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내용!! 강해!!

[스크랩] 레위기 강해

하나님아들 2014. 11. 20. 00:08

 

 

 

 

 

 

레위기 강해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사랑의 제사(레 1:1-2)
951001400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신자는 교회를 다니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책임이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을 나도 소유하고 싶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것은 버리고 오직 하나님 마음만 나에게서 보여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도 사랑하기를 힘쓰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같이 나도 공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값없이 은혜 베푸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시라면 나도 값없이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흔히 신자들은 자신이 뭔가를 안하므로 정당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안하는 것으로 신자가 된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안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살아가느냐를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통해서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살려 놓으신 이유는 나를 통해서 누군가가 유익을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나를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고 남을 위해서 사는 자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이 일을 함으로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를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네가 그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형제가 어떤 유익을 받느냐’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만약 내가 어떤 일을 하지 않았다면 형제에게 갈 유익이 소멸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봉사하지 않은 것이 되고 결국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남을 해롭게 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닐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신자는 주님을 따르는 자이며 주님을 표적으로 삼고 나아가는 자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여기에는 교만이나 경쟁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주님하고만 비교하십시오. 그럴 때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 살고자 할 때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를 때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사랑은 자기중심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내가 손해 보지 않고서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내 손해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때문에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에는 필연코 누군가의 희생이 담겨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희생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희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가치 없는 자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것입니다. 신자는 이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희생으로 사랑을 받았으니 나 또한 이 사랑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사랑할 대상은 내가 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만나게 하신 모든 자가 내가 사랑을 보여야 할 대상입니다. 인간이 이 사안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제사는 정성과 지성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구약의 제사를 지금의 예배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성과 지성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구약의 제사가 지금의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쳐지는 제물이 있어야 제사가 되는 것 같이 바쳐지는 제물이 있어야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바쳐지는 제물이 나 자신이라고 합니다. 즉 내가 제물 되는 것이 참된 예배인 것입니다. 제물은 이 제물처럼 너도 죽어야 하는 제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너도 죽어야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제사를 지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도 이 제물같이 죽어야 할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너는 살아났고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레위기의 제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의 제사는 사랑의 제사인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자입니다. 아들 예수까지 버리신 그 사랑으로 살아난 존재가 바로 여러분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살아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나를 통해서 보여지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언제나 내 중심으로 살아온 믿음의 삶이 하나님의 사랑을 앎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이웃 중심으로 바꿔져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알고 내 이웃을 나와 비교하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을 보여야 할 대상으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받는 것을 사랑으로 아는 한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받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순간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내가 정말 못나고 이기적이고 쓸모없는 사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고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를 나가고 신자들과 만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희생의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희생하지 못하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자신의 못난 모습, 죄인된 모습을 발견하십시오,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 있지 않은 자고 또한 사랑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사랑을 받았은즉 사랑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번 제(레 1:3-9)
9510084102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무거운 짐을 지고 높은 산을 헉헉대며 올라가고 있는 모습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짐을 던져 버리고 싶지만 쉽게 던져버릴 수 없고, 내려놓고 잠시라도 쉬고 싶지만 남이 나를 앞질러 가는 것이 두려워서 잠시도 쉬지 못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사람은 인생이라는 짐을 떨쳐 버리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 짐을 해결하고자 예수님께 나아오지만 오히려 신앙이라는 짐이 하나 더 지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모든 짐이라는 것은 내 스스로가 만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에 대한 욕심, 자식에 대한 욕심, 세상에서 남들 못지않게 잘 살아보고자 하는 욕심들이 우리에게 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쉬게 하시겠다는 것은 우리의 짐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고 인생이 짐이 안 되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인생에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 신가라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주신 규례 중에서 번제라는 제사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제사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느냐 입니다. 번제물은 소니 양이나 염소 또는 집비둘기로 정해져 있습니다. 번제물이 여러 가지로 정해져 있는 것은 자기의 형편대로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를 드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돈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다못해 산비둘기라도 잡아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물이 다르다고 해서 제사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즉 값나가는 제물이라고 해서 그 제사가 다른 제사보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제물은 곧 나를 가리킵니다. 즉 제물을 통해서 앞으로 내가 당할 일을 미리 보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나중 운영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제물을 가져오라해서 그 제물이 죽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제물을 잡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죽어야 할 존재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번제는 제물을 태우는 것입니다. 제물이 태워짐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제물을 태웠다는 것은 나의 죄를 다 태웠다는 의미이고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제사는 태워서 죽이는 것입니다. 나를 태워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 대신에 제물을 잡아서 죽이고 나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린 인생을 너무 나의 편에서만 바라봅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만이 최고의 인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짐이 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생의 사고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겠다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봉사하는 인생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는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워지는 제물을 바라보면서 저것은 지금 내가 타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죄를 태우고 있는 것임을 아는 것이 곧 제사입니다. 신자들은 보통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주님의 고통과 죽으심만을 생각하고 지나칩니다. 하지만 신자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도 나 대신 죽은 제물이 누구였는가를 봐야하고 나도 십자가를 진 예수님과 함께 죽은 존재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제물 되어지는 삶을 곧 예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세상에서 내가 잘돼보겠다는 인생이 아니라 내가 제물 되어서 하나님께 봉사하겠다는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제는 내 인생이 아니고 예수님의 인생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아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번제로 자신을 바쳐가는 삶을 사는 자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태우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이란 열심히 힘을 내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선교사로 나가는 것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세상에서 살 때 나를 위해서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도 교회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하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힘쓴다면 그것이 봉사이고 헌신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나의 성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까? 내 인생의 목적이 나의 성공이 아니라 내가 죄인 됨을 알고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곧 나의 뜻이 되어서 하나님을 섬길 때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고 내 몸을 드리는 것이고 번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태워지는 제물을 보면서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지 못한 자는 십자가를 보면서도 자신의 인생이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에 포함된 인생임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십자가는 말하지만 결국 가는 인생은 자신의 인생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을 잘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과 절대로 상관없는 것임을 알야야합니다. 하나님이 향기로운 제사로 여기시는 것은 자신의 모든 삶을 나를 위해서 힘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힘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제물 되고 나를 태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 장소가 곧 제물을 드리는 제단이고 그것이 곧 제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소 제(레 2:1-3)
9510154203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 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정신으로 존재하지 못할 때 그들은 이스라엘 될 수가 없었던 것같이 지금 신자들이 십자가의 정신으로 존재하지 못하면 신자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조직이나 예배의식이 교회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이 교회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만이 관심이 되어야 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는 어디에서 주님을 만나고 찾을 수 있으며 무엇이 주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까?

 

 


지난 주일에는 번제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번제는 내 모두를 바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불태워서 주님의 일을 하자는 것이 아니고 제물이 태워지는 것 같이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는 심판 받아 죽어야 할 존재임을 제물을 보고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번제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도 주님과 함께 죽은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나를 헌신하는 것이 번제입니다.

 

 


소제는 제물이 곡물입니다. 곡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에는 고운 가루가 되도록 빻아서 드리도록 되어있습니다. 즉 이것은 신자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부서진 가루로서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이 부서진 가루로 무교병을 만들어서 드리라고 합니다. 무교병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말합니다. 즉 딱딱하고 맛없는 떡을 만들어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소제물 위에 번제물과 마찬가지로 신자의 인생이 어떠해야 하는가가 담겨 있습니다. 곡물이 부서져 가루가 되는 것같이 그리고 맛없는 무교병이 되는 것 같이 신자의 인생은 고난의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일부러 어렵고 힘든 상황으로 만들고 그런 일들만을 찾아가야 하고 생활에 어려움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이 가신 길이 세상의 영광을 다 포기하고 섬기고 사랑하시기 위해서 수치를 받으시고 죽으신 것 같이 신자의 인생은 섬김과 사랑을 위해서 내가 희생하고 손해 보는 길을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희생하고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길을 간다는 것은 신자에게는 고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부서지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이 길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주님이 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주님의 이름만 부른다고 가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섬김을 아는 자가 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땅의 것을 모으는 기쁨으로 살아가지만 신자는 재가 부서지고 섬기는 기쁨과 행복으로 사는 자입니다. 이 기쁨과 행복은 주님의 길에 서 있는 자만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번제단에 내 몸을 바친 존재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은 존재입니다. 이제 남은 인생은 헌신과 희생이 있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는 우리의 인생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화려하게 살려고 하는 꿈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화려하게 하려고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해보고 싶고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부지런히 열심히 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결국 내 욕심에서 비롯된 것일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니고 또 신앙의 기쁨도 그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기쁨과 행복은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을 만나지 못한 자는 이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은 오직 주님이 가신 길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희생과 섬김이 없는 곳에 주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화목제(레 3:1-5)
9510224304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그는 또 그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할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하나님은 신자가 하나님 편에서 주어지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즉 내 쪽에서 좋은 것은 택하고 싫은 것은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올 때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는 모습보다는 내 것을 요구해서 그것을 들어주실 때 감사하고 보답하겠다는 마음으로 나옵니다. 이러다 보니 나타나는 현상은 신앙이 무질서해진 것입니다. 뭔가 확고한 목표가 없는, 고장 난 배가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가는 것 같은 모습의 신앙이 된 것입니다. 자신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서 움직여지는 신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본문은 화목제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린 소제는 인간이 제단 앞에서 자신이 불에 태워지는 제물과 같은 존재임을 깨달았을 때 이제는 세상을 향한 모든 소원과 욕심이 부서진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임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 힘들기 때문에 신자는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할 존재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인간이 이런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마귀의 유혹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같이 되는 것을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은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화목제는 하나님께서 다시 본래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로 우리를 부르시는 제사입니다. 본래의 관계란 인간이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화목제는 번제와 모든 것이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은 번제는 제물의 모든 것을 태우지만 화목제는 내장과 내장에 덮인 기름은 태우고 고기는 하나님 앞에서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번제에서 태워지는 제물은 곧 나 자신임을 말씀드렸습니다. 화목제에서도 바쳐지는 제물은 곧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남은 고기를 먹을 때 그 고기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나 자신인 것입니다. 내가 나를 먹도록 되어 있는 것이 화목제입니다. 이것은 내가 나를 먹으면서 나는 죽었다는 것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은 존재임을 아는 자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은 존재임을 안다는 것이 쉬운 말이 아닙니다. 내가 죽은 존재임을 아는 자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 없으면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살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죽은 존재임을 안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의 가능성을 버리지 않는 한 나는 죽은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화목을 원하시지만 우리가 죽은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나의 힘과 땅의 것, 세상에 대한 소원,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것만으로 감사하고 만족하겠다는 본래의 인간의 모습으로 나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물이 있는 것입니다. 제물이 나 대신 죽은 것 같이 우리의 죄로 인해 죽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죄를 깨닫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속죄제(레 4:1-5)
9511054505

 

 

사람들이 가진 오해 중의 하나가 하나님은 깨끗한 신자를 좋아하시지 더러운 신자는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될 수 있으면 깨끗한 존재가 되어 가지고 나오려고 합니다. 양심적인 일을 많이 해서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떳떳해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이 정도 했으니 이제 하나님은 나를 축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란 더러운 몸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더럽기 때문에 깨끗해지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더러움을 고백하고 용서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십자가에서 만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웅장한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라고 외치는 이스라엘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더러운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그 장소는 거룩한 성인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다. 성문 밖 골고다, 즉 해골이라는 곳에서 죽으셨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도 하나님의 제단은 축복산이 아니라 저주 산에 있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신자가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저주 아래 있는 자신의 존재, 더러운 자신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더러움을 알고 그 더러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신자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의 세 가지 제사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는 구약 식으로 제사를 드리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를 명했던 그 의도는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실제로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친히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의 의도를 통해서 참된 신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번제는 자신 모두를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라고 했습니다. 소제는 헌신을 좀 더 구체화한 것으로서 헌신이란 자신의 소망과 욕심을 다 부서지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난의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께서 음식을 놓고 우리를 부르실때 그 자리에 함께하여 오직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데 그 음식은 제물의 몸의 일부로서 곧 내 몸의 일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의 죄로 인해서임을 내 몸을 먹으면서 알아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감사하고 만족하는 본래의 인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화목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속죄제에 대한 것입니다. 속죄제는 앞의 세 가지 제사와 다릅니다. 세 가지 제사는 제물이 태워짐으로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기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을 향기로운 냄새, 기쁨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죄제에는 제물의 향기로운 냄새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속죄제는 더럽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속죄 제물은 제단에서 태우는 것이 아니고 진 바깥 재버리는 곳에서 태우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속죄 제물은 성막 바깥 재 버리는 더러운 곳에서 죽습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했던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죽으신 것과 일치하고 저주 산에 하나님의 제단이 쌓아진 것과 일치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까 이제 자신은 죄와 상관이 없어진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예수님만 믿는다고 하면 자신은 자동적으로 더러운 존재에서 깨끗한 존재로 전환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와서는 축복만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세속적인 교회로 만드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교회란 세상의 문화가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사고방식이 교회로 들어온 것을 말합니다. 세상적인 사고방식이란 사람은 자기 손해 보는 쪽으로는 움직이지 않고 언제나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도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신앙도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려고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주님이 걸어가신 길은 배척해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 길에서 나의 손해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속죄제란 하나님의 제단 앞에 나와서 내가 사랑하는 땅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안수가 나옵니다. 제물에 안수하는 것은 저 제물의 운명과 내 운명이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물을 성막 바깥 더러운 곳에서 태우면서 나도 더러운 존재이고 저렇게 죽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신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내가 사랑하는 것을 태워버리면서 내가 더러운 존재임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세상의 것을 더 풍족하게 얻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것이 교회의 세속화인 것입니다.

 

 


교회란 십자가의 정신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모이는 것입니다. 이들이 신자입니다. 십자가를 보기 위해서는 나의 더러운 모습을 봐야 합니다.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보지 못한 자는 십자가를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더러운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도 더러운 곳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즉 자신의 더러움을 발견하고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은 존재임을 모르는 자에게는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축복도 더러운 곳에 있습니다. 십자가에만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더러움을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를 사랑하고 내 자식을 사랑하고 내 직장을 사랑하고 세상의 재물을 사랑했던 나의 더러움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속건제(레 5:14-6:7)
9511124606

 

 

요즘 우리들은 한 나라의 통치자이면서 그 권력을 이용하여 돈을 끌어 모았던 한 인간의 비참해진 모습을 보면서 분노, 또는 씁쓰레한 마음을 감추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권력을 이용해서 옳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은 것에 대해서 분노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 볼 때 그 사람이나 우리나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믿고 있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지 너는 돈을 얼마만큼 정당한 방법으로 모으고 있느냐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진심으로 믿으시고 의지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신자가 생명을 얻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단순한 고백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버림이 있는 믿음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버림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붙드는 그 믿음이 우리를 여생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고 하시면서 버림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을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버린다는 것은 변화입니다. 내가 붙들고 있던 것을 버린다는 것은 전혀 다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이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물질에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 삶이 어떤 삶인가를 속건제를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속건제는 죄를 속한다는 점에서는 속죄제와 동일한 제사이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상이라는 것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남의 물건을 도적질했거나 남이 잃어버린 물건을 줍고도 몰래 감추거나 남이 나에게 맡긴 물건을 맡지 않았다고 거짓말하고 그 죄를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물건의 주인에게 원래의 값을 그대로 돌려주되 오분의 일을 더해서 돌려주라는 것이 속건제입니다. 결국 내가 남에게 100원의 피해를 입혔으면 120원을 돌려주라는 것이 속건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오분의 일을 더해서 돌려주라고 하십니까? 앞의 네 가지 제사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약의 규례라는 것은 지금 우리들에게는 문자적인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속건제의 의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분의 일을 더해서 돌려주라는 것은 속건제는 남에게 손해를 입힌 것은 그대로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이웃과의 관계개선입니다.

 

 


예를 들어서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100만원의 피해를 입혔을 때 일단 발생하는 것은 A와 B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감정이 상하고 사랑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알고 100만원을 그대로 보상을 했다고 해도 불편한 관계는 그대로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B의 입장에서는 100만원의 손해는 돌려받았으나 A를 향한 상한 감정은 해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A와 B의 파괴된 관계는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서 오분의 일을 더해서 배상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오분의 일을 더 배상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자세이고, 오분의 일을 더해서 받는 사람은 더 받았기 때문에 상대방을 향해서 악한 감정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안해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결국 속건제는 인간관계는 물질로 이루어지고 물질로 지속되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지고 사랑으로 지속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물질로 인해서 파괴된 인간관계를 수없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형제간에도 부모와 자식 간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돈 문제가 끼어들면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모습이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들에게 물질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한 몸 된 신자의 관계를 파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더 주라고 하십니다. 즉 물질이 귀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더 귀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이고 신자들에게 있어야 할 모습입니다. 결국 세상에 대한 버림이 없으면 신자는 신자의 관계도 바르게 지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돈 문제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결코 자기 손해는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드는 자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하나님만 붙드는 자이기 때문에 돈 때문에 사랑이 파괴되는 일이 발생 한다면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돈은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란 이런 사랑의 수준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몸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우리는 이 한 몸 된 관계를 사랑과 희생으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속건제를 통해서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분명한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신자는 내 것을 주장하지 않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내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서 보여지기를 소원하고 힘쓰는 자일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그 마음에 맞는 자로서 존재하기를 기뻐할 뿐입니다. 속건제를 아는 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부탁(레 8:30-36)
9511194707

 

 

지난 시간에 신자의 관계는 물질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의 관계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의 관계는 보이는 세상적인 것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는 사랑의 관계에 손상을 입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로 속건제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으로 얻어지는 기쁨을 원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이 사라지게 될 때 그 기쁨도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거나, 재림하신다거나,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무신경하게 받아넘기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어떤 큰일을 당하면 마음에 충격을 받으면서 십자가의 이야기에는 전혀 어떤 동요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붙들고 의지하는 것이 보이는 세상의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이는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살기를 부탁하십니다.

 

 


본문 35절에 보면“너희는  칠 주야를 회막문에 거하여 여호와의 부탁을 지키라 그리하면 사망을 면하리라 내가 이같이 명령을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8장은 제사장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제사장 위임식때 칠 일 동안은 회막문에서 바깥으로 나가지를 못한다는 규례입니다. 이것은 제사장이 어떤 존재인가를 밝혀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을 중심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장을 세우시고 그 제사장 중심으로 살도록 하신 것은 제사장을 바라보고 제사장을 본받아 살라는 의도에서 입니다.그럼 제사장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회막 바깥과는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국 제사장은 다른 백성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백성다운 삶인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장을 향한 여호와의 부탁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누가 제사장다운 사람입니까? 벧전2:5에 보면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자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제사장이라는 말이 아닙니다.신령한 제사라는 것은 우리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롬12:1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즉 내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신령한 제사이고 그 사람이 곧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제사장은 자신의 몸을 여호와를 위해서 제물로 드리는 자가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세상에서 내 몸을 위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고 사는 삶 자체를 말합니다.

 

 

 

제사장은 목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고 교회에 오래 나온 사람도 아닙니다. 누구든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말씀에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가 제사장입니다. 오늘날 교회, 가정의 문제는 이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신자들이 희박해져 간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세상에서 인정받고 칭찬 듣는 것을 더 원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제사장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신앙의 선배가 후배에게 제사장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는 완벽한 제사장의 모습을 나타내 보일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완전한 제사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제사장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그 모습이 나 자신을 통해서 비춰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 모습을 위해서 힘쓰는 삶을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30절에 보면 제사장이 입은 옷에 관유와 피를 뿌려서 옷을 거룩하게 하라고 합니다. 거룩한 옷을 입은 사람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해주는 일을 합니다. 즉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그 모습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에 제사장이 입은 옷을 거룩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남을 위해서 희생하고, 남의 고통을 대신지고, 남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어렵다고, 힘들다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외면하고 멀리해 버릴 때 우리는 여호와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 되고 결국 사망을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 역할을 하지 못해서 사망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 역할을 무시해 버리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사망을 면할 수 없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이고 이 나라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고 땅의 것을 붙들지 않으려고 애쓴 사람만이 갑니다. 이런 신자들이 주님을 본받고 이해해야 할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제사장 역할을 못하면 천국 못 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애당초 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신자를 가리켜서 제사장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신자만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힘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는 자는 주님을 본받고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려고 힘쓰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가 곧 제사장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제사장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복이 전달되어지고 그 사람이 생명을 얻는 기적이 날마다 발생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힘들다고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불(레 9:1-7)
9511264808

 

 

여호와께서 제사장에게 부탁하신 것은 회막 바깥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므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제사장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장은 다른 백성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백성다운 삶인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 역할을 제사장은 자신의 모든 삶을 희생하고 살아야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이 희생함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복을 받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제사장 나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은 그 제사장의 역할을 신자들이 해야 한다고 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누구든지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말씀에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제사장인 것이다.

 

 


오늘은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가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다가 죽은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사장이라고 할 때 결국 우리가 여호와가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드리면 우리는 여호와 앞에서 죽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가야지 자신의 생각과 마음대로 하나님께 나갈 때 하나님은 그것을 거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입니다. 하나님이 세웠다는 것은 이제 제사장은 자신의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도록 되어 있는 자입니다. 백성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갈 때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규례대로 나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생각과 방법으로 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규례를 무시해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대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가지고 나와야지 자기 마음대로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거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무엇이고 우리 방식이란 무엇입니까?

 

 

 


영영한 규례(레 10:1-11)
9512034909

 

 

여러분은 지금까지 목사를 통해서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들어 왔습니다. 각기 본문은 다르고 내용은 달랐지만 결국 강조하는 것은 신자가 천국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집약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세상에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바르게살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종교인답게 선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지침서가 아닙니다. 오직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어떤 자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곧 성경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말씀을 듣거나 보면서 하나님 나라를 소원해야 하고 그 나라를 기다리면서 세상을 사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천국에 가는 길을 성경을 통해서 계시하시고 있습니다. 천국에 가는 길,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약속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은 이 약속에 의해서만 천국을 들여보낼 자를 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하나의 규례로 정해져서 구약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냥 예수가 아니라 주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주 예수라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사는 자, 그 자를 하나님은 천국으로 들여보내십니다. 주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오직 주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만이 천국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규례입니다. 결국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이 주신 규례대로 하나님을 믿으며 산 것이고, 들어가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규례대로가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믿고 세상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는 뭐냐는 것입니다. 보통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나는 말씀대로 살려고 힘을 많이 씁니다’라고 하지만 정작 그 말씀대로 산다는 신앙의 모습을 보면 말씀과는 상관없이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말씀이라고 규정지어 놓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천국과 상관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신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길에 교회 봉사가 존재합니까? 헌금이 존재합니까? 성경 통독이 존재합니까?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이것은 종교행위일 뿐입니다. 만약 신자가 봉사나 헌금이나 다른 것을 붙들고 천국에 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곧 다른 불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서 드리다가 불이 나와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불을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불은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드린 자는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영영한 규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명하신 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제단에서 나온 불입니다. 제단의 불을 향로에 담아서 여호와께 분향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제단의 불만 받으십니까? 그것은 제단의 불은 우리를 향한 심판이 제단의 희생 제물위로 떨어진 증거물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제단의 불을 요구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것은 나 대신 심판을 받은 희생 제물을 의지하고 나와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이 희생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천국갈 수 있는 하나님의 규례는 분명합니다. 희생을 알고 그 희생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나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붙들고 내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종교행위를 부지런히 하는 신자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을 아는 신자를 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봉사도 헌금도 그 모든 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 보여지는 것을 원해서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담겨 있는 십자가의 흔적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십자가만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신자는 자신의 행위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섬김과 사랑만을 드러내고자 애쓸 뿐입니다.

 

 


모세는 6절에서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때문에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죽음을 면하라고 합니다. 즉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그들의 죽음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고, 죽음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은 결국 그들도 똑같이 제물의 희생을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버리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다른 불에 참여한 자는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시켜 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9절에 보면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나답과 아비후가 포도주나 독주를 마셨기 때문에 다른 불을 드리게 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술을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을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무시해 버리고 자기 쾌락에 빠져서 살아가는 삶을 금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삶의 즐거움에 관심을 둘 때 십자가의 희생에 대한 관심이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나올 때도 자기 삶을 위해서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불이고 결국 심판에 들어가게 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영한 규례는 내 인생, 내 즐거움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를 붙드는 자가 천국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붙들고 살아갑니까? 내 인생을 붙들고 있습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붙들고 있습니다.

 

 

 

구 별(레 11:1-23)
9512105010

 

 

신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노력과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수시로 변하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규례를 남기셔서 그 규례를 하나님의 뜻으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선한 행동에 따라서 주어지는 보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살았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신자는 교회에 대한 봉사나 헌금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규례, 즉 약속에 의해서 천국에 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규례는 무엇입니까? 나에게 떨어질 죽음의 심판이 내가 아닌 다른 존재, 즉 희생 제물에게로 떨어졌음을 알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단의 불의 의미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받을 심판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십자가의 희생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은 내가 심판 받은 존재라는 것을 모르고서는 알 수 없습니다. 신자가 무엇을 하든지 십자가의 희생과 섬김으로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인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만약 신자가, 인간이 볼 때 아무리 선하고 도덕적인 일을 했다 하더라도, 십자가의 희생과 섬김으로 하지 않을 때 그것은 오히려 저주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지난 시간의 설교를 다시 길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동물을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으로 구별하시는 내용입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동물을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으로 구별하신 것은 그 동물 자체를 가지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이 더럽다고 정해놓으신 것을 먹으면 그 먹은 사람도 같이 부정해져서 더러운 존재가 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동물 자체에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어떤 요소가 있는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어떤 음식을 먹어도 음식 때문에 내가 더러워지는 것은 없습니다. 지금 신약은 음식에 대한 규례가 없습니다. 무엇을 먹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면 레위기의 음식 규례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음식을 구별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구별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백성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특징은 하나님의 규례를 날마다 잘 기억하며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날마다 먹는 음식에다 하나님 백성의 모습을 담아놓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날마다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음식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식 규례를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건강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처음 등장할 때는 노아 홍수 때입니다. 노아 홍수때 방주에는 더러운 것과 부정한 짐승이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홍수 후에 노아는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노아는 뭔가를 알았던 것입니다. 즉 자신과 같이 더러운 존재가 심판 곳에 살 수 있는 것은 정결한 것 우리와 함께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자신은 정결한 것의 희생으로 인해서 살았다는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때 정결과 부정한 짐승이 레위기에서 구체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구별하신 것만 먹으면서 정결한 것의 희생을 기억하고 자신들의 삶은 그 정결한 것의 운명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정결한 것으로 구별된 짐승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운명이 담겨 있습니까? 먼저 짐승 중에 먹을 수 있는 것은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것만 먹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즉 세상에서의 분리된 모습,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고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굽이 갈라진 것은 분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김질한다는 것은 먹었던 것을 다시 뱉어내며 오직 풀만 먹는 초식동물을 의미합니다. 뱉어낸다는 것은 세상에서 탈출하는 것을 의미하고, 오직 한 가지만 먹는 것은 하나님 백성은 오직 하늘만 바라보며 살아야 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동물이 가지고 있는 습성이나 모습을 통해서 세상에서 분리되고 오직 하늘만 바라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운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식에 대한 규례는 모두 이런 의미입니다. 물고기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는 물고기이면서 땅과 밀착해 살기 때문입니다. 즉 미꾸라지나 뱀장어 같은 종류의 물고기가 흙에서 사는 습성을 들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땅에서 벗어나서 물에서만 생활하는 물고기가 정결하다는 것입니다. 새 중에서는 독수리, 솔개, 매, 타조 같은 것은 더럽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땅과 연관된 습성을 가진 새는 더럽다는 것입니다. 매, 솔개 등은 땅에 있는 짐승이나 시체를 먹고 삽니다. 타조 같은 새는 새이면서 땅에서 삽니다. 땅과 연관된 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곤충은, 기어 다니는 것은 더럽고 땅에서 뛰는 것만 정결하다고 하십니다. 이것 역시 땅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정결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정결의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44절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거룩은 땅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땅의 것으로 살지 않고 하늘의 것으로 사는 것이 거룩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음식을 먹으면서 기억해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무엇이 정결한 것입니까? 오직 십자가만이 정결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땅에서 구별된 것을 요구합니다. 세상은 죽음이고 심판인 것을 알고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에만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이 거룩입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살면서 배워야 할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에서 구별되는 삶입니다.

 

 

 

하나님 사랑(레 12:1-8)
9512175111

 

 

믿음이란 자신의 모든 의지와 소망을 하나님의 뜻에 합류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합류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적당히 반반 섞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의 의지와 소망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지배당하는 합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왜 자신의 뜻을 내세우지 못하고, 자기의 소망을 따라서 살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해야 합니까? 그것은 인간이란 애당초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해서 존재케 한 것인데 그 인간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앞세움으로 인해서 세상이 심판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자기의 뜻을 버리는 것이고 그 믿음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소망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기를 굳건히 만드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가 소망으로 될 때 그것이 곧 성공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음식 규례를 통해서 세상에서 벗어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중심 사상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고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이 함유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은 이 사랑에 깊은 감동을 느끼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세상을 인간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꿈을 이루어주는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소망을 이루어 가는 장소가 아닙니다. 세상은 온통 저주 아래 있습니다. 저주로 덮여 있는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멸망의 문 앞에 놓여 있는 세상을 봐야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저주로 덮힌 세상에서 건져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의 흔적을 우리에게 남기신 것입니다.

 

 


레위기 12장은 아이를 해산한 산모의 정결에 대한 규례입니다. 남자를 낳으면 7 일 동안 부정하리라 하고 여자를 낳으면 이 7 일 동안 부정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정결케 되는 기간이 남자아이를 낳은 경우 33일이고 여자를 낳았으면 66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규례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에 대하여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즉 부정한 기간이나 정결케 되는 기간이 여자는 남자보다 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죄가 더 깊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죄가 더 깊은 것은 여자가 타락의 최초 사람이고 남자는 여자에 의해서 죄를 범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를 돕는 배필로 창조했습니다. 돕는 배필이란 남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즉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먼저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자에게 남자로부터 다스림 받는 징계를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해산하는 고통이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여자에게 아이는 하나님의 저주의 증거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라는 증거가 곧 아이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는 부정하다고 하고 정결의 기간을 거쳐서 어린양으로 제사를 드려야 비로소 깨끗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규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너희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규례입니다. 그리고 그 저주에서 깨끗케 되기 위해서는 어린양을 취해서 번제를 드리고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저주 아래 있는 세상에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의 세상에서 건짐을 받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 저주 아래 있음을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저주의 흔적을 아이를 해산하는 것을 통해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해서 죽음에 처하게 된 그 증거가 해산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에서 우리를 깨끗케 할 어린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저주를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저주의 흔적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십니다. 즉 해산을 통해서 이 땅이 저주 아래 있음을 발견하고 세상을 보지 말고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할 어린양의 희생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를 알려주고 영생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봅니까? 신자는 세상을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주 아래 있는 세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보기에 좋은 것이라 해도 결국 저주 아래 속해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저주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저주를 보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랑도 볼 수 없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세상은 망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나의 소망을 두게 되는 것이 곧 우리 인생에서의 성공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실망하고 포기하도록 하십니다. 세상을 바르게 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저주의 흔적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저주에서 깨끗케 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떤 사랑을 기대하십니까? 하나님께 무엇을 원하십니까? 우리를 세상에서 끄집어내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문둥병 규례(레 13:1-8; 14:1-9)
95122452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사람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딱지가 앉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 피부에 문둥병같이 되거든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 자손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처의 털이 희어졌고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문둥병의 환처라 제사장이 진단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칠 일 동안 금고할 것이며 칠 일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의 보기에 그 환처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칠 일 동안을 금고할 것이며 칠 일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처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는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그러나 정결한 여부를 위하여 제사장에게 보인 후에 병이 피부에 퍼지면 제사장에게 다시 보일 것이요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진단할 것이라 이는 문둥병임이니라”(레 13:1-8)

 

 

(레14: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14:2) 문둥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 갈 것이요 (레14:3)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문둥병 환처가 나았으면 (레14:4)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레14:5)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레14:6)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레14:7)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지며 (레14:8)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밖에 칠 일을 거할 것이요 (레14:9) 칠 일 만에 그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신자라면 대부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뭔가를 하려고 하면 결국 그것은 잘못된 길로 나가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뭘 한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관심을 두고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관심이 과연 성경적인가를 언제나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두고 하나님 나라만이 눈에 보일 때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신자는 세상에서 잘 돼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기 욕심을 하나님의 기쁨이란 것으로 치장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잘돼든 못돼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또 사실 세상에서 잘된다 못 된다는 말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잘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치든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참된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여 크나큰 고통으로 빠져들 때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의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평소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세상에서 잘되는 방향으로 인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시거나 하나님을 증명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어떤 일을 겪든 그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은 나 하나의 고통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세상에서 영광되게 하고 존귀하게 만들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나에게 고통과 어려움이 있게 하신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나의 이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누구를 유익하게 하시려고 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13장과 14장은 문둥병자에 대한 규례입니다. 일단 여기에서 생각할 것은 문둥병이라는 것은 드문 병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둥병에 대한 규례를 문둥병자를 위한 규례라고 생각한다면 문둥병이 걸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규례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문둥병 규례는 문둥병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단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가르침을 위해서 어떤 사람에게 문둥병이 들게 할 때 본인의 입장에서는 크나큰 불행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적인 편에서 보면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이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신자에게 필요한 것이 오직 하나님께 대한 관심입니다. 예수님께만 관심 두고 예수님만 바라보는 삶이 아니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언제나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문둥병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하십니까? 13:2절을 보면 문둥병자가 발생하면 제사장에게로 데려가서 보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문둥병자를 고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는 진짜 문둥병자라고 선언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짜 문둥병과 가짜 문둥병을 가려내라는 것입니다. 진짜 문둥병자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45절을 보면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즉 문둥병 환자는 온 동네를 향해서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문둥병은 하나님의 저주받은 표시이기 때문에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는 병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드러내며 온 동네를 향해서 외치라고 합니다. 문둥병이 든 것도 고통스러운데 스스로를 부정하다고 외쳐야 하는 그 일은 더욱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쓰여지는 신자의 역할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럴듯한 역할을 하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잘 돼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할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에게 남에게 멸시를 받고 수치를 당하는 그런 역할을 맡깁니다. 그럴 때도 그 역할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런 신자가 예수님만 바라보는 자이고 하나님 나라에만 관심을 두는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둥병자의 역할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14장을 보면 문둥병자의 정결의식이 있습니다. 즉 문둥병자가 나았을 때 그냥 있지 말고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은 그를 정결하다고 선언한 뒤 진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합니다. 문둥병은 난치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4장에 문둥병이 나았을 때 규례가 나옵니다. 즉 문둥병도 낫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둥병자가 나았다면 그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의 은총일 것입니다. 즉 저주 아래서 풀려났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 증거를 제사를 통해서 보여라는 것입니다. 제사에는 제물의 피 흘림이 있습니다. 즉 피가 문둥병자를 저주에서 구출했고 깨끗한 자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둥병자는 하나님의 자비를 선언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피가 구출했다는 것을 실제 자기의 모습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상은 도저히 나을 수 없는 문둥병자가 깨끗케 된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자비가 피에 담겨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도록 한 것입니다.

 

 


문둥병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14절을 보면 제물의 피를 내어서 문둥병자의 우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가락과 우편 발 엄지가락에 바릅니다. 그리고 기름도 동일하게 바릅니다. 이 모든 것은 더러운 자가, 저주 아래 있던 자가 어떻게 해서 깨끗함을 입게 되었고 저주 아래서 구출 받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피를 통해서만 깨끗함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문둥병자는 제물의 피 흘림 때문에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오늘날 신자는 예수님의 피 흘림 때문에 깨끗함을 입은 존재입니다. 문둥병자와 같은 더러운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깨끗함을 입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에게 부어진 주님의 피를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피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다른 이웃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곧 우리들의 할 일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차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보여주고 오직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그 모습을 보여주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둥병자와 같은 역할을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하고 싶어 하고 나에게 없기를 바란다면 결국 하나님의 일을 내 뜻대로 내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보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 크나큰 고통과 어려움에 빠졌으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리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해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입어서 하나님의 백성 되었으니 내 소원은 하나님 나라이지 이 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때 그 지체의 고통을 아는 우리로서는 그 지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금 깨닫는 해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모두 제사장 역할, 문둥병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서 살아갈 때 그 사랑과 자비를 이웃에게도 전달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은 말로써 되는 일이 아니고 내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서만 기뻐하고 만족하며 살아갈 때 그것이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알게 하는 길입니다.

 

 

유출병 규례(레 15:1-12)
9512315313

 

 

(레15:1)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15: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을 인하여 부정한 자라 (레15:3) 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함이 이러하니 곧 몸에서 흘러 나오든지 그것이 엉겼든지 부정한즉 (레15:4) 유출병 있는 자의 눕는 상은 다 부정하고 그의 앉았던 자리도 다 부정하니 (레15:5) 그 침상에 접촉하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레15:6) 유출병 있는 자의 앉았던 자리에 앉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레15:7) 유출병 있는 자의 몸에 접촉하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레15:8) 유출병 있는 자가 정한 자에게 침을 뱉으면 정한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레15:9) 유출병 있는 자의 탔던 안장은 다 부정하며 (레15:10) 그 몸 아래 닿았던 것에 접촉한 자는 다 저녁까지 부정하며 그런 것을 옮기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레15:11) 유출병 있는 자가 물로 손을 씻지 아니하고 아무든지 만지면 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레15:12) 유출병 있는 자의 만진 질그릇은 깨뜨리고 목기는 다 물로 씻을지니라

 

 

 

자존심이라는 것은 남 앞에서 굴복 당하기 싫어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나는 너보다 못하지 않는데 왜 내가 너한테 머리를 숙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을 맞는다고는 해도 실제로 신앙생활은 그것과는 반대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뭔가 내 편에서 하는 것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나를 구원시키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해야 신자이고 신자가 돼야 복 받고 천국 간다는 뿌리 깊은 반 성경적인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할 때 부딪히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혼자 생각할 때는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았는데 막상 하려고 하니까 주위 환경들이 그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집에서 혼자 성경보고 묵상하면서 말씀을 깨달아가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때는 뭔가 신자 같았는데 집에서 나와서 세상을 대하고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성경보고 묵상할 때의 마음은 다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과 별 다를 것이 없이 살아갑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신이 성경대로 살지 못하고 신자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악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얼마든지 신자로서 살 수 있는 데 세상이 자기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결국 자기가 싸워야 할 적을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 즉 세상으로 규정짓는 것입니다.

 

 

 

이들은 중요한 한 가지를 잊고 삽니다. 그것은 신자에게 적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로부터 발생되는 악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세상에 있는 악이 자기에게 묻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러움은 자신에게서부터 끊임없이 방출되는 데 그 더러움은 생각하지도 않고 외부에서 더러움이 나에게 묻는다고 여길 때 결국 그 사람은 자신을 보지 못하고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더러움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더러움의 출발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의 자존심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전혀 그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은 자만이 하나님 앞에 고개 숙인 모습으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양심을 깨우고, 도덕을 배우고, 윤리를 배우고,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할 일은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더러움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확인시켜주는 일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포기이고 이 자기 포기가 있는 신자만이 하나님을 진실 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문둥병자에 대한 규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문둥병자에 대한 규례에서 중요한 것은 문둥병이라는 더러움을 숨기지 않고 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문둥병이 나았을 때 피를 바르므로 인해서 자신이 깨끗해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요 자비임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야 하는 것이 문둥병자의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역할을 주던 그것을 거부하지 말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는 것이 곧 문둥병자가 보여주는 제사장 역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유출병 규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출병이라는 것은 몸에서 피나 고름이 계속적으로 흘러나오는 병을 가리킵니다. 유출병의 규례가 문둥병과 공통적인 것은 더럽다는 것인데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둥병은 자신이 더러운 것을 말하는 데 유출병은 자신만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가 접촉한 모든 것이 함께 더러워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세상을 더럽히는 것은 곧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더러워서 내가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나로 인해서 세상이 더러워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피나 고름이 더럽다는 것은 사람자체가 더럽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러운 사람에게서는 더러운 것만이 흘러나온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을 더럽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싸워야 할 적을 외부에 있는 세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나를 세상이 악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더럽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기도를 해도 자신이 세상과 싸워 이겨서 괜찮은 사람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성경을 봐도 그런 식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확실히 알지를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모든 더러움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아는 자는 세상을 향한 불평과 원망과 분노 대신에 자기 자신에 대한 포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더러움을 덮을 것은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음을 알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둥병과 동일하게 유출병이 깨끗하여 지면 그 몸의 정결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라고 말합니다. 제사는 자신의 더러움을 아는 자만이 드릴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더러움을 아는 자가 제물이 흘린 피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모습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문둥병자를 통해서 유출병 규례를 통해서 나는 더러운 존재임을 알게 하시고, 나로 인하여 세상이 더러워진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 말씀에 의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더러운 존재이고 나 때문에 내 주위가 더러워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적은 여러분 자신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주위를 더럽히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에게 이웃은 내 경쟁자가 아니고 시기의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내가 용서를 구해야 할 이웃이 됩니다.

 

 

 

아사셀 염소(레 16:6-10)
9601070114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권속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 두 염소를 취하여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스스로를 ‘여호와’라고 알리셨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알려주신 것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지만 오직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아 갈 뿐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알리신다는 것은 그 누구도 자기 멋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금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에 맞추어서 생각할 수 없다. 그것 모두 잘못된 하나님이고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두려워해야 할 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죽음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는 자는 모두가 죽는다. 이것은 구약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법칙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죽게 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참으로 두려우신 분이다. 그런데 요즘 신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모든 것을 그냥 넘기시고 우리가 잘만하면 세상에서 편히 살 수 있도록 복을 주시는 분으로만 연상을 한다. 혹 신자가 마지막 심판때 받을 심판을 말한다고 해도 그 심판은 세상에서 열심히 봉사하지 못하고 헌금하지 못한 일에 대한 심판으로 왜곡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바로 심판의 조건이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참된 신의 모습을 알리셨다. 참된 신은 우리의 죽음을 요구한다. 우리의 죽음을 기뻐하시고 만족해하시는 분이다. 살아 있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이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요구하시지 우리 종교 행위의 열심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이스라엘에게도 종교 열심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그러한 열심을 거부하셨던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본문 6절의 말씀대로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너무 쉽게 말한다. 교회 나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면서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무조건 용서해 주신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의 죄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이고 하나님의 용서를 값싸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죽음이 있는 용서를 말한다. 죽음이 없이는 하나님은 그 누구의 죄도 그냥 넘어가시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내가 죽었다는 의미로 제물을 앞세우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제물이 아니다. 그 제물이 나의 죽음을 대신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죽어야 할 죄인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제물이 나 대신 죽는 희생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의 모습이 무엇인가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 대신 죽는 제물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이시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보고 나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런 얘기들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아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 곧 구원인데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의 증거는 나 또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셨으니까 나는 안 죽어도 된다가 아니다. 예수님은 내가 죽을 길을 대신 가신 것이지 내 죽음까지 없애버린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보고 내가 죽어야 할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이 가신 길로 동행하기를 소원하는 것이 곧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달리는 모습이다. 이런 신자는 주님의 피가 그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로 간주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얘기들을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속죄라는 규례에 담아서 알리시고 계시는 것이다. 단지 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 것을 원하시는 것이다. 대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들고 속죄소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피를 속죄소에 뿌린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고백하는 행위인 것이다. 14절에 보면 피를 속죄소 동편에 뿌리라고 한다. 동편에 뿌리라고 한 이유는 인간이 죄를 범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게 하셨는데 그것이 에덴동산의 동편에 있었다. 따라서 피를 속죄소 동편에 뿌린다는 것은 피, 즉 내가 죽어야 할 죄인임을 아는 자가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속죄를 위해서 두 염소가 나온다. 그중 한 마리는 피를 취해서 속죄소에 뿌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산채로 광야로 보내라고 한다. 광야로 가는 염소는 아사셀을 위해서이다. 아사셀 염소는 무엇인가? 21-22절을 보면 ‘아론은 두 손으로 산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고 말한다. 즉 아사셀 염소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지고 광야로 떠나간다. 이것은 속죄소에 피를 뿌린 뒤에 행해진다. 결국 속죄소에 피를 부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사셀 염소를 통해서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피를 뿌림은 죽음을 의미하고 죽음이란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광야로 떠나는 것이다.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모든 불의와 죄를 다 떠나보내는 것, 이것이 옛사람을 벗는 것이고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리시고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리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죽어야 할 죄인인데 그 길을 주님께서 담당하셨고, 내가 이제 가야 할 길은 주님의 십자가라는 것을 아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제물의 피를 통해서 그들이 죽어야 할 자임을 알리시고 아사셀 염소를 통해서 죽은 자로서 모든 불의와 죄를 벗어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알리시고 계신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이고,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이 무엇임을 발견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날마다 우리의 불의와 죄를 덧입고 있는 옛사람을 따르지 말고 생명 되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피의 규례(레 17:10-16)
9601140215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라도 피를 먹지 말라 하였나니 무릇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 먹을 만한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여 잡거든 그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지니라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은 자는 본토인이나 타국인이나 물론하고 그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후에 정하려니와 그가 빨지 아니하거나 몸을 물로 씻지 아니하면 죄를 당하리라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큰사랑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운명의 사람인가를 제대로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바르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인간에 대해서 알리시고 계신다. 그러나 인간은 수긍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자기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성경에 대하여 눈을 돌릴 때 이미 그 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은 단지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관심을 하나님께 두고 성경을 읽는 것을 말한다. 신자가 성경을 볼 때 관심이 나에게 쏠려 있으면 모든 말씀은 왜곡되어서 자기에게 다가온다. 다시 말 해서 자신이 좀 더 신자답게 되기 위해서 성경을 볼 때 자신이 뭘 해야 하는 가로 집중되며 복에 대해서 관심을 둘 때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누가 복을 받았는가로 관심이 가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성경을 볼 때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은혜를 받은 우리는 상대적으로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가야 한다. 이럴 때 성경이 인간에 대해서 고발하는 모든 면에 대해서 깊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이런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한다.

 

 


오늘 본문은 피에 대한 규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피를 먹지 말라고 한다. 만약 피를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끊어 버리시겠다고 한다.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이유는 피가 곧 생명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육체의 생명이 피이기 때문에 음식을 피채 먹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피가 모든 육체의 생명이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 우선 우리의 생명을 피 하나로 대변할 수는 없다. 생명이란 피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구조의 모든 것이 같이 존재하면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은 눈에 보이는 어떤 형체를 들어서 이것이 생명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피를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피는 우리 몸 전체를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심장이나 다른 기관들은 몸의 일부이고, 몸의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피의 흐름이 멈출 때 그것은 곧 생명이 멈추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피를 왜 먹지 말라고 하는가? 여호와 증인은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여 피와 연관된 모든 것, 예를 들어서 수혈이나, 전쟁을 대비한 군 입대 등 모든 것을 금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의도가 아니었다. 피를 생명이라고 규정하고 그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인간에게 뭔가 다른 것을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의도가 있으신 것이다.

 

 


생명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의 몸과 연관된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다. 몸과 연관된 생명은 영원하지 않다. 결국 흙으로 돌아갈 생명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가 이 흙으로 돌아갈 생명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간다. 먹어야 살기 때문에 먹는 것에 관심을 두고 산다. 입어야 살기 때문에 입는 것에 관심을 두고 삽니다. 그리고 먹는 것과 입는 것이 채워지면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 산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피를 먹는 것을 금하신 것은 생명은 먹고 입는 것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이다. 말씀드린 대로 피는 몸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그 피를 먹지 않기 위해서는 사전에 피를 모두 흘러 내야만 한다. 이것은 ‘너는 그 음식을 먹어서 네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진짜 너의 생명은 네가 흘려버린 그 피에 있다’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음식을 먹어서 유지하고자 하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된 생명은 다른데 있다. 그 다른데 있는 생명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산다면, 그것은 참된 생명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되니까 결국 하나님 앞에 죄는 짓는 것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생명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가? 먹음으로 유지되는 생명에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닌가? 나는 이쪽과 저쪽 생명 모두 관심을 두고 살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은 하나님과 반대된 것에 관심을 두면서 하나님께도 관심을 두며 살수는 없다. 10절에 보면 누구든지 피를 먹으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백성 중에서 끊어버리시겠다고 한다.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피를 먹는 자, 즉 다른 데에 있는 참된 생명에는 관심이 없이 단지 음식을 먹어서 유지되는 생명에만 관심을 두는 자는 그 누구라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 끊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피에 담겨 있는 생명은 무엇입니까? 11절에 보면 피가 죄를 속한다고 말한다. 처음에 인간은 생명을 소유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은 생명을 인간이 소유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 뒤로 인간에게는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다. 죽음의 원인은 죄이다. 그 죄를 속한 다는 것은 곧 죽음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고 따라서 잃었던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모든 것을 제물의 피를 흘리고 그 어떤 피든지 먹지 않음으로 깨달아야 했던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음식을 먹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이 아니다. 피가 흘려져서 우리를 살리는 그것이 진짜 생명이라는 것을 발견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이다.

 

 


지금은 피를 먹고 안 먹고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알아야 했던 것은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다. 지금 세상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땅의 것을 얻기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는 것은 모두 헛된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흙으로 사라질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관심 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의 피이다. 세상의 것이 있어야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 사는 것은 다른데 내 생명이 있다는 것은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은 피를 먹는 행위로 보시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생명에 관심을 두고 사는가? 예수님 쪽의 생명에 관심을 두고 살려고 해도 여러분을 붙드는 것은 여러분에게 있는 세상의 사고방식일 것이다. 내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생을 살려고 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점령하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서 예수님 쪽에 있는 생명이 눈에 보이는 신자가 될 것이다.

 

 

 

 

땅의 풍속(레 18:1-5; 24-30)
96012103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그러므로 너희 곧 너희의 동족이나 혹시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이런 가증한 일의 하나도 행하지 말라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무릇 이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좇음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신자들이 십자가를 말할 때 흔히들 가지고 있는 오해가 뭐냐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으니까 나는 이제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하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 모두 다 해결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 즉 십자가를 자신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삼아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좀도 편안한 마음으로 죄속으로 나아가는 모습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으니까 염려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구하는 기도 한마디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만히 있고 예수님께 회개하는 기도 한마디만 하면 죄가 용서된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이 만들어 낸 법칙일 뿐이다. 성경은 십자가를 내가 같이 죽어야 할 장소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같이 나도 같이 못 박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럴 때 십자가에 흘리신 주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가리우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실로 알고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고자 하는 자는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더욱 더 부끄럽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것이다. 땅의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고 주님만으로 만족하려고 하는 것이 신자이고 십자가를 아는 자이고 죄에서 떠나려고 애쓰는 자이지, 십자가 용서라는 것을 믿는다 하면서 자신의 죄가 단지 말 몇 마디로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결코 신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자기를 감싸주고 있는 어떤 힘을 믿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와 법도 안에서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2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해서 아무런 잘못도 없는 가나안 거민을 쫒아낸 것이 아니라 그들의 더러움과 악함을 가나안 땅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땅이 그들을 토해 낸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나안 민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가나안 땅에서 아무렇게나 행해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이 없다. 28절을 보면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고 말씀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도 약 속의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거민들과 같이 더러움을 행할 때 땅은 그들도 토해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토함을 받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3절에 보면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30절에서도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좇음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한다. 즉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는 땅의 풍속을 버리는 것이다. 땅의 풍속을 좇지 아니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토함을 받지 않는 길이다. 결국 유월절의 피로 인해서 애굽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는 땅의 풍속을 좇아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세상이 가지고 있는 질서를 따르지 않고 우리를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는 유월절의 희생의 피, 그 피의 희생을 생각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이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세상을 생각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희생의 대가로 살아난 자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희생을 생각하고 살아야지, 나를 생각하고 내가 세상에서 어떻게 되고자 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산다면 그것은 주님의 희생을 무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가짐이 항상 내 안에 있는 세상을 향한 욕심은 점점 소멸시키고 그 자리에 주님의 희생, 나 같은 것을 위해서 희생하여 주심을 감사하는 그 마음이 향상 내안에서 넘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이 사람은 하나님께 거부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받아들여지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좇지 말라고 하신 애굽 땅의 풍속, 가나안 땅의 풍속은 무엇인가? 그것을 말하는 것이 6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이다. 6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우리를 아주 난처하게 만드는 내용이다. 우리의 구원을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거룩한 성경에 어떻게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할 정도로 낯 뜨거운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성에 대한 규례이다. 그 중에서도 18절까지는 근친상간에 대한 규례이다. 어미를 범하지 말고, 계모 범하지 말고, 자매를 범하지 말고, 이복 자매를 범하지 말고, 고모, 이모, 백숙모, 자부, 형제의 아내, 손녀, 외손녀 등 골육지친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단순한 성에 대한 규례, 즉 단지 근친상간은 좋지 않은 것이니까 하지 말라는 의미로만 생각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 성경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상관없는 내용이 되고 만다. 또한 단지 윤리와 도덕으로 끝나 버리게 된다. 그러나 이 근친상간, 또는 동성연애 등, 성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면서 이것을 이스라엘이 버려야 할 땅의 풍속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의미를 두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이 말씀을 단지 윤리적인 기준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근친상간은 애굽의 풍속이고 가나안 땅의 풍속이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도 바로 성에 대한 문란이었다. 그러나 멸망의 이유를 단지 성에 대해서 문란했다라고만 해 버린다면 앞서 말한 대로 윤리와 도덕이 되어 버린다. 성에 대한 문제도 인간의 욕심이다. 인간의 죄는 자신의 욕심을 자제하지 못했을 때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어떤 행위의 죄를 짓지 아니한 것이 결코 우리가 바른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간음이라고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은 내가 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욕심을 자제했을 뿐인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욕심대로 못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 욕심을 채울 힘이 없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자신 때문이다. 인간의 욕심은 힘이 있어야 채울 수 있다. 즉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그만한 힘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힘이 있음에도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이름, 즉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세상의 윤리와 도덕을 벗어버릴 때 자신의 이름은 땅에 떨어지게 됨으로 자신에게 어떤 욕심이 있다 해도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그 욕심을 자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레18장의 내용도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성에 대한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고, 본성이다. 여기에 대한 욕심은 다른 여자를 범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다른 여자에 대한 욕심이 있으면서 범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한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근친상간이다. 근친상간은 세상의 힘과 권력이 없어도 자신의 욕심을 성취시킬 수 있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인간은 자신의 욕심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근친상간이 나쁘니까 하지 말고, 다른 여인을 범하는 것이 나쁘니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은 세상의 도덕책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당연시하고 윤리로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단편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내면을 드러내고 계시는 것이다. 근친상간을 하지 말라는 것은 너의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었을 때 그 욕심대로 행동하지 말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풍속이고, 가나안의 풍속이었다. 자신의 욕심대로 움직이는 것,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조건이 될 때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 이것을 애굽이라고 한다.

 

 


인간이 죄의 행동을 보이지 않는 것은 자기의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땅의 인간은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조건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을 때 욕심을 따라서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것이 설령 근친상간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에게 욕심이 있고, 그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면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다. 나는 그런 행동을 안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 말씀과 상관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지 말라. 행동을 안 한 이유에는 윤리와 도덕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상대방에게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애굽, 즉 땅의 풍속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힘대로 움직이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런 나라에서 빠져나온 나라이다. 즉 힘으로 유지되는 나라가 아니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서 살아서는 안 되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애굽과 같은 모습으로 산다면 가나안 땅은 다시금 이스라엘을 토해 버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약 속의 땅의 속성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힘으로 살지 않고, 욕심대로 살지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반대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힘과 욕심은 모두가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집약되어 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사는 자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교회이다. 그런데도 교회가 힘을 추구하고, 그 힘을 모으기 위해서 애를 쓴다면 그것은 결국 땅의 풍속을 따르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봉사와 섬김으로 살려고 힘쓰는 것이 이스라엘이고 교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나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살아야 할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사라지고 썩어질 것입니다. 신자가 이것을 알고 믿는다면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세상에서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움직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자는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자는 희생과 섬김으로 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힘을 모으고 이웃에게 그 힘을 내세우는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결단과 그 결단으로 움직이기를 힘쓰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레 19:9-18)
9601280417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 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웃이라는 관계는 무척 중요하다. 자의든 타의든 어쩔 수 없이 맺게 되는 것이 이웃 관계이고 그 이웃으로부터 도움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이웃 때문에 해를 입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이웃은 관계를 피하고자 하고 자신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이웃만을 골라서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편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고 유익을 주지 못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좀더 겸손하게 이웃과의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웃관계를 하나님께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계신다. 구약 때부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시고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에서의 이웃사랑은 단지 이웃이니까 사이좋게 지내고, 이웃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도와주자는 것으로 말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다. 단지 이웃을 도와주고 서로 좋은 마음으로 지내는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뭔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무엇인가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이웃은 누구냐는 것이다. 사람은 살면서 별의별 이웃을 만나게 된다. 좋은 이웃, 나쁜 이웃, 나를 좋아하는 이웃,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이웃, 정말 온갖 종류의 인간을 만나서 관계하게 되는 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을 만나게 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저런 이웃이 있게 하셨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가 이웃에 대하여 맨 먼저 가져야 할 정신은 ‘왜 하나님은 저 이웃을 나에게 있게 하셨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즉 내가 살다가 우연히 만난 이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부러 나에게 만나게 하신 이웃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여러 종류의 이웃을 만나게 하신 이유이다. 지금도 여러분들에게는 여러분이 미워하는 이웃이 있을 것이다. 정말 눈에 안보이는 곳으로 멀리 이사 가버렸으면 하는 이웃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런 이웃을 왜 우리에게 있게 하시는 것인가? 그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웃이라는 것은 단지 인간관계가 아니다. 이웃이란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세워 나가야 할 대상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 이웃을 만나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음을 증명해야 할 대상이고,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안다는 것을 나타내야 할 대상이고, 내가 부끄럽고 부족한 존재임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이웃인 것이다.

 

 


오늘 본문도 이웃 사랑이 주제이다. 2절에 보면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이어서 부모 공경이 나오고, 안식일을 지킬 것을 말하고, 우상을 섬기지 말고, 여호와의 성물로 더럽히지 말 것을 말씀하고 나서 이웃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고 있다. 즉 거룩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규례들을 지키는 것이 거룩이다. 하나님이 부모 공경을 하라고 했으면 부모를 공경하고 사는 것이 거룩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 거룩한 모습에 이웃에 대한 규례가 포함되어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자에게 이웃은 단순한 이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만나게 하신 대상이다. 때문에 신자는 자신이 어떠한 이웃을 만나도 그 이웃을 탓하면 안 된다. 즉 누구도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나에게 보낸 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이웃을 대하는 것이 곧 진정한 이웃 사랑이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9절을 보면 곡물을 벨 때나 포도 열매를 딸 때 모두 거두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해서 조금 남겨 두라고 말씀한다. 누가 와서 주워 가든 상관하지 말고 단지 가난한 자, 타국인을 위해서 남겨두라는 것이다. 가져갈 자를 네가 스스로 고르지 말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상대방에 대한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항상 상대적으로 반응한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할 때 나도 상대방에게 잘하게 되어 있다. 또 상대방이 뭔가 잘못하면 나는 잘해 줬는데 너는 왜 그러느냐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와 같이 상대방에 대해서 뭔가를 판단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난한 자를 위해서 곡식을 남겨두고 포도를 남겨두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거룩한 모습이다. 그래서 신자가 자꾸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로만 다가가려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것을 자기 소관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또 11-12절을 보면 도적질하지 말고, 속이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라고 한다. 이것이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거룩이다. 13절을 보면 이웃을 압제하지 말고 품삯을 미루지 말라고 한다. 자신에게 있는 힘을 이웃을 압제하는데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내가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과 나누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지 그것을 힘으로 삼아서 이웃을 압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이웃에게 자랑하며 그 힘을 가지고 이웃을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거룩이 아니다. 자랑하지 않고 나누는 자가 거룩한 자이다.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않고,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않는 것이 거룩이다. 즉 이웃이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그것을 가지고 호기심 삼아 떠벌리면서 즐거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재판할 때는 공평하게 하라고 하시면서 결론적으로 17절과 18절의 말씀을 한다.

 

 


이웃은 나를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이며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세워 가시고자 하시는 대상이라고 말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베풀 때 이웃에게 그 하나님의 사랑이 쌓여 가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인 여러분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낱낱이 발견해 가는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이웃, 나를 욕하는 이웃, 나의 주위에서 나를 괴롭히는 가시 같은 존재들, 그런 이웃들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하고 똑같이 욕하고, 미워하고, 나도 그에게 가시 같은 존재로 다가갈 때 그것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부끄럽고 부족한 존재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웃은 신자인 우리에게 그런 존재이다.

 

 


하나님은 이웃을 통해서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우리의 못난 모습을 드러내시면서 그것을 하나하나 벗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된 모습으로 자라가게 하신다. 왜 나에게 주님의 십자가가 필요했는가를 알리기 위해서 이웃을 통해서 나의 죄 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왜 나에게 주님의 사랑이 필요했는가를 알리시기 위해서 우리의 삶들이 여기저기서 부딪히도록 만드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도록 만드시는 것이다. 신자는 세상을 자기 마음에 맞도록 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바꿔가시기 위해서 우리의 삶에 여러 가지 간섭을 하신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셔야 한다.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도 내 생각과 판단과 감정으로만 대할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이웃을 나에게 있게 하셔서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하시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럴 때 어떤 이웃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사랑으로 내가 만나는 모든 자를 대할 때 신자가 거하는 곳은 곧 천국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요구(레 19:19-37)
9602040518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무릇 아직 속량도 되지 못하고 해방도 되지 못하고 정혼한 씨종과 사람이 행음하면 두 사람이 형벌은 받으려니와 그들이 죽임을 당치 아니할 것은 그 여인은 아직 해방되지 못하였음이라 그 남자는 그 속건 제물 곧 속건제 수양을 회막 문 여호와께로 끌어 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범한 죄를 위하여 그 속건제의 수양으로 여호와 앞에 속죄할 것이요 그리하면 그의 범한 죄의 사함을 받으리라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제 사 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제 오 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 채 먹지 말며 복술을 하지 말며 술수를 행치 말며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치 말며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네 딸을 더럽혀 기생이 되게 말라 음풍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할까 하노라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나의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웃은 사람이 살면서 필연코 맺어야 할 관계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우리들 자의로 맺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시는 관계이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만나게 되는 이웃에 대해서 불평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어떤 이웃을 만나게 되던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나에게 불편함을 주는 이웃을 피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 이웃을 나에게 보내신 의도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한다면 결국 나에게 있는 사랑의 진실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방의 어떤 변화에도 변화되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는 나에게 불편함을 주는 이웃을 만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웃은 나를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이다. 그리고 내가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도, 나누어야 할 대상도 그 이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부족한 모습과 죄 된 모습을 하나하나 발견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왜 주님의 십자가가 필요했는가를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버려야 할 옛사람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하나하나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신자 삼으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세우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세상의 것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만 만족하며 사는 백성들을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신 목적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지내게 하신 것도 오직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사는 특별한 존재들을 만드시기 위해서이다. 애굽과 다른 나라, 애굽과 다른 모습을 가진 존재,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이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신 것은 애굽의 풍속을 버리는 것이다. 애굽의 모든 모습을 버리는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애굽과 다른 모습을 가진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서 불러내셨는데 다시 애굽과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만한 일이다. 그래서 레위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을 요구하시고 거룩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것도 곧 거룩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애굽의 모습을 버리라는 것은 신약 식으로 말하자면 옛사람을 버리라는 의미이다. 유월절 피로 인해서 살아난 백성들이 모인 나라, 희생이 바탕이 되어서 생명이 유지되는 나라가 이스라엘이고 지금의 신자들이기 때문에 이 나라는 애굽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들에게도 옛사람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러 가지 규례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규례를 지키라고 19절에서 말씀한다. 그 규례는 여호와의 거룩에 참여할 수 있는 규례이다. 즉 규례는 단지 지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단지 지켰다고 여호와의 거룩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규례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과 반대되는 자신의 옛사람을 죽이는 것이 여호와의 거룩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여러 가지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할 자가 누구인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19절을 보면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고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짠 옷을 입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뭔가 섞인다는 것을 금하고 있는 말씀이다. 한가지만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너는 새사람이 되었으니까 이제 옛사람을 버릴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옛 사람이 섞이지 않은 새사람으로서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자아가 죽는 것, 이것이 새사람이다. 20절에서도 속량되지 못하고 해방되지 못한 씨종과 행음하지 말라고 한다. 이 역시 해방되지 못한 종, 즉 옛사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여호와의 거룩에 참여할 수 없는 모습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23절부터 25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 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과목을 심거든 처음 3년 동안은 먹지 말고 4년째는 거룩한 과실이니 하나님께 드리고 5년째부터 먹으라고 말씀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지어 곡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곡식을 수확할 수 있는 땅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곡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곡식을 먹으면서 애굽 땅에서 빠져나와 약 속의 땅에 들어온 새로운 존재가 된 자신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단지 곡식에만 관심을 두고 먹는다면 그것은 애굽 때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된다. 때문에 하나님은 4년 동안 곡식을 먹지 못하게 하심으로 자신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26-28절까지의 말씀도 오직 유월절의 희생에 관심을 두는 삶을 살 것을 요구하며, 이방의 풍속을 좇지 말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방의 풍속은 모두가 자신의 몸을 지키고 세상에서 잘되기 위해서 행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잘되고자 하고 몸을 위해서 사는 것은 옛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에 이방의 풍속을 좇지 말라는 것이다. 29절에 딸을 기생이 되게 말라는 것은, 애굽에서 자기의 딸을 이방종교의 제사장에게 갖다 바치면 복을 받아서 집안이 잘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딸 가진 부모들이 자기 딸을 스스로 그들의 제사장에게 갖다 바쳤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집안이 잘되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을 버려라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고 성소를 공경하라는 것도 자신의 집에 대한 관심보다는 성소, 즉 하나님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질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31절에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라는 것은 신접한 자나 박수들은 모두가 세상에서 잘되는 복을 가지고 다가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욕심을 더욱 커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날마다 세상에 대한 욕심에서 떠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할 사람들이 세상에서의 복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할 때 결국 욕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욕심이 더욱 가중되고 결국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몸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32절부터의 말씀도 세상은 자신이 잘 살기 위해서 이웃을 압제하고 손해를 입히지만 옛사람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힘쓰는 사람은 오히려 이웃과 나누어야 하고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것이 곧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떠난 삶이고 자신의 몸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둔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느냐이다. 과연 무엇이 여호와의 거룩에 참여하는 모습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내 몸에 관심 두지 않고,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지 않고 오직 나를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주님의 희생과 은혜에 감사하며 날마다 옛사람의 흔적을 벗어버리기에 힘쓰고 예수님께만 관심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관심이다. 여러분이 자신의 목숨에 대해서, 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살아갈 때 여러분의 관심에 하나님은 존재할 수 없다. 신자는 오직 새사람으로 날마다 태어나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규례(레 20:1-9)
960211061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무릇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우거한 타국인이든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 본 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그 사람과 그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무릇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히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 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였은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신자에게 가장 쉽고도 어려운 말은 ‘하나님만을 신뢰한다’는 말일 것이다. 세상에 살면서 자신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도 변함없이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내편에서 모든 문제를 바라볼 때는 절대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 편에서 바라볼 때 거기서 신뢰가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말한다. 지난 시간에 이 땅에서 신자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은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시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가?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지 않는 자이다. 세상은 모든 것을 자기편에서 바라본다. 자기에게 해롭고 손해되는 일은 결코 용납하지를 않는다. 조금 나은 사람은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착하고 양심적으로 살려고 한다. 이 모두가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힘쓰는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는 버리고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지기를 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둔 삶의 모습이다. 자신의 양심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된다. 내가 볼 수 없었던 천국을 알게 하시고 볼 수 있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옛사람은 벗어버리고 하나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보고자 힘쓰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된 기쁨이 있는가? 죄인된 내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백성 되었다는 기쁨과 감사를 누리고 있는가? 신앙생활이 재미있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가? 대부분의 신자들은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닥쳐온 여러 가지 문제가 신앙의 기쁨과 감사를 소멸시킨다고 하소연할 것이다. 그러나 기쁨과 감사는 어떤 문제 때문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문제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는 언제나 문제가 발생할 때 인간 편에서 서서 그 문제를 바라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은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자기에게 그런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것을 참지를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어제나 모든 일이 아무 일 없이 편안하게 잘되기를 바라고 산다. 그리고 천국까지 자기 것이 되기를 원한다. 문제가 없을 때는 하나님이 자기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감사해 한다. 신앙생활이 기쁘다고도 한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할 때 그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만다. 결국 자기가 누렸던 기쁨과 감사가 거짓된 것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관심은 자기 몸에 있었지 하나님께 있었던 것이 아님이 증명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는 것은 언제나 근심과 걱정, 염려뿐이다.

 

 


인간 편에 서서 세상을 보시면 안 된다. 그럴 때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사라지게 된다. 불평과 원망만이 있게 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님 편에서 이해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럴 때 신자는 어떤 일속에서도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세상을 편안하게 살고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면서 살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것은 한낱 꿈에 불과하다. 마귀의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러 어떤 고통을 기다리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통에서나 평안한 가운데서나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 나는 평안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으니까 평안함을 주시기 바랍니다’는 생각을 가지는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몸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증거이다. 신뢰는 날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삶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어떤 환경을 내편에서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경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지 못할 때 등장하는 것이 인간의 정성이다. 신에게 나아가는 모든 목적이 잘되는 것이다. 자신이 잘되고 자식이 잘되는 길이라면 어떤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위 ‘복 받는 비결’에 ‘기도응답 받는 비결’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하나님은 이것을 거부하신다. 본문에 보면 자식을 몰렉에게 준다는 것은 몰렉이라는 우상신에게 자신의 최고의 정성을 보이기 위해서 자식까지도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이 행위를 못본체 하는 자에게까지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그들을 백성 중에서 끊으시겠다고 말씀한다.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도 백성 중에서 끊으시겠다고 하신다. 지난 주일에 말한 대로 신접한 자와 박수는 세상의 복을 말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는 것은 그들을 통해서 세상에서 잘사는 길을 찾아보려는 목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것을 거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신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만들어 낸 우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신이라는 존재는 모두가 인간 편에 서 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는 신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철저하게 세상의 것을 원해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금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을 원해서 하나님께 나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을 우상의 신과 같은 종류의 신으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힘으로 얻어 보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편에서 볼 때, 세상 편에서 볼 때는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이다. 세상의 모두가 이렇게 살아간다. 때문에 인간 편에서 세상을 살 때는 회개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을 인간 편에서 살 때와 하나님 편에서 살 때의 잘못이 전혀 다르다. 인간 편에서 살 때는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께 정성을 다하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하고 용서를 구한다. 즉 예배에 빠지고 십일조를 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성경보지 않은 것을 죄라고 여긴다. 물론 이렇게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지 죄를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결국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을 복을 얻기 위한 자신의 정성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죄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살 때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세상의 것에 탐욕을 가진 것을 죄로 여긴다.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한 자신에 대해서 회개하게 된다. 이것이 새사람의 모습이다. 어떻게 하든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싶어 하고, 하나님 편에서 세상을 보고 싶어 하고, 천국을 사모하면서 마음속 깊숙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가 되기를 힘써 가는 것이 새사람인 것이다.

 

 


10절부터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18장의 근친상간의 규례에 대해서도 말했지만 성에 대한 규례는 자기의 힘으로서 자기의 욕심을 만족시키려는 대표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결국 성에 대한 규례는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질서를 자신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힘으로 깨뜨려 버리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거부하시는 것이다.

 

 


신자는 세상을 자기 욕심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이방인의 모습이고, 가나안 백성의 모습이고, 세상의 풍속이다. 신자가 주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할 때 결국 자기의 욕심을 앞세우고 신을 찾게 된다. 이것은 옛사람이고 몰렉을 찾는 행위이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해 할 때 그 삶에 기쁨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근심 걱정은 인간 편에서 서서 는 전혀 해결할 수 없다. 방법은 하나님 편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여러분의 원망과 불평과 염려는 인간 편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규례는 하나님 편에 서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제사장 규례(레 21:1-9)
960218072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려니와 골육지친인 부모나 자녀나 형제나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친 자매로 인하여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 제사장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그 수염 양편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 그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그들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말 것이며 이혼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께 거룩함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하게 하라 그는 네 하나님의 식물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나 여호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자는 거룩함이니라 아무 제사장의 딸이든지 행음하여 스스로 더럽히면 그 아비를 욕되게 함이니 그를 불사를지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규례로서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쫓아내는 가나안 족속의 풍속을 좇지 말 것을 요구하신다. 왜냐하면 그 풍속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증히 여기시고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신 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레20:23).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약 속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그들과의 구별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풍속을 좇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결할 것을 요구하고, 정결함을 보이는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백성의 풍속을 좇지 않음으로 증명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결을 요구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여호와의 은혜로 인해서 구출 받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를 좇지 못할 때 하나님의 약 속의 땅은 가나안 거민을 토하듯이 이스라엘을 토해 버린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좇지 말아야 할 가나안의 풍속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쫓아내라고 하신 것, 죽이라고 하신 것, 끊겠다고 하신 것은 통해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박수, 신접한 자를 추종하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박수나 신접한 자는 세상에서 잘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친상간을 금하는 것은 자기의 힘을 가지고 그 힘을 거부할 수 없는 대상에게 발휘하여 자신의 욕심을 만족시키는 세상적인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구별할 것을 요구하시는 세상 풍속은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세상에서 잘되고자 하는 것이 세상 풍속이다. 자신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악한 자를 향해서 자신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 세상 풍속이다. 모든 관심이 세상에서 사는 문제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나 믿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어지고 소홀해지게 된다. 믿음 때문에 세상에서 구별되는 것, 세상 풍속에서 멀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모습인데 오히려 세상 풍속을 따르기 위해서 믿음과 은혜를 이용하는 모습으로 바뀌어져 버렸다. 이것이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부정한 모습인 것이다.

 

 


신자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것, 신자가 진심으로 관심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믿음의 문제이다. 내가 과연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있는지,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늘에 소망을 두는 행동인지, 내가 이웃에게 하는 모습을 통해서 진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이런 물음 앞에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항상 믿음보다는, 은혜보다는 세상에서 사는 문제가 더 급했고, 자식이 잘되지 못한 것이 더 실망스럽고 애가 탔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닌가? 가인이 아벨과 자신을 대조하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불만을 품고 아벨을 향하여 미움이 발생하였던 사실을 기억하면서도 우리는 남이 나보다 더 잘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원망과 미움 속에서 살았던 자가 바로 우리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평생토록 살아야 할 인생이다. 이런 인생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가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인간에게 구별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부끄러움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부끄러움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리는 방식이다. 부끄러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면 한시도 살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오늘 레21장도 그런 의미의 말씀이다.

 

 


21장은 제사장에 대한 규례이다. 제사장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레8장을 말씀드릴 때 설명하였다. 다시 요약해서 말하면 제사장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백성다운 삶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21장도 그런 의미에서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21장을 보면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구별된 것을 말씀하고 있다. 골육지친을 제외하고는 죽은 자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한다. 이는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생명으로 끌어가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과는 가까이 말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흠있는 자는 제사장을 할 수 없으며 아내도 오직 처녀만 취하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제사장이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이기 때문이다(4절). 제사장이 어른이라는 것은 나이가 많아서도 아니고 제사장이라는 직책이 있기 때문도 아니고 뭔가 경험이 많기 때문도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 본을 보여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른이란 다스리고 본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나이가 많다고, 세상을 오래 살아서 경험이 많다고 어른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장을 남겨 놓으신 것은 단지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제사장을 통해서 세상 풍속을 멀리한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고자 하시기 위함이다. 물론 제사장의 임무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다. 모든 제사는 하나님의 법안에서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제사장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제사장은 구별된 삶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이 하나님 백성다운 삶인가를 알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제사장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알고 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들고 하나님께 나갈 때 그 피가 자기가 흘려야 할 피라는 것을 인정하고 애통해 할 때 그것이 곧 구원받은 자였던 것이다 .이런 역할을 하는 제사장을 하나님은 어른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잘못된 것이 무엇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줘야 했던 것이다 .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다른 점은 땅이다. 제사장은 자신의 땅이 없다. 따라서 자기가 손수 일해서 곡식을 수확해서 먹고살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 드릴 때 하나님께 가져오는 것의 일부를 먹도록 하셨다. 즉 제사장은 자기가 전혀 일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만 살아간다. 그럴 때 제사장은 오직 하나님의 힘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의 힘으로 먹고사는 이스라엘 가운데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만 먹고 살아가는 제사장을 두신 것은 무슨 이유인가? 결국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일해서 먹고살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알고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두라는 가르침을 제사장을 통하여 하시는 것이다 .그런 제사장을 하나님은 거룩히 여기라고 말씀한다. 제사장을 거룩히 여겨라는 것은 제사장의 그런 삶을 본받고 섬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오늘날의 어른은 누구인가? 교회의 어른은 분명히 예수님이다. 그러면 신자들 사이에서 어른의 역할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신자들에게서 어른은 목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고 권사도 아니다. 레8장을 말할 때 지금의 제사장은 신자를 말하는데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말씀에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가 곧 제사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 신자들 가운데 어른도 오직 믿음으로 세상을 살면서 사랑으로서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는 신자가 어른인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그 어른이 보일 때 여러분은 그 분을 통해서 자신의 부족을 발견해야 할 것이고 그 분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어른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어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장이 어른이 되었던 것처럼 이제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된 모습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어른의 역할을 하시기 바란다. 

 

 

 

성물 규례(레 22:1-9)
96022508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이 내게 드리는 성물에 대하여 스스로 구별하여 내 성호를 욕되게 함이 없게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들에게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에 그 몸이 부정하고도 이스라엘 자손이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에 가까이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지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아론의 자손 중 문둥 환자나 유출병이 있는 자는 정하기 전에는 성물을 먹지 말 것이요 시체로 부정하게 된 자나 설정한 자나 무릇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벌레에 접촉된 자나 무슨 부정이든지 사람을 더럽힐 만 한 자에게 접촉된 자 곧 이런 것에 접촉된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니 몸을 물로 씻지 아니하면 성물을 먹지 못할지며 해 질 때에야 정하리니 그 후에 성물을 먹을 것이라 이는 자기의 응식이 됨이니라 절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들은 나의 명을 지킬 것이라 그것을 욕되게 하면 그로 인하여 죄를 짓고 그 가운데서 죽을까 하노라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제각기 나름대로 자기의 소신을 가지고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 보면 자기의 의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고, 능력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지만 사람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능력과 재능을 사용하는 목적과 기대하는 것도 동일한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이 세상이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자기 몸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사는 의미를 자기에게 두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세상이라는 마귀에게 붙들려 살아가는데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붙들려서 살아간다. 하나님께 붙들려서 살아가는 사람은 이 땅의 사람과 똑같이 자신의 힘과 재능을 발휘하면서 살아가지만 그 목적은 자기 몸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몸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있게 하신 자리에서 열심히 살면서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재능과 힘으로 무엇인가를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아주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들려 사는 자는 모든 결과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안다. 때문에 모든 결과에 순종함을 통해서 온유를 배우는 것이다. 이런 자가 신자이다. 결과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고 자신의 소망을 포기할 때 그 안에서 자유함을 얻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모든 결과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자식에게 대해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 직장에 대해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 사업에 대해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 이 모두가 자기가 기대하고 바라는 자기만의 결과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스스로 자기를 결박하는 결과만 될 뿐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신자된 여러분이 참된 믿음을 알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자신의 소망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의 모든 소망은 하나님 안에서 다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소망이 내 소망이 되어버리는 것이 곧 신자이고 이것이 곧 자유이다.

 

 


본문은 성물에 대한 규례이다. 한마디로 제사장은 성물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이다. 성물을 더럽히게 되는 것은 부정한 자가 성물을 가까이 했을 때이다. 성물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예물을 말한다. 이 예물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이다. 거룩한 예물은 희생제물이다. 그리고 희생제물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단지 희생제물을 바쳤다는 것이 구원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이 예물을 바쳤느냐가 구원과 연관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면서 이 예물과 함께 해야만 했다. 예물과 함께 하는 것이 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예물과 함께 하는 것인가? 그것은 예물을 드리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예물을 드리는 것이 예물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기가 죄인 됨을 모르면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물을 더럽히는 것이고 그 결과는 여호와 앞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예물을 들고 하나님께 나가는 제사장들에게 부정한 몸으로 성물에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규례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기가 죄인 됨을 안다는 것이 무척 쉬운 문제 같으면서도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 앞에 서면 죄인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보다 더 나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의가 나오는 것이다. 구원이란 누가 더 착한 행동을 보였는가를 묻지 않는다. 누가 더 선한 양심으로 살았느냐를 묻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자가 누구냐만 묻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행위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부족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부족하다는 것은 뭔가 조금 모자라니까 채워 넣으면 된다는 의도가 있는 말이다. 그래서 그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착각을 한다.

 

 


본문을 보면 4절에 문둥환자나 유출병이 있는 자는 정하기 전에는 성물을 먹을 수 없다고 한다. 또 사람을 부정케 하는 것에 접촉한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니 물로 몸을 씻지 아니하면 성물을 먹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성물에 대한 규례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인간의 정성 때문도 아니고 인간의 행위 때문도 아니고 오직 자신의 더러움을 알고 나올 때이다. 우리의 더러움은 희생제물 안에서만 깨끗해지는 것이지 우리의 선한 양심이나 착한 행동을 통해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구제를 할 때도 사람들은 구제하는 그 행동 자체에 의미를 둔다. 그리고 구제에 동참하는 자신을 바라보고 마음이 뿌듯하게 된다. 즉 자기가 이런 좋은 일을 했다는 데서 자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자기도 하나님의 신자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대부분의 신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신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을 때 신자는 이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를 쌓아갈 뿐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선한 양심과 행위를 가지고 뭔가 신자의 덕목을 쌓아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부딪히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뭔가 편하고 일상생활에 별 문제가 없이 생활할 때는 얼마든지 할 수가 있는데 집안에 문제가 발생하거나 어떤 어려움이 생기면 그 순간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행위에 대한 보상이 생각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자기가 선하게 살아왔는데 왜 이런 일이 있게 하느냐를 따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한계이다. 그러나 자신의 더러움을 알고, 자신이 죄인 됨을 알고 살았던 자들은 이미 그 믿음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믿음이기에 어떤 문제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좇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은 자신의 부정함, 더러움을 아는 자만이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자기가 바친 저 제물이 무엇 때문에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하는지는 자신의 더러움을 모르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결국  하나님 앞에 자신의 행위를 내세우게 되어 있다. 선한 양심과 도덕으로 신앙생활을 하고자 힘쓰게 되는 것이다.
부정한 자는 성물에 가까이 하지 말라는 규례는 성물을 소홀히 취급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가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저절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제물을 바라보는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를 묻는 것이다. 자신의 더러움을 알고 그 제물을 바칠 때 제물을 바치라고 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천국에 거하는 자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도 신자들 가운데는 자신이 십자가를 안다고 하고 교회 나오면 그것이 믿는 것이고, 또 저절로 천국 가게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한다. 그러나 십자가를 아는 것이 우리를 저절로 천국 보내주지 못한다. 십자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십자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자는 자신의 더러움을 아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선한 양심과 도덕으로 하지를 않고 자신의 어려움과 부끄러움을 알고 그 더러움을 위해서 죽으신 주님께 자신의 모든 인생을 맡긴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 붙들리지 않고, 자기에게 매이지 않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길이다. 여러분 무엇에 붙들려서 살아가는가? 세상에 붙들려서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주님께 붙들려서 살아가는 인생인지를 판단하시기 바란다. 진정한 삶의 자유는 주님 안에 있음을 아시고 내 인생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이되기를 바란다

 

 

 

훼방(레 24:10-23)
9603030922

 

 

(레24:10)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요 그 아비는 애굽 사람 된 자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 중에서 싸우다가 (레24:11)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하므로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그 어미의 이름은 슬로밋이요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었더라 (레24:12) 그들이 그를 가두고 여호와의 명령을 기다리더니 (레24: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24:14) 저주한 사람을 진밖에   끌어 내어 그 말을 들은 모든 자로 그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 (레24:15)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요 (레24:16)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레24:17)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레24:18) 짐승을 쳐죽인 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 것이며 (레24:19)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레24:20)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레24:21)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 줄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일지니 (레24:22) 외국인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히 할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레24:23)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니 그들이 저주한 자를 진밖에   끌어내어 돌로 쳤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사람이 세상을 보는 데에는 두 가지 시각이 있다. 하나는 자기편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기편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함은 세상을 자기 것을 만들고 자기 것을 찾기 위해서 필요한 곳으로 보는 것을 말하고 하나님 편에서 세상을 보는 것은 세상에는 내 것이 없음을 알고 진짜 내 것이 존재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이 시각이 어떠냐에 따라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도 달라지게 된다. 자기편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도 자기의 것을 들고 나가고자 한다. 즉 자기의 열심과 정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어 보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로 세상의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는 자는 처음부터 ‘하나님은 누구시냐’ ‘나는 누구냐’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까? 세상을 보는 시각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말씀드린 대로 시각여하에 따라서 신앙생활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나님 편에서 세상을 보는 자는 직장생활도, 가정생활도, 자식 양육도, 모든 것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내편에서부터 출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내 욕심이 들어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 삶을 살기 때문에 세상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살수밖에 없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도 중요하다. 흔히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을 보면서 답답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경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성경이 세상을 보고 있는 편에 서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봐야 이해할 수 있는데 자꾸 자기 입장에서 성경을 보고자 하기 때문에 결국 성경의 내용을 자기 입장에서 해석하는 사람과 자기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은 서로 대화가 통하지를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편에서 성경을 봐야 하는가? 물론 하나님 편에서 봐야 한다. 하나님 편에서 성경을 볼 때 우리는 자꾸만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대신 하나님께로 점차 가까이 다가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 입장에서 보시기 바란다.

 

 


본문은 어느 부모의 자식을 온 회중이 보는 앞에서 돌로 쳐 죽이는 내용이다. 그 자식의 죄는 같은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다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볼 때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했다는 이유로 돌로 쳐 죽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자비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성품에 맞지 않는 일인 것 같다. 이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은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했으니까 죽어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자식을 통해서 그 자식의 부모, 그리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서 끊어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시기 위함인 것이다.

 

 


부모가 부모 노릇을 못했다는 것을 하나님이 지적하시는 것이다. 10절에 보면 그 부모가 누구인가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아비는 애굽사람이다. 결국 그 애굽 사람은 자식에게 애굽의 사고방식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즉 자기편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잘사는 것이, 돈 버는 것이, 공부 잘해서 능력을 갖추는 것이 최고의 목적인 것으로 가르친 것이다. 그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하게 된 것이다. 결국 문제는 자식이 아니라 그 부모에게 있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지적하시고자 하신다.

 

 


여러분이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믿음을 말한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얼마나 참되고 진실된 것이냐는 여러분이 부모로서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이 뭐냐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자식이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보다는 세상에서 공부 잘하고 남들에게 뒤지지 않게 자라 가는 것을 대견해 하고 기뻐한다. 자식이 믿음 안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기보다는 세상에서 남에게 뒤질 때 더 불안해하고 염려해 한다. 이것이 부모들의 모습이고 지금까지 애굽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식을 가르쳐 왔던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 왔고 믿음을 말해 왔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잘못된 모습인가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본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했다고 하는 데 과연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하는 어떤 의미인가? 여호와 이름이란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라는 사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말하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3:13)’라고 한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3:15)’ 고 말씀한다.

 

 

 

즉 여호와의 이름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구원의 은혜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의 은혜를 높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애굽에서 영원히 종으로 살아야 했는데 그 종에서 자기들을 구출하시고 하나님 백성 삼으신 분이 여호와임을 찬양하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만이 나의 왕이시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분이시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살린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우리의 삶은 온통 하나님과 반대되는 쪽으로 치닫고 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는 것이다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구원을 감사한다고 하면서 세상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버리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는 것이다. 내가 천국에 가게 된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앞세우고 세상에서 누릴 복을 요구하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저주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앞세우고 교회를 한다고 하면서, 구원을 말하고 천국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결국 목적은 교회 성장이고, 예배당 건물 짓고, 사람 수를 늘리는 것에 두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지신 십자가에는 그러한 것들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십자가에는 같이 죽자는 초청만이 있다. 세상에 대하여 죽자는 요구가 십자가이다. 자신의 죄를 아는 자는, 주님이 왜 오셨는지를 아는 자는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간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자신의 구원을 감사하며 노래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세상의 것이 만족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만족이다. 이런 신자가 진심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는 자이다.

 

 


오늘날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지혜를 가르쳐야 한다. 그럴 때 그 자녀는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는 자녀로 자라 갈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한 자식을 죽이게 함으로 부모의 잘못된 가르침을 책망하고 온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무엇인가는 가르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웃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는 것이다. 즉 진심으로 자신의 구원을 아는 자는 이웃에 대하여 구원을 아는 자의 모습으로 다가간다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단지 인간적인 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로서, 그 은혜와 사랑으로 대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아는 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웃과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는 하나님이 주신 자녀를 내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세움 받은 도구이다. 때문에 부모는 자녀에게 상상적인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소망 둘 곳이 못 되고 다 썩어지고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임을 보여줘야 한다. 부모가 세상을 붙들고 의지하는 모습을 보일 때 자녀 또한 세상을 힘으로 삼는 방식으로 자라 갈 수밖에 없다. 부모는 분명히 자녀를 사랑한다. 자녀를 잘못된 길로 밀어낼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녀를 멸망의 도구인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기르는 것은 결국 부모가 멸망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있고, 지옥을 믿지 않고 있고, 하나님의 구원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십자가를 바라보시고 어느 것이 헛된 것이고 어느 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며 진심으로 자녀에게 복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희 년(레 25:47-55)
9603101023

 

 

너희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부요하게 되고 그 곁에 사는 너희 동족은 빈한하게 됨으로 너희 중에 우거하는 그 이방인에게나 그 족속에게 몸이 팔렸으면 팔린 후에 그를 속량할 수 있나니 그 형제 중 하나가 속하거나 삼촌이나 사촌이 속하거나 그 근족 중 누구든지 속할 것이요 그가 부요하게 되면 스스로 속하되 자기 몸이 팔린 해로부터 희년까지를 그 산 자와 계산하여 그 년수를 따라서 그 몸의 값을 정할 때에 그 사람을 섬긴 날을 그 사람에게 고용된 날로 여길 것이라 만일 남은 해가 많으면 그 연수대로 팔린 값에서 속하는 값을 그 사람에게 도로 주고 만일 희년까지 남은 해가 적으면 그 사람과 계산하여 그 연수대로 속하는 그 값을 그에게 도로 줄지며 주인은 그를 매년의 삯군과 같이 여기고 너의 목전에서 엄하게 부리지 못하리라 그가 이같이 속하지 못하면 희년에 이르러 그와 그 자녀가 자유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신자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따로 기록한 적이 없습니다. 기도가 신앙생활이라고 말한 적도 없고, 교회 다니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살아가는 모든 일상생활에서 이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특별히 구분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언제나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뭔가 교회와 연관되어 있는 일을 해야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은 그 용서의 기쁨을 주위에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를 신앙생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부모로서는 자기에게 맡겨진 자식을 나의 자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세움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자녀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가르치기 위하여 모범을 보이고 애를 쓰는 그 자체를 신앙생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일을 다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세상도 포기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신앙이 오히려 짐이 됩니다. 자신이 신자로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이고,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지 못했을 때 신앙은 분명히 하나의 거추장스런 짐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뭔가 신앙의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신앙의 법칙을 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법칙을 지킴으로서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애당초부터 하나님께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교회 나오는 것도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자는 교회에 올 때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을 이루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셨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본래의 인간된 자세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레위기 25장의 말씀은 희년에 대한 규례입니다. 희년이란 어떤 날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25장의 내용입니다. 9절을 보면 “칠 월 십 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라고 말합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기쁨의 날이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기쁨의 날이 되는 것입니까? 자유 때문입니다. 희년은 곧 자유의 날이기 때문에 기쁨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25장을 보면 채무를 탕감하고, 노예들을 자유롭게 하고, 기업은 원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는 날이 희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기쁨의 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자에게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희년에 기쁨을 누리는 자들은 종 되었던 자들,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인 되고, 가졌던 자들에게는 희년이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슬픔의 날일 것입니다. 결국 희년이라는 것은 가진 자도 없고 억눌린 자도 없는 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50년마다 이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희년은 천국이란 가진 자도 없고 억눌린 자도 없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이런 나라라는 것을 희년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이란 내 것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세상은 내 것을 위해서 일하고, 내 것을 만들기 위해서 땀을 흘리며 삽니다. 내 것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욕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그 오 십 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고 합니다. 희년이 되는 해는 땅을 경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은 그전에 배의 소출을 주신다고 합니다. 희년이 되기 전에 희년에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소출을 미리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십니까? 희년에는 이 땅은 내 땅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희년에 우리의 모든 것은 우리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셨음을 알고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희년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나를 도우셨던 결과였기 때문에 내 권리를 포기하는 해가 곧 희년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품꾼으로 자처하는 것이 곧 천국으로 들어가는 믿음인 것입니다.

 

 


55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남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남을 다스리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없는 자를 무시했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희년은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종도 없고, 주인도 없습니다. 가진 자도 없고 가지지 못한 자도 없습니다. 이것이 희년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내 주인이라는 믿음은 참으로 귀한 믿음입니다.

 

 


천국은 가진 자도 없고 가지지 못한 자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나눠진 것으로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로만 기뻐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천국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상상하는 천국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이 누려보지 못했던 것을 실컷 누려보는 그런 천국을 상상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가지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거하는 동안은 욕심을 버릴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영원한 희년, 영원한 천국인 것입니다. 내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힘을 삼고자 하는 자신의 죄악을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것이 신자의 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여호와의 품꾼입니다. 애굽의 종 되었던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희생을 통해서 여호와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여호와의 소유된 우리들에게 내 것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고, 우리는 단지 여호와의 은혜로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천국인 것을 기억하시고 세상으로부터의 자유, 내 것으로부터의 자유, 가진 자도 가지지 않는 자도 없고, 다스리는 자도 다스림 받는 자도 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그 나라를 이 땅에서 맛보고 살아가는 신자 되기를 바랍니다.

 

 


심판의 하나님(레 26:14-20)
9603241224

 

 

(레26:14)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치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 (레26:15)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진대 (레26:16)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파종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레26:17)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레26:18) 너희가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 배나 더 징치할지라 (레26:19) 내가 너희의 세력을 인한 교만을 꺾고 너희 하늘로 철과 같게 하며 너희 땅으로 놋과 같게 하리니 (레26:20) 너희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할 때는 자기입장이라는 것이 있다. 즉 모든 것을 자기입자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하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동일한 것을 두고 생각할 때도 각기 다른 생각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자기 입장에서만 하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신앙에 대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좋은 것만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신앙도 신앙 때문에 미움 받고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복 받고 잘살다가 천국 가는 것만을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셔서 좋은 길로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입장에서만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에도 사랑만 존재하지 저주와 심판은 없는 줄로 안다. 저주와 심판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해결되어버린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천국과 지옥이 함께 있다. 즉 심판과 구원이 함께 있다는 것이고, 지옥갈 자가 있기 때문에 지옥을 말씀하신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누가 과연 심판으로 빠질 자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교회 안다녔기 때문에 심판 받는다고 간단히 생각해 버리는 것도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언제나 자기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 다니는 자를 찾는 것이 아님을 알 때, 구원은 교회 다녔던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 그 사람은 신앙을 자기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 레26장이 바로 하나님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이 약속 안에 무엇을 담아 놓고 있는지를 밝혀주고 있다. 26장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순종치 아니할 때 칠 배나 더 징치하고 칠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말씀한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으로서는 도저히 하실 수 없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생각하시면 안 된다. 하나님은 분명히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흔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셨다.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사랑을 완성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사랑으로 죄용서를 받았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를 받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이제 우리는 이 사랑을 감사하면 되지 우리가 또 자신의 죄를 생각하고 죄책감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 말은 그럴듯한 말이지만 성경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십자가는 분명히 우리의 죄를 덮어주고 가리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십자가를 아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아는 자에게만 가능하다. 즉 십자가는 우리를 십자가로 초청을 하고 있는데 그 십자가에 같이 동참할 수 있는 자는 자기의 죄를 알고 주님과 함께 죽기를 소원하는 자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죄를 말하지 않고 용서를 말하고 십자가의 사랑과 자비를 말하는 것은 뿌리 없는 나무에 물을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말할 때 사랑만을 고집하면서 자기에게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는 것인가? 그 이유가 자기 입장에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입장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를 옹호해주고 보호하신다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또 교회에서도 심판의 하나님이 아닌 교회 나오는 자를 옹호하고 보호하며 지켜주는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설마 자신을 심판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같이 열심히 교회 나오고 봉사하는 사람을 어떻게 심판하느냐고 고개를 흔들게 된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이 자신들의 그런 열심과 자기들의 그런 입장을 고수하는 그 마음을 심판하여 버리신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과 같다. 그러나 열심 있는 바리새인조차도 심판해 버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내 입장에서 보면서 사랑만을 말하는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를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입장을 가지고 교회를 다니면 결국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부르는 목적이 자기를 위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자기를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지 뭔가 하나님을 알고 싶고,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교회를 찾는다는 것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과 구원을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피 흘리심과 희생을 모르는 자는 심판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자기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지 왜 심판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하느냐는 반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게 될 때 죄인을 위해서 피 흘리시고 희생하신 그 사랑을 외면해 버리고, 오히려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공격을 하면서 자기의 고집을 가지고 세상을 살려고 하는 쪽에 대해서 분노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신 만큼 그 사랑을 영접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시하고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입장을 앞세우고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에 대해서 기뻐하시고 무엇에 대해 저주하시고 분노하시는가 에는 관심도 없이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복을 얻는 것에만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자기 것이지 하나님의 것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레위기 26장을 보면서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하시는가, 이것은 구약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무조건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은 바로 그런 마음을 심판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마음은 26장의 말씀을 보면서 내가 바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죄인이라는 것, 이 말씀과 같이 내가 심판 받을 죄인이다는 그 고백을 하는 그 자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이고, 그 자가 곧 천국갈 마음을 소유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의 입장으로 돌이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으로 돌이킨다는 것은 자기를 생각하던 삶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삶으로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세상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눈뜬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자기 입장을 계속 지키고자 할 때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서 가르치실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발을 빼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에 땅에 들어가면 원하는 것을 다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이 다 주어졌을 때에라도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약속에 땅에서 주어진 것에 관심을 두게 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해 버리시겠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을 통해서 땅에 대한 관심을 버리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에 따른 복은 영생입니다. 영생이란 단지 오래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켜서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사라지고 없어질 생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한 것입니다. 영생을 단지 오래 사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럴 때 그 생명 때문에 주어지는 모든 열매도 모두 우리의 것이 됩니다. 이 생명을 약속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입니까? 심판하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시겠다고 했을 때 제발 봐달라고 사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심판 받아 마땅한 존재이니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의하는 사람이 약속 안에 있는 신자입니다. 자기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심판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자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은 혜(레 27:1-8)
96033113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너의 정한 값은 이십 세로 육십 세까지는 남자이면 성소의 세겔대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삼십 세겔로 하며 오 세로 이십 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이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십 세겔로 하며 일 개월로 오 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은 오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은 삼 세겔로 하며 육십 세 이상은 남자이면 그 값을 십오 세겔로 하고 여자는 십 세겔로 하라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너의 정가를 감당치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가 세상에서 기대하고 원했던 것이 만족으로 다가오기란 일생을 두고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각각 다른 면이 있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공통된 것은 더 크고 좋은 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있는 것보다 좀 더 큰 것, 좀 더 좋은 것을 계속 원하다 보니까 결국 인간에게 만족이라는 것은 평생을 통해서 이룰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좀 더 큰 것, 좀 더 좋은 것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인간이 원하면 원하는 것만큼 커지고 좋아지는 것이 바로 소망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족이란 채워지는 것인데 한계가 없기 때문에 일평생을 두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크고 좋은 것을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즐거움이란 많은 것을 소유한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즐거움은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만족한데서 얻는 것이지 더 많은 것을 소유했다고 해서 인생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남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내 것이 더 적다는 마음,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서 생활의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언제나 부족함으로만 채워져 있는 마음, 그런 마음에서 삶의 기쁨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면 저절로 인생이 행복해 질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스스로 삶의 행복을 멀리 해버리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하니까 그 마음은 언제나 불만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살아도 기쁨이 없고 즐거움이 없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 보기 위해서 교회를 찾지만 교회에 나와도 해결되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교회를 찾는 목적도 자기의 부족함을 예수님을 통해서 메워보자는 의도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기쁨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신앙생활하기가 힘든 이유 중의 하나가 세상이 온통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나는 적은 것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만 살겠다고 작정을 하지만 내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이 나에게 상처를 주고 부담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은 것으로 채워갈 때마다 자신이 뭔가 뒤쳐지는 것 같은 생각이 신자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이런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자신보다 적은 것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자신으로 인해서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적게 가지기 위해서 자기 소유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항상 자기보다 많은 사람을 바라보면서 상처를 입지 말고 자기로 인해서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적게 소유한 자들을 생각하면 겸손하게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는 삶으로 나가야 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한 신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항상 자기만 적게 가진 것 같고, 자기만 어려움을 당하며 사는 것처럼 생각되어지기 쉽습니다. 그럴 때 사람은 자연히 자신보다 편안하게 살고, 많이 누리고 사는 자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자신보다 더 큰 어려움과 고통에 처한 자가 있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를 알 때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다 많은 것, 더 좋은 것만 바라고 산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될 때 나오는 것은 한숨이고 신세타령밖에 되지 않은 것입니다.

 

 

내 인생의 기쁨을 빼앗아간 장본인이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이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면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도 정작 세상 살아갈 일, 돈 들어갈 일 생각하면 은혜와 사랑이 아니라 걱정과 근심만이 쌓이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세상에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을 이 땅에서 보내셔서 나를 구원하셨다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붙들고 책임지고 계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책임지시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시기 위해서 붙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하나님 나라로 들여보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만이 갈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의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있는 땅의 것을 빼앗아 가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즐거움은 나에게 주어져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씩 하나씩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많은 것, 더 큰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사랑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의 행복은 많은 세상 사람들이 찾는 좋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많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의 기쁨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이유는 더 좋은 것을 원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그런 인간의 잘못된 모습을 발견하면서 인생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기쁨을 주실 때 세상이 원하는 그런 기쁨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은 세상의 좋은 것을 통해서 인생의 기쁨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찾지 못한 이유는 항상 크고 좋은 것에서만 삶의 기쁨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그토록 원하고 찾는 삶의 기쁨, 즉 행복이라는 것을 내 스스로 놓치면서 살아가는 헛된 인생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자를 선택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레위인입니다. 레위인들은 제사장으로서 성전에서 일하는 특별히 선택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은 아무나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한 자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바쳐진 자는 레위인 외에는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여기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자는 레위인 외에는 안 되니까 나에게 몸을 바치겠다고 네가 서원을 했으면 그것을 돈으로 계산해서 바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보다 적게 바쳐야 하는 이유는 여자가 남자보다 노동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네가 내게 몸을 바치겠다고 했는데 네가 할 일을 레위인이 하고 있으니까 너는 재물을 바치는 것으로 대신해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몸을 바치기로 서원한 사람은 하나님께 재물을 바치는 것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기쁨으로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헌금하라는 내용이 아닙니다. 물론 본문의 의미에는 헌금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더 넓은 의미로 모든 것을 헌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든, 교회 일을 하든 모든 것을 헌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헌신의 의미를 바르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헌신을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헌신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나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자체를 받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러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자는 하나님이 선택해서 세운 사람입니다. 그 분이 바로 구약에서는 제사장이고 신약에서는 완전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예수님같이 내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우리의 모든 일을 그 사랑으로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헌신할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헌금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봉사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헌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헌신에는 기쁨과 즐거움만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가난한 자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돈이 없어서 내지 못하는 자는 제사장에게로 가면 제사장이 그 형편대로 값을 정해서 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돈을 전혀 낼 형편이 아니면 한 푼도 안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도 하나님께 헌신한 자로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자는 누구입니까? 돈을 많이 내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아는 자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 받은 것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 데서 은혜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만약 돈을 한 푼도 낼 형편이 못되는 가난한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을 했다면 그것은 어떤 마음입니까? 돈이 한 푼도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은혜는 많이 받았으면 은혜도 많고, 적게 받았으면 은혜도 적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100만원 받은 사람과 10만원 받은 사람의 은혜가 같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는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지고에 상관없이 같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은혜가 많고 적음에 따라서 차이가 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고통 받고, 어려움에 처한 상황 속에서도 그 은혜를 찾았고, 어떤 사람은 더 좋고 많은 것을 찾아 헤매다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그 무엇이든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가 헌신도 은혜로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삶은 하나님 편에서 주어진 기쁨으로 가득 채워지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찾아서 헤매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여러분에게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대와 눈이 세상의 크고 좋은 것을 향해 있을 때 여러분은 스스로 ‘나는 하나님께 받은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은혜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께 헌신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작다고 무시하지 말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은혜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