었습니다. 세상에 내세울 것이 없고 자기 소유로 삼아서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신은 전혀 구원받을 가망성이 없는 인간임을 고백하는 자들을 환영하신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만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면 신자가 왜 세상에 있어야 하느냐? 신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냐?'라고 묻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반문입니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이유가 뭔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는 분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야 할 일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다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행동을 해야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즉 인간이 안하면 안할수록 하나님의 일은 그만큼 손상을 입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정을 하고 아부를 해야할 판입니다. 창조주인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신자님, 제발 내 일좀 해주세요'라고 사정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되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 일 해줄테니까 복좀 줄래요'하면서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때문에 뭔가 일이 잘돼서 기분이 좋으면 이것저것 열심히 하게 되고, 일이 잘안풀려서 기분이 좋지 않으면 하던 일까지 팽개쳐 버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기분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방해되거나 미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가 신자로서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라는 점에 대해서 혼란이 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면 도대체 나는 뭐냐?'는 자신에 대한 가치관이 흔들려지면서 발생하는 혼란입니다.

 

 

 

 

특히 선교단체들이 이런 혼란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자기 단체의 존재가치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두고 있고, 하나님의 일이란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그들이 '당신의 단체가 없어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라는 이 말에 반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단체가 세워진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고 있고, 또 열심히 성경 가르치고 전도하면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라는 말이 이해될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은 자기들이 더욱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힘을 공급해주는 것이고, 일이 잘되도록 도와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의 모든 교회와 신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함으로써 자기 선교단체의 가치를 높이려고 합니다. 한국교회에 필요한 존재가 되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이기 때문에 절대로 망해서는 안되고 꼭 존재해야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교회에 가치를 두는데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그렇다면 신자는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분명히 할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에 남겨두시고 살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 할 일은 무엇입니까? 신자의 할 일은 '내가 없어도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 대한 봉사이고, 충성이고, 전도이며, 헌신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자기 기도 응답을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은 주님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면서 하나님은 내 봉사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봉사를 기뻐하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면서 하나님은 내 헌금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을 받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여러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망각하고 자신에게 의미와 가치를 두게 될 때 그것이 곧 우상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상이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가치 두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상이 안돼는 것은 없으며 모든 인간은 우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이 우상이고 남편도 우상이고 아내도 우상이며 심지어 교회도 우상이고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도 우상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들의 욕망과 소망과 상식과 가치관을 혼합해서 제조해낸 가짜 하나님에 불과합니다.

 

 

 

 

출 20:5절에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너를 위하여'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우상은 나 자신을 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나를 위하여 하는 모든 것은 우상이 됩니다. 자기를 위하여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란 부처나 마리아 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형상입니다. 예배당 건물도 형상이며 예배 의식도 형상입니다. 따라서 예배당 건물이 우상이 될 수 있고, 예배의식이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떨 때입니까? 자기를 위할 때입니다. 형상을 없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다 형상인데 어떻게 형상을 없앨 수가 있습니까? 다만 자기를 위한 형상을 만들어 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형상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시각이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우상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잘 기억하시면서 본문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요단 가 모압 평지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기 전에 중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다 훼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거기 거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산업으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52,53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며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러한 것들이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우고 거부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 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부처나 무당이나 점치는 것들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내가 이것을 위해서 열심히 금식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일이 잘되겠지'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 응답을 위해서 온갖 방법과 기술을 동원하는 것들도 우상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다 보니까 기도의 참된 의미가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세계를 이루어 보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을 어찌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도 없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복음을 전할들 그것이 받아들여지겠습니까? 이미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있고, 자기 욕망으로 가득차 있고, 무엇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하려고 하고, 눈에 보이는 신비한 현상에 마음 뺏겨서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하고 싶어서 안달인 사람들에게 과연 복음이 복음으로 들리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사람을 다 몰아내고 우상을 부수라고 하는 것은 '이제 너희는 너희들의 생각과 욕망으로 살아온 세계를 벗어나서 나에게 붙들린 채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세계를 들어가게 되었다. 그 세계는 눈에 보이는 형상을 의지하는 세계가 아니라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세계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울고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홍해 앞에서 애굽 군사 때문에 죽게되었다고 울었고,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했고, 물이 없다고 해서 불평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그러한 것으로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직 은혜로 사는 나라입니다. 때문에 은혜로 사는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보이는 것을 의지했던 가나안 사람과 우상은 크나큰 방해거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 없애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자 역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힘을 얻고 은혜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 것이 나에게서 사라지면 금방 죽을 듯이 야단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살린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한시라도 세상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친구라는 관계, 친척이라는 관계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예식장에 가야할 일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우리들이 눈에 보이는 우상에 둘려 싸여 있을 때 복음에 대해서는 희미하게 되고, 희미한 마음으로는 결코 그리스도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린 결코 우상으로부터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 깊숙이 오랜 세월동안 습관으로 자리한 채 우리를 따라다녔던 것이 우상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 우상에 대해서 너무 소홀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스라엘이 우상을 철저하게 무너뜨리고 가나안 사람을 모두 쫓아낼 것을 기대하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상을 부수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사고방식이나 습관들이 어느 정도 뿌리깊이 박혀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과 근심 걱정은 바로 뿌리깊은 습관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의 습관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 깊숙이 뿌리박고 자리하고 있음으로서 온갖 괴로움과 근심과 번민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 때문에 남을 시기하면서 못견뎌하고, 남의 것을 빼앗고 싶고, 미워하는 모든 고통과 번민들이 사실은 우상으로부터 떠나지 못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54절에 보면 "너희의 가족을 따라서 그 땅을 제비뽑아 나눌 것이니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되 각기 제비뽑힌대로 그 소유가 될 것인즉 너희 열조의 지파를 따라 기업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산업으로 주시는 방법은 지파의 수에 따라서 공평하게 분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잘한 사람에게 많이 주고 못한 사람에게 적게 주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 누구에게도 많고 적음이 없도록 수에 따라 분배하십니다. 그리고 땅의 위치는 제비뽑아서 결정했습니다. 제비뽑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주어진 기업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을 다 무너뜨렸을 때 가능한 삶의 모습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며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할 때 옆의 사람이 얻은 것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시기나 다툼이나 경쟁이나 미움이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 습성이 드러날 때 결국 그들은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보면서 불평하는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괴로움을 당하고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아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저렇게 좋은 것을 주셨으면서 왜 나는 주시지 않느냐'라고 하면서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하나님의 불공평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을 똑같이 분배했다고 해서 인간의 욕심이 사라지고 경쟁이 사라지겠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똑같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더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결국 공평하게 분배해봐야 불평은 끊이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 나는 저 사람보다 열심히 했는데 왜 저 사람과 똑같이 줍니까?'라는 불평으로 하나님을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무너뜨릴 것을 기대하지도 않으셨고,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대로 감사하면서 살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아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우상을 부수라는 하나님의 진짜 뜻은 55, 56절에 숨겨져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 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이 가르치시고자 하신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을 몰아내지 않았을 때 그 남겨둔 자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가시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나안 거민에게 행하기로 한 심판을 이스라엘에게도 행하겠다고 하십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알게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포기한 대가는 하나님의 기업이지만, 그 하나님의 기업은 우리가 바른 인간 되지 못할 때 도리어 우리를 심판해 버린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부수라고 말씀합니다. 우상을 부숴야 할 이유는, 우상이 우리로 하여금 시기하게 만들고, 분쟁하게 만들고, 원수 맺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들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업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시는 뜻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들의 욕심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부수지 못한 육체의 욕심이 도리어 가시가 되어서 우리를 찌르고 괴롭히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괴로움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우상을 부숴 버리지 못한 결과임을 깨닫게 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보다 좋아하는 그것이 여러분을 찌르는 가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눈물이 흐르게 하고, 번민과 고통에 빠지게 하는 가시들은 사실은 여러분들이 귀하게 여기고 사랑했던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이 주어진 것을 가지고 축복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축복이 아니라 찌르는 가시입니다. 가시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세상의 것을 여러분들에게 두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시가 여러분을 인간 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남편이 가시역할을 합니다. 자식이 가시 역할을 합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을 찌르는 가시가 있습니다. 찌르게 함으로서 이 괴로움은 내가 하나님만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만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너뜨려야 할 것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주어진 괴로움인 것을 알게 하셔서 인간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괴로움을 당할 때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처음에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괴로움의 조건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이런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찌르는 가시를 우리 곁에 두시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상처도 받고 괴로움도 당해봐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큼 가치 없는 인간이며 믿음이 없는 인간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잊지 않게 됩니다. 찌르는 가시로 인해 눈물만 흘리고 한탄만 하지 마시고 믿음을 배우고 새로운 인생을 발견하는 참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48강 민 35:1-8 레위인 98.1.25


오늘날 신자들의 믿음이 참된 것인가, 거짓된 것인가를 알려면 그 인간이 무엇을 지향하며 사는가를 보면 됩니다. 인간이 지향하고 있는 그 대상이 보이지 않는 인간의 속을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아무리 예수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한다고 할지라도 지향하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의 것이라면 분명히 그 속에는 예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속에 예수가 자리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을 지향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다른 것과는 절대로 혼합될 수 없는 분입니다. 세상과는 완전히 분리된 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거룩이라고 말합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거룩하시다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과 직책 때문에 거룩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신분과 직책이 예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되어버립니다. 오늘날 거룩이 이런 식으로 오해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목사라는 신분과 직책을 거룩한 것으로 만들어 놓고 누구든 목사라는 직책을 얻으면 거룩한 사람으로 취급해 버리는 것입니다.

 

 

 

 

신분과 직책에 따라서 사람을 달리 대우하는 것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거룩은 신분과 직책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세상과의 구별 그 자체를 가지고 거룩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는 사람을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행동하신 것은 모두가 거룩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세상과 구별되어 있는 삶을 통해서 거룩을 선포하시고 상대적으로 거룩 되지 못한 세상의 죄를 고발하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처럼 살지 않는다면 모두 거룩하지 못한 더러운 자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거룩하신 예수님'이라고 말할 때 예수님이기 때문에 당연히 거룩하신 분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고,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셨고, 예수님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나와 예수님을 분리해 놓은 채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을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예수님만의 일로만 여겨버립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한국교회의 크나큰 오류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헌금하는 것으로도 안되고 봉사하는 것으로도 안되고 수 천명을 전도하는 것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가신 길로 가는 것 외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들은 단지 예수를 믿으라고만 외치고 있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자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은 세상과의 구별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상과 혼합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망하는 자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철저하게 망하고 철저하게 심판 당할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마 3:10). 어느 때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날에 나무를 찍어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한 나무는 불에 던져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생명을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곧 길이요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나를 구분한 채 십자가는 주님이 지신 것으로 끝났고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고, 주님의 삶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삶이고 거룩하신 분은 의례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면서 나의 삶은 십자가 지신 주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곧 망하는 길이고 불에 던짐 받을 결과를 가져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은 '나는 주님을 믿고 따른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지 아니면 주님으로 위장한 거짓된 주를 따르고 있는지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성경만이 하나님의 계시이고, 진리이며,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지향하고 있는 것이나 소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과연 주님이 지상에서 하신 일속에 포함되어 있는지, 또는 선지자 사도들이 하는 말속에 포함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있다면 그것은 참된 것이고, 없다면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종교성을 상식으로 해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철저하게 성경만을 가지고 판단해야 합니다. 시대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성경을 적용하는 것도 다르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곧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참된 계시에 대해서 눈이 어두워지게 만들고 엉뚱한 것을 계시로 알게 해서 망하는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마귀의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귀에게 속아서 참된 계시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있음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모든 교회는 교회의 부흥을 하나님의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당연한 상식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상식을 벗어버리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계시만 가지고 생각할 때 과연 성경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나 선지자들이 교회의 부흥을 말했던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결국 계시에 없는 것을 가지고 계시인 것처럼,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인 것처럼 주장하고 가르쳐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부흥을 위해서 등장되는 인간의 온갖 종교놀이들이 인간들을 망하는 길로 끌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지향하고 있고, 자기 자신을 지향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서 미련과 애착을 가지게 만듭니다. 살기 좋은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도록 합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세상을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건져내어서 씻고 고쳐가도록 합니다. 이런 인간들 사이에 세상을 버리라고 외치는 자가 등장한다면 그를 죽이고 싶어하고 없애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은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의 잘못을 지적하시기 위해서 하신 일이 있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에서 기업을 얻었을 때 그 기업에서 다시 레위인을 위해서 성읍을 주고 들을 주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단지 레위인들의 생계를 위한 조치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레위인들이 어떤 기능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은 레위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자신 스스로를 점검하고 배우면서 믿음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인을 폭로자, 또는 고발자의 기능으로서 이스라엘 속에 자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기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레위인을 이스라엘과 함께 살아가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잘못된 것을 드러내고 고발하게 하시기 위해서 레위인을 이스라엘 가운데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을 부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만 지향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레위인이 이스라엘 속에서 함께 살아갈 때 이스라엘이 불편하겠습니까,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혹 이스라엘도 레위인처럼 하나님만 의지하고 은혜로 살아간다면 레위인이 자기들 가운데 있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불편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에서 벗어나서 세상에 미련을 두고 애착을 가지며 살아갈 때 레위인은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들의 잘못이 레위인으로 인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레위인을 세상 속에 두신 것은 '저 사람을 보니까 내 믿음은 믿음이 아니구나 나는 죽어야 할 죄인이구나'라는 기분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끄럽게 만들려고 레위인을 있게 하신 것입니다. 어두움으로 하여금 '너는 진짜 어두운 존재다'라는 것을 고발하고 폭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 속으로 보내신 것은 바로 레위인을 이스라엘 속에 있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과 전혀 다른 분을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을 부끄럽게 하시고 죄를 고발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을 향하여 선포하신 첫마디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와 다르다'는 것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 곁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그분과 가까이 하려고 하면서 환영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슬슬 피하면서 될수록 멀리 떨어지려고 하겠습니까. 아마도 멀리 떨어지려고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가까이 할수록 자신의 더러움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둠의 세상은 깨끗한 존재를 싫어하고 밀쳐내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가까이 하는 예수는 자기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고 자기를 도와주는 마귀가 만들어낸 가짜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교인들은 자기의 죄를 지적하고 드러내는 말을 싫어하고 피하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만 전하는 교회를 싫어하고 거부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의 더러움과 죄를 감추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밀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곧 바로 나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마주했을 때 자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타락한 인간이며, 나쁜 인간이며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세워두시고, 예수님이 살아가신 인생과 우리의 인생을 비교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어느 것이 제대로 산 인생인가를 알게 하셔서 옳은 인생을 따라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인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과 얼마나 거리가 먼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제대로 된 인간을 우리 가운데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이고, 예수님 앞서서 그 역할을 담당할 레위인을 있게 하신 것입니다. 레위인은 한 지역에 밀집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 흩어져 있습니다. 참된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하며,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을 모든 이스라엘이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레위인이 이스라엘 속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레위인에게 줄 성읍은 살인자로 피케 할 도피성으로 여섯 성읍이요 그 외에 사십이 성읍이라"고 말합니다. 살인자로 피케 할 도피성이라는 것은 우연하게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도망치는 장소를 말합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여서 도피성으로 도망쳤다면 그 누구도 그 자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도피성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피난 장소인 것입니다.

 

 

 

 

사람을 죽인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오직 레위인이 살고 있는 도피성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안에 도피성이라는 피난처를 만드십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체가 피난처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가령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발생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사랑이라는 정신에 입각해서 바로 살고 있다면 그 살인자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도망쳐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고 도피성 또한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러한 정신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세상과 똑같이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원수이고 그에게 보복해야 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결국 도피성으로 피할 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레위인이 거하는 곳에 도피성이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으면서 사랑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고발하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을 보여줘야 할 레위인은 철저하게 사랑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쪽이 사랑 받는 쪽 때문에 큰 낭패와 손해를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상대방을 용서하고 용납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죄를 자기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고통 없이 만드는 사랑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은 도피성이 될 수 없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에는 레위인 같은 인간이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할 만한 곳이 못됩니다. 세상을 의지하려고 해봐야 결국 세상으로부터 상처만 받은 채 낙심하고 눈물만 흘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세상을 자신의 도피성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사랑이 없고 레위인이 없는 세상을 고치고 잘 가꾸어서 자신의 왕국으로 삼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예수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도피성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도피성으로 삼기 위해서 예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자신의 도피성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수모와 고통을 교회를 통해서 위로 받고 보상받고자 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교회로부터 더 큰 고통과 상처를 입게 될 뿐입니다. 교회에도 진정한 레위인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레위인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모든 고통과 희생을 담당하신 분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레위인이며 예수님만이 우리의 도피성이 되십니다. 문제는 예수님 앞에 선 우리들이 전혀 엉뚱한 것을 지향하며 나온다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기 위해서 달려드는 무리들로부터 살려달라고 외치면서 예수님께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상처 주고 무시할 수 있는 무기를 손에 쥐기 위해서 예수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멸망 받을 자의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이 고발 받고 있습니까? 예수님 앞에 설 때마다 여러분의 죄가 폭로되고 있습니까? 그리고 겸손히 주님의 사랑을 구하며 주님께로 나오십니까? 혹 아니면 예수님 때문에 나의 죄가 폭로되고 정체가 드러나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밀쳐내고 피하려고는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상대방의 죄지은 것을 내가 대신 품어주고, 그 사람의 고통 때문에 내가 손해보는 사람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본래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레위인입니다. 이 레위인을 여기저기 있게 해서 사람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이것이 인간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더러운 속을 드러내시면서 '너는 더러운 인간이다 죽어야 할 인간이다'는 것을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레위인이 있는 도피성으로 도망치는 누군가가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도피성으로 도망치는 사람이 있구나'를 발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을 받아주는 레위인을 보면서 자신들의 더러움을 깨달아야 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이스라엘이라면 레위인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합니까?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고발하고 지적해주는 일을 하고 있는 레위인에 대해서 감사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7절에 보면 "너희가 레위인에게 모두 사십 팔 성읍을 주고 그 들도 함께 주되"라고 말씀합니다. 레위인에게 들을 주라는 것은 단지 레위인의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레위인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레위인 때문에 부담을 느끼고 그들을 밀쳐버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레위인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살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중에 보면 이스라엘은 레위인을 자기들의 모임에서 추방해 버리고 맙니다. 레위인의 생계수단인 십일조를 내지 않음으로서 레위인이 자기들 곁을 떠나가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가 예수님만을 바라보지 않고, 천국을 지향하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 중심으로 살아갈 때 가장 싫은 것은 자기의 허물을 들춰내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 중에는 자기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는 목사를 칭찬하고, 자신의 허물을 말하는 목사는 공격을 하고 트집을 잡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나는 어떻게 사는가?'를 물어보셔야 합니다. 불신자 욕하고 남 욕할 것이 아니라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물어보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레위인으로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면 신자는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의 더러움을 찾아가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레위인 되시는 그리스도안에서 레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서는 과연 레위인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레위인의 삶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고발당하고 더러운 속이 드러난 것 같이 이제는 여러분이 레위인이 되어서 세상이 여러분 때문에 죄가 고발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레위인으로 살아야 하고 가정에서 레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여러분이 빛이 되어야 하고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하고, 여러분이 가는 곳은 레위인이 가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있음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돈으로 살고 자기 자랑으로 살고 복수심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교회는 그런 세상에서 상처를 입고 눈물을 흘리며 피해 나오는 사람들의 도피성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도피성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레위인으로 모여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교회로 모인다고 하면서도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을 그대로 드러낸다면 결국 누군가를 다시 상처를 입혀서 쫓아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만 지향하고 하나님만 자랑하는 곳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레위인답게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이 있는 그곳이 거룩한 곳이 될 것입니다.

 

 

 

 


49강 민 35:29-34 삶의 원칙 98.2.1


인간은 세상 안에 살아가면서 자신이 만나게 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알지 못한 것이 있을 때 끊임없이 물으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인가?' 이처럼 인간은 자기가 대하는 모든 사물과 현실에 대해서 물으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묻는다는 것은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물론 알면서도 고의로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는 상대방을 시험하기 위해서나 또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묻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물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묻는다는 것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묻고 해답을 얻는 삶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의 물음은 둘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인간이 답을 내릴 수 있는 것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답을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답을 내릴 수 있는 경우는 인간이 만든 것에 대해서 물었거나 인간의 지식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을 물었을 때입니다. 예를 들어서 '비행기가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비행기를 만든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 물음에 대해서 충분하고 완벽하게 답할 수 있습니다. 또 '바닷물이 왜 파란가?'에 대한 물음에도 인간의 과학적인 지식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저히 인간 스스로 답을 내릴 수 없는 물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물음입니다. 결국 물음에 대한 답이라는 것은 인간 지식의 범위 안에서라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지식을 초월한 물음에는 수없이 많은 것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인간 존재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물음은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세월동안 반복되어진 물음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러한 물음들이 인간 존재성에 대한 무수한 물음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지금껏 이 물음에 대해서 답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신이 질문자이면서 동시에 질문을 받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한 개인의 의문과 물음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의문이요 물음입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의문이며 물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묻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답을 누가 내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인간 중에 누군가가 이 물음에 대한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있다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의문과 물음이 계속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답을 내린다고 해도 또 다른 의문이 계속 꼬리를 물고 일어났을 뿐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 자체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에 대한 답은 창조주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로마서의 토기장이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가령 제가 흙으로 그릇을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럴 때 완성된 그릇은 자신이 그릇이라는 것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자기의 지식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왜 만들어 졌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에 대한 답은 그릇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릇을 만든 자가 알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릇을 만든 의도는 만든 자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든 자가 그릇에게 '너는 이런 이유로 만들어졌다'라는 답을 내리기 전에는 그릇은 끊임없이 '나는 왜 만들어졌는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의도를 아실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당연히 하나님께 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얻어내어야 할 물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 물음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것은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의문을 품고 물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왜 인간은 세상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인간 스스로 답을 내릴 수 없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이 물음을 던지고 여기에 대한 답을 얻고자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인간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인간을 만드신 목적과 의도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인 우리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원칙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제대로 된 인간다운 모습을 찾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다 각기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선악을 판단하며 자기 나름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원칙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세상을 살아갈 인간의 삶의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원칙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과 원칙을 자기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정해지고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자기 인생을 꾸려 가는 모습입니다.

 

 

 

 

우린 오늘 인간답게 살아가는 원칙을 알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선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인간답게 사는 원칙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답게 사는 문제에 대한 것은 모든 인간의 궁금점이 아닙니다. 대개의 인간은 어떻게 하면 세상의 것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느냐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인간답게 사는 원칙을 강조하는 하나님은 따분하게 여겨버립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인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결국 지금의 현실은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간답게 사는 원칙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자를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 되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교회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인간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것도 인정하고, 인생의 모든 답은 하나님께서 홀로 주관하신다는 것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게 살아가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원칙에서 벗어난 채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인정한다고 큰소리 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간답게 사는 원칙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제시한 원칙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보태어서 새로운 원칙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원칙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까?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원칙에는 자신의 포부와 야망이 모두 빠져 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야망과 포부를 삽입해서 하나님의 원칙을 수정해버린 것입니다. 결국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원칙에다가 내 희망사항을 삽입시켜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원칙과 인간의 원칙이 항상 충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어려운 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33절을 보면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 한마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칙은 이미 결정 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지 자기들의 포부와 목표를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라고 해도 그들이 따로 만들고 정해야 할 원칙이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결정하시고 세워주신 원칙의 범위 안에서만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원칙에 순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보인다고 해도 절대로 자기의 것을 보태면 안됩니다. 가령 신 6:5절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스라엘이 얻을 땅에서 지켜야 할 명령과 규례와 법도, 즉 하나님의 원칙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그대로 보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하면 됩니다.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해도 좋으니까 다만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원칙에다가 인간의 행함을 삽입합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증명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은 행함이라는 한계 안에 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행함을 통해서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를 구현하고자 합니다. 결국 사랑의 표현도 행함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남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은 자신의 사랑을 행함을 통해서 증명하려고 하고, 여자들은 상대방의 행함을 통해서 사랑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사랑을 의심받게 되기 때문에 결국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인식시켜주기 위해서라도 사랑의 표현을 할 수밖에 없어집니다. 이것이 행함이라는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서 행함을 요구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성 속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했으면 그냥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 '어떻게 사랑할까요?'라는 것은 없습니다. 가령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십일조 바치겠습니다'라고 할 때 십일조 바치는 것은 좋은데 십일조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진 삶의 원칙은 땅을 더럽히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는 이미 결정되어졌습니다. 자기의 이상, 야망, 포부는 하나님의 원칙아래서 포기되어져야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말씀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포부와 이상, 야망을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변명합니다. 자기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꼭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목적이라고 해서 모든 수단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포부와 야망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고 하나님을 이용하고 성경을 이용해대는 인간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고 신이 되고자 하는 아담의 집단에 동참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분명히 멸하신다고 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크는 교회로 부흥시켰다고 해도 그것이 죄사함 받는 면죄부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표가 되지도 않습니다.

 

 

 

 

인간다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움직여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 참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포부와 야망을 드러냄으로 인간다운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금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자기 개인의 포부와 이상과 야망을 포기한 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참된 인간을 만드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본래의 인간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땅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많이 하는 환경운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 땅은 자연이 파괴됨으로 더렵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 자체가 땅을 더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34절에 "너희는 너희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땅은 이스라엘만 거하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이기 때문에 더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여기에 관심을 두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구원받고 축복 받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살았지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보신 적이 있습니까? 땅은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기반입니다. 어디를 가도 땅을 밟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때문에 땅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자로 살아가야 할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신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을 더럽힌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창 4:10절에 보면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는 것에 대한 반발이며 아벨에 대한 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땅이 말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깨끗하게 창조하신 땅을 더럽히는 인간의 행위를 고발하시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반발과 인간에 대한 미움이 땅을 더럽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홍수를 통해서 저주받은 세상을 물로 깨끗이 씻어버린 것입니다. 심판의 이유는 땅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의 식구를 살려놓으심으로서 세상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유지되는 땅임을 전파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가리울 때 그 인간은 땅을 더럽히는 인간이 되는 것이고 결국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고의로 사람을 죽인 자와 우연히 죽인 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나옵니다. 고의로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도피성으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는 피는 반드시 피로서 갚으신다는 하나님의 원칙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연히 사람을 죽인 자는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고 도피성에서는 대제사장으로 인해서 살 수가 있다고 합니다. 우연히 살인한 사람은 자기가 잘못하지 않고 신세 망친 사람입니다. 이것이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공통점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발생된 불우한 환경인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발생된 약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를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자를 남겨두신 것은 인간의 처음의 모습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시면 살 수 없는 약자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약자가 발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피를 흘린 자들로서 피로서 피를 갚아야 하기 때문에 다 죽어야 할 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중에 있는 제사장 때문에 살려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희생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구나'를 알 때 자기들의 포부와 야망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곧 약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원칙에 의해서 살아가는 참된 인간의 모습이며 땅을 더럽히지 않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칙은 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결코 죄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가 되셔서 우리의 죄 때문에 더렵혀진 땅이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는 하나님의 원칙에 의해서 대신 자신의 피를 쏟아서 땅을 깨끗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땅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에 의해서 깨끗해진 땅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삶의 원칙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감사하고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땅을 더럽힌 장본인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피를 흘려야 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신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 땅은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개인의 야망과 포부를 앞세울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각자가 딛고 서 있는 땅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는 땅이고, 여러분은 오늘도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 덕분에 살고 있음을 앞세워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인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보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말은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면서도 어떻게 우리의 포부와 야망을 그리스도에 피에 더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주님의 희생을 밟고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를 자랑할 수 있고 자기보다 가진 것이 적고 배우지 못하고 뒤떨어진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모두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땅을 더럽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피를 믿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피를 믿지 않는 자들을 때가 되면 반드시 그 피로서 갚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밟고 살아가는 땅을 볼 때마다 '나는 그리스도의 피를 밟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오늘도 살아간다'는 것을 상기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몸으로 땅을 깨끗이 하는데 봉사하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바랍니다.

 

 

 

 


50강 민 36:1-13 신자의 희망 98.2.8


인간은 현재의 불만 속에서 과거를 후회하거나 동경하며 미래를 희망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과거란 좋았든 나빴든 지나간 것이기 때문에 과거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래는 지금의 처지보다 좀더 나은 환경을 꿈꾸는 희망을 안고 살아가게 마련인 것입니다. 비록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에 급급하여 내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들 속에도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자리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미래를 물으면서 살아갑니다. 내일, 모레, 또는 몇 년 후 몇십 년 후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내 가정에 내 나라에 이 지구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정확한 해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미래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걱정하고 희망을 두고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요즘 같이 경제가 어려울 때는 더욱 더 미래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희망을 가져보지 않습니까?

 

 

 

 

이렇게 오늘날 사람들의 희망은 철저하게 현실 위주로 되어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묻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죽음 이후의 세계라는 것이 하나의 인간의 상상일 뿐 실재로 존재하는 않은 세계일 것이라는 의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에서는 내세라는 것에는 희망을 두려고 하지 않고 오직 현실 위주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의문을 품을 수도 없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죽음 앞에서 인간의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죽음이 인간의 마지막 종점이라면 인간이 어떤 희망을 가지고 산다고 해도, 또 그 희망대로 이루어 졌다고 해도 결국은 죽음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희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에게 있어서 참된 희망이란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때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일 뿐 그 누구도 이것을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모든 인간은 그 죽음의 흔적을 몸에 지닌 채 세상을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인간의 희망과 죽음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린 것은 죽음 앞에서는 인간의 희망은 의미 없고 가치 없는 것임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현실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이란 내 뜻대로 내 마음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버리려고 하지 말고 다만 인간에게는 죽음이란 무너뜨릴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 인생이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참으로 쓸데없는 것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죽음의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너무 쉽게 잊고 삽니다. 특히 세상으로부터 존경받고 칭찬 받고 대우받을 때 죽음의 과정 속에 있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높여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흡족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신자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으며 죽음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흔적을 우리의 삶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병이 들고, 늙어 가고, 노동을 해야 하고, 한평생 고생하면서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죽음의 신호탄입니다. 죽음을 짊어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의 흔적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희망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음속에 희망을 품고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께 있는 죽음의 흔적은 생각지도 않은채 현실의 희망만 품고 산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말씀을 듣는 것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이시간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있는 죽음의 흔적을 분명히 발견하고 나오셔야 할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옛날부터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불사약, 불로초라는 있지도 않은 약을 상상하게 만들었고, 피라밋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었지만 그 무엇도 죽음을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을 찾으면 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죽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의 문제는 그리스도안에서만 해결되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무조건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죽음이란 죄의 결과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의 해결은 죄문제를 해결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죄문제만 해결하면 죽음에 대한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되어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죄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입니다. 죽어야 하고 피흘려야 하는 그 요구에도 자기의 희망을 드러내지 않고 순종하심으로 죄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신자의 삶의 원칙이 무엇이었습니까? 땅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땅은 어떤 땅입니까? 예수님의 피가 흘려진 땅입니다. 하나님께 순종치 못하는 우리로 인해서 피흘려진 땅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예수의 피가 흘려진 땅을 살아갈 때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땅을 더럽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정신을 온전히 드러내며 사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죽음이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여전히 죽음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죄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죄속에서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인생이기 때문에 죽음의 흔적은 여러분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불만, 불평, 슬픔, 불행감 그 모든 것이 죽음의 흔적입니다. 여러분이 여전히 죄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죄 때문에 스스로 짊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짐을 모두 남 탓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자기 불행의 원인을 자기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원인은 여러분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을 느끼고 불만이 있고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생을 생각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인생을 생각하면 불행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를 불행한 인생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도 한마디로 표현하면 순종입니다. 그런데 저마다 자기 희망을 앞세우고 있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것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죄가운데 있는 인간의 모습이고 죽음의 흔적인 것입니다. 감사하고 기뻐하다가 자식이 취직이 안돼는 것 때문에 슬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의 흔적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내 욕심 때문에 기뻐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몸이 아플 때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죄가운데서 살기 때문에 몸이 아픈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십시오. 사고를 당했다면 내가 죄가운데 살기 때문에 사고를 당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십시오. 죄악 가운데 살면서 자기 희망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신자는 자포자기한채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에 희망을 두지 말고 다른 세계에 희망을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피할 수 없고 벗어버릴 수 없는 죄악으로 인해서 죽음의 흔적을 몸에 지난 채 인생을 살아가지만 이 죄를 완전히 벗어버릴 그 나라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하늘과 새땅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찬 삶을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의 희망으로 채워지기 위해서는 세상이 어떻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희망이 없고 가능성이 없고 오직 죽음의 흔적만 가득 가진 채 결국 멸망으로 사라질 세상으로 볼 때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희망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슬로브핫의 딸들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우린 민 27:1-11절에서 슬로브핫의 딸들이 자기들에게 기업을 달라는 요청을 함으로서 그들에게도 아비의 기업이 주어졌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 이들에게는 기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른 지파로 시집을 가게 되면 결국 슬로브핫의 딸이 속해 있는 지파의 기업이 상실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다른 지파로 시집을 가지 못하게 함으로서 기업을 보존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슬로브핫의 딸들의 결혼은 단지 남녀간의 결혼이 아니라 기업을 짊어지고 그 기업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한 결혼인 것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결혼할 때도 여느 사람들과 같이 자기 행복을 위해서나, 미래의 희망을 안고 결혼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을 그대로 유지하고 전달하기 위한 결혼인 것입니다. 시집을 가되 자기를 위한 시집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 멋대로 자기 인생을 위해서 자기 마음에 드는 남자를 골라서 시집을 가게 되면 한 지파의 기업이 상실되어 버리고 하나님이 정해준 기업이 엉뚱한 지파에게로 흘러가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결혼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기업이 그대로 전달되어지느냐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결혼에 대한 어떤 법칙을 찾아내기보다는 신자된 사람으로서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인간은 죽음의 흔적을 지닌 채 산다고 했습니다. 죄가운데 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우리이지만 그러나 죽음을 이길 수는 있습니다.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죽음이라는 사슬에 묶이게 했던 죄의 문제에서 영원히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더 이상 죽음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아들을 희생의 자리로 보내셔서 부활을 가능케 하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를 지금 여러분이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의 흔적 위에 은혜의 흔적을 입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야 하고 죽음의 흔적을 나타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흔적을 나타내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들이 자기의 희망을 앞세운 채 내 인생을 위해서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내 행복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죽음의 흔적을 드러내는 인생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죽음 속에서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중요하고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 더 귀한 일임을 깨닫고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곧 은혜의 흔적을 나타내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눈물을 흘리고 고생을 해야 하는 것은 이 땅에 저주받은 땅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악하기 때문에 세상이 악한 것이고 내가 악하기 때문에 세상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내세를 모른 채 온통 세상에만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여러분은 다같이 하나님의 복음을 짊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대로 자기에게 좋은 것은 선택하고 나쁜 것은 버리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처럼 시집을 가도 하나님의 기업을 짊어지고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어디를 가도 은혜를 나타내야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 일을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내마음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죽음에 서서 산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잊고 살기 때문에 죽음 위에서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은혜의 실체도 발견하지 못한 채 입으로만 은혜를 떠들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달하기 위해서 자기의 삶을 포기하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세상의 악함이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오직 자기 행복을 찾아 살기 때문에 예수님이 피흘리셔서 주어진 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은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만이 피흘리신 주님을 원할 것입니다. 죽음의 흔적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고는 예수의 피를 믿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잊어버렸는데 어떻게 죽음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피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죄를 멈출 수 없고 죄를 고칠 수도 없는 인간입니다. 죄속에서 죽어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깨끗케 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새하늘과 새땅이지 우리의 죄로 더러워진 이 땅이 아닙니다.

 

 

 

 

더러운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새하늘과 새땅에 공짜로 들어가게 하시는 사랑과 자비, 그것이 곧 신자된 우리의 희망입니다. 슬로브핫의 딸은 마음대로 살아갈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업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도 하나님의 기업의 약속이 주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랑과 자비를 전달해야 할 사람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무엇을 보여주며 살아갑니까? 돈이 있으면 행복하고, 자식이 잘되는 것이 행복하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행복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세상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인생의 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삶이 되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사랑과 자비를 지키는 삶이 되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환경 속에서 내 죄 때문에 짜증이 나고 걱정이 생기고 근심이 일어나고 불평이 날 때마다 여러분에게 드리워져 있는 죽음의 흔적을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여러분의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럴때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할지 삶의 목표가 분명해 질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순탄치 못하다고 탓하지 마십시오. 세상살이가 순탄하면 행복해지고 순탄치 못하면 불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세상을 인생의 끝으로 생각하고 내 편하기만 희망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은 죽음인 것을 잊지 마시고 모든 희망을 새하늘과 새땅에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이 짊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고 복음을 지키고 복음이 전달되어지는 삶이 되기를 힘쓰기 바랍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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