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요한 계시록!!

[스크랩] 제4장 7~8절 - 하나님께 찬양하라

하나님아들 2014. 4. 18. 16:41

 

 

 

 하나님께 찬양하라

 

“그 첫째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 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자라 하고.”(4:7-8)

 

요한이 본 하늘나라의 장면들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신령한 눈으로 보았다. 가장 높은 곳에서 만물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영광가운데서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시는 어린양을 보았다. 그가 장차 될 일을 요한에게 알려주신다.

 

오늘은 요한이 들은 찬양에 대하여 알아보게 되는데, 찬양은 하늘에서 신령한 눈을 기쁘게 하며 영광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신령한귀를 매우 즐겁게 하는 것들도 있다. 우리는 아름다운 장면과 소리를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해서도 맛볼 수 있다.

 

요한은 24장로들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소리도 들었다. 그것은 지상의 성도들이 목자의 인도를 받아가며 하나님께 찬양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고 10-11절은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찬양이라고 할 때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 소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찬양은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하나가되어서 하나님께 경배할 때 찬양이라 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배에는 진정이 있어야 되고 진실이 있어야 신령하다. 이것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마음과 육신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예배해야 된다는 것이다.

 

예배하려면 먼저 각인의 영적상태가 중요하다. 마음을 정리하고 하나님을 만나려는 심정으로 나아와야 된다. 산만하지 않은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준비할 때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희락과 기쁨을 주시므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준비가 없고 흩어 진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러므로 24장로들이 찬양하는 모습을 배워야 된다.

 

본문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네 생물이 있는데 그들이 거룩하다고 세 번이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전에도 지금도 장차 오실 자에게 있다고 찬양한다. 그 리고 영광과 존귀와 감사함을 영원토록 살아계실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돌리라는 찬양이다. 이때에 24장로들이 보좌 앞에 엎드려서 영원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한다.

 

장로들은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벗어놓으면서 하나님은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심이 합당하다고 찬양한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다고 찬양하고 있는 내용으로 대지를 다음과 같이 분류시킨다.

 

첫 번째는 네 생물의 기능에 대하여,

두 번째는 생물들이 드리는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 누구신가?

세 번째는 24장로들이 드리는 찬양이다.

 

1. 네 생물의 기능

 

  네 생물의 신분에 대하여는 많은 이론들이 있다.

    • 어떤 이들은 우주의 4원소로 해석하고,

    • 어떤 이들은 신약교회의 4교구로 해석하고,

    • 어떤 이들은 세계의 4대륙으로, 네 천사장,

    • 또는 피조물의 대표,

    • 어떤 이들은 4복음서를 쓴 저자들의 이름인 마태는 사람, 마가는 사자, 누가는 송아지, 요한은 독수리의

      뜻, 등 여러 학설들이 있다.

 

이러한 바탕에서 초대교회시대 이후로 4복음서로 보는 것이 정설로 주장해 왔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네 번째 설이 지배적이다. 이유는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의 대표로 24장로가 둘러앉았고, 주위에 모든 피조물의 대표들이 각자의 독특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점이다. 앞뒤에 눈이 가득한 생물들이 하나님과 회복된 사람과의 온전한 자연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역시(겔1:10.10:12)의 배경으로 그들의 통찰력과 지혜를 나타내고 있음이라 하지만 그러한 해석도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본문에서는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의 순서로 되어있으나, 에스겔1장10절은 사람, 사자, 소, 독수리, 순서로 기록되어있다. 그 순서가 어떻게 배열되었던 사자는 짐승의 왕으로 용기를, 송아지는 가축의 대표로 힘을, 사람은 만물의 영장인 지혜를, 그리고 독수리는 새들의 왕으로서의 속도 등을 각각 표시하는 것 같다. 앞뒤에 눈이 가득하다는 것은 현명함과 조심성과 용의주도함을 뜻하는데, 그들에게는 사자 같은 용맹과, 소 같은 근면과 수고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과 같은 분별력과 신중성이 있다는 것이다. 독수리가 하늘로 향하여 나르는 것처럼 숭고한 상상력과 지혜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하게 된다. 특별히 그 날개에 눈이 가득하다는 것은 자신과, 자기들의 영혼상태를 잘 알고 종교적인 중요한 의무와 임무를 잘 지키며, 백성의 영혼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상태를 살피면서 밤낮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24장로들은 앉아서 섬기고 네 생물들은 서서 밤낮 쉬지 아니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다. 이는 하나님과의 가까운 위치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경배에 주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주시는 교훈은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영원토록 그분과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께 찬양하려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가깝게 생활하되 절대로 멀리 떨어져서 생활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생각이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하여야 생활도 함께하게 된다.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려면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용감하게 성전에 출석하는 현명함이 있어야 된다. 하나님을 향한 수고와 근면이 있어야 된다. 악이 자신에게 침범하지 못하도록 분별력을 가져야된다. 신중하게 시온에 있는 새 예루살렘을 향하는 소망으로 살아야 된다. 지혜로움을 가지고 생활해야 하나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서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는다”고 동거를 약속한다. 이러한 교회와 이러한 성도는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올라갈 수 있을 뿐만 니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경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에 어울리면서 멀리 떠나있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올라갈 수도 없고, 또한 영원한 경배를 하나님께 드릴자격이 없다는 교훈이다.

 

2. 찬양을 받으시는 분

 

생물들이 드리는 찬양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시면서 이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오실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셔서 영원히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소개한다. 전에도 계셨던 분은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고 존귀함을 받으시고 감사함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전에도 계셨다는 뜻은 만물을 만들기 이전부터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말이다. 지금도 계신다는 뜻은 어두움의 권세와 악한 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였지만 그리스도는 죽지 않았고 지금도 살아있다는 말이다. 이분이 장차 우리에게 다시 오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분이라 하신다.

 

그러면 이분이 누구라고 하시는가? 그는 메시야다. 1장에서 요한에게 지시하시는 과정에서도 아버지 품속에 계셨던 성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장1절에서도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셨다고 하였고, 이사야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하셨다.

 

그러므로 전에도 계셨다는 뜻은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제도 계신다는 뜻은 계시의 말씀을 주시던 때에나 지금도 예수는 살아 있다는 말씀이다. 장차오실 자라는 뜻은 예수께서 공중 재림을 시작하여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심판 주라는 말이다. 그분이 지상 재림하여 천년왕국과 백보좌 심판을 끝내고 영원히 계시기 때문에 알파(Α)와 오메가(Ω)라고 알려주셨다. 

 

말세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고 예수님에 대하여 오해하지 말아야 된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죄와 악을 심판하신다고 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무자비하게 심판하고 당신의 사랑을 외면하겠느냐 한다. 그래서 주님이 오신다는 재림 때를 말하면 듣지 않으려한다. 자신의 죄와 악함 때문에 심판받을 일이 싫어서 주님의 오심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로 성경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 예로, 마가복은 13장32절과 마태복은 24장36절을 인용하여 ‘그 때와 시는 아들도 모른다(Περί δέ τῆS ἡμέραS  ἐκείνηS  καί  ὥραS  οὐδείS  οἷδεν...,)하고, 사도행전 1장7절을 인용하여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이다’ 하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1-2정절을 인용하여 ‘도적같이 임한다’ 했으니 주의 재림 때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하지만, 예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라는 성경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왜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자신의 죄와 악이 심판의 대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좀 더 신중하게 살펴보면 아들도 모른다고 하신 오이다(οἱδα)애그노네오άϒνοέω) 처럼 ‘모른다’는 뜻이 아니다. οἱδα는 희구동사인데, 3인칭 오이덴(οἱδεν)은 영구적인 부정이 아니라 일시적인 부정이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οἱδεν은 오늘에 와서는 οἱδα로 바꾸어진다. 그래서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기 때문에 너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에 성령이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게 하여 주리라” 하시면서 “아버지의 것은 다 내 것이라” 하였는데 어째서 아들은 모른다고 반론을 제기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런 사람들이 재림 때를 부정하는 자들이며 자신이 때를 모르기 때문이라 하신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3:3)

 

이 구절에서 주님의 재림 때를 모르고 부정하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말하신다. 흰 세마포 옷을 입지 못하면 주님께서 어느 시에 재림하시는지를 알지 못한다 하셨으므로, 주의 재림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 때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의 신앙은 불신앙의 자세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주님이 오시는 때를 알겠는가!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이 온전치 못한 것은 보지 못하고 남을 정죄하면서 이단이니 잘못이니 말하지만, 자신의 허물에다 비방하고 험담하는 죄를 더 추가시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의 영이 일깨야 주님의 때를 알게 된다. 또한 벌거벗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예수께서 경고하셨다. 그런 사람은 의의 흰 옷을 입지 못하고 벌거벗은 사람이다.

 

벌거벗은 사람은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알 수 없다고 예수께서 답을 내리셨다. 그러므로 함부로 남을 정죄하려는 잘못된 습관을 회개하야 된다. 또 자신의 영혼이 죽게 된 것을 깨닫고 살기 원하면 바리새인 같은 신앙에서 떠나야 된다.

 

보좌에서 장래 일을 요한에게 알려주시는 예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장래 일을 알려주신다. 오직 아버지만 알고 계시는 그분이 보좌에서 알려주시는데 어째서 잘못이 되겠는가? 잘못이라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에 있다 하셨으므로 당신의 때를 택한 사람에게만 알려주고, 택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것도 그분의 권한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부정하고 반대할지라도 그 자체가 그분의 권한에 도전하는 행위가 되어서 죄를 짓게 된다.

 

때와 기한은 그분의 권한이고 우리의 알바가 아니라면 왜 예수께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은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다” 하셨으며.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다”고 지적하는 ‘너희’‘저희’는 누구를 말하는가? 너희는 2인칭이요 저희는 3인칭이다. 너희는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요 저희는 예수를 반대하는 무리들이다. 어린양의 재림을 사모하는 제자들인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실 것이다. 그러나 심판주 예수께서 오심을 사모하지 아니하고 부정하며 세상에 관심을 두는 사람인 저희에게는 주의 재림을 알려주시지 않으신다. 이 말씀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1-3)

 

너희는 빛과 낮의 자녀이므로 그날이 너희에게도 도적같이 임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어두움의 자식인 저희에게는 그날이 ‘도적’같이 임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된다. 또 ‘너희’와 ‘저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저희가 되므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어두움의 자식인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모르는 것이다.

 

성경은 모른다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신령한 일을 깨닫지 못한다고 했다. 요한의 교훈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말을 듣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서 안다”(요일4:6)고 했다.

 

심판주 그리스도께서 오신다고 증거 할 때 부정하고 반대하는 사람 속에는 성령이 없다. 다만 미혹의 영에 속하여서 곧 오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아니다 잘못이라며 성도들을 미혹하는 것이다. 그러나 빛과 낮의 자녀들은 보좌에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리고 성령께서 장래 일을 알려주실 때는 얼마든지 알게 된다. 알지도 못하면서 공연히 비난하고 핍박해서 죄짓지 말아야 된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것이 현명한 신자다. 준비해서 구속의 축복을 누려야 한다.■

 

출처 : churchofpraise
글쓴이 : 장죠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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