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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하나님아들 2014. 8. 11. 22:54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

Ⅰ. 서 론

1. 몰트만의 생애

몰트만은 1926년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1954년 시골교회에 시무하기도 하고, 브레멘에서 교목생활도 하고,
1955년 괴팅헨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58년에 '퍼젤과 브레멘에서의 칼빈주의' 를 필두로 1961년 '예정과 견인',
1965년 '기독교 종말론의 定礎와 결론에 관한 논구(희망의 신학)' 를 마르크스 사회주의자인 에른스트 블로흐의 喜望의 哲學에 대한 神學的 비판과 대답으로 출간하게 됨으로 화제가 되기 시작한다.

이어서 1972년에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을 희망의 신학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리고 1975년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를 그의 思想의 결론적인 책으로 출간하게 된다.

몰트만은 한스 요아킴 이반트와 에른스트 볼프, 그리고 오토 베버를 스승으로 모시고 튜빙겐대 교수로 활동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상기의 스승들을 모시고 1948년에서 1949년에 있었던 강의를 언급하면서 이 강의들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 당시 나의 세대에 있어 전쟁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이 삶의 충격을 받고 기진맥진한 채 포로수용소와 야전병원으로부터 대학 강의실로 모여들었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채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을 안중에 두고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신학은 그 당시 우리들에게 아무런 감명을 주지 못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1960년대에 희망의 운동이 강한 반대에 부딪쳤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났던 인간적 견지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의 결말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민권운동의 결말, 그리고 제 2 바티칸회의와 1968년의 움살라 세계대회의 에큐메니칼운동과 카톨릭교회가 나를 실망시켰는데 희망과 용기의 중심점으로 등장한 것이 사회와 교회 안에서 모든 미래의 차원을 열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고 회상한다.

이러한 그의 생애는 그의 사상에 있어서 당시 양식사학파를 거쳐 나타난 불트만과 실존주의 신학의 바르트 사상의 틈바구니에서 희망이란 종말론적 관점의 새로운 신학사상을 창출하게 된 것이다.

2. 희망의 원리(종말론적 관점)에 대한 구조적 문제점

몰트만의 저서인 '희망의 신학' 서론에서 기독교를 종말론적으로 보아야 할 합리적인 근거가 무엇인가를 말하며, 여기에서 자신의 사상에 대한 전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1장 종말론과 계시를 어떻게 종말론적으로 이해할 것인가를 말한다.
2장에서는 계시를 희망의 원리로 보아야 할 근거로서 성경이 어떻게 언약의 책인가를 밝힘으로 자기 신학의 근거를 마련한다.
제3장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미래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정리를 하면서 인간의 부활에 대한 희망과 기대에 대한 근거를 말하고,
4장 종말론과 역사에서는 역사관에 있어서 부활에 대한 사실성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논한다.
그리고 5장 새 출발의 교회에서 이제 그런 종말론적 희망을 소유한 교회가 어떻게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 설 것인가를 말하면서 논의를 종결한다.

몰트만의 저서인 '십가가에 달리신 하나님' 에서는 삼위일체를 십자가 신앙으로 정리하면서 부활은 사실증명이 불가능함으로 종말론적 관점에서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십자가는 역사적 관점임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동일성을 통해서 종말론적 신학을 대변코자 한다.

이어서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에서는 성령을 교회가 종말론적 사역을 하게 하는 존재로서 교회가 어떻게 사회에 희망을 심어줄 것인가 하는 종말론적 신학의 결실을 맺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희망이 기독교 사상의 근본적인 논점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결과인 희망을 가지고 전기독교 사상을 담아 표현한다는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Ⅱ. 본 론

1. 계시관

1) 계시를 종말론적으로 이해한다

몰트만은 계시를 종말론적으로 이해하며 약속과 기대의 범위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계시는 본질적으로 약속의 성격을 지니고 있고 그것은 종말론적 종류이다" 라고 말하면서 이스라엘의 애굽에서 해방과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브라함과 시내산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제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도 역시 약속의 성취라는 사상을 전개한다.

몰트만은 또한 "우리는 그가 목적을 향한 움직임과 걸음 속에 있는한 부활하신 주는 살아계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만난다고 말할 수 있다. 부활하신 주의 미래는 약속에서 현재가 되고 고난을 기쁘게 질 수 있는 희망을 통해서 받아지고 인간과 사물을 통한 비판적 희망의 사고에서 파악되어진다" 라고 말하며,
또 약속의 사건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항상 다만 인간의 실제적인 세계경험의 관계에서 그리고 그것과의 논의에서 비로소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계시를 실존론적 관점에서 이해하여서 말하기를 "기독교 신학은 인간 실존의 문제성과 현실의 문제성을 전체로서 받아들이고 약속의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인간 존재와 세계의 종말론적 문제성을 처리하는 그런 방식에서 인간 현실과 인간에 관한 세계의 현실에 관해서 그의 진리를 증명할 수 있다" 라고 한다.

2) 발전적 계시로 본다

몰트만은 로테와 트뢸취의 발전적 계시에 동의한다.
즉 "계시가 인간 정신의 과정 가운데서 발전한다든지 인간정신의 과정을 절대정신의 자기 운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라고 본다.
그래서 "그리스도 사건은 운명이나 섭리로부터 또 사실들의 세계사적 연속에서 생기는 역사적 연쇄 가운데 있게 된다.
즉 계시가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약속과 희망과 비판으로써 인간의 현실을 역사적으로 또 발전으로 만드는 것이다" 라고 함으로 계시가 완결되지 않고 발전되어 나가야 할 것을 말한다.

3) 약속과 율법, 계명, 복음에 대한 이해

(1) 약속에 대한 몰트만의 견해

몰트만은 약속을 계약과 동일한 의미로 보고 "약속은 복종과 결부되어 있고 복종은 장소의 변화, 실존의 변혁과 결부되어 있다.
"우리가 그 성취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일어나서 그 약속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지 아니하면 안된다" 라고 하므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으로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주된 방편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말하기를 "계약은 역사적인 사실로 보여질 수 없고 자체를 넘어서 약속된 미래를 지시하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라고 하므로 자신의 종말론적 신학을 변증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를 한다.

(2) 약속과 복음과의 관계에 대하여

실존주의는 약속과 복음을 비연속성으로 보고 믿음의 회고적 설계가 복음이라고 한다.
구속사관에서는 연속성으로 이해하여 역사적 발전의 결과로 복음이 주어졌다고 한다.
몰트만은 연속성으로 보되 종말론적 관점에서 약속이 신앙을 생성하고 신앙은 희망을 불러 일으키는 복음이 된다고 한다.

(3) 율법과 복음, 약속과 복음과의 관계

율법과 복음은 과거가 가진 신학적 문제를 말하고,
약속과 복음은 미래가 가진 종말론적 문제를 말한다고 한다.
그래서 복음은 약속된 미래를 위해 효력을 발생케 한다고 본다.

(4) 계명과 약속과의 관계

계명과 율법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세우신 계약을 지키는 것은 그 약속의 말씀과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서 "만일 계명이 윤리적인 면이고 복종이 희망의 열매라고 한다. 약속들과 마찬가지로 고정된 규범이 아니고 미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라고 한다.
"하나님에 대한 희망, 기대의 힘으로 계명을 쉽게 성취할 수 있다" 라고 말한다.
"계명들은 법적인 조건들이나 신학적으로 흔히 율법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의 형태로서 약속, 또는 복음의 형태로서의 약속이다" 라고 하므로 종말론적 신학의 기반을 구축한다.

2. 신관

1) 몰트만은 초월적 신관을 부정하며 내재적 신관을 말한다

몰트만은 초월적 하나님을 부정하면서 에브너의 말을 인용하여 "영원한 삶은 말하자면 절대 현재에 있어서의 삶이요 실제로 하나님의 현재를 의식하는 인간의 삶이다" 라고 말하고,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이란 절대적인 영의 현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현재는 하나님의 현재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은 시간으로부터 나와서 현재 안에 산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 안에 산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과 사랑은 우리를 시간으로부터 옮기는 무시간적 행동들이다. 그것들이 우리를 완전히 현재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내재적으로 말하며 결국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논리에 이른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인간이 희망의 세계를 이루어야 할 것을 천명한 것이라 하겠다.

2) 종말론적 관점에서의 신관을 주장한다

몰트만은 "희망의 하나님은 자신의 인간의 그리고 세계의 미래를 약속하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역사 속으로 인간을 들여 보냄으로써 현재적이기 때문이다. 엑소더스와 부활의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가 아니고 미래로의 그의 보냄에 따라가는 사람에게 그의 현재와 가까움을 약속한다. 약속하고 미래의 전망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야훼는 존재의 본질로서 미래를 가진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 현재로부터 미래로 떠나는 하나님, 그의 자유로부터 오고 있는 것과 새로운 것이 솟아 오르는 하나님이다" 라고 말함으로 신관도 종말론을 위한 신의 존재로 정의한다.
이것 역시 희망의 논리를 펴기 위한 요청적인 신관이지, 신 존재를 믿는 사상이 아닌 것이다.

3) 십자가와 부활로 계시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한다

몰트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계시하신다고 함으로 신과 인간을 동일시하게 되는 결과를 주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삼위일체적으로 묘사를 한다.
몰트만은 이어서 "하나님의 나타남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현저하다" 라고 말한다.

이상의 신관은 논리 전개상 하나님을 약속하시고 이루신 하나님이란 공식으로 그의 이름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약속한 것이고, 그 부활과 십자가는 미래의 희망을 주기 위한 종말론적인 약속이다.

결국 몰트만은 하나님을 종말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심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그런 신으로 논의를 전개함을 볼 수 있다.
즉 그의 존재를 믿고 논의를 전개한 것이 아니라 종말에 역사와 약속의 성취에 의해서만 존재가 확인이 가능한 종말론적 관점에서 신관을 말하므로 불가지론에 이르고 인간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논의상 필요해서 사용한 요청적 신관이며 사신신학이다.

3. 역사관(인간관)

1) 실존주의 역사관에 대하여

몰트만은 종말론과 역사에서 "실존주의 역사철학을 역사의식은 위기의식이고 역사철학은 위기 철학임을 말한다.
즉 위험에 내 던져진 무서운 불확실한 세계, 자기 실존의 위험에 빠져 중대한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될 위기에 노출된다고 말하고 역사는 이 위기를 내려다 볼 수 있게 만들지 못하고 스스로 이 위기 안에 드러나 있어서 그것을 촉진시키고 또 그것을 확대시키는 것을 돕기 때문이다.

모든 위기는 역사적 미래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미래의 모습은 결단에 의하여 형성되고 이 결단은 기대되든지 두려워지며 또 얻고 싶어하는 미래의 환상에서 그 형태를 얻는다" 라고 하며,
그는 "이런 역사를 위기와 동일시하는 역사의 개념은 충분한가" 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는, 역사는 인간이 위기의식을 느끼므로 미래 희망을 향한 결단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인본주의적 역사관이다.

2) 역사의 방법론

역사의 방법을
첫째는 역사적 진정성이 입증되려면 어느 시대의 어떤 사람에게도 확증할 만한 자료에 비추어 발언과 사실이 일치할 때 가능하며,
둘째는 역사에 관한 인식이 바르냐? 그 인식이 조종할 만 하느냐는 것이고,
셋째는 역사적 대상이 근본적으로 재인식할 수 있느냐 (자료와 재료에 의해서),
넷째는 사건이 사건으로 밝혀지고 체험에 이끌어 들이기 위한 일정한 가설, 계획관점, 전망을 가지고 연구해야 하며,"역사는 시대사로서 지나간 생의 흘러가는 과정에서 이끌어 내고 역사적 생성에 몸을 맡기고 역사를 관찰하는 끊임없는 변화에서 거듭 다시 써야 한다" 고 말한다.

3) 종말론적 실존주의 역사관을 말한다

몰트만은 "역사학에서 취급하는 사실이란 것은 처음에 주어진 사실이 아니라 전통적 해석으로부터 오늘날 일반적으로 또 자명하게 객관성이라고 보는 것에는 움직이는 추상화의 과정에서 생긴 마지막 산물이다" 라고 말한다.
즉 "사실은 자료의 전승을 해석해 주며 매개해 주는 (매개는 역사적 법칙) 것에서 얻은 제일 밑의 기초"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일 위기에서 새 것이 인식되고 역사가 존속하는 것의 위기가 인정되지 않고 미래라는 범주 속에 기대된다면 전혀 다른 해명의 지평이 기대의 지평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역사를 종말론적 계시의 술어로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예수의 역사적 현상이 그 자체적인 역사적 현상이 아니라 미래와의 관계에 있어서만 역사적 현상이라고 말하고 헤겔주의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역사의 종말론적 해석을 실존의 종말론적 역사성의 실존론적 해석을 통해 대체했다. 즉 역사가 끝나서 우리가 역사의 종국에서 있다면 세계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의미성에 있어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종국이 아니라 그 도중에 있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을 미래의 희망에 연결하여 과거를 고유한 현재의 미래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따라서 역사의 의미는 과거, 현재, 미래로서 일반 연대기적인 순서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미래에서부터 현재를 통해서 과거로 그 의미가 밝혀진다고 함으로 역사를 종말론적 관점으로 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역사관에 대한 논의 목적도 역시 희망의 원리를 위해서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으로 사실인가를 입증하고자 했고, 또한 그것이 불가능하므로 신앙의 영역으로 가두고 십자가만이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4) 판넨베르크의 보편역사관에 대한 몰트만의 견해

몰트만은 판넨베르크의 "역사행위 속에 있는 신의 간접계시" 라는 보편역사신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보편역사신학은 희랍 우주신학의 확대 내지 추월이라고 하는데, 희랍 우주신학은 신의 영원한 존재가 존재자 속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나고 존재자에게서 계시될 수 있는 것같이 판넨베르크는 신의 본질이 역사의 과거성에서 다시 인식되어질 수 있다고 한다.

둘째, 약속과 성취라는 구약의 도식이 보편역사적 종말론에 의해서 포기되어졌다고 한다.
즉 보편역사적 종말론에서 현실이 아직 종국에 이르지 않았고 전체로서 아직 직관되지 않았으므로 종말론적이 된다.
세계는 신현이 되고 총체성에 있어서 신의 간접적 자기 계시가 된다.

셋째, 그의 보편역사신학은 역사는 전승의 언어에서 만나게 되는데 전승의 언어가 역사적 비판에 접근되는 현실의 관점에서 맞는가가 문제라고 한다.

넷째, 예수 부활을 역사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
만일 있다고 하면 역사의 종국이요 완성인 일반적 死者 부활을 기대에 지배되는 역사개념을 전제한다고 한다.

다섯째, 몰트만은 교회의 선교가 주요 주제라고 말한다.
즉 묵시록적이며 보편역사적인 판넨베르크 사상은 신약의 부제에 속하고 세계 변혁의 약속과 보냄의 역사의 지평은 신약의 주제라고 한다.

여섯째, 부활은 십자가가 우선해야 가능하므로 십자가 사건을 신학의 주요 범주로 정한다.

몰트만의 이런 역사관은 예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사실성을 증명하지 못하는데 오는 논리적 한계를 실존적 종말론적 의미로 해석하고 부활신앙은 구약의 약속에 근거를 삼고 오히려 역사적으로 인정하는 십자가 신앙의 실존론적 해석을 통해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4. 기독론

몰트만의 기독론은 십자가와 부활로 대변한다.
그런데 이 기독론에서도 역시 종말론적으로 해석한다.
부활을 희망의 원리로 십자가는 부활을 변증하기 위한 논리로 제시하고 있다.

1) 부활에 대한 논고

(1) 하나님 계시의 방편으로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한다.

몰트만은 부활에 대한 실존론자들의 견해에 대해 "언제나 현재 오늘에 일어나는 설교와 신앙의 현실성으로 이해하는데 반해 그것은 인간의 신앙 이해에서 그 신앙 이해는 자기 이해에서 근거를 얻으며 이는 신학이 인간학이 되어서 기독론은 변개될 수 있고 인간학만이 변개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온다" 라고 말한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건은 오직 약속이란 양태에서 이해되는 사건으로 보고, 그 사건은 인간의 톡특한 시간 가운데 있으며 인간이 역사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그의 미래에 관련지음으로서만 역사적 현상으로 이해되며 또 인식하는 자에게 매개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주의 부활의 보고를 거듭 종말론적으로 내가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하는 주도적인 질문 아래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신앙은 약속을 통한 미래의 희망의 확실성에 의해 주어지고 그 신앙에 의해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게 아니라 선포라고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2) 몰트만은 부활을 미래부활의 선취로 이해한다.

몰트만은 부활에 대하여 판넨베르크의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선취라고 하는데 반해서 "신을 통해서 부활을 인정하고 이 부활 속에 역사의 알려진 종말을 인식할 수 있도록 역사적인 것의 개념을 먼저 바꾸어야 한다" 라고 말한다.
또한 "부활이 역사를 설립하는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는 부활사건은 역사 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역사, 미래를 개시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표시될 수 있다. 즉, 부활은 역사적 사실증명을 넘어서 부활한 구주의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지는 미래의 약속, 영원한 생명과 새로운 존재의 약속에 대한 것의 선취로서 파악해야 한다" 라고 말한다.

몰트만은 "미래를 선취하기 위해 신앙은 순종을 통하여 시련과 투쟁을 짊어지며 육체의 고통 속에 내 맡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와 고난과 죽음을 경험하면서 부활과 생명과 하나님의 의와 실현될 미래를 선포한다. 부활의 미래는 신앙이 십자가를 짊어질 때 그에게 온다" 라고 본다.

(3) 몰트만은 역사적 사실을 증명할 수 없으므로 상징으로 이해한다.

몰트만은 말하기를 "제자들의 부활신앙은 예수의 선포와 제자들의 따름, 예수의 못박힘과 그것으로 인해 훼파된 제자들의 신앙을 통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일반적인 묵시록적인 임박한 기대의 동기와 상징들을 통해서 비로소 규정지어진다. 즉 증언자 중 어느 누구도 부활절에 일어난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자는 없었다. 부활은 역사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위한 상징이다" 라고 말한다.
그는 부활에 대하여 "인간학이나 보편사가 아니라 死者와 生者에 대한 신의 정의의 미래적 승리의 기대가 자리잡고 있다"고 하므로 상징적으로 이해한다.

(4) 역사적 사실성의 문제

몰트만은 종말론적 희망신학에서 핵심이 되는 부활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그들(증인)은 한 사실, 한 사건에 대해 말하려고 하였다.
그들에게 그 사건의 사실성은 자기들의 의식이나 신앙 밖에 있었고, 그들의 의식은 회상과 희망으로서 모든 일에 앞서 그것이 사실로 일어났다는 데서 불붙어 일어났다.
그들의 말은 단지 그것은 내게 확실하다는 말의 형식으로 실존의 확실성을 가질 뿐 아니라 그것이 확실히 일어났다는 화법으로 사실의 확실성을 가진다.
그들의 말과 선포의 현실성만이 그들의 말과 선포를 보증해야 한다" 라고 하므로 증인들의 신앙의 영역으로 돌려버리고 말았다.

2) 십자가

몰트만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십자가와 부활은 동일한 지평 위에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역사적 사건을 표시하고 부활은 종말론적 사건을 표시한다" 라고 말하므로 십자가 신학을 축으로 하여 부활한 자와 동일시함으로 신학을 전개하고자 한다.

(1) 삼위일체론적 이해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한다.
그는 "삼위일체의 처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라고 한다.

삼위일체적 내용 원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요 십자가 인식의 형식 원리는 삼위일체론이다. 그리스도의 버림받음에 대한 진술에서 이 버림은 아버지 자체에도 해당한다. 아들을 버림으로써 아버지도 자기 자신을 버린다. 아들을 내어줌으로써 아버지도 동일한 방식은 아니나 자신을 준다. 그러므로 신이라고 일컬어지는 비밀의 바깥 측면에서부터 삼위일체인 그의 내적 공간으로 들어오게 된다" 라고 말한다.

즉, 내재적 삼위일체(존재론적)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역사적으로 일어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함으로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존재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보여질 수 있게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로서의 하나님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 인간이 되시고 이 인간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에 의해서 볼 수 있게끔 될 때만 인식될 수 있다" 라고 말한다.

(2) 십자가 안에서의 신의 죽음

몰트만은 삼위일체에서 신과 예수의 동일 존재로 인한 "예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으로 이해하면 안되고 신 안의 죽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신 안에서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의 신으로 기독교 신학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몰트만은 "예수가 십자가의 고뇌 속에 처한 것은 예수 자신만이 아니라 그를 위하여 예수가 살았고 말했던자 즉 그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라고 말하고 또한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은 '나의 하나님 왜 당신을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한다.

"시22 편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곧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이해된다고 말하고 아들을 아버지로부터 분리시키는 십자가 위의 버림받은 상태는 하나님 자신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라고 한다.
그는 계속해서 성부 수난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아버지를 통한 버림 속에서 아들의 고통과 죽음은 아들의 죽음에서 아버지 고통과는 다른 고통이다. 아들의 아버지 없음에 아버지의 아들 없음이 상응한다. 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규정되어진다면 그는 아들의 죽음 속에서 역시 그의 아버지 됨의 죽음을 통감한다" 라고 하고
"아들이 버림 받음 속에서 죽음을 당함으로써 아버지도 사랑의 무한한 고통 속에서 아들의 죽음을 경험한다" 라고 함으로 내적 경험과 내적 동참으로 그리고 신앙의 영역으로 말한다.

그러면서도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그의 미래로 부활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의 고난 가운데서 고난 당하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죽었다" 고 하므로 논리적 모순을 스스로 가져온다.

(3) 하나님 나라의 선취를 위한 정치적 죽음으로 이해

몰트만은 "예수의 활동이 비정치적이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없다" 라고 함으로 정치적 죽음을 말한다.

그가 열심당원(열혈당)이었느냐는 것에 대하여
"첫째 열심당원처럼 설교했다. 즉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고 설교했다.
둘째 열심당원처럼 예수는 그의 등장과 복음을 하나님 나라를 불러오기 위한 선교로, 즉 하나님 나라의 선취로 이해했다.
셋째 열심당원에 대한 논박이 별로 없었다.
넷째 열심당원처럼 예수는 헤롯왕을 여우라고 불렀고
다섯째 열심당원에게 호감을 주었고 열심당원을 제자로 받기도 했다.
여섯째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정화는 제자들과 유대주민들에게 그리고 로마인들에게 열심당원의 상징적인 행위로 이해하게 되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선취를 부르짖으므로 로마는 예수를 열심당원의 지도자로 십자가에 처형한 것이다" 라고 한다.

(4) 하나님의 의를 전파함으로 해방자로 죽었다고 이해

몰트만은 "예수는 로마인과 열심당원에게 자신의 죽음을 심판자와 복수자가 될 권리를 거부하므로 율법성으로부터 해방시켰는데 당시 예수는 바리새인과 열심당원들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거룩한 일을 배반한 배반자로 처형당했다" 라고 한다.

이상의 기독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희망의 논리의 근거로서 활용할 뿐이지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5. 교회론

1) 종말론적 관점에서 교회를 이해한다

몰트만은 교회론에 있어서 역시 종말론적으로 이해하여 "교회는 의롭게 인정받은 죄인들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해방받은 자, 구원을 경험한 자, 그리고 감사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역사의 의미를 성취하는 도중에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만 믿는다. 이는 희망의 표시이다. 교회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희망의 표시이다. 미래의 성취 도중에 있는 메시야적 공동체이다. 메시야적 보냄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충족되고 부활에서 능력화된다. 교회는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보냄에 참여하고 다가오는 나라와 인간 해방의 메시야적 교회가 된다" 라고 하며
출애굽의 공동체, 해방하는 공동체, 희망하는 공동체, 회개하는 공동체라고 말한다.

2) 성령에 의한 교회로 이해한다

(1) 교회는 성령 안에서 일어난다.

교회는 역사적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성령 안에서 산다.
교회는 종말론적 영의 창조물로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영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를 통한 아들과 성령의 선교가 교회를 세웠고 성령이 말씀과 신앙, 성례전과 은혜, 직무와 전통의 사건으로 교회를 관할한다. (희망을 주어서)

(2)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이 인식은 성령의 능력이다.

"영의 능력들은 새로운 삶의 미래로부터 오는 현재를 결정하는 삶의 능력들이다. 영의 열매는 고난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기쁨 속에 있는 미래의 축복의 선취이고 사랑 속에 있는 미래의 선취이다."
"성령은 보냄의 빛 속에서 그리스도의 역사를 계시하는 힘으로 미래의 빛 속에서 새 창조의 힘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영은 미래의 권세로 표시될 수 있다. 영은 종말론적 은사, 미래의 시작과 보증이 되므로 종말론은 성령의 일이다."

3) 몰트만의 교회의 본질에 대한 견해

(1)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근거요 능력이요 희망이다.

(2) 교회의 본질은 선교적 교회라고 하는데 선교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현재 속에서 보편적 재난에서 하나님의 떠남에 이르기까지 노예 됨에서 인간의 해방을 시도하는 모든 활동을 포괄한다.

(3) 연합적 교회라고 한다.
즉 기독교가 그 자체에 있어서 연합적인 공동체를 통해서만 세계에 평화를 증거할 수 있는 재난적인 세계 상황에 있다.
그는 에딘버러 대회(1937) 이후 대부분의 교회가 분열에 있어서 작용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갈등 들에서 이런 사상을 말한다.

(4) 정치적 교회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유일한 통치는 정치적 결과를 항상 수반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치적 속박으로부터 교회의 해방을 말하므로 혁명의 신학과 해방의 신학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해방이란 정치, 종교, 경제, 현재와 미래 경험과 소망을 포괄한다.
해방은 억눌린자 짓밟힌 자에게만 해당하지 않고 억압자의 자유스러운 그리고 인간적 미래까지도 해당한다.
기득권 층의 노예 상태에서 진정한 인간적 자유의 가능성으로 해방시키는 과제를 가진다.
죄, 가난, 정치, 경제, 문화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라고 말한다.

이상의 교회론에서 그는 성령을 말하나 실존주의자가 말하는 새로운 삶을 향한 결단을 가져오는 영감같은 의미로 이해하며, 교회는 이런 영감에 의한 결단으로 희망의 세계를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 모이는 공동체로 보았다.

Ⅲ. 결 론

1. 몰트만의 계시관은 인본주의 신학이다

그는 성경을 장래 주어질 종말에 의해서 해석하므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이르지 못한다.
그는 희망의 근거로 약속을 제시하지만 계약의 관점으로 이해하므로 인간이 희망을 성취하기 위해 현재적 결단과 계약의 준수를 해야 하는 인간에 의한 신학이므로 인본주의 신학이다.

성경신학은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계시를 위해 약속하시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의 주권성을 계시하고 약속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존재를 증명하신다.

2. 몰트만의 신관은 사신신학과 신존재를 미래에 보류하는 불가지론에 이른다.

몰트만은 자기 시대에 겪었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있었던 무참한 살육의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러한 일이 존재할 수 있을까하는 고뇌를 한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희망의 신학에서는 희망의 원리를 부활에 두면서 부활은 역사적인 성격이 아니고 종말론적이어서 종말에야 확증될 사건이라고 한다.
즉 그의 사상의 중심에 있는 부활신학에서 신 존재의 확정을 미래에 보류하여 불가지론으로 말한다.
또한 그의 십자가의 신학에서 종말론적 삼위일체를 제시하여 신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말하므로 신을 제거하게 된다.

성경신학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은 언약 성취의 실증으로 제시함으로 언약하신 신 존재를 확증적으로 증거한다.

3. 몰트만의 역사관은 보편역사관을 부정하고 종말론적인 역사관을 말한다

그는 미래의 희망이 역사를 이끌어 간다고 하므로 인간을 역사의 주관자로 삼고 하나님의 존재를 역사에서 제거한다.

성경신학에서는 하나님이 과거의 역사에서 약속하시고 그것을 때가 차매 성취해 나가시므로 역사가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어졌고 주관되어지고 종말을 향해서 나아감을 증거한다.

4. 기독론

몰트만의 기독론은 십자가와 부활로 대변되는데,
먼저 부활에 대한 사상은 역시 종말론적으로 봄으로 말미암아 미래 부활의 선취로 상징으로 보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사실을 역사 밖으로 추방하고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부활은 희망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서 십자가신학은 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도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경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언약이 성취되는 실증으로 증거하므로 장차 성도의 부활의 확증을 갖는다.

몰트만의 십자가 사상은 종말론적으로 삼위일체론에 적용하여 실존주의로 흐른다. 그 결과 사신신학으로 전락하는 계기를 만들고 말았다.

성경신학은 하나님이 구약에서 하신 약속의 성취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계시하신다.
즉 언약대로 오셔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으므로 신실성을, 하나님의 계시된 뜻대로 되었으므로 주권성을, 그의 부활하심을 인하여 전능성을 그리고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므로 영원성을 또한 죄인을 위하여 지셨으므로 자비성을 계시하셨다고 증거한다.

5. 몰트만의 교회론은 실존주의적인 교회론으로 해방신학과 정치신학에 귀결된다

종말론적인 계시관에 의하여 확증되지 않는 미래의 부활에 대한 기대에 의하여 신의 존재를 보류시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신을 못박아 버려서 제거한다.
이제 남은 것은 미래에 희망과 기대를 심어주어서 역사함으로 나타나는 인간 공동체인 교회만 존재하게 되었다.
그 교회는 인간의 결단과 노력으로 가난과 질병과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상황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의무가 남은 것이다.

그 일을 하는 것이 선교이고 교회의 사명이라 하므로 해방신학과 정치신학, 그리고 사회구원론에 이른다.
이와 같은 사상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철학의 도전에 대한 신학적인 비판과 답변이라기보다는 희망의 철학을 기독교로 각색한 철학사상에 불과한 기독교적 사회주의 사상이다.
이러한 그의 사회구원적인 교회관은 세계교회연합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현재의 종교연합운동인 종교다원주의의 모체가 되기도 한 것이다.

성경신학의 교회론은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으로 약속대로 성령에 의해서 설립되고, 양육되고, 무장하고, 투쟁하여 승리하게 되므로 하나님의 존재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이다.

【참고도서】

1. J. 몰트만(전경연 외 1인), 희망의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1994.
2. J. 몰트만(김균진 역),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대한기독교서회,1994.
3. J. 몰트만(박봉랑 외 4인), 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 한국신학연구소, 1994.
4. 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대한기독교서회, 1993.
5, 박아론, 현대신학연구, 기독교문서선교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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