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제목 / 내 안에 있는 족속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본문 / 마태복음 28장 16-20절설교자 / 류현수 목사3월 27일 주일설교문

하나님아들 2012. 9. 1. 00:30

3월 27일 주일설교문
제목 / 내 안에 있는 족속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설교자 / 류현수 목사

본문 / 마태복음 28장 16-20절
16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그들에게)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 17 예수를 뵈옵고 (그에게)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 18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그들이)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서론

올해의 사순절과 부활절의 기간에는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후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을 바탕으로 복음서는 예수의 기록이고 그 기록을 바탕으로 우리들이 다시 반복하여 그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 과제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역사 속에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한번 뿐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목적이 각각 다른 네 복음서에 모두 나타나 우리들이 져야하는 십자가는 한 번이 아니라 네 번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는 왕 같은 제사장이 주제로 하나님의 요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요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그 마태복음의 요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 ‘열 한’은 ‘풍부함 서로 다른, 오직, 어떤 하나’라는 뜻이며, ‘제자’는 ‘이해하다, 배우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갈릴리’는 ‘흐르다, 구르다’는 뜻을 바탕으로 하는 ‘벨브’로 자기 스스로 말씀을 조절하려고 하는 의지를 설명합니다.
‘가서’는 ‘죽거나 살기를 목적으로 여행하다, 횡단하다’는 뜻이며, ‘산’은 ‘일어나다, 세우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16절의 말씀을 재구성하면 <서로 다르지만 자기가 정한 하나의 목적을 배우고 이해한 자들이, 자기 기준의 수위를 정하고 육적 성품을 죽이고 신의 성품을 받아 영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일어났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17절을 살피면, ‘뵈옵다’는 쳐다보다, 직시하다, 응시하다‘는 뜻이지만 아래에서 위를 본다는 개념으로 하나의 목적을 바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배하나’는 ‘부복, 아첨’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되어, 16절의 마지막인 ‘(자발적으로)이르러’의 어의와 함께 자기의 목적을 위해 스스로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뜻을 찾게 됩니다.
‘의심하는’은 ‘이중인격’을 뜻하는 단어로, 예수를 바라보고 경배하는 것 자체가 이중성을 띠고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여기에서 <의심하는 자>에서 대명사로 사용된 ‘자’는 관사로도 사용됩니다. 이는 뒤에서 계속되는 단어들이 3인칭이 아닌 2인칭으로 사용되면서 가르쳐야 할 타인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아야 할 자신의 색이 짙음으로 이 ‘자(놈)’는 타인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으로 사용했어야 합니다.

18절에 죽고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 부여된 우주를 다스릴 권세가 나옵니다.
이는 문법해설이 아니더라도 창세기의 창조사건에서 사람에게 보여야 할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자라고 증명할 수 있는 몸으로 행하는 육체의 부활을 상징하는 여섯째 날의 창조 사건의 끝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는 사역을 설명하면서 그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을 주시는 것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죽음 후에 부활하신 예수는 타인을 가르칠 자격을 보여주는 예표였습니다.
그리고 그 설명을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죽고 부활하여 나와 같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절대 명령입니다.

19절의 말씀은 ‘그러므로’라고 시작되는데, 이 의미는 나는 하늘과 땅을 가진 권세를 가졌으니 그 권세를 받지 못한 너희들은 그 권세를 받게 하기 위하여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이제 겨우 타인을 가르쳐서 하나님을 바로 알도록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의 사람을 보여주는 예표임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삼아야 할 제자들이 타인인지 자신인지를 구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포튜오마이)’라는 단어는 ‘격분, 도발’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동사, 명령, 과거, 수동, 주격, 남성, 복수, 2인칭>으로 예수에게서 떨어져 나가서라는 명령임을 알아야합니다.
영어의 ‘가다’는 누구에서 떨어져 나가느냐 아니면 누구에게 가느냐에 따라 Go와 Come을 분리 구분하여 사용한다고 합니다.
Go는 떨어져 나가는 것이며, Come은 부르는 사람에게로 간다는 뜻이랍니다.

그러므로 영문 Go로 설명되는 이 뜻은 지금 예수에게로 와서 얼굴을 쳐다보고 있지만 예수에게로 가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에게서 떨어져 나가 다시 예수와 하나 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모든’이란 ‘많다’라는 뜻이며, ‘족속’이란 ‘(동일한)습관, 풍습’이란 뜻으로 예수의 풍습이나 습관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습관이나 행실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자를 삼아(아페듀오)’는 ‘자신이 제자가 되다, 배우는 학생이 되다, 가르치자 학자로 등록하다’ 등의 뜻이 있으며, 동사, 명령, 과거, 능동태, 복수, 2인칭으로, 타인이 아닌 예수의 명을 받드는 자신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제자가 되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세례’가 영이 해야 할 회개이므로 세례를 주라는 것은 회개를 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본문 중에 나타난 그 이중성부터 회개를 시켜야 하나는 숨겨진 뜻이 있습니다.
‘이름으로(오노마)’는 이름이 아니라 ‘불리우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다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몸으로 보여주며 타인에게 불리우도록 회개를 시키라는 말이 됩니다.

20절에서의 핵심은 ‘지키다’로 <동사, 부정, 현재 능동태>로 ‘지키게 하라’가 아니라 ‘지키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라>는 말로 바꿔 기록해야합니다.
‘가르쳐’는 <동사, 명령분사, 현재, 능동태, 2인칭>으로 역시 남이 아닌 명을 받는 자신의 문제로 본문은 모두 타인을 위한 파송이 아니라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모든 자기중심의 습관들을 하나님께 회개시키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하는 명령의 말씀인 것입니다.

앞의 설명을 이해한다면 여기서 끝 날까지 가야 하는 ‘세상’이란 변화 받지 못한 자기중심의 성품인 것이 이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 날까지 함께하신다는 예수님은 자신과 같이 부활한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게 되게 하기 위하여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동행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론

예수님은 죄인인 사람들이 생각을 통해 자신의 마음의 문제에서 찾아야 할 죄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육체가 가진 눈에 보이는 타인의 죄만 가지고 싸워대기 때문에 우리들이 마음에서 죄인의 모습을 찾게 하기 위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하면서 그 아들을 죄인이라고 정했다고 했습니다(롬8:3).

하늘에 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과 땅의 경계를 넘어 이 땅에 태어나시면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셨습니다.
그 예수는 인간의 성품을 가진 죄인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기 위해 인간의 성품을 버리는 과정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계속되겠지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복음서마다의 마지막 부탁으로의 그 명령들을 보면 모두 미래완료형으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이루어야 할 우리 사람들의 새로운 사명이 있습니다.
일례로 누가복음에서 따뜻한 봄날이란 뜻을 가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그 자신은 엠마오로 가지만 두 제자들에게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므로 인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복종하게 되는 따뜻한 봄날을 위해서는 엠마오로 가는 신앙의 시작을 예배부터 다시 시작하여 엠마오로 다시 좇아오라고 하는 명령을 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제 주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다고 하면서 제게 접근을 합니다.
그리고 제게 듣는 말씀으로 자신의 그 무엇을 결단하고 행동하겠다고 합니다.
뭔가를 좀 알았다, 깨달았다고 하는 다른 목사님들의 예로 들자면 자신들에게 필요한 생명의 말씀이 제게 있다고 하는 것으로 알고 제게 듣는 것으로 자신들의 희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신의 지혜나 지식이 있으면 타인을 가르치길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식을 배웠으면 믿음으로 고취시키고 그 믿음을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인정하십니다.

“모든 천사들은 (하나님이)부리는 영으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후사들의 구원을 위하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음)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히1:14-2:3),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불법을 행한 죄를 묻기 위해 사용하시는 천사들을 통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4장까지 이어지는 이 내용은 그 천사들이 주는 괴로움에서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선 검보다 더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까지 쪼개게 된다고 설명하십니다.

성경의 말씀으로 자신을 변화시켜주는 생명의 말씀은 가르침을 주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생활을 통해 주시는 고난이나 비난, 힐난 등, 하나님을 대신하는 타인들의 소리나 육체로 당하는 환난 속에서 들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이 어디냐를 묻는다 해도 그 천국은 마음에 있어야 한다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하면서 자기에게 생명의 말씀이 있다고 하는 자들을 멀리 하십시오.

그래서 강의를 나가는 저 역시도 제게서 생명의 양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양식을 생활에서 찾는 법과 듣는 법, 하나님과 이야기 하는 법을 말할 뿐이라고 말하면서 제가 하는 말도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그대로 하는 것으로 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지금 열 한 제자의 상태들은, 지금 부활하신 예수에게 듣는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믿으면서, 과거형으로 설명된 이미 제자가 되어 지식으로 훈련을 받고 있었던 열 한 제자의 모습에서 각자가 정한 자기의 기준을 바탕삼아 부활에 관한 자기중심의 이론을 세우고자 예수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에게 아부하고 아첨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부활뿐만 아니라 자기중심의 성품이 죽는 방법도 생활에서 실천하지 아니한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이라는 뇌의 공간에 채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생활에서 사람들을 대하며 하는 몸짓을 기도라고, 믿음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뇌에 존재하는 지식이나 그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말들은 모두 자기를 포장하여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려고 하는 위장술을 선보이는 위선적인 신앙인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보고 경배하나 의심하는>
이는 죽었는데 다시 살아 자신들 앞에 서있는 예수의 상태에 대한 놀라움에 관한 역사적인 표현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표현은 목적은 예수를 닮길 원하지만 행동하는 기도가 아닌 입으로 하는 마음의 소원만 아뢰면서 입으로만 거룩한 행실을 말하는 위선자들을 가르치는 말이면서 또 자신이 행동하기 보다는 타인에게 자신의 믿음을 높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성경을 모르면 자신도 모름) 타인을 가르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힐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예수라는 이름을 주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그 이유가 사람들이 말이 아닌 행동에서 예수와 같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죽음 그 모습을 본다면,
자기를 죽이는데도 왜 죽이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얼토당토 않는 죄목으로 그를 옭았지만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는 방법에 애매한 공격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이 옳고, 맞는 행동을 했지만 얼토당토 않는 이유로 공격을 당하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 받는 것을 입증하게 하신 것입니다.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이순재씨가 선전하는 보험의 광고내용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생활의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지금 교회의 모습, 아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분들 스스로 천국의 삶을 위해 육신의 소욕을 희생시키기 위한 자세나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타인의 비난이나 해를 끼치는 것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시험으로 믿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 해를 영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까?
영이 받는 그 복을 통해서 포기했던 육체의 복도 채워주심을 믿습니까?

본을 보이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신 채로 피로 뺨을 적시시고 그 피로 가슴을 적시면서도 또 심장을 창으로 찔려 물과 피를 쏟고 계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양손에 못 박히우시고 양발에 목이 박힌 채로 당신을 향해 내가 죽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 같이 너도 죽으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더 오래도록 그 예수를 십자가에 두려합니까?
우리는 얼마나 더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울고 있게 하시렵니까?

우리는 교육이나 교회예배를 통해 죽어야 할 자신을 배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이제 생활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신의 습관이나 관습 풍습에 물든 자신의 성품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에 죽어야 할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죽이기 위한 예수의 그 방법을 따라해야 합니다.

주님이,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자신의 성품 속에 죽어야 할 세상의 종말을 위해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권능으로 함께 하신다고!!!!

사람들은 육신이 당하는 고난 앞에서 그 고난을 주는 조건들을 없애달라고 하면서 그 조건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받기위해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의 위해 나아갈 때 두려움이 되는 육신 세상의 모든 조건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을 위한 일들을 밀고 나가라고 권고하십니다.

남들의 비난이 두렵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두렵고 항상 기뻐할 수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보여드리고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삶의 제사를 드려보십시오.
남들의 잘못된 것을 가르침으로 고치고 싶습니까?
사람들의 모든 것은 자신의 소원을 따라 하나님의 기름부음으로 변화 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믿어보십시오.
그리고 타인을 판단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 내 멋대로 되기를 소원하는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치유 받는 새 길에서 새 걸음을 시작해 보십시오.

결론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서 하나님의 입의 기운으로 지음 받은 영이 다시 하늘에 살기위한 새로운 믿음의 일을 시작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남이 아닌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절대명령인 것을 잊지 마시시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것을 해결해 준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십자가의 길을 제시하고 보여주고 가르치면서 우리가 그 예수와 똑 같이 자시 지어야 할 새로운 십자가에 대한 명령의 십자가사건임을 잊지 마시시오.

이제 우리는 그 기억을 따라 생활에서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면서 머리에는 있지만 지키지 못하고 있는 마음의 생각, 성품, 또 성품을 따라 나오는 성질, 성격 등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키는 자기의 가르침을 시작해야합니다.

사순절을 맞이한 우리 교우 여러분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따라 죽음의 십자가와 그 부활을 위해 자기를 가르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이 있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출처 : 복음 중 복음
글쓴이 : 임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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