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제목 / 남자를 낳아야 할 여자의 역할

하나님아들 2012. 9. 1. 00:36

 12월 19일 주일설교
제목 / 남자를 낳아야 할 여자의 역할
설교자 / 류현수 목사

본문 / 디모데 전서 2장 1-7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라 /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 할 것이라 /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우심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서론

본문의 핵심은 남자로 설명되는 가르치는 자의 자격과 그 자격이 누구에게서 시작되었고 그 자격을 가진 자의 할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중에서 나는 그 남자를 양육해야 할 여자의 중요성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본문 1절과 2절은 디모데전서 1장에 나타난 디모데 자신에게 요구되는 그 요구의 목적을 설명하는 것으로, 1절은 다시 그 자신이 해야 할 것들 중,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타인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이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였습니다.

그 4가지 중, 감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3개는 같은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원문에서 간구(데헤세이스)는 청원이라는 뜻으로 같은 의미가 있지만, 기도(프로슈카스)는 ‘예배, 예배당’이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어 디모데전서 2장의 전체내용과 같이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에서의 행동 속에 있는 영적 의미에서 찾게 되는 바램>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도고(엔튝시스)는 ‘만나서 간청하다, 회견하다’는 뜻이며, 감사하라(유카리스티아스)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입니다.

임금들(바실레온)은 ‘절대주권’이라는 뜻이며, 높은 지위(휘페로케)는 ‘스스로 높은 자리를 유지하다’라는 뜻으로 가지고 있어 임금들과 높은 자리에 있는 자란, 자기를 높은 자리에 있다고 믿는 교만함과 그 교만함을 바탕으로 하는 자기중심의 틀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행동보다는 마음에서 타인들과의 문제에서 자신의 의견이 항상 관철되기를 바라므로 타인의 의견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보편적 인간 전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경건(유세베이아)는 ‘복음의 개요, 거룩함’이란 뜻으로,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것보다는, 신앙인의 거룩한 성품과 행동을 만드는 것이 복음이라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단정(셈노테스)은 ‘존경받을 만한 존엄, 정직, 정중함’이란 뜻으로 단정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단어입니다.
평안(헤쉬키온)은 ‘자기 자리 유지, 방해하지 않는 평안’이란 뜻으로 남의 일에 관해 마음에 정의감을 포함하는 그 어떤 것도 없이 행동으로만 하나님의 법을, 몸으로만 말하면서 상대방이 감동받아 변화 받기를 소원하는 감동은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으로만 기다리는 평안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절은 2절로 설명되는 신앙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기도라는 의미보다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입장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고 그 입장의 차이에서 가르치는 자가 생활의 예배인 행동에서 하나님을 만나 동행 동거하는 모습을 보이며, 행동 그 자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을 보이며, 배워야 할 신앙인에게는 자신의 그 모습으로 그 대상이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기를 간청하는 것으로 비쳐 타인에게 공경을 받게끔 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3절과 4절은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 하나님(예수그리스도 아님)이 받으실 만한 선(善)으로(3절), (1절과 2절로 설명된) 이것이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진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4절).

5절을 설명하자면 6절과 7절이 먼저 설명되어야합니다.
고린도서로 본다면 전파하는 자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전도자이며 지금으로 말하자면 전도사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사도를 찾는다면 목자로 목사입니다.
전도자는 설교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며 목사는 자기에게 속한 교인들의 마음상태를 일일이 찾아 회계하며 하나님께 바쳐야 할 심령의 제물들을 바칠 수 있게 꼴을 먹여 일러주는 선지자로서의 목자가 되어야합니다.
본문의 사도 바울은 성품과 행위가 온전한 하나님의 법을 따라 변화 받게 하는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이기도 하며, 자기에게 속한 자의 죄의 유형들과 잘 못된 개념들을 일일이 찾아 알려주는 목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을 받아 기록하는 사도바울 그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구원의 방법은 오직 하나(‘한 분’의 원어는 인칭이 아닌 형용 대명사로)로 그 하나의 방법뿐인 구원을 이루게 할 중보(원문 ‘메시테스’는 사이에 있는 중개인, 중재자) 자는(5절), (아직은 아니지만) 때가 되면 증거 할 것인데, 그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을 소망하여, 자기의 잘못된 것들을 이미 하나님께 제물(속전 대속물이란 모두 죄 사함 받기를 위하여 바치는 제물이란 뜻)로 바친(주었다)(6절), 사람 예수그리스도다(5절)라고!!!

본문을 자세히 보면 본문은 2000년 전에 사역하신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설명이 아닙니다.
첫째 이유는 구원자는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 예수는 사람이라는 데에서 연유하며 둘째 이유는 2000년 전에 사람의 모양으로 일하신 예수를 증거하고 있으면서 본문의 사람 예수에 관해 아직 증거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8-15절에 나타난 질서 그 안에 존재하는 남자와 여자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배움을 갖지 않고 가르치는 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가르치는 자는 남의 집을 지으러 다니며, 그 지어진 남의 집에는 그 집의 여자들이 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면 가르치는 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 것은 배우는 것으로 여자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들이 하는 일은 남자가 되는 일이며 그 남자가 되기 위한 그 일을 사람의 예대로 말하자면 이는 남자를 키우는 일입니다.

에베소서나 골로새서 디모데전서 1장과 2장으로 설명되는 남자와 여자의 모든 관계는 신앙성장의 과정에서 배워야 할 신앙인과 가르치는 신앙인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숫자의 배열 중 4, 7, 10 등으로 상징되는 신앙성장의 순서 그 맨 마지막 숫자만 가르치는 자의 자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타난 말씀도 영의 문제에서 제기되는 신앙성장의 모습으로 본다면 6일까지 자라야 할 1장 전체가 여자적인 일이요 가르치는 자의 자격을 설명하는 제7일도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역시 가르치는 과정을 배워가는 여자의 일입니다.

출애굽 사건에서 나타난 10가지 재앙의 모습을 본다면 자기와의 싸움을 싸우는 신앙의 상징인 고센의 이스라엘을 노예삼아 생활을 영위하는 자신이 아닌 타인과 다투면서 가르치길 원하는 애굽에 나타난 그 재앙은 어느 신앙인에게 어떤 하나님의 응답이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대한 답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재앙은 피로 시작하여 장자의 죽음으로 그 끝을 맺습니다.
1. ‘피’는 생명으로 인본주의 교육사상을 생명같이 여기게 된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상과 담을 쌓는 것이다.
2. ‘개구리’에 대하여는 요한계시록에 우상을 따르는 음녀적인 행동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본주의가 생명인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을 따라 만들어진 틀을 따라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3. ‘이’는 자기의 것을 늘어놓고 달라붙어 남의 피를 빨아 먹는 것으로 이는 개구리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남과의 문제에서 남이 가진 절대적인 사상이나 기준을 잘 못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괴롭게 하며 자기의 사상이나 기준으로 바꾸라고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4. ‘파리’는 남의 음식에 독을 뿌리는 해충으로 타인의 생각 속에 있는 근본사상까지 고치라고 강요하게 되어 있다.
5. ‘악질(카베드, 다바르)’은 자신 스스로 무겁게 느끼는 자기 안에서의 고통으로 남을 바구는 것에 대한 고통이나 자신의 말이나 타인에 대한 요구조차 할 수 없고 자신도 해결하지 못하는 자기의 문제 때문에 스스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삶의 무게를 무겁게 느낀다는 것이다.
6. ‘독종(아바부아, 쉐힌)’은 염증으로 고름을 발하면서 남의 염증을 조롱하며, 육을 죽이기 위한 말씀으로 상징된 풀을 죽이는 것으로, 이는 자신도 영이 살지 못하여 하는 말이나 행동이 남의 조롱을 받는 것으로 남이 자신을 생각하며 염증을 느끼는 것도 모르면서 타인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상태를 설명한다.
7. ‘우박’은 '점이 있다 얼룩졌다'는 뜻으로 죽은 피의 자국으로 상징된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을 참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으로 믿고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8. ‘메뚜기’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상징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 사는 자는 하나님이 매사에 고난을 주신다고 했다. 자기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믿지만 돌아보면 모두가 고통의 연속이었으며 사람들을 통해 비난받는 그 고통을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9. ‘흑암(호쉐크)’은 성경에 수도 없이 나왔지만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상태이며 그 모르는 것을 고집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상태이다. 이 상태인 흑암에는 '불행, 파멸, 죽음, 무지, 슬픔, 사악'이란 뜻이 함께 있어 육신중심의 사상이나 생각에 맞추고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가르치길 원하는 자를 뜻하는 애굽적인 믿음의 정의와 상태를 설명하는데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악한 자였다.
10. ‘장자’의 죽음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을 상속받는 구원자가 죽었다는 뜻에 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는 똑같이 배우지만 자신을 위한 싸움을 거절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사람이라 믿으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그만 괴롭히라고 요구하며 싸우는 사라들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저주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를 반대로 생각하여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배우면서 배우는 말씀마다 자신의 영적 성품을 위한 말씀으로 배우면서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 성품 행동에 그 말씀을 비교하며 자신과의 싸움을 싸울 줄 아는 것으로 그 생활의 피로 삼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절대 그 장자를 죽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런 장자를 낳기까지 자라가는 믿음은 하나님 앞에 순결한 신부요, 자신은 쓴 것일 분이라고 고백하는 마리아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신앙성장의 과정에서 찾아보는 여자의 비중은 10중에 9할을 차지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요셉에 이르는 족장시대에서 찾게 되는 신앙성장의 모습에서도 그 비율을 찾을 수 있고, 예수사역의 비중을 보더라도 33년의 일생 중에 3년 하고도 반이나 거의 더한 날이 있어 예수를 통해 보는 성경적 여자의 사역도 역시 10중 9할을 차지합니다.

또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십일조가 남을 위한 사역에서 타인들과 화평을 이루면서 또 다른 남과 남들을 이어주는 사역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 십일조라는 단어가 ‘그 십(10)의 마지막 수’란 뜻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 나타난 남자를 낳기 위한 여자의 사명이란 지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찾아본다면 남자의 사명 속에 여자의 사명이 없을까 라는 궁금증입니다.
예수 사명의 그 마지막은 예수를 대신하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집을 짓는 사역입니다.
이는 남자의 사역 안에 역시 아들을 만들기 위한 여자의 사역이 남아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람의 예대로 말하자면 남자가 아무리 집을 나가 남을 위해 일할 지라도 아내가 아내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 남자의 일은 헛것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지금까지 저의 설교나 강의의 일부만 들어온 분들은 저를 여성비하론 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지론에서 여성의 몫은 90%이며, 그 나머지 10%도 여성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목회자 사모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저는 남성과 여성의 질서를 강조한 것이지 절대 여성비하론 자가 아닙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아들로 태어난 남자가 타인의 집을 지어주면 그 보상으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진정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 그 과정에 존재하는 교육을 말하고자 합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가족의 중요성, 사회의 중요성 국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우리들의 시대보다 현저히 저하되었습니다.
우리시대까지는 아버지가 밖에 나가 일하고 어머니는 가정에서 자녀들과 생활하였습니다.
우리시대까지는 여자는 자녀 낳는 것을 의무로 여기고 살면서 자녀들을 많이 낳아 자녀들 스스로 위계질서를 배우고 서로 협동하여 다른 집의 자녀들 사이에서 서로를 보호하며 살았습니다.
우리시대까지는 장자인 부모가 조부모를 함께 모시고 살면서 부모에게 효도하여 자녀들에게 저절로 효를 가르치고 가정을 꾸려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그 모습에서 우리는 남에게 인정받는 가문의 명예를 생각하면서 사는 법을 저절로 배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바라보는 젊은 세대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명예가 아니라 자신들이 꾸며서 남에게 인정받는 문화로 바뀌어, <나만 아니면 돼>를 구호처럼 외치는 1박 2일의 내용처럼, 이제는 남이야 뭐라던 말던 남이야 욕을 하든 말든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을 만들면서 역설적으로 남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핵심은 여자들이 남자의 일터로의 탈출이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일은 그 인구와 비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일은 그 인구 중에 남자가 할 수 있는 만큼 세상에 그 일거리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남자의 일을 여자가 시작하며 하나님의 질서는 깨어져 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땀을 흘려가며 몸으로 하는 일들이 줄어들고 인간의 편리와 행복추구를 위한 일들이 주류를 이루면서 남자들이 하던 일들은 무식한 자들이나 하는 일, 지저분한 일, 귀챦은 일로 치부되고, 아이들도 몸으로 하는 일을 거부하게 되었고, 남자들은 일거리가 줄어들면서 가사를 책임지는 남편이 늘어나, 돈 버는 기계라는 소리도 이제는 멀어져 일하는 여자들의 노예라는 소리마저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보편적으로 남자는 밖에서 사람에게 인정받는 명에를 추구합니다.
보편적으로 여자는 자신을 꾸며 남에게 인정받는 명예를 추구합니다.
자신을 꾸며 남에게 인정받길 원하는 그 욕심이 자녀들이 교육받는 학교로 이어져 자신들의 치맛바람으로 자기자녀의 위상을 높이려 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교사들이 제자사랑의 표시로 드는 매를 꺾어 이제는 제자가 스승을 폭행하는 것이 다반사가 되었고, 스승이 매라도 들라치면, 아니 자신이 잘못을 인정하고 그 매를 두려워하는 아이들이 스승에게 매를 청하기보다는 전화 번호판을 눌러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우리시대의 교육은 홍익인간 제세이화를 바탕으로 하는 인격도야가 교육의 최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재능과 육체의 능력이나 인격교육이 무시되고 어머니가 원하고 육체가 원하는 오직 하나의 목적, 육신의 편리와 자랑을 위한 로봇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목표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으로 그 방법에 육신의 소욕 하나 하나를 발견해가며 죽이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가운데에서 서로의 욕심이 드러나며 서로의 잘 못된 것들이 드러나 그 것들을 하나님 앞에 드려가며 생활을 조율해 나가는 것입니다.

요즈음 TV프로 중 남자의 자격에서 몇 달 동안 박칼린과 그 합창단이 유행하여 아직까지도 그 감동이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한 조율과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한 단결, 저는 그 프로그램 안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찾아야 할 영적 성장의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파트가 다르고, 지도자와 지휘자, 청음을 위한 최재림에, 반주자와 가수, 35명이 만들어간 그 합창은 우리들이 찾아야 할 하나님 안에서의 구별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찾아야 할 남과 여, 스승과 제자, 10일로 구분되는 신앙성장에 속한 각각의 신앙인들이 찾아야 할 자기의 자리들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질서는 2차적인 목적을 가지고 자기의 임무를 찾아 행하는 것이지, 1차적인 자기의 요구를 성취하기 위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여자의 자리란 그 모든 신앙과 사람의 생활에 철저히 관여하게 되어있습니다.
남자를 밴 어머니 출산, 양육, 가정을 이끌어가는 여자를 몸으로 보이는 교육, 남편사의 사상을 따라 가정을 이끌어가는 것을 몸으로 이해시키는 행동교육, 가정의 평화를 만들어가는 어머니의 포용력,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도 가정의 명예와 남편의 조력자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하는 어머니, 남편이 자신의 가정을 떳떳이 자랑스럽게 말하고 자신의 가정유지법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고 자녀교육법을 떳떳이 세상에 가르칠 수 있도록 가정을 이끌어주는 아내, 하나님의 질서에서는 이런 여자를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의 여자와 남자의 관계에서 남자는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만 그 드러남이 아내 없이 잘 되는 것 없고, 남자들이 세상에서 그 명예를 드날리지만 그 명예에는 그 어머니의 교육이 고스란히 묻어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자가 남자 아래 있다고 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전부이며, 여자 없는 세상 생각 할 수도 없으며, 엄밀히 말해 남자가 뜨는 것은 여자를 자랑하는 것이라 몸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아내를 온 몸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결론

참 복음인 하나님의 법 질서 안에서 여자적인 믿음의 끝 하나만 남자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도 여자 없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낳아야 할 여자는 하나님의 법 안에서 가정에 머무르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자녀들을 쑥쑥 낳아 가문을 흥왕 시키는 것이며, 그 자녀들이 세상에서 명예로운 칭호를 듣게 만드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야 할 우리의 집인 천국에 가서 하나님의 칭찬을 받으며 사시길 바라십니까?
그 영원한 복의 자격이 이 땅에서 채워지고 그 믿음이 되는 날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지구에서 사는 날 동안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세상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복을 이제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여자적인 믿음이 자신을 키워나가며 영적인 신앙들을 순서적으로 발전시키는 해산을 바라시는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그 영적인 의미를 따라 남자를 세워주기 위해 가정으로 돌아가는 귀한 믿음이 있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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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복음 중 복음
글쓴이 : 임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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