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 2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목차)
14.죽이시는 하나님(출 19:7-15)
15.십계명(출 20:1-17)
16.약자 보호(출 21:1-6)
17.하나님 마음(출 23:16-19)
18.자비로운 하나님(출 24:12-18; 32:15-20)
19.성 소(출 25:1-9)
20.제사장(출 29:1-9)
21.행복한 사람(출 29:38-46)
22.불안감(출 32:1-6)
23.헌신(출 32:25-29)
24.중보자(출 33:1-6)
25.하나님의 인도(출 40:34-38)
죽이시는 하나님(출 19:7-15) - 14강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서는 믿음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모두 여호와께서 거부하시고 인정하지 않으시는 믿음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과연 하나님에 대한 지식 위에 세워진 믿음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가? 질문이 너무 애매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여러분을 죽이시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살리시는 분이십니까?
사람들의 신지식은 신은 인간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신의 의무라고 합니다. 대신 인간편에서는 신에 대한 정성과 성의를 보여주면 된다고 합니다. 즉 정성과 열심이 있는 자는 잘 보살펴주는 것이 신의 당연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개념입니다. 이런 신 개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단체 안에서 신의 이름을 부를 때 과연 어떤 바램으로 부르겠습니까? 그것은 보나마나 뻔합니다. 모두 자기 인생에 대한 보장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은 절대로 나를 해로운 길로 인도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나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잘못돼도 나만큼은 잘돼야하고, 다른 사업체는 다 불경기라도 내 사업체만큼은 발전해야 하고, 다른 교회는 작아도 내 교회는 커야한다는 전제하에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왜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에 대한 관심은 조금도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고 엉터리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를 신앙의 울타리로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으로 신자로서 내 할 일은 다하고 있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언제나 자기를 살려주고 행복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지 자기를 죽이는 하나님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양속의 땅에 이르기 전에 시내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죽이시는 하나님입니다. 누구를 죽이십니까? 산을 범하는 자는 죽이겠다고 하십니다. 산은 하나님이 계신 산입니다. 그 산을 마음대로 범한 자는 죽이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만나는 자는 누구든지 죽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고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면 죽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흔히 하나님의 일을 돕는다고 말을 합니다. 특히 선교단체가 말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돕는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교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돕는다면 결국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신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데 한낱 죽어야 할 인간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뭘해도 하나님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고 안해주고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은 자기들을 죽이시는 분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인도하고 계신 것만 생각하고 기분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8절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지킬 자신이 있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무엇을 알게 됩니까? 자기들은 깨끗함을 입어야 할 더러운 존재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는 무서우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10절에 모세에게 백성을 성결케 하고 옷을 빨라고 지시하신 것이 옷이 더럽다는 얘기겠습니까? 이스라엘이 더러운 인간이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설 수 없는 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 생활은 자기들의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가 얼마든지 지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신앙의 행위는 모두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자와 기도안하는 자를 구분하게 되고, 봉사하는 자와 봉사하지 않는 자를 구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되면 그러한 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이고 헛된 일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안다닌다고 해서 미워하시고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반겨주시는 분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두가 죄인으로 출발합니다. 교회를 나와도 죄인이고, 안나와도 죄인입니다. 이것을 모르니까 같은 죄인이라도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안하는 사람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의 생각을 모두 버리고 정직하게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을 좇고 있는 삶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가치 있게 생각하고 훌륭한 거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다 헛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믿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를 죽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합니까? 나를 죽이시는 하나님을 보신다면 인간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한 행위를 자랑스럽게 꺼내놓을 수도 없고 그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길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죽을 죄인입니다'를 날마다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무조건 살려주시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대신 하나님의 아들을 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시고 우리에게 살길을 제공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 앞에 나와야 발견할 수 있는 것인데 여러분은 어디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 있습니까? 언제나 자기의 성공과 행복에서 사랑을 찾고 있기 때문에 다른 하나님, 다른 예수를 붙들면서 믿음의 착각에 빠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죽이신다면 하나님은 참으로 무서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무서우신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대합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움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멸시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두렵지가 않은 것이고, 하나님이 두렵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세상일에 근심하고, 염려합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임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많은 이적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는데 그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양식이 없다고 원망하는 것은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적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놓을 정도로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이시라면, 그 사랑을 아신다면 세상 것은 아무것도 없어도 좋다는 것이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십자가 사랑만으로는 만족 못하겠다는 얄팍한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십자가가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나에게는 반갑지 않다는 고집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가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더러운 것에서는 더러운 것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나올 것도 더러운 것이지 깨끗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선한 행위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자신의 더러움을 알아야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하신 십자가의 일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려고 하십니다(6절). 제사장 나라란 제사장의 희생으로 백성들과 함께 하는 나라입니다. 문제는 백성들이 자기들과 함께 동행하는 희생의 의미를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죽이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며 그들이 죽어야 할 이유로서 계명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깨끗한 분과 함께라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더러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끝까지 자기의 의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알게 됩니다.
십계명(출 20:1-17) - 15강
지난 시간에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의 중점은 우리는 더러운 인간인지라 의로우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 인간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도 없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에만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오해해 왔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를 보내셨다는 지식의 차원에서 끝나버리고, 또는 우리의 삶을 좋고 편한 길로 인도하시는 사랑에만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간과해버리는 실수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가까이 할 수 없도록 막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죄인인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갈 수 없는 죄인인 인간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성경은 그분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갈 수 없는 죄인인 인간을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즉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고, 죽어야만 하는데 그런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다면 예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그 어떤 열심도, 종교행위도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예배드린다고 하나님께 가는 것 아니며, 기도한다고 하나님께 가는 것 아니며, 헌금한다고 하나님께 가는 것 아닙니다. 주님을 믿어야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곧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행위는 주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지 행위 자체가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거부하시는 것은 인간에게는 하나님 앞에 선이 되고 기쁨이 될만한 그 무엇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아직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자신이 하는 행위가 종교적인 행위라는 이유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 순간 그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의로 삼는 것이지 주님만을 의로 여기는 믿음은 보여지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는 하나님께 나아갈 만한 의가 없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신 이유도 나의 더러움 때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고 이런 고백이 있는 신자라면 과연 그에게서 자신의 행위를 의로 여기고 자랑하는 모습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의로움을 증명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선한 행위, 남들이 알아주는 행위를 보여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 잡혀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실수를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흉을 보고 욕할까라는 염려가 자신을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돈이 있어서 100만원 헌금하는 사람과 돈이 없어서 헌금을 한푼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할 때 하나님은 100만원 헌금하는 사람만 영접하시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한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소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적게 준 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게 있는 자나 많이 있는 자나 자신의 소유가 의의 근거는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은 믿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하면서 돈이 없어도 억지로라도 헌금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즉 빚을 내서라도 헌금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빚도 갚아주시고 만배나 축복을 해주신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무당들이 하는 짓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하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 자신을 죽이시는 분이심을 앎으로서 신앙이 출발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거부하신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길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의로움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되신 분이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믿음은 자신의 더러움을 알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십자가에 달린 모습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모습인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의를 내세우겠습니까? 이런 신자는 자신의 믿음조차도 자기의 의로 여기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더러움을 알게 하시고 주님을 바라보게 하심을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신 분은 예수님 한분뿐입니다. 예수님이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어서 의로우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모든 율법의 정신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대로 지키며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죄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인데 그 사랑을 완벽하게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를 지키고 행하려고 해서는 안되고 인간이 왜 죄인인가를 알아야 법을 완성하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알고 주님을 아는 신자들은 진심으로 주님을 귀한 분으로 섬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직 주님 때문에 천국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천국만을 소망하고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은 자신이 어떤 어려움과 환경에 빠져 있다고 해도 주님을 믿게된 것으로만 감사하며 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믿음, 이런 삶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자세로 세상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게 하셨다면 옛날 구약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길을 제시하셨습니까? 그것이 오늘 본문의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으니까 이제 율법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 또는 예수님이 오셨어도 신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규범은 있어야 하는데 그 규범의 역할을 율법이 해야 하기 때문에 십계명은 오늘날도 계속해서 신자들이 실천해야 할 법이라느니 하면서 많은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주장은 모두 성경에서 벗어난 것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스스로를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때문에 율법이 폐지되고 없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또 율법을 예수님이 완성했다는 것은 인간이 실천할 수 없는 율법을 예수님 편에서 실천했다는 것인데 또 다시 신자의 규범으로 법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무시하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무엇이고, 오늘날 우리는 십계명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절에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를 먼저 말씀하는 것은 지금 율법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신분인가를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서 벗어난 존재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애굽과 상관없는 존재이며 이제는 그들을 구원하여 낸 여호와의 다스림 아래서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때문에 그들에게서는 애굽에서의 사고 방식은 보여져서는 안되며 오로지 하나님의 사고 방식만이 보여져야할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단지 신자로서의 행동 강령이나 도덕과 윤리적인 삶을 강조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1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입니다. 세상에 신이 되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신이 되신다는 것은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만을 우리의 힘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다른 것을 힘으로 삼아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대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살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만을 신으로 섬기는 모습입니다.
2계명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너를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즉 우상이란 자기 자신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신을 찾을 때 그것이 곧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애굽과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위해서 신을 부를 때 비록 그 이름이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아니며 따라서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거룩을 대신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행위까지도 거룩의 의미를 두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어떤 종교행위에 거룩의 의미를 두게 되면 사람은 그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려고 할 것이고, 그것으로 복을 얻고자 힘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한다면 그것이 곧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즉 기도한다면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고 있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목적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피조물의 입장을 상기해야 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께 그 무엇도 요구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깊이 깨우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4계명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인간의 휴식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안식일을 말하면서 휴식을 해야 일의 능률이 오른다는 등의 말을 하면 그것은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칠 일째 하루를 쉬라는 것은 육일동안 일하고 먹고살았던 모든 것은 우리가 일해서 되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일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내가 일할 수 있는 직장, 힘, 건강, 이런 모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은 내가 일해서 벌어들인 세상의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것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언제나 변함없이 동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효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듯 하나님은 그 백성을 돌보십니다. 즉 부모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 공경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관자는 여호와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도 세상에 살아가는 것은 여호와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내 이웃의 생명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웃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의 배후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까지 같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부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관계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남편과 아내0에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의 부부관계에 침범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부부 관계를 깨뜨리게 된다면 그 가정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깨뜨리는 것이 됩니다.
8계명은 도적질하지 말라고 합니다. 도적질이란 남의 소유물을 침범하는 행위입니다. 우리에게는 다같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습니다. 신자는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살아가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웃의 것을 도적질한다면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도전하는 행위가 됩니다. .
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고 합니다. 거짓 증거라는 것은 이웃을 해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웃을 해친다는 것은 우리가 다함께 어린양의 피로서 구원받은 한 형제임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함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구원받은 한 몸입니다. 신자는 이웃을 한몸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웃에 악한 마음을 가지고 헐뜯고 거짓말하는 모든 것이 몸의 관계를 해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10계명은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합니다. 이웃의 것을 탐낸다는 것은 이웃과 나눌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웃의 소유에 대해서 탐욕이 일어날 때 그 속에는 시기와 질투가 함께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랑과 자비로 다가오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웃은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야 할 대상입니다.
이것이 십계명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이 법 앞에서 어떤 마음이 듭니까? 십계명은 애굽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야 할 모습입니다. 십계명이 곧 하나님의 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의를 완성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법 앞에서 자신들은 실패한 인생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은 후에 제물이 흘리는 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법의 정신을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랑도 은혜도 그리스도안에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임을 알고 주만 바라보고 은혜로만 살아갈 때 그런 신자를 통해서 율법의 정신인 사랑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안에서 사랑을 보이며 성령의 열매를 맺어 가는 신자 되기를 바랍니다.
약자 보호(출 21:1-6) - 16강
고린도전서 2:12을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 즉 성령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임의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모든 것은 안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힘이 아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다는 것은 우리가 제아무리 성경을 배우고 연구한다고 해도 은혜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연구를 통해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연구를 통해서 알아가는 것은 성령이 있는 자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알아간다는 것이지, 연구 자체가 우리에게 은혜를 알게 하는 수단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이 함께 하고 있는 자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기적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은혜가 아닌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이해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에 잘못된 은혜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은혜를 깨닫게 된 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은혜를 말하면서 은혜 외에 다른 것을 구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은혜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세상의 것이 없어도 오직 은혜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 뭔가 세상의 것이 부족해서 기도로서 채우고자 한다면 그것이 과연 은혜만으로 만족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은혜를 안다는 것은 세상 것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인간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있는 그 어떤 것을 가져가셔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 인간들의 사랑은 상대적입니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같이 보이면 나도 그를 사랑하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같이 느껴질 때, 예를 들어서 집안의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었다든지 그럴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하고 좋아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하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사랑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가셔도 흔들림 없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 것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사랑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서 이런 사랑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모습을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법칙을 세우셨습니다. 인간이 그 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린 지난 시간에 십계명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십계명은 크게 나누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모습이 이웃을 통해서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시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판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그 사랑이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는 사랑인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해서 23:9절까지 보면 집안의 종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웃과의 관계와 사회의 여러 면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규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규례가 십계명 다음에 나오고 있는 것은 십계명의 정신을 구체화 시켜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십계명과 또 다른 계명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십계명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그 모습이 이웃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법적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규례나 22장까지 나오는 모든 규례들은 단지 실천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존재이고, 날마다 그 은혜 속에 살아간다는 것을 이런 이웃과의 여러 가지 문제를 통해서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출 받은 사람들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고 있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땅에는 은혜를 제대로 아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규례를 통해서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고 있는가를 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종에 대한 규례입니다. 종은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었을 때의 모습입니다. 20:2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해 냈다고 합니다. 때문에 종을 해방한다는 것은 자신이 종되었던 몸에서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종을 해방시킨다는 것은 세상적인 이치로 볼 때는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종이란 자신의 소유물입니다. 재산으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종을 자유케 하면 분명 재산상의 손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도 종되었다가 은혜로서 구출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종에게 자유를 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종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을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여종으로 아들에게 주었으면 그 여종을 딸로 여겨야 하고, 여종을 자기 아내로 삼았다가 다른 여자에게 장가가도 그 여종을 버릴 수없고 계속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종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도 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종을 평등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대한 규례인 것입니다.
신자가 모든 이웃을 평등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은 자신도 이웃과 같은 처지로 볼 때입니다.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는 결코 평등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다르고, 직분이 다르고, 집안 다르다는 생각이 있다면 상대방을 자신과 차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은혜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신분에 있을 때, 죄의 종으로 있을 때 주어진 것인데 은혜를 안다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달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몸에 상처를 입혔을 때와 손해를 입혔을 때도 배상을 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이웃에게 손해를 입힐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손해를 갚아줌으로 다 끝났다가 아니라 이웃의 소유까지도 보호하고자 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는 것과 고아나 과부를 해롭게 하지 말라는 규례입니다.
나그네 고아 과부는 대표적으로 약한 자입니다. 이들을 보호하라는 것도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나오기 전에는 나그네요, 고아와 과부 같은 그런 처지였다는 것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고아 과부를 해롭게 하고 나그네를 압제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무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네 아내가 과부되고, 네 아들이 고아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줘도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시고, 이웃의 옷을 저당 잡아도 해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하십니다. 이 모두가 가난한 자, 약한 자를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시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단순히 가난한 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사랑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있게 하신 약한 이웃을 통해서 확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규례를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규례인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을 모두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다 포기하고 살 수 있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함에 부족하기 때문에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서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까 말씀으로 사는 것이 힘들지, 다 포기해 버리고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만 감사하며 살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부담이 되고, 어렵다고 느껴지거든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뭔가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아십시오. 사랑은 '세상 것 다 잃어도 주님만 있으면 그것으로 기뻐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약한 자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약자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약자 편에 서 계십니다. 그런데 내가 나에게 있는 힘 때문에 약자 앞에서 강자로 나타난다면 하나님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은 약자의 하나님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재산 다 버리고, 고아되고 과부되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무엇이 있든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오직 주님의 은혜가 있어야 살 수있다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재물이 있다고 해서 '나는 이 돈으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라고 하는 순간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은혜가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외치는 약자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살게 되고, 약자를 무시하고,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무시하고, 약자를 무시하는 것을 보니까 지금껏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교회 나오고, 봉사하고, 헌금했던 모든 것까지 사랑없이 했던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흉내는 냈지만 결국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고, 자기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웃을 돕는다는 것은 조금만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웃을 돕는 것은 내가 그 이웃의 처지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저 사람의 처지가 곧 내 처지다'로 출발하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이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도 죽을 죄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종을 자유케 하는 것이나, 고아 과부를 도우라는 것은 모두가 '너도 종이었고 고아고 과부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은혜를 아는 것이고, 따라서 내가 종의 자리에서 고아와 과부의 자리에서 이웃을 대하는 것이 곧 사랑인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있는 힘은 남에게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상대방보다 뭔가 더 나은 것이 있을 때는 그것을 도구 삼아서 상대방을 자기보다 못한 자로 전락시키고자 하는 것이 인간인데, 자기에게 있는 힘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종으로 고아와 과부 같은 처지로 낮춰서 이웃을 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산다면 세상일도, 교회 일도, 이웃과의 관계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아직까지 나를 포기하지 못한 부분이 있고, 세상을 포기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신앙생활도 부담되지 않습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사랑이 나를 말씀으로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도 신자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데서 일어납니다. 신자와 신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교회를 나오고, 자기를 사랑하며 이웃을 대하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이 이웃을 대하는 모습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행동하는 여러분 자신을 통해서 사랑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알고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모든 일을 주님의 마음으로 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마음을 무시해버리고 내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고, 교회에 관심이 없고, 내가 무엇을 해서 교회에 유익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지도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교회 와서 예배드려주고 가면 내 할 일 다했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인도 받은 것은 어린양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나에게만 주어진 피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 피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피를 나눈 자로서 모이는 것이고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단지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곳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여러분들이 서로 사랑을 보이는 곳입니다. 형제가 은혜에서 벗어날 때 애타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권면하면서, 혹시 나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나누면서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도와준다고 강자가 아닙니다. 어차피 내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헌금하는 것이나 교회 일하는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같이 피를 나눈 자로서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 자가 되기 위해서 애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나는 부족함이 없으니까 다른 이웃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살게 된 자입니다. 그 사랑과 자비를 보이면서 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마음(출 23:16-19) - 17강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된 자들을 부르셨는데 그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신자로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의 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들 멋대로 기준을 정해서 거기에 맞추어서 살려고 힘쓰고 있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가지고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을 해도 이미 자기 기준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은 자기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내가 아는 신앙의 기준을 실천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찾아가려고 모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신앙의 기준을 배우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거나 동조를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시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서 설교되는 말씀들이 자기의 기준과 맞지 않을 때 반발을 하게 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사람이 세운 신앙의 기준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인간의 힘으로 가능해 보인 것들만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천국가는 방법으로 어떤 기준을 제시할 때 그것을 보면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시작하는 말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기준을 모두 인간들이 조금만 열심을 보이면 가능한 것들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주관자가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믿음의 주관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열심히 하면 하는 것만큼 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신자들은 자기들의 열의와 감정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뭔가 신앙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통해서 성경을 배우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은 '그러면 신앙생활에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기도할 것은 하나도 없네요' '우리가 해야할 것은 뭡니까?'라는 것입니다. 자기 쪽에서 뭔가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신앙이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그 모습이 주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믿기가 어려우니까 보이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고자 하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교회서 목사들이 신자들에게 열심을 강조하고 부지런히 행할 것을 요구하면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신앙이 없는 것으로 가르치는 이유도 목사 자신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교회가 교회답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신자들을 보면서 흐뭇해하고 만족해하는 그 자체가 불신앙임을 목사조차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다는 것은, 교회에서 주님의 십자가가 보여질 때입니다. 즉 교회로 모이는 신자들이 서로서로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주님을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이 곧 교회입니다. 그러면 이 모습이 교회의 일에 대한 열심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전에 말한 대로 형제를 대하는 사랑의 마음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어제 우리 교회는 바자회를 했습니다. 해마다 하는 바자회이지만 그 목적을 바자회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바자회를 할 때마다 걱정을 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몇명이나 오겠나?' '뭘해야 하나?' '바자회가 너무 초라하다' '물건이 많아야 할텐데' '수입이 너무 적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기준입니다. 우리 교회는 해마다 바자회를 해서 누군가를 도와주기 때문에 교회답다는 생각은 인간의 기준입니다. 신자들은 교회가 여러 가지 행사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야 뭔가 교회가 활기가 있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앞다투어 여러 가지 행사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신앙의 기준도 교회의 기준도 아닙니다. 교회 행사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교회 행사를 통해서 얻어야 할 유익을 바로 찾아가자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어떤 행사를 통해서 주님의 마음으로 스스로 일하는 것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내가 작은 일에 봉사하는 마음을 배우시라는 것입니다. 바자회를 해서 수입을 가지고 누군가를 도와주자는 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관심 두어야 할 것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모습입니다. 일 안했다고 나무랄 것도 없고, 참석하지 않았다고 핀잔줄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다 우리 기준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자회를 통해서 작은 자리에서 일하는 형제들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모습을 얼마나 발견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발견했습니까? 모든 것을 주님의 사랑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에 대한 결과에 관심을 두게 되면 결국 좋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 주님의 마음은 사라지게 됩니다. 교회의 일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일을 하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을 배웠느냐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결과는 성공이든 실패든 상관없습니다. 성공하면 성공한대로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주님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자리에서 인간의 계획과 노력이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 때 실패의 그 자리는 오히려 성공의 자리로 뒤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기준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약자 보호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보호하는 규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영원한 사망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살아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입은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약자 보호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약자를 보호한다는 것은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에 있는 자들을 내려다보면서 도와주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 또한 약한 자들과 똑같은 약자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약자의 자리에 있는 자들을 바라보면서 저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나에게 있는 것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손해를 유발하게 합니다. 여러분, 그런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나에게 손해가 있게 하시는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여러분의 사업을 도와주고, 소원을 이루어주는 예수님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나 따라갈 수 없습니다. 마음먹는다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만 따라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준을 말을 하면 아주 당황해하고 부담스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과는 너무나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입니다. 그 기준은 네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떤 인간으로 바뀌었느냐 입니다.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아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인간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그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6년 동안은 땅에 파종하여 소산을 거두되 7년째에는 갈지 말고 묵여 두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7년째의 것은 땅이 없는 가난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파종하지 않았는데 곡식이 나는 것은 땅에 남아 있는 씨앗이 자연적으로 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즉 7년째에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도와줘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7년째에 파종을 포기함으로 가난한 자들이 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규례 속에 은혜와 자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 모습을 바라보는 땅주인은 가난한 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서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규례 때문에 남의 밭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 것을 먹는 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천국 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이 땅을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은혜와 자비를 아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안식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육일 동안은 일하고 칠일은 쉬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우리가 세상을 사는 것은 우리가 일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은혜로 산다는 것은 주신 것으로 만족하는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13절에서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할 때 사람은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신을 부르게 됩니다. 그 이름이 하나님이든 무엇이든 그것은 다른 신을 부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14-17절까지의 절기에 대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의 세 절기를 말씀합니다. 이 절기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절기들을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다'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없이도 지금 나에게 있는 지위와 돈만 있으면 세상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떡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 즉 은혜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떡이 있어야 산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떡을 얻기 위해서 모든 노력과 힘을 쏟지만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지금까지 자신이 붙들고 얻고자 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자신은 나를 살리는 떡이 더 필요한데 목사의 입에서는 은혜만을 말하고 은혜로만 만족하라는 말만이 나오기 때문에 불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다면 그것으로 최고의 복을 누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복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떡으로만 살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이런 삶을 배웠습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삶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서 세상을 사는 자는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자비로운 하나님(출 24:12-18; 32:15-20) -18강
사람이 회사에 취직을 하려고 하면 이력서라는 것을 내야 합니다. 그 이력서에는 학력과 경력을 적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느 학교를 나왔고 그동안 어떤 일을 했느냐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경력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것은 그 사람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 되겠는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경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에서만큼은 학력이나 경력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을 학력화하거나 경력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회에는 대학이 유행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하는 대학이 아니라 뭔가를 가르치면 무조건 대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노인대학, 레크레이션 대학, 뭐 한다하면 대학이란 간판을 붙입니다. 사회뿐만이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교회에서 성경을 공부해도 무슨 성서대학이니 하면서 대학이란 간판을 내세웁니다. 교단에서 교사들을 가르치는데도 교사대학이란 명칭을 붙입니다.. 물론 대학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학력 풍조를 따라가는 것 같아서 씁쓰레할 뿐입니다.
사회는 대학을 나온 자와 나오지 않은 자에게 차별화를 둡니다. 학력을 우대하기 때문에 당연합니다. 그런데 교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성경 공부를 마친 자와 마치지 않은 자를 차별화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사를 해도 무슨 과정을 마쳐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많이 배워서 가르치면 좋겠지만 결국 이것은 성경을 많이 아는 자가 그리스도를 잘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닙니까? 이것은 신앙을 학력화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대학이라는 명칭 말고 그냥 교사학교라든가, 아니면 무슨 성경공부라고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뭔가 수준 낮아 보이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신앙의 경력이나 학력을 앞세우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선배 후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먼저 교회 나온 자는 선배고 뒤에 나온 자는 후배다는 것은 세상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먼저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앞선 자는 말씀대로 사는 자입니다. 목사가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앞선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 가운데서 목사보다 더 말씀으로 사는 분이 있으면 그분이 바로 앞선 자입니다. 앞선자라는 것은 1,2,3등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사는 자는 누구나 앞선 자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목사, 장로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신앙 생활을 얼마나 했느냐는 경력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을 찾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나타내는 생활이지 어떤 계명을 지키는 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왜 계명을 주셨겠습니까? 실천을 잘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마치 시험치는 것으로 여깁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그 문제에 답을 하나하나 적어 가는 식입니다. 그리고 맞으면 맞은 것만큼 실력이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50점맞은 사람보다 60점 맞은 사람이 더 실력이 있는 자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지킨 것만큼 신앙이 있는 자가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명은 그런 것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하면 결국 신앙의 경력이나 실력을 따지면서 많이 지킨 사람과 적게 지킨 사람을 차별화 하는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앞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으로 살아난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안다면 그 사람은 평생을 하나님의 자비를 마음에 두고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마음에 두고 산다면 그 사람에게서는 자연히 자비의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계명이란 바로 그 모습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살아가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계명은 우리의 힘으로는 실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어서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문자적으로는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보여지는 것이 교만일 뿐입니다. 지켰다는 자부심만 보여집니다. 이것은 마귀가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원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함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법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법이 언제나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인간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안되니까 포기하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실천할 수 없는 계명을 실천하려고 발버둥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계명을 지켜보겠다고 설쳐댔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를 알아야 하나님의 자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가능성도 없는 나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자비를 알아야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만이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내 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의 죄인 됨을 볼 때 나는 도저히 그런 일을 할 인간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마음이 없이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한다면 그 사람은 하면 하는 것만큼 그것을 자기 경력화하고 자기보다 못한 다른 사람과 차별화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더욱 잘한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결국 위선과 외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주를 쌓고 있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켜서 선하게 될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의지하는 자는 자기의 부족과 무능을 아는 자입니다. 때문에 소위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결코 신앙이 아니며 마귀적인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주님을 이용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계명을 우리 힘으로 실천할 수 없다면 그러면 죄짓고 잘못되게 살아도 된다는 말이냐'라고 반문합니다. 이 사람이 지금 오해하고 있는 것은 죄를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실천하면 죄가 아니고 실천하지 않으면 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은 계명을 실천할 수 없다는 말에 반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계명을 주셨는지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자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죽은 자를 바라보는 그 자리입니다. 하지만 자기의 부족과 무능을 알지 못한 자가 자기 죄를 대신 지신 분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계명을 통해서 우리의 부족과 무능을 알리시고 계명을 지키지 못한 그 결과는 죽음이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나님께서 대신 죽을 자를 보내신 자비와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이고, 대신 피흘리신 그분의 은혜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자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처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결국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를 알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뭔가 해보려고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비는 어떤 자비를 말하는 것입니까? 24:12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시는데 그 이유는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주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율법과 계명을 돌판에 기록해서 주십니까?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라는 말씀을 보아서 뭔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칠 것이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은 율법과 계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율법과 계명은 앞에서 가르치셨기 때문에 또 다시 가르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가르치시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이 32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25장과 32장 사이에는 성막에 대한 규례가 있습니다. 성막에 대한 규례가 중간에 나와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성막이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음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2장을 보면 모세가 돌판을 받아 가지고 내려왔을 때 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며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자기의 지도자로 여기며 따르고 있었는데 모세가 산에 올라간 후 40일이 넘어도 내려오지 않자 그들은 불안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들 생각대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계시한 하나님과, 인간들이 자기들 멋대로 상상해서 만들어 낸 하나님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보니까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춤을 추면서 하나님이라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것을 본 모세는 들고 있는 돌판을 깨뜨려 버립니다. 돌판을 깨뜨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화가 나서 깨뜨려 버렸다고 간단히 생각해 버릴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화가 나서 깨뜨린 것이라면 모세는 하나님이 친히 주신 것을 마음대로 깨뜨려 버린 것이 됩니다.
돌판은 하나님의 계명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 돌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내려오면 계명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때문에 모세는 돌판을 깨뜨려버린 것입니다. 돌판이 깨어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판에 십계명을 기록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잔소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돌판의 계명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돌판이 깨어짐으로서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돌판이 깨어진 것은 이스라엘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깨어지고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만들어서 죄인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고자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안에서 가능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자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우리가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죽인 우리가 뭘 해보겠다고 나서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멋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내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설치는 그 자리가 돌판이 깨어지는 자리요 예수님이 죽으시는 자리입니다. 나를 위해서 주님이 죽으시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 자비로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성 소(출 25:1-9) - 19강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하는 말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느냐는 물음을 던진다면 분명 '살아 계시다'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증거를 보여보라고 할 때는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겨우 하는 말은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는 분이니까 우리가 증명할 수 없다'라고 얼버무리고 말게 됩니다. 즉 신자 자신부터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그 어떤 증거도 갖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고 있다면 그 증거를 무엇으로 내세울 수 있습니까? 증거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안믿는 자에게 믿게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이 나에게 함께 하시고 나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느냐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는 하나님의 모습을 꿈에서 본다거나 어떤 큰 기적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가장 큰 증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6:1을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청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십자가를 말합니다. 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어떤 큰 능력과 기적의 표적을 구했는데 그것이 곧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모습임을 책망하시고서 표적은 오직 십자가가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는 십자가를 표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 한마디로 표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삶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삶으로 바뀐 것이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삶은 버리지 못합니다.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기심이 있는 인간이 자기를 도외시하고 누군가 제 삼자를 위해서, 그것도 보이지도 않는 분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이 남기신 말한마디를 가지고 자기의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이 십자가를 알고 주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편에서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는 무엇입니까? 나의 변화입니다. 나의 삶이 주님을 알기 전과 주님을 알고 난후 변화되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입니다. 이러한 증거를 안고서 세상을 사는 신자라면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저히 이렇게 바뀌어질 수 없는 내가 변화된 것을 보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신다. 살아계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다스리신다. 나를 봐라 내가 그 증거다.'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자가 신자 아니겠습니까?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하냐? 악한 사람들이 잘살고 선한 사람들은 고통받고 사는 것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이냐? 라고 반문을 합니다. 또 신자들 가운데도 열심히 신앙생활했다고 자부하고, 남들보다 부지런히 앞장서서 신앙생활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믿음을 살지 않은 것 같은 사람들보다 더 힘들게 살고,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발생할 때 당장 쏟아지는 불평은 '하나님은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신앙생활 열심히 한 사람을 더 잘되게 해야지 왜 더 힘들게 하시느냐?' 이러한 원망을 많이 하게 됩니다. 결국 신자라고 하지만 불신자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좋게 만드셔야 하고, 참된 신자를 잘살게 만드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뭔가 자기의 일이 잘되어야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 우리의 육신을 편안하게 만드시는 데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세상은 언젠가는 하나님의 손으로 불태워 버릴 곳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가득찬 곳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봐야 또 다시 악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기 좋은 세상인 에덴을 만들어 주셨지만 인간이 그것을 파괴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세상에 악한 사람, 즉 도둑질하고 강도질하고 사기 치고 하는 사람들만 없애버리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그 어떤 인간도 선한 인간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선한 인간만 남기기 위해서 악한 사람을 없애버린다면 우리 모두가 다 죽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새하늘과 새땅에 있으며, 우리가 그 나라에 거할 참된 신자되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기 때문에 지신에게 조금만 손해가 되는 일이 발생해도 하나님을 부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이 우리의 힘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세상에 대한 관심보다는 주님의 길에 더 관심을 두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기뻐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살아 계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우리에게 뭔가 영향을 입혀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게 하는 것입니까? 기도 열심히 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들은 우리의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옛사람이 다 허물어지고 새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내 모든 인생을 맡기는 삶으로 변화된 모습, 그것이 곧 기적이며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증거입니다. 이 증거를 안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증거가 있습니까? 있다면 참으로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은 세상에서 어떤 충격적인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낙심이 먼저가 아니라 그 일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여러분의 중심에서 일하시는 것, 그것을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소를 지을 것을 명령하시는 내용입니다. 성소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함께 하시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삶속에서 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이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장차 성소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가 있고, 제사를 드리면서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들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표준을 우리가 정해서 그것을 기준 삼아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혹 아직까지 여러분이 어려울 때 도와주고, 힘들 때 짐을 나눠져 주는 그런 함께 하심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를 때리고 힘들게 하셔서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바꿔놓고야 마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신자는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배하시도록 나를 내어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뀌어진 인생입니다. 내 인생을 내 계획대로 내 뜻대로 못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하나님이 끌어가시는 대로 감사하고 끌려가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어느 누가 이런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사람이 신을 찾는 것은 자기 인생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찾는 것인데 오히려 포기하라는 말에 반발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목사님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가야하는 인생인 것 다 아는데 또 힘들게 말합니까?'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신자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살아 계신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여러분의 삶속에서 여러분을 다스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성막을 만들어서 그들을 다스리고자 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삽니까? 여러분들 안에 성막이 세워져 있습니까? 성막의 규례를 보면 인간의 생각이 갈 수 없도록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님의 지시가 내려져 있습니다. 크기, 길이, 재료의 종류, 갯수, 모든 부분에 걸쳐서 인간의 판단은 전혀 개입될 수 없도록 되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에는 인간의 생각이나 판단은 전혀 개입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모습입니다. 어느 것은 하나님께 양보하고 어느 것은 양보하지 않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나에게 별 손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하나님께 양보하고, 손해가 될듯 싶으면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앞세워 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종교행위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판단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참된 신자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무조건 사람들의 마음을 좋게 해주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 하면서 책망하고 이 땅에 생명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가를 알리는 사랑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만드시기 위해서 죽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는 오직 생명 되신 주님을 알리기 위해서 힘씁니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을 모방하는 사람은 단지 사람을 좋게 할뿐입니다. 사랑을 가장하고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할말을 하지 않아 버리고, 고쳐줘야 할 것을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신자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에는 관심 두지 않습니다. 오직 내가 해야 할 일, 주님을 전하고 바르게 가르치는 일에 힘쓸 뿐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날마다 말씀에 지배를 받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헌금은 내면서 어려운 자가 보이는데도 한푼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도 하기 싫다는 것을 모르고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즐거운 일이 있으면 반대로 슬픔에 빠진 이웃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마냥 즐거워하고 자랑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소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고자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자 하십니다. 오전 설교대로 여러분의 종교적인 열심, 스스로의 믿음을 믿지 말고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히 여러분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제사장(출 29:1-9) - 20강
성경은 인간을 가리켜서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세상에서 말하는 죄인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누군가를 죄인으로 칭할 때 행위의 잘못을 근거로 해서 죄인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정해놓은 법을 근거로 해서 죄인과 죄인이 아닌 자가 구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을 어기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죄인이라고 부를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상적인 시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을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죄인을 생각하게 될까요? 보나마나 어떤 법을 기준으로 내세워서 그 법을 지키면 죄인이 아니고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해도 부분적인 죄인을 고백하지 전체적으로 타락되어서 어느 한구석도 선한 모습이 없는 죄인은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적으로 죄인이다는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그 어떤 선한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에게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즉 죄인인 인간이 하는 일은 그 어떤 일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교회에서 하는 일은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를 하나 세우고 열심히 노력해서 사람들 많이 끌어 모으고 선교 많이 하고 구제 많이 하면 하나님이 아주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저 목사는 자꾸 교회에서 하는 일까지 선한 것이 아니다는 말을 하느냐'고 이상하게만 생각하실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깊이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주 간단한 이치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왔느냐? 그리스도에게서 나왔느냐? 이 차이입니다. 사람은 죄인이고, 그리스도는 선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의 생각으로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이는 분명히 선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죄인이 죄인의 생각으로 죄인을 위해서 하는 것은 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비록 죄인인 인간이지만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한다면 그것은 악이겠습니까? 선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생각은 모두 선한 것입니다. 때문에 비록 죄인인 인간이 하는 것이지만 죄인의 생각이 아니라 선하신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하기 때문에 선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인 인간이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일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안에 있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칭함 받는 것입니다.그런데 문제는 기독교라는 종교와 연관된 일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생각, 또는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버린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고찰은 전혀 없이 종교적인 일이기 때문에 무조건 선한 일로 단정짓는 것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적인 몸부림에 의해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몸부림이 우리를 구원시킬 수도 없고 선한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도와주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대속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대속의 종교란 우리의 힘으로 안되는 것을 누군가의 도움으로 가능케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행위로서는 제아무리 선하게 보이는 행위라고 할지라도 구원에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셔서 대신 죽으시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대속의 종교라고 하면서 왜 자꾸 인간의 행위에 선을 두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이란 인간에게서는 그 어떤 가능성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대속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아무리 선하게 보이는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의 의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기의 의로 삼지 않는다는 것은 그 행동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한다거나, 자신은 천국갈자가 틀림없다는 표로 삼는다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한 행동이라면 그것은 그렇게 하도록 하신 성령의 도우심이지 인간의 힘으로 한 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을 아는 신자라면 그 어떤 행위를 가지고도 자기의 의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의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도우심이 아니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것인데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신앙생활을 내힘으로 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의 대속을 무시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이란 단지 남에게 머리 숙이고 말로만 겸손떠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깊이 간직하고 사는 자입니다. 이런 신자는 자신이 무엇을 해도 성령이 한 것이지 결코 자기의 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적 겸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중심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기심이 있습니다. 사람의 속중심에는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욕망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에 묶여서 감추어져 있게 됩니다. 세상적인 지위와 체면, 명예라는 것에 묶여서 그 속의 본성이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체면과 도덕을 벗어버릴 어떤 조건이 갖추어지면 그때 사람에게서는 본성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두세 사람이 모이면 스스럼없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복을 입으면 그런 신사다운 신사가 없는데, 예비군복만 입으면, 그것도 여럿이 어울려서 다니게 되면 술 취해서 난장판이고, 고성방가에 노상방뇨에 길거리에 여자들 희롱하고 그런 개망나니가 없을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즉 예비군복이 그동안 구속돼 있는 세상의 도덕과 체면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목사는 어떻습니까? 장로는 어떻습니까? 교회에서는 그토록 인자하고 덕망 높은 목사 장로가 노회, 총회에만 가게 되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소리를 지르고 핏대를 올리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을 보시고 판단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중심을 보신다는 하나님을 이해하십니까? 속중심이 선한 인간이 이 세상에 있습니까? 겉행동이야 선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속중심이 선한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여러분은 자신의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의도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속중심으로 보시고 판단하시기 때문에 인간중에 하나님께 나아갈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이런 인간을 기뻐한다'는 것을 제사장을 모델로 내세워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제사장을 기준으로 해서 우리의 모습을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사장 위임식에 대한 규례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세우신 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의 죄용서를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사장을 세우신 것은 제사장을 바라보고 제사장을 본받아 사는 인간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즉 제사장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레위기 8:35절에 보면 제사장 위임식에 대한 규례가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너희는 칠 주야를 회막문에 거하여 여호와의 부탁을 지키라 그리하면 사망을 면하리라 내가 이같이 명령을 받았느니라 "고 합니다. 제사장이 위임식을 할동안 회막문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규례는 제사장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제사장 위임식동안 회막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은 회막 바깥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결국 제사장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백성다운 삶이고 구원을 얻는 삶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장을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소망이 있으시다면 오늘 제사장의 모습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제사장을 보시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장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제사장을 세우신 규례를 통해서 여호와의 뜻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단지 제사를 진행하기 위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제사장의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기준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원하신다면 제사장 마음을 품으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이것입니다.
제사장은 레위인으로서 재산이 없습니다. 먹고사는 양식은 하나님의 규례 때문에 백성들을 통해서 공급됩니다. 즉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아가는 자가 제사장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제사장은 하나의 모델입니다. 시범조교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신자의 모습인지, 하나님 백성의 바른 삶인지를 시범으로 보여주는 것이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은 제사장을 바라보면서 그 마음을 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생활태도를 내 생활태도로 받아들이려고 애쓸 때 천국에 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언제나 이것입니다. 병낫고, 돈벌고, 자식 잘되고 하는 이런 것들을 성경이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좋아하기 때문에 목사들이 신자들 비위 맞춰 줄려고 하는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귀에 듣기 좋은 말이라고 해서 솔깃하는 것은 아직까지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재산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사는 제사장은 그날그날의 양식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은 날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을 의지해서 세상 것을 쌓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세상 것을 더 갖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여러분 과연 그날그날의 양식으로 감사하며 살아갑니까? 딤전 6:8절에 보면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또 9절에 보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0절에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서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아는 자로서 하나님께 기도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만족하는 인간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부자되기에 힘쓰지 않는 인간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 자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뜻안에서 기도하는 자가 과연 자기의 육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까?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육신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말그대로 그날 필요한 양식입니다. 내일 것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그날그날 것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과연 그날의 것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거의 대부분은 앞일을 대비하기 위한 기도일 것입니다. 그날그날의 것은 굳이 하나님이 주시지 않아도 내힘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루하루의 양식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얼마나 느끼며 살아갑니까? 이것을 느끼며 사는 자가 일용할 양식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고 그 사람이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편안하고 물질이 풍부해져서 하루하루의 양식에 대한 간절함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루에도 수천명이 굶어죽어 간다는 소말리아나 아프리카의 사람들에게는 하루하루의 양식이 정말로 절박한 심정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양식이 얼마나 고마운 하나님의 은혜인지를 생각해 본적 있습니까?
나이드신 분들은 옛날 일제시대나 6.25전쟁을 통해서 일용할 양식에 대한 뼈저린 체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삽니다. 보릿고개를 이야기하면서도 단지 옛날의 추억으로만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풍부함에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더 큰 풍부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살고 있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아론과 그 아들들을 물로 씻기라고 하고, 7절에서는 머리에 관유를 부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제사장은 거룩한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표면적인 거룩이 아니라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으로서의 거룩을 말합니다. 제사장이란 자기 이익과 욕심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남을 위해서 사는 자입니다. 이러한 제사장의 삶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가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말씀을 살펴볼 때 자신의 성공, 출세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신자를 가리켜서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벧전 2:9). 제사장은 목사도 장로도 교회에 오래나온 사람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종교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지 말고 속중심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만을 바라고 사는 그 마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자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제사장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멘. †
행복한 사람(출 29:38-46) - 21강
사람들은 세상 살아가는 재미를 여러 자기를 통해서 얻습니다. 직장에서 승진하는 재미, 사업이 잘되는 재미, 자식이 공부 잘하는 재미, 좋은 집을 장만하는 재미, 하다못해 낡은 가구를 새로 들여놓거나 가전제품을 구입하는 데서까지 재미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재미들만 있으면 세상 살맛 난다고 말합니다. 사실 지금 여러분들이나 여러분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재미를 인생의 행복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인생의 행복이 아니더라 조금 있으니까 다 사라지더라'는 말을 한다면 그 분은 뭔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 것이 있어야 행복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고 살아가는데도 우리는 가끔 이웃을 통해서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세상 것을 잊고 살려고 하는데 좋은 것을 장만한 이웃이 찾아와서 온갖 자랑을 한바탕 늘어놓고 갈 때 자신이 뭔가 잘못 살고 있는 느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남들같이 공부를 못해도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겠지'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려고 하는데 이웃에 공부 잘하는 자식을 둔 어머니가 자식을 자랑할 때, 순간 그 마음들이 산산조각 나서 흩어지면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는 것이 미련하게 보여지고 자식이 공부 잘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복으로 느껴지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에게 행복이 되는 것이라면 기어코 그것을 얻고 싶은 욕망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항상 자기가 좋아하는 쪽으로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들이 대학을 진학합니다. 그럴 때 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학과를 선택하려고 하는데, 부모는 부모대로 좋아하는 학과를 요구합니다. 여기서 서로 마찰이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자기 좋은 쪽으로 행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아들이 부모가 원하는 학과를 선택함으로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학과를 선택함으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쪽으로 움직에게 되어 었습니다. 만약 타인의 기쁨 때문에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억지로 포기했을 때 그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들이 자기가 선택한 학과에서 공부를 잘해서 장학생이라도 될라치면 그 동안의 모든 상처 입은 마음들이 눈녹듯 사라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해 줄 또 다른 큰 기쁨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사람은 또 착한 일을 함으로써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착한 일을 했다는 것이 자기에게 보람이 되고 행복을 안겨다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착한 일을 하게 되면 더 많은 착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결국 남보다 더 많은 착한 일을 하겠다는 욕심이 행복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자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수많은 구제단체들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더 많은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기쁨이 되었던 때와 그 기쁨을 잃어버렸을 때 등을 곰곰히 생각해 보시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평생을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가지만 결국 세상은 그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나이를 많이 드신 분들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나이가 젊을수록 사람들은 자신에게 가능성을 가집니다. 특히 청년들이 예수를 믿기가 힘든 이유는 자신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실패를 아직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의지한다는 것을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을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살면서 실패 속에서 뭔가를 하나 하나 발견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청년의 때에 그것을 미리 맛본 자는 참으로 복된 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그토록 원했던 것, 그것만 있으면 아주 행복해질 것 같이 생각되어졌던 것들이 막상 주어졌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것도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적이 한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또 다른 행복이 되는 것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얻으면 또 행복이 아니고, 또 다시 다른 것을 찾아다니고 그러다가 평생을 행복이 뭔가를 모른채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이란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얼마전 T.V에서 죽음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방영한 것을 봤습니다. 조금 보다가 채널을 돌려 버렸지만 그들은 죽음을 실제로 체험해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관에 넣어 실제 땅에 묻고 몇 시간이 지난 후 꺼내놓고는 그 느낌을 묻습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자에게 단지 땅속에 묻혔다가 나왔다고 해서 죽음의 느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너무나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죽음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죽는 자는 말이 없는데 어떻게 죽음에 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가장 큰 행복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모든 행복을 빼앗겨 버리고 맙니다. 때문에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죽음을 초월하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복된 자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 문제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사장이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본문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주어진 규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드릴 제사가 광야에서 미리 주어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성막의 규례와 제사의 규례가 주어집니까?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땅입니다. 은혜를 알지 못한 자는 들어갈 수 없고, 존재할 수 없는 땅이 되는 것은 성소가 있고 그 성소에서 제사가 드려지기 때문입니다. 제사가 드려짐으로 희생제물이 피를 흘리고 죽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기 때문에 그것이 곧 복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43절에 보면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고 합니다. 제물이 피를 흘리는 곳에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물 되셔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놀라운 은혜요 복임을 아십니까? 결국 행복이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자체가 행복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피흘리셨다는 그것으로 기뻐하며 삽니까? 그것으로 기뻐하신다면 그 기쁨에는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신다면 그것으로 부족함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고 하면서 기뻐하는 신앙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직까지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모든 부족을 채워주시니까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로 만족하고 기뻐하니까 더 이상 다른 것으로 부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합니다.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해결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주님 한분으로 기뻐하며 사십니까? 주님으로 기뻐하신다면 그 무엇에도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주님으로 기뻐한다고 하면서 내가 다니는 교회 신자들이 어떻니, 교회가 어떻니 하면서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결국 주님으로 기뻐하지 않고 있는 증거입니다. 교회를 향한 자신의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어져야 교회를 다니는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은혜와 복을 모르고 있는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45, 46절을 보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심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성소에서 그들과 만나신다고 하십니다. 지금은 성소가 따로 없습니다. 주님이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이제는 모든 세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결국 모든 세상이 성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십니다. 바른 진리가 선포된다고 그곳만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눈이 가려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와 성경공부를 하신 분들이 간혹 저에게 '교회가 바른 말씀을 전하지 못하는데 그 교회를 나와야 합니까?'라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나오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디에든 계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틀린 모습이 많이 보여진다면 그것이 틀렸음을 내 자신이 보여주면 됩니다. 그러나 비판이 아니고 사랑입니다. 어디에 살던지 그리스도의 피를 알고 내가 입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행복한 인생이며 죽음까지 초월할 수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나에게 무엇이 있으나 없으나, 내가 무엇을 하나 안하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자체만으로 행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더러운 나를 거룩하게 하시고 나를 만나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것만으로 부족함이 없어야 하며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제물이 피를 흘리며 죽는 그 자리에서입니다. 내가 죽을 자리에 대신한 제물을 통해서 결국 나는 죽어야 할 존재인데 희생의 피 때문에 살았다는 것을 알 때입니다. 그럴 때 인간은 자기에게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고, 풀의 꽃과 같이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죽음을 초월하게 되는 것이고 모든 환경도 초월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불안감(출 32:1-6) - 22강
사람은 세상에서 안정된 삶을 추구합니다. 즉 평강을 원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 불안함을 가지는 것도 인생이 안정되지 못하고 많은 시련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경제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사람들이 차기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도 대부분이 경제의 안정이었습니다. 경제가 안정되기를 바라는 것은 경제의 안정이 곧 자신의 삶의 안정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불안하면 자신의 삶도 불안해 진다고 여깁니다. 지금도 보면 경제가 불안함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조기퇴직을 당하고 그것이 수많은 남자들에게 불안함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많은 직장인들이 부업을 하고, 학원을 다니면서 전문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모든 이유도 결국은 자신의 삶의 안정을 찾아서 헤매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이와 같이 안정이 없고 불안함만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덴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보이는 것을 통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하고 또 보이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안심하는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평강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평강을 누려보려고 세상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자'라고 하면 꼭 '하나님을 보여봐라'고 따져 묻는 이유도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겠다는 인간의 타락한 모습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믿지 못하는 그 불신앙이 우리들에게 평강을 잃어버리게 하고 대신 온갖 불안함이 몰려오게 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먼길을 떠날 때 어머니들이 호주머니에 용돈을 넉넉하게 주면서 하는 '수중에 돈이 있어야 힘을 잃지 않는다'는 말도 모두 보이는 것을 통해서 평강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인간이 보이는 것을 통해서 평강을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이 아담 때부터 사단에게 붙들려 있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바라보았을 때 그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보여진 모든 것도 결국 눈에 보여지는 것에 매력을 느낀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후로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보다는 눈에 보여지고 확인되어지는 믿음에 더 매력을 느끼며 살게 된 것입니다. 제아무리 믿음을 말해도 눈에 보여진 증거가 없으면 믿음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어떤 체험이 있고 확인되어지는 증거만 있다면 그것을 믿음의 진수로 여기면서 그러한 헛된 믿음을 쫓고 있는 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사람들은 간증이라는 것을 할 때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말하기보다는 자신의 체험이나 어떤 표적을 제시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물론 신자 개개인의 체험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무수한 체험이 있습니다. 한동안은 그 체험을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게 된 후부터는 그 체험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목사라는 입장에서 섣불리 체험을 말하면 그것이 신자들의 신앙의 기준이 되어버릴수가 있기 때문에 무척 조심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체험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내세우는 것은 그런 체험을 나누면서 은연중에 체험적인 신앙으로 빠지게 되면 항상 체험을 기다리게 되고, 체험이 없으면 신앙이 없는 것은 같은 착각에 빠지기 때문에 체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꺼려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은 보이는 것은 믿음의 대상도 증거도 아니다는 뜻입니다. 보이는 것을 제시하는 것은 사단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제시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보이는 것입니다. 떡, 권력, 명예 이 모두가 세상에서 삶에 안정을 줄 수 있고 사람들이 세상을 헤매면서 얻고자 애를 쓰는 것들입니다. 심지어는 말씀을 인용하면서도 그 말씀을 눈에 보이는 것을 제공하는 약속으로 바꾸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단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오늘날 교회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서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모습이 보여지면 기를 쓰고 그것을 지적하고 그것이 아니라고 외치는 그 이유를 알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고 신뢰하게 하는 것은 사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모든 재산들도 사단이 준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에 만족하고 보이는 재산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신자인데 사단은 주어진 것에 대해서 불평하게 하고, 재산을 의지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40일을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은 불안해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자기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단지 하나님이 이용하시는 도구였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없음으로 인해서 잃어버린 평강을 다시 되찾고자 모세 대신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듭니다. 그 신의 모습은 송아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송아지를 가리켜서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4절)고 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목이 곧은 백성'(9절)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진멸하시겠다고 하십니다(10절).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지 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 이름 붙였다는 것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멸시하게 된 것은 하나님을 단지 자기들의 삶에 안정을 가져다주는 그런 하나님 정도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송아지 앞에서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리며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6절). 즉 희생을 단지 자기들의 평강, 자기들의 삶의 안정을 위해서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진노하십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삶을 사랑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시고 자기의 인생을 도우셔서 안정과 평안으로 인도하실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앞으로 자기들을 인도할 하나님 아닌 송아지에게 희생을 드린 것같이 말입니다.
6절에 보면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고 합니다. 번제와 화목제는 모두 희생을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는 제물을 모두 태우는 것입니다. 즉 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임을 의미하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사를 드리면서도 자기를 태워버리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더 사랑하고 자기 만족을 누리는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물의 희생을 모독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먹고 마시며 뛰논다는 것은 모두 자기 즐거움입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들이 만든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에게 제사 아닌 제사를 드리면서 자기들의 복을 추구하면서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에서 보여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은석교회는 또 어떠합니까?
여기서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번 수요일이 성탄절입니다. 보통 성탄절은 많은 장식을 하고 깜박이는 전구도 장식하면서 성탄절 분위기를 만들고, 그리고 성탄절 저녁에는 유년부들의 노래와 율동을 들으면서 지내곤 합니다. 그런데 은석교회는 다른 교회에 비해서는 너무 썰렁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히려 잘됐다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과연 썰렁하게 성탄절을 보낼 때 은석교회 신자들이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말을 하겠는가가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을 지내고 나면 흔히 하는 말이 뭡니까? '재미있었다'또는 '재미없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에 대한 만족의 정도를 가지고 성탄절을 평가해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뛰놀며 자기 만족을 채우며 기뻐하는 날이 되버린 것입니다. 목사는 또 목사 입장에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준비해서 신자들에게 제공함으로 교회에 대한 만족을 느끼게 해주고 신자들이 '재미있었다' '재미없었다'고 하는 그 말 한마디에 기뻐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들이 과연 여호와를 믿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까?
여호와를 믿는 믿음이라면 성탄절을 어떻게 지내든 그리스도안에서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성탄절을 주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면 연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연약한 모습, 낮고 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주님을 이해하는 마음은 없이 단지 어떤 행사나 놀이를 통해서 즐거워하고 만족해한다면 그것은 결코 주님을 믿고 있는 모습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자기 사랑에 불과하며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신앙의 만족을 누리는 불신앙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쁨과 즐거움이란 주님을 알게 되었을 때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어쩐 종교적인 행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종교적인 행사를 통해서 신자에게 기쁨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은 신자를 자기 교회에 재미를 느끼게 하고 붙들어 놓고자 하는 속셈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보이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고자 하는 유혹이 없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으라는 말에 왠지 불안하고 신뢰할 수 없는 모습은 아닙니까? 그 모든 것이 불신앙이며 여호와를 멸시하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 때문에 안심하고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시고 책임지시는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통해서 담대해지기 바랍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고 평강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바랍니다.
헌신(출 32:25-29) - 23강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 백성이 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희생을 드리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자기들 곁에 없다는 것이 불안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일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모세를 더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만약 보이는 것이 자기에게서 사라질 때 사람은 불안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이 자기의 미래를 책임져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기들의 미래는 모세가 책임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모세가 없자 그들은 자기들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고 염려하게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어야 안정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집 전셋집에서 예배를 모이는 것보다도 조그마해도 좋으니까 우리 땅에다가 아담한 예배당을 지어서 예배를 드리면 더 은혜가 될 것같고, 더 기쁨이 될 것 같고, 더 힘이 날 것같고, 더 안정되고 평안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토록 예배당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처음 시작할 때 예배당 건축 계획을 미리 세워놓고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잘 지어진 예배당을 바라보면서 마음뿌듯해 하고, 든든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천국에서는 티끌만큼도 필요없는 것들입니다. 언젠가 수요일에 '천국갈 때 예배당 지고 갈 것도 아닌데 왜 예배당을 원하는가?'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이 마음에 안드시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천국에서 필요없는 것들에는 마음두지 맙시다. 천국에서 가치 없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맙시다. 이것이 믿음이고, 천국을 아는 자입니다. 예배도 눈에 보이는 예배를 즐기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희생을 드리며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뛰놀았다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를 즐기는 것입니다. 귀에 들리는 것을 즐기다 보니 악기에 관심을 두게 되고, 돈이 있는 교회는 몇억씩 하는 파이프 오르간을 구입하게 됩니다.
저는 2년 전에 서울 양재동의 횃불 회관에 설치되있는 파이프 오르간을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관리하는 분들은 오르간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독일제인데 3억인가를 들여서 설치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관리인에게 '이거 소리 좋아요'라고 물었더니 '물론이죠. 돈이 얼만데, 이거 치면 은혜가 저절로 되요'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비싼 악기, 소리가 좋은 악기를 가지고 반주를 하면 찬양에 은혜가 저절로 된다는 생각 자체가 바로 귀에 들리는 것을 즐기는 우상입니다. 실제 서울에서는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는 교회를 찾아간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몇억을 가지고 악기를 사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몇억이라 할지라도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이프 오르간이 일반 피아노보다 더 은혜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예배를 즐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가대가 없으니까 예배가 허전하다든지, 강대상에 시든 꽃을 그대로 꽂아 놓은 것까지 신경을 쓰는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예배를 즐기고 있기 때문임을 아셔야 합니다. 이와 같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안정을 찾고 평강을 찾아보고자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됩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가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할 때 모세에게로 모여드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레위인이었던 것입니다. 즉 레위인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희생을 드리는 일에 함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편에 서있던 레위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에게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전달합니다. 레위 자손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이 날에 레위 자손의 칼에 죽은 자가 삼천명 가량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29절에 보면 레위인이 그 아들과 형제를 친 것을 가지고 여호와께 헌신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신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헌신입니다. 우리는 여호와께 헌신한다는 것을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수고하고 일하는 것을 가지고 헌신이라고 이해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헌신은 그런 의미와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긴 하였어도 결국 하나님이란 이름으로 불렀는데 그 이스라엘 백성을 몽땅 죽인다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데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지만 아들과 형제를 죽인 것을 가지고 헌신이라고 말하는 것도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레위인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장차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 땅을 나누어서 자기들의 분깃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레위지파들만은 분깃이 없습니다. 즉 땅이 없다는 것입니다. 땅이 없다는 것은 살 터전이 없는 것입니다. 땅이 있어야 천막을 칠 수 있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러서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땅이 없다면 그런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결국 양식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레위인은 무엇으로 먹고삽니까? 하나님은 레위인이 성막에서만 일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릴 때 이스라엘 백성이 가져오는 제물을 가지고 양식을 삼도록 하셨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손에 쥐고 있으므로 안정을 찾습니다. 그런데 땅이 없다는 것은 결국 미래가 확실치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비록 레위인이 성막의 일을 전담했다고는 할지라도 땅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땅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요즘 이러한 레위인의 규례를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직장을 가지지 않고 교회에서 교회에 관계된 일만 하는 목사를 비유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때 레위인이 오늘날 목사를 말한다면 목사는 그 어떤 재산도 가지면 안됩니다. 땅도 집도 가지면 안됩니다. 오직 남이 주는 것을 가지고 먹고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목사는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레위인은 지금의 목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레위인은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사는 족속이 아닙니다. 제사의 제물이 그들의 양식입니다. 즉 하나님이 레위인의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신 18:2에 보면 "그들이 그 형제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은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게 되어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고 살기란 그야말로 여호와의 은혜가 아니면 되어질 수 없는 삶입니다.
이러한 레위인을 이스라엘 사이에 존재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얻은 기업을 의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얻은 기업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땅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레위인을 통해서 깨닫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게 되다면 레위인이 이스라엘에게 심판의 도구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레위인이 레위인의 모습을 보이지 못할 때는 레위인에게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레위인이 심판자로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장차 레위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의 편으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 금송아지를 섬긴 형제, 친구, 이웃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문자 그대로 적용되면 안됩니다. 여호와의 편에 서 있는 레위인이 형제 친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금송아지를 섬긴자들을 죽인 것은 여호와의 편에 선다는 것은 형제나 친구 이웃까지도 초월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에서 어긋나 있는데 형제요, 친구라 해서 타협하고 양보해 버린다면 그것은 잘못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편에 선자는 형제나 친구들에게까지 그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잘못됨을 보여주는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결국 헌신이란 여호와를 위해서 무슨 큰 일을 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여호와의 편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에 어긋나 있는 것은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헌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기업이고 전부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들을 심판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여호와께 헌신하는 삶입니다. 내 전체를 여호와께 드린 삶인 것입니다.
오늘날 레위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전부로 삼고 사셨습니다. 머리 둘곳도 없을 정도로 눈에 보이는 것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 우리들을 심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에 붙들려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머리둘 곳도 없었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우리는 내가 사는 집이 좋니 나쁘니 하면서 불평 불만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여호와의 편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사는 것은 멸망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예수님 편에 서서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의지하고 살기를 원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아서 여호와의 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 땅에 보여주신 것이 곧 예수님의 헌신이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여호와께 헌신할 수 있는 것도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업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 곧 멸망 받을 죄임을 심판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배웁니까? 우린 예수님에게서 돈버는 기술이나, 복받는 비결을 배울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헌신의 삶에 대해서 배울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임을 알고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으로 여호와의 편에 서서 세상을 살아가는 헌신의 삶을 소원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중보자(출 33:1-6) - 24강
지난주에는 헌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헌신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단지 교회 일에 열심히 하는 것이 헌신이라면 그것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조금만 노력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헌신이란 자기를 모두 태우는 것입니다. 자기를 태운다는 것은 내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모든 사생활을 포기하고 교회에 틀어박혀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모두가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은 내 삶 전체가 하나님을 보여주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뭐가 신앙적인 것이고, 뭐가 불신앙적인 것인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헌신의 삶을 사신 분은 예수님 한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참된 레위인도 예수님이셨습니다. 참된 나실인도 예수님이셨습니다. 인간은 한 사람도 레위인의 삶을 보여주고, 나실인의 삶을 보여줌으로서 하나님을 증거한 자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레위인 되시고 나실인되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중보자로 삼고 우리의 죄를 깨달으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보자로 삼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는 하나님의 의와 전혀 반대인 세상과는 양보와 타협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헌신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그속에 왕이 되셔서 다스림을 받으면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아닌 것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직 하나님의 요구대로 움직이는 삶이 곧 헌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친척이나 혈연에 너무 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친척과 형제들에게 욕을 먹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친척에게 형제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친척들의 요구에 순종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요구와 반대되는 일에는 전혀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편에 서서 잘못된 것은 잘못이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이 곧 여호와께 헌신하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보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왜 인간에게 중보자가 필요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시하시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향해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대로 사자를 앞서서 보내어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도록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올라가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목이 곧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목이 곧은 백성이어서 그들이 싫어서 같이 가지 않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목이 곧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의 입장과 자기의 뜻을 먼저 내세우는 그런 족속이기 때문에 만약 의로우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들을 가만두지 않으시고 진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성은 이 말을 듣고 슬퍼해서 한 사람도 자기 몸을 단장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기 몸을 단장하지 않았다는 것은 죄를 깊이 깨달은 모습의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서 집에 부모가 죽거나 큰 일이 생겨서 온 집안이 슬픔에 빠져 있는데 어떤 식구가 자기 몸을 화장하고 보석으로 단장을 하고 화려한 옷을 입는다면 그 사람은 가족의 슬픔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즉 슬픔 때문에 자기 몸을 단장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슬퍼해서 단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깊은 뉘우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올라가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말씀드린 대로 의의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평생 소원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꿈에라도 좋으니까 하나님을 봤으면 원이 없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그 이유를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중보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보의 역할을 한 것은 법궤였습니다. 법궤가 함께 하는 것은 곧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법궤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법궤가 왜 그들에게 주어지게 되었는가를 그들이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법궤에 피가 뿌려지는 규례가 주어졌는가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법궤가 그들 가운데 있다고 해도 그것은 헛일이었습니다.
법궤 앞에서 그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우리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죽어야 하는 죄인 중의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법궤에 뿌려지는 피가 아니면 우린 죽은 존재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법궤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은 법궤에 뿌려지는 피의 주인공 때문에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중보자가 아니면 나는 살 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지금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또 다시 할 수밖에 없는 이 마음을 이해하십니까? 믿음은 지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안다고 해서 그것이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안다면 그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고, 그 마음으로 산다면 그 마음이 여러분을 주장하고 있는 삶의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그런데 중보자가 아니면 나는 살 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그 마음에 다스림 받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또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보자는 물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목이 곧은 백성이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모두 진멸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로 등장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으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가 생명 안에 거할 수 있는 지시사항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중보자로 영접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나도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고, 말씀이 싫어하는 것은 나도 싫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연륜이, 신앙의 체험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어제의 신앙이 오늘의 나를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이 교회생활을 오랫동안 해오신 연로하신 분들에게는 싫은 소리가 될지 모르지만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일수록 이것만큼은 조심해야 합니다. 몇십년 신앙생활했다는 것이 자신의 믿음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생각과 고집이 자기에게 쌓이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각에 반대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고집이 중보자이신 주님을 믿는 믿음을 방해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에게 특별히 드리는 말씀입니다.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 연륜에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성경 지식에도 자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종교적인 체험에도 자리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그 마음에 자리하십니다. 그 마음으로 신앙생활할 때 그 사람에게는 몇십년 신앙생활 했다는 것도 부끄러울 뿐이고 헛된 세월로 다가올 뿐입니다. 신앙의 체험이라는 것도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삶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중보자 예수님을 아는 자라면 자기를 자랑하지 않을 것이고, 자기보다 못한 자를 무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자 힘쓸 것입니다.
우리는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기보다는 먼저 내 이익을 생각하고 내 생활을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의지하는 것은 내가 편해진 다음의 일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이러한 우리 때문에 예수님이 중보자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시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 예수님만이 우리의 중보자입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중보자의 자리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상입니다. '아니 목사님, 우리가 바보입니까? 중보자는 예수님인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그 자리에 다른 것을 두게요'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둘 때가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데도 예수님과 함께 다른 것을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신앙의 연륜일 수 있고, 열심있는 기도일수도 있고, 헌금일수도 있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자신의 삶일 수도 있고, 종교적인 전통일수도 있습니다. 주님 외에 다른 것을 신성화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우상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중보자 예수를 믿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치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나를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것에만 관심을 두면 세상에서 나를 돕고 나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나, 돈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힘있는 사람을 가까이 하려고 하게 되고, 돈을 가까이 하게 됩니다. 그 마음에는 이미 중보자 예수는 자리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예수가 자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중보자 예수 외에 가치를 두는 것이나 의지하는 것은 교회에서 모두 추방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이며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그런 신자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죽은 우리를 향해서 '너는 죽은 자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생명 되신 예수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거부하면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갑시다. 이것이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이며 만날 수 없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복을 누리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출 40:34-38) - 25강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물위를 걷는 것을 베드로가 보고는 자기도 물위를 걷기를 원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물위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가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을 때 더 이상 물위를 걷지 못하고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건져주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신 이야기가 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왜 물에 빠지게 되었으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다고 하신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위를 걸을 수가 있다고 굳게 믿는 믿음이 적었음을 나무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게 된 것은 주님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힘으로 걷고 있는 것이지 자기 힘이 아닙니다. 결국 믿음이란 주님의 힘을 의지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바람이 부는 바다 위를 걷게 하셔서 주님이 계신 곳으로 인도해 가실 것을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바람이 불자 그 믿음이 사라집니다. 바람 때문에 자기가 물에 빠질 것이 염려되었던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걷고 있다면 그런 마음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자기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걷고 있다면 바람이 아니라 그 어떤 태풍이 불어도 주님은 나를 이 바다 위를 걷게 하셔서 주님이 계신 곳까지 도달하게 하실 것이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람 때문에 주님의 인도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이야기는 지금 우리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은 한마디로 바람을 무서워하는 베드로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바람이 없을 때는 주님 편에 서서 주님의 말씀대로 하려고 애를 쓰다가도 바람이 있으면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라는 의심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바람이 있어도 주님께 내 인생을 맡기고 주님의 말씀에만 순종하겠다는 용기가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에 문제점입니다. 자기의 인생을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미래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이나 자식의 인생의 미래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뭔가 되어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내가 하지 못했다면 자식이라도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을 소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소망에 대한 보장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장이 될만한 것을 찾아서 세상을 헤매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부분을 오해합니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인생을 포기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성공적인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인생을 책임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까지 인도함 받는 그 성공을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이 부분에서 하나님과 뭔가 갈등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인생에 대해서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길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길이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길은 세상에서 잘되는 것입니다. 문제 속에서 해결이 있는 길을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이러한 길잡이로 일하시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보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을 믿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갈등에 해결점을 얻기 위해서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 출애굽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끄집어내신 것은 이스라엘을 어디론가로 들여보내시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살고 있는 자리에서 살지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곳으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계속해서 살았으면 비록 애굽의 종으로 살았다고 해도 먹을 것은 해결하고, 먹고 싶은 것도 먹을 수가 있었고 목마를 때는 마음대로 마실 수가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오자 그 모든 환경이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 때문에 애굽에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을 도저히 볼 수가 없고 얻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갈등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이러한 신앙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갈등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하나 깨달아가고 믿어감으로 인해서 결국 내가 원했던 것은 잠시 동안의 행복이고 물거품 같은 것이며,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임을 점차 알아갈 때 그 사람은 출애굽의 과정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성막을 짓고 나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구름을 따라서 움직입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르면 움직이고, 떠오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구름가운데 불로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이 구름으로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구름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고 구름이 가는 곳이 바로 하나님이 가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구름이 어디에 머물러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름은 회막 위에 덮여 있습니다. 이스라엘 위에 덮여 있는 것이 아니라 회막 위에 덮여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회막 위에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관심두고 계시고,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지키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회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신다고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가치 없는 것은 버립니다. 가지고 있어봐야 별 필요가 없고, 귀찮고, 소용이 없는 것은 버려버립니다. 어떤 것은 버리면서도 속시원해 합니다. 그러나 귀중한 것은 지키고 보호합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우리는,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과연 가치 있는 존재입니까? 가치 없는 존재입니까?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까? 죄송하지만 오전에 말한 대로 벌레 같고 지렁이 같은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가치 없습니다. 지키고 보호할 만큼 귀중하고 사랑스런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뭘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을 했습니까? 오히려 살면 살수록 죄만 보여주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뭐 잘났다고 하나님께 나와서 나를 지켜달라고, 나를 잘되게 해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구름은 회막에 덮여 있었습니다. 회막이 여호와의 중심입니다. 그러면 회막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존재하는 곳입니다. 양의 피가 뿌려지면서 이스라엘에 뿌려져야 할 여호와의 진노가 해결되는 은혜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 은혜를 중심으로 움직이십니다. 은혜를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 그 은혜 안에 있으면 그 자가 누구이든, 어떤 죄를 지은 자이든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회막은 곧 주님의 십자가의 피흘리심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십자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일하시고, 오직 십자가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주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구던 그 피에 자기를 맡기는 자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을 우리의 생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누구든 주님을 영접한 자는 그 안에 거하시는 주님 때문에 하나님께 귀하게 여김 받고 하나님의 지키심을 받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심을 둔 자만 지키십니다. 나를 위해 피흘리신 주님께 관심을 두면서 나의 관심을 점차 포기하고 점점 세상에서부터 벗어나는 그런 신자만이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는 것이며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지만 세상을 향한 우리의 관심을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이루어지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관심에 자기의 관심이 가 있는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셔서 생명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고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붙들어서 나를 감싸고 나를 주장하며 세상으로 고개가 돌려질 때마다 나를 질책하며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도록 도우십니다. 왜 이런 도우심을 하찮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이런 도우심이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 안에서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자가 되겠습니까? 엉뚱한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세상일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상관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세상적인 관심을 도우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움직이는 자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주님의 피입니다. 돈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헛일입니다. 육체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도 역시 헛일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관심을 가지고 사십시오. 그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항상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한 세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키심과 인도하심은 그리스도안에서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밖에 있으면서, 이미 관심은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기의 인생에 있으면서도 그 인생을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고 도우심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자는 생명은 그리스도임을 잊지 않습니다. 반면에 세상은 헛되다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혀도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 속에서도 생명에 대한 관심이 흐려지지 않고 주님을 보여주는 삶이 되기를 갈망하며 도우심을 구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 힘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같은 문제를 두고 같이 기도를 하지만 관심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신자이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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