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

[스크랩] 선악과 금령의 의미

하나님아들 2014. 6. 11. 11:01

 

   에덴 동산에는 각종 열매맺는 나무가 있었으나 이름이 붙여진 나무는 동산 중앙에 있는 두가지 나무인데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또 하나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였다. 선악과는 정확히 말하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 evil)이다.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나무에 이런 이름을 붙이셨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 열매는 마음대로 먹되 오직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만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 두 나무에 붙여진 이름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어기는 날에 주어지는 결과가 죽음인 것을 볼 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죽음의 나무인  셈이다. 그렇다면 동산 중앙에는 각종 나무를 대표해서 생명 나무와 사망 나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슬프게도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금령을 어겼으며 이 사건은 인간 역사를 갈라놓는 분수령이 되고 말았다.

 

  선악과와 관련되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은 두가지 일 것이다. 왜 하나님은 선악과 금령을 명하신 것인가?  왜 하나님은 사람이 금령을 어기는 것을 막지 않고 내어버려 두신 것일까?  이런 의문은 당연한 것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려 한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은 왜 선악과 금령을 만드신 것인가라는 질문은 대단히 중요하고 근본적인 질문이다. 뱀의 유혹에 대한 하와의 대답을 보면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을 주신 뜻을 잘 알지 못한 것 같다. 만일 하와가 선악과 금령의 의미를 잘 알았다면 뱀의 유혹을 이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금령을 통해서 그들이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특별한 존재로 지으시고 그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그러니까 선악과 금령은 누구에게 주신 것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오직 인간에게만 선악과 금령이 주어졌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선악과 금령을 통해서 인간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려고 하신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지만 그 권세는 무조건적인 권세가 아니라 조건적인 권세였다. 어떤 조건이냐 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스려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것은 권세가 주어질 때 당연히 전제된 것이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져야한다. 인간의 책무는 바로 이것이었고 이것이 바로 인간 창조의 목적이었음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지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된 존재라야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선악과 금령의 의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인간이 어떻게 만물을 다스릴 것과 관련된 것이다.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통하여 만물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선악과 금령을 통해서 바로 순종을 가르치시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선악과 금령이 어떻게 순종을 가르치게 되는가? 우선 선악과 금령은 아담에게 금령을 주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그리고 금령을 지켜야 되는 자신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끼 선악과 금령은 이미 금령을 주신 분과 금령을 받은 자 사이에 이미 어떤 관계가 성립되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선악과 금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자신은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자신은 어떻게 순종하여야 하는지를 배워야 할 것이다. 사실 선악과를 먹지 말아야 되는 유일한 근거는 선악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것 그것이 전부이다.

그러므로 선악과 금령은 단순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이 없이는 지킬 수 없는 금령인 것이다.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라도 순종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배우고 훈련하여야만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일견 선악과 금령은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고 억압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순종을 통해서 누리게 되는 것이다. 참된 순종이 있는 곳에 참된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것 아닌가? 사실 선악과 금령은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인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특별힌 존재로 지으셨고 하나님 대신 만물을 다스리는 엄청난 권세를 주셨는데 하나님이 인간을 억압하실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천사라도 이런 특권을 누리지 못했으며 인간의 다스림을 받는 다른 피조물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까 선악과 금령은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만 주는 보물과도 같은 교훈처럼 인간에게만 주신 소중한 교훈인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동산 중앙에 생명 나무와 같이 있었고 인간의 범죄이후 생명나무의 길이 막히게 된 것을 보면 결국 인간에게 생명이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 반대인 불순종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왜 불순종이 죽음인가? 그것은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다. 인간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인데 만일 인간이 불순종한다면 인간은 창조목적을 떠나는 것이므로 당연히 그 존재의미도 상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것은 사망의 경고로서 아담의 범죄를 막으려는 위협이라기 보다는 창조목적을 떠나게 되면 그 존재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는 진리의 계시일 것이다. 결국 죽음이란 존재의미의 상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주어진 부활의 약속은 인간 존재의미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살아야  될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는 것이다.

 

  뱀이 등장한다. 성경은 뱀의 정체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의 가장 간교한 짐승으로 표현할 뿐이다. 이 말씀은 선과 악의 이원론 혹은 하나님과 대등한 어떤 악한 존재에 대한 생각을 부수어 버린다. 뱀의 유혹의 대상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였다. 아마도 하와는 아담보다는 뱀의 유혹에 취약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뱀의 첫 질문은 진리와 비진리가 교묘하게 뒤섞여 비틀어진 질문이었다. 그리고 뱀의 질문에 대한 하와의 대답역시 하나님의 명령과 자기 생각이 뒤섞인 뒤틀어진 대답이었다. 반쪽 진리 다음에 등장하는 것은 거짓이었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뱀은 결코 죽지 아니한다는 거짓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뱀은 선악과의 의미를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만드는 나무" 라고 해석해 주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 것이 아니라 결코 죽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 나무에 그런 이름을 붙이신 이유는 자명하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선이고 불순종하는 것이 악이라는 것이고 하나님은 선악과 금령을 통하여 바로 이 진리를 가르쳐 주시려고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뱀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이름을  그대로 먹으면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만드는 나무라고 속인 것이다. 결국 뱀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금령을 통하여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알지 못하게 거짓으로 속인 것이다.

 

 그런데 하와와 아담이 선악과를 먹자 과연 그들은 뱀의 말대로 눈이 밝아졌다. 그런데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안 것이 아니라 눈이 밝아진 결과는 엉뚱하게도 자기들이 벗은 줄 알고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이후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상호 비난의 모습을 볼 때 아담과 하와의 관계 깨어짐을은유적을 비유한 것인 듯 하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 " 이는 내 뼈중의 뼈요 내 살중의 살이라" 고 한 두사람의 일체성과 친밀감이 사라진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는 인간 공동체의 와해이며 이기적 자아의 탄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그 다음에 눈이 밝아져 나타난 현상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 피한 것이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은 세상에서 하나님과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피조물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이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고 피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려야 할  인간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는 어이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과의 관계 깨어짐을 보여준다. 결국 불순종의 결과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선악을 알게된 것이 아니라 그 결과로 인간간의 관계 깨어짐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깨어짐을 알게된 것일 뿐이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는 인간을 하나님은 찾으신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어디있느냐고 부르신다. 인간은 하나님을 피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찾으신다.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 바로로 이분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아담을 부르셨던 그 하나님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포기하시는 법이 없다.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것이 바로 세상의 소망이요 인간의 궁극적인 희망인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이유를 단순히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하나님을 사랑의 화신처럼 생각한다면 불순종하는 뭇 인간들을  가치없이 심판하고 형벌하시는 하나님은 누구란 말인가?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진노하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으시는가? 그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중심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당신의 창조목적을 이루시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떠난, 인간 없는 하나님의 창조는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릴 자가 없어졌으므로 만물에게도 저주가 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귀를 낸다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만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울이 말한바 만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았다 하고 만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 한 것은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릴 인간들의 출현을 만물도 탄식하며 고대한다는 것이다 .범죄한 인간에게 즉각적인 죽음이 주어지는 대신에 수고하고 고통스런 삶이 주어진다. 물론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죽음은 선고되었지만 집행을 유예하신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바로 사형집행의 유예기간인 것이다. 그렇다면 집행유예를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을 부르시고 찾으시는 이유와 동일할 것이다. 그 기간은 인간이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신다. 이는 일견 뱀의 말이 이루어진 것을 하나님이 시인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어지는  " 그가 손을 들어 생명 나무 멸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두렵다"는 말씀은 앞의 말씀이 뱀의 말의 성취를 시인한 것이 아니라 뱀의 말을 듣고 악을 택한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히나님의 탄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이미 사망의 선고를 받았으므로 생명 나무를 먹는다고 영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동산중앙에 생명나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영생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생명임을 가르치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선악을 알게 될 줄 알고 먹은 어리석은 인간이 이제는 생명 나무 열매를 멱으면 영생을 할 줄 알고 먹으려고 하겠구나! "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일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를 막지 않으셨는가? 혹은 왜 하나님은 인간을 범죄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지으셨는가라는 두번째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 질문 역시 중요하지만 첫번째 질문처럼 근본적인 질문은 아닐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한 것은 순종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순종을 배워야 할 존재로 지으신 것이다. 순종이란 본질적으로 자발적인 것이다. 자발성이 배제된다면 그것은 이미 순종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불순종을 막는다든지, 불순종할 가능성이 없는 존재로 짓는다면 어떻게 순종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순종을 가르치려면 불순종을 막지 않아야 하고 또한 불순종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지으셔야만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의미에게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가장 신비하고도 위대한 창조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에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순종을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시기를 기뻐하신 것이 아닐까? 그만큼 하나님의 창조경륜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만큼 인간의 순종은 말할 수없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오직 인간의 순종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출처 : 배우는 자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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