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신앙(은사)의 본질과 중심 / 초록피리

하나님아들 2012. 9. 1. 00:37

 

 신앙의 본질과 중심


성령의 은사론에 앞서서 오늘은 먼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신앙의 본질과 중심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경 디모데전서 2장 9이하를 보면 사도 바울은 여성분들에게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이 말씀은 남녀를 불문하고 신앙인에게 있어서 무릇 먼저 그리고 중요하게 가꾸어야 할 것은 본질의 내면이지 외적인 것이 아님을 말씀하는 것이지요. 제가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은사를 찾고 사모하는 것은 좋으나 그러한 분들 중에는 외적인 은사를 사모하는 나머지, 일종의 은사주의로 흘러서 신앙의 본질과 중심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은사주의로 흘러서 은사의 충만한 가운데 기적과 이사를 많이 행하였으나 신앙의 본질과 중심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주는 경종의 말씀을 하셨지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1-23절)


그러므로 은사를 사모하고 그러한 능력을 사모하기 이전에 신앙의 본질과 중심이 무엇인지, 은사를 주심은 무엇 때문인지, 또 은사의 주체가 누구인지 우리는 분명하고 명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은사는 우리의 혼과 육을 뚫고 성령께서 나타나셔서 - 흘러 나오셔서 - 역사하시는 것인데, 고린도전서 12장 7절의 말씀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처럼 우리에게 유익함을 주시려 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은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유익함이 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저마다의 소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잘 하는 재주가 있고 어떤 사람은 물건을 잘 만들거나 또는 그림을 잘 그리거나 하는 등의 재주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 땅에 속한 우리 몸의 자연적인 재능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선물로 주시는 은사는 초자연적인 재능으로 주를 섬기는 신앙생활과 교회를 세우는데 덕을 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어떤 기구로 비유로 설명해 볼 수 있는데, 가령 어떤 길을 가는데 걸어가는 사람과 또는 차를 이용하거나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과 같겠는지요? 또는 전쟁을 하려 나가는 군인이 맨손으로 가는 것과 위력적인 무기를 지니고 있는 경우와 같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선물인 은사를 사모함의 선한 욕심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인의 신앙생활과 나아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데 말할 수 없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인용하는 문구, “믿음은 구원으로, 축복은 행함으로, 성령(은사)는 사모함으로”가 있지요. 이 문구처럼 성령과 더불어 성령의 선물인 은사는 사모함, 곧 기도함으로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선한 사모함의 마음으로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과 나아가 은사의 충만함을 사모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적극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한 생을 살아가면서 주님의 성령의 충만한 기름부음을 받고 큰 능력과 은사를 받아서 주의 손에 붙들려 쓰임 받는다면 이 또한 얼마나 복된 인생인지요?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은사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주시나 어떤 재능이나 능력이지 본질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으로 인한 본질은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말씀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실상 은사는 실상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고 분류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은사의 분류는 9가지이지요. 방언, 방언통역, 영분별, 예언, 능력행함, 병고침, 믿음,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등이 있지요. 이 9가지 성령의 은사는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9가지 성령의 열매와 대비를 이룹니다.


비유를 들자면 땅콩을 예를 들 수 있는데, 은사는 땅콩의 껍데기요, 성령의 열매는 땅콩의 열매입니다. 껍데기만 있는 땅콩은 우리의 속된 말로 빛 좋은 개살구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주님의 경종의 말씀처럼 자신의 영혼조차도 구원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보면 은사는 일단 주어지면 그 사람의 삶과 행위와 믿음에 관계없이 유지되는 경우가 있나 봅니다. 저는 아주 어릴 적에 방언 등의 은사를 받았는데,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의지가 있는가?” 또 이 땅에 수많은 아픈 현실들을 보면서 “진정 하나님은 사랑이신가?”라는 지적방황을 하면서 오랫동안 세상적인 삶을 살아가며 교회생활을 등 진 적이 있는데 그 당시도 은사는 지속적으로 유지가 되었으니까요.


그러므로 그 사람의 은사와 능력 이전에 우리는 그 사람의 본질을 살펴보는 혜안이 필요하겠지요. “은사와 능력”만을 보고 “오 주님이 크게 쓰시고 사랑하시는 사람인가”섣불리 판단하여 함께 그 길을 가다가는 함께 멸망으로 가는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땅콩이 온전히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 열매를 지켜주는 껍질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벌레가 와서 먹고 비와 바람에 상하겠지요. “은사로 강하게”라는 말처럼, 은사의 능으로 사단과 마귀를 제압하고 자신을 이기는 등의 능력이 있을 때에라야만 아름다운 열매를 또한 맺을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은사가 비록 본질은 아니라하더라도 유익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 논하고 싶었던 은사 이전의 신앙의 중심과 본질은 무엇일까요?


첫째, 말씀대로 살아감입니다. 무슨 각종 다양한 은사만을 추구하고 덧입기 위해 온통 마음이 그러한 것으로 흐른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하루하루 성경이 기록하고 말씀하시는 바를 좇아 행하는 삶의 경건함이 신앙의 본질이요, 바탕입니다. 아무리 은사능력을 많이 행하였다 할지라도 그의 삶에 말씀대로 살아감이 없다면, 주님의 경종의 말씀처럼 불법을 행하는 자에 불과할 뿐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둘째,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과 신앙생활의 본질이 사랑임을 말하고 있지요.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라고 단언하고 있지요.


나아가 결국 그 모든 화려해 보이는 은사 등은 가을날의 낙엽처럼 떨어지고 말 것이나 사랑은 영원할 것을 말하고 있지요.


그러므로 은사 능력 이전에 먼저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은사의 주체를 알고 겸손한 사람이 됨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은사는 하나님이 그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태복음 10장 7절 이하에서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말씀하지요.


은사뿐만 아니라 실상 우리의 모든 것들은 다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우리는 교만할 수 없지요. 그러므로 주님이 더 큰 은사와 능력을 덧입혀 주시면 더욱 주 앞에 겸손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낮아져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처럼 낮아지고 낮아지는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은사를 통하여 이적과 기적이 나타나면 그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금전적이거나 무슨 대가를 요구하여서도 아니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묘하여 무슨 신령한 은사를 받고 나면 특별한 사람인냥 스스로 교만하여 지기 십상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간절히 사모함으로 큰 능력과 은사를 받았던 사람들 중 이러한 교만의 유혹에 빠져 스스로 자칭 예수라 하면서 타락과 멸망의 길로 빠진 사람을 우리는 흔히 보게 되지요. 또한 그를 통하여 나타나는 기적과 이사만 보고 함께 이단의 길,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보게 되지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표적과 기사만 보고 어떤 것들을 따르지 마십시요. 본질과 중심을 보는 혜안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늘로부터 땅에 불이 내려오게 하고 이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는 짐승”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애굽의 술사들이 모세를 따라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하는 것처럼 사단의 세계에도 사술이 있습니다. 실제로 귀신들도 방언을 말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표적과 기사만을 좇지 마십시요. 그러하다 보면 더불어 멸망의 길로도 갈 수 있습니다. 본질인 말씀의 경건한 삶과 사랑의 삶과 겸손의 삶이 있어야 진정한 성령의 사람이요, 능력의 사람인 것입니다.


넷째, 은사는 자신의 신앙의 유익과 더불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주시는 것을 앎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6절은 다름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각 지체에게 그 뜻대로 성령의 은사를 주심은 다양한 지체가 모여 한 몸을 이루듯 교회의 덕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때때로 은사를 받고 나면 교회의 덕과 화합을 이루기보다 분쟁과 혼란이 일어나는 경우들을 흔히 봅니다. 은사의 본질을 바로 알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지혜롭게 행하며 애쓰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며칠 전 주님이 제게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신 바 말씀으로 신앙의 본질과 중심에 관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목회자는 목회를 하면서 다양한 문제와 현장에 부딪힙니다. 교인 가운데 귀신이 들린 사람이 있어 축사의 사역이 필요할 수도 있고, 아픈 사람이 있어 치유를 위한 기도를 드려주어야 할 경우도 있고, 예수님에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물었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라는 등의 신학적으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나 상황 등 다양한 어려운 현장과 문제에 직면할 수 있지요. 그래서 목회자는 참으로 다양한 방면에 해박한 지식과 아울러 영적인 능력도 견지해야 함을 살아가면서 실감합니다.


그러한 연유로 이러저러한 기도를 드리다가 주님께 “주님의 제자들에게 충만히 입혀주셨던 능력을 제게도 덧입혀 주십시요”라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감동으로 말씀하심이 들려왔습니다. “능력은 나를 사랑하는 자의 몫이다. 나를 사랑하는 그 깊이가 곧 능력의 깊이니라”


그래서 주님께 다시 제가 물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함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다시 감동하심으로 “나를 위해 너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나를 위해 너 자신을 부인하는 깊이가 나를 사랑함의 깊이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며칠 전에 성령충만한 삶에 대한 신앙계에 실린 배본철 교수님의 논설을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러한 표현이 있더군요.


“성령에 사로잡혀 살아갈 때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영향이 전달되어진다. 성령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은 그의 심련은 전혀 요란하지 않다. 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전체가 온전히 성령께 복종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영혼은 마치 잘 정돈된 화원과도 같이 단정하고 아담하다. 영혼의 주인 되신 성령께 인격적으로 복종하며 그분의 인도하심만을 끊임없이 따르는 성경된 영혼이다.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따르기 위해 그의 영혼은 오직 정결한 가운데 고요하게 주님만을 응시할 뿐이다”


주님께 제가 받은 바 감동하심과 배본철 교수님의 논설이 통하는 면이 있지 않은가요? 같은 맥락의 말씀이 아닌가요?


은사 능력 이전에 신앙의 본질과 중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대로 살아감이요, 사랑의 삶이요, 주님과 사람들 앞의 겸손이요,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덕 된 삶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 모든 것들에 선행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참되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출 처: cafe.daum.net/riverofwater 초록 피리>  --    카페

 

 

출처 : 생명수 흐르는 그곳에
글쓴이 : 초록 피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