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

[스크랩] 창세기 제3장 강해 - 인간의 범죄와 에덴 추방

하나님아들 2014. 6. 3. 14:22

 

창세기 제3장 강해 - 인간의 타락

 

 

  본장에서는 아담의 타락(1-7)과 그에 마땅한 형벌의 선포와 값없는 구원의 약속(8-12), 낙원에서의 추방(22-24) 등의 내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선악과 언약은 선악과를 따 먹을 경우 반드시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 범죄가 없었다면 인류에게 영육간의 죽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기어코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아담과 그가 대표하는 모든 인간에게 이 현재 세상에서의 죽음을 선포하시면서도 아담을 당장 죽이지는 않고 잠시 더 생명을 연장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타락하고 인간까지 유혹한 사단의 악영향(엡 2:2)으로 세상은 질고로 가득 차 있으나 하나님의 소위 일반은총((一般恩寵)으로 이 세상은 종말까지 유지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결국 종말까지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원죄와 자범죄의 영향으로 모두 필연적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할 경우에는 그의 죄 값을 다른 존재가 대신 책임지고 피를 흘려 죽는 즉 희생의 대속(代贖)을 하는 대신 그 죄인은 구속되어 구원되는 구속의 법을 새로 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대속 희생을 치르는 구속의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러한 구속의 은혜를 예표하는 것은 ‘여자의 후손’ ‘가죽 옷’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1: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나하쉬:נחש)은 ‘쉿쉿 소리를 내다’ ‘속삭이다’란 뜻에서 나온 단어로, 속삭이듯 날름거리는 혀와, 지나갈 때 쉿쉿 소리를 내는 뱀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간교(아룸:ערום)의 기본 뜻은 ‘영리함, 신중한’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에 부합됩니다. 하지만 유혹자 사단은 자신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뱀의 이러한 영특함을 이용하였습니다. 뱀은 사단의 도구로 전락됨으로써, 오히려 그 지혜로움이 사악하고 교활한 것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확대해서 해석하면 성화되지 않은 영리함과 총명은 즉 불신자나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의 총명함은 사단의 사악한 목적에 이용당하기 쉽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뱀은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옛 뱀” 곧 사단은 보다 연약한 그릇(벧전 3:7)인 여자를 유혹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뱀의 간교함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린 반역자 사단은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물의 면류관인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해 유혹자로서 뱀을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과 명예를 질시한 불타는 시기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지만 사단은 화려한 뱀의 빛깔과 영특한 뱀의 지혜를 빌려 광명의 천사인 양 인간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접근을 한 것입니다.

  어쩌면 여자는 선악과 금단명령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듣지 아니하고 아담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사단은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여자에게 접근한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단에게 유혹의 기회를 준 여자에게도 문제점이 있습니다. 곧 남편과 떨어져 금단의 나무 가까이 홀로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지만 그녀는 유혹하는 자와 대화하고 그의 말을 들어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던 것입니다. 그녀는 유혹자의 말을 단호하게 대적하고 물리치며 피해야 옳았습니다.

  일단 유혹의 말에 반응을 하는 여자에게 뱀은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물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의심하게 할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외친 놀라움입니다. 뱀의 이러한 질문은 이간(離間)자로서의 사단의 특성이 잘 나타난 말입니다. 이 질문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활동을 제한시키고 속박하는 자로 묘사하여 여자로 하여금 불만하고 반발을 하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동산의 각종 실과를 임의로 먹도록 허용하신 자유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당시 뱀은 사단의 도구로서 사단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 때문에 여자와의 의사소통이 가능했습니다. 어쩌면 창조 당시 타락하기 전에는 모든 동물과 사람과 의사소통이 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후일 여호와께서는 나귀의 입을 통하여 이방 술사 발람을 견책하신 적도 있었습니다(민 22:28-30).  여자가 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볼 때에 당시의 뱀은 오늘날과 같이 혐오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뱀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인간과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뤄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하와는 절제와 조심의 필요성을 느낄 때에는 ‘하나님’의 명칭을 사용했지만, 자신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자 했을 때에는 ‘하나님의’의 성호를 삭제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을 제외한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뱀과 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역과 범죄의 첫 징조입니다.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와가 대답하는 속에 그녀에게 깃들어 있는 불만과 의심의 일면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만지지도 말라’는 내용을 덧붙였습니다.  금지규정의 엄격성에 대한 불만입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라는 말로 완화시켜 금지규정의 절대성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일획의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마 5:18,19; 계22:18,19).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계시하시듯 뱀이 하와에게 자신의 간사한 의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하와에게 있어 자신이 하나님 되기를, 그리고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계실 자리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가 대신 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보다 다른 존재의 언어가 더욱 호소력 있게 들리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죄악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첩경입니다.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결코(무트:מות)는 2:17에서 ’정녕‘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사단은 하와의 불만과 의심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직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 뱉었습니다. 이로써 사단은 자신의 가장 큰 속성이요 특징인 ’거짓‘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요 8:44)인 것입니다. 오늘날 역시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은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죄의 삯은 기쁨‘이라고 귀가에 속삭이고 있습니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단은 하와가 유혹 당하는 것을 감지하고 계속해서 거짓말을 합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마치 인간의 행복과 명예를 질투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선악과 금단 명령을 내린 비겁자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너희 눈이 밝아’는 ‘너희 눈이 뜨여’입니다.  이런 표현은 어떤 숨겨진 비밀이나 계시를 확실히 이해했을 때의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뒤에 ‘선악을 알 줄’과 연결되어 영적 해안이 열린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하나님과 같은 신적 능력과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결국 사단의 논리는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들이 전능한 당신과 같이 되는 것을 시기하여 선악과에 관한 금령을 내렸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이기적인 신이요, 거짓과 위선의 신이라고 매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금령에 담긴 비밀 즉 인간이 신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원치 않으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 인간의 행복과 명예를 질투하고 두려워 한 자는 바로 사단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신뢰하였더라면, 후일의 예수님처럼 ‘사단아 물러가라.(마 4:10)’고 외치며 더 이상 상조하지 않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와는 뱀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스스로의 욕망과 교만에 빠져 계속 상종했습니다.  따라서 타락 그 자체가 있기 전에 이미 타락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죄라고 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의 의지와 동의가 없이는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죄를 짓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에덴동산의 모든 과목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2:9)입니다. 특별히 선악과 나무가 더 아름답고 더 탐스런 나무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와가 사단의 유혹에 빠져 자신의 현 상태에 대한 불만과 하나님과 같은 불별력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으로 욕망과 탐심의 눈을 들어 선악과 나무를 보았을 때 유난히 그 나무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탐스런 나무로 보인 것입니다. 즉 사단의 소욕을 좇아 육신의 안목과 정욕으로(벧전 2:11; 요일 2:16) 바라본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한 자’라고 규정하셨습니다(마 5:28).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욥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눈과 정결 언약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욥 31:1).  ‘남편에게 주매 그도 먹은지라.’ 죄는 그 속성상 전염성을 지닙니다.  따라서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는 불순종의 죄를 짓자마다 곧 유혹자가 되어 남편 아담도 먹게 만들었습니다.(딤전 2:14)  결국 사단의 전략에 말려든 셈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사단은 가까운 자를 내세워 죄를 짓도록 유혹합니다. 즉 욥에게는 그의 아내를(욥 2:8,9), 심지어 그리스도에게는 그의 수제자 베드로를(마 16:21-23) 유혹자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맥락에서 모세 율법은 형제나 자녀나 품의 아내나 친구가 다른 신을 섬기자 할 때엔 긍휼히 보지 말고 죽일 것을 명했고(신 13:6-11), 예수님께서는 아비나 어미, 또는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자는 천국에 합당치 않다고 교훈하셨습니다(마 10:34-39).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을 갑작스럽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사단이 유혹하던 말대로 초경험적인 인식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초경험적 인식 능력은 복되고 좋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엉클어진 양심의 현실을 바라보게 되었고, 또 자신들이 영적, 육체적으로 벌거벗은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자신들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됨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마음의 고통과 뼈아픈 고독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의 눈은 죄로 오염되었습니다. 영적 순결의 눈은 어두워진 반면, 세상적인 죄의 눈은 밝아지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속임수에 놀아난 것입니다. 수치를 깨닫게 된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에서 잎을 따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치마로는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수치는 결코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아담과 하와는 수치를 무릅쓰고 하나님께로 나아가 회개했어야 옳았습니다. 이처럼 죄는 숨기면 숨길수록, 변명하면 병명할수록 더 크게 자라고 급속하게 번지는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저녁 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찾아오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어디에 있는가 찾으셨지만, 그들은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들은 하나님을 피하여 자신을 숨기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반역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가 없었으며, 동시에 그들은 죄로 인해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공포에 질린 그들을 방치해 둘 수도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소유된 인간들에게 사랑의 모습으로 찾아오셔서 그들의 아픈 현실을 지켜보신 것입니다. 평상시라면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가 친근했겠으나 죄를 지은 상황에서의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는 우뢰(雨雷)요, 책망의 음성에 다름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죄를 지은 영혼은 이렇게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자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맞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고통으로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이 질문은 아담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장소에의 물음이 아닐 것입니다. 아담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묻는 ‘영혼의 상태적인 물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현상태를 깨닫고 자복하는 심령으로 나무 사이에서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처럼 아담을 부르신 것입니다. 인간은 하늘 끝이든지 음부나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시 139:7-9).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근본 이유는 수치로 인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불순종으로 인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께서 금한 선악과를 따먹은 죄 때문입니다. 아담의 이 답변은 어설픈 변명입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가 저주를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불순종의 죄 뿐만 아니라 회개의 기회를 무시한 죄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누구를 통해 어떻게 벌거벗은 사실이 수치가 된다고 느끼게 되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결국 이 질문은 아담이 죄 지은 것을 확인시키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의 불순종을 고백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을 알고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이는 선악과를 먹는 일이 죄악이 됨을 알지 못했다고 하는 아담의 핑계를 미연에 차단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었으므로 당연히 그 죄와 허물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질문은 더 이상 핑계하지 말고 선악과를 따 먹는 사실을 고백하고 잘못을 빌도록 유도하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죄의 덫에 걸린 아담은 점점 더 변명의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 뿐이었습니다.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결국 하나님까지 죄의 공범자로 끌어들이고 말았습니다. 처음 하와를 보았을 때 그토록 기뻐하고 감사하던 아담이 이 지경까지 타락하게 된 것은 모두 죄가 빚어낸 비참한 결과입니다. 이처럼 죄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상호간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여지없이 파괴시켜 불신과 미움과 적대의 관계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실토하기는 했지만, 그 실토는 자신의 불순종을 부끄럽게 여기고 회개하는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먹긴 먹었지만 그것은 다 여자 때문이요, 또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고 있는 것입니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상대방의 잘못이 확실할 때에 적극적으로 그 원인에 대하여 추궁할 때 사용하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아담처럼 핑계를 대어 그 원인을 뱀에게로 돌리고 있습니다.  하와는 아담의 불순종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고백했어야만 합니다. 남편과 같이 책임 회피를 하여 그 죄를 더욱 심각하게 몰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자신을 유혹한 뱀을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아름다운 사랑과 신뢰의 관계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유혹자 뱀(사단)은 인간을 선악과나무로 데리고 갈 수는 있어도 입안으로 선악과를 넣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서 입에 넣은 것은 분명 하와와 아담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의 교만과 불순종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상대방을 노려볼 것이 아니라 즉각 자신의 가슴을 쳤어야 옳았습니다.  진정 자신의 죄책을 스스로 지고 가슴을 치며 통회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긍휼은 풍성히 임하는 것입니다.  후일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통회 자복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삼하 12:13; 시 51:1-19).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뱀에게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뱀을 유혹의 도구로 이용한 사단에게보다 뱀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징계입니다. 그러나 이 징계가 뱀인가 사단인가는 엄밀하게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단의 도구는 사단의 형벌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며, 이미 타락하여 구원의 소망이 완전히 없어진 사단에게는 인간처럼 회개의 질문이 없이 바로 저주가 선언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사단이 왜 그토록 질투와 유혹의 화신이 되어 성도를 타락시키고자 ‘우는 사자처럼(벧전 5:8)’ 으르렁거리며 두루 돌아다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짐승보다’에서 ~보다는 더 큰 비교급이 아니라 구별되거나 분리된 상태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징계는 사단의 도구가 된 뱀에게만 직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배로 다니는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배를 땅에 댄 채 벌레처럼 흙 가운데를 기어 다니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실제 뱀은 인간의 발꿈치를 쉽게 공격하여 상하게 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반면 그 머리가 쉽게 상할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뱀은 그 의미상 사단의 신세와 같은 처지가 되고 만 셈입니다. 사단은 뱀의 영특함과 오만한 듯 한 거동을 이용하여 인간을 유혹하는 자신의 도구로 사용했고, 그 결과 사단의 하수인이 된 뱀은 영원토록 배로 기어 다니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흙을 먹는’ 즉 극도의 멸시와 수치와 굴욕의 상태가 되고 만 것입니다. 뱀은 땅을 기어 다니므로 흙먼지나 티끌이 입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도 문자대로 해석도 가능합니다. 결국 먹어서는 안 될 선악과를 먹도록 부추긴 뱀은 그 죄의 대가로 결코 먹고 실지 않은 흙을 평생 먹어야 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원수가 되게 하고’ 원수는 적대감, 증오심이란 뜻으로 상대방에 대해 마음 속 깊이 품고 있는 악한 감정을 말합니다. 이로써 향후 전개되는 인류사는 구속사적으로 뱀의 후손(사단과 그의 추종 세력)과 여자의 후손(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투쟁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실 인류의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 일차적으로 가리킵니다. 이를 확대 해석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신구약 시대의 모든 거룩한 씨들, 곧 성도를 포함합니다. 결국 사단은 여자를 통해 인류를 멸망시키려 했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오히려 여자를 통해 그 자신이 멸망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머리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치명적 부위를 의미합니다. 머리가 짓밟혀 상한다는 것은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결정적 패배를 당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 선언은 궁극적으로 맞이하게 될 사단과 그의 추종 세력의 비참한 종말을 알리는 조종(弔鐘: 죽음의 종소리)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범정 선고의 집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그 이후 사단은 으깨진 머리를 감싸 쥐고 최후 발버둥 칠 것이지만, 주님의 재림시 영원토록 죽음을 맞이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머리 잘린 뱀, 곧 패잔병에 불과한 사단의 세력에 결코 겁먹지 말고 용감히 싸워서 물리침으로써 최후 승리의 순간을 앞당겨야 할 것입니다.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발꿈치는 신체 중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부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이 사단의 공격으로 인해 해를 당하긴 할 것이나, 그것이 결코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말의 성취는 그리스도의 수욕과 고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써 발꿈치의 상처를 말끔히 치유하셨습니다.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뱀의 유혹에 빠져 먼저 선악과를 따 먹은 후 남편 아담도 먹도록 한 하와는 먼저 형벌을 선언 받았습니다. 그 형벌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잉태의 수고와 해산의 고통입니다. 본래 여인의 잉태와 해산은 하나님의 큰 복이었습니다. 그것은 기쁨과 환희요, 결코 고통과 수고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범죄 후 여인의 해산은 무서운 고통을 수반하는 형벌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해산의 고통을 당할 때 죄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둘째 남편에 대한 사모와 복종입니다. 본래 부부 관계는 피차 동등한 관계로 사랑과 이해 및 순종의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범죄 후 부부간의 관계는 위계질서와 복종의 관계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형벌로 말미암아 아내는 남편에게 의지하고 그 지배에 복종해야만 되는 의무를 띠게 된 것입니다. 결국 여자의 권귀가 박탈당하고 그 지위가 낮아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보다 강화되고 범조문화 된 부부간의 위계질서를 의미할 뿐, 예속이나 노예는 아닙니다.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먼저 지음을 받은 자로서, 그리고 선악과 금단 명령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들은 자로서 아담은 마땅히 하와의 유혹을 물리쳤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회개 하도록 선도했어야 옳았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그러한 영예로운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하와의 장중에 놀아났고, 급기야 하와에게 죄책을 전가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은 형벌 선고 직전 바로 이 사실을 예리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아담은 모든 피조물의 주관자요 대표자라는 측면에서 아담의 타락은 필연적으로 땅을 비롯해 땅에 속한 모든 피조물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따라서 범죄 이후 인간을 위해 창조된 모든 피조물 역시 하나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게 되었습니다(롬 8:19-22). 그리고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고하여야’라는 말은 ‘슬픔 중에, 고통 중에’란 뜻입니다. 이 말은 얼굴에 땀이 흐르도록 힘껏 일해야만 '수고의 떡‘(시 127:2)을 먹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조 시 땅은 온갖 열매와 채소를 풍성하게 낼 수 있는 좋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이후에는 땅도 저주를 받아 향후 땅의 자연적 소산은 가시덤불과 엉겅퀴 같은 잡초 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제 수고의 땀을 흘려 땅을 일구고 경작해야만 겨우 땅으로부터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죄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변질시키고 부패시키는 무서운 독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밭의 채소’를 식물로 주셨습니다. 그 전에는 온갖 과일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수고와 고통과 근심의 땀을 흘려 겨우 얻어지는 밭의 채소는 하나님의 주신 복으로 거저 주어진 ‘낙원의 실과’와 대조가 됩니다.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얼굴(아프:אף)’의 기본 뜻은 ‘코, 콧구멍’입니다. 이 말은 소나 나귀 등 가축이 고되게 일할 때 코에서 콧김을 내뿜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타락 전에도 노동은 부여되었지만,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의 복된 노동이요, 타락 후와 같이 먹거리를 얻기 위한 고되고 힘든 노동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대가로 인간에게 수고스러운 노동을 명하셨으므로 인간은 그 형벌을 달게 받아들여 회개하는 심령으로 열심히 일해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타락 전후를 막론하여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딤후 3:10)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최후는 결국 죽음이요, 죽을 때까지는 수고의 떡을 먹어야 합니다. 즉 인생의 길은 곧 죽음의 향해 가는 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연적인 죽음의 법칙이 아니라 범죄한 원인으로서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범죄 한 후에 즉각 죽음이 임하지 아니하고, 이처럼 유예기간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은혜언약(3:15)에 기인합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릴 ‘여인의 후손’을 위한 배려입니다.

 

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하와(חוה)’는 ‘살단’란 뜻의 ‘하야(חיה)’에서 파생된 말로, 곧 ‘생명(조에:)’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죽음을 선고 받았지만 ‘여자의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근거하여 생명에의 소망을 확신한 아담의 신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든 산 자의 어미’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태어날 ‘전 인류’의 어미라는 뜻이며, 구속사적으로 볼 때 뱀의 후손과 구별되는 택함을 받은 자녀의 어미라는 뜻입니다.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어쩌면 고생길을 떠나는 자식에게 보따리를 챙겨주는 어머니의 심정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에덴을 떠나 거친 땅을 일구며 살아가야 할 아담과 하와에게 손수 질기고 튼튼한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죽옷을 위해 희생된 짐승은 구약 시대 인간의 속죄를 위해 희생된 숱한 희생 제물의 예표가 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영원한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아담과 하와를 위한 짐승의 희생은 최초의 제사 행위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속죄의 길을 계시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죄악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는 희생 제물의 피흘림을 통해 얻어지는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어야 된다는 것을 바랍니다.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인간의 범죄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한탄입니다.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는 죄악을 지질러 태초의 순결과 무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죄와 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악은 인간이 영원토록 몰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한 영원토로 유지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교만과 불순종은 이러한 창조주의 바램을 산산히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중 하나’란 말은 일체(一體)시나 삼위(三位)로 계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선악과나무와 더불어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는 하나님과 인간간의 생명의 교제를 상징하는 나무이며, 실제 생명나무 실과는 인간 삶의 영존(永存)에 영향을 주는 나무입니다. 따라서 범죄한 인간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존할 경우 하나님께서 세우신 행위 언약이 부정(否定)되는 결과를 빚게 되고, 인간에게는 범죄하고도 영원토록 살겠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결과를 빚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로부터 인간을 영원토록 격리시켜 놓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성화된 성도는 천국에서 다시 신령한 생명나무 실과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계 22:2).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결국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농사를 짓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이는 사실상 죽음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행위 언약’을 따라 인간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직접적인 교제는 단절했지만, 영원히 그 관계를 창산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범죄 후 주어진 여인의 후손 언약과 가죽 옷 사건 속에서 뚜렷하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사실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지만 그것은 두 가지의 측면에서 은혜라고 말해야 합니다. 첫째는 죽어야 하지만 생명을 연장 받았다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상황에서 영생하는 것은 오히려 회한과 눈물로 사는 죽음보다 못한 삶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오히려 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룹(케루빔:)은 천상의 영적 존재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수호하는 일단의 천사군(天使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룹의 기능은 경호 및 감시(3:24), 심판 대행(겔 10:2,27), 하나님의 보좌 운반(시 18:10; 80:1) 등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물이나 처소에 형상화 되어 등장합니다(출 25:18-20; 26:1; 왕상 6:23-28); 대하 3:10-14; 겔 41:17-20). 그리고 그 형상은 날개를 가진 사람이나 사자, 소, 독수리의 모양으로 묘사가 되었습니다(겔 1:6, 10; 10:14, 21,22; 41:18). ‘두루 도는 화염검’은 그룹들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회전하며 두루 돌아가는 불 칼을 가리킵니다. 이 불 칼은 하나님의 위엄을 상징합니다. 그룹과 화염검으로 에덴동산과 생명나무를 철저하게 봉쇄하였습니다. 이제 인간은 결코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도 없을뿐더러 돌아가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또 다른 생명나무길(계 22:1,2), 곧 천국의 문을 향하여 부단히 전진해야 합니다. 천국 문은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통해 활짝 열어젖혀질 것이며, 인간은 단지 그 피 흘림의 공로를 의지하여 따라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죄인을 대신하여 화염검에 찔리셔서 새로운 생명나무의 길을 열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해야만 할 것입니다.

출처 : 행함교회
글쓴이 : chuk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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