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6일 주일 설교문
/제목 / 우리가 버려야 할 본성의 주인은 사탄이다.
설교자 / 류현수 목사
본문 / 요한계시록 9장 1-3절, 11-12절
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 2.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 3.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11.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 12.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서론
‘계시’라는 단어가 ‘벌거벗겨 보여주다’라는 말은 이미 했습니다.
벌겨 벗겨 보여주는 그 세상을 말하는 종말 사건을 설명하는 계시록의 기록들을 보면 그 기록의 진실이 지구를 포함하는 우주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는 인간성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씀하는 곳이 본문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무저갱’으로 그 무저갱에 있던 것이 무엇이며, 그 무저갱에 있던 것들은 어떤 형태이며, 그 무저갱의 주인은 누구인가? 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사이에 등장하는 기록들 중에 그 무저갱에 있는 것들을 멸망시키는 과정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무저’는 ‘서서히 투명하여질, 심연, 깊은 곳, 바다’라는 뜻입니다.
‘갱’은 심연, ‘감옥, 불을 피우기 위한 구멍’으로, 9장이 말하는 구멍은 모두가 이 ‘갱’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구멍은 창세기 1장 2절의 ‘깊음’이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깊은 곳이 아니라, 서서히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도록 투명하여져야 하는 깊은 곳에 있는 샘으로 설명하며 <모든 일의 그 원인>을 나타내는 단어로 이해해야합니다.
그 구멍을 여는 사역자를 별이라고 했습니다.
그 ‘별’은 ‘확실하게 세우다’라는 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단어로 ‘놓다, 뿌리다, 펼치다, 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별이 심연의 구멍에 내려오는 광경을 떨어졌다고 했는데 ‘떨어지다’는 ‘(’내려오다‘의 개념으로)날다, 내려오다, 마주치다, 넓어지다’입니다.
별이 내려온 목적은 심연에 있는 것들을 몰아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땅인 사람을 만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고, 그 심연에 넓게 뿌려 버려야 할 것을 확실하게 버릴 수 있도록 하여 하나님의 법대로 확실하게 세워주기 위한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그가 가지고 온 ‘열쇠’는 ‘자물쇠를 열다’라는 개념이 아니라 열려있는 자물쇠를 ‘잠그기 위한, 열쇠’라는 뜻입니다.
더러운 것을 버리기 전에 잠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더러운 것을 버린 후의 그 심연의 문을 잠그므로 해서 다시는 그 더러운 것이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없도록 하는 사역이 그 별의 사역이었습니다.
2절에서 ‘열다’는 ‘따로 따로, 각각, 씩, 통해서, 안에’라는 뜻이고, ‘풀무’는 ‘벽난로, 아궁이, 불을 붙이다, 빛내다, 소모하다, 타다, 비추다’라는 뜻으로 쇠를 달구는 풀무와는 의미가 전혀 다르며, ‘올라오매’는 ‘(희망을 가지고) 올라오다, 자라다, 솟아나다. 나타나다’는 뜻이고, 올라오는 ‘연기’는 ‘연막을 위한 연기’입니다.
그러므로 올라오는 풀무의 연기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태우는 빛을 내면서 마귀의 일을 따르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각각의 일을 따라 영적인 행동들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연기로 인해 어두워지는 해와 공기에서, ‘해’는 ‘(자신을 들어 올리기 위한) 빛 광선, 해’라는 뜻으로, ‘드러내다 외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와 같습니다.
‘공기’는 ‘숨 쉬다, 호흡하다, 산들바람(호흡의 의미에서)’라는 뜻으로 타인에게서 오는 바람이 아니라 자신이 호흡하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어두워지다’는 ‘불투명하다, 어둡다, 그늘, 장님’이란 뜻으로, 하나님의 사상들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모든 것을 바탕으로 하는 자기의 생명 같은 사상들에 대한 정체성이 흔들리어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 ‘황충’은 ‘메뚜기, 말단, 이 끝 저 끝, 가장 먼 곳, 정확하게 하다, 확인하다’라는 뜻인데 메뚜기나 황충은 하나님이 부여하는 것으로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고난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땅위에 나오는 것으로, 모든 일의 끝에서 확실하게 그 원인을 알게 하는 메뚜기는 육체가 당하는 그 신앙의 열매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갈’은 ‘관통하다는 뜻에서 유래, 덧, 올가미, 함정, 죄에 빠지는 것, 표적, 경계’라는 뜻으로 황충이 가지고 있는 모양이 타인을 괴롭게 하기위한 사람의 성품에서 나오는 자기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1절에서 그 깊은 곳에 숨어 있으면서 타인들을 괴롭히는 근원인 샘물에도 그 주인인 임금이 있는데, 그 ‘임금’이란, ‘(기초의 개념)절대적, 권세자, 걸음, 발’이란 뜻이며, ‘아바돈, 아볼루온’은 ‘사탄, 헤메다, 멸망하다, 잃다, 진멸하다, 파멸하다, 부수다’는 뜻으로 이 말씀은 사람의 기본 개념에 숨어있는 자신을 위한 자기중심의 행동 그 근본 배경이며, 절대 자신중심으로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어 하는 성품의 그 주인인 임금은 사탄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12절을 논하는 것은 ‘화’에 대한 기본 개념이나, 한글의 단어를 잘못 사용한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화(우아이)’는 ‘슬픔의 탄성, 슬프다, 오호, 아~~’란 뜻으로, ‘경악의 탄성’이란 뜻의 ‘우아’와, 절대부정으로서 ‘아무 것, 할 수 없다’라는 뜻을 가진 ‘우’라는 단어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을 괴롭게 하는 화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으로서의 초라한 자기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괴로움의 고백이며 하나님만 의지 할 수 있는 신앙인의 절대 외침입니다.
본론
성경의 ‘심연’을 지구 안에 있는 깊은 곳으로만 이해한 결과 우리는 그 속에서 나오고 있는 사람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무저갱을 우주의 블랙홀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심연에 있는 것이 올라오는데 그 올라온 곳이 땅의 표면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그곳을 땅 속으로 이해했다면 심연에 있는 것으로 사탄의 뜻을 따라 타인을 괴롭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버리고도 성경의 무오성을 외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다 풀어보아도 그 멸망의 모습은 지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와 같이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천국에서 살아가야 할 신앙인의 자격을 만들어가는 순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봉인을 떼는 일곱 번째 사건 안에 존재하는 일곱 나팔사건에서도 다섯 번째 사건은 신앙인으로서 온전히 겪어야 할 자신을 버리는 일들을 많이 겪은 후에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의 자기 성찰이며, 고백이며 회개의 눈물입니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는 마음의 감옥에 타인을 괴롭게 하는 것들,
이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에게서 비난을 받은 사람들이 그 마지막에 괴로움을 느끼고 실망하고 낙심케 하는 말의 근원으로서 타인을 가두고 있는 자신의 감옥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란 그 누구라도 타인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관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선입관이나 편견을 바탕으로 그 대상에 대한 평가를 하고, 그 선입관이나 편견을 바탕으로 자신의 호감이나 비호감의 순서를 정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세상의 모든 창조물은 모두 다 서로의 영을 위한 도우미로 존재합니다.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자신만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그 죄들을 하나하나, 따로따로, 이 것 저 것, 모두 다 알 수 있도록 시시때때로 찾도록 일러주기 위해 일하는 도우미로 타인들이 존재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인간중심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가 편안하기 위함을 찾고, 자신의 기분이 행복해지기를 바람으로, 영을 살려주기 위한 하나님의 세상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생각에서나 행동이, 남을 괴롭게 하기 위해 말꼬리를 잡고, 행동을 비난하고, 사람들에게는 그를 비하시켜 자신과 친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간질을 시키기도 하는 전갈의 권세를 가지고, 그 마지막에 드러나는 일에서는 황충이나, 메뚜기를 만난 것과 같이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정당성을 회복하려는 반사적인 악행이나, 음주, 흡연, 심하게는 자살에까지 이르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라는 말은 첫째를 반복하여 다섯 번째라는 말입니다.
그 다섯에 있는 내용들을 찾아보면, 창조의 다섯째 날, 물에 있는 큰 물고기가 용입니다.
창조사건을 중심으로 보거나 히브리서를 통해 보는 다섯 번째는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인데 그 십자가 사건의 마지막에 음부에서 마귀를 결박시키는 사건이 언급됩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다섯 번째인 ‘사데’의 뜻이 ‘남의 것’입니다.
다섯 번째 나팔 사건에서도 역시 사탄에게 매여 있는 사람의 정체를 밝히며 그 사탄에게서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봅니다.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다섯 번째 사건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마귀에게 매였던 일들에서 해방되는 날이라는 의미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이나, 마음에 지어질 성소를 위해 들어가야 할 성막을 설명하는 히브리서 1-7장을 보거나, 회개를 목적으로 하는 이김이 없는 에베소 교회의 모습으로 보는 현재교회의 모습들을 돌아봅니다.
2011년 새해 첫 주 부터 시작된 소망교회 사건, 순복음교회 사건, 그리고 아직도 진행 중인 많은 교회와 교단들의 고소고발사건에 더하여 인간의 노력을 통한 자정을 외침으로 하나님이 고쳐주실 인간의 근본인 성품을 무시하고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있다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장하는 교회들의 가르침!!!
모세를 통해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고 예정하신 하나님의 발언에 아모리의 죄가 관영할 때가 그때라고 하셨습니다.
관영(貫盈)이란 차고 넘쳐 밖으로 흐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의 법을 모르고 육신의 예와 윤리를 강조한 세상의 모든 종교나 사상 정치, 그 어디에서도 서로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참 도나 철학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2011년, 교회의 모습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보는 그 열매에 대해 논하자면 교회는 싸우는 곳, 상식도 없는 곳, 그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은 싸움을 싸워서라도 정당하면 된다고 가르치는 신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교회들의 모습은 하나님께 해결 받지 못한 성품을 바탕으로 하는 죄들이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지난주 설교한 요한복음 8장의 내용 중에 자신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싸우면서도 자신의 가르침에는 싸우면 안 된다고 하는 비상식적인 논리를 말하는 것이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양자로 인정받지 못한 거짓을 말하는 지도자들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나 그 교회들의 지도자들인 목회자들 또 그 목회자들을 가르치는 신학이나 그 신학교의 교재를 만드는 신학자들의 마음속에는 그런 것들이 다 멸망을 받았을까요???
받았다면 사람을 보면서 그 행동에 대한 정죄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죄에 대한 개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것이 죄며,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싸우는 것을 하나님과 싸우는 악(惡)으로 보십니다.
사람이 행하는 육체의 죄는 하나님의 법 안에서는 행위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죄입니다.
그래서 다만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무지함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그 영을 사랑하는 것이 참 신앙인이 되어가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12월의 마지막 주간에 국회헌정기도회 회장이신 정병학 목사님을 뵈었습니다.
현직이거나 전직이거나 국회의원을 지내신 그분들이 보는 저의 학벌은 일천함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그 목사님께서 그분들에게 저를 좋게 말하시고 학벌과 목회를 구분하며 옹호해 주신 것은, 저의 생활 자체가 저의 잘못을 찾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생활을 하는 것이며, 타인을 죄인라고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법을 알 수 있도록 섬겨주어야 하는 고마운 대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세상의 모든 삶을 자신의 영을 살려주시려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세상으로 보고 자신이 만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어린양의 신부로 살아가게 될 천국을 목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의 위신은 땅에 떨어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비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교회 안에 겨우 들어온 사람들은 교회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만큼으로도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이 주시는 벌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을 우리들의 손에서 거두어 가실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육체로 행하는 우리들의 행동은 우리들의 뇌에서 나오며 우리들의 뇌는 우리들의 생각을 따르며 우리들의 생각은 마음의 성품을 따르며 그 성품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신다면, 마음에 기쁨으로 자기중심을 버릴 때는 아니더라도, 머리의 고정관념에서만이라도 인간의 성품은 남을 괴롭게 하는 사탄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머리를 감싸고 <아~~~~!!!>라고 하는 탄식을 쏟아내야 합니다.
결론
신앙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입니다.
남이 그렇게 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남이야 그러던 말던 오직 나만은>이라는 결단을 가지고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이야기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의 성품으로 변화 받지 못한 사람의 성품 안에 타인을 어떤 사람이라고 가두어 놓는 마음의 감옥은 싸우고자 하는 말(馬)이 있고 자기만 최고라고 하는 금 면류관이 있으며, 그 얼굴에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자신을 감추고 상대를 물어뜯기 위한 사자의 이를 가지고 육신의 사랑을 설명하는 여자의 머리털이 있습니다.
또 그 모습에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 한다는 뜻으로의 철 흉갑을 두른 가슴이 있고, 싸울 때는 많은 말발굽 소리같이 요란한 소리를 내는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시간은 자신의 욕심을 다 채우기까지를 상징하는 다섯 달 동안 남을 괴롭히는 전갈이 됩니다(7-10).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평화를 원하시지만 사탄은 늘 타인과 싸우라고 요구를 하게 합니다.
보이는 세상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타인을 가두고 시비하며, 원수 갚고, 방백을 두어 상대를 괴롭게 할 꾀를 생각하게 하는 것, 그 모든 일의 중심에는 사탄이 있다는 증거로 이해해야합니다.
신앙의 시작은 개념의 변화이며 그 개념의 변화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타인과의 다툼을 멈추고자 하는 노력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2011년의 첫 달, 올해에는 개념의 변화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들의 올바른 행동인 거룩한 빛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귀한 해가 되며,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새로운 믿음들이 하나하나씩 증가하는 새로운 복을 가득 받으시길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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